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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씨름하는 것이다
by Guy M. Richard
2021-03-10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선택한 이름들 가운데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택하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창세기 32장에서 이 이름이 주어진 정황은 다른 모든 가능성들 중에서 “그가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창 32:22–32; 호 12:3–4). 하나님이 무한하신 지혜 가운데 자신의 백성들 즉, ‘씨름하는 자들’을 부르기로 선택하신 듯하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시간들 사이에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려해 본다면, 하나님의 진정한 이스라엘로서(롬 2:28–29; 4:11–12; 갈 6:12–16) 크리스천은 원래 야곱에게 주어진 이름의 의미처럼 상속자이며 바로 ‘씨름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들 사이를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관점에서 크리스천의 삶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야곱처럼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씨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씨름해야 하며 극복해야한다(호 12:2–6).하지만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 물든 세상, 즉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은 ‘이미’와 ‘그러나 아직’ 사이의 긴장감 속에 있다. 죄로 인한 아픔, 질병, 기근 그리고 자연재해 등은 ‘아직’ 새롭게 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결과들이다. 무법, 폭력, 테러 그리고 전쟁도 ‘아직’ 새롭게 되지 않았거나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죄인들이 거주하는 세상 속에서 사는 삶의 결과들이다.시간들 사이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이러한 결과들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씨름은 결코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분의 섭리가 아무리 어둡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대항하여 다투거나 혹은 그분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서도 안된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많이 있다. 왜 나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지 궁금한 순간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이혼의 순간에 크리스천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자녀가 도망가거나, 가정을 등지고 떠나거나,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할 때는 어찌해야 할까? 한 번의 사건으로 삶의 가치가 송두리째 상실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범국가적인 자연재해나 전염병이 누군가의 가정과 직장, 교회와 사회의 기능을 파멸시켜 버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크리스천은 이러한 때에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 우리는 단지 하나님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욥이 씨름했던 것 아닌가? 욥은 하나님이 그의 삶을 섭리하신 그 어둠의 순간들로 고군분투했으며 야곱처럼 그냥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씨름했고 비록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승리했다.우리도 마찬가지다. 삶의 여정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머리를 덮고 있는 구름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우리는 욥처럼 전심을 다해 노력해야만 하며 끝나는 날까지 인내해야만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어둠이 물러갈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야곱처럼 고백하며 씨름해야만 한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기 전까지 당신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한다는 의미다. 기쁨없이 모든 것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어둠이 제거될 때까지 고통없이 참아내야 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께서 진정으로 모든 것을 우리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 삶의 여정 가운데 보내주셨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잘 씨름하는 것이다.둘째로,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씨름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이미’와 ‘그러나 아직’ 사이의 긴장감은 크리스천이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비록 우리의 현재 모습이 과거의 모습과는 다를지라도, 분명 아직은 완벽한 모습을 갖추지는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롭게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다. 이것은 크리스천의 삶이 필수적으로 자신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임을 의미한다(롬 7:15–25). 크리스천은 반드시 죄를 억누르며 거룩과 의로움을 추구하도록 노력해야만 하되 이를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해야 한다(롬 8:12–14; 빌 2:12–13).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힘써 행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죄와 악한 영들을 대항하며 하나님과 함께 씨름해야만 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생이 끝나는 날과 그림자가 물러가는 날까지 인내해야만 한다. 야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밤새 씨름하고 승리해야 한다.시간들 사이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씨름을 예상해야 한다. 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과 함께 죄와 악한 영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씨름하는 것은 씨름하지 않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시간들 사이를 살아간다는 말은 우리가 씨름하게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우리는 잘 싸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주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원제: Our Blessed Struggle출처: www.ligonier.org번역: 정진호
고난
영적성장
씨름
영적여정
이스라엘
야곱
욥
축복
승리
이미와아직
자녀 양육의 목표를 높게 잡으라
by Adrien Segal
2021-03-08
부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초조하고 활동적이며, 또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다. 그런데 이게 좋은 걸까? 자녀에게 쏟는 모든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눈물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부모라면 누구나 부모의 책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자녀를 사랑하고 또 그들이 행복하고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런 소망을 자녀에게 갖고 있다고 할 때,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자녀 양육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뻔한 대답이지만, 부모라면 자녀가 사랑스럽고 의미있는 관계, 좋은 직업에 필요한 훌륭한 교육,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돈과 자원, 그리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를 원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는 고귀한 소망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자녀를 이 땅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삶 정도를 살라고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녀를 위해 진흙 파이를 만들기우리의 자녀가 이 땅에서 7, 80년 정도를 산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편안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시간 관리와 함께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환경 조성에 집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단지 이 세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위로나 소유 또는 성취도 결코 우리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의 기대 수준을 높게 잡는다. C.S. 루이스는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에서 이렇게 말했다.“우리 주님의 눈에 우리의 욕망은 강하기는커녕 너무 약하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반쪽짜리 마음을 가진 피조물이다. 무한한 기쁨이 저기서 손짓하는데도 고작해야 술과 섹스, 그리고 야망같은 것에 눈이 팔려 집적거리고 있으니까. 그런 우리는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도 못하는 아이가 빈민가에서 진흙으로 파이나 만들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뻐한다.” 이 땅에서 얻는 성공과 기쁨이 반드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가 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부요함과 비교하면 그것은 단지 진흙 파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소한 수준에서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훨씬 더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 창조되었다. 우리의 자녀들이 알아야 할 것은 단지 이 땅에서 칠팔십 년 살면서 진흙 파이나 만들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신 우리의 창조자와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 땅에서 기쁘게 살기 위해, 또 그에게 영원한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태어난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관점으로 자녀를 양육할 때, 모든 것이 바뀐다. 부모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우리가 이런 목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대답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반복해서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저렇게 하시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모든 만물과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그 날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만약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이는 실로 절망적인 소식이다. 그러나 죄를 용서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누리고 있고, 또한 예수 구원의 은혜 안에서 정체성을 발견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다. 우리의 삶을 기쁘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헌신하는 한(고전 10:31),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지금 그리고 또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 예수님과 함께 새 창조의 공동 상속자로서(롬 8:17)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또 자녀를 위해서 가장 열심히 해야 할 기도를 바울이 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라는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C.S. 루이스가 말한, 우리의 자녀들이 영원히 경험하기를 바라는 바로 그것이다. 열심히 가르치라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계명에 순종하는, 예수님이 알려주신 그 기쁨을 자녀들이 알아갈 수 있도록 부모는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로 삼지 않을 때, 너무도 쉽게 이 세상에 휩쓸린 우리의 삶은 진창에서 허덕이게 된다. 하나님과 분리된 채 우리는 자녀의 목적과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두려움과 초조함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주는 진리, 그리고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영광돌리는 것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삼으라는 그의 명령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가 자녀들에게 쉬지 않고 가르치기를 바라는 바로 그 교훈이다(신 6:7).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바로 그 토대 위에 우리와 자녀들의 삶을 세워나갈 때, 그는 신실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가장 열심히 일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 주신다(롬 8:28). 자녀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축복을 받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 또 있을까?첫 번째 그리고 가장 큰 교훈아마도 누군가는 바로 물을 것이다. “우리가 이것도 가르치지만 또 열심히 일해서 우리 자녀들이 이 땅에서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도우면 안 될까요?” 물론 대답은 예스다. 그러나 자녀 양육을 어떻게 하는가는 우리의 진짜 마음이 무엇을 진짜 목표로 믿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단지 자녀들이 배워야 할 수많은 교훈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그러니까 사실상 우리가 믿는 것이 자녀가 일자리를 얻고 좋은 집을 사고 가정을 꾸미는 것과 그렇게 상관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결국 자녀들에게 경건의 시간이나 또는 주일 학교에서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이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 과학 및 문학과 별반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정보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단지 이땅에서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또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소한 일에까지 다 빠짐없이 관여한다고 (달리 말해, 이 세상을 주관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행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를 어떻게 맺는가에 달려있게 된다.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녀 교육에 관한 우리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세상의 모든 가치가 한순간에 부차적인 것으로 바뀐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로서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이다. 부모는 하나님의 경이로움과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받은 존재라고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깨어있기자녀를 이렇게 양육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자 주권자 하나님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부터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이런 진리를 잘 가르쳐야 한다. 이런 교육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다. 이는 또한 온가족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교회를 다니고 있음을 뜻한다. 아이들은 부모인 우리가 말씀 안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목격해야만 한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세상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책임지고 손에 쥐고 있다(골 1:17). 우리가 세상 모든 사물과 움직임 속에서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의 자녀들도 그런 경이로움을 볼 수 있도록 돕고, 또 역사와 과학, 그리고 예술의 모든 고비고비마다 크고 작은 모든 업적이 오로지 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이뤄졌다는 것을 자녀들이 알도록 가르칠 때, 우리의 자녀들은 비로소 눈을 뜨고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광으로 인해 빛나는 이 세상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자녀 교육은 믿지 않는 부모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과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녀를 양육하며 누리는 아름다움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우리도 함께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자녀들의 미래가 주는 두려움과 초조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부모로서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또 항상 곁에서 우리를 격려하고 도우며 우리가 맞을 결과에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 권능의 하나님이 주는 이 약속에 의해 부모로서 하루하루를 살게 되며 또한 영감까지 얻게 된다. 더 높은 기준자녀 양육의 목표는 단지 자녀가 이 세상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도록 돕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영원한 만족을 발견하도록 도와야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신뢰할 때,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의 길과 자녀의 길을 인도할 것이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이여, 목표를 기억하라. 자녀에게 진정한 행복과 성공은 오로지 창조 목적에 따라서 살 때에만 따라오는 것임을 가르치라.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으로 바라보도록 가르치라. 그리고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는 영광의 소식을 기뻐하며 그분과 사랑의 관계에 동참하도록 가르치라. 이런 현실을 이해하고 마음에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자녀들이 단지 자신감과 기쁨으로만 충만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제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상으로 보냄받았다는 사실까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벅차고, 너무도 다른 목표다. 그러나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차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스런 목표다. 원제: When Parents Set the Bar Too Low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가정
양육
루이스
정체성
임재
사랑
교훈
충족감
관계
주권
삶에 기쁨이 없을 때
by Scott Hubbard
2021-03-03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지만 여전히 기쁨이 멀게만 느껴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성경도 이미 읽었다. 묵독과 음독으로. 한 번에 다섯 절씩. 심지어 한 자리에서 성경의 책 한 ‘권’ 전체를 읽은 적도 있다. 약속의 말씀들을 메모지, 화이트보드, 그리고 손등에까지 적어두기도 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이들과 함께 모이기를 힘썼고, 마음의 짐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 회개하지 않은 죄는 없는지도 찾아보았다. 물론 기도도 했다. 홀로, 그리고 여럿이 함께. 골방에서, 그리고 길을 걸으면서도 말이다. 절박함 가운데 수련회에도 참석해봤다. 긴 시간 금식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같은 생각들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두움, 적막, 그리고 의심은 여전히 당신 곁을 배회한다.‘내 기도를 들으시는건가? 나를 아시기는 하는 걸까?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나는 정말 그의 백성일까?’우선 기억해야 할 것들기쁨이 멀게 느껴질 때면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기억해야 할 것들’이라 함은 그저 ‘단순한 해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껏 많이 경험했겠지만, 도와주려는 선한 의도는 있으나 문제의 심각성을 축소시키고 단순한 해결책만 제시하는 사람들이 주는 조언 말이다. 이 사람들은 보통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겠네요”라고 말하곤 한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단순화된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계속하여 우리가 늘 잊곤 하는 단순한 진리를 말한다. 그 진리가 어두움을 없애주지는 않지만, 구름 사이로 보이는 별들처럼 그 어두움 위에 빛을 비추고,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빛으로 가득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우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우리에게 힘을 준다. 다윗 왕은 시편 40편에서 삶 속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음을 꼭 기억하라고 말한다. 어두움은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다. 기쁨의 날이 올 것이다. 주 안에서 소망을 잃지 말라. 어두움은 정상적인 것이다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어두운 시절은 정상적인 것임을 상기시킨다. ‘시절’(seasons)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시편 40편이 묘사하는 어두움은 어느 오후 동안 잠시 느끼는 슬픔이 아니라 길고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어두움이다. 다윗이 통과해야 했던 그 어두움의 시기가 얼마나 길었는지를 보라.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는 말로 시를 시작한다(40:1). 다윗이 얼마나 오래 그 어두움을 견뎌야 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지만,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주께 울부짖었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그의 어두움의 시기의 ‘지속성’에도 주목하라. 이 시편의 중간 부분을 보면 다윗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짐을 받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40:2), 그는 다시금 갑자기 어두움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40:11–13). 이로 인해 심각한 몰락의 위기에 직면한 다윗은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40:12)라고 부르짖는다.마지막으로, 다윗의 어두움의 ‘상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라. 이 시의 끝에 이르렀을 때에도 다윗은 여전히 어두움의 포로가 되어 있다. 기쁨의 노래는 간 곳 없고, 다윗은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라고 애통해 한다. 찬양하는 대신, 그는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간구한다(시 40:17).잃은 후 다시 찾은 행복, 하지만 다시금 상실한 행복에 대한 다윗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기쁨에 대한 우리의 기대감을 다스릴 수 있다. 많은 이들을 비롯해 다윗이 경험한 것이 주는 교훈은 우리가 천국을 너무 급히 붙잡으려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직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정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기쁨을 다 가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약한 육체를 입고 살며, 죽음이라는 우리의 대적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실제기는 하나 어두움과 공존한다.이 어두움은 우리를 괴롭히지만 나 혼자만 이런 어두움을 겪는 것은 아니다. 시편 기자들,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 역시 같은 어두움을 통과해야 했다. 우리 앞서 살았던 성도들, 그리고 현재 우리 곁에 있는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우리 구주 역시 이를 겪으셨다. C. S. 루이스는 “우린 아무도 지나가 보지 않은 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네. 오히려 아주 넓은 도로 위에 서 있는 것이지”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킨다(‘말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Malcolm)).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하지만, 다윗은 어두운 색 물감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슬픔으로 가득한 이 시편은, 놀랍게도 소망으로도 가득하다. 어두움은 정상적인 것이 맞다. 하지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다윗의 기도가 하늘에까지 상달되지 않는 듯 보일 때조차도, 결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듣고 계셨다(시 40:1). 다윗이 다시금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의 변치 않는 사랑과 신실함으로 가까이 다가오셨다(시 40:11). 스스로 가난하고 궁핍한 것처럼 느끼고 그 마음이 심히 낙심되었을 때에도(시 40:12), 다윗은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시 40:17)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하지만 하나님이 정말 그리 가까이 계시다면, 어떻게 어두움이 정상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때로는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에게 어두움이 임한다. 다윗의 어두움 역시 부분적으로는 그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다(시 40:12). 하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시나 우리 스스로 구덩이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잘못을 범하지 않더라도 어두움을 통과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주님께는 오직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만 빚어낼 수 있는 계획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가 이 시편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시 40:6–8; 히 10:5–7). 예수께서 감당해야 했던 어두움에 비하면 다윗의 어두움은 그저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보다 하나님과 가까운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아들의 길은 우리 중 누구의 길보다도 어두웠다. 당신이 보는 하늘이 얼마나 밝은가로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우신지를 판단하지 말라. 당신이 예수께 속한 자라면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버리거나 잊지 않으신다. 무한하신 당신의 주께서 당신을 생각하신다(시 40:17).기쁨의 날이 올 것이다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고 해서 우리가 어두움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은 그 어두움이 결코 ‘끝’이 아니며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겪는 어두움은 기찻길이지 역이 아니라는 의미다. 집으로 가는 길일 뿐이지 아늑한 집 자체는 아니다. 우리가 어두움의 길을 지날 때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조율하셔서 다가올 찬송을 준비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시간에, 멀게만 보이던 기쁨이 다윗에게 돌아왔다. “나를 [중략]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시 40:2–3). 기쁨이 다시 멀어졌을 때, 다윗은 기쁨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했던 것을 기억해냈고, 이로 인해 이 시편의 말미에서 다윗은 담대히 기도한다.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40:16). 다가올 기쁨에 대해 다윗이 확신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겪었던 어두움이 사실은 그다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어두움보다 기쁨이 언제나 더 깊고 더 확실하다는 뜻이다. 이 기쁨은 끝없이 더욱 깊어지고, 영원히 더욱 확실해진다. 당신은 아마도 현재로서는 이 진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다시금 찬양하고 웃으며, 듣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라고 선포하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라.상실된 기쁨이라고 해서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기쁨이 회복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기쁨이 지금은 그저 깜박거리는 수준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활활 타오르게 될 것이다. 이 땅 순례 여정의 남은 모든 기간 동안 어두움이 늘 당신 삶에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해도, 반석 위에 우뚝 서 걸음이 견고해지고 입에서 탄식이 멈추며 새 노래를 부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회복하기 위한 이 싸움에서 당신이 아무리 혹독한 어두움을 마주한다 해도,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가 말했듯, “천국에서의 첫째 날에 누리게 될 환영식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The Loveliness of Christ)). 그리스도인이여, 기쁨 가득한 날이 오고 있다.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 끝없이 영원한 기쁨이 오고 있다. 주 안에서 소망을 잃지 말라하지만 기쁨의 날이 온다는 약속을 어두움 속을 걷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 약속은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의 것이다. 다윗의 기도에서 이를 묘사하는 문구에 주목하라: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시 40:16). 다윗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 안에서 소망을 잃지 말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이 지체하시는 것 같을 때조차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라. 하나님이 그의 약속들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그것들을 붙들라. 하나님이 들으시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에도 계속하여 부르짖으라.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계속하여 그의 얼굴을 구하라.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에 지쳤을 때 거짓에 치우치고자(시편 40:40) 하는 유혹, 다시 말해 즉각적인 도움을 약속하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로 달려가고픈 유혹에 저항하라. 기다리고, 매달리고, 기도하고, 찾으며, 하나님이 오실 것임을 신뢰하라. 얼마 있지 않아 어두움은 비정상적인 것이 되고 결국에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가까워질 뿐 아니라 그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기쁨이 진정한 실제가 될 뿐 아니라 그것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토마스 켈리(Thomas Kelly)가 '구세주를 아는 이들' 5절에서 썼듯이 말이다. 그날에 천국문 들어가 한량 없는 기쁨 누리리이 땅에선 부족하나온전해지리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When Joy Feels Far Away번역: 이정훈
생활
감정
기쁨
어두움
슬픔
기쁨의날
지속성
상존성
CS루이스
말콤에게보내는편지
교회에서의 짧은 만남의 가치
by Megan Hill
2021-03-01
교회에 린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다. 코로나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 우리는 거의 매주일 교회에서 만나면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또는 복도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를 자주 안아주었고 우리는 이번 주에 할 일에 관한 세부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린과 나는 성격도 다르고 생활 환경도 비슷하지 않다. 사실 그런 차이가 우리의 대화를 즐겁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린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가끔 교회의 예배실 건너편에서 그녀를 봤지만 우리는 더 이상 마주치지 않는다. 코로나바이러스는 화장실에 있는 사람들의 수를 제한하고 복도에서 우리 사이의 거리를 넓혔다. 우리 교회는 예배 사이에 있던 커피 타임을 폐지했고, 뉴잉글랜드의 추운 겨울은 주차장에서 서로 만나는 시간마저 줄어들게 만들었다. 린과 이야기하던 시간이 그립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지만 정기적으로 전화를 하거나 무슨 모임을 갖는 것은 우리 관계의 특징이 아니다. 코로나 관련 팟캐스트 멤버를 선택할 때도 우리는 상대방의 멤버에 속하지 못했다.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다. 단지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사이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한다.린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특히 교회에서 나누던 소소한 잡담을 사라지게 만든, 전염병이 가져다준 슬픔의 한 예일 뿐이다. 내가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예배가 끝나면 내가 앉은 의자에 와서 장난을 치던 아이들도 그립다. 그 아이들은 이제 예배실에서 부모님과 함께 예배드리고 다른 문으로 총총히 떠날 뿐이다. 십대들과 농담하던 때도 그립다. 분홍색 카펫이 깔린 펠로우십 홀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 번에 오 분씩 이 사람 저 사람과 얘기하던 그 시간이 그립다. 사실 교회에서 주고받는 이런 식의 잡담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그 시간을 그리워할까?우정의 범주(category)아만다 뮬(Amanda Mull)은 디아틀란틱(The Atlantic)지에 실은 글을 통해 주변(peripheral) 관계의 실종을 한탄했다.“코로나는 인간 관계를 가족 및 가장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에게로만 묶어버렸다. [중략] 코로나는 우정의 전체 범주를 증발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또한 인간의 건강함을 부양하는 기쁨을 고갈시켰다.”사회 과학은 우정의 다양한 범주를 식별하고 또 가장 사소한 관계조차도 우리의 웰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러한 약한 관계 내지 중간 고리 관계 또는 가벼운 관계는 소속감에 기여하고 커뮤니티를 강화하며 심리적 행복을 증가시킨다. 이 범주는 또한 교회에서의 우정을 포함하여 우리의 규칙적인 상호 작용을 설명한다. 현대 심리학이 탄생하기 수천 년 전에 예수님과 바울은 모두 다 다양한 범주의 우정이 주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지상 사역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요한)에 대한 특별한 사랑, 세 사람(베드로, 야고보, 요한)과의 친밀한 우정, 열두 명에 대한 깊은 헌신과 일흔 두 명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에게도 친애하는 동반자(디모데), 몇 명의 동역자(디모데, 실라, 에바브라), 사랑하는 많은 친구들(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유오디아, 순두게), 그리고 수많은 헌신적인 지지자들이 있었다.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없는 예수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가 없는 바울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사역을 지원하고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수십 개의 느슨한 유대가 없는 그들을 상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때때로 교회에서 우리는 소그룹, 멘토링 관계 또는 책임 파트너십을 통해서 자라나는 친밀한 우정을 특히 강조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매우 중요한 연결이다. 하지만 관계가 가깝지 않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오산이다.이름을 부르며 친구와 인사하자요한의 마지막 서신서는 이런 명령으로 끝난다.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요삼 15b).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 훈육을 실천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편지의 결론으로는 약간 이상한 것 같다. 게다가 “쓸 것이 많다”고 말한 후(13절)에, 이런 권고를 하는 것은 양피지 낭비처럼 보일 수 있다.그러나 교회에서 인사하는 관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먼저 '친구'를 맞이해야 한다. 단순한 미소와 환영의 말(또는 더 좋은 날에는 악수)로 우리는 모두가 함께 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스도의 친구는 내 친구라고 말한다. 임의의 개인으로 구성된 자발적 조직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상호 연결되고 상호 의존적인 조직이다(고전 12:18). 각 부분은 먼저 그리스도에게 속함으로 인해 전체에 속한다. 서로를 보고 인정함으로, 비록 아주 작은 울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의 일부로서 각 사람의 정체성을 간증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서로 간에 '이름을' 부르면서 인사한다. 이름을 시작으로 상대에 관해서 알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독특한 은사 뿐 아니라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는 은혜의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전 12).우리의 많은 관계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고, 그러다 보니 주로 관심사를 공유하거나 비슷한 삶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된다. 반대로 우리가 교회에서 맺은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구속받은 광범위한 사람들과의 접촉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나이가 많거나 또는 더 젊은 사람, 성별이나 인종이 다른 성도들의 관점을 통해, 다양한 시련을 겪으며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모든 종류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삶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서로의 짐을 함께 지고팬데믹 기간 동안 나는 매주 동네 공원에서 산책하면서 다른 교회 교인과 우정을 나누었다. 우리가 걷는 트레일은 약 30분 정도 걸리는 숲길인데, 처음 20분 동안 우리의 대화는 그냥 말 그대로 잡담이다. 날씨 또는 코로나 감염자 수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아이들이나 그녀의 고양이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교환한다. 거의 차로 돌아올 때가 되어서야 (때로는 실제로 열쇠를 들고 주차장에 서 있는 경우도 있음) 우리는 마침내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함께 산책한 몇 달이 지나면서 깊은 맘을 나누기 시작하는 시점은 점점 더 빨라졌지만, 그럼에도 상호 신뢰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는 항상 어느 정도의 잡담이 필요하다. 우리는 잡담을 쓸데없는 수다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 신실한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진짜 중요한 시련을 만났을 때 필요한 신뢰까지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2)는 큰 일 뿐만 아니라 작은 일을 위한 명령이기도 하다. 초대 교회에 보낸 각각의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일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간단한 사실, 회중의 위치와 상황에 대한 인식,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공통된 정체성에 대한 몇 가지 진술로 시작한다. 이 인사말을 잡담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추구하는 목적은 비슷하다. 그들은 각각 당사자가 처한 고유한 상황을 인정하고 서로 간의 관계를 재확인하고 있다. 바울은 편지의 처음 몇 문장을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쓴 후, 신앙과 삶의 더 깊은 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한다. 누군가의 일이나 취미에 대한 일상적인 세부 사항에 매주 몇 분을 소비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동료 교인들의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결국 그들의 더 많은 문제까지도 맡는 권리를 얻게 된다.물론 잡담이 사라진 것이 100퍼센트 전염병 때문만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현대 생활 속 기술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우연하고 계획되지 않은 상호 작용의 기회를 서서히 줄여갔다. ‘세 조각의 유리: 우리는 왜 스크린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점점 더 외로워지는가(Three Pieces of Glass : Why We Feel Lonely in a World Mediated by Screens)’ 에서 에릭 제이콥슨(Eric O. Jacobsen)은 자동차, 전화 및 TV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공동체의 사회적 구조를 강화하는 인간 관계를 어떻게 약화시켰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오늘날 스크린 뒤에 숨는 것은 아주 쉽다. 즉, 우연한 대화 조차도 이제는 어느 정도의 의도가 있어야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약해져도 우리는 여전히 교회 잡담 속에서 많은 도전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과의 어색한 대화(중요한 문제일수록 일부러 천천히 언급하는 식의 대화)는 결코 편리하거나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원제: Church Small Talk Was More Important Than I Though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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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덩이에서 나를 건져 준 말씀의 밧줄
by Vaneetha Rendall Risner
2021-02-21
언젠가 절망의 구덩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능력을 발견한 적이 있다.첫 번째 남편이 나를 버렸을 때였다. 당시 나는 깊은 구렁에 처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회오리바람에 붙들려 이전에 누리던 행복하고 안전한 생활로부터 번쩍 들리더니 이내 캄캄한 우물 속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며칠 간 홀로 있었다. 다시 걸어갈 여력이 있는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나 있는지 고민했다. 거기에는 빛이 없었다. 앞이 어두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살 수 있으리라곤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용기를 감히 내지 못했다.그렇게 회오리바람이 내 인생에 몰아치기 전, 나는 시편 119편을 읽고 있었다. 그 고백을 음미하며 내용이 좀 길고 지루하며 짜증스럽게 반복되는 구절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절망의 구덩이에 빠지게 되자, 나의 태도는 더욱 비관적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그 구절들이 행복한 시절에만 그럴 듯하게 적용되지 평범한 시절에는 속이 텅 빈 약속일 뿐이라고, 아니 불행한 시절에는 잔인한 조소를 들려주기나 하는 속삭임이라고 여겼다. 그전부터 주님의 증거를 지키며 전심으로 그 말씀을 따랐건만 결국에는 부끄러움만 얻게 되지 않았는가 생각했다(시 119:2, 6).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정말 진짜일지, 내 인생의 모든 게 나를 실망시켰듯 그 약속도 결국에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게 아닐지 의심하게 되었다.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그렇다고 다른 데로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소망의 빛을 보기 원하는 심정으로 시편 119편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빛을 찾게 되었다.곧 안식을 찾아 헤매며 흐느끼다가 다음 구절을 읽게 된 것이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불현듯 이 구절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그 구절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나에게 생명을 달라고 간구했다. 내 힘으로는 뒤틀린 인생을 바로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나를 살게 할 수 있을지 미심쩍게 여겼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때부터 시편 119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유익을 주는지 나열해 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대충 넘어갔던 미묘한 의미를 담은 약속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약속들을 붙들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을 통해 나를 가르치고 위로하며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생겨났다. 그때부터 나는 시편을 읽기만 하기보다 본문을 연구하고 밑줄을 그으며 거기에 기록된 고백을 묵상하고 각 단락을 암송하기도 했다. 그렇게 낮에는 하나님 앞에서 반복해서 읊조리고 밤에는 깨어서 시편으로 기도를 올렸다.내게 필요한 그 말씀결국 시편 119편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아침마다 나는 말씀을 읽기 전에 이렇게 기도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또 나의 슬픔을 대신 표현할 말씀을 찾다가 시편 기자의 이 질문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중략]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시 119:82, 84).하나님은 그런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셨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이 내게 지혜를 주고(시 119:66), 내 길에 빛이 되어 갈 길을 지시한다는 확신을 주셨다(시 119:105). 실제로 그 말씀은 내게 소망을 주고(시 119:49), 고난 중에 위로를 주었다(시 119:50). 또한 나를 세워 주고(시 119:28), 내 마음에 즐거움과 평안을 일으켜 슬픔을 몰아내었다(시 119:111, 165). 그래서 나는 그분의 견고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시 119:76).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지 못했다면, 나는 절망감을 벗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성실하심으로 나를 괴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에(시 119:75), 그분이 나의 고통 중에 선을 이루시리라는 사실 또한 믿을 수 있게 되었다.변함없는 유일한 진리이후로 하나님은 날마다 나의 필요를 정확히 알 수 있도록 마음을 이끄셨다. 물론 그전부터 이 말씀을 알고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이 유배지에 있던 백성, 다시 말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느끼며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이 경험한 실망이 내가 느끼는 실망을 대변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이전에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런 식으로 분명하게 응답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사 30:21). 그때는 이사야 30장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그처럼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기 전에 그 백성이 환난과 고생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0-21).또 한 번은 절망 가운데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하다가 이 말씀을 읽기도 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나는 절망 속에서 새로운 눈을 뜨고 성경을 읽었다. 그러자 진정으로 내게 필요한 모든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안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 하루에 필요한 진리를 발견할 때까지 찾고 또 찾았다. 마치 지치지 않고 매달리는 과부처럼, 또 진주를 찾아 헤매는 상인처럼 말이다.이후로는 기대감을 안고 경건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만나 주셨다. 또한 나를 가르치고 위로해 주셨다. 그렇게 그분의 말씀만이 한결같이 기댈 수 있는 변함없는 반석이 되었다. 그래서 내 인생이 바람에 이는 모래 같다 여겨질 때 나는 그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절망의 구덩이에서 나를 건져 준 밧줄이와 같이 나는 매일을 생존하는 데 필요한 교훈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내가 배운 교훈을 든든하게 받쳐 주는 반석과 같은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한 진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보여 주는 큰 그림이 되어 주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매일매일의 필요를 넘어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공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바로 그분이 주신 말씀에서 하루에 한 가닥씩 뽑아 낸 실이 마침내는 서로 연결되고 엉기어서 튼튼한 밧줄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밧줄로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밧줄을 통해 시련과 역경 끝에는 영광스러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음도 확신하게 되었다.그리하여 나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는 진리를 믿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의 유익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진리를 믿게 되었다. 정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분이라면,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서 최선의 결과를 허락하심이 당연하기 때문이다(롬 8:28-32).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 중에 더 귀히 여겨졌다. 그리고 심히 어두운 시절을 만난 나에게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마치 예레미야가 역경 가운데 슬퍼하면서도 이렇게 증언했듯이 말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렘 15:16). 이처럼 우리가 고난당할 때조차, 아니 고난당할 때야말로, 그분의 변함없는 말씀은 우리를 세우고 이끌어서 마침내는 영원한 안위를 누리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사 40:8).원제: My Rope Out of the Pit: The Word I Needed in My Worst Day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장성우
영성
묵상과기도
시편
말씀
경건
시간
안식
절망감
즐거움
배우자가 당신을 떠났을 때도 소망은 있다
by Craig Luekens
2021-02-15
나는 몇 가지 이유로 이 글 쓰는 것을 꺼렸다. 행여 이 글이 이혼이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말을 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 정당화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적인 고충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유쾌하게 전달하는 이 시대의 가벼운 유행에 빠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느낀 연민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 더욱이 가십거리나 중상 모략으로 독자들을 유혹할 마음도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것은 이혼이 끔찍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만연한 문제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와 목회자의 삶에까지 찾아오는 이혼의 현실을 정직하게 그려서, 이혼이 주는 잔혹한 아름다움 속에서조차도 그리스도의 자비를 높일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이 당신으로 하여금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하고, 또 이혼의 아픔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사랑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길 바란다.기본적이고 또 공식적인 사실은 12년 간 나의 아내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였던 여자는 신앙을 버렸고 이어서 이혼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미 교회를 떠난 그녀는 이혼과 관련해 그 어떤 성경적 근거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녀가 결혼 생활을 버린 것은 사실 내게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고, 또한 내가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남편이 되는 데 실패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결혼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작년에 이혼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섯 가지 교훈이 있다.1.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했다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애통하는 법을 알아야 하지만(우리 신앙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고난과 죽음이기에), 나는 사실 그동안 수많은 개인적인 고난으로부터 크게 보호받아 왔었다. 내가 겪은 슬픔의 과정은 여러 형태를 띄었고, 결코 일차원적이지 않았다. 어떤 때는 내가 지금 진짜 슬픈 것인지 의아할 때도 있었고, 또 당장 몇 분 후에 어떤 감정이 닥쳐올지 아예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평생 가졌던 꿈의 상실, 내가 준비하던 계획의 종말, 이제 사라져버린 내 아이들과의 그 소중한 시간들, 오, 내 자식들! 가슴을 후벼파는 통증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시편 말씀과 더불어 '지친 영혼 피난처 있으니', '십자가를 내가 지고' 그리고 '주님께 물었네'와 같은 귀한 찬송이 없었다면 내가 예측할 수 없는 그 슬픔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어떤 날은 시편과 찬송가 속 모든 가사가 내게도 진리로 다가왔다. 그러나 또 어떤 날은 찬송이 울려 퍼질 때면 바닥에 얼굴을 대고 따라 부르며, 그 속의 가사가 내게도 진리가 되기를 바라곤 했다. 또 어떤 날은 도무지 그 가사가 진짜라고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리라는 사실만으로 그 찬송을 듣기도 했다. 슬픔의 어둠 속에서 나는 그때처럼 절실하게 하나님을 필요로 했던 적이 없었다. 2. 부당한 고통을 받아들여야만 했다특권으로 가득했던 내 삶에서 이혼은 내가 처음으로 만난 고통과 불의였다.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꿀 수도 없던 고난에 시달리던 그때, 내 침대 옆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쓴 문학 전집이 쌓여 있었다. 나는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과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을 재발견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작가들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겪은 고통은 내가 개인적으로 겪는 슬픔과는 그 형태에서도 또 깊이에서도 차원이 달랐지만, 나는 고통이 삶의 일부라고 말하는 작가들의 생각을 통해 유대감이 주는 위로를 발견했다. 비록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따르는 제자라고 해도 고통을 추구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고통이 알아서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부당한 고통을 겪는 내내, 나는 힘든 길을 걸어야만 했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또 위로를 받았다. 3. 쓴 뿌리를 버려야 했다나는 오랫동안 분노했다. 그 감정은 아직도 가끔 나를 찾아온다. 그러나 결국 나는 분노를 긍휼과 사랑으로 바꿀 수 있었고, 결국 나를 자기 연민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켰다. 거룩하고 죄 없는 분이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에 쓴 뿌리를 계속 품고 있을 수 있겠는가?성령께서 내 속에서 일하셨고, 나는 이제 좋은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전 아내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정말로 100퍼센트 그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도달하려면 아직까지 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실로 놀랍게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부드럽게 하셨다.4. 내 속에 깊이 숨은 죄를 대면해야만 했다 “자기 자신을 영적 멘토로 택하는 것은 바보를 멘토로 삼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교부가 있다. 또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믿을 때 쓰러지지 않은 사람을 난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다행히 나는 훌륭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며, 진실하고 은혜로우면서도 의미 있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너무도 자주 나 자신을 고립시킴으로써 죄의 기만적인 계획에 빠지곤 했다. 예를 들어, 새롭게 연애를 시작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죄가 가진 커다란 힘에 관해서 여전히 순진했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셨고, 내가 얼마나 절박하게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알게 하셨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이렇게 썼다. “의인들 가운데 갑자기 진짜 죄인이 발견될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겁에 질린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과 위선 속에 살면서도 죄와 더불어 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죄인이다! [중략]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경건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복음의 은총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진리를 들이대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죄인이다. 대단히 절망적인 죄인이다. 이제 죄인인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라.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원하신다. 그는 당신에게서 희생도, 공로도,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 그는 오로지 당신만을 원한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잠 23:26).”이혼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또 내 마음을 하나님께 더 드릴 수 있다면, 나는 이혼의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리라.5. 결혼은 여전히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드라마다나는 최근에 이혼 이후 처음으로 결혼식 주례를 하는 놀라운 특권을 누렸다. 나는 그 부부가 나의 개인적인 상황을 혼전 상담이나 결혼식 주례자의 장벽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 고무되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부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그 부부의 공개적인 결혼 서약을 목격하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결혼에 대한 나의 확신이 흔들린 것은 아니다. 건강한 결혼은 여전히 가능하다. 결혼은 변함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내 경험이 진리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6. 가장 힘든 시간에 나는 종종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혼이 최종 확정된 후 사람들이 했던 이런 말을 나는 싫어한다. “이게 최선이었어. 이제 당신 두 사람은 각자 행복하기만 하면 돼. 애들도 잘 자랄 거야.”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진리를 동시에 단단히 붙들도록 요구한다. 죄는 끔찍하고 그에 따른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과 그분을 사랑하는 자녀들의 선을 위해 죄를 사용할 수 있으며 또 사용하신다. 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혼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또한 하나님이 이혼까지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그분은 나를 지키셨고, 내게 자신을 더 많이 보여주셨고,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예수님을 더 닮아 가도록 만드셨다. 나는 이혼이 남긴 수많은 상처들이 너무도 싫다. 그럼에도 나는 시편 기자와 함께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고후 1:3-4)라는 말씀에 의지하면서 나는 이전보다 더 영적으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분이 주시는 피난처에서 당신의 지친 영혼도 위로받기를 기도한다. 원제: Hope When Your Spouse Divorces You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가정
결혼
디트리히본회퍼
위로의하나님
이혼
영적성장
위로
결혼생활
애통
쓴뿌리
기도는 아버지를 향한 자녀의 특권이다
by Burk Parsons
2021-02-14
지역 교회 목사로서 나는 수많은 배경과 문화, 그리고 다양한 나라와 종교가 섞인 다민족 공동체인 중부 플로리다 지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믿고 또 어떤 종교를 반대하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이다. 하나님의 우주적 아버지되심에 대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즉시 이렇게 반응한다. “글쎄요,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라는 측면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맞다. 바울이 아테네(행 17:29)에서 선언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소생'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오로지 성령으로 인해서 그의 아들이 전가해준 의로 인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양자가 될 수 있다. 상당수의 기독교인까지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고 있지만,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믿음으로 인해서 그의 아들과 연합한 자들만이 오직 하나님에게 입양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만이 바울이 자신을 포함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 대상이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또한 참고하라. 요 1:12; 롬 8:14–21; 9:8; 갈 3:26).가족으로 입양'아버지'라는 단어와 함께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주었을 때, 그는 이 세상 모든 인류를 다 포함하는 전 우주적 의미로 그 단어를 쓴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또 우리와의 관계와 관련해서 보다 더 심오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단지 그냥 아버지(a Father)가 아니라 유일한 아버지(the Father)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을 때, 그는 우리를 가족으로 만드셨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항상 상기하게 된다. 하나님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통해 우리를 공동체를 위한 존재로 새롭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함께 모이도록 부르신다. 공동체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당신을 예배하도록 하신다.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믿는 자들과 그 자녀들의 언약 공동체인 살아있는 몸의 생명력 있는 한 지체임을 되새기게 된다. 독생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한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러나 1세기 많은 유대인들에게 이 일은 오만하게 여겨졌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그들에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요 1:14; 8:19; 14:7).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친 것은 당시의 유대 랍비들의 눈에 좋게 봐줘야 교만한 행동, 최악의 경우에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명백하게 예수님이 자신을 거부하는 몇몇 유대인을 꾸짖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아닐 뿐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바로 사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요 8:39-47). 유대인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았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아닌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지 않은 그들의 본성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성령님이 주시는 들을 수 있는 귀,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그토록 오랜 시간 기다린 여자의 후손, 오랜 기간 고대하던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창 3:15; 사 9:6).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지 않은 본성의 상태였을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정복하고 친구와 아들로 삼기 전까지는 우리도 하나님의 적이었다. 환영받고 축복받음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오직 그 길을 통해서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와 형제된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그가 우리도 맞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즉, 그는 많은 형제들 중 맏이가 되었고 따라서 그와 연합함으로 우리는 그와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과 거룩함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벧후 1:3-4). 우리의 아버지는 자애롭고 또 너그러운 아버지이기에 이 땅에서 만나는 육신의 아버지가 돌보는 것과 전혀 다르게 우리를 돌보시고, 이 땅의 아버지가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데, 이는 다 그가 이 땅의 아버지가 줄 수 없는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히 12:9-10; 롬 5:8).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숨은 욕망과 죄를 다 알면서도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자로 바꾸실 수 있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일하시지 않는다고, 또 우리의 아버지가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하기에, 아예 간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삼으셨는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고아처럼 간주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는 단지 우리를 '입양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므비보셋은 다리를 절었고 또 다윗 왕과 원수 관계에 있었다. 우리는 단지 다리를 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죄로 죽었고 우리의 왕,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과 원수가 된 존재다. 그러나 다윗이 므비보셋을 환대하고 축복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환대하고 축복하신다. 그는 우리를 맞아서 씻어주심으로 그의 식탁에 편히 기대앉아 쉬게 하시고 또 함께 식사하고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게 하셨다(삼하 9; 요 13:1-20).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예수님은 또한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아버지가 그의 영광 안에서 완전하고 세상을 초월한 존재며 하늘 위 영적인 영역에 있기 때문에 그는 결코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우리 가까이 계시며 항상 존재하고 언제라도 우리의 기도를 듣고 우리와 소통할 준비가 된 아버지라는 것을 예수님은 상기시킨다(시 145:18; 렘 23:23; 행 17:28; 약 4:8).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어떤 권력자나 너무도 바빠서 결코 우리 근처에 오지 않는 그런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 대신 아침이든 밤이든 항상 그 언제라도 우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온 우주를 운행하는 이, 주권자이자 삼위일체이신 전능한 하나님께 겸손히 그러나 자신있게 “아버지여~”라고 울부짖을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쳤을 때, 그는 또한 거룩히 여김을 받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라고도 가르쳤다. 하나님이 스스로 공개한 언약의 이름은 여호와다(출 3:14).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또는 거룩한 이름의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로, 우리 자신과는 별개로, 하나님 스스로의 선포에 의해서 거룩해졌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 권위나 권세로 인해 구별되거나 성화된 것이 아니다(히 6:13). 그의 이름이 거룩한 것은 그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과 같지 않으며, 그의 이름은 단순히 우리가 그를 부르는 그 무엇이 아니며, 그의 이름은 그를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여호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이름이 거룩하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그에게 그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어 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인정하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우리의 경외감을 확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전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알리고 거룩한 이름으로 존중받게 되도록 역사하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며, 일단 우리를 자녀 삼으신 이상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다(신 31:6; 히 13:5).원제: Humbly Coming Before Our Father: The Privilege of Christian Praye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입양
자녀
축복
기도
특권
독생자
삼위일체
아버지되심
나이 든 부모님이 도움 받기를 거부할 때
by Gaye Clark
2021-02-13
“난 됐다. 나는 아무 데도 안 간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못들어 봤니? 이게 네가 나를 공경하는 방법이냐?” 나이 든 한 여자가 병원에서 넘어져 엉덩이뼈가 부러졌다. 요양원으로 가야한다는 딸의 말에 그 여자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2011년 이후로, 매일 만 명의 베이비부머가 65세를 넘긴다.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인구 예상에 따르면, 2030년까지 18퍼센트의 인구가 65세 또는 그 이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점점 많아지는 고령 인구를 돌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돌봐야 할 노인층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도전은 하루하루 겪어야 하는 고통이다. 그중 적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이상의 노인을 돌본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족을 돌보고 또 일도 해야 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데 소요되는 신체적, 정서적인 부담 외에도 나이 든 혈족과의 관계는 때때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의 연속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또 약 처방을 받으면서 점점 소외감을 느낄 뿐 아니라 정신 질환까지 경험하기도 한다. 나이 든 가족을 돌보는 것은 마치 재난 지역을 돌보는 것 또는 선교지에 있는 것, 아니, 그 두 가지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이런 스트레스에 더해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당신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공격적으로 나올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담대한 마음과 강한 멘탈이다. 여기 열 가지 제안이 있다. 1. 미리 대비하라요양원에 가는 것, 그러니까 이제는 자동차 키도 포기하고 은행 계좌도 자식한테 넘기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개 병원에서 넘어져서 크게 다치거나 아니면 심각한 병이 발병했을 때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오히려 대화를 더 힘들게 할 뿐이다. 요양원에 가는 것과 같은 심각한 이야기는 당신의 부모가 그나마 괜찮을 때 하는 것이 낫다. 그러니까 치매 또는 다른 증세가 나오기 전에, 병원에 입원해서 이미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하는 것이 낫다. 2. 질문하라부모에게 최후통첩을 하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대신, 가능하다면 당사자를 의사 결정 과정에 포함시켜라. 당사자가 느끼는 공포와 걱정을 당신이 다 알고 있다고 간주하지 마라. 당신 생각을 피력하기 전에 먼저 묻고 배우라. 다음과 같은 열린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라. “내가 어떻게 기도해주면 좋을까요?” 3. 치매라고 간주하지 마라부모의 고집스런 생각을 그냥 나이가 많아서 그렇다고 치부하는 것은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요양원과 관련해서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어머니를 알츠하이머라고 쉽게 단정하면 안 된다. 지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다 피차 선입관에 입각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 (잠 18:17). 안전 또는 복지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당신의 부모는 당신의 의견에 얼마든지 반대할 권리가 있다. 4. 의학적 진단을 요청하라부모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는 것이 반드시 치매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떤 의학적 원인 때문일 수 있다. 그런 경우 주치의와 약속을 잡을 필요가 있다. 신장 감염 또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과 같은 의학적 상태는 노인의 판단에 영향을 주고 혼란과 동요를 유발할 수 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은 이러한 상황이 제대로 알려질 때, 판단 능력이 오히려 더 좋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5. 최대한 빨리 외부 카운슬링을 받으라부모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개입해야 하는 경우라면, 가능한 한 많은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라. 가족의 도움과 관련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쓴 경우라면, 노인에 관한 법을 잘 아는 변호사에게 연락하여 후견인을 얻는 문제에 도움을 받으라. 목회를 돕는 직원 뿐 아니라 의료 전문가, 요양 관리자, 노인 이동 관리자 또는 노인 돌봄 관리자와 같은 다양한 전문가는 당신이 힘든 여정을 걷는 중에 만나는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 15:22). 6. 공감하라“나한테 가장 힘들었던 일 중 하나가 아들에게 자동차 열쇠를 주는 거였어.” 한 노인이 언젠가 내게 한 말이다. “내 아들은 그때 내가 어떤 상실감을 느끼는지 알지 못했을 거야.” 대부분의 노인은 배우자, 건강, 독립성, 소중한 소지품 또는 주택 등등, 여러 번의 상실감에 고통받는다. 당신도 같이 마음 아파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변화를 제안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제공하라. 7. 인내를 연습하라“처음에는 내가 아버지 통장을 관리하는 것을 아버지가 대단히 반대했어요. 한참이 걸렸어요, 아버지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는요.” 한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재정에 관련된 결정을 할 때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고민해야 한다. 재정적인 정리를 하거나 또는 재정 규모를 줄이는 데는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주말에 불쑥 나타나서 굿윌(Goodwill, 미국에 있는 기부센터-역자 주)에 가져다줄 물건을 트럭에 잔뜩 쌓아서 바로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올 때마다 가구 하나씩 처리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8.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하라비협조적인 부모는 스트레스와 가족 갈등을 가져올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수 있다(롬 8:28). 나는 사이가 벌어졌던 형제가 부모를 돌보는 중에 자연스럽게 화해하는 것을 보았다. 말기 질환으로 호스피스에 대해서 의논하면서 부모가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에게 우리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맡길 수 있다. 9. 교회를 끌어들여라당신이 출석하는 교회 또는 부모가 다니는 교회에 상황을 알려주라. 그리스도의 몸은 지친 가족에게 꼭 필요한 휴식과 격려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지역 교회는 간병인과 그 가족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10. 복음을 굳게 붙잡으라나이를 먹는다고 항상 너그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더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독립성을 잃은 부모는 가장 편하게 느끼는 대상, 즉 자녀에게 그 분노를 쏟아낼 수 있다. 이런 경우 성인이 된 자녀는 지치게 되고 모든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나이 든 부모를 돌봄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한 그리스도에게 더 큰 감사를 할 수 있게 된다(롬 5:7-8). 그 누구도 자연적으로 예수님처럼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능력을 타고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간병을 통해 우리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우리의 구주를 더 의지하게 된다. 오로지 그분만을 붙잡게 된다. 원제: When an Aging Parent Rejects Your Hel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생활
관계
부모님
공경
예방
치매
돌봄
공감
인내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라 세워지는 가정
by Paul Tripp
2021-02-12
나는 삶의 방식에는 오직 두 가지 방식만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든다. 하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과 다스림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삶이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방식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삶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이 되려는 삶에 더 익숙하지는 않은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역동성이 자녀 양육과 결혼 생활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점검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자녀 양육성공적인 자녀 양육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올바르게, 통제권을 내려 놓는 것이다. 자녀 양육의 목표는 한때 완전히 우리에게 의존했던 자녀들을 독립적이고 성숙한 성인이 되도록 키우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독교 공동체에 바르게 연결되고, 그들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육아 초기에는 부모인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 우리는 육아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로 불평을 하면서도 그런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즐긴다. 어린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 그들의 음식, 쉬는 시간, 운동 방법, 그들이 보고 듣는 것, 가는 장소, 심지어 친구까지 모두 우리가 선택해 준다. 하지만,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때 뒤집지도 못했던 아기가 이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화장실 안으로 기어 들어가 화장실에 걸려 있는 화장지를 풀어 버릴 수 있게 된다. 그 아이는 곧 자가용을 몰고 집을 떠나 부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이 선택한 친구들로 인해 힘들어 하는가? 친구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그 부분은 성숙해 가는 자녀에게 통제권을 넘겨주어야 하는 영역이다. 자녀들의 성숙과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하여 우리가 그들을 통제하지 않는 것에 자녀 양육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그런 종류의 통제를 행사하실 수 있다. 따라서 자녀 양육은, 말씀의 원리를 통해 자녀들 안에 자제력이 커가도록 심어 주어 그들에게 훨씬 폭넓은 선택 상황이 주어졌을 때 스스로 통제하고 독립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돕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나는 상담사이자 목회자로서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싶어하는 부모들을 정기적으로 돕고 있다. 내가 상담했던 부모들은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희망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십대 자녀를 어린 아이와 같이 취급하려 했다. 결국에는 부모라기보다는 마치 교도소장처럼 명령과 통제로 자녀들을 다스리려고 했다. 그리고 그 힘들고 중요한 순간에 복음으로 자녀들을 보살피는 것이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자녀 양육 문제에 있어서 다음 세 가지 진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1.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그분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상황은 없다(엡 1:22).2.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약속하신 선한 일을 이루고 계신다(롬 8:28). 따라서 성장해가고 있는 자녀의 모든 욕구와 생각 그리고 행동을 우리가 통제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주권적 다스림을 받고 있다. 3. 자녀 양육의 목표는, 자녀에게 우리의 형상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취향과 관점 또는 습관을 자녀 안에 복제하려 하거나 그들 안에서 우리 형상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들 안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을 정직하게 보지 않고는 자녀 양육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자녀들의 성공과 감탄할 만한 일에 맞추어져 있고 그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으면, 그들의 영적 필요를 돌보기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자녀가 우리의 기대를 채워주기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 어려움의 순간들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삼지 않으면, 우리는 자녀를 단지 좌절감을 주며 실망과 짜증을 일으키는 존재로 보게 되며, 그들을 돌보라고 하신 부름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분노만 커져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결혼통제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원리는 결혼 관계에서도 똑같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 가운데서 결혼 생활을 한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깨진 세상에 의해 매일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어쩌면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우리 생애와 결혼 생활의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결해 나가야 하는 주요 문제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가도록 선택해주신 환경을 우리가 피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가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결혼으로 인한 우리의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운명이거나 혹은 우연한 기회에 얻은 행운이 아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다. 사도행전 17장은 하나님이 우리가 살 곳들과 살 날들을 정확하게 결정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계시며,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로 인해 놀라지 않으신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맞이하더라도,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 세상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우리를 그 속에 두신 목적을 아는 것은 결혼 관계를 연합과 이해와 사랑 위에 세워 가는 데 근본이 된다.우리는 대부분 개인적인 행복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즐거워할 능력을 주셨고 즐거워하도록 우리 주변에 놀라운 것들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작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은 뭔가 깊고 필수적이며 영원한 것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거룩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계신다. 거룩이라는 용어 때문에 흥미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그 단어는 하나님이 일상의 상황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려 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분은 우리의 현재 모습이 모두 원래 창조되었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 시인하기가 어렵겠지만, 우리 안에는 아직 죄가 있으며, 그 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원래 모습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죄는 모든 이들이 연합과 이해와 사랑의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방해물이다.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현재 마주한 어려움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온전히 우리를 살피시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 우리가 느끼는 행복을 잠정적으로 중단시키거나 보류하실 수도 있다.우리가 하나님의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우리가 처한 삶이 이해되고,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이 불합리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도구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과 결혼 관계에 소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 가운데 계시며,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셨던 모습으로 재창조하기 위하여 그 상황들을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는 더 낳은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더 좋은 결혼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이 타락한 세상의 것들이 우리 가정의 문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서 이러한 어려운 것들이 우리를 통하여 선한 결과를 내도록 일하시기 때문이다.원제: Ordering the Home without Being Controlling출처: www.ligonier.org번역: 정은심
가족
양육
통제권
결혼
거룩
패러다임
순종
질서
자녀영육
행복
예수님처럼 당신은 화해의 메신저입니다
by Rod Mays
2021-02-11
관계는 왜 이렇게 꼭 복잡해야만 할까? 왜 좋은 친구들도 서로 간에 '복잡한 상황'을 맞아야 하는 걸까? 왜 가족끼리도 사이가 벌어져서 몇 년 동안 말도 하지 않는 그런 관계가 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적이자 동시에 서로 간에도 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바로 화해의 메시지다(그것은 서로 갈라진 관계를 하나로 만든다는 것인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서로 묶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바울이 쓴 화목이라는 단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움직임을 묘사하는데, 그 의미는 적대감과 적개심 또는 악의를 종식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소통은 방해받았고, 그 관계는 깨어졌다. 이사야 59장 2절이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에게는 그의 백성에게 사랑을 다시 보여주기 위해서 극단적인 회복책이 필요했다. 극단적인 회복책은 십자가 예수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왔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우리가 아닌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하길 원했다. 하나님 은혜의 수혜자는 이제 이런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의 메신저가 되었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린 능력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새 생명을 준다. 옛 생각, 옛 행동, 옛 의견, 옛 성격과 태도는 사라졌다. 그것들은 이제 다 죽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남자와 여자는 이제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부름받았다. 이 메시지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나님이 화평을 위해 우리에게 하신 일과 같은 방식으로 전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바로 그런 극단적인 관계의 회복을 우리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C.S.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썼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예수님은 그 죄로 인해 상처받은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려고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기 자신이 모든 공격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주된 이해 당사자처럼 행동했다”('순전한 기독교'). 하나님이 바로 모든 갈등에서 '가장 상처를 받는' 존재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하찮은 인간이 상처와 분노를 잊어 버리고, 너무도 많은 고통을 초래하는 죄가 궁극적으로 하늘 아버지를 대적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문제는 이 화목하게 하는 의사 소통이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감정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화목이 필요함을 깨닫도록 하실 때에야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세상에 만약에 갈등이 없다면 화목에 대한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 죄를 짓는다. 또는 서로 다른 이의 죄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갈등이 싹튼다. 자존심, 잘못된 가정, 분노, 그리고 마음의 쓴뿌리는 다른 이들의 행동 또는 태도 때문에 생긴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을 때, 화목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오해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죄를 무시하는 것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성경은 또한 인간의 의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그러나 죄가 특별히 큰 상처를 주거나, 심각한 후유증을 가지거나, 또는 교회의 권징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하다면, 거기에 대해서 마태복음 18장 15-17절은 이렇게 말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당연히 갈등의 당사자들에게는 사적인 소통이 훨씬 더 편할 것이다. 갈등이 막 시작됐을 때 특히 더 필요한 명확하고 온유한 소통은 잘못된 가정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또 당사자의 영혼에 지속적인 슬픔을 초래하는 성급한 조언을 막을 수 있다(시 13:2).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한다(엡 4:15). 그것은 말을 할 때, 인내와 온유함을 가지되, 자랑, 거만, 무례, 초함, 그리고 원한을 갖지 않는 것이다(고전 13).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화목을 전달하는 소통의 본질이다. 우리는 왜 그래야 하나? 왜 이런 수고를 해야 하나?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그의 백성이 하나되게 해 달라고, 하나됨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요한복음 17장 20-23절에서 기도했다.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관계를 해치는 갈등의 문제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명성이 달린 중요한 문제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우리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거나 아니면 두려움에 도망가게 한다. 쓴뿌리와 원한은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함을 사라지게 한다. 회피는 다른 이와의 열린 관계가 주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이런 감정의 근원에는 자만심이 있다. 어쩌면 말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진짜 칼과 총 때문에 누군가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수도 있다. 음주 운전자로 인한 교통사고일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이들 간의 잡담에서 나의 인격이 묵살당했을 수도 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기는가 하고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시편은 상실과 아픔 속에서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표현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대적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선한 이름이 바로 보존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데 초점을 맞춘 의로운 분노가 되어야 한다(시 37:7–13; 4:4–8; 13:3–6; 55:12–14, 19–23).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 4:4). 숙고하고 생각하라. 무엇을? 우리가 하나님과 떨어짐으로써 상실했던 진리의 달콤함과 풍성함,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고 또 우리와 화목한 하나님의 마음은 이제 우리가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할 때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대하실 때 하셨던 방법, 우리의 죄를 동쪽에서 서쪽이 먼 것처럼 제거하시고(시 103:12)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에 더이상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바로 그 방법으로 하도록 만드신다. 때로는 화해에 실패할 때도 있다. 다시 소통의 길을 열어서 의미가 있는 관게를 회복하는 게 불가능하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럼 화해의 노력을 끝내고 화해하지 않은 당사자 간에 반목만 더 커지도록 놔둬도 될까? 아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화목의 메시지를 전달할 기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 6:27).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는 있기 마련이고 친구로서 회복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계속 사랑해야 한다(롬 12:17-19 참조). 어떻게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이런 요구를 하실까? 그가 우리에게 바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롬 5:10). 화해는 고통스런 과정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해하신다. 하나님에게 화목은 그에게 죄를 지은 인간을 위해서 그의 아들을 죽이는 고통스런 과정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이 세상의 원수와 화목하기 위해 아들을 데려다가 제물로 바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는 대신 자만심을 버리고 그가 보여주신 화목의 메시지를 다른 이에게 전하라고 하신다. 그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런 노력이 실패했을 때에도, 그는 우리에게 이타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바로 그 마음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는 우리가 이제는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행동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임을 기억하라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원제: The Necessity of Reconciliation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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