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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교회, 가정을 넘어 실천으로!
제임스 K. A. 스미스의 세계관 읽기_2
by 김경호
2022-12-26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주일/날/예배를 넘어서는 실천 반성.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주일/날/예배에 관한 크리스천 셰런Christian A. B. Scharen의 예리한 비판을 소개합니다. “주일 아침, 이웃들이 집에서 신문을 읽는 시간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가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그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셰런의 비판은 스미스에게 그만큼 풀어야 할 까다로운 숙제입니다. 왜냐하면 한 시간 반 동안 드리는 예배가 그 이후 나머지 시간에 비하면 무엇인가를 형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스미스는 이런 까다로운 숙제를 왕을 기다리며에서 “대부 문제”라고 표현합니다. 대부 문제란 주일/날/예배와 실천의 모순을 의미합니다. 스미스는 “대부”The Godfather라는 영화에서 한편으로는 세례식을, 다른 한편에서는 그와 대비된 불법 거래, 협박, 착취, 폭력으로 결속된 가족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례식과 폭력이 교차하는 상황 속에서 아이의 대부는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다음과 같이 축도를 받습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주께서 당신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이 영화는 우리가 주일/날/예배를 드리지만, 잘못된 형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평생 주일/날/예배를 드리지만 성화의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안. 여기서, 스미스는 주일/날/예배를 넘어서는 실천을 제안합니다. 첫째, 주일 아침 예배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러함에도 이 시간은 밀도가 높고, 의미로 가득 차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감안할 때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그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스미스는 문화에 대한 수도원적 절제를 제안합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한 몰입의 양보다는 살아 있는 본보기(몰입의 질)가 되어야 하고, 일부 문화에 대해 문화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자제하는 것입니다. 셋째, 날마다 예배하는 습관입니다. 이러한 날마다 예배하는 습관은 교회사의 풍성한 유산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예배의 실천을 넘어 양의 도전에도 맞서야 합니다. 즉 부엌 식탁, 기숙사 방, 대학 채플, 구내식당, 레스토랑, 나무가 우거진 길에서도 공동체적 실천이 일어나야 합니다. 주일/날/예배를 넘어서는 실천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하는 또 다른 기회입니다.스미스는 습관이 영성이다에서, 주일/날/예배의 실천의 핵심을 모임, 들음, 사귐, 보냄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설명합니다. 모임은 예배로의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예배와 달리, 예배로의 부름으로 시작되는 예배에서는 예배 가운데 일하시며 우리가 그곳에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습니다. 예배로의 부름은 우리 삶에서 창조주의 으뜸 되심과 주권을 매주 재연하는 행위입니다. 들음은 하나님의 율법, 즉 우리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이 선포되는 것을 듣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괴로운 멍에가 아니라 오히려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로 만들고 우리 자신을 구속 드라마의 등장인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얻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사귐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창조주와 만찬을 나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초대받았기에 그들과도 화해해야 합니다. 이는 사회적 실체, 심지어 정치적 실체의 재연입니다. 예배의 마지막 장인 보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본래 받은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아 숨 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라는 성전에서 살도록 보냄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축복이자 가라는 명령을 담은 축도로 마무리됩니다. 칼뱅은 교회의 예배가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을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새로운 이야기 안으로 이끄시는 영적 운동을 단계적으로 하게 만드시는 체육관이라고 했습니다. 이야기에 몰입할 때 (이 체육관에서) 성령이 당신의 습관을 바꿔 놓으실 것입니다.교회/공간을 넘어서는 실천반성. 명백한 교회의 실패.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성령의 사역이 가장 강력하고 열정적으로 이뤄지는 공간은 그럴 가능성이 가장 작아 보이는 곳, 바로 교회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교회의 실패입니다. 스미스는 왕을 기다리며에서, 이러한 교회의 현실에 대해 묻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그토록 많은가?” 그 이유는 우리가 성화와 변화를 위한 공간인 교회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있지만, 교회 예배에만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쟁하는 도제 살이에 예속되어 있고, 경쟁하는 욕망의 교육에 동시적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지만 동시에 노예무역에 종사하여 인간을 상품화하고, 그들을 비인간화시킵니다. 포르투갈 노예선은 이것을 필요악이라고 정당화시키고 그들의 수치를 숨기기 위해 밤에 몰래 아프리카 노예들을 배에서 내리고, 교회의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두 흑인 소년을 교회에 노예로 바칩니다. 월리 제임스 제닝스Willie James Jennings는 이러한 관행이 국가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참여가 아니라 교회 자체에서 시작된 내부 기획이라고 비판합니다. “교회와 성직자들이 신세계에서 국가의 세속적인 일에 참여했다거나 신세계의 시간적 질서에서 교회의 존재가 이차적으로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아니다. 교회는 정복자들과 함께 들어갔으며, 에스파냐인 정복자들의 진영 안에서 그들과 더불어 진영을 세웠다. 인디오 세계의 질서 재편은 기독교적 형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식민주의와의 공모를 막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교회의 실패입니다! 제안. 스미스는 반성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교회론과 민족지학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크리스천 셰런은 “교회론으로서의 민족지학”이라는 형태로, 존 밀뱅크John Milbank는 “신학과 사회이론”이라는 형태로 제시합니다. 쉽게 말해, 신학자들이 놓친 이단을 사회학자들이 발견하게 하는 것이자, 더 나아가 민족지학자로서의 목회자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스미스는 민족지학자로서의 목회자의 역할을 제안합니다. 첫째, “회중을 둘러싸고 있는 제국의 의례들을 읽어 내는 민족지학자가 됨으로써 회중을 섬기고, 성경적, 신학적 렌즈를 통해 회중이 후기 근대 민주주의의 의례를 읽어 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읽어 내는 것과 함께 해석도 필요합니다. 둘째, “지상 도성의 의례를 폭로하는 것과 함께 더 나아가 천상의 시민권을 계발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 시민권은 곧 우리에게 소명이자 부르심입니다. 이런 점에서 목회자-신학자에게는 기독교 예배에 암시된 선(텔로스)에 대한 본질적, 성경적 전망을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공간을 넘어서는 실천반성. 스미스는 습관이 영성이다에서 가정에 대한 반성을 표현합니다. 가정은 사랑을 키우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교회라는 첫 번째 가정 내에 위치시켜야만 가정에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고, 교회의 예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일 아침의 예배와 주중에 우리의 실존을 규정하는 예배가 상호작용함으로써 가정을 넘어 교회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가정은 결혼에서부터 잘못된 형성의 시작점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혼은 급성장하는 결혼 산업과 함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결혼 자체를 과시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증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혼의 소중함이 아니라 결혼의 화려함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노력보다 결혼식이라는 과시적 화려함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을 과시하고, 사랑을 과시하지만, 그 이면에 배우자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 내가 원하는 바를 이뤄 줄 사람일 뿐입니다. 결혼은 일종의 과시이자 자기애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혼여행은 둘만을 위한 것이고, 자녀는 결혼의 흥을 깨는 존재이므로 자녀는 천천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결혼관은 가정을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위치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가정을 작은 교회로 만들게 하지 못합니다. 이런 결혼과 신혼여행 이후에, 가정 예배는 형성적 힘을 가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의 형성이란 보호받는 가정이 아니라 세상으로 파송하는 또 다른 재정향의 공간으로서의 가정일 경우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안. 스미스는 가정에서 교회 건축하기를 형성하기 위한 몇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 무엇보다 저녁 식탁 자리의 형성의 힘을 강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녁 식탁은 자녀들에게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권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재미를 우선으로 하는 청소년 집회와 프로그램은 사실상 자녀들이 교회와 신앙을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부모와 성인들의 창작품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더 광범위한 하나님의 집 안에 자리 잡게 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어른과 떼어놓는 방식이 모방과 형성의 기회를 제거하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단순히 교회 안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인 줄 착각합니다. 따라서 스미스는 가정에서 청소년을 형성하는 교육은 교회 안 다른 곳(청소년부 예배실)이 아니라 어른들과 함께 예배당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에 초점을 맞추는 모형은 다른 연령대의 계층과 어려움에 직면하고, 청소년과 어른들을 분리해 버리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따라서 재미를 추구하는 교육은 결국 소셜 미디어에 조장된 자아에 초점을 맞추게 됨으로써 잘못된 형성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가정은 교회라는 일차적 가정 안에 위치해야 하고, 교회는 우리가 습득한 자기중심주의를 바로잡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스미스는 가정에서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서 형성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것은 “학생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형성하고자 한다면, 먼저 형성하는 이들을 형성해야 한다. 즉, 우리가 먼저 재형성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가정의 형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가 부모 자신의 형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덕은 반드시 본보기를 통해 흡수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미스는 가정과 교회를 넘어 창조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세상을 창조세계로 이해하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부르심임을 깨닫는 것이다. 성령은 당신에게 들을 귀와 볼 눈을 주셨으므로 창조세계는 우리를 부르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방이요, 그 자체가 초대장이다.” 주일 날 드리는 예배가 교회와 가정이라는 공간을 넘어, 창조세계로 확장되기를!
제임스스미스
세계관
예배
교회와가정
외로운 이들에게 오신 평화
by Quina Aragon
2022-12-25
말씀 주님, 나를 돌보아 주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외롭고 괴롭습니다.내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나를 이 아픔에서 건져 주십시오.내 괴로움과 근심을 살펴 주십시오. 내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내 원수들을 지켜 봐 주십시오. 그들의 수는 많기도 합니다. 그들은 불타는 증오심을 품고, 나를 미워합니다.내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 나를 건져 주십시오.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피난처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시편 25:16-20)묵상2년 전 12월, 우리 부부는 콜롬비아 음식(남편 모국 쪽)과 필리핀 전통(내 쪽), 그리고 죽음의 고통을 앞에 놓고서 성탄절을 축하했다. 그해 내내 비극은 하나씩 계단식으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우리는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좋은 아침, 근데 오늘은 긴급 상황이 뭐야?” 하지만 그때까지도 우리는 끔찍한 비극의 한 해가 더 남았다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 몇 년, 그렇게 우리는 모두 죽음의 찌르는 고통에―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에, 꿈의 죽음에, 또는 어쩌면 공동체 생활의 죽음에 시달렸을 터이다.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나는 외롭고 괴롭습니다”(16절). 게다가 성탄절이면 외로움이 더 심해지곤 한다. 외로움은 고통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다들 이 고통을 인정하길 꺼린다. 심지어 우리는 외로움을 죄와 혼동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데 어떻게 외로울 수 있을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한 거 아닌가?’ 물론 외로움은 인류 반역의 부산물이다(창세기 3장). 하지만 외로움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하나님께 하찮은 일인 것도 아니다. 다윗 왕은 외로울 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돌이켜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자신의 죄와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죄로 인해 평안이 없음을 알았다. 그는 외쳤다. “내 괴로움과 근심을 살펴 주십시오. 내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18절). 우리는 이것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짊어진 복합적인 슬픔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분풀이하거나, 성적인 죄가 주는 부질없는 쾌락에 빠져도 되는 인증서라도 되는 양 착각한다.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진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평안을 갈구한다. 그러나 다윗은 또 이렇게 외쳤다. “내 원수들을 지켜 봐 주십시오. 그들의 수는 많기도 합니다. 그들은 불타는 증오심을 품고, 나를 미워합니다”(19절). 본질적으로 그는 외치고 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또 나한테 죄를 지은 이도 많습니다. 그 두 가지가 다 나를 아프게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다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누려야 하는 평화와 온전함을 위협한다. 우리는 부서져버렸다. 그러나 다윗의 더 큰 자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베들레헴 외로운 밤 어느 구유에서 꼬물거리며 그가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 어느 외로운 밤에서 몸부림칠 때, 그의 외침이 또 한 번 터질 것이다.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로부터 분리되어 궁극적인 외로움을 겪으시는 한낮의 어둠을 뚫고, 그의 마지막 절규가 다시 천지를 진동할 것이다. 그의 오심은 당신과 하나님, 당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영원한 평화의 확보, 곧 외로움을 향한 죽음의 선고를 의미한다. 응답시편 25편의 이 말씀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오늘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특정 문제를 적용하여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고통을 들으시고, 돌보시며, 또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신다는 것을 제발 믿으라.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아평화를 말하라, 이제 우리 하나님이 말씀하시니.위로하라, 그늘에 앉은 이들을, 슬픔에 짓눌려 울부짖는 이들을.예루살렘에 말하라,평화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모든 죄를 말하라, 내가 덮을 것이라고,이제 전쟁은 끝났다고.―Johann Olearius, “Comfort, Comfort Ye My People”원제: An Advent Meditation: Peace in the Loneline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탄묵상
성육신
외로움
고독
두렵지만 은혜를 입은
by Aimee Joseph
2022-12-24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하신다.” (누가복음 1:28)목수와 약혼한 십 대 소녀가 이상한 인사를 받은 그때 세상이 뒤집혔다. 그런데 더 이상한 초대가 뒤따랐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누가복음 1:30-33)마리아는 이 초대에 동의했고, 이제 그녀의 세상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참으로 그녀는 은혜를 입었다. 그리스도를 전하고 세상의 빛을 세상에 가져오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다. 마땅히 그녀를 존중해야 하지만, 그녀를 사람으로 보는 것도 필요하다. 은혜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구주를 공경하라는 초대일 뿐 아니라, 그를 위한 고난까지 받으라는 의미이다. 마리아는 약속과 동시에 과업을 부여받았는데, 비록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닥칠 일과 믿음으로 평생 씨름해야 함을 의미한다. 대림절 때마다 나는 성탄절을 감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 올해 내 마음은 “은혜를 받은 자여”라는 인사말에 사로잡혔다. 이 인사말은 매우 단순하지만, 주님의 어머니 앞에 매우 복잡한 인생 여정이 놓여있음을 암시한다. 은혜로 가득한, 그러나 두려움도 가득한천사는 그녀의 허락을 구했고,그녀는 복종하며 대답했다.두려움에 찼지만 성스러운 어머니,은혜로 가득한, 그러나 두려움도 가득한,쉬어야 할 때,그녀의 강인함은 헤롯의 시험을 받았다. 지쳤지만 기대에 찬 임산부,은혜로 가득한, 그러나 두려움도 가득한,그녀는 그를 어깨에 꼭 안았다.사막의 바람이 점점 차가워진다.지쳤지만 기쁨에 찬 어머니,은혜로 가득한, 그러나 두려움도 가득한,천사가 밤에 속삭이고,그들이 또 다른 곤경을 피해 도망간다.도망가는 두려운 어머니,은혜로 가득한, 그러나 두려움도 가득한,시므온은 그를 헌신적으로 붙들었고,엇갈린 감정의 말을 한다.헌신적이고 사랑스러운 어머니,은혜로 가득한, 그러나 두려움도 가득한,그녀는 구주를 잃었다.이상한 행동을 하는 아들,정신을 못 차리고 아들을 찾는 어머니,은혜로 가득한, 그러나 두려움도 가득한,그녀는 그가 집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이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할 그의 시간이 도래했다.슬픔으로 떠나보내는 어머니,은혜로 가득한, 그러나 두려움도 가득한,치유 받은 자들이 자랑하며 돌아다닐 때 그녀는 두려운 잔이 다가오는 것을 본다. 보호하고 싶지만 생각에 잠긴 어머니,은혜로 가득한, 그러나 두려움도 가득한,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말로는 차마 그녀의 상실을 표현할 길이 없다.말문이 막히고 고통받는 어머니,은혜로 가득한, 그러나 두려움도 가득한,슬픔보다 더 깊은 기쁨,그가 부활했을 때 그녀의 맥박이 뛰었다.춤추고 기뻐하는 어머니,은혜로 가득한, 그러나 두려움도 가득한,그는 은총이 충만하시다.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나는 은혜 받은 자로 살았던 마리아의 모범을 보며 감사한다. 인간으로서 그녀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리아는 그녀 자신과 우리 모두가 믿는, 유일하고 완벽하게 순종하신 그분, 하나님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는 예수님을 세상에 데려왔다. 대림절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로서 우리가 받은 놀라운 은총의 지위를 기억하자. 하지만 마리아의 삶에서 알 수 있듯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혼란과 고통, 괴로움과 슬픔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그분이 “사랑하는” 아들 예수와 연합함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붙잡고 일생을 걸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믿음의 삶으로 초대받는 것, 그게 바로 은혜를 입는 것이다. 오 주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 입은 자로 살게 하소서!원제: Fearful and Favored: An Advent Poe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대림절
성탄
마리아
베들레헴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면…
by Jeremy Linneman
2022-12-23
가끔은 초라하고 답답하고 또 평범하기만 한 내 인생이 별 의미가 없는 건 아닐까 느낄 때가 있다. 우리 가족은 훌륭하고 규칙적이다. 나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부족함을 메꾸는 내용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해서 이끌고 있다. 우리는 중서부의 한적한 주에 살고 있다. 내 인생이 TV 쇼라면 관객은 그리 오랫동안 앉아서 내 쇼를 구경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종 묻는다. 뭔가 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더 활기찬 곳으로 옮겨야 하는 건 아닐까? 뭔가 더 특별한 교회를 해야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지 않을까?개인적이고 또 사역적인 불안함 속에서 대림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대림절은 내 두려움 속으로 들어와 진리를 속삭인다. 대림절 때마다 나는 성탄절이 주는 역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도래를 의식한다. 역설적으로 나는 이런 평범한 삶, 이런 평범한 가족, 그리고 초라하지만 막 새롭게 태어난 이런 교회야말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기 가장 좋아하시는 장소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성탄절의 역설성탄절이 어떤 의미에서 역설인가?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영적인 거룩한 날인 동시에 극히 상업화된 황금의 노다지이다. 인류 역사를 바꾼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면서도 목격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성탄절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주장을 한다. 우주의 왕이 지구에 오셨다. 그러함에도 이 놀라운 주장은 가장 어리석은 것처럼 들린다. 그는 아기로 태어났다…. 가난한 부모에게…. 동물을 위한 마구간에서.우리 주님이 탄생하시기 수 세기 전에 예언자 이사야는 소망의 도래를 예언했다.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사 9:1, 6).어둠의 세계에 빛이 밝았다. 절망의 세계에 희망이 솟아올랐다. 돈과 권력과 전쟁의 세계로… 한 아이가 태어난다고?누가복음 속 출생 이야기는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까지 무려 80-90마일을 여행했다고, 또 출산을 위한 안전한 장소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구주께서 실로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나신 것에 관해서 알려준다. 이 모든 것이 역설이다. 우주의 왕,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를 “구주”를 의미하는 이름, 예수라고 불렀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의미하는 임마누엘이다. 무한한 영광과 위엄을 가지신 그분이 무기력하고 혼자 힘으로 생존할 수 없는 작은 아기로 우리에게 오셨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부모에게 느닷없이 여느 아기와 다를 바 없는 이 아이가 태어났다. 예수님은 황금 궁전에서 동화 같은 출생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고통과 가난과 혼란을 통해 오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어떤 이상화된 세계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부서짐이 공존하는 현실 세계로 오신다. 불완전한 세상 전 세계를 한 장에 담은 멋진 사진을 사무실에 걸어둔 친구가 있다. 크고 푸른 바다, 흰 구름, 푸른 땅, 그리고 갈색 산맥. 사진 속 세상은 너무나 완벽해 보인다. 내 친구는 사진 속 세상의 완벽함을 언급한 후에, 그게 사실은 진짜 풍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즐긴다. 거의 백 장에 가까운 사진을 조합해서 만든 합성 풍경이라는 것이다. 한쪽이 환하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어둠과 그림자가 덮고 있기에, 지구 전체를 밝고 환하게 찍기 위해서 사진가는 수많은 이미지를 하나의 사진으로 합성해야만 했다. 아름답지만 진짜는 아니다. 사진과 같은 완벽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포토샵으로 수정한 지구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속에 이상화된 버전을 가지고 있다. 지구는 분명히 완벽하게 아름다운 곳이어야만 하는데, 그러나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만나는 세상은 아름다움의 일부와 부서진 조각에 불과하다. 이것이 성탄절 이야기가 가진 능력이다. 예수님은 결코 나사(NASA) 엽서에서나 만나는 이상화된 세계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진짜 세상, 부서짐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현실로 오신다. 이 세상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 그는 부서진 세상 속으로 오신다. 소망의 도래우리의 아기 왕은 역설적이다. 그의 궁전은 마구간이고, 침대는 흙과 짚이다. 뜻밖의 아이, 가난한 가족, 아무도 모르는 동네. 이러한 평범한 환경 속에서 하늘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프레드릭 비크너(Frederick Buechner)는 이렇게 그린다. 어둠이 유리처럼 부서지고 영광은 천 개의 태양 빛으로 넘쳐났다. 별이 빛난 적 없던 곳에 새 별이 태어나 빛나고, 천사들의 찬란한 날갯짓이 공기를 가득 채우며, 밤하늘은 번쩍이는 하나님의 군대로 생기를 띠었다. 큰 승리의 찬송이 그들에게서 솟아나오니, 오!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동방에서 온 이방인 왕들이 실로 왕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이 어린아이의 발 앞에 예물을 놓았다.목동들에게 천사 합창단이 나타났다. 그들은 귀족도, 제사장도, 또 종교 지도자도 아닌, 야간 근무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성경은 그들이 겁에 질렸다고 말한다. 만약에 이들 앞에 하나님이 나타났다면, 그건 심판이고 죽음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 천사는 좋은 소식을 전한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서 너희를 위해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그는 메시아, 주님이시다.”이것이 온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아의 위대한 도착이었을까? 새로운 예언도 없고, 압제자로부터의 자유도 없고, 또한 새로운 성경도 없는 수 세기의 침묵 끝에 마침내 왕이 오셨다.천사들은 마치 스스로를 자제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아기를 낳은 부모가 가능한 한 빨리 인스타그램에 수십 장의 아기 사진을 게시하는 것처럼,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천사들이 순진한 목자들을 찾아 노래를 부른다. 한시라도 빨리 이 소식을 전하고 싶은 그들은 초조하다. 천사의 노래 속에서 하늘과 땅이 만난다. 천사의 영광과 보통 사람의 평범함이 하나가 된다. 구유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위대한 역설과 성찬절 이야기의 도래가 상기시키는 진리가 있다. 마굿간에 나타나는 하나님이라면, 어디에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크너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하나님을 진짜로 믿는다면, 더 이상 하나님에 관해서 단정해서는 안 된다. 마구간에 오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이제 더 이상 확신할 수 없다. 하나님이 어디에 나타나실지, 얼마나 오래 우리와 함께 하실지,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과연 얼마나 더 굴욕적인 모습으로까지 내려가실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사건 중에서도 가장 상서롭지 않은 한 미천한 사람의 아이의 탄생에까지 하나님의 거룩함과 두려운 권능 그리고 위엄의 임재가 가능했다면, 그분의 거룩함이 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천하고 세속적인 장소 또는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이 가장 능력있게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는 곳이 다름 아니라 그분이 가장 보이지 않고 또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곳이라는 사실 말이다. 마구간의 어둠 속에서 또 동물들과 목자들 사이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은 이제 어디에나 나타나실 수 있다. 가장 지저분한 삶의 현장에서도 우리는 그분을 찾을 수 있다. 대림절은 갈등으로 가득한 결혼생활의 혼란 속으로도 임한다. 우리 교회와 직장에 빛이 비취고 있다. 육아로 지친 긴 밤중에도 한 아이가 태어난다.여관에는 방이 없었다. 게다가 마굿간은 결코 왕이 태어날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름답고 신비롭고 지극히 지혜로운 구속의 계획 안에서 이 모든 상황을 선택하셨다.이것은 바로 대림절의 좋은 소식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분이 있을 법하지 않은 곳, 보이지 않는 곳, 초라한 곳에 나타나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장소를 더 선호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한밤중에 동물들로 붐비는 마구간에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그분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곳이 어디가 있겠는가? 할렐루야!원제: If God Can Show Up in Bethlehem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탄
성육신
강림
대림절
성탄절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by Matt McCullough
2022-12-21
내 경험상, 음악 목록에서 크리스마스 인기곡을 클릭하는 순간 당신은 정신적 그리고 정서적 고통을 만날 것이다. 조금의 경고와 설명도 없이 당신의 귀에 울리는 건 각종 캐럴이다. “Rockin' Around the Christmas Tree”에서 “Silent Night”까지, “Blue Christmas”에서 “Joy to the World”까지, 그리고 “Grandma Got Run Over by a a Reindeer”에서 “Lo, How a Rose E'er Blooming”까지 말이다.현대 문화에서 성탄절은 독특하다. 뚜렷한 기독교적 내용도 있지만 동시에 온갖 잡다한 문화의 수많은 전통이 축적되어 마구 섞여 있다. 나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문득 혹시라도 오래된 기독교 캐럴과 최근 인기 있는 캐럴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옛 노래는 종종 죽음을 언급하는 반면, 요즘 노래에는 아예 죽음이 빠져있다. 성탄절 노래 속에 담긴 죽음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곧 오소서 임마누엘(O Come, O Come Emmanuel):오 구하소서 이스라엘그 포로생활 고달파메시아 기다립니다어둠의 구름 사라져죽음의 그림자 사라지리천사 찬송하기를(Hark, the Herald Angels Sing): 세상 빛이 되시며 우리 생명 되시네죄인들을 불러서 거듭나게 하시고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하여라기뻐하며 찬송하라(Good Christian Men, Rejoice): 무덤을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평화! 평화! 우리 구원 위해 주께서 나셨네한 송이 장미꽃 피었네(Lo, How a Rose E’er Blooming):부드러운 향기의 꽃,영광스런 장엄함으로 세상의 어둠을 없애시네진정하신 사랑, 진정하신 주님,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우리의 모든 짐을 나눠지시는 구세주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옛 작사자가 강조한 것은 죽음이었다. 죽음이 없이 그들에게 축하 행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성탄절을 더 축하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죽음을 피한다. 우리가 축하하는 성탄절은 죽음이라는 도전을 견디지 못한다. 익숙하지 않은 죽음오래된 노래와 요즘 노래 사이의 차이는 중요한 문화적 변화를 반영한다. 옛날 노래가 나오던 시절에 죽음은 어디서나 만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와 달리 그들에게 죽음은 쉽게 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18세기 말, 미국에서는 다섯 명 중 네 명이 일흔 살 이전에 사망했다. 평균 수명은 삼십 대 후반이었다. 요즘 평균 연령은 거의 여든 살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과 친구, 이웃들에게 둘러싸인 채 집에서 죽었다. 1980년까지 사망자의 17퍼센트만 집에서 죽었다. 요즘 들어 호스피스 치료 덕분에 가정에서 죽는 비율이 다시 증가 추세이다. 친숙한 장소에서 만나는 친숙한 사건이었던 죽음이 점점 더 사람들이 거의 방문하지 않는 위생적이고 전문화된 기관에서 만나는 낯선 사건으로 바뀌었다. 단지 죽음의 경험이 덜 친숙해진 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죽음이라는 주제 자체가 금기시되어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는 아예 추방되었다.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es)는 이러한 변화를 “잔인한 혁명”이라고 부른다. 죽음이 “과거에는 너무 편재하다 보니 친숙했다. 그런 기억은 이제 지워지고 사라질 것이다. 죽음은 이제 수치스럽고 금지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85).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억누를까? 아리에스는 이 금기가 행복을 일종의 도덕적 의무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마치 “슬픔이나 지루함의 원인을 피하고 절망 속에서도 항상 행복한 것처럼 보임으로써 집단의 행복에 이바지할 사회적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다. 행복이 도덕적 의무라면 슬픔은 도덕적 실패가 된다. 아리에스는 이렇게 썼다. “아주 약간의 슬픔이라도 징후를 보이는 순간 행복에 대한 죄를 짓는 것이다. 슬픔은 행복해야 할 사회를 위협하며, 따라서 사회는 존재 이유 자체를 잃을 위험에 처한다.”행복해야 할 의무에 관한 아리에스의 생각이 옳다면, 왜 성탄절에 죽음을 덜 이야기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대화는 죽음이 초래한 결과에 대한 진정한 슬픔을 숙고하기는커녕 좋지 않은 뒷맛만 남긴다. 심지어 반사회적인 주제로도 보일 수 있는데, 단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죽음의 그림자 안에서 살기 그러나 아무리 이 주제를 피하려고 애써도, 우리는 모두 매일 죽음의 그림자를 경험한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삶이 중요한지를 생각할 때마다 밀려오는 불안감은 결국 죽음을 바라보게 한다. 행복으로 가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삶을 직면할 때마다 죽음이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좋은 것일수록 결코 오래 가지 못하는, 모든 좋은 것이 결국은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상이 주는 고통 앞에서 죽음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제는 문화가 되어버린 즐거운 성탄절을 비롯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피한다. 성탄절 쇼핑, 빵 굽기, 파티 및 선물 나누기, 그리고 지나간 좋은 세월을 회상하며 희망하는 올해의 완벽한 성탄절, 그 자체로 다 좋은 것이지만, 죽음에 대한 방어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당신은 성탄절을 전도서 2장에 나오는 설교자의 실험처럼 기이하게 들리는 한 달 동안의 자가 치료 공세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혼자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할 것이니, 너는 네 마음껏 즐겨라.’ … 원하던 것을 나는 다 얻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 삼가지 않았다”(전 2:1, 10). 전도서 저자는 집을 지었고 사고 싶은 것을 다 샀다. 그는 마음껏 먹고 마셨다. 그는 엔터테인먼트를 즐겼고 행복한 사람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결국 죽음에 직면했고, 누구나 만나는 결과 앞에서 섰다.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전 2:11).성탄절 직후에 느낀다는 우울증에 관해서 들어봤을 것이다. 그건 놀라운 게 아니다. 돈 주고 산 행복은 결코 죽음의 그림자 속 삶의 진실과 맞설 수 없다. 그 어떤 선물도 죽음이 가져오는 정체성의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 어떤 성탄절 휴가도 죽음이 가져오는 일(work)의 좌절감과 허무함을 덜어주지 못한다. 그 어떤 감상적인 노래도 죽음이 가져오는 이별의 고통을 달래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무덤에 일 년 더 가까워진 몸으로 새해를 맞는다.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셨다. 기뻐하라. 하지만 이번 성탄절을 다르게 보낼 방법이 있다. 가장 오래된 캐럴은 그 길을 알려준다. 죽음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세상 속 흐릿한 구름 같은 약속을 지금 현실 속 일상적인 문제에 적용함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이 주는 기쁨을 더 누릴 수 있다. 오래된 성탄절 노래가 죽음을 크리스마스와 연결했을 때, 거기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이사야서 9:2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그리스도의 빛은 죽음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성탄절 축하 행사를 굳이 두려움과 좌절, 슬픔과 분리할 이유가 없다. 진실을 직시하자. 지금 느끼는 슬픔에 대해서 정직하자. 그리고 기뻐하라. 임마누엘이 당신에게 오셨다. 그리고 그는 재림하실 것이다. 할렐루야!원제: Christmas Under Death’s Shadow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탄
성탄과죽음
캐럴
‘가벼운 기독교’를 우려한다
by 김형익
2022-12-17
분명히 맥주의 맛을 내는 맥주이지만 알코올 함량이 적은 맥주를 라이트 비어(light beer/lite beer)라고 부른다. 가벼운(light)이란 형용사를 붙여 ‘가벼운 맥주’란 뜻이다. 덜 취하면서 맥주를 즐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공략한 맥주 회사의 마케팅 전략이었고, 결국 라이트 비어는 맥주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었다. 라이트 비어는 1970년대 후반부터 수십 년 동안 엄청난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맥주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2015년 이후 다시 맥주 시장의 판도가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라이트 비어는 더 많은 사람이 원하고 소비하는 맥주를 만들어 판매한 맥주 회사의 마케팅 전략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맥주 이야기가 아니다. 라이트 비어를 만들어낸 맥주 회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교회가 더 넓은 시장(?)을 개척하려는 의도로 동일한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2012년 5월 21일 자 ‘타임’에는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 교회가 시도한 소위 ‘다니엘 다이어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엘리자베스 디아스(Elizabeth Dias) 기자가 쓴 이 기사는 종교 섹션이 아니라 건강 섹션에 실렸다! 그녀는 다니엘 다이어트에 참여한 새들백 교회의 1만 5,000명의 교인이 뺀 지방은 26만 파운드(130톤)에 달한다고 썼다. 실로 어마어마한 성공적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라이트 비어와 다니엘 다이어트의 차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당시 이 기사에 대한 짧은 평론을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이 썼는데, 그는 성경이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새들백 교회는 다니엘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놀랄 만한 일을 한 것이 아닐까? 10대 소년들로서 지배국인 바벨론으로 끌려와 바벨론의 사람으로 길러지고 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왕의 진미를 거절했던 신앙적 행동이 이제 배부른 시대, 배부른 나라에 사는 배부른 교인들에게는 그저 다이어트 교과서로 전락한 느낌을 어찌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금 지나친 비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새들백 교회가 기발하게 개발한 다니엘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맥주 회사들이 시장을 확장하려고 만든 라이트 비어의 전략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레위기의 음식 정결 규례를 해석하는 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보게 된다. 음식 정결 규례를 주로 건강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현상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우리가 가벼운 기독교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맛과 거품은 똑같은 맥주이지만 알코올 함량과 열량을 줄인 라이트 비어와 비슷하게, 기독교의 모양과 맛을 내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사실 있어야 할 중요한 핵심이 빠진 기독교가 지금의 대세가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10년 전쯤의 일이다. 당시 이메일로 구독하던 한국의 한 기독교 신문 기사 중에 ‘맛있는 전도, 부침개 전도특공대’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던 적이 있다. 나는 특정한 교회의 특정한 전도 프로그램과 그 전도의 열심을 폄하하려는 의도 없이 말한다. 그때 나는 이건 또 뭔가 하는 심정으로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았고, 전도의 문이 막혀버린 이 시대에 어떻게든 전도를 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먼저는 보기 좋았다. 사진들을 보니, 무더운 대낮에 길에서 불을 때고 부침개를 부치며 땀을 뻘뻘 흘리는 부인들, 그리고 마실 음료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주는 학생의 모습들이 들어왔다. 전도는 귀한 일이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들려주고 그 영혼을 살리는 일의 가치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뭔가는 좀 아쉽다고 느꼈다. 부침개전도특공대라? 그리고 맛있는 전도라?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한 생명의 영원이 걸려있는 이 일, 매를 맞고 돌에 맞으며 감옥에 들어가며 전했던 복음과는 뭔가 그림이 겹치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린애들이 ‘전도’ 하면 “아, 부침개요?”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면 너무 심한 혹평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게 사실이다. 열심으로 어떻게든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애쓰던, 사진에서 본 분들의 열심과 수고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 두렵다. 하지만 내 마음에 인상 깊게 드리워졌던 느낌은 우리가 지금 가벼운 기독교로 가는 길목에 이미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트위터에서 보았던 ‘주기도문 드리기 운동 본부’가 생각난다. 당시 내가 검색해 본 바로는 “하늘을 향해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고 소리 내어 주기도문을 드리면 범사에 축복이 온다”고 주장하며 주기도문을 일천 번 반복하는 운동이었다. 몇 번 했는지 정확하게 세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그 운동본부는 친절하게도 주기도문 계수기까지 판매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가벼움의 극치를 넘어 이단적 수준, 바알 종교의 수준으로 가버린 경우를 보았다. 문제는 이런 행태들이 기독교 안에서 부끄러움이나 주저함 없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일들을 그저 현대적인 현상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 가벼운 기독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에덴동산에 쫓겨난 이후로 언제나 있었던 현상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평생 받은 고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하던 일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발한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그들이 부끄럽지 않게 그런 일을 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탐욕 때문이었다. 더 많은 추종자를 얻고 그들로부터 더 많은 인기와 물질을 얻어내려는 탐욕 말이다. 가벼운 기독교의 시대에 진짜 기독교를 전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 어찌 예레미야 선지자뿐이겠는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 모두가 그랬다.신약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사람들로부터 의심과 비난을 받아야 했던 이유는 그가 가벼운 복음을 전하기를 거부하고 진짜 복음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바울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수많은 사람은 초대교회에서 행세하던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이었다. ‘혼잡하게 한다’는 헬라어는 ‘물을 타서 희석한다’(water down)는 뜻이다. 당시에는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포도주에 물을 타서 ‘라이트 와인’을 파는 부도덕한 포도주 상인들이 있었는데, 바울 사도는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한 셈이다.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물을 탔던 이유는 더 많은 사람에게 미치는 더 큰 시장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죄를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하지 않는 복음, 회개를 말하는 대신 손쉬운 할례의 행위를 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벼운 복음을 전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가벼운 복음을 다른 복음, 가짜 복음이라고 선언했다(갈 1:7-9).‘가벼운 기독교’는 결코 현대적 현상이 아니다. 다니엘서를 다이어트 교과서로 사용하는 것과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을 염불이나 주문 외듯이 외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은 라이트 비어와 어떤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는가? 나는 가벼운 기독교로 가는 현상을 우려한다. 20세기 중반의 미국 기독교를 보면서 A. W. 토저는 이렇게 우려했다. “약은 약이로되 고칠 수 없고, 독은 독이로되 죽일 수 없는 기독교가 되었다.” 너무나 물을 많이 타버렸기 때문이다.가벼운 기독교(light Christianity)는 사람의 살을 빼주고 잠깐의 기분 전환을 신선함을 제공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생명을 살리는 능력은 없는 기독교다. 우리는 조금은 오르막길처럼 느껴질지라도 진짜 기독교(authentic Christianity)를 찾고 그 산으로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가벼운기독교
진짜기독교
다른복음
가짜복음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자제력이 필요하다
by Jay Kim
2022-12-12
2006년 겨울, 두 아이의 엄마인 마흔한 살 리디아 앙기유(Lydia Angyiou)는 북극곰과 싸우고도 살아남았다. 앙기유와 어린 두 아들이 동네 커뮤니티 센터 옆을 걷고 있을 때였다. 아이스하키를 하던 한 무리의 아이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앙기유 앞에 나타난 건 무려 700파운드는 되어 보이는 북극곰이었다. 곰은 그녀와 일곱 살 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야수와 아이 사이로 뛰어들면서 소년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총을 든 한 남자가 올 때까지 그녀는 곰을 발로 차고 때리며 싸웠다. 우리는 종종 아드레날린의 힘을 통해 다른 세상에서나 만날 거 같은 초능력을 행사하는, 비범한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인간 의지력에 숨은 잠재적인 능력은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게 분명하다. 인간의 의지력이 그토록 강력한 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왜 고작 몇 파운드를 빼기 위해 그렇게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걸까? 소셜 미디어에서 눈을 떼거나 아이들에게 소리치지 않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의지력과 우리 몸에서 나오는 부신 호르몬이 북극곰과 싸우거나 긴급 상황에서 무거운 차를 들어 올릴 만큼 엄청난데도, 우리는 왜 야식을 억제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의 투쟁 또는 도피 대응 능력은 극한 상황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은 평범함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무한한 유혹에 대응할 힘은 그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아드레날린 이상이 필요하다. 꾸준한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 자제력의 필요성을 알아야만 한다. 나를 속이는 마음의 간교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제력이라는 미덕을 기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삶, 긴급하지 않은 삶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제력의 필요를 인정하라성령의 열매 목록(갈 5:22-23)에서 바울이 절제를 제시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의 타락한 본성 때문이다. 성령이 연료가 되는 자기 통제의 대척점에 바울이 놓은 것은 죄된 욕망(갈 5:16)과 육체의 행위(갈 5:19)이다.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갈 5:19-21). 이러한 악덕이 드러내는 것은 전혀 통제되지 않는 삶의 모습이다. 겉으로 보기에 자제력은 한계를 정하고 심지어 숨 막히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주의라는 우상 숭배와 자기만족을 종교 수준으로 떠받드는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게 자제력은 기껏해야 구식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억압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한계가 없는 삶은 자유가 없는 삶이다. 두 가지 유형의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 관한 연구와 실험이 있다. 하나는 경계가 있고, 다른 하나는 경계가 없다. 거의 모든 경우에 경계가 없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공포에 떨지만, 경계가 있는 놀이터는 오히려 움직임의 자유, 개인의 창의성, 그리고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적 화합을 끌어낸다. 자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경계의 설정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속이며 영혼을 마비시키는 사탄의 힘과 무모한 방종의 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는 놀라운 자유를 선물하는 것이 자제이다.죄에 젖은 마음속 고르지 못한 지형을 조심하라“만물보다 거짓되고(deceitful)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라는 예레미야의 말은 인기가 없었다. 오늘날에는 인기 없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를 공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여전히 사실이다. 죄인인 인간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겸손과 자각 없이는 자제 자체가 불가능하다.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최근 몇 년 동안 “사람들이 자신을 겸손하게 생각하도록 장려하는 문화에서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도록 장려하는 문화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세상은 이제 개인의 욕망을 제어하는 모든 도덕적 제약을 제거하고 자제에 관한 논의 자체를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건 위험하다. 마음을 “거짓되다(deceitful)라고 표현했을 때, 예레미야는 고르지 않은 지형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했다. 마음은 일관성과 꾸준함이 부족하다. 포장되지 않은 길이며 바위가 많고 불안정하며 장벽은 약하기 이를 데 없다. 잠시 당신 속에 숨은 악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라. 가혹한 요구라는 건 나도 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막 7:21-23).죄로 가득한 마음의 상태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자제력을 지속하여 행사하는 데 필요한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다. 베드로전서 5:8-9을 보자.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급하지 않은 삶을 받아들이라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게 빠르게 움직인다. 편의성과 접근성이라는 디지털 유혹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압도했고, 알고리즘은 우리를 더 빨리 움직이도록 바꾸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위험한 속도에 중독되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기만적인 본성과 결합했다. 이제 게임에서 포르노, 소셜 미디어, 그리고 이메일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중독은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되었다. “중독”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딕투스(addictus)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이 단어는 법원의 판결을 통해 노예가 된 사람, 따라서 다른 사람의 법적 재산이 된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중독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노예이다. 실로 놀라운 정도로 많은 사람이 디지털 기계에 매여있다. 그들은 디지털의 폭정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 잠언 25:28은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벽이 무너진 성읍 같다”고 한다. 디지털 세계는 오늘날 우리를 한없이 취약하게 만들었고 우리의 벽은 오래전에 허물어졌다. 우리는 과연 중독과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팀 켈러는 트위터에 “자제력이란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령님께 중독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디지털이 초래하는 긴박함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더불어서 자제력을 더 잘 발휘하고 유지하도록 돕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경계를 정하고 사는 것이다. 내 주변의 디지털에도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하루 중 특정 시간에 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밤에는 휴대전화를 아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둔다. 특히 중독성이 강한 앱은 삭제한다. 이런 결단이야말로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며 우리 삶에서 자제력을 배양하는 삶의 모습이다. 그렇게 할 때, 느리지만 확실한 자유를 경험할 것이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에 급박함 없이,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또 평화롭게 다가가는 진짜 자유를 말이다. 이 글은 Jay Y. Kim의 Analog Christian: Cultivating Contentment, Resilience, and Wisdom in the Digital Age(InterVarsity Press, July 2022)에서 간추린 것입니다. 원제: To Be Free, You Need Self Control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자제력
인내
의지력
중독
절제
디지털시대
알고리즘
두 강림 사이에서
by E. M. Welcher
2022-12-11
나는 지금도 그녀를 기억한다. 갓 자르고 염색한 머리에 노란색 선글라스를 쓴 그녀가 맨손으로 캔자스시티 로열스 경기에서 파울볼로 날아온 뜬공을 잡던 바로 그 모습 말이다. 그녀는 그 공을 한 아이에게 주었는데, 그건 다 큰 어른이면서도 그 공이 꼭 갖고 싶었던 내게는 퍽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그날은 우리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세인트루이스 토박이인 다니엘은 당연히 카디널스 경기를 더 보고 싶었겠지만, 우리는 캔자스시티 가까이에서 살고 있었다. 그해 성탄절이 다가오던 즈음, 항암치료로 머리가 다 빠진 그녀는 크리스마스트리 옆에서 내게 키스했다. 그녀의 고통과 죽음은 생각만 해도 아프다. 그녀가 떠난 지 육 년이 지났지만, 그녀의 사진은 지금도 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고 답답한 가슴을 더 숨차게 만든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그리스도의 두 번째 강림은 내게 죽음이 앗아간 신성한 사랑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법을 가르쳤고,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강림은 하나님도 죽음이 앗아간 성육신의 사랑을 이해하신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두 번째 강림을 상상하며나는 부활의 날, 곧 그리스도의 두 번째 강림을 상상하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그럴 때면 동이 트는 순간 사라지는 아침 안개처럼 몽환적인 인상주의 그림 한 폭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위대한 자, 작은 자, 고귀한 자, 비천한 자, 비범한 자, 평범한 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죽은 자가 부활한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 힘든 날이면 더 그리워지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일어난다(계 20:11-15).십자가에 못 박힌 목수였던 왕(Carpenter-King)이 불의를 짓밟는다. 눈물을 영원히 닦아주신다(계 21:4-5). 모든 것이 바로잡히고, 마침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오래전에도 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게 여기셨다(창세기 1장).왜 강림을 고대하는가 하지만 고통스러운 현실로 되돌아가는 순간, 소중한 삶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의지해야 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강림이다. 강림은 부활의 날까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녹슨 못이다. 강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밭을 처음으로 좋은 땅으로 경작하시며 선물로 주신, 힘들게 얻은 믿음의 결과이다. 우리를 둘러싼 절박한 어둠 속에서도 세상에는 여전히 찬란한 빛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고 믿게 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강림을 기념할 때, 현재의 황폐함 가운데서도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바라본다(시 34:8).그리고 그는 … 떠나셨다 옛 선지자들은 먼 미래에 성육신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마 1:23), 임마누엘은 어둠 속에 빛나는 초신성이다. 오랫동안 인류의 목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었던 그 어둠 속에서.그러나 예수님!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내려놓은 바로 그 생명을 다시 취하셨다(요 10:18). 죽음을 물리치시고 그 차가운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셨다.그리고 그는 … 떠나셨다. 예수님이 떠나셨다고 말하는 목회자는 별로 없겠지만, 현재 많은 교인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 주님은 떠나셨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숨을 쉰다. 하나님이 이 모든 비참한 어둠 가운데에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고 느낀다. 우리는 그의 강림이 필요하다물론 목회자라면 십자가에 못 박힌 목수-왕이 결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할 것이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겪으신 고통이 가져다준 교제를 누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생각과 행동에서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가신 먼지투성이의 좁은 길을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면서 걷는 것이다. 때로는 절뚝거리고, 심지어 기어서라고 그 길을 걷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건전한 지적 훈련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는 이런 십자가의 삶을 살 수 없다. 감정이라는 전쟁터에서 싸우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이것은 사랑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의 강림이 중요한 이유이며, 올해는 다른 어떤 해보다 더 중요하다. 그의 강림에서 소망을 찾을 수 없다면, 세상에서 지치고 낙심한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자매에게 당신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강림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 일을 이루실 때까지 성도들이 인내하도록 도와주신다(빌 1:6). 대림절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소망을 고대하며 미래를 바라본 오래전 선지자를 상기시킨다(벧전 1:10-12). 그들의 소망은 우리가 지금 되돌아보면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소망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이제는 예수님의 두 번째 강림을 기다리며 미래를 바라본다.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이자 왕 되신 이의 두 강림 사이를 서성거리는 나그네이다. 용기를 가지라 아마도 조용한 밤에 당신은 기도했을 것이다. 오 주님, 먼지에 불과한 연약한 인간이라는 그릇 하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지기 전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슬픔을 그 속에 쏟아부으셨습니까? 따뜻한 부활의 물결이 마침내 차가운 세상을 녹이고 너덜너덜해진 당신의 마음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용기를 내라. 부활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그때까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필요하다.원제: Oh How We Need Advent (This Year More Than Mo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강림
대림절
초림
재림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자녀로 양육하려면
고전 재발견: 부모의 의무
by Caleb Greggsen
2022-12-10
기독교 고전 재발견C. S. 루이스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수 세기 동안 불고 있는 깨끗한 바닷바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스쳐 지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리고 루이스에 따르면 그건 오로지 “오래된 책을 읽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우리가 잊고 지낸 기독교 고전을 재발견하는 시리즈(Rediscovering Forgotten Classics series)를 시작합니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 도움을 주는, 그러나 잊고 있던 기독교 고전을 하나씩 되찾아 나갈 것입니다. 요즘은 자동차 광고도 우리가 “전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팬데믹이 이런 식의 표현을 대중화했을 수도 있지만, 사실상 요즘 상황이 가진 독창성은 거의 주문(呪文)처럼 사방에서 쉬지 않고 들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육아라는 주제에서보다 이 주문이 더 두드러지는 데는 없을 것이다. 꼭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육아와 관련해서는 지금 시대가 말 그대로 전례가 없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내 딸들 세대처럼 아예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이라는 환경에서 자란 세대는 여태까지 없었다. 아무리 일시적이라도 하더라도, 그 어떤 다른 세대에서 부모가 “줌 스쿨링”을 대면 교육의 대안으로 고려한 사례는 없었다. 인스타그램, 스냅챗, 틱톡은 그 자체로 매우 새롭고 전례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 이처럼 아무리 시대와 문화에 따라 현실이 주는 외적인 특수성은 변한다고 하더라도, 변치 않는 한 가지가 있다. 우리 모두 무력한 아담의 후예라는 사실이다. 아이들도 여전히 아이들이고, 부모는 여전히 육아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일 뿐이다. 바로 그 이유로 나는 라일(J. C. Ryle, 1816-1900)이 쓴 부모의 의무(Duties of Parents)가 오늘날에도 매우 고무적이고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심지어 “새로운” 양육 아이디어의 유행까지 관찰한다. 나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과 젊은이를 위한 새 책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모든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어린이는 마땅히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제대로 훈련받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어른이 된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일의 짧지만 뼈 있는 충고는 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그의 책에서 자녀를 둔 목사에게 특히 적용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훈계를 발견했다.부모의 의무J. C. 라일이 소책자는 자녀 양육을 시작하는 그리스도인 부모가 무엇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라일은 자녀를 무서운 속도로 세상에 빼앗기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잠 22:6)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도구와 초점을 제시한다. 1. 자녀의 영원한 미래가 육아의 최우선 고려 사항이다. 기독교 양육과 세속 양육의 핵심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녀의 영원한 미래야말로 그들의 삶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임을 믿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과 관련한 다른 여러 가지 중요한 책임에 너무도 쉽게 압도된다. 오늘은 뭘 먹이고 뭘 입히지? 어떤 교육 방법이 가장 좋은가? 학교에서 좋은 친구를 잘 사귈까? 이제는 성에 관해서도 교육해야 하나? 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꾸릴까? 타지에 가거나 내가 죽어도 우리 아이가 잘 살아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바뀌기 마련이다. 새로운 학교 환경이나 은행 시스템 또는 십 대의 친구 관계에 따라 세부 사항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인생의 교훈과 같이 항상 바뀌고 불확실하다고 느끼는 것일수록,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에 반해서, 내 자녀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방법에 관한 답은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의 단순성과 또 무엇보다 자녀에게 중요한 영원의 소망이 도리어 부모로 하여금 그 문제를 소홀히 취급하게 만들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실상 우리에게 다른 각종 중요한 문제들에 비해서 복음은 덜 긴급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 관해서 라일은 이렇게 말한다. “자녀들과 관련해서 당신이 취하는 모든 단계에서, 그들과 관련해서 구상하는 모든 계획과 준비에 있어서, ‘이것이 그들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라는 엄중한 질문을 절대 빠뜨리지 마십시오.”아무리 작은 결정도 좋든 나쁘든 아이들 영혼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도 중요하지만 기말고사 점수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부모를 나는 적지 않게 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시험 기간에는 교회에 오지 않아도 양해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부모도 나는 적지 않게 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는 게 아니라, 가족의 삶을 교회 생활을 중심으로 질서 있게 만드는 데에 실패한 부모를 보았기 때문이다. 2. 자녀에게 믿음의 습관을 가르쳐라. 내 또래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되도록 많은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이건 강압적이었던 이전 세대 부모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는데, 우리 세대 부모는 최대한 예의와 존중으로 자녀를 대하고 싶은 마음에서 뭔가 요청하거나 말할 때마다 반드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확실히 라일 시대의 부모들도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부모가 내리는 모든 결정에 대해서 자녀에게 일일이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자녀의 믿음을 약하게 만든다고 라일은 주장한다. 비록 전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아이들은 자기보다 현명한 부모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는 도무지 못 배기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그럴 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결국 아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이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모든 이유를 단숨에 알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이 교훈은 아이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자녀가 부모를 신뢰하고 따르는 데에 선결 조건이 사전 이해라고 생각하는 부모는 사실상 자녀를 믿음의 삶이 아닌 의심의 삶을 살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3. 자녀에게 순종의 습관을 가르쳐라.젊은 그리스도인 부모 사이에서 내가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행여나 어린 바리새인을 양육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겉으로만 빠르게 순종하도록 요구하는 게 효과적인 양육일까? 전혀 아니다. “진정한 순종은 보이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 그리고 체화된 믿음입니다. 순종이야말로 주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진정한 제자를 가려내는 리트머스 종이다.” 라일은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는 확실한 존재로서 부모가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칠 때,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좋은 일임을 훈련해야 한다. 라일은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이 땅의 아버지에게 불순종하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나중에 커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순종하기를 거부한다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게 없습니다.”시대를 초월해서 시의적절한지금까지 내용은 라일의 육아 조언 열일곱 가지 중 세 가지에 불과하다. 그의 조언이 시대를 초월하여 시의적절한 이유는 그는 바로 다음 사실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문제에서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는가에 따라서 자녀는 영적으로 자라거나 아니면 영적으로 후퇴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중간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지금까지 읽은 내용에서 부모의 권위가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지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도 선하고 경건한 삶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해서 자녀가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권위를 회피하지 말라. 그 권위를 사용하여 자녀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도록 양육하라. 원제: How to Prepare Your Kids for Eter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자녀양육
기독교교육
부모의의무
라일
기독교고전재발견
상한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뻐하기
by Brittany Salmon
2022-12-04
대림절이 한창이고 또 각종 연말연시 파티가 예정되면, 내 영혼은 기대감으로 들뜨곤 한다.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매년 9월이 되고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면, 조만간 테이블에 다 함께 둘러앉을 가족 생각에 나는 행복한 현기증을 느낀다. 추수감사절이 성탄절로 바뀌는 즈음이면, 흥분은 한껏 고조된다. 이게 바로 고통이 닥치기 전까지 나의 연례 의식이었다.몇 년 전 나는 새로운 상처를 안고 연휴 시즌에 들어섰다. 한때 위로를 주던 계절이 오히려 고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해는 말 그대로 고통으로 점철된 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결혼 생활이 힘든 고비를 맞았으며, 입양 계획은 중단되었다. 남편은 직업 전환 과정에 있었고, 말 그대로 우리 가족은 위기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충격과 변화 때문에 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았다. 죄와 죽음과 부서짐이 나를 떠나지 않는 것 같았고, 생생하기만 한 슬픔은 도무지 예전 같은 마음으로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을 기뻐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감사를 위한 싸움하나님께서 기쁨과 풍요의 계절을 선물하실 때 감사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그분이 고난을 허락하실 때, 감사를 위한 거친 싸움이 벌어지는 시기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해 연말은 내게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시기 중 하나이다. 고통이 어떻게 내 눈을 밝히는지를, 또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몇 주간이 현재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실직, 불임, 아기의 죽음, 충격적인 병원 진단 또는 가족 위기 등으로 인해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극도로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탄절을 그냥 견디면서 보내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한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서 이겨내려 하지 말고 정말로 중요한 것 하나에 집중하는 건 어떨까? 그렇다고 이미 더럽혀지고 부서지고 또 빼앗긴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러함에도 우리는 고통 속에서조차도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누릴 수 있다. 올해 성탄절,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 다른 해와 다른 성탄절을 보내는 것도 괜찮다. 슬픔은 감정을 고조시킨다. 그 결과 기쁨을 가져다주던 성탄절이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자유를 당신 자신에게 선물하라. 힘들었던 해에 맞은 성탄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오히려 감사를 드린다. 고통은 내가 성탄절이 가져다주는 각종 과함을 던져버리고, 가장 진실하고 단순한 의미에만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고통은 내 감정을 가장 적절한 자리에 위치시켰다. 고통에 비추어 볼 때, 성탄절이 주는 화려함과 사치는 신기하게도 희미해진다. 그리고 성탄절의 진짜 의미가 슬픔의 잿더미를 지나 내게로 다가왔다. 올해는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하고, 절망을 촉발하는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도록 하자. 2. 주변을 오로지 진리로만 채우라. 슬픔과 시기와 불만이 가져다준 신체적 부작용은 어느새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평소 내가 잘되기를 바라던 사람들에게서조차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 나는 그들이 가족과 직장에서 행복하고 또 즐거운 성탄절을 누리길 바랐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의 죄를 고백했다. 그중 한 사람인 카운셀러는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이미지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다.사랑으로 당신에게 지원을 베풀 사람과 자원으로 주변을 채우라. 지금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는 것에서 시선을 떼어 놓으라. 대신 이미 당신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향해서 시선을 집중하도록 하는,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음악, 팟캐스트, 책을 선택하라. 간단히 말해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가정과 마음, 그리고 관계에 생명을 주는 진리이다. 복음의 은혜라는 빛 가운데 고통과 기쁨이 함께 거하도록 하는 진리로 주변을 가득 채우라. 3. 소셜 미디어를 멀리하라.고통이 우리 가족을 덮쳤을 때, 나는 잠시 소셜 미디어를 쉬었다. 당시에는 그런 결정이 어리석게 보였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페친의 가족과 파티 사진이 올라올 때면 나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하셨지만 내게서는 빼앗아간 것들 때문에 고통했다. 나는 어느새 하나님이 내 삶에 쓰신 슬픈 이야기를 인생의 절정기에서 행복해하는 것 같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었다. 올바르게만 사용한다면, 소셜 미디어는 전 세계의 가족 및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환상적인 도구이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가 타인을 비판하는 도구가 되고, 내 삶을 부정적으로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면, 거기서 잠시 벗어나라. 친구 및 가족과 오프라인에서 정직하게 또 나를 다 드러내는 교제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라. 화면이 아니라 실제로 만나는 공동체와 함께 성탄절을 보내라. 신자들이여,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부서진 것들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이다. 구유에 있는 아기를 생각하면, 상처받고 보내는 성탄절도 그리 문제될 게 없다. 상처를 부정하지 않고 성탄절을 보내는 것은 괜찮지만, 그 상처가 더 큰 이야기를 가리키는 도구가 되도록 하라.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을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신다. 이 진리 안에서 안식하며 큰 슬픔 가운데서도 큰 평안을 찾는 은혜를 누리기를 바란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슬픈 날조차도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 함께 기뻐하자. 원제: Celebrating Christmas with a Broken Hear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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