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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스트레스 부부의 친밀감 회복 작전
by Gavin Ortlund
2019-10-11
우리 부부는 교회 옆에 있는 작은 사택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 이사야도 살고 나오미도 같이 산다. 성경 인물의 이름 때문에, 우리가 이사야와 나오미와 한집에 산다는 일이 이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제 막 세 살이 된 이사야는 꽤 까다롭고 짜증을 잘 내며, 이제 겨우 한 살이 된 나오미는 집 전체가 울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나는 부모 역할을 좋아하고, 우리에게는 대단한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게 매우 큰 기쁨을 준다. 하지만 양육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결혼 생활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부부가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항상 방해를 받고, 함께 시간을 가지려고 계획은 세우지만 완전히 지쳐서 그것을 이행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낭만적인 데이트를 계획하려고 해 보지만 아이를 봐주는 사람에게 얼마나 비싼 값을 주어야 하는지를 깨닫고는 그냥 접어 버리고 만다. 어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지 알 것 같은가?최근에 나는 어머니가 언젠가 내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았다. 부모가 되는 것은 결혼 생활에 중압감을 줄 수 있지만, 또한 결혼 관계를 더 깊어지고 풍부해지게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것은 누군가와 싸우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 함께 진흙탕 속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도전을 주는 이 시기를 그냥 견뎌 내야만 하는 시기가 아니라 우리의 결혼 생활을 위한 좋은 기회로 여기며 배워 가려 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시작한 후부터, 내 삶 속에 아내와 친밀감을 유지하며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아빠가 되는 것조차도 말이다. 사실, 결혼 생활이 굳건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나를 아빠로 부르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되돌아본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젊은 부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10가지 전략을 나누고자 한다. 1. 의도적으로 배우자에게 키스/껴안기/듣기 좋은 말 등을 하라매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처음에 이것들을 하라. 현관문에 들어서면 나는 나와 씨름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습격을 받는다.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싶지만, 그들에게도 나에게는 아내가 우선이며 그 무엇도 그녀를 대치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려 한다. 부부가 서로 매일 잠깐씩이라도 신체적 접촉을 하고 지지와 관심을 표현하면 그 효력은 오래 간다. 2. 아이 돌보는 사람과 데이트를 위해 돈을 투자하라 부부가 데이트를 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투자할 가치가 있다. 낭만적인 데이트를 계획할 때, 나는 종종 “우리 형편에 괜찮을까?”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일단 데이트를 마치고 나면 항상, “하기를 정말 잘했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거였어”라고 생각한다. 배우자와 함께 웃고 여가 활동을 하며 즐기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함께 즐기는 가족은 함께 잘 산다”는 옛말이 판에 박힌 말 같지만 사실이다. 3. 함께 산책하라우리 아이들은 유모차 안에서는 조용하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산책하는 일은 우리의 관계를 한층 더 좋게 만드는 전환점이 되었다. 산책을 하면서 운동도 하고 대화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바쁠 때는 운동과 대화가 늘 뒷전으로 밀리기 쉬웠는데 말이다. 산책이 잘 맞지 않는다면, 당신의 상황에 맞으면서도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취미를 찾아보라. 예를 들면, 헬스 센터가 아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주고 당신이 이를 편하게 느낀다면, 아이들을 맡기고 부부가 함께 운동을 해 보라. 4. 밤 데이트를 창조적으로 해 보라우리는 집에서 하는 ‘밤 데이트’를 개발하여 매주 해 오고 있다. 보통 아이들을 일찍 재우고, 나의 할머니가 결혼을 주제로 쓰신 책을 한 장 읽으며,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보드게임을 한다. ‘집에서 하는 밤 데이트’로 돈을 절약하고, 저녁 시간을 잡아먹는 계속되는 TV의 횡포를 줄일 수 있다.5. 문자 대화를 활용하라나는 기술의 진보가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면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내와 나누는 문자 대화만은 즐기기를 원한다. 문자로 재미와 농담을 주고받는 일은 작은 것 같지만, 우리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고, 내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편이 된다. 또한 우는 아이로 인해 의사 소통이 방해받을 일도 없다. 6. 친밀한 시간을 계획하라아이들을 둔 젊은 부모들은 때로 서로 친밀해질 시간을 찾기가 쉽지 않다. 주간 일정을 세울 때 이 시간을 꼭 따로 정해 놓으라. 계획된 성관계는 이를 하지 않는 것보다 낫고, 이는 부부가 여러 일로 바쁠 때 결혼 생활에 충실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법이 된다.7. 함께 경건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틈을 만들라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면 중요한 기회를 잃게 된다. 배우자는 아마도 어느 누구보다 당신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당신을 영적으로 깨어 있게 도울 수 있는 가장 알맞은 사람일 것이다. 8. 배우자의 일상 생활에 관심을 가지라배우자가 하루 내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관계가 멀어지기 쉽다. 배우자가 직장에 다니고 있으면,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질문하고, 그(녀)를 가장 옹호하는 지지자가 되라. 배우자가 가정에 머물고 있다면, 당신이 그(녀)가 집에서 하는 가정일을 도와줌으로 그 일의 중요성을 인정해 주고 감사를 표현하라.9. 배우자의 가장 약한 점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기르라 부모 역할은 배우자의 가장 깊은 두려움과 죄 및 실패를 표면으로 떠오르게 할 수 있다. 배우자의 부족한 점은 특히 당신 자신이 겪는 어려움과는 어느 정도 다르기 때문에 쉽게 경시될 수 있다. 배우자를 판단하지 않도록 자신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슬퍼하라.주님께 유연함과 긍휼을 구하라. 빈정거림으로 배우자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라. 친구들에게 배우자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로 말하고, 불평하지 말라.배우자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꼭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인내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라.10. 배우자를 알려고 노력하라배우자가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배우자의 페이스북에 무엇이 올려져 있는가?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해 배우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배우자가 최근에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인가? 배우자를 연구하라. 부부만 아는 농담을 개발하라. 결혼 생활로 만들어진 친밀한 비밀은 부부가 함께 간직하고, 상대 배우자에게 숨기는 비밀은 따로 간직하지 말라. 결혼 생활의 각 시기에 알맞게, 연애할 때처럼, 평생 서로에게 낭만을 유지하려는 목표를 세우라.사탄과 세속 문화는 부부 간의 정절보다 불륜이 더 짜릿하다는 거짓말로 우리를 유혹한다. 복음의 증인이 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참 진리를 삶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결혼 생활에 완전히 헌신하는 것이 참 기쁨을 얻는 길임을 보여주는 길이다. 낭만적 관계에서 당신이 무엇을 기대하는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이 갈망하는 친밀감이 어떤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장점을 보여야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결혼 생활의 목표는 평생 한 명에게 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이며, 가장 만족을 주는 길이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삶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리의 결혼 생활을 일구어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Ways to Grow Your Marriage While Having Young Kids번역: 정은심
가정
결혼
육아
친밀감
관심
긍휼
회복
부부생활
불안정감은 죄인가?
by Jeremy Pierre
2019-10-09
미국의 유명한 어린이 TV 프로그램 쎄사미스트리트(Sesame Street) 속의 인물 바니는 최근에 점차로 시청자가 줄어들어 힘이 빠진 커다란 보라색 머리를 힘들게 들어 올린다. 한때 어린이 TV 프로그램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던 그는 이제 조용히 옆에 서 있는 친구 엘모를 힘없이 붙잡는다. 바니는 친구의 목을 겨우 끌어 잡고 가까이 가서 그에게 말했다. “한 아이라도 ‘자신이 특별한 아이다’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게 해야 해.” 가성을 내는 괴물 엘모는 털로 덮인 손으로 바니의 손을 꼭 잡고 다른 이들에게 향한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전달되었음을 알게 된다. ‘너는 특별한 아이다’라는 메시지는 어린이 TV 프로그램에서 전달하는 여러 도덕적 교훈들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어린이 프로그램이 유치한 재미나 상황적 문제 해결에서 도덕적인 권고로 넘어갈 때마다, 보통 등장하는 주제가 바로 긍정적 자아상과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신감의 중요성이다. 그래서, 교육 TV는 우리의 머리카락 색깔부터 우리의 특정한 관심 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지도해 준다. 하지만 언론이 대중에게 주려는 메시지가 단순히 불안정감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낮은 자존감은 불안정을 양산하고 개인의 삶을 건강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끊임없이 던지는 불안정의 문제를 심각한 죄의 측면으로 볼 필요가 있다. 왜일까?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나는 하나님도 불안정을 죄로 여기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왜일까?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화를 가르치는 교육자들은 우리의 불안정이 개인의 가치를 위협하기 때문에 이를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안정이 그분의 아들의 가치를 범하는 죄이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여기신다. 하나님이 불안정을 문제로 여기신다는 점은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 불안정과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성경에 따르면, 불안정은 바울이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라고 한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불안정과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어떤 의미이고 그것이 왜 문제가 될까? 우선,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는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특성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데서 오는 자기 확신이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가 없는 데서 오는 불안정은 우리 삶에서 그냥 위험 그 자체로 여겨진다. 따라서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 데 문제가 있다. 당시의 종교 및 문화적 배경에 따르면, 바울 사도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모든 위대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적으로 자신이 바리세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했고,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받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이처럼 신뢰한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 문화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특별히 인정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우리 문화 속에서 인정받을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더 면밀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는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절박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생각이 이에 고정되어 모든 면에서 절박하기 그지없다. 어린이 TV 프로그램의 여러 인형 친구들이 강조하듯이, 우리 문화가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안정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형 친구들의 말에는 깊은 교훈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내가 앞서 지적했듯이, 불안정은 그리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안정은 적어도 4가지 영역에서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자기 자신과의 혼란불안정은 하나님이 그분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돌봄을 제공해야 했거나 누군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지만, 당신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혹은 그 사람이 얼마나 더 똑똑한지를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질척거리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라. 자의식이 강한 것은 자기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 관하여 몰입하고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을 우리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빌 2:3). 2. 하나님에 대한 불만불안정은 현재 내게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만나를 원하며 불평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영양은 좋으나 맛이 없는 음식에 싫증을 내고 별미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돈과 지위, 외모와 성격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하며 불평한다. 그러한 불만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딤전 6:9).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한 불만은 종종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연결되어 있다. 불안정은 우리의 (우리가 그리 생각하는) 가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는 죄가 아닐 수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모독이다. 3.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갈망함불안정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받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당신의 허리 사이즈가 28인치인지 34인치인지, 혹은 당신이 남의 집에 사는지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으신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신경 쓰기 때문에 우리도 여전히 신경 쓰게 된다. 우리는 무엇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신경 쓰고 있다. 의(righteousness)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평판을 가지려 한다. 우리의 생각이 페이스북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거나 우리의 가치를 치켜올려 줄 더 나은 직업에 꽂혀 있다면, 실제로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저버리는 것이다(롬 1:16-17). 4. 업적으로 인정받기를 갈망함불안정은 우리가 여전히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바탕으로 인정받는다고 믿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면서, 적어도 더 큰 교회나 더 인상적인 자녀들 혹은 또 하나의 학위를 갖기를 소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신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과 완전히 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 바울이 불안정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분별의 메시지이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7-8). 우리의 끝없는 불안정에 대해서, 바울은 “당신이 스스로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별함이 해결책이라면, 우리의 삶은 끝없는 구직 활동과 속성 다이어트와 같은 것들로 점철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부식된 동전의 한쪽 면으로 치우치고 있는 우리의 애처로운 시도일 뿐이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가 여전히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외에 다른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려 하지 말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자신을 내려놓는 일은 자기 비난으로 돌아가는 또 다른 불안정의 싸이클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족을 준다. 경건한 만족은 지속적인 불만으로부터 오는 곤고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을 가져다 준다. 전능한 하나님의 진심 어린 인정은 사람들의 변덕스런 감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굳건하고 영원한 안정감과 자존감을 심어 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은 우리 안에서 유지되고 있는 흔들거리는 확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가치이다. 바울이 우리에게 작별 메시지를 보낸다면, 분명히 당신이 특별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의롭게 되며, 이에 대한 증거로 결승선에서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으니, 믿음으로 계속 달려가라는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딤후 4:6-8). 스스로 특별해지는 것에는 너무 관심을 두지 말자.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참 가치를 발견하는 데 부족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Sin of Insecurity번역: 정은심
생활
감정
불안정감
혼란
불만
인정
갈망
면류관
자존감
그리스도
영적 성장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by Jon Bloom
2019-10-07
우리 집에는 작은 정원이 하나 있다. 여름이면 부엌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정원은 작은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최근 그 아름답던 정원을 제대로 즐길 수 없게 되었는데, 다년생과 일년생 식물들 사이에 엄청난 양의 잡초가 자라 버렸기 때문이다. 왜? 지난 몇 주간 정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다른 집안일로 바빠 정원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어쩌면 정원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은 나의 의도적인 포기였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정원 관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정원 방치는 더 중요한 임무를 포기하지 않기 위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정원사가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집 정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중요하다정원에서 꽃이나 관목, 풀이나 나무를 키우고 싶은 정원사라면 땅을 재배하고 씨를 심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가뭄, 잡초, 전염병, 성가신 동물들(땅에 구멍 파는 걸 좋아하는 우리 집 개처럼)로부터 식물을 보호하고 가꾸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이런 사실은 심지어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정원사에게도 적용된다. 만약에 정원사의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다면, 어차피 하나님께서 그분이 지으신 정원을 알아서 관리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면, 그런 생각이야말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전혀 잘못된 이해이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라고 바울이 말했을 때, 그는 교회를 개척하는 자신의 역할뿐 아니라, 물을 주는 아볼로의 역할도 하나님이 주신 교회 성장에 꼭 필요한 수단이었음을 믿고 있었다(고전 3:6). 바울은 자신이 '씨'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씨는 단지 그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아볼로도 자신이 “물”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물도 아볼로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식물'의 성장에 꼭 필요한 '태양,' '토양' 또는 기타 환경 요인을 직접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맡은 일이 '식물'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들의 역할은 실제로 필수적이었다.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식물은 자라지 않는다. 물을 주지 않으면 식물은 죽는다. 하나님의 정원에서 우리가 '식물'의 발아와 성장에 필요한 '정원 가꾸는' 일을 하는 것은 결코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관할권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시고 또 우리는 정원을 가꾸는 역할을 맡는 것, 이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진정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존엄성을 선물하셨다. 즉, 우리가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선택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행여 우리가 책임을 제대로 지지 못해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짓눌려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우리가 식물처럼 사는 방법을 배운다면, 정원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정원사는 식물을 좋아한다왕국에서는 모든 기독교인이 다 양이고(요 10:27) 또 그중 일부가 목자의 사명을 받는 것처럼(벧전 5:2), 모든 기독교인은 다 식물이고 그중 일부는 정원사의 사명을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편에 나오는 식물처럼 살기를 바라신다. "복 있는 사람은 [중략]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자,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게 무엇인지 주목해 보자. 나무는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믿음이 점점 더 자라난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나무는 결코 시냇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고, 때가 되어도 과실을 맺지 못하며 또 건강하고 푸른 잎사귀를 자랑하지도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이렇게 하셨다.“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가지가 건강하게 자라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주목하자. 가지는 나무에 지속적으로 붙어 있어야만 한다. 만약에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시들 것이다(요 15:6).이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할 때, 하나님이 우리도 식물(나무 또는 가지)과 같이 설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또 무엇을 하지 않는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의 책임과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든지, 포도나무에 가지를 붙이고 있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정원을 돌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이미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의 정원은 어떻게 자라고 있는가우리 모두는 식물이지만 또 정원사이기도 하다. 정원을 돌보는 일은 결국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먼저 주신 임무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가꿔야 할 정원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정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잘 가꾸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어떻게 일하는지는 정원의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정원은 무엇인가? 유명한 동요 ‘고집센 메리’(Mary, Mary, Quite Contrary)에 나오는 가사, “당신의 정원은 어떻게 자랍니까?”처럼 당신은 무엇을 심었는가? 씨앗을 심어야만 식물이 자랄 수 있다. 심은 씨앗을 당신은 지금 어떻게 가꾸고 있는가? 정원일은 무엇보다 지속적이고 부지런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 당신에게 주어진 주된 정원과 보조 정원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주된 정원이 주된 관심을 받고 있는가? 관심이 가는 모든 정원을 다 돌볼 수는 없다. 주된 정원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 한 시즌 동안 보조 정원을 소홀히 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다른 보조 정원을 아예 무시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면 정원일에 필요한 충분한 은혜를 하나님이 약속하셨다(고후 9:8).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 모든 정원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는 다른 사람이 맡아야 하는 정원도 아니다. 부엌 창 바깥에 있는 작은 정원은 주된 정원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린 보조 정원이다. 조만간 그 정원에도 관심을 갖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부엌 창밖에 보이는, 잡초가 무성한 정원은 정원사로서 무엇을 하고, 또 하지 않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있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piritual Growth Is Not an Accident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존엄성
정원사
임무
보조정원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by David Mathis
2019-09-30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 성령은 우리가 읽는 말씀 위에 머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를 감화시키고, 마음을 조명하며, 삶의 방향을 바꾸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요 16:14). 성령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보고 생각하며 느끼는 평범한 행위를 초월적인 일로 만드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의 눈과 마음과 가슴을 사용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기도는 대화이지만, 우리가 시작하는 대화는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대화이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개인 안에서, 그리고 아들의 사역 안에서 말씀하신다. 그 다음, 경이롭게도, 그분은 말씀을 멈추고, 우리의 간구를 경청하기 위하여 귀를 기울이신다. 기도는 매우 훌륭한 영적 교제의 도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고 있으면, 그분도 우리에게 귀 기울이신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을 읽기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기도하도록 돕는 네 개의 성경 구절을 살펴보자. 1. 눈을 열어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하나님께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라. 그분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단지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자연적인’ 사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놀라운 것을 볼 수 있도록 영적 눈을 열어 달라고 간구하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보아도 보지 못하며”라는 말씀은 성령의 조명 없이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을 자연적 눈으로만 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마 13:13). 이것이 바울이 크리스천들을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엡 1:17-18)라고 기도한 이유이다.시편 기자와 함께 영적 안목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경이로운 것을 보는 은사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높이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따듯하고 부드럽게 하여, 마음이 냉담해지지 않고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라. 2.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38)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맹인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38)라고 기도하라. 우리가 이생에서 사는 한, 죄는 우리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방해한다. 우리는 친구들과 가족을 매일 실망시킨다. 그리고 하나님도 실망시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마 18:13)라고 외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여는 일에 겸손하며 상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성경 읽기는 우리의 실패를 회개하게 하고 그분의 은혜를 새로이 경험하도록 돕는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겸손의 마음을 키우도록 돕는다. 3.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약 1:22)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 놀라운 것을 보게 해 주시기를, 그분의 충만한 은혜를 기억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 이러한 기도는 당신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말씀의 씨가 마음의 밭에 심겨 다른 사람을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그래서 실제로 눈에 보이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말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성경 본문에서 인위적으로 어떤 의미를 찾아내서 적용하려 하지 말고, 이 말씀이 당신의 실제 삶을 형성하고 영향을 미치며 방향을 설정하도록 기도하라. 말씀을 홀로 읽고 연구하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는 이유로 실제의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더 확실히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4. 내 눈이 예수님께 열리게 하소서(눅 24:45)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놀라운 것을 더 구체적으로 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성경 속에 놀라운 산맥처럼 우뚝 서 있지만, 그 놀라움의 정점이며 가장 장엄한 풍경은 그분의 아들의 인격과 사역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직접 가르쳐 주셨듯이, 그분은 모든 성경 본문의 의미를 풀 수 있는 핵심 열쇠이다. 첫째,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고]”(눅 24:27), 그다음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눅 24:45).성경 읽기와 공부의 목표는 예수님을 알고 기뻐하는 데 있다. 다가올 천국을 지금 맛보는 기쁨을 얻기 위함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성경 공부의 방향과 목적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이것은 우리 영혼의 큰 갈망을 형성한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8). 마음의 눈을 열어 예수님을 계속 찾으라. 본문이 예수님의 인격 및 사역과 어떻게 관련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성경 읽기의 핵심이다. 그 다음 그것이 나와 내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이 목적을 이룰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찾고 묵상하라.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Four Prayers for Bible Reading번역: 정은심
영성
묵상기도
마음의눈
충만한은혜
성경읽기
기도하기
시편기자
진정한변화
말씀의씨
마음밭
기독교 신학은 가정을 구할 수 있는가?
by Ryan Hoselton
2019-09-27
최근에 나는 아내와 함께 결혼식 전 마지막 토요일 저녁을 함께 보낸 식당에 찾아갔다. 자리를 잡은 우리는, 16개월 전 여행을 계획하면서 서투른 발음으로 프랑스 음식을 주문하고, 또 앞으로 만들어 갈 가정을 꿈꾸며 앉아 있었던 건너편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 바에 앉아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한 중년 부부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건넸던 충고가 기억났다. “정말 멋지군, 당신 두 사람 그렇게 사랑에 빠져 있는 걸 보니,” 약간 취한 남자가 말했다. 그러자, “결혼식만은 꼭 성대하게 하세요”라며 부인이 끼어들었다. “결혼식 이후 모든 건 다 바닥을 향해서 내려갈 테니까요.” 부인의 냉소적인 말투와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난 눈빛은 그 남편의 말을 의미 없게 만들었다. 악마는 집 바로 옆에 있다가정을 망쳐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바로 깨달았다.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1854-1921)는 “악마의 무리 전체가 가정을 망치기 위해 애워싸고 있다”라고, 시간을 초월한 고전, ‘기독교인 가정’(The Christian Family)에서 말했다. 바빙크는 또한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는 몇 가지 악마의 계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남편의 외도, 아내의 고집, 자녀의 불순종, 여성 숭배와 여성 경멸, 폭정과 노예로 부리는 것, 남성 유혹과 남성 증오, 자녀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과 자녀를 살해하는 것. 성적 부도덕, 인신매매, 첩질, 중혼, 일부다처, 일처다부, 간음, 이혼, 근친상간.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성관계를 맺는 부자연스러운 죄 [중략] 불순한 생각, 말, 이미지에 의한 욕망의 자극 [중략]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나체를 갈망하고 육체를 향한 열정을 고취하는 것."바빙크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의 기쁨이 사라졌을 때, 결혼 생활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단조로움으로 전락한다.” 가정은 실패한 프로젝트인가“지금의 시대처럼 가족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라고 바빙크는 선언했다. 그가 살던 시대의 과학자들은 가족의 기원과 본질을 자연주의적 설명에 근거해서 축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일부일처제와 정절 그리고 자녀 양육에는 도덕적으로 정당한 또는 신성한 기초가 없다고 주장했다. 가정의 유용성을 결정하는 주체는 과학이었고, 과학은 가정을 현대인에게는 너무도 큰 결함을 가진 제도로 판단했다. 지식인들은 제안하기를, 결혼은 자유로운 사랑으로, 가족의 유대는 사회적 사교로, 또 자녀 양육은 과학적 양육 방법으로 대체하자고 했다. 그뿐 아니라, 바빙크는 예술적 표현의 변화가 보이지 않게 가족을 전복시키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오늘날 사실주의(realism)는 예술의 주류가 되었다. [중략] 예술가는 결혼식과 결혼 후의 인생을 묘사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데, 결혼을 거대한 실망으로, 한마디로 참을 수 없는 동거로 또 비극과 고통으로 점철된 처참한 상황으로 그려 낸다. 죄악된 열정, 금지된 애정, 부자연스러운 정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가 사용된다. 결혼 속 사랑과 정절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런 표현들은 영광스럽게 취급되고 또 번쩍거림으로 넘쳐난다." 가정에게 이상적인 세대는 여태 없었고 오늘날도 당연히 그런 시대는 아니다. 음악상 시상식에서부터 우디 알렌(Woody Allen)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는 가정을 향해 결코 친절한 미소를 보내지 않는다. 더욱이 재정적 성공에 대한 굶주림은 기존의 많은 가족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또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싶은 동기 부여마저 현저하게 감소시켰다. 타임지가 실은 ‘2013년 결혼에 대해 배운 톱 10’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돈에게는 우리를 증오할 진화론적 이유가 있다”, “낮은 비율의 이혼은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하다”, “동성 결혼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 리스트의 1위는 바로 이것이다. “가족의 정의를 정확히 내리려고 애쓰다 보면 현기증을 느낄 수 있다.” 정말로 어지럽다. 정말로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걸까? 가족이라는 제도를 완전히 포기한다면 과연 세상이 더 나아질까?가정 신학에 대한 요구바빙크는 기독교 신학만이 그가 살던 시대와 또 지금의 시대를 사는 가족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기독교인은 시대정신에 떠밀려 행동하는 대신 하나님의 명령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말과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정이라는 선물을 통하여 인류에게 어떤 축복을 허락하셨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바빙크의 통찰을 바탕으로 뽑아낸 다음 몇 가지 포인트는 가정 신학에 꼭 필요한 기초를 제공한다. 1. 하나님은 가정을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다하나님이야말로 가장 헌신적인 가정 옹호론자이다. “인류의 역사는 결혼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혼식의 주례자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한 선물로 함께 할 파트너를 만들었고, 그 부부에게 축복을 주었으며, 자신의 형상을 지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번성시키라고, 또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다(창 1:28). 바빙크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예술 작품은 가정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이뤄지는 관계적인 사랑을 반영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고, 바로 그 목적을 위한 최고의 도구로 가정을 만드셨다. 2. 죄는 가정을 황폐화시킨다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단지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로 또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죄를 지었다. 죄는 가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죄는 “아담과 하와 사이의 불일치”를 불러 일으켰고, “가인의 마음을 아벨에 대한 증오로 채우고 형제를 죽이도록” 만들었으며, “라멕을 일부다처제로” 이끌었다. 죄는 건강한 관계를 독으로 채운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어서 배우자, 부모, 자녀들, 형제자매 및 이웃과의 관계를 망치도록 한다. 3. 그리스도는 가정에 희망과 큰 계획을 제공한다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하와에게 그녀의 후손이 사탄을 정복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3:15). 바빙크는 이렇게 썼다.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들로 인해서, 여자와 남자는 다시금 그들을 향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천국의 아버지와 지상에 있는 그분의 가족에게 죄를 짓지 않는 유일한 인간이다. 인간의 죄를 위한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지상 가족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용서 및 화해를 가능하게 했다. 바빙크는 다음과 같은 희망의 말로 그의 책을 결론맺었다. “인류의 역사”는 “결혼식, 즉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식 그리고 천국의 주님과 그분이 택하신 땅의 신부의 결혼식”으로 끝난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정은 의미, 목적, 그리고 희망을 찾을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n Christian Theology Save the Family?번역: 무제
가정
악마
기독교신학
바빙크
창조
죄
그리스도
예상치 못한 고통에 대비하라
by Adrian Warnock
2019-09-25
일 년 전, 46세가 되던 해에, 탄탄대로를 걷던 내 삶의 행로는 경고도 없이 방해를 받았다. 나는 지금까지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기차로 출퇴근을 해 오고 있었다. 그날도 사무실에서 집으로 퇴근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차역 앞에서 걸음을 걸을 수가 없고 숨도 쉬기 어려움을 느꼈다. 구급차가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고, 거기에서 나는 폐렴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피 검사의 결과가 비정상으로 나왔고, 더 좋지 않은 진단 결과가 나왔다. 천천히 진행되는 백혈병이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신체적이고 영적인 면에서 내 삶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삶의 불확실성과 연약성이 갑자기 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병원에서 받은 충격나는 의사이며, 견실한 성경적 교육도 받았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통에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에 나 스스로 놀랐다. 되돌아보자, 내가 왜 그리 놀랐는지 조금 더 명확해졌다. 첫째, 사회적으로 받은 축복으로 고통을 면제받고 있다는 기대가 내게 형성되어 있어서 충격이 더 컸었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는 고통에 관한 한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맑은 물, 위생적인 음식, 놀라운 의료 기술, 빠른 응급 처방 시스템, 그리고 일을 못하게 되면 사회 보장 제도를 사용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선대의 사람들을 괴롭게 했던 여러 위험한 것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심신을 위협하는 모든 상황이 제어되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추측 속에서 내가 고통을 면제받고 있다고 여기면서 살고 있었는지 이제는 알 수 있다.둘째,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이들이 나누고 있는 잘못된 기능적 신학을 내가 어느 정도는 흡수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아마도 그래서 이러한 고통에 내가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충격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러한 신학을 배웠거나 믿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든 내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경배하고 섬기면 그분이 심각한 고통을 면하게 해 줄 것이라는 가정을 충분히 논의해 보지 않고 단순하게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었다. 이러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 매우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백혈병을 통해 내 믿음이 생각보다 미천하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시고, 여러 차례 그분께 복종하고 또 더 깊이 그분을 신뢰하도록 도와주심을 말이다. 예상치 못함에 대비하라만성 림프성 백혈병의 여파가 내 가족을 덮치기 몇 달 전에, 한 친구가 내게 성경 구절 하나를 보내 주었다. 그 구절은 내가 그 병을 진단받고 힘들어하던 초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나를 지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진단을 받고 그 질병과 투쟁하기 시작한 지 지금 일 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순간에는 그 기간이 잠깐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고통이 남은 생애 동안 계속되더라도, 다가올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서는 잠깐에 불과하다. 내가 진단받기 전에 배운, 고통에 대한 굳건한 성경적 가르침은 내게 많은 위로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상황에 대해 더 준비가 된 상태였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나의 경험을 토대로 이 글에서 예상치 못한 고통에 준비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나누고자 한다. 여기에서 나열하는 목록들이 모든 것을 다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목록들이 갑작스런 변화로 인한 충격을 완충시켜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를 바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영적으로 대비하라하나님을 더 잘 알수록 고난의 시험을 더 잘 맞이할 수 있다. 바쁜 직장 일을 내려놓고 강제로 누워 있게 됨으로써, 나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 삶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혼자만의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진실하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개인적으로 그분을 경배하라. 그리고 건강하고 성경적으로 신실한 지역 교회의 능동적인 구성원으로서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그분께 예배를 드려라. 삶이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을 경배한 욥처럼 되려는가 아니면 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다그친 욥의 아내처럼 되려는가? 신학적으로 대비하라내가 백혈병 진단을 받기 전에 고난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 읽는 일에 얼마나 소홀했었는지를 이제야 깨닫는다. 추천하고 싶은 자료들을 여기에 적어 본다. ‘하나님을 기뻐하라’(Desiring God)는 그 어떤 자료보다도 고난에 대해 훨씬 도움이 되는 책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존 파이퍼(John Piper)의 핵심 가르침은 내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삶의 단맛을 새롭게 느끼게 했다. 팀 켈러(Tim Keller)의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는 아파하는 이들에 공감하는 진리와 지혜로 가득하다. C.S. 루이스(C.S. Lewis)의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은 상실을 맞이하고 있는 크리스천의 깊은 슬픔을 뛰어난 화술로 고통스럽게 탐구하고 있다.책임감 있게 대비하라선한 청지기는 그의 청지기직을 내려놓기 위해 생각해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한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이 집이나 교회나 직장에서 당신의 역할을 바로 이어서 할 수 있는가? 당신이 갑자기 일을 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가족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 놓고 있는가? 재정 전문가로부터 투자나 당신의 재산과 수입에 보험을 드는 것과 관련하여 상담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양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태만한 것인가? 그리고 재정적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일과 그러한 전략적 방법에 대해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동일한 크리스천이더라도, 투자와 보험에 대해 그리고 얼마만큼 투자하고 보험을 드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생각이 다 같지는 않다. 로마서는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롬 14:5)라고 말하고 있다.간단하게 살펴본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대비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공급하시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대비하지 않는 것은 교만한 것이다.신체적 건강과 영적 건강나는 크리스천 의사로서 신체적 건강이 영적 건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지속적인 영적 문제들은 단지 영적 투쟁의 문제에만 근거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점차로 몸이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단지 직장 일 외의 다른 일상에서 지난 몇 년간 점차로 무관심이 증가하고 에너지가 떨어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영적인 면을 포함하여, 나의 열정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나는 번번이 내 가족에게 실망을 주고 있었지만, 영적 에너지를 다시 회복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진단을 받으면서, 피로감은 악화되었고 백혈병이라는 소식에 대한 나의 정서적 반응이 이에 복합되었다. 한동안, 하나님이 멀게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내 믿음은 위안을 주지 못했다. 나는 영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아팠다. 내가 장기 병가를 냈을 때 겨우, 한정된 에너지를 사용하여 시간을 내서 이제 하나님과 다시 연결될 수 있었고, 내 믿음을 조금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고난을 대비할 때, 영적 건강이 신체적 건강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도록 하라. 정서적으로 흔들릴 수 있음을 예상하라. 고난을 겪는 시편 기자의 생생한 기도가 내게도 필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음으로 준비하라. 그리고 실제로 고난이 오면 “슬퍼할 때”(전 3:4)임을 예상하라. 가장 신실한 신자들도 심각한 병을 진단 받은 후에는 바로 혼란스러운 기간을 지날 것이다. 오직 시간의 흐름과 깊은 영적 작업을 통해서만 그들도 만성 질환과 고통을 맞이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 영광의 날을 고대하라예상치 못한 고통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베드로 사도는 바람직한 관점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하나님이 기적으로 나를 치유해 주시지 않는 한, 나는 남은 생애 동안 이 심각한 질병과 싸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벌써 여러 차례 병원에 입원했고, 감염이 재발되었으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영원의 관점을 소유하는 것은 특히 고통을 겪어 나가는 방식을 크게 다르게 한다. 나는 이 점을 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이 고통은 물론이고 예상치 못함으로 인한 초기의 충격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원의 빛에 비추어 보면,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들은 “경한 것”과 “잠시 받는” 환난이다(고후 4:17). 그리고 스펄전은 이를 아주 아름답게 말했다. “아마도 한 주가 더 지나기 전에, 우리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젊을지라도, 또 한 해가 시작되기 전에 그늘지고 우울한 일들을 넘어 우리는 안식처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날이 얼마나 밝을 것인지! 오, 하늘에서의 하루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날은 해가 시기를 함으로 희미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날은 얼마나 행복한 날일까요! 다시는 밤이 없[을 것입니다]. 두려운 밤도, 슬픔의 밤도, 죽음의 밤도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곡괭이도 없고, 수의도 없고, 관도 영구차도 없을 것입니다. 밤이 짧아지고 그날이 가까워짐을 기뻐합시다. 인생의 새 아침을 고대하며 승리합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습니다]”(C.H. Spurgeon’s Forgotten Early Sermons, 20–21).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urprised by Trials: Preparing for Unexpected Suffering번역: 정은심
생활
건강
고통
영적대비
루이스
존파이퍼
팀켈러
책임감
이웃을 사랑하듯 자녀를 사랑하라
by Jen Wilkin
2019-09-19
내게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준 자녀 양육 지침은 아이들이 사람이라는 점이다.이는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아이들도 팔과 다리, 귀와 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인간성을 가지고있다는 것은 그들이 단지 인간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 이상의 의미를 포함한다. 이것은 그들의 존재가 중요하며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도 성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소유하고 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성인들과 똑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성인과는 다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내적 가치나 존엄성은 발달 속도나 정도에 따라 증가되거나 축소되지 않는다. “사람은 아무리 작아도 사람이다”라는 닥터 수스(Dr. Seuss)의 말은 유명하다.자녀 양육과 관련하여 내가 들어 본 말 중에서 가장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성경이 자녀 양육에 대한 주제에 비교적 침묵하고 있다는 진술이다.겉보기에 이 말은 사실처럼 보인다. ‘양육에 관한 본문’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부모와 자녀, 권위와 훈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구절들을 보통 생각한다. 예를 들면, 신명기 6장이나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의 다섯번째 계명을 떠올린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 자녀가 가야할 길을 가르쳐야 한다,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한다는 가르침들과 그 외의 성경 구절들을 피상적으로 언급한다. 혹은 양육을 평가해 보기 좋은 방법으로, 탕자의 예나 족장의 비애 이야기를 그저 던져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외에, 부모와 자녀 관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자녀 양육의 문제를 우리가 알아서 하도록 남겨두셨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해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전까지는 말이다.아이들이 사람이라면, 그들도 우리의 이웃이다. 이 말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모든 성경 말씀이 갑자기 우리가 양육하는 방법과 관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큰 희생과 노력으로, 경건한 지혜로, 우선적으로 사랑하라는 모든 명령은, 직장 동료들이나 교회의 사람들, 미용실에 있는 사람들이나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사람들, 혹은 노숙자 쉼터에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이는 내 집 지붕 밑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명령도 된다. 그들이 아무리 작을 지라도 말이다. 아이들이 사람이라면 내 자녀들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자녀들보다 더 가깝고 우리의 희생적 사랑을 더 필요로하는 이웃은 없다. 자녀들을 이웃으로 인식하게 되면, 갑자기, 상당히 많은 성경 말씀이 양육에 대해 전혀 침묵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자녀들을 이웃으로 인식하는 것은 내가 그들을 훈육하는 방식과 내가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방식,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에 대해이야기하는 방식에 영향을 줬다. 그것은 친구나 동료에게는 결코 그리 대하지 않을 것 같은 방식으로 얼마나 빨리 내가 가장 가까운 이들을 대하는지 알아차리게 했다. 내 자녀를 무시하는 대신 긍휼의 대상으로 보게 했다. 생색내지 않으며 그들의 성공을 더 잘 축하해 줄 수 있으며, 그들의 실패를 내가 형편없는 부모라는 명백한 증거로 보지 않으면서 더 잘 슬퍼할 수 있다. 자녀들을 이웃으로 인식하는 관점은, 내가 그들이 빨래를 만들어내거나, 음식을 먹어버리거나, 집안을 어지럽히거나, 때를 쓴다고 짜증내기 보다는, 그들을 사람으로 여기며 기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렇지 않은 날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이들을 이웃으로 사랑하지 못한 날에는, 나는 성경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다시 기억하며 자녀를 그 방식으로 사랑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은 필요한 도움을 제공해주었다. 여기에 자녀 양육에 관한 구절이 “아닐 것 같은” 몇 개의 성경 구절들이 있다. 이 구절들은 내가 자녀를 이웃으로 사랑하지 못한 날에 다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말씀이다. 자녀를 가혹하게 바로잡고 싶은 충동이 들 때“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자녀에게 잔소리하고 싶을 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자녀가 나의 자랑이 되게 하고 싶을 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자녀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부담으로 느껴질 때“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7–40). 부모로서 그 공로를 인정받고 싶을 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자녀의 잘못을 용서하고 싶지 않을 때“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내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았을 때“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4-26).마지막 성경 구절은 우리 집 냉장고에 붙어 있다. 하나님은 아이들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녀는 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는 그들을 잘 돌보고 양육할 수 있을 것이다. 자녀를 이웃으로 소중히 여길 때, 훈육하면서 그들에게 비난이나 수치나 경멸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자녀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때도, 우리의 말은 사랑과 존엄성 전하는 언어로 바꿔진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좌절감을 주는 내 아이를 고쳐주세요”에서 “당신이 나를 사랑하셨듯이, 당신이 우리 집에 보내주신 작은 이웃을 사랑하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바뀌게 된다. 프레드 로저스(Fred Rogers)는 아이들의 가치와 존엄성을 잘 이해했다. 장로교 목사인 그는 TV에서 '작은 사람들'에게 이웃 사랑의 아름다움을 설교하며 일생을 보냈다. “아름다운 날이네요. [중략] 내 이웃이 되어 주시겠습니까?”라는 그의 메시지는 부모들에게도 좋은 것이다. 아이들은 사람이다. 자녀는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스런 이웃이다. 부모들이여, 당신의 지붕을 공유하는 자녀를 이웃처럼 여기고 먼저 사랑하기 위해, “아름다운 날이네. 내 이웃이 되어 줄래?”라는 말을 사용해 보라. 그리고 용기를 내라. 성경은 당신을 돕는 말씀들로 넘쳐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r Child Is Your Neighbor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프레드
존엄성
훈육
사랑
이웃
자녀
학대와 복종 사이 명확한 성경적 가르침
by John Piper
2019-09-13
여러 해 전에 나는 온라인 질의응답 코너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학대하는 남편에게도 아내는 복종해야 할까요?”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 아내가 법적인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비평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성경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를 7 가지로 정리해 보려 한다. 1. 복종해야 하는 관계들이 상충될 때는 지혜가 필요하다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권위에 복종하고 또한 서로에게 복종하도록 부름 받았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자녀는 부모에게(엡 6:1), 시민은 정부에게(롬 13:1), 아내는 남편에게(엡 5:22), 고용인은 고용자에게(살후 3:10), 교인은 장로에게(히 13:1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엡 5:21),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께(눅 6:46) 복종하라고 한다.이 본문들은 부부 관계 안에서의 복종을 그리스도, 행정 권위자, 서로, 그리고 교회 등 좀 더 넓은 범주로 확대시켜 놓는다. 이는 복종의 행위가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려면 이 모든 관계들이 적절한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모두 우선적으로 그리스도께 복종할 책임이 있다. 그 다음, 그 밑의 다양한 다른 사람들과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 이 복종의 관계들이 상충될 때는 사랑과 순종의 방향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며, 성경 중심적인 겸손과 영적인 지혜가 요구된다. 2. 학대하는 남편은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는 것이다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는 명령을 받았다. 성경은 남편에게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엡 5:28–29)라고 말한다.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처럼 하라는 말씀의 초점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는 데 있다.하지만 그리스도인 남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들은 유한하며 죄에 빠지기 쉬운, 죄 사함을 받은 죄인들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그들의 아내들에게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똑같이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같은 지혜와 능력 및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들이 그리스도처럼 아내를 인도하는 모습은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그녀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고 [중략] 보살피며 소중히 여기고 [중략] 가혹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말로 제한된다. 그러므로 아내를 학대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다. 즉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그러한 남편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지 말고 교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또한 아내는 교회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크리스천 여성이 경찰에게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그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이는 교회가 성경적으로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도울 수 있음을 그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3. 여성들은 정부기관이 제공하는 도움을 신실하게 요청할 수 있다교회가 도울 수 있지만, 또한 학대받은 아내가 정부기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바른 일이다. 배우자나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위협이나 고의로 신체상의 위해를 가하는 일은 범죄이다. 가해자는 벌금을 물을 수도 있고, 감금형을 받을 수도 있으며, 둘 다에 해당될 수도 있다. 이는 아내를 위협하거나 고의로 상해를 입힌 남편은 하나님의 도덕법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민법도 어기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남편이 자신이 행한 위협과 상해를 아내가 조용히 수긍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도덕법과 국가의 민법 둘 다를 어기는 데 그녀도 동조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법 집행관들을 세워 두셨다.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4). 이 말씀은 남편에게 상해를 입은 아내가 민법의 권위를 추구하고 이에 복종할 때, 이를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라는 부부 관계의 정신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이 합법적인 시민 보호 수단을 통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편의 회개와 돌봄의 리더십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무겁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수단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교회는 한 가지 이상의 자비를 베풀도록 부름받았다교회는 학대하는 남성이나 여성을 교회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당국이 알고 처벌하려고 할 때, 그들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 우리는 자비롭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자비를 베풀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공의로 행해야 할 때도 있다. 범법 행위의 경우가 종종 그러하다. 또한 벌금을 내야 하거나 감옥에 가야 하는 범법자에게 자비를 보여 주는 길에는 여러 접근과 형식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처해 있는 대부분의 상황은 자비를 선택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고민처럼 단순하지 않다.5.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학대를 홀로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많은 여성들은 남편이 감옥에 가고 직장을 잃으며,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을 그리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관의 도움을 얻어야 할 만큼 절실해지기 전에는 남편의 많은 죄악된 행위를 종종 그냥 견딘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절실한 상황 혹은 상해를 입는 상황에 이르기 훨씬 전에, 교회는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모든 교회에 그런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영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는 자비로운 남성과 여성이 항상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교회에 그런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성숙한 형제자매들은 교회 내의 학대받는 결혼 관계에 개입하여 남편을 회개와 화해로 이끌 수 있다. 그들은 또한 남편들이 법을 어겼음을 알게 되면 민간기관에 알릴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교회는 여성 혹은 남성 그 누구라도 학대를 홀로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 6. 성경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탈출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라고 명하실 때, 그분은 일방적인 사랑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나는 복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이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하지만 이것은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아니다. 성경은 도망하는 것도 정당한 행위로 보고 있다. 존 번연(John Bunyan)은 박해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두 가지 방법을 가지고 씨름했다. 도망하는 사람은 그리하도록 보장된다. 견딜 사람은 그리하도록 보장된다. 참으로, 한 사람이 도망할 수도 있고 견딜 수도 있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도망하기도 했고(출 2:15), 참기도 했다(히 11:27). 다윗도 도망하기도 했고(삼상 19:12), 참기도 했다(삼상 24:8). 예레미야도 도망했고(렘 37:11-12), 참았다(렘 38:17). 그리스도는 스스로 물러섰고(눅 9:10), 참으셨다(요 18:108). 바울도 도망했고(고후 11:33), 참았다(행 20:22-23). 노예처럼 두려움을 피해 도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도망하라. 하나님의 섭리로 문이 열리기 때문에, 즉 하나님이 도피할 문을 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리하라는 말이다(마 10:23). 7. 성경은 공급과 보호를 촉구한다성경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라고 말할 때, 그것은 연약한 자를 도울 수 있는 수단과 힘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도적으로 그것을 감당하라는 의미이다. 이 본문은 도움을 주기 위해 연약한 자들을 방문하며, 또한 그들에게 공급과 보호를 제공하라고 촉구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른 편 뺨도 돌려 대며”(마 5:39)라고 하신 말씀의 초점은 ‘내가 참을 수 있다면, 그것도 참아 내라고 해야 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부당함의 순환을 깨뜨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취해야 할 모습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 남성들과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상호보완적 결혼 관계의 아름다운 비전을 알려라. 남성들은 자신의 용기와 온유함뿐만 아니라 다른 남성들의 온유함에도 책임을 지도록 부름 받았다. 성경적인 남성다움을 보여 주는 것의 일환으로, 교회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행하는 학대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원제: Clarifying Words on Wife Abuse 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정은심
가정
결혼
학대
남편
불순종
존번연
온유함
복종
갈등을 다루는 삶의 기술
by Josh Squires
2019-09-11
내게 갈등을 다루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 바랐다. 나는 갈등을 정말로 싫어했고, 이를 회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성격과 상황, 죄 등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나는 상대방과 갈등 속에 있는 것 보다는 그런 불편한 상황에서 그냥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약 30년 전에 내가 상담사 훈련을 받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내게 갈등이 항상 관계에 손상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해 주기 전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사실, 그 사람은 우리가 누군가와 갈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그와 더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게 해 주었다. 그것은 내게 혁명적인 생각이었지만 갈등을 잘 다루는 기술은 쉽게 습득되지 않았다. 그것은 헌신과 지속성, 그리고 잘못했을 때 용서할 수 있는 의지가 요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갈등을 다루는 기법은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때 필요한 삶의 기술에 속한 것이다. 골로새서 3장 12절은 이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준다. 이 구절은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면서 양육해야 할 품성들을 언급하면서, 그것들을 외적으로는 세상을 향하여, 그리고 내적으로는 크리스천 형제자매들에게 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다룰 때 도움이 되는 지침들을 살펴보자. 1. 긍휼긍휼이 첫 번째 자질로 언급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긍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감정이다(마 20:34; 막 1:41; 눅 7:13; 마 9:38; 14:14; 15:32; 막 6:34; 8:2).긍휼한 마음은 다른 사람의 사정에 따라 자신의 마음이 깊이 움직여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누군가의 상황에 의해 마음이 움직여지기 위해서는 그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즉 말하기보다는 먼저 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잠 18:13).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이 당신이더라도, 어떻게 그의 마음이 상했는지를 이해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양쪽 모두 상대방이 자기에게 잘못했다고 느낄 때,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듣는 일은 특히나 어렵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을 듣기 위하여 자신의 감정을 먼저 내려놓는 사람이 되는 것은 영적 성숙의 표지이다. 2. 자비자비는 행동으로 표현된 긍휼이다. 갈등 중에도 여전히 상대를 사랑하며 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 주려는 의지를 가져라. 눈을 위아래로 굴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거나, 혹은 한숨을 내쉬는 것보다 갈등을 더 빨리 달아오르게 하는 것은 없다. 몸의 언어와 목소리의 톤을 조절하는 것은 긴장되는 순간에 의사소통의 효과를 높이는 데 핵심적인 요소이다. 자비로운 태도는 또한 생각과 말에 주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건설적인 의사소통은 각자 상하고 화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천천히 다루게 되면 대부분 미리 무산되고 만다. 상하고 화난 생각들을 대면하라. 당신도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떠올려 보라(롬 3:23).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심에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그리고 당신과 갈등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러한 용서와 감사를 적용할 수 있기를 주님께 간구하라(골 3:13).3. 겸손겸손은 보상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게임이론’에 근거한 사고방식 때문에 갈등에 휘말린다.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덕을 세워주기(엡 4:15–16; 롬 14:19; 살전 5:11)보다는 상대의 잘못을 탓하는 비난을 주고받게 된다. 갈등을 통해 개인적인 승리를 얻으려는 욕망을 버려라. 그 대신, 그 기회를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는 놀라운 기회로 여겨보라. 4. 온유온유는 상대의 말을 비난으로만 여기기보다 도움으로도 생각해보는 행동이다. 이 말은 갈등의 정도를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갈등으로 인한 억압된 감정은 대체로 전략적으로 방출되기보다는 화산의 폭발처럼 분출된다. 누군가가 언제 어디서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언제 어떻게 그것에 대해 소통할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상처에 대해 다 논의해야 할 필요는 없다. 1부터 10까지의 척도로 측정해 볼 때, 당신의 상처가 5 이하이면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고 잊기 위해 노력해 보라(골 3:13). 그렇게 할 수 없거나 그 수치가 5 이상이면, 그 상처에 대해 언제 어떻게 이야기할지를 지혜롭게 생각해 보라.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 활동하는 행동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당신이 밤 시간까지 대화를 이어 간다면, 그 사람에게 늦은 밤까지 깊이 집중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녁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에게 아침 일찍부터 대화에 집중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당신은 또한 상처가 되지 않는 말이나 비난이 섞이지 않은 단어를 선택할 수 있다(잠 16:24). 당신이 얼마나 화가 나고 불만이 있든지 상관없이, 상대방을 방어적인 모드가 되게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이는 8%에도 미치지 못하는 효과를 거둔다).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5. 인내인내는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우리로 하여금 계속 도움을 제공하게 한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한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인내하신 것처럼 당신도 그 사람에게 인내할 수 있습니까?” 당신과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여기에 넣어 보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엄청난 번개를 내리치시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게, 과거에 행한 것처럼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는 경향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버리거나 저버리시지 않는다. 그 대신 그분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사람들은 일생 동안 같은 부류의 것들과 투쟁하는 경향이 있다. 혹시 도움을 잘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을 친구로 두고 있는가? 당신의 배우자가 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가? 세부 사항을 다루기 어려워하는 형제자매 때문에 짜증나는 경우가 많은가? 아마도 그러한 성향이 갑자기 극적으로 바뀔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명백한 상처를 초래하므로, 그냥 괜찮은 척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바뀔 것이라는 너무 높은 기대를 하지도 말아야 한다. 일관되게 사랑스런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은 때로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며, 훨씬 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효과가 있다. 갈등에 처해 있을 때 긍휼, 자비, 겸손, 온유 그리고 인내하는 것은 정말로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의 조언은 명확하다. 무엇을 하든지 항상 이러한 자질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골 3:17). 그렇게 함으로써 갈등의 반대편에서 서로 더 가까워질 가능성이 커질 뿐만 아니라, 복음이 가장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품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 된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Christian Conflict: Five Ways to Fight It번역: 정은심
생활
관계
갈등
기술
긍휼
자비
온유
인내
금식 초보자들을 위한 조언
by David Mathis
2019-09-09
금식을 거의 하지 않거나 한번도 해보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수없이 많다. 이는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았거나, 신실한 설교를 들어 보지 못했거나, 금식의 능력에 대한 가르침을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며, 혹은 금식을 진정으로 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실제로 절대 수저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금식을 못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음식이 너무 흔하여 먹을 필요가 없을 때도 있고, 먹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식을 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보통 좋은 이유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혹은 때로 그냥 기분 전환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금식으로 인한 불편함이 안락함에 대한 갈망과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식의 목적금식은 영적인 목적을 위하여 음식(혹은 정기적으로 즐기는 다른 것이나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자원해서 먹지 않는(혹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결혼할 때까지 성적 행위를 금하는 것처럼, 소비 중심적인 사회에서는 현저하게 반문화적인 것이다.잃어버린 금식의 기술을 배우고 그 효과를 즐기려면, 소비 중심적인 사회가 아니라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금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언제 하느냐가 우리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금식할 것이며, 심지어 그 때가 올 것이라고 예견하신다. 예수님은 ‘만일 금식을 하면’이 아니라 “금식할 때”(마 6:16)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금식할 수도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라고 확고하게 말씀하셨다(마 9:15).우리는 다가올 삶을 믿기 때문에 이생에서 금식한다. 우리는 다가올 시대에 모든 것을 가질 것이라는 약속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모든 것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볼 수 없고 한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 맛보았으며 또한 그분을 더 절실히 갈망하기 때문에,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철저한, 일시적인 방침금식은 이 세상을 위한 것이다. 주변의 고통과 문제를 넘어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넓히는 것이다. 금식은 우리의 죄와 약점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죄악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고 그리스도를 더 갈망하는 것이다.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금식은 끝날 것이다. 금식은 이생과 이 시대를 위한 일시적인 방침이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그분을 대면할 다음 생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그때는 금식을 거두고 잔치를 벌일 것이다. 그때에 모든 거룩한 금욕은 영광스러운 목적을 이룰 것이며 또한 모든 놀라운 선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그때까지, 우리는 금식할 것이다.금식을 시작하는 방법금식은 어렵다. 개념으로 아는 것보다 실제로 행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우리가 한 끼의 식사를 먹지 못했을 때,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느끼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금식을 시작하기로 처음으로 다짐한 이들은 한 끼 식사를 먹지 않기로 결정하고 나서 다음 식사 시간이 오기도 전에 바로 허기를 느끼게 된다. 금식은 간단한 것 같지만, 우리의 육적인 세계와 대적은 금식을 하지 못하도록 모든 다양한 음모를 꾸민다. 나는 여기서 금식을 잘하기 위해 느린 행로를 시작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6가지 간단한 조언을 주고자 한다. 이 제안들은 너무 구체적인듯 보이지만, 그러한 기초적인 조언은 금식을 처음 해 보는 사람이나 진지하게 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1. 작게 시작하라처음부터 일주일 간 금식하기를 시도하지 말라. 한 끼니로 시작하라. 여러 주 동안 매주에 한 끼를 금식할 수도 있다. 그 다음 두 끼니를 시도해 보라. 그러고 나서 하루 종일 금식하기를 해 보라. 아마도 이틀 동안 주스만 먹는 금식을 해 볼 수도 있다. 주스 금식은 주스와 물을 제외한 모든 음식과 음료를 금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스를 마시는 금식은 몸이 계속 작동하도록 영양소와 당분을 제공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단단한 음식을 먹지 않는 효과를 느낄 수 있다. 금식을 짧게 하든지 길게 하든지, 물을 금하는 것은 권장하지 않는다.2. 먹는 데 사용하는 시간에 대신 무엇을 할지 계획하라금식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 제어의 행위가 아니다. 이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더 경험하기 위해 추구하는 영적 훈련이다. 그 의미는, 보통 먹기 위해 사용하는 시간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쓸 것인지 계획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을 음식 앞에서 보낸다. 금식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기도를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어떤 행위를 하도록 그 시간을 새롭게 고안하는 것이다. 금식으로 돌진하기 전에 간단한 계획을 세우라. 그것을 금식의 목적과 연결시키라. 금식의 목적을 인식하여, 당신이 먹는 데 들이는 시간을 어떻게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할 것인지 설계하라. 목적과 계획이 없으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금식이 아니라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의 배를 굶주리게 하는 '굶식'일 뿐이다. 3.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라금식한다고 해서 사랑을 베풀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받는 것은 아니다. 금식이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높이는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 행위로 인해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 결핍된다면, 이는 의미 없고 슬픈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함께 간다. 좋은 금식은 수직적 관심과 수평적 관심이 어우러지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금식을 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사랑과 돌봄을 더 많이 받는다고 느껴야 한다. 따라서 금식을 계획할 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를 고려해야 한다. 당신이 보통 직장 동료와 점심 식사를 하거나 또는 가족이나 같이 사는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한다면, 당신의 금식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라. 식사 시간에 그냥 나타나지 않거나 혹은 음식을 먹지 않기로 한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당신의 결정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당신이 금식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도록 하라. 또한 수동적 동기에 의한 금식일 수 있지만, 이것도 고려해 보라. 당신이 특정한 친구들이나 가족과 매일 혹은 매주 식사를 하는데, 그 사람들이 여행이나 휴가를 떠나거나 혹 그들에게 이례적인 상황이 생겨서 식사 계획을 이행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러면, 혼자 식사를 하기보다는 그것을 금식하는 기회로 고려해 보라. 4. 다른 종류의 금식 방법을 시도해 보라금식의 전형적인 형태는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부분적인 금식이지만, 성경에는 다양한 형태의 금식이 등장한다. 개인적인 금식과 공동체적인 금식, 사적인 금식과 공적인 금식, 회중적인 금식과 국가적인 금식, 정기적인 금식과 간헐적인 금식, 절대 금식과 부분 금식 등이다.특별히 가족과 함께 하는 금식, 소그룹이나 교회와 함께 하는 금식을 고려해 보라. 특히 하나님의 지혜와 지도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는가? 교회나 사회에 이례적인 어려움이 발생하여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특별히 다른 신자들과 함께 금식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해 보라. 5. 음식이 아닌 다른 것을 금해 보라음식을 금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금식 방식에 따르면, 가장 경건한 사람조차 그의 건강 상태에 따라 금식을 실천한다. 또한 성장기 아이들, 출산한 산모, 수술 후 회복 중인 사람들 혹은 여러 건강 상의 이유로 금식을 권하지 않는 상황들을 인정한다. 한편, 금식은 음식을 금하는 것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가 말했듯이, “금식은 특별한 영적 목적에 합당하다면 어느 것이든지 금하도록 고안되어야 한다.” 건강 상태 때문에 음식을 금할 수 없는 경우에는 TV, 컴퓨터, 소셜 미디어를 금하든지, 혹은 그 밖에 그리스도를 더 즐기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이나, 당신이 정기적으로 즐기는 것을 금해 보라. 바울도 결혼한 부부가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성관계를 금하는 것에 관하여 언급한다(고전 7:5).6. 불필요한 것에 집중하지 말라빈속이 꼬르륵거리기 시작하고 뇌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다해 “먹을 것을 달라”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하면, 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을 집중하지 않도록 하라. 위장의 신호에 저항하려고 강한 의지를 발휘하더라도 마음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음식에 대한 사랑이 더 강하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적 금식은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께 돌리거나 세상과 관련된 중요한 이유에 돌리는 행위이다. 기독교적 금식은 굶주림의 고통을 택하여 이를 영원한 찬가를 부르게 할 열쇠로 바꾸려는 숭고한 신앙 행위이다. 그것이 어떤 죄와 씨름하는 것이든지, 누군가의 구원을 호소하는 것이든지,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탄원하는 것이든지, 혹은 예수님을 더 깊이 경험하기를 열망하는 것이든지 말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Fasting for Beginner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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