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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회복을 갈망하는 기도
by David Mathis
2020-02-17
시편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노래는 찬양이 아니다. 감사도 아니다. 그건 애통함이다.이 사실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기도를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대에 살면서 각종 다양한 방법으로 죄를 짓는 것을 생각하면, 또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인(고후 7:5)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떻게 항상 찬양과 감사만 할 수 있을까? 항상 그런 건 아니더라도 종종 우리는 애통한 심정으로 하나님에게 도와 달라고, 고쳐 달라고, 회복시켜 달라고, 또 환난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한다.시편의 찬양시가 주는 영광은 명확하다. 우리의 환경과 관계없이, 또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면서도 찬양하는 게 맞는가 아닌가 하는 우리의 느낌과도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가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애통하는 시 속의 영광은 이것이다.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의 환난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당해도 다른 곳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바로 그 행동 자체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애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큰 피난처임을 알게 된다.우리의 영혼이 시들어갈 때찬양과 감사의 시가 영광스러운 만큼, 또 시편 속에 애통하는 시가 많다는 사실은 지금 세대를 돌아보면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ggemann)이 “방향을 읽어버린 시들”이라고 불렀던 애통하는 시가 시편 속에 많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방향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애통하는 시는 우리에게 더더욱 도움이 된다.시편 6편을 예로 들어보자. 다윗이 만난 힘든 상황이(그 상황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관련한 것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자신의 죄를 보게 했고, 또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절규하도록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 시를 회개에 초점을 맞추는 “참회의 시편” 여섯 편(32, 38, 51, 130 그리고 143편) 중의 첫 번째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죄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죄로 인해서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렇기에 시편 6편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고통과 혼란은 매우 심각하다. 이렇게 방향을 잃어버린 소용돌이 속에 빠진 다윗에게, 또 우리에게 하나님은 단지 이를 악물고, 미소 띤 얼굴로 긍정적인 노래를 부르며 고통을 이겨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말과 소년’(The Horse and His Boy)에서 아슬란이 샤스타에게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한다. “너 힘든 거 다 내게 말해봐.”라고 말이다.하나님은 우리의 혼란을 아신다. 그 혼란을 단지 남들이 보지 못하게 옷장 밑으로 쓸어 넣어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가 영감을 주어 기록한 시편 속 가장 흔한 형태의 시를 통해서 그 혼란을 인정한다. 우리에게 고통을 연습해서 익숙해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첫 일곱 구절에서 다윗은 절망 속에서 절규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런 간구는 애통하는 시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다윗은 마지막 세 구절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신감을 보이며 시의 어조를 바꾸어버린다(8-10절). 하나님 안에서 회복한 자신감에 넘치는 어조로 시를 마무리하는 것도 애통하는 시의 전형적인 형태이다.하나님은 우리가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방향 상실의 수준을 뛰어넘길 원하신다. 사실상 하나님은 성경의 애통하는 시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영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즉 그분의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설계했다.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시편 6편에서 고통과 혼란을 호소하던 다윗이 하나님 안에서 회복한 자신감과 확신을 표현하는 장면은 정말로 놀라울 정도이다. 그는 자신이 수척하고 뼈가 떨린다고 했다(2절). 그리고는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신다고 했다(6절). 그랬던 그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선언한다.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 6:8-9)이제 방향이 바뀌었다. 그는 선언한다. 자신의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게 될 것이라고(10절).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었다는 것을, 또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할 수 있었을까? 새롭게 드러나는 그의 이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그건 처음 일곱 구절이 지나고 나서 하나님이 그의 귀에 새로운 계시를 속삭여서 받아낸 게 아니었다. 또 우리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는 마지막 세 구절이 다윗이 처음 애통하는 기도를 하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그러니까 기도하고 난 후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나서 추가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사실 10절은 두 번에 걸쳐서 구원이 여전히 미래에 일어날 것임을(ESV 성경은 “shall”로 표기되었다) 암시하고 있다. 그 구원이 이미 벌어진 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의 강력한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도 다윗처럼 영혼이 낙담하고 지칠 때 다윗과 같은 자신감을 가지는 방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어떻게 방향을 바꾸시는가거기에 대한 대답은 시편 속에 있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는 진리를 상기하는 것(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이름 야훼, 즉 여호와를 반복해서 부르고 있다), 당신의 영광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죄성 속에서도 드러나는 다윗의 정직함,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 믿음과 자신감이라는 은혜가 다윗에게 주어졌다. 방향 상실의 중심에서도 영적 온전함(spiritual sanity)이 회복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이 누구이고, 또 그가 하신 약속을 붙잡았기에 가능했다. 애통함은 힘들고 괴로워하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뜻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통로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적인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우리는 먼저 영적 방향 상실에서 방향 재정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리고 외부 상황이 좋게 바뀔 그때까지, 하나님이 정한 그때까지 필요한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누가 감히 왕과 비교 하랴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다윗 왕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지.” 다윗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의 왕이었으니까 틀린 말도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러나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나는 주를 구주로 고백하는 이 세상 수십억 기독교인 중 한 명일 뿐인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듣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내가 다윗처럼 말할 수 있을까? “주님이 들으셨다. 그가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라고? 내가 다윗이 가진 자신감 비슷한 것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당신도 다윗이 가졌던 그 자신감과 100% 동일한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보다 더 큰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다윗보다 더 위대한 그의 후손이다. 그리스도는 다윗이 실현하고 싶었던 모든 일의 완성이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 장차 그의 민족의 왕이 될 존재였다.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그가 다윗의 후손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다윗이 위대한 이유가 그의 후손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 주님으로 믿을 때 그 믿음은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서 영적으로 우리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우리의 죄만을 가져가신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모든 능력도 다 우리 것이 되게 하셨다. 자신감에 대한 질문은 우리를 어떻게 다윗과 비교할까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어떻게 다윗을 감히 예수님과 비교할까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이 다윗의 애통함도 들으셨다면, 다윗의 호소를 듣고 그의 기도에 응답했다면, 어떻게 그가 독생자 아들이 외치는 애통함을 듣고 응답하지 않으시겠는가? 당연히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아니 그보다 더 확실하게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 하나님의 놀라운 초대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시편 6편 10절에서 말하듯이 “갑자기”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당신이 지쳐서 낙담하고 있다면, 당신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얼마나 오래입니까?”(3절)라고 물었다면, 하나님이 이미 당신의 기도를 들었고 당신의 기도를 응답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건 하나님이 당신의 환경을 당장 바꾸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또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는 보통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는다. 다윗의 확신과 희망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구원이 아니라 내적인 회복을 통해서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부르는 애통의 기도를 듣고 그에게 필요한 영적인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때에 마침내 완전한 구원이 올 때까지 그가 견딜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초대는 그의 귀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있다는 것이고, 또 그는 단지 찬양과 감사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그를 향해 울라고 초대하신다. 우리의 고통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오라고, 그리고 모든 슬픔을 다 털어놓으라고 하신다. 그는 들으시고 그분의 시간에 반드시 움직인다고, 그리고 그날까지 필요한 힘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Church and the Offices of Christ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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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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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양육에 필요한 세 가지 안경
by Champ Thornton
2020-02-14
“결혼하기 전에 나는 자녀 양육에 대한 6가지 이론을 알고 적용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이제 나는 6명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자녀 양육 이론을 한가지라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이 말은 17세기의 시인 존 윌모트(John Wilmot)의 말이지만 부모라면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자녀 양육은 복잡하다. 하지만 자녀 양육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부모로서 우리는 자녀들이 현실과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돕기 원한다.”이 소망은 아내와 나에게 자녀 양육의 원리가 되었고, 안개 속에서 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었다. 어느 부모라도 말할 수 있는 단순한 원리이지만,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과제는 확실히 단순하지 않다.자녀 양육에 요구되는 일들모든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각각 고유하고 다양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다. 이 말은 자녀 양육이 한 가지 이론으로 모든 경우에 다 통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자녀가 한 명씩 증가할 때마다 그 복잡성은 더 커진다. 수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도 더 다양해지며, 구성원 각각의 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요구한다. 자녀 양육이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일 중의 하나라는 말도 과언은 아니다.풀어야 할 주제도 많다. 오늘날 당면하는 복잡한 주제들에 대해 자녀들과 어떻게 이야기할까? 부모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에서 동성애와 성전환까지 모든 주제에 대해 준 전문가의 역할을 하도록 요구된다.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은 양육, 가족, 자녀 등에 대한 정보가 넘친다는 점이다. 가족과 친구들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나름대로 조언을 한다. 자녀 양육에 관한 책이 책꽂이에 가득하게 있을 수도 있다. 수없이 많은 웹사이트, 블로그, 유튜브, 팟캐스트 등에서 내보내는 정보가 핸드폰에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자녀 양육에 대해 풍부하다고 생각한 정보는 금방 쌓여 이제는 선택하기 어려울 만큼 많아진다.자녀 양육을 위한 명료성자녀 양육이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은 그 복잡성을 극복해가도록 인도한다.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성경 말씀은 몇 구절밖에 되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신명기 6장 20-25절 이다.“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본문에서 아들의 질문에 대한 부모의 대답이 우리가 예상한 바와 다름을 알아차렸는가? 자녀는 하나님이 많은 명령을 내리신 이유에 대해 묻는다. 그런데 부모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자녀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다시 말해준다. 만일 내 아이가 우리 집에서는 왜 어떤 것을 할 수 없는지를 물었다면 나는 여러 가지로 답변을 했을 것이다. 특정한 행동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들을 말하거나, 그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사랑이 없는 행동인지를 설명할 것이다.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내가 그리 말했으니까!”라고 했을 것이다.부모로서 우리의 자녀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의 선한 다스림 속에서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돕기를 원한다. 이 본문은 우리가 일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빛은 하나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백성들을 구원하신 이야기 말이다. 이것은 어떤 이야기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신명기 6장 20-25절은 양육에 관한 지혜에는 도움이 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의사 결정과 자녀 양육을 명료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제 이야기일 때 명료성이 생긴다는 의미이다.세 가지 안경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가지 안경을 통해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안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원래 좋았다(창 1:31)는 사실을 알려 준다. 두 번째 안경은 이 좋은 세상은 이제 나쁘게 되었으며 죄로 오염되었다(창 3장)는 사실을 보여 주며, 세 번째 안경은 예수님이 오셔서 죄로 깨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다(롬 8장)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좋다. 나쁘다. 새롭다.’ 이 세 가지 안경은 복잡한 것들을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한다.만일 어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실재를 보기 원하면 이 세 가지 안경을 동시에 사용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음식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좋은) 것 중의 하나이다. 음식을 남용하면 해가(나쁘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음식도 구속하여 제자리로 (새롭게) 돌려놓으신다. 음식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도록 말이다. 언젠가는 건강을 위해 음식을 조절해야 하는 일이 영원히 없어지고, 기쁜 잔치와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계 19:9). 이 세 가지 안경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계획하신 선한 것을 볼 수 없게 된다.좋다ㆍ나쁘다ㆍ새롭다부모인 당신을 바라보는 자녀의 관점을 가져보라. 아이들은 당신이 부모로서 잘못했을 때에도 부모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좋은) 존재임을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이 안경을 무시하면 아이들은 냉소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다. 자녀들은 어느 부모도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나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안경은 자녀들이 괴로움과 환멸을 느끼지 않도록 돕는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그분의 가족으로 (새롭게) 부르셨다. 이것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인 이라는 새로운 신분과 사랑을 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우선순위를 갖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이 세 가지 안경은 자녀가 그의 부모를 성경적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한다.좋다ㆍ나쁘다ㆍ새롭다부모로서 이러한 복음 이야기의 줄거리를 아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안내자로서 역할을 하게 한다. 이 세 가지 안경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당신의 이해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당신의 여정을 깨닫게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과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의 현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도록 도울 것이다.이 세 가지 안경을 통해서 볼 때 복잡했던 자녀 양육의 문제는 명료해진다. 이 세 가지 진리는 직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자녀 양육의 난제를 모두 해결하고 바꾸어 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발걸음이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밝게 비추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인도해 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Lenses Every Parent Needs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윌모트
명료성
창조
성품
성경
안내자
베드로 아내의 남편 보고서
by 배경락
2020-02-07
어느 날 남편은 집을 떠났습니다. 계획도 없이. 가정과 일밖에 모르던 남자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배 한 척 마련했을 때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생생합니다. 물고기를 잡으면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왔던 그였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친정어머니를 모시자고 했을 땐 정말 감격이었습니다. 이 남자와 함께 평생을 행복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 그가 변하였습니다.메시아라고 하는 예수를 만난 이후 남편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매일 같이 배를 손질하고 그물을 청소하며 소중하게 여기던 것, 그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나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모아 놓은 재산도 별로 없는 데 떠나겠다는 남편은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이제 생계는 오로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남편이 결단하고 가는 길이라면, 기쁨으로 격려하지 못할망정 울고불며 막아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집을 떠난 후 나는 한동안 방황하였습니다. 허무했습니다. 남편 소식은 간간이 풍문으로 들려왔습니다. 예수에게 정신이 팔려 목숨을 내놓고 따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가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찾아와서 동태를 살피고, 험악한 낯으로 눈알을 부라리며 위협하다가 가곤 했습니다. 나는 두려웠습니다. 돈 한 푼 가져다주는 것이 없지만, 베드로는 나의 남편입니다. 그가 비록 위험한 선택을 했다 할지라도, 나는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만 나면 회당에 나가 남편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심한 고열에 시달렸습니다. 병의 원인도 알 수 없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고, 손 쓸 방법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고 있는 그를 번거롭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결국 남편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많이 안 좋아요. 한 번 오셔서 어머니를 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나 자상하였던 남편은 그 소식을 듣자 예수님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기도하시더니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의 고열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가버나움 동네는 그야말로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도 마다치 않고, 위하여 기도하고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오랜만에 남편을 보았지만, 기쁨을 나눌 시간도 없었습니다. 허리 펼 시간도 없이 부엌에서 음식 장만을 하였습니다. 열병에서 회복된 어머니도 일을 거들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남편은 예수님을 따라 다시 집을 떠났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남편이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메시아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그래도 들은 풍월은 있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사 61:1-2)리라 하였더니 예수님이 과연 그렇게 하였습니다. 나는 이 일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열병으로 죽어가던 어머니가 일어났고, 우리 집을 찾아왔던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는 남편의 결정이 얼마나 옳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나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어깨가 축 처져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토록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셨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종교인들이 흉악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으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할 자이시며 우리의 희망이었습니다. 나는 남편을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할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비칠 때라도 엎드려 기도하면 응답하신다.’숨어 살던 남편은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그물을 정리하여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바다로 나가는 남편은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런 상태로 무슨 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남편은 인생의 낙오자 같았습니다. 날이 훤하게 밝아오는 아침에 남편은 신나서 뛰어 들어왔습니다. 고기를 잔뜩 잡은 것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따르던 때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 야망은 순전하기보다 어쩌면 사심이 섞인 야망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뭔가 한자리할 것 같은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집을 떠나는 남편은 달랐습니다. 더는 인간적 야심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남편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당당하게 나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도 남편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남녀 구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500여 성도에게 보이실 때 나도 주님을 뵈었습니다. 주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말씀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나는 복음의 증인이 되어 주를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남편이 가는 길이라면 언제나 동행하면서 함께 사역자로, 복음의 증거자로, 전도자로 살았습니다(고전 9:5). 핍박을 받아도 같이 받았고, 눈물도 같이 흘렸고, 기쁨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주님이 언제나 함께하기에 두려울 것은 없었습니다. 부부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함께 죽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로서 남편의 손을 잡고 함께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고 늘 기도했습니다.1) 나의 기도가 정말 이루어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늦게 들어가든, 일찍 들어가든 우리는 함께 만날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모르는 모든 사람도 그 날에는 함께 아름다운 교제를 이룰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남편의 설교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남편에게 착한 아내가 되어, 남편의 필요를 들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이야기에 무관심했던 남편도 여러분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에 감화를 받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 - 머리 모양, 몸에 걸친 보석, 옷차림 - 가 아니라, 여러분의 내적인 마음가짐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계발하십시오. 내면을 온화하고 우아하게 가꾸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전에 거룩하게 살았던 여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이 아름다웠고, 남편에게도 착하고 성실한 아내였습니다. 예컨대 사라는 아브라함을 보살피면서 그를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도 걱정과 두려움 없이 그렇게 하면 사라의 참된 딸이 될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권합니다.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십시오. 아내를 존중하고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아내는 여자이기에 여러분보다 연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새로운 삶 안에서는 여러분과 동등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를 동등한 사람으로 존중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벧전 3:1-7, 메시지 성경) -----1)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의 말에 따르면 베드로 부부는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주를 위하여 순교하였다고 전하였다. 클레멘트는 베드로의 가정은 행복하였고, 주를 위하여 헌신하였던 축복받은 가정이라고 하였다.
가정
결혼
눈물
거룩
감화
결단
기도
내적
마음가짐
내면
당신은 어떤 중풍병자인가?
by William Ross
2020-02-03
지붕에서 내려온 중풍병자를 고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우리는 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사랑이나, “무엇이 더 쉬운가”라는 예수님의 질문 혹은 병이 나은 기적을 떠올리기 쉽다.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의 모습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라기보다는 중풍병자와 비슷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중풍병자와 비슷한 이유 네 가지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치료법을 보자.1. 예수님 주위가 “복잡하면” 우리는 굳이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성경을 읽고 묵상하기에 아침은 너무 바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거나 상담하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가정 예배를 인도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장벽이 놓여있을 때 우리는 굳이 예수님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쉽고 편한 방법을 선택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을 묵상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존심이나 바쁜 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인해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육신이 주는 게으름에서 벗어나 성령님으로 채우고 동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갈 5:16-18;롬 7:6). 2. 예수님과 함께한 최고의 순간들은 많은 경우 친구 때문이다그의 친구들은 중풍병자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어떤 것도 친구들을 막을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지붕까지 수리했을 것이다. “일단 예수님께로 내려보내자. 지붕은 나중에 처리하자.” 그들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죄성으로 가득한 나의 생활을 본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쉬고 있을 때 교회에 나오도록 격려하거나 힘든 일 앞에서 두려워하는 내게 용기를 주는 친구들도 있다.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믿음이 굳건한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는 형제자매는 우리가 지역 교회를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때로 우리는 친구들과 언쟁을 하거나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서로의 짐을 나눌 수 있는 형제를 우리에게 주셨다(갈 6:2). 내가 바로 친구들이 들어야 할 짐일 경우도 있다. 그들이 나를 들고 예수님께로 나가기도 한다. 3. 친구들이 나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때 불평한다중풍병자는 아마도 당황하고 절망했을 것이다. 심각한 죄를 지었거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요 9:1-3).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지만(시 146:8; 레 19:14; 예 30:17을 보라)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육체적 장애는 말할 것도 없고 중풍병자도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거부 그리고 종교적인 경멸까지 겪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절망에 빠져서 혼자 있기를 더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고집이 센 친구들이 우리를 끌고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화를 낸다,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면 우리는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함께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이게 가치 있는 시간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친구들이 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갈 때 우리는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낸다.그럴 때 우리의 영혼은 돌처럼 딱딱해지고, 새롭게 해주신 마음과는 정반대의 상태가 된다(겔 36:26).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모습의 가운데에 멈춰 서 있다. 우리의 약함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과 분노는 죄로 이끄는 덫과 같다. 예수님은 내면의 가장 깊은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만나 상한 마음을 고쳐주시고,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킨다(골 3:8-10; 시 51:8).4. 우리는 아직도 상(matt)을 들고 다니고 있다중풍병자가 용서받고 병의 고침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상을 들고 가라고 했다(막 2:11). 아마도 예수님은 상을 들고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다 “상”을 들고 다닌다. 우리의 회심과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상처, 우리가 견딘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한 간증의 의미로 말이다. 이런 “상”은 우리 구주의 사랑과 능력을 보여준다.우리는 구주의 사랑과 능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상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할 때도 많다. 우리는 남이 보지 않을 때는 그 상 위에 다시 누울 생각까지 한다. 어떤 경우든 좋은 소식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치고 두려워할 때 우리의 짐을 대신 들어주신다(마 11:28-29). 우리의 약점을 강력한 능력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약점까지도 돌봐 주실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벗어버릴 수 있다(시 55:22; 빌4:5-6). 우리는 구주를 위해 봉사하는 것 외에는 어떤 짐도 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마 11:29-30; 롬 6:22).구원받은 중풍병자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 이야기는 그냥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다. 그는 심각하게 부서진 사람이었지만 창조주로부터 용서받았고, 치료받았다. 예수님은 자신을 높일 목적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그런 기회를 “사용하는”분이 아니다. 그는 더 많은 일을 한다. 그는 온 세상의 모든 짐을 지고도 우리의 죽어버린 부분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인내하고 기다린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으로 성숙하고 잘 훈련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때때로 중풍병자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피는 것을 기뻐하신다. 우리를 구속하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집으로 보내신다. 그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비된 부분이 그분 안에서 치유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고후 12:9).헌신적인 사람들, 파파라치, 회의론자들로 가득하고, 덥고 냄새나는 좁은 방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은 오늘도 기쁨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온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우리 속에서 메말라버린 부분을 되살리기 위해 참고 기다린다. 먼지와 지붕 파편이 아래로 떨어지고, 초대받지 않은 우리가 지붕을 통해 절뚝거리며 나아가도 그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한다. 그에게로 가자. 그가 당신을 그의 능력으로 채우게 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Kind of Paralytic Are You?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중풍병자
친구
간증
구원
게으름
동행
배우자와 성에 대해 대화하라
by David White
2020-01-31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식당에서 식사할 때였다. 대화가 무르익자 친구는 자기 결혼 생활, 특히 성생활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점점 열변을 토하다가 “결혼 생활이 쉬운 게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성생활이 어려울 줄은 몰랐다니까!”하고 말했다. 소리가 너무 커서 식당 안에 다 들릴 정도였다.나는 불쾌한 듯 우리 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친구가 한 말을 되짚어 보았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친구는 결혼 전까지 “순결을 유지”했다면 결혼 후 성생활은 아주 멋질 것이라 배웠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달랐다.부부의 성생활은 쉬운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의 외형적인 차이를 포함하여 많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성(sex)은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는 신비로운 것이다. 남녀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물론 서로의 욕구, 기대, 그리고 특별한 기호 등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부부들과 교제하면서 계속 발견되는 것은 그들의 성생활에 불만이 있다는 사실이다. 남녀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게 되면 부부간의 만족스러운 성생활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 의지, 그리고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부부의 성생활이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바르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배우자 간의 열린 대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성생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부부의 성생활에 대한 논의는 성경이 성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성경이 결혼 후 성생활에 대해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식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지는 않는다. 단지 섬김과 사랑의 행위로서의 성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가르친다. 사실 부부의 성생활에 관한 구체적 가르침을 주는 본문은 한 군데뿐이다.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 7:3–5)나의 몸은 상대 배우자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성생활의 주목적은 상대를 섬기는 것이다. 신약을 관통하는 윤리는 결혼의 성생활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이기심 없이 섬기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서로를 섬기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부부는 자신들의 성행위에 대해 정기적으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이 대화를 위해 생각해봐야 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각자가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가?남녀가 아주 다르게 지어졌기 때문에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배워야 한다.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안 좋은지, 어떤 행위가 흥분을 주고, 어떤 것이 어색함을 느끼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당신의 몸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배우자는 결코 알 수 없다. 성행위 전이나 도중에, 그리고 후에도 부부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신혼 때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이러한 대화를 멈춰서는 안 된다.횟수에 대해서도 솔직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헌신적으로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각자의 기대감을 조정하고 두 사람의 차이점을 극복해나갈 수 있다. 배우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성적 희열에 대한 내 욕구를 내려놓아야 하는 때는 언제인가? 반대로 나는 전혀 욕구가 없을지라도 내 배우자를 위해 섬겨야 하는 때는 언제인가?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억지로 상황을 만들거나 투덜거리며 화를 내기보다는 사랑의 섬김으로 배우길 원하신다.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내 의견과 욕구를 무조건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직한 의사소통은 인간관계의 실수를 최소화한다. 배우자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혹은 육체적으로 어떤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지 이해한다면 자신의 욕구를 잘 다스릴 수 있다. 어떻게 상대를 섬길 수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부부의 모든 성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을 내어주는 태도에 대해서는 가르친다. 배우자와 대화를 나눌 때 당신이 가진 욕구를 다음 질문에 비추어 생각해보라. 이 행위를 통해 배우자가 사랑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가?성적 표현들이 사랑의 행위 속에서 위로와 안정감을 증진 시키는가?이 행위가 배우자에게 기쁨과 풍요로움을 선사하는가?2.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인류의 타락이 우리의 성적관심(sexuality)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결혼 전 다른 사람과의 성관계로 인한 죄책감이나 과거 혹은 현재의 포르노 탐닉은 현재 부부의 성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주거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과거에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받은 성적인 고통도 현재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성적 학대를 경험한 이들도 결혼 후 성생활을 어렵게 느낀다.많은 이들이 과거의 성생활에 대해 자신의 배우자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부간의 대화가 열려있다면 과거의 상처와 죄악을 고백함으로 죄책감과 수치를 이겨낼 수 있다. 당신의 숨겨진 내면을 이야기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신의 배우자이지만, 안내자로서 목회자나 상담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필요하다. 과거의 죄나 트라우마만이 결혼 생활에서의 육체적 친밀감을 방해하는 문제는 아니다. 결혼한 부부도 서로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하라. 당신의 배우자가 싫어하거나 아주 불쾌하게 여기는 행위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적 표현을 타자 중심적으로 디자인하셨다. 동의를 구하지 않은 성적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배우자와 어떤 행위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3. 이제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우리는 삶의 여러 곳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만난다. 결혼 생활 동안 부부의 성생활은 변화를 겪는다. 어떤 면에서 성숙해지고 깊어질 것이다. 결혼 후에 경험하는 여러 가지 일들 역시 성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의 각 단계마다 성생활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부부가 성에 대한 대화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서로의 기대감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된다.위에서 언급했던 내 친구가 힘들게 깨달았듯 성생활은 쉬운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평생 대화를 지속하는 것은 분명하게 도움이 된다. 대화를 시작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Conversation About Sex You Need to Have with Your Spouse번역: 이정훈
가정
결혼
성생활
섬김
의사소통
동의
지속적대화
진정한 기쁨의 근원
by Matt Smethurst
2020-01-29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순종이 항상 기쁜 건 아니다. 올바른 순종은 기쁨과 진정성이 있어야 하는데, 항상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억지로 순종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보고 싶다. 성경 전체에 기뻐하라는 명령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무언가 이상하다. 기쁨은 행동이 아니라 감정이 아닌가? 느낌을 어떻게 명령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닌데… 이런 경우가 많지 않을까?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가 자주 생각하지 않는 문제를 한번 다뤄보자.창조의 기쁨으로다소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행복하다.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행복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그 기쁨은 있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세 위격이 한 하나님 안에서 영원토록 교제하며 신성한 기쁨을 나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했을까? 뭔가가 부족해서 보충할 피조물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다. 천지 창조는 기쁨의 폭발이고 넘쳐남이었지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게 아니었다. 이 점을 잠시 생각해보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놀라운 자연 세계뿐만 아니라 당신과 나도 하나님의 넘치는 기쁨의 결과이다. 삼위일체 세 위격의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피조물과 무한한 기쁨을 나누기로 결정했다.이러한 신학 정보가 성경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모든 것과 관련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쓰인 책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행복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부수적인 게 아니다창세기 1-2장의 모습처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시간은 짧다. 지금 우리는 어둠과 죄가 만연한, 그리고 죽음으로 가득한 창세기 3장 속에서 살고 있다. (아직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면 계속 살아보면 알게 될 것이다.)성경이 왜 그렇게 긴지 궁금한 적이 있는가? 그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이 오래 참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오래 참음에 대한 긴 이야기이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렇게 오래 참으실까? 그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계획된 일을 신중하게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들과 자신의 끝없는 기쁨을 나누는 바로 그 계획이다(계 7:9).성경에 따르면 기쁨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부수적인 것이 아니며, 힘든 일을 이겨낸 성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도 아니다. 기쁨은 인내하는 것이다. 기쁨은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기쁨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다. 기쁨은 인생의 거친 물결이 우리를 위협할 때 꼭 필요한 것이다. 내가 탄 배의 복원력이고, 폭풍 속에서 붙잡는 닻이며, 내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이다. 기쁨은 성경 속의 사소한 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핵심이다. 우리의 작은 이야기도 그 구원을 만들어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기쁨이 얼마나 중요한지 잠시 살펴보자.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눅 2:10).죽음이 무엇인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교제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2 12).성경을 읽는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예 15:16).예레미야 선지자는 마음속의 진짜 기쁨이 요란한 잔치와 관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문화가 주장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기쁨은 내 자신이 기준이 되어 나의 말을 듣는 것에 있지 않다. 주의를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 진짜 기쁨이 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할 때”(시 1:2),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 그리고 말씀 속에서 퍼내고 퍼내도 모자라지 않는 것을 찾을 때 진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똑같은 주제를 좀 더 발전시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했는가?“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여기 그가 아버지에게 기도한 내용이 있다.“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요한의 말도 살펴보자.“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 1:4).계속해서 구절 속에 나오는 후렴구를 알아차리겠는가? 이것, 이것, 이것 - 바로 말씀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또는 요한의 글을 통해서 나오지만, 이 모두는 다 하나님의 호흡이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기쁨과 그 생명이 말씀 속에 들어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말씀의 목적, 그러니까 성경의 목적은 당신의 마음에 기쁨의 홍수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기쁨이 말라갈 때성경적인 기쁨은 겉모습으로 활기차게 보이고, 긍정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수준이 아니라고 이미 말했다. 지옥은 그런 사람으로 가득하다. 진정한 기쁨은 훨씬 더 좋고, 훨씬 더 대단한 것이다. 나는 성경을 읽는 기쁨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의무처럼 느껴진다. 훈련이 필요하다.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기쁨이 된다. 그것이 훈련의 본질이다. 매번 그런 것도 아니고, 또 단번에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 기쁨은 우리가 왕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고,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그 날까지, 그래서 영원한 기쁨으로 가득해질 그 날까지 멈추지 않고 조금씩 더 커지고 있다(사 33:17; 고전 13:12).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eal Joy Has an Address번역: 무제
생활
감정
창조
훈련
죽음
복음
성경
구원
기쁨
명절에 만난 가족 간 갈등 해소법
by Joe Carter
2020-01-24
17세기 정치철학자인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시민 사회가 없다면 인간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될 것이라 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명절 가족 친지 모임 때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경험한다.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기도 전에, 선물 상자들을 열어보기도 전에, 우리는 옥신각신하며 부모/형제들과 상처를 주고받는다. 최초의 인간 갈등이 가족 내 갈등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는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담이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 아내인 하와를 비난한 것을 시작으로(창 3:12), 그들의 두 아들 중 첫째가 둘째를 살해했으며(창 4:8), 이는 결국 성경에 나온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심지어 예수께서도 가족 내 갈등에 휘말리셨던 적이 있으셨다(막 3:21). 리차드 프랫(Richard Pratt Jr.)은 “창세기 초반부는 오늘날 가정생활이 거의 모든 면에서 망가져 있는 이유가 인류 최초의 부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임을 보여준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우리 가정을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 가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가정은 그 시작일로부터 이미 깨어져 있다.”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이들이 계속 부대껴야 하는 상황이라면 죄의 속성을 가진 우리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녀들이 자기 친구들보다 자신의 형제자매와 더 많이 싸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연구자인 사만다 펀치(Samantha Punch)는 형제자매 관계란 어떤 일이 있어도 끊어지지 않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형제자매 관계는 인간관계가 어디까지 악화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한다. 펀치에 의하면, 이 관계 안에서 “분노와 짜증은 여과 없이 표출되고 친절과 인내는 등한시된다.” 연구에 의하면 3세에서 7세 사이의 형제자매가 함께 있을 경우 한 시간에 평균 3.5회 싸움이 일어난다고 한다. 싸우는 시간을 합하면 평균적으로 시간당 10분이다. 그러므로 하루 열두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우 어린 자녀들은 평균 두 시간을 싸우는 셈이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든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성인 형제자매들 역시, 함께 거주하거나 부모와 함께 살지 않는 경우 갈등과 대립적 경쟁을 경험한다고 한다. The Atlantic 기사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갈등 양상은 형제자매의 연령차가 적은 경우, 또한 동성(同性)일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그렇기에 가족 내 갈등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단계는 우리 모두 죄인이고 이로 인해 우리의 가정이 깨어져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하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 간 갈등 해결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는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당신과 당신 가족을 향한 그의 명령을 깨닫기 위해 계속하여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명절에 가족 간 갈등을 지혜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원칙들이 있다. 당신의 역할을 알아야 한다갈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족 내에서의 역할을 파괴하거나 회피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남편과 아버지(엡 5:25–33; 골 3:19, 21; 벧전 3:7), 아내와 어머니(엡 5:22–24; 골 3:18; 벧전 3:1–6), 그리고 자녀(엡 6:1–3; 골 3:20)의 의무를 잘 이해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헌신적으로 순종하라.자녀가 있는 경우 이는 더욱 중요하다. 당신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자녀도 그 길을 따를 것이다.교제의 의무우리는 보통 “교제”라는 말을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회합을 뜻하는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피상적인 수준에서 사람들과 교제한다. 하지만 신약에서 이 용어는 더욱 풍성한 의미가 있다. 이는 우리 기독교 가정 안에서의 교제에 적용될 수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사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요일 1:3). 당신 가족들도 신자라면 가족 내의 관계는 단순히 가족적 유대뿐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서도 이어져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이요 딸일 수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들의 형제요 자매이다. 이는 가족 구성원과의 갈등 문제에 접근할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믿지 않는 가족 구성원이 이를 지켜보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갈등 상황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 우리는 이것을 가족 구성원 대 가족 구성원으로 풀어야 할 문제인지, 아니면 신자 대 신자로 다루어야 할 문제인지 판단해야 한다. 다시 말해 부자 관계나 손위/손아래 형제 관계처럼 가족 내의 위계질서의 관점에서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가족 밖의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에서처럼 좀 더 동등한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가 하는 것을 판단해야 한다. 가족 관계와 신자 간 관계는 결코 배타적 관계가 아니다. 이 두 관계는 어떤 경우에는 겹치기 때문에 어떤 관계를 적용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단순히 가족 구성원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신자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갈등 상황에 대해 좀 더 선명한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갈등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목표는 바울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고 말한 것처럼 서로 화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는 것인데, 이는 내가 가진 힘과 권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폭력 사태가 발생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저 그 자리를 피하셨다(눅 4:28–30). 자신에게 위력을 행사한 이가 누구이든 예수께서는 그를 힘으로 제압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로 하셨기에 사람들과의 대결을 피하셨다.불필요한 갈등을 피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잘못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사소한 모욕과 무례를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용서해버리는 것이다. 잠언 기자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라고 말한다.하지만 용서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갈등 역시 존재한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학대를 참거나 다른 이들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삶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체로 인간관계의 갈등에서 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끝없고 피할 수 없는 전장에서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 우리 자신,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갈등 없는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전(前) 대통령은 언젠가 “평화는 갈등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갈등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삶이 갈등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말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갈등을 평화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o Handle Family Conflict This Holiday Season번역: 이정훈
가족
명절
갈등
용서
역할
교제
화목
토마스홉스
관계
아버지 됨을 헛되이 하지 말라
by Ray Ortlund
2020-01-17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죄인을 구원하셨고, 당신의 소중한 자녀 삼으시며 그 품 안으로 부르신다.하늘 아버지는 아버지가 가지는 놀라운 속성을 우리 남자들과 함께 나누신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신성한 특권이고 높은 소명이다.유일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성경에만 있는 독특한 것이다. 기뻐하시는 일을 작정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순종하는 아들 하나님, 그리고 그것을 적용하는 사랑의 성령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존재로 나타난다. 아이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것처럼성경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서 어떻게 말하는가? 놀랍게도 구약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구약에서 분명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가끔 말하지만(사 63:16; 64:8; 렘 3:19; 말 2:10), 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거리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느껴야 할 초연함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시고, 인도하시지만 친밀하고 가깝게 보여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관점은 우리를 진실하고 겸손하게 한다. 우리는 전능하신 왕,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와 그 앞에 몸을 낮춘다. 하지만 신약에서 – 우리 눈에 하나님은 거룩하고 장엄하시지만 – 예수님은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매우 분명하게 강조한다. 예수님의 아버지이자 우리의 아버지인 것이다(요 20:17).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막 14:36). 우리 아버지로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는 분이 예수님인 것이다(마 6:9). 우리 자신의 아바 아버지로서 우리를 하나님과 친밀함으로 이끄는 것이 예수님의 영이다(갈 4:6). 이제 우리는 우리 아버지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피고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안다(마 6:25-34). 우리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신다(마 7:7-11).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훈육하시고(히 12:3-11),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시며, 우리가 회개하며 돌아올 때 기뻐하신다(눅 15:11-32).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희생적으로 우리와 관계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다. 높이 계시고 영광 받으실 분, 만물을 창조하신 분,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사랑으로 자녀 삼으셔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요일 3:1). 팀 켈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진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이해하는데 다음과 같은 말로 도움을 준다. “물 한 잔을 마시고 싶어서 새벽 3시에 감히 왕을 깨울 수 있는 사람은 자녀뿐이다. 우리는 그런 자녀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다.”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이 놀라운 권리는 복음에 있어서 사소한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그 메세지의 핵심이다. 제임스 패커(J. I. Packer)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이다. 그들은 가족처럼 두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고, 언제나 아버지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이 신약 메시지의 핵심이다.”영광스러운 실패들그렇다면 성경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된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성경에 따르면 아버지가 되는 것은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한다. 아버지로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풍부한 영적 유산을 물려줄 수도 있고(출 15:2; 신 32:7; 시 44:1; 78:1-4), 우리가 부정하고 싶은 실패의 역사를 물려줄 수도 있다(느 1:6; 9:2). 아버지가 되는 것은 훈련, 양육, 교육, 훈계를 통하여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잠 3:11-12; 4:1-4). 하나님은 엘리가 그의 어리석은 아들들을 통제하지 않은 것에 대해 벌을 주었다(삼상 3:11-13). 엘리의 죄는 하나님 위에 그의 아들들을 둔 것이다(삼상 2:27-30).성경은 아버지들의 약한 부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롯은 소돔의 악영향에 대한 반신반의한 마음을 가짐으로 가족이 화를 당하게 했다(창 19:15-16, 30-38). 야곱은 지혜롭지 못하게 요셉에 대한 편애를 보여 주었다(창 37:3-4). 삼손의 아버지는 이방 여자에 대한 아들의 욕망을 허용했다(삿 14:1-3). 다윗은 딸 다말에 대한 위협을 분별하지 못했고, 아들 암논과 압살롬의 훈육에 실패함으로 집안의 위기를 자초했다(삼하 13).지혜로운 아버지는 자식의 훈육에 있어서 자신의 감정으로 몰아붙이지 않도록 조심한다(엡 6:4). 경건한 아버지는 위엄과 권위로 품위가 있으며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기대할 수 있다(시 127:3-5). 주 안에서 연합된 가정을 행복하게 이끄는 것은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경험이다(시 128). 신실한 아버지는 게으르거나 부주의하지 않고 자녀의 영적 건강을 성실하게 책임진다(욥 1:4-5). 확실한 영적 헌신의 삶을 통해 가족을 이끈다(신 6:4-9). 기도로 가족을 주님 앞으로 부른다(요 4:46-53). 가족의 필요에 따라 물질을 제공한다(딤전 5:8). 가족의 요청에 대해 좋은 선물로 응답한다(눅 11:11-13). 미래를 내다보고 가족을 위해 계획한다(잠 13:22). 실패와 성공 그 모든 면에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는 것을 앎으로써 힘을 얻는다(롬 8:15-17; 엡 5:1).부서짐 안의 아름다움아버지로서 가장 슬픈 것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원죄”가 나의 자녀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아는 것이다(창 5:3; 롬 5:12-21). 원죄는 하나님에게 저항하고 자신이 신인 것처럼 행하게 했던 죄이며, 하나님을 향해 부정적으로 행하게 하는 본성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심판과 고통을 감수하며, 반항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어리석은 열망이자 비이성적인 반사작용이다. 아버지인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서 원죄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슬프게도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재현된 우리 자신의 죄악을 인정해야 한다.아버지로서 가장 행복한 부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새 생명을 주는 기적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을 받는 것을 보는 것이다(요 3:1-8).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신자들을 사랑하며 복음을 소중히 하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본성을 주실 수 있다(요일 3:9; 4:7; 5:1-4).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 안에서 양육하여 그들의 거듭난 삶을 위한 역할을 다한다(엡 6:4).마지막으로, 성경은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누군가를 이끌면서 영적인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몬 10). 신약성경은 다른 사람들의 영적 성장을 아버지와 같은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지도자를 가장 알맞은 리더로 세우고 있다(살전 2:11-12).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보살피면 그들의 삶에 자신의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전 4:14-1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높은 소명을 좇는 신실한 아버지, 우리 모두 그런 아버지가 되기를 기도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n’t Waste Your Fathering번역: 허예송
가정
양육
제임스패커
소명
지혜
훈육
아버지
관계가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by Jon Bloom
2020-01-15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삼하 19:25). 지친 왕은 앞에 앉은 이, 힘들어하는 장애인을 바라보며 엄하게 물었다. 다윗은 지금 막 그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겪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려다가 실패한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고 있었다(삼하 15-18). 쿠데타는 실패했고 반란군은 죽거나 흩어졌다.다윗에게 충성을 지킨 많은 사람에게는 축하의 시간이었지만, 다윗에게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 하는 힘든 시간이었다. 그의 슬픔은 탕자 아들의 비극적인 종말을 보는 것보다 더 깊었다. 자신이 아들의 죽음에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인생의 복잡함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 앞에서 펼쳐졌던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도 그의 귀에 생생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삼하 2:9-12).그는 참기 힘들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바로 그 이웃이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다윗은 이 말을 소리내서 계속 할 수 없었다. 백성의 사기를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삼하 19:5-7). 그러나 그는 영혼 깊은 곳에서 계속 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이 비극은 그의 아들뿐만 아니라 그 아들로 인해 동요된 모든 사람 - 그중 일부는 지금 새로 만든 무덤에 누워 울부짖는 어머니와 아내를 보고 있다 - 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악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불가피하게 엮여 있다. 그랬기에 다윗은 압살롬의 군대가 한창 세를 얻어갈 때 그를 버렸을 뿐 아니라 그를 저주한 사람에게까지 자비로울 수 있었다. 다윗은 격렬하고도 복잡한 시대의 흐름 속에 빠졌을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을 초래한 데에는 어느 정도 자신의 책임이 있음도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상황의 복잡함은 이 위대하고 슬픈 왕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혼란스러운 일로 만들었다. 그는 지금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그에게 합류하지 않은 사람들의 불충한 말은 단순히 두려움과 혼란스러운 전쟁의 소동 속에서 나온 바람과 같은 것에 불과한가? 다윗이 복귀했을 때 전과는 전혀 다른 찬양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진짜 모습일까 아니면 단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연기일까?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시 116:11). 다윗은 그 “모든 사람” 속에 자신도 포함했다.그리고 지금 여기 므비보셋이 있다. 그의 배신은 특히 아팠다.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이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어린 시절에 장애인이 되었다(삼하 4:4). 다윗은 가장 친한 친구(삼상 20:42)에 대한 깊은 사랑과 언약을 지키기 위해 므비보셋을 찾았고, 그에게 할아버지 사울의 땅과 더불어 사울의 종 시바를 붙여주었다. 시바에게는 15명의 아들과 20명의 하인이 있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왕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명예로운 자리를 주었고,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다(삼하 9:7-8,11).그러나 반란군이 들어와서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도망쳤을 때 그와 함께 한 사람은 정작 므비보셋이 아니라 시바였다. 그리고 시바의 보고에 따르면, 므비보셋은 그의 왕좌를 향해 창을 겨눈 또 다른 위험한 “아들”처럼 보이기도 한다(삼하 16:3-4). 다윗은 그가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모든 재산을 시바에게 줌으로 시바의 충성을 보상했다. 모호함이 떠오른다그런데 지금 승리한 다윗이 예루살렘에 다시 입성할 때 므비보셋이 그를 맞이하는 현장에 있다. 그는 초라하고 냄새가 날 정도로 비참한 상태다. 한 보좌관은 다윗에게 보고하기를 므비보셋은 다윗의 망명 내내 면도와 목욕을 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고 했다(삼하 19:24). 그리고 므비보셋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것은 시바의 보고 내용에 심각한 의구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상황이 모호해졌다.“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지친 장애인이 대답했다.“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삼하 19:26-28).므비보셋의 진실함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건 바로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속였던 방법이기도 하다(수 9:3-6). 게다가 시바는 다윗이 가장 위급한 순간에 처했을 때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의 곁을 지킴으로 충성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 다윗 자신도 후새에게 생명을 걸고 압살롬에게 충성하는 척 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가(삼하 15:32-37)? 시바가 다윗 곁에 있었던 건 충성이라기 보다는 오만함으로 가득한 왕자가 아닌 경험 많은 왕에게 베팅을 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아닐까? 여기서 누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걸까?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그래서 다윗은 새로운 판결을 내렸다. 사울의 이전 재산을 므비보셋과 시바에게 반반으로 나눠주었다(삼하 19:29). 그들 중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적게 받은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더 많이 받는 셈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두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게다가 상황의 시급함을 고려할 때 거짓말에 대한 조사가 우선순위가 될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다시 하나로 모아야 할 왕국과 가족, 그리고 민심이 우선이었다. 지금은 새로운 적을 만들 시간이 아니었다.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그에게 충성을 나타냈으며, 다윗은 그들 각자로부터 가장 좋은 쪽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진정한 정의 구현은 하나님께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때로는 다윗처럼 하는 게 복잡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일 때가 있다. 가족, 우정, 목회 및 직장 상황에서 복잡한 일이 발생했을 때, 증거가 충분하지 않거나 상황이 너무 모호하거나 또는 시간이 너무 제한되어 있어 우리가 원하는 완전한 정의가 이루어지기 힘들 때가 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한 최선의 결정은 관련된 당사자의 선의를 믿고 최대한 관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그리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다”(신 32:4). 그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공의를 실행하신다. 인간 또는 사탄이 의도한 악을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을 통해 완벽한 공의로 바꿈으로 선을 가져다 주신다(창50:20; 롬 8:28). 그리고 우리의 불완전한 판단과 이 시대의 불의를 사용하여 그분의 선을 성취시킬 것이다. 비록 한정된 능력이지만 불완전한 판단을 최대한 활용하여 믿음을 바탕으로 선한 결정을 하도록 우리는 부름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한정된 능력”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밀리에 악과 타협하는 것이 “정의를 행하는 것”(미 6:8)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ometimes We Must Settle for Peace번역: 무제
생활
관계
충돌
배신
므비보셋
진실함
나단
다윗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라
by Scott Hubbard
2020-01-13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이미 거룩에 대한 열망을 심어 놓으셨다. 그 거룩은 당신을 가두는 좁은 방처럼 불편하게 느껴지기보다 즐거움이 깃든 정원처럼, 하늘의 메아리처럼, 다시 찾은 에덴의 눈부신 경관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따라서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물론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사실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와 같이 의롭게 되기를 진정으로 사모한다. 그분이 거룩하시듯 당신도 거룩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거룩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구체적으로 말해, 어떻게 하면 늘 더듬거리며 샛길로 빠지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만 집중하는 영적 대화로 바뀔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잔걱정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가 인생에 산적한 고민을 그분께 다 맡길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헛된 자랑을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이 가난한 심령으로 변화되어, 의에 대한 무관심이 뜨거운 갈망으로, 인색한 태도가 관대한 손길로, 쉼 없는 고달픈 일상이 평온한 생활로 바뀔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하면 인생의 궁극적 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그분을 알 때만 생명을 얻고 가장 고상한 유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을까?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본문을 통해서 그러한 거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르침을 대하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곤 한다. 바로 거룩이란, 너무나도 자주 사소한 일들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일과를 주목하라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거룩을 어떻게 추구하라고 권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그는 전반부에 걸쳐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는다.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생을 보증하셨다고 찬양한다(엡 1:3-14). 또한 우리의 영혼을 살리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으며(엡 2:1-10)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선포한다(엡 3:14-19).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랑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후반부에 걸쳐 바울이 하는 작업은, 그 복음을 일상의 소소한 생활 속에 적용해 나가는 일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나열한다. 서로에게 진실하라(엡 4:15). 빨리 화해하라(엡 4:26). 정직하게 일하라(엡 4:28). 선하게 말하라(엡 4:29).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품으라(엡 4:32).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으로서 그리스도를 의식하며 서로를 대하라(엡 5:22-6:9).이 각각의 교훈은 그 자체로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거기서 강조되는 순종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관심을 잘 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순종의 대부분은 일상에서 쉽게 잊히는 순간, 어딘가 방치된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스타프 빙그렌(Gustaf Wingren)은 루터의 직업소명에 관해 설명하며 “성화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일과 속에 숨어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너무나도 평범해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수밖에 없는 일상의 영역, 바로 거기서 거룩이 이루어진다.눈을 땅 끝에 두지 마라그래서인지 거룩을 추구하면서 미련한 자의 오류에 빠지는 이들이 많다.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잠 17:24). 저 멀리 있는 놀라운 광경만 바라보다가 정작 발끝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먼 미래에 실행하려고 거창한 순종을 계획하는 데만 마음을 둔 나머지 당장 코앞에 있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순종은 실천하지 못할 수 있다.날을 잡아서 아내와 아이들을 섬기는 데 하루 종일 헌신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당장 가사를 돌보는 일에는 무관심할 수 있다. 이다음에 미전도 지역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게 해 달라고 뜨겁게 기도하는 선교사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소그룹은 소홀하게 돌볼 수 있다. 언젠가 비영리 단체를 개설하여 사회에 공헌하기를 바라는 청년이 맡겨진 계산대 아르바이트는 대충 때울 수 있다. 앞으로 닥칠 어떠한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대학생이 조금 전 룸메이트가 치우지 않고 나간 그릇 더미를 보며 투덜거릴 수 있다.이 모든 일상의 영역에서 때가 되면 순종하리라는 마음은 오늘의 순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곤 한다. 앞선 잠언에서 솔로몬이 밝혔듯이, 명철한 자는 자기 앞에 있는 지혜를 본다. 그는 오늘의 의무, 오늘의 과제, 오늘의 대화, 오늘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그 모든 게 사소해 보일지라도 말이다.마찬가지로 지혜로운 크리스천은 그때그때 쌓이는 낱장의 벽돌로 웅장한 예배당이 지어지듯 거룩도 그렇게 이루어짐을 알고 있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는 일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과정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순종하라그렇기에 거룩을 추구하는 일은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정도보다 더 쉽기도 하고 더 어렵기도 하다. 더 쉬운 이유는, 우리의 성장이 대부분 한 번에 한 단계씩 은혜 안에서 꾸준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어려운 이유는, 성화의 과제가 일상의 전 영역 속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일과, 즉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그 모든 일을 통해 거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우리의 영적 성숙은 바로 이 “무엇을 하든지”에 달려 있다. 남들에게 보이는 곳에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특별한 일을 할 때든 평범한 일을 할 때든, 인생의 중대한 순간에든 일상적인 순간에든,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따라서 하루 열두 번도 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이 10년 후에는 어떤 사명을 맡기실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잘못된 생각에 빠지려 할 때마다 그 생각을 바로 멈추는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시간에 쉬지 않고 기도하려고 힘쓰는가?’, ‘한눈팔지 않고 오늘도 정진하고 있는가?’, ‘상대를 향해 따뜻한 말을 하고 있는가?’이처럼 일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부담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격려가 되기도 한다. 일단 부담이 되는 이유는, 주님이 인생의 모든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만의 시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격려가 되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가 애쓰며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매순간 지켜보시며 그 일로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행하는 작은 일, 말하자면 냉수 한 잔을 떠 주는 일조차 잊지 않으신다(마 10:42). 반드시 그 일을 기억하시며 그에 맞는 상급을 준비하신다.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게 된다(엡 6:8). 더 나아가 그분은 우리의 순종에 어떤 결함이 있든,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는 그 순종을 자신의 은혜로 덮으신다.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라그렇다면 과연 어디서부터 거룩을 실천해야 할까? 당연히 다른 곳이 아닌,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C. S. 루이스는 ‘개인기도’(Letters to Malcolm)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의 원리를 제시했다.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를 시작하라.” 이를테면 매번 기도할 때마다 “창조와 구속과 ‘인생의 모든 복락’에 관해 생각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모조리 고백하는 식으로” 기도를 시작하지 말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작은 대상들에 주목함으로써 기도의 말문을 열라고 권했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나무 한 그루라든가 이제 막 끝마친 아침식사 또는 옆방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며 감사의 고백으로 기도를 시작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루이스가 지적했듯이, “가장 사소한 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한다면, 가장 고상한 일에 대해서도 그분을 결코 예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원리는 우리의 순종에도 적용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세를 배운 자만이 큰 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거의 예외 없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작은 일을 통해 훈련되지 않고는 큰 일을 감당할 수 없다.우리가 세운 계획대로 일정이 진행되지 않고 엉망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를 익혀야만 자녀들의 구원과 같은 큰 일에 대해서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수입이 부족할 때도 자신의 소유를 내어주며 섬길 줄 알아야만 수입이 넉넉해졌을 때도 똑같은 마음으로 섬길 수 있다. 오늘 만나는 이웃과 부끄러움 없이 예수님을 나눌 수 있어야만 언젠가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도 그분의 이름을 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상의 작은 순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오늘 하루가 우리에게 대단한 순종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수십 년간 형성된 우리의 성품도 하루만에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한 변화는 긴 세월이 흐르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하루는 오히려 그보다 작아 보이는 일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친구를 용서하기, 부끄러운 생각을 멈추기, 아이에게 관심 갖기, 진심어린 말로 격려하기,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등.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상의 순종을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Offensively Ordinary Steps to Godliness번역: 장성우
영성
묵상과기도
거룩
구스타프
루이스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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