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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까?
by 박혜영
2023-03-11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보기도 합니다. 평소 ‘기독교식’으로만 생각하느라 미처 바라보지 못한 것을 ‘외부인’들의 도움으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끼리, 우리만 아는 용어로 계속 말하다 보면 진부함에 갇혀 더 이상 새롭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인생과 자연을 진지하게 보는 ‘외부인’들의 시선이 도움이 됩니다.물론 늘 ‘외부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기독교 진리를 새롭게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독교 진리를 보던 익숙한 시선 말고, 좀 더 공감의 폭이 넓은 시선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진리가 우리끼리만 만족하는 그런 게 아니라 보편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겁니다. 당연합니다. 진리라면 우리끼리만 쓰는 용어에 갇힐 수 없습니다. 만약 기독교 안에만 갇혀 있는 진리라면, 그건 진리라기보다는 종교의 독단적인 주장에 가까울 겁니다. 독단적인 주장은 금방 재미없어집니다.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그랬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한 대사가 인상에 남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영화에 나오는 사진작가의 말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받기 위해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자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평범해 보입니다. 그러다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아, 조용히, 기다릴 때” 비로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이 비밀을 모르는 월터는 평범하고 소심합니다. 지출이 좀 과하다 싶으면, 가계부 같은 걸 쓰면서 감당할 만한지 살펴봅니다. 누가 회사원 아니랄까 봐 옷도 꼭 그렇게 입고 다닙니다. 인터넷 관계망의 자기소개서에 빈칸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이력이 없는 겁니다. 이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월터는 자주 공상에 빠집니다. 영웅이 되어 극적인 활약을 하거나 자기를 무시하는 상사에게 당당하게 대거리하는 공상에 빠집니다. 이런 월터에게 사진작가는 “안쪽을 보라”는 말을 남기는데,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모습, 곧 ‘월터의 비밀스러운 삶’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월터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나중에 비로소 알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특별한 주인공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온 세계 사람들에게 그런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저 유명한 잡지 ‘라이프’(LIFE)가 폐간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름다움 앞에 앉아, 조용히, 기다릴 줄 아는 수많은 작가의 사진을 이젠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지요.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까요? ‘자리를 잡고, 조용히,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이미 성경에 들어 있습니다. 다만, 관심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분주한 사람 눈에는 안 보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리를 잡고, 조용히, 기다리며’ 성경을 읽다 보면 보이고, 그럼 음미하게 되며, 그럼 변화하게 된다고 존 파이퍼는 그의 초자연적 성경 읽기에서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용히 숨어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평범한 일상이나 자연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에 차이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외부인’들은 이것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성경만이 알려줍니다. “내가 오랫동안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숨이 차서 헐떡이는, 해산하는 여인과 같이 부르짖겠다”(사 42:14).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거룩한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남용하면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니까요.
아름다움
하나님의아름다움
성경읽기
‘문제 청소년’은 없다
by 이재훈
2023-03-10
우정을 쌓아야 할 아이들이 “왕따”와 “학폭”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로 뒤틀려버린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청소년 폭력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청소년의 아픔이 극에 달했다는 말이다. 사회는 비행 청소년, 나쁜 아이라 낙인찍지만, 그 이전에 그들은 아픈 아이들이다. 무엇이 겨우 10여 년밖에 살지 않은 우리 청소년들을 이렇게 아프게 만든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무섭게 바꾸어버린 것일까?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아니다. 여기서 오는 일탈도 일부 있겠지만, 근본 이유는 분명 아니다. 결국 어른들이 그들을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청소년에게는 공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끓어오르는 반항심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길은 공감이 유일하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공감해 주는 누군가가 있는 청소년이라면 어려움이 변하여 내적 능력이 되고 위기가 기회가 된다.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부모에게서 자란 자녀가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기란 불가능하다. 문제 있는 자녀는 없다. 문제 있는 부모가 있을 뿐이다. 문제 청소년은 없다. 문제 어른이 있을 뿐이다. 사람의 뇌는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만 관찰하고 느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뇌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도 마치 거울을 보듯이 느끼고 반응하는 능력이 있다. ‘거울 뉴런’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공감 세포를 우리의 뇌에 만들어 넣어 주신 것이다. 이 세포는 쓰면 쓸수록 더욱 촘촘하고 정교해진다. 따라서 인생 경험이 늘어날수록 공감 능력도 더욱 풍부해져야 정상이다. 나이 먹어 갈수록 상처를 주고받고, 충돌하고 갈등하는 일은 줄어들어야 맞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건 공감 능력을 유지해 주는 세포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능력이 지극히 떨어진 것이다. 엄마는 내 아이의 마음 상태에 정확하게 조율되어 있다. 아이는 엄마와의 조율을 통해서 자기 마음을 읽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과 조율하는 능력을 기른다. 어린 시절 누군가로부터 이런 공감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정서를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정서 공명’이라는 작용이 있다.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나도 함께 웃게 되고, 슬퍼서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보면 함께 슬퍼지는 작용이다. 한 사람의 감정이 다른 사람 속에도 똑같이 일어나는 것이 마치 물리학에서의 공명 작용과 비슷하다 보니 정서 공명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런 정서 공명이 잘 훈련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친구를 ‘나의 슬픔을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1996년에 미국 콜로라도에서 아메리카 인디언 남자들이 모여서 그들의 공동체 철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공동체 안에서는 한 사람의 영광이 곧 모두의 영광이고, 한 사람의 고통이 곧 모두의 고통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자연과 양심을 통해 얻은 관계에 대한 놀라운 지혜가 있었다.이 땅의 청소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공감하고 정서가 공명하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 친구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일이다. 입시가 전부인 교육에서는 결코 이런 능력은 계발될 수 없다. 우리 청소년의 아픔은 교육의 자리를 대학 입시에 내어 주었을 때 시작되었다. 입시마저도 친구들이 서로 도우며 준비하는 그런 교육은 불가능한 것일까? 공감 능력을 배양하면서 공부하는 학교는 지나친 이상일까? 내 자녀와 주변 청소년, 그들 모두의 아픔을 지적하기보다 먼저 공감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교육의 목표를 학업의 성취만이 아니라 공감 능력의 발달에 둘 때, 비로소 이 땅의 청소년은 살아나게 될 것이다.
청소년
문제청소년
문제아
학교교육
공감
정서공명
나의 아름다운 습관 만들기
‘거룩에 다가가는 습관’ 기르기 연습
by 전재훈
2023-03-09
‘거룩에 다가가는 습관’ 기르기 연습· 나의 아름다운 습관 만들기· 마음에서 기억나도록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청년부 새내기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청년부 부장 집사였고 형은 총무였다. 주일 저녁 집에서 밥을 먹는데 아버지가 형에게 한소리 하셨다. “청년부는 임원회를 했으면 결과를 부장 집사인 내게 알려줘야 할 거 아냐?" 아버지의 느닷없는 호통에 형은 난감했다. 자기는 회장이 아니라 총무였을뿐더러 청년부가 어떤 일을 하건 부장님에게 보고해야 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대 부장님들은 한번도 청년부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다들 그냥 이름뿐인 부장이었고, 시각장애인교회의 특성상 비장애인이 대부분이다시피 한 청년부 활동에 시각장애인 부장 집사님이 해 주실 일은 거의 없었다. 가장 적극적인 참여라 해봐야 임원들 밥 사 먹으라고 돈이나 주는 게 전부였다. “버릇이 안 돼 있어서 그래요.” 내 딴에는 형을 편들려고 꺼넨 말이었는데, ‘습관’이라고 해야 할 말을 ‘버릇’이라고 해 버렸다. 돕는다는 것이 도리어 같이 비난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발끈한 형은 숟가락으로 내 머리를 쳤다. 습관과 버릇은 같은 뜻의 말이다. 다만 습관은 한자어이고 버릇은 순우리말이라는 차이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습관과 버릇은 다르게 쓰인다. 주로 바람직하지 못한 걸 가리킬 때 버릇을 쓴다. 내가 다리를 떠는 것은 버릇이고,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은 습관이다. 하루의 삶 속에서 습관과 버릇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가는 것이 습관일지 버릇일지 몰라도 매일 하고 있다. 씻을 때도 먼저 물을 온수로 틀어놓고 칫솔에 치약을 묻힌다. 냉기가 사라졌다 싶을 때 입을 헹군다. 컵에 물을 받아 머리를 적시고 세수를 한다. 이런 행동은 아무런 고민 없이 물 흐르듯 이뤄진다. 이것은 습관일까 버릇일까? 옷 입을 때도 자신만의 순서가 있고 밥 먹을 때도 숟가락을 먼저 집든지 젓가락을 집든지 별생각 없이 같은 순서를 반복한다. 출근하는 과정도, 사무실에 도착해서 하는 행동도 매일 복사-붙여넣기의 반복이다. 매사에 깊이 생각하고 하는 행동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이런 반복되는 일상에 의도적으로 습관을 만들어야 하는 일이 있다. 당뇨병에 걸린 후로 약을 먹는 일에 습관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약을 건너뛰거나 두 번 먹는 일이 생기곤 한다. 소화기관이 별로 좋은 않은 내가 밥 먹기 전에 새우젓 하나 집어 먹는 습관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런 일은 의도적으로 훈련을 거쳐 습관으로 이어지게 한 것이다. 습관을 만들기는 어려워도 한 번 습관으로 만들어지면 그다음부터는 매우 쉽다. 아침에 출근하면 커피를 내리고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과 뉴스를 검색하고 그날 일과를 체크한다. 그냥 노력하지 않고도 습관이 되었다. 삶이 습관을 만들어 준 셈이다. 하지만 컴퓨터를 켜기 전에 먼저 묵상하는 일은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매일 아침 소셜 미디어로 말씀을 보내주는 지인이 여럿 있다. 그중 한 분은 시를 보낸다. 놀라운 습관을 지닌 열심 있는 지인들 덕에 말씀을 고르는 수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쁜 사진과 함께 보내주는 말씀에 내 묵상을 담아 답장하는 일은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잊어버릴 때도 많고 “귀차니즘”에 무시하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컴퓨터를 켜기 전에 말씀 묵상이 와 있지 않으면 내 루틴이 방해받은 것처럼 서운해지기도 한다. 책을 가까이하려는 노력 덕분에 내 주변에는 늘 책이 넘친다. 읽어야 할 책, 발제나 강의를 위한 책이 책상을 점령하고 있다. 아직 읽지 못한 책은 책꽂이에 꽂지 않는다. 한 번 책꽂이에 들어가면 다시 꺼내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매일 읽어야 하는 책들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책상에 강림한다. 이들에게 빨리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서라도 책과의 농밀한 만남을 중요한 일과로 삼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사무실에 앉으면 일반 서적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소설이나 에세이, 혹은 심리학이나 철학책에 소홀해지곤 한다. 이유를 딱히 꼽을 수는 없지만, 사무실이라는 공간은 신학 서적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거나 강의와 발제를 위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크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의도적으로 만든 습관이 카페에 가서 책 읽기이다.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주인이나 손님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카페에서는 신학 서적보다 일반 서적이 더 잘 읽힌다. 커피가 주는 중독성 탓인지 인문학 서적이 주는 기쁨 탓인지 여러 날 카페에 가서 책을 읽지 못하면 몸이 달아오른다. 약속이 있으면 두 시간 정도 일찍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집에 들어가기 전 동네 카페에서 책을 읽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과 함께 책을 읽는 것이다. 책 한 권을 보는데 대략 두세 시간이면 족하다. 두꺼운 책은 파트별로 나눠서 3일짜리 책이라는 느낌으로 접근한다. 이런 습관을 들인 덕분에 베스트셀러나 고전 필독서, 심리학이나 철학 서적을 꾸준히 읽을 수 있다. 목사가 직업이면 신학 서적은 물론이려니와 꾸준히 인문학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시대사조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수고 없이 신학을 시대에 녹여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내게 주어진 은혜도 성도의 삶에 상황화하지 못하면 전달은 요원할 뿐이고, 성도의 삶과 동떨어진 언어는 외국어나 다름없다. 책과 가까이하는 노력도 필요하고 책을 읽는 습관도 필요한 직업이 목사이기도 하지만, 감사하게도 내게는 활자중독이 있어서 책을 안 읽고 하루를 버티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러나 일반 도서를 읽고 이해하려는 일은 의도적인 수고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나는 그 방법을 찾았고 지금도 카페에 앉아 책 읽다 말고 이 습관을 나누기 위해 글까지 쓰고 있다. 카페가 주는 물리적 환경 덕분인지 커피 향 가득하고 사람들의 대화가 나지막한 소음을 만들어 내는 이곳에서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일은 꽤 낭만적인 느낌까지도 선사한다. 아직 책 읽는 습관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혼자 가까운 카페에 가서 책을 펼치고 앉아 우아하게 커피 한 잔 할 것을 권한다. 누군가에게 몰래 사진이 찍힌다면 이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리라.
습관
버릇
일상의영성
묵상
독서
게으름뱅이의 여덟 가지 특징
by Derek J. Brown
2023-03-07
지난 몇 년 동안 정기적으로 읽은 잠언은 당장 적용할 수 있는 큰 유익을 주는 습관으로 내게 자리 잡았다. 잠언을 통해서 나는 게으름뱅이를 만났다. 게으름뱅이에 관해서 잠언이 말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날 뿐 아니라, 게으름 피우고 싶은 내 속의 성향까지 깨닫게 된다.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이 사는 것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어라(잠 6:6).성령님은 종종 이런 실질적인 통찰을 사용해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게 하신다. 다음 여덟 가지는 게으름뱅이의 특징이다. 내 속에 숨은 게으름을 인식하고 회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경고: 진짜 게으름뱅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1. 게으름뱅이는 시작을 안 한다.게으름뱅이는 무엇보다 시작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다른 사람이 시켜야 간신히 시작하고(잠 6:9), 말만 많을 뿐 결과는 신통치 않다(잠 14:23). 훌륭한 계획 어쩌고저쩌고 떠들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을 힘들어한다. 쾌락과 오락에 정신이 팔려서 그럴 수도 있다. 또는 단지 더럽고 힘든 일을 하기 싫어서 그럴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게으름뱅이는 아예 일을 시작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서 제대로 된 성취를 기대하기란 힘들다. 2. 게으름뱅이는 끝을 맺지 못한다.우여곡절 끝에 시작한다고 해도 게으름뱅이는 여전히 게으름뱅이다. 게으름뱅이에게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도무지 일을 마치지 못한다는 것이다(잠 12:27; 19:24; 26:15). 비록 첫발을 떼었다고 하더라도, 어려움과 저항에 부딪히면 순식간에 모든 동기가 사라진다. 게으름뱅이는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소 상태로 후퇴한다. 책상 위에서 점점 쌓여가는 반쯤 읽은 책더미, 완성을 기다리는 각종 프로젝트, 친구나 가족에게 한 이행되지 않은 여러 약속, 마무리 짓지 못한 글쓰기, 그리고 2018년 1월 이후로 간 적 없는 헬스클럽 회원권 등을 바라보고 있는 게으름뱅이를 한번 상상해보라. 3. 게으름뱅이는 결코 힘든 일과 부딪히려고 하지 않는다. 게으름뱅이는 힘든 일을 거부한다. 게으름을 감추려고, “바깥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나가면 찢겨 죽는다”(잠 22:13) 같은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피난처로 숨어들어 간다. 어려운 결정 또 잠재적으로 힘든 대화에 직면하는 경우, 우유부단한 상태에 빠진 게으름뱅이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라도 오락으로 눈을 돌린다. 게으름뱅이에게는 넷플릭스 같은 게 아편의 역할을 한다. 4. 게으름뱅이는 초조하고 안달복달한다.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은 만들고 성취하고 또 창조하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게으름뱅이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애초에 설계한 방식과 반대로 사는 존재이다. 게으름뱅이가 끊임없이 안절부절하고 항상 근심에 가득 차 있는 건 그래서이다. 때때로 더 큰 생산성과 성취를 갈망하곤 하지만, 실행을 꺼리기 때문에 성취 없는 갈망 상태에 계속 머물 뿐이다(잠 13:4). 결국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게으름뱅이의 삶에서 언젠가는 심각한 파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잠 21:25-26).5. 게으름뱅이는 쉬지 않고 문제를 일으킨다.게으름뱅이의 삶은 항상 괴로움에 쌓여있다(잠 15:19). 제시간에 일을 마치지 못하다 보니 끊임없이 서두르기 마련이고, 주변 사람들 때문에 시간을 뺏긴다는 식으로 자주 짜증을 낸다.게으름뱅이는 재정의 어려움을 겪거나(잠 12:11; 19:15; 20:4; 21:5; 24:33-34), 가정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시간을 관리하고, 산만함을 피하고, 또 열심히 일할 능력이 없기에 직장을 구한다 해도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 청구서 지불과 차량 관리 같은 단순한 책임도 무시하기에 굳이 치를 필요 없는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영적 성장을 갈구하는 게으름뱅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규칙적인 성경 읽기, 기도, 신학 및 경건 서적 연구, 교회 헌신, 그리고 일관된 복음 속의 관계 유지와 같은 훈련은 게으른 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일이다. 6. 게으름뱅이는 타인에게 성가신 존재이다. 게으름뱅이는 열심히 일해서 기술을 발전시킬 마음이 없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게으른 사람은 부리는 사람에게,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다”(잠 10:26).생산력은 떨어지고, 집중하지 않고, 주변보다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게으름뱅이는 고용주를 미치게 만든다. 그래서 근면과 극기가 필요한 직장에서는 결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결국 게으름뱅이는 도둑이나 약탈자와 하나 다를 바 없다(잠 18:9).7. 게으름뱅이는 자신을 속인다.게으름뱅이의 목적은 단 하나, 자신을 섬기고 최대한 한가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려는 욕구이다. 따라서 그를 침대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게 하는 것은) 여간해서 가능하지 않다. 게으름뱅이의 자기기만이 드러나는 사례는 외부의 건전한 비판에 눈을 감은, 현실적 근거가 거의 없는 거창한 사업 제안을 떠벌리는 경우이다.게으름뱅이는 성실하게 일하는 습관을 통해 느리지만 꾸준히 부를 축적하는 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빨리 돈을 벌겠다는 비현실적인 꿈이다(잠 21:5). 입은 살아서 얼핏 듣기에 그럴듯한 영적 변명을 늘어놓는 게으름뱅이를 만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성경이 휴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둥, 구원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둥, “균형 잡힌 삶”이 필요하다는 둥, 성경이 부의 위험을 가르치고 있다는 둥. 어떤 경우든 게으름뱅이는 자신이 가장 똑똑하다는 확신에 찬 채 사람들과 대화한다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잠 26:16).8. 게으름뱅이는 결코 이끄는 사람이 될 수 없다.아쉽게도, 게으름에 찌든 게으름뱅이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결코 제대로 된 리더가 되지 못한다. 다른 어떤 자질 보다도 리더십에는 근면, 희생, 지속 능력, 고통 감수,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으름뱅이는 이런 리더의 특성을 멸시한다. 그러므로 게으름뱅이는 언제나 누군가의 지휘를 받으면서 일할 수밖에 없다.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게으른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잠 12:24).게으름뱅이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다.게으름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획과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소명에 역행하는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게으름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복음이 밝히 보여주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공로와 아무 상관 없이 거저 받는 구원이라는 복음은 이 짧은 지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거기에 더해서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도 부지런히 일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열정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술을 연마하도록 독려한다. 그래서 내가 우리의 왕과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고, 용감하게 어려운 일에 맞서서 완수하며, 게으름이라는 장애물을 피하도록 강권하신다. 원제: 8 Marks of a Sluggar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게으름
나태
게으름뱅이
‘하나님 카드’를 함부로 쓰지 말자
by Will Anderson
2023-03-05
“저 사람과 데이트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성령님이 나를 이 직업으로 이끄셨어요.”“하나님이 어젯밤 말씀하셨어요.”“하나님이 이런 생각을 주셨어요.”그리스도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이른바 “하나님 카드”(God card)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내린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결정의 순간을 놓고 볼 때, 그게 과연 나의 뜻이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어떤 영감이 작용한 건지 분명하게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게 과연 정당한 걸까, 아니면 지극히 인위적인 걸까?구체적인 성경 말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속삭임, 느낌, 충동, 즉흥적인 생각, 그리고 주장으로 바뀔 때, 대화는 엉망이 될 뿐 아니라 남용되기 쉬운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분별력 있는 신자라면 모든 암시를 무분별하게 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문화를 조장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검증해야 한다(살전 5:21). 성경이 검증하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가짜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하나님 카드가 잘못 쓰이는 네 가지 이유를 생각해보자.1. 고립코로나19가 하나 확실하게 가르쳐준 게 있다면, 교회 공동체로부터 고립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 나쁜 신학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혼자 있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쉽게 속고 방향 감각을 잃는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죄성이 불러일으킨 충동마저도 하나님의 인도로 착각하곤 한다. “고립이 불러일으킨 끔찍한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사례는 끔찍한 사회적 고립을 겪은 마빈 히메이어(Marvin Heemeyer)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TREAD이다. 그는 적대적인 이웃의 비즈니스를 파괴하기 위해 비밀리에 불도저를 장갑차로 바꾸는 데 몇 달을 보냈다. 그리고 미리 녹음한 선언문에서 파괴의 난동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TREAD 같은 사건을 단지 극적이고 예외적인 고립 사례로 치부하면 안 된다. 우리는 모두가 스크린을 눈앞에 끼고 사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실제로는 내가 나에게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어”라고 착각하는 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항상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책임을 다하며 산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나를 진짜로 아는 누군가의 조언 없이는 누구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감각을 잃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가서 하나님이 “너한테 그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주장하기 전에, 당신이 느끼는 바를 믿을 수 있는 다른 교인에게 먼저 이야기하라. 당신 생각에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느끼는 그것을 “제대로 검증”하기 전에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 운운하는 “하나님 카드”를 꺼내면 안 된다. 2. 습관성 어휘일부 기독교 교파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가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나를 이 가게에 오게 하신 것도, 이 자리에 주차하게 하신 것도, 저 사람에게 메모를 쓰게 하신 것도, 이 거리를 걷게 하신 것도, 그리고 팬케이크 대신 오늘 달걀을 주문하게 하신 것도 다 하나님이 인도하셨기 때문이란다. 하나님께서 5초마다 말씀하신다는 이런 식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이 약속하는 것은 지혜의 원리이다. 성경은 우리를 지혜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인도한다. 언젠가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의 권위 아래 살 때 하나님의 뜻은 애타게 길을 찾아 헤매는 미로라기보다는 즐기면서 탐험하는 정원과 비슷하다.” 모든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어”라고 끌어댈 필요가 없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그 대신 우리가 취할 행동은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앞에 놓고 용기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모든 변덕을 합리화하려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하나님의 입에 당신의 생각을 담는 위험한 일이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다. 행여라도 “하나님 카드”를 자주 이용한다면, 다음 두 가지 중 어느 쪽인지 생각해보라. 당신의 언어에서 제거해야 할 생각 없이 뱉는 습관성 용어인지 아니면 주님께 진짜 들은 메시지를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 3. 책임 회피때때로 반대하는 사람을 제압하기 위해서 하나님 카드를 쓰는 경우가 있다. 당신이 바라는 목표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내림으로써 상황에 따라서는 규칙을 바꾸거나 대다수의 반발까지도 무시할 수 있다.책임 회피를 위해서, 원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 또는 죄를 변명하기 위해서 하나님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라면, 그 사람이 그 카드를 포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런 사람에게 정면으로 대응한다면, 그는 이렇게 반발할지도 모른다. “아니,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간섭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내게 하신 말씀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맞냐 틀리냐를 따지는 겁니까?”이런 식의 반론은 건강한 공동체일수록 서로를 검증하고 바로잡는다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마 18:15-20).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그 음성의 진위를 분별 받아야 한다(행 9:26-28; 11:1-18).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인 접근, 또는 책임에 대한 면죄부 주장은 바른 기독교가 아니라 이단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다른 그리스도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하나님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라면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활용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다. 4. 실패가 두려워서수많은 선택이 주는 압박감과 과거의 실패가 주는 절망 속에서 사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승인”이라는 명확한 도장이 찍히지 않는 한 여간해서 선택하려고 하지 않는다. 망설이던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승인을 받으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인생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종 목표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보다는 어떤 결과를 맞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게 더 가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좋은 의도와 현명한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위험이나 실패에서 구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약점까지 활용해서 승리를 만들어내는 PR 요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좁은 길을 걷다 넘어지는 양과 함께하시는 분이다. 때로는 최악의 상황에 있는 양에게 가장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 선한 목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명확성, 신비함, 겸손나는 부주의하게 하나님 카드를 사용한 사람으로 인생을 마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그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또는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검증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완고하게 거부하는 사람으로도 살고 싶지 않다. 순수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짜도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대담함과 소심함이라는 양극화된 함정을 피하면서 하나님 카드에 현명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명확성과 신비와 겸손이라는 세 가지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명확성: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가장 분명한 계시이다. 우리 손에는 이미 많은 양의 귀중한 보석이 들려있다. 따라서 굳이 새로운 “영적 금맥”을 찾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신비: 하나님은 무한하고 우리는 유한하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을 인간의 사고 체계라는 한계 속에 넣으면 안 된다. 우리가 가진 인지적 한계의 벼랑에서 바라볼 때 하나님은 그랜드캐니언을 백만 배 합친 것보다 더 광대하시다. 선입관이라는 한계 속에서 사는 인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어떤 말을 해도 절대로 모순되지 않는다. 케네스 버딩(Kenneth Berding)은 성경 속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장 명확한 방식에서 가장 명확하지 않은 방식으로의 연속이라는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의 글은 전체를 다 읽을 가치가 있다). 다음은 그의 결론이다.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항상 특별한 인도를 경험할 거라는 성경의 약속은 없다. … 그렇더라도 진심으로 성경적인 결정을 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인도하실 수 있도록 공간을 허용해야 한다. 때로는 전혀 모호함이 없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러나 어떤 때에는 충동과 속삭임으로 때로는 재정립된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신비가 분명한 정의와 예측 가능성을 어렵게 만들지만, 성경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거나 인도하시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겸손하게 말해야 한다. 성경이 보여주는 사례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라는 식의 절대적 언어가 아니라 부드러운 고백이다. “성령과 우리는 … 더 이상 아무 무거운 짐도 여러분에게 지우지 않기로” (행 15:28).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약 4:13-15).우리가 서로 대화할 때도 “천천히 말하는 것”이 맞는다면,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신중해야 한다는 걸까? 원제: Be Slow to Pull the ‘God Car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뜻
하나님카드
고립
부자 아니면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세상에서
by 박혜영
2023-03-03
“어느 사람이든지 그 자체로써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양의 한 부분이어라. 만일에 흙덩어리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게 될지면, 유럽 땅은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만일에 모랫벌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며,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이어라.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란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애써 사람을 보내지는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므로.”17세기 영국 사람 존 던이 남긴 시입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17세기 영국의 마을에서는 누군가 죽으면 애도의 표시로 교회의 종(鐘)을 울렸다고 합니다. 국교회 예배 시간도 아니고, 특별히 울려야 할 시간도 아닌데, 뎅그렁뎅그렁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인간은 섬이 아니라’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만약 인간이 저마다 섬처럼 존재한다면, 저 종소리는 나랑 아무 상관 없지만, 인간이 대륙처럼 서로 연결되었다면, 내가 그만큼 감소하고 있다는 종소리이며, 결국에는 내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누구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종을 울렸는지 굳이 알아보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마을도 없고, 종소리도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관없는 옛날 표현이지만, ‘인간은 섬이 아니라’는 울림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무심한지…이 대륙에서 일어난 어떤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이 떠오릅니다. 아빠와 엄마가 어린 딸은 정신을 잃게 만들어 놓고, 가장 어두운 밤에, 밤보다 더 어두운 바닷속으로 그대로 차를 몰아 한참 지나 발견된 일 말입니다. 어떻게 젊은 부부가 그런 결정을 내리고 실행할 수 있었는지…. 바다보다 깊고 어두운 절망(絶望)에 빠졌기 때문일 겁니다. 사건도 많고, 사고도 많지만, 이런 일은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시대의 지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그들만의 잘못이요, 그들만의 절망일까요?보십시오. 화면을 열기만 하면 아무 데서나 나오는 유혹과 부추김이 무엇입니까? 부자가 되어야 사람이라는 광고 아닙니까? 교육방송을 보다가 우리는 다 부자가 될 권리가 있다고 유혹하는 광고까지 보았습니다. 실컷 교육과 교양으로 마음을 가다듬게 해놓고 그런 광고를 내보내고 있으니, 교육이든 교양이든 결국 부자가 못 되었으면 다 헛소리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종합편성채널이나 유튜브 채널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요즘은 직업이 무엇이든, 교수든 의사든 연구원이든, 모든 대화는 부동산, 주식, 코인 이야기로 수렴된다면서요? 누가 투자에 성공했다는 소리, 누구는 대박을 터뜨렸네, 누구는 40대인데도 직장에 다닐 필요 없는 자산가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있다는 그런 소문이 평범해 보이는 한 젊은 부부에게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열망을 얼마나 불어넣었겠습니까? 안정되게 산다는 사람들도 그러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불안과 초조는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그래서 자신들도 한 번 나서 보았는데, 갚을 수 없는 빚만 남았으니, 이제 자신들과 어린 딸에게 남은 인생이란 가난에 대한 천대뿐일 테고, 앞으로 산다는 건 사는 게 아닌 것처럼 보여, 그 어두운 바다를 향해 그대로 차를 몰았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자리는 아무 데도 없으며, 잡을 만한 누구의 손도 없다는 절망과 무력감에….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건 그 가족의 문제야’ 그렇게 잊고 만다면, 내가 사는 섬만 안전하면 된다는 식인데, 과연 그럴까요?이런 비극이 이 한 가족으로 그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이번엔 우리와 멀리 떨어진 대륙 저 끝에서 일어난 일 같지만, 계속 이렇게 침식당할 뿐이라면, 이런 비극의 소식이 점점 가까이서 들려올 텐데, 그러다가 교인 중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 알고 지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알지 못하고 지내는 일이 더 많아, 교회도 친구도 사회도 국가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그런 고립과 체념에 빠지는 교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투자니 성공이니 대박이니 이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런 열망을 품고 있다면 지금 중지하십시오. 아무렇지 않게 서로 나누는 그런 말이 이 사회를 부풀려놓고는 그냥 터지게 할 겁니다.
존던
절망
무력감
배우자와 잠자리하고 싶은 맘이 도무지 들지 않을 때
by Lauren Washer
2023-03-02
친구들과 하는 결혼 축하 파티가 끝날 무렵 한 여자가 나를 옆으로 부르더니 속삭였다. “한 가지 중요한 팁을 줄게. 남편하고 왠지 거리감을 느낄 때면 바로 깨달아야 해. 아, 우리가 섹스를 너무 오래 안 했구나…라고. 알겠지?” 섹스에 관해서 내가 원하지도 않은 조언을 할 정도로 그녀가 나를 편안하게 느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우리는 친한 친구가 전혀 아니었다. 사실 그 순간 나는 그 여자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남편과 내가 하루 이상 섹스를 하지 않고 지낼 리가 없었다. 1990년대에 교회에 다니는 수많은 소녀가 “진짜 사랑은 기다립니다”라는 구호에 동참하겠다며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첫날 밤까지 처녀로 남겠다고 결연하게 다짐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또한 섹스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섹스야말로 결혼 생활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토록 참고 기다려야 할 정도로 섹스가 가치 있다면, 섹스야말로 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한 게 아닐 리가 없었다. 나는 옳았고 또 틀렸다. 부부가 누리는 섹스는 참 좋은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에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무언가가 담겨있다. 하나님은 섹스를 좋은 것이라고 하셨는데, 왜 이토록 복잡한 걸까?어린 신부로서 나는 항상 기대한 만큼 섹스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남편은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서로가 다르게 품고 있는 성적 욕구, 그리고 쾌락의 기대 수준은 신혼 시절 때때로 긴장까지 불러왔다.결혼하고 사 년이 흐르면서 우리는 네 명의 아기를 낳았고, 섹스에 대한 욕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몸도 바뀌었고, 또 시간도 없었다. 무엇보다 항상 피곤했다. 그런 상황에서 섹스야말로 가장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변화에 나는 좌절하고 지쳐갔다. 아니 슬프기까지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혹시 섹스에 관해 조언을 얻을 수 있는 구절이 있는지를 찾기 시작했다. 수줍어하는 사춘기 소녀 또는 열정에 불타는 예비 신부가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펼쳤다. “하나님, 섹스에 대한 말씀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내게 유익이 될 겁니다. 내가 바로 배우고 변화하게 도와주세요.”말씀을 검토한 결과, 나는 섹스를 설계한 하나님의 계획과 결혼 생활에서 섹스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결혼 속에서 이뤄지는 섹스는 단지 출산을 위한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하고 아름다운 선물이다(창 2:24-25). 우리는 결혼과 함께 시작하는 섹스를 소중히 여기도록 부름받았다(히 13:4). 성경은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에서 이뤄지는 섹스를 즐겁고 축하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아 1:2-4). 그게 다가 아니다. 참으로 신비한 방식으로 부부가 하나 되는 성적 결합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가르침을 알려줄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누리는 기쁨까지 더욱 커지게 한다(엡 5:28-32). 실로 섹스는 소중히 여기고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또 즐겨야 하는 선물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만나는 다른 모든 좋은 선물과 마찬가지로 죄는 성적 친밀함마저 망쳐버렸다(창 3:16-19). 과거에 저지른 성적인 죄와 학대의 역사는 정서적 연결을 통해 부부가 하나되는 데 장벽을 만든다. 건강 문제, 스트레스, 노화, 일상적인 갈등, 그리고 짜증은 섹스를 추구하고 즐기는 데 방해가 된다. 심지어 섹스가 육체에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섹스를 통해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우리는 오히려 결혼과 함께 따라오는 섹스에 (또는 섹스에 대한 기대에) 반감까지 가질 수 있다.그러나 결혼 생활을 치유하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은 섹스도 얼마든지 회복(redeem)하신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로부터의 구속을 가져왔고, 부활의 능력은 새 생명을 준다(엡 1:7, 19-20). 부활의 능력은 섹스를 포함한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부부가 누리는 육체의 결합을 파괴하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부부의 섹스를 바르게 회복하신다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부부의 섹스와 관련해서 다음 세 가지 원칙을 깨닫게 되었다. 1. 섹스를 놓고 기도하라나도 이게 기도 노트에 적기에 어색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우리가 결혼 생활에서 섹스를 중시하라는 명을 받았다면(고전 7:2-5), 기도는 다른 영적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다음은 내가 몇 년 동안 기도한 몇 가지 내용이다. 욕망을 달라고 기도하자. 남편 때문에 피곤하거나 짜증이 나는데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피차 서로를 건드리지 않고 지내는 게 다반사이다. 때때로 남편의 욕망 부족이 아내의 욕망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두 사람 다 섹스에 관심을 잃을 수도 있다. 섹스에 대한 욕구를 크게 해달라고 내가 주님께 정기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 욕망이 약해질 때면 항상 이 기도로 돌아가곤 하는데, 하나님은 내게 계속해서 응답하신다.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이 제거되도록 기도하자. 아기의 울음소리, 어제 있었던 열띤 토론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 그리고 즐거운 섹스를 방해하는 열 살 자녀의 노크 소리 등등. 이런 것들이 불안을 일으키고 성적 친밀감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막상 그런 방해를 만났을 때 올바르게 대응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구해야 한다. 기쁨을 위해서 기도하자. 자매들이여, 남편을 유혹하는 건 괜찮다. 남편에게 유혹받는 것도 괜찮다. 그리고 두 사람이 유혹을 다 좋아해도 괜찮다(잠 5:18-19). 부부가 함께 느끼는 즐거움은 정서적 유대감을 높이고 신뢰를 더 깊게 만든다. 2. 섹스에 관해서 터놓고 얘기하라섹스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쉽지 않다. 심지어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행복한 부부 사이에서도 섹스와 관련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꺼리는지 등에 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부부라면 꼭 해야만 하는 바로 그 대화이다. 겸손하고 경청하는 마음으로 이 주제에 접근함으로(약 1:19), 남편과 나는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을 보게 되었다. 더불어서 나의 행동이 상대방의 성적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때로는 눈물도 흘리고 실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피차 바라는 궁극적인 결과는 상대에게 기쁨을 주고 싶은 욕망이다. 3. 섹스를 하라인정하기 조금 어색하지만, 결혼 16년 차에 접어드는 나는 섹스는 참으로 멋진 것이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적극적으로 섹스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안전한 결혼 생활에서 섹스는 회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서로를 향한 헌신을 강화하고, 하나님 앞에서 맺은 성약을 새롭게 하며, 결혼 생활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혜택 중 하나에 대한 우리의 열망과 기쁨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섹스는 부부 사이에 육체의 결합을 이루게 하지만 그 효과는 영적이고 정서적인 친밀감으로까지 확장되어 건강한 결혼 생활에 이바지한다. 이러한 친밀함은 부부 관계를 더 독특하게 만들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결혼 생활의 순결하게 하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히 13:4)고 명하신 이유이다. 부부의 섹스는 소중한 선물이다. 오래전 결혼 축하 파티에서 나를 옆으로 불어내어 섹스에 관해 조언해 준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원제: When You Don’t Feel Like Having Sex with Your Spous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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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친밀감
성실한 교회출석이 주는 아홉 가지 유익
by Steve Bateman
2023-03-01
연구나 조사 결과 없이도, 교회 출석률이 감소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신실한”(committed) 교인에게조차 예배 참석은 이제 하나의 선택 사항이 되었고, 한 달에 두 번 정도만 교회에 온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 대응하겠다는 명목으로 기대치를 낮춰서는 안 된다. 바른 해결책은 등록 교인을 향한 교회의 높은 기대치를 더 명확히 하는 것이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다. 첫째, 발열과 가끔 있는 가족 휴가는 교회에 빠지는 적절한 이유이다. 따라서 성실한 교회 출석은 다음에 해당한다. 직장이나 자녀의 학교 문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주일 공적 예배 참석을 막아서는 안 된다. 둘째, 출석 교회가 복음에 충실할 때만 예배 참석이 유익하다. 마지막으로 예배 참석의 이점을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든 경우에 다 적용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러함에도 매주 예배 참석과 긍정적인 혜택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다. 무려 아홉 가지이다. 1. 교회 출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한다.성실한 교회 출석이 주는 가장 큰 유익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세상을 향하던 관심을 유일하게 참되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또 선한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전 10:31). 그러나 모두가 함께 모여 찬양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을 향해서 가장 예민하게 집중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우리는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에 사랑 안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히 10:24-25)고 명하신다. 공적 예배에 대한 이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 혜택이 우선시되지 않는다면, 성실한 교회 출석이 가져다주는 다른 모든 혜택은 다 우상에 불과하다. 교회에 나간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라면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 2. 교회 출석은 이웃 사랑이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키고 또 우리를 보다 더 예수님처럼 만들어가신다. 따라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준비하신 은혜의 수단에 참여할 방법이 있을 수 없다. 분노를 조장하는 문화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과 인내 그리고 친절의 미덕은 수요는 많으면서도 공급이 부족하다. 마르틴 루터의 말을 빌리자면, 교회 출석이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지 않지만 이웃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3. 교회 출석은 당신을 더 똑똑하게 만들 수 있다.하나님은 책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또 온 마음을 다해서 그를 사랑하라고 명하신다(마 22:37). 성경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어휘, 문법, 역사 및 지리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총명을 주시는 주님은 우리가 좀 더 열심히 생각하는 일에 몰두하기를 기대하신다(딤후 2:7).두뇌 운동은 몸과 마음에 좋다. 독서는 어린이의 지능을 높이고 성인의 인지 기능을 보호함으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인지 기능 저하의 위험을 줄여준다. 함께 모여서 성경 공부하는 것보다 두뇌를 훈련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4. 교회 출석은 당신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이것은 번영 신학이 아니라 청지기 신학이다. 몸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건강 관리를 해야 한다. 올바른 교회는 교인이 현명하게 살고, 자제를 실천하고, 거룩함의 습관을 추구하고, 또 건강을 위협하는 자기 파괴적인 활동을 삼가도록 준비시킨다. 게다가 의미 있는 교제에 참여하는 중년의 경우 스트레스와 사망 위험을 55퍼센트까지 줄일 수 있다. 성실한 교회 출석이야말로 의사들 대다수가 환자와 함께 탐구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과소평가된 자원”이다. 레베카 맥클러플린이 지적한 것처럼 성실한 교회 출석은 “당신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5. 교회 출석으로 당신을 더 행복해질 수 있다.행복을 바라는 것은 행복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피조물의 정상 본능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리는 거룩한 행복을 기뻐하시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롬 12:12)고 명령하신다. 처절한 절망에서 오는 절박한 슬픔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소망을 가질 확실한 이유가 있다.하버드 연구원들은 매주 교회 출석이 수백만 미국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효과적으로 개선했으며 “십오 년에 걸쳐서 사망률을 20-30퍼센트” 줄였다고 결론지었다. 또 다른 연구는 성실한 교회 출석이 자살과 알코올 남용으로 인한 조기 사망으로 이어지는 절망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희망에 넘치는 사람들과 매주 교제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6. 교회 출석은 당신을 더 관대하게 만들 수 있다.오로지 교회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하신다는 말이다. 우리의 돈도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고 언젠가 우리는 그분 앞에서 청지기 인생에 대한 셈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교회는 교인에게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딤전 6:18) 가르친다. 에리카 앤더슨은 이렇게 말한다. “매주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아낌없이 헌금하고도 세속적인 목적에 기부할 가능성이 81퍼센트이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떤 목적에든 기부할 가능성이 60퍼센트에 불과하다.”7. 교회 출석은 결혼 생활을 보호할 수 있다.신앙에 진지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 서약을 지키고, 서로 용서하고, 결혼 생활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드러나도록 피차 노력하라는 설교를 꾸준히 듣는다고 가정해보자. 성령님이 그 부부를 더 거룩하게 하시지 않겠는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를 서로에게 더 가깝게 이끄신다. 부부를 갈라놓는 데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많은데, 성실한 교회 출석은 “이혼 위험을 47퍼센트나 현저하게 줄인다.” 8. 교회 출석은 국가 권력을 제한할 수 있다.1840년에 알렉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인이 자발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협회를 형성하는” 데 감탄했다. 그는 교회를 정부의 폭정으로부터 보호하는 중재 기관이자 가장 강력한 자발적 연합체로 보았다.신실한 교회는 교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또 지역 사회와 원수까지도 사랑하도록 이끈다. 자기 부인이라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누적 효과는 범죄, 이혼, 마약 및 알코올 남용, 인종 차별, 빈곤, 불의, 재범, 무지, 굶주림, 노숙자, 소송, 낙태, 아버지 부재, 자연재해의 부정적인 영향 및 기타 정부가 해결해야 할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9. 교회 출석은 망상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할 수 있다.“진리의 기둥과 버팀대”(딤전 3:15)로서 교회는 속임수에 빠진 세상 속에서 진짜 현실을 붙들고 있다. 문화가 어느 정도 도덕적 반역에 이르면 망상적인 생각의 형태로 임한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 사람의 “타락한 마음”(롬 1:28) 속에 뿌리내리도록 하나님이 내어두실 것이다. 남자가 남자와 결혼할 수 있고, 여자가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것, 또 남자가 여자일 수 있고, 여자가 남자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해부학적, 호르몬적, 유전적, 논리적, 어원학적, 사회학적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이다. 이것이야말로 망상적인 생각이다. 이런 평가가 이상하거나 불쾌하게 들린다면, 그건 우리 세대가 사실이 아닌 것을 믿도록 길들어졌기 때문이다. 타락한 미국에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중재 기관이 있다면 바로 신실한 교회이다. 자녀를 데리고 교회에 성실하게 참석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가 도덕 감각을 상실한 세상의 영향을 받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성실한 교회 출석은 어렵고 반문화적일 수 있다. 하지만 교회를 빠지면 안 된다는 말에 놀라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주일에도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9:23). 그러나 이익을 생각하는 우리는 종종 비용부터 따지곤 한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기쁨으로 이렇게 고백하자. “나 오직 주님만을 자랑할 것이니, 비천한 사람들아, 듣고서 기뻐하여라. 나와 함께 주님을 높이자. 모두 함께 그 이름을 기리자” (시 34:3).원제: 9 Benefits of Faithful Church Attendan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출석
이웃사랑
지혜
건강
행복
관대함
결혼생활
국가권력
망상
‘용서’가 사라졌다
팀 켈러의 ‘용서를 배우다’에 나타난 문화 내러티브
by 고상섭
2023-02-23
드라마 ‘더 글로리’가 인기리에 시즌 1을 마감했다. 학교폭력을 다룬 이 드라마의 중심 테마는 복수이다. 많은 사람이 복수에 열광하는 데는 정의가 바르게 집행되지 못하는 답답한 사회 현실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지만, 현대 문화의 한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한다. 팀 켈러도 용서를 배우다에서 용서하지 않는 오늘날 미국의 문화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살해당한 흑인 아홉 명의 유족들이 저격범인 딜런 루프에게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자, 이를 두고 다양한 여론이 형성된 적이 있었다. 그중에는 “미국 흑인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를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끊임없는 용서는 공격과 학대를 지속시킬 뿐이라는 논리였다. 여성 성폭력 피해자를 돕고자 시작된 ‘미투’ 운동도 많은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용서보다는 정의를 강조하고 있으며, 학교폭력 이슈도 가해자의 처벌에만 집중되어 있다. 물론, 무조건적 용서가 기독교의 가르침은 아니다. 가해자에 대한 정의의 실현이 없는 피해자의 무조건적 용서는 성경에 기초한 용서라기보다는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에 가까울 것이다. 또 거래적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강조점은 가해자가 용서받을 자격을 갖추는 데 있고, 가해자의 충분한 회개와 배상 행위로 용서를 얻어 낼 때까지는 분노를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은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모델과 거래적 용서, 그리고 값싼 용서라는 세 가지 정도의 반응이 나타난다. 심리치료 문화 내러티브 용서에 대한 이러한 세 가지 신념―값싼 은혜, 인색한 은혜, 은혜 없음―의 배후에는 어떤 문화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심각할 정도로 개인의 내면에 치우친 문화이다. 이전 시대에는 공동체를 개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개인이 공동선에 부합하도록 자신을 조정하던 문화가 지배했다. 반면 모더니즘은 자기 내면을 통해 각자의 갈망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형성한 뒤 밖으로 나가 사회를 향해 개인의 이익을 존중하라고 요구했다. 오늘날 현대 심리치료는 일정한 기준을 내세워 공동체나 외부의 영향에 맞서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 임무이다. 프로이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 신념은 결국 진정한 개성이란 자신이 선택하거나 만들어 내지 않은 일체의 규범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심리치료 문화의 강조점은 개인이 공동체의 전통과 의무와 책임이라는 속박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동경과 갈망을 추구하는 데 있다. 오늘날 심리치료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을 해결할 때 용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서 억지로 용서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더 지워주는 것이라 여긴다. 심리치료의 핵심은 환자를 지원하는 것이지 용서에 대한 도덕적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원치 않는 관계 속으로 도로 떠미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현대 심리치료 모델은 용서를 정서적 폭력처럼 강요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모델이 적용된 사례는 다양하다. 개인의 마음과 정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피로사회의 저자인 한병철 교수는 또 다른 책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오늘날 문화를 상처를 거부하는 문화, 즉 “매끄러움을 추구하는” 문화라고 꼬집는다. 한 교수는 특히 현대 미술의 거장인 제프 쿤스의 ‘풍선 개’(Ballon Dog)를 통해 매끄러움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문화를 분석한다. “제프 쿤스의 조형물처럼 우리는 왜 매끄러움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이것은 미적 차원을 넘어 하나의 사회현상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를 추구한다.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한다. … 제프 쿤스의 작품은 관찰자가 그저 ‘와!’라고 내뱉기만 바랄 뿐이다. 그의 예술 앞에서는 어떤 판단도, 해석도, 해석학도, 성찰도, 사고도 필요하지 않다. … 관찰자를 포옹하라, 관찰자에게 충격을 주거나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아름다움의 구원, 13).자기감정의 평온함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사회는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사람을 용서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 같은 소셜미디어의 세상에서는 소통이 되지 않을 때 관계를 단절하고 친구를 끊어버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다. 심리치료의 문화 내러티브는 결국 자기중심성을 강화하고 타인과의 관계성을 더욱 약화한다.심리분석가 셰리 터클은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가상공간이라는 피난처’에 도피하면서 대화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공감 능력이 사라지며 더욱 자기중심성에 매몰된다고 말한다. 진정한 대화의 핵심은 경청인데, 가상공간은 결국 진정한 소통과 용서의 개념이 사라지는 공간이 된다. “페이스북에 ‘싫어요’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긍정적 반응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못 얻을 경우 실망감이 따르면서 갈수록 재미있는 것을 올리는 성향이 강해진다”(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 64). 이런 자기중심적 감정관리에 몰두하는 문화 내러티브 속에서 “용서의 문화는 지옥에나 가라!”라고 외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새로운 ‘수치와 명예’의 문화 내러티브 팀 켈러는 용서의 실천이 빈곤해진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새롭게 뒤바뀐 ‘수치와 명예’ 문화 내러티브라고 분석한다. ‘새롭게 뒤바뀐’이라는 한 것은 고대사회에 있었던 ‘수치와 명예’ 문화가 다른 형태로 현대에 등장했다는 말이다. 고대사회는 ‘수치와 명예’ 문화에 기초했다.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이 아니라 명예와 사회적 지위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던 시대였다. 이런 문화 안에서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면 복수가 절대적으로 필수였다. 보복하지 않는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런 문화 안에서는 정의와 사랑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복수를 통해 ‘충분한 명예’를 되찾을 피해자의 권리가 먼저였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수치와 명예의 문화를 거부한다.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 20: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고대의 ‘수치와 명예’의 문화 안에서는 재빨리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자신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 중요했지만, 성경은 그런 사람을 내면이 공허하고 불안해서 자기밖에 모르다가 화를 자초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자기변호에 빠른 사람일수록 강한 사람이 아니라 나약한 사람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고대의 수치와 명예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수치와 명예 문화는 어떤 것인가? 팀 켈러는 서구 문화도 본래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수치와 명예 문화가 강했는데 시간이 흘러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존엄성’의 문화로 변모했다가 다시 새로운 수치와 명예 문화가 출현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고대의 수치와 명예 문화에서는 자신이나 가족의 명예가 공격받을 때 힘 있고 강한 사람들이 그 명예를 찾아오는 것이 선호되었다면, 오늘날은 심리치료 문화에서 본 것처럼 개인이 사회의 기대와 역할과 구조에 억압받고 지배당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회나 다른 권력자에게 종속해 있는 피해자일수록 더 큰 명예와 도덕적 품성을 부여받는다. 기존의 사회 위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명예가 더 커질 수 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피해를 떠받드는 수치와 명예의 문화’이다. 이렇게 뒤바뀐 수치와 명예 문화는 일정의 “배척문화”(cancer culture)로 힘 대신 허약함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지극히 사소한 문제로도 늘 선악으로 대치하는 사회를 낳고, 사람들은 피해자의 지위 또는 피해자를 옹호하는 지위를 얻고자 경쟁하기도 한다. 이 문화는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주는 역량을 위축시킬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용서와 화해의 개념 자체를 말살해 버린다. 이제 용서는 완전히 불공정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사람들이 피해자를 두둔하려 해도 피해자가 용서해 버리면 명예와 덕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화에서는 망가져서 이미 회복 불능인 관계가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 이제는 다른 사람의 실수조차 무조건 이단자의 악으로 간주된다(용서를 배우다, 70).새로운 수치와 명예 문화는 이제는 새로운 신흥 세속종교가 되었지만, 이 종교 안에서는 구원이나 용서를 받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팀 켈러는 앨런 제이콥스의 말을 인용하며 새로운 수치와 명예 문화를 강하게 비판한다. 우리 시대의 특히 심각한 도덕적 위기는 많은 동료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성적 방종이 아니라 복수심이다. SNS는 도덕주의자에게 마약과도 같다. 악인을 벌하는 것만큼 짜릿한 쾌감은 없다. 그러나 모든 중독처럼 여기에도 냉혹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타격을 가한다. 그래서 남을 벌하려는 광기는 가라앉을 새가 없이 오히려 악화된다”(용서를 배우다, 71).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기독교적 관점을 버리고 사회가 점점 세속화가 되어 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버리면 사회는 도덕주의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심해진다. 어설픈 정의감은 그대로인데 용서를 주고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 복귀한 야구선수가 학교폭력을 언급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또 과거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지목을 받은 배구선수를 팀에서 퇴출하라는 요구가 빗발쳤고. 결국 그 선수들은 한국에서는 선수 생활을 할 수 없어서 외국으로 나가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가해자를 퇴출해야 한다는 압력이 커지고 있다. 물론 가해자에 대한 정의는 바로 서야 한다. 그러나 사건 자체의 잘잘못보다는 이런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문화 내러티브는 건강한 용서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기보다는 강한 처벌과 응징, 복수에 가까운 말들이 난무하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왜 용서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가? 또한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기독교적 용서인가? 문화 내러티브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우리는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바른 성경적 용서와 대인관계의 원리들을 배워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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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저의 마지막 설교입니다...독신남으로는요!”
어느 독신 목사의 결혼 이야기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02-22
“오늘 사십사 년간 기다려온 발표를 하겠습니다.” 스티브 드위트 목사의 말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린 미국 인디애나 크라운포인트의 베델 교회 교인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소리 지르고, 박수하고, 휘파람 부는 교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티브는 말을 이어갔다. “오늘이 독신 목사로서 마지막 설교입니다.”교인들은 스티브가 아내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아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나서서 찾아주려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어렵지 않을 거라고 대부분 생각했다. 스티브는 신학적으로 탄탄했고, 재능 있는 설교가였으며, 게다가 나날이 커가는 교회에서 인기를 구가하는 목사였다. 스티브가 여자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스티브는 고등학교 때부터 데이트를 시작했고, 3학년 때 부모는 그를 기독교 고등학교로 전학시켰다. 스티브에 따르면 “학교가 마치 교회 자매들이 돌아다니는 여름 수련회에 온 거 같았다.”“열여덟 살이 되면서부터 거의 매주 미래의 아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스티브는 신앙, 책임 있는 데이트, 그리고 사역에 있어서까지 모든 부분에서 진지했다. 코너스톤 대학교와 그랜드래피즈 신학대학을 마친 후에 목회 인턴십과 청소년 목사로 몇 년을 사역했다.“나는 항상 희망을 품고서 데이트에 임했지만, 그렇다고 꼭 잘되어야 한다는 어떤 압박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했다. 상황이 항상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여자가 신도의 약 3분의 2를 차지했던 초대 교회 시절부터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비율은 균형이 맞지 않았다. 1700년대에 청교도 설교자 코튼 매더는 이렇게 불평했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삼사백 명 중에 남자는 백 명이 조금 넘고 나머지는 다 여자다.”오늘날 미국 복음주의 교파에서 여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55퍼센트이다. 그러나 신앙을 중시하는 적절한 결혼 상대자를 찾는다면 상황은 조금 더 까다로워진다. 결혼 적령기에 해당하는 남자의 경우에 약 12퍼센트, 여자는 18퍼센트만이 신앙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을 믿고 … 기독교가 가르치는 경건을 의미 있게 실천한다”고, 연구자 라이먼 스톤은 썼다.스티브가 찾는 여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렇듯, 예상한 것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독신 목사스티브가 스물다섯 살 청소년 부서 목사였을 때만 해도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칼리지파크 교회에서는 아무도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은 그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물아홉의 나이로 베델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을 때도 그는 여전히 미혼이었다. 스티브와 나이가 비슷한 커트 핸드는 스티브가 부임했을 때, 아내 켈리와 함께 베델 교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커트의 말이다. “우리는 그가 결혼에 관해서 어떻게 가르칠지 궁금했습니다.”“한 가지는 확실했습니다. 그가 완전히 헌신된 종이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몇 분만 함께 대화하면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켈리의 말이다. 1997년 베델 교회가 스티브를 청빙했을 때, 그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주 오백 명의 교인 앞에서 설교를 통해서 헌신된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베델 교회뿐 아니라 다른 지역 교회의 미혼 여성들도 그의 헌신에 매력을 느꼈다. 그뿐 아니라 교인들 가운데 독신의 딸이나 손녀, 조카딸, 친구를 그와 연결하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티브의 말이다. “부끄럽게도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상대가 가지는 헌신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실 내 이야기 중에서 별로 건강하지 못한 부분이에요. 결과적으로 분명히 좋은 아내가 되었을 훌륭한 자매를 여러 명 간과하거나 놓쳤어요.” 그렇다고 스티브가 매일 밤 데이트를 했다는 건 아니다. “독신으로 사역하는 데에는 분명히 여러 가지 이점이 있는데, 나는 그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가정이 있는 목사라면 결코 할 수 없을 수준으로 교회에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거든요.”예를 들어, 그는 교인들과 함께 집에서 식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훌륭한 요리사가 아니었고, 스티브 집에서 먹는 식사는 BYOE, 즉 ‘당신 먹을 건 알아서 싸 오세요(Bring Your Own Everything)를 의미했다.) 그는 설교에 몰두했다. 설교를 연구하고, 고민하고, 연마하고 또 연습했다. 여러 곳에 글을 기고했고, 대학 예배당, 캠프 및 기타 여러 교회에서 설교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썼다. “자유함이 주는 다양한 경험을 정말로 맘껏 즐겼어요.”그러는 중에도 그는 미래의 아내를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많은 목회자가 배우자와 함께 사역하며 책임감을 키우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젊을 때 함께 시작해서 점점 성숙해지고 함께 노련해질 수 있는 거죠.”사십 대에 접어든 스티브는 이제 수천 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아내는 반드시 성숙한 신자여야 하고, 목회를 사랑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꺼리지 않아야 한다. 게다가 지난 십오 년 동안 스티브의 전부와 다름없었던 교회와 남편을 공동소유 해야 한다. 메가처치 전문가 스코트 써마와 워렌 버드에 따르면, 스티브는 당시 미국에서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은 대형 교회 목사였을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그는 하나의 유니콘이었다. 당연히 그의 아내도 유니콘이 되어야만 했다. 또 한 명의 유니콘어렸을 때 제니퍼는 어머니 친구와 가족 결혼식에 어머니의 껌딱지가 되어서 따라가곤 했다. 솔직히 말해서 어머니가 데리고 갈 사람이 제니퍼밖에 없었다. 전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이자 캔자스시티 로얄즈의 스카우터였던 아버지는 대부분 출장 중이었다. 두 오빠는 결혼식에 참석하느니 차라리 칫솔로 화장실 청소하는 것을 선택할 게 뻔했다. 반면에 제니퍼는 결혼식에 가는 걸 좋아했다. 음악과 웨딩드레스와 꽃을 사랑했다. 그리고 특별한 상자에다 결혼식장에서 가져온 각종 색종이 조각, 초대장, 비눗방울 같은 기념품을 보관했다. 결혼식에서 어떤 특별한 아이디어라도 얻은 날은 언젠가 자기 결혼식에 응용할 생각에 메모까지 할 정도였다. 제니퍼는 멋진 남편과 가족, 홈 인테리어를 꿈꾸며 자랐다. “나는 사실 엄마 자격증을 따려고 베일러 대학에 들어간 거예요. 항상 아내이자 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하나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기회를 주셔서 내 삶에서 그 소망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서 마침내 제니퍼는 약혼했다. 그녀는 당장 행동에 돌입했다. 결혼식 장소를 알아보고, 드레스를 입고, 또 케이크를 결정했다. 리셉션 홀을 방문해서 사진사를 고용했고 또 친구들에게는 신부 파티 초대장을 보냈다. 모든 것이 완벽할 것이다.결혼식을 하려고 캔자스시티로 가던 그녀는 피닉스 공항의 보안 검색대에 서 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행히도 결혼식 전 몇 가지 최종 세부 사항을 확인할 시간이 충분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약혼자가 이별을 통보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바닥에 바로 쓰러졌고, 사람들이 와서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봤던 것뿐이에요.” 며칠 후 절망에 빠진 그녀는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친구에게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실패한 자신을 직시했다.“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혼이었어요.” 결혼이 사라진 그녀는 이제 삶의 방향을 잃은 것이다. “저는 [약혼자 근처로] 이사하려고 직장까지 그만뒀어요. 거기서 나는 영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고작해야 친구들의 도움을 받은 게 다였지요.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남자였는데 아니었던 겁니다. 내가 거절당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복음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 내가 드릴 것이 없을 때, 내가 부끄러울 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제니퍼는 “그 일이 있고 몇 달 동안 자궁 속 태아와 같은 자세로 시간을 보냈지만, 나는 결코 그 시간을 다른 시간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느꼈던 말씀에 대한 갈망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고통과 믿음의 눈물에 젖은 일기가 지금도 눈에 선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달콤했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치유의 계절을 보낸 후 제니퍼는 제약 회사 직원으로 다시 경력에 집중했다. 그녀는 성경공부 모임에서 봉사하고 교회에서 아이들을 돕기 위해 자원했으며, 나중에 여성 행사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독신이거나 기혼이거나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다 외롭다는 것입니다. 결혼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예수님 안에서 만족을 찾느냐 여부입니다.”첫 전화그렇게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 후에 제니퍼는 그곳에 있던 한 여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스티브 드위트가 쓴 “Lonely Me: A Pastoral Perspective”라는 The Gospel Coalition의 기사 링크였다. 그 여자는 메일에 이렇게 썼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 글이 생각났습니다. 혹시 이 글을 쓴 사람과 교제할 생각이 없나요? 스티브는 내가 인디애나에 있을 때 우리 교회 목사님이었어요.” 제니퍼는 동의했고, 몇 달이 지나고 페이스북에 스티브의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스타벅스 앞에 서 있었다.“우리 둘 다 전에 이 근처에 있었던 적이 있다고 생각해요. 발가락을 물에 살짝 담그는 것으로 교제를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당신은 어떤가요? 가끔 전화 통화, 어때요?”흥분한 제니퍼는 주문한 음식을 카운터에 놓고 시누이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차로 달려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메시지 답장을 만들었다. “내 발가락은 이미 물에 들어가 있습니다.”솔직히 스티브는 관심이 있었지만 회의적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그분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전화 통화를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니퍼와 너무도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기분 좋게 놀랐다. 스티브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 때 부모님 집이 있는 아이오와로 가는 길에 캔자스시티에 들러도 되냐고 물었다. (고작해야 여섯 시간 더 운전하는 거니까.)첫 만남첫 만남에 대한 스티브와 제니퍼의 느낌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제니퍼는 너무 긴장해서 스티브가 방문한 사흘 내내 거의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다. 그러나 제니퍼의 눈에 스티브가 너무도 편안하게만 보여서 그녀는 이 남자가 과연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나는 말 그대로 부서지고 불타고 있었어요.” 제니퍼의 말이다. 출발하는 날, 스티브는 부모님 집으로 가기 위해서 새벽 일찍 캔자스시티를 떠나 길을 나섰다. 제니퍼의 말이다. “나는 스티브가 일 분이라도 빨리 이 마을을 떠나고 싶어서 그렇게 새벽에 떠났다고 생각했어요. 스트레스를 떨쳐내려고 그날 무려 19마일을 달렸습니다.”그런데 진실은 스티브가 제니퍼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좀 더 깊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제니퍼에게 자기 부모님 집으로 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우리 가족 모임에 들어오는 순간 제니퍼는 모두를 사로잡았습니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환경에서 그녀를 좀 더 잘 볼 수 있었고, 반짝이는 그녀의 매력은 정말 나를 사로잡았습니다.”그러나 제니퍼는 다른 한편에서 자문하고 있었다. 스티브가 정말로 그토록 훌륭한 사람이라면, 왜 아직 결혼하지 않은 거지? 제니퍼의 질문에 스티브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사역이 너무도 중요했기에 행여라도 잘못된 결정으로 사역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둘째, 아직 나와 맞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세 번째, 서로를 위해서라도 교인 모두가 다 기쁘게 받아들이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 세 번째가 가장 쉬운 것이었다. 처음으로 몰래 베델 교회를 방문한 제니퍼에게 옆에 앉은 가족이 말을 걸었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에 그들의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봐요, 혹시 스티브 목사님 만난 적 있어요?”독특한 데이트스티브는 인디애나에, 제니퍼는 미주리에 살았다. 스티브는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제니퍼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했다. 제니퍼는 오후 5시 이후에 심방을 가거나 교회 모임에 참석하러 가는 스티브와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다. 캔자스시티에서는 밖에서 데이트가 가능했다. 그러나 인디애나에서는 조심해야 했다. 조심하는 게 쉽지 않을 정도로 스티브는 그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공인이었다. 제니퍼가 무릎 수술을 받고 입원한 스티브를 방문했을 때, 그는 간호사에게 “친구”라고 말했지만, 간호사는 속지 않았고, 집에 가서 스티브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광고했다.3월에 스티브는 이스라엘 여행을 인도했다. 같은 시기에 제니퍼는 이스라엘로 가는 다른 여행에 등록했고, 스티브는 그녀에게 자기가 인도하는 여행으로 오라고 말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프라이버시가 확실한 동산 무덤 안에서 스티브는 헤세드(“언약의 사랑”이라는 뜻)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새겨진 목걸이를 그녀에게 주면서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했다.5월에 설교를 마치고 제니퍼를 무대 위로 불러 회중에게 소개한 스티브는 그녀를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 그런 다음 모두를 놀라게 한 순서를 진행했다. 오페라의 유령 음악이 흐르고 천장에서 장미 꽃잎이 떨어지는 가운데 한쪽 무릎을 꿇고 청혼한 것이다. 그때를 돌이켜보면서 제니퍼는 말한다. “그때 손가락을 턱에 대고 고민하는 척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바로 스티브에게 키스하고 속삭였다. “아, 어쩌지요? 방금 사람들이 다 보는데 키스했어요.” 스티브는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합시다”라고 속삭이며 그녀에게 다시 키스했다. 그리고 부목사가 올라와서 미리 요청받은 긴 기도를 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교회를 빠져나갔다. “기도하고 눈을 뜨니까 벌써 나가고 없더라고요. 스티브 목사를 워낙 오랫동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로 기뻤습니다. 스티브가 오랫동안 곁에 있을 배우자를 원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현숙한 여자를 찾는 게 어디 쉽겠어요? 정말로 스티브가 아내와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서 아이를 낳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켈리의 말이다. 예배당이 수다와 환호로 넘쳤다. “우리는 다 궁금했어요. 그리고 기억하려고 애를 썼지요. 언제 제니퍼를 교회에서 본 적이 있었나?” 켈리의 말이다. 성대한 결혼식제니퍼가 두 번째로 경험하는 결혼식 계획은 처음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첫 번째 결혼식은 미학에 중점에 뒀기 때문에 애초에 교회에서 할 생각이 없었어요.” 제니퍼의 말이다. 그러나 이번 결혼식은 교회에서, 그것도 스티브의 교회에서 하기를 두 사람 다 원했다. (“다른 곳에서 했다면 문제가 되었을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스티브는 우리들의 목사님이잖아요.” 커트의 말이다.)처음으로 그녀는 육 개월의 약혼 기간을 가졌고, 그녀의 머리는 세부 사항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거의 관여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첫 번째 결혼식을 했다면, 분명히 꽤 화려한 행사가 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번 결혼식은 코스트코 케이크와 펀치 드링크를 준비해야 해요. 정말 많은 사람이 올 거니까 최대한 저렴하게 준비해야 했거든요.” 본당은 1,200명을 수용했다. 그런데도 스티브와 제니퍼는 처음에는 하객 명단을 교회 등록 교인으로, 그다음에는 각 가정에서 두 명으로 제한해야만 했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교회에 등록한 사람도 있었다.)제니퍼는 결혼식 세부 사항에 덜 집중하는 대신에 미래의 남편에게 훨씬 더 집중했다.“열일곱 살짜리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고 상상해보세요. 그게 바로 그들이 왔을 때 모습입니다.” 커트의 말이다.“우리 목사님이 어지러워하는 걸 보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너무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켈리의 말이다. 제니퍼가 통로를 따라 걸어 내려올 때, 켈리는 신부를 바라보는 스티브를 주목했다. 켈리의 말이다. “마법 같은 순간이었어요. 마침내 그들은 부부로 선언되었고 통로를 걸어갈 때 ‘할렐루야 합창’이 울려 퍼졌습니다.” 많은 교인에게 이 둘의 결혼은 마치 왕실의 결혼식 같았다. 교인들의 기쁨은 완전했다. 그러나 실로 오랫동안 절실히 원했던 것을 마침내 손에 넣은 사람이라면 즉각적으로 깨달을 것이다. 그게 결코 나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티브와 제니퍼는 2012년 8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Courtesy of Katie Lee Photography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제니퍼의 말이다. “결혼 첫해는 정말 힘들었어요.” 과거의 의학적 문제 때문에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임신은 금방 되었고 스티브가 교인들에게 임신 사실과 함께 출산 예정일을 알렸다. 제니퍼의 말이다. “혹시 속도위반이 아닌 건지, 교인들이 날짜를 계산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한참 웃었습니다.” “임신하자마자 입덧으로 고생했어요. 나는 목사의 아내가 되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새신부였어요. 사람들한테 배우려면 같이 가서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입덧 때문에 커피 냄새를 참을 수가 없었어요!”그녀는 입덧 때문에 기도했지만 그렇다고 불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직장 여성에서 임신한 목사의 아내로 바뀐 현실은 그녀의 모든 리듬을 깨뜨리고 있었다.“나는 하나님의 힘으로 버텼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도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 첫해에는 주님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어요. 결혼 전에는 나름 영적 성장의 기운을 먹고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영원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목사의 아내가 ‘예, 저는 지금 말씀 안에 거하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다소 굴욕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건 나를 겸허하게 만드는 경험이 되었습니다.”스티브는 스티브대로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하는 노련한 전문가가 된 상황이었다. “일종의 도전적인 전환이었지요. 더 나은 위임자이자 사역의 공유자가 되기 위해 동역자와 팀 리더십에 더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습니다.”베델 교회에도 어느 정도의 조정이 필요했다. 스티브의 관심은 이제 분산되었고 그의 사역 시간도 새로운 방식으로 제한되었다.그러나 스티브와 제니퍼의 결혼은 동시에 큰 혜택을 가져왔다. 스티브 부부에게는 키랄리와 매들린이라는 어린 두 딸이 있다. (이들은 설교와 책 삽화에 등장한다.) 스티브 부부는 저녁 식사를 나누기 위해서 수백 명의 교인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자기가 먹을 음식을 가지고 오거나 월마트에서 파는 값싼 종이 접시에서 먹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켈리의 말이다. “제니퍼는 스티브를 크게 보완해 줍니다. 그녀는 환대에 재능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을 잘 돌봅니다. 결코 사람들에게서 부정적인 면을 보지 않아요. 매우 긍정적입니다. 제니퍼와 이야기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내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것처럼 느낍니다. 제니퍼는 상대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커트의 말이다. “결혼이 하나님을 위한 [스티브의] 사명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은 오히려 목회와 설교를 더 풍요롭게 했습니다. 이제 그는 약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결혼과 자녀 양육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습니다.” 켈리의 말이다. “스티브는 더 부드러워졌어요. 남편과 부모가 된 것이 좋은 면에서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는 아내를 더 잘 알기 위해서도 자신과 성경을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합니다.”최고의 중매자스티브의 말이다. “우리의 데이트는 일종의 디즈니 동화 같았어요. 하지만 세상에 디즈니 동화 같은 결혼은 없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의 죄 가운데 복음을 적용함으로써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셔서 감사하지만, 우리에게는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제니퍼는 두 사람이 다 싱글 시절을 아련한 감정으로 회상한다고 말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말씀을 공부하고, 또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 독신 생활은 훌륭하고 가치 있는 선물입니다.”그것이 결혼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최고의 조언이다. 예수님을 따르라. 그리고 지역 교회에 투신하라. 이웃을 위한 자원봉사에 참여하라. 선교 여행을 떠나라. 5킬로미터 달리기에 도전하라. 성경 공부에 참석하라. 직업을 가지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준비한 삶이 독신이라면, 그것은 고통과 기쁨, 관계와 외로움, 어려움과 평화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기혼자도 하나 다르지 않다. 독신자라면 보채는 아기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지는 않겠지만, 대신에 교회나 지역 사회에서 아이를 돌볼 수도 있다. 배우자와 나누는 친밀한 대화 대신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친밀한 우정을 쌓을 것이다. 직계 가족을 제자로 삼는 대신에 다른 믿는 이들에게 멘토링을 하고 또 멘토링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배우자를 계획하셨다면, 그것도 선물이다. 하지만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오로지 당신 자신의 매력에만 의지해선 안 된다는 게 스티브의 조언이다. “우리는 배우자를 놓고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보다 훌륭한 중매인은 없으니까요.”원제: Megachurch Marriage for the Bachelor Pastor: A Story of Love that Las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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