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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당신을 묵상하겠습니다
by Marshall Segal
2019-09-02
하나님과 단둘이 있고자 하는 열정 또는 헌신을 잃을 때면, 그분은 그냥 내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여전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볼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몇 주가 지나는 사이, 눈에 안개가 끼여 시야가 서서히 흐려지면서 나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고, 내가 얼마나 그분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도 무뎌졌으며,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누릴 수 있는 그 깊고도 강렬한 행복감을 잃었다. 당신도 이런 안개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다윗왕 역시 그 안개를 알고 있었다. 그는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갈망했고, 마침내 구름이 걷혔을 때 이렇게 말했다.“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시 63:5-6).다윗은 우리에게 묵상을 통해 안개를 뚫고 나가라고 가르친다. 그는 단지 말씀만 묵상할 것이 아니라 그분, 곧 하나님을 묵상하라고 말한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묵상은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더 오래 생각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시편, 레위기의 율법, 소선지서, 복음서, 초대 교회 및 바울 서신서 속에 자신의 영혼을 깊이 잠기게 할 때, 우리는 단지 글자가 아닌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우리는 빛나는 영광 속에 계신 그분을 보고, 무한한 지혜로 드러나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또한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키시는 그분의 독특한 능력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공부하고 영적 훈련을 하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기를 권고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일찍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45:5). 새벽과 오후 그리고 밤늦은 시간에 잠들지 않고 앉아서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장엄함을 그리고 그분의 위엄을 기대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기대한다. 잠보다 더 중요한밤의 시간은 경계병이 적을 감시하는 내내 길게 이어진다. 안전이 잠보다 중요하기에, 누군가는 도시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잠을 자지 않는다. 행여 잠자는 사이에 누가 와서 나를 죽이지 않을까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 119:147-148).시편 저자는 비록 휴식이 소중하지만 묵상이 그보다 더 큰 만족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잠을 포기한다.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을 경시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균형을 잃을 것이다. 잠은 중요하다(시 127:2).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 음식은 중요하다(딤전 4:4; 6:8).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 결혼과 가정은 중요하다(전 18:22; 시 127:3).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즉 잠잠한 가운데 서두르지 않고 그분을 묵상하며 또한 그분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을 즐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급하게 느껴지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욱 소중하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깊은 밤에 깨어 있게 하고 또한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일어나게 하신다면, 이는 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 쉬어야 할지, 언제 묵상하고 기도해야 할지 잘 알고 계신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분은 자명종 시계가 울리기 한참 전에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한번 더 그분의 위엄을 보고 누리도록 하실 것이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귀를 더욱 활짝 열어 전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의 마음 괴롭히던 그 무거운 짐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당신은 스트레스 때문에, 소화가 안 되서, 또는 다른 어떤 불균형 때문에 깨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은 잠자리보다 더 가치있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집중된 애정그러나 집중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묵상을 더 이상 은혜로 느끼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인터넷은 길게 묵상하는 능력을 저해한다. 우리가 찾는 대부분의 사이트는 끊임없이 클릭을 유도하고 또한 사용자가 페이지를 옮겨다니며 움직이도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사람들이 인터넷을 하면서 어느 하나에 온전히 집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가를 말씀하시는 경우에도 당신은 이에 전혀 집중하지 못할 때가 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 119:12). 당신은 최근 시편 저자와 같이 뭔가에 집중한 때가 있는가? 무언가에 마음을 온전히 기울인 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아예 거부했던 적이 언제인가? 알람도, 먹을 것도, 혹은 뉴스 속보나 스포츠 경기 결과도 거부하고 오직 한 가지 일에 집중했던 때가 언제인가? 만약 시편 저자가 묵상을 통해서 느낀 이런 기쁨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거의 불가능하거나 달성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이는 우리가 묵상으로부터, 즉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갈구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는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 그런 갈급함을 잃어버린 것일까? 묵상은 단순히 정신적으로 집중하는 것, 다시 말해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읽고 생각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차가운 동의가 아닌 열정적인 갈망만이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영혼에 불을 붙일 수 있다.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48). 묵상은 집중과 깊은 생각, 심지어 지치지 않는 애정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묵상하는 사람은 축복받은 자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힘들고 무거운 아침에도우리는 조용한 아침, 방해받지 않는 아침에만 제대로 묵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즉 우리는 묵상을 아무 문제 없이 “평상시”대로 흘러가는 날에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용한, 방해받지 않는, 또한 예상대로 흘러가는 아침이 어떤 아침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아침은 정신없이 바쁜 시간일 뿐만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기 마련인 때이다. 말 그대로 비정상이 정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다. 내가 아무리 계획을 짜고 알람을 맞추어도, 인생은 마구 흘러간다. 아침에는 언제나 예상보다 시간이 모자라고, 어떤 아침에는 아예 시간 자체를 낼 수 없기도 하다. 또한 예상치 못한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 아침도 있다. 우리는 비로소 왜 다윗이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을 선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어느 하루, 혹은 인생의 어떤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묵상에 적합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우리에게 묵상을 위한 이상적인 시간을 기다리느라 그저 앉아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알려 준다. 사실 묵상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시간이 사라져 갈 때, 그때야말로 가장 유용한 묵상이 가능하다. 고난과 박해 속에서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시 119:23). 다윗은 집에서 쫓겨났으며 적에게 둘러싸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오로지 위험뿐이었지만, 그는 결코 묵상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시편 한편 한편을 보면, 다윗은 다른 모든 것은 다 포기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집중된 애정을 바탕으로 그분을 더 생각하고 기도하는 그 시간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내일 아침 일어나 말씀을 통해 그분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단지 당신을 만나고, 당신으로부터 이해받고, 또 찬양을 받기만 하는 분으로 존재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을 이해하고 찬양하도록 도우신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진정한 묵상은 자신을 의지하려는 욕망을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조차도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의 지혜를 대적하고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펼칠 때마다 강하고, 똑똑하고, 또한 독립적인 사람으로 서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시편 저자처럼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27). 우리가 집중된 애정과 기도에 의존해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신다. 또한 사라지지 않는 상처에 대한 위로와 치유, 끈질긴 죄로부터의 독립, 힘든 상황과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을 다시 맛보고 누리는 경이로움을 허락하신다.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묵상을 인도하실 때 나와 당신은 로버트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처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이 그토록 사모하는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만날 수 있는데, 그 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을까요?”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은 우리 곁에 앉아 계시고, 또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한다. 내 영혼이 사랑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묵상을 허락하시고, 또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그분 자신을 내게 드러내신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I Will Meditate on You in the Mornin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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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그리스도인 가족의 아름다움
by Tedd Tripp
2019-08-30
성인이 된 아들이 최근 내게 가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요약하자면,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은 이제 그다지 경쟁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 지켜질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다. 오늘날,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고 또한 현대 문화는 가족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다. 동성애 가족, 부부 관계의 창조성과 다양성에 대한 합의, 일부다처제를 수용하라는 압박 등과 같은 문화적 현상들에 의해 전통적이고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있다. 부모는 사랑으로 자녀를 낳고, 남녀는 결혼 관계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하며, 부부는 경건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하여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문화적으로 이상적이지 않게 보인다. 보통의 크리스천들이 비범한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이룬 가정, 우리는 이를 평범한 기독교 가족이라고 부른다. 물론 가족이 두 명의 부모로 이루어진 가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한 부모 가정의 크리스천들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많은 조부모들이 그들의 손자,손녀들을 담대하게 키우고 있다. 내 며느리의 친정 어머니는 홀로 세 자녀를 키우셨으며, 그 자녀들은 이제 크리스천 성인이 되어 자신의 자녀들을 키우고 있다. 그녀는 성경적 가족의 규범을 자녀들에게 계속 상기시켜 주었다고 한다. “네 아버지가 있었으면 이것을 했겠지만, 아버지가 없으니 내가 하는 거란다”라고 말이다. 비록 남편이 부재하지만, 그녀는 자녀들이 가족 안에서의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도록 가르쳤다. 가족의 역동성에베소서 5장은 평범한 기독교 가족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이 본문에 의하면, 남편은 사랑의 리더십을 행하도록 부름받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목회 사역을 아버지의 자격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이 겪는 고된 일과 어려움을 말하면서, 그가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가르친 이유는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사용한 그 아버지 은유는 경건한 리더십을 알게 하는 놀라운 도구였다.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내려놓았다. 경건한 권위는 다른 사람을 종으로 삼을 때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으며 상대방을 섬길 때에 나타난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복하듯이 아내는 남편의 리더십 아래에서 살아간다. 아내는 남편이 가족의 지도자로 성공하도록 돕는 역할을 담당한다. 머리로 존재하는 다른 사람의 지위에 자신의 삶을 종속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에베소서 5장은 이를 평범한 크리스천 아내의 부름받은 모습이라고 표현한다. 궁극적으로 아내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남편의 권위 아래에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은 에베소서 6장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하는 자녀는 잘되고 장수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현명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순종의 필요성을 잘 이해시킨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독려하면서, 이는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부모의 권위를 주셨기 때문임을 설명한다. 즉 자식은 부모의 요구 때문에 그들을 공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순종을 실천해야 한다. 부모님께 순종할 때, 자녀들의 삶은 잘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순종을 보시고 자녀들에게 복을 주신다. 어린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방식을 진리로 수용하는 모습은 무척 아름답다. 나의 평범한 손자,손녀들이 그들의 부모를 기뻐하며 또한 부모가 현명하게 정해주는 경계선을 사랑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내게 큰 기쁨이다. 나는 최근에 내 손자들이 그들의 아빠와 나눈 짧은 대화를 들었다.첫째 아들(사춘기): 아빠, 커피 마셔도 돼요? 아빠: 물론이지.둘째 아들(십대 초반): 나도 마셔도 돼요?아빠: 아니, 아직은 안 돼.둘째 아들: 아빠, 불공평해요. 왜 형은 마셔도 되고 나는 안 돼요?아빠: 아들아, 아빠의 역할은 가정을 공평하게 이끄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인도하는 거란다.이 대화는 짧고도 유쾌한 상호교환이었다. 그리고 둘째가 아빠의 판단을 불평 없이 수긍했기 때문에 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대화를 통하여 아버지의 권위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다. 언젠가 그도 아버지로서 친절하고 현명한 권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관계의 역동이 성경적 질서로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가족에게는 세 가지 소명이 생긴다. 즉 가족은 신학과 사회성 및 복음을 배우는 학교가 된다. 신학을 배우는 학교평범한 크리스천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음의 두 계명으로 요약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막 12:30-31).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의 삶에 대한 훌륭한 묘사이다. 신학을 배우는 학교로서의 가족은 첫 번째 계명에 잘 묘사되어 있다. 가족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놀라움에 매료되는 공동체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심오한 감각을 아이들에게 심어 주는 장소이다. 시편 기자는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시 145:4)라고 기록했다. 당신의 가족은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이에 대해 시편 145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위를 입으로 말하는 것, 그분의 위대하심을 선언하는 것, 그분의 풍성한 선하심의 명성을 쏟아 놓는 것, 그분의 의로우심을 노래하는 것,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알리는 것, 그분의 친절하심을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송축하는 것(시 145:4-20)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읊조릴 때에,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가족 안에 심어진다. 아이들은 개념적인 공백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면, 그들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행복해진다. 가족은 신학을 배우는 학교이다. 사회성을 배우는 학교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은 두 번째 명령이다. 이는 가족의 책무이다. 가족 생활은 다른 사람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가정은 관계적 갈등이 가장 크게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4장은 관계적 갈등을 질문의 형식으로 언급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4:1). 우리는 보통 갈등의 이유를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 “그가 나를 너무 화나게 한다” 혹은 “그녀가 내 실수를 보며 비웃었다”와 같이 말이다. 야고보는 갈등의 이유를 우리 자신에게서 찾으라고 권면한다. 그에 따르면, 관계적 갈등은 우리 안에 있는 정욕과의 싸움에서 온다. 우리 내부의 열정과 욕망이 갈등을 야기한다. 가정은 그 내적 욕망이 전쟁을 벌이고 다른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통찰할 수 있는 장소이다. 즉 가정은 자기애의 추함을 밝힐 수 있는 장소이다. 이와 동시에 가족 생활은 다른 사람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의 훌륭함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가족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추구하는 법을 배우는 훌륭한 공동체이다.가족 간의 갈등은 때때로 가족의 책무를 이행하며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가족의 갈등은 이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다. 가족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장소이다.복음을 배우는 학교마지막으로,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은 복음을 배우는 학교이다. 즉 크리스천 가정은 복음의 은혜를 현실에서 삶으로 나타내는 장소이다.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고자 노력할 때 생기는 갈등은 우리가 복음의 은혜를 매우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점을 일깨운다.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또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기 위해, 즉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충족하기 위해 죽으셨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그리고 용서받은 사람들로 살아가도록,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나와 당신을 하나님께 중재하신다.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은 완벽한 장소가 아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또한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하여 상처를 입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녀들도 죄를 지으며,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상처를 입는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인간의 지혜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당신은 갈등을 통해 얻는 유익을 잃게 된다. 가족 생활에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엡 4:32)하신 것처럼 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제공한다.자신들도 열망과 욕구로 노략당한 죄인임을 아는 부모는 자녀의 죄에 공감할 수 있다. 죄의 문제와 복음의 은혜 및 능력을 아는 부모는 죄를 지은 자녀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 죄인으로서 은혜를 경험한 부모는 자녀에게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전할 수 있다. 크리스천들은 가족을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은혜로 함께 성장하며 사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크리스천 가족은 이상적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추상적 개념의 대상이 아니다. 평범한 크리스천 가족은 보통의 사람들이 그들의 목숨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내려놓을 때에만 존재한다. 그러한 가족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아름다움을 강력하게 설득하는 힘이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Ordinary Christian Family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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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중 병원 대기실에서 만난 하나님
by Elizabeth Reynolds Turnage
2019-08-28
쿵, 쿵… 나는 조심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혹시 대기실에 있는 다른 사람이 내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고작 4일 전에, 이비인후과 의사는 충격적인 소식으로 우리의 삶을 뒤흔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건강하기만 하던 22살 아들이 뇌종양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3일 전, 동네 병원에서 서둘러 찍은 MRI는 뇌종양을 확진했다. 이틀 전, 우리는 이 소식을 다른 가족에게 전했고, 어제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선포하는 예배에서 찬송을 부르면서 흐느꼈다. 그리고 지금, 아들은 이 지역의 가장 뛰어난 종양 센터에서 길고 긴 한 시간 동안의 정밀 검사를 받고 있다. 당신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는가?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발생하여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는가? 당신은 아니더라도, 아마도 주변의 가까운 누군가는 가슴이 마구 뛰고 속은 메슥거리는 가운데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며 병원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속에 “만약에”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만약에 암이면 어떡하지? 만약에 직장을 잃으면 어떡하지? 만약에 손주를 안지도 못하면 어떡하지? 만약에 우리 아들이 죽으면 어떡하지?”이런 생각은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는 환자 자신과 그 가족의 평안을 한순간에 뒤흔든다.아들이 뇌종양 진단을 받은 때에 83세이신 내 아버지 또한 4기 전립선암 진단을 받으셨다. 나는 아버지뿐 아니라 아들까지 간호해야 할 상황을 맞은 것이다. 지금껏 병원 대기실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낸 나는 복음이 주는 희망을 만나고 다시 또 만나는 경험을 했다. 건강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초조한 가슴을 가라앉히고 다시 평안과 희망을 찾도록 만든다.1. 이 세상에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은 없다복음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21세기의 주된 세계관, 즉 삶의 평안은 개인의 자유와 주체적인 관리에 달려있다는 생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 안에 속할 때에만 평안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세 번째 뇌 수술이 끝나고 아들은 바로 이런 평안을 고백했다. 아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문병 온 사람들과 나누었다. 종양 제거를 위한 두 번의 수술, 그리고 종양이 감염되어서 치러야 했던 세 번째 수술. 그 세 번째 수술에서 두개골의 일부까지 제거되었다. 뼈가 사라진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착용한, 독특한 소재로 만든 회갈색의 헬멧을 보며 아들과 방문객들은 같이 웃었다. 만약 뇌종양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 아들일 것이라고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아들이 보여준 놀라운 용기를 뜻했다. 그러나 곧 웃음은 사라지고 침묵이 찾아왔다. 바로 그때 눈물을 머금은 아들이 천천히 말했다.“그 어떤 것도 나로부터 예수님, 내 가족, 그리고 내 친구들을 떼어놓을 수는 없어요.”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고 죽음이 눈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때조차도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 그리고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는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평안과 평화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2. 하나님은 내 머리칼 하나하나를 셀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병원 대기실에 있던 첫째 날, 가슴이 미칠 듯이 뛸 때 내 마음은 온통 “만약에”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아들의 머리카락, 항상 단정하게 머리를 빗던 아들이 수술 때문에 머리카락을 뭉텅 잘라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바로 그 무서운 “만약에”의 생각이 떠오른 직후, 나는 하이델베르크 신조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최근 공부했던 내용을 기억했다. 그것은 바로 머리카락 한 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 모든 과정은 결국 나의 구원을 위해 모두 협력한다는 사실이었다.건강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평화와 희망은 오로지 하늘 아버지가 인자한 왕이며 또한 그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보살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누릴 수 있다(마 10:29-3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용서함을 받았다대기실에 앉은 사람들이 깊은 후회와 죄책감을 느끼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불치병을 선고받은 환자도 동일한 후회를 느낄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 환자를 간호하면서 분노와 함께 좌절까지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일수록 용서야말로 우리가 더욱 기억해야 할 참된 복음이다. 암 전문의 대기실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던 어느 날, 나는 너무도 화가 났다. 얼마 전 아들을 간호하기 위해 아버지와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아버지는 분명히 자신의 상태가 아주 좋다고 내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쓰는 대기실에서 내가 그토록 성이 났던 이유는 바로 아버지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그렇게 거짓말을 하셨기 때문이다. 내 분노는 아버지로 하여금 죄책감과 미안함을 유발했다.감사하게도 아버지는 화를 내는 내 모습을 용서했고, 나 역시 거짓말을 해서라도 나를 안심시키고자 하셨던 아버지를 용서했다. 우리에게 평화과 희망을 가져다 준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에베소서 1장 7절의 말씀이 전하는 진리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4. 예수님이 가까이 계신다예수님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대기실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불확실성에 평화와 희망을 가져다준다. 그분의 가까움이 지닌 두 가지 속성은 힘든 시간을 참을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가까이 하신다(시 34:18). 다시 말해 그의 가까움은 우리의 좌절을 달래 준다. 그분의 가까움은 오로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놀라운 평화로 우리를 감싼다.갑자기 닥친 아들의 세 번째 수술은 대기실에 앉은 나를 고독과 절망에 빠뜨렸다. 행여 아들의 뇌 전체가 전부 감염된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의 심장은 너무도 요동쳐서 손목에 찬 디지털 시계가 내게 숨을 제대로 쉬라고 경고 메시지를 보낼 정도였다. 나는 곧 이어폰을 꺼내서 찬송가를 들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가…” 그 가사를 음미하는 내내 예수님이 주신 평화가 나를 감쌌다. 어머니가 보채는 아기를 달래듯 찬송은 그렇게 내 마음을 달랬다.두 번째로 빌립보서 4장 5절의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를 히브리어로 해석하면, 이는 곧 있을 주님의 재림을 의미한다. 대기실에서 느끼는 긴장과 초조함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언젠가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모든 부서진 머리와 가슴 그리고 수족을 새롭게 만들 때(계 21:5),우리의 가장 깊은 희망은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그 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속에 거하실 것이고 우리는 실로 완전하고 영원한 평화를 맛볼 것이다. 혹시 당신은 지금 이 순간 병원 대기실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좌절하지 말라.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그날을 상기하면서 평화와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애초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셨던 온전한 모습으로 서게 될 바로 그날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을 온전히 또한 영원히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희망을 누리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Finding God in the Anxiety of the Waiting Room번역: 무제
생활
감정
고통
죽음
건강
위기
죄책감
좌절
후회
예수님
십대 자녀와 지혜롭게 대화하는 방법
by William P. Smith
2019-08-16
많은 부모들은 십대 자녀와의 대화에 좌절한다. 대화 중 격한 말이 갑자기 튀어나와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경험을 비일비재로 하고, 이후에 똑같은 갈등이 다시 반복될 때까지 서로 눈치를 보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다.청소년기는 아동기에서 성인기로 넘어 가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십대 자녀는 부모의 그늘 아래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리고 독립성과 책임감을 어떻게 다루고 감당할 수 있을지를 배워가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런 자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단계를 거치는 중이다. 자녀가 유아일 때 형성된 부모와의 관계는 더 이상 지금의 상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를 다시 살피고 배우는 이 힘겨운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불협화음을 감내해야 한다. 비록 자녀와의 원활한 대화를 보장하는 방법은 없지만, 자녀가 부모를 자신의 편으로 인식하도록 도울 방법이 있다. 1. 떠오르는 대로 말하지 말라말하기 전에 생각하라. 잠언은 언어 습관에 대해 조언하는데 결국 그 교훈의 핵심은, 지혜로운 자는 말을 주의하지만 미련한 자는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참지 않고 모두 내뱉는다(잠 12:23)는 것이다. 만일 대화 중에 갑자기 튀어나오려는 말이 있다면, 그 순간에 내뱉지 말고 항상 나중에 언급하라.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악한 생각까지 모두 쏟아내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행위이다. ‘입을 떠난 말은 다시 거두어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라.2. 말을 가로막지 말라만약 자녀가 당신의 말을 끊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다면 당신은 매우 불쾌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 역시 자녀의 말을 가로막지 말라. 상대방이 말할 때 이를 존중하고 귀담아듣는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특히 대화할 때, 당신이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상대에게 행하라(마 7:12). 사실 많은 부모들이 예수님이 명하신 이 말씀을 잘 알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게 자녀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그들의 말을 방해하곤 한다. 남에게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무례한 방식으로 자녀와 소통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제부터 자녀를 당신이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상상하며 대화의 자리에 앉아 보라.3. 무례했다면 시인하라 당신이 자녀에게 무례하게 했다면 아이 역시 이를 분명하게 인지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스스로의 태도를 되돌아 보고 있으며 또한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아이가 알게 하라. 크리스천의 삶에서 죄를 고백하는 모습은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옳은 태도이다(약 5:16).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있어서도, “내가 방금 소리 질렀구나,” “내가 네 말을 끊었구나,” “내가 너를 무시했구나.”라고 시인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다음에는 자녀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당신은 그리스도 앞에 신실한 백성으로 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녀는 자신이 잘못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당신을 통해 배울 수 있다. 부모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듣지 못한다면, 훌륭한 사과가 어떤 것인지를 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4. 못된 행위를 용납하지 말라못된 행위를 허용하지 말라. 이는 불쾌함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태도는 큰 잘못이다. 자녀의 이러한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말라. 자녀의 행위가 그릇된 태도임을 인식했다면, 아이가 당신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옳은 행위가 아님을 바르게 알려 주어야 한다. 물론 당신이 받은 상처나 분노로 반응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지적을 피하거나 포기하기 않고 지혜롭게 행할 수 있을까? 바른 훈육보다 망설임이 앞선다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음으로써 자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겪게 될 위험을 생각하라. 그리고 당신이 해야 할 말을 자녀가 들음으로써 그가 얻을 유익에 초점을 맞추라. 더불어, 자녀의 감정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아이를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표현에 대해 생각하라. 5. 다른 의견이 갈등을 부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라당신은 친구나 이웃과 항상 같은 의견을 가질 수 있는가? 많은 경우, 당신은 그들과 다른 의견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왜 자녀와 대화할 때는 항상 그들의 의견이 당신의 생각과 같기를 기대하는가?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5절에서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라고 언급한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여기에서 도덕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생각이 다르다고 반목하게 되거나 죽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면 상대방이 나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은 이 또한 다루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가정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자녀가 알게 하라.6. 성령이 주시는 말을 사용하라격한 대화는 상처와 불신을 만들고, 상대로 하여금 그 대화의 자리를 떠나도록 만든다. 그리고 마음이 상한 상태 그대로 지난 대화를 ‘묵상’하다 보면, 미처 하지 못한 날선 말들이 떠올라 또다시 상처 주는 말을 하게 된다.이러한 악순환을 깨뜨리는 방법은 생각을 달리 하여 나의 말을 다스리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의 곱씸음이 아닌 새로운 ‘묵상’을 시작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라고 촉구한다. 비록 이를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당신은 부모로서 자녀의 마음을 헤아리고 또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자녀에게 긍정적인 말을 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으라. 자녀가 지닌 좋은 부분, 즉 아이의 성숙한 모습과 칭찬할 만한 일들에 대해 말하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말하라. 더 자주 자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아이와의 관계를 회복하라.나의 말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음을 기억하라부모를 향한 자녀의 마음과 말은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마음과 그 표현에 대한 책임은 분명 나 자신에게 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기 위하여 돌아가셨다(렘 31:31-34). 그분이 주시는 새 마음으로 자신의 말을 다스리라. 그분은 하늘 아버지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대로, 우리가 자녀에게 말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6 Ways to Bring Light to Heated Talks with Teenagers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십대
교훈
무례
갈등
성령
책임
지혜
대화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우정
by Amy DiMarcangelo
2019-08-14
누구나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를 좋아한다. 관심사도 비슷하고, 대화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신학적 방향성이 일치하여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친구 말이다. 이러한 친구는 오래 함께할 만한 소중한 선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단지 만남의 편안함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그 우정을 통하여 결코 거룩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다. 친구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친밀함 이상의 것을 추구하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이다. 만약 당신이 복음의 은혜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구와의 우정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통로가 되도록 이끌 수 있다. 진실한 우정과 사랑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품은 관용과 구원의 은혜 및 화해의 메시지를 상대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행할 때에 비크리스천 친구들은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변화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친구 관계, 즉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우정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1. 관대한 사랑을 베풀라 우리는 보통 비슷한 성격과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관계를 형성하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만 교제를 이룬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관대한 사랑을 증거할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된다.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 보라. 십대 소년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 모임에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그 모임의 다른 아이들이 그 에게 먼저 다가가서 따뜻하게 환영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한 부부가 자신들과 여러 마찰을 빚어 온 다른 부부에게 친구로서 따뜻한 호의를 베풀기 시작한다면 그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까? 또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서로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화합의 예배 드릴 수 있다면 그들 사이에 어떠한 만남이 이어질까? 이런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목적을 이루어 가는, 즉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이 아니다. 주님은 다른 족속과 다른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을 백성으로 삼는 일에 우리를 쓰기 위하여 나와 당신을 구원하셨다(벧전 2:9-10). 공동체가 하나의 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요인은 비슷한 교육 수준이나 정치적 입장, 혹은 성격이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그분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은혜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갈 3:28). 나와 당신은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우리는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요일 4:7). 물론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관대한 사랑을 보여줄 때, 그들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고 또한 이를 통해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2. 구원의 은혜를 전하라교회 안에서 누리는 크리스천 친구들과의 우정은 영적 보호벽과 같다. 우리는 매일 세상의 여러 유혹을 마주하면서도 자신이 범하는 죄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무감각을 흔들기 위하여 경건한 친구를 보내시고 또한 사용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고 거룩한 삶을 이루는 과정에서 서로 돌보고 격려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홀로 그 싸움을 감당하기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돌봄을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친구가 뼈아픈 조언을 할 때,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잠 27:6)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자. 실제로 수년 동안 많은 친구들이 내게 이런 "아픈 책망"을 선사해 주었다. 친구들은 나의 이기적인 성향을 알게 하였고, 나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던 내 안의 ‘자기 의’를 혹독하게 꾸짖어 주었으며, 늘 불평하고 비판적이었던 나의 마음을 바로잡아 주었다. 어쩌면 이러한 나의 모습을 굳이 지적하기보다는 그저 지나치는 편이 쉬웠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내가 어떤 문제에 물들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게도 그 조언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대신 분노를 보이곤 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포기하지 않는 "충직"을 통하여 성령님은 나의 연약함을 조금씩 치료해 주셨다. 그분은 친구들의 입을 통하여 나의 차갑고 날카로운 부분을 드러내고 이를 점차 고치셨으며, 그러한 도우심 안에서 나는 서서히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갈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종종 ‘사랑 안에서 진실하게 말하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즉 우리는 죄와 투쟁하는 친구에게 진실을 전하며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구원의 사랑을 보여 주기보다는, 갈등으로 인한 불편한 상황 자체를 피하려고 한다. 나 역시 친구에게 진실을 언급하기에 앞서 그의 반응이 두려운 나머지 말하기를 주저한 적이 있다. 교회를 향한 헌신과 사랑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던 친구에게 바람직한 조언을 하고 싶었지만, 그가 내게 화낼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여러 달 동안 그 상황을 못 본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친구의 영적 안녕보다는 내 개인의 관심사에 더 몰두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내가 더 이상 그 상태에 머물지 못하도록 도우셨다. 나는 주님의 이끄심에 힘입어, 먼저 그의 영적 침체를 모른 척 침묵한 나의 죄를 고백했다. 그리고 내가 우려하는 부분을 그 친구에게 진솔하게 전했다.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그 친구는 겸손하고 차분한 태도로 나의 얘기를 경청해 주었고 우리는 깊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죄는 진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나와 당신을 옭아맨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진정한 구원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하며, 또한 서로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야 한다. 3. 화목케 하는 능력을 보이라우정이 깊어질수록 갈등을 겪을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 예를 들어 가까운 친구가 영적 투쟁 중에 있더라도, 내가 감각이 무디어진 상태에서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이를 간과할 수도 있다. 혹은 이를 알고서 진솔한 대화는 시도해 보지만, 그로 인해 친구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아랑곳없이 나의 의만 앞세우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 또한 관계의 갈등 앞에서 적극적으로 화해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입을 다물고 씁쓸한 마음만 품는 경우도 많다.주님은 우리를 평화의 중재자가 되도록 부르셨고, 성령님은 우리에게 이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부어주신다. 평화를 이루는 유일한 길은 죄와 직면하여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는 과장하고 자신의 잘못은 축소시키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자신은 바르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늘 싸워야만 한다. 만약 내가 영적으로 올바르게 서 있는 상태라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과 동일하게 우리도 친구를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하며 또한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기 위하여 자신의 교만에 대항해야 한다(엡 4:32). 허다한 죄를 덮는 일(벧전 4:8)에는 희생이 뒤따른다. 만약 어떤 친구가 내가 뱉은 험한 말을 용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그는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나 역시 친구의 비난을 용서하려면 인내의 고통을 치러야 한다. 물론 이러한 희생을 감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돌아가신 것처럼, 그분은 우리가 친구와의 화평을 위하여 자아를 죽이고 희생하도록 나와 당신을 격려하신다.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친구를 사랑하라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 한 몸이 되게 하시며, 서로를 화해시키시는 분이다. 그분은 사랑에는 희생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이 나와 당신을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함을 기억하라. 이 사랑은 내가 누군가의 가족과 친구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며 또한 이 땅에서 우리가 성취해야 할 소명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예수님은 다락방 설교를 통하여 그분의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러한 삶을 살아갈 것을 동일하게 요구하신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Unique Witness of Unlikely Friendships번역: 정은심
생활
관계
우정
관대한사랑
공감
두려움
갈등
화목
구원의은혜
그리스도
삶이 무너져 내릴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by Vaneetha Rendall Risner
2019-08-12
꿈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마음을 움켜잡을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믿고 그분께 간구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그분은 이미 우리를 향한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므로 간절한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가? 삶이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두 모습 모두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마주했고, 바닥에 엎드린 채 피가 땀방울처럼 떨어질 때까지 기도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예수님이 드린 이 기도야말로 우리가 절실함 속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모범이다.아빠, 아버지께 나아가라고통 중에 드린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거창한 말로 시작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고 또한 존경과 경외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깊은 애정이 담긴 단어인 ‘아빠’를 선택했다. ‘아빠’는 ‘아버지’에 비해 더 사랑스럽고 친밀감이 느껴지는 호칭이다. 고통 중의 예수님은 마치 아이가 아빠에게 바라듯, 하늘 아버지께 무엇인가 해주시기를 구한 것이다.지금 당신은 고통 속에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다가가야 한다. 그분은 전능하신 주님이지만, 또한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기 때문이다(롬 8:15).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음을 믿으라예수님은 하나님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왕이고,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양 떼의 주인이시다. 그분에게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우리는 이를 증거하는 성경 말씀을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나의 상황을 바꿀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의심한다. 즉 우리는 종종 눈앞에 놓인 상황만 보고 고난의 상태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속단한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도, 기적과 같은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도는 진심 어린 믿음의 간구이기보다 마치 암송하듯 반복하는 중얼거림일 때가 많다. 하지만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하늘 아버지가 자신의 요청을 들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분은 하나님이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고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실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므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했듯 한계가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해야 한다.이 잔을 옮겨 달라고 구하라예수님이 “이 잔을 옮겨 주소서”라고 기도했을 때, 이는 단지 육체적 고통을 면하게 해 달라는 요청이 아니었다. 이는 혹여 죽음의 고통 외에 인류를 구원할 다른 길이 없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노하심을 받아야 했고, 깊은 고난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위로부터 오는 위로도 없이, 오로지 그분 혼자서 하나님의 노여움을 대면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러한 끔찍한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향해 “이 잔을 옮겨 주소서”라고 청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담당하도록 주어진 바로 그 고난을, 이 땅에 온 목적이자 스스로 감당하고자 한 그 고난을, 당신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그 고난을 옮겨달라고 간구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로 스스로 작정하신 분이다(요 10:18). 하지만 예수님은 그 죽음에 앞서, 하나님께 그분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 삶이 무너져 내릴 때, 나는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거두실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이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드려야 할까?, 아니면 치유해 달라고 기도해도 될까?, 혹 기도하며 무언가를 바라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욕심이니 그 무엇도 구하지 말아야 하나?”라고 고민하며 기도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아무런 변화도 요청드리지 않은 채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그 고통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 더 거룩한 태도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하지만, 예수님도 하나님께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구하지 않았는가?예수님이 요청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나의 고난을 거두어 달라고, 이 상황을 바꿔 달라고, 더 큰 고통에서 나를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가? 그분은 내게 좋은 선물을 주기를 원하신다. 이 분명한 사실을 믿으며 나는 하나님께 내 친구의 아픔을 치유해 주시기를, 내 가족을 슬픔으로부터 구해 주시기를,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내가 그분의 뜻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애원했고, 그분은 그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러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은 바람도 있다. 나는 죽어가는 내 아들을 구해 달라고 기도드렸지만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점점 악화되는 내 몸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기를 그리고 내 남편을 되돌려 주시기를 구하고 또 구했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이처럼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그분이 어떻게 대답하실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진심으로 간구하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구하라예수님은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뜻을 내려 놓는다. 자신의 구함이 거절되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내리신 그 결정을 완전하게 받아들인다. 그분은 중얼거리거나 불평하지 않고, 십자가 형벌을 받으러 떠나셨다. 예수님처럼 내려 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을 때에, 우리는 그분께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깝고 친밀한 관계 속에 머물며 그분이 나의 상황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을 때, 우리는 내가 바라는 결과를 더 집요하게 원하고 이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입으로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이라고 기도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나 자신의 뜻에 더 몰입하곤 한다. 하나님은 때로 ‘내가 원하는 결과’에 매달리지 않도록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아니다”라고 답하실 때 절박함에 몸부림치지만, 그분은 우리 안의 실망과 눈물을 통해서라도 내가 결국 그분의 뜻에 순종하도록 일하신다. 바로 이때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가장 선한 일을 하고 계신 순간이다. 우리는 나를 향한 그분의 온전한 계획 중 작은 부분밖에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분명 전체를 계획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에도 그 거절의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아버지는 잔을 옮겨달라는 아들의 간청을 거절하셨지만, 그 거절은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하나님은 변덕이 없는 분이시다. 그분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데에 여러 이유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살아 있는 동안 그 이유를 알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분명 궁극에 이르러 그분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은 거절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응답이 실제로는 나를 향한 그분의 자비임을 신뢰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도움을 구하라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내 삶에 불어닥친 광풍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자 씨름함과 동시에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을 바꾸실 수 있음을 굳게 믿으며 그분께 다가가라. 그리고 내게 필요한 것을 담대히 간구하라. 마지막으로,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라.우리 아버지의 계획은 항상 완벽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고 또 그분에게 영광이 되는 계획을 세우시는 분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o Pray When Life Falls Apart번역: 정은심
영성
묵상과기도
삶이무너져내릴때
간구
순종
겟세마네기도
십자가
나의 사랑, 나의 기쁨
by Greg Morse
2019-08-08
로이할아버지는 몸을 겨우 움직일 정도로 연로하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향한 사랑 앞에서 아마추어 정원사가 된다.90세인 할아버지는 새벽마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밤사이 나무 뿌리가 아내의 무덤을 파고들었는지 확인하고 그것을 잘라내기 위해서이다. 그녀가 주님께로 떠난 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로이할아버지는 여전히 아내와 함께하는 마음으로 아침마다 길을 나섰고, 또한 사람들에게 그녀의 지난 날에 대해 마치 어제의 일인 듯 생생하게 말해 주었다. 그는 평생 아내에게 정성을 다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아끼기 위하여 자신의 연약한 등을 기꺼이 구부린다.지난 50년 동안 이어진 로이할아버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내게 감동을 준다. 그는 아내와 교회에 다니던 기억, 아이들을 키우며 함께 늙어가던 추억, 그리고 함께 웃고 울며 기도했던 순간을 내게 말해 주었다. 또한 아내와 처음 만난 이야기, 그리고 젊은 시절 길 한가운데에서 처음으로 그녀에게 키스한 아름다운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대화하는 내내 위아래로 까닥거리는 그의 눈썹과 마치 멜로디처럼 흐르는 억양, 그리고 그리움으로 촉촉해진 두 눈이 모든 이야기의 진실함을 드러냈다. 아내로 인한 그의 기쁨은 아직도 소멸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 즐거움은 할아버지의 미소로 터져나왔고, 그의 말 속에 녹아 있었다. 또한 그 기쁨은 매일 아침 묘지의 흙으로 바지가 물드는 것조차 개의치 않게 했을 것이다.이제 아내는 손에 닿지도, 그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먼 곳에 있지만, 로이할아버지의 가슴은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노래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은 당연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감동시킨다. 아내로 인한 넘치는 기쁨은 그에게 분명 천국의 기쁨을 전해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즉 그분께 구속된 자들로 인한 충만한 기쁨을 젊은 남편의 열렬한 애정에 비유하셨다. 로이할아버지처럼 경건한 사람들이 소유한, 갈수록 커지는 열정 말이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5).그리스도는 그분의 신부인 우리로 인해 즐거워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이 주시는 사랑의 열정에 빠져 있을 것이다. 잠시, 다른 사람들이 나와 아내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지를 생각해 본다. 하나님이 그분의 신부로 인해 기뻐하시는 것과 같은 사랑의 관계를 우리 안에서도 볼 수 있을까? 주님이 그분의 신부를 기뻐하신다(사 62:4)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도 내 아내를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혹시 아내에 대한 나의 사랑이 부족하여,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못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러한 생각을 모든 남편들의 상황으로 확장시켜 본다. 당신은 아내를 기뻐하는가? 결혼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열정을 그려 내고 있는가? 어떤 깃발이 그녀 위에서 펄럭이도록 하는가? 아가에 나오는 아내는 “그 사랑은 내 위의 깃발이로구나”(아 2:4)라고 증언한다. 우리의 아내들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까? 형제들이여, 아내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지 않기를 바란다. “무관심, 가혹함 그리고 후회의 깃발이 내 위에서 펄럭이는구나.”주님, 우리를 도와주소서.원치 않는 여성과의 결혼야곱의 첫 번째 결혼 이야기는 아마도 읽는 자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창 29:30). 성경에 따르면, 라헬은 아름다웠던 반면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덜 매력적이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삼촌 밑에서 무려 7년을 일했지만,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창 29:20). 하지만 삼촌은 야곱을 속여 그가 라헬 대신 레아와 결혼하게 만들었고, 야곱은 신부인 레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그가 레아와 라헬 모두와 결혼한 후에도, 야곱은 남은 생애 내내 레아의 머리 위로 라헬이 얻은 것과는 다른 깃발이 펄럭이도록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습을 모두 보셨다.레아로 하여금 자신의 형상과 관심을 소유하도록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들의 결혼 생활에서 무엇을 보셨을까?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고,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다(창 29:31). 하나님은 그분의 딸이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을 보시며, 즉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녀의 애통함을 보시며 라헬 대신 레아에게 임신의 기쁨을 허락하셨다(창 29:32). 그녀는 아들을 얻을 때마다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중략]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창 29:32, 34)라고 소망했다. 이러한 기대를 품으며 레아는 아이를 낳고 또 낳았다. 하지만 네 번째 아들 유다를 낳았을 때, 그녀는 결국 남편의 사랑을 대한 간절한 바람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린다.비록 이 이야기는 남편의 사랑을 우상처럼 여기는 이들에게 경고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레아의 머리 위에서 업신여김의 깃발을 흔든 자가 야곱임을 기억해야 한다. 레아가 남편의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하여, 우리가 그녀를 우상숭배자로 단정할 수 있는가? 오늘날 레아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여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마도 그녀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마지막으로 한 선언은 그 성화된 표현의 정도만큼 남편에 대한 많은 고발도 함께 담고 있을 것이다. 레아를 향한 야곱의 모습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남편들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아내는 결코 당신에게 무시당하거나, 멸시받거나, 비교를 당하거나, 혹은 추궁을 당해도 괜찮은 존재가 아니다. 아내는 당신의 살과 뼈이다. 또한 당신의 사랑스럽고 우아한 암사슴이고, 백합이며,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녀는 당신이 갈망하는 우물이자 기쁨의 샘이다. 그러므로 아내는 당신에게 사랑받기 위한 간절함 때문에 자녀를 낳아주거나, 당신의 직장 생활을 지원하거나, 또는 매력적인 몸매를 유지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심지어 당신은 사랑하는 여성, 곧 당신은 라헬과 결혼하지 않았는가.모든 남편을 위한 기도문예수님은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버려두지도, 무시하지도 않으신다. 또한 예수님은 원치 않는 신부와 결혼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아내에 대한 익숙함으로 처음의 열정을 잃는 분도 결코 아니다. 신부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며, 그 영원은 마치 한 순간처럼 동일하다. 주님의 신부인 당신과 교회는 그분의 포옹을 얻기 위한 어떠한 책략도 꾸밀 필요가 없다. 그분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신부를 위하여 온 힘을 쏟았고, 아내의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뿌리를 잘라내기 위하여 찔림을 당하였으며, 그녀를 영원한 무덤으로부터 보호하셨다. 이것은 놀랍고도 거룩한 사랑이다. 이 땅에서의 삶에 비유하자면, 이는 로이할아버지처럼 경건한 남편이 보여 주는 그러한 사랑이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5).아내로 인한 남편의 기쁨은 곧 우리로 인한 하나님의 기쁨이다. 우리의 결혼 관계는 곧 그분과 교회와의 관계이다(엡 5:32). 우리는 로이할아버지처럼 사탄과 육체 및 세상의 유혹에 용감하게 대면하여,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 위로 ‘그녀는 나의 기쁨’이라는 깃발이 펄럭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모든 신랑의 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아내는 나의 요리사이며 청소부”라는 깃발을 세워서는 안 된다. “아내는 내 자녀들의 어머니”라는 깃발도 아니다. “아내는 내가 선택한,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내게 가장 좋은 사람”이라는 깃발이어야 한다. 신부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선언에서 드러나고, 우리가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를 통하여 울려 퍼질 것이다. 남편들이여,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를 더욱 기뻐하고 사랑하게 하소서”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May She Be My Delight: A Prayer for Every Husband번역: 정은심
가정
결혼
아내
야곱
사랑
기쁨
예수님
기도문
평범함이 선물하는 위대한 결혼생활
by David Ayers
2019-08-02
결혼 생활을 든든히 잘 해나가기 위한 방법들을 찾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변의 충고가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충고는 좋고 심지어 훌륭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공적인 결혼생활의 토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위대한 결혼 생활을 추구하겠지만, 성경이 설명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처럼 정말로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회과학의 연구 결과들은, 결혼한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평범하며, 기본적으로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범을 받아들이면, 긍정적이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 중에서 결혼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양상들 몇 가지를 설명하고자 한다.교회 출석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지역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회원이며, 동료 신자들과 격려를 주고 받고 사는 이들이다. 하지만 2008년부터 2018년까지의 기간에 걸쳐 조사한 종합사회조사(GSS)에 의하면, 스스로 복음주의자들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서, 교회에 매주 한 번 혹은 더 자주 출석하는 사람들이 전체의 절반에 조금 못미치고 있다고 한다. 그 통계 조차도 많은 응답자들이 교회 출석에 대해 과장된 응답을 한 결과, 실제보다도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교회 출석을 게을리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결혼 생활을 개선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 GSS 설문 조사에서 특히 자신이 개신교 신자와 복음주의자라고 밝힌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교회 출석률이 낮은(오직 1년에 몇 번 또는 그보다 적게 교회에 출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출석률이 높은(매주 또는 그보다 더 많이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보다 그들의 초혼 관계가 이혼이나 혹은 법적 분리로 끝날 가능성이 약 20% 더 높게 나타났다. 또한 이 조사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매우 행복하다”라고 한 사람들 중에서 교회에 매주 출석하는 사람들이 1년에 몇 번만 참석하는 사람들보다 약 9% 더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66% vs 57%).흥미롭게도, 2008년에서 2018년까지의 조사에서, 예배에 참석한 회수가 일 년에 몇 번 이하인 그리스도인들이 좀처럼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종교적인 ‘자유주의자’나 ‘온건주의자’보다 이혼 또는 법적인 별거를 하는 경우가 약 14% 더 높게 나타났다. 이 통계 수치는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다”(계 3:15-16)고 말한 예수님의 책망을 상기시킨다. 2014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와의 인터뷰에서 사회학자 W. 브래드포드 윌콕스(W. Bradford Wilcox)는 직접적으로 자신들이 교회에 헌신하지 않는 신자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초라한 결혼 생활 통계를 지적하면서, “미지근한 기독교 신앙은 가정 생활의 재앙이다. [중략] 겉으로만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이며 복음주의자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형편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이 결과가 우리를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교회들 특히 성경적으로 견실한 사람들은 귀중한 사회적 지원과 도덕적 지도 및 책임을 제공한다. 교회 출석은 약물 남용을 줄일 뿐만 아니라 음란물 보기와 난잡한 혼전 성교 및 동거와 같이 결혼 생활을 약화시키는 성적인 행동의 수준을 낮추는 일과 관련 있다. 그리고 정기적인 교회 출석은 기독교인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기본적인 표시인 것이다(히 10:24-25).용서와 친절과 긍휼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또한 용서를 실천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 친절과 긍휼 및 관대함으로 나타난다(잠 11:24-25; 마 18:21-22; 막 11:25; 골 3:13). 이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일상에서 실행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다른 측면들처럼, 우리는 은혜로 그것들을 쌓아간다. 하지만 용서와 친절과 긍휼은 믿는 자들, 특별히 결혼 언약으로 하나 된 사람들의 관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이러한 덕목은 자신의 죄의 깊이를 인정하며 정기적으로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비를 얻어야 하는 점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풍성해진다. 결혼한 모든 사람은 에베소서의 말씀을 그들의 결혼 생활에 적용해야 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전국 결혼 생활 프로젝트’는 결혼의 여러 항목들을 측정하여 ‘결혼 생활에서의 관대함’이라는 이름 아래 묶어 보았다. 이 프로젝트는 실제로 서로 돌보고 용서하는 부부가 더 높은 수준의 결혼 만족도와 안정감 및 심지어는 성적 만족을 느끼며, 갈등도 적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배우자의 커피를 따뜻하게 데우고, 차의 시동을 미리 켜놓으며, 서로의 일상 이야기를 들어주고, 요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설거지를 하거나 세탁물을 정리하며, 사소하지만 진실하게 칭찬을 하는 것과 같은 일상의 의식(ritual)들이 결혼 생활에 그런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헌신마지막으로,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한 약속과 서약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민 30:2; 잠 12:22). 그들은 결혼이나 가까운 가족으로 결속된 사람들을 버리거나 경시하는 것이 특히 혐오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말 2:14-15; 막 7:10-13; 딤전 5:8). 이것은 그들이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도 배우자나 가족을 외면하거나 버리지 않고 언약적 결속을 향상시키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굳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혼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종종 간단히 ‘결혼 생활에의 헌신’이라고 부르는 모습과도 일치한다.린다 웨이트(Linda Waite)와 매기 갤리거(Maggie Gallagher)는 그들의 저서 ‘결혼 사건’(The Case for Marriage)에서 이러한 헌신이 높은 수준의 성적 만족감을 포함하여 결혼 생활 전반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GSS는 2002년과 2012년에 응답자들에게 “이혼이 결혼 관계에서 생긴 문제들을 해결하는 최상의 해결책이다”라는 말에 동의하는지 물었다. 이것은 그들이 결혼 생활에 어려움이 있을 때 이혼을 얼마나 고려하는 지를 대략 측정하려는 것이었다. 이 진술에 동의한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그들의 결혼이 “매우 행복하다”라고 할 가능성이 8% 정도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60% vs 68%). 이것은 결혼에 더 헌신할 수록 그 안에서 행복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생각을 지지한다.헌신된 부부는 서로 의지하고 지지한다. 그들은 배우자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 하며, 결혼 관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어떤 것이나 사람으로부터 결혼 생활을 보호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보다 배우자를 더 중요한 존재로 여기며(빌 2:3), 배우자의 복지가 그들의 최고 우선순위임을 기억한다. 팀 켈러와 캐시 켈러(Tim and Kathy Keller) 부부는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The Meaning of Marriage)에서 “당신이 결혼 관계와 배우자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으면서, 부모, 아이들, 직업, 그리고 취미 같은 것들을 ‘배우자’로 삼는다면, 당신의 결혼은 제대로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결혼 관계에의 헌신은 긍정적인 감정 또는 자기 성취를 추구하는 것보다 결혼 생활의 기초를 더 확고하게 한다. 이러한 헌신이 단기적으로 볼 때는 손해나 희생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결혼 생활을 더 큰 기쁨과 만족으로 이끄는 핵심 요소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든 가치 있는 노력은 희생과 헌신이 요구된다. 결혼 생활은 왜 다를 거라고 기대하는가?서로에 대한 헌신 없이, 부부는 힘든 시간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며, 주님 안에서 그들의 결혼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헌신은 행복한 결혼 생활의 플랫폼이다. 결혼 생활은 모순 위에 세워진다비록 우리가 불완전한 죄인들로서 거룩을 향한 진보를 이루어가고 있지만, 모든 비범한 그리스도인의 결혼 생활은 신자들의 삶을 특징 짓는 평범한 일상의 행동과 태도 위에 세워진다. 훌륭한 결혼 생활은 자신의 배우자, 자녀들, 그리고 동료 신자들에게 의지하고 겸손하게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들은 결혼 생활을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함으로 받고, 그들의 삶 속에서 함께 그것을 실행하려 하는 평범한 남편과 아내이다.그들의 결혼 생활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위대한 연합의 신비를 반영한다(엡 5:31-32). 하지만 무엇이 그들의 삶을 그렇게 뛰어나게 만드는 지에 대해서는 신비한 것이 없다. 성경의 파라독스 안에 모든 것이 있다. 부함은 나눔에서, 자유는 섬김에서, 높임은 겸손에서, 열매 맺는 삶은 자아의 죽음에서 흘러나온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ant an Extraordinary Marriage? Be an Ordinary Christian번역: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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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과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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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하나님께서 입을 주신 이유
by Jonathan Leeman
2019-07-29
보통 사람은 하루 최소 칠천, 일주일에는 약 오만 개의 단어를 말하는데, 이는 짧은 책 한 권 분량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입이라 불리는 인쇄기로 일 년이면 오십이 권의 책을 출판하는 작가들인 셈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때로 가만히 우리가 이 세상으로 무슨 말들을 흘려보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내가 있는 그 곳이 내 말들로 인해 더 좋은 곳이 되었는가, 아니면 더 안 좋은 곳이 되었는가? 말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을 치유하고 있는가(잠 12:18)? 우리 입은 여호와 경외함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미련한 것을 쏟아내는가(잠 15:2)? 다른 이들의 영을 새롭게 하는가, 아니면 상하게 하는가(잠 15:4)? 스스로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 거의 점검하지 않고 살고 있지만,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려있음을 명심해야 한다(잠 18:21). 우리 입의 청지기 역할을 잘 수행하려면, 말(words)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늘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주었던 다음 명령은 말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은혜를 끼치게 하라!” 저녁 식탁, 교실, 스마트폰, 사무실, 그리고 우리가 입을 열어 말하는 모든 곳에 적용되는 헌장이 이 말씀에 들어있다.은혜를 말하라은혜에 대해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해볼 때, 바울은 우리 입에 대해 가히 최고의 소명을 전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속성이고, 바로 이 은혜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인침을 받고, 성화된다. 은혜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고(엡 1:6), 죽은 자들 가운데서 우리를 일으키셨으며(엡 2:5-6), 우리 죄에서 우리를 구출하셨다(엡 2:8).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고, 넘쳐흐르며,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것이다(엡 1:7; 2:7).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말’이 ‘그것을’ 끼치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우리 영혼의 특색을 변화시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말에 은혜의 향내를 섞어 다른 이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기도 하시고, 그 사람을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신다. 바울이 복음 전파를 위하여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받았듯이(엡 3:1-2, 7-8), ‘우리 각 사람에게’도 ‘은혜를 주셨다’(엡 4:7). 자신이 모세처럼 입이 뻣뻣하다고 느낄지라도(출 4:10),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하늘의 속삭임이 우리 혀 위에 임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끼쳐야 할 은혜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짐사실상 은혜를 끼친다는 것은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엡 4:29) 말을 하는 것을 뜻한다. 은혜로운 말은 고개 숙인 성도들을 일으켜 세우고, 비틀거리는 다리를 강하게 하며, 상한 팔에 붕대를 감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이르기까지 서로를 자라게 한다.“은혜를 끼치라”는 말은 달리 말해서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시 8:3)을 닮으라는 부르심이다. 다른 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삶을 살라. 당신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그 사람을 보라.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그 ‘진리’를(엡 4:21) 그에게 지혜롭게 적용하라. 하나님께 받은 특정한 말씀을 상대방의 특정한 필요에 맞춰 전하라. 당신이 하는 말이 가볍지 않게 하라. 의미 있는 말을 하고, 가치 있는 말을 하라. 다른 이들이 거짓으로부터 보호받고 진리 안에 세워지고 은혜 안에 뿌리 내리며 그리스도께로 자라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게 하라. 은혜를 끼치는 것은 설교나 성경 공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명령은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대화에 대한 것이다. 자녀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해 줄 때 은혜를 끼치라. 동료들과 점심을 함께 할 때, 친구들과 캠프파이어를 할 때, 밤에 아내와 대화를 나눌 때, 마트 계산대 앞에서 줄 서 있을 때, 당신이 오후에 보내는 서른 번째 이메일을 쓸 때, 은혜를 끼치라. 은혜를 끼치는 말의 성격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 두 가지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은혜를 끼치는 말이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친 은혜, 부드러운 은혜먼저, 은혜를 끼치는 말이 항상 듣기 좋은 것은 아니다. 흔한 십자수 베개나 연하장 등에 적혀있는 문구와는 달리, 은혜는 우리가 종종 생각하듯 폭신한 무언가가 아니다. 은혜가 항상 편하고 아늑하고 좋아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좋은’ 말들은 우리 기분을 좋게 해주지만 ‘은혜를 끼치는’ 말에는 더 높은 목표가 있다. 우리를 진실로 좋은 상태, 다시 말해 그리스도처럼 되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끼치는 말은 때로 거칠게 들릴 수 있다. 우리에게 ‘은혜를 끼치라’고 명한 그 사도 역시 우리가 이전에는 죄 가운데 죽은 상태였다는 것을 잊지 않고 상기시키고(엡 2:1),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하라고 권면하며(엡 6:10-11),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엡 5:6). 그 말씀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 1:14)하셨던 우리 구주 역시 그리 하셨다. 은혜는 때로 그의 입술에서 이슬처럼 흘러나오기도 했으나, 때로는 선지자의 외침처럼 천둥으로 임하기도 했다. 그의 은혜는 때로 상한 갈대를 싸매셨지만, 포도나무의 가지를 치기도 했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말씀하기도 하셨고, ‘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눅 9:23) 말씀하기도 하셨다. 우리 역시 때로는 말하기 힘든 주제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가 늘 좋은 말, 듣기 좋은 말,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말만 한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은혜만 끼치는 셈이다.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은혜를 끼치는 말은 다양하지만, 그것이 상황에 따라 변하는 말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곳에서는 거친 말을 하고 저곳에서는 부드러운 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주어진 순간의 필요에 맞는 말을 생성해 준다. 은혜는 주어진 상황에서 ‘소용되는’(엡 4:29) 말을 찾는다. 이것은 그런 말들이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은혜를 끼치는 말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저쪽’ 상황이 아닌 ‘이곳’ 상황에 맞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이’ 사람에게 맞는 말이다. 좋아하는 약속, 좋아하는 이야기에서 벗어나 ‘예수 안에’ 있는 그 ‘진리’를(엡 4:21) 샅샅이 살펴 다양한 국면을 지닌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적절한 부분을 찾아내어 동일하게 다양한 국면을 지닌 우리의 경험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마음 속 광산에서 말을 캐내어 신중한 생각의 용광로에 통과시켜 신선하고도 신랄한 진리로 제련해낼 수 있어야 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내가 하는 말이 은혜를 끼치지 못한 때가 너무 많았다. 대화 도중 내 마음은 끊임없이 딴 생각을 했고, ‘점심으로 뭘 먹지?’ ‘오늘밤 뭘 할까?’ ‘저 사람 셔츠가 전혀 안 어울리는데’와 같이 아무 관련 없는 생각들로 마음이 산란해졌다. 집중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들로는 은혜를 끼칠 수 없다. 그 말을 전파해주는 공기만큼이나 가볍기 때문이다. 우리 혀는 자동적으로 은혜를 끼치는 말을 만들어낼 수 없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말은 온전한 집중, 지혜로운 분별, 창의적인 생각, 그리고 감정적 투자가 있을 때에만 나오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주는 보람은 엄청나다. 은혜를 끼치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 생명 나무 과일처럼 떨어져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를 만족케 한다(잠 15:4, 18:21). 질문, 그리고 기도어떻게 이런 말 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예수께서 가르치신 대로, 우리 마음에 은혜가 이미 살아 있을 때에만 그 은혜가 우리 입을 통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마 12:34). 그러나 은혜가 우리 안에서 무너뜨리고, 세우고, 새롭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 은혜를 잘 정리하여 말로 표현하는 것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간단한 첫 단계로, 다음번에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는 잠시 멈춰 다음 질문을 던지고 기도를 드려보라. 질문: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뭔가? 이 상황에서 ‘소용되는’ 말이 무엇일까? 그 사람의 필요를 언제나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질문을 해봄으로 인해 더욱 집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생기게 된다. 기도: 주님, 제 입에서 오염된 말이 나오지 않게 해 주소서. 제 입을 은혜로 채우소서.이제 대화를 시작해보라. 정말 놀라운 사실은, 약하고 여전히 부족함 많은 당신에게 다른 이와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손을 거치면 형제와 자매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내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주의를 집중하여 경청하라. 통찰력 있는 질문을 던지고, 마음 가동장치에 전원을 넣으라. 그리고 말을 해야 할 때가 오면 입을 열어 은혜를 끼치라.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Why God Made Your Mouth번역: 이정훈
영성
영적성장
입
은혜로운말
거친은혜
부드러운은혜
질문과기도
경청
덕을세우는말
은혜를끼치는말
기도라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법
by Bryan Litfin
2019-07-22
“우리의 지성이 수 세기에 걸쳐 불어온 상쾌한 바닷바람을 계속 맞을 수 있도록” 하려면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했던 C. S. 루이스(C. S. Lewis)의 말은, 오늘날 성도들의 삶에 연관이 있고 교회를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독교 고전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사람들은, 케케묵었지만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없기 때문에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기독교적 덕목이 기도라 생각하는 것 같다.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에게 우리는 흔히 “기도할게”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기도하는가? “우리의 마음과 기도로 당신을 응원합니다”라는 말은 더 나쁘다. 이 말은 정말이지 판에 박은 듯해서 심지어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도 슬픔 당한 이들을 위로할 때 이런 뻔한 말을 쓰곤 한다. 오늘날 기도는 그저 남에게 행복을 빌어주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말 제대로 하는 기도의 전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는 늘 다니엘 같은 이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현재의 기도 생활을 불만족스럽게 여기고 있다. 우리가 기도를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렇게도 중요한 국면이 기도임에도 그 기도를 통해 권능과 힘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래된 문제이다. 이전 세대 역시 동일한 문제로 씨름했다. D. L. 무디(D. L. Moody) (1837-1899)의 ‘승리하는 기도’(Prevailing Prayer: What Hinders It?)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룬 책이다. 그의 탐색적인 질문 “우리의 기도를 패배가 아닌 승리로 이끄는 비결은 무엇인가?”는 오늘날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무디는 이 책에서 그가 책을 집필하던 1884년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 해답을 제시했다. 실크 모자를 쓰고 구레나룻을 기르고 다니던 그 옛 시절의 무디가 주는 지혜는 힙스터 수염을 하고 스키니진을 입는 현재 우리 세대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고민해온 문제이다. 전투로서의 기도‘승리’(prevail)라는 말은 미국 도금시대(鍍金時代, Gilded Age: 남북전쟁후 18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던 미국 자본주의 호황기를 말한다–역주)에 전투에서 이겼다는 것을 말할 때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구글 애널리틱스(Google Analytics)의 영어 단어 사용 빈도 분석에 따르면 1800년부터 지금까지 ‘승리’라는 말의 사용빈도가 점차 감소해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은 명확하다. 전쟁 상황에서 이기는 것, 승리를 거두는 것을 말한다. 그 책에서 기도는 일종의 전투, 즉 우리가 이기거나 질 수 있는 행위로 묘사되었다. 무디의 청중에게 남북전쟁은 먼 과거가 아니었기에 인생을 논할 때 전쟁 용어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전쟁 용어를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는 오늘날에도 전투로서의 기도라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왜일까? 성경이 그런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대적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얼마나 기도하는가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외세나 호전적인 이웃 나라들의 압제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고집스럽기 짝이 없던 선민들은 그제서야 여호와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 하나님은 구원자를 일으키시거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방법은 바로 기도였다. 전투 이미지는 굉음을 울리며 달리는 전차와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싸우는 구약 시대 전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신약 시대의 영적 전투 역시 기도에 의존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그런 용어를 쓴다. 복음 전도를 다룰 때 존 파이퍼(John Piper)는 “기도로 전투에서 승리하기” 또는 “기도와 하나님의 승리”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그저 복음주의권에서만 사용하는 독특한 용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천주교에서도 동일한 개념을 사용한다. 천주교의 현대 교리문답서는 “전투로서의 기도”를 주요 내용으로 다룬다. 성경에 이 개념이 나오기 때문에 이는 기독교의 보편 주제라 할 수 있다. ‘무엇이 기도를 방해하는가?’천주교 교리문답서에 나온 질문 중 하나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불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다. 무디는 빅토리아 시대에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손위 처남이었던 플레밍 H. 레벨(Fleming H. Revell)은 1870년에 출판사를 시작했는데, 레벨이 세운 출판사의 첫번째 베스트셀러 작가가 바로 자신의 매부인 시카고의 복음전도자 무디였다. 승리하는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레벨은 무디의 책을 1884년에 출판했다. 그리고 현 무디 출판사(Moody Publishers)에서도 이 책의 확장판을 내놓았다. 이 잊혀진 고전을 펼치면 무디가 기도의 효용에 대해 확신했음을 금방 알게 된다. 그는 이 책에서 1836년 즈음에 이미 널리 사용되던 19세기 경구인 “기도는 세상을 움직이는 팔을 움직인다”를 인용한다.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그의 응답이 비처럼 쏟아져 내려온다. 무디가 믿기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쉽게 말해 기도를 안 하기 때문이다. 무디의 말이 맞다. 성경도 이것을 가르치지 않는가? 사도 야고보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를 구할 때, 종종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야고보는 ‘왜’ 그런 결과가 초래되는지 알려주는데, 우리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약 4:3). 무디 역시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나님께 응답받는 기도에는 특징이 있는데, 이것이 없는 기도는 승리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기도는 반드시 역사한다는 단순한 믿음이다(약 5:13-18). 무디는 “그런 믿음이 있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것을 성경 전체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승리하는 기도의 아홉 가지 요소 무디에게 있어, 기도 용사의 순전한 자신감은 기도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아홉 가지 태도와 행동을 중심으로 구축되는데, 무디는 이를 하나씩 자세히 설명한다. 오늘날 독자들 중에는 기도에 대해 가르칠 때 널리 쓰이는 경배(Adoration), 고백(Confession), 감사(Thanksgiving), 그리고 간구(Supplication)의 약자인 ACTS를 아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 ACTS는 무디 시대에 나왔던 출판물들에서 온 것이다. 무디는 이 네 가지에 몇 가지를 더해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제시한다. 1. 경배(Adoration): “그리스도인들로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자.”2. 고백(Confession): “하나님께 가장 가까웠던 이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가장 많이 지녔던 이들은 바로 자신의 죄와 실패를 고백했던 이들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3. 바로 잡기(Restitution): “우리 삶에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시기 전까지는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이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많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일 수 있다.” 4. 감사(Thanksgiving): “우리는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 안에 찬송과 감사는 얼마나 희박한가!” 5. 용서(Forgiveness): “내가 믿기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데, 바로 사람들이 용서하는 태도를 함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6. 하나됨(Unity): “우리가 하나 되기만 한다면,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의 권세라 해도 우리에게 맞설 수 없을 것이다. 교회, 강단, 그리고 회중이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한마음이 될 때, 기독교는 엄청난 에너지로 온 땅을 덮을 것이고 사망과 음부의 권세가 맞서지 못할 것이다.”7. 믿음(Faith): “불신앙은 하나님이 손에 뭔가 갖고 계신 것을 보면서도 ‘저걸 내게 주시지 않으실거야’라고 말하는 것이고, 신앙은 그것을 보며 ‘저걸 내게 주실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8. 호소(Petition):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끊임없이 귀찮게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 그분 앞에 나와 우리가 원하는 바를 요구하기를 바라신다.” 9. 복종(Submission): “모든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복종 가운데 드려져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올려드린 후에 우리의 기도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가 되어야 한다. 나는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나님은 미래를 보시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후세를 위한 고전‘응답된 기도’를 다루는 마지막 장에는 오랜 세월동안 많은 독자들에게 울림을 준 무디의 가르침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주실 복을 기다리는 것은 헛된 일은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길, “우리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잘못된 동기로 기도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기도를 그만두지는 말자.” 하나님은 언제나 주권적으로, 그리고 최선의 때에 응답하신다. ‘승리하는 기도’의 모든 페이지는 무학(無學) 구두 판매원에서 세계적인 설교자가 되었던 무디가 속속들이 알았던 성경의 가르침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긴 세월에 걸친 놀라운 사역으로부터 건져 올린 소박한 이야기들과 이해를 돕는 실례들도 넘쳐난다. 개신교 역사의 위대한 믿음의 위인들이 한 말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무디 마음 속에 굳건히 자리잡은 세계 교회 주의(ecumenism)를 보여준다. 성공회 고위 성직자인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청교도 신학자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장로교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 그리고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의 전도자요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힘썼던 죠지 뮐러(George Müller) 등, 무디가 인용했던 이들은 무수히 많다. 135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승리하는 기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 책의 첫 장에 나오는 무디의 권면은 이 책을 잘 요약해준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자.”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길 기대하는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A Guide to Prevailing in the Battle of Prayer번역: 이정훈
영성
묵상
기도
CS루이스
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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