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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는 대계명과 게임 체인저들
by 김형익
2021-08-10
한 달 전, ‘게임 체인저(the Game Changer)’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나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그 다음 이야기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한 서기관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대답하셨다(막 12:28-31). 이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마태복음의 병행본문에서(마 22:34-40), 주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달려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 물었던 서기관은 예수님의 대답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것을 자신의 대답에서 보여주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로군요!(막 12:33)” 누가복음의 병행본문은(눅 10:25-28) 주님께서 부연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들려준다(눅 10:29-37). 이 비유에서 주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표면상의 이유는 분명하다. 제사를 위해서였거나 의식법적으로 정결함을 유지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제사법과 정결법을 위해 대계명을 희생했다는 점에서 틀렸다는 점을 보여주셨다. 이런 일은 지금도 적잖이 일어나고 얼마든지 우리들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와 교제, 기도와 봉사, 구제와 선교보다 더 중요하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대계명의 우선순위를 흔들거나 그 무게를 경감하거나 그 농도를 희석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취와 성공을 추구하면서 경쟁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은 너무나 도전적이며 결코 녹록한 계명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분리시킴으로써 대계명의 부담을 덜어 보려는 시도를 하려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선택사항이고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주님은 이 둘을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마 22:39).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나뉠 수 없다.세상은 우리에게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는 말도 듣는다. 좋은 대학, 높은 연봉과 평생 보장 직장, 멋진 결혼과 안정적인 가정, 그리고 안락하고 넓은 집, 좋은 차, 조기 은퇴와 멋진 은퇴 계획은 이 세상의 게임에서 포기할 수 없는, 모두가 선망하는 중요한 가치들이다. 이것을 얼마나 성취하느냐가 인생의 승패를 결정한다. 이것을 위해서 모든 가치를 희생하고 달려간다. 영혼 마저도! 이것이 세상의 게임의 법칙이다. 내가 너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일까? 사실, 세상은 이것보다 더 터프(tough)하고 험악하다. “실제로는 영화보다 더 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제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신자도, 이 세상의 게임이 진행되고 있는 그라운드에서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신자들이 더 이상 이 세상의 게임이 아니라 새로운 게임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말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되 더 많이 사랑하는 게임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신자들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이 소명을 부여받는다. 하늘에서가 아니라,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동안에,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을 따라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한 게임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다.누가복음 6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눅 6:27-37).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만일 신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세상 죄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누가복음 6:38).” 이것은 좀 더 디테일한 새로운 게임의 법칙이다. 우리가 취사선택하거나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의 말씀이다. 당신은 주님의 이 말씀을 알고 기억하는가? 주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신자인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자세히 말씀하신다.그러나 문제는, 이 땅에서 신자들이 여전히 경쟁과 승리의 게임에 몰두한다는 사실에 있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드리고 예배와 봉사에 열심을 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서기관의 대답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영신학은, 여전히 세상의 게임에 몰두하며, 그 게임의 법칙을 따라 사는 신자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며 그들의 사욕을 채워준다. 신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매 주일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세상의 게임을 하며 살아갈 유혹을 직면하는 성도들에게 매주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거룩한 소명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게 편지를 쓸 때, 이렇게 로마의 성도들에게 거룩한 소명을 일깨워주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사도 요한은 어떻게 그 일을 했는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한1서 3:16–17).”매주일, 복음의 말씀으로 일깨움을 받는 신자가 이 세상의 게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새로운 게임을 하기 위해, 점검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덜 고생하고 좀 더 편하고 좀 더 안락하게 살겠다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이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거나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이 기준이 작동하는 한, 신자의 소명은 관념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이 기준이 뭐가 문제인데?”라고 반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이 기준이 진짜 숨어있는 문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을 따라 살도록 새로운 게임으로 부름을 받은 신자들이 그 소명을 이루고 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문제가 여기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삶을 눈여겨보았는가? 그들이 조국을 떠나 하나님이 부르신 땅, 그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소명을 위해 덜 고생하고 더 편하고 더 안락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부르신 소명을 따라 살겠다고 한 순간, 그런 기준들은 힘을 잃고 만다. 덜 고생하고 더 편하고 더 안락하게 살겠다는 기준을 포기하지 않은 선교사가 있다면 당신은 그를 존경하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신자가 모두 해외선교사로 부름을 받지는 않지만, 신자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대계명과 모든 말씀에 비추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소명은 이전의 세상의 게임을 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포기할 수 없는 암묵적 기준, 덜 고생하고 더 편하고 더 안락하게 살겠다는 기준을 내려놓게 만든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소명을 따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게임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신자는 이 세상의 게임 체인저로 오셨던 주님을 따라 세상의 게임 체인저들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게임체인저
대계명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무한경쟁
신자의소명
우선순위
게임의법칙
번영신학
강단
결혼 생활을 힘들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by Darren Carlson
2021-07-27
우리 부부가 결혼 생활을 통해서 하나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건 어떻게 해야 서로를 향해 죄를 지을 수 있는가이다. 목소리를 어떻게 내어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 어떤 단어를 써야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지도 잘 알게 되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내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죄에 빠진 우리 자신의 현실을 훨씬 더 잘 보여준다.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서로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지도 잘 안다. 어떻게 해야 서로를 더 잘 섬기는 지도 알고 있으며, 또한 지금도 매일 새롭게 그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누군가로부터 아직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말 그대로 은혜이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도전이다. 성령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직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 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부부 관계가 좋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 문제를 진단받기 위해서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 세 가지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였는데, 그건 정말로 결혼 생활에 대해서 그동안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놀라운 사실을 드러나게 했다. 이 세 가지 질문을 이 시간 함께 나눔으로 다른 부부도 우리처럼 결혼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1. 같이 사는 것을 힘들게 하는 점이 무엇인가?누구나 다 개인적인 특성 또는 선호하는 게 있기 마련이고, 비록 죄는 아니지만 그건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다. 이런 개인적 특징들이 가져다주는 문제는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될 때 더 가중되기 마련이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이것이었다. “나는 잘 잃어버려. 물건 놔 둔 걸 잘 못 찾아.” 이 말을 하고 두 시간이 지난 후, 우리 부부는 렌트카로 갔는데, 가서 보니까 내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고 생각한 차 열쇠가 없는 게 아닌가? 엄청나게 정리 정돈하는 내 아내에게 나의 이런 점은 단지 짜증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어둠 속 3킬로미터를 걸어서 호텔로 돌아갔다. 아내는 그날 내게 참으로 인자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나의 이런 약점을 어느 정도까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아내는 너무 잘 안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결국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감출 수 없다는 의미이다. 교만에 가득찬 우리는 종종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모든 문제는 다 내 배우자의 약점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심하라.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제일 싫어한다(잠 16:5; 약 4:6).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고전 13:4). 겸손은 우리로 하여금 배우자를 향해서 심하게 대하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도록 한다. 또한 배우자를 더 잘 섬기고, 오해의 소지를 일으킬 일을 최대한 줄이게 하며 또한 상대로 하여금 관심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한다. 죄가 아닌 약점을 고백함으로 서로에게 건강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게 되며, 배우자는 당신이 스스로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성장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것도 보게 된다. 이 질문을 통해서 나는 아내를 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엡 5:33), 아내가 힘들어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다. 2. 당신의 배우자를 향해 어떻게 죄를 짓는가?이제 문제의 본질로 들어가도록 하자. 그건 죄가 당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8-19). 죄를 짓게 하는 건 배우자가 아니다. 배우자의 도움이 없어도 누구나 죄를 짓는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우리를 몰아부치고,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싸움과 비방만이 남게 된다(약 4:2). 그렇기에 우리는 이 죄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야 한다. 아내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은 잘 인정하면서도 특정한 죄를 콕 짚어 말하는 데에는 아주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그녀 말은 맞았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다라는 식의 고백이 아니라, 죄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당신의 죄에 빛을 비추는 길이다(요1 1:7). 잠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가 누구인지 내 인생에 비춰가며 한번 살펴보자. 어리석은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긴다(잠 12:15)당장 분노를 나타낸다(잠 12:16)방자하여 스스로 믿는다(잠 14:16)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긴다(잠 15:5)돈을 낭비한다(잠 17:16)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한다(잠 18:2)다툼을 일으킨다(잠 20:3)지혜를 업신여긴다(잠 23:9)스스로 지혜롭게 여긴다(잠 26:5)자신을 믿는다(잠 28:26)다툼에는 그침이 없다(잠 29:9)노를 다 드러낸다 (잠 29:11)바울을 인용해도 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이렇게 말해도 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38). 그런데 당신이 자신의 죄를 콕 집어서 말할 수 있는가?3. 결혼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는가?모임을 인도하고 나면 나는 언제나 모임 과정에서 토론한 내용을 바탕으로 행동 계획을 세워준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항상 그 행동 계획에 동의하는데, 그건 이미 토론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남편으로서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이 내 아내를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우리의 결혼도 그리스도로 인해 그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기에(골 1:16), 결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세상을 닮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롬 12:1-2)도 물론 중요하다. 또한 이 죄악된 본성에 빠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갈 5:13)도 나름 중요한 일이다. 이런 말을 하는 건 다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백과 다짐이 삶에서 드러날 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 부부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건 어쩌면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물건을 제자리에 놓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서로의 약점을 향해 최대한 눈을 감겠다는 결심이 될 수도 있다. 그건 또 자녀들 앞에서 서로에게 규칙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어쩌면 그건 비난 대신 질문을 던지고, 비난 대신 칭찬을 하는 게 될 수도 있다. 또 가까운 친구를 불러서 우리의 결혼 생활을 점검 받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한 결혼배우자와 뭔가 진정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이 세 가지 질문에 철저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다. 이 질문들은 단지 출발점이 되는 것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하고 그것을 배우자와 나눌 때, 부부가 서로 동의하는지 충분한 토론을 나눠야 한다. 함께 사는 것을 힘들게 하는 항목에 당신이 적어놓은 어떤 내용이 배우자가 당신에 대해서 평소 하는 말과 일맥상통하는가? 예를 들어서, 당신이 “나는 물건을 잘 잃어버려”라고 하는데 배우자가 이렇게 대답한다면? “상관 없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까지도 배우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배우자가 전혀 신경도 안 쓰는 부분 때문에 왜 당신은 함께 사는 게 힘들다고 느낀 걸까?) 이 모든 것의 핵심은 결국 결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남편이라면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을 위해 보여준 사랑을 더 많이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엡 5:25). 아내라면 더 기쁘게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엡 5:24, 33). 복음 중심적인 결혼이라고 완전한 건 아니다. 그러나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결혼은 서로의 약점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 또한 죄를 서로에게 고백하고 서로를 기꺼이 용서한다. 당신이 지금까지 말한 질문들을 놓고 토론할 때, 무엇보다 당신 자신과, 또 당신의 배우자, 나아가서 당신네 부부를 향한 하나님의 헌신을 기억하도록 하라. 원제: What Makes Any Marriage Difficult: Three Questions to Help Yours Grow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가정
결혼
결혼생활
장애물
부부관계
배우자약점
죄인고백
하나님께영광
복음중심적결혼
용서
십자가로 두려움과 직면하기
by Chris Castaldo
2021-07-23
“도로시 만세! 사악한 마녀가 죽었다!” 도로시는 무서운 마녀에게 물 양동이를 끼얹어 가까스로 물리쳤다. 마녀는 천천히 녹아 내렸다. 여섯 살 어린 마음에 이 장면을 보면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댔다. 때마침 있던 양동이 덕에 재앙은 모면했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녀의 막대기를 얻은 뒤 도로시는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오즈 마법사의 궁정으로 들어갔다. 마법사의 거대한 머리가 화염과 연기, 뇌성 가운데 고함을 치며 맞이했다. 여동생과 나는 황급히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두려웠지만 오즈의 영광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태어난 후로 이처럼 충격적인 일을 경험해 본적이 없었다. 도로시가 오즈의 마법사를 쫒아낼 만큼 큰 물 양동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때, 도로시의 작은 개, 토토는 커튼을 잡아 당겼다. 문이 열리자 흰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커튼 뒤에 있는 남자에게 신경쓰지 마.”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말했다. 하지만 맙소사, 그 사람은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아니라 마이크를 든 나이든 남자일 뿐이었다. 사칭극은 끝이 났고, 도로시의 빨간 루비색 구두는 그녀를 곧 집으로 보내 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쉽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정도의 감금은 오랜 외상을 남긴다. 미셸 몽테뉴 말에 따르면, “내 인생은 끔찍한 불행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일은 거의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려움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점령할 정도로 정신과 정서가 작동하게 하는 기기를 지배한다.성경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훈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안심하라 …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라거나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은 우리를 옥죄이기 매우 쉽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시 ‘더 이상 두려워마오’처럼 종종 우리의 귀에 울린다. 번쩍이는 번갯불을 더 이상 두려워마오모든 무서운 천둥도 두려워마오중상모략 비난을 두려워마오그대는 기쁨도 슬픔도 끝냈다오모든 젊은 연인들, 연인들은 누구나그대에게 맡기고 흙으로 돌아오시오이 시는 제목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길을 암시하기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어떤 희망을 마음에 그렸다면 그것은 이번 생은 아닐 것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그는 당신을 무덤으로 데려간다.그러나 신약 성경은 죽음에 대한 다른 개념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말씀하셨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시작이자 공포가 힘을 잃어버리는 통로이다. 어떤 모습으로든 두려움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로 우리를 맞이하지 않는다. 한 가지 예로, 1505년 7월의 어느 날, 마틴 루터는 말을 타고 집에서 학교로 돌아오는 도중에 벼락을 만났다. 빠르게 움직이던 구름은 그의 여행길 초반에 가벼운 비를 내렸지만 빗줄기는 갈수록 거세졌다. 번개가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루터 주변 땅으로 내리치기 전에 하늘이 번쩍이고 울렸다. 위험할 정도로 너무 가까이 닿아서 그는 공포에 질려 땅으로 떨어졌다. 자연의 분노에 루터는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성모 앤! 수도승이 되겠습니다.”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루터가 경험한 두려움이 그의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했음을 깨닫는다. 이 예시처럼 우리는 두려움의 영향으로 세상에서 내몰린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실존에 전환점이 될만큼 중요할지 모르지만, 더 거대한 마지막 결전을 희미하게나마 반영할 뿐이다. 시인 로잔나 엘리너 레프로혼(Rosanna Eleanor Leprohon)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피곤에 지친 제자들이 모두 잠든 사이홀로 깊은 고통 속에 있었다함께 기도할 그 누구도 없고,같이 울어줄 이 없이그 앞에 놓인 높이 들려야 하는, 죽음의 고통 십자가 수많은 죄인들의 영혼을 얻기 위해 죽어가는 겟세마네 동산! 하나님만이 하시는 경험고통스럽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징표가 남겨졌고상처받은 마음이 더 강해졌고, 죄의 짐에 눌려 절망에 빠져 죽었다예수님은 앞에 놓인 죽음을 정면으로 맞이하여 십자가를 견디셨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두려움을 경험하셨다. 영원한 과거로부터 아버지와 완벽한 교제를 하던 그분은 버림받았다. 신의 진노는 끊임없는 분노로 쏟아져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룩함의 공포에 의해 가려졌다. 그 정죄의 무게 아래서 예수님은 외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5-46).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때문에, 그 저주를 우리를 위해 견디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어둠 속에 내 던져졌다.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더 이상 아버지로부터 버려질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아버지께 버려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원제: Confronting Fear with the Cross출처: www.ligonier.org번역: 송유희
생활
감정
심판
루터
십자가
두려움
구원
은혜
아이가 자라서 보아스가 된다
by Rachael Starke
2021-07-22
2년 전쯤 내 SNS 뉴스피드에 끔찍한 성적 착취로 고통을 받는 여성들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던 적이 있다.아프리카에서 온 난민 여성들은 자기 나라에서의 성폭력을 피해 탈출했지만 이민국 직원들에 의해 강간을 당하거나 인신매매로 팔려나갔다.내가 일하는 실리콘 밸리의 언론 매체 두 곳의 보도에 의하면 첨단 산업에 종사하는 많은 여성들도 동료들에 의해 성희롱을 당하거나 유혹에 노출된다고 한다.그리고 친구들과 사석에서 나눈 대화에서, 자기 어린 자녀들이 포르노를 본 후에 서로 성적인 장난을 쳤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다.슬프게도, 오늘날 이러한 예들은 넘쳐난다.나는 엄마이고 딸이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딸들에 대한 염려를 이겨보려 하는 나의 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믿음의 기반이 없는 엄마들은 이렇게 성적으로 망가져 있는 문화에서 성인이 되기까지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더더욱 모를 것이다.문화: 악당인가 구세주인가?자신 역시 성폭력의 희생자이기도 한 조디 알라드(Jody Allard)라는 미혼모가, 성적인 폭력은 실재하고 이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청소년기에 있는 자기 아들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에 관해 글을 썼다. 알라드는 아이들이 엄마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문화가 이미 아들들에게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고 결론지었다.알라드가 믿기로는 자기 아들들의 사고방식은 외면적으로 문화의 영향이고 해결책이라는 것들 역시 외면적으로 공교육을 통해 받은 것들이다. 알라드는 자신의 노력이 먹히지 않기 때문에 낙담해있고 결국 이렇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여가고 있다. 그 결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들조차 근본적으로는 알라드 자신에게 안전한 존재가 아닌 셈이다. 알라드의 글에 대한 반응은 익히 봐 왔거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보수 진영에서 재빠른 비난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나는 알라드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성폭행과 성적 착취를 경험한 수많은 여성을 만나봤다. 나 역시 실리콘 밸리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내 자신도 성희롱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알라드, 내 자신, 또는 다른 여성들에게 있어 그런 기억을 털어내 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행한 범죄의 대가가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정의가 구현되지 않을 때, 사람들이 그런 범죄를 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그런 범죄로 고통 받는 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가 나를 압도한다. 하지만, 알라드와 내 경험이 유사하긴 해도, 문제의 뿌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의 진단은 서로 다르다. 향후 상황에 대한 예측에 대해서도 생각이 다르다. 알라드는 가부장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인간 본성을 “안전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의 시각은 다르다. 혹자는 알라드의 관점이 너무 부정적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충분히 부정적이지 않다는 데 그 문제점이 있다. 우리 모두는 “안전하지 않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실로 엄청난 악을 행할 수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볼 수 있기에, 해답 역시 있음을 분명히 믿는다. 우리를 안전한 존재로 만들 뿐 아니라 우리를 진정으로 선하게 만들 수 있는 해결책 말이다.오래된 문제구약에서 보아스만큼 명확하게 이 소망을 보여주는 이는 없다. 그는 오늘날의 어두움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시대의 문화에서 자랐다. 사사기 19장은 보아스의 고향을 뒤덮고 있던 영적 어두움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한 레위인과 그의 베들레헴 출신 첩이 길을 가던 중 베냐민 족속의 땅에 속한 성읍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한다.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지만 그들을 집에 들여 유숙케 하려는 이들이 없다. 마침내 한 노인이 거리에서 유숙하지 말라며 그들을 자기 집으로 들여 묵게 한다. 과연, 거리에서 밤을 보내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HBO에서나 볼법한 저속한 판타지 드라마에 나오는 반전이 등장하는데, 정욕에 눈이 먼 군중이 집을 에워싸고 레위인을 성폭행하기 위해 그를 끌어내라 요구한다. 군중들이 흩어질 기미를 안 보이자 그 레위인은 자기 첩을 대신 그들에게 내준다. 그들은 밤새 그 첩을 강간하고 능욕하기를 아침이 올 때까지 계속하였다. 동틀 때에야 그들은 그 여자를 풀어주었다(삿 19:25). 해가 떴을 때 그 여인은 문 앞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에 그 레위인 남편은 그녀의 시신을 열두 덩이로 토막을 내 한 지파당 한 조각씩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 얼마나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를 각 지파가 보게 하였다. 지배 문화에 대항하는 자보아스가 자랐던 그 독기 서린 문화를 고려할 때, 그 역시 그가 나고 자란 문화를 그대로 본받으며 자랐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보아스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보아스는 부유한 지주이다. 룻이 도착했을 때 보아스의 집에서는 추수가 한창이다. 추수 직전 키 크게 자란 밀밭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추수 일꾼들이 여자들을 성폭행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남편이나 아버지가 있는 여자들은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과부들이나 이방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과부인데다 이방인이기까지 한 여인이 밭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보아스는 말과 행동으로 그 여인의 필요를 공급한다. 보아스는 룻에게 물을 주고 그 자신 및 그의 하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보아스는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한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룻이 자기 자신과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며칠이 아닌 수 주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의 이삭을 주워갈 수 있도록 해준다. 룻이 보아스가 베푼 친절에 대한 감사와 놀라움으로 그의 발 아래 엎드리는 장면을 그려보라. 보아스가 한 대답을 읽을 때마다 나는 눈물이 난다.“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 3:10–11)룻의 희생과 믿음에 대해 보아스가 한 축복의 말은 순전하기 그지없다. 보아스가 한 말을 보면 나그네를 선대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그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 자체로 명백한 대항 문화적 가치였다. 하지만 룻의 사연이 보아스를 깊이 감동시켰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자기가 살던 땅을 떠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피난해 온 여인들은 룻 외에도 많다. 보호와 믿음의 유산보아스와 룻이 만나기 수십 년 전에 여호수아는 정탐꾼 둘을 가나안 경계를 넘어 보내 그 땅으로 진군해 들어가기에 앞서 그곳을 미리 살펴보게 했다. 그들은 라합이라는 가나안 여인의 집에 머무는데, 라합은 자신의 몸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던 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던 여인이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가족을 구해줄 것을 간청한다. 그들은 라합이 먼저 그들을 보호해준다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지켜줄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맹약을 지킨다. 그날 이후 라합은 이스라엘 땅에 거하고, 지체 높은 이와 결혼해 아들까지 얻는다. 보아스가 바로 그 아들이다.라합이 자기 아들에게 그 레위인의 첩의 끔찍한 죽음과 시신 훼손에 관한 일을 말해주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삿 19:30). 라합은 그녀 자신의 상황 안에서 아들 보아스에게 그 일을 말해준 것이다. 다시 말해, 남자들에 의해 학대 받는 여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이스라엘의 참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어떻게 피난처가 되어주었는지, 그리고 결국 보아스가 어떻게 그 가족 안에서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룻에게 한 보아스의 말은 그가 자기 어머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보아스의 행동을 결정해준 것은 단순히 그가 받은 교육이 아니다. 그 자신 역시 자기 모친 라합의 피난처가 되셨던 하나님, 자기 백성을 불러 자신을 본받으라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룻에게 복 주시기를 구하며,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모친에게 주셨던 그 보상을 구현하는 사람이 된다. 이 보상은 보아스나 룻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두 사람을 통해 그들의 손자인 다윗에게까지, 그리고 그들의 후손 예수에게까지 계속될 것이었다.. 보아스를 본받아보아스가 살았던 그 문화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었다. 보아스와 그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법과 말씀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서 그 문화에 저항하던 이들을 통해 바로 그 문화의 한복판에서 실행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그의 신실하심이다. 보호하시고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남성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드려 여성을 위한 피난처와 보호자가 되어주는 남자들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이다. 그런 남자들은 궁극적으로 죽기까지 자기 육체를 드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본받는 이들이다. 그런 남자들은 우리 문화가 아닌 우리 구주를 본받는 이들이다. 알라드는 자신이 쓴 글에서 자기 아들들이 본받을 만하고 자기 자신이 믿을 수 있을 만한 남자들이 없다고 탄식한다. 알라드가 보아스의 이야기를 읽어봤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보아스의 후손인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어봤으면 좋겠다. 예수님은 그저 안전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 피난처와 구원을 궁극적으로 체화하시는 분이시다. 원제: Boys will be Boaz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보아스
라합
룻
예수님
피난처
구원
가정
양육
지배문화
나그네선대
결혼을 재정의 한다고요?
by Joe Carter
2021-07-20
아브라함 링컨은 다음의 질문을 던지는 것을 좋아했다. “만약에 개의 꼬리를 다리라고 부른다면, 개 다리는 몇 개가 될까요?” 그의 질문을 들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섯 개요”라고 외쳤다. 그러면 링컨은 정중하게 “아닙니다”라고 말하고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답은 네 개에요. 꼬리를 다리라고 부른다고 해서 꼬리가 다리가 되는 게 아니니까요.”링컨의 질문을 들은 사람들처럼, 요즘 기독교인을 포함한 일반 시민들은 어떤 단어의 정의를 바꿀 때 그 단어의 본질(essence)까지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속는 것 같다. 여기에 관한 가장 큰 사례가 동성 결혼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결혼의 정의를 바꾸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성애자의 관계를 “동성 결혼”(gay marriages)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 결혼이 진짜 결혼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의 생각은 개의 꼬리를 다리라고 부르면 꼬리가 다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문제가 많다. 우리가 살펴본 꼬리/다리 사례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변화를 고려해보자. 개의 꼬리는 다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개는 꼬리를 가지고 달리거나 수영을 하거나 또 가려울 때 몸을 긁지도 못한다. 꼬리와 다리 모두를 다리라고 부르려면, 꼬리가 다리와 다른 모든 요소를 포기해야 한다. 다리에 관한 새로운 의미는 이제 개의 발이 다리 끝에 붙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기존 개의 형태(form)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 개가 다리를 사용해서 서 있다고도 말할 수 없으므로 기존 개의 기능(function)까지도 바꾸었다. 다른 말로 하면, 꼬리를 재정의함으로 기존 개의 다리가 가진 형태와 기능을 꼬리에게 새롭게 부여하는 게 아니라, 기존에 개의 다리가 가졌던 특정한 기능을 없애버리고 대신 다리를 그냥 몸통에 붙은 부속물로 일반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을 재정의하려고 할 때 같은 일이 발생한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하나 됨이라는 특정한 형태가 필요하다(창 2:24). 그렇기에 이 용어를 동성의 하나 됨에 적용하려고 할 때 우리는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뿐만 아니라 결혼이 수행해야 할 기능까지 변경해야 한다.예를 들면 동성애 파트너를 가진 사람 중 적지 않은 비율이 일부일처제 또는 성적 배타성을 결혼의 필요한 요소로 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여전히 일부일처제라는 용어를 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단어조차 재정의해서 “모노가미쉬”(monogamish)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모노가미쉬는 정서적인 면에서는 오로지 한 사람하고만 친밀감을 나누지만, 성적인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과 또는 그룹 섹스까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결혼의 정의를 바꾸어서 동성 연합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결혼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던 모든 기능(예: 정조를 지키는 것)을 오히려 배제하기 때문에 결혼을 더 포괄적인 것이 아닌 더 배타적인 것으로 만든다. 결혼의 재정의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를 인식한 어떤 기독교인은 이제 결혼은 투 트랙으로, 그러니까 국가가 정의하는 결혼과 교회가 정의하는 결혼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시각은 결혼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결혼의 본질적 특성을 바꾸는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결혼이라는 제도는 애초에 국가나 교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고, 또 거기에 속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R.C. 스프로울(R.C. Sproul) 박사는 2013년 6월 테이블토크(Tabletalk)에 이렇게 썼다.결혼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제정하셨다. 즉 결혼은 사회적 관습이나 금기를 따지는 인간의 머리에서 임의로 나온 게 아니다. 결혼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발명되었다.교회, 국가 그리고 결혼이라는 이 세 가지 기관은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또 서로 의탁적인 관계이다. 서로의 적법성을 인정할지에 대한 여부를 결정할 수는 있지만, 서로의 경계에 정확하게 선을 그을 수는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관계는 국가와 국가 사이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미국 정부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가자 지구(Gaza Strip)를 배제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국경을 좁히는 방식으로 국가를 재정의할 수는 없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정의한 대로 국가로 인정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 나라의 정당성을 거부해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국가가 결혼을 재정의할 권한이 없지만, 복음 증거를 위해서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법률적인 허용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도가 나쁘지 않을지 몰라도, 그들은 사실상 지키고자 하는 복음 그 자체를 훼손하고 있다. 결혼을 재정의하라는 법에 굴복함으로 그들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 하라고 한 일을 반대로 하는 셈이다. 그들은 도리어 게이와 레즈비언 친구를 비롯한 이웃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행동을 하라고 부추기는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시 5:4-5; 롬 1:18).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거룩하지 않은 행동에 오래 참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행동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도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이 된다. 이웃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제외되기를 바라는 당신은 결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엡 5:5).교회가 참된 복음을 말할 용기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동을 보고 참기만 하면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을 알면서 “그냥 서로 어울리면서 사이좋게 사는 게 좋지”라는 마음으로 계속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야 하며(행 4:31), 타락한 사람은 어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내가 섬길 주인을 결정해야 한다. 지혜의 하나님인가 아니면 동성 결혼이라는 어리석은 우상을 만든 세상인가? 원제: Defining Marriage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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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동성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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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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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링컨
일부일처제
관습
Ligonier
게임 체인저
by 김형익
2021-07-12
언젠가 대학생 집회를 마친 후, 집회에 참석했던 형제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었다. 그는 3포를 아는지를 물었고 5포, 7포를 이야기했다. 당시 10년 넘게 미국에 거주하던 나에게 그 말들은 생소하기만 했지만, 나는 그 형제 덕분에 우리나라의 청년 세대가 겪는 고충을 조금 알게 되었다. 질문의 핵심은 “이런 암울한 현실을 사는 청년들에게 복음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었다. 이르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경쟁을 시작해서, 좋은 대학, 좋은 성적, 높은 연봉, 멋진 결혼식, 괜찮은 평수에서 신혼 시작하기, 멋진 차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은퇴 플랜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일평생 사는 동안 경쟁은 멈추지 않는다. 복음은 이런 끝없는 경쟁 사회 속에서 더 잘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는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라면 복음은 그다지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믿는 자에게 좋은 대학, 높은 연봉의 직장, 멋진 가정, 소위 ‘성공적인’ 삶을 약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이 죽어서 가는 천국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면, 이 복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특히 N포로 일컬어지는 암울한 시대적 환경에 서 있는 기독청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전제가 있다. 복음은 성공이라는 지상목표를 향하여 경쟁하는 세상 속에서 이 땅의 사람들이 몰두하는 그 ‘게임’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한다. 말하자면, 거듭난 신자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비록 이 땅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이전의 그 게임을 지속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회심 이전과 이후,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던 그 그라운드에서 살아간다. 그러니 이 그라운드에서 이전에 하던 그 게임을 계속 해야 한다고 느낄 뿐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 게임을 더 잘 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가지게 된다. 내게는 믿음의 힘이 있고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가? 그래서 소위 ‘고지점령론’같은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들이 한때 기독청년들에게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의 모토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의 고지(高地)에 올라 멋지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사실, 성경은 이런 생각들을 승인하지 않는다. 복음은 신자의 삶의 목적을 바꾸고 삶의 내용도 바꾼다. 이전의 삶의 목적은 성공이었지만, 이제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음으로써가 아니라, 기꺼이 패자가 되는 방식을 통해서다.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게임의 법칙도 바뀌었다. 가령,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신자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게임의 법칙—이김의 원리—을 설명해준다(마 5:3-10). 그것은 심령이 가난해져야 하고 애통해야 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런 게임의 법칙으로 살아간다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심령이 가난하면 무시를 당할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 온유한 자는 짓밟힘 당하기 일쑤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얻으며, 애통하는 자는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고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세상에서 하던 그 게임의 법칙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게임의 법칙으로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문제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 중첩된 시대를 살고 있고,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러나 신자는 눈에 보이는 그 게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인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믿음이라는 그 나라의 게임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고후 5:7). 신자가 살아가는 위치가 이러하다 보니, 때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을 적당한 선에서 살아가기가 너무나 쉽다. 적당히 심령이 가난하고, 적당한 선에서 그리고 최소한의 선에서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살아가려는 유혹을 받을 뿐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신자가 부름 받은 삶은 그렇게 해서 무시를 당하면 무시를 당하고, 짓눌리면 짓눌림을 당하고, 바보나 이상한 사회부적응자로 여겨지면 기꺼이 그렇게 여김을 받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신자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바,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의 상황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 된다(롬 8:35,37). 히브리서는 배교의 상황에 처해있는 유대-기독교회를 격려하기 위해서 쓰여진 성경이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들이 익히 아는 구약의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었는지를 말한다. 그들이 영웅이어서가 아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그렇게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았던 것은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 믿음 때문에 세상에 살면서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한 사람들임을 증명한다. 우리의 게임은 세상에서 승패가 결정되지 않지 않는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기대하는 믿음으로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게임을 하는 사람이다. 신자는 세상에서 더 높은 연봉과 좋은 직장, 넓은 집, 좋은 차를 얻기 위해 살지 않는다. 신자는 세상에서 얻는 보상만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알고’ 일하는 사람이다(골 3:24). 죽을 때 만기가 되어 찾는 하늘나라 적금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1세기 후반의 신실한 성도들이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히 10:34).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 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은 바로 ‘상 주심을 바라봄’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히 11:26).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의 결론부에서 거의 참을 수 없어 외치듯이 말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38).” 신자가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세상의 경쟁에서 더 나은 위치를 점하고, 성취를 이루고 성공을 구가하면서, “이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말하는 게임으로 우리는 부름을 받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세상의 법칙으로 살아가는데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복음은 세상이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공을 위하여 달려가는 그 게임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이다. 영끌해서 대출받아 좋은 집을 얻는게 이들의 단기적 목표가 아니다. 집을 가지고 못 가지는 것은 어쩌면 안중에 없다. 연봉과 직장, 멋진 결혼과 집과 차가 이들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새로운 인류다. 새로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게임의 법칙으로 말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십자가에 무력하게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골 2:15).” 이렇게 주님은 이 세상의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승패의 기준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다. 그분은 그렇게 진정하고 유일한 의미에서 이 세상의 게임 체인저(the Game Changer)가 되셨다. 그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 진정한 게임 체인저들이다.
영성
영적성장
N포세대
고지점령론
하나님나라
팔복
히브리서
게임
게임체인저
이미와아직
바쁨, 그리고 참 안식
by Kevin DeYoung
2021-07-11
수년간 마가복음의 이 본문이 내 마음을 압도했다.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막 1:35–39)예수님은 나를 놀라게 한다. 그의 성육신, 부활, 승천, 승귀(昇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들이 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삶에서 보이는 평범한 것들이다. 예수께서는 경솔한 말씀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하루도 낭비하지 않았으며,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으셨다. 나는 지금껏 예수님이 정말로 바쁘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만 바쁘셨다. 우리 대부분은 복음서 기록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예수님이 정말 바쁜 분이셨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마가가 자주 쓰는 단어 중 하나는 “즉시”이다. 3년간 예수님과 제자들은 정말 치열한 삶을 살았다.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가복음 1장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자마자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꾸짖고,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또한 밤늦게까지 각종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신다(1:14–34).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고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였다(3:20–21). 군중들이 늘 예수님께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항상 그를 찾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의 시간과 보살핌을 주셔야 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거의 매일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 같다. 예수님을 명상에만 빠져 사는 뭔가 신비로운 선생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예수께서 오늘날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사역하신다면 그 누구보다도 이메일을 많이 받으실 것이다. 사람들과 미디어가 예수께 몰려와 그분의 관심을 받으려 아우성일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겪는 인생의 어려움들을 모른 체하며 고고한 삶을 누리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히 4:15). 예수님 역시 죄가 될 정도로 바쁜 삶의 유혹에 노출되셨다. 하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다. 바쁘신 분이었으나 그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 듯 지내거나, 염려하거나, 짜증을 부린다거나, 교만해지거나, 시기하거나, 덜 중요한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셨다. 가버나움에 사는 이들이 모두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을 기다릴 때에도 예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기도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빨리 다시 사역을 시작하시라 종용했을 때 그는 다른 성읍으로 가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아셨다. 그는 많은 선한 일들을 하실 수 있으셨으나 반드시 그 자신이 그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계셨다. 예수께서 우선순위를 주도면밀하게 조정하셨다면 우리 역시 그래야 마땅하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집중하는 것을 우리의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일들이라고 해도 거절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또한 안식을 취하고자 애써야 한다. 약 5년 전, 나는 정기적으로 운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좋아했고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내내 달리기를 즐겼지만 세월이 흐르고 체중도 늘면서 운동을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구 한 명과 함께 철인삼종경기(triathlon)에 등록을 했는데 우리 둘 중 누구도 해본 적이 없던 모험이었다. 그래서 주일을 제외하고 주중에는 매일 수영, 자전거, 그리고 달리기를 하기 시작했다.놀랍게도, 정말 즐거웠다. 여전히 그렇다. 지난 5년간 내가 한 가장 뿌듯한 일 중 하나이다. 해야 할 일 목록을 내려놓고 운동을 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다. 내가 운동이 일종의 “안식”이라는 걸 배우긴 했지만, 당신이 실제로 안식하지 않는다면 운동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운동에 그리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새롭게 시작한 내 운동 분야에 대해 책을 많이 읽음으로써 부족한 부분을 보완했다. 수영, 자전거, 그리고 달리기에 관해 지난 5년간 적어도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그 책들이 말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운동을 해보려고 결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방해물은 의지력이나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바로 쉬는 것이다. 운동을 할 때 심장과 폐는 압박을 받는다. 근육 활동은 최대치가 되고, 심지어 미세한 파열도 생긴다. 운동 자체는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운동을 마치고 쉬는 그 때에 당신의 몸이 비로소 강해지는 것이다. 당신 몸이 아마 이렇게 말 할 것이다. “휴우, 힘들었다. 이쪽에 근육을 좀 더 만들고 다음번에는 지방을 더 태워야겠어. 혈액순환을 더 보강하고 폐활량을 늘려서 산소량을 증가시켜야지.” 프로 운동선수가 쓴 여섯 가지 훈련 법칙을 어떤 잡지에서 읽었다. 처음 법칙 세 개의 내용은 쉽게 말해 당신의 능력 이상으로 훈련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 법칙은 지금보다 더 많이 수면을 취하라는 것이다. 육체가 그러하듯 영적인 몸도 마찬가지이다. 더 크고 어려운 도전을 감당하기 위한 당신의 육체, 지성, 그리고 감성은 매일 당신이 당신의 한계 이상으로 그것들을 몰아칠 때 극대화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생활에서의 훈련처럼, 휴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 일반적인 쉼이나 구체적인 안식일의 쉼에 대해 논할 때면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조심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 하나님의 선물을 무시하는 것이 더 큰 위험이다. 안식일에 대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날이든, 우리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원제: Busyness and Rest출처: www.ligonier.org번역: 이정훈
예수그리스도
바쁨
쉼
마가복음
예수님
새벽기도
부활
우선순위
안식
건강
잊혀진 기도
by 최창국
2021-07-08
얼마 전에 오방 최흥종 목사님이 섬기셨던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대학 후배와 대화하던 중에 후배가 “기도의 언어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실천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대화 후에 후배의 말이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신대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면서, 나도 그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배는 새벽예배 후에 성도들과 함께 걷기기도를 실천하고 있는 목회자이기도 하다. 요즈음 실제로 걷기기도를 실천하는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기도의 언어는 통성기도와 묵상기도가 일반적인 것 같다. 하지만 기도는 그 내용과 방법 면에서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내용면에서는 감사기도, 찬양기도, 축복기도, 회개기도, 간구기도, 탄식기도, 중보기도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방법적인 면에서는 묵상기도, 말씀기도, 노래기도, 쓰기기도, 몸기도, 구송기도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잊혀진 기도 회복하기일찍이 어거스틴은 입으로 기도하는 것은 한 배로 기도하는 것이요, 노래로 기도하는 것은 두 배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우리는 다양하게 기도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입으로 기도하는 것, 즉 이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한 배로 기도하는 것이고, 노래로 기도하는 것, 즉 이성과 감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두 배로 기도하는 것이요, 몸으로 기도하는 것, 즉 이성과 감성과 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세 배로 기도하는 것이요, 다윗처럼 온 몸과 함께 비파와 수금으로 기도하는 것, 즉 이성과 감성과 몸과 악기로 기도하는 것은 네 배로 기도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때 형성된 중요한 경구가 있다. 바로 “기도의 법이 곧 믿음의 법이다”(lex orandi lex credendi)라는 경구다. 이 경구는 5세기의 수도사 아퀴테인의 프로스퍼(Prosper of Aquitaine)가 말한 것이다. 이 경구는 기도의 법과 믿음의 법을 형성해 왔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유지해 왔다. 기도와 믿음은 중요한 관계가 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믿음과 삶의 방식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요즈음은 총론의 시대이기보다는 각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이다. 교육, 문화, 과학, 설교 등에서도 각론에 뛰어나야 하는 시대다. 총론은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말할 수 있지만, 각론은 깊은 연구와 고민과 경험 없이 불가능하다. 한국교회도 이제는 기도와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프로스퍼의 경구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느냐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방식을 형성하기 때문에 기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기도하는 법을 아는 것은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기도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시편의 탄식 기도이다. 잊혀진 기도로서 탄식 기도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잊혀진 기도가 있다면 시편의 탄식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와 회개와 간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편의 애가는 개인과 공동체가 슬픔과 고통과 절망 속에서 느낀 부정적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말한다. 시편의 애가는 파괴적인 상황에서 불안함을 느끼는 이들의 정직한 기도였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이런 형식의 기도를 ‘불평 기도’라고 불렀다. 그는 “성경에서는 착한 이들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날 때, 그들은 마음껏, 그리고 시시콜콜 하나님께 불평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처럼 불평하는 기도를 지혜로 간주 한다”고 하였다(James Packer and Carolyn Nystrom, Praying, 181). 이러한 기도는 성경 전반에 걸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슬픔과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기거나 제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님 앞에 표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면, 이러한 기도는 현실을 부정하게하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과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자기 기만적인 의를 추구하며 살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감정인 분노와 불평을 억눌려서 내면의 무의식 속으로 흡수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억눌린 부정적인 감정은 매우 해롭다. 그것은 낙심에 이르게 할 수도 있고, 질투, 심한 조롱, 비참함 등의 뒤틀리고 파괴적인 행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서 불평과 탄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현상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사상에서 연유된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 이성이 원활하게 작용하려면 감정을 통제하고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사상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은 마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허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낳게 되었다. 나아가 오늘날 왜곡된 경건이해 때문에 지나치게 많이 슬퍼하는 사람이나 탄식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의심받기까지 한다. 사실 심각한 상실로 고통 받은 후 깊은 슬픔을 느끼지 못하거나 느낄 수 없는 사람은 정서적 장애가 있거나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단지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보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대신 문제를 해결할 열쇠만을 찾게 된다. 나아가 인간이 단지 부정적인 감정을 바꾸려고만 할 때 하나님을 찬미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기술자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기도의 여정에서 자신의 내적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영적 가면을 써서는 안 된다. 부정적인 감정과 믿음은 중요한 관계가 있다. 불완전한 인간의 믿음은 의심과 불평 없이 자랄 수 없는 특성이 있다. 의심과 불평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믿음은 의심, 불평, 즉 참된 의심과 불평으로부터 자란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의심과 불평을 피하려하기 때문에 올바로 기도할 수 없음에도 적극적으로 의심과 불평을 회피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자아를 만들게 되고, 그런 자아의 영속성을 정당화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의심, 분노, 불평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자아의 가면을 벗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람직한 의심, 분노, 불평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파괴적인 의심, 분노, 불평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은 부정적인 감정의 경험을 피할 수 없는 존재다.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바람직한 의심, 분노, 불평과 파괴적인 의심, 분노, 불평은 내용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파괴적인 의심, 분노, 불평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인간에 바로 쏟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의심, 분노, 불평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놓은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인간에게 쏟아내면 정죄와 공격이 되지만 하나님 앞에 탄원하면 간구가 된다. 시편에서 탄식 또는 불평 기도의 목적과 탁월성이 여기에 있다.진정한 자신의 실재적 자아를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영적 가면을 쓰게 된다. 시편의 애가는 이러한 영적 가면을 벗어던지도록 도전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는다. 특히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어 놓도록 도전한다. 시편의 애가는 불의하고 부당한 일들로 인해 발생하는 인간의 마음과 인간 공동체의 부정적인 감정의 언어들을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고백과 양도를 통해 진정한 자기 발견, 즉 피조물임을 확증하게 한다. 변형의 여정으로서 탄식 기도대상관계론의 관점에서 서술하면, 불평으로 시작된 기도는 기도의 행위가 진행되면서 점차 긍정적으로 변형(transformation)이 발생된다. 기도의 대화가 진척되면서 지금까지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투사해 왔던 자기의 불평은 작아지고 더 큰 자기를 경험하는 계기가 찾아온다. 이는 자기 안의 상처, 슬픔, 고통 등으로 인한 탄원에서 진정한 ‘타자’에 대한 경험을 통해 건강한 ‘내사’(introjection)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다(A. Ulanov and B. Ulanove, Primary Speech: 29). 기도를 통해 내면의 변형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시편의 불평 자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불평(자기 투영)이 변형되어 가면서 내적 치유와 성숙을 경험하게 되고, 보다 더 깊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가 불평에 의하여 시작되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변형을 경험하는 신비적인 경험이 되는 것이다. 시편의 불평기도는 그 불평 자체에 있기보다는 자기 변형을 위한 한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도는 성화, 변형의 여정, 즉 하나님의 은혜와 치료를 경험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람과 사물을 귀하게 여기며, 그것들을 잃었을 때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3세기의 이레니우스(Irenaeus)는 “충만하게 살아있는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비록 불평과 탄원을 할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이지만, 불평과 탄원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영성
기도
통성기도
묵상기도
제임스패커
탄식기도
시편
불평기도
이레니우스
치유
진정한 소통을 갈망하자
by Abigail Dodds
2021-06-28
“그녀랑 얘기하는 건 즐거워요. 항상 서로 통하는 느낌이거든요.”“나는 그녀의 인스타 계정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재미도 있고 통하는 느낌이거든요.”“그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이에요. 선생님의 이야기는 정말로 나랑 통하는 거 같거든요.”다른 여성을 칭찬하고 싶다면, 그녀를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람”이라고 불러라. 서로 좋은 관계로 소통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 원하는 바이다. 대화하는 사람과 연결점을 찾아내는 것은 그 방법이다. 앞에 있는 사람과 갈등 또는 어떤 환경에서 서로의 공감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대등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자신을 포장하면서 ‘척’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다양한 기술을 통해 그럴듯한 가짜 정보가 범람하는 디지털 세계에서 서로 통한다는 것은 하나의 해독제와도 같다. 보여 주는 완벽한 이미지의 커튼을 젖히고, 너무나도 평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세탁거리가 있고, 재수 없는 날이 있으며, 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농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소통은 고작해야 가려진 모습을 보이는 정도이다. 관계를 맺는 하나의 시작점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다. 소통한다는 것은 자칫 나의 죄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미가 되거나, 나의 죄를 다른 사람과도 연결하고 싶은 갈망을 만들기도 한다. 공유하는 소통의 위험한 측면“아이들에게 소리를 친다고요? 아, 다행이네요. 같이 웃어봅시다. 우리는 정말로 비슷하네요.”“당신도 다른 사람에게 와인을 따라주면서 각자 원하는 것을 먹으라고 말한다고요? 나도 그래요. 난 정말로 식당에 가면 모두가 다 똑같은 거 먹어야 하는 거 싫거든요. 하하하. 정말로 우리는 통하네요.” “아, 당신도 넷플릭스를 나흘 밤 꼬박 계속 본다고요? 그러니까 당신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고요. 나도 그래요. 우리 정말로 비슷하네요.”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은 우리가 각자의 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커튼을 젖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가 회개와 회복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 “좋지 않았던 시간”을 공유하는 것도 주의 깊게 잘 선별해야 한다. 그것이 때로는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깐일 뿐이다. 자신에게 좋지 않았던 이야기를 나누는 목적은 다른 사람이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들기 위함이지, 반성하고 부끄럽게 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서로가 공유하는 소통의 위력이다. 우리는 나처럼 문제가 많은, 또 나랑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지은 다른 사람들과, 때로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도 소통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실제로 내게 죄를 지은 사람, 또는 내가 죄를 지은 사람과 진짜로 연결되는 것은 싫어한다.그건 실제 삶에서 조금도 재미있지 않다.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찾는 크리스천 여성이나, 또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별 관심이 없는 크리스천 여성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통한다. 우리는 누구나 다 서로 고백하고 또 나눠야 한다는 마음의 압박과 유혹이 있다. 그런 투명한 공유와 소통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나눔과 소통은 우리가 주님께 가도록 이끌 때만 그렇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흔하고 또 예상 가능한지를 놓고 크게 웃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에서 구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거룩함 속에서 우리는 서로 모여야 한다(갈 1:4; 딛 2:11-14).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서로와 연결된다.. 우리 속의 깊은 신앙은 단지 서로 간에 공통된 죄 또는 표면적으로 소통하는 자매의 수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서 자매로 만든 그 아버지 안에서 소통해야 한다. 그렇다. 거룩한 여자도 웃을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심각한 죄를 놓고는 웃지 않는다. 우리는 앞으로 닥칠 일 때문에 웃는다. 이미 이뤄진 일 때문에도 웃고, 우리 자신을 보면서 웃는다. 우리는 또한 우리 속 깨끗한 양심을 보면서 웃는다. 바울은 아주 흥미로운 방식으로 교회와 소통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투명했고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불렀다(딤전 1:15).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처럼 나를 닮으라고 말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고전 11:1). 우리는 겸손을 우리의 모자란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방식을 보여 준다. 겸손은 우리의 죄성이 가득한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방식을 쫓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젊은 자들을 향해서 “나를 닮아라, 내가 그리스도를 닮은 것처럼”이라고 소리쳐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삶에 가장 지대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남자 또는 여자를 생각할 때, 그것은 그들의 탁월한 유머 감각도 아니고, 나와 연결되는 이야기 때문도 아니었다. 많은 경우에 나는 그들의 경험과 연결할 수 없었다. 나치 수용소에서도 누렸다는 베씨 텐 붐(Betsy ten Boom)의 자족을 나와 전혀 연결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이 자기 남편을 죽인 살인범을 전도했다는 이야기와도 연결할 수 없었다. 심지어 더 이상 텔레비전을 안 본다는 존 파이퍼 목사의 이야기와도 나는 연결할 수 없었다. 나는 또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언제나 기꺼이 아기를 돌봐주는 내 엄마와도 연결할 수 없다. 또한 늘 진지한 내 친구와도 연결할 수 없다. 이런 “전형성(typicality)”의 부족,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즉각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나의 특징은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적이고 보통인 상태가 되고 싶은 갈망에서 한 걸음 떨어져 더 큰 갈망을 갖게 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전형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 힘을 주실 때만 가능한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그런 갈망을 말이다. 많은 사람은 이런 구분 또는 다름을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했다. 그리스도는 자비로운 대제사장이고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우리와 소통하는 분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짓는 죄악에서 우리가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범상치 않고, 즐거움이 가득한 거룩함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자매들이여, 우리 이제 그를 따라가자. 원제: When Being ‘Relatable’ Does Dam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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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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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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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갈망
디지털세계
공유
마음속에서 진리를 말하라
by Thomas Brewer
2021-06-27
혼잣말하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킨 적이 있는가? 그건 좀 부끄러운 일이다. 왜냐고? 내 자신이 노출된 것 같은 느낌은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누군가가 우연히 벌거벗은 나를 본 거 같은 느낌과도 비슷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거의 볼 수 없는 우리의 내적 삶이 갑자기 공개된 것과도 비슷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혼잣말을 하다가 들키는 경우는, 보통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은밀한 곳이라고 확신하던 장소일 때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휴게실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이렇게 중얼거리곤 한다. “아이고, 하루에 커피 두 잔 이상 안 마시겠다고 약속했는데 말이야.”물론 혼잣말하는 게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 혼잣말하는 것을 본다고 그렇게 놀라지도 않는다. 누구나 다 살면서 마음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우니까. 혼잣말은 단지 그런 생각이 밖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오늘 하루 중에 몇 번이나 이런 말을 중얼거렸는지도 모른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데.” 또는 “가게에 가야 하는데…. 아니야, 그냥 집에 있을래.”우리는 마음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의 저울질을 한다. 마음속에서 논쟁을 하기도 한다. 어떤 생각을 하면서는 혼자 재미있어 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대화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은 그냥 우리 마음속에서 묻힌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가 스스로에게 하나의 독립된 세상이다. 나는 가끔 사탄을 만난 하와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오갔는지가 궁금하다. 우리는 단지 상상만 할 뿐이다. 물론 하와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이런 구절이 있음에도 우리는 그녀가 사탄의 말을 듣고 생각했을 구체적인 내밀한 마음속 대화를 알 길은 없다. 하와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저 과일 정말로 맛있어 보이네.”, “저건 나를 지혜롭게 할 것이 확실해.”, “이 사탄의 말을 믿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잘못된 결정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속았다. 아담과 하와가 한 마음속 대화는 치명적인 실수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탄에게 귀를 기울였고, 결과적으로나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사탄은 그들의 마음속에 자기기만을 심어 넣었다. 사탄과 대화하던 어느 순간에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법을 배웠다. 자기기만은 자주 접하지 못하는 주제이다. 스탠포드 철학 사전(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s, SEP)은 여기에 관해서 이렇게 소개한다.자기기만은 용어의 정의와 전형적인(paradigmatic) 사례를 포함해 사실상 모든 측면에서 철학자들 간 논쟁의 문제이다. 최소한의 의미만 부여할 경우, 자기기만은 어떤 동기로 인해 압도적인 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럼에도 어떤 측면에서는 마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좋은 것만 주었지 나쁜 것은 하나도 주지 않았다. 사탄과 이야기할 때, 그 두 사람은 사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사탄과의 대화를 보면, 그들은 진짜 진리가 뭔지에 관해서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SEP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자기기만이 개인적으로나 또는 집단적으로 자기 지식(self-knowledge)을 얻는 데에 장애물의 역할을 하는 한, 그것은 단지 철학적으로 흥미롭게 다룰 문제 그 이상이 된다. 자기기만은 실존적 우려를 자아내는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경우, 자기기만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또 타인과 세상에 대해서 얼마든지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현저한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얼마든지 스스로에게도 이방인이 될 수 있고, 또한 인간에게 중요한 도덕적 책임(moral engagements)이라는 본질에도 눈을 감고 살 수 있게 된다.인간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거짓말하는 건 사탄만이 아니다. 우리도 거짓말쟁이다. 남들에게만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이 사실은 SEP가 설명했듯이, 우리가 얼마든지 스스로에 대해서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살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정말로 우리는 잘 속는다. 우리가 실재(reality)라고 생각하는 게 실재가 아닐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연기와 거울로 가득한, 재미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절망감에 빠져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시편 15편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절). 그리고는 대답한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2절). 이 짧은 문답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문제를 다룬다. 누가 하나님의 면전에 나갈 수 있을까? 아담과 하와 같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그는 하나님께 순종했고 그의 마음에 진실만을 말했다. 그건 그 자신이 바로 진리였기 때문이다. 그럼 마음에서 나오는(from hearts) 진리를 말하는 것 뿐 아니라, 마음에서도(in hearts) 진리를 말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진리를 말하는 길을 따라 예수님을 쫓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세 가지를 생각해보자. 진리를 알라마음속에서 진리를 말하려면 먼저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성경을 알았고 또 공부하면서 자랐다. 공생애 사역 내내 말씀을 인용했고, 희망을 가지고 말씀을 끝까지 의지했다. 우리도 말씀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나에 대해서, 또 가족과 교회 그리고 직장에 관해서도 비관적인 태도를 갖기 쉽다. “나는 결코 바뀔 수가 없어. 하나님이 이렇게 화를 못 참도록 만드셨는데, 뭐.”, “이 직장은 정말로 구제불능이야, 정말로 개판이야.”, “이놈의 교회에는 위선자만 가득 차있네.” 이 모든 게 다 거짓말이다. 이런 모든 생각들, 우리가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만 품고 있는 모든 생각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주는 성경 구절이 있다. 먼저 화를 못 참는 성격과 관련해서, 인내는 성령의 열매이고 또 하나님은 우리가 더 거룩해지길 원하신다는 것이 진리이다(갈 5:22; 히 12:10). 나와 별 관계없어 보이는 직장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다 주를 위해서 일하는 존재이기에 어떤 일도 나와 관계없는 일은 없다는 것이 진리이다(골 3:23-24). 교회 안 위선과 관련해서는, 교회도 죄인이 모이는 곳이지만 교회는 여전히 거룩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자라는 곳이라는 게 진리이다(고전 5:1-2; 엡 4). 예수님은 제자들이 진리 안에서 성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될 때, 그 진리는 당신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거짓말을 물리치는 항생제가 될 것이다. 진리를 믿으라마음속에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믿는다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거짓말이 들릴 때, 그래서 그 거짓말을 믿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 능동적으로 거짓말을 버리고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공생애를 앞둔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거짓말을 앞에 놓고 반복해서 진리를 택하고 또 택했다(마 4).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고, 그 말씀을 믿겠다고 선택했다. 내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겠다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는 달리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믿겠다고 선택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도 진리를 믿겠다는 선택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논쟁이 과열되다 보면 우리는 마음속에서는 내가 지금 상대편에게, 그게 배우자이든 아니면 직장 동료, 친구이든, 죄를 지은 것을 알면서도 내가 지금 확실하게 옳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무엇이 진리인지를 마음속에서 먼저 인정해야 한다. “상대의 동기가 뭔지 내가 미리 어림잡아서 가정하는 죄를 지었어.”, “너무 거칠게 반응하는 죄를 지었어.” 상대에게 정직해지고 치유 과정을 구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진리를 행하라마음속에 있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믿는 그 진리가 말과 삶으로 드러날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마음에 죄가 없었기에 아예 죄 자체가 없는 분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진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났다. 야고보가 진리를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라(약 1:22-25)고 했을 때, 나는 그가 진리를 행하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4장 32절은 이렇게 말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 간단한 권고의 말씀은 한 가지 진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에서 그 진리를 실천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거짓말을 믿게 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도저히 희망이 없는 위선자가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거짓말을 믿게 되면, 우리는 그 거짓말에 근거해서 행동한다. 쉽게 잡담에 휩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 믿음을 떠나게 된다.그러나 그와 반대로 지금과 같은 세대에서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진리를 믿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의 죄성을 보면서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다 거룩한 나라이며 지금 함께 새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기만 한다면, 미래를 바라보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벧전 1:5; 계 21). 포기하면 안 된다. 서로를 세워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계속 진리를 드러내야 한다. 마음속 거짓말을 멈추고 그 대신 언제나 진리만을 말하게 되는 그날을 소망한다. 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속에서 무엇이 맞고 틀린지, 무엇이 진리이고 아닌지를 놓고 갈등하지 않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으로도 오로지 진리만을 말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진리만을 말하는 바로 그 예수님처럼, 우리도 변화될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원제: Speak the Truth in Your Heart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혼잣말
마음
거짓말
진리
자기기만
에덴동산
선악과
거짓말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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