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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불평없이 하라
by Scott Hubbard
2019-06-17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4).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명령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두 단어, ‘모든 일’을 빠르게 지나친다. 정말 '모든 일'을 불평 없이 하란 말인가? 그렇다. 모든 일이다. 깨어나 보니 몸은 무겁고, 욕실은 엉망이며, 아이들은 아침밥을 먹기 싫다고 떼를 쓴다. 회사에 늦기 일보 직전인데 타이어는 말썽이고, 지난 주 미처 처리하지 않는 이메일은 머리를 맴돈다. 이 모든 일을 감당하면서 한 마디의 불평도, 중얼거리지도 말라 말인가? 아마도 당신은 "그건 정말로 어려운 일인데..."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대체 누가 듣는다고 불평조차 하지 말란 말인가?많은 경우,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불평거리'를 만난다. 그리고 하루 종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수많은 상황과 대상을 불평한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모습을 '내 감정에 솔직하기', '묵은 감정 떨어내기' 혹은 '건강한 스트레스 해소' 등의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 하지만 아무리 불평이 아닌 듯 자기 합리화를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 밭의 상태를 모두 아신다.불평은 타락한 마음이 부르는 콧노래이고, 인간에게 내재된 죄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정말 특별한 존재이다. 즉 바울이 말했듯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사람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이다(빌 2:14-15).불평하는 목소리바울이 쓴 ‘원망’이라는 단어는 (그리고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가 언급하는 신명기 32장 5절은) 우리를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의 광야로 데려간다. 거기서 우리는 불평에 도가 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보여 주는 광야에서의 사십 년은 우리에게 불평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려 준다. 불만족이 소리로 터져 나오는 것, 마음 속의 경멸감이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 바로 불평이다. 이는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강한 갈망'을 가질 때 만들어지는 소리이며, 우리는 불평을 통해 점점 더 불안정한 상태로 빠져 든다(민 11:4; 시 106:14).물론 갈망의 대상이 반드시 악한 것은 아니다. 아니, 많은 경우 그 대상은 아무런 부정적인 요소를 지니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자체로는 전혀 해가 없는 것을 갈망했다. 그들은 음식과 물(출 15:24; 16:2-3; 17:3),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안전한 경로(민 14:2-4), 그리고 고단한 삶에 대한 위로(민 16:41)를 원했다. 그러나 이런 선한 것들에 대한 갈망은 나쁜 결과를 불러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보다 그것들을 더 빨리 성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보다 자신이 손에 넣고자 하는 대상을 더 갈구하게 되었다. 우리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편하게 쉬고 싶은 저녁에 이사를 도와 달라는 친구의 전화를 받게 되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지만 하루 종일 같은 일만 하는 직장에 다니기도 한다. 또한 아무리 철저하게 미래를 계획해도 그 결과는 항상 나의 기대를 저버리다. 우리는 이러한 매일의 상황 속에서 "이건 부당해! 이건 말도 안 돼!"라고 외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욕망은 기대가 되고, 기대는 어느 순간 우리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로 인식 된다. 그리하여 실망감을 하나님께 가져가 그분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도록 하는 대신, 충족되지 않은 욕망이 불만족으로 부출되는 악순환의 고리로 들어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끝없는 불평을 늘어놓는다.복을 걷어차는 불평 불평은 불만족의 목소리, 그 이상이다. 이는 불신앙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대한 나의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불평하기 때문이다. 나의 유익을 위해, 궁극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이런 실망까지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에, 우리의 눈은 오로지 당장의 고통스러운 결과만을 주시한다.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마지막 세대를 땅에 묻었을 때, 모세는 광야에서의 고난에 숨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중략]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5-16). 광야에 널리고 널린 무덤 위로 던져진 이 말씀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광야의 모든 묘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는 불평했고, 그리하여 주어진 복을 걷어찼다."이스라엘 민족의 첫 불평 이후, 하나님은 그들에게 많은 말씀과 더불어 선택권을 주셨다. 그들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중략]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거나"(출 15:26) 아니면 그들 중의 성난 군중을 따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쪽을 선택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폭도들을 따랐다.우리의 불평도 이처럼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아닌 사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에 더욱 커진다.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대신 불평을 쏟아낼 때, 이는 곧 "하나님, 당신의 방법은 선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불평 버리기불평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 다음의 약속을 기억하라.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런데 우리가 불평하고 싶은 마음에 맞설 때, 대체 어떻게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4)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단 말인가? 1. 잘못된 욕망을 회개하라불평하는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 바로 멈추고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물으라.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보다 더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명보다 내게 더 중요해진 갈망은 무엇인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내게 더 달콤해진 욕망은 무엇인가?"불평이 터져 나오는 것은 외부의 문제가 아닌 내면의 상태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외부의 환경이 나를 불평하게 할 수 없다. 바울이 "모든 일에 불평하지 말라"라는 글을 쓸 때, 그는 복음을 전한 죄로 사슬에 매여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술한 빌립보서는 불평이 아닌 감사함으로 가득하다(빌 1:3; 4:14).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바울 서신의 중심에는 아무런 불평 없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겸손하게 낯춘 구세주가 자리한다(빌 2:5-8).하나님은 우리가 감옥에 갇혀서도 감사할 수 있는, 순교의 현장으로 가는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신다. 그러므로 불평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중략]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라는 바울의 고백을 떠올려라. 그리고 나로 하여금 그 고백에 동참하지 못하게 만드는 안락함, 실망, 연기된 소망에 기인한 잘못된 욕망을 회개해야 한다.2.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불평은 현실에 대한 그릇된 해석의 결과이기에, 우리에게는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해석이 필요하다. 즉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밝혀"(빌 2:16) 불평을 멈출 수 있다. 이때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 곧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은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막연하고 모호한 생각으로는 결코 불평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이 주신 말씀을 단단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력하게 붙잡아야 한다. 지금 당신이 불평의 언어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 더 단단하게 말이다. 그렇다면 불평이 스며드는 순간에 붙잡아야 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 내면의 요란함을 잠재우는 하나님의 풍성한 선하심에 관한 말씀(시 31:19),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은혜에 대한 말씀(시 103:1-5), 우리의 밝은 미래에 관한 약속의 말씀(벧전 1:3-9),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붙잡으라는 말씀(약 1:2-4), 그리고 순종의 즐거움을 알게 하는 말씀(시 19:10-11) 등이 이에 해당한다.또는 바울의 명령과 관련해서, 보석과 같은 다음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것은 어떨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예수님 안에서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그 영광스러운 풍성함은 다름 아닌 우리의 것이다. 이 말씀을 굳게 붙잡으라. 3. 믿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라마지막으로,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라(시 46:1). 이는 불평을 기도로 대체하라는 뜻이다. 불평은 다른 말로 하면 기도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왜냐하면 불평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맘을 토로하지 않기에, 그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지 않기에 나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는 곧 불평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된다. 물론 기도하는 중에도 싸움은 계속된다. 아무리 기도해도 우리의 마음은 종종 애초에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 또는 환경으로 회귀하곤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다시 스스로의 마음을 되돌려라. 당신을 만들고,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구속하고, 또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 당신의 거룩함을 완성시킬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라(빌 1:6).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실 때, 불평은 우리 속에 머무를 수 없다. 불평은 믿음 앞에 무릎을 꿇을 것며, 궁극적으로는 찬양으로 바뀔 것이다. 불평이 감사함으로 바뀌는 그 은혜를 경험하라.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Do Everything Without Grumblin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불평
원망
욕망
불만족의목소리
사탄의목소리
욕망회개
말씀기억
기도
지식을 넘어 사랑으로
by Dan DeWitt
2019-06-10
나는 어거스틴(Augustine)의 그림들 중에 17세기 플랜더스파 화가인 필립 드 샴페인(Philippe de Champaigne)이 그린 그림을 가장 좋아한다. 이 그림에서 어거스틴은 서재에 앉아 한 손에는 깃털 펜을 쥐고 다른 손엔 불이 붙은 그의 심장을 들고 있다. 그는 상단의 밝은 빛을 응시하고 있으며, 그 빛은 어거스틴의 머리와 심장 두 군데 모두를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의 중앙에는 진리라는 뜻의 라틴어 'Veritas'가 쓰여져 있다. 이 작품의 의미는 온 몸과 마음을 다하고 또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는 온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신 메시지이다(마 22:36-40). 또한 바울 역시도 그의 사역 내내 이를 핵심 내용으로 전하고자 애썼다. 우리는 유창한 설교자, 관대한 자선가, 또는 숭고한 순교자가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한다면 우리의 행위는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고전 13:1-3). 그 어떤 행위를 더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이러한 관점에서, 당신은 어쩌면 삶을 낭비하고 있을 수도 있다. 바로 오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가? 혹시 그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신학을 정교하게 분석하는 데 더 중점을 두고 있지는 않은가? 불타는 떨기나무그날,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한 날이었다. 당시 나는 청소년 집회에서 유황고 지옥불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있었다. 설교자는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열정적으로 전했고, 그 설교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실 나는 크리스천이 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초신자였다. 집회 바로 전날, 이제 막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인 차였다. 그리고 내 인생의 첫 집회 주제가 바로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집회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설교자는 학생들에게 각자 원하는 장소를 찾아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권면했다. 또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무르라고 격려했다. 넘치는 열정과 기도할 생각으로 들뜬 채, 나는 조용한 수풀 사이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땅에 손을 짚은 후 그 위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기 시작했다.한참을 소리 높여 기도했다.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마법 같은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각각의 단어에 더욱 힘을 주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날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웅장한 목소리를 듣기 원했다 . “그래, 네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한단 사실을 안단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일어나서 네가 좋아하는 치즈 버거를 먹어도 괜찮단다.”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에 결국 기도를 멈추었다. 그때 나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장담컨대 십오 분 이상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 잠깐의 시간이 그토록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적잖이 실망했다. 마치 기도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가리는 것아마도 이와 같은 기억을 가진 크리스천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지만, 또 어떤 때는 치즈버거와 같은 다른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두기도 한다. 사소해 보이는 많은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그처럼 쉽게 가리고는 한다. 지난 삶을 되돌아 보았을때, 과연 무엇을 보게 될까? 하나님을 알고자 지금보다 더욱 노력했고, 더 많이 그분을 사랑했던 때를 보게 될까? 전심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때가 언제인가?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더라도 그것이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이었을까?종종 어린 시절의 집회를 떠올리며 웃을 때도 있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진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 진리는 바로 예수님께서 다른 어떤 것보다 내 마음을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때의 나에게도 진리였고, 지금의 우리 모두에게도 변치 않는 진리이다. 즉 바른 믿음, 그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지식을 넘어 사랑으로올바른 신앙은 정통 교리와 함께 형성되고, 예수님과의 관계는 진리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사도 요한, 엘리야, 혹은 선지자 등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은 몇 가지 호칭을 말하였다(막 8:27-28). 여기서 예수님은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심으로써, 이를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셨다(막 8:29).베드로는 바로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막 8:29). 만약 이 질문이 정통 교리에 관한 시험 문제였다면, 베드로는 최고의 점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역사적인 오순절 설교를 전해야 하는 자였고, 또 그 설교는 약 삼천여 명의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 예정이었기 때문에(행 2:14-41), 베드로에게 정통 교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교리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으신다.반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세 번이나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베드로는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순교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그를 순종의 자리로 이끌었던 것이다.올바른 신앙을 갖게 하는 정통 교리는 믿음의 시작이지 끝이 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향한 사랑 역시 커질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제대로 앎으로써 바른 믿음을 형성하는 일은 크리스천에게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위험하게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대로이면서 그분을 아는 지식만 점점 방대해질 수 있다. 마음이 그분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지식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순교자로 내어 드리는 중에도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일에 실패할 수 있다. 신학 전공자의 고백내 사무실에는 학위 증서가 놓여 있다. 바로 신학 석사 학위증이다. 이는 내가 성경과 하나님에 관한 수많은 수업을 들었음을 의미한다. 나는 분명 신학에 통달하였다. 그러나 과연 학위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당치도 않다. 아마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애썼던 열다섯 살 소년에게 하나님은 더 크게 감동하셨을 것이다.오래 전 그날,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것이 바로 꼭 일어나야 할 일이었다. 주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 드러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내 머리와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사로잡힌 상태에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 삶을 낭비하고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Why Good Theology is Not Enough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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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Cash Tate
2019-06-05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그날도 이런 생각이 얼마나 빨리 찾아왔는지 모른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온 이른 저녁, 장시간의 대화와 고민 끝에 한 가지 제안을 하던 중이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을 위해 나와 남편이 함께 실천할 계획을 말이다.물론 그때까지 우리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봤다. 때로는 평일 저녁에 데이트를 하자고 계획하기도 했고, 자기 전에 둘이서 경건의 시간을 갖거나 신앙 서적을 읽자고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처음에는 의욕을 갖고 시작하다가 곧 다른 방해 거리들로 좌절하고는 했다.그래서 이런 생각이 쉽게 찾아들었던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나는 그 생각을 받아들이며, 점차 침묵하게 되었다.그런데 그날 저녁 주님은, 나의 태도가 잘못됐음을 깨닫게 해 주셨다. 계속 기도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와 남편은 그동안 대적에게 우리 가정을 마음껏 짓밟도록 방치하고 있었다. 굳건히 서서 주님께 이 가정을 지켜달라고 도움을 구하기보다, 우리는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후퇴하여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어쩌면 벌써 이렇게 선언했는지도 모른다. "난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지키지 않을 테니, 대적아, 네가 공격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삶은 전쟁이다편안한 식탁에 앉아 맛있는 식사를 나누며 즐거운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우리가 가정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와 배우자의 마음은 매일같이 여러 가지 유혹과 생각으로 공격을 받는다. 그 유혹은 현재 처한 상황에도 완벽히 들어맞고, 자신의 사고방식에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결국 그런 생각과 속삭임이 삶을 무너뜨리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환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신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마귀의 권세를 대항하는 싸움이라고 말이다(엡 6:12). 실제로 사탄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불화살을 마음껏 날리고 있다(엡 6:11, 16). 그리고 그 전략과 불화살의 주된 타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안타깝게도, 이 결혼 생활을 더 이상 이롭게 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고, 그렇게 추구해 봤자 다 소용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잠깐은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실패하게 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게 마귀의 불화살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도대체 나는 믿음의 방패를 어디에 두었던 것일까? 왜 하나님의 군사로서 제자리를 지키지 않았을까? 과연 난 어디서 싸움을 하고 있었을까?우리는 가정 생활과 관련하여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나와 당신 모두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 받았다. 그러니 싸워야 한다.1. 굳건히 서서 싸우자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우리는 결코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 오히려 주님이 허락하신 능력의 갑주를 입고 굳건히 싸워야 한다(엡 6:10-20). 대적이 퍼붓는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 필요한 장비는 이미 다 주어져 있다. 문제는, 우리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때때로 잊고 있다는 것이다.나는 주님께 이 전쟁에서 내가 포기해 버린 영역이 있다면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십대 청소년인 우리 아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아이가 가진 특수한 문제에 대해 기도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문제는 매우 까다롭고 습관이 될 만큼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어, 나는 해결되지 않으리라고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결국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또 다른 거짓말에 속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능력이라면, 그 어떤 상황이든 변화시킬 수 있는데 말이다.여기서 잠시 묻고 싶다. 혹시 당신의 결혼 생활에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라며 포기해 버린 영역이 있지는 않은가? 자녀가 처한 상황을 보며 ‘이는 어쩔 수 없어’라고 체념해 버린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혹 그렇게 생각하며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다면, 이는 결국 대적의 불화살을 부르는 빌미가 된다. 그래서 그 불이 순식간에 옮겨 붙으면, 우리는 뒷걸음치며 후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체념의 마음이 일어난다면, 곧 닥칠 치명적인 결과를 생각하며 물리쳐야 한다. 그리하여 대적이 우리의 가정을 짓밟도록 그대로 내주기보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굳건히 서서 싸워야 한다.2. 믿음으로 걸으며 싸우자우리의 결혼과 가정 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미 굳어진 습관이나 행동 패턴 혹은 깊이 자리잡아 버린 그릇된 모습이 발견된다. 그래서 그 모습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냥 눈에 보이는 현실을 따라가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걸음은 우리의 결심을 무너뜨리며 결국은 좌절을 겪게 할 뿐이다. 믿음은 이 세상의 현실을 넘어 주님을 바라보게 만든다. 곧 나의 약함을 이해하시고, 내게 인내할 수 있는 힘과 소망을 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고, 그 결과 소망이 없던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새로워졌음을 깨닫게 한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도록 기적을 행하셨다면, 그 가정 생활도 바꾸지 못하실 이유가 없다.3. 꾸준히 기도하며 싸우자이 전쟁에서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 바로 기도의 영역이다. 당연히 우리의 대적은 ‘기도해봤자 소용없다’는 식으로 그에 대해 무관심한 생각을 갖도록 유혹한다. 그만큼 기도라는 무기가 얼마나 강력한지 반증하는 셈이다.우리가 이러한 유혹을 떨쳐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속이 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이 담대함을 가지고 나의 가정이 영적으로 강건해지도록, 또 행복해지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또한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이 듣고 응답하실 것을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기억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적군에게 한치의 땅도 내주어서는 안 된다. 그 은혜를 의지해서, 오늘도 이 가정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ree Ways We Fight for Our Family번역: 장성우
가정
결혼생활
믿음
기도
군사
마귀
은혜
고난,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무게
by Vaneetha Rendall Risner
2019-06-04
하나님은 왜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시고 다른 기도에는 침묵하실까? 하나님은 왜 누군가에게는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 왜 특정 도시에는 재앙을 내리시는데 다른 도시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허리케인 플로렌스가 노스캐롤라이나의 동부를 완전히 휩쓸어버린 이후로 나는 이러한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나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중심에 살고 있었는데, 당초 예보와는 달리 우리 지역은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왜 참사를 당하지 않았는지, 왜 광풍이 이 지역을 피해 남쪽으로 갔는지 알아. 그때 내가 하나님께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기도했거든.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던 거야.”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7:7). 하지만 내 친구의 논리를 따른다면, 동부 사람들은 그 순간 아무도 기도하지 않았다는 의미인가? 그들은 도시를 구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생명을 잃었고, 또 누군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재산과 집을 잃고 말았다.기도와 응답의 상관 관계신앙인의 입장에서 이러한 자연 재해를 통해 어떤 영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모든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분일까? 여러 해 전에, 암으로 투병 중이던 목회자가 기적처럼 암세포가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고 간증했다. 그 목회자는 즉시 교인들에게 자신의 완쾌 소식을 전했는데, 그때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목사님이 치유받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아니, 하나님은 치유해 주셔야만 했어요. 왜냐하면 많은 성도들이 기도했거든요.”그 목회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준 것에 감사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치유해 주셔야 할 어떤 빚을 가진 분이 아님을 알았기에 마음이 적잖이 무거웠다고 한다. 진정으로 기도하지만 아직 치유 받지 못한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다. 바울도 이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그가 약한데서 온전하여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바울의 '가시'를 치유해 주지 않으셨다(고후 12:9). 내 얘기를 조금 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내 아들 폴을 아주 일찍 하늘 나라로 데려가셨다. 우리는 기도하며 금식했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아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아내의 품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우리 부부는 우연히 한 형제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아들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얘기를 오해 없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부부는 아이들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 생명을 위해 기도했고 모두 건강하게 태어났죠.” 우리는 당혹스러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베드로를 구출하신 하나님하나님은 언제, 왜 우리를 고난에서 구출하시는가? 사도행전 12장의 말씀을 떠올려보자.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 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중략]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1-3, 5) 야고보를 죽인 헤롯이 베드로마저 죽이려고 하던 그날밤, 하나님은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해내셨다. 야보고의 죽음과 베드로의 구출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아끼시던 세 명의 제자였다. 이들은 예수님께 선택 받았고 또 종종 그분과 함께 있도록 허락된 이들이다. 하지만 주님이 부활하신 후, 그들의 삶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펼쳐졌다. 요한은 가장 나중에 죽었고, 베드로는 사도행전 12장에서 보듯이 옥에서 구출되기는 했지만 훗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했다.야고보는 제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순교를 당한 인물이다. 성경은 그 구체적인 정황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다만 헤롯이 야고보를 죽였다고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베드로는 비록 순교를 당했으나 그에 앞서 옥에서 구출을 받았고, 야고보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님이 야고보보다 베드로를 더 사랑하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야고보의 삶이 덜 중요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야고보의 믿음이 베드로의 것보다 약했기 때문일까? 혹시 초대 교회 성도들이 야고보를 위해서 기도를 덜 했기 때문일까? 모두가 하나님의 뜻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그분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이나 길과는 완전하게 다르다(사 55:8-9). 우리는 죽음 이전의 삶에 대해 고민하며 많은 계획을 세우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를 완전하게 넘어선다. 그분은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삶을 그리시고, 이 땅에서 이룰 각자의 사명을 계획하시며, 또한 죽음의 날까지도 결정하신다(시139:1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다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을 통해 제자로서의 야고보의 삶이나 순교자로서의 그의 죽음이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사 46:10). 바로 그 목적에 따라 하나님은 순교를 통해 야고보를 그분의 품으로 부르신 반면(빌 1:6), 그분이 계획하신 베드로의 사명은 아직 이 땅에서 끝나지 않았기에 그를 옥에서 구출하신 것이다(빌 1:24-25).살고 죽는 문제, 또는 위기에서 구출되거나 고난을 당하는 상황 등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나 개인의 신앙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우리의 미래 또한 그분의 보시기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결정될 것이다(롬 8:28, 35-39). 바울은 이 영적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1~23).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이 땅에서의 짧은 삶보다 훨씬 낫고,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이 땅에서 내가 부유하든 가난하든, 힘이 있든 아니든, 화려하든 소박하든,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 안에서 그분이 베푸시는 천국의 은혜를 영원토록 누릴 것이다(엡 2:7). 처벌이 아닌 우리의 고난그러나 이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고난으로부터 건짐을 받은 반면 나는 여전히 애통함 속을 걸어간다는 사실에 종종 좌절하고는 한다. 번영 신학과 거짓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은, 만약 내가 믿음으로 기도했더라면 몸이 치유함을 얻었을 것이고, 내 아들은 이 땅에서의 생명을 연장 보장 받았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아픔이 더 빨리 회복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곧 내 삶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오로지 나의 선택과 의지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그들의 이해는 마치 내가 좀 더 잘하기만 했더라면, 더 나은 결과가 얻었을 것이라는 뜻과도 같다.이러한 주장은 오롯이 나와 남편에게 상처와 환멸을 안겨주었고,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대한 비통한 마음과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우리가 특정 상황에서 마땅히 보여드렸어야 하는 어떤 종교적 행위나 반응이 아닌, 그분의 위대한 자비와 긍휼하심 그리고 계획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단 9:18).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롬 8:31). 그분은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내에게 모든 것을 주기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를 위하신다(롬 8:31).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그러므로 지금의 고난은 형벌이 아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제대로 기도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요구하지 않았거나, 혹은 믿음이 약하거나, 또는 중보자의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분명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언젠가 나와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고난의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또, 그 고난이 바로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무게를 더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고후 4:17).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진정한 복음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분의 모든 백성에게로 향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Just Have More Faith’: How Bad Theology Hurts the Suffering번역: 정은심
영성
영적성장
기도와응답
야고보의죽음
베드로의구출
하나님의뜻
영적원리
처벌아닌고난
절제의 미덕을 키우라
by Don Bailey
2019-05-31
몇 년 전 원예학을 공부할 때, 잡초는 '달갑잖은 식물'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배웠다. 생각해 보라. 잡초도 다른 식물처럼 반짝이는 초록색 잎사귀와 화려한 꽃을 가지고 있다.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식물이다. 그럼에도 잡초에게는 “달갑잖은”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왜 그럴까? 이는 잡초의 급속히 퍼진다는 특성 때문이다. 처음에 잡초는 정원 여기저기서 느긋이 자라난다. 그러다 잘 가꿔진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내가 다 점령해 버려야지”라고 마음먹은 듯 급속도로 영역을 넓힌다. 자만으로 가득 찬 잡초는 정원의 아름다움이 빛나지 못하도록 큰 혼란을 초래한다. 이처럼 이 식물에게는 무엇인가를 지배하려는 성향이 있다. 잡초의 지배적인 성향은 우리 안의 과한 욕구와 무척 닮아 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열망이라는 감정을 심어 주셨고,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닮은 자녀로서 그 열망을 잘 가꾸어 내면의 정원을 건강하게 만들도록 지음 받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음식에 대한 욕구를 주셨고, 이성을 갈망하는 마음도 주셨다. 이러한 본성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울타리 안에서 잘 관리하고 누릴 때 우리의 삶과 영혼을 이롭게 한다. 돈도 마찬가지다. 재물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또한 내면에 존재하는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우리가 위험한 상황으로 뛰어들지 않도록 그 행동을 조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러한 욕구들이 정해진 울타리를 벗어나 마치 잡초처럼 무성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배부르게 먹은 후에도 스스로를 취하게 하는 알코올과 달콤한 디저트에 매번 마음을 빼앗길 지도 모른다. 또한 미모의 여성이 지나가면 보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에 따라 시선을 멈추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두려움과 불안이 너무 거대해진 나머지 당신의 영혼을 완전히 압도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 이렇듯 절제가 부족할 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열망은 복이 아닌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우리를 위협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하다고 일관되게 말한다. 잠언 25장 28절은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라고 말한다. 잠언의 지적처럼, 절제의 성벽 없이 살아가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충동적인 생각과 언어 그리고 행동은 아름답고 좋은 모든 것들을 점령하고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 금욕하며 노력했던 이방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우리 크리스천들은 노력한다고 해서 스스로 영적인 경건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모든 충동과 유혹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절제는 오직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성령의 힘에 대해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성령이 역사하고 있을 때에도 계속 노력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벧후 1:5-6) 더하라고 말이다. 베드로는 절제의 부족이 노동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며, 열매의 풍성함 역시 무너뜨린다고 경고한다. 다시 말해, 절제하지 못하는 습관은 우리의 삶과 영혼을 파괴시킬 수 있다.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성물을 탐하는 아간의 욕심을 생각해 보라. 그는 여호와의 명령에 불순종했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외투와 은 이백 세겔, 그리고 묵직한 금덩이를 탐냈다. 결국 그는 여호와의 명백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물질을 욕심껏 움켜잡았고, 결과적으로 자신과 온 가족에게 엄청난 손실과 상처를 입혔다. 절제의 미덕은 사실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 2012년 펜실베니아대학교에서 실시한 한 연구에서, 응답자들은 24가지의 역량 카드를 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차례로 나열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중 절제는 가장 마지막 자리인, 24위를 차지했다. 놀랄 일도 아니다. 인기있는 어느 대중 노래의 가사는 절제를 버리라고 외친다. “자제력은 필요 없어. 나의 절제를 가져가 [중략] 난 자제하고 싶은 의지도 없고 싸우고 싶지도 않아.” 간음이나 중독 혹은 분노 등 절제하지 못해 벌어지는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저항은 더 이상 일간지의 헤드라인을 차지하지 못한다. 이 시대의 문화는 이제 자기 중심성과 무절제, 그리고 나이키의 십삼 년 된 슬로건인 “일단 해 봐”의 정신을 권장한다.그러나 크리스천은 이러한 자기 선호에 대한 욕구와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유혹이 속삭이는, 다스려지지 않는 욕망을 경계해야 하고 끊임없는 육적인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 즉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 절제가 나 자신의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속이는 대적 마귀의 책략에 저항해야 한다(벧전 5:8). 다스려지지 않는 욕망이 단순히 우리가 타고난 신체적 조건 때문이거나 삶의 여건과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우리가 절제하지 못하여 생긴 결과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욕구나 감정 때문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왜곡된 생각에 매이면, 우리는 영혼 속에 침입하는 죄악의 속삭임에 더욱 쉽게 굴복할 수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한다. 나와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벧전 1:16).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욕구를 절제하여, 욕망의 열매가 아닌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한다(롬 8:13; 빌 1:11).이와 더불어, 절제를 위해 싸울 때 큰 영적 전쟁이 일어남을 기억해야 한다. 스프로울 박사(Dr. R.C. Sproul)는 한 설교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 담배에 대한 욕구를 끊으려 할 때 겪었던 갈등을 솔직히 묘사했다. 그는 흡연 욕구에 지지 않으려 담뱃갑 포장지에 예수님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욕구가 자신의 의지보다 훨씬 강할 때, 그는 양심의 부담을 덜기 위해 담뱃갑을 뒤로 돌려놓은 채 자신의 욕구를 따라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절제를 행하려는 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영적 유혹의 사이에서 심히 갈등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절제를 실천할 때, 나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가고자 애쓰고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자. 또한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메시아께서 “[자신의]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다]”(사 50:7)라고 예언한 것을 기억하자.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돌아서고 싶은 유혹을 능히 거절하셨다(눅 9:51). 우리도 성령의 힘을 의지할 때, 유혹에 힘없이 희생되지 않고 부활의 승리를 기억하며 “넉넉히 이기[는]”(롬 8:37)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절제를 실천할 때, 잡초와 같은 끈질긴 욕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안한 삶으로 몰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젠가 눈부시게 빛나는 생명나무 아래에서 영원히 밝게 빛날 것이다(계 22:1-3).출처: www.ligonier.org원제: Cultivating Self-Control번역: 정은심
생활
감정
절제
잡초
욕구
스프로울
성품
열망
영적전쟁
당신의 자녀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면
by Christine Chappell
2019-05-29
남편과 나는 우리 아이가 어둠에 짓눌린 채 정신적 혼란과 보이지 않는 고통을 겪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경고도 없이 발생한 이 상황으로 인해 우리는 매우 놀랐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초조했다.자녀의 우울증을 개인이 홀로 지는 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가족이 그 충격과 불안을 함께 겪게 된다. 우리 부부도 처음에는 아이가 겪는 아픔이 가족 모두에게 고통이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와 동일한 상황 속에서 “주님, 제가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요?”라고 외치는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에 너무나도 공감한다.나와 남편은 마치 여호사밧 왕처럼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라고 하나님께 외쳤다.우리는 그렇게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른 채 주만 바라보았다.하나님의 돌보심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지친 엘리야를 돌보신 하나님에 관해 설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영혼을 돌보는 모든 사람과 목회자들은 이제 막 시작한 젊은 의사와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 마치 그들이 자기 분야의 명의가 환자를 어떻게 돌보는지 하나라도 놓칠까봐 집중하여 지켜보듯, 우리도 하나님이 곤경에 처한 자녀를 어떻게 돌보시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우리 부부는 아이의 힘든 시간 속으로 들어가 그와 함께 하던 중, 상한 심령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의 그 지혜로운 돌봄을 배운다면, 우울증을 어루만지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1. 신체적 안녕을 간과하지 말라이세벨이 목숨을 위협하자 엘리야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광야로 도망갔다. 그 절망의 한가운데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절규했다(왕상 19:4). 그러자 하나님은 곧바로 그를 쉬게 하고, 음식을 먹이며, 그의 몸을 돌보셨다(왕상 19:5-8). 주님은 엘리야의 신체을 신속히 돌봐야 한다고 여기셨고, 우리는 이 장면에 주목해야 한다. 엘리야가 그 몸을 돌봄 받았듯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아이들 또한 주치의의 의견에 따라 신체 검진 및 각종 검사와 같은 절차가 필요하다. 특히 자해나 자살 시도(혹은 둘 다)의 위험이 큰 위급 상황에서는 아이의 신체적 안전을 위해 응급 서비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2. 영적 안녕을 간과하지 말라하나님이 니느웨 성 사람들의 회개에 자비를 베푸시자, 요나는 화가 나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욘 4:3)라고 외쳤다. 하나님은 깊은 절망에 빠진 요나와 계속 대화하며 그의 괴로움을 다루셨다(욘 4:4-11). 우리 부부 역시 대화를 통해 아이가 우울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자, 잠시나마 그가 얼굴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모는 따뜻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질문을 통해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가 어떠한 경험을 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으며, 동시에 겹겹이 쌓인 슬픔으로부터 자녀가 천천히 벗어나도록 도울 수 있다. 더불어 시편 88편과 같은 애통의 노래도 도움이 된다. 영적 고통에 처한 아이들은 이러한 노래를 통해 그분께 "왜"라고 질문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시 88:14), 더 나아가 하나님께 대항하기보다 자신의 문제를 말하고픈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또한 기독교 상담 단체에 요청하여 우울증에 관한 성경적 자료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3. 기독교 상담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라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불평하자 모세는 그 영이 꺾인 채 자신의 무거운 짐에 대해 하나님께 토로했다(민 11:11-15). 그는 민족을 이끄는 막대한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즉시 나를 죽여” 달라고 호소했다(민 11:15). 이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체적, 영적 필요만큼 절실하게 필요했던 한 가지, 바로 위기를 관리할 도움의 손을 붙이셨다. 즉, 존경 받는 칠십 명의 연장자를 모아 그들이 모세의 짐을 나누어지도록 일하신 것이다(민 11:16-17).하나님의 명령을 통해 모세가 신앙의 리더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자녀의 회복을 도울 신앙적 상담사의 지원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이때, 그 상담사가 복음 중심적 상담을 진행하고, 성경 기반의 돌봄을 지향하며, 전문 자격증을 갖추었는지 등을 알아보아야 한다. 아이가 사회적 고립, 절망, 자해 충동, 혹은 두 주 이상 지속되는 우울 감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더는 늦추지 말라. 즉시 교회에 연락하여 교회 내 전문 기도교 상담사를 찾거나 관련 기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구하라.4. 신앙 공동체의 지원을 얻으라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느꼈을 깊은 슬픔에 대해 생각해 보라. 누가는 예수님의 영이 너무 힘겨워진 나머지, 그분의 땀이 마치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았다고 기록했다(눅 22:44).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증상을 혈한증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극한 정서적 괴로움을 겪을 때에 발생한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을 위해 하늘의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이 갈보리 여정을 걸어가도록 힘을 주셨다(눅 22:43).이와 같이, 실의에 빠진 우리 아이들도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그분을 신뢰하고 용기를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늘로부터의 힘을 공급받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신앙 공동체에서 또래들과 교제하며 믿음을 키워가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속할 공동체의 리더들과 가깝고 긴밀하게 협력하여 이 과정을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나와 남편은 아이가 사회적 환경에 단 한 발이라도 내딛을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계획을 세웠고, 또래와의 공동체에 안정적으로 합류할 때까지 순차적으로 지원했다. 우리는 또한 중보 기도, 격려 카드, 가족 동반 행사 등을 통해 소그룹이 제공하는 다양한 유익을 얻었다. 빠른 회복은 없다우리 가족이 회복되기 시작한 지 수개월이 지났다. 아이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좋아지고 있다. 실의에 빠진 자녀가 단번에 회복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아이를 향해 처음 지녔던 긍휼의 마음이 어느새 조급함과 괴로움으로 변질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부모로서 자신의 마음도 잘 살피고 지켜내야 한다. 이 여정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즉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겸손하고 신실한 사랑을 품도록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다(엡 5:1-2). 우리는 자녀의 우울증을 ‘고치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그 우울증을 통해 아이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하나님 안에서 양육하도록 부름받았다(살전 5:14).정신 건강과 관련된 아픔은 원래 복잡한 양상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편견까지 더해져 그 치료의 시기나 방법이 간과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각 인물의 상황에 맞도록 각기 다른 방법으로 그 슬픔을 다루셨다. 따라서 우리도 그분이 보여 주신 다양한 방법으로 홀로 아파하는 아이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위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인간은 몸과 영혼 모두를 가진 존재이고, 또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필요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파하는 영혼을 하나님처럼 돌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어려운 부르심 앞에서도 소망을 갖고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여,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통해 도울 힘을 얻게 하소서!”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alking Our Children Through Depression: Four Ways We Imitate God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우울증
찰스스펄전
신체적안녕
엘리야
영적안녕
요나
기독교상담가
신앙공동체
독생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증거하는 우리의 미약한 언...
by 전재훈
2019-05-24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신을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실 때(출6:3) 엘로힘이 아닌 ‘엘샤다이’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 엘로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이지만 엘샤다이는 ‘뜻을 정하면 그 뜻을 이룰 능력이 완전한 자’라는 의미다. 바울은 전능의 하나님을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엡1:11)로서 소개했다. 뜻을 정하기만 해도 그 뜻을 온전히 이루실 수 있는 전능의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아들의 생명을 걸었다면, 그 뜻은 결코 실수나 실패나 포기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롬5:8)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이든, 원수이든, 혹은 연약하든 상관없이 완전하게 넘쳐 흐른다. 그 사랑에는 결코 실수나 실패나 포기가 없다. 전능의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성도는 자신의 환경이나 느낌, 혹은 판단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성경의 가장 핵심구절을 뽑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주저 없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뽑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해온 사람이라면 성경의 첫 구절인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창 1:1)라는 말씀은 외우지 못할지라도 위의 말씀은 망설임 없이 읊을 것이다. 그 정도로 요한복음 3장 16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구절이다. 흔히 이 말씀을 ‘일삼이사’(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부르며 비밀번호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토록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 말씀은 바울이 언급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원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구절 속에 담긴 ‘독생자’라는 표현은 약간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그 예로 하나님은 아버지고 예수님이 아들이니, 성령님을 어머니로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보다 먼저 계셨고 지혜와 능력 역시 더 앞선 분이라고 이해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큰 신으로, 예수님은 작은 신으로 부르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예수님을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그 존재의 기원이나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결코 열등한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고, 우리는 이를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분이 곧 하나님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는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다’는 유사본질이 아니라 ‘두 분이 같은 분’이라는 동일본질이다. 두 분이 완전하게 같은 분이라면 왜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불렀을까? 조금은 외람된 표현이지만 ‘제 2의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바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두 분이 쌍둥이라면 거룩한 형 ‘성형 하나님’과 거룩한 동생 ‘성제 예수님’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표현할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남성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것도 인상 좋은 백인 할아버지 정도로 상상한다. 한 때 베스트셀러였던 윌리엄 폴 영(William P. Young)의 소설 ‘오두막’은 하나님을 뚱뚱한 흑인 여성으로 묘사하여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남자거나 혹 최소한 어머니는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비록 성경은 하나님을 어머니로 부르지 않지만, 성경 전체의 여러 부분에서 그분을 여성적인 언어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엄마’로 부르지 않고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엄마’는 본능적 언어에 해당한다. 아이들은 누구를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자신을 낳지 않았어도 자신을 돌봐주는 이를 ‘엄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빠’는 학습적 언어라서 누구를 ‘아빠’로 불러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아빠는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가치관과 생각을 가진 분인지 배워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를 배워서 알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배워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엄마’로 부르기보다 ‘아빠’로 불러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왜 '독생자'라고 부를까?요한복음 3장 16절은 일삼이사, 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증거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독생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깊은 관련을 가진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공자가 유교를 만들 때 ‘인(仁)’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았다. ‘인’은 ‘어질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씨’라는 의미도 가졌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씨’가 무엇인지를 관찰하는 데에서 유교가 시작되었다. 결국 공자는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파악했고, 국가를 통치할 이념 역시 이 관계에서 시작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본질을 '효'라고 정의하여 ‘부자유친’의 정신을 강조했고, 이를 이웃으로 확장하여 ‘예의’를 만들고, 국가로 확장하여 ‘충성’의 개념을 확립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존재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목숨일지라도 아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어 줄 수 있을 정도이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헌신은 ‘살신성인’ 혹은 ‘희생정신’이라고 표현하며 훌륭하다고 여기지만, 타인을 위해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는 아버지에게는 미쳤다고 비난할 망정 절대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는다. 그만큼 아들의 생명은 결코 내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아들의 생명을 내어 준다면, 그는 단단히 미쳤거나 혹은 상대를 미치도록 사랑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신 사실은 그분이 미치신 것이 아니라면 세상을 미치도록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당신이 하나님께서 미치도록 사랑하신 그 ‘세상’이다. ‘독생자’는 단순한 ‘아들’의 의미를 넘어선다. 아들보다 큰 개념이 장자(큰아들)이고, 그보다 큰 개념이 독자(외아들)이다. 그래서 과거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군대에 갈 때 ‘부친이 사망한 독자, 부모가 60세 이상인 독자, 2대 독자’는 방위병이 되었고, 3대 독자는 군 면제를 받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그 위대한 사랑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담아 낼 수 있는 인간의 미약한 언어가 바로 ‘독생자’라는 표현인 것이다. 나는 쌍둥이 남매를 키우는 아빠다. 아들이 내게 유일한 자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들 대신 죽을 수는 있어도 아들을 죽게 내어 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 사랑의 크기와 넓이, 깊이와 높이는 끝이 없을 듯하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실 그 어떤 표현도 ‘독생자’라는 말보다 그분의 위대하고도 절절한 사랑을 더 근접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나님은 나와 당신을 사랑하신다. 만약 이 사랑의 크기나 넓이를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 어떤 표현일지라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한없이 부족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언어의 특성상 그 사랑을 표현할 가장 위대한 단어가 ‘독생자’이기에 ‘독생자를 주셨다’라고 하셨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고 믿는다.당신이 만약 하나님의 사랑을 벅차게 느꼈다고 할지라도 이는 당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 중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이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의 한계 탓에 그 이상을 못 보는 것일 뿐,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훨씬 크고 견고하게 또 신실하게 당신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영성
묵상과기도
독생자
하나님의위대한사랑
증거
엘샤다이
하나님의본체
하나님과동등
엄마에게 신학은 중요하다
by Christina Fox
2019-05-22
신학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낯선 언어, 수 세기 전에 쓰인 먼지 쌓인 책, 아니면 혹시 길고 지루한 설교가 떠오르는가? 신학 서적과 일상 생활을 위한 실용 도서 사이에서 당신은 어떤 책을 선택할까? 보통의 엄마라면 신학을 공부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일상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란 느낌을 갖기에 충분하다. ‘지금 이 상황에 신학은 무슨 신학...’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엄마라면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고 힘들다. 어떻게 해야 자녀들이 깨지 않고 밤새 편안히 잘지, 쑥쑥 크는 십대 자녀에게는 어떤 음식이 좋을지, 수시로 짜증내는 어린 자녀를 어떻게 달랠지 등등에 관한 공부를 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엄마로서 일상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자기 싫어하는 자녀들과의 잠자리 전투, 끊임없이 생기는 근심, 마트에서의 장보기 등등 이 모든 것을 잘 하기 위해서 엄마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신학이다.신학이란 무엇인가?신학(theology)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theos'와 말씀 또는 지식을 의미하는 'logos'에서 왔다. 그러니까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체계, 더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연구라는 의미이다.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그 분은 우리의 창조자, 지키는 자 그리고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 공부 그 자체는 첫 걸음에 불과하다. 우리는 신학을 일상의 삶에 적용하는 단계까지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신학이 단지 목회자나 신학생들게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된다.하나님을 향한 믿음, 다시 말해 그 분이 누구인지, 그 분이 하신 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에 비추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단순한 연구와 토론만을 위함이 아니다. 칭의, 속죄 그리고 선택적 구원과 같은 신학적 개념은 삶의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기독교 교리가 바로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의하고, 또 그 정의 안에서 내가 빚어지기 때문이다.1) 아이는 숨넘어갈 듯 우는데 의사가 자꾸 이런저런 검사만 하자고 할 때, 이런 순간에서조차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게 바로 신학이다.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이 당신을 잊을 리가 없다(시 121:3-4). 모든 것은 그의 통제 아래에 있으며,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은 놀라거나 당황하시지 않는다. 어떤 순간에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고, 지금 그 분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일하고 계심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신학이다(롬 8:28)2) 자녀에게 분노의 말을 쏟아냈을 때,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나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도 바로 신학이다. 또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살았으며, 결코 불친절한 적이 없었고, 항상 사랑을 베푸셨다는 사실도 말해 준다. 더불어, 신학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 분의 의로움을 통해서 나 역시 의로운 자가 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알려 준다(고후 5:21). 그 예수님이 지금도 내 안에서 일하고, 우리를 회개하도록 인도하며, 선한 일을 시작하셨듯이 그 일을 온전하게 완성하실 것을 알려주는 것도 신학이다(빌 1:6).3) 당신의 가치가 엄마라는 역할에만 제한됨을 느낄 때, 신학은 엄마라는 정체성까지도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내가 엄마로서 얼마나 성공적인지, 자녀들이 얼마나 모범적으로 행동하는지, 아니면 집이 얼마나 깨끗한지가 엄마로서의 그리고 나로서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는다(시 20:7-8). 나의 가치와 정체성은 오로지 내가 하나님게 구속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사실 안에서만 결정된다(요 1:12).4) 기절할 것 같이 피곤할 때, 자녀는 아픈데 집에 아무도 없어 혼자 힘으로는 이동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순간, 내게 필요한 은혜를 주시는 이가 바로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이 신학이다(고전 10:13). 즉 나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고,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신학이다(요 15:5). 그러므로 신학은 나의 안식과 희망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며, 그분이 나를 지키신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참 희망, 참 지혜, 참 평안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해결책, 내일 당장 적용 가능한 빠른 해결책, 일이 잘 풀리도록 도와줄 것만 같은 인간적인 해결책은 가정을 돌보는 데 지친 엄마의 눈에 무척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살림을 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매일 직면하는 도전들이 결코 만만치 않기에 신선한 아이디어와 새로운 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잠깐의 시간이라도 나면 우리는 그러한 정보를 얻는 일에 시간을 보낸다. 실용적인 책과 블로그 기사를 읽고, 쓸만한 팁이 삶의 불편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책이나 정보들이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이는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영원한 도움으로 남지도 않는다. 해답은 바로 신학이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그가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매일의 삶에서 필요한 사라지지 않을 참 희망, 참 지혜 그리고 참 평안을 가져다 준다. 기억하라. 해답은 신학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 즉 일상에서의 신학이 우리가 엄마로 성숙해지는 그 과정과 혼란 속에서 든든한 닻이 되어줄 것이다.엄마들이여, 신학은 목사, 교사, 학생, 그리고 교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신학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신학은 인생의 다음 단계를 위해 필요한 초석이 아니다. 엄마로서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바로 이 순간, 지금 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신학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Moms Need Theology Too번역: 무제
가정
양육
신학
참희망
참지혜
참평안
그리스도
엄마역할
성숙
약함과 싸우다 지친 그대에게
by Scott Hubbard
2019-05-16
대학교 신입생이 되고 몇 주 동안, 심각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캠퍼스 도서관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엄청난 속도로 페이지를 넘겨 가며 책을 훑어보곤 했다. 아마 어느 누구라도, 전공 도서를 그처럼 빨리 살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누구라도, 그렇게 머리에 남는 것 없는 독서를 해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아마 많은 이들이 이런 노력을 해 봤으리라 생각한다. 나 역시 보통의 독서 수준을 가진 여느 학생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속독법을 익혀 보려고 부단히 애써 본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그렇게 되듯, 곧 빨리 뛰는 일을 포기하고 결국에는 천천히 정독하는 원래의 페이스로 돌아왔다.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그 몇 주동안의 분투는 사실상 더 큰 전쟁 속에서 일어난 작은 접전 중의 하나와 같았다. 여기서 말하는 더 큰 전쟁이란, 훨씬 더 오랜 시간을 두고 싸우는,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바쳐 싸울 수밖에 없는 전쟁을 의미한다. 다름 아닌, 자신의 ‘약함’과 매일 싸우는 전쟁을 의미한다.약함과 붙어 싸우는 전쟁에서나는 ‘약함’이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또는 우리가 이르고 싶은 상태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연약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죄’와 달리, 약함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킬 때 함께 변화되지 않는, 아니 그럴 필요가 없는 기질을 가리킨다.예를 들어 우리는 스스로 바라는 만큼 똑똑하지 않고, 운동에 뛰어나지 않으며, 외모가 빼어나지도 않고, 음악에 소질이 있지도 않다. 또한 대중 앞에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재주도 없고, 재치도 부족하며, 일에 있어서 탁월하려면 아직 멀었고, 리더십도 약하다. 간혹 부단한 노력 끝에 이런 약함을 극복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대체로는 그 약함이 단단한 바위의 표면처럼 변함 없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이를 떨쳐 내려고 온갖 시도를 다 해 보지만, 많은 경우 거의 변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약함은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정해진 만큼의 몫이기 때문이다.그러니 매일 약함과 투쟁하는 일도 이상할 게 없다. 학창 시절에는 그로 인해 놀림을 당하는 일이 다반사고, 최악의 경우엔 내 인생에 꼭 한번 이르고 싶은 길을 가려다 끊어진 다리를 만난 듯한 낭패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내 몸의 가시를 자랑하기보다(고후 12:9-10), 대부분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자하여 그 가시를 뽑아내려고 한다.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해, 우리는 승산이 없는 그 싸움을 멈추어야 한다. 특히 크리스천이라면 말이다. 세상의 많은 이들은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약함과 싸우려고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약함에 대해 기쁘게 환대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두렵고 기이할 정도로 약한 나를 지으시다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약함으로 둘러싸인 세상 한복판에 보내셨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그분이 모세에게 물으셨다. 모세는 스스로의 언변이 매우 약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으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출 4:11). 이는 우리의 입이나 귀나 눈에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약함이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모태에 지으실 때부터 이미 그분이 다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원래 두렵고 기이할 정도로 약하게 지어진 자들이다.우리가 출생할 때 가지고 나온 약함은 다른 모습들이 놀랍게 변화되는 중에도 거의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구속하신 교회는 어떻게 보면, 서로의 불평등한 차이에서 그 영광이 나타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사람의 약함이 다른 사람의 강함으로 보완되는 장소이다(롬 12:3-5). 하나님은 우리 중 누군가는 발로, 누군가는 손으로, 또 누군가는 눈이나 입으로 지으셨다. 따라서 입으로 지어진 자가 걷기 힘들어하고, 눈으로 지어진 자는 말할 때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고전 12:14).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이크 앞에서 떠는 사람이 있다. 또 행정에 탁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인 가족의 이름도 까먹는 사람이 있다.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약함과 싸워 이겨 보려는 노력이 별 성과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에 우리는 믿음보다 불평을 표출할 때가 많다. 불평은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내 삶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이루고자 수년을 낭비하기도 한다.전쟁을 그치고 화해하라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전쟁을 포기하고, 백기를 들고, 협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약함과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이다.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수개월을, 아니 수년을 이 약함과 싸우며 극복하려고 애써 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하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게다가 기뻐하면서 받아들이라고(고후 12:10)?’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고자 그 약함을 주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자신을 위해,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다고 착각하며 세운 잘못된 기준을 내려 놓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에게 자유와 평강이 찾아온다. 바위처럼 무거운 기준을 지고 수년을 버텨온 자가 그 돌덩이를 던져버릴 때 느끼는 홀가분함이란 어떠하겠는가! 신참내기 엄마가 아이 다섯을 키우는 엄마처럼 양육을 척척 해내야 할까? 마찬가지다. 베드로가 요한처럼 되기를 관두고, 요한이 베드로와 같이 되기를 그만둘 때, 얼마나 큰 평안이 찾아왔겠는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 우리의 영광은 계속해서 강해지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강함과 약함을 막론하고 우리가 이를 수 있는 한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전심으로 그분의 의를 구하는 데에 있다.그분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살라이처럼 다른 이들에게 주어진 은사를 나도 가져 보겠다는 집착을 내려 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전 12:4-7). 발은 손처럼 되려는 노력을 그칠 때 똑바로 걸을 수 있게 된다. 눈은 입처럼 말해 보려는 망상에서 벗어날 때에야 앞을 훤히 보게 된다.우리가 가진 문제의 핵심이 여기서 드러난다. 우리가 치르는 약함과의 전쟁은 바로 우리가 잘하고 있는 일을 얕볼 때 시작된다. 우리는 잘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일이 별 볼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어쩌면 내가 하는 일이 정말로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무대 위가 아니라 청중도 모르는 음향실 안에서 일할 수 있고, 누군가는 강의실에서 가르치기보다 교내의 복도를 청소할 수도 있다. 아니면, 중요한 회의를 주관하기보다 뒤에서 서류 정리를 하고 담당할지도 모른다. 이런 일들을 잘 해내는 은사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마련이다.그러나 진정한 만족이란,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한 은사나 기술을 가졌다고 찾아오는 게 아니다. 참된 만족은 내게 주어진 은사를 감사함으로 받고,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하며, 하나님이 그 미약한 섬김을 통해서나마 그분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시기를 기도할 때 찾아온다(벧전 4:10-11). 그러므로 우리가 잘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개의치 말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약함 중에서도 그분을 높일 때, 비로소 참된 만족이 우리에게 찾아온다(고후 12:9-10).나를 가르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가 겸손한 마음으로 지은 시, ‘엘릭시르’(The Elixir)의 한 연을 마지막으로 음미해 보고자 한다.“나를 가르치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여모든 일 가운데 당신을 볼 수 있도록무슨 일을 하든당신을 위한 일처럼 할 수 있도록”바로 이런 고백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람, 그래서 그분의 도우심을 따라 맡겨진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이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음이 한없이 낮아지는 그 날, 세상의 어떤 칭찬과 박수갈채라도 그분의 음성에는 비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End Your War Against Weakness번역: 장성우
영적
영적성장
약함
기질
환대
창조
선한목적
은사
집착
조지허버트
성경이 말하는 결혼
by David Mathis
2019-05-15
1.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태초에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그리고 남성과 여성으로서 영광스럽게 서로 보완할 수 있도록 다르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본질적으로 중성적인 인간이 아니라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다. 우리는 모두 몸의 모든 세포까지 남성 아니면 여성이다. 우리는 다르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놀랍도록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다름은 남자를 여자보다 더 낫거나 여자를 남자보다 더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함께 할 때 더 나은 모습이 되게 한다.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동산 안에 두시고 삶에 대한 도덕적 비전을 그에게 주시면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라고 하셨다. 창조가 진행되는 내내, 매일 창조 후에,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이 좋다고 반복하여 선언하셨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드시고는 매우 좋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남자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셨다. 적어도 첫 번째 남자는,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는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2. 창세기 2장 24절“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하나님은 첫 여자를 만들고 남자에게 이 놀라운 선물과도 존재를 함께 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결혼이라고 부르는 제도를 만드셔서 두 사람이 하나의 새로운 독립체가 되게 하셨다. 즉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는 부모와 자녀 관계보다도 더 기본적인 관계이다. 남자는 그의 부모를 떠나서 그의 아내와 합하고, 여자도 아비의 집을 떠나서(시 45:10) 남편과 함께 새 가족을 세우게 된다. 남자에게 이제 아내가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기본적으로 헌신해야 할 대상이 되고, 또한 여자에게도 이제 남편이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기본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하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남자는 동산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는 경계심을 허물어 뱀이 아내의 귀에 속삭이게 했고, 그녀는 속임을 당했다. 그 후,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들었던 남자는 이제 자신의 뜻대로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이 타락하고 저주 받은 세상 속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인 결혼은 더이상 심한 고통과 어려움 없이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창 3:16).3. 마태복음 19장 6절“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수 천년 전의 예수님 말씀으로 가보자. 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점령하고 남편과 아내가 종종 서로에게 큰 어려움을 느끼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하시며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강화하신다. 죄가 결혼 관계를 위협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설계를 뒤집지는 못한다. 사실 결혼은 죄를 견디도록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결혼의 의미는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하나가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하나님은 특히 남자를 남편이라 부르고 첫 번째 남자가 실패한 부분에 충실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남성이 아내와 함께 거룩한 열심으로 결혼을 지키고 보호하라고 하신다. 자기 자신의 죄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로부터 말이다. 이제 아내의 허물이 남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남편의 잘못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는 “둘이 살아 있는 한” 서로 언약 관계 안에 있다.그들은 피치 못하게 서로 죄를 지을 것이다. 어쩌면 결혼식 당일이 지나기도 전에, 신혼 기간이 끝나기 전에 서로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다. 죄는 어떤 방식으로든 조화로운 결혼 관계를 위협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려운 시기에 그들이 함께 연합하도록 결혼 언약을 설계하셨다. 결혼 관계 안에 힘든 시간이 없을 수는 없다. 결혼은 바로 그 때를 위해 만들어졌다. 언약은 대개 곤란이 없을 때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장 심한 곤란이 있을 때를 위한 것이다. 4. 에베소서 4장 32절“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이 구절은 나의 12년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말씀일 것이다. 많은 결혼 생활에서 친절은 가장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결혼 언약 안에서 지켜야 할 경계선과 의무 때문에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친절히 대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삶을 더 힘들게 배우자의 고집을 비난하고 싶은 충동과 유혹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살펴보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비열함이나 멸시가 있을 곳은 없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다듬어 가는 일, 힘든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는 일, 때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 받는 일은 그분의 비전 안에서 매일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비열한 행위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그들을 인내와 친절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이 함께 사는 삶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분의 백성에게 친절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서로에게 친절”하기를 추구하라.5. 골로새서 3장 19절“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하나님이 남편에게 특별히 명하신 것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단지 우러나는 애정만은 아니다. 그것은 애정 그 이상이다. 그것은 충성과 희생의 행위이다. 최악의 순간에 남편은 수동적이거나 반대로 강압적이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서 필요로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남편에게 명하신 것은 온유함이지 강압이 아니다. 그리고 능동성이지 수동적인 나태함이 아니다. 즉, 하나님은 남편에게 온유한 능동성을 요구하신다. 온유함은 약함이 아니다. 온유함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다. 온유함은 더 훌륭한 성숙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영에 의해 길러지는 칭찬할 만한 힘이다.결혼은 우리의 삶을 더 쉽게(혹은 더 어렵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더 도전하게(더 낫게) 만들려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삶의 은총을 상속받은 사람이다. 아내를 이해하면서 함께 살고, 그녀를 특별히 존중하고 돌보라고 하나님은 남편에게 명하셨다(벧전 3:7).6. 골로새서 3장 18절“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하나님은 결혼 관계 안에서 남편을 인정하고 그가 사랑으로 행하는 이끔을 받으며 더불어 남편을 돌보도록 아내를 부르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내로 하여금 모든 남자에게 섬기게 하려 하심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오직 자신의 남편만을 섬기라고 하셨다(엡 5:22; 딛 2:5; 벧전 3:1, 5).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복종은 절대적인 복종이 아니다. 골로새서 3장 18절은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라고 말한다. 즉, 아내가 남편에게 하듯이 궁극적으로 섬기고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남편이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며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희생할 때,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인정하고 힘을 북돋아 주며, 그녀 없이는 절대 가능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남편이 되게 할 때, 남편과 아내는 함께 결혼 생활을 잘 세워갈 것이다. 경건한 섬김은 수동적이거나 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만으로 가득한 현대인들은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때 행하는 바로 그 섬김이다.7. 에베소서 5장 32절“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마지막 구절이지만 가장 좋은 말씀이다. 하나님이 결혼을 비밀이라고 하신 말씀은, 결혼이 혼동스럽고 수수께끼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그 의미의 깊이를 알기 어려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수 천년 동안 결혼의 진정한 의미가 비밀처럼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제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 및 부활로 인하여 결혼의 의미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의미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밀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비밀은 이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 때, 왜 서로에게 언약하는가? 하나님은 왜 결혼 언약을 정하셨는가? 인간 사회를 왜 결혼 언약 위에 세우셨는가? 아들을 보내기 수 천년 전에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삶 속에 예수님과의 언약을 가리키는 신호를 심어 주셨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하여 그분의 아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결혼을 설계하셔서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십자가 사역을 통한 그분과의 언약 관계를 느끼고 경험하게 하셨다. 결혼은 예수님이 그분의 백성인 그분의 신부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주신 사실을 상징한다. 남편은 취함으로써가 아니라 줌으로써 아내를 인도하라고 부름 받았다. 또한 남편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특권을 주장하지 않고 애정과 충성 그리고 행동으로 신부를 사랑하며, 이를 위해 더 많은 책임을 지는 남편이다.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결혼의 궁극적인 의미다. 이것이 크리스천들이 언약 속에 살아가며, 또 다가올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기다리며 이 세상에 보여 주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결혼 이야기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Story of Marriage in Seven Verses번역: 정은심
가정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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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마태복음
에베소서
골로새서
희생
예수님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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