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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가족 모임을 위한 5가지 목표
by Kathleen Nielson
2021-09-21
명절 가족 모임의 시간이 가까워졌다. 이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별생각 없이 기쁜 마음으로 그 시간을 기대하는 사람들조차 각자의 습관과 생활 리듬을 가진 가족들과 만남에 따른 긴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어찌 보면 복잡한 이 시기를 헤쳐 나가기 시작하면서, 믿음의 아내, 장성한 자녀의 어머니, 비교적 풋내기 시어머니와 할머니로서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5가지 가족 모임에 관한 목표를 적어 보았다. 물론 각자의 삶의 다양한 배경과 상황에 따라 관점은 다를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삶의 여정의 단계에서 얻은 괜찮은 조언을 목록에 추가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1. 미리 기도하자너무도 바쁜 일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명절을 맞이하게 되다 보니 우리는 흔히 여행, 메뉴, 손님맞이 등 실용적인 준비에만 몰두하게 된다. 우리가 함께 모이기 전, 시간을 내어 육체적 준비뿐 아니라 영혼의 준비를 위해 미리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내가 자녀들의 가정을 방문하거나 우리 집에 맞아들일 때 기도로 북돋아 주며 아이들의 바쁜 삶 가운데 그들을 격려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큰 차이를 만든다. 우리가 중요한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한 기도,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드리는 기도,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유익한 말만 하도록 드리는 기도를 해보자.2. 하나님께서 내 입술을 주장해 주시기를 기도하자(시 141:3)수년간 장성한 미혼 아들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제쳐 놓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미 2년간의 할머니 역할과 3년 동안 결혼한 자녀와 함께 여러 차례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는 (전화 대화와 이메일을 포함하여) 방문 전과 방문 중 및 후에 기도하는 것이 포함된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때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 무심할 수 있다. 장성한 자녀와 손주를 둔 한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그저 “NORTH”라고 말한다고 한다.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그것은 “Not Our Row To Hoe!”(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님)의 머리 약자라고 한다. 이제 남편과 나는 종종 “NORTH”를 사용했다. 그것은 다른 많은 불필요한 단어를 대체한다!성경의 지혜는 우리에게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는 꿀송이와 같은 선한 말”을 위해 기도하도록 가르친다(잠 16:24).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 안에 거하시고 우리 삶에 선한 말씀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시는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말씀이다. 주님, 당신의 영으로 제 입을 지켜 주시옵소서. 복음의 은혜로 나의 말에 품위가 있게 하옵소서.3. 삶의 다양한 상황에 있는 가족들을 돌아보자종종 가족이 모일 때에는 자녀가 있는 기혼 자녀, 자녀가 없는 기혼 자녀, 미혼 자녀, 연로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및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된다. 어떻게 하면 모두를 한 번에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아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만나는 동안 각기 다른 상황이나 관심 분야에 뭔가 관심을 끌 만한 무언가가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좋은 음식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좋은 매개체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우리는 가장 연장자와 막내가 한자리에서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시간과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충분한 활동이 필요하다. 우리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하기 시작한 이야기로부터 해외여행에 대해 배운 것이나 방문한 이야기들 혹은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이야기 등,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다양한 구성의 가족 단위를 다양한 활동에 관여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경건의 시간이든, 식사 시간이든, 다양한 종류의 게임이나 산책이든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복음을 위해 사용하시는 수많은 방법을 볼 수 있도록 젊은이와 노인, 그리고 매우 다른 삶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가족의 기쁨을 나누는 것은 얼마나 큰 선물인가?4. 나의 계획에 주권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불어넣자잠언은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라고 말한다. 그 구절은 내게 현실로 서 있는 견고한 하나님의 계획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계획은 사람들의 두뇌에서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상상하게 한다. 우리가 가장 신중하게 생각해낸 크고 작은 계획들이 우리 눈앞에서 얼마나 빨리 바뀌곤 하는가! 우리가 비행기를 놓쳤거나, 저녁 식사를 망쳤거나, 질병에 걸렸거나, 훨씬 더 심각한 반항적인 아이나 건강 위기와 같은 슬픈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의 전반적인 관점은 견고하고 확고한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에 의해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다.우리는 여전히 애통해 하거나 슬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믿는 자로서 우리 영혼의 흔들리지 않는 밑바닥에 주님께서 우리의 반석이 되시며 우리의 구세주시라는 것을 안다. 그분의 구속 계획은 모든 역사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로 묶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계획이 우리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더라도 우리는 잊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정하여 주신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5. 함께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자화려하거나 색다르거나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이것을 듣거나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지적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목적하신 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은 간단하지만 서로에게 우리의 영혼을 열고 영적 실재를 경험하게 한다. 믿지 않는 손님이나 가족에게 이것은 강력한 간증이 된다. 아버지가 이러한 습관을 주도하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그런 가정과 결혼한 사람으로서 나는 기도와 찬송, 그리고 주위에 울려 퍼지는 말씀으로 모인 가족들에게 강력한 증거와 기억에 대해 간증할 수 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들에게도 이것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성장하게 한다.물론 어떤 가정에서는 관련 가족의 구성에 따라 그러한 공개적인 간증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 얼마나 놓칠 수 없는 축복이겠는가!그러니 우리를 모으소서, 주님,어려운 상황의 가정 가운데서, 우리가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지만아버지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며,아버지의 은총으로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이신 생명,그 풍성한 생명을 당신의 아들을 통해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주님, 우리 가족의 지경을 깊고 넓게 만들어 주시고우리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옵소서 보이는 것 이상을 위해,하늘과 당신의 하늘 보좌를 위하여,그토록 소중하고 짧은 삶을 위해,당신의 아들을 통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기도합니다.원제: 5 Aims for Holiday Family Gathering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생활
관계
명절
가족모임
가정
가족
결혼
NORTH
간증
은혜
어려운 환경에도 감사하기
by Laura Baxter
2021-09-20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들은 첫 번째 정신질환을 앓았다. 조현병의 변종인 분열 정동병 진단을 받았다. 지난 몇 년 동안은 그에게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가족인 우리도 그와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5년 전, 아들은 전액 장학금을 받고 대학교에 들어갔다.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친구들과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변했다. 4년 동안 다섯 번이나 병원에 입원했고, 학교도 여러 번 휴학 해야만 했다. 아들의 행동은 이상했다. 소외감을 느끼고 좌절하고 낙담하는 모습이 때로는 무섭게 느껴졌다. 많은 약을 먹었다. 어떤 약은 비쌌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또 어떤 약은 악몽을 꾸거나 공포를 느끼게 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마지막 입원 후, 의사는 그의 전두엽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서 보호 기관을 알아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조현병은 인구의 약 1%를 괴롭히는 파괴적인 정신질환이다. 일반적인 증상으로는 환청, 환시, 망상, 횡설수설하는 말, 의욕감소 그리고 무감각 등이 있다. 정신분열증이 있는 사람은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다. 친구를 사귀거나 직장을 다니는 것, 심지어 정기적으로 옷을 갈아 있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나는 엄마로서 5년 동안이나 울며 기도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감사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명절 연휴에는 특히 힘들었다. 물론 감사 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음식, 가족, 친구들, 집 등. 그런데 이런 감사의 제목도 사랑하는 아들이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믿음이 있는 사람은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하지만 현재의 나는 어떻게 감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시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세계 2차 대전 중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일원이었던 코리 텐 붐은 벼룩이 가득한 독일 강제 수용소의 생활을 기록했다. 코리의 영적 자매인 베시는 코리에게 벼룩을 보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만큼 감사를 실천하는 생활을 하라고 말했다. 코리는 베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놀랍게도 교도관들은 죄수들에게 전례 없는 자유를 주었다. 이런 자유가 주어진 것은 경비원들이 벼룩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코리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코리가 나치 수용소에 있는 벼룩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사랑하는 아들이 정신질환을 겪고 있지만 말이다. 5년이 지난 후, 내 질문의 대답은 기적처럼 “그렇다”가 되었다. 이제 아들의 아픔과 고통을 직접 경험하고 깨달은 4가지의 축복을 이야기하려고 한다.1. 동지애아들의 정신병은 고통스럽고 남에게 드러내기 싫은 일이다. 그것은 분명 우리 가족 모두에게 위기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위기로만 끝나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가 한편에서는 감사와 축복의 상황으로 변해갔다. 우리는 친구에게 마음을 열고, 교회 가족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면서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조현병에 관한 블로그와 회고록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이런 고통을 나만 겪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전국에 있는 ‘온라인’ 친구들을 사귀었고, 서로 격려하고 위안을 얻었다. 위기를 만나기 전까지 결코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역설적이겠지만 아들의 병을 통하여 만난 관계에 감사했다.2. 연민건강한 사람들에게 정신질환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종종 수치심을 느끼거나 소외되는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솔직하게 나도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피했었다. 그러나 아들의 경험을 통해 정신적 질환이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아들은 여전히 내 아들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형상이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가족의 위기를 통해 내 주변의 고통을, 특히 사회적 기대에 못 미치는 성인 아들을 둔 부모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제는 불안과 우울증으로 약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었다. 아들의 고통을 통해 내 마음을 부드럽게 변화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3. 교감C. S. 루이스가 쓴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 소리치신다”. 내 세계가 무너졌을 때 하나님께로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기도하는 횟수가 많아졌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시간도 늘었다. 모든 예배에 집중했고 눈물로 가득한 찬양을 했다. 욥기를 자세히 읽으며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건 아닌지 궁금했다. 아들의 삶과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았다.여러 정신과 전문의들에게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의 소망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내가 걷는 걸음마다 함께 걷고 계심을 발견했다. 욥과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서 경험하게 되었고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욥 42:5).4. 만족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0). 고통이 찾아왔을 때 나의 첫 반응은 이렇지 않았다. 선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아들의 마음이 파괴되는 것을 허락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나는 서서히 타락한 세상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부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번영신학 설교자들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이 땅에서 건강과 부를 약속하지 않으셨다. 나와 아들의 삶의 의미는 부유한 환경, 목적의 성취,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멋진 순간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거하는 그곳에서 신실하게 남아 있기를 원하신다.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노력 끝에 얻은 교훈이기에 감사하다. 감사를 위한 싸움가족이 함께 모이는 명절에 당신의 어려움과 위기 상황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의 “벼룩”에 대해 이야기하라. 당신이 싸우고 있는 정신적 질환, 외로움, 실직의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다음 감사를 위해 싸워라. 바울은 믿는 자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고후 6:10)라고 묘사했다. 성령님이 함께 하는 당신에게도 이 말씀은 적용된다. 상하고 깨진 마음을 그분께 가져가라. 마음껏 울라. 그리고 주신 것에 감사하라. 원제: Giving Thanks When Your Family Is Struggl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송유희
생활
건강
동지애
연민
교감
C.S.루이스
만족
성령의도움
상한심령
감사
사랑이 남자를 진짜 남자로 만든다
by Marshall Segal
2021-09-18
현재 진행되는 역사든 아니면 지나간 과거의 역사이든, 가장 놀라움을 주는 남자는 어김없이 끈질기게 사랑하는 남자이다. 전 세계 다양한 남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존심, 돈, 명성과 명예, 권력 등 그 많은 것을 성취하며 살아간다.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희생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몇몇 이상한 남자들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런 남자들 또한 열심히 일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희생하지만 다른 남자들의 이익, 특히 그들의 영원한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바친다. 사도 바울이 젊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봉사의 직무와 관련해서 제자로 삼았을 때, 그는 이렇게 명령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 이 구절 속 여러 자질들이 젊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그 자질들이 특히 하나님의 더 나은 남자가 되기 위한 단순하지만 도전적인 패러다임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바울 사도가 그의 제자에게 이 짧은 목록을 읽어주는 것을 우리가 옆에서 들었다면, 그가 사랑에 대한 부분에 이르러서 말하는 속도를 늦추고 특별히 그 부분을 강조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없어서는 안 되는 야망왜 그렇게 생각할까? 바울이 편지를 이렇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전적으로 당신이 사랑의 남자가 되고 다른 남자들을 그 사랑으로 더 나아가게 돕도록 하기 위함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가 정의한 것처럼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넘치고 확장되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기쁘게 충족시키는 것”(The Dangerous Duty of Delight)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디모데야, 하나님 안에서 너희가 자라가고 넘치고 필요한 것을 채우는 기쁨으로 믿는 자들에게 본을 보여라. 당신의 삶으로 그들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라.’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벧전 4:8).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사랑은 한 남자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그를 선택했고, 구속하셨고, 준비시키고, 변화시키고, 그 안에 거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자에게서 흔히 보는 모습은 이기심, 성적 부도덕, 더러움, 우상 숭배, 시기, 분냄, 다툼, 분열, 분열, 시기, 술취함이다(갈 5:19-21).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남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정면으로 대면하도록 만든다.그러므로 이처럼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의 남자로 구별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을 추구하는 남자라면 없어서는 안 되는 야망이다. 진짜 사랑이 하는 것진정으로 사랑해 본 사람은 사랑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 바울은 인간관계에서 사랑이 얼마나 쉽게 시들 수 있는지를 자신의 삶 속에서도 보고 느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다루지만 아마도 서로에 대한 사랑의 결핍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사랑 장”으로 흔히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결혼 생활을 기대하며 즐기는 신혼부부를 위해 쓰여진 게 아니다. 이기심과 분열에 깊이 오염된 교회, 즉 사랑은 식었지만 자신은 성숙했다고 착각하는 기독교인을 향해서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에게 뿌리를 두고 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상상하는 자기 아첨에 불과한 것인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그리고 7절에 이르러서 절정에 달하는 하나의 테스트를 제공한다.“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모든 것을 참는 남자사랑의 남자는 관계에서 책임을 포기하거나 일이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들은 참으며 기쁨으로 사랑한다. 사랑의 남자는 다른 이의 짐을 기꺼이 지고 그들이 나를 실망시키거나 상처를 주거나 기분을 상하게 할 때조차도 그들의 짐을 함께 짊어진다. 하나님의 남자는 칭찬이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일을 감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 즉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게 보일 수 있는 일까지도 감당한다. 그럼 그는 거기에서 무엇을 얻기 때문일까? 더 놀랍게도, 그는 성급하지 않을 뿐 더러 인내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필요와 불쾌감까지도 지속적으로 참는다. 거칠거나 무례하지 않게, 그리고 친절하게 대한다(고전 13:4-5).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랑할 때 지고 있는 짐은, 진짜 무겁지만 이상하게도 가볍게 느껴진다(마 11:30). 그는 대부분의 다른 남자들 보다 더 많은 은혜로 더 많은 짐을 질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짐을 져야 할까? 당신이 결혼했다면 그 짐은 가정에서 시작한다. 아내와 자녀의 일상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요구 사항에 얼마나 민감한가? 그러한 요구를 짊어지는 데 있어서 요구받는 이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은 가족의 특정한 약점과 죄를 얼마나 잘 견디고 있는가? 그렇게 가정에서 충분한 공급을 마친 후 거기서 끝나지 않고 교회와 이웃,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두신 다른 모든 곳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당신 자신 속에 있는 기쁨과 가정을 통해 넘치는 그 기쁨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는가?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짊어져야 할 짐이 비교적 적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라. 우리 모두는 다 필요에 둘러싸여 있다. 독신은 종종 우리가 결혼한 남자들보다 더 집중력을 가지고 짐을 져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고전 7:32-35).믿는 남자사랑은 또한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믿는다. 그런데 이 말은 매우 순진하고 나아가서 무모하고 무책임하게까지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남자는 세상 남자들과 달리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확실히 알고 있다. 바울 사도가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할 때, 사랑이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을 다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도 그렇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 가장 최선의 면을 믿는다. 달리 말해서, 다른 이들의 생각과 욕망 그리고 동기가 불분명할 때, 사랑은 최악을 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다른 사람의 죄를 경멸하면서 종종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죄는 무시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냉소주의는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전혀 지혜롭지 않다. 그것은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심각한 형태의 사랑 결핍이다. 물론 사랑에는 분별이 필요하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그러나 사랑에 분별력만 필요한 게 아니다. 경건한 분별력이 자라고 연단될수록 사랑은 줄어들고 쪼그라드는 게 아니라 도리어 점점 더 풍성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분별력은 신중하고 깊이 생각할 뿐 아니라 죄의 심각성을 깊이 느끼면서,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죄와 맞설 준비까지 되어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바른 분별력은 결코 다른 사람 속에서 악을 찾지 않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 최선의 모습으로 믿기 위해 가장 애를 쓰는 대상이 누구인가? 배우자나 룸메이트, 자녀나 부모, 동료, 학우, 또는 이웃 중, 누가 은혜를 베풀기에 가장 꺼려지는가? 하나님의 남자는 진리를 기뻐하고(고전 13:6), 진리가 불확실할 때에 조차도 모든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마음에 의심이 다시 커지기 시작할 때면 최선을 다하기 위해 싸우고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한다”(벧전 4:19). 소망하는 남자하나님의 남자는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보고 믿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소망한다. 이런 복스러운 소망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와 같이 수직적인 소망뿐 아니라 동시에 크고 행복한 소망에 뿌리를 둔 끊임없는 수평적 소망이기도 하다. 선한 남자는 다른 사람의 실패나 불행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야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들은 시기심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성공하고 열매를 맺고 번성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 특히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라면, 그 기쁨은 배가가 된다. 바울은 이 수평적 희망에 대해 그리 자주 이야기하지 않지만 고린도후서 1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질”(고후 1:8) 정도의 상황에까지 처했지만, 바울은 여전히 고린도에 있는 형제들이 잘되기를 바랐다. 자신이 처한 현재가 점점 더 나빠질수록, 바울은 다른 형제들의 미래가 더 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더 큰 용기와 힘을 얻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남자는 바울처럼 생각하고 소망한다. 따라서 모든 관계에서 최상의 결과를 기대하라. 최고를 위해 기도하라. 다른 사람의 삶과 미래를 개선하기 위해 당신을 사용하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라. 남이 잘될 때 탄식하는 이기심과 경쟁심을 버리고,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은사를 사용하고 높이시는 하나님께 도리어 감사하라.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남자는 기뻐할 이유가 워낙 많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행복한 남자다. 그런 남자가 누리는 기쁨은 자신의 성공, 성취, 기회에 국한되지 않고, 도리어 다른 사람의 기쁨에 의해 촉진되고 강화된다.인내하는 남자이런 남자들의 사랑은 짐을 그냥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계속 진다.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느끼며 떠나고 난 뒤에도 사랑의 남자는 남아서 견딘다. 거짓된 사랑은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같이 빨리 시들고 금방 사라진다(막 4:17).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저항을 만났을 때 단지 인내를 나타낼 뿐 아니라 실제로 더 큰 인내를 만들어낸다(롬 5:3). 이런 남자는 특정 관계에서는 필요할 때 분명한 경계를 정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래 참는다. 그들은 다르게 사랑하고 오래도록 사랑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이런 사랑의 질과 관련해서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렇게 썼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계속해서 힘차게 환난을 이겨내는 것은 바로 군인의 인내심이다. 사랑은 압도되지 않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남자답게 그 역할을 수행한다(고린도전서 주석).많은 남자가 자신을 “어떤 어려움”이라도 견뎌내는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또한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는 모습을 스스로에게서 상상하고 싶겠지만(마 26:35), 안타깝게도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처럼 한낱 여종 앞에서 조차도 굴복하는 나약한 존재이다(마 26:69-70). 우리는 길에 놓인 어떤 특정한 어려움 앞에서는 항상 투덜거리고 포기하며, 또한 사랑이 요구하는 사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편리한 변명을 하곤 한다. 너무 피곤해서, 너무 바빠서, 나도 할 일이 있는 남자인데, 이미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니야? 등등의 변명을 늘어놓는다.그렇다면 당신으로 하여금 떠나도록 유혹하는 것은 무엇인가? 죄인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은 남자는 누구나 다 포기할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사랑은 모든 이유를 극복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것처럼 용감하고 희생이 따르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결혼 생활에서 또는 친구 관계와 교회 생활 그리고 전도의 사명에서 인내와 기쁨을 가지고 짐을 지려는 마음이 약해졌을 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나를 버려도 되는 이유가 얼마나 많았었는가 하는 점이다(히 13:5, 8).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한, 결코 그 어떤 남자도 떠나거나 포기하는 남자가 될 수 없다. 나는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 죽는 남자자기 자신에 대한 죽음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명시적으로 나열되지는 않았지만 5절에서 우리는 최소한 이러한 종류의 희생을 엿볼 수 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종종 자신의 방식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자신의 필요, 자신의 욕망, 때로는 스스로 생각할 때 가장 좋고 가장 현명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도 죽는 것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위를 올려다보고 사랑 장 너머로까지 시선을 넓힐 때, 무엇보다도 남자가 되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남자다움(loving manhood)을 반복해서 보게 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놀랍고 남성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의 모범을 남겼다.견디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편안함과 편리함을 포기해야 한다. 믿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냉소주의를 버려야 한다. 소망하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야망이 사라져야 한다. 지속되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계속해서 죽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남자는 항상 죽는 남자며, 죽기를 행복해 하는 남자다. 그들은 죽을 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히 12:2)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남자는 사랑하고 참 기쁨을 위해서 기꺼이 죽는다. 원제: Love Makes a Man a Ma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생활
관계
하나님의남자
진정한남자
진정한사랑
이웃사랑
고전13장
사랑장
분별
인내
무지개 깃발이 있는 헤어숍을 이용해도 될까?
by Laura Baxter
2021-09-13
“우리는 가면을 쓰지 않은 사람, 인종차별주의자, 동성애 혐오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내가 다니는 헤어숍의 입구에는 이런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 년 내내 무지개 깃발(성소수자 운동을 상징-역주)이 걸려있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결혼의 정의를 믿는다. 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성경을 믿는 나는 동성애 혐오자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헤어숍을 이용해도 되는 것일까?성경적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에 무지개 깃발이 걸린 헤어숍은 그리 놀라운 광경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질문은 시의적절하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죄라고 정의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거나 죄의 행동을 부추기는 기업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걸까?’우선은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 혐오”와 같은 비방을 예상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박해 가운데서도 기뻐하라고 하신다(마 5:11-12).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고 성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헤어 디자이너와 관계를 계속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단절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도움이 되는 질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경은 그것을 금하고 있는가? 다른 하나는 현명한 방법인가? 하는 것이다.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과 교제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세 가지 원칙이 있다.1. 성경은 그것을 허락하고 있다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과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말씀한다(고후 6: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업에서든 결혼 생활에서든 우리와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과는 장기적인 동반자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성적으로 부도덕하거나 다른 죄를 짓는 사람과의 모든 교제를 끊거나 피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말한다(고전 5:10 참고). 그리고 우리가 자기의 의로 우쭐해지기 전에 과거 죄에 빠져있던 우리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라고 말이다(고전 6:11).헤어 디자이너와 파트너 관계가 아닌 한 우리는 언제든지 다른 헤어숍으로 갈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들에게서만 상품과 서비스를 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같은 장소에서 계속 머리를 자르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다.2. 현명하지 않을 수 있다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은 특정한 선택을 금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신중한 태도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것은 합리적이지만 유익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전 10:23).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불경건한 사람으로 바꾸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우리는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로 인해 불순종하는 세상에 타협하고 마치 친구처럼 가까워질 수도 있다(약 4:4). 그런 우리에게 바울은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3)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헤어 디자이너는 그리스도인이 불순종하도록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한 가지 예를 보자.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협력하도록 창조하셨다. 성경은 문화적 규범에 따라 남자는 남성적인 옷을 입고 여자는 여성적인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친다(신 22:5; 고전 11:14~15). 따라서 우리는 옷을 입는 방식으로 성별을 인정하고 서로의 성별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은 특히 여성들에게 단정하게 옷을 입으라고 하신다(딤전 2:9). 그러나 오늘날은 성별의 구분이 없고 극단적인 헤어스타일이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운영하지 않는 헤어숍에서 볼 수 있는 불경건한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등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헤어숍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있는 곳의 주인이자 모든 곳을 다스리는 통치자이시다.또 다른 고려 사항은 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현명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무지개 깃발이 단순한 신념의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헤어 디자이너가 우리의 돈을 사용하여 반기독교 운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도 있다. 주변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돈을 더 감사하게 생각하고 중요한 곳에 사용할 다른 헤어 디자이너가 있을 것이다. 이제 막 헤어숍을 시작한 경우라면 우리가 지출하는 돈을 더 감사하게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돈의 청지기로 삼으셨으니 작은 일이라도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길이고, 가장 좋은 방법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눅 16:10).내가 헤어숍에 가는 이유가 헤어 디자이너의 유창한 말이나 유행에 앞선 스타일로 인해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라. 지혜가 필요한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도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하며 조언을 구해보라. 그런 다음 기도하며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그곳에 계속 갈지 말지 최선의 결정을 내리라.3. 복음을 전할 수 있다일단 현재의 헤어숍을 선택한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돈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 경우에는 나 자신을 헤어숍에 파견된 그리스도의 대사로 생각하기를 권한다(고전 8:19-23).헤어숍으로 가는 길에 성령님께서 헤어 디자이너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서로가 교제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라. 직원을 친절하게 대하고 팁을 아낌없이 주라(마 7:12). 헤어 디자이너가 말하는 것을 좋아하면 그의 말을 들어라. 배우자와 결혼 등 관심 있는 주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은 물론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영적인 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가라. 그리고 헤어숍을 떠날 때 교회의 전도지를 주거나 관심 있는 기사의 링크 주소를 전달할 수도 있다.머지않은 미래에 무지개 깃발이 실제 서비스 거부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혹은 훨씬 더 나쁜) 일이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게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여(마 10:16) 그 기회를 이용하자. 그래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자.원제: Can I Get My Hair Cut Under a Rainbow Fla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생활
관계
무지개깃발
성소수자와의관계
성경적결혼
복음전파
문화적규범
불경건한사람
서비스거부
절실하게 기도하며 양육하라
by J. D. Greear
2021-09-09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기도하는 삶(A Praying Life)’의 저자인 폴 밀러(Paul Miller)가 지적했듯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시간, 돈, 재능이 인생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라고 조용히 확신하기” 때문이다.물론, 우리는 그것을 뻔뻔스럽게 말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것을 소리내어 말하면 그것은 이상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종종 마음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우리는 너무 피곤하거나 너무 바쁘다는 말로 기도하지 않는 것을 핑계댄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마음 속으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린다. 충분한 시간과 돈과 재능으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우리 삶에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나를 겸허하게 만든 육아나의 삶에서 DIY 접근 방식을 적극적으로 적용시킨 영역은 육아였다. 17년 전 처음으로 부모가 되었을 때,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모든 육아 관련 책을 읽었다. 내 철학은 이랬다. 기독교 양육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면 내 아이들이 잘 된다고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들의 웃는 소리가 들린다.)이 철학을 무너뜨린 책은 엘리스 피츠패트릭(Elyse Fitzpatrick)의 저서 ‘Give Them Grace(은혜를 베풀라)’이다. 기독교 양육에 관한 대부분의 책은 원칙을 알려주고 (대개 암묵적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A, B, C를 하면 자녀가 잘 될 것이라고 한다고 그녀는 지적한다. 내가 바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스, 이것이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겁니다. 내게 A, B, C를 알려 줘요. 시작. 나는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으니 D와 E가 있으면 내게 전수해줘요.’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접근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완전한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그분이 만드신 천사의 삼분의 일은 반역하였다(계 12:4). 그가 직접 창조한 유일한 두 인간은 둘 다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독자인 내가 기술과 원칙과 양육 면에서 하나님을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그녀는 이런 종류의 생각, 즉 우리가 DIY 기독교 양육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의 정말 위험한 문제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한 가지, 즉 매일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의 자비를 구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는 기도로 최선을 다했다”고 결론을 내린다.성경은 우리에게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렘 17:5). 성경적 지혜를 습득하는 것이 건강한 영적 삶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믿는” 모습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부활의 능력을 제공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예수님은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지침서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 사시는 영을 주려고 내려오셨다. 원칙을 마스터하고 그 원칙에 생명을 주는 관계를 잊어버리는 것은 비극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자들이라고 했다.오직 우리의 소망: 하나님의 은혜원칙이 중요한가? 물론이다. 그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도로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우리 자신, 가족, 교회, 지역 사회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다. 우리의 기술이나 성경적 원칙이 아니다. 당신은 그것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믿는가?그렇다면, 당신은 기도할 것이고, 계속 기도할 것이다.우리의 기도가 절실한 것은 우리에게 매우 원하는 것이 있어도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나와 내 아내가 어떤 원칙이나 규율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게 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수년 동안 우리는 꾸준히 함께 기도하기 위해 애썼다. 이제 우리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으며 그중 세 명은 십대다. 우리는 항상 함께 기도한다. 양육은 규율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절실함으로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십대 아이들을 “북한 지도자들”이라고 부른다. 핵폭탄을 만들 만큼 똑똑하지만 그것을 다룰 만큼 성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절실할 때까지 기억하라. 그렇게 하면 기도하게 되고, 규칙적으로 기도하게 된다.원제: Why We Need to Pray Desperatel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육아
DIY육아
절실한기도
정기적인기도
오직소망
하나님의은혜
시기심과 싸우는 5가지 방법
by Christa Threlfall
2021-09-07
바닷가에서 세 번째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친구들을 보거나, 당신이 바라던 승진에 동료(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뽑혔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 보라. 부럽지 않다거나 샘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시기심은 좋은 직업을 얻거나 건강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 혹은 멋진 은퇴 계획과 같이 중요하고 거창한 일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보통 우리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을 시기한다. 예를 든다면, 누군가의 깨끗한 자동차(내 차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계속해서 흩어져 있을 때)를 보았을 때나 소셜 미디어에서 친구가 올린 멋지고 인상적인 음식 사진(나는 먹다 남은 음식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을 때)을 볼 때 등이다. 지난주에 나는 내가 사는 곳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키우는 토마토보다 키가 커 보이는 토마토를 째려보았다. 부러움과 시기심은 그 크기에 상관이 없다.나는 근본적으로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이렇게 쓰면 시기심이라는 것이 간단하고 그리 복잡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문제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시기심은 관계를 망치고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를 방해할 수 있다. (어떻게 아느냐면?) 하나님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시기심의 썩은 과일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내 마음에 있는 이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직접 대면해서든 혹은 온라인상에서든 내 관계를 통해서든 그것이 드러나는 여러 방식을 보여주고 계신다.때로 시기심은 내가 원했던 일을 누군가가 성취하여 주목을 받았을 때 화를 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혹은 다른 사람이 성취한 좋은 일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내가 받을 수 있었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어떤 때는 시기심이 나를 극도로 비생산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나보다 잘하고 있는지 계속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기심의 더 위험한 결과는 우정을 갈라놓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기심이 들면 친구와의 우정조차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인데도 말이다. 아마도 이러한 “선망의 열매” 중 일부는 당신에게도 친숙하게 들릴 것이다. 그것은 모두 교만이라는 죄로 귀결된다. 내가 최고가 되고 싶어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부러워지는 것이다. 이 죄와 싸울 수 있도록 성령이 가르치시고 능력을 주시는 다섯 가지 방법을 살펴보자.1.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을 채우라나에게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두 구절이 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그리고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울 때 성령님은 그 말씀을 사용하여 시기심으로 가득한 내 마음이 그분을 따르도록 도우신다.2. 성령님이 시기하는 생각과 행동을 드러내시면 바로 회개하라이 죄와 싸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시기하지 않고(고전 13:4)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은혜를 구하라.어떤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전에 잠재적인 나의 시기심을 하나님께 이야기할 때가 있다.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에 적을 식별하는 것과 같다(내 경우엔 누군가의 아름다운 집에 들어가거나 그들의 대단한 성과를 보게 될 때이다).3. 시기심이 드는 상대에게 복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라시기심이 드는 상대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 주시기를 간구하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들의 삶, 관계, 직업, 사역에 복을 내리시기를 기도하고, 그들이 번성하고 그들을 보호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라. 그들이 영향력을 높이고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마음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하라. 이러한 간구는 하나님이 나에게(그리고 나 혼자만) 해 주기를 원하는 일을 그들에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4. 도움과 조언을 구하라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척하는 것을 멈추게 한다.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할 때 다른 사람의 지혜와 전문성을 인정해야 한다. “자기 보기에 옳은” 시기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보다는 “권고를 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라(잠 12:15).5. 조언을 구하는 이에게 너그럽게 베풀라사람들이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데 내가 인색하게 대응하는 것은 보통 그들이 나보다 더 많은 성공 거두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8)라고 하신다. 남이 나보다 더 번성할까 걱정하기보다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풍성히 베풀라.계속되는 싸움나는 오랫동안 이 죄와 싸워왔다. 성령님이 처음으로 나를 깨닫게 한 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시기심과 씨름하고 있다. 물론 어떤 때는 더 힘들 때도 있지만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이 죄를 이겨내고, 내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닮을 때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마음을 쏟기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의 시기를 근절하시는 선한 일을 멈추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시리라”(빌 1:6)는 것을 확신한다.원제: 5 Ways to Fight Env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생활
감정
시기심
썩은과일
선망의열매
권고
하나님의은혜
성령의능력
은퇴계획
자녀를 교회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려면
by Jared C. Wilson
2021-08-31
최근 LifeWay 연구에 따르면 교회를 떠나는 청소년의 비율이 70%를 상회한다. 라이프웨이 리서치의 스캇 맥코넬(Scott McConnell)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소식은 교회가 10년 전보다 더 많은 학생을 잃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탈교회 비율의 실질적 개선 여부를 말할 만큼 통계적 차이가 큰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교회 이탈률은 거의 그대로(실제로는 4% 하락)이지만, 다시 교회로 돌아올 가능성은 더 나빠지고 있다.이런 걱정스러운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최근 트위터에 ‘청년 문화’에 대한 내 생각을 간략하게 공유했다. 대부분 동의하고 있는 것은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들에게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독교 가정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추론하여 믿음의 가정에 있는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제 그에 관한 여섯 가지 원인을 살펴보도록 하자.1. 부정기적인 교회 출석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교회에 출석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자녀들도 같은 길을 따르게 될 것이다. 별다른 일이 없을 때나 교회에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또는 운동이나 취미 활동 혹은 휴가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자녀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2. 교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것은 목회할 때 아내와 내가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다. 우리는 교회의 문제에 대해 불평하거나 실망스러운 상황에 낙담하는 것조차도 자녀들 앞에서 보이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다. 아이들이 교회를 엄마와 아빠를 낙담시키는 장소로 인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상처를 무분별하게 드러냄으로 아이들이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의 어린 자녀 앞에서 교회를 향한 당신의 불평, 불만, 실망, 갈등, 심지어 교회와 관련한 험담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교회에 대한 환멸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3. 지엽적인 교회 공동체의 경험이것은 교회 안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경험하는 교회는 전적으로 또는 대부분 중고등부 공동체 문화에 한정되어 있다. 모든 것은 그들의 관심사 혹은 흥미에 의해서만 돌아간다. 그것은 교회가 가는 근본적인 방향과는 다른 방향일 수도 있다. 교회 전체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목적과는 동떨어지기도 한다.나는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연령대로 나뉘어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는 또래들과 함께 지내며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교회 경험이 그들의 연령대 중심일 때 그들은 교회가 아닌 중고등부의 체험만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보완하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대학 청년 부서가 일종의 고등학교 “4학년”과 같은 역할을 함으로 우상 숭배와 속임수가 가득한 대중문화에 둘러싸인 청소년 문화가 교회 모임에 잠입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잘 먹혀 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커서 집을 떠나게 되면 그들은 '대형 교회'를 찾게 되고, 타지의 교회들은 그들의 취향과 비슷하지도 않고 잘 맞춰 줄 수도 없다.청소년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그들이 예수님의 몸과 연합하며 교회의 일원으로 부르기 위해 세례를 준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약 우리가 그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기독교가 언약 공동체가 아닌 각자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인식했다면 그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했다고 생각할 때 기독교의 경험에는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4. 중요한 질문에 대한 무시대형 교회에 영향력을 펼치는 성인으로서 도덕적 심리치료 이신론(道德的心理治療理神論; Moralistic Therapeutic Deism)에 초점을 맞추는 청소년 그룹, 외부인들에게 복음의 전통적인 개념만을 강조하며 슬픔이나 고통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 설교, 복음주의와 정치적 우상 숭배의 상관성, 10대들이 가지고 있는 남녀, 성, 인종 등 문화적 질문에 대한 변증이나 명확한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 부모와 지도자들, 이 모든 현상은 교회가 실생활과 관련된 궁금증에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한다. 그들이 대학이나 그 이후에 직면하게 될 문제의 답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 만일 그들이 확고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지 못한다면 교회는 삶에 활력을 줄 수 없는 곳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현실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지적, 문화적 매력이 없는 곳이라고 판단하게 될 수도 있다.5.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소비지상주의 정신은 미국 문화에서 강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내가 ‘탕자교회’라는 책을 쓰면서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은 일반적인 가정이 교회에 정착하기까지는 4-7년 정도가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변화와 연관이 있다. 교회를 떠나는 데는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하거나 취향이 변할 때 혹은 실망감을 느낄 때 다른 교회로 쉽게 옮기는 가정은 교회를 가족처럼 여기고 사랑하고 헌신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교회는 필요에 따라 버릴 수도 있는 소비지상주의 상품처럼 대하도록 아이들에게 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교회를 정하거나 옮길 때 큰 고민 없이 쉽게 진행한다.6. 무시되거나 선포되지 못하는 복음2010년 ‘True Love Waits’ 캠페인에서 기독교 청소년들의 성 순수성을 장려하기 위해 수년간 활동한 결과를 분석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임신과 질병의 위험과 성경에서 말하는 혼전 성관계 금지에 초점을 맞춘 이 캠페인은 결혼 때까지 순결을 지키겠다고 자발적으로 서약한 교회 아이들에게도 사실상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결과 때문이다. 공동 설립자인 리처드 로스(Richard Ross)는 ‘Christianity Today’에서 “그들의 약속은 도덕적 심리치료 이신론보다는 경외감과 친밀감으로 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십 대들이 더 잘 지켜나가고 있다”라고 말했다.로스는 이어 “예수님을 아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질병과 임신을 피하고 싶은 욕구보다 훨씬 더 강한 동기 부여가 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순수한 삶이 가져다주는 혜택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성행위의 위험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춘기의 청소년들에게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설득은 그리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지 못한다. 고등학교 졸업 파티 날 밤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 지도자, 친구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율법은 선하며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오직 복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 우리 사이에 있는 분열을 깨뜨리시고, 믿음으로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며 우리를 서로 묶어 주셨다. 종교적 관심과 교회에 대한 자기 생각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학생들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단절시킬 뿐이다.만일 교회가 복음이 주도하는 기도, 친교, 예배를 포함한 생활의 중심이 아닌 매주 돌아오는 습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면 아이들은 교회가 사람들과 함께 몸담아야 할 곳이 아닌 단순히 주일 날 가야 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아닌 율법의 그늘에서 키운다면 교회와 관련된 모든 행위는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점수를 따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거나, 종교적인 행동이거나, “영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은 탈진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며, 어쩌면 영적 우울증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복음을 중심으로 은혜 아래에서 잘 되기를 기도하라.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교회 이탈률 통계 수치에 포함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위에서 이야기한 여섯 가지를 기억하고, 그것을 피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원제: How to ‘Disciple’ Your Kids into Church Dropout Statu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가정
양육
교회출석
교회이탈률
교회이탈의이유
기독교가정
교회공동체
청소년문화
소비지상주의
마음과 펜으로 드리는 기도
by 최창국
2021-08-22
쓰기기도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를 소리를 내어 하거나 묵상적인 형태로만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기도는 다양한 형태로 실행될 수 있다. 특히 쓰기기도와 같은 기도는 매우 중요한 기도의 방편이 될 수 있다. 쓰기기도는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 앞에 깊이 성찰하는 기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큰 소리로 정신없이 하는 기도보다 더 깊고 풍성한 기도가 될 수 있다. 쓰기기도는 하나님과 관계를 성찰하는 기도로 작용할 수 있다. 쓰기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에 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의 파노라마를 마음과 펜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쓰기기도는 소리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일명 ‘마음과 펜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우리의 지식과 세계가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영혼으로 화할 수 있다. 영혼을 만들 수 있는 그릇은 성찰과 경이로 빚어진 내면의 컨테이너이다. 만일 날마다 몇 분 동안의 시간을 내어 쓰기기도를 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심리치료의 경비와 수고를 덜 수 있다. 쓰기기도의 이런 소박한 실천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삶의 성찰을,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과 보다 더 깊은 관계를,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의 변형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영성지도로써의 쓰기기도 쓰기기도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깊이 성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영성 지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쓰기기도는 일상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들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서술하는 기도 형태이기 때문에 자기 인식과 동시에 영적 성찰과 감수성을 수련하는데 효과적인 기도 방식이 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삶의 의미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쓰기기도를 통해 우리 삶의 모양과 관련된 부정적이고 긍정적 암시를 주는 고정된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할 수 있다. 때문에 쓰기기도는 단지 하나님과의 대화에만 목적인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지도의 형태로 작용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를 분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쓰기기도는 감정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우리의 내적 삶을 반영하는 하나의 분별 훈련이 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쓰기기도는 일상의 구체적 상황을 넘어 뜬구름 잡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쓰기기도는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deepest self)을 감추고 사회적 공동체적 역할만을 강조하는 표면적 자아(surface ego)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쓰기기도가 영성 형성의 효과적인 방식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이어야 한다. 쓰기기도가 영성 형성을 위한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어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쓰기기도는 좋은 날이나 슬픈 날 모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가지고 마음과 펜으로 하나님과 대화함으로서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을 치료할 수 있다. 또한 쓰기기도는 ‘나에게는 좋은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비관적인 평가를 하는 것도 치료할 수 있다. 쓰기기도는 하나님과 더불어 자기 통찰력(self insight)을 기르는 좋은 방식이 될 수 있다. 쓰기기도는 고통스럽고 힘들 때 자신을 마주함으로써 내면의 긴장과 갈등을 성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나아가 쓰기기도는 자신의 기도 역사로 남을 수 있다. 쓰기기도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통하여 감사의 삶과 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 쓰기기도는 다양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성경의 구절이나 사건에 대한 통찰이나 묵상과 함께 드릴 수 있다. 특히 성경 묵상을 통해 성찰기도, 회개기도, 탄식기도, 기쁨기도, 감사기도의 형태로 쓰기기도를 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영성 일기 형태로 실행될 수도 있다.쓰기기도를 오랫동안 하면 기록된 기도를 통해 성찰하면서 읽을 때 삶의 일반적 방향에 대해 성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삶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실제적으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는가를 결정할 때 유용할 수 있다. 특히 고통스런 시기에 드려진 쓰기기도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삶의 질문이나 투신들에 대해 실제적으로 다시 회상하게 해주기도 한다. 쓰기기도는 전에 쓰인 기도를 통해서 다시 기도함으로 자신의 영적 여정의 패턴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는 우리가 기도했던 상황이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려움을 이겨낸 것들을 후에 읽게 되면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더욱 하나님께 둘 수 있게 된다. 쓰기기도 모델로써의 시편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는 젊은 시절에 기도 생활의 깊이를 더하려고 애쓰던 가운데 펜으로 기도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속에서 약동하는 감성을 파악해서 토로하고 분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정직한 자세를 취했던 시편 기자들의 기도의 길을 따라갔다. 오코너는 이렇게 기록했다.당신에 대해 생각하거나 늘 갈구하는 당신의 사랑으로 가슴 벅차기보다 예술적인 기교를 닦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은 가느다란 초승달입니다. 내 자아는 옹근 달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지구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내 자아의 그림자가 점점 더 커져서 달의 전모를 보지 못하게 될까, 그리하여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그림자를 근거로 나 자신을 판단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스스로 길을 막고 선 탓에 난 하나님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Flannery O’Connor, A Prayer Journal, 3).오코너는 삶의 승패는 사랑의 우선순위를 다시 설정하는데 달렸다는 것을 의식한다. 이는 어거스틴이 깨닫고 그의 기도 일지 고백록에 기록했던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하나님과 이웃보다 성공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은 심령에 공허를 증가시킨다. 오코너는 자신의 비범한 재주로 인해 오만하고 이기적인 작자가 될 뻔 했지만 기도로 끊임없이 마음의 지향점을 조절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오 하나님, 제발 내 생각을 투명하게 해 주세요. 정결하게 씻어 주세요. … 만물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주님이 머무시는 곳을 깨닫게 도와주세요”(O’Connor, A Prayer Journal, 4). 오코너는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 되풀이하는 기도 행위를 답습하는 것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여태 되뇌던 기도문의 내용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입으로 읊조릴 수 있을지언정 마음으로는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의식은 도망자처럼 사방팔방 떠돌았습니다. 매번 이런 식으로 기도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심정을 적을 때는 사랑의 온기가 온몸을 감싸는 걸 감지했습니다”(O’Connor, A Prayer Journal, 4). 어느 날 그는 그의 쓰기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적었다. “아무라도 좋으니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없나요?”(O’Connor, A Prayer Journal, 23).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지금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도는 단지 소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는 입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쓰기로도 할 수 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이 기도이지만, 시편에 나타난 기도 실천방법은 입술의 기도보다는 쓰기기도였다고 할 수 있다. 시편은 쓰기기도의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쓰기기도는 옳고 그른 특정한 방식이 있지 않다. 쓰기기도라고 해서 논리적인 형태의 글쓰기와 같이 할 필요가 없다. 쓰기기도의 형태는 문장으로 써도 되고, 구절이나 단어만 써도 된다. 쓰기기도는 내면의 성찰과 깊이 관련된 기도이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소리 내어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천천히 마음과 펜으로 드려야 한다. 쓰기기도에는 적어도 참된 마음, 회개, 감사, 희망, 성찰, 두려움이 하나님 앞에 토로되어야 한다.
영성
묵상과기도
쓰기기도
반추기도
시편
표면적자아
통찰력
영성지도
어거스틴
상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라
by David P. Barshinger
2021-08-14
“대니는 죽을 거야.”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사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자리에는 열 살 된 대니 형도 있었다. 그를 변호하고 싶은 강한 절박함에 나는 여덟 살짜리 아이가 쥐어짤 수 있는 모든 힘을 모아서 “아니에요! 대니는 안 죽어요.”라고 말했다. 당시 대니는 뇌종양을 앓고 있었다. 한때 그는 내 누나와 레고 만들기, 태그 놀이, 촌극 꾸미기 등을 즐기던 활기찬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피부는 뼈에 달라붙은 것처럼 말라버렸고, 몸은 서서히 쇠약해졌다. 철없는 사촌들의 행동은 단지 부모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한 것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그 말이 나와 우리 형제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알 리 만무했다. 그러나 결국 대니 형에 관한 내 생각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이모와 삼촌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대니 형은 그 날로부터 채 일 년을 더 살지 못했다.죽음, 그리고 삶인간에게 죽음은 실로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부활의 생명과 천국에 있는 사랑하는 그리스도인과의 재회에 대한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죽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내며 경험하는 죽음은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기 충분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극단적인 상실의 형태는 죽음이지만, 오늘날 COVID가 고통스럽게 상기시키고 있듯이 우리는 때때로 다른 종류의 상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COVID가 지금 강요하는 상실은 정상적인 사회적, 전례적, 그리고 직업적 리듬에 관한 것이다. COVID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인간 번영에 꼭 필요한 갈망을 가져다주는 연결성마저 상실하고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지금과 같이 단절된 세상에서 삶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굳이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기도 한다. 이런 현실은 여전히 상실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더욱 부각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와 함께 할 수 없을 때, 교회에서 함께 예배할 수 없을 때, 무슨 힘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나 자신을 절단하기지속되는 상실과 관련한 이미지 중 하나가 미국의 남북 전쟁 참전 용사이다. 남북 전쟁 동안 의사들이 집도한 절단 수술은 약 60,000건이다. 사실상, 전쟁에서 하는 수술의 4분의 3이 절단 수술이다. 그중 약 45,000명의 수술에서 살아남았고, 그리고 그들은 신체적이고도 개인적인 상실을 시각적으로 상기시키는 세대를 대표한다. [‘의학 및 통합 과학 역사 저널(Journal of the History of Medicine and Allied Sciences)’에 실린 ‘내전의 절단: 물리적 및 사회적 차원(Amputation in the Civil War: Physical and Social Dimensions)을 참조하라]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신체 일부가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더 이상 걷거나 글을 쓸 수도 없었고, 생계를 유지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만질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실은 정상적인 삶을 방해하고, 이런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상실의 삶은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삶을 거스를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까지 좌절시킨다.크리스토퍼 애쉬(Christopher Ash)는 욥기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살다 보면 인생에서 모든 것이 잘못되는 때를 만나거나 또는 만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고통과 실패, 심지어 재난과 비참한 시간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어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한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팔다리를 잃은 것, 직업을 잃은 것, 그리고 형제를 잃은 것과 같은 상실 속에서조차 하나님이 선하실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멀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마음을 현세적인 것에서 돌이켜서 오로지 그분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신다. 따라서 상실은 어떤 의미에서 반직관적이지만,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그 혜택을 다른 방법으로도 찾을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러나 상실이 주는 유익을 거둬들일 때조차, 우리는 종종 상실 이전으로 돌아가길 갈망한다. 지금의 내가 아닌, 이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종종 대니 형을 생각할 때, 그가 아직도 살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대니 형이 지금 내 아이들과 함께 논다면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공유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상실을 지워버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상실을 지우는 게 적어도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또 다른 상실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간과한다.매건 웨일런 터너(Megan Whalen Turner)가 쓴 소설 ‘도둑의 귀환(The Return of the Thief)에는 현명한 마법사와 유게니디스(스포일 주의: 그녀의 이전 책에서 손을 잃은 인물) 사이의 대화가 나온다. 유게니데스에게 잃어버린 손을 여전히 원하는지 마법사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당연히 그립지요. 누구나 다 더 춤을 잘 추고 싶고, 더 노래도 잘하고 싶고 또 더 강해지고 키도 커지고 싶어할 겁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 자신을 바꾸고 싶어하지요…. 하지만 손을 잃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손이 다시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건 결국 지금의 내가 어떤 낯선 사람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과 같아요. 그것은 결국 지금의 내 자신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데, 누가 그걸 원할까요? 불신자의 경우 상실이 그 사람을 더 낫게 만든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믿는 자라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구원과 거룩함을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그렇기에 나의 상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나 자신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지금 나 자신의 모습을 지우려는 것이다. 내면의 변화(character arc)이런 주제는 사실상 오래된 질문의 되풀이이다. 에덴 동산에서 처음 세워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재건된 하나님의 왕국을 드러내는 선함과 생명에 대해 명백하게 모순되는 나쁜 일이 생길 때, 나는 그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우리는 타락이 이 세상에 가져다 준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는 상실은 죄에 빠진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더 많은 진실을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동시에 구속주이시다. 그의 일하시는 방식은 선하게 창조된 질서 속에 인간이 도입한 악에서조차 선함을 가져오는 것이며, 또한 상실을 통해서도 우리의 부서진 몸과 영혼 속에 생명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우리를 지금도 빚어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상실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려고 애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상실을 통해 주시려고 준비한 선한 무언가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런 희망은 손상과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준다. 욥의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는 상실 이후의 회복의 그림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회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렇기에 계시록의 마지막이 단지 새 하늘과 새 땅의 건설 및 더 이상 애통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없다는 보장(계 21:1, 4)만이 아니라, “만국의 치료”까지 덧붙여서 끝나는 이유이다(계 22:2). 어떻게든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상실을 연결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존재로, 상실이 없이는 결코 될 수 없는 존재로 우리를 만드신다. 나는 대니 형이 아직 살아 있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암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나의 결함을 드러낸다. 나는 하나님이 대니 형의 삶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보지 못한다. 하나님은 대니 형을 육체적 고통과 죽음을 통해 죄와 질병, 그리고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난 더 나은 상태로 인도하셨다. 왜냐하면 대니 형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은 또한 대니 형의 죽음을 사용하여 나를 빚으셨다. 하나님은 그 죽음을 사용하여 나를 구속하고 또 거룩하게 하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내 안에서 성취하신 일이 지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비하게도 나의 상실을 지우는 것은 나의 유익을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상실에 직면했을 때 나는 울면서 발버둥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분의 백성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하나남의 방법을 받아들여 소망에 매달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절뚝거리고 걸으며 비틀거리더라도 말이다. 원제: Learning to Live with Lo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생활
건강
고통의의미
상실의유익
남북전쟁
부활생명
COVID
욥기주석
도둑의귀환
불신자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사랑의 참된 의미
by Alex Duke
2021-08-11
그리 오래 전이 아닌데도 마치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 오바마가 대통령이던 시절, 그는 이런 트윗을 남겼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리트윗하세요. #사랑은 사랑이다.나는 동성 결혼에 대한 교훈이나 도덕성에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단지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한 더 큰 대화의 출발점을 삼기 위해서 오바마 전 대통령의 트윗을 언급한 것이다. 인기도 있고 트윗하기에 좋은 문장이지만, “사랑은 사랑이다”라는 말은 사실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말하는 사람이 가진 기존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는 말이다. 사랑은 장난감이 아니다물론 “사랑은 사랑이다” 식의 조잡한 사랑의 정의는 진정성 및 자아 실현과 같은 미덕이 지배하는 오늘날 시대 정신(zeitgeist)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제 사랑의 중재자가 되었고 사랑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법과 제도의 가식적인 방해와 타인의 신비한 의견을 뛰어넘어 나무랄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언어 사용은 중요한 개념을 확장시키고 또 확장시켜 완전한 주관주의로 바꾼다. 그 결과는? 진정한 의미와 무게가 사라진 사랑은 이제 훨씬 못한 무언가, 인간이 만들었기에 불안하고 심지어 변덕스러운 대체물로 채워진다. 그래서 사랑은 결국 특별한 것 하나 없는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고, 그럴수록 진정한 사랑에 관한 대화는 더욱 어려워졌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나쁜 거래를 했다. 업그레이드하겠다고 정비소에 차를 맡겼지만 실상은 그만 고물차를 몰고 나오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 자신부터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이 틀린 점에 관해 정확하게 지적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 성경이 사랑에 관해서 말하는 다섯 가지 사실이 있다. 1.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우리가 사랑에 대해 인식해야 하는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은 오로지 하나님에 관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사랑은 삼위일체 창조주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을 통해 이런 사실을 드러내셨다. 때때로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리는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현재와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됨과 사랑을 주시며 피할 수 없는 세상의 미움 가운데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시기를 간구하신다. 예수께서는 또한 자신을 위해, 특히 임박한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몇 구절 후에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잠시 여기서 멈추고, 당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사실, 존재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상상해보라. 사람도, 장소도, 또 사물도 없다.무엇이 있는가? 예수님에 따르면, 뭔가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한 사랑이다. 아들과 그 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없이는, 아버지와 그 영을 사랑하는 아들이 없이는,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하시는 영이 없이는, “창세 이전”부터 있었던 이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리는 사랑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그 대답을 찾아야 하고,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기초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2. 사랑이 땅으로 내려오시다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새하얀, 사랑의 핵 그 자체이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있다.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부메랑”이 되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우리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그의 아들을 희생하셨다. 성경에서 사랑은 대속의 희생과 얽혀 있다. 우리는 이 연결의 정점을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발견한다. 십자가는 아들이 치른 희생의 증거이다. 빈 무덤은 아버지께서 그의 희생을 받아들이셨다는 증거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3. 사랑은 이웃에게 퍼진다사랑에 관한 성경의 핵심적 가르침은 사랑은 수직적이며, 이는 주로 하나님과 사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하나님은 실재하는 수직적 사랑의 존재에 대한 시험으로 수평적 명령(“이렇게 하라”)을 사용하신다. 즉, 수평을 통해 수직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희생적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35).빌립보서 2장의 서두에서 바울도 같은 말을 한다. 여기서 바울은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를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결한다. “같은 마음을 품는 것”과 “같은 사랑을 갖는 것”은 우리를 오로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킨다. 그분은 모범을 보이셨다. 사랑과 겸손을 관해서 그는 선구자이다. 계산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희생적으로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4. 사랑은 왕에게 순종한다또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바로 다음에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니라”는 말씀이 따라오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의 설명은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 속에 권위의 요소를 도입했다. 이런 사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전반과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아직까지 새 몸으로 영화롭게 되지 못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Christians not-yet-glorified)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권위가 실종된 사랑에 대한 정의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기에 이러한 대조는 강조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그의 선하신 권위와 주권 아래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죄라는 신용 카드를 엄청나게 쓰고 아버지가 그 빚을 갚아주기만 바라는 식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의 삶은 그런 게 아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죄와 거룩함에 대한 우리의 생각(disposition)이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 이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가 이루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것이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의 말하는 요점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왜 그런 건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 때문이다. 아무런 구속 없는 내 자신의 자유에 집착하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시나리오에서 꿈꾸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인 신기루를 바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인이 있다. 그 주인이 가혹하고 변덕스럽고 도무지 기쁘게 할 수 없는 존재(죄처럼)인지, 아니면 은혜롭고 변함없고 신뢰하는 존재(하나님처럼)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의 왕은 우리가 그의 통치 아래에서 살도록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5. 사랑은 천국을 꿈꾼다마지막으로, 사랑은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다. 사랑은 단지 “지금”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변할 수 없는 구원을 서로 상기시키고 또한 끊임없이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약속된 예수님의 재림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사랑해야 한다. 두 번째로, 회심은 실제적이고 그리스도인은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필요할 때 지체없이 죄의 심각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서로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서로를 거룩함의 자리로 격려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나 자매가 나의 죄를 놓고 나를 권면할 때, 비록 그 과정이 만족스럽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죄함이나 원망에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비롯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권면이 비록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내 속에 자신감을 억누르며, 때로는 논쟁적으로 반응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랑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대립은 특히 비기독교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모든 면에서 거짓 그리스도인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당히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은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지옥을 예약한 비기독교인에게 그들이 맞을 영원한 상태에 관해 경고함과 동시에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내세움으로써 오늘도 “천국을 소망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만약에 비기독교인이 이 기사를 읽는다면, 나는 대환영이다. 그들에게 이 글이 아마도 당혹스럽고 대립적이겠지만, 그만큼 또한 솔직하고 매력적이라는 사실까지 보기를 바란다. 이와 유사하게, 기독교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함과 동시에 지금도 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기독교인을 향해서도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붙들라고 격려함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반응에 따라 우리는 그들의 회개를 함께 기뻐하거나 또는 마태복음 18장과 고린도전서 5장에 나와 있는 권면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도무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경우, 그 형제 또는 자매를 공동체에서 퇴출함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영혼이 주님의 날에 구원받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흔히들 권징이라고 부르는 이런 과정조차도 사실은 천국을 향한 사랑의 모습이다. 웅덩이와 바다이 세상과 미국의 전 대통령이 말하는 사랑이 틀린 건 아니다. 사랑은 사랑이다. 그러나 이 자기 암시적인 문장이 말하는 사랑의 진짜 의미는 인간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기원, 즉 사랑은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이 아닌 외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두 번째로, 그분은 아들의 희생을 통해 그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 사랑이 조건적이 아니며 강권적인(authoritative) 이유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한 성령을 통해 필요한 것을 그때 그때 우리에게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 즉 신자와 비신자, 그리고 나아가서 죄에 빠져있다고 고백하는 신자까지도 사랑하는 방식을 바꾼다. 성경은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사랑은 우리의 기대를 높이고 또한 우리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놓는다. 이 세상은 아직 웅덩이에서 뒹굴고 있지만, 우리는 저 바다를 그려가고 있다. 원제: Love Is Not Whatever You Want It to B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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