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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부흥과 거짓 부흥을 가르는 표지
by Sean Michael Lucas
2018-12-06
오랫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회중 가운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분별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는 황폐한 시대도 간혹 있었다. 또한 그런 시대와는 달리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사람들은 영적 관심을 강렬히 나타내며, 뚜렷한 부흥의 역사가 도처에서 일어나는 대각성의 시기도 있었다.목회자들이 참 회심과 거짓 회심, 또는 참 부흥과 거짓 부흥을 구별하도록 지침을 제시하는 일은 바로 그런 각성의 시기에 이루어졌다. 오늘날은 기독교 사역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간혹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교회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면 그에 맞추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 위한 바른 지침과 표지가 필요하다. 특별히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말이다.영적 각성이나 진정한 회심을 구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표지 가운데, 거짓되고 그릇된 표지가 있다. 여기서는 진정한 회심과 부흥을 알아볼 수 있는 참되고 신뢰할 만한 표지를 제시하기 전에, 바로 그 거짓되고 그릇된 표지를 다섯 가지 예를 들어 지적하고자 한다.고조된 감정신앙적인 관심을 잘못 판단하게 하는 표지 중 하나는 고조된 감정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거나 죄에 대해 압도적인 슬픔을 느낀다고 해서, 그런 감정이 반드시 회심이 일어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강력하고 고조된 감정이 일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여러 사례를 통해 잘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월드시리즈나 슈퍼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감정이 최고조에 오르는 경험을 하지만, 그런 감정은 영적인 운동이 그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열변을 듣는 시민들은 큰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깊은 분노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그런 감정이 회심을 이끄는 역사임을 의미하지 않는다.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과거에 드린 예배를 생각해 보라. 음악이나 설교가 마음 깊이 와 닿은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감정이 움직이고, 그 순간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대체로 삶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만한 의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거룩한 삶을 새롭게 실천하게 만드는, 즉 성령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마음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감정은 고조될 수 있지만, 그러한 감정이 지속적인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준비된 간증또 다른 그릇된 표지는 우리의 신앙 경험에 대해 미리 준비된 내용을 전달하는 간증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자신의 심적 변화에 대해 그 자리에서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는 경우, 우리는 그 간증이 참된 회심의 표지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캐릭터 수다쟁이가 우리에게 경고하듯이, 단순히 신앙 경험이나 교리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진정으로 회심하거나 각성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거짓 종교 체험을 한 사람들은 영적인 교만과 야심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본인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말하기가 쉽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그들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절박한 영적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일 수도 있다.성경 인용진정한 회심과 참된 부흥을 구별할 때 그릇되게 사용되는 세 번째 표지는 성경 구절을 길게 인용하는 능력이다. 이를테면, 진정한 영적 각성에 대한 증거로 흔히 인용되는 특정한 성경 구절이 마음에 즉각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표지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귀도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성경 본문을 인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가 그분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떼어놓고자 시편 91편을 잘못 인용한 것이 바로 그 예이다.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 동안은 즐겁게 받아들이지만, 결국에는 등을 돌리고 만다. 마태복음 13장은 돌밭으로 비유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겠지만, 시련의 때가 오면 거짓 회심자임을 드러내고 만다고 가르친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성장하는 듯이 보여도, 결혼생활이나 가정이나 직장에서 시련을 당하는 때가 오면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성경의 인용 또는 성경에 대한 관심이 표현된다고 해서, 참된 회심이나 부흥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영적 체험자신이 죄나 사탄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느낄지라도 참으로 회심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누군가 본인이 영원한 심판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깊이 염려하고 심지어 절망을 느낀다고 생각해 보자. 이는 영적인―심지어는 마귀적인―압박감에 해당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그러다가 갑자기 이적을 경험한 것처럼, 마치 마귀가 쫓겨나고 억압이 그치고 어떤 중독에서 벗어난 듯이, 자신이 문득 구원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더 나아가 손이나 옆구리에 상처가 난 어떤 사람을 꿈이나 환상 속에서 만날 수도 있고, 그 사람을 그리스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으로 구원받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런 경험이 확실한 회심이나 진정한 부흥을 위한 견고한 토대가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예배에서 느끼는 자유마지막으로 누군가가 예배를 통해 심적인 자유를 느낀다고 해서 이것이 반드시 회심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배를 드리러 가고, 신앙 교육을 정기적으로 받으며, 부흥 집회에 참석하는 일은 그 자체로 회심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단순히 예배에 많은 군중이 모였다고 해서, 또는 그 사람들이 매우 열심히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부흥의 징후를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아울러 하나님을 찬양하는 중에 느끼는 자유도 참된 신앙의 확실한 증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 자유롭게 마음을 몸짓으로 표현하거나, 큰 소리로 노래하거나, 혹 설교 시간에 ‘거룩한 적막함’을 유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임재해 계심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분명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분의 임재를 갈망하지만, 그러한 갈망이 회심이나 부흥의 확실한 표지는 아닌 것이다.지금까지 설명한 다섯 가지 표지들은 신앙적인 관심이나 진정한 회심 또는 참된 부흥을 잘못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그릇된 표지들이다. 따라서 이런 표지들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영적 상태에 대해 잘못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참된 부흥, 진정한 회심, 그리고 영적인 각성을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표지들은 무엇인가?참된 표지들한 가지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은혜로운 감사’(a gracious gratitude)라고 불렀던 표지이다. 은혜로운 감사란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실 수 있거나 하신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의 성품을 묵상하고 그 인도하심을 기뻐하는 삶이 곧 제자의 길임을 알게 된다.또한 그들에게는 ‘거룩함에 대한 큰 기쁨’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맛보기 시작하고, 죄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느끼기 시작한다. 따라서 죄는 그들에게 점점 더 쓰디쓴 경험으로 다가온다. 성령이 그 마음 안에 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랑하도록 이끄시며, 하나님을 닮고 싶어 하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이다.하나님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일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세 번째 표지는, 그의 삶에 두루 퍼져 가는 ‘겸손’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아는 지혜가 있을 때, 신자들은 하나님 및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알게 된다. 그러한 겸손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의 마음에 거하시는 새로운 역사를 통해서만 생긴다. 진정한 회심은 항상 겸손을 수반하는데, 그 이유는 회심이 본질적으로 교만을 꾸짖고 자기 신뢰를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의지하는 겸손을 갖게 된다.끝으로 하나님이 누군가의 삶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표지는 ‘거룩한 순종의 실천’이다. 성령님이 참으로 어떤 사람 안에 거하신다면, 결과적으로 거룩함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새롭게 일어난다. 거룩함에 대한 갈망은 단순히 내면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영역이나 문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뻐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며, 말씀에 대한 순종을 즐겁게 실천하는 성도로 가득한 교회, 바로 그 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이다. 그러한 교회는 부흥의 실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그러한 교회를 많이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한다.원제: True Revival and False Revival출처: www.ligonier.org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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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척자가 알아야 할 고통의 문제
by Adam Ramsey
2018-12-06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나는 고통이 있을 때면 지하실로 내려가 주님이 주시는 최고의 포도주를 찾는다"라고 말했다.교회 개척이 당신을 ‘고통의 지하실’로 내려가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통은 일반적인 일이다.환경의 불확실성, 개인적인 죄, 성취되지 않은 소망, 비합리적인 요구, 가정에서의 영적 전쟁, “당신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했으나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핵심 멤버들, 바로 이 모든 요인들이 고통을 가져올 수 있다.‘나는 아니야! 내 지체들은 그렇지 않아! 우리는 다를 거야!’라고 말해봤자 소용없다.지난 22년 동안 내 삶은 교회 개척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었다. 처음에는 교회를 개척한 가정의 십대 소년이었고, 다음에는 실패한 교회 개척팀의 일원이었으며, 이제는 분립 개척을 추친하는 교회의 담당 목사이다.이 각각의 기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달콤함과 고통, 승리와 시련의 시기였다. 이 지면을 빌어 나는 교회 개척자로서 처음부터 알았으면 좋았을 고통의 문제에 관하여, 세 가지 교훈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1. 고통이 피할 수 없는 문제라면, 자기 연민에 빠질 필요가 없다만약 고통 없는 삶을 원한다면, 교회를 개척하지 않아야 한다. 현재 당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편이 낫다. 교회 개척은 잊어버리고, 사는 동안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해라.고통이 오고 있음을 안다면, 고통이 발생했을 때 그 충격은 줄어드는 법이다. 고통이 일반적인 경험임을 안다면, 자기 연민에 선제 공격을 가할 수 있다.자기 연민이 교회 개척자의 정서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좌절과 슬픔 및 실망이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연민을 향해서 단호하게 ‘안 돼’라고 말해야 한다. 실수하지 마라. 교회 개척자가 된다는 것은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이다.결국 우리 각자는 실망하거나, 배신당하거나, 비방을 받거나, 낙담하거나 오해 받거나 잘못된 소문의 대상이 되거나 반대를 받거나 우울해지거나 외롭거나 영적으로 소진될 것이다.당신이 영적으로 (유명한 권투 선수인) 플로이드 메이웨더(Floyd Mayweather)여서 당신 앞에 던져진 거의 모든 문제를 피해갈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 인생을 둘러싼 문제들이 당신을 로프로 밀어붙이고 곧 라이트훅으로 눕혀 버릴 날이 올 것이다.하지만 사역자가 상처를 쉽게 받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그분의 최선을 이루시는 장소이다. 청교도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눕히실 때에야 그들은 천국을 올려다 보게 된다.”이 사실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천천히 그러나 점점 더 그의 아들을 닮아 가도록 빚으실 때 고통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예상하기 힘든 주님의 도구 중 하나가 바로 고난이다.2.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라면, 고통은 나를 돕는 종이 될 수 있다교회를 개척할 때 불가피하게 경험하는 온갖 어려움은 우리의 성화를 돕는 종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어려움은 우리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 부분을 드러내어 결국 변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통은 훌륭한 의사가 잡은 메스의 날카로운 칼날과 같다. 그것은 우리 속에 아직도 잘못되어 있는 부분을 열어서 드러낸다.생각해 보라. 고난은 성공 이면에 위장해 있는 우상을 노출시킨다. 어려움은 마음 속 어두운 곳에서 여전히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나르시시즘을 향해 빛을 비춘다. 실망은 비밀스럽게 유지되어 온 혜택과 권리를 수면 위로 드러내어 우리 인생 가운데 선을 이루어 간다. 우리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목회자로 하여금 사역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고통은 교만을 드러낸다.바울이 형언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의 결론을 놓치지 마라. 그 결론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지 않기로 하신 육체의 가시를 고백하는 데 있다. 그는 가시의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고후 12:7).고통은 우리가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오로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가르친다. 그래서 바울은 확신에 차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6-17).무슨 뜻인지 이해했는가? 고통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이 인생의 모든 것을 현재의 성장과 미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실망, 반대, 실패에 정복당할 이유가 없다.나는 타비티 안야빌리(Thabiti Anyabwile)의 강의를 듣던 날을 기억한다. 그는 부흥에 필요한 고통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로 우리를 격려했다.“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셨듯이, 당신의 고통에 대해서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당신이 겪는 고통은 당신을 돕는 종입니다. 당신의 고통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감당하도록 당신 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다음 번에 고통이 당신의 자리에 찾아온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환영한다 나의 종이여. 나에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광을 이루어 달라.’”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역의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게 할 것이다. 그 삶이 바로 우리가 선물 받을 명품 포도주인 것이다. 3.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바울이 그의 인생의 막바지에 당신과 식탁에서 마주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극복할 수 없을 듯한 어려움 속에서도 신실함을 잃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 온 그리스도의 종이다(고후 11:23-28). 그는 성실했고,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이어왔으며, 이제 그 앞에 놓인 경주를 곧 마무리하려 한다.“바울이여, 당신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또 묻는다. “당신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까? 그 많은 고통 속에서 어떻게 복음 사역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당신 자신을 그토록 쏟아 부을 수 있었습니까?”늙은 사도는 당신 가까이로 몸을 숙인다. 그리고 그의 미소 속에서 몸에 난 상처와 어울리지 않는 기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속삭인다. “비결을 알고 싶습니까? 그리스도로 충분합니다. 그분의 은혜 안에 있다면, 가시를 지녀도 좋습니다(고후 12:9).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면, 불확실함 속에서도 안전합니다(롬 8:38-39). 그분의 강함 안에 있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능력이 있습니다(빌 4:12-13).”바울은 인간 관계 속에서 배신을 당했고, 폭력적인 반대를 경험했으며, 계획이 무너지고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에 익숙했다. 하지만 사역에서 겪는 놀람이나 염려는 바울을 근본적으로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만족의 비결을 배웠다. 그는 그리스도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배웠다.교회 개척자여, 앞에 놓인 골짜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잠시 마주치는 비탈길에 놀라지 마라. 어둠의 그늘이 강해지는 것처럼 보일 때, 자기 연민 속으로 뒷걸음치지 마라. 용기를 가져라! 주 예수님이 거기서 당신과 함께 하실 것이다(시 23:4). 당신은 반대를 받겠지만, 버림은 받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쓰러지겠지만, 패망하지 않을 것이다(고후 4:9).부활하신 우리 왕의 임재가 교회 개척의 고통과 실망보다 더 실제적이고 소중한 현실이 될 때, 우리는 바울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이제는 모든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Every Church Planter Needs to Know About Pain번역: 이주일
교회
교회개척
개척자
사무엘러더포드
고통
예수님
부활
왕의임재
바울
만일 당신이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면
by Mark Dever
2018-12-05
떠나기로 결심하기 전에1. 기도하라. 2. 당신이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다른 도시로 이주하려고 하기 전에, 당신의 솔직한 생각을 현재의 목회자와 상담하라. 그리고 그의 조언을 구하라. 3. 당신의 동기를 살펴보라. 떠나려는 마음이 개인적인 다툼이나 실망 때문인가? 혹은 교리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그 교리적인 문제가 얼마만큼 심각한 정도인가? 4. 깨진 관계를 화목케 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 5. 여태까지 교회 생활에서 경험했던 모든 은혜의 증거들, 즉 분명한 하나님의 사역을 꼭 고려해보라. 만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를 전혀 볼 수 없다면, 당신 자신의 마음을 한번 더 점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마 7:3-5). 6. 겸손하라. 모든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사람들과 상황을 자애롭게 평가하라(나만 옳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라). 만일 당신이 떠난다면 1. 주님의 몸을 분열시키지 말라. 2.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조차 불만의 씨앗을 뿌려 두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라. 당신은 그들이 현재의 교회에서 은혜 가운데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험담하고 싶은, 또는 감정을 분출하고 싶은 마음을 잠잠케 하라. 3. 회중과 그들의 리더십을 위해 기도하며 축복하라. 이 일을 실제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라. 만일 상처를 입었다면 어렵더라도 용서하고자 노력하라. 당신이 용서받았듯이.출처: www.9marks.org원제: If You’re Thinking about Leaving a Church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교회
교회생활
기도
조언
교리
관계
은혜
겸손
주님
회중
초대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을까?
by Justin Taylor
2018-12-05
여기서는 초대교회의 세례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선 교회사가 에버렛 퍼거슨(Everett Ferguson)의 975페이지짜리 대작, ‘초대교회의 세례: 첫 5세기 동안의 역사, 신학, 예전에 대하여’(Baptism in the Early Church: History, Theology, and Liturgy in the First Five Centuries)에서 결론적으로 설명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2세기 후반에 유아세례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2세기 후반에 유아세례를 행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입니다”(856페이지).그렇다면 유아세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까?“유아세례가 행해지지 않았다기보다는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세울 만한 역사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856페이지).“많은 사람들은 이 역사적인 공백을 신학적인 또는 사회학적인 설명으로 대체합니다”(856페이지).왜 유아세례가 생겨나게 되었나요?“유아세례의 기원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비상적인 관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을 앞둔 병든 아이들이 곧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긴급적으로 행해지던 세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856페이지).언제부터 유아세례가 세례의 일반적인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까?“예비적인 차원에서 아기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 조금씩 늘어났습니다”(857페이지).“그렇게 유아세례는 일반적으로 용인되었지만, 그 타당성에 대한 질문은 5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857페이지).“그러다가 5-6세기에 들어서며 통상적인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857페이지).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까?“본 연구에서 수집된 증거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예외적인 경우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더불어 증거에 관한 일관된 해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857페이지).“당시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사용하던 (세례를 의미하는) 단어나 (물에 몸을 담그던) 유대교의 관습을 포함한 기독교 문헌들을 분석하였을 때, 거의 압도적으로 전신을 물에 담그는 세례가 일반적인 방식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857페이지).“그러나 물이 부족하거나 병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할 때는 예외였습니다”(857페이지).“물 속에 잠기게 하는 방식은 의심의 여지없이 (동방) 그리스 지역에서는 4-5세기에도 행해졌고, (서방) 라틴 지역에서는 그보다 약간 덜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857페이지). 물 속에 잠기게 하는 방식은 (1) 초기 관습에서 변형된 것입니까? 아니면 (2) 이전에 존재했던 방식들 가운데 하나입니까? 또는 (3) 처음 3세기 동안 행해지던 방식이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까?“본 연구의 결론에 따르면, (3)의 해석이 현재 가지고 있는 증거에 가장 부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857페이지).“물 속에 잠기게 하는 방식을 누군가가 생각해서 고안해냈다면 모르겠지만, 문학과 미술 및 고고학적 증거들은 이번 연구의 결론을 지지합니다”(857페이지).다음으로 이 주제에 관한 또 다른 관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앤서니 레인(Anthony Lane)의 ‘초대교회는 유아세례를 주었는가?’(“Did the Apostolic Church Baptise Babies?: A Seismological Approach,” Tyndale Bulletin 55, no. 1, 2004)에서 설명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첫째, 초대교회가 유아세례를 주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입장을 확정짓기에는 1세기로부터 확보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둘째, 이에 대한 대안적인 접근은 초대교회 이후 바로 이어지는 속사도교회의 세례 관습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 관습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초대교회의 원인을 소급하여 연구할 수 있다.셋째, 3세기 초부터 그 이후 두 세기 동안 행해진 세례에 관해서는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 가정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자녀들이 세례를 받은 경우를 포함하여 다양한 세례의 관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넷째, 초기에 행해졌던 일반적이지 않은 다른 세례의 관습들을 원리상 비(非)사도적이라거나 잘못된 방식이라고 주장했던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다섯째, 비록 구전 전통(oral tradition)이 연구물로서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과거에 접근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라고 전제할 수 있다. 그 전통을 고려하면, 교회가 다양한 방식들로 세례를 베푼 관습에 대하여 사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기원을 설명하는 편이 가장 자연스럽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Baptism in the Early Church번역: 조현빈
역사
초대교회
세례
유아세례
관습
방식
에버렛퍼거슨
앤서니레인
초대교회는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
by John Piper
2018-12-03
초대교회는 하나님이 그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기를 기도했다.“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다.“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검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엡 6:17-18).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8-19).“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행 4:29).기적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주여 이제도 ...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29-30).“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기를 기도했다.“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약 5:14-15).믿지 않는 자들의 병을 고쳐 주시기를 기도했다.“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행 28:8).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기도했다.“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기적적인 구출을 위해 기도했다.“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 12:12).“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행 16:25-26).죽은 자를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했다.“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 9:40).그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기도했다.“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전략적인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했다.“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지도자를 세워 주시기를 기도했다.“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3).일할 사람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했다.“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8).“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2-3).다른 선교사들의 성공적인 사역을 위해 기도했다.“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롬 15:30-31).공동체의 연합과 화합을 위해 기도했다.“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만나서 격려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우리가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3:10).총명한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했다.“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 1:9-10).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기도했다.“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하나님을 더 잘 알도록 기도했다.“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기도했다.“이러므로 내가 ...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너희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4-15, 18-19).더 깊은 소망의 확신을 갖도록 기도했다.“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6, 18).능력과 오래 참음을 위해 기도했다.“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9-11).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깨닫도록 기도했다.“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6, 19).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더 큰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했다.“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막 9:24).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했다.“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 6:13).“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하나님이 그들의 결심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했다.“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그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기도했다.“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기도했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악한 자에게서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했다.“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the New Testament Church Prayed For번역: 매일배움
역사
초대교회
존파이퍼
기도
무엇
믿음
복음
능력
기적
소망
종교개혁 이전의 복음중심적 신학
by Gavin Ortlund
2018-11-30
최근 복음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로 개종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젊은 세대나 훈련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는 신학을 공부한 목사와 교수, 그리고 복음주의신학회(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회장까지 포함되어 있다.물론 이 현상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다. 개인의 경우는 각기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종종 회자되는 이유 중 하나는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가 제공하는 깊이 때문이다. 침례교인이었던 어떤 사람은 ‘나는 왜 가톨릭 신자인가’(Why I’m Catholic)라는 웹사이트에서 자신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일을 교회사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설명했다. 한때 장로교인이었던 어떤 이는 ‘교제로의 소명’(Called to Communion)에서 자신이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된 일을 ‘정통 기독교’로 입문하는 과정으로 표현했다. 또 영국 성공회의 신자였던 한 사람은 ‘정교회로의 여정’(Journey to Orthodoxy)에서 동방 정교회의 예배 형식을 통해 사도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 얼마나 복된지를 묘사했다.개신교 진영 내부에서도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교파(가령 중도파에 해당하는 영국 성공회)로 이동하거나 예배와 영성에 있어 더욱 전통적인 형식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나보다 젊은 개신교 친구들도 대부분이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를 신앙 서적으로 애독하지만, 존 엘드리지(John Eldredge)의 책은 보려 하지 않는다. 찬송가 작사가 늘어나는가 하면, 많은 복음주의자들도 전통적인 형식을 강조하는 예배 달력(the liturgical calendar)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이러한 흐름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던 세대들의 정처 없는 삶과 불안감이 주된 요소라고 생각한다. 현세대의 한 가운데에는 깊은 허무감, 고립감, 단절에 따른 불안감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고전적이고 장엄한 것에 대해, 초월적이고 전통적인 것에 대해, 그리고 안정적이고 견고한 것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을 품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복음주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올해 스물 아홉 살인 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겪는 방향 상실, 다시 말해, 인생을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이 시대의 방황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기 위해 복음주의를 포기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역사적 뿌리에 대한 목마름은 개신교와 복음주의에서도 충분히 만족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가톨릭(Catholic) 신자가 되지 않고도 공교회적(catholic) 신자가 될 수 있고, 또한 정교회(Orthodox) 신자가 되지 않고도 정통적인(orthodox) 신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한 복음중심적 사역’(gospel-centered ministry for the next generation)을 추진할 때, ‘복음적인’ 신앙과 ‘역사적인’ 신앙, 혹은 ‘복음중심적’ 사역과 ‘역사중심적’ 사역을 함께 추구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복음중심성(gospel-centeredness)은 그 자체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복음주의자들과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사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사도 요한과 마틴 루터 사이의 교회 역사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는가?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은 마치 교회사의 중요한 내용들이 1세기에서 갑자기 16세기로 건너뛰며 전개된 것처럼, 그 중간의 역사를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우리는 어거스틴(특히 그의 ‘고백록’)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일찍이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둘러싼 주요한 논쟁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일부 용감한 순교자들이 그 논쟁들 배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설교나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의 시를 감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우리의 전통이 지난 2 천 년에 걸친 견고한 역사라기보다, (몇몇 선구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의) 약 5백 년 정도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에 친숙하지 않은 시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9세기에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언어가 아니라 실재하는) 복음중심성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을까? 오늘날 우리가 지지하는 목회 방식은 교회사 전체와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까?오늘날 개신교인들이 이런 질문들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경향은 초기 종교개혁자들이나 개신교 진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지 재창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참된 복음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일이 결코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루터나 투레틴처럼) 심지어 로마 가톨릭 신학에 대해 가장 공격적이었던 비판가들조차 하나님은 거대한 부패와 타락의 시대에도 항상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셨음을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반종교개혁(the Counter-Reformation) 신조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어거스틴과 교부들에게 호소했을 때, 칼빈은 “누가 어거스틴과 교부들에 대해 신경이나 쓰는가?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종교개혁 신학과 교부 신학 사이의 연속성을 수립하기 위해 교부들을 열심히 연구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모토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임을 의미하지, 다른 것들이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다.가족 앨범나는 개신교인으로서 종교개혁 신학이 복음을 수호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건실한 개신교인으로서 중세 기독교의 좋은 가르침을 배우는 일 역시 가능하다고 믿는다. 교회는 성곽들과 성당, 수도사와 수도원, 활과 창,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시대 동안 완전히 침체되어 있다가, 루터의 95개조 논제와 함께 갑자기 재부상한 것이 아니다. 까에드몽(Caedmon)과 샤를마뉴(Charlemagne) 및 초서(Chaucer)의 바로 곁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견고하고 안정된 기독교의 줄기가 존재한다. 수많은 전진과 후퇴, 부패와 개혁의 역사 속에서도 예수님은 항상 교회를 세워 오셨기 때문에(마 16:18; 사 42:4), 우리는 중세 신학으로부터도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의 가르침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기독교 후기 시대, 곧 방향을 잃고 헤매는 문화적 상황 속에서 좋은 목회 자료로 쓰일 수 있다.물론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프로테스탄트의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는 위험한 일도 발생할 수 있다. 또 한편, 특정 교단의 가르침에만 고립되면 전체적인 기독교 전통과의 연결점을 상실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결국 오늘날 개신교인들에게는 균형 있는 역사적 정체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불연속적인 부분을 인식하고 겹치는 부분들은 장려하면서, 최근의 5백 년과 그 이전의 1천 5백 년 양자에 모두 연결되어야 한다. 교부 시대의 어느 아프리카 신자가 한 말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나는 기독교인이며 기독교에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이질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말이 종교개혁 이전 교회사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를 정확히 집어 준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받은 유산과 정체성의 일부이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는 가족 사진들이 정리된 앨범이다. 가족 앨범에는 다양한 사진들이 존재한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친척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삼촌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혹 결점과 흠, 또는 다른 문제들이 있더라도 나의 가족은 여전히 나의 가족이다. 나 자신을 그로부터 끊어내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종교개혁 이전의 역사에 대해 인식하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마크 놀(Mark Noll)의 ‘전환점: 기독교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들’(Turning Points: Decisive Moments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이라는 책의 첫 여섯 장이 2차 자료로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세 개의 1차 자료들을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 작품들은 모두 오늘날 개신교인들에게 널리 읽힐 만한 가치가 있는 고전적인 신학 자료들이다.1. 보에티우스(Boethius)의 ‘철학의 위안’(The Consolation of Philosophy)이 책은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책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거의 잊혀졌다. 이에 대해 C. 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각에 약 2백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 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이 책에 맛을 들이는 것은 중세 시대에 동화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보에티우스가 524년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운문과 산문의 교차 형식으로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고통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주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5권에서는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고전적 난제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 논의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2.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의 ‘목회지침서’(The Book of Pastoral Book)칼빈은 이 책의 저자인 그레고리 대제(약 540-604년)를 본받을 만한 마지막 교황이라고 불렀다. 이 책은 목회신학의 고전으로서 모든 목회자들이 일독할 필요가 있다. 그레고리 대제의 주장에 따르면, 목회는 내면적 특성과 외면적 특성, 즉 이론과 실천, 명상과 활동, 금욕과 행정, 초월적 거룩함과 세속적 지혜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요구한다. 이런 면에서 그의 글은 한 영역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강한 목회자들에게 유익한 일깨움을 준다. 이 책의 좋은 번역본은 초기 기독교 사상을 접하는 데 훌륭한 자료 역할을 하는 블라디미르신학교의 교부학 시리즈(Popular Patristics Series)에서 찾아볼 수 있다.3. 안셈(Anselm)의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안셈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기 위해 ‘존재론적 증명’을 제안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 책에 담긴 풍부한 신학과 열정적인 기도는 본 작품을 매우 유익한 읽을거리로 만든다. 나의 박사 학위 연구는 24-25장에서 안셈이 말한 천국 교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나의 기쁨과 놀라움이 바로 이 글을 쓰게 된 주요 동기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끝으로,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 작품들을 평가절하하는 이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잘 번역된 프로슬로기온을 찾아서 “들고 읽어라!”(tolle le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earching for Gospel-Centered Theology Before the Reformation번역: 주영식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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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개신교
복음주의
마크놀
순전한기독교
보에티우스
그레고리대제
진정한 개혁
by Burk Parsons
2018-11-29
각성(Awakening)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우리를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첫걸음이다. 각성은 주권적이고 은혜로운 하나님이 행하시는 강력한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울 때는, 단순히 잠에서 깨우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깨우신다. 각성은 중생과 부흥 및 개혁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영광스러운 일이다.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울 때에는 먼저 마음을 되살리고 거듭남의 선물을 주어서 결국 우리가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아 있으라!”라고 말씀하신다(겔 16:6). 그러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의 영혼을 정복하고 설득하신다. 성령은 완고하고 자기를 신뢰하는 돌 같은 우리의 마음을 뜯어내고 새롭게 하여 살아 있는 마음으로 바꾸신다. 이 새 마음은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는 마음이고, 그 아버지의 뜻에 부드럽게 반응하려는 마음이며,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사랑의 노예가 된 마음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일깨울 때는, 단일한 영혼의 부흥이든, 가정의 부흥이든, 공동체의 부흥이든, 아니면 어느 민족의 부흥이든 항상 부흥의 결과가 따라온다.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킬 때,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는 깊은 회개를 하도록 만들어서 믿음과 회개 및 순종의 삶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일깨울 때, 그분은 참되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개혁, 곧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개혁을 일으키신다. 그러나 우리는 각성을 계획할 수 없으며, 또한 각성을 일으키는 피상적이고 정형화된 계획을 세우려는 시도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각성은 오직 하나님이 그 일을 작정하실 때에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부흥은 결코 광고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스스로를 광고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각성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원하실 때,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게, 그 선한 뜻에 따라 각성을 일으키신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은 각성을 작정하는 것처럼, 각성의 방편도 정하신다. 하나님은 만물의 목적을 주권적으로 작정할 뿐 아니라, 모든 목적의 수단까지도 정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우고자 정하신 방편들은 정기적인 주일 예배, 그리고 매일의 은혜 가운데 우리의 성장에 필요한 통상적인 수단들을 가리킨다. 즉,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세례와 성찬으로 행해지는 성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통상적인 은혜의 방편들이다. 이는 성령이 참된 회심, 참된 부흥, 참된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를 각성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자신의 계획과 전략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과 바로 그 통상적인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 발현된다. 이때 우리는 코람 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그 얼굴 빛이 우리에게 비췬다는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적인 지혜를 따라 그분이 기뻐하는 일을 정확하게 행하실 것을 신뢰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rue Reformation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역사
종교개혁
진정한개혁
부흥
각성
당신이 꿈꾸던 대로 교회가 개척되지 않을 때
by Noel Heikkinen
2018-11-28
교회 개척은 당신의 영혼을 무척 힘들게 할 수 있다. 물론 지구상에는 물리적으로 더 위험한 직업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순전히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교회 개척’의 위험성을 능가하는 직업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다른 손쉬운 일들을 그만두고 교회 개척으로 뛰어들고자 한다면, 먼저 무슨 상황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교회를 개척한다.1. 신앙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기 위해2. 자신이 사는 동네, 도시, 그리고 이웃이 활력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보기 위해3. 자신의 교회로부터 새로운 교회가 계속해서 세워져 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이러한 목표들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가슴을 설레게 한다. 반면, 이를 성취하는 일은 특히 이제 출발한 교회로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진행된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기에 나는 최근 한 교회 개척자가 보낸 짧은 이메일의 내용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척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여기서 나를 구해주기를 원합니다.”좀처럼 잊을 수 없는 이 문장을 통해 교회 개척이라는 사역이 열정적이고 경건한 사람에게도 무척 고되며 일상적인 지루함마저 안겨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전의 수많은 교회개척자들이 그러하였듯이, 그는 새로운 교회를 향해 전력 질주했지만 정작 지속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복음 사역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힘들게 배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 교회에 오도록 초청받은 사람들조차 의심의 눈초리로 목회자를 바라보게 된다.이처럼 교회 개척자가 어렵고 느리게만 진행되는 상황에 맞닥뜨릴 때, 그 마음에 숨겨진 우상들이 쉽게 드러날 수 있다. 심지어 거룩한 야망을 통해서도 숨은 우상들이 드러날 수 있다.변함없는 구세주당신이 지친 사람들을 향해 매주 설교하는 바로 그 복음은 성도들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은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하나만 상기해 보자. “예수님은 당신이 실망하는 그 순간에도 당신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신다.”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실망시키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곧 세상을 떠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 없이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버거운 현실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족을 잃게 되고 회당에서도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더욱이,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해 주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슬퍼하셨다. 이는 낯설고도 무서운 현실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우리는 예수님이 여기서 자신의 죽음, 장사, 부활, 승천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음을 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이 약속은 사도들이 개척한 그 시대의 교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2천 년의 시간이 지나 오늘의 우리가 개척하는 교회에도 동일하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힘들 것이다, 그리고 슬픔이 따라올 것이다슬픔은 이 세상의 구조에 얽혀 있으며, 교회 개척도 여기에 속한다. 교회 개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계획들은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은 당신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 줄 것이다. 당신의 교회는 본인이 생각했던 모습이 아닐 수 있고, 아마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더욱 의미 있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예수님의 말씀대로 당신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할 것이며,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는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진실이다. 그 기쁨은 누군가가 빼앗아 갈 수 없는 참되고 지속적인 경험일 것이다.그러나 교회 개척의 과정에는 기쁨과 동시에 슬픔을 느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기뻐함과 동시에 목회에 필요한 어려운 결정도 내려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만약 당신이 현재 처한 상황 안에서 영적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면, 당신의 삶은 끝없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수 있다.확실한 희망예수님은 이 모든 일이 우리의 현실임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 특히 그분 자신을 세상에 알리려는 우리의 노력들이 환난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임을 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난 중에서도 평화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평화가 있다. 평화는 교회 개척이 가져올 폭풍 속을 뚫고 지나간다.교회 개척의 목표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분명 환난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낙심하지 말라.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교회를 개척한다. 우리는 환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에 거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를 얻게 되기를 소망한다.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잘 지켜야 한다. 교회 개척은 복된 일이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잘못된 경우에는, 교회 개척을 통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이 세워질 수도 있다.교회 개척이 당신에게 예수님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기 시작한다면, 일상은 곧 서서히 진행되는 죽음이 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당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면, 예배당의 빈 의자들은 점점 당신의 영혼에 상처가 되고 마음 속에서는 쓴 뿌리가 자랄 것이다.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지금도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절대 홀로 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분명 당신의 교회 개척에도 그분이 함께 하실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Your Church Isn’t What You Dreamed번역: 주영식
교회
교회개척
영혼
신앙
구세주
확실한희망
그리스도
하나님
기쁨
목표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상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by Michael Kruger
2018-11-26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여러 측면들을 이상하거나 불쾌하게 바라보는 문화에서 살아간다면 기분이 어떨까? 단절감이나 좌절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운이 빠질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처럼 고립되거나 홀로 있다고 느끼는 크리스천이라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현재 당신이 겪고 있는 상황은 과거부터 존재해 온 것이다. 처음부터 크리스천은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존재였다.특히 2세기 기독교의 네 가지 특징인 예배, 교리, 행위, 저술은 로마인들에게 비록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꽤 독특하게 여겨졌다. 이 네 가지 특징은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배척하는 자들로부터 눈총을 받는다.1. 기독교 예배초대교회 예배의 근본적인 성격은 ‘배타성’(exclusivity)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예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었다. 다른 어떤 종교적 대상도 기독교 예배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성도들은 오직 왕이신 예수님께만 전적으로 헌신하는 예배를 드렸다.로마인들은 국교 이외의 사적인 종교 의식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당시의 로마 정부는 종교를 전혀 개인의 영역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제국의 성공과 번영을 지켜 주었던 로마의 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은 그 당시의 시민으로서 중요한 의무였다. 신들에게 경배하지 않는 일은 사회적으로 무례한 행위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신들을 불쾌하게 만들어 국가를 위기에 빠트릴 위험까지 있다고 판단되었다.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여러 신을 섬기는 당시 로마의 종교 의식을 거부하게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동료들의 안녕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s)에 따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간을 증오하는 자들’이라고 불렸다. 그 결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주 심각한 박해로 고통을 받았다.2. 기독교 교리정치적 박해 외에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상당한 ‘지성적 박해’(intellectual persecution)를 받았다. (특히 성육신 개념과 같은) 기독교 교리는 우습고 어리석은 사상으로 취급받았으며, 로마의 지식인들에게는 논할 가치가 없는 내용으로 간주되었다.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예배하는 행위는 로마인들의 눈에 극도로 심각한 정신 이상적인 행동이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수치와 거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왜 굳이 그런 모욕적인 고통에 처한 사람을 따라야 하는가?따라서, 루키아노스, 갈레노스, 프론토, 켈수스와 같은 사람들은 이 ‘새로운’ 종교를 향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비단 십자가에 달렸던 자만이 아니라, 그 가르침까지도 조롱했다.3. 기독교 행위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의 내용만이 아니라 ‘행동하는 방식’(how they behaved) 때문에도 로마인들에게 배타적으로 여겨졌다. 특히 그들의 독특한 성 윤리는 당시 문화 속에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로마인에게는 성적 파트너를 여러 명 취하고 신전 창녀들과 관계를 맺는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관습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예를 들어, 터툴리안은 당시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관대하며 자신의 소유를 서로 나누는지를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의 합법성을 변호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온 마음으로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이 땅의 재산을 서로 나눕니다.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지만, 아내만은 아닙니다.”그만큼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사람들이 배우자를 공유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이상한 관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적 순결에 헌신한 다른 예들은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Epistle to Diognetus), ‘아리스티데스의 변증’(Apology of Aristides), ‘미누키우스 펠릭스의 변증’(Apology of Minucius Felix)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4. 기독교 저술초대교회 성도들은 성경이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지위 때문에 로마인들에게 특이한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에는 성경 중심적 종교가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2세기에는 이러한 특징이 기독교를 유별난 종교로 보이게 만들었다. 고대의 종교들은 일반적으로 글로 기록된 문헌과 그렇게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따라서 기독교는 로마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기독교가 정확히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분명히 로마인들의 눈에 그 종교는 낯설어 보였다. 실제로 ‘책을 좋아하는’ 특성 때문에 기독교는 철학에 가까워 보였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다른 학파처럼 학문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했다.고유성을 신실하게 지키라이처럼 배타적 예배, 논쟁적 교리, 도덕적 행동, 그리고 책에 대한 집중은 처음부터 기독교를 이상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이 요소들은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핵심적으로 보여준다.우리는 2세기 성도들의 모습을 보며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약하고, 어리고, 박해 받던 교회가 살아 남았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제국 전체로, 더 나아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이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기독교의 고유성을 지키는 데 신실했다.만약 오늘날 우리도 그 이질적인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신실하다면, 초대교회가 이룬 것과 동일한 소망을 품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Early Christians Were Odd, Too번역: 이주일
역사
초대교회
성도
크리스천
문화
예배
교리
고유성
정체성
특성
노래를 못하면 어쩌죠?
by Keith Getty & Kristyn Getty
2018-11-22
우리는 “저는 노래를 못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이는 “노래하려 할 때 제가 원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아요.”라는 말이다.어쩌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당신일 수도 있다. 당신은 어릴 때 노래하는 대신 입만 움직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학교나 교회 합창단원은 당신이 가진 은사와는 그다지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다.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 있다면 당신은 노래할 수 있다. 하나님은 노래하도록 당신을 설계하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노래를 잘 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하나님은 정확한 음정보다 진심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으시는 분이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크리스천의 노래는 입술이 아닌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엡 5:19).하나님은 모든 목소리를 소중히 여기신다나의 딸들이 함께 노래할 때, 첫째가 둘째보다 자신감에 있게 노래하고, 둘째는 막내보다 음정이 더 정확하다. 이런 현상은 이들이 자라면서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요점은 다음과 같다. 부모의 귀에는 자녀들의 모든 목소리가 중요하고 소중하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역시 우리가 노래한다는 사실 자체와 우리가 무엇을 노래하는지에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신다. 교회에 전문성과 실력을 갖춘 합창단원들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의 진정한 합창단은 회중이다. 진정한 합창단은 심사가 필요치 않다. 모든 성도가 참여할 수 있고 또 참여해야만 한다.이러한 회중 합창단의 아름다움은 찬양으로 우리 목소리와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데 있다. 진리를 함께 노래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이다.나는 얼마 전에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국 선교사를 만났다. 우리는 함께 찬양을 불렀다. 그는 찬양을 마친 뒤, 성도들과 함께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에 대하여 말했다. 그가 살고 있는 중국에서는 찬양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 다시 노래하기를 온 마음으로 얼마나 기다렸던지요!”라고 감격하며 말했다. 당신의 목소리가 ‘전문가’ 수준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고백자’ 수준에는 속할 것이다.가진 것으로 최대한 노력하라그러나 역시, 우리가 연습할수록 더 잘하게 된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걷기를 배우는 일에는 시간이 들고, 걷기 위해서는 먼저 발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하기를 배우는 일에는 시간이 들고,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입을 열고 소리를 내야 한다. 음정에 맞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배우려면 시간이 들고, 우리는 노래를 연습함으로써 더 잘할 수 있게 된다.만약 자신의 음정이 한계에 도달해 노래에 조금 못 미치는 상태라면, 약간의 유머 감각이 유용한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모든 음을 조금씩 틀리게 부르는 특별한 은사를 갖고 있다(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거나 칭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격려하고 찬양하기 위해 노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틀린 음을 웃어 넘기고 계속 노래할 수 있다.우리 밴드의 일원인 자크 와이트(Zach White)는 자기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들려준 찬양에 대한 영감을 우리와 나누었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열정적으로 회중과 함께 노래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는 사실 세 음만 낼 수 있었다.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참 적은 음만 낼 수 있던 것이다(자크 와이트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베리 와이트는 유명한 가수이다-역주). 그 세 음 마저도 음정이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회중 찬양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크리스틴(Kristyn)의 노래를 14년 동안 가르친 킴 우드 샌더스키(Kim Wood Sandusky)는 여러 장르의 가수를 수십 년 가르친 전문가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는 모두 가수다. 우리 중 누군가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할 은사를 가졌지만, 누군가는 자기 영혼으로 노래할 은사를 가졌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귀에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는 가수이다.”건강상 또는 선천적 문제가 있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만약 말할 수 없어 손 또는 하나님이 주신 다른 방법으로 노래할 수도 있다. 이는 모든 입술이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는 그날까지 한마음이 되어 당신에게 주어진 방법으로 공동체를 축복하며 노래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회중이 노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수화 사역에 감사를 표한다.교회여, 우리 함께 노래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If I Can’t Sing?번역: 하늘샘
영성
예배
노래
목소리
가진것
최대한
노력
하나님
소중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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