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그리스도인의 삶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학대를 극복하고 가정을 세우라
by Kathleen Shumate
2019-07-19
과거에 학대를 당한 사람이 가정을 새롭게 세워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파괴의 힘에 저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삶에 소망의 빛을 비추는 놀라운 기회가 될 수 있다. 그 기회를 잘 사용하면, 학대를 이끄는 사탄의 모든 추한 작업을 적극적으로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 중심의 가족을 세울 수 있다. 그와 같은 성취는 악에 대한 지배일 뿐만 아니라 구속과 재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행위이다.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는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매일의 삶이 그분의 가치를 반영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은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나기에 하나님은 가족을 설계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배움과 성숙을 알아가도록 하셨다. 따라서 아이는 부모의 양육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부모의 세계를 그대로 흡수하며 성장하게 된다. 가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살핌과 가르침을 주는 세계일 수도 있고, 혹은 유기와 학대를 일삼는 세계일 수도 있다. 바른 믿음의 가정에서 양육 받은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낀다. 또한 예수님은 신뢰할 수 있는 분이며, 그분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신다 사실을 알게 된다. 반면 학대를 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에 갇힌다. 또한 아무도 신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자신의 고통에 아무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잔인한 분이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거짓말의 명수인 사탄은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더욱 부추긴다. 아이들은 부모의 비난 속에 섞여 나오는 “너는 쓸모없는 존재야”라는 거짓 메세지가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상처 받은 아이들은 혼돈의 하루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나름의 생존 전략을 만들어 가며 두려움과 수치심을 간신히 다룬다. 언어적, 신체적 학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이러한 방어 행위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또다른 왜곡의 사고를 만들어 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처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려면,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기억하고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학대의 영향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 모든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자들이다. 원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지만, 십자가 사랑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더 나아가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일생을 통해 진행되는 그 회복의 과정은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경험을 부여한다.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자, 구세주, 왕이라고 배운다. 또한 그분을 완전히 선하고, 지혜로우며, 사랑이 많고,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능력과 강함 그리고 위엄이 있는 분(출 15:11)으로 배운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날개 아래 피난처를 마련해 주시는 부드러운 분(시 91:1)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또한 회복의 과정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새롭게 배운다. 즉 자신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그분의 양자가 되었으며, 구원과 죄사함 받은 존재임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다(엡 1:3-10). 이러한 배움은 우리로 하여금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고, 또한 일상에서의 모든 관계와 일이 누구의 영광을 향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이와 같은 변화는 학대의 거짓말로 인해 왜곡된 사고 안에서 고통 받는 모습과 뚜렷이 대비된다. 학대는 단순히 거짓말로 마음을 부추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거짓말은 아이의 가슴에 새겨지고 다시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 결국 삶의 모든 영역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학대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회복되려면, 신실한 관계와 진실된 말 그리고 선함과 믿음을 경험함으로써 가슴과 머리에 새겨진 거짓말을 지워내고 그곳에 새로운 신념을 채워야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따뜻한 기독교 공동체는 학대의 생존자들에게 치유의 장이 될 수 있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사랑의 언어로 듣고 또한 진실한 교제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대로부터의 회복을 위해 상담과 다른 전문적 도움을 받는 일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선하고 신실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머리와 가슴에 새겨진 거짓말을 지워내는 것에 필수적이고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회복의 시작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대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종종 건강한 상호작용의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그러한 상태로 성인이 되면, 그들은 애정 어린 터치에 반응하는 방법이나 친구와 깊은 우정을 쌓아가는 방법 등과 같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방법도 새로 익혀야만 한다. 자녀를 학대하는 자들은 그 부모로부터 자녀 양육에 필요한 소질이나 방법을 전수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그들의 부모 역시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부모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학대의 생존자들이 가정을 새로 세우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바른 자녀 양육을 가르쳐줄 멘토와 본이 되는 신실한 가족들을 찾아야 한다. 식사 시간과 기도 시간, 심지어 빨래하는 시간과 같은 가정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하는지를 나눌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신실한 믿음의 가족들이 이들의 주변에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아마도 도움이 되는 그 가족들은 아픔이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가는 여정에 놀라운 공헌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공동체가 만들어진 이유이다. 학대의 상처를 이긴 사람이 경건한 가족을 세워가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위대한 작업이다. 그것은 거짓말의 명수인 사탄의 교묘하고 은밀한 계획을 믿음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또한 학대로 인한 깊은 상처도 주님 안에서 치유가 가능하다고 이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느리며, 생이 다할 때까지 완전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 여정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쁜 일상에서 더 이상 소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된다. 학대가 우리를 아무리 깊은 진흙 구덩이에 밀어 넣었더라도 그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건지셔서 새 삶을 시작하도록 도우실 것이다(시 18:16-19).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새로운 피조물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불행한 과거로 인해 실패하지 않도록, 가망 없는 덫에 갖혀 있지 않도록 도우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알고 누릴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보이실 것이다. 그리하여 상처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학대의 관습을 끊고, 가족을 돌보는 새롭고 따뜻한 방식을 알게 되며, 경건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된다(고후 5:17).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놀라운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죽음의 그늘에서도 인류의 첫 번째 여인인 하와는 생명을 주는 자, 곧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불려졌다(창 3:20).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슴에는 세상에 건강하고도 따뜻한 생명을 주고 싶은 갈망이 있다. 학대 가정에서 성장하여 어둠과 가까웠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갈망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 가정에 새롭고도 건강한 호흡을 불어넣는 일로 발현된다.내 자녀들이 그들의 배우자와 자녀 및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또한 삶의 공간에서 기쁨으로 복음을 나누는 훌륭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나는 설레인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아이들의 엄마로 조금씩 성장하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내 가족 안에 점점 더 크고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이 학대 받은 아픈 자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또한 그분을 경외하는 새로운 가족으로 부르시는 일은 심히 놀랍다. 이는 자연적으로는이루어질 수 없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악으로부터 선을 만드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삶은 파괴적이고 사악한 학대의 결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생명을 소망하게 한다. 그리고 그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경외와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Can Overcome Any Abuse: Building a Family from the Ashes번역: 정은심
가정
학대
그리스도사랑
피조물
경건한가족
회복의시작
기독교공동체
분노로 가득한 우리의 내면
by Jonathan Parnell
2019-07-17
그 형태로만 볼 때, 사람에게 하나도 좋은 게 없는 게 바로 분노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분노의 감정은 심장병의 가능성을 현저하게 높이는데, 분노가 폭발하고 2시간 이내에 심장마비 또는 뇌졸중이 발병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고 한다. 한마디로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화는 잘 내는 것은 건강뿐만이 아니라 관계의 면에서도 아주 위험한 약점이 된다. 하지만 분노는 결코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그건 나와 당신을 모두 포함한,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분노 문제를 논할 때, 그 대상을 분노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격한 분노를 분출하는 성향을 갖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느긋하며 모든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는 시각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 세상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왜 화를 내는 것이 당신에게 해로운가?'라는 글에서 신경학자인 네리나 라믈라캄(Neerina Ramlakham)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분노하는 사람들을 분류할 때,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과 화를 마음속에 품고만 있는 사람, 그렇게 두 부류로 나눠야 한다.” 자, 이제 던져야 할 질문은 '누가' 화를 내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모두 다 화를 내는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는 사랑과 관련이 있다. 분노 뒤에 숨은 사랑분노가 이유없이 생기지 않는다. 먼저, 분노라는 감정은 우리가 아끼는 무언가에 위험이 닥쳤을 때 따라오는 반응이다. 팀 켈러는 그의 책, ‘분노의 치유’(The Healing of Anger)에서 이렇게 말한다. “분노 속 타락한 부분만 제거하면 분노는 실제로 사랑의 한 형태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대상에게 위협이 가해졌을 때 발생하는 사랑의 한 형태가 바로 분노라는 그의 진단은 여러 면에서 일리가 있다.집 앞에서 노는 아이들 옆을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는 차를 향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차가 아이들을 위험한 상태에 처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의 이슬람 무장 단체인 보코 하람(Boko Haram)의 끔찍한 악행을 향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정말로 그들이 저지르는 만행은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위험에 처한 아이들 때문에 또는 세계 어디선가 일어나는 악행 때문에 분노하는 것처럼 우리의 분노가 올바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그리고 무고한 희생자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에 화를 내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 많은 경우 우리의 분노는 타인을 향한다. 팀 켈러(Tim Keller)가 말한 것처럼 이는 바로 '조절되지 않는 사랑'이다.과도한 애정'지나친 애정'으로 불리는 이 조절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해야 하는 당연한 어떤 대상에 너무 지나친 가치를 부여할 때 생긴다. 이는 인간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자녀를 향한 사랑이 도가 지나쳐서 그들에게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거나, 더 나아가서 그들의 번영이 없다면 내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에까지 이르는 부모가 있다. 이처럼 과도한 애정은 누구나 쉽게 엎어지는 위험이며 축복할 대상을 우상으로 바꾸어 버리는 사악한 변화이기도 하다. 사랑이 조절되지 않을 때, 우리의 분노 또한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런 경우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나중에 보면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에 화를 낸다. 이에 대하여 팀 켈러는 이렇게 반문한다."누군가가 당신의 명성을 떨어뜨릴 때 어느 정도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왜 당신의 그러한 분노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무고한 사람들을 향한 끔찍한 폭력을 볼 때보다 10배, 아니 100배나 더 강하게 일어날까?"그 이유를 아는가? 만약 당신의 가치와 안전을 위해 정말로 바라는 것이 사람들의 승인이나 좋은 평판 또는 지위 같은 것이라면, 당신 자신과 당신이 마땅히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의 화가 일어난다. 당신은 가져야 할 것을 가져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당신은 최고이니까. 당연한 내 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누군가에게 조롱당한다고 느낄 때, 운전 중 누군가가 끼어들었을 때, 회사에서 내 아이디어가 묵살될 때, 또는 배우자가 나의 고생을 몰라줄 때, 그럴 때마다 우리가 화를 낸다면 그건 바로 우리가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문제에 빠져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분노에서 탈출하는 세 가지 단계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분노가 어떤 특정인이 아닌 모두의 문제라면, 우리 모두가 종종 이런 조절되지 않는 사랑을 분출한다면, 어떻게 해야 이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여기 세 가지 탈출 단계가 있다.1. 분노를 분석하라먼저, 분노의 세부 사항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분노의 감정이 솟구쳐 오를 때 바로 멈추고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이처럼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반응할 만큼 지금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 나에게 발생하고 있는 것인가?” "마음에 이런 분노가 일어날 만큼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화가 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런 질문을 한 번이라도 던진다면, 그래서 당신이 이런 분석을 할 수만 있다면, 대부분의 경우 화를 내는 진짜 이유가 다름 아닌 자존심과 자존감을 방어하기 위함임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2. 죄에 대한 애통함을 느껴라이런 질문을 던진 후 우리는 당황할지도 모른다. 우리 내면을 덮고 있는 뚜껑을 열고 죄악으로 부패한 그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끔찍한 일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썩은 냄새가 난다고 해도, 우리는 아프지만 담대한 마음으로 그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와 당신은 내면의 부패한 것들이 결코 스스로를 정죄하거나 패배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의 조절되지 않는 사랑을 위해서 이미 대가를 지불하셨다. 우리가 져야할 진노를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모두 지셨고, 그 죽음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죄책감에서 해방시키셨다. 그리고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에게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이 모든 사랑을 떠올릴 때, 우리에게는 슬픔이 따라온다. 나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에 얼마나 느린지를 깨달을 때 우리는 당연히 슬픔을 느낀다. 도시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살인보다 상처받은 나의 자존감 때문에 분노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상한 영혼을 돌보기 위해 손을 내밀기보다 나를 비난하는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을 흔드는 자신을 볼 때, 말할 수 없는 약자의 권리를 대변하기 보다는 나와 의견이 다른 누군가를 경멸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이러한 자신 때문에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은혜를 받은 사람의 내면이라면 있어서는 안 되는 부패 때문에 우리의 더욱 깊은 애통을 느낀다. 나와 당신은 이제 이러한 슬픔을 안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고후 7:9-10). 우리는 그 회개의 자리에서 자신을 돌이켜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더 이상은 아닙니다. 주님, 더 이상은 아닙니다."3.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라조절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가장 분명한 해결책은 당연히 사랑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쉬운 게 아니다. 어떤 대상을 잘못 사랑하던 방식에서 한순간에 벗어나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사랑해야 할 대상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는 없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세상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밖에 없다(엡 3:14-19).눈을 열어 예수님의 빛을 보고(고후 4:6) 그의 은혜에 압도될 때(고후 8:8-9),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진정으로 중요한 대상을 향하게 되고, 가치 없는 것을 향한 내면의 분노는 잠잠하게 될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Our Anger Is Telling Us번역: 무제
생활
감정
분노
내면
팀켈러
조절
분석
애통함
예수님
사랑
기독교적 결혼의 근본 원리
by Ray Ortlund
2019-07-11
모든 결혼 생활은 신앙적이거나 아니면 우상숭배적이다. 결혼 생활을 세심하게 돌보지 않을 때, 우리는 자각하지도 못하는 사이 혼인 관계를 우상숭배적으로 만들 수 있다.신앙적인 것과 우상숭배적인 것은 서로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이는 베푸는가 아니면 요구하는가, 서로를 품는가 혹은 상대방을 이용하는가, 또는 협력하는가 아니면 상대를 조종하는가와 같이 대조적인 모습이다. 둘 중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느냐는 서로에게 겸손과 감사의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각자의 내면이 무분별한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지에 달려있다. 하지만 잘못된 태도로 결혼 생활에 상처를 남겼더라도, 부부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치유 받을 수 있다. 모든 결혼 관계는 그리스도를 경외할 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생명을 주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성경은 가정이 우상숭배적인 모습으로 치닫지 않도록 보호하며 부부가 더욱 풍성한 관계를 누리도록 이끄는 두 가지 근본 원리를 가르쳐 준다. 이는 모든 부부의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결혼 관계의 특권첫 번째 근본 원리는 결혼이 특권이라는 사실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결혼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에덴 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몸”이라는 말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이 세상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생애 내내 서로 지지하며, 모든 면에서 서로에게 속해 있음을 느끼고, 또한 모든 면에서 연합된 관계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에서 결혼 외에 이와 같은 관계는 없다. 친구 관계에는 경계선이 있지만, 부부는 완전히 벌거벗은 취약한 상태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관계이다(창 2:25). 나는 당신이 결혼 관계의 이러한 영예로운 특권을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쫒아내셨을 때도, 그분은 우리에게 주신 결혼이라는 선물을 빼앗지는 않으셨다. 즉 하나님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결혼이 불완전한 사람 간의 약속이지만 이를 신성하다고 보았고, 어떤 것으로도 침범받지 못하는 영역으로 여겼으며, 우리의 혼인을 아담과 하와의 결혼과 같이 완벽하게 다루셨다(마 19:3-6).당신의 결혼 관계 안에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의 모습이 남아 있다.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가 완전히 하나로 속하게 되는 한 몸으로의 결합된 모습 안에 남아 있다. 하나님은 그분이 짝지어 주셨던 에덴 동산의 모습이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아름다운 기독교적 결혼 관계 안에서 일구어지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두 번째 원리로 우리를 인도한다.결혼 관계를 지탱하는 자원 성경이 말하는 두 번째 근본 원리는 그리스도가 결혼 관계를 지탱하게 해주는 자원이라는 점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생명은 당신 안에 있지 않다. 생명은 당신의 배우자 안에도 있지 않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생명이며 빛이다. 그분의 빛은 우리의 지루한 존재를 비추어 깨닫게 하는 빛이다. 그분의 생명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다. 그 생명은 우리에게 목적과 소망과 지혜를 일깨워주는 능력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죽어가는 생각과 행동을 멈추고 생명과 빛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리석은 생각을 그만두고 생명에 대한 의식을 키우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모습이며 그분이 하시는 일이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임을 믿고 마음을 열면, 우리의 결혼 관계는 변화될 것이다. 우리가 배우자를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현실에서는 그것은 배우자를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듯이 잘못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실제로 우리는 배우자를 더 잘 사랑하기 시작하게 된다.배우자를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배우자가 당신의 생명과 빛이 아닌 이유는 그 혹은 그녀가 당신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생명과 빛을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영원한 생명과 빛에 의존해야 하는, 쉽게 고갈되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이나 당신의 배우자와는 달리, 그리스도는 항상 근본적이고 원천적이며, 값없이 주시는, 강렬한 생명이며 빛이다. 두 명의 죄인이 한 몸으로 연합된 상태가 되어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더 깊은 연합을 이루게 될 때,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편하게 느끼게 되며, 그리스도로 인해 행복해 질 수 있다. 이때, 오늘날의 기독교적 결혼 관계 안에서도 에덴 동산이 다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통찰을 통해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나의 귀한 아내를 팔로 안을 때, 내가 경험하는 사랑은 그녀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그때 아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도 함께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녀를 통해 내게 내려온다는 사실은 그 사랑의 신적 특성이 멈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내 아내가 내 눈에 훨씬 더 놀랍도록 만든다. 그녀의 사랑은 순간마다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선물이며, 만일 그 경험이 인간의 사랑에 의해서만 제한되고 정의되었다면 내가 결코 파악하지 못했을, 순간마다 넘쳐나는 빛이다. 이것을 깨달음으로, 나는 그녀에 대한 감사와 그분에 대한 경배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나는 오늘날의 에덴 동산, 즉 거룩한 땅을 내 결혼 관계 안에서 발견한다. 중요한 것을 우선시 하라그리스도는 우리의 결혼 관계를 진실로 기독교적이게 만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 때, 우상숭배적인 본능과 충동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결혼 관계를 보호해주신다.오직 그리스도만 나와 아내에게 모든 생명과 빛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할 때, 나는 아내가 자기 본연의 모습 이상이기를 바라지 않게 된다. 나는 우리의 결혼 생활을 영광스러운 기적으로 여길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지에 놀라움으로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완전한 영역이 바로 그분이 거하시며 사역하는 곳임을 알기 때문이다. 두 명의 크리스천이 결혼했다고 하여 결혼이 기독교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계속 바라볼 때, 결혼 관계는 참으로 기독교적이 된다. 이것은 결혼 생활의 원리에 관한 문제이지만, 때로 아이가 자전거를 타는 훈련을 하는 것처럼, 거기에도 정보가 필요한 영역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결혼 관계가 기독교적이 되게 하는 일은 두 사람이 남편과 아내로서 매일 함께 동행하는 현실에서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훨씬 더 원리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당신과 함께하시며 그분의 생명을 당신과 나누고 계시는 것이다. 그분의 빛이 당신 두 명에게 주신 성스러운 영역에 존재하는 어둠을 없애는 일이다. C.S. 루이스(C.S. Lewis)의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내가 이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를 배울 때, 나는 이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내가 지금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중략] 중요한 것을 우선시 할 때, 이차적인 것은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증가된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top Loving Your Spouse Too Much번역: 정은심
가정
결혼
특권
그리스도
배우자
우선시
루이스
생각을 정결하게 하는 세 가지 방법
by Scott Hubbard
2019-07-08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의 마음을 새롭게 만드신다.한 때 우리는 “총명이 어두워진”(엡 4:18) 상태였다. 영리하고 똑똑했을지는 모르지만, 마음의 문을 닫은 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가 아닌 헛된 것을 더욱 원했고(롬 1:18), 그 바람대로 가꾸어진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치를 잊었고, 죄는 더 이상 경계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았으며, 거룩함은 추구할 필요성을 잃고 말았다. 애초에 주님이 거하는 동산이 되도록 창조된 우리의 마음은 가시덩굴이 가득한 불타버린 땅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닫혔던 당신의 마음 속 문과 창문을 여시고 빛을 비추신다. 그분은 그렇게 우리 마음 안의 동산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이 말씀하기시를, 크리스천의 위대한 임무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심령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엡 4:23). 그 말씀을 따라 마음 속의 무성한 잡초를 뽑아내고 좋은 나무를 심으라. 바위를 치우고 밭을 일구라. 또한 포도나무 가지를 치고 울타리를 세우라. 우리에게는 마음을 정결하게 가꿀 의무가 있다. 마음을 정결하게 하라마음을 순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특정한 방향을 바라보도록 습관을 들여야 한다. 무가치한 것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더러운 것에서 순수한 것으로, 거짓에서 진실을 향해 마음의 눈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전환은 회개와 마찬가지로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매일, 시간마다, 아니 심지어 순간마다 노력해야 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의 습관을 바꾸는 것은 오랜 시간 굳어 있던 도로에 새로운 바퀴 자국을 내는 것과 같다.하나님을 원하시는 방향으로 마음을 고정하고 거룩한 생각을 하도록 버릇을 들이는 것은 마치 깜깜한 방에서 조금씩 커튼을 열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 방에 서서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과 따뜻함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어느새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는 생각과 참나무처럼 올곧게 자라는 의로움을 보게 될 것이다. 빌립보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다음의 세 방향으로 끊임없이 향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 세 방향은 하늘의 영광, 땅의 아름다움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이다.1. 위의 영광에 마음을 두라“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19-20).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 곧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빌 3:18-19)가 되지 말라고 경고한 후 하늘 시민권을 상기시킨다. ‘땅의 일’이란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에 존재하는 은사가 아닌 죄와 쾌락을 의미한다(골 3:5 참조). 즉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표현의 의미는, 천국은 저 멀리 밀어 놓고 세상적인 것에 온 마음을 빼앗긴 채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땅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자가 되는 길은 바로 위를 쳐다보는 것이다. 하늘의 영광을 향해 눈을 들고 천국의 정원을 거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막연한 “위의 영광”을 말하지 않는다. 하늘을 향해 마음을 고정한 상태는 안개가 끼어 있는 듯한 희미한 영적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온 마음이 채워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에 있으며, 우리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존재라는 말, 그리고 위의 영광을 향해 마음을 두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이 그 분 안에 거하게 하라’는 뜻이다.끊임없이 주 예수님을 생각하라. 그분이 어떻게 아버지를 떠나 종의 모습을 취했는지를 생각하라. 그리고 절망에 빠진 죄인들을 위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했음을 떠올려라. 더불어 그분은 지금 십자가의 상처가 남겨진 영화로운 육체를 입고, 또한 가장 높고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쓰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때가 되면 그가 “우리의 천한 몸도 그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시킬 것”임을, 또한 산산이 부서진 우리를 언젠가 온전하게 만드실 것임을 묵상하라(빌 2:6-11; 3:21). 그때가 되면 우리는 비로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는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매일 성경을 읽으며 바로 이 예수님을 찾으라. 그의 선하심에 당신의 마음을 맡기고, 그분이 하신 모든 약속을 당신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그리고 수시로 위의 영광을 기억하라. 2. 아래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라“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천국에 마음을 고정할수록 당신은 이 세상을 향한 생각 또한 멈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창조물인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끊임없이 찾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에게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는 것은 순종의 문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사랑스러운 것’ 대신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티끌같고 즉각적인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긴다. 세상이 주는 이러한 맛에 길들어져 버린 우리의 마음을 재정비하기 위해서라도 나와 당시에게는 천국이 필요하다. 순간적인 쾌락을 넘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고 지속적인 기쁨을 주는 천국, 우리는 그곳을 지향해야 한다(빌 1:10).하늘의 영광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주는 사소한 것들에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더 깊은 진리를 갈구할 뿐만 아니라, 껍질에 불과한 이 세상 쾌락을 지나 본질적인 깊은 울림을 갈망한다. 타락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는, 즉 그 경이로움을 일깨워 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다. 그리하여 그 입술에는 복음을, 그리고 마음에는 그 분의 영광을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빌 1:27). 또한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나를 진정한 본향으로 이끌어 줄 하나님의 영광을 갈구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넓고 아름다운 하늘과 공중을 나는 새, 들판의 꽃과 구름의 움직임을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일상에서 드러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잠자던 우리의 영혼이 깨어날 수 있다. 잠시 동안 모든 것을 잊은 채로 달리기를 하고, 자전거를 타며, 또한 글을 쓰고 요리를 하라. 그리고 무릎을 꿇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3. 주변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두라“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이 세상 속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정작 주변의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영적인 눈이 감긴 상태와 같다. 내 주변의 이웃들은 천국 또는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될 아담의 자녀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명령했다(빌 2:4).“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라는 명령은 단순히 시간이 남을 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도록 노력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타인을 향한 그의 명령은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 세심한 관찰, 진지하고 창조적인 고민을 기초로 한다. 즉 바울의 명령은 어떻게 주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여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 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일에 착수하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타인을 품는 역할에 있어서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모델로 삼는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서 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빌 2:5-11). 십자가는 결코 예수님이 우연히 감당한 좋은 일이 아니었다. 우리를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 속에서 계획되고, 예수님 자신이 죽는 극도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뤄진 일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 희생 그리고 사랑을 닮음으로써 우리도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도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될 수 있다(빌 2:20).균형 잡힌 크리스천은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자신에게 생기는 불이익은 생각할 겨를이 없는 자들이다. 마음과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건강한 습관은, 나의 유익을 떠나 타인의 희망, 갈등, 성공 및 실패에 관심을 쏟는 것이다.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라마음을 정화하라는 부름은 이땅에서의 삶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가장 거룩한 사람들조차도 부패한 생각을 끊임없이 쫓아내며 마음의 정원을 가꿔야 한다. 오직 거룩한 시온 산의 땅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심을 때에만 우리의 생각은 제대로 피어날 수 있다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담은 여러 열매는 바로 “이것들을 생각하라”라는 성경의 명령에 귀 기울일 때에 주어진다. 즉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위의 영광과 아래의 아름다움,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두어야 한다. 빛이신 그 분이 나의 마음을 완전하게 정화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이 세 곳을 바라보며 주님의 따스함을 만나야 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ree Ways to Purify Your Thinkin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마음정결
하늘의영광
땅의아름다움
주변사람들
마음고정
거룩한생각
빌립보서
복음적으로 훈육하기
by Sara Wallace
2019-07-05
지난 주에 나는 아들에게 벌을 주었다. 이내 울음 소리가 들려서, 나는 그가 적어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속상해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아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려나 하여 방에 들어가 말을 걸어보았지만, 아이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벌을 받고 있는 상황 때문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여 동생을 다치게 한 행동을 뉘우치며 울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그것은 생각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훈계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히브리서 12장 11절은 모든 징계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벌 받는 것을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슬픔을 느끼는 것이 항상 뉘우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 바울은 슬픔을 경건한 근심과 세상 근심으로 구분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경건한 근심은 생명을 주고, 세상 근심은 사망을 낳는다.그러면 우리 자녀들이 바른 근심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며, 아이의 근심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세상 근심죄책감은 죄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 마음 안에는 모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다(롬 2:15). 그것이 바로 양심이다. 하지만 죄책감이 든다고 하여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즉 죄책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상 근심은 우리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슬픈 감정이다. 세상 근심으로 인한 슬픈 감정은 자기 연민, 분노 및 교만 등으로 표출되며 자기를 기만한다. 세상 근심이 자기를 기만하는 모양은 매우 미묘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난 어쩔수 없어”라고 변명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 사람 잘못이야”라며 남을 탓하게 부추기기도 한다. 또한 “난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라고 하며 자신의 잘못을 더 나쁜 누군가의 죄와 비교하게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나쁜 일을 조금 하기는 했지만, 난 늘 선한 사람이야”라며 죄와 협상하게 한다. 세상 근심이 계속되면, 이러한 양상과 더불어 깊은 죄책감에 빠져들게 된다. 죄책감에 빠지는 모습은 자칫 회개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사실 그것은 스스로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해 행하는 일종의 고행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죄에 대해 충분히 슬퍼하면, 죄가 어떻게든 축소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죄책감이 조금 경감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슬픈데 내가 어떻게 나쁜 사람일 수 있겠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결국, 진정으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는 한, 세상 근심으로 슬퍼하는 일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히브리서 12장에 의하면, 에서는 장자권을 팔아넘긴 후 자신의 잘못을 슬퍼했지만 그의 슬픔은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에서는 장자권을 잃은 그 결과를 바꾸고 싶었을 뿐 자기의 마음을 바꾸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눈물만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수 없다. 고통 자체가 우리를 정화시키지 않고, 고난 자체가 우리를 성인이 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망의 슬픔을 생명을 낳는 애통으로 바꾸실 수 있다. 우리가 이 복음의 은혜를 알고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경건한 근심우리가 어떤 근심으로 슬퍼하는지는 그 결과로 알 수 있다. 세상 근심은 마음을 경직되게 하지만, 경건한 근심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 서술되어 있는 것과 같이 감사를 낳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죄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그 죄의 값을 대신 치르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죄사함을 선물로 받아 감사와 순종의 삶을 살게 된다." 경건한 죄책감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기 때문에 항상 감사함으로 이어진다.로마서 7장 24절에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외치면서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의 죄책감은 바로 다음 절에서 감사로 바뀐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또한 경건한 근심은 자기 연민을 없앤다. 그것은 성찰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으로 바뀐다. 그것은 슬픔을 지속시키거나 숨기거나 거기에 빠져들게 하지 않고, 죄의 추악함을 알아차리고 해결 방안을 찾아내게 한다. 세상 근심은 우리 마음을 동요시키지만, 경건한 근심은 우리 마음을 자비의 하나님에게 돌리게 한다. 아마도 당신도 자녀들이 경건한 근심 보다는 세상 근심을 더 많이 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속상해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세상 근심을 사용하여 아이들을 진정한 회개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어떻게 자녀들의 세상 근심을 복음의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후회: 어떤 아이들은 때로 부모가 훈계나 벌을 주지 않아도 자신의 잘못을 쉽게 후회한다. 하지만 후회 자체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지속적인 위로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네가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우리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없앨 수는 없단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음을 믿으면, 우리의 죄는 영원히 없어지게 되는거야”(요일 1:9). 자기 연민: 자기 연민은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기보다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있는 경우 생긴다. 아이들은 자기의 죄를 시인하는 대신 본인이 느끼는 불의와 불공평 때문에 슬퍼할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그러한 좋지 않은 기분을 죄의 결과를 이해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관계를 깨뜨린단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다는 사실이야(엡 2:12). 하지만 하나님은 용서를 통해 너와 그분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신단다.”분노: 아이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일과 관계를 그르친 자기 자신에게 분노할 수 있다. 그럴 때에는 이렇게 말해 보라. “나는 네가 이러한 죄의 결과로 인해 스스로에게 화가 나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사랑의 수단이란다(히 12:6). 그러한 감정은 우리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삶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 주지. 죄는 하나님도 화나게 한단다. 우리는 그분의 분노를 받아 마땅하지. 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노하심을 결코 경험하지 않게 된단다(롬 5:9).” 숨기기: 슬프게도, 아이들은 그들의 죄를 종종 속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속임 역시 우리 아이들 스스로 잘못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 경우도 역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때는 이렇게 말해보라.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하여 이미 알고 계신단다. 하나님께 그것을 숨길 수는 없어. 그것을 숨긴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없애버릴 수도 없지. 하지만 그것을 숨기기보다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어(시 32:5).” 참된 회개경건한 근심은 표면적으로는 세상 근심과 비슷해 보이지만, 두 가지 중요한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고 싶어하는 마음과 변화되고 싶어하는 욕구이다.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그것은 아이들이 우리에게 와서 자신들의 죄를 시인하는 모습일 수 있고, 혹은 꾸지람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사과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는 그들이 죄악된 습관에서 돌이키고 스스로 올바른 행동을 하며 순종하는 모습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참된 회개를 일으킬 수 있다(겔 36:26). 아이들이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경건한 근심을 하든지 아니면 세상 근심을 하든지 중요한 것은 그들을 예수님께 향하게 하는 것이다. 복음만이 죄책감과 자기 연민을 느끼는 자들과, 분노하고 속이는 자들에게 소망이 된다. 아이들이 세상 근심에 빠져 있으면, 그들을 부드럽게 이해시키고 이렇게 말해보라. “세상 근심에 빠지는 것보다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 더 낫단다. 자기 연민과 분노에 빠지기 보다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분께 의지하라. 그것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Kids Express Worldly Grief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훈육
세상근심
죄책감
경건한근심
참된회개
자기연민
분노
복음
이렇게 친구를 사귀라
by William Boekestein
2019-07-02
우리는 종종 친구들과 우정을 쌓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이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을 늘어 놓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나의 경우도 드문드문 친구 관계를 맺곤 하는데, 특히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주변에 친구가 많지 않아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어떻게 자연스레 표출해야 할지를 모르기도 했다. 아직 갈 길이 멀은 것이다.그러다가 나는 최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진정한 친구로 지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요 15:15). 자기 자신을 깊이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구로 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기 전부터, 심지어는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아버지와도 그리고 성령님과도 깊은 교제를 나누시는 친구였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도 진정한 친구가 됨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서로에게 그분의 형상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렇다면 이처럼 꼭 필요한 친구 관계를 어떻게 잘 맺고 살아갈 수 있을까? 여기에 그에 대한 몇 가지 조언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1. 이웃을 사랑하는 일과 친구를 사귀는 일을 서로 구분하라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 이웃에는 자신이 혹 미워하는 사람까지 포함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웃 사랑이 친구를 사귀는 것과 동일한 행동은 아니다. 친구는 단지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묻는 상대가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나눌 수 있는 상대이다. 그래서 바울이 말했듯이, 친구들은 서로에게 마음을 넓히고(고후 6:13) 여러 시간 교제하며 하나 되기를 힘쓴다. 다시 말해 친구는 몸소 만나 정서적인 공감을 이루고, 또한 영적으로 깊은 이해 속에서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관계이다.우리는 분명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의 친구가 되는 일에는 그 이상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2. 배우자만을 친구로 삼지 마라물론 배우자는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유일한 친구가 될 순 없다. 혹 배우자만을 친구로 삼는다면, 당신은 자신의 성장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결국 배우자도 숨막히게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공동체 안에서 충족되어야 할 필요까지도 오직 배우자가 채워주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혼 관계는, 다른 친구들을 통해 얻어야 할 새로운 즐거움이 결여되어 차차 메말라 갈 수 있다. 따라서 건강한 친구 관계, 배우자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3. 감정을 표현하라칼빈은 시편이 “여러 가지 고뇌와 슬픔, 두려움과 의심, 소망과 염려와 당혹스러움, 한 마디로 말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든 감정”을 생기 있게 드러낸다고 설명한 바가 있다. 그래서 시편이 우리에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누군가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꺼리는 사람이 있는데, 특히 남자이다. 친구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다윗은 친구 요나단과 헤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울었다(삼상 20:41-42).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36).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바울이 떠날 때 울면서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행 20:37).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남자니까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비인격적이고 잘못된 견해를 담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자이든 여자이든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4. 친구 관계가 무엇인지 말로 정의해 보라최고의 친구 관계는 일종의 언약 관계와 같다. 다윗과 요나단은 그들이 맺은 친구 관계를 언약의 개념으로 엄숙히 표현했다(삼상 18:3; 20:8; 23:14-18). 이처럼 당신도, 친구 관계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친구와 함께 말로 표현해 본다면, 그 관계에 놀라운 진전이 일어날 것이다.진정한 친구 관계는 서로에 대해 직접적으로만이 아니라 간접적으로도 좋은 말을 하는 사이다. 바꿔 말해, 당신의 친구 관계는 친구가 없는 자리에서 그 친구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요나단은 다윗이 위기에 처해 그와의 관계가 위태로울 때조차 그에 대한 마음을 다른 사람 앞에서 지켰다(삼상 19:4). 언젠가 파스칼은, 만일 친구들이 우리 자신에 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안다면, 이 세상에 친구라는 존재는 얼마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 얼마 없는 귀한 친구 중 한 명이 되기를 바란다.5. 축하하고 기념하라좋은 친구란 인생을 어떻게 즐거워하며 살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성경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괜히 잔치로 묘사한 게 아니다(계 19:9; 요 2:1-11). 하나님은 미래만이 아닌 현재를 위해서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축하하고 기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요즘 세상에는 “진짜 좋은 일은 내일 일어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내가 친구를 축하해 줄 때, 진짜 좋은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깨닫게 된다.6. 활동적인 교제만 하려고 하지 마라친구들과 활동 중심의 교제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비해, 나눔 위주의 교제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도시화와 현대화가 진행될수록, 친구를 개인적인 관계보다는 살면서 알게 된 지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커진다. 그 결과, 웬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자기 속내를 나누는 관계는 좀처럼 형성되지 않는다.하지만 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대화하는 시간은, 활동적인 교제에서는 가려질 수밖에 없었던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게 만든다. 그만큼 더 깊은 나눔을 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친구 관계를 더 깊이 진전시키도록 이끄는 나눔의 시간을 꺼리지 말라. 혹 그런 교제가 다소 느리고 어색할지라도 말이다.7. 예수님을 대화에 포함시켜라나는 열아홉 살에 혼자서 켈리포니아로 떠난 적이 있다. 나쁜 영향을 주던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를 사귀어야겠고 다짐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러한 친구들을 만났고, 하나님은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나의 신앙이 빗나가지 않도록 지켜 주셨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에서도 신앙적인 나눔을 계획적으로 실천하진 못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 원래 살던 지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우리가 함께 기도해 본 적이 없었어.” 그랬다. 우리는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나는 자신의 신앙을 친구들 앞에서 감추지 않는 모습이 진짜 멋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영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면 변죽만 울려서는 안 된다. 생사 간에 유일한 위로가 되시는 그분에 관해 진솔히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에 관해 친구와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진짜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8. 그리스도 안에서 실천하라우리가 율법적인 규칙을 따른다고 더 경건한 사람이 되거나 좋은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한 대속을 이루셨다는 복음의 소식만이 자신 및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이다(롬 1:16). 그러나 벨직신앙고백의 진술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 곧 삶의 규칙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의 생활을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지금까지 나열한 조언을 친구 관계의 초석으로 삼아 실천하며, 더불어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행한다면, 좋은 친구로서 살아가는 비결을 바로 그분으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8 Ways for Men to Make the Friends They Won’t Admit They Need번역: 장성우
생활
관계
친구
배우자
감정
표현
교제
실천
비교는 경건의 열쇠다
by Amy DiMarcangelo
2019-07-01
세상은 우리에게 “비교하지 마라! 너는 너일 뿐이다. 진정한 만족은 네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달콤한 그 말은 죄성 가득한 우리의 귀에 매우 듣기 좋은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그 속삭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감’만 있다면 ‘성령의 열매’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유혹하며 신앙적 결핍을 외면하도록 부추긴다.우리는 그 달콤함이 주는 유혹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과 나의 모습을 견주어 보는 일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비교는 두려워하거나 피할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주님은 종종 이 방법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경건한 비교’는 다른 누군가의 기준을 따르거나, 그 삶을 모방하거나 혹은 더 나은 자기만족감을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다. 자기 발전을 위해 런닝머신에서 힘들게 뛰는 것도 아니고, 헛되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애쓰는 것도 아니다. 경건한 비교의 목적은 타인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데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위해 비교를 사용하신다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두 형제가 드린 제사를 비교하셨다. 우리가 잘 알듯이, 주님은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은 반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가인이 이에 완악한 마음으로 화를 냈을 때, 하나님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양떼 중 가장 좋은 것을 드린 동생 아벨의 모습을 가인 역시 닮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에게 배우는 대신 동생을 죽여 버리고 만다(창 4:1-8).이 이야기를 들으며 당신은 어쩌면 “그건 예수님 오시기 전 일이잖아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은 제사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다. 다시 말해,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그 ‘의로움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의 성취가 한 순간에 예수님을 닮은 성품으로의 극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을 제시하셨다. 그 중 회당에서 헌금을 많이 한 부자와 두 렙돈만을 바친 가난한 과부를 떠올려 보라. 주님은 부자보다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이 드렸다며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선언을 하셨다. 하지만 이는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가진 모든 것을 드린 과부의 마음이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 과부의 가장 큰 보물은 바로 하나님이셨던 것이다(막 12:41-44).계속해서 예수님은 두 자매를 비교하여 가르치신다. 식사 준비로 바쁜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가 전혀 돕지 않는다고 예수님께 불평했을 때, 그분은 당신의 발 아래서 말씀을 들은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반응은 분주함으로 지친 마드라가 계속해서 혼자 일하도록 부담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마리아가 품은 마음의 의도, 즉 말씀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그 마음의 중요함을 보여주려 하셨던 것이다(눅 10:38-42).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자세도 물론 소중하지만, 그분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 역시 중요한 일임을 가르치신 것이다.하나님이 비교의 방법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망가뜨리거나 비난하려 함이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우리의 마음이 더욱 하나님께 사로잡히기를 원하기 때문에 거룩한 비교를 사용하신다.우리의 경건함을 위한 비교 예수님께서 교회를 한 몸으로 설명하신 것처럼 크리스천들은 각각의 지체로서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각각의 기능을 가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다(롬 12:4-5). 그 속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은 크리스천들에게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주님은 서로 다른 성향과 재능, 배경과 사연, 그리고 강점과 약점을 가진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선하심의 일부가 되어 이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기를 바라신다. 획일적인 것으로는 이룰 수 없는 그 빛이 다름의 조화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우리를 거룩하도록 부르셨다. 걸을 때 몸 전체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또한 다양함을 품고 예수님 한 분을 향해 함께 나아간다.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 방법 중 하나는, 그분을 모범으로 삼는 여러 기독교인들과 어울리며 내가 경험해 본 적 없는 순종의 방식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건한 비교는 우리를 그분의 아들처럼 만들기 위한 자비로운 계획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다른 모범 사례들을 통해 우리를 다듬어 가신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가 예수님을 본받은 것처럼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다(고전 11:1). 또한 바울은 디도에게 좋은 일의 모델이 되라고 가르치며(딛 2:7), 디모데에게 말과 행동, 사랑, 믿음 그리고 순결의 본이 되라고 강조한다(딤전 4:12). 바울이 환난에 처한 자신에게 마게도냐 교회가 보인 관용에 대해 널리 소문을 낸 것(고후 8장) 역시 그런 이유에서다. 경건과 겸손, 소망으로 비교하는 것, 그리고 모범적 삶을 따르는 발걸음이 없다면 몸은 결코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의 추구는 당장 멈추어야 한다. 가인이 아벨에게 그리고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배워야 하는 것처럼, 또한 고린도 교회가 마게도냐 교회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어떻게 비교해야 할까?경건한 비교를 위해서는 기본적 원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성경적인 섬김에 대해 고민한다면, 섬김을 잘하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 그렇게 하는지를 관찰하고 따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와 같이 행하다 보면, 섬김의 여러 방식을 스스도 확장시키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우리 시어머니는 명절마다 가족이 없는 친척들을 초대하신다. 또 우리 가족은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고 있다. 최근에 모임에서 만난 한 친구는 몰몬교 선교사를 초대해 믿음에 대해 토론하기도 한다. 주님은 나에게 그런 본보기들을 마주하며 주눅들기보다 오히려 그들로부터 배우기를 원하신다. 그들 안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확인하면서 말이다. 그분은 내가 약점을 외면하기보다는 성장하고, 순종하며, 심지어 기꺼이 섬기는 일을 즐거워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는 분야조차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겸손히 배워야 한다. 나는 자비를 베푸는 일에 조금은 남다른 재능이 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시간과 자원 혹은 인력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에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역에서 여전히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가까운 친구가 이웃에 사는 사회적 약자에게 품은 깊은 연민을 소유하고 싶다. 또한 중독자들을 향한 남동생의 헌신 및 그가 희망이 없는 지역을 찾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도 본받고 싶다. 성령님은 우리가 담대함과 기대를 가지고 비교의 경건을 누리도록 인도하신다. 주변의 누군가가 예수님을 더욱 소중히 섬기도록 당신의 마음에 도전하고 주고 있지 않은가? 당신에게 없는 경건함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선교를 위해 열정을 쏟는 이웃이 있는가? 여러 모범 사례들을 떠올리며 그 길을 닮아 가기 위한 방안을 찾아보라. 그 신실한 노력의 시간 동안, 주님은 그들을 강력하게 이끄시듯 나의 약점까지도 단련하시고 꾸준히 변화시켜 가실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Comparison Is a Key to Godliness번역: 송유희
영성
영적성장
선을위해비교
가인과아벨
마르다와마리아
경건한비교
기본적원리에초점
그저 탄식할 수밖에 없을 때
by Joseph Rhea
2019-06-24
나는 그날 마트에서 한 손으로는 카트를 끌고 다른 쪽으로는 18개월 된 딸을 안은 채, 비어 있는 계산대를 찾고 있었다. 아침부터 아이에게 미열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마트에서도 딸을 카트에 앉히는 대신 안고서 장을 보던 참이었다. 그런데 딸이 갑자기 상체를 꼿꼿이 세우더니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호흡 곤란이 온 것처럼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했고, 구역질을 시작했으며, 몸을 뒤로 굽혔다가 다시 내 쪽으로 납작하게 기대왔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입술이 둥그런 모양으로 굳어짐과 그 주위가 그 주위가 한눈에 보기에도 알아챌 정도로 파래졌다. 십 분 가량 아이는 멍한 상태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무섭고 떨리는 상황 속에서 나는 일단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이가 질식한 것은 아닌지 확인한 후 직원에게 119에 연결해 줄 것을 긴급하게 요청했다. 곧 구급대원들이 도착했고 천만다행히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며 날 안심시켜 주었다. 원인은 갑작스런 고열에 의한 열성 발작이었다. 십오 분쯤 지나자 딸 아이는 나를 알아보고 물을 달라고 했고, 이내 자고 싶어 했다. 다음날까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지만, 그날의 일은 그렇게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되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던 그 순간, 경련이 너무 심해 아이가 곧 의식을 잃을 처럼 보였던 그 무시무시하던 때,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탄식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날의 고통은 짧았지만, 내가 아는 이들 중에는 오랜 기간 처절한 고통과 슬픔을 겪으며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또한 지인 중에 장애가 있는 이들이 있는데,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주긴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지, 또한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의 기도를, 탄식에 가까운 기도마저 모두 이해하시는 분이시다. 로마서 8장은 이러한 진리를 잘 보여준다.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중략]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3, 26-27).바울이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언어적으로 잘 정제된 기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적나라한 탄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성령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기도에 관한 바울의 이와 같은 고백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세 가지 위로를 발견할 수 있다.1. 탄식의 기도를 들으신다누구의 기도이든, 어떠한 상황에서든, 하나님이 우리의 탄식하는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은 실로 놀라고도 감사한 사실이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면들이 있긴 하다. 예를 들어 많은 이들로 붐비거나 시끄러운 곳이라고 해도,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또한 특별히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상대방이 행복한지 슬픈지, 아니면 신난 상태인지 지루해 하는지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탄식의 기도, 일체의 생각과 바람을 다 '들으신다.' 자신조차도 미처 말로 표현하지 못한,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지도 못한 내 영혼의 몸부림까지도 그분은 아신다. 너무나 큰 고통과 고뇌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분을 송축하기는 커녕 단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은 탄식의 기도를 들으신다. 바울이 말한 “마음을 살피시는 이”는,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을 때조차 언제나 그 자녀의 기도를 들으신다. 2. 탄식의 기도를 이해하신다하나님은 아무 말 못하는 기도까지도 들으신다. 다윗 역시,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4)라고 고백한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며, 미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들으신다.그러나 그분은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시는 분이다. 다윗은 가슴을 저미는 애가인 시편 38편에서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9절)라고 읊조린다. 이는 곧 다윗이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8절)할 때 하나님이 그것을 들으시며, 또한 그가 이 사실을 믿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하늘이 선포하는 그분의 영광, 그리고 밤과 낮이 하는 “말”을 들으시는 분이시므로(시 19:1-3), 그분은 우리 영혼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하시고도 남는다. 로마서 8장이 묘사하는 "속으로 탄식하는"(롬 8:23) 모습은 피조물이 지닌 슬픈 단면이자 한계이다. 고통이 너무도 깊어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롬 8:26), 오직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롬 8:27). 성령 하나님은 마음 속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또한 그 고통을 보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신다. 이처럼 로마서 8장에서의 바울은,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에 살았던 다윗의 고백보다 더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다. 내가 아무 반응이 없는 딸을 안고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바울이 말한 바로 그 성령 하나님이 애타는 나를 깊이 이해하고 또 그런 나를 위하여 성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계셨다. 3. 탄식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신다언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 지을 뿐 아니라, 아이가 성인이 됨과 함께 발달하는 일종의 선물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말을 통해 세상을 밝히며, 또한 각자의 생각과 소망을 표현한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중요한 영적 진리를 논함에 있어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늘 강조하곤 했다. 또한 개신교는 믿음에 관한 핵심 진리를 누구라도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 위에 세워졌다. 다시 말해 개신교는 언어를 통한 진리의 전달을 귀하게 여긴다. 하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기도까지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신다. 그리고 그 탄식을 알고, 이해하며, 귀하게 보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능력과 은혜, 그리고 사랑을 깨닫는다. 로마서 8장에서 성부 하나님은 바울을 향한 성령 하나님의 탄식을 기도로 받으신다. 우리의 탄식마저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 다윗 역시 하나님이 자신의 “눈물”을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한다(시 56:8). 그날 딸을 위해 울던 나의 기도는 비록 불완전했지만 결코 헛되지 않았다. 고통이 너무 커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이들의 탄식, 슬픔에 너무도 짓눌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들의 신음, 정신적인 질환으로 고통 당하는 아픈 사람들의 갈망 역시 헛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기도를 들으신다.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귀하게 여겨진다. 우리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라 해도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Comforts When You’re Reduced to Wordless Prayer번역: 이정훈
영성
묵상과기도
탄식
들으신다
이해하신다
귀하게여기신다
시편38
로마서8
자녀를 노엽게 한 부모를 위한 일곱 가지 처방전
by William P. Smith
2019-06-21
만약 당신이 부모라면, 말로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게 얼마나 쉬운지 잘 알 것이다. 말 대신 차가운 냉소로 자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우리 중에는 분노를 말로 폭발시키는 사람이 많다. 또 어떤 이는 기만적인 방법과 자기 연민으로 자녀가 시달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자녀에게 어리석게, 또 아프게 말하는 방법은 끝이 없다. 말은 강력한 도구이다그렇다면, 다시 주워 담고 싶은 말을 자녀에게 이미 뱉어버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변명과 핑계를 대는 언행, 뱉어버린 그 말이 그렇게까지 나쁜 것은 아닌 척 하는 행동, 뱉은 말을 아예 무시하는 모습, 아이에게 사정을 하거나 또는 물건을 사주면서 상황을 모면하려는 태도, 혹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으려니 맘 편하게 생각하는 태만 등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 뿐이다. 이런 방법들 중 그 어떤 것도 아이와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복음은 그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 구약의 시대에는 죄를 용서 받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과 제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분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끊임없이 실패하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죄 많고 약한 상태의 인간이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새 길을 만드셨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죄값을 지불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신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실망하시게 했더라도,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이처럼 복음은 단순히 좋은 소식 정도가 아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당신이 자녀에게 잘못을 했을 때, 특별히 더욱 다행스럽고도 기쁜 소식이다. 당신의 말로 인해 아이와의 관계가 엉망이 되었을 때, 주님이 선물하신 복음을 통해 이를 회복하도록 하라. 1.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하라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상기함으로써, 죄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을 먼저 기억하라(롬 3:21-26). 또한 어리석은 말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떠나게 할 수 없음을 기억하라(롬 8:38-39). 다시 말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사랑하도록 나의 마음을 변화시킨 그분이, 변함없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신 30:6-10).2. 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라당신이 한 행동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몸의 각 기관 중에서 혀처럼 통제하기 힘든 것도 없다. 오죽하면 야고보 사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입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까지 언급했을까?(약 3:7-8) 우리가 말을 통제하기 어려운 이유는, 입이란 끊임없이 하나님께 대항하고 싸우려는 인간의 내적 죄성이 밖으로 표출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갈 5:17).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뱉어버린 날카로운 말은,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을 향한 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아주 조금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죄성에 젖은 약하 존재라는 그 처참한 현실을 직시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낙담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끊임없는 죄성과 매일 싸우겠다는 결심을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한다. 3. 멈추고 생각하라일상의 다른 일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또 그 말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를 미리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잠언은 어리석은 자로 묘사한다(잠 12:18,23). 그러므로 당신이 자녀의 마음을 찌르는 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우매한 자가 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보다 말에 있어서 사려깊고 조심스럽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잠 15:28). 그러나 스스로의 부족함 앞에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구원하신다. 당신이 그분께 지음 받은 존재임을 잊지 말고, 그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라. 자녀에게 왜 그와 같은 말을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그리고 상처 주는 말을 뱉던 그 순간, 당신에게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뭐가 더 중요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그때 어떤 말을 했으면 더 좋았을지를 생각해 보라.4. 하나님께 가져가라다른 사람에게 지은 죄(약 4:1-2)는 우선 창조주께 지은 죄부터 회개해야 해결된다(약 4:7-10).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분명하게 명하셨다. 이때 당신의 가족인 배우자와 자녀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이웃이다. 따라서 나쁜 말을 포함하여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평적'인 죄악은 사실상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중대한 '수직적' 문제이다(시 51:4). 그러므로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부분은 하나님께 지은 죄이다. 주님께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 자녀와의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5. 먼저 다가가서 치료의 언어를 사용하라겸손한 자세로 자녀에게 나아가라(마 5: 23-24). 부모와 대화를 나눌 시간과 마음이 있는지 먼저 물어보고, 아이에게 쏟아낸 그 말을 진심으로 후회한다고 말하라. 화를 내던 그 때 당신이 마음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백하고, 그것은 잘못된 마음이었다고 전하라. 더불어, 행여 당신의 말을 듣고 자녀가 취한 행동을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 반응은 전적으로 당신의 문제이지 자녀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그 때 자녀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강요가 아닌 겸손한 자세로 물어봄으로써 자녀가 자신의 마음을 터놓도록 인도하라. 6. 동기를 점검하라 당신 스스로에게 회복을 위해 자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어떠했는지를 질문하라. 그 대화에 당신의 진정성이 있었는가? 만일 부모의 사과가 앞으로 자녀를 쉽게 대면하기 위해 필요한, 어떤 숨겨진 의도를 가진 수단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당신이 아이에게 전한 사과는 관계의 회복을 위함이지, 자녀가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하려는 게 아니었음을 기억하라. 아이가 가진 문제는 언제고 적절한 때에 얼마든지 다시 언급할 수 있다.7. 좋은 추억을 만들라마지막으로, 자녀와 함께 할 활동을 계획하라. 게임, 과자 만들기, 산책, 축구, 산책, 영화 보기, 그리고 여행에 이르기까지,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소소한 것에서부터 큰 계획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과거를 지울 수는 없지만, 새로운 추억을 함께 만드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좋은 추억들이 이전의 나쁜 기억들을 전부 밀어낼 것이다. 나쁜 말에 대한 좋은 소식인간이 최초의 죄를 짓기 전인 에덴동산에서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영광된 복음. 그 복음 뒤에는, 우리에게 수백 만번의 ‘또 다른 기회’를 기쁘게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이 위대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자녀야 일어나라.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났기에 네 인생 속 그 어떤 이야기도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너의 모든 이야기는 예외없이 행복한 결말을 가질 수 있다. 네 자녀와의 안 좋았던 그 날의 이야기조차도."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7 Things to Do When You’ve Blown It (Again) with Your Kids번역: 무제
가정
양육
말
복음
관계회복
은혜
구원
죄
회개
치료의언어
일상의 두려움이 나를 찾아올 때
by Kristin Tabb
2019-06-19
나는 백미러로 운전사를 쏘아보았다. 우리는 움푹 파인 동부 아프리카 도로를 따라 여행 중이었고, 자동차는 시속 7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나는 있지도 않은 안전 벨트를 마음속으로 부여잡은 채 안절부절했다. 결국 미친 듯이 달려오는 맞은편 차를 상대로 기사가 마음대로 경주를 시작했을 때, 나는 위험하게 운전하는 그를 향해 날카롭고 퉁명스러운 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우리를 초대한 지인은 당황한 채 어색한 목소리를 냈고, 함께 타고 있던 몇몇 사람들은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시선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미 그보다 큰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두려움은 신뢰의 정도를 드러낸다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에 불안한 상황을 종종 보고 또 겪는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일들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죄로 인해 타락하고 왜곡된 이 세상은 더 이상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그 결과 두려움은 이미 삶의 일부가 되었다.두려움을 느끼는 감정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내 속에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주고, 우리 가정에 거주하게 하며, 관계와 양육을 통제하고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도록 놓아둔다면 이는 문제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두려움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세상을 보는 우리의 관점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두려움은 누가 지배권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올바른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두려움이 찾아올 때우리는 종종 두려움이 찾아올 때 문제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확률을 분석하며, 해결 방안의 실행 가능성 등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는 한다. 혹은 아예 불안감의 원인이나 감정 그 자체를 회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통해 두려움을 단순히 잦아들게 하는 대신, 그와 대항하여 담대히 싸우는 방법은 없을까? 두려움에 움켜잡은 운전대를 내려놓고 “내 힘으로는 두려움을 다스릴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지배권을 가지고 계시므로 나는 괜찮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1. 두려움을 인식하라두려움은 단단한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면 너머의 존재를 알아차려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집앞 놀이터에 갈 때마다 아이들에게 매번 선크림을 듬뿍 발라주고 챙이 넓은 모자와 긴 소매 셔츠를 반드시 입힌다고 가정하자. 이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이들을 단 1분이라도 햇빛에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것이 얼마나 나를 두렵게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발견이 그저 작은 발걸음을 떼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두려움이라는 존재를 한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거나 혹은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상태로 일생을 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인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문제가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단지 운전자의 불안한 상태를 그 차에 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즉 자신이 안전하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두려움을 대면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 용기를 구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베푸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안의 두려움을 알고 시인해 보도록 하라.2. 두려움을 명명하라두려움의 존재를 깨닫게 되면, 자신을 진정으로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사실 우리는 선크림 없이 외출하는 그 행위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로 인해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부정적인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여기서 혹시 모를 무서운 결과란 아이들이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피부암 혹은 선크림 속 발암물질로 인한 다른 질병의 발생 등이다.때로는 두려움이 나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를 흔들기도 한다. 한 엄마가 해변가에서 여러 친구들에게 선크림과 관련된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 때 다른 엄마도 자신이 느끼는 비슷한 불안을 이야기하며 거들 것이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덜 신경 쓰던 엄마들은 본인이 너무 안일했던 것은 아닌지 자책하며 갑자기 근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겨난 두려움은 모임 안에서 점차 확대대고 재생산되어 더욱 큰 걱정을 야기할 것이다.나는 지금 지혜를 나누지 말거나, 주의를 갖지 말거나, 혹은 잠재적 위험에서 서로 보호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과도한 두려움을 일으켜 나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는 만큼 아이들에 대한 청지기 역할을 지혜롭게 수행해야 한다.3. 두려움을 물리치라두려움이 나를 짓누르려 할 때, 예수님은 내가 두려워하는 그 무엇보다 더 강한 분이라고 믿고 선언하라. 그리고 그 선언을 통하여 두려움에 대항하라.암은 무서운 질병이지만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작은 부분까지 전부 돌보시며(눅 12:7), 질병을 포함한 당신 인생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에 이르게 하신다고(롬 8:28) 명백히 선언한다. 하나님은 내 아이들을 피부암으로부터 능히 보호하실 수 있으나(시 91:3), 그리하지 않기로 선택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러한 선택을 우리가 경험하는 동안, 그분은 변함없이 또 반드시 나와 함께 동행하실 것이다(히 13:5). 예수님은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라고 하셨다. 당신은 피부암을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마주칠까봐 근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미 정복하신 것에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주님이 나를 부르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후 10:5). 우리는 그 두려움을 물리칠 때까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 기억하고 선포해야 한다.죽음은 인간을 두렵게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멸하셨다. 다시 말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여 두려움을 물리치시고, 또 다시 살아나는 역사를 통하여 죽음을 완전하게 이기신 승리자가 되셨다. 그분이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그러한 성취를 이루신 이유는 그분의 자녀들을 사망의 노예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물론 나와 당신은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두려움의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대적 사탄과 그가 던진 두려움의 화살을 온전하게 이기신, 믿을 수 있는 승리자이다. 그분의 자녀인 우리는 오늘도 그 사실을 선언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승리자이신 하늘 아버지를 신뢰할 때, 그분은 심히 즐거워 하신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Pull the Mask Off of Fear번역: 정은심
생활
감정
두려움
지배권
인식
선언
용기
예수님
죽음의권세
청지기
처음
이전
41
페이지
42
페이지
43
페이지
열린
44
페이지
4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