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그리스도인의 삶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고난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는 법
by Clarissa Moll
2023-01-14
남편 롭이 끔찍한 하이킹 사고로 마흔한 살의 나이에 떠났을 때, 나는 “왜”라고 묻지 않았다.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나는 세상이 죄의 저주로 망가진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는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동일하게 내린다. 우리의 날들은 그 끝을 알지 못한 채 계수된다. 고통과 슬픔은 하나님이 모두 창조하시고 선이라고 부르신 놀라운 태피스트리 속의 검은 실들처럼 흐르고 있다. 나는 “하나님, 왜요?” 또는 “왜 나에게요?”라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롭이 사망했을 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종종 물었다. 나의 길을 어둡게 만든 이 고통에 대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이해할 수 없는 비극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런 가슴 아픈 상실 앞에서 나는 세상과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우리 부부가 십년 동안 함께 쌓아왔던 삶이 내 발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가 살아남기를 원하고 또 다시 성장해가야 한다면 예수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쩌면 고난당하는 자의 아이콘인 욥이 말한 것처럼 “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 1:21)라고 말할 수 있는 장소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는지 몰랐다. 나는 이제 유족들을 대변하고 돕는 사람으로서, 에릭 오틀런드(Eric Ortlund)의 ‘지혜롭고 온전하게 고통을 지나가는 법: 욥의 슬픔과 하나님의 은혜’(Suffering Wisely and Well: The Grief of Job and the Grace of God)에 감사한다. 그가 학자의 예리함과 목회자의 마음으로 쓴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상실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실을 사려깊음과 정직함과 희망을 가지고 헤쳐 나갈 수 있게 한다. 때때로 어떤 내용은 이제 막 극심한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고난받는 사람과 유족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성경적 지침을 제공한다. 자기 자신이 욥의 친구의 자리에 던져졌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욥의 친구들보다 더 나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현명하고 필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Suffering Wisely and Well: The Grief of Job and the Grace of God지혜롭고 온전하게 고통을 지나가는 법: 욥의 슬픔과 하나님의 은혜 에릭 오틀런드(Eric Ortlund) 하나님은 왜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고난의 고통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불가사의할 수 있지만, 성경은 해답을 제공한다.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삶에서 특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시련을 허락하신다. 고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죄를 회개하며, 구약의 욥의 이야기에서처럼 설명할 수 없는 아픔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이 책에서 에릭 오틀런드는 성경 전체에 걸쳐 다양한 유형의 시련을 탐구하여 각각의 영적인 목적을 밝히고,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독자들을 위로한다. 이 책의 대부분은 고난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으나 또한 잘못 이해되고 있는 욥기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틀런드는 욥의 친구들의 의심, 욥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리워야단과 베헤못을 포함한 중요한 문학적 묘사 뒤에 숨어있는 의미를 각 장에서 세심하고 신중하게 분석한다. 이 책은 자신의 삶에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는 동안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깊게 하며 어떻게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지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무엇을 말해야 하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욥기를 한 장 한 장 지나갈 때마다 이 책은 고난당하는 자와 그들을 돕는 자들 모두에게 신뢰 할 수 있는 행로로 인도한다. 고난의 다양한 종류에 대한 간단한 개요 후에 저자 오틀런드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아주 가치 있는 내용을 제공한다. 그것은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고 욥과 하나님 사이에서 오간 대화에 대한 주해적 탐구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말하는가를 하나님은 아주 중요시한다”(169)라고 단언하면서, 오틀런드는 욥의 세 친구가 고난과 고난의 원인과 목적들에 대한 열띤 대화에서 그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분석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독자들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뻔한 대답과 상투적인 말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찡그릴 수 있다.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의 고난의 자세한 내용들을 분석하려는 잘못된 시도를 했다는 데 있다. 저자는 종종 욥기서의 구절구절에 나타난 대화들로 우리를 데려가서 희생자를 탓하고 판단하는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상실에 끼어들어서 그 원인과 목적을 분명하게 분별하려고 들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냉담한 위로와 그런 가증한 온유함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79). 그러나 당신이 내가 대화해 본 많은 선의의 친구들과 가족들처럼 당신의 삶에서 어떤 상처받은 한 사람을 돌보는 입장이 된다면, 단지 “뭔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보다 더 이상의 것을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적절한 말을 해야 하고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오틀런드와 욥기서의 기자는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오틀런드는 욥의 친구들을 거울로 삼아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 조용히 욥의 잿더미 속에 합류하고 있는 그림을 제공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의 분노와 좌절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능력과 사랑을 보여주시는 위대한 장면을 보여주신다. 당신이 상처 받은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그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준다. 모든 사람의 가장 좋은 친구오틀런드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의 매력적인 토론을 통해서 고난당하는 자를 돕고자 하는 모든 친구들과, 또 고난당하는 모든 성도가 마음에 항상 지녀야 할 지혜의 핵심을 제공한다. “자신의 세상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장 명확히 보시는 그분은 그 세상을 그대로 영원히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사는 바로 그분이다”(157). 당신이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싶고 또한 지혜롭고 온전하게 고난을 지나가기를 원한다면, 이 지혜가 당신의 말과 발걸음을 인도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선한 의도, 신학적 명확성, 또는 성경적인 증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분별하려고 시도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오틀런드와는 달리 나는 여기서 ‘시도해서도 안 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도와줄 것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대신 오르크런드는 가장 깊은 고통 속에 있는 욥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이상적인 친구로서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을 비난할 때 분노나 가로막음 없이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욥의 그릇되고 오해로 빚어진 불평도 친절하게 받아주신다. 하나님은 비꼬거나 비하하지 않으시고 판단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욥의 분노,슬픔,의심, 좌절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그의 곁에 계시기로 하신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자질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표면적인 위로로 행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시간에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깊은 믿음에서 행해야 한다. 내가 힘들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시련은 종종 무력감과 절망감을 동반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슬픔을 바꾸거나 완화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온갖 시련을 인내할 때, 우리는 소망 가운데 그분을 기다리면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이것은 레몬을 레모네이드와 같은 달콤한 것으로 바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그분 앞에 가져가야 한다” 욥기서는 필요하다면 우리가 슬픔을 속속들이 표현할 수 있다고 곳곳에서 거듭해서 가르쳐준다. 더 나아가서 고난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우리는 가혹하고 가학적인 자기 점검으로 자신을 몰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의 슬픔을 매듭으로 단단히 묶고 고통이 끌어내는 교훈을 얻겠다고 자신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그대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을 때,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가 언제나 신실하기를 요구하신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지혜로 그들의 위로를 걸러내어야 한다. 금을 건지고 나머지는 처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당신의 기도가 화가 나 있고 절망에 소리에 지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악의 무시무시한 영역을 꿰뚫어 보시면서 거기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기를 결코 망설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항상 돌아가야 한다. 원제: How to Walk Faithfully Through Suffering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성도의고난
영성
묵상과기도
욥의고난
회복과약속
고통의경험
고난의목적
자초지종을 잘 모를 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by Megan Hill
2023-01-13
얼마 전 지인이 내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가 목회직에 면직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지역도 관계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문제가 생기게 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부당한 면직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그렇지만 나는 그의 편지에 어떻게든 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정말 중요하고 인생을 바꿀 만한 문제에 부닥친 그 친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빠진 조각교회에서, 그리고 특별히 사역에서, 우리는 빈번하게 도전적인 상황에 대해 듣게 되고 또 응답을 요청받는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전체 이야기의 작은 부분만을 안다.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에 관해 부풀린 이야기나 아니면 치우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의 죄를 폭로하지 않으려고 이야기의 일부만 전달하는 사람도 있다.잠언은 정보 없이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말라고 경고한다: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 (잠언 18:17)다 들어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것은, 수모를 받기에 알맞은 어리석은 짓이다. (잠언 18:13)때로 우리는 전모를 파악하여 더 완전한 그림을 얻기도 한다. 양 당사자 모두 우리 동아리 내에 있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두 사람이 성경에 기초하며 갈등을 해결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내 지인처럼, 자초지종을 모두 또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나 관계도 있다. 세부 사항 전부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때도 있다.이처럼 전체 이야기를 파악할 수 없을 때라면, 이메일이나 커피 또는 주일 친목 점심 식사를 통해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정말 안됐어요’죄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떤 상황에 죄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의 죄이든지 상관없이 진심으로 안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고수하는 기독교 신념이 고용주에게 불쾌감을 주어서 해고당한 교우가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렇게 되셨다니 정말 안됐어요.” 결근을 하는 바람에 직장을 잃은 교우가 있다? 그때도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렇다니 정말 안타까워요.” 죄와 고통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죄와 고통에 대한 슬픔은 올바로 표현할 수 있다.‘감사합니다’내가 받은 그 이메일의 경우처럼, 최고의 답장은 “당신의 오랜 섬김에 감사드립니다”일 것이다. 어쩌면 “힘든 시기에 좋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라거나 “걱정해줘서 고맙다”일 수도 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내게 말해줘서 고마워”일 때도 있다. 상황에 대해 언급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사람이나 관계에 관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다.‘같이 기도해요’우리 주님은 우리가 모를 때에도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는 주님이 일하시도록 겸손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을 변론하시고, 죄를 지은 사람을 책망하시고, 서로 멀어진 사람들을 화해시키시고, 그의 아들을 높이시도록 요청할 수 있다. 기도는 또한 우리 각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여 부르짖게 하는 훌륭한 평형 장치이다. 전체 이야기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함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그리고 우리가 모두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면, 그걸로 됐다.원제: What to Say When You Don’t Have the Full Sto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위로
조언
감사
기도
새해에도 고난은 있을 터, 어떻게 믿음을 굳게 지킬 것인가...
by David Schuman
2023-01-10
내가 힘들어하는 게 뭔지 아는가? 단지 며칠 또는 몇 주가 아니라 몇 달, 몇 년, 심지어 수십 년 동안 한 가지 일을 성실하게 헌신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소명이다.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디모데와 우리에게 오래된 믿음을 유지하라고 권면하면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믿음을 지켜나가기 어렵게 만드는 두 가지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당장 한편에서는 박해가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딤후 3:12). 그중에는 돌에 맞아 죽다시피 버려졌던 바울이 당했던 것처럼, 가혹한 박해도 있다(행 14:19). 그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오늘날에도 박해는 여전히 존재한다. 조롱당하거나 험담을 듣거나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 박해가 주는 매일매일의 압력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때로는 믿음에 눈을 감고 세상 문화와 타협하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다른 한편에는 거짓 가르침이 있다.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악하여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할 것입니다”(딤후 3:13). 거짓 교사들은 더 흥미롭고 새로운 것을 제시하며 우리를 유혹하고 위협한다(cf.딤후 3:7).이 두 가지가 우리를 괴롭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계속 고수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딤후 3:14).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받은 것을 붙잡아야 할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이유 #1: 누구로부터 배웠는지 알고 있다.큰 유산을 관리 부실로 다 날린 이로부터 재정 조언을 받을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재정 조언을 하려면 자기 돈부터 잘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입증된 성공이야말로 메시지를 신뢰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한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습니다”(딤후 3:14). 디모데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바울에게서 믿음을 배웠다(딤후 1:5). 디모데에게 믿음을 가르친 사람들의 경건한 성품은 내용의 신뢰성을 증명한다. 경건한 선생으로부터 믿음을 배웠다면, 그들이 가르친 대로 계속할 수 있음을 확신하라. 이유 #2: 어린 시절부터 거룩한 말씀을 배워서 알고 있다. 내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언제나 어머니를 가리킨다. 아버지도 지금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주일마다 나와 형제들을 교회에 데려가셨고, 매일 아침 성경 공부를 인도하셨으며,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디모데의 어머니처럼, 내 속에 성경의 진리를 심어 주셨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딤후 3:14-15).이건 새 동네로 이사할 때와 비슷하다. 공원으로 가는 가장 경치 좋은 길, 최고의 중식당, 퇴근하는 가장 빠른 길을 배우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제2의 천성이 된다. 그와 비슷하게, 어머니 덕분에 나는 성경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성경의 선함과 진실함을 경험했고, 그 사실은 내가 계속해서 믿음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그러나 이 처음 두 가지 이유가 당신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다음 이유는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이유 #3: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유익하다. 박해와 거짓 가르침에 직면하여 우리는 배운 것을 계속 지켜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디모데가 받은 진리와 거짓 선생을 구분하는 다음 네 가지 대조에 유의하라. • 말씀은 단지 인간의 충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로 기록된 것”이다. • 거짓 가르침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의로 교육한다. • 말씀만으로 온전히 충분하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곳을 기웃거릴 이유가 없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 유익합니다. …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 3:16-17).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과 경건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 거짓 선생의 목표는 속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고 진리를 가르친다. 그는 신실하시다우리는 여전히 믿음 안에서 견디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때때로 박해의 압력에 굴복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는 누구나 다 거짓 가르침의 유혹도 받는다. 우리의 죄 많은 마음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를 부르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까지도 성경이 알려주지 않는 잘못된 믿음에 설득되기도 한다. 항상 실패하는 우리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신실하게 견디셨다. 종교 지도자들의 거짓 가르침 속에서도 끝까지 버텼다. 체포되어 구타와 조롱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이라는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신실함을 유지했다.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므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우리가 넘어지고 또 넘어질지라도 그는 여전히 우리를 지키신다. 거짓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우리가 박해받을 때도 함께하실 것이며, 이 세상 끝날에는 죽음으로부터도 우리를 구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붙잡고 계신다. 당신이 받은 믿음을 굳게 붙잡고 가야 할 이유이다.원제: How to Hold On to Faith When 2023 Gets Toug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새해
고난
핍박
박해
인내
하나님을 중심에 둔 새해 계획을 세우자
by Jared Kennedy
2023-01-09
“목표를 세웠어. 심지어 습관까지 계획을 잡았고 삶의 규칙까지 명확하게 했었지. 하지만 내가 정한 규칙은 바인더에 적혀만 있을 뿐, 삶 속에서 구현이 안 돼. 적당하게 자고 일하고 또 경건의 시간까지 갖는 완벽한 삶을 꿈꾸지만, 아무리 수준 높은 계획을 세워도 수요일 오후까지도 채 지속이 안 돼. 모든 계획이 수요일이면 다 허사가 돼.” 내 동료의 고백이다. 당신도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되고 싶은 사람, 읽고 싶은 책, 몸에 배게 하고픈 습관까지 다 알고 있지만, 커다란 목표를 일상생활이라는 거친 현실 속에 맞춰 끼워넣기 위해서는 고군분투해야만 한다. 계획이 틀어질 때마다 바인더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내년 1월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할 게 아니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목표를 현실적으로 만드는 원칙과 동기 부여이다. 나는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가 바울의 “하나님 중심 관점”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목표 설정과 건강한 습관 유지에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열쇠를 발견했다.1. 하나님의 부르심은 믿음으로 충만한 훈련에 동기를 부여한다.우리는 목표를 세울 때 미래를 내다보는 경향이 있다. 이미 끝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다. 그러나 현명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원하는 삶의 모습을 먼저 상상한 다음에 역설계(reverse engineer)한다. 비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습관과 헌신에 집중한다. 저자의 말을 관리하는 편집자로서 내가 그들을 존중하는 방식은 탁월함과 꼼꼼함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The Copyeditor's Workbook(원고 편집자 워크북)이 제공하는 주간 연습을 통해 교정 능력을 키울 계획이다. 우리는 연습을 통해 기술을 배우고 악보를 보면서 악기를 연주한다. 탁월한 편집자가 목표이기에, 나는 반복해서 교정 연습을 할 계획이다. 이런 건 계획을 세울 때 나름 의미가 있다.그러나 나는 리델보스로부터 계획을 실천하겠다는 동기 부여는 목표를 내다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되돌아보는 과거에서 온다는 것을 배웠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에게 우리의 죽을 몸에서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을 때, 그가 그 명령의 근거로 삼은 건 다름 아니라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바울은 죄로 점철된 우리의 과거 삶의 방식이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다고 선언한다(롬 6:6).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은사를 사용하는 산 제물이 되라고 그리스도인을 도전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가 그런 명령을 내리는 근거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롬 12:1)이다.그리스도 안에서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날것의 훈련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전 15:10)는 말씀에 뿌리를 내린, 믿음으로 동력을 받는 훈련이다. 주님께서 내게 딸들을 주셨고 아빠로 부르셨기에, 나는 가족 예배와 부녀 데이트를 계획한다. 심지어 미래의 목표 달성을 위한 중심 영역인 직업에서도 나는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직업 속에 심어놓으신 진리에서 동기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나의 소질과 소명은 다 그분께서 이미 예비하신 결과이다(엡 2:10).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돌아보는 것은 훈련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활력을 주지만, 하나님 중심의 관점은 그보다 더 많은 역할을 감당한다. 2.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야망을 제어한다. 계획에 충실하려면 결심을 실행하기 위한 일정을 잡아야 한다. 매년 초 나는 이상적인 주간 일정을 담은 스프레드시트를 작성한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마다 그것을 참고하여 그때그때 필요한 수정을 추가한 후, 다음 주 일정을 리걸패드에 세로로 정리한다. 또 아무리 회의와 약속이 많아도 규칙적으로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이 적힌 구글 캘린더 일정만은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몇 년 동안 나름 꼼꼼하게 스케줄을 관리했다고 자부하지만, 여전히 내 모든 열망을 다 채우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거 같다. 때로는 게을러서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다. 때로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트위터 대신 일을 하기도 하고, 또는 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프라임 비디오(Prime Video)를 끄기도 한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죄 많은 게으름뿐만 아니라 지나친 야망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의미한다. 그건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또 직장인으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나의 한계를 아시며 나의 날수를 세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어떤 주간에는 계획한 모든 일을 다 실행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가도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드 드라이브가 망가진다. 아이들은 아프다. 교통 체증으로 출퇴근 시간이 길어진다. 그 결과 매년 2월, 그리고 8월 그즈음이 되어서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질 때마다, 나는 현실과 일치하는 목표를 만들기 위한 재조정 과정을 가진다. 나는 이것을 속임수 또는 포기로 보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매일 아침 기도 노트를 집어 들고, 체육관에 가고, 또 자기 전에 책을 읽는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책을 읽지 못하거나 운동을 거를 때면 깨닫곤 한다. 비록 내가 하나님만큼 바라는 것이 많을 수는 있어도 결코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한다는 뜻이며, 나의 모든 계획도 오직 하나님이 주신 시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시간과 상황 때문에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지만, 그 어떤 변동도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아멘, 그렇습니다!”라는 그의 확신을 흔들지는 못했다(고후 1:15-20). 바울에게 경건한 훈련이란, “내가 달음질한 것과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함”(빌 2:16)을 의미한다. 그것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엡 4:1). 리델보스는 이렇게 말했다. “‘합당하다’는 것은 공로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동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에서 파생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을 향해서 거룩하게 하셨고, 우리를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만드셨다.”당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속한 한 사람이라면, 새해 계획은 오로지 하나님 중심의 믿음에 뿌리를 두고 세우도록 하라. 동기 부여가 필요할 때마다 그가 당신을 누구라고 선언했는지 되돌아보라.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 때마다, 인도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믿음으로 바라보라. 원제: In 2023, Anchor Your Plans with a God-Centered Perspectiv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중심관점
헤르만리델보스
새해
새해계획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관을 위하여
제임스 K. A. 스미스의 세계관 읽기_3
by 김경호
2023-01-07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지난 두 편의 글을 통해서 제임스 스미스의 세계관이 가진 장점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공평하게,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비판점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스미스의 주장 스미스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자신의 기본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신념, 사상,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마음과 욕망의 형성에 관한 문제, 즉 지성이 아니라 상상력을 변화시키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성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급진적인 제자를 형성하는 것이고, 이는 기독교 교육과 예배의 근본 목적이다.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일련의 매커니즘으로 도식화됩니다. 먼저, 출발점은 인간론입니다. (1)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2) 이 욕망과 사랑은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어떤 목적에 이끌리고, 상상력(or 정서)에 사로잡힌다. (3) 이러한 욕망과 사랑, 그리고 목적은 몸에 새겨진 습관을 통해 “자동적 무의식적 실천”이 이루어진다. 몸의 자동성은 오랜 시간 반복되고 지속적으로 실천될 때 이루어진다.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비판 먼저, 개혁주의 신학에서 인간은 마음, 즉 “지-정-의”를 통해 실천(형성)해 나가는 존재로 이해해 왔습니다. 예배가 삶의 핵심인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형성은 예배만이 아니라 양육과 교제, 선교로 구성된 교회를 통해 유기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형성에는 철학적 인간론이 아니라 “영혼과 몸” 또는 “지-정-의”라는 성경적 인간론이 그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런 전통적 견해로부터 이탈된 급진적 정통주의의 입장에서 욕망-사랑, 몸-습관을 통해 형성해 가는 철학적 인간론으로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의 입장이 과연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입장인지 이론적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주요 비판점을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욕망-사랑,” “몸-습관-형성,” 그리고 “이야기-목적-상상력”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보고, 그 장단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비판 1: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한다. 인간은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욕망하고 사랑하는 존재라는 점, 이것이 스미스의 세계관의 출발점입니다. 그 근거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빌려온 것입니다.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에 대해서 서로 합의함으로써 뭉친 이성적 존재들!” 그리고 여기서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다”라는 명제가 나옵니다. 그러나 스미스는 자신이 차용한 이 근거 구절을 좀 더 복잡하게 서술합니다. 즉, 인간은 욕망하며 사랑하는 존재라고 말하며, 욕망과 사랑을 동일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책의 8권 6장 각주 2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참된 사랑이라야 사랑이라고 부를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욕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과 욕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스미스는 일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 책에서 사랑과 욕망을 구별하지 않았고, 에로스와 아가페도 구별하지 않으려 했다. … 이와 관련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카리타스caritas와 쿠피디타스cupiditas 사이의 구별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나는 이 둘 모두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델렉타티오delectatio라고 본다.” 여기서 스미스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해석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부합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맡긴다.” 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한 사랑과 욕망의 개념을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는 기존 용어가 가지는 의미와 정의를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비판 2: 인간은 자신과 사회적인 몸에 새겨진 습관을 통해 실천한다. 먼저, (1) 메를로퐁티는 지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의 기만적 단순성과 대조를 이루는 현장의 불분명하고 모호하며 거친 현실이다.” 조금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지각은 판단과 분석,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입니다. 이런 지각을 메를로퐁티는 “신체적 앎”으로, “지식보다 앞서며 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일종의 지향성을 통해 환경을 헤쳐 나가는 행위자” 즉 “의식보다 앞선 선지식”preconcious knowledge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된 습관화된 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스미스는 몸의 작동이 행위자 자체에게 무의식적이고 숨겨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2) 부르디외는 메를로퐁티가 지각이라고 부른 것을 아비투스(습관)라고 명명합니다. 아비투스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아비투스는 영속적이며 치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비투스는 사회적 몸이 내 몸보다 우선합니다. 둘째,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을 구성하는 전수된 이 성향은 ‘의식적 지향’ 없이 기능합니다. 그러나 아비투스는 의식적일 수도 있지만, 무의식적 지향이 의식적 지향보다 우선합니다. 그러나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인용한 근거자료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스미스가 인용한 메를로퐁티와 브르디외의 무의식적-자동적 형성은 형성의 한 면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단 스미스가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도덕적인 덕”이 “습관”을 통해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습관은 지성과 분리되지 않으며, 오히려 지성을 통해 더 탁월한 행위를 가지게 됩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는 습관을 지성과 분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연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근대의 존 듀이John Dewey의 인간본성과 행위에서도 발견됩니다. 듀이는 이렇게 간략하게 그 핵심을 말했습니다. “어떠한 습관 형성이든 예외 없이 지적 독특함이라는 초기 단계를 거치지만 지속적으로 성찰되지 않는다면 사유 없는 행동으로 끝나버린다.” 또한 “습관들이 서로 갈등하고 충동이 불러일으켜지면, 비로소 의식적 탐구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유와 습관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됩니다. 비판 3: 예배하는 인간은 이야기에 의해 목적에 이끌리고 상상력에 사로잡힌다. (1) 이야기. 스미스는 인간을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향이 이야기에 의해 근본적으로 형성되는 서사적 동물”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러한 서사, 즉 이야기가 우리의 감정적 지각 장치를 훈련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2) 이야기와 상상력. 이야기는 상상력으로 더 잘 이해가 되고, 철학적 인간론에서 이야기에 핵심 역할을 부여합니다. 따라서 “예전적 인간론은 이러한 몸/이야기의 결합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3) 이야기와 상상력과 목적. 또한 이야기는 “미학적 수단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예전에 몰입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특정한 텔로스를 욕망하는 사람으로 형성된다.” 좀 더 명확한 문장은 이렇습니다. “예전은 좋은 삶의 수행된 그림,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사랑과 갈망을 방향 짓는 왕국에 대한 전망의 상연된 수행으로서 은유와 서사와 드라마의 역학을 전달한다.” 종합해 보면, 예배는 이야기에 의해 상상력을 건드리며, 텔로스를 욕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스미스의 형성 개념은 이야기, 상상력, 목적과 연결된 논리입니다. 여기서 나의 고민은 스미스가 제시하는 이야기, 목적, 그리고 상상력이 포스트모던의 상황에만 한정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따른 비판점은 이것입니다: 과연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현재 분리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제임스 사이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근대의 가장 최근 단계로, 자연주의의 가장 최근 형태로 간주”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속에는 근대주의의 본질(신 없는 우주,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마이클 고힌과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도 동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지금 현시대의 상황은 네 가지의 징후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던” “소비주의와 세계화” “남반구 기독교의 부흥” 그리고 “이슬람교의 부흥”입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가운데 실세는 포스트모더니즘만이 아닙니다. 아직도 현실 속에서는 우리의 사회, 정치, 경제생활의 많은 부분을 모더니즘이 형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세계화의 과정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이런 측면에서, 대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야기”만으로는 이 시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이라는 두 가지 실세에 대한 인식하에, “이야기”와 “명제성” 또한 함께 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앨리스터 맥그라스의 주장이 우리에게는 큰 실마리가 됩니다. 맥그라스는 성경의 구조에서 교리(명제성)와 내러티브의 상관관계에 주목합니다. 일차적으로 성경 안에서 내러티브와 교리는 서로 얽혀 있습니다. 성경은 교리적 진술이나 추상적 원리라는 방식보다 주로 살아온 삶과 역사적 실존을 가리키는 내러티브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맥그라스가 이 둘의 관계에서 주목한 점은 “내러티브에서 교리로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입니다. 맥그라스는 이 질문을 통해 그 상관관계를 설명합니다. 맥그라스는 구스타프 아울렌Gustaf Aulen의 고전적 속죄론인 승리자 그리스도,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예수의 두 본성), 그리고 성육신 교리를 다루면서, 교리와 내러티브 사이의 상호작용이 있음을 분석해 냅니다. 이 상호작용은 한편으로는 “교리는 성서적 내러티브를 해석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제공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리는 임의적 틀이 아니라 내러티브에 의해 제안되고 암시되는 것입니다. 맥그라스는 내러티브로부터 제안되는 암시를 개념적 틀, 개념적 하부구조, 준-교리적 암시라고도 표현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내러티브는 일차적이고. 개념적 틀은 이차적입니다. 교리와 내러티브 간의 상호작용은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해석으로 나아가며, 개념적 틀은 하나의 교리로 확장됩니다. 맥그라스의 교리와 내러티브에 대한 논증의 장점은 교리가 외부 출처로서의 계몽주의적 전제에 의해 연역된 것이 아니라(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의 개념) 성경적 내러티브 자체로부터 해석되고 추론됨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내러티브는 내러티브에서 파생되는 개념적 틀보다 근원적이며, 우월하며,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 내러티브 자체만으로는 암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결함이 있으며, 따라서 내러티브는 교리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시한 것입니다.스미스의 세계관 읽기 전체 평가. 긍정적 측면. 스미스의 세계관이 제시하는 바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예배로부터 시작하고 형성되는 교육적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이 형성은 예배로부터의 형성과 함께, 이야기를 통해 상상력에 이끌리고, 목적에 사로잡히는 독특한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이러한 형성에는 역학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형성, 잘못된 형성, 대항적 형성, 경쟁적 형성과 같은 역학들입니다. 셋째, 이러한 형성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교회론으로서의 민족지학을 제안한 점입니다. 부정적 측면. 그러나 스미스의 세계관이 제시하는 바에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첫째, 스미스의 모던과 포스트모던에 대한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모던을 배제하고 포스트모던적 요소만 인정합니다. 그러나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그런 식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셋째, 스미스는 그가 인용한 학자들의 주장을 선택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스미스가 인용된 학자들의 주장에는 대부분 지성이 포함되어 있지만, 스미스는 자신의 전제에 따라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배제한다는 점입니다. 끝.
기독교세계관
제임스스미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욕망
사랑
성경을 읽자, 지혜를 복리로 쌓으려면!
by Tim Casteel
2023-01-06
성경 읽기는 복리 이자를 쌓는 것과 비슷하다. 중단 없이 꾸준히 읽는다면 당신의 이해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다. 어떤 면에서 성경은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단순하다. 동시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게 성경이다. 평생 읽어도 결코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내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는 왜 더 빨리 성경에 깊이 빠지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전임사역자 섬기면서도 매년 성경 전부를 통독한 것은 고작해서 지난 8년 동안이다. 25년 전부터 성경을 통독했더라면 내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하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시작하기성경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와 비슷하다. MCU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고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딱 50시간 정도를 투자하여 엔드게임으로 이어지는 마블 영화 21편을 모두 본다면, 결말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MCU에 대해 수년 동안 배운 사람의 경우 훨씬 더 깊은 수준에서 마지막 전투를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성경도 그와 비슷하다. 하지만 천 배는 더 깊은 수준에서 작동한다. 성경은 6,0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실로 다양한 테마를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짜놓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양탄자와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록 “나는 선한 목자이다”(요 10:11)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 큰 의미가 되어서 다가온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600년 전에 쓰인 에스겔 34장에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구하기 위해 강림하신다고 선포하셨다. “참으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나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아 주겠다. 양 떼가 흩어졌을 때에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 떼를 찾겠다. … 내가 그들 위에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도록 하겠다. 그 목자는 내 종 다윗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미가, 그리고 스가랴에서도 목자로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라는 예수님의 주장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의미가 있다.신약은 구약을 몇 번 읽으면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 누가, 바울, 그리고 베드로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보면서 자란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신약성경의 큰 주제가 완전한 영광으로 뚜렷하게 보인다. 부는 한 번에 축적되지 않는다. 워런 버핏의 자산은 1,070억 달러로, 그중 1,067억 달러는 쉰 살 생일 이후에, 1,030억 달러는 예순다섯 살 이후에 쌓은 것이다. 버핏의 비밀은 시간이다. 부를 얼마나 쌓는가는 얼마나 빨리 시작했는가에 달려 있다. 성경에 들어 있는 보물도 마찬가지이다. 지혜를 쌓고 싶은가? 어릴 때부터 읽기 시작하라. 내가 어렸을 때 누군가 내게 규칙적인 성경 읽기에 투자하라고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돈을 버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오늘부터 성경을 곁에 두는 것이다. 꾸준히 성경 읽기를 즐기게 되는 다섯 가지 이유1. 두뇌가 점점 더 읽기에 최적화될 것이다. 당신도 아마 대부분 다른 사람들처럼 책을 별로 읽지 않을 것이다. 수년간의 디지털 장치 때문에 인간의 두뇌는 이제 아예 집중하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었다. 지난 십 년의 세월이 파편처럼 부숴버린 두뇌를 단 한두 주 만에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뇌가 스스로 재배열되어 집중하고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성경 읽기를 점점 더 좋아하는 당신의 모습에 놀라지 말라. 2. 흩어진 단서를 연결하는 희열을 알게 된다. 독서는 지혜와 지식의 문을 연다. 책 읽기 광인 패트릭 오쇼너시(Patrick O'Shaughnessy)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다. “독서를 시작할 때, 당신은 별자리 속에서 상호 뚜렷한 연관성이 없는, 멀리 떨어진 점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한다. … 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불완전하지만 조밀하게 상호 연결된 점을 가지게 되었다. … 독서는 하면 할수록 더 큰 즐거움을 준다.”많은 사람에게 성경은 마치 뚜렷한 연관성이 없는 많은 점을 모아 놓은 집합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혼란스러운 느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읽으라. 열두 살짜리 우리 아이는 이번 여름부터 성경 읽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책 넓은 여백에 질문을 쓴다. 이건 무슨 말이지? 이 나라는 어디에 있지? 왜 이렇게 말하는 거지? 최근에는 시편 66:5-6(“와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라. … 그가 바다를 마른 땅으로 변하게 하셨으니”)의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이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아주 좋은 질문이다. 보통 마른 땅은 저주이자 형벌이다. 하지만 지금 시편 기자가 언급하는 것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받은 하나님의 자비이다. 이런 식의 연결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 친숙해짐에 따라 성경 모든 곳에서 나타날 것이다. 3. 지식 기반이 늘어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간직한다”(잠 10:14). 축적된 지식과 지혜는 함께 간다. 매리언 울프(Maryanne Wolf)는 다시, 책으로: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Reader, Come Home: The Reading Brain in a Digital World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평생 우리가 읽는 모든 것이 이해 능력의 기초가 되는 지식 저장소에 추가된다. … 그건 무엇을 읽건 관계없다.” 읽을 때마다 우리는 사실상 지식 은행에 예금을 한다. 여러 해 동안 쌓아온 지혜를 인출할 때, 성경의 위대한 진리는 실로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4. 독서는 습득해야 하는 기술이다. 깊은 독서는 깊은 생각을 낳고, 깊은 생각은 깊은 독서를 하도록 한다. 아름다운 선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매일 성경 읽기에 고작 2분을 할애하면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 (물론 2분도 아예 안 읽는 것보다는 낫다!) 어렵더라도 끊임없이 읽으면, 어려운 내용도 점점 더 쉽게 읽을 수 있게 된다. 두뇌를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 어려워도 낙심하지 말라.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서 성경을 읽어라. 그리고 말씀이 당신 앞에서 어떻게 열리는지를 확인하라. 5. 성경은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오래된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알려지기를 원하셨고, 그렇기 위해서 책을 쓰셨다. 당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그의 영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지혜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요 16:13). 정기적으로 성경 읽기 습관을 갖겠다는 당신에게 그 사실은 큰 격려가 된다. 이전에 성경 읽은 적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말라. 2023년을 당신의 해로 만들어 보지 않겠는가? 미래의 당신이 2023년의 당신에게 고맙다고 말할 것이다. 원제: Read Scripture for Compounding Interest in 202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경읽기
독서
새해에도 변하지 않을 진실, 다섯 가지
by Phil Thompson
2023-01-05
2020년부터 나는 삶의 모든 규범, 내가 살면서 기대하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뒤집히고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새해에 자동차 대출을 받을 수 있을까? 달러의 구매력이 행여 약해지는 건 아닐까? 우리 아이들의 문제가 나아질까, 아니면 나빠질까?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아니면 행여라도 나를 배신하는 친구를 만나는 건 아닐까? 정치가 교회에 더 깊은 분열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 누구나 새해에 대해서 아는 건 별로 없다. 그러나 말씀으로 돌아가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거기서도 특히 시편 90편은 달력이 12월에서 1월로 넘어가는 기간에 특히 더 중요한 변함 없는 진실들을 알려준다. 1.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이시다.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시 90:1-2)해를 거듭할수록 내 삶에서 가장 큰 진리는 하나님의 임재는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거기에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것이다. 올해 내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실 것이다. 아무리 거센 폭풍이 몰아쳐도 하나님은 항상 나를 위해 계실 것이다. 나는 모세가 그 옛날 이 시로 드린 기도를 좋아한다. 그는 단지 저 밖에 계신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거처이신 하나님, 내 삶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 내 생명이 위협받을 때 당장 달려오시는 하나님을 묘사했고, 바로 그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2. 올 한 해도―내 삶도―사라져갈 것이다.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순간과도 같습니다.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풀은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시 90:3-6)두 번째 진실은 나쁜 소식이다. 안전한 거처가 필요한 이유는 삶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11월이 다가올 것이고, 우리는 다시 한번 연휴의 분주함에 빠져들 것이다. 올해에도 놓친 기회, 비생산적인 주간, 그리고 수많은 좌절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올해에도 사람들은 이곳저곳에서 죽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이 변함없듯, 인류의 필멸성과 인간 노력의 일시성도 변하지 않는다. 3. 죄 때문에 생긴 슬픔과 고통이 더 날뛸 것이다.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사라지고,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주님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들추어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분노의 위력을 누가 알 수 있겠으며, 주님의 진노의 위세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시 90:7-11)또 다른 “불변의 나쁜 소식”은 올해가 단지 나를 삶의 끝으로 일 년 더 가까이 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해에도 반드시 어느 정도의 악이 세상을 채울 것이다. 고통과 박해, 질병과 슬픔이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올해에도 내 몸에서 아담으로 인한 죽음의 먼지를 느낄 것이다. 삶과 가정, 직장에서도 저주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피조물이 탄식할 때 나는 함께 실망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롬 8:22-23). 올해에도 나는 나의 더러운 죄성을 더욱더 분명하게 볼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진노가 더욱더 커질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4. 하나님의 자비의 언약에 내가 만족할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 (시 90:12-15)그다음 진리는 삶의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소망의 광선이다. 삶의 불만족 속으로 하나님께서 만족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슬픔 속으로 기쁨을, 깊은 고통 속으로 환희를 가져다주실 것이다. 잃어버린 세월은 잠시요, 회복의 시간은 영원이다. 눈을 뜨고 똑바로 보면, 새로운 달력을 꺼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 이생과 내생을 아우르는 위대한 진리에 비추어 우리 삶을 점검할 기회이다. 새해에는 나를 하나님의 품으로 더 깊이 인도하여 그의 품을 기뻐하고 그의 다시 오심을 더 간절하게 갈망해야 한다. 또 다른 해를 만난다는 것은 그의 나라가 도래하고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더욱더 간절하게 바라는 새로운 시간이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5. 하나님은 나의 노력에 항상 미소 지으실 것이다.주님의 종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 주시고, 그 자손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십시오.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 90:16-17)마지막 진리는 단지 낙심한 마음을 격려하는 것을 넘어 연약한 나의 손을 강하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알게 되었다. 주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새해를 맞았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더 임하기를 기도하며 힘차게 섬겨야 한다.하나님의 은혜라는 태양 아래에서 일하기에 우리에게는 올해에 만날 각종 수고와 어려움, 고난과 좌절도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은 내 삶에 하나님의 미소를 영원히 보장하셨다. 새해에도 이 변덕스러운 나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변함없으신 일을 이루어나가실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원제: 5 Constants for the New Yea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불변성
새해
모세의시
시편90편
초보자에게 추천하는 성경 읽기 계획
by Bernard N. Howard
2023-01-01
성경 66권 전체를 읽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뜸만 들이고 있다? 더는 망설이지 말자.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께서 지으신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드러낸다.많은 사람이 일 년 안에 성경을 다 읽어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서는 성경 통독에 나선다. 2023년이 당신에게 바로 그런 해라면, 당신에게 연간 성경 통독 표를 활용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읽기 표는 함께 뛰는 동료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목표 시간을 달성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선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일일 분량을 관리할 수 있는 시간표의 도움 없이는 일 년 안에 성경 전체를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시편-에스겔 계획내가 지난 몇 년간 활용한 성경 통독 표는 일명 ‘시편-에스겔 읽기표’이다. 이 계획표에도 두 개의 트랙이 있는 건 다른 여러 계획표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계획표도 날마다 성경의 두 부분을 따로 읽도록 한다. ‘트랙 1’은 시편과 에스겔을 뺀 구약 읽기다. ‘트랙 2’는 시편과 에스겔에 신약을 더한 것이다. ‘시편-에스겔 읽기표’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트랙 1’을 따라서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하루 두 장씩 읽는다. ‘트랙 2’를 따라서는 시편과 에스겔은 하루 두 장씩 읽고, 그다음에 신약에 들어서면 하루 한 장씩 읽는다.내가 이 계획을 좋아하는 이유1. 과하지 않다연간 성경 읽기 계획표가 많이 있기는 하지만, 개중에는 초보자보다는 베테랑에게 맞는 게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많이 사랑받는 맥체인 성경읽기표(M’Cheyne Bible Reading Plan)는 신약과 시편은 1년에 두 번 읽고, 나머지 구약은 한 번 읽도록 요구한다. 부담이 적지 않은 독서량이라 성경 통독 초보자에게는 최고의 선택이 아닐 수 있다.묵상 글이 들어 성경읽기표도 있는데, 아무리 도움이 되더라도 결국 읽을 분량이 그만큼 늘어난다. 이 계획에는 구약과 신약만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편-에스겔 읽기표’는 구약과 신약만 읽는다. 2. 다채롭다우리 어머니가 즐겨 하시는 말씀이 있다. “다채로움(variety)은 삶의 양념이야.” ‘시편-에스겔 읽기표’는, 다른 ‘투 트랙’ 읽기표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가져온 두 가지 일일 분량을 제시한다. 이 때문에 성경 읽기에 양념을 치는 효과가 생긴다. 한쪽 분량이 좀 따분하더라도, 다른 쪽 분량은 흥미진진할 수 있다. 3. 간단하다나의 첫 성경 통독은 친구가 놀랍고도 간단한 매일 읽기 계획을 추천해 주면서 시작됐다. “구약에서 세 장, 신약에서 한 장.” 그 계획이 단순했다는 건 곧 읽을 분량이 바로 눈에 보였다는 말이었고, 이는 다시 해낼 만해 보였다는 뜻이다. 그 계획이 도움이 되었던 또 한 가지는 달력에 적힌 읽기 목록을 계속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이다. (인쇄된 목록은 잃어버릴 수도 있고, 온라인 목록은 폰을 내려놓고 조용한 시간을 가자는 걸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디까지 읽었는지만 기억하면 되었고, 그다음에는 구약에서 세 장을 읽고 신약에서 한 장을 읽으면 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성경 읽기를 열두 달로 골고루 배분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 계획표대로 읽으면 열 달 만에 성경을 다 읽게 된다. 이는 곧 하루 독서량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말도 된다.)‘시편-에스겔 읽기표’도 간단하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달력을 참고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전날 어디에서 읽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면, 목록을 내려받아서 손이 닿는 데 보관하면 된다. 이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약 트랙은 연말이 되기 약 일주일 전에 끝난다. 남은 며칠은 구약에서 혹시 놓친 데가 있으면 [가령 시편 119편처럼 너무 길어서 놓쳤다면_역주] 그 부분을 보완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면 된다.다른 연간 성경읽기표들도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시편-에스겔 읽기표’가 목표를 이루는 가장 수월한 계획이 될 것이다.원제: Easy Schedule for Bible-in-a-Year Rooki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경읽기
성경통독
시편-에스겔읽기표
올해도 성경 통독에 실패했어요
by Phil Thompson
2022-12-31
내 사무실 선반에는 일곱 살 때 할머니로부터 받은, 예수님 말씀은 빨간색으로 인쇄된 파란색 가죽 장정의 킹제임스성경이 꽂혀 있다. 이 성경은 할머니가 내게 남긴 보물 중 하나이다. 할머니는 성경을 읽다가 “믿다”나 그 동의어가 나오면 밑줄을 그으라고 하셨다. 내가 단어의 숫자를 정확하게 맞추면 할머니는 상을 주시곤 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세심하게 말씀을 읽으며 ‘믿다’와 그 동의어에 동그라미 친 어린 시절의 흔적은 성경에 여전히 남아 있다.열 살 때 처음으로 신약성경 통독을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적절하지 않은 내용 때문에 조금 불편해하는 부모님의 복잡한 감정에도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한 살이 되어서는 구약 통독까지 시작했다.그렇게 나는 해마다 성경을 통독했다. 십대 초반에는 지금은 돌아가신 사랑하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선물로 주신 Adventure Bible을 읽었는데, 이런저런 낙서로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서 상을 받기 위해 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성경 통독은 끝났다. 그 시절 나의 영적인 삶은 말 그대로 격변기를 겪었는데, 하나님과 복음 자체에 대한 생각이 수시로 바뀌었다. 성경 통독에 나 자신을 던질 만한 동기 부여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몇 번이고 성경 통독을 시작했지만, 성탄절 불빛이 환할 즈음 성경에 꽂힌 책갈피의 위치는 언제나 레위기 어디쯤이었다. 몇 년 동안 나는 낙심, 좌절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지난 십 년은 성경 그리고 성경 속 하나님과 다시 관계를 맺는 과정이었고, 나와 비슷한 여정에 있는 소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 기간에 나의 성경 공부를 구성한 네 가지 핵심 요소는 연간 성경 통독의 기쁨까지 회복시켰다. 비로소 나는 새롭게 통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 기대 수준을 재정의하라.교회 역사를 공부할 때 누리는 큰 축복 중 하나는 지난 이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성결하고 신실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다 간 신앙 선배를 만나는 것이다. 그들 중 연간 성경 통독을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아예 성경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또는 문맹이었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묵상와 암송, 경청과 교제를 통해서 영적 탐구의 자유를 누렸다. 이런 사실은 어쩌다 성경을 읽지 않고 하루를 지난다고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나를 해방해 주었다. 성경 읽기의 실패가 결코 믿음의 실패가 아니라고 신앙의 선조는 나를 격려하고 가르쳐주었다. 어느 날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는 의대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시간 없다는 그들의 변명을 일축한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예외는 딱 하나 있습니다.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입니다. 그들에게는 정신적으로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접한 다음에 나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러 엄마를 격려하기 위해 이 예화를 사용했다.성경 통독과 관련한 기존 기대치에 대한 관점을 바꾸라. 말씀 안에서 우리를 만나기를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더 알고 싶은 동기가 오히려 더 커질 것이다. 2. 범위를 재정의하라.성서 전체가 아니라 한 권 읽는 것을 목표로 삼는 건 어떨까? 때때로 적은 게 더 큰 결과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 특정 성경에 관해서만은 교회에서 알아주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 일 년을 투자하라. 여러 우물 대신 한 우물을 깊이 파 보라. 성경 한 권을 파고들기 위해서는 노트를 준비해야 한다. 본문에서 영감을 받아 기도문을 작성하고, 매일 책임감 있는 파트너와 공유하라. 주석을 사용하여 당신의 생각과는 다른 해석이 있는지 살펴보고 도움을 받아라. 해당 성경의 주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단어 연구를 수행하라. 일부 또는 그리 길지 않은 성경이라면 전체를 암송하라. 당신이 교회 지도자라면 연말까지 교회를 위한 학습 지침서를 제작하겠다는 목표를 세우라. 그러나 기억하라. 천천히 나아가는 성경 읽기를 통해서 영혼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3. 기간을 재정의하라.기간이 지남에 따라 집중하는 시간은 눈에 띄게 줄어들기 마련이다. 직장과 집에서 할 일이 늘어감에 따라서 일 년 동안 매일 같은 방식으로 성경 읽기를 반복하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이어트와 운동 계획이 대체로 일 년이 아니라 석 달을 기한으로 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 나도 일 년이 아니라 석 달 통독 계획을 세웠다. 석 달은 내가 바짝 집중할 수 있을 정도의 짧은 시간이다. 비록 노동집약적이지만, 이 정도 기간이면 몇 가지 일이라도 집중해서 다 수행할 수 있다. 게다가 목표는 가시적이고 연초 달성이 가능하다. 삼 개월만 집중하는 게 너무 짧게 느껴지는가? 그런데 나는 심지어 한 달 계획을 수행한 적도 있다. 집중 기간을 통해서 당신은 성경에 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고도 성경 공부를 더 깊이 할 수 있는 11개월이 남아있다!4. 방법을 재정의하라.목발을 사용하라. 오디오북을 배제하는 순수 독서주의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오리지널 성경은 오디오북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원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또 초기 신약 교회에서 큰 소리로 읽혔다(느 8:1-3; 딤전 4:13).역사서(창세기-욥기, 마태복음-사도행전)의 경우에 오디오 성경을 통해서 더 큰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오디오 성경을 들을 때에도 성경책을 옆에 두라. 필요할 때 더 깊이 연구하거나 메모를 하도록 하라. 마음에 드는 성우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ESV 앱은 다양한 성우를 소개한다. 매년 다채로운 방식을 사용하여 통독의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다. 문자주의 중심의 텍스트를 선호한다면, 다음 일 년 동안 NASB를 사용하라. 보다 우회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면, NLT를 권장한다. 구어체 영어를 선호하는 경우, NASB와 NLT의 중간 형태인 CSB 또는 ESV를 추천한다. 텍스트를 새로운 방식으로 듣거나 읽는 것은 통독 과정의 “뻔함”(sameness)을 깨는 데 도움을 준다. 성경은 우리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도록 기록되었다(요 5:39). 성경 연간 통독에 대한 생각을 재정의함으로 새로운 눈으로 성경을 읽는 놀라운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원제: Help! I Failed My Year-Long Bible Reading Pl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경통독
성경읽기
성경묵상
경건의 시간(QT)을 또 놓쳤나요?
by Kaitlin Miller
2022-12-30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우리 주님과 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또 늦잠을 잤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문제에 부닥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아침에 경건의 시간을 갖는 건 물론 아니다. 하루의 마감을 경건의 시간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점심시간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건의 시간을 놓치는 경험은 거의 모든 사람이 한다. 그게 하루 또는 그 이상이 되기도 한다. 기도 시간에 공상에 잠기거나, 딴생각하면서 성경을 읽기도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보내는 아침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 나를 사랑하시는 왕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경외심 외에도, 왕과 나누는 교제는 나를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꾼다. 오직 그분만이 내 안에 형성하실 수 있는, 오늘 하루 꼭 필요한 안정감과 힘을 얻을 수 있다(벧전 3:8).그러나 주님은 내가 종종 늦잠 또는 작업 때문에 경건의 시간을 단축하거나 아예 빼먹는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럴 때면, 하루를 시작하면서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좀 더 속도를 늦추고 양보해야 할 때도 그러지 못하고 조바심을 낸다. 주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고 그가 주시는 쉬운 짐과 가벼운 멍에를 메는 대신에, 나는 하루가 주는 책임의 무게에 아예 압도당하기도 한다. 또 영적인 지혜보다 인간적인 이유에 더 근거해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주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지 않은 날이면, 나는 종종 밤늦게 그분의 말씀을 펴고 반성한다. 내가 과연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제대로 살았는지, 그리고 그렇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아,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럼 그런 날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1. 정죄하지 마라.첫 반응이 절망감이라면,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 어떤 정죄함도 없다(롬 8:1). 그리고 선행도 매일 성경 읽기도 그 어떤 것도 결코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엡 2:8-9).다른 것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죄를 지었다면,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 내가 지은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알고 있다(요일 1:9). 그 무엇도, 빼 먹은 경건의 시간도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8-39).2. 우선순위를 지키라.아무리 정죄하지 않고 또 용서를 확신한다고 해도, 빼 먹는 경건의 시간이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고 결국에는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구약의 모세와 신약의 예수님은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양식보다 더 필요한 양식으로 묘사했다(신 8:3; 마 4:4). 성경은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을 비추는 빛이다(시 119:105). 오로지 성경만이 내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할 수 있다. 마음은 너무나 기만적이어서 성경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렘 17:9; 히 4:12). 성경은 또한 원수의 간계에 대항하는 유일한 공격 무기이며(엡 6:17), 우리 믿음의 근원이다(롬 10:17).그렇기에 경건의 시간을 놓친 날이면, 정죄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훈련의 결과로써 종일 마음이 무거울 것이다.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 숙면하지 않으면, 다음 날 약간 나른하고 몽롱하다. 경건의 시간을 갖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루를 보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날이면 두드러지는 부족함을 너무 잘 알기에, 나는 더욱더 그 시간을 가지려고 결심한다. 3.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라.우리 삶에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 나를 더 온전케 하기 위해서,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진리에 우리를 매어 주기 위해서(약 1:17),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가르침, 책망, 바로잡음, 그리고 훈련이 필요하다(딤후 3:16-17). 비록 책상에 앉아서 제대로 한 시간 성경을 읽지 못했다고 해도, 여전히 창의적으로 그 결핍을 해소할 방법이 있다. 단, 정기적인 대체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출퇴근 길에 듣는 오디오 성경은 어떤가? 점심시간에 한 장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않은가? 다른 작업을 완료하는 동안 말씀에 근거한 좋은 가사의 찬양을 듣는 건 어떨까? 집중해서 읽는 성경 말씀이 가장 좋겠지만, 비록 그렇게 못하더라도 조금씩이라도 읽는다면, 아예 읽지 않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4. 기도하라.경건의 시간을 제대로 가진 날과 그렇지 않은 날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요 1:1; 마 28:20). 그분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으시다. 너무 가까워서 우리가 단지 손만 내밀면 된다(행 17:27). 우리는 성령 안에서 모든 경우에, 모든 구할 것을 들고 나가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살전 5:17; 엡 6:18).아무리 바쁜 날이라고 해도, 잠시 틈을 내어서 주님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사무실, 출퇴근 길, 싱크대, 교실, 공항 등등, 생명의 주와 교제하지 못할 곳은 없다(행 3:15). 성경책을 손에 들고 경건의 시간을 보내는 데에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그 길만이 그분이 우리를 초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5. 계획을 분석하라.우리는 과거의 실수에서 배움으로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 전날 밤에 너무 늦게 자서 늦잠을 잔 건 아닌가? 소셜 미디어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닌가? 한적한 장소가 아니라 거실 같은 분주한 곳에서 성경을 읽으려고 했는가?진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혹시라도 경건의 시간이 내게 최고의 우선순위가 아니기에 놓친 건 아닌가? 내가 행여라도 그분의 말씀이 스스로 증언하는 것처럼 내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탄 원수는 내가 성경 읽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래서 경건의 시간을 못 가지게 하려고 온갖 계략을 다 쓴다.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식별해야 한다. 동시에 나의 약점을 파악하고 제대로 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을 의지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 안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딤후 1:14).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가 이기지 못할 만큼 큰 유혹이란 있을 수 없다(고전 10:13). 심지어 밤늦게 TV를 보거나 일어나자마자 확인하는 이메일조차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매일 아침 새로운 자비하심하나님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다(애 3:22). 비록 오늘 아침 늦잠을 잤다고 해도 그렇다. 그리고 내일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이 금보다 귀하고 꿀보다 달다는 사실(시 19:10)을 상기하자.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나 자신을 맡김으로써 우리는 오늘도 평안히 누워 잠을 잘 수 있다(시 4:8). 내 믿음이 부족할 때조차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시다(딤후 2:13).원제: Missed Your Quiet Time? Do Thi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경건의시간
큐티
하나님의말씀
성경묵상
처음
이전
11
페이지
열린
12
페이지
13
페이지
14
페이지
1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