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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기도, 더 위대한 응답
by 최성은
2021-12-10
유다 왕국에 위기가 닥쳤다. 주변 국가들이 연합하여 유다 왕국을 침공했다. “연합군 대부대가 사해 바다 저쪽에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미 엔게디까지 이르렀습니다.” 전령이 긴급 상황을 여호사밧 왕에게 보고한다. 유다 주변국 모암과 암몬이 마온 사람들과 결탁하여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한 이 국가 위기 상황이 역대하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남 왕조 유다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태평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약소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까지 했다.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던 이 나라에 별안간 위기가 닥친 것이다.이러한 급박한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국가 최고 지도자는 어떤 조치부터 취할까? 따져 볼 것도 없이 가장 먼저 군대를 소집하고 전시 상황에 돌입할 것이다. 전군에 비상령을 발동하고 국가비상사태 내지는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다. 그게 상식이다. 왕위에 오르고 유다 왕국을 다방면으로 개혁해 온 왕이지만 여호사밧에게도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런 급변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지하 방공호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군사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은신하여 국가안보회의를 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상식에 어긋난다.여호사밧은 계엄령 대신에 국가 금식령을 내린다. 이상하기는 유다 백성도 마찬가지다. 피난 갈 준비는 하지 않고 온 나라가 국왕의 이 이상한 명령을 따른다. 국왕은 몸을 숨기지도 않는다. 여호사밧은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국가비상사태에 대한 대국민 연설을 하려나 보다. 그런데 그 내용 역시 이상하다. 국방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라거나 예비군 소집령에 따르라거나 하는 내용이 아니다. 왕은 군중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주를 위해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돌이켜 그들을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그들이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6-12).국가 위기 상황에서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 드린 여호사밧의 이 기도를 찬찬히 살펴보자.여호사밧이 드리는 기도의 초점은 여호사밧 자신이나 그의 왕조나 그의 백성에 가 있지 않다. 그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고백한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 상기시키신다. ‘하나님은 이러 분이 아니십니까?’ 매우 당돌하다. 계속 이어지는 그의 수사의문문은 마치 하나님을 설득하겠다고 작심이라도 한 듯하다(이 기도는 시종일관 수사의문 문장이다.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모두 9문장으로 된 이 기도문에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이 4개나 된다). 이 당돌한 기도를 살펴보자. 여호사밧의 이 기도는 그 첫마디가 “우리 조상 하나님!”이라는 하나님 부름이다. 왜 조상을 소환하는지는 이어지는 기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부르자마자 바로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마치 하나님께서 잠시 잊고 계시기나 하듯이, 그래서 하나님께 환기시켜 드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힘주어 아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세계 만민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 누구도 맞설 수 없는, “권세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지 않습니까?’ 여호사밧은 “우리 조상의 하나님” 곧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고 확인한다. 이 하나님은 유다는 물론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믿는 이들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안 믿는 이들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악한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곧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어떤 신학자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했다. 이 단순하지만 확고한 믿음을 여호사밧이 지금 국가 위기 앞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휴전이나 강화조약 같은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지 않는다. 전군 비상령을 내리지도, 진군명령도 공격명령도 내리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만 찾을 뿐이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자기 자신에게, 그의 백성에게,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께 되새길 뿐이다. 그의 이러한 고백 속에는 지금 시시각각 좁혀 오는 저 연합군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닥친 이런 상황과 처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렇지만 동시에 여호사밧은 이 위기 상황에서 분명히 자신과 백성이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왕이 되자마자 “주적” 남쪽 이스라엘 왕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국가 방어 체계부터 개혁하고 강화한 자신이(대하 17:1) 오히려 교만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았을 것이다. 바알숭배를 척결하고 우상의 산당들을 일소하려한 자신의 종교개혁도(대하 17:3-4, 6) 돌아보았을 것이다. (사실 그는 이 종교개혁을 완결하지 못했다. “산당만은 철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대하 20:33).) 북쪽 이스라엘 왕조와 정략혼인 관계를 맺고 전략적 제휴를 시도한 뼈아픈 실책(대하 18장)이 시국이 이렇게 되니 다시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지금 이 위기가 자신과 백성의 죄로 인한 것이든 불가항력적인 주변 상황으로 인한 것이든, 여호사밧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한 분 하나님께 오로지 무릎 꿇을 뿐이다.사실, 여호사밧의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 부름은 하나님이 그의 조상에게 하신 약속과 하신 일을 우리가 잊지 않고 있다는 재확인이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조상과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근거로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조상의 하나님, 곧 조상과 약속하신 하나님이심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평소에도 곧 태평성대를 구가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고 그 말씀으로 백성을 가르쳤다.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그의 방백들[을]…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또 그들과 함께…레위 사람들을 보내고 또 저희와 함께 제사장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대하 17:6-9). 이 절체절명의 국가위기 앞에서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기도할 수 있었다.여호사밧이 구체적으로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그리고 또한 솔로몬에게 하신 약속도 들추어낸다. 이제 그의 기도는 현실의 급박한 상황에 더욱 근접한다. ‘우리가 성전에서 주께 부르짖으면 우리를 기근이나 환난이나 전염병에서 구해 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람 연합군이 쳐들어오는 지금 이렇게 성전에 올라와 무릎을 꿇고 주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이제 비장의 카드로 하나님을 압박(?)한다. “옛적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은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을 보십시오.” 옛적 ‘그들’은 지금 유다로 쳐들어오고 있는 바로 ‘그들’이다. “옛적에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우리는 암몬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들을 침공하지 않았는데, 이제 그들이 유다를 침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여호사밧,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약속을 지켜달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는 정곡을 찌른다. 더 나아가 그는 지금 그들이 유린하려고 쳐들어오는 땅은 ‘우리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 “주의 기업”이라고 아뢴다. “그들이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그런 땅을 연합군이 빼앗으려 한다고, 그는 지금 하나님께 핵심을 찔러 일러바치고 있다. 여호사밧의 기도는 이제 맺음 부에 이른다. 조상과 과거를 들추어 하나님께서도 도저히 어찌하실 수 없게 한 그는 거두절미하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요구한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나님, 조상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저들을 무찌를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볼 뿐입니다!’기도는 끝났다. 절박함에서 우러나온 기도였다. 당돌하다 싶을 정도로 간절한 기도였다.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우리 군대에게 힘을 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침공한 연합군을 박살내 버릴 수 있을 것이야.’ 아마도 여호사밧은 이 정도로 예상했을 것이다. 이것으로도 어찌 큰 믿음이 아니겠는가! 기도와 믿음의 군주 여호사밧은 이 기도를 마치고 어쩌면 현실적인 행동에 나섰을지도 모른다. 출정식을 거행할 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차례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의 허를 찌르신다.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 당당히 요구한 여호사밧에게, 하나님도 그 백성 앞에서 당당히 말씀하신다. 여호사밧이 백성 앞에서 기도한 바로 그 자리에서 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 있는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대하 20:14-17). 여호사밧의 기도가 매우 구체적이었던 만큼 하나님의 응답도 매우 구체적이다. 여호사밧의 지난 역사 회고(말)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현재적 행동으로 응답하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놀라지 마라. 이 전쟁은 너희 전쟁이 아니라 내 전쟁이다. 너희는 싸울 필요 없다. 내가 직접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너희는 그 들판에서 구경만 해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그냥 수사가 아니었다. 이 전쟁은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전쟁으로 끝난다. 유다 백성은 전쟁터에 그냥 구경하러 간다. 군악대도 아니고 찬양대가 선두에 서고, 백성은(전투 부대가 아니다) 전장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찬송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암몬-모압-세일 연합군을 전멸시키신다.여호사밧의 기도는 위대했다. 하나님의 응답은 훨씬 더 위대했다.
여호사밧
기도
기도응답
약속
조상의하나님
하나님부름
전쟁
하나님의전쟁
아담은 인류 전체의 아버지이다
by Michael Reeves
2021-12-07
어제 게재한 “‘첫 사람’ 정말 중요한 문제일까?”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아담, 인류의 머리됨 인류와 아담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항상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의 오래된 논쟁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펠라기우스는 아담과 인류 사이의 물리적 연결에만 의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아담과 인류의 물리적 연결은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구원과 저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개별 인간 각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떤 사람이 저주를 받는 것은 그가 아담과 근본적인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담의 죄를 따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의 의를 본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과 저주는 다른 누군가의 상태(status) 때문에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운명을 가진 대상을 본받는가에 달렸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이런 주장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12-21과 결코 일치할 수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로마서의 이 본문은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이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바울을 이해한 것처럼, 하나님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인류를 다루신다. 곧 아담, 모든 인류 중 최초의 인간이자 최초의 머리, 또는 그리스도, 하나님이 재창조하신 새 인류의 처음이자 머리. 왜 아담의 정체성 및 아담과 나머지 인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만 나오면 자꾸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논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구원과 구원에 대한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 사이의 논쟁을 실제로 대표한다는 점에서 이 논쟁에 근원적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논쟁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현대의 가장 난해한 공식들에도 적용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사실은 전체 (아마도 신석기 시대) 인구 집단의 상징이며, 그 인구 집단에서 어느 날 죄가 나타났고 또 모든 인류에게 퍼졌다는 데니스 알렉산더의 개념을 예로 들어 보자. 여기서 펠라기우스주의의 문제는 인류 대부분의 문제에서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로 가마득한 원시시대 극히 소수의 문제로 간단히 바뀌어 버렸다.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논쟁의 틀을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머리로서 아담을 부인하게 되면 개별 인간의 운명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개인이 결정한다는 [펠라기우스주의] 식의 해석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개별 인간의 자기 결정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기보다는 모범으로 보려는 경향도 커지게 된다. 머리됨에는 존재론적 뿌리가 있다또 다시 데니스 알렉산더는 그의 합성 이론에서 이런 함정을 교묘하게 회피한다. 아담을 옛 인류의 머리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중대한 신학적 필요성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아담이 결코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는 자신의 견해를 아담이 인류의 머리라는 신학적 사실과 통합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식은 인류의 머리로서 아담이 가지는 법적 또는 계약적(federal) 지위를 아담이 인류의 자연적 머리 또는 아버지라는 개념에서 분리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느 시점에 아담을 단지 모든 호모 디비누스뿐 아니라 모든 호모 사피엔스를 대표하는 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이 처음으로 (알고도) 죄를 지었을 때, 호모사피엔스들이 아담과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아담이 지은 죄를 모든 호모 사피엔스에게 전가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아담의 신석기 공동체에 연결되지 않은 앞에서 언급한 한 인간 집단을 들자면) 호주에 살던 계몽되지 않은 호모 사피엔스는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을 갖게 되었다.하지만 아담의 계약적 머리됨(대표성)을 그의 자연적, 물리적 머리됨에서 분리해 냄으로써 알렉산더는 이제 낯익은 문제들에 봉착한다. 첫째,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존재론적 근거가 전혀 없는 신학적 확정을 하신다. 아담은 물리적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데도, 어떤 것(인류의 머리)으로 선언되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담과 하등 관계가 없는 순진한 호주 원주민에게 죄를 전가하시는, 독단적인 신이 되고 만다. 서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호모 사피엔스와 아담은 아무런 연결의 근거도 없는데도, 하나님은 그들도 아담의 죄를 공유해야 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무슨 근거에서? 하나님의 변덕에 근거해서일 뿐이다.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결코 성경이 말하는 머리됨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개별 인간들을 심판하실 때 그 영향이 미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후손이다(그렇기에 구약에서 족보는 중요하다). 그런 사례가 무척 많지만, 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에게 내린 복이 그들의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는 여호야긴에게 내린 저주가 그의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라. 거꾸로,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 속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 “안에서” 행동한 것으로 간주된다(히 7:9-10). 다시 말하면, 개인의 머리됨 또는 집단적 본성은 결코 실제적 연결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아담 안에서” 났는지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이야기가 옮겨간다면, 진정한 연결의 필요성은 더 명확해져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는 근거가 전혀 없는 일에 기초한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 거듭나거나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진정한 존재론적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된다. 성령이 그러한 연합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의 의는 단지 하나의 법정 가설(legal fiction)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두 가지 방식, 곧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와 육신에 의한 아담과의 연합 안에서 작동하는데, 여기서 본질은 이것이 서로 관련이 있는 존재론적 연결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다 법정 가설이 될 수 없는 것은, 온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옳은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굳이 존재론적 토대를 두지 않고도 하나님이 (아담이나 그리스도를 위해) 계약적 머리(federal headship)를 세우실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아담과의 연합의 병치하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연합이라는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신성한 명령으로 개인의 의를 세우셨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은 없다고 상상해 보자. 무엇이 부족할까? 성령이다. 따라서 이 모델은 삼위일체적이지 않다. 바울의 아담-그리스도 병치가 맞는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어떤 실제적인 연결도 없이 아담과 결합될 수 있다는 제안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에 이를 수 없게 한다. 고린도전서 11:3의 논리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아내와 그 어떤 존재론적 연결도 없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가 인정하는 것이 이상할 것 같다면, 그리스도의 머리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과 아무런 존재론적 연결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울 것이다. 머리됨에 대한 이런 식의 가벼운 존재론을 삼위일체에 적용하면 아리우스주의나 삼신주의에 빠지기 쉽다. 물론 두 경우 다 그런 식의 결과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왜 머리됨에 관한 문제가 경우에 따라서 그렇게 다르게 취급되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그러므로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아담이 물리적 실재로서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모든 인류의 머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아담이 모든 인류의 기원이 된 한 사람임을 암시하는(행 17:26) 정황적인 성경 증거와는 별개로, 신학적으로 아담이 모든 인류의 머리인 것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아담이 전 인류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다심지어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Nazianzen)가 깔끔하게 표현하기 전에, 속사도시대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론의 상당 부분이 이 사상, 곧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통해서 감당하지 않은 것은 결코 “치유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사상이 형성되었다(Philip Schaf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ume Ⅶ Cyril of Jerusalem, George Nazianzen, 438쪽). 본질적으로 그것은 히브리서 2:11-17의 사상을 체계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예수님이 자신이 오셔서 구원하신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살과 피를 나누어야 이 살과 피가 하나님의 저주를 지나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성육신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천사의 육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것은 참으로 그가 우리와 같아지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을 훼손하고 그분이 가져오신 구원을 훼손하는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한 것은 바로 이런 신학이었다.그러나 아담이 모든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단절된 호모 사피엔스의 여러 구성원 중 하나일 뿐이라면,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의 말은 다소 걱정스럽게까지 보인다.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이 나의 육체가 아니라 또 다른 어떤 인성을 가진 육체였다면, 그는 결코 나와 같은 혈육을 가진 구속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속사도시대의 교회가 히브리서 2장을 제대로 읽었고, 성육신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옳았다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무 인성이나 취하신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평결: 역사적 아담은 중요하다역사적 사실과 연결되지 않은 교리는 성경이 아닌 다른 데이터 및 이데올로기와 조화를 이루기 쉽다. 물론, 본질적인 면에서 굳이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교리도 적지 않다. 아담의 정체성, 그리고 인류의 물리적 조상으로서의 아담의 역할은 결코 독자적이고 역사와 분리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라는 게 나의 주장이다. 아담의 역사적 실재성은 죄와 악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뿐 아니라,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근거로서 필수적이다. 모든 인류에 대한 아담의 물리적 아버지 됨은 아담 안에서 우리를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존하며(같은 추론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도 보존한다), 또한 성육신의 논리를 보호한다. 멋대로 재해석하는 믿음이 초래하는 결과는 실로 심각한 재앙일 뿐이다. 이 글은 Should Christians Embrace Evolution?: Biblical and Scientific Responses, Norman C. Nevin 엮음(P&R, 2011)에 실린 Michael Reeves의 글을 갈무리한 것입니다. 원제: Does It Really Matter Whether Adam Was the First 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진화론
창조와진화
아담과예수
아담의대표성
인간타락
아담의역사성
머리됨
펠라기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첫 사람 아담’ 정말 중요한 문제일까?
by Michael Reeves
2021-12-06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은 보통 복음서를 탈신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의 부활을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드러내는 일종의 신화적 묘사로 보는 식의 해석을 반대한다. 반대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역사성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라는 성경의 두 인물과 관련해서는, 복음주의 안에 이들을 신화적이거나 상징적인 인물로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글의 목적은 단순하다. 까다로운 문자주의자의 주변 문제까지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담을 인류 전체의 조상이 되는 역사적 인물로 믿는 것이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바로 이것이다.아담은 역사에 존재한 사람이다텍스트 증거창세기 처음 몇 장은 종종 ‘아담’이라는 단어를 “인류”라는 의미로 사용한다(예, 창 1:26-27). 그리고 아담을 이런 의미로 사용한 장들에 어떤 문학적 구조가 분명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아담을 실제 존재했던 한 사람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적 장치로 파악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여기서 이미 질문이 생긴다. 그럼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할까? 성경 전체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기 위해서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는 예를 종종 만난다. 굳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니고데모 이야기나, 복음서가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에 맞추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 예로 든 두 사건의 경우에 주석가들 대부분이 그 역사적 사건의 신학적 중요성에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문학적 장치가 사용되었음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이 경우에 “문학적”이라고 해서 꼭 “문자적 사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 이제 이런 질문을 해야 하다. 아담의 경우에는 “문자적 사실”이 배제된 “문학적” 장치일 뿐인가? 아담을 언급하는 다른 성경 구절들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창세기 5장과 역대상 1장,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족보는 모두 다 아담을 첫 조상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성경의 족보를 보면 이름을 종종 생략하기는 하지만, 허구나 신화의 인물을 족보에 넣는 경우는 전혀 없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9:4-6에서 혼인에 관해 가르치셨을 때, 그리고 유다가 유다서 1:14에서 아담을 언급할 때, 그들은 아담의 역사적 실재를 의심한다거나 아담을 구약의 다른 인물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그 어떤 암시나 경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나중에 여자가 아담에게서 났다는 사실을 말하면서(고전 11:8-9; 딤전 2:11-14), 바울은 창세기 2장을 당연한 역사적 사실로 간주했다.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영원한 진리를 설명하면서 바울이 만약에 아담과 하와를 역사가 아닌 신화적 상징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구절을 쓴 것이라면, 그의 모든 주장은 한마디로 난센스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신학적 필요따라서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성경 저자들은 하나같이 아담을 역사적 실존 인물로 생각했다는 정황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정황 증거도 유용하고 중요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이 있다. 바울의 신학 안에는 아담이 맡고 있는 실로 엄청난 역할이 있다. 그것은 곧 아담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사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기본 줄거리에서 필수 요소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담의 역사성은 단지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첫 번째로 주목할 구절은 로마서 5:12-21인데, 여기서 바울은 “한 사람” 아담의 죄와 “한 사람” 그리스도의 의를 대조하고 있다. 바울은 단수형 “자손”과 복수형 “자손들(갈 3:16)의 분명한 구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낀 사도이다. 따라서 그가 아담을 놓고 “한 사람”이라고 썼을 때, 그 의미는 결코 복수형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이 단수형 “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과 반복해서 대조되고 있으며, 이 단수 “한 사람”이야말로 한 사람(아담)의 한 번의 죄가 한 사람(그리스도)의 한 번의 구원으로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바울의 핵심 주장의 근간이 된다. 이 본문 전체(롬 5:12-2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방식과 똑같이 아담에 대해 말한다. (또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사망을 이야기하는 바울의 단어 사용은, 그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복에 대해서 말할 때와 유사하다.) 바울은 이 한 사람의 범죄가 있기 전(그 때는 죄나 죽음이 없었다)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사람의 범죄 이후(아담에서 모세까지 이어지는 기간)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바울이 아담을 그리스도와 모세(그리고 아브라함)와 똑같이 실제로 살았던 역사의 인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단지 바울의 언어만이 그가 아담을 역사의 인물로 믿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신학 전체가 곧 그가 아담을 역사의 인물로 믿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바울이 역사적 인물(그리스도)을 신화적 또는 상징적 인물(아담)과 비교하는 순간, 그의 논리는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아담과 그의 죄가 단순한 상징이라면, 굳이 역사 속에서 속죄가 일어나야 할 필요가 없다. 신화적 타락을 되돌리려면 신화적 속죄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신화적 인물이라면,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용서와 새 생명을 나타내는 단순한 상징 정도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실제 역사 속으로 들어온 죄와 죄책감, 사망이라는 문제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반드시 역사적 해결이 필요한 문제이다. 아담의 죄에서 역사성을 제거하는 문제는 십자가와 부활이 반드시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만 한다는 논리나 근거만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건 바울의 복음을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도대체 죄와 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만일 이것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면, 거기에는 단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곧 죄는 원래부터 있었고 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일부라고 선택하거나, 죄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으로 각 사람이 저마다 거의 무에서(ex nihilo) 범하여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라고 선택하거나 둘 중 하나다. 전자는 선하신 창조주와 그의 선한 창조세계를 일원론적으로든 이원론적으로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비기독교적 사고이고, 후자는 펠라기우스주의에 해당하는데, 선한 개인이 아담을 본받아 죄를 짓게 된다(그리고 아마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의롭게 된다)는 사고이다.바울의 신학에서 역사적 아담이 갖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증언하는 두 번째 구절은 고린도전서 15:21-22과 45-49이다. 여기서 다시 바울은 죽음에 이르게 한 첫 사람 아담과 새 생명을 얻게 하신 두 번째 사람 또는 마지막 사람 그리스도 사이의 긴밀한 유사점을 풀어낸다. 다시 말하지만, 아담은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언급된다. 또 한 번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생명의 기원으로 간주되듯이 아담은 사망의 기원으로 간주된다. 고린도전서의 이 곳에서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몸과 관련하여 일으키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들과 관련한 목회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으로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미래에 반드시 있을 육체의 부활이라는 현실에 대한 확신을 주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바로 바울이 제시하는 궁극적인 해답인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만일 바울이 아담을 신화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담과 그리스도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바울의 글은 수사학적 어리석음의 극치에 해당할 것이다. 만약에 신화적 아담과 그리스도의 부활, 이 둘이 평행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얼마든지 신화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바울의 서신 전체가 그 핵심과 목적, 효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내가 고린도전서 15:21-22과 45-49에 담겨 있는 바울의 신학을 정확하게 표현했다면, 바울의 복음에서 역사적 아담을 제거한 채 그 복음을 온전하게 유지하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아담을 역사 속에서 제거한다면 바울의 신학 자체가 결국 탈역사화하고 말 것이며, 그 결과 악의 기원에 대한 전혀 다른 설명을 주장할 것이며 구원에 대한 완전히 다른 방법을 요구할 것이다. 제3의 길?데니스 알렉산더(Denis Alexander)는 존 스토트가 제시한 이론을 매우 정교하게 다듬으면서 역사적 아담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이러한 전통적 입장은 이제 과학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는 견해로 갈라진 날카로운 이분법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제안한다(Denis Alexander, Creation or Evolution: Do We Have to Choose?, 9-10장). 곧 아담을 의심의 여지없이 역사적 인물로 봐야 하지만 굳이 아담이 최초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다. 알렉산더가 선호하는 모델에 따르면, 해부학적 현대인은 20만 년 전에 나타났고, 이 현대인의 언어는 5만 년 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6,000년에서 8,000년 전쯤에 하나님이 신석기 시대 농부 두 사람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인류 최초로 하나님을 알고 영적 생명까지 갖춘 최초의 인간, 호모 디비누스(Homo divinus)가 되었다는 것이 알렉산더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역사적 아담을 부인하면서 생긴 신학적 틈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실로 기발한 합성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새로운 근본적 문제 몇 가지를 스스로 야기한다. 첫 번째는 아담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곧 이미 수만 년 동안 세계를 채우고 있었다고 알렉산더 스스로 말하는 그 해부학적 현대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알렉산더는 현명하게도 그들이 완전한 인간은 못됐다고 말하지 않고, 이렇게 단호하게 강조한다.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신석기 시대에 세계에 살았던 다른 수백만 명의 사람들도 포함된다”(238쪽).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스스로 매우 불쾌하게 여겼을 수렁에 빠졌을 것이다. 알렉산더 자신이 말하길 아담과 하와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4만 년 동안이나 호주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 인구가 그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바고 그 순간 곧바로 비인간 상태의 동물로 강등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인간이 아닌 동물 단계였을 아담과 하와의 부모도 다른 호주 원주민과 함께 얼마든지 배고픈 호모 디비누스의 합법적인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그런데 이 모든 것을 피하는 바람에 알렉산더의 제안은 오히려 더 위험한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아담과 하와가 동시대 사람들과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를 설명하면서, 그는 결정적인 주장을 한다. 아담과 하와가 태어났을 때,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거대한 신석기 시대 인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를 다른 신석기 인구와 달리 호모 디비누스로 구별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통해…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실질적으로 스스로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238쪽).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태어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오랜 가계의 자녀들이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 두 사람의 차이점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제기하는 첫 번째 문제는 이것이 성경적인 주장인지 여부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구체적으로 아담과 하와였다고 특정한다(창 1:27의 사건은 창 2:18-25에서 새롭게 제시된다). 이것은 누군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나중에 그 후손 몇몇이 그 사실을 알게 됐을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다. 정반대다. 창세기 2:7은 대단히 예외적일 정도로 분명하게 하나님이 인간 아담을 존재하게 하시려고 직접적이고 특별한 창조 행위를 하셨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문제까지는 어떻게 해서 극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도무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번째 신학적 문제가 이 사실로 인해 생기게 된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 존재했다면, 우리에게는 다음 두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아담과 하와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최초의 인간이 있었다는 시나리오다.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두 명의 아담이 생긴다.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첫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 첫 인간 아담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류 안에서 서서히 진화했다는 시나리오다. 이럴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최초의 인간 집합체와 복수의 아담을 갖게 된다. 이런 입장이 가져다주는 황당한 어색함과는 별개로, 이로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눈덩이처럼 빠르게 불어날 것이다. 알렉산더가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계시를 받지 못한, 하나님의 형상을 한 모든 인간은 죄를 짓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들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알렉산더가 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리는 이런 그림은 우상숭배에 빠진 인류의 모습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 믿음은 아담과 하와 이전에도 존재했는데, 삶의 의미를 나름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지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이나 신들을 찾았다”(237쪽). 따라서 이 모델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 전에 이미 죄를 짓고 있었다. 아마도 하나님이 그런 죄를 무시했던 것 같다(무슨 근거로 그랬다는 건지, 우리가 알 길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정말로 그러셨다면, 그건 바울이 로마서 1:18-32에서 말한 내용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인류를 향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창조세계에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서 1:18이하를 보면, 알렉산더가 말하는 종교적이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아담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도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모델을 억지로 로마서 1장에 끼워 맞춘다고 해도, 하나님이 아담에게만 베푼 특권, 그러니까 의로움 및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을 전혀 제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맘껏 죄를 짓고 우상숭배의 기회를 허용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아담은 어떻게 되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 계시를 받도록 택함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죄에 물들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 계시를 받기 전까지 아담은 애초에 창조된 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 계시를 받은 그 순간에 일시적으로 죄가 없다고 선언된 것인가? 아니면 창세기 3장이 말하는 것은, 항상 죄를 지어 왔던 아담이지만, 마침내 처음으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죄를 지었다는 의미인가? 후자가 맞는다면, 왜 그 전에 지은 무의식적인 죄는 용서가 가능한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은 의식하지 못하고 짓는 모든 죄도 다 정죄한다고 했는데 말이다(레 5:17; 시 19:12).알렉산더의 주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정작 인간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 기회는 준 적 없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짓도록 허용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만나는 하나님은 별로 이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일해야 하는 신이다. 알렉산더의 주장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지금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규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마치 이 우주의 주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 점은 하와의 창조에 대한 알렉산더 논평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하와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인간 부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담의 몸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창세기 2:21의 목적은 단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상호보완성의 확인이라고 주장한다(197쪽). 이 점이 이 본문의 목적 가운데 하나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창세기 2:21을 단지 신화와 상징으로 만들어 버리면, 존재론적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남녀의 상호보완성은 불가능하다. 하와가 아담과 별개의 물리적 기원을 가졌다면, 하나님은 자신만 아는 어떤 불가사의한 이유로 남녀의 상호보완성을 원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거기에 그 어떤 존재론적 근거도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알렉산더의 확언(그리고 적어도 그의 다른 확언 중 일부도 해당한다)은 현실과 무관하게 둥둥 떠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신학을 근거 없는 허공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건(또는 비사건)에 의미를 접목하도록 강요받는 하나님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도무지 주권을 가진 창조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만든 모델에 따라 창세기를 읽어 가는 알렉산더를 보면 마치 사각 구멍에 둥근 못을 박으려는 사람과 같다는 느낌을 준다. 여자의 창조가 다시 좋은 보기가 된다. 알렉산더는 이렇게 썼다. “하와를 ‘내 뼈 중의 뼈이자 살 중의 살’로 인정했을 때, 아담은 그 한 사람을 단지 호모 사피엔스로 인정한 게 아니라(하와뿐 아니라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함께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까지 인정한 것이다”(237쪽). 이런 주장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내용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이 구절과 관련해서는 고전 6:16-17과 엡 5:28-31을 참조하라), 하와를 아담을 위해 꼭 필요했던 “돕는 자”라고 말한 성경 내용을 온통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로 만들어 버린다. 창세기 2:18-20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아담에게 돕는 자가 필요했는가? 그건 아담과 같은 차원의 다른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돕는 자라는 개념이 단지 다른 신자를 찾는 것이라면, 왜 들짐승과 공중의 새 중에서 찾지 않는가? 다른 곳에 있다가 아담에게로 이끌려 온 인간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그냥 주변에 있는 다른 호모 사피엔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의 의미를 계시하고는, 자연스럽게 아담에게 필요한 ‘돕는 자’가 되도록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알렉산더는 비슷한 논지로 창세기 6:2을 해석한다.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통혼한다. 알렉산더가 보기에 이것은 영적으로 살아 있는 아담의 가족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인 현대의 호모 사피엔스와 결혼하는 단순한 사건이다. 알렉산더의 적용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제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지 말라. 6:5이하에서 보듯이 그런 경우에 홍수 사건과 같은 심판이 분명히 뒤따르기 때문이다”(199쪽). 그러나 창세기 6장의 교훈이 정말로 믿는 아담의 가계가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에 관한 경고라면, “경건한” 아담의 아들 가인이 믿지 않는 가계 밖 아내를 취했을 때, 홍수의 심판이 뒤따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241쪽 참조). 내 생각은 이것이다. 아무리 독창성이 있다고 해도, 역사적 아담을 고수하는 알렉산더의 “제3의 길”(말이 아담이지, 알렉산더는 그를 최초의 인간으로 믿지 않는다)은 창세기 본문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제공할 수 없으며, 창세기가 내포한 각종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야기한다. 그러한 문제들 중 일부(앞에서 설명한 창세기 6장의 적용과 같은 경우)는 단지 그가 제시하는 모델이 내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성경의 설명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작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에 하나님을 주권적인 창조주로 이해하는 그의 방식이 초래하는 다른 문제들은 너무 심각해서, 그의 주장은 아예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내일 “아담은 인류 전체의 아버지이다”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원제: Does It Really Matter Whether Adam Was the First 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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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복음전도
by Grant R. Castleberry
2021-12-04
2018년 2월 21일, 빌리 그레이엄이 소천한 이후로 나는 현 시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복음전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좋지 않다. “번영 복음”의 부상과 더불어, 극단적 오순절 운동의 발흥, 정치에 대한 집착 등 여러 요인들이 교회의 복음전도 사명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혼란을 이미 우리 문화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장 강력한 제도들이나 기관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세속주의와 한데 묶어 바라보면, 우리가 복음의 확장을 극렬하게 저지하는 최악의 폭풍우 한가운데 있음을 느끼게 된다. 구속 언약바로 이 위태로운 시기에 중요한 진리 하나가 떠올랐다. 오래된 진리, 성경의 진리다. 개혁 신앙이 특히 갱신과 부흥의 시대에 강조했던 진리다. 지난 2000년 동안 전도와 선교의 원동력이 되어 온 진리다.바울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영생”(딛 2:1)이라고 디도서에서 말한 진리다. 요한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요한계시록 13:8에서 말한 진리다. 바로 ‘구속 언약’이라고 부르는 그 진리다. 이 언약은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 곧 구속하실 사람을 택하시는 성부 하나님, 대신 자신을 내어 주어 그들을 속량해 주신 성자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당신 이름의 존귀와 영광을 위해 한 백성을 구속하기로 언약하셨다는 영광된 교리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의 사람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들으면 반드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았던, 바울과 베드로와 여러 사도들이 땅 끝까지 전한 그 진리다(행 13:48; 18:10; 딛 1:1). 19세기 영국의 저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그의 복음전도 사역 중심에 구속의 언약을 두었다. 그는 구속 언약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은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생각이요, 우리가 가르치는 옛적 칼빈주의 교리의 바로 그 시가(詩歌)다. 샛별이 그 자리를 알기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무에서 존재를 말씀하시기도 전에, 천사의 날개가 아직 아무도 난 적 없는 창공을 휘젓기 전에, 고독한 노래가 하나님께서 지존자로 다스리시는 침묵의 장엄을 방해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영과 함께 엄숙한 의논을 시작하셨으며, 그 회의에서 당신의 백성의 구원을 작정하시고, 결정하시고, 목적하시고, 예정하셨다.구속 언약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복음전도 사역의 발판을 복구하는 데 중추가 된다. 두 가지 이유만 간략하게 얘기하겠다. 방향을 잃은 인류와 구원의 확실성프란시스 쉐퍼는 비행기에서 옆에 앉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한 시간 주어진다면 처음 55분 동안은 그 사람이 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있는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를 설명하고, 나머지 5분 동안을 복음 그 자체를 설명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누군가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것이 가장 큰 금기가 되어 버린 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으려면, 프란시스가 했던 것처럼, 복음 자체를 전하기 전에 먼저 사전 작업을 해야 할 때가 많다. 바로 이런 점에서 구속 언약이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구속 언약은, 첫째, 인류는 항상 하나님의 구원의 개입이 필요한 지점에 서 있기에(딤후 2:26; 벧전 2:10) 가야 할 방향을 상실한 현대 문화를 보면서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언약은, 둘째, 문화가 아무리 불경건하고 세속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속하기로 하셨고, 그 택함 받은 사람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고전 1:26-28; 엡 1:3-10; 딛 1:1; 벧전 1:1-2)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복음전도 사역 앞에는 큰 장애물들이 놓여 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택하셨고, 아들께서는 자신을 대신 내어 주시고 그들을 속량하셨으며, 성령께서는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왜냐면 우리가 큰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할 것을 확신하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세우신 언약의 이행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전함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 언약은 또한 우리를 십자가의 위대한 메시지로 다시 이끈다는 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신부를 속량하셨다. 그리스도는 백성을 구속하셨다. 구원하시는 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셨고, 또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단번에 바치셨다.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서 성부의 공의를 충분히 만족시키셨으며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화목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주신 모든 백성을 위하여 천국의 영원한 기업도 얻으셨다”(8.5).개혁주의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다는 사실에 항상 의지하고 있다. 로마가톨릭 미사의 희생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또 우리는 믿음을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에 우리가 덧붙이는 어떤 일로 여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위대한 구속 언약의 결과로써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다. 구속 언약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와 온전한 십자가를 전한다. 이런 말이 설 자리는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몫을 하셨고, 이제 당신이 당신 몫을 해야 한다.”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두 다 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 고 존 머레이(John Murray)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준비하고 이루셨다는 바로 이 교리가 복음의 풍성함과 능력을 값 없이 제공한다. 오직 이 교리만이 그리스도의 성취와 그의 인격에 합당하게 그리스도를 드러냄을 허용한다. 그가 구속을 준비하고 이루셨기에 그는 가장 충분하고 적합한 구주이시다.” 바위 위 등대 휘몰아치는 문화의 풍조와 복음주의의 격변 가운데서도 우리에게는 우리를 교리적 확신과 복음주의적 확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우뚝 선 바위 위 등대가 있다. 우리 사명의 성공은 영원 전부터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로 언약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성부 하나님은 백성을 택하셨다. 성자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들을 이끄신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혼란한 시대 가운데 있는 우리가 확신을 갖는 이유다. 원제: Reformed Evangelism 출처: www.ligonier.org번역: 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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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의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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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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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복음전도
빌리그레이엄
스펄전
존머레이
복음주의
때가 차매
by David Holwerda
2021-12-03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설렘과 기쁨이 넘친다. 분주함까지 더해진다. 상인은 더 많아 팔아야 하고 쇼핑하는 이들은 즐거워야 하니, 또 그래야 경제도 잘 돌아갈 것이니, 상점은 더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연장한다. 그리고 이 주간에 교회는 4주간의 그리스도 강림(Advent) 절기에 들어간다. 이 절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음을 기억하고 또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시간이다. 쇼핑과 파티와 이런저런 특별 행사로 분주한 나머지 그리스도 강림의 목적을 잊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 강림은 우리가 때가 됐다고 결정한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강림을 기억하는 이 기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때를 준비하셨는지 되새겨야 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 크리스마스는 경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이 때가 찼음을 알려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때가 찼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그 길을 예비하고 계셨다.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계보 둘이 우리를 아담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인류의 시작에 이르게도 하고(눅 3:23-37), 아브라함과 다윗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이스라엘 시작에 닿게도 한다(마 1:1-17). 하나님은 베들레헴에서 당신의 아들이 태어나시기 수세기 전부터 그 길을 예비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 길을 어떻게 예비하셨는가?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니, 하나님이 열방의 역사를 주관하셨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그 역사에는 이스라엘에, 예수님에게, 그리고 초기교회의 복음전파에 영향을 끼친 로마제국의 지배도 포함된다. 이러한 역사는 분명히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의 일부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열방의 역사를 사용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때가 찼다”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말하는 “때가 참”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들, 곧 미래의 축복과 평화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찬 약속들에 의해 정해진다. 하나님은 그 약속들이 성취될 때를 이미 정해 두셨지만(합 2:3), 그 때를 누구에게도, 심지어 선지자들에게도 나타내지 않으셨다(벧전 1:10-12). 하나님은 당신의 달력에 따라 일하시고 우리와 달리 시간을 측정하시기 때문에(“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그 때가 차기까지 기다리는 데에는 수 세기의 인내가 필요했다. 천사들이 평화의 소식과 함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렸을 때(눅 2:14),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고 선언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 ‘때가 참’을 하나님의 백성이 마침내 약속받은 유업을 주장할 수 있는 바로 그 때로 해석한다. 전에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자녀로서 약속된 기업에 대한 온전한 권리를 받았다는 것이다(갈 4:1-7).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같은 선언을 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마태복음에서 우리는 때가 차서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수세기 전에 하나님이 하신 준비를 엿볼 수 있다.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계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브라함부터 다윗 왕까지, 다윗 왕부터 바벨론 유배까지, 바벨론 유배에서 예수님의 탄생까지, 세 시기로 나눈다(마 1:2-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을 주셨지만 아직 이뤄지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곧 하나님께서 때가 찼다고 알려 주시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데, 이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마침내 성취된 것이다.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뿐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12:1-3). 하나님의 언약의 복은 아브라함과 그 육신의 후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통해 온 세상까지 받게 될 복이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하시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사 55:11).그런데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언제 일어난다는 것일까?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마태의 간략한 계보 조사는 그 일이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렇기는커녕, 이스라엘의 역사는 불순종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열방의 빛으로 택하시고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사 42:6).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다른 민족들과 나누기보다는 움켜쥐고 있으려 했다(요나의 교훈). 그게 다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빈번히 참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했고, 억눌린 사람들을 공의로 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으로 사는 데 실패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백성에게 유배라는 심판을 내리셨다. 참으로 비참한 결과였다.그러나 유배는 하나님의 최종 응답이 아니었다. 마태의 계보는 예수님이 곧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패역과 유배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열방이 복을 받을 아브라함의 참 후손(씨)으로 오신다. 이제 때가 차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약속받은 복에 참여하게 된다(갈 3:16, 26-29).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다”(마 8:11). 예수님을 통해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된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마침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찼다.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도 때가 찬 예수님의 탄생을 이해하는 데 똑같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거의 천 년 전에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바빌론으로 유배되기 전까지였다. 그 후로 그 왕들이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는 임무에 실패했기에 다윗 왕조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다윗의 왕국이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삼하 7:11-16). 유배 생활에서 예수님의 탄생까지 5세기라는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를 기다렸다. 이제 때가 차매 예수님이 다윗 왕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약속된 목자요 왕으로 태어나셨다(미 5:2, 마 2:6). 다윗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그 영존하는 보좌를 세우시는 영원한 왕이시다.마태의 예수님 계보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언약의 교훈이 담겨 있다.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게 던진 경고를 들어 보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하나님이 돌로도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면, 결코 장자권이나 족보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참 이스라엘은 단순히 순수한 유전자 또는 흠잡을 데 없는 가계도로 만들어지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마태가 그리는 예수님의 계보에 주목하자. 특별히 “거룩하지 않은” 외국인 여자 네 명이 이 계보에 들어 있다. 다말과 가나안 사람 라합, 모압 사람 룻, 그리고 헷 사람의 아내 밧세바이다. 적어도 마태는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이 단순히 아브라함과의 유전적 연결에 근거하여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참 이스라엘은 인종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 대신에 하나님은 누가 이스라엘에 속할지를 택하셔서 이방인을 이스라엘에, 심지어 이스라엘 소망의 근거가 되는 왕의 혈통에까지 편입시키신다.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 모든 백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도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과 택하심에 그 기원뿐 아니라 존속까지 달려 있다.우리는 특히 예수님의 계보에 있는 “거룩한 불규칙성”에서 이런 사실을 볼 수 있다. 요셉이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이지만, 예수님은 요셉의 씨가 아닌 성령으로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셨다(마 1:18, 20). 이것은 예수님의 계보에 현저한 불연속성을 만들어 낸다. 비록 예수님이 그 백성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아브라함과 다윗과의 연결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역사와 가능성을 초월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조상이 생산할 수 있는 후손 그 이상이시다. 이스라엘은 결코 그들의 구주를 생산할 수 없다. 그 대신에, 예수님은 성령의 창조 활동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때가 차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세계 열방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모여 그 백성이 된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의 지평은 과거로 깊숙이 닿아 있으며 미래로 멀리 뻗어 있다.우리는 지금까지 과거를 조사했다. 그러면 미래는 어떨까? 마태는 약속된 새로운 출애굽에 관한 호세아 11장의 예언을 인용한다. 유배 생활은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최종 결정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시는 대신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속을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첫 번째 해방과 같이 완전하고 최종적인 회복과 구속을 주는 두 번째 해방 사건이 있을 것이다. 마태는 이 새로운 해방의 시작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집트에서 부르실 때 발생했다고 선언한다(마 3:15). 구속과 해방의 이 새로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구속과 자유의 복은 하나님께서 세계 열방에서 당신의 백성을 계속 모으고 계시는 지금도 온 열방 위에 부어지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때가 찬 시간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때를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온전히 성취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하나님은 당신의 달력을 가지고 계시고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으시니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가 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까지 우리는 확신과 소망을 갖고 인내하며 증언하고 기다릴 뿐이다.원제: In the Fullness of Time 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성탄절
참이스라엘
재림
출애굽
크리스마스
강림
마태복음
계보
언약성취
목자들만 천사가 전한 그 소식에 반응했다
by 이재훈
2021-12-02
첫 번째 크리스마스 사건은 세상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이루어졌다. 세상은 철저히 메시아의 출생에 침묵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럴 수 없었다. 영적 세계의 비밀을 증언할 수 있는 존재는 천사밖에 없었다.그리고 천사들은 가장 먼저 목자들에게 메시아 탄생 소식을 전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 출생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경배하러 왔지만(마 2:11), 목자들은 아기 예수가 아직 구유에 누워 계실 때 찾아왔다.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 먼저 당시 목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목자는 베들레헴 성읍 밖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양들과 함께 뒹굴고 양 떼 속에 섞여 들판에서 잠을 잤다. 그들은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복음서는 이 초라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메시아의 출생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이야기한다.정보는 힘이다. 정보 시대라고들 하는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때도 그랬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는지 수소문하고 다니자, 헤롯왕은 최고 정보기관, 대제사장들과 율법교사들을 동원하여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실지 조사한다(마 2:4). 그리고 동방박사들을 “가만히” 불러 “아기 예수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라고 말한다(마 2:7-8). 정보를 독점하고 싶은 던 게다. 아니, 독점하거나 선점해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정적을 제거할 수 있다! 이처럼, 새로운 소식이 생겼을 때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전달받는 사람은 대부분 지위가 높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 신분과 위치에 따라 다루는 정보의 양과 내용이 달라진다. 세상의 질서는 정보를 가질 수 있는 권한에 따라 나뉜다.그런데 목자들은 어떤가? 그때는 신분 사회였다. 성문 밖이 삶의 공간인 목자들은 신분이 높을 리도 없고, 그렇다 보니 성읍 안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알 턱이 없다. 그들에게는 어떤 정치적인 견해도, 어떤 사회적인 영향력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메시아 출생 소식이 이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다. 가장 중요한 뉴스가, 가장 긴급한 정보가 가장 소외받는 초라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전해진 것이다. 가히 혁명적 사건이다.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어떤 사람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소외받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복음의 역사가 전해지고 나타나도록 역사하신다. 복음의 능력과 축복은 누릴 것 다 누려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통해 세상에 나타난다. 세상은 사람을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고난 받으시고, 연약한 이들과 함께 연약해지기를 기뻐하신다.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크리스마스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왜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소식을 알리셨는지를 흥미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설명했다. “만일 바리새인들에게 제일 먼저 소식이 전해졌다면, 그들은 먼저 주석을 펴 놓고 세미나부터 했을 것이다. 만일 정치가들이었다면, 그들은 주변에 누가 본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느라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기업가에게 제일 먼저 소식이 전해졌다면 그들은 자신의 스케줄을 맞추고 있었을 것이다.” 목자들에게 이 고귀한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진 이유는 그들이 대단한 기업가이거나 전략가여서가 아니다. 그들은 들은 대로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과연 목자들만 천사의 소식을 들었을까? 모튼 켈세이(Morton Kelsey는 ‘크리스마스의 숨은 이야기’(에스라서원 역간)에서 다른 사람들도 그 소식을 들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나님께서 동방의 박사들에게까지 신비한 별을 통해 소식을 전해 주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날 밤 베들레헴 자기 집에서 편안히 자던 사람들의 꿈속에도 소식이 전달됐을지 모른다. 상인에게도, 여관 주인에게도, 어쩌면 헤롯 왕이 있던 궁궐의 신하들에게도 천사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잠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저 다음날 간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이상한 농담을 주고받는 데 그쳤을 것이다. 오직 목자들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말을 진실 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천사들에게 메시아가 태어나셨다는 메시지를 들은 목자들은 그 주제를 놓고 토론도 세미나도 열지 않았다. 쓸데없는 논란을 벌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지키던 양 떼도 버려두고 서둘러 달려가서 예수님께 경배했다.하나님은 메시지에 그대로 반응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해 주신다. 그때도, 지금도. 이 글은 이재훈 목사의 ‘(위대하지 않은) 선한 그리스도인을 찾습니다’(두란노)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성탄
복음
소식
목자
성탄절
크리스마스
천사
동방박사
헤롯
정보
교리문답에 대하여 알아야 할 9가지
by Joe Carter
2021-12-01
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지금으로부터 347년 전에 완성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의 질문과 답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은 모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교리 문답서에 속한다. 다음은 교리문답과 교리교육에 관하여 알아야 할 9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1. 교리교육자는 교리문답을 사용하여 문답형식으로 교육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교리교육은 구두형식의 전형적인 정보 암송방식을 사용하는 신앙 교육의 한 형태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리, 특히 기독교 교리에 대한 요약이 포함된 교리문답으로 알려진 책이나 문서를 기반으로 하며 종종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교리문답은 기본 신앙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교리문답을 배우는 사람을 (그리스어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 이라는 뜻인) 카테큐멘(catechumen)이라고 부르며,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을 카테키스트(catechist)라고 부른다. 이 교육 과정을 교리교육이라 부르며, 이 교육 과정은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진다. 2. 교리교육과 관련된 용어는 성경에서 파생된 것이다교리교육과 관련된 용어는 원래 그리스 동사 ‘카테케오’(구두로 가르치다, 교육하다)에서 음역 된 것이다. 이 용어들은 누가복음 1:4과 고린도전서 14:9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6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또 사도행전 18:24에서 바울이 아볼로에 대해 말했던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아볼로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3. 거의 모든 교리서에는 네 가지 중요한 요소가 동일하게 포함되어 있다교리문답의 교리적 내용은 초기교회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교리문답에는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 성례전 또는 의식(예를 들어 성찬과 세례)의 4가지 주요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4. 종교개혁자들은 (적어도 그들의 말에 의하면) 교리교육을 회복했다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은 중세시대 선조들이 가르쳐 왔던 것이 교리교육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장 칼뱅은 “마귀가 교리교육을 무너뜨려 신앙 형성의 열매가 없는 미신 찌꺼기들만 남기고 말았다”라고 말했으며,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 15세 나이의 소년소녀들이 이전의 명문 대학을 다니던 모든 신학자들이 알던 것보다 기독교 교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교리문답 곧 주기도문과 사도신경과 십계명이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5. 교리문답과 인쇄술은 종교개혁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두 가지 도구였다종교개혁 시대의 인쇄술은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인쇄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교리 교육 자료를 보급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1691년부터 1694년까지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존 틸롯슨(John Tillotson)은 “교리 교육과 순교자의 역사는 개신교의 두 기둥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가톨릭 트렌토 공의회는 개신교도들이 교리문답을 통해 큰 “해악”을 저질렀다고 혹평하기도 했다.6. 마르틴 루터가 질의응답 형식을 대중화했다거의 모든 교리 교육은 어느 정도의 암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모든 교리문답이 각본대로 쓰여진 질문과 답변의 형식을 동일하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루터는 믿는 자들이 그들이 외운 것을 이해하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1529년에 만든 그의 소교리 문답서에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 유형과 그가 작성한 답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루터가 문답형식을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 형식을 개신교 교리교육을 위해 대중화시켰다. 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중요한 교리문답서들에게 지대한 영감을 주었다1646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인 목사-신학자들의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이 완성되었다. 이 두 교리문답서는 모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동반 문서로 만들어졌다. 이 대중적인 신앙고백은 다른 교리문답서에도 영감을 주었다. 챠드 반 딕스훈(Chad Van Dixhoorn)은 “신앙고백서에서 볼 수 있는 용어와 문구는 거의 즉시 영어를 사용하는 개혁교회들에서 선호하는 표현이 되었다”라며 “회중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가 자신들의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 문구를 만들고자 할 때 그들은 종종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제작한 문서들을 수정하고 재발행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8. 전통적인 교회 거의 모두는 교회 자체 교리문답서를 만들었다교회 역사에서 거의 모든 교단과 전통을 가진 교회는 믿는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위한 신앙 교육에 교리교육 형식을 사용하였다. 루터교회의 루터 소교리 문답서, 침례교회의 키이치(Keach)의 교리문답, 가톨릭교회의 교리서와 성공회의 공동기도문답서 등이 그것이다.9. 복음연합은 현대시대의 교리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2012년에 복음연합(TGC)과 리디머 장로교회는 뉴시티 교리문답을 발표하였다. 이 교리 문답서는 팀 켈러(Timothy Keller)와 샘 샤마스(Sam Shammas)가 종교개혁 교리문답서를 기반으로 개발하고 각색한 것이다. 52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어 교회의 연간 교육계획에 맞출 수 있으며, 바쁜 일정을 가진 사람들도 교육 일정을 쉽게 따라갈 수 있게 마련되었다. 또한 성인과 어린이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교리서이기도 하다. 즉,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어린이 파트 답변은 항상 어른 파트 답변에 부분적으로 들어 있는 방식이다. 각 질문과 답변에는 역사적인 설교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 웨슬리의 짧은 문서로 편집된 가르침과 현대 설교자인 돈 카슨(Don Carson), 마크 더버(Mark Dever), 팀 켈러, 존 파이퍼(John Piper)의 짧은 강의 영상도 첨부되어 있다. 뉴시티교리문답 바로가기 ▶▶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Catechism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서은성
신학
교리
교리문답
기독교교리
문답형식
신앙고백서
뉴시티교리문답
팀켈러
웨스트민스터교리문답
건강한 자아상은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다
by 고상섭
2021-11-27
팀 켈러는 ‘센터처치’(두란노 역간)에서 복음의 능력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첫째 ‘나는 내가 감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죄인이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둘째 ‘나는 내가 감히 바랐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용납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99쪽). 이것은 인간은 ‘구원받은 죄인’ 또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오래전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가 했던 이야기의 현대적 표현이며 적용이다. 복음의 이러한 내용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복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2-4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바울은 복음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먼저, 건강한 정체성의 특징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기는 것이라 말한다(2절).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다른 사람의 인정에 두기 때문이다. 인정받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거나 비위를 맞추게 되고, 열심히 노력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지 않을 때 실망하거나 좌절하게 된다. 내 삶의 뿌리를 다른 사람의 인정에 두기 때문에 늘 불안한 마음의 상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내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말아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자신에게 떳떳하면 된다.” 일반 상담가들이나 자기개발서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교만을 통해 열등감의 문제를 해결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의 감정에게 솔직하게 물어 보라. 진정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는가? 나도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고 실망한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살 수 없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존 스토트에 따르면, 인간에게 죄가 침투하면서 세 가지 관계가 단절된다. 첫째,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둘째, 이웃과 갈등이 생겼다. 그리고 세 번째로, 또 하나의 관계가 무너졌는데, 바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속박된 존재로 살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없는 상태이고, 또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로 살게 한다. 나의 원함 자체가 기울어져 있는 죄인이기 때문이다.다른 사람의 평가와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울은 이제 더 나아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2절)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멈춘다는 것이다. 나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시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열등감의 문제, 자아상의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자기개발서들이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라고 권고한다. ‘자존감 수업’같은 책에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권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외롭고 힘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자기사랑을 주장하지 않는다. 성경은 자기부인을 말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찾으려면 자기사랑을 힘써야 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존 스토트는 ‘모퉁잇돌 그리스도’(복있는사람 역간)에서 단순한 자기사랑과 자기위로는 성경적 단어가 아닌 심리학적 단어일 뿐이라 말하고, 하나님이 심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여전히 죄인 된 우리를 향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기심 없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을 찾게 된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막 8:35). 진정한 자기 부인이 진정한 자기발견을 낳는다”(91쪽). 팀 켈러의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복있는사람 역간)의 원제목은 ‘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 즉 ‘자기망각의 자유’다. 자기를 덜 생각하는 것이 건강한 자아상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게리 토마스도 ‘거룩의 영성’(도서출판CUP 역간)에서 겸손이란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왜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이 건강한 자아상일까? 건강한 자아는 자신의 자아를 네 번째 발가락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네 번째 발가락이 있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 걸어가고 살아간다. 그런데 네 번째 발가락을 계속 의식하고 산다면 분명 그곳에 상처가 났거나 신발에 무엇이 들어가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아를 계속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아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건강한 자아는 자신을 더 생각한다. 자신은 부패한 죄인일 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하나님 사랑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여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면 상처 난 결핍을 붙잡고 있는 것이고, 자신의 노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교만이 끊임없이 자신을 이끌기 때문이다. 건강한 자아상의 시작은 사도 바울처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로부터 시작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영적 침체’(복있는사람 역간)에서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모든 영적 침체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며, 시편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을 해설하면서, 자기망각을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영적 침체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자신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맥없이 감정이 가는 대로 드러누워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33쪽). 많은 사람들이 낙담하고 실망하는 이유는 자신이 자신을 생각했을 때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다르게 설명하면, 자신은 이것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해서 실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이 가는 대로, 자신이 자신에게 떠오르는 생각대로 자신을 맡기며 점점 침체 가운데로 들어간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제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는, 또는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대안을 설명한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데 만족하지 말고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 바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자아가 우리에게 말을 걸게 하지 말고 우리가 자아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영적침체의 주된 문제점은 우리가 자아에게 말하는 대신 자아가 우리에게 말하는 데 있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의 불행은 우리가 자아에게 말하는 대신 오히려 자아의 말을 듣는 데 있음을 모르시겠습니까?(33쪽). 시편 기자는 다른 사람의 조롱에 낙심했다. 그리고 바뀌지 않는 현실의 문제에 좌절했다. 그러나 자신의 자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선포하고 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 하는가.” “나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가!” 그는 자신의 자아에게 말을 걸고 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라는 바울의 말을 적용한 것이다. 우리의 생각 속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세 존재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둘째는 마귀가 우리에게 말한다. 셋째는 자신의 자아가 말한다. 자신의 자아가 말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 가지를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마귀의 말과 자신의 생각이 모두 1인칭 시점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상섭아, …을 하거라”라고 말씀하거나, 마귀는 쇳소리를 내면서 “상섭아,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두 내 생각인 것처럼 1인칭 시점으로 “…을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라고 떠오른다.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상했다고 판단되면 뱉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고 누가 내게 생각을 불어넣어 주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 생각이 성경이 원하지 않는 생각이라면 버려야 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못한 일을 계속 곱씹으면서 생각하게 되면 분노는 더욱 커지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면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결국 건강한 자아상은 복음의 기초를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복음 안에서 나는 죄인이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아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는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은 좀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으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무시할 때 폭발하는 이유도 여기도 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으로 자기 자아상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자기를 부인하게 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한다. 복음의 정체성은 내가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시는 그 판단을 진리로 받아들일 뿐이다. 나는 죄인이기에 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거나 개선될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로 인해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이룬 행위와 성취가 아니기 때문에 전적으로 감사해야 할 은혜이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인 사람은 비난받을 때 격노하거나 감정적으로 좌절한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으로서의 자아상은 자신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에 위협이 되는 것은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없애야 한다. 반면 복음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비난을 당할 때 씨름한다. 그러나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48쪽).복음의 자아상은 나를 덜 생각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이웃을 더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신을 판단하기를 멈추고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지에 더 집중하는 삶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한계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된다. 죄인인 나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못남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못난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를 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를 우리에게 선물해 준다.
정체성
자아상
망각
영적침체
자기부인
자기사랑
팀켈러
센터처치
존스토트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
by 최원준
2021-11-23
아무도 모르게 계시고자 했지만 숨길 수 없었다. 이미 명성이 두로와 시돈까지 널리 퍼졌다. 예수에 대한 소문이 한 여인에게도 미쳤다. 여인은 소문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찾는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출신”이다. 여인은 시리아 지역에 속해 있는 페니키아 이방인이었다(마태복음은 ‘가나안 여인’으로도 표현한다). 여인은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애원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취해서 개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막 7:27).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이방 여인을 “개”라고 하신다. 인종차별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 예수님도 사람을 차별하시는구나.’ ‘예수님도 유대인이시니, 사랑을 베푸는 대상은 불쌍한 이스라엘 사람들이지 이방인이 아니구나.’ 오늘 우리에게는 참으로 불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이 불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학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이 언행은 인종차별적이고 남성우월적인 예수님 당신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억압적 체제를 짐짓 빗대신 것, 흉내 내기(simulation) 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수님의 이 발언은 인간을 비극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 세상의 의식과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몸으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또 당시 유대인의 식탁 문화를 배경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에 등장하는 개는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사나운 들개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이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퀴나리온’은 작은 개를 의미한다.) 당시에 애완견은 식탁 밑에서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었다. 여기서 우리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나사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허기를 면하려고 했을 때,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 이 개들 역시 집에서 기르는 개다. 당시 유대인들은 수염을 길게 길렀는데, 식사할 때 음식이 수염에 묻으면 식후에 빵으로 털어 냈다. 그리고 그 빵을 개에게 주었다. 그러나 어떤 주인도 ‘먼저’ 자녀에게 빵을 주지 개에게 주지는 않는다. 먹고 남은 것을 줄 뿐이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제시되고 그 후에 이방인에게 차례가 돌아간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병이어 이적 이후에 칠병이어 이적이 나오는 것도 그렇다. 오병이어 이적에서 남은 빵을 담은 바구니가 열둘이라는 사실은 이 이적이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반면에 칠병이어 이적은 이방인 지역에서 있었고, 또 일곱 광주리가 이방 세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여인은 대답한다.“주여, 맞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먹다 떨어뜨리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막 7:28) .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퀴리에)이라고 부른다.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듣고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예수님을 높이고 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한다. 사람은 모욕을 당하게 되면 수치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때 나타내는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 번째, ‘그래, 내가 그렇지. 내 주제에….’ 이전보다 더 자기를 비난하고 숨어 버린다. 두 번째, 자신을 모욕한 사람에게 분노하고 그를 비난한다. 이 두 반응은 자신을 모욕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런데 여인은 다른 반응을 보인다. 곧, 현실을 직면한다. 이 가나안 여인은 자신을 개 취급하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현실에 대한 체념이나 막연한 분노가 아니라, 현실을 마주하고 인정한다. 문제 해결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여인은 현실 직시 및 인정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간다. 이제 여인은 불의한 현실 속에서 자신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들을 먹습니다.” 여인은 개의 권리를 주장한다. 자녀가 우선되어야 하는 현실, 인정합니다. 그러나 개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부스러기라도! 여인은 우리가 “부스러기 은혜”라고 부르는 바로 그 은혜를 자신에게 베풀어 달라고,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한다.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급식 이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막 6:52; 8:14-21), 또 정결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우둔함과 대조된다. 또한 여인은 자기의 요청을 사실상 거부한 예수님의 대답에 좌절하지 않고 겸손히 자비를 구하는 믿음을 가진 자라는 점에서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은 제자들(막 4:40)과 대조된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 보아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지혜와 믿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막 7:29). 같은 내용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여인의 지혜와 믿음에 놀라기까지 하신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마 15:28, 개정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감탄사 ‘오’가 있다). 예수님은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쓰인 ‘나갔다’의 헬라어(엑세레뤼쎈)는 현재완료시제다. 예수님은 귀신 축출을 위한 그 어떤 말씀이나 행동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이미 귀신은 떠나갔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내다보신 것이 아닐까? 이미 요청은 이뤄졌다. 그러나 여인은 모른다. 여인에게는 거쳐야 할 테스트가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그것을 잘 통과했다. 이 글은 최원준 목사의 ‘마가복음’(홍성사, 2021)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갈무리하여 다시 엮은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믿음
지혜
모욕
인종차별
남성우월주의
이방여인
오병이어
수치심
오래된 속삭임
by 이인호
2021-11-1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복음은 타락의 선언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이 선언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복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게 된다. ‘내가’ ‘나’ 자신이 나의 흉악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아래 있다는 이 선언에서부터 복음은 시작된다.이를 잘 아는 사탄은 복음을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것은 긍정의 속삭임이다. “네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사탄은 절망적인 인간에게 긍정의 불을 지핀다. 이것은 오래된 속삭임이다. 사탄은 첫 사람 아담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사탄의 이 속삭임은 그치지 않고 있다. 사탄이 오늘도 우리를 파멸로 이끌고자 우리에게 이렇게 주입하고 있다. 인간은 괜찮은 존재다. 인간은 이성의 존재다. 인간은 스스로 진리에 이를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은 신에게 반항할 수 있다. 칼빈은 말한다. “진실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는 사람들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자력으로 싸우라고 가르치는 것은 갈대로 우리를 높이 드는 것과 같다. 그 갈대가 꺾이면 우리는 떨어지고 만다. 허망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은 모두 연기와 같다.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것을 찾으라고 강요하고, 사람이 자기를 높이게 하는 것은 사탄의 음성이다.” 칼빈에 앞서 아우구스티누스도 동일하게 경고한다. “아무도 자신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도 인간성의 능력을 중요시하는가? 그것은 상하고 부서지고 혼란하고 망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고백이지 그릇된 자기변호가 아니다.”초기 교회부터 종교개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사탄의 이 끈질긴 계략을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간다. 사탄은 오늘도 그 목소리를 위장하여 우리의 도덕의식, 비판력, 정의감에 짐짓 호소하는 듯 ‘인간이여, 그대는 괜찮은 존재다’라고 속삭인다. 사탄은 오늘도 그 목소리를 변조하여 우리더러 성경 지식을 깨달음을, 열심을, 헌신을 자랑하라 부추기며 ‘너희는 괜찮은 신자다’라고 속삭인다. 더 나아가 사탄은 ‘너의 삶의 주인은 너다’라고 속삭이며 주인 되신 하나님께 반항하라 부추긴다. 이 속삭임에 굴복하여 우리 사회의 한 쪽에서는 사회의 미덕과 규범을 당당하게 어기고 반항하는 사람들에게 ‘매력 있다’ ‘용기 있다’며 찬사를 보내는 문화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단언한 것처럼, 결단코 우리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이만하면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실 거야!’ ‘나는 평생 법 없이 살았어!’ ‘나는 평생 진리를 가르친 사람이야!’ 자신의 종교 생활, 공로, 선행이 은근한 의가 되어 남들과 비교하면서 공로 의식에 젖어 사는 것이야말로 지옥에 이르는 멸망의 대로이다. 하나님은 남들 눈에는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은폐한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의 구원을 포기해야 살 수 있다. ‘나 같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우리 내면의 이 뿌리 깊은 자기 의, 자기 숭배를 포기해야, 산다. 내 안에 구원의 길이 없음을 깨닫는 사람, 자기 파산을 선언하는 사람,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비로소 예비 하신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신다. 긍정의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거짓 복음이다. 사탄의 복음이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습니다.” 이 글은 이인호 목사의 ‘믿음에서 믿음으로’(익투스, 2017)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복음
변증
칼빈
사탄의속삭임
거짓복음
아담
긍정의불
타락선언
종교생활
자기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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