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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나의 여정
by Scott Hubbard
2022-12-03
내 컴퓨터 파일 중에는 “의심 처리 방법”이라는 작은 문서 하나가 숨겨져 있다. 아, 내 어두운 시절의 잔재여.그 문서는 나 자신에 관한 메모,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시편 기자처럼 영혼의 대화를 연습한 노력이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네가 의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분열하느냐?문서 속 내용은 예측할 만한 제안들로 시작한다. “하나님을 찾아라”는 첫 번째 구절이 나오고 이어서 여러 구절이 따라온다. 네 번째에 가서는, “너 자신을 믿지 말라.” 그리고 끝을 향해서 나아간다. 열여섯째와 열아홉째는 “예수께서 성취하신 예언을 생각하라”와 “위대한 성도들을 기억하라”라고 되어 있다.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은 그 어떤 별빛에도 기뻐한다. 이런 문서는 하나님, 성경, 복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진지한 의심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또한 그들은 경험이 없기에 의심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 적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의심하는 도마가 적지 않다. 그들은 어떤 사람인가? 성격과 환경, 내재하고 있는 죄가 만들어낸 슬픈 혼합으로 인해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요 20:25) 도무지 못 믿겠다고 하는 이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그러함에도 때때로 믿음이 곤경에 빠지고 영혼이 분열된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막 9:24).두 마음이상하게도 형식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적이 없다. 진정한 믿음이 주는 첫 기쁨, 첫 번째 구원이 가져다준 격정,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주는 첫 감격을 맛본 후에야 나는 의심의 첫 그림자를 느꼈다. 그건 마치 강도가 불시에 습격한 것과 같았다. 결과는 똑같았다. 잠시 땅에 쓰러져 피를 흘리면서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의심이 어디에서 온 걸까? 왜 하필이면 나일까? 내게는 단서가 없었다.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갑자기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이전의 확실성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달갑지 않은 질문들이, 결코 하고 싶지도 않은 질문들이 어떻게든 내 마음을 뚫고 들어왔고, 나는 방어 자세로 발버둥하고 있었다. 네가 믿는 성경이 과연 철저한 조사를 이겨낼 수 있을까? 이상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리고 더 어두운 순간에 이런 목소리까지 들렸다. 하나님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 수없이 많은 밤을 어둠과 논쟁하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면 어김없이 같은 질문이 나를 찾았다. 의심과 관련해서 오스 기니스(Os Guinness)가 1976년에 쓴 책 제목은 의심의 실체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두 마음(InTwo Minds). 의심은 당신을 분열시켜 두 개로 만든다. 당신을 지킬과 하이드로 만든다. 가장 불편한 곳에서 당신을 둘로 쪼갠다. 나의 한 마음은 “[나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나의] 명철을 의지하지”(잠 3:5)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의 다른 마음은 그것을 지적 도피라고 불렀다. 한 마음으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주님의 모습을 찾아 성경을 읽었고, 또 다른 마음으로 나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주님을 보았다. 한 마음으로 나는 믿었다. 그러나 다른 마음으로 나는 의심했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나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약 1:8)이었다.두 마음이 되는 건 당신을 절망에 빠뜨린다. 의심이 바로 그 일을 한다. 거의 2년 동안 나는 그동안 메모한 공책을 샅샅이 뒤지고, 고민에 빠진 생각을 기록하고 또 간구하는 기도를 쉬지 않았다. 나는 강박적으로 설교를 들었고, 악마를 쫓아낼 수 있는 음성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변증 기관에 여러 차례 전화했으며, 그중 한 번은 자정에 전화를 걸었다. 은사를 추구하는 분위기에 빠져있던 시기에는, 어느 비참한 밤에 잠언 전체를 읽고 제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충동까지도 느꼈다(그때 잠언 중간 정도까지는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미 말했다시피, “의심 처리 방법”이라는 문서를 만들었다.어둠에 빠진 절망적인 사람은 뭐든지 잡으려고 하고 또 비틀거린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섭리로 길을 찾게 되기도 한다.의심 너머의 길의심으로 가는 길이 많고 신비로운 것처럼, 의심에서 벗어나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존 블룸(Jon Bloom)이 관찰한 것처럼, 예수님은 다양한 의심에 대해 다양한 자비로 응답하셨다. 세례 요한에게는 부드럽게 상기시켜 주셨고(마 11:2-6), 베드로에게는 책망의 질문(마 14:28-33)으로, 또 도마에게는 고통스러운 지체함(요 20:24-29)으로 그들의 의심을 처리하셨다.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훌륭하고 유일하며 오류 없는 안내자이시다. 의심이 가진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의심에는 공통 요소가 있다. 그래서 과거에 의심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몇 마디 정도는 조언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다음은 내가 어둠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몇 가지 경로이다. 그 누구도 나를 즉시 어둠 밖으로 빼내지 못했다(의심으로부터의 해방이 한순간에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동틀 때의 햇살”처럼 “의인의 길”이 되어 “대낮이 될 때까지” 나의 길을 “점 더 빛나게” 비추었다(잠 4:18).1. 의심을 믿음의 시련으로, 정상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라. 앞에서 말했듯, 의심은 마치 강도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닥쳐서 감각을 잃게 만든다. 내 경우에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몇 년 동안과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몇 달 동안, 아무도 내게 의심에 관해서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기에, 더 예상하지 못했던 면이 있다. 정욕, 교만, 탐욕, 자립, 분노, 조바심 등등, 이것들은 이미 알려진 적이기에, 충분히 계획을 짜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심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마치 총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총상을 입은 군인이 된 것 같았다. 의심이 가진 힘 대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느낌을 주는 능력 말이다. 느리지만 진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로 가슴 벅찬 일이다. 의심은 어떤 면에서 독특하긴 하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가 직면했던 정상적인 믿음의 시련이다. 악마의 첫 번째 유혹(창 3:1) 중 하나인 의심은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유혹으로 남아 있다.의심 속에서 방황하던 중에 읽었던 기독교 철학자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의심을 단순히 옛 자아가 끼치는 지속적인 영향력의 또 다른 표현(엡 4:22)으로 묘사했다. 옛 자아는 본성상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자신의 말을 더 신뢰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 사망의 몸”을 소유한 우리가 때때로 여전히 의심과 불신앙을 다뤄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롬 7:24).사실, 하나님의 백성 중 일부는 항상 의심한다. 의심이 성도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퍼진 죄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세(출 3:13), 아삽(시 77:7-9), 하박국(합 1:2-4), 사가랴(눅 1:18), 세례 요한(마 11:2-3), 베드로(마 14:31), 도마(요 20:25) 같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 의심이라는 두려운 원수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의심은 결코 우리를 한계 너머로 보내지 않는다. 의심은 우리를 자동적으로 불신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 대신 의심은 각종 유혹과 죄에 저항하는 동시에 의심과도 싸웠던 믿음의 선배가 걸어갔던 대열에 우리도 막 합류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2. 털어놓을 친구를 찾아라. 고인도 괜찮다.의심을 변칙으로 취급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태양이 비추지 않는 어두운 세상에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얘기 나누는 걸 주저했다. 오해와 어리둥절한 눈빛, “아니, 난 너를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와 같은 조심스러운 반응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마침내 내 생각을 나눴을 때, 내가 만난 건 긍휼이었다(유 1:22).모든 사람이 다 이런 경험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모두가 다 공감하는 친구를 만나 털어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지금 행여나 혼자 끙끙대며 의심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친구를 찾아 속을 털어놓아라. 친구가 보이는 긍정적인 반응에 당신은 분명히 놀랄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 창조된 성도들의 어깨(갈 6:2)가 의심을 짊어지지 못할 만큼 약하지 않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건 위험하지만 충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 정도로 의심은 나 혼자 힘으로 이겨내기에는 너무도 강력하다. 방향을 잃게 하고, 기만하며, 또 정신을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살아서 가까이에 있는 성도뿐 아니라 고인이 되었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성도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내게는 레드 마운틴 교회(Red Mountain Church) 찬송, 앤드류 피터슨(Andrew Peterson)의 음악,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의 시, 그리고 C. S. 루이스의 책이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낼 수 없을 때,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었다. 나는 할 수 없었지만, 이들은 의심이 초래한 들리지 않는 고뇌를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또한 감히 나는 할 수 없었지만, 의심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조차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적용하는 방법까지 알았던 뜨거운 영혼이었다. 그들은 내가 의심의 수준을 뛰어넘는 삶을 상상하도록 도와주었다.(소셜 미디어 시대이기에, 간단한 경고가 필요하다. 얼굴을 맞대고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온라인에서 무분별하게 게시물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의심은 숨겨야 할 대상도 아니지만, 또한 실시간으로 광고할 대상도 아니다. 모든 측면을 고려할 때, 글로만 판단하기에는 우리의 시각은 너무도 왜곡되어 있다. 게다가 소셜 미디어의 조언은 신뢰하기 힘들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내 속을 털어놓는 것으로는 열매를 맺기 힘들다.)의심은 고립시키는 속성이 있다. 특히 수치감을 줄 수 있으며, 때로는 설명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은둔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교제는 천천히 기적을 일으킨다.3. 의심에서 벗어난 시간을 가지라.의심의 손아귀는 믿음의 목구멍을 조여 믿음의 호흡을 막는다. 따라서 숨이 막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의심에 관심을 가진다. 목이 졸리고 있는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일 중 하나가 바로 거의 강박증 수준으로 의심에만 온통 집중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저지른 가장 최악의 일 중 하나이다. 의심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놔두면 혼자 알아서 죽기도 한다. 물론 가장 성가신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찾는 것은 안도감을, 그것도 궁극적인 안도감을 줄 수 있다. 나는 책과 설교, 친구와의 대화에서 의심에 대한 몇 가지 해결책을 찾아서 내 목을 짓누르던 손가락 몇 개를 떼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답변은 의심에 대한 해결책의 일부에 불과했으며,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결코 가장 중요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의심을 극복하려고 내가 했던 많은 시도는 마치 거울을 많이 쳐다봄으로써 더 잘생긴 얼굴을 만들려는 것과 같았다. 그런 노력은 단지 나를 더 나 자신 속으로 파고들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의심하는 시간보다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이었다. 변증 자료에서 벗어나 더 많은 것을 읽고 봐야 했다. 내면의 고통을 뛰어넘는 더 많은 것에 관하여 일기를 써야 했다. 의심은 온전하고 깨끗한 햇빛이 필요하다. 그러나 의심과의 씨름은 종종 나를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실로 끌고 내려갔다. 그렇다면 의심하는 사람이 답을 찾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늘 아래에 오래 앉아서 피조물로서 영혼의 산소를 깊이 호흡하라(시 19:1; 시 104:24).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울고 또 기뻐함으로써 자아에서 벗어나라(롬 12:15). 모임에 참석해서 당신 그리고 당신의 문제보다 훨씬 높은 영광을 바라보고 찬양하라(골 3:16). 합당한 직업이 주는 고된 노동 속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으라(골 3:23). 그리고 무엇보다 천천히, 기도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라(히 3:1).4. 하나님을 계속 찾아라.오랫동안 의심에서 허덕이다 보면, 어쩌면 결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에 빠질 수도 있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런 식으로 나는 빠졌다. 뼛속까지 파고든 일종의 숙명론에 사로잡혔던, 가장 깊은 의심의 계절이었던 그 며칠 또는 그 몇 주를 나는 기억한다. 싸움은 아예 쓸모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부의 깊은 분열은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결국 의심의 관점에서 미래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자비롭게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은 언제나처럼 나를 깨우셨다. 하나님은 의심이나 긴 투쟁을 쉽게 간과하도록 만드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 주셨다. 그건 다름 아니라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진리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밖에서부터 들어오셔서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이시다. 파라오를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이시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흔드시는 하나님, 그리스도를 보내고 무덤을 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선은 결코 제자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불가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단지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태복음 7:7-8의 예수님 말씀은 모든 숙명론에 마침표를 찍는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다 파헤치기에 의심은 너무 깊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영혼을 덮고 있는 의심의 그림자가 너무 짙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함에도 어두움에 맞서서 구하고 계속 구하고, 찾고 계속 찾고, 또 두드리고, 계속 두드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떤 시간에 또 어떤 장소에서, 한 단어로 또는 다른 말로 삼중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얻을 것이요 … 찾을 것이요 … 열어 주실 것이다.”5. 인내를 가지고 구원을 기다리라.그러나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구와 응답 사이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이 길 수도 있다. 도마 이야기는 그래서 도움이 된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여드레 뒤에…(요 20:25-26).여드레가 지나서. 왜 여드레인가? 잠긴 문이 도마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막을 수 없다면(요 20:26), 기다리는 시간도 방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부활하신 주님은 방해받지 않으셨다. 그는 일부러 지체하셨다. 도마가 한 시간이나 그날 오후에 답을 얻도록 하지 않고, 그가 고뇌에 찬 여드레를 보내도록 내버려 두었다.예수님에게는 언제나처럼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기다리실 때, 그 기다림을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의심은 우리를 유혹하고 고문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는 도마와 함께 배운다. 하나님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된다. 자기 불신이라는 필수 덕목을 배운다(잠 3:5). 다른 사람의 약점을 동정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너는 결코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할 거야”라고 말하는 절망 앞에서조차,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법을 배운다.나의 주, 나의 하나님자기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더딤은 언제나 자비로운 지체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신실하게 주님을 기다린 모든 성도는 다 윌리암 쿠퍼(William Cowper)의 찬송 “여호와이레, 주님이 공급하신다”(Jehovah Jireh, The Lord Will Provide)에서 진리를 느낄 것이다.기다려라, 그의 알맞은 도우심을늦더라도, 기다려라. 그 약속 지체되더라도 너무 늦지 않으리니. 기다리는 내내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이들을 위해 말하고 싶다. 마침내 우리도 도마처럼 외칠 것이다. 무릎 꿇고서, 경외의 마음으로, 의심을 걷어버리고, 큰소리로 고백할 것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 그러니 의심이 가져다주는 모든 질문 속에서도 무엇보다 귀를 기울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자. 두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보자. 그가 친히 오셔서 화평을 말씀하시고 모든 흑암과 의심을 넘어 빛의 땅으로 인도하시길 간절히 기도하자. 원제: Doubt: A Personal Histor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의심
회의
도마의의심
여든 살이 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여전히 읽을 가치가...
고전 재발견: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by Joseph A. Kohm Jr.
2022-12-02
기독교 고전 재발견C. S. 루이스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수 세기 동안 불고 있는 깨끗한 바닷바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스쳐 지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리고 루이스에 따르면 그건 오로지 “오래된 책을 읽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우리가 잊고 지낸 기독교 고전을 재발견하는 시리즈(Rediscovering Forgotten Classics series)를 시작합니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 도움을 주는, 그러나 잊고 있던 기독교 고전을 우리는 하나씩 되찾아 나갈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가 소리도 없이 “빈 침실로 사라지고, 거기에서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 다 낡아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이 책은 잘 팔렸고, 출판된 지[1942년 초판 출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위직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부하 악마 웜우드에게 보낸 일련의 편지는 기독교 베스트셀러 목록에 단골로 등장한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느 날 루이스가 교회에 앉아 있을 때 퍼뜩 떠올랐다. 1940년 동생 워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예배가 끝나기 전이었지. … 가장 유용하고 재미있을 것 같은 책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그 아이디어가 너무 좋아서 충격을 받을 지경이었지. 내용은 ‘한 악마가 다른 악마에게’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 먹어 은퇴한 악마가 이제 막 첫 번째 ‘환자’에 대한 작업을 시작한 젊은 악마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될 거야.” 실용성에 재미까지 더한 이 책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매일 매일을 사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더불어, 거만하면서도 다독거리는 성격의 스크루테이프는 모든 독자에게 유쾌한 웃음까지 선사한다.스크루테이프의 편지C. S. 루이스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저 아래 계시는 우리 아버지”(Our Father Below_사탄)를 보좌하는 고위직 악마 스크루테이프의 시선으로 인간의 삶과 약점을 은근한 익살과 역설로 생생하게 그려내어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종교 풍자의 고전 걸작이다. 매우 통렬한 풍자와 극도의 진지함과 놀라운 독창성이 교차하는, C. S. 루이스의 이 책은 악마의 유혹에 대해―그리고 그 유혹을 물리치는 승리에 대해―이야기하는 전대미문의 매력 넘치는 고전이다. 세상 독자들을 위한 멋진 이야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책으로 나오기 전에 종교 주간지 가디언(The Guardian, 같은 이름의 현대 영국 일간지와는 관련 없음)에 31부작으로 연재되었다. 첫 번째 편지는 1941년 5월 2일에 출판되었다. 그리고 1942년 2월에 서른한 통의 편지 모두가 포함된 단행본이 출간되었다.처음부터 독자들 대부분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모든 독자가 그 이야기의 밑바탕에 있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시골 목회자는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 웜우드에 대한 스크루테이프의 조언들은 “그릇된 것들일 뿐 아니라 확실히 악마적”이라며 구독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이처럼 혼란에 빠진 성직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일종의 농담으로 독자들을 가장한 진지한 자기 지식의 세계로 끌어들이느냐에 이 책의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좌절한 스크루테이프가 저도 모르게 큰 지네로 변해버리는 장면에서 독자는 킬킬거리며 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이스의 유머뿐 아니라 악마를 이용한 그의 냉소 섞인 진실 전복에는 다 목적이 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독자들이 스크루테이프의 성공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특히 붙잡고 싶은 것은 세속의 독자이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죄와 싸우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훈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편지의 독자층이 루이스가 원래 목표로 삼았던 “세속의” 사람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점점 더 세속화되는 문화에서 이 책의 독자들은 주로 기독교 전통을 따르거나 최소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기독교 인구 통계라는 면에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가치를 가진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12에서 말세에 이르면 불법이 더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유혹에 휩싸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이 책이 주는 가치는 대단히 크다. 악마의 모든 계책을 손에 쥔 우리는 이제 숨어있는 함정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 전반에 걸쳐 스크루테이프가 활용하는 함정(trapdoor)이 있는데, 객관적 진실에 대한 스크루테이프의 왜곡이 그것이다. 그러나 마귀가 항상 속이기만 하는 건 아니다. 약간의 진실이 섞인 거짓말이 훨씬 더 위력이 있다는 것을 마귀는 잘 알고 있다. 상대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환자에게 결혼을 권하는 것은 괜찮다고 스크루테이프는 제자에게 말한다. 교리가 엉망이 되어버린 교회라면, 교회 출석을 장려하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환자에게 만사에 중용을 지키라고 말해 주거라. ‘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해 놓으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moderated) 종교란 우리한테 무교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모교보다 훨씬 더 즐겁지”(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홍성사, 스페셜 일러스트 에디션, 82-83). 환자의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면, 그리고 평생 헌신하는 신앙이 아니라면, 환자에게 기독교를 권장하는 것도 별로 문제 될 게 없다. 우리 중에 그 누가 선견지명으로 가득한 이 책이 말하는 유혹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아직 한 번도 읽지 않았거나 마지막으로 읽은 게 오래전이라면, 출간 80주년이 되는 올해는 당신이 그 책을 손에 들어야 할 멋진 이유가 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스크루테이프가 쳐 놓은 함정 하나를 피할 수 있다. 그는 웜우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음의 숙명을 안고 사는 인간들, 참 웃기지 않아? 우리가 항상 그들 마음에 무슨 생각을 집어넣는다고 착각하니까 말이야. 사실은 꼭 생각해야 할 것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게 우리한테는 제일 큰 성공인데.” 원제: At Age 80, ‘The Screwtape Letters’ Is Still Worth Read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편지
알고리즘 시대에 지혜를 찾아서
by Steve Bateman
2022-11-30
우리는 알고리즘이 아첨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 알고리즘은 내가 듣고 싶은 유쾌한 거짓말을 한다. 왜 그럴까? 알고리즘을 만드는 똑똑한 사람들은 내가 가진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돈, 관심, 투표를 원한다. 이익을 위해서든, 칭찬 또는 권력을 위해서든,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첨하는 이 일에 투입된다. 알고리즘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알고리즘이 관심을 기울이는 건 오로지 하나, 우리 결정에 최대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시간 동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쉼 없이 가장 확실하게 나의 관심을 끄는 주제를 화면에 띄운다. 나를 화나게 하고, 두렵게 하고, 흥분시키거나, 또는 존경심을 우러나게 하는 것들 말이다. 알고리즘의 아첨은 긍정적인 확언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또는 내가 항상 의심했던 것이 맞았다며 나를 안심시키며 확인시킨다.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고 또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다고 알고리즘은 속삭인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다시 현실로 인도한다. 알고리즘이 거짓으로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을 말하고 우리를 올바르고 지속적인 성취의 길로 안내한다. 하나님 앞에 선 나는 우상숭배와 죄의 현실에 직면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발가벗겨졌지만, 동시에 값없이 사랑받는다는 복음 안에서 기뻐한다. 나는 하늘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고 영원히 의롭다 함을 받았다. 이제 온전히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온전히 용서받았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힘든 성화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그렇다면 알고리즘 아첨의 시대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내 삶을 올바르게 정리할 수 있을까? 일곱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 지혜롭겠다고 결심하라.전도서를 설교하면서 나는 우리 교회 가족에게 지혜의 실제적인 정의를 제시했다. 지혜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진리를 능숙하게 분별하고 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분별력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분별은 개발해야 할 기술이다. “인간의 간교함과 속이는 간계”에 속지 않으려면,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또 지적으로 성장해야 한다(엡 4:14-15). 예수님을 더 오래 따를수록, 우리는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2. 진리의 중재자로 말씀을 의지하라.우리 복음주의자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고백한다. 성경만이 최종 권위이자 진리의 표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조차 악명 높은 성경 문맹(biblical illiteracy)은 우리를 “엉터리 정보 시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만든다. 컴퓨터 또는 스마트폰에 보내는 시간과 성경 읽는 시간을 비교할 때, 우리가 진짜 성경이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걸까? 패트릭 밀러(Patrick Miller)가 지적했듯이 오늘날 많은 교인의 “진정한 멘토는 알고리즘”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진짜로 내게 말씀하시는가?”라는 질문 형식으로 포장된, 기만적이고 아첨하는 메시지의 공격을 받고 있다(창 3:1). 알고리즘이 주는 아첨의 매력에 저항하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실제로 내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똑바로 아는 것이다.3. 인터넷 탐색 기술을 연마하라.“속지 말라”는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고전 6:9, 15:33, 갈 6:7, 약 1:16). 잘 속는 건 경건한 게 아니며, 순진한 건 고귀한 게 아니다. 사실 속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다. 신자라면 내부에 거짓말 탐지기를 장착하고 수시로 작동시킬 의무가 있다.효과적인 제자도는 이제 다음과 같은 훈련 항목이 필요하다. 디지털 문맹 수준, 비판적 사고, 측면 읽기, 진리 삼각 측량, 논리적 오류 식별, 논리적 오류 판별, 사실 확인, 그리고 일반적인 온라인 거짓 정보 및 허위 정보 방지 피하기. 알고리즘 시대를 맞아 우리는 검색(search)과 조사(research)를 구분해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의 목소리는 편견을 강화하는 전문가에 더 집중하라고 우리를 설득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서 무엇보다 증거부터 자세하게 살핀다.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잠언 18:17).4. 인터넷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내 자동차를 수리할 거면 3주 전에 약속을 잡아야 한다는 정비공의 말에 나는 일단 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유튜브 영상에서 수리 방법을 찾아서 내가 직접 고쳤고, 바로 정비 약속을 취소했다. 나는 인터넷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는 것도 아마 알고리즘을 통해서일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우리는 참되고 존귀하며 그리스도를 높이는 많은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인터넷은 지상명령 수행을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된다. 5. 음모론에 도전하라.구약과 신약은 모두 정보를 흩뜨리고 분열시키며 파괴하기 위해 고안된 음모론에서 시작한다. 창세기에서 뱀은 하나님을 남자와 여자의 가장 큰 유익을 빼앗기 위해 음모를 꾸민 음모자로 비난한다(창 3:1). 마태복음에서 산헤드린은 제자들이 공모하여 예수님의 시체를 훔쳤고 더불어 이기적인 운동까지 시작했다는 음모를 꾸몄다(마 28:13).오늘날의 회의론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고 기독교의 부상을 막기 위해서 종종 음모론의 형태를 도입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음모론에 사로잡혀 속기 쉬운 것으로 널리 알려진다면, 우리는 거짓 이야기를 부추기고 교회의 신뢰성을 훼손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주범이 될지도 모른다. 6. 정치를 유쾌한 거짓말이 널린 지뢰밭으로 여기라.지뢰밭은 때로는 건너야 하지만 또 때로는 피해야 한다. 지혜는 그 차이를 안다. 그리스도인이 공공영역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지만, 잘못된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각별한 경계를 요구한다. 정치적 당파주의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증거는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거기에 반박하는 증거를 억누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많은 것이 걸려 있는 상황이라면, 정당한 목적 달성을 위해 불의한 수단 정도는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다는 유혹까지 받는다. 상대방의 이중 잣대는 눈을 부릅뜨고 보지만, 정작 나 자신의 잣대에는 눈을 멀게 만드는 게 당파적 정치이다. 알고리즘의 아첨은 양극화를 부추기고, 문화적 격차를 넓히며, 나아가서 교회의 평화까지 교란한다. 7. 겸손하게 진리를 적용하라.세상은 더 이상 성경 인용, 비판적 사고, 알고리즘 분석, 그리고 사실을 확인하는 순진한 바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무리 진리를 분별하는 데 능숙하더라도, 정작 내 삶에 진리를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다면 오류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뱀의 지혜에서 비둘기의 순진함을 빼버리면 남는 것은 위선에 찬 양이다. 예수님이 말하는 비둘기가 그렇다고 가장 똑똑할 필요는 없다. 비둘기는 분주함에 휩쓸리지 않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도 않는다. 또한 정확하게 자신을 판단하고 있으며 언제 무익한 논쟁에서 벗어나야 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기 인식이 있다. 더불어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오류를 수정하거나 소셜 미디어에 모인 국가적 차원의 무지에 굳이 나까지 기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원하는 비둘기는 누군가의 주장을 논박하기 전에 먼저 자세한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실천하는 비둘기는 “합리성”(reasonableness)을 가졌다는 평판을 얻는다(갈 5:22-23; 빌 4:5).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알고리즘이 쏟아내는 아첨으로 가득한 세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원제: Seek Wisdom in the Age of Algorithm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알고리즘
음모론
인터넷
성경문맹
오직성경
속도를 늦추라, 기억하라, 고대하라
by Adam Ramsey
2022-11-27
성탄절이 다가오면 뭔가 멋진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당신도 그런가? 멀리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공항 터미널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수평선 저 너머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처럼, 그리고 오랫동안 고대하던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되는 바로 그 순간처럼, 성탄절에는 뭔가 멋진 일이 생길 것만 같다. 프레드릭 비크너(Frederick Buechner)는 다음과 같이 썼다.아주 잠깐, 당신은 공기 중에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장소,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향기를 맡습니다. 지금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낄 정도입니다. 앞으로 일어나려는 특별한 일은 오로지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이 가져다주는 특별한 순간과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의 이름은 바로 대림절입니다. 대림절, 이는 무언가 놀라운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이다. 속도를 늦춰야 하는 시간이번 주일은 교회 절기에 따라서 성탄절 전 네 번째 주일에 시작하는 대림절이 시작하는 날이다. 지금은 그리스도를 보물로 삼기 위해 마음을 준비할 때이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쁜 연말의 혼잡 속에서 우리는 이 소중한 기다림의 순간을 너무도 쉽게 낭비하곤 한다. 정신없는 12월을 제대로 기억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소비주의 시대가 빚어낸 또 하나의 희생자가 되어 성탄절을 목전에 두는 기분이 어떤 건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반응하기. 조직하기. 쇼핑하기. 계획하기. 포장하기. 예산 책정하기. 스트레스받기. 먹기. 스트레스 때문에 먹기.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와 마찬가지로 속도를 좀 늦춰야 하는 사람들, 유명한 캐럴 “우리 모두 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세”(Let every heart prepare him room)가 꼭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이다.기억해야 할 시간성탄절에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강력하게 뒤흔들었는지를 상기하게 된다. 성탄절의 의미는 가족 전통, 예쁜 조명, 오래된 양말을 걸어놓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다. 성탄절은 혁명을 의미한다. 성탄절은 기적을 의미한다.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오셨음을 의미한다. 하늘의 왕이 왕좌를 요람으로 바꾸었음을 의미한다.전능자가 자신을 연약함으로 감쌌음을 의미한다.창조주가 피조물 속으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저자가 페이지 속에 자신을 넣었음을 의미한다.무한하신 이가 아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주시는 이가 선물이 되었음을 의미한다.예수님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셨다. 오래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가 창조한 어머니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으신 손에 의해서 이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셨는지를 숙고하면, 그분을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깊어질 것이다. 기대의 시간대림절에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행복한 기억뿐 아니라 그의 재림에 대한 깊은 열망을 일깨우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계 22:20). 이 시대의 교회는 구약의 끝을 향하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과 여러모로 비슷한―마치 유배자처럼 주변으로 밀려나 있으며, 어둠 속에서 소망을 품고 있으며, 톨킨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슬픈 일을 사라지게” 만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숨죽여 갈망하는―위치에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과거 성탄의 행복한 추억과 다가올 성탄의 흥분이 주는 숨 가쁜 기대 사이에서 들떠서 성탄 전야를 보내는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할렐루야’와 그리스도의 재림이 주는 ‘마라나타’ 사이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대림절을 기다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의 기대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엿볼 수 있는 독특한 기쁨을 발견한다. 티모시 폴 존스(Timothy Paul Jone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림절을 맞은 그리스도인은 신음이 현재의 빈약함 때문에 생긴 희망 없는 흐느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신 신성한 잔치에 대한 간절한 열망 때문임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육체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듯, 우리도 메시아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 대림절을 맞아 신실한 신자는 고백한다. 동정녀의 무릎 사이로 거친 숨을 내쉬며 태어난 아기에게는 아직 해야 할 마지막 말이 남아있다고. 대림절은 우리는 이 세상을 지나가는 순례자임을, 죄악으로 망가진 이 세상이 계속 이렇게 있지는 않을 것임을, 진정한 왕께서 참으로 곧 오실 것임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원제: Tired Just Thinking About Advent? Slow Down and Savor Chri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대림절
성탄절
초림
재림
세계관에서 예배로, 신념에서 실천으로, 표현에서 형성으로!
제임스 K. A. 스미스의 세계관 읽기_1
by 김경호
2022-11-26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세계관에서 예배로! ‘신념의 세계관’ 비판.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기존의 ‘신념의 세계관’을 비판합니다. 스미스는 기독교 세계관의 인간 이해가 주지적 혹은 인지 중심적이라며 실천과 신념 사이의 관계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신념의 세계관은 “교리와 신념의 원천인 성경으로부터 시작하고, 그런 다음 이를 적용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일치하고 이를 표현하는 예배의 실천을 만들어 낸다.” 스미스는 이러한 신념의 세계관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이렇게 주장합니다. 첫째는 교리보다 예배가 먼저였습니다. “예배가 정경의 형성보다 선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예배 참여는 교리의 공식화와 세계관의 명확한 진술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신념과 교리보다 욕망의 실천으로서의 예배가 우선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의 신념보다 더 심층적인 차원이 필요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 지성이 아니라 상상력, 무엇보다 세계관이 아니라 “예배하는 인간”이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미스는 무엇보다 욕망하고 사랑하는 “신체성”(몸)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무시가 실천에 치명적이라고 강조하며 비판합니다.스미스의 기본 주장. 스미스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자신의 기본 주장을 설명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신념, 사상,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마음과 욕망의 형성에 관한 문제, 즉 지성이 아니라 상상력을 변화시키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성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급진적인 제자를 형성하는 것이며, 이것이 기독교 교육과 예배의 근본 목적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스미스는 이러한 주장을 일련의 매커니즘으로 도식화합니다.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욕망과 사랑은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어떤 목적에 이끌리고, 상상력에 사로잡힙니다. 이러한 욕망과 사랑, 그리고 목적이 몸에 새겨진 습관을 통해 “자동적 무의식적 실천”이 이루어집니다. 몸의 자동성은 오랜 시간 반복되고 지속하여 실천될 때 형성됩니다. 물론 모든 습관이 자동성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미스는 여기서 실천의 자동성을 “얇은 실천”과 “두꺼운 실천”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이를 닦는 것과 같은 얇은 실천은 평범하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입니다. 따라서 이는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꺼운 실천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이 모든 매커니즘의 핵심이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에는 욕망과 사랑, 목적과 상상력(또는 정서), 그리고 몸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핵심은 형성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자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신념에서 실천으로!형성. 스미스는 신념이 아니라 예배에 의해 욕망에서 몸을 통한 실천으로 이어지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잘 그려줍니다. 형성, 잘못된 형성, 그리고 대항적 형성이라는 실천의 역학이 그것입니다. 먼저, 형성은 실천의 첫 번째 단계이자 시작입니다. 이 형성은 예배로부터 시작하고, 욕망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형성에는 두 가지 모호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형성이 이루어지는 시간의 부족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를 통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일주일 가운데 주일에 드리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예배 시간 안에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엿새 동안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시간이 예배하는 시간보다 더 많으므로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합니다. 둘째, 형성이 가진 실천의 모호성입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 아침에 이웃들이 집에서 신문을 읽는 시간에 우리는 교회에 가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그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잘못된 형성. 결국 잘못된 형성의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스미스는 그의 책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이 점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교인들이 기독교 예배에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속적 예전이 기독교 예배의 실천을 효과적으로 압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스미스는 그의 책 습관이 영성이다에서 잘못된 형성의 사례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그는 웬델 베리Wendell Berry의 온 삶을 먹다라는 책에서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 환경 운동―행복한 소, 행복한 돼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그 책을 탐독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열정적으로 이 책을 탐독하면서 형광펜을 칠하고 밑줄을 긋고 여백에 중요한 표시를 하고 아멘이라고 적었다. 읽다가 핵심 주장을 곰곰이 생각하려고 책에서 머리를 드는 순간, 추악한 아이러니를 깨달았다. 나는 코스트코 푸드 코트에서 웬델 베리의 이 책을 읽고 있었다.잘못된 형성의 역학은 그것을 지적하는 책을 저술한 저자 자신에게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평생 교회를 다니지만 잘못 형성된 채로 살아갈 수 있으며, 심지어 불의한 체제와 구조와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제대로 막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쟁하는 욕망의 교육에 동시적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항적 형성과 대항적 형성을 위한 내부 공간으로서의 교회.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형성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스미스는 바로 대항적 형성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바로 몸의 올바른 습관과 실천이라고 강조합니다. 몸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실천의 문제에 대한 답으로 제시해 왔습니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현대의 모리스 메르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신체적 앎(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지향성),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아비투스(무의식적 지향), 사이몬 로버츠Simon Roberts의 체화된 지식embodied knowledge 등입니다. 이 가운데 사이몬 로버츠의 ‘체화된 지식’ 개념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체화된 지식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한 경비원의 예에서 실증됩니다. 2006년 포틀랜드 공립학교에 효율성을 위해 인공지능을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10년 이상 학교 건물을 관리해 왔던 경비원의 체화된 지식의 효율성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경비원은 창문이 닫히지 않는 이유, 어떤 수도꼭지가 더 잘 세는지, 어떤 라디에이터는 다른 라디에이터보다 좀 더 자주 공기를 빼줘야 한다는 학교 건물의 특이점을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체화된 지식은 운전할 때나 타자 칠 때처럼 생각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합니다. 이런 점에서, 대항적 형성은 몸이 가진 체화된 지식 또는 자동으로 반응할 수 있는 습관이 답입니다. 또한 대항적 형성은 재형성을 위한 공간인 교회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 사랑을 새롭게 하고 욕망을 재정향하도록 촉구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성령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먹여 주시는 집,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바로 그 공간 그 간격에서 번개 같은 마법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 습관을 징집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대항적 형성과 대항적 형성을 위한 외부 공간으로서의 일반계시. 스미스는 교회와 세상을 문화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기독교 예배가 독특한 사람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다중요인을 분석합니다. 이 요인은 원론적으로 생각이나 지성이 아니라 실천적 형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중성인가 아니면 실천 중 일부만인가의 문제입니다. 스미스는 영화 ‘대부’의 주인공 마이클 코를레오네를 통해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코를레오네는 예배의 주기와 습관에 의해 지배받은 적이 없습니다. 코를레오네는 그가 필요할 때 결혼식, 세례식, 장례식에 선택적으로 참여했을 뿐입니다. 코를레오네는 자신에게 유용한 실천 중 일부만 참여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간헐적, 선택적 예배 참여를 올바른 습관화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미스는 교회와 목회자의 역할을 제안합니다. 특별히 스미스는 교회와 세상을 연결하여 신학자들이 놓치는 이단을 사회학자들이 발견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밖에서도 목회자의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화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작업입니다. 표현에서 형성으로! 스미스는 우리가 예배의 주요 행위자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할 때, 우리는 예배를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행위, 또는 헌신을 보여주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이런 식으로 이해할 때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진정성이라고 가정하는 셈입니다. 진정성에 대한 열망은 참신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그래서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예배하고 그런 행위를 반복한다면 스스로 위선적이라고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렇게 위선적이라고 느끼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리의 헌신을 보여줄 새로운 예배 방법을 추구할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배를 표현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예배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참신함을 추구합니다. 의도는 좋지만, 결과는 예배 형식과 복음 내용의 미심쩍은 구별과 결합입니다. 예배의 형태와 실천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형식에 불과하며, 현대적이고 매력적이고 적절한 방식으로(참신성)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버릴 수도 있고 버려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현대 문화를 향해 말을 걸기 위해 우리는 교회를 개조합니다. 예배 형식과 복음 내용을 담아내려는 열망에서 우리는 더 익숙한 동시대의 문화 형식을 찾습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현대적 실천을 채택하여 예배를 개조합니다(커피숍, 공연장, 쇼핑몰 같은 분위기에서의 예배).문제는 이런 형식이 메시지를 담는 중립적인 용기도 아니며 폐기할 수 있는 통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이런 형식 자체가 특정한 텔로스(목적), 즉 좋은 삶의 암묵적 전망을 지향하는 실천입니다. 형식 자체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관계 맺는 법을 가르치는 욕망의 교수법입니다. 이런 실천 형식 자체에 이미 세상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 가득 차 있습니다.또한 예배를 표현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표현을 통한 의로움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배에서는 우리 자신을 예배의 주된 행위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 예배의 실천은 예배의 본질에 대한, 행위 주체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패러다임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배는 위로부터 아래로 이뤄집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시는 공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시 훈련하시는 체육관이기에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스미스의 ‘형성의 세계관’은 모던적 특징을 모두 배제했다는 점입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몸을 통한 실천의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유산임은 틀림없습니다. 이제는 몸의 실천이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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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
by 고상섭
2022-11-25
해마다 11월이면 추수감사주일을 지킨다. 미국의 추석을 교회의 절기로 기념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입장도 있지만, 일 년에 한 번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회로 삼는 교회가 많아졌다. 추수감사절에는 감사노트와 감사기도문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이태원 참사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은 세상 속에서 교회 안에서 감사의 절기를 지킨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마음이 불편하기도 한 현실이다. 성경은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명령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어려운 현실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감사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감사의 고백이 문화와 동떨어진 우리만이 리그가 되어 세상과 단절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적 감사노트를 활용하라 추수감사절 즈음에 감사노트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다양한 감사노트를 통해 감사를 생활화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케빈 드영은 미친 듯이 바쁜에서 바쁨이 신앙의 가장 큰 방해물이라고 말하면서 영적인 침체에 빠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이라 말한다. 하루의 삶에서 감사하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 하루 속에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 오늘날 감사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바쁨이다. 미디어 비평가 닐 포스트먼은 죽도록 즐기기에서 정보를 통제하는 사회가 아니라 너무 많은 정보로 인해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미래 사회를 꼬집었다. 인터넷과 SNS에 빠진 현대인은 홀로 생각하고 사고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바쁜 현실에서 잠시 시간을 내서 감사노트를 활용하는 것은 오늘 내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는 좋은 경건의 훈련이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이 땅에서 내가 받은 무엇을 향한 감사는 자칫 물질주의와 자연주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감사노트를 사용하는 법을 보면 이런 예시가 등장한다. “오늘 아침 식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에 출근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알람 소리를 듣고 깰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물질세계 안에서, 자연주의 세계 안에서 나에게 있는 무엇을 향한 감사뿐이라면 오프라 윈프리의 감사 노트와 다를 게 없다. 물론 하나님이 없는 감사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차별성을 가지지만,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려면 물질세계 속에서 내게 주어진 무엇에 대한 감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감사가 세상 속에서 내게 주신 무엇에 대한 감사뿐이라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나보다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한 무시가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작은 것이라도 나에게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정신은 필요하지만, 어쩌면 풍성한 감사가 아니라 어려운 현실 속에서 감사라도 붙들지 않으면 지탱할 수 없는 메마른 감사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땅에서 감사할 수 없는 조건이 많은 이유는 이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구조적으로 망가진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는 때로는 낙심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전도서이다. 데릭 키드너는 “잠언이 창조 질서를 강조하는 반면, 전도서는 그 질서가 뒤죽박죽 망가져 있음을 더 부각하고, 욥기는 이 질서가 대개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고 하면서, 지혜로워지려면 잠언뿐 아니라 전도서, 욥기라는 지혜서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이 세 가지 관점을 동시에 가질 때 비로소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잠언은 하나님의 정해진 질서가 이 세상에 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대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면 복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창조 세계 안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신체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잠언은 명확하게 의인은 주리지 않고 악인은 주리게 된다고 말한다. 손이 부지런하면 부하게 되고 게으르면 가난하게 된다고 명확하게 정의한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3-4).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고 악한 사람이 득세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사람을 속이며 게으른 사람들이 부하게 되는 경우를 본다.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고 실망하며, 감사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것은 잠언의 한 구절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지혜서 전체를 통해 입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권유한다. 전도서는 잠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질서가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전 2:15).전도자는 지혜자로 살건 우매자로 살건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한탄한다. 또 전도서를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잠언은 하나님의 드러난 질서가 있다고 말하지만(God’s order Perceived), 전도서는 그 질서가 교란되어 있고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God’s order Disrupted). 또 전도자는 하나님의 질서가 왜곡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해 아래서’ 무엇을 찾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이 땅에 있는 물질 속에서 이 세상의 관점만으로 자연주의 세계관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질서가 다 왜곡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진리가 왜곡된 세상, 뒤틀린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 아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해 밖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주는 책이 욥기이다. 욥기는 하나님의 질서가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God’s order Hidden). 욥기 1장에서 사탄은 하나님께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를 하나님이 물질의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 말하면서,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가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한다. 그 사탄의 요구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면서, 욥의 소유물을 사탄에게 맡기고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1-12). 욥기 1장은 천상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보여주지만, 문제는 욥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고난을 당할 때, 어려운 현실을 통과할 때 욥은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인생의 밤 중에 노래를 알려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또 이 과정을 통해 귀를 들었던 하나님에게 눈을 보게 되는 하나님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욥은 알지 못한다. 팀 켈러는 “삶의 환난을 평온하게 맞이하고 이겨내려면 두 가지 진리가 다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로 우리의 고통을 즐거워하지 않으심을 알아야 하고, 둘째로 그 고통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오늘을 사는 잠언, 89). 인생의 참된 감사는 부조리한 세상처럼 보이는 교란된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질서가 여전히 숨겨져 있음을 신뢰하는 것이다. 잠언은 명확한 질서를 이야기하고, 전도서는 그 질서가 꼬여있다고 말하지만, 욥기는 자세히 보면 꼬여진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겨진 뜻과 질서가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도서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늘 부조리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해 아래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하라 욥은 예수님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했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우리는 더욱 선명하게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모든 고통과 부조리를 가져가셨다. 이제 우리는 어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뒤틀리고 꼬여있는 현실을 만나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숨겨진 질서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어떤 부조리와 고난도 나에게 더 이상 정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지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다. 나 자신의 마음의 새로워짐도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아는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빼앗기지 않는 감사는 내게 주신 무엇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분이다. 나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땅엔 명확히 선포된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잠언). 그러나 그 진리는 세상 속에서 바르게 작동하지 않고 왜곡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전도서). 그러나 그 왜곡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회복하면 여전히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욥기). 그것을 우리가 누리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의 대상이 하신 말씀이라면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왜곡되어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겨진 질서와 뜻이 있음을 믿을 때, 우리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6:1).
감사
부조리
잠언
전도서
욥기
내가 더 이상 교회 쇼핑을 하지 않는 이유
by Tess Abraham
2022-11-24
나는 살면서 지금까지 교회를 열두 군데 정도 다녔다. 우리 부모님은 교회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이었는데, 나는 자라는 내내 두 분이 교리적으로 건전하고 또 지역 사회에도 도움을 주는 교회를 찾는 데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다. 대학에 갈 무렵, 내게는 고약한 습관이 하나 자리 잡았는데, 새로운 교회를 갔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한 교회에만 헌신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종종 교회를 개인적으로 애용하는 연극 무대처럼 대한다. 찾아간 교회가 내가 원하는 바로 그 경험을 주지 않으면, 바로 관람권을 전액 환불하고 다른 극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내가 배우게 된 건, 지역 교회가 주는 아름다움은 주일 아침의 이상적인 경험이 가져다주는 개인적인 선호도를 모아놓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단지 주일 하루의 경험이 아니라 일주일 전부와 관련이 있다. 공동체로의 초대교회를 마냥 시대에 뒤떨어지고 이상한 의식이나 치르는 곳으로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 모이는 신자들은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눈에는 교회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그와 같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채택하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묻게 된다. “내가 굳이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야 하나?”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즈음, 이런 생각이 완전히 내 속에 자리 잡았고, 그랬기에 아무리 많은 교회를 다녀도 나에게 딱 맞는 교회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성경 신학은 교회가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나의 행동은 그 반대로 움직였다.대학 마지막 학기 때, 나는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 친구가 다니던 작은 교회에 함께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 교회에 참석한 첫 주일, 예배 시작 전 담임 목사는 한 시간 동안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예배가 끝나고 그는 우리를 사택으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주일마다 교인들은 목사의 가족과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주일은 이제 내게 한 시간 동안의 예배가 아니라, 종일 진행하는 이벤트가 되었다. 나는 소그룹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또 주중에는 다른 가족의 집을 방문하는 식으로 점점 더 교회 생활에 빠져들어갔다. 어느새 나의 생활이 일주일 내내 작은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움직여다. 저녁 식사, 게임, 또는 커피 타임을 위해서 교인들과 함께하는 것이 제2의 천성이 되었다.공동체로 인한 변화지역 교회가 제공하는 격려와 확신, 그리고 많은 은혜로 인해 내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나는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주신 이유를 온몸으로 체험하기 시작했다. 나를 그 교회 공동체로 이끌었던 특성은 다른 게 아니라 그들이 날마다 실천하고자 하는, 말씀을 진지하게 삶에 적용해서 살아내려는 사고방식(life-on-life mentality)이었다. 교회는 단지 예배 세트나 설교가 아니다. 교회는 삶의 방식, 그 자체이다. 교인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즉 그분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형제자매로서 서로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오랜 시간 나는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교회에 가는 게 자연스러웠다. 내가 괴로워하는 죄, 내가 발버둥 치는 고통의 계절을 아는 사람은 교회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내 혼자 그 길을 걸었고, 내 삶에서 절실하게 부족한 지혜를 알려주고 나를 인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성경을 읽으면 혼자 해결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지역 교회에 온전히 헌신한 이후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이십 대를 지나는 지금, 내 짐과 기쁨 그리고 슬픔까지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항상 곁에 있다.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맛보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섬겼듯이 나도 다른 사람들을 똑같이 섬기고 격려하고 또 동행할 기회를 교회에서 얻고 있다. 공동체에 헌신한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우리가 단지 주일마다 온전한 경험을 하도록 함이 아니다. 이 힘들고 죄로 가득 찬 세상에서 결코 혼자 걷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셨다. 신자로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향해서, 우리가 짓는 죄는 결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오로지 예수님만이 진정한 만족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죄와 싸우고 있는지 알 만큼 친한 사람이 없다면, 그 결과는 처참하다. 그건 아무도 당신을 권면하거나 책망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부드러운 손길로 당신의 발걸음을 돌려서 그리스도께로 돌이킬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지역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면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 당신은 이제 진리와 은혜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가며, 성화를 향해 자라기를 바라는 신실한 신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기에 안심할 수 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신실한 지역 공동체의 한 예일 뿐이다. 주님의 무한한 지혜와 은혜로, 그곳을 내 교회 집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에 나는 너무도 감사한다. 내가 더 이상 교회 쇼핑을 하지 않고 한 교회에 헌신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간단하다.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가는 공동체와 함께하는 일상의 달콤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교회 없이는 살 수 없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교회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원제: Why I Stopped Church Hopp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지역교회
교회쇼핑
공동체로서의교회
젠더 이데올로기 문제를 자녀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by Josh Glaser·Paula Rinehart
2022-11-22
지난봄, 헬레나 키르슈너(Helena Kirschner)의 탈성전환(de-transitioning) 이야기가 일으킨 파장은 적지 않았다. 헬레나는 무엇이 그녀를 성전환으로 이끌었고 또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녀는 몸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고, 섭식 장애로 고생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멀어졌다. 구글에서 클릭 몇 번 하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을 환영하고 온전히 받아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났다. 자신의 성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온라인에서 사회적 지위를 더욱 높여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급기야 옷을 바꿔입고 젖가슴을 묶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되어서는 고용량 테스토스테론을 복용하기 시작했다.그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가 사회복지사, 심리학자,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유행가 후렴처럼 듣고 또 들은 건, 성전환이 결국에는 모든 우울증을 사라지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거친 헬레나는 이렇게 썼다. 진짜 내가 만난 결과는 “나로 하여금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슬픔을 느끼도록 만든 조건을 이해하기는커녕 전보다 더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부모로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 아이들 가운데 헬레나가 겪었던 것과 같은 불안과 어려움을 내놓고 말할 수 있는 아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자, 이제 당신의 자녀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바로 그때 누군가가 성전환을 통해 생소한 외로움이 소속감으로 바뀔 수 있다고 약속한다고 상상해보라. 긴장감을 느끼지 않는가? 우리 아이들은 동성애와 관련해서 지금 역사상 가장 취약한 시기를, 또한 성장 과정 중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질문은 오늘날 십대를 둘러싼 모든 곳에 존재한다. 정체성의 핵심은 성 정체성이라는 항상 있어 왔던 오류가 이제는 소셜 미디어, 통해서든, 교실 수업,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너 자신은 네가 만들라는 말이다. 트랜스젠더 이념이라는 문제를 놓고 자녀과 이야기할 것인지 여부가 그리스도인 부모가 당면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이다. 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녀가 자기도 모르게 형성했을지도 모르는 나쁜 생각에 대처할 수 있는 세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1. 성장통을 느끼는 건 정상이다. 현재의 성 이데올로기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라면서 경험하는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잊어버리기 쉬운) 갈등을 증폭하고 악용함으로써 그들의 정신 속으로 파고든다. 아이들이 겪는 불안, 우울증, 외로움 또는 자해의 징후를 심각하게 받아들임으로, 부모는 자녀를 도울 수 있다. 지금 세대는 놀라운 속도로 정신 건강 문제를 겪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부모의 관심과 시간과 개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고통이 단지 성(sex)을 바꾸면 다 사라질 것이라는 잘못된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는 청소년기에 겪는 불안과 신체 불편, 사회적 어색함은 대부분이 다 겪는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부모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 열다섯 살이면 누구나 다 그래. 하지만 좋아질 거야. 내가 약속한다.” 친구들의 비웃음을 받았을 때, 부모와의 끊임없었던 갈등, 당신이 좋아했던 남자가 가장 친한 친구를 더 좋아하게 되었을 때, 또는 거울을 보고 다른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느꼈을 때 등등, 당신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라. 문제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희망까지 사라지곤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시야가 짧기로 악명 높다. 아이들에게는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성(성별 불쾌감)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고 해도, 대다수에게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아이들이 알도록 해야 한다. 불편함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여자 또는 남자로서 느끼는 자연스러움과 함께 육체적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춘기 차단제(puberty blockers)에 의지하는 것은 달리기 훈련이 힘들다고 발에 총을 쏘는 것과 똑같다.2. 나의 성을 누리자.젠더 이데올로기(내 느낌에 따라 몸을 바꾸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둥 위에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물학으로부터 “젠더”를 분리함으로, 누구나 단지 자신이 남자 또는 여자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남자 또는 여자가 되는 길이 열려버렸다. 그게 과연 바람직한 세상인가?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우리는 성에 관해서 훨씬 더 훌륭하고 온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믿음은 삶을 통합함으로 몸과 영혼을 하나로 만든다. “성 정체성”이 “사람”을 몸에서 분리하는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방식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서 몸에는 분명한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창 1:27). 인류의 성(남성 또는 여성) 생물학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도록 설계되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 진리(reality)를 계속해서 강조해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굳이 한 가지만 부연하자면, 이 정도의 진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사랑하시는 신부라는 영광스러운 신비로 우리를 이끄는 길에 뿌려진 빵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이 생물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도록 설계하셨다. 올바르게만 이해하면,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속삭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는 연령에 맞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젠더 설계를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엮어갈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달라 보이니? 엄마와 아빠가 너를 대할 때 어떻게 다르니? • 남자와 여자가 어떤 점에서 독특한 것 같니? 서로의 차이점은 어떻게 상호 보완하고 있니? •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할 수 있는 게 뭘까? 또 상대가 없으면 아예 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뭘까? 이런 식의 간단한 대화는 성별의 차별 없이 내가 가진 성을 누리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또 때에 따라서는 아이가 지금 잘못된 몸에 들어가 있다고 말하는 성전환 운동가의 뻔한 소리(stereotypes)에 반박할 기회까지 제공한다. 소녀가 나무 오르기를 좋아한다고 또 소년이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소녀가 소년이 되거나 소년이 소녀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단지 나무를 오르기 좋아하는 소녀와 춤을 사랑하는 소년일 뿐이다.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가 말한 것처럼, 당신이 거부해야 할 것은 몸이 아니라 고정 관념이다. 청소년기에 가까워진 자녀와는 성적(romantic) 욕망, 결혼과 성, 그리고 성이 가져다주는 자연스러운 결과인 출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라. 당신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구글과 틱톡, 그리고 교사 및 친구들이 그들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다음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몇 가지 질문이다. • 여자와 다르다는 이유로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게 뭘까? • 남자와 다르기에 남자로 하여금 여자에게 끌리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게 뭘까? • 남자와 여자가 결혼할 때는 서로에게 생명을 걸고 맹세해. 이런 사실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해서 알려주는 게 무엇일까?(사 62:5; 호 2:19, 20; 계 19:7)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의 관계와 다른 게 뭘까? 피임 및 기타 관련 기술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설계하신 성의 아름다운 결과인 출산과 거리가 멀어지도록 하거나 아니면 아예 성을 출산과 정반대의 위치에 자리 잡도록 하는 현대 문화를 만들었다. 오늘날 문화는 성관계 후 임신을 원치 않는 놀라움이나 아예 “문젯거리”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게 정상인가?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성경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왜 “남자와 여자”(창 1:27)를 창조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성 이데올로기가 성경과 전혀 다른(alternative) 복음을 제공하기에, 우리는 아이들(그리고 아마도 우리 자신까지도)로 하여금 이런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아이들도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느꼈던 부활과 연결에 대한 똑같은 갈망을 갖고 있다. 새 이름, 새 정체성, 새 몸, 새 사랑의 공동체를 믿고 영접하라. 트랜스젠더 이념도 아이들에게 이런 식의 “복음”을 제시는 하지만, 결코 전달하지는 못한다. 3. 친절함과 진리를 연결하라.잠언 3:3은 친절함과 진리를 연결한다. “인자와 진리를 저버리지 말고,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며, 너의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라.” Z세대는 진실이 친절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한 진리조차도 들으려고 하지 않기에, 이 둘의 연결은 오늘날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동감(compassion)은 일반적으로 무조건적인 인정(affirmation)을 의미한다. “네가 원하는 걸 하는 게 가장 중요해”(You do you). 이제 공감(Empathy)은 지배적인 미덕이다. 마치 인기 있는 마당 표지판이 선언하듯이 말이다. “친절이 전부이다.” 십대의 아버지로서 나(Josh)는 오랫동안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진리의 틀을 먼저 잡아놓고, 그 다음에 공감의 맛을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젊은 목사 친구가 내게 조언했다. 이 세대에게는 친절하게 들리지 않는 한 진리조차도 결코 진리로 울려 퍼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는 이제 친절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진리가 어떻게 더 큰 친절로 이어지는지를 배우고 있다.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연구에 따르면 성별위화감이 있는 대부분의 아이가 그 문제를 극복한다고 해. 그런데 오늘날 문화는 아이들이 느끼는 성적 혼란(trans)을 영구적인 것으로 취급하도록 강요하고 있어. 아이들을 아예 탈출할 수 없는 상자에 강제로 집어넣는 게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 친구가 우울증으로 고생한다니, 가슴이 아프구나. 정말 힘든 일이지. 성전환은 일반적으로 그 그런 증상 개선에 도움을 주지 않아. 그 친구는 하루라도 빨리 우울증을 일으키는 깊은 뿌리가 뭔지 밝히기 위해서라도 전문가가 필요하겠구나. • 지속적인 혜택을 주지만 그럼에도 몸에 영구적인 손상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사람을 도울 방법이 뭐가 있을까?• 평생 훈련을 통해서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여자 수영 선수가 여자라고 인식은 하지만 몸은 여전히 남자인 생물학적 남자와 경쟁해야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나는 한 가지라도 분명한 생각을 공유하고는 조용히 물러난다(십대들은 숙고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나중에 대화를 시작하거나 더 많은 질문을 위해 또 다른 기회를 찾는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이가 또 있는지 파악하라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자녀와 성에 대한 대화를 시작할 기회를 찾아야 하지만, 다른 누가 또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헬레나 키르슈너(Helena Kirschner)는 온라인에서 특히 십대를 겨냥하는 성전환 찬성(pro-trans) 인플루언서가 얼마나 유혹적이고 공격적인지를 폭로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다. 로드 드리어(Rod Dreher)와의 이전 인터뷰에서 키르슈너는 부모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이가 친구 집에 자러 가는 경우에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어딘데? 거기 또 누가 오는데? 그러나 문제는 부모와 같은 방에 있는 아이가 사춘기 차단제와 교차 성호르몬을 제안하는 낯선 사람과 온라인 채팅을 하고 있어도 부모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헬레나는 부모에게 외치고 있다. 지금 당신네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바로 이 질문이 자녀와 성에 관한 정기적인 대화를 시작하는 진짜 핵심이 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갑옷의 어떤 균열이 그들을 젠더 이데올로기에 취약하게 만드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녀가 남자든 여자든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현실에 뿌리를 둔, 가장 진실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겠다는 건강한 비전을 심어주는 것이 당신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원제: How to Talk with Your Kids About Transgender Ideolog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정체성
트랜스젠더
젠더
성전환
불안이 엄습할 때 도움을 주는 세 가지 질문
by Karrie Hahn
2022-11-21
아무리 온건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 건 힘들다. 자연재해가 발생한다. 병에 걸리거나 관계가 깨진다. 생계유지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비록 지금은 별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뀔 수 있다는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깨어지기 쉽고 취약하다. 무엇보다 끔찍할 정도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현실을 도통 인식하지 못하는 건 성숙하거나 자아실현을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망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다. 그렇다고 두려운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는 게 모든 답은 아니다. 그건 언제라도 불안으로 바뀔 수 있다. 산상수훈의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6:34)는 많은 이에게 친숙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불안이 미래를 지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에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고 또 과거로 인해 영향이나 자극을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불안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도 다 발생한다. 그러면 불안이 우리를 압도할 정도로 위협이 될 때, 어떻게 방향을 바꿀 수 있을까? 여기에서 저기로 가면 된다는 식의 쉬운 조언으로 해결될 정도로 인생이 단순하지 않다. 사람마다 다 미묘한 차이가 있을 정도로 복잡한 인생이지만, 스스로에게 던지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이 불안감 해소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1. 내 과거에서 건질 가장 중요한 진실은 무엇인가?나이가 들수록 되돌아보는 과거는 점점 더 많아진다. 지금의 정보와 지식을 당시에도 갖고 있었더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죄를 생각하며, 또는 결코 그리 쉽게 내리지 않았을 잘못된 결정을 회고하며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과거에 저지른 일이 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고, 누군가가 가한 악행이 가져다준 수치심에서 도통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과거의 사건은 종종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우리에게 가해진 일을 기억하면서 “내가 이제는 안전한가?” 또는 “나한테 그런 나쁜 일이 또 생기는 건 아닐까?” 등의 질문을 던지곤 한다. 또한 내가 범한 악한 일을 떠올리며,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용서하셨을까?” 또는 “내 결정이 나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친 건 아닐까?”라고 묻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과거 나의 행동과 나를 향한 타인의 행동이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고 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말하자면, 그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과거와 관련해서 결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진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시고 구속하셨고 또 그분의 소유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엡 1:3-7). 당신은 이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다(요일 3:1). 당신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고전 1:30). 당신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신다(갈 4:6).2. 지금 내 현재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은 무엇인가?조금만 솔직하다면, 현재라는 것은 단지 과거의 후회와 트라우마가, 그리고 미래의 불안과 두려움이 만나는 곳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미래에 대한 불안과 씨름하는 현재이기에, 매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때때로 현재 상황은 오로지 고통과 어려움으로만 가득 차 있는 거 같다. 단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다. 진짜 힘든 건 모든 것을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경우이다. 그렇기에 당신의 현재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진실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고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히 13:5)고 약속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항상 내 곁에 계시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시편 88편).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당신은 완전히 혼자라고 비명을 질러도, 그건 거짓말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비록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환난 가운데 걸어가는 당신과 함께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곁에 계신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유대 관계로 당신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밤낮으로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당신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당신을 위해 항상 중재하신다(히 7:25). 하나님의 임재는 그가 당신을 보고 계시고 또 당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또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당신이 느끼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심을 의미한다. 3. 앞으로 내 미래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은 무엇인가?아마도 이게 가장 좋은 질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희망의 영역에 들어섰고 성경이 약속하는 소망은 켤코 우리를 실망시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실망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사 49:23). 미래를 생각할 때, 현실의 표면 아래에서 작은 소리로 덜렁거리는 낮은 등급의 불안에서부터 내 존재 전체를 전면적인 공포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불안을 경험하기 쉽다.몸에 장애를 갖게 되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내 몸 하나도 부양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어쩌지? 집을 살 여력은 없는데 집세만 계속 오르면 어쩌지? 결국 결혼을 못 하고 애가 없으면, 다 늙은 나는 누가 돌보지? 배우자가 죽으면? 행여 사업이 실패하면? 우리 애의 삶이 엉망이 되거나 혹은 복음을 거부하면 어쩌지?불안은 매우 창의적이고 불안이 가져다주는 상상력은 풍부하기가 이를 데 없다. 머릿속에서 끝없이 움직이는 불안의 스크롤을 멈추는 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고민하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선의로 말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이러한 두려움에 직면할 때면, 미래의 안전을 보장하는 보다 더 크고 넓은 시각을 갖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관점을 넓혀야 한다. 미래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진실은 무엇인가?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완전한 행복 속에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계 21:1-7; 22:1-5). 더 이상의 돈 문제, 인간 관계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건강으로 걱정할 필요도 없다. 모든 고통과 혼란이 사라진다.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다.어제, 오늘, 그리고 영원시간 밖에 존재하시는 시간의 창조자 하나님은 시간에 얽매인 피조물인 우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올바르게 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신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지속적인 은혜와 사랑의 임재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심지어 아니, 오히려 불안감에 내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일수록 나를 더 꼭 잡고 계신다. 불안이 엄습할 때 이 세 가지 질문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진정한 북쪽으로 인도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든든한 나침반 역할을 하길 바란다. 하나님은 창세부터 우리를 택하셨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통해서 이뤄질 완전한 세계에 대한 약속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원제: 3 Questions to Ask When Anxiety Strik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우울증
불안
하나님의약속
소셜 미디어에 관해서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빌립보서 4:8이 알려주는 ‘온라인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방법’
by Rae Tosh
2022-11-11
우리가 믿어야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담고 있는 책이 성경이다. 더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을,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까지 알려준다. 그런데 아쉽게도 소셜 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성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에 관한 지침까지 성경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성경이 분명하게 알려주는 게 있다. 어떻게 나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드러낼지에 관해서이다. 성경에 인스타그램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성경에 담긴 이 지침은 소셜 미디어에서 만들고 소비하는 콘텐츠에, 그리고 다른 사람과 상호 작용하는 방식에까지 다 적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땅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다(마 5:13-16). 그러나 동시에 맛을 잃은 소금은 무익하고, 빛은 밝혀야 하는 것이지 숨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소셜 미디어 프로필과 상호 작용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춰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에서도 그리스도의 빛이 가진 능력을 높여야 한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스도인의 짠맛을 보존해야 한다. 이 목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이 있다. 빌립보서 4:8에 있는 바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 구절은 우리가 소셜 미디어에서 무엇을 소비하는지뿐만 아니라, 무엇을 게시하고 또 다른 게시물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준다.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그게 무엇이든아니다. 다른 사람을 잘 사랑하는 방법은 빌립보서 4:8에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가득하다(마 5:43-48, 롬 13:8-10, 요 13:34). 심지어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게, 로마서 13:8의 말씀이다. 그렇기에 남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바로 빌립보서 4:8에 담긴 많은 교훈의 중추를 이룬다. 소셜 미디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성경의 명령은 바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오로지 진실한 사실들만 공유하고 싶을 것이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사랑스럽고 좋은 것들만 게시하고 싶을 것이다. 더불어서 정의를 옹호하고, 다른 사람들이 칭찬할 만한 일을 했을 때 힘을 다해 격려하고 싶을 것이다. 사랑은 또한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하도록 도움을 준다. 사랑이 반대하는 사실까지 동의하도록 하는 건 아니지만, 화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단지 하나의 아이디(ID)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임을 알기에, 우리는 사랑의 방식으로 상대를 대할 수 있게 된다. 진실하고 정의롭기 위해서라면, 그게 무엇이든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한다(엡 6:14). 거짓과 반쪽짜리 진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이는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든 명령이다. 소셜 미디어도 이런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소셜 미디어에서 만나는 진실 대 거짓의 비율은 더 우려스러울 지경이다.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에 순응해서 최대한 팔로워가 빠르게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려는 사람으로 넘친다. 그런 이들에게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콘텐츠를 공유하는 게 주된 관심사이다. 사실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게시물을 공유할 때 이런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지혜로워야 한다. 화면에 뜨는 게시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동의하지 않는 내용을 무조건 거짓이라고 가정하고 폭언을 퍼붓기 전에 먼저 조사하라. 당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어떤 내용을 공유하기 전에도 먼저 사실 여부부터 확인하라. 당신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당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더 멀리 밀어낼 뿐이다. 진리를 전파하는 것과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죄가 옹호되고 선이 거슬리는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모든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눌 필요는 없지만, 두려움 때문에 침묵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엡 4:15). 여기에는 죄를 죄라고 외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두려워서 세상을 집어삼키는 죄를 조용히 바라만 보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죄를 죄라고 비난하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길이다. 사랑스럽고 훌륭하고 순수함을 위해서라면, 그게 무엇이든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망가졌다. 따라서 수많은 진실한 것들이 더 이상 사랑스럽거나 훌륭하지 않다. 어둠을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지만, 화면에 얼마나 많은 것이 뜨도록 허용할지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에야 결국에 겉으로 드러내야 하겠지만, 누구나 다 그 전에 은밀하게 처리해야 하는, 자신만의 어둠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또한 우리는 나와는 다른 타인의 한계에도 민감해야 한다(고린도전서 8장).어쩌면 당신은 섭식 장애, 인신매매, 자살 같은 어려운 주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열정을 품고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주제지만, 이런 이야기가 특정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을 줄 수도 있다. 따라서 경고를 하더라도 신중하게 게시함으로 연약한 이를 존중할 수 있다. 어떤 계정이 지속하여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경우라면 계정을 언팔로우해야 하지만, 내가 올리는 게시물을 보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할 때도 있다. 칭찬할 만하다면, 그게 무엇이든마지막으로,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빛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진정으로 좋은 일을 했을 때, 그들을 세워주는 것이 포함된다. 부정적인 피드백에도 불구하고 악에 맞서는 친구가 있는가? 그의 곁에 서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삶에서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친구가 있는가? 격려하라. 믿음을 나누는 데 전념하는 계정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는가? 좋아요, 댓글, 공유를 통해 지원하라. 소셜 미디어에서 좋은 것을 더 많이 보고 싶다면, 선한 것을 열심히 장려해야 한다.때때로 성경이 우리가 직면한 모든 현대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온라인 성경에 검색어 “소셜 미디어”나 “인스타그램”을 치면 결과는 제로이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하며 소셜 미디어를 포함하여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을 적용할 수 있다. 이 사실만 기억한다면, 우리는 성경이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얼마나 깊은 연관성을 가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원제: What the Bible Says About Social Media: Philippians 4:8 Teaches Us How to Engage Onli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소셜미디어
빌립보서4:8
소금과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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