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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집 열쇠와 함께 온다
환대의 힘
by Rosaria Butterfield
2022-10-25
남편과 나는 요즘 강연 활동을 많이 한다. 그리스도인 이웃들은 우리가 집에서 집단적 공동생활체를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따금 지역 교회 목회자들은 우리를 초청하여, 우리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왜 그렇게 하는지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한다.2014년 5월 8일, 캐롤라이나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아름다웠다. 남편과 나는 한 침례교회에서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강연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정 예배를 드린 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그 교회로 향했다. 우리는 집을 나서기 전에 샐리와 벨라에게 얼린 땅콩버터를 바른 레드빈을 간식으로 줬다. 그리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보관했다. 우리는 급히 서둘렀고, 성경책들을 펼쳐진 채로 식탁 위에 놔두었다. 출발 전에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성경책들이 식탁 위에 대충 정사각형의 형태를 이룬 채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레고 조각들, 플라스틱 공룡들, 광선검 한 자루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문에 붙어 있는 모든 잠금장치를 사용하여 이중, 삼중으로 문단속을 하였다.강연은 잘 진행되었다. 우리는 다른 기독교 가정들에게 집을 개방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라고 독려했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스도인 청중에게 있어 그것은 설득하기 쉽지 않은 주제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기를 좋아한다. 그들에게 낯선 사람은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우리는 사회적 계층이나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방법을 묻는 좋은 질문들에 대해 상세하게 대답했다. 강연을 마치고 우리는 녹스와 메리를 다시 자동차에 태워 한 시간 동안 낯익은 지역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좋은 날이었다. 나는 집에 가면 커피를 마시고, 빨래를 하고, 다친 발을 얼음찜질하고, 아이들에게 ‘캐스피언 왕자’의 마지막 장을 읽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집에 들어가는 순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활발하고, 감정 표현이 풍부하며, 활기 있게 움직이는 골든리트리버 샐리가 상처를 입은 채 겁에 질려 한쪽 구석에 웅크려 있었고, 옷들과 접시들과 가족사진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 창문의 틀이 부러진 채 쇠지렛대와 함께 툭 튀어나와 있었다. 도둑들이 개 먹이 그릇을 지탱하는 틀을 밟고 깨진 창문을 통해 기어들어 온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큰 개들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듯하다. 바닥에는 어머니가 맡긴 도자기 그릇들, 남편이 세례식에서 사용하는 금색 용기, 펼쳐진 성경책들이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온통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곤 성경책들 곁에 있는 금색 세례용 그릇뿐이었다.나는 다친 개에게 다가가서 얼굴에 입을 맞춰주었다. 녀석은 나를 보고 살살 꼬리를 흔들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나는 마치 물속을 걷듯 조심스럽게 집안을 돌아다녔다. 샐리가 그런 내 뒤를 천천히 따라왔다. 도둑들은 내 어머니의 텔레비전을 벽에서 잡아 뜯어 놓았다. 벽과 바닥에 구멍이 나 있었고, 바닥의 구멍은 아마도 텔레비전을 떨어뜨려 생긴 것처럼 보였다. 모든 서랍들이 다 열려 있었고, 양말, 퍼즐 조각들, 수학 비디오, 구슬, 개 심장약 등, 서랍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도둑들은 시댁에서 5대째 내려오는 가보인 내 약혼반지를 포함해 모든 귀금속을 훔쳐 갔다. 나는 항상 내가 그것을 착용하면 손상이 되거나 분실될까 봐 걱정했었다. 손에 정원의 흙이 많이 묻는 여름철에는 특히나 더 조심스러웠다. 그날 아침에 나는 반지를 바라보면서 오늘 이것을 착용하는 것이 안전할지 아닐지를 잠시 생각하고 나서 그냥 놔두고 나왔는데, 결국 그것이 반지를 잃지 않을 마지막 기회였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최근에 노인 전용 아파트로 거처를 옮긴 나의 어머니는 그녀가 간직하던 가보들을 모두 내게 맡겼다. 우리집은 추억을 간직하기에도 좋고, 안전한 보관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둑들이 그것을 모두 훔쳐 갔다. 어머니는 최근에 다른 가족 문제 때문에 (나의 조카가 어머니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나와만 연락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페이스북을 통해 알아차렸다(나는 페이스북은 물론, 그 어떤 소셜 미디어도 사용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것들을 사용한다). 나는 너무 녹초가 되어서 어머니에게 도둑맞은 사실을 보고할 방법이나 어머니의 분노로부터 나를 보호할 방법을 강구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니 받아들이자”라는 생각뿐이었다.도둑들은 모든 것을 가져갔으며, 나의 골든리트리버 샐리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녀석은 우리 가족 가운데 가장 외향적이었고, 일평생 고양이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서도 함부로 대우받아본 적이 없었다. 골든리트리버 품종인 녀석은 “심술궂다”는 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지만, 멍든 몸을 이끈 채 슬픔에 잠겨 떨고 있었다. 경찰이 와서, 도둑들은 큰 개들이 자기들을 방해할 경우, 총으로 쏴서 죽이거나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 보통이라고 설명했다. 샐리는 총에 맞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했다.경찰들은 우리의 신원 정보를 받아 적었고, 모든 문손잡이와 문틀에서 지문을 채취했다. 그들이 떠난 뒤에 집은 더욱 어지럽혀진 채로 남아 있었다.도둑맞는 일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낯선 사람에게 손 대접을 베풀라고 주장했는데 낯선 사람이 내 개를 두들겨 패고, 물건들을 훔쳐 간 것도 모자라, 집까지 망가뜨린 것을 생각하니 무척 아이러니했다.우리는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아이들의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몇 달 동안 안정을 찾지 못했다.그러나 그날 저녁, 식사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동료 신자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나는 섬기지 않고, 섬김을 받았다. 동료 신자들, 곧 하나님의 가족들이 식탁을 차렸다. 주님 안에서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자 싱가포르의 교환 학생인 매튜는 방학 중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기숙사가 문을 닫는 관계로 그날 밤에 우리집으로 잠시 거처를 옮기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차분한 태도로 도움을 주는 그가 오게 되어 좋았다. 수산나는 막 일을 마치고, 우리집에 오는 길에 전기구이 통닭과 버터 피칸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그녀는 내가 버터 피칸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고, “랙트에이드”[소화 촉진 효소의 일종]도 약간 사 왔다.늘 하던 대로 나는 플라스틱 상자 안에서 닭고기를 꺼내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닭고기 기름과 육즙으로 덮힌 플라스틱 용기를 샐리에게 주었다. 녀석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세로 그 옆에 편안히 엎드렸다(코는 구석에 처박고, 뒷다리는 요가를 하는 물소처럼 쫙 벌린 자세. 녀석은 우리를 둥지면 40킬로그램이나 되는 자신의 덩치를 감출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더 많은 친구들이 꼬리를 물고 들어올 즈음, 녀석은 플라스틱 용기를 앞발로 붙들고, 차츰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홈스쿨 아빠들은 자기 집 잔디를 가꾸는 일과 중요한 직장 업무를 제쳐놓고 우리를 돕기 위해 연장과 성경책을 들고 나타났다. 저녁 식사와 성경 읽기와 기도와 시편 찬송 부르기를 끝마친 후, 우리는 양동이와 걸레, 쓰레기 봉투와 청소기를 들고 본격적으로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도둑맞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우리가 공적으로 주장한 것이 그토록 강력한 하나님의 시험의 손길 아래 놓이는 것은 쉬운 경험이 아니었다. 즉, 이 땅의 것들에 피해를 입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들(우리의 영혼, 하나님의 말씀, 언젠가 영화롭게 될 육체 등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남아 있게 될 것들)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도난을 당한 다음 날, 남편은 야외용 식탁이 놓여 있는 앞마당에 바비큐 그릴을 갖다 놓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넥스트 도어” 연락망에 “① 우리는 도난을 당했습니다. ② 도둑들이 물건을 훔쳐갔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③ 그들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들, 곧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영혼을 빼앗아 갈 수는 없었습니다. 주일날 오후 3시에 모두 우리집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햄버거와 핫도그를 먹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적고서 ‘전송’ 버튼을 눌렀다.남편이 방금 우리집 앞마당에 300명을 초대한 것이다. 그런데 수산나는 그날이 어머니날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버터필드 가문에서 흔히 전개되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또한 교인들까지 모두 초대했다. 그는 도둑맞은 경험이 있는 불신자 이웃들을 도우려면 신자들이 많이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안에 하나님의 백성을 가득 채워 이웃들이 도둑맞는 일은 물론이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도록 돕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남편이 항상 사용하는 전략이었다.핫도그, 아이들, 물총놀이, 새로운 친구와의 만남,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 등, 기쁨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21명의 이웃들과 대다수의 교인들이 참석했다. 종교에 회의적인 불신자 이웃들이 우리에게 힘든 상황을 어떻게 견디고 있느냐고 묻자, 남편은 설득력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우리가 형통할 때 함께하시는 하나님보다 시련을 당할 때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의심하며 냉소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도둑맞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집에 돌아와서 온 집안을 뒤진 흔적들, 벽에 난 구멍들, 타인의 손이 닿은 속옷들,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잡지들과 영양제들, 장갑 크기만한 멍이 든 채 겁에 질려 있는 우리 개를 보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가보인 약혼반지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니 무척 고통스러웠다(롬 8:28).그러나 우리집 물건을 훔쳐 간 도둑들은 자신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사악한지 느껴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전기구이 통닭과 버터 피칸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찾아온 친구들의 위로나 한 꺼풀의 페인트칠로도 교정이 불가능할 만큼 악하다. 그들의 인간성에는 큰 구멍이 나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언젠가는 그 구멍으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집어삼키게 될 것이다. 나는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일어난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며, 기도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성경책들은 펼쳐 있고, 아이들은 무릎 위에 앉아 있고, 발밑에는 개들이 돌아다니고,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먹고 있었다. 도둑들이 휩쓸고 간 집안은 도처에 침입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우리가 모여 있는 방에서 나는 깨달았다.“나는 축복받았어.”“너무 감사해.”“나는 희생자가 아니야.”내 처지보다 도둑들의 처지가 훨씬 더 끔찍했다.이 글은 로자리아 버터필드, 복음과 집 열쇠(개혁된실천사)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
환대
손대접
왜 주기도문은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는 걸까?
by D. J. Marotta
2022-10-24
주기도문은 첫 문장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킨다. 주의를 기울이면 오히려 길을 잃어버리는, 재미있는 상황 중 하나가 주기도문이다. 우리라고? 왜 복수형이지? “우리”에는 도대체 누가 포함되지? 지금 상황은 “1단계: 위에서 말한 재료를 섞을 것”이라는 지침으로 시작하는 사용 안내서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 한 단계를 놓쳤다고 가정하자. 그럼 이제 잃어버린 첫 페이지를 찾기 위해 마구 뒤섞인 서류 더미를 잘 찾아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다음 두 진영으로 나뉜다. 주님을 “나의 하나님”(My God)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존경심을 담아 적당하게 거리를 두면서 “경외하옵는 하나님”(Mr. God, sir.)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말이다.두 가지 접근법“나의 하나님” 그룹은 기도하는 걸 좋아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다른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다 알아들은 당신을 향해 몰래 윙크를 보내주는 다정한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 같은 존재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좋은 점이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다. 당신을 위해 하나님이 항상 대기하고(available) 있고, 언제나 곁에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사랑한다. 당신은 또한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느끼며, “나의 하나님”이 흘러나오면 자연스럽게 “아버지”라는 단어가 따라나온다. “경외하옵는 하나님” 그룹은 기도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목사가 대신 기도하는 게 훨씬 편하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무섭고 끔찍한 타자성(otherness)을 가진 존재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초월한 존재이기에 결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순한 골든 리트리버가 아니며, 당신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안다. 하나님은 오히려 훈련되지 않는 클라이드데일(Clydesdale) 말과 더 비슷하다. 그 말이 뛰고 있는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발굽에 두개골이 박살이 날 수도 있다. 성경의 비유를 들자면, 하나님은 사자이고 기도하는 것은 그 사자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런 위험한 작업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다.당신이 이런 두 유형에 속한다면 “우리”라는 작은 단어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다. “우리”라는 말은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의 하나님도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적인 존재도 아니고 빌릴 수도 없다. 하나님은 단지 공유될 뿐이다. 복수형 “우리”는 기도가 나와 하나님 사이의 일대일 대화가 아님을 즉시 보여준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글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논리적 대답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우리”에 포함된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 1:12).성공회 교리서(Anglican Catechism)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설명한다. 문: 예수님은 왜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가?답: 예수님은 나 자신을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가족의 일원으로 이해하라고 하신다. 따라서 그에 걸맞게 기도하라고 일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라는 말은 우리를 가족의 일원으로 만든다. 별로 어렵지 않다. 우리는 다 가족이다…. 이제 설명이 다 된 거지? 아니, 아직은 아닌 거 같다.“우리”라는 단어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잠깐 속도를 늦추고 우리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보기에 오히려 역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기도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 “우리”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하다. 그로초 막스(Groucho Marx)가 “나는 나를 회원으로 받아주는 어떤 클럽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아마도 그가 염두에 둔 곳은 교회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다지 덕(virtue)이 넘친다고 알려져 있지 않은, 제멋대로인 무리이다. 하나님은 “거역하는 자식들아, 너희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너희가 계획을 추진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동맹을 맺지만, 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다”(사 30:1)라고 선언하신다.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라는 단어를 들은 제자들은 분명히 움찔했을 것이다. 거기에 그럼 탕자 형제도 포함된다는 건가? 세리와 매춘부는? 바리새인과 로마 군인도? 부자 청년과 가난한 과부까지?오늘날 문화 속에서 여기에 포함할 수 있는 개탄스러운 사람들의 목록은 뭐가 있을까? • 다른 교단과 부류의 그리스도인?• 정치적 진보와 보수?• 활동가와 평화주의자?• 도시인과 시골 사람들?• 캐나다 록밴드 니켈백(Nickelback)을 듣는 사람들?• 밀레니얼 세대와 베이비부머 세대?의심할 여지 없이, 누구나 “우리”에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라는 이 말은 본질상 공격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평생 구분되고 싶어서 발버둥질한 대상과 나를 같은 범주 안에 넣어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투자한 모든 시간과 돈과 에너지와 관계없이, “우리”는 나를 그냥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 모두와 한 덩어리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어떻게든 교회에 나오게 된 그들을 위해서(for) 기도하는 건 나쁘지 않다. 그런데 내가 그들과 함께(with) 기도해야 하나? 내가 그들과 동일시되어야 하나? 주 예수님의 대답은 조용하고 따뜻하며 단순한 “그렇다”이다. 처음에는 실망스럽게 느끼겠지만, 그 안에는 실로 놀라운 특권이 담겨 있다.가족의 유대예수님도 “우리”의 일부이다“우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사생아 무리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큰형이 되시는 그리스도와의 형제 관계에 들어간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당신과 나를 초대한다. 내가 함께 기도하는 대상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그분의 백성, 심지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나는 얼마든지 함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회중이 공동 예배에서 함께 주기도문을 하는 게 중요하다. 주기도문은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일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단지 주기도문을 같이 한다고 이질적인 그룹을 지속하여 함께 유지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입에서 나오는 급진적인 단어 “우리”를 제대로 이해만 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매주 상기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다른 죄인들과 한 가족이라는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단지 나 혼자만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는 없다는, 예수님이 만드신 주기도문의 원칙 말이다. 예수님은 가장 좋은 기도 방법 또 세상에서 올바른 영적인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바른 기도에 목마르고 갈급한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예수님은 경쟁적이고 또 남을 판단하기에 바쁜 죄성을 보았다. 바로 그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 속에서도 똑같은 죄성을 본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화를 내거나 한숨 쉬지 않는다. 오히려 참을성 있는 부모처럼 이렇게 다독거린다. “자, 다시 한번 더 해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우리”는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할지에 관한 나의 생각을 전복시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상세한 목록을 주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자신을 따라서 “우리”라는 단어를 말하라고 가르칠 뿐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도 “우리”라는 단어를 말할 때, 나를 포함할지를 놓고 고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라고 여지를 남겨둘 뿐이다. 이 글은 D. J. 마로타가 쓴 Liturgy in the Wilderness: How the Lord’s Prayer Shapes the Imagination of the Church in a Secular Age(광야의 전례: 주기도문이 세속 시대에 교회의 상상력을 형성하는 방법)에서 발췌한 것이다.원제: Why Does Jesus Make Us Pray ‘Our’ Father?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주기도문
기도
우리
하나님
일치
차별
구별
배격
개인주의
공동체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
이상한 신세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Carl Trueman
2022-10-22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변했다. 자아성(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덕적 양식에 따르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계의 광범위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아도 전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기독교가 형성한 사회적 상상의 마지막 자취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심지어 지금 이상한 신세계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처지다. 자아성 혁명은 구체적으로 성혁명의 다양한 국면에 나타나듯이 유치원 교육부터 직장 내 대명서 사용 정책[직장 내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대명사를 사용할지 말지 같은 정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자면 아직은 이런 일을 피하면서 당분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현대적 자아성의 관념이 만들어 낸 도전적 상황과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 순응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세계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 여섯 가지 대응 방안이 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주_ 이 글은 칼 트루먼,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의 제9장을 부흥사개혁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으로, TGC의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여섯 가지 방안을 6회에 걸쳐서 싣는다. 1.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2.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치자4.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5.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6.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절망해서도 낙관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절망의 유혹과 낙관의 유혹을 피함으로써 이 시대에 대응해야 한다. 절망에 빠지는 것은 지옥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므로 교회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낙관에 사로잡히는 것은 단지 나중에 더 큰 절망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절망과 낙관은 모두 무기력을 조장하는데, 이 무기력은 절망의 경우에 무력감에서 비롯되고 낙관의 경우에 순진함에서 비롯된다.하나의 대안이 존재한다. 언론인이자 정교회 신자인 내 친구 로드 드레허(Rod Dreher)와 나눈 대화에서 나는 그가 쓴 글의 많은 부분에 나타나는 암울한 전망에 대해 논평했고 그에게 비관적이라고 지적했다. 드레허는 웃으면서 이 표현에 반대했다. 드레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비관론자도 아니고 낙관론자도 아니야. 나는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이지.” 그런데 소망은 물론 낙관이 아니다. 폴리애나(Pollyanna[앨리노 포터가 쓴 동명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이 이름은 낙천주의자를 뜻하는 보통 명사로도 쓰임])도 미코버(Micawber[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등장하는 낙천주의자])처럼 낙관론자였다. 낙관론은 모두가 단지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신념이다.하지만 기독교적 소망은 현실적이다. 소망은 이 세계가 눈물의 골짜기며 여기서는 상황이 당위적이지 않으며,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말대로 죽음이 참으로 모든 생명을 끝장낸다고 이해한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아니므로, 우리는 이 세계가 우리에게 가정의 안락함을 제공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누리는 좋은 것에 대해 감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내가 가령 중국보다 더 큰 자유가 있는 국가에서 아직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내가 훌륭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와 장소에 살고 있고, 내가 즐기는 일이 있으며 나에게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이런 것들이 나에게 계속되고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나는 또한 세계가 타락했으며 복음이 내가 현재 누리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반드시 나에게 약속하는 것은 아니며, 나의 소명도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처럼 내가 처한 시대와 장소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세계에서 일이 잘못될 때, 또는 나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회 전체에 고통을 주는 변화와 맞닥뜨릴 때, 내가 절망하지 않고 이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또한 내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의 진정한 의미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서 겪는 고난은 때로 끔찍하고 심지어 참기 어려운 것일 수 있으나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 고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 승천, 재림에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새롭고 혼란스럽고 유례가 없는 암흑기로 들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우리는 준비해야 하고 교훈을 받아야 하고 자신이 무엇을 믿고 왜 그것을 믿는지를 알아야 하며, 우리를 지적으로나 직관적으로 진정한 제자와 순례자로 만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고 확증하신 변함없는 약속에 계속 주목해야 한다. 지금은 소망 없이 절망할 때도 아니고 순진하게 낙관할 때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선택한 독특한 방식으로 벌어지는 타락의 참상을 탄식하자. 하지만 이 탄식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 정체성을 선명하게 하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기다리고 있는 위대한 완성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위한 맥락이 되게 하자.원제: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성혁명
낙관주의
비관주의
기독교현실주의
예수님의 만짐, 은혜의 전염
by Rosaria Butterfield
2022-10-18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나병이었다. 그 병은 불결하고, 치명적인 불치의 질병이었을 뿐 아니라 제멋대로 거침없이 퍼져나가는 전염성까지 지녔다. 그 병은 사랑하는 가족을 사회적 추방자로 전락시켰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처럼 나병환자의 피부는 힘줄과 근육을 감싸지 못하고 여기저기 고름이 터져 나오면서 하루아침에 사랑스러운 가족에서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다. 나병환자들은 도덕적, 사회적으로 배척과 멸시를 받아 격리된 채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고통에 시달리며 살면서 모든 희망을 잃은 채 죽기만을 기다렸다. 나병은 체포와 추방이 가능했던 법정 전염병이었다. 율법의 의식법은 나병환자를 도덕적, 육체적으로 불결하게 여겼다. 나병은 전염성이 있는 피부 질환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건강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었고, 예배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에 나병은 원죄의 물리적 현현이자 혐오스러운 징후였다. 그것은 특별한 죄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지닌 죄의 본성, 우리 내면에 장착된 시한폭탄을 가리켰다. 해결책은 나병환자를 격리하고, 아직 건강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레위기 13-14장은 나병의 전염을 억제하고, 치료된 나병환자를 공동체 안으로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이 질병은 사랑하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하루아침에 멸시받는 추방자로 전락시킬 수 있었다. 함께 어울리고 부대끼며 존중받으며 살다가도 한순간에 쓰레기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었다. 나병은 비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빗물 같은 엄연한 현실이었다.하나님이 자기 아들, 곧 온전한 하나님이자 온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을 때 두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누가복음 5장에는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나병환자 거주지를 방문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회적으로 추방된 그들을 찾아가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나병환자 거주지를 떠나(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불법적인 행동이다) 곧장 예수님께 나와 엎드려 간구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눅 5:12).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는 지역을 떠나 마을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산을 옮길 만한 믿음과 용기, 곧 선지자적인 믿음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은 자기의 문화와 자기의 동료들과 정해진 장소가 주는 안전함을 뒤로한 채 예수님께 나오는 일이었다. 아마도 예수님께 나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너는 너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존재다. 너는 지금 율법을 어기고 있다. 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칠지도 모른다’라며 스스로를 질책하는 생각이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주”로 일컬은 것으로 보아, 그의 행동은 믿음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칭호인 “주”는 성경에서 오직 신실한 신자들만 사용했던 칭호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나병환자로 하여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체포당할 위험을 무릅썼다. 그는 공중 보건을 위태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킬 위험과 군중에게서 쫓겨나 다시금 자신이 처한 냉엄한 현실(자신은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것)로 되돌아가야 할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면에서 우리보다 더 나았다. 그는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단지 사회적 신분의 향상이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예수님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듯한 행동을 하셨다. 그 질병이 그 환자의 몸을 상하게 한 이후로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만진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손을 갖다 대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처음에 하얀 발진이 생겨난 순간에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그 사람의 몸을 만지셨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눅 5:13). 그 한 번의 만짐이 그 사람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 만짐은 더 큰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켰다.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지면서 기존에 없었던 은혜를 새로 만들어 내지 않으셨다. 그것은 항상 존재해 온 성부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는 구약성경 곳곳에서 성부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병이 치유된 사실도 나온다. 나병환자였던 수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이스라엘 땅에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가 있다는 히브리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와 나음을 얻었다(왕하 5:1-14). 예수님은 누가복음 4:27에서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으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엘리사가 그 무명의 히브리 여종 때문에 나아만을 치료해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의 믿음은 강력했고, 주인의 나병보다 전염성이 더 강했다. 그녀의 믿음 때문에 엘리사는 전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기적을 일으켰다. 그녀의 믿음은 참믿음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참믿음이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치유와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올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지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지 않으셨는지 아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하나님이 그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나병이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에 근거하는 ‘사회 구성상의 문제’(객관적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사람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 말하자면 사람들이 그것이 존재한다고 합의했기에 존재하는 것)라거나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므로 ‘율법’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나병환자에게 자긍심을 좀 더 크게 가지라고 권유하지도 않으셨고, 나병환자들을 불합리하게 금기시한(나병공포증) 믿음의 공동체를 꾸짖지도 않으셨다. 문제는 전염성이었다. 전염성은 사회 구성상의 문제가 아니다. 전염성은 실제로 위험했다.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상처받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겁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셨다. 그분은 텅 빈 사람들을 만나 충만하게 채워서 보내셨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설(Jesus paradox)이다. 예수님의 만짐을 통해 은혜가 전염되어 사람들이 믿고, 회개하고 돌이켜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은혜의 전염성 덕분에 신자들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무명의 히브리 여종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예수님의 만짐을 통해 은혜가 전염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원죄는 지정의를 왜곡시킨다. 자범죄는 우리의 주의를 흐트러뜨린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죄는 우리를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그런데 예수님은 원죄, 자범죄, 내재하는 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종종 그러는 것과는 달리 사탄이 조종하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가 아니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율법을 온전히 이루시고,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후에 자기 백성에게 그들을 속박하는 죄를 극복할 능력을 주셨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치유하시며, 성령을 보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고, 자신이 베푸는 구원의 사랑이 바위처럼 견고하다는 확신으로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기업을 상속받게 하신다.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작고 고립된 은혜의 대리인이 되어 우리 “임의대로의 친절”을 베풀며 살도록 놔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허락하셨다. 믿는 자는 교회에 등록함으로써 멤버십 언약을 맺고, 한 가족이 되고,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세상 안에서 선교 사역을 행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사람들을 일상에서 돌보며, 필요할 때마다 교훈과 책망을 받고, 권징을 행하는 목회자와 장로들을 지원하며, 하나님의 가족처럼 행동하고, 아직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의 가정과 가족과 교회로 인도하는 일을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예수님의 역설은 특히 오늘날과 같은 탈-기독교 세상에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전달되는 전염성 있는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전염성 있는 은혜 안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런 은혜가 행해지는 현장을 보려면 요한복음을 펼쳐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기적(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살펴봐야 한다. 예수님은 급진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환대를 통해 전염성 있는 은혜를 전하는 방법을 친히 보여주셨다. 그로 인해 하찮은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평범한 결혼식이 우리를 텅 빈 상태에서 충만한 상태로 변화시키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당시에 마리아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고 말한 대로 우리가 행한다면, “전염성 있는 은혜” 곧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중앙으로 옮겨주는 은혜,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은혜, 예수님이 주님인 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된다.간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순종을 행할 의지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는 순종할 수 없다. 속되고 그릇된 우리의 정체성과 우상들을 우리의 목숨과 함께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다. 복음은 우리가 한때 사랑했던 것들을 버리는 것과 함께 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비로소 순종할 수 있다. 우리는 자아에 대해 죽을 때 비로소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발견한다. 수잔 헌트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반역자에서 구속받은 자로 변화시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된다(고후 3:18). 즐거운 순종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다(요 14:15)”라고 말했다.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으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베푸는 것이 상처가 될 때까지 베풀 수 있을까?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가 강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다. 심지어 죄와 싸울 때도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인 우리가 강하다고 말씀하신다.예수님께 대한 순종(이것은 자아에 대한 죽음이요, 육신의 정욕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은 자유를 가져다준다. 그래서 버림받고 멸시받는 사람을 보면 우리도 한때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안타깝게 여겨 양팔을 활짝 벌려 환영하고 빵과 고기를 나눠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그러했고, 기독교 신앙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뿐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가 참된 동정심과 관심과 다양성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탈-기독교 세상에서도 여전히 마찬가지다.이 글은 로자리아 버터필드, 복음과 집 열쇠(개혁된실천사)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
환대
손대접
은혜
나병환자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
이상한 신세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Carl Trueman
2022-10-14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변했다. 자아성(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덕적 양식에 따르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계의 광범위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아도 전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기독교가 형성한 사회적 상상의 마지막 자취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심지어 지금 이상한 신세계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처지다. 자아성 혁명은 구체적으로 성혁명의 다양한 국면에 나타나듯이 유치원 교육부터 직장 내 대명서 사용 정책[직장 내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대명사를 사용할지 말지 같은 정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자면 아직은 이런 일을 피하면서 당분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현대적 자아성의 관념이 만들어 낸 도전적 상황과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 순응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세계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 여섯 가지 대응 방안이 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주_ 이 글은 칼 트루먼,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의 제9장을 부흥사개혁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으로, TGC의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여섯 가지 방안을 6회에 걸쳐서 싣는다. 1.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2.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치자4.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5.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6.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교회는 또한 자연법과 몸의 신학도 회복해야 한다. 로마가톨릭교 신자는 자연법과 관련된 오랜 전통이 있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는 몸의 신학과 관련해 탁월한 스승이었다. 개신교는 종교개혁 당시에 자연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으나 이런 이해는 지난 2세기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그러면 자연법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자연법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재료’가 아니라 그 자체에 도덕 체계가 있다는 개념이다. 특히 우리의 몸은 심오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다. 우리는 우리의 몸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 우리 몸은 우리가 우연히 깃들이고 생기를 불어넣는 그릇이 아니다. 우리 몸은 심오하고 중대한 방식으로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 자신에게 필수적이다. 몸에는 강점과 약점이 있고 개인마다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모두 많은 점을 공유한다. 이것은 인간(인체)이 어떤 면에서는 번성하도록 만들어졌고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의미한다.우리는 모두 기술적이고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이것을 이해한다. 나는 번창하기를 기대하면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수 없다. 나는 자기 힘으로 날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내 신체 구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제한을 둔다. 자연법은 이 개념을 도덕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그래서 가령 신생아가 엄마에게 의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최선을 다해 자녀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엄마의 의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엄마가 자녀를 숲에 버려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 또는 우리가 생명을 타고난 선으로 상정한다면, 다른 사람이 이 생명을 끝장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요 자연에 반하는 조처이므로 살인은 잘못이다.자연법 개념은 성과 정체성과 관련하여 분명히 도움이 된다. 지나치게 노골적이기를 바라지 않으면, 남성과 여성의 몸은 어떤 면에서는 성적으로 알맞게 만들어졌으나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남성의 몸은 정말로 다른 남성의 몸과 성적으로 알맞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거의 모든 사람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출생 시에 남성이나 여성으로 분류하는 몸을 갖고 태어난다. 남성과 여성의 몸은 다른 능력이 있고 특정한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각각의 경우에 인간을 번영으로 이끌 행동이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행동이 무엇인지의 경계를 자연(또는 자연법)이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이에 대한 한 가지 반응은 인간의 죄가 이런 주장이 더 넓은 세계에 어떤 설득력도 없을 것임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 행위가 에이즈나 암의 위험을 높이는가? 아마 세상은 관련 의학 연구에 돈을 투자함으로써 대응할 것이며, 문제를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약물과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자신이 잘못된 몸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수술과 호르몬 치료는 심리적 확신을 물리적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이용될 수 있다. 각각의 경우에 가정은 자연이 단순히 ‘재료’일 뿐이어서,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거나 원하는 대상이 되는 일을 방해할 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반대는 중요하다. 세계가 하나님께 반역하는 상태며 자기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외부 권위에 대한 모든 호소는 조롱이나 거부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내가 자연법과 몸의 신학에 대한 반성을 권고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니다. 자연법과 몸의 신학은 세상에 대처하기 위한 변증학 도구라기보다(물론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것보다 더 유용할 수도 있다), 교회 자체 안에서 설득력 있는 교육 전략의 중요 부분이다.동성애가 옳은지 아닌지를 두고 씨름하는 젊은 신자를 예로 들어 보자. 목회자는 이 신자에게 동성애가 성의 목적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상충하므로, 잘못된 것임을 나타내는 특정 성경 본문을 지적할지 모른다. 아마 이 신자는 이 과정을 통해 충분히 납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신자가 추가적인 문제와 여전히 씨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단지 비열한 독재자여서 동성애를 금지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나의 게이 친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 정당한가? 어째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행동을 금하셨을까?나이 든 신자는 성경적 윤리가 젊은 신자에게 납득된다고 더 이상 상정할 수 없는데, 성경적 윤리가 작용하는 사회적 상상은 우리가 성장한 사회적 상상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내용뿐 아니라, 기독교 도덕의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이 시나리오에서는 단순히 성경이 몇몇 본문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런 본문이 더 큰 그림 속에서 의미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 더 큰 그림은 성이 인간의 인격성과 관련해 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작용인 폭넓은 성경적 측면도 있고, 가령 특정 성행위로 신체에 가해진 손상의 증거와 같이 남성과 여성의 몸의 성적 상보성과 관련된 ‘자연법’의 측면도 있다. 여기서 자연이 결정적 논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자연에 임의로 부과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자연과 서로 관련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참으로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 자연은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명령이 의미가 있음을 보여 주는 데 도움이 된다.원제: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이상한신세계
성정치
성혁명
동성애
자연법
연쇄살인마와 함께 천국에서 살 수 있을까?
by Rachel Joy Welcher
2022-10-13
로이 래트클리프(Roy Ratcliff)는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 제프리 다머(Jeffrey Dahmer)에게 세례를 준 목사이다.다머가 15건의 살인 혐의로 중복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래트클리프는 그를 방문해서 복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래트클리프에 따르면 다머는 하나님 은혜의 깊이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머와 같이 극악무도한 짓을 한 사람에게 은혜는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1994년 스톤 필립스(Stone Phillips)와의 인터뷰에서 다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천국에 가서 확인하기 전까지야 그의 진심을 알 수 없겠지만, 우리 인생에서 가장 뒤틀린 연쇄 살인범 한 명이 은혜를 향해서 “주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그런데 당신은 다머를 천국에서 만나고 싶은가? 래트클리프는 다머와 함께 보낸 시간을 책으로 냈다. 아마존에서 책 설명을 훑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라는 게 항상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는 않는 게 분명하다. 한 독자가 이렇게 리뷰를 썼다:나는 당신이나 바로 위에 글을 쓴 사람이 천국에서 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아예 말할 것도 없고, 애초에 왜 다머 같은 인간의 영혼 상태에 관심을 갖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난 그냥 소름이 돋을 뿐이다. 저자의 책과 평론을 읽은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엇이든 용서하실 수 있고 또 실제로 용서하신다는 사실과 그런 은혜가 자신들을 천국에 들여보낼 거라는 점에 희망을 느낀다며 감격한다.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기에 다머 같은 사람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다는 말에 ‘안도’하는 걸까? 물론 모든 사람이 이 리뷰를 쓴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글은 우리가 은혜를 생각할 때 가질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우리는 하나님이 덕 다이너스티(Duck Dynasty)에 나온 족장 필 로버트슨과 같은 사람을 과거의 섹스, 마약, 로큰롤로부터 구원하신다는 사실에는 기뻐하지만, 피해자를 강간하고 죽이고 인육을 먹기까지 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는 똑같이 기뻐하지 않는다. 천국에서 브래드 피트(Brad Pitt)는 만나고 싶어 하지만, 행여라도 히틀러가 죽기 직전에 개종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게 우리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 소소한 우상숭배는 다 용서하시길 바라지만, 소아성애자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는 치를 떤다. 구원 여부가 인간의 결정에 달린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는 사실을 찬양한다. 나는 자비로움에 있어서 인색하기 짝이 없지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롬 10:13).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 제프리 다머 바로 옆에 서서 “거룩, 거룩, 거룩”하고, 그와 함께 찬양할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나를 흥분시킨다.1. 내게 소망이 있다는 의미이다. 므낫세 왕에 대해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아들들을 산 채로 불태웠고, 마법사와 마녀(해리 포터에 나오는 종류가 아님)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바알 숭배를 위한 “신당 재건”이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두손 두발이 꽁꽁 결박당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대하 33:10). 그러나 “므낫세는 고통을 당하여 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는 조상의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겸손해졌다. 그가 주님께 기도하니, 주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그 간구하는 것을 들어 주셔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왕이 되어 다스리게 하셨다. 그제서야 므낫세는 주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대하 33:12-13).므낫세 왕과 제프리 다머 같은 사람에게도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과 나에게도 소망이 있다. 나는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기에, 다머 같은 사람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다는 말에 ‘안도’하는 걸까?”라고 아마존에 리뷰를 쓴 사람의 질문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얼마나 끔찍한 죄냐고? 너무 많다. 나는 거룩하지 못했다. 나는 참지 못했다. 나는 내가 받은 자비를 확장하지 못했다. 나는 나의 창조주를 완벽하게 실망시켰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은혜가 연쇄 살인범과 악한 왕에게까지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은혜에 대한 오해이다. 그것은 죄를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선하심을 과소평가하는 교만이다. 2. 다른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는 의미이다.내게는 목록이 하나 있다. 종이가 아닌 마음에 담아둔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사랑하는,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고 영아를 죽였다는 므낫세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내 죄가 생각난다. 그리고 나는 목록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매달리지 않는 한, 영원한 형벌을 짊어질 것임을 나는 안다. 그들이 므낫세와 같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스스로 겸비하여 그의 얼굴을 구하지 아니하면 은혜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도 은혜가 있음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편히 쉴 때가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보내실 것입니다(행 3:19-20).나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매달림으로써 하나님께 굴복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인해 기뻐한다.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예수님은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묘사된다. 그의 죽음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는 매일 치러야 하는 희생이 더 이상 필요 없다. 그만큼 그의 제사가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모든 희생이 이루지 못한 것, 즉 죄에 대한 속죄가 영구적이고 단번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히 7:25).“완전하게”(To the uttermost)를 어떤 번역자는 “온전히”(completely) 또는 “영원히”(forever)라고 표현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주의 사항이 없다. 살인. 동성애. 유아 살해. 우상숭배. 그 어떤 죄를 저질러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나와 당신이 전도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이 다 자비의 후보자이다. 하나님께서 므낫세나 다머 같은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뿐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소망이 없다.3.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담긴 넘치는 풍요함은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이 사실에 불편함을, 심지어 굴욕감을 느끼는 교만한 사람도 있다. 죄를 물리치는 일에 관해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승리하신다. 선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감사한 미소 대신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라고 말한다. 자비가 축복이 아니라 빚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지독한 교만이다. 어느 목사가 최근 설교에서 이렇게 상기시켰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는 그 어떤 꼼수나 속임수가 없다. 당신은 오로지 선물로 받기만 하면 된다.”우리가 예수님의 족보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로 채울지가 궁금하다. 확실히 라합(마 1:5), 다윗의 가장 치욕적인 죄(마 1:6) 또는 므낫세 왕(마 1:10)과 같은 부류의 인간은 결코 넣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가장 좋아하는 성자를 선택해서, 그런 성자들로 족보를 채울 생각에 흐뭇해할 것이다. 그러나 은혜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은혜의 경로와 길이와 깊이를 표시하신다. 마가복음 2:7에서 율법학자들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아무도 사할 수 없다. 그리고 기억하라. 하나님은 당신이 아는 최악의 사람에게조차도 용서를 베푼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의 기도는 특별하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행 7:60, cf. 눅 23:34).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울의 반응이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행 8:1). 바울로 더 잘 알려진 사울의 회심과 그 이후의 사역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에 대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사례의 하나이다. 무자비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사랑할 줄 모르는 자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와 같은 반역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원제: Sharing Heaven with Serial Killer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제프리다머
천국
용서
자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회고와 반성, 그리고 도약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을 위하여
by 김경호
2022-10-12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회고: 1970-2003년까지 국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시작은 1970년대부터입니다. 인물로는 손봉호 교수와 문서 선교사인 웨슬리 웬트워스(Wesley Wentworth)를 통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적은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데 있습니다.그 이후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세계관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모임은 1980년 초, 당시 IVF 사무실에서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을 읽고, 토론 모임을 가진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계관 모임의 1세대는 강영안, 김헌수, 송인규, 신국원, 양성만, 오창희, 이승구, 이정석, 황영철, 홍병룡이었습니다. 세계관 모임이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되었는지, 당시 원서의 출판과 번역이 늦게는 5년, 빠르면 2, 3년 만에 나왔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 기독교 세계관은 1970년대 광주사태와 마르크시즘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의 논리를 치열하게 전개하던 상황에서, 나름의 “대안적 이론”으로 기대감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정체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원년 멤버들이 유학과 취업으로 흩어졌고, 세계관 각론이 나오지 않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의 문화 분석은 거의 방어적으로, “영적 비평”(사탄의 문화)이라는 형태로 비약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1990년대 기독교 세계관은 원론을 반복하는 것 외에 이론적 측면에서나 실천적 측면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어놓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세계관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 위기에 대한 인식은 2002년 ‘복음과 상황’, 2003년 ‘신앙과 학문’에서 표출됩니다. 먼저, 2002년 ‘복음과 상황’에서 일어난 비판과 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박총은 기독교 세계관이 원론에 머물러있고 인지-명제적 접근법만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명제성”에서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려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최태연은 모던-명제성과 포스트모던-이야기라는 등식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비판하고,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양희송은 세계관의 문제가 내러티브적 성격을 포착하지 못하고 명제화하는 작업을 주된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최종 목표가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에만 머물렀다고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내러티브만이 살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정정훈은 기독교 세계관이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현실 속에서는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이는 단체,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논리를 바탕으로 기독교 내부와 외부의 경계선을 긋고 그 내부에만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먼저 타자의 얼굴을 솔직하게 대하고,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서로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대화해 보기를 제안했습니다. 이원석은 기독교 세계관이 가장 우월한 세계관이고, 한국 교회에 가장 적합한 세계관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세계관의 다양성을 제안했습니다. 2003년 ‘신앙과 학문’에서 일어난 비판과 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태연은 개혁주의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의 전부일 수 없다는 점, 기독교 세계관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 그리고 실천을 위한 전략과 행동이 부족했다는 점을 비판했습니다. 그 대안으로 함께 연구하고, 다양한 연구자원을 넓혀 가야 한다고 말하며, 결국 다양한 세계관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세계관 쪽으로 결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기현은 세계관 운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고, 사회 참여의 근거는 창조가 아니라 십자가이며, 세계관의 문제는 이원론보다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이에 대해 다양한 변혁 모델 가운데 상황에 맞는 것을 선택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양희송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개혁주의 신학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개념적 틀에 여백이 많으며, 세계관의 개념 자체가 느슨하게 정의됨으로써 가지는 오해나 왜곡이 많다고 비판하면서, 이론은 그만하고 실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승구는 기독교 세계관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없애야 하는 것이 용어라면 상관없지만, 내용이 비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세계관의 표현, 제시 방식을 내러티브로 바꾸자는 비판에는 동의하지만 그 내러티브는 명제성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세계관은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이 기준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일이 그 방향이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상의 2002년과 2003년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과 제안은, 비판을 통해 위기의식을 가지면서, 동시에 여러 다양한 제안들을 통해 탈출구를 찾았고, 그 이후 반성과 도약의 발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성: 무례한 말투, 무례한 전투, 무례한 태도! 또는 잘난 척, 거룩한 척, 완벽한 척!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는 자신의 저서인 서양 문화의 뿌리에서 이론적 탐구가 반박보다는 신뢰를 추구하는 대화의 길이자 자기 검토의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무례함을 보여 왔습니다. 리차드 마우(Richard J. Mouw)는 이것을 무례한 말투, 무례한 전쟁, 무례한 태도라고 부르며, 그 사례를 소개합니다. 무례한 말투의 예로, 마우는 귀담아들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 모델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우는 17세기 청교도와 퀘이크교도 사이의 논쟁을 하나의 본보기로 보여줍니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한 팸플릿에서 퀘이커 교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모욕했습니다. “술주정뱅이, 욕쟁이, 호색가, 음탕한 자들, 교황 절대주의자보다 나을 것이 없다.” 반면에 퀘이커 지도자인 제임슨 네일러(James Naylor)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청교도들의 비난에 응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청교도들을 “뱀, 거짓말쟁이, 마귀의 자식, 저주받은 위선자, 멍청한 개망나니”라고 말했습니다. 무례한 전투의 예로, 마우는 무례한 말투 안에는 십자군식 의식구조, 즉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무례한 전투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무례한 태도란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데이비드 키네먼(Davie Kinnaman)과 게이브 라이언(Gabe Lyons)은 나쁜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외부인들이 보기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잘난 척, 거룩한 척, 완벽한 척이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외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반감을 느끼는 이유는 어떤 신학적 입장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잘난 척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에서 그들만의 잘난 척하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습니다. “거룩한 척하는 가면을 쓰고 싶은 유혹은 죄를 짓지 않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중요한 신앙의 우선순위들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 자신만 우월하고 완벽한 척한다는 이미지를 풍기게 될 소지가 있다.”도약: 정체성, 다양성, 그리고 경계-투과성 지금까지 세계관의 회고와 반성이 이런 수준이라면, 우리의 세계관도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브라이언 왈쉬(Brian J. Walsh)는 기독교 세계관도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세계관이 어떻게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바뀔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왈쉬는 다섯 가지로 답합니다. 첫째, 세계관이 전체 체계로 간주되며, 세계관 자체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될 경우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둘째, 세계관이 보편적 최종성을 대표할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셋째, 세계관이 성경적 역학성을 잃을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즉, 방향, 방향 상실, 재방향이라는 이러한 요소를 잃어버릴 경우다. 만일 방향을 상실하게 될 때, 그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재방향을 통해 세계관이 수정될 수 있어야, 세계관은 활력, 힘, 통찰력의 깊이를 가지게 된다. 넷째, 세계관이 변화하는 문화적 맥락에 부적절하거나 논리에 맞지 않을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된다. 다섯째, 세계관은 자기-폐쇄적 기독교 공동체에서 안전에 대한 방어적 정신을 섬길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된다. 따라서 나는 세계관의 도약을 위해, 정체성, 다양성, 그리고 경계-투과성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정체성이란 “개혁주의 세계관의 입장”을 의미합니다. 이런 개혁주의를 정체성으로 표현하는 세계관으로는 2003년부터 이승구의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005년 신국원의 니고데모의 안경, 2008년 송인규의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 2020년 최용준의 성경적 세계관 강의 등이 있습니다. 또한 다양성이란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란 넓은 범주의 종교를 의미합니다. 개혁주의보다 범위가 넓고 다양합니다. 양희송의 세계관 수업은 이러한 다양성을 대표하는 책입니다. 그는 다양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세계관은 “관”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청,” 세계“미,” 세계“향”으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둘째, 세계관은 명제성이 아니라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세계관은 명제보다 이야기를 통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런 다양성과 이야기성에 따른 세계관의 판별 기준은 복잡성을 감당해 낼 역량, 그리고 자기 오류 불가능성에 반대하는 자기성찰능력입니다. 경계-투과성은 개혁주의와 기독교 세계관의 범주 외의 비주류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경계-투과성은 개혁주의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비판점을 가진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나는 소수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성경의 관점을 조금이라고 반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정체성이나 다양성 안으로 투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성민의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이러한 경계-투과성을 대표하는 책입니다. 그는 경계-투과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경계-투과성은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가 우리의 선입견을 깨뜨리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둘째, 경계를 넘는 힘은 바깥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나타난다. 즉, 우리의 삶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는 교류가 필요하다. 셋째, 이러한 노력에는 고집이 아니라 겸손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성경 읽기가 자기 확신 강화제, 즉 고집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정체성과 경계선에 대한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경계가 없다면 한 집단은 정체성을 잃고 그 집단이 누릴 수 있는 영향 자체를 포기하는 셈이 된다. 그렇지만 기독교 공동체가 경계를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높은 장벽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 경계는 소통을 위해 열려있어야 한다. 그래야 변화를 위해 참여할 수 있고 밖에 있는 아름다움을 인식하기도 하고 그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도약의 발판을 딛고 좀 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봅시다!
세계관
기독교세계관운동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는…
by Rosaria Butterfield
2022-10-11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이웃으로, 이웃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여긴다. 그들은 인간을 범주나 부류로 축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 모든 사람의 눈빛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그들은 자신이 마약 중독자, 성매매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기심과 교만을 비롯해 자신의 모든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을 생명줄로 여겨 굳게 붙잡는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사람들은 자기 집을 자신만의 전유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그분의 선물로 생각한다. 그들은 대문을 활짝 열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자기 집의 문을 활짝 열면 복음을 그들에게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신조와 신앙고백과 전통은 물론, 성경적인 신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우리집에서는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 일은 이른 아침에 한쪽 불로 야채수프를 끓이고, 다른 쪽 불로 밥을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늦은 저녁에 나의 남편 켄트가 갈 곳이 없는 가족을 위해 소파 위에 잠자리를 만들고, 에어매트리스에 공기를 넣어 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진정으로 손 대접을 베푸는 사람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식탁 교제를 베풀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기꺼이 맞이한다. 그런 사람은 섬길 기회를 찾는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무엇을 공들여 갖추어 놓거나 요란하게 초청장을 내밀지 않는다. 초청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 가정을 닮은 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가정은 공동체적이며, 기독교적 전통과 실천을 넓고 깊게 펼쳐 나간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구별된 백성이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는 이웃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식탁을 함께 공유하며, 그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행복하게 여기기 때문이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하루 중에 약간의 여유 시간, 곧 일상의 루틴이 파괴되지 않으면서 잠시 짬을 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나이 든 이웃을 병원에 모시고 가거나 이웃의 아이를 잠시 돌봐주거나 홍수나 세계적인 난민 위기로 인해 살 곳을 잃은 가족들의 임시 거처를 만들어주는 일 등,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언제라도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돈을 버는 족족 다 써버려서는 안 되며, 남에게 나눠줄 것을 많이 남겨 두어야 한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삶에는 주인과 손님이 따로 없다. 당신이 우리집에 저녁 식사를 하러 와서 내가 아직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것과 내 세탁물이 식탁 위에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당신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세탁물을 정리하거나 식탁을 차리거나 식기세척기를 돌리거나 개들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한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주인은 도움을 받더라도 당혹스러워하지 말아야 하고, 손님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힘을 보태야 한다. 매일 함께 모이는 하나님의 가족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주인과 손님은 스스럼없이 서로 도울 수 있다.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행해지는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날마다 함께 모이며, 꾸준히 기도한다. 초대는 필요 없다. 그리고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고, 교제를 나눈다. 이 땅의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보여진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성적인 외로움으로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순종의 희생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순종의 희생을 향해 부름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자비로운 존재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에게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하라고 사람들을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일을 보면 크게 슬퍼한다. 우리는 무겁고 힘든 십자가(죽음처럼 느껴지는 자기 부인)를 짊어지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언가를 명령하실 때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은혜도 함께 허락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어려움을 혼자서 감당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가족은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삶으로 구현해 나가면서,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공유한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고난을 동반한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사람들은 식사 자리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 진정으로 관대한 사람들은 자신과 많이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용납과 승인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용감하게 받아주고 존중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우정을 곡해할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식사를 하셨지만 그들과 함께 죄를 짓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세상에서 살았지만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는 않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설이고,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꺼이 고난을 받는 사람들, 곧 겉모습보다는 내면의 인격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특징이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들과 굳센 관계를 맺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견고한 관계를 맺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선자와 겁쟁이들은 관계보다 말이 앞선다. 그런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몰래 문화 속으로 침투하거나 동네에서 깐깐한 도덕군자인 척 행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려 든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냉소적인 탈-기독교 세상에 참된 기독교를 분명하게 보여준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믿는 믿음의 증거를 드러낸다. 그런 손 대접은 정치나 문화나 시사 문제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손 대접은 회심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이 무엇인지, 회개를 통해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런 손 대접은 죄가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속는다는 것은 악의 세력에 사로잡혀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본다. 사람들은 단지 좋은 선택을 독려하는 격려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이해한다. 그런 손 대접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서 통치하신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한때 자기를 유혹하고 속박하면서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했던 죄가 지금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더라도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통해 빛을 발한다.이 글은 로자리아 버터필드, 복음과 집 열쇠(개혁된실천사)의 머리글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
손대접
환대
가정
가정교회
복음과집열쇠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
이상한 신세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Carl Trueman
2022-10-08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변했다. 자아성(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덕적 양식에 따르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계의 광범위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아도 전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기독교가 형성한 사회적 상상의 마지막 자취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심지어 지금 이상한 신세계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처지다. 자아성 혁명은 구체적으로 성혁명의 다양한 국면에 나타나듯이 유치원 교육부터 직장 내 대명서 사용 정책[직장 내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대명사를 사용할지 말지 같은 정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자면 아직은 이런 일을 피하면서 당분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현대적 자아성의 관념이 만들어 낸 도전적 상황과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 순응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세계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 여섯 가지 대응 방안이 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주_ 이 글은 칼 트루먼,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의 제9장을 부흥사개혁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으로, TGC의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여섯 가지 방안을 6회에 걸쳐서 싣는다. 1.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2.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치자4.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5.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6.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우리가 현대 사회 속에서 발견하는 형태의 표현적 개인주의는 개인과 개인의 욕망(심지어 자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을 도덕적 세계의 중심에 두는 방식에서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땅의 계층 구조에서 어디에 속하느냐와 상관없이 보편적 인간 존엄성의 관념에 대한 근본적 헌신같이 표현적 개인주의에 내포된 중요 진리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 내면의 심리적 공간, 우리의 감정, 우리의 욕망에 대한 표현적 개인주의의 강조는 그 자체로 잘못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사실상 그 자체로 목적으로 만들 때만 잘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정과 욕망이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단순히 본능의 동물이 아니라 의지를 가진 존재여서 우리의 내면 생각은 우리의 정체성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내면의 심리적 공간을 인정하고 이 공간의 직관을 올바른 방식으로 형성해야 함을 의미한다.아우구스티누스의 자서전 ‘고백록’은 기독교 문학의 고전이다. 이 작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은 시절에 경험한 중요 사건들을 회상하면서 자기의 정신생활에 집중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내향적 반성의 움직임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항상 외부로 하나님을 지향하면서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감정은 하나님 및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라는 더 큰 진리의 맥락 안에 놓이며 이 진리를 기준으로 교정된다. 비슷한 역학관계가 시편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시편 저자는 친구, 원수,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감정에 대해 종종 노골적이면서도 지나칠 만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확인, 또는 훨씬 나쁘게 말하면 방종한 자기 연민을 탐닉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야기하고 있는 경험과 감정을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의 맥락 안에 두기 위한 것이다.교회가 이 진리를 붙잡고 우리의 심리적 직관을 성경적 방식으로 형성하려면, 예배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행동 중 하나인 찬양을 길게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 시편이 공동 찬송가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시편을 공동체로 노래하는 것이 유대인의 사회적 상상을 형성했다. 그리고 교회도 오늘날 똑같이 해야 한다. 우리가 표현적 개인주의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루소에서 오프라 윈프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르는 것과 정서를 우리의 생활방식을 위한 토대로 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우리가 교회 생활에서 정서와 감정의 자리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자기의 정신생활을 알맞게 형성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공동 교회 생활을 개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을 위해 감정을 탐닉하거나 나의 필요와 욕망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이유라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지 않는 예배 음악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자기의 감정을 이해하고 솔직하게 표현하게 해 주면서도, 항상 밖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노래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 주장하듯이 교회가 시편만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더 많은 시편을 (또는 여러분이 아직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어떤 시편이라도) 노래하는 것이 훌륭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시편에 대해 생각해 보라. 시편은 기쁨을 특징으로 하지만 또한 슬픔과 상실도 알고 있는 기독교 인생관을 제공한다. 시편은 현재의 투쟁을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위대한 행동과 미래를 위한 약속의 맥락 안에 둔다. 시편은 우리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인 자기의 신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님의 웅장한 그림과 미래 안식에 대한 약속을 제시함으로써, 시편은 우리가 질병 같은 개인적 사건이든, 이 책에서 설명한 충격적 변화 같은 사회적 사건이든 간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신학적이고 감정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감정과 정서의 존재인 동시에 타락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감정과 정서를 올바른 맥락으로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구속의 노래가 필요하다.원제: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표현적개인주의
시편
시편찬송
고백록
복음은 환대로부터 온다
서평: 로자리아 버터필드의〈복음과 집 열쇠〉
by 이춘성
2022-10-06
환대를 주제로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난 지난 5~6년 동안 환대에 대한 고대 사회에서 현대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문화인류학과 사회학, 철학과 윤리학, 신학 등 다양한 논의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20대 후반부터 10년 넘게 셀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 집 식탁에 초대하여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하는 환대 사역을 전문적으로 하였다. 내가 사역했던 단체는 1950년대 스위스의 한 가정집에서 자녀들의 친구들을 위해 가정집을 개방한 선교사 부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후에 이 가정은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젊은 구도자들로 넘쳐났고, 가정은 공동체가 되어 프랑스어로 피난처라는 뜻의 라브리(L’Abri)라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되었다. 이 공동체를 세운 선교사 부부가 20세기 기독교 지성이라 불리는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와 그의 아내 이디스 쉐퍼(Edith R. M. Schaeffer)다.환대의 추억영국 라브리에서 일할 때, 그곳에는 쉐퍼 목사 부부와 그의 자녀들과 함께 환대의 사역을 함께해 왔던 간사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외부인들이 라브리 사역을 지성적 사역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라브리 사역은 환대 사역이라고, 나 같은 신세대 간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도 당시 라브리를 쉐퍼의 책을 통해 접하고, 이러한 지적인 접근에 매료되어 라브리를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날카로운 지성을 배우고자 했다. 당시 나와 같은 학생들이 라브리 식탁을 가득 채웠고, 식탁에서는 대학 강단보다 더 심도 있는 질문들이 오갔다. 그러나 후에 내가 간사로 지원하여 라브리 사역을 시작하려 할 때, 라브리에서는 나의 지성적인 능력을 평가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내가 치러야 하는 시험은 라브리 간사와 가족들을 위해서 내 손으로 직접 요리한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떨림은 머리가 아닌 식칼을 잡은 내 손끝으로 기억한다. 난 인터넷을 검색하여 몇 개의 레시피를 얻었고, 마른반찬과 메인 요리로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준비했다. 이 음식을 기쁘게 받아먹은 공동체의 가족들은 나를 가족으로 맞이하였다. 이후에 난 일을 준비하기 위해 서점에 가서 요리책들을 샀고, 마트에 가서 요리 도구와 앞치마를 샀다. 지금도 내 서재에는 10년 넘게 사용하여 각종 양념이 듬성듬성 묻어 있는 레시피 북들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꽂혀 있으며, 주방에는 결혼 전부터 손님 대접을 위해 사 모았던 요리 도구와 코렐 접시들이 가족과 손님을 위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최근 받아 든 한 책은 나의 젊음의 한 챕터를 장식하고 있는 환대의 일을 떠올리게 하였다. 지금은 이론과 강의로 환대를 설명하고 있지만, 환대는 이론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숨어 있다. 그리고 단숨에 읽어 내려간 이 책은 그 신비의 강력함을 다시 한번 증언하였다. 이 책은 한때 레즈비언 영어학 교수였고 미국 동성애 운동의 지도자였지만, 지금은 보수적 신앙의 그리스도인이 된 뜻밖의 회심의 저자인 로자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가 쓴 복음과 집 열쇠이다.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는 내내 눈가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너무나 펑펑 울어서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기도 했다. 이미 중년이 되어 버린 난, 이 시기의 남자가 그렇듯 호르몬의 영향으로 이런 과도한 반응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로자리아 가정에서 일어난 환대의 식탁은 내 집에서 일어났던 일과 너무나도 같았다. 마치 어린 시절 미술 시간에 데칼코마니를 하듯,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다른 대륙의 이름 모를 그리스도인의 환대의 식탁에서 일어난 기쁨과 공포, 회복과 회개, 분노와 용서, 다양한 세계관들의 대결 등은 환대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하물며 로자리아가 식사 대접을 위해서 잘 깨지지 않고 실용적이며,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릴 수 있는 코렐 접시를 사용하고 있는 것까지도 말이다(53쪽). 20년 전, 총각으로 환대 사역을 시작할 때 구입한 코렐 접시는 여전히 우리 집 주방 싱크대 상부 장의 한편을 채우고 있다. 매일 실천해야 하는 일상의 환대를 위해서 20년을 견딜 만한 접시로 이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그리스도인의 급진적 환대로자리아는 예수님의 환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은 급진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환대(손 대접) 행위를 통해 전염성 있는 은혜를 전하는 방법을 친히 보여주셨다.” 또한 예수님의 환대는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중앙으로 옮겨주는 은혜,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은혜, 예수님이 주님인 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은혜”를 우리에게 준다고 주장한다(43쪽). 로자리아는 예수님의 환대를 ‘급진적인 환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급진적인 환대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자리아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급진적인 환대란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에 기초한 것이다(51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곧 위대하고 더 큰 급진적인 환대를 경험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급진적인 환대를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급진적인 환대는 그리스도인이 은혜를 경험한 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증거 하는 대표적 표징이다.로자리아는 그리스도인의 급진적 환대를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당신이 하는 말들이 당신이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이다”(55쪽), “둘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56쪽), “셋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우리가 입어야 할 영적 갑옷의 일부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심령이 상한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께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게 할 수 있다”(57쪽), “넷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하늘에 있는 수많은 증인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게 해준다”(57쪽) 로자리아는 그녀의 환대에 대한 네 가지 이해를 바탕으로 환대가 우리가 살아가는 포스트 크리스천 세상에서 이웃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주장한다. 로자리아는 환대를 세상을 향해 벽을 쌓고 세상의 이웃을 악의 하수인으로 여기면서 증오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주며, 이와 달리 세상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고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진보적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교만의 죄의 함정에서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주장한다. 로자리아는 그리스도인의 급진적 환대의 강력함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독교적 환대(손 대접)”는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표현이지만 이것을 통해 신비가 드러나고, 공동체가 형성되며, 진실을 말하는 태도가 널리 확대된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기를 극도로 싫어하지만 환대(손 대접)는 바로 그것을 요구한다. 환대(손 대접)는 매우 가정적인 의미로 들리지만 이는 매우 강한 힘을 지녔다. 진실로 당신이 음식을 대접하고, 붙들어 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천국의 문을 뒤흔들 만큼 강력하다(66쪽). 환대와 그리스도인의 소명 로자리아는 전직 영어학 교수이자 동성애 운동의 지도자이며 레즈비언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과거는 ‘환대’란 용어가 현대에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은 ‘환대’를 ‘혐오’의 반대 표현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혐오’의 대표적인 피해자로 인식되는 집단이 성소수자들이다. 그리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집단을 모두 혐오 집단으로 낙인찍는 것이 현대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같은 성 정치이다. 그러므로 현대에 환대란 표현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성정치, 동성애 운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용어로 변질되어 있다. 그러기에 로자리아는 ‘기독교적 환대’가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로자리아는 환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 요소라는 사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가 이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복음과 집 열쇠”에서 찾을 수 있다. 원래의 영어 제목은 “The Gospel Comes with a House Key”이다. 직역하면 “복음은 집 열쇠에서 온다”이다. 한글 제목은 복음, 집, 열쇠가 각각 환대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책 내용 안에 이 제목의 사연이 있다.로자리아가 레즈비언으로서 동성애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할 당시, 미국과 유럽 사회에는 에이즈로 인한 공포가 극에 달하였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은 사회에서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 동성애자들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 만약에 위급한 상황이 되면 서로의 집으로 피신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비상 연락망을 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로의 집 열쇠를 공유했다고 한다. 위험할 때, 언제든지 자기 집을 동료 동성애자들이 피난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로자리아는 당시 이러한 동성애자들의 연대와 환대가 현재 ‘급진적 환대’라는 용어를 이들이 점유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사회가 동성애자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이유로 로자리아는 자신이 과거 동성애자였을 때를 상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현대 동성애자들이 점유하고 있는 ‘환대’라는 용어와 가치를 되찾아 와야 한다고 이 제목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로자리아가 한 그리스도인 가정을 통해서 동성애자들의 왜곡된 환대가 아닌 더 크고 바르며 급진적인 기독교적 환대를 경험하였을 때, 비로소 동성애를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로자리아는 거짓과 가짜 환대가 아닌 진정한 환대를 세상의 이웃들이 경험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도의 사명이라고 확신한다. 급진적 환대는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아니라 소명이자 의무이다.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 자기 집에서 환대(손 대접)를 베풀도록 부름 받고 있다. 독신자 가정도 기혼자 가정과 마찬가지로 환대(손 대접)를 필요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녀들이 있는 가정이나 자녀들이 없는 가정이나 모두 그리스도의 축복을 전하는 통로이기는 마찬가지다. 구원받은 부자들이나 구원받은 빈자들이나 그 중간에 속한 사람들도 가정과 기숙사와 버스 정류장과 공원에서 기독교적 환대(손 대접)를 베풀도록 부름 받고 있다(315쪽).환대로의 초대 과거 내가 환대 사역을 위해 이른 새벽부터 밥을 하고, 오전에는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며, 점심이나 저녁을 준비해서 손님들을 대접할 때, 내 한쪽에서는 이 사역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멋지게 설교하고 성경 공부를 인도하며, 인사이트 넘치는 강의를 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온종일 노동하고도 밤늦게 홀로 책을 읽고 공부하였다. 읽고 가르치는 것이 더 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나를 가득 채웠고, 언젠가는 이 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때로는 찾아온 손님들이 자기가 다니는 서울 대형교회의 부목사들을 자랑하면서 시골에 사는 내 기를 죽이는 일도 있었다. 환대는 나에게도 환대받는 상대에게도 대접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명절에도 나를 찾는 사람들은 내게 밥을 얻어먹었던 사람들이었다. 아마 내 설교와 가르침이 내 요리 솜씨보다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이제는 과거와 달리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시대는 탁월한 설교자와 강의, 책이 없어서 복음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옆집의 우리 이웃이 복음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우리 식탁에 한 번도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환대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세상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탁월한 설교자와 강의, 신학과 변증, 책이 있다고 한들, 만나지 못한다면 들려 줄 수 없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신앙의 신비는 만남에서 온다. 그리고 환대는 만남을 만든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삼위 하나님과의 만남 말이다. 마지막으로 환대는 겸손한 초대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소박함과 겸손함은 환대의 가장 큰 미덕이며, 누구나 환대를 베풀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열린 손이다. 환대(손 대접)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환대(손 대접)는 잔치가 아니다. 환대(손 대접)는 잔치가 될 필요가 없다(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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