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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겪을 때 나를 붙잡아 준 성경 말씀
by Paul Tripp
2019-05-14
아내는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4년 전 내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여 두렵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때, 내 아내 루엘라는 내 곁을 절대 떠나지 않았다. 정기 회진 시간에는 나 대신 의사들과 논의하고, 내가 직접 인사할 수 없는 문병객들을 친절하게 맞이해줬으며, 매일 밤 의자에 앉은 채로 내 옆에서 잠드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했다.경련이 일어나거나, 고통이 심해지거나, 혹은 간호사가 약 때문에 나를 깨워 정신이 들 때면, 언제나 눈 앞에 아내가 있었다. 눈 뜨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운 아침에도 아내는 나와 함께 있었으며, 눈물이 흐를 때는 말없이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내가 좌절을 느낄 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람도 루엘라였다.입원실에서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고통을 당하던 그 시간에 내가 가장 많이 들었고 또 내게 가장 힘이 되었던 말은 “여보,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이곳에 계세요”였다.큰 소망의 선물 그 때 이후로, 가장 어둡고 약한 순간에 신실한 믿음과 사랑을 베푸는 아내의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고, 오직 은혜로 우리 삶에 찾아오셨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내 안에 계신다.우리는 매일의 삶을 위한 신학 체계나 다른 어떤 지혜가 아닌 큰 소망을 의지한다. 그 소망은 신실하고 전능하시며 또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꺼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분과의 동행은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는 모든 이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더 큰 선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 그분 자신보다 더 달콤하고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분이 곧 나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선물이다.하나님이 우리 삶에 어려운 일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이해한다고 해서 소망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굳세게 견뎌낼 것이라는 믿음이 소망을 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소망은 의사나 변호사, 혹은 목회자나 가족 또는 친구에게 있지도 않다. 내 몸의 회복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생각이나 사물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순간의 임시적인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신실하고 은혜로운 하나님이다. 다시 기억해야 할 두 구절어쩌면 당신은 이 두 구절을 수없이 외웠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번 이 말씀에 귀기울여 보기를 바란다. 내 소망을 두었던 무엇인가가 무참히 깨져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하는 이 말씀만이 참되고 영원하며 견고한 소망을 제공할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분의 사역을 위임할 때 이 말씀을 하셨음에 주목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이 파송될 세계와 그들이 당면할 고난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위임 명령의 마지막에 이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더하셨던 것이다.예수님은 그들이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하고, 또한 담당해야 할 임무가 무척이나 고단한 일임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제자들이 반대와 오해, 비난과 거부를 반복적으로 겪게 될 것을 알고 계셨다. 심지어 쫓기고 옥에 갇히며, 기소당하고, 구타당하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생명을 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험한 고난을 홀로 당하도록 놓아두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고난을 견디도록 하지 않으셨고, 그들이 스스로의 지혜를 의지하도록 두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분께 충성하며 고난을 당하는 자들과 항상 함께 하겠다고 보증하셨다. 다시 말해 그분은 제자들을 험한 세상으로 보낼 때 홀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예수님 자신을 주셨다.“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 1:5).이 약속은 성경에 여러 번 나온다. 하나님의 자녀 혹은 공동체 전체가 힘들거나, 새로운 환경에 처하거나, 혹은 어렵고 저항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계획하신 장소와 고난의 상황으로 인도할 때,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던 모습을 기억해 보라. 상황이 얼마나 어렵고 그들의 대응이 얼마나 적절한지와는 상관 없이,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다. 너희를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하신 그 말씀은 고난을 당하는 모든 이들을 보호하시겠다는 의미심장한 선언이다. 가까이 계신 주님형언할 수 없는 은혜로 하나님은 당신 안에 거주하며 또한 결코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삶의 여정에는 감정적이고 영적인 기복이 존재하고, 좋지 않은 날도 있으며, 투쟁이 계속되거나 무너질 때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절대 떠나지 않으신다는 그 약속이다.복음의 진리가 당신으로 하여금 예배드리고 안식하며 찬양드리게 하라. 그렇게 할 때에 이 땅에서의 어려움은 당신에게 궁극적인 해를 가하지 못할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wo Verses Held Me Through Suffering번역: 정은심
영성
영적성장
큰소망
하나님의임재
고난
복음의진리
함께하심
영적고통
약속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회개의 모범
by Irene Sun
2019-05-08
예수님은 하지 않았지만 부모가 해야 하는 일 한 가지를 찾는다면 그것은 회개이다. 예수님은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으셨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회개는 새 생명이 탄생할 때의 첫 호흡과 같이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요소이다(사 30:15). 새로 태어나기 위한 첫 호흡이 회개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모두는 이렇게 저렇게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경향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다.세상이 교만을 조장할 때, 빛과 소금을 자처하는 우리는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친다. 그런데 정작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내가 속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모든 관계에서 경외와 존엄(체면)을 유지하도록 배웠기 때문에. ‘체면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체면을 지키려는’ 충동에 매일 씨름하게 된다. 특히 아이들 앞이라면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더더욱 애를 쓰게 된다. 자녀에게 존중을 받으려는 갈망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서양 문화권에서의 사과는 솔직함과 취약함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동양 문화권에서의 고백과 사과는 본질적으로 수치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동양 문화권의 부모들은 ‘회개’도 하지 않고 직접 사과도 하지 않는 경향이 높다. 자녀에게 회개의 모범을 보이려고 하기 보다는 수습하려는 모습에 더 치중한다. “밥 먹었니?” “배고프니?”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다.” “지난 밤에 잘 잤니?” 이러한 말들은 화해를 제안하는 다양한 버전의 제스처이다. 체면 잃기, 그리스도 얻기지난 가을 학기 첫 날에, 우리 아들의 선생님은 준비가 몹시 미흡했다. 그녀는 학기가 시작되었는데도 아직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 그 선생님이 바로 나다.오전 열 시까지, 우리 집은 엉망이었고 불안한 마음이 극에 달해, 나는 학교 일을 잠시 접어두고 아이들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님 앞에 회개해야 했고, 또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엄마가 잘못했어. 내가 오늘 미처 준비를 못했다. 나를 용서해 줄래?”라는 말이 목구멍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나의 육적인 마음이 저항했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싶었다.회개는 마치 구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이들 앞에서 내가 아이들의 존경을 잃고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양 문화권에서 이러한 느낌은 우리 의식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아이들 앞에서 나의 망가진 모습을 드러낸다는 생각과 뉘우치는 마음을 보여주는 일은 나의 자존심을 뭉개버리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이 일은 그런 부모를 은혜의 길로 이끄는 훌륭하고 필요한 행위이다.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으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크리스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회개의 길을 가르치도록 하기 위하여 그 분을 사용하신다. 이런 방식을 통해 고집스럽던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의 그릇이 된다. 회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학기 첫 날 하나님이 계획하신 수업이었다. 나의 회개는 그 분이 계획하신 각자 물건을 가져와서 발표하는 수업 활동이었다.아버지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기꺼이 체면을 잃으려 하는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 자기의 체면을 지키려는 자는 잃을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체면을 잃는 자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될 것이다.훈육으로서의 회개우리 삶 전체는 마치 시온산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 것과 같은 회개이다. 우리는 죄라는 중력, 육적인 삶의 무게, 그리고 죄악된 갈망에 대항하며 올라가야만 한다. 한가지 죄가 떠올라 그것을 고백해보지만 이내 수많은 또 다른 죄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 일은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정상을 향해 또 한 발자국 내딛고 나아가는 길이다. 은혜로우심과 선하심은 우리가 숨쉬는 공기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언약의 신실함은 죽음의 벼랑에서 우리를 꽉 잡아준다.회개는 하나님의 자비에 우리를 맡기는 일이다. 그 태도를 기르기 위해 특별히 가정에서의 훈육이 요구된다. 1. 자신의 죄를 미워하라“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로사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의 말은 내 삶을 변화시켰다. 나 자신의 죄악은 내 실패의 원인이다.내가 자녀들이나 남편의 죄를 싫어하는 것보다 나 자신의 죄를 더 싫어해본 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의 잘못은 쉽게 지적하면서 나 자신의 잘못은 변명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자기 의에 매우 익숙하며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여러 방법과 형태를 가진 영혼이다. 나는 과연 자녀들에게 자기 연민과 이기심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으로 인해 힘들어 할 때 아이들에게 기꺼이 기도를 요청한 적이 있는가?2. 아예 말을 하지 말거나, 아니면 앞에서 말하라인도의 힌두교 사원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구출해 엄마가 되어준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의 집에는 다음과 같은 규율이 있다. "우리 집은 되도록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 대신 말하고자 할 때는 얼굴을 보면서 말하려고 한다.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하려 할 때, 우리는 너를 지지한다고 말하거나 혹은 반대하지 않는다고 부드럽게 전한다. 서로간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할 때는 사랑으로 말하게 요구하며, 비난이나 분노를 보이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부모와 형제 자매는 서로의 잘못을 고자질하지 말아야 하고, 가능하면 아이들에게 스스로 잘못한 것에 대하여만 말하게 하고, 형제 자매가 한 잘못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것을 요구한다." 3. 넓은 마음을 유지하라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 통회하는 마음은 더 크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한다. 넓은 마음은 기꺼이 용서하며 잘못을 더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주님, 좁아 터진 웅덩이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바다 같은 마음을 갖게 해 주소서”라고 자주 기도한다. 웅덩이 같은 마음은 쉽게 상처를 받아 원통해 하지만 바다 같은 마음은 수많은 잘못을 덮어준다. 넓은 마음은 변명이나 남을 탓하지 않으며 빨리 회개로 나아간다.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면, 기쁨이 올 것이다회개하는 영혼에게 애통과 기쁨이 조심스럽게 오르락 내리락 할 때, 숨을 들이 마시고 또 내쉬어 보라. 우리의 사악함이 빚어낸 죄와 고통은 우리를 애통하게 한다. 그로 인해 주님 앞에서 슬퍼하지만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고후 7:10).내가 속한 문화적 유산은 애통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체면 잃기’를 두려워하는 문화적 유산은 그 애통하는 일을 방해하기까지 한다. 회개의 눈물을 닦는 수건과 애통해하며 뿌리는 재는 멋져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죄가 나를 공격할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울부짖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아이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 좋다. 가족 안에서 폭력이 목격되면, 우리는 그들과 함께 울어야 한다. 그것의 결과를 보게될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애통의 눈물을 함께 흘릴 것이다. 그 죄를 설명하거나 용서하지 않으며 말이다.학기 첫 날 우리 집에 검은 구름이 몰려들었다. 나의 게으름이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했을 때, 우리 모두에게 큰 안도감이 찾아왔다. 마치 메마르고 거칠어진 땅 위에 떨어지는 단비와 같이 말이다(행 3:19-20). 회개할 때, 그 기쁨은 우리의 수치와 자기 연민을 이기게 한다. 주님은 우리 입에 새 노래를 넣어 주신다. 회개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더욱 즐거워하게 된다. 그분이 갈보리의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신 일을 기억해보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싫어 하셔서 우리 죽음을 대신하셨다. 그분은 가장 넓은 마음을 가지신 왕으로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직접 말씀하셨다.회개하는 가정은 즐거움이 가득하다. 용서받은 가족은 사랑을 잘 주고받는다. 주님은 우리의 슬픔을 찬양으로 바꾸시며 혼란을 바로잡아 주신다. 우리의 수치를 가져가시고 우리를 영광으로 덮어 주신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을 선물해 주신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Parents Can Do That Jesus Cannot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회개
체면
훈육
그리스도
용서
사랑
애통
외로운 모든 이들에게
by Scott Devor
2019-05-03
역사적으로 우리는 가장 기술적인 세상을 살고 있는 세대이지만, 아마도 가장 외로운 세대일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잠깐이라도 검색해 보라. 그러면 전염병, 심각한 건강 문제, 공중 보건 문제, 사회적 단절과 같은 단어와 문구로 주요 언론 매체에서 규정하고 다루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최근에 시그나라는 건강 보험 회사는 2만 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에 응한 사람들의 54%는 ‘항상 혹은 때때로 아무도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응답자의 40%는 ‘우애가 결핍’되어 있으며 그들의 ‘관계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꼈다고 답변했다.이 통계자료에 의하면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직접 얼굴을 대하며 만나는 관계는 계속 감소되는 중이며, 현재 혼인 제도는 과거보다 인기가 없어졌다(1960년에는 성인의 72%가 결혼을 했지만, 오늘날에는 성인의 절반만 결혼한다). 평균 가구 수도 점점 적어지고 있다. 1960년에는 전 인구의 13%만 혼자 살았지만 지금은 그 수치가 25%를 넘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소외되고 있으며, 외로움은 우리 문화 저변에 깊게 깔려 있다. 이것은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도록 창조되다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모든 것을 만드셨을 때,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선언하셨다. ‘보기에 좋다’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 작업이 계속 될 때, 여러 번 메아리 친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을 하시기 전까지 계속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만들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담의 외로움을 지목하여 그것이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홀로 있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도록 창조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주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및 성령의 삼위가 일체이며 영원한 관계로, 가장 친밀한 관계로 존재하신다. 하나님 및 다른 사람들과 맺은 우리의 관계는 창조, 타락, 구속 그리고 회복의 핵심이다.창세기 3장으로 넘어가면, 타락의 중심에 관계의 단절이 있음을 보게 된다.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우리의 하나님 및 창조물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사라지는 장면으로 두드러지게 그려진다(24절).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서로 간의 관계가 단절되며 세상과의 관계도 단절된다(14-19절).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고, 낙원을 잃어버렸다.타락한 그들은 이상하게도 즉각적으로 소외와 수치로 반응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다(8절). 그들은 하나님과 동산에서 함께 걸었으며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을 만큼 하나님과 깊은 친밀감을 즐겼었다. 하지만 이제 그 친밀감은 사라지고 그들이 벗은 줄 알고 부끄러워서 숨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거리를 두고, 서로 상대를 탓하며, 뱀을 탓하고, 결국 하나님을 탓하게 된다.성경 말씀 여러 곳에서, 그리고 때마다 반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은 정절이 없는 신부였다. 하지만 구속의 드라마에서 보면,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에게 다가가신다. 그분의 백성을 향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나님이 다시 자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실 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반복된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를 부를 때에도 나타난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하실 때도 나온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선자자들을 보내실 때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그 분의 아들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불순종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을 위하여 희생 당하셨다. 수치와 죄가 없으신 분이 죄책감과 수치로 가득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결코 흉내 낼 수 없었던 완벽한 삶을 사셨지만 죄인으로 죽음을 당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다시 가까워지게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셨고,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랬듯, 우리도 똑같은 친밀한 관계를 누리도록, 우리의 상호 관계도 똑같이 회복하도록 기도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라솔직히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원할 때, 그런 갈망이 생긴 것은 아마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우리 안에 뭔가 결핍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깊은 관계를 원하는 갈망은 원죄 이전부터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유대를 쌓고 깊은 관계를 맺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외로운가? 왜 스스로 소외되는가? 개인주의적성향으로 시작하여 소셜 미디어와 그 밖의 여러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요소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가장 주요한 요소는 창세기 3장으로 되돌아가서 보면 대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마디로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혹은 더 심각하게는 하나님에게 취약한 존재라는 생각에 두려움과 수치심이 있는 것이다.나는 언젠가 관계에서 솔직한 모습과 취약한 모습이 서로 어떻게 다른 자를 서술하고 있는 비유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을 유리로 만들어진 집이라고 상상해보라. 솔직한 모습의 당신은 커튼을 열고 모든 창문을 깨끗하게 닦은 다음 사람들이 그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보게 할 것이다. 취약한 모습의 당신은 집을 개방하여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사람들에게 집안을 둘러보게 하고 더 좋은 모습을 만들어가기 위해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는 일을 돕게 할 것이다. 그래서 취약한 모습은 용기가 필요하다.이 지점이 바로 우리가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양육할 때 시작해야 하는 곳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얼마나 솔직하거나 취약한가? 혹시 우리의 것을 숨기거나 붙들고 있으면서 우리를 형성하고 드러내는 데에 그분이 우리를 돕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취약함은 연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계명이 하나님을 이와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다(마 22:36-39).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가 보여주지 않아 하나님의 눈에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시지만 우리의 죄와 갈망을 그분에게 고백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놀랍게도 복음의 능력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우리는 이제 죄책감이나 수치심 없이 담대하게 그분의 현존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새 언약 백성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관계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 가족이 되며, 상호간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도록 부르심 받고(롬 12:15), 서로의 짐을 지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며(갈 6:2), 서로 사랑하도록(요 13:35) 부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과 맺으신 깊은 유대감과 관계를 그대로 따라서 하도록 부름을 받은 영적인 새 가족이다(요 17:21).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우리 서로를 향하여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움직여 주시기를 기원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ll the Lonely People번역: 정은심
생활
관계
외로움
죄책감
친밀감
갈망
결핍
타락
단절
복음
호기심 많은 아이에게 하나님의 이야기를
by Marco Silva
2019-05-01
부모라면 맞서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물음이 있다. 어떤 날에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아이에게만 보이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이 열리듯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여겨지고, 또 어떤 날에는 손에 들린 과자를 필사적으로 낚아채려는 해변가의 갈매기 소리마냥 귀에 거슬리는 소음으로 다가오는 물음이 있다. 바로, ‘왜요? 왜요? 왜요?’이다.하나님은 굶주린 갈매기처럼 우리 아이들이 집요하게 내뱉는 그 물음이 얼마나 자주 나를 괴롭히는지 아시고 큰 은혜를 베푸셨다. 말하자면, ‘왜’라는 그 물음이 사실은 나를 귀찮게 하는 방해 거리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이다. 전에는 아이들이 계속 던지는 물음이 마치 손상된 레코드판에서 들려오는 반복되는 스크래치 소리처럼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이제는 그 호기심 어린 마음을 이끌어 그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 필요한 과정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하나님의 이야기를 담은 일상의 대화모세는 신명기 6장 4-9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명령한 후에, 20-25절에 가서는 아버지와 그 자녀 사이에 흔히 있을 법한 질문과 답변을 보여 주는 일상적인 장면을 묘사한다.“아빠,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율법과 규례의 뜻은 뭐예요?”“얘야, 우리는 전에 애굽에서 바로의 노예로 살고 있었단다. 그를 위해 큰 성을 건설하며 일했지만 바로는 우리를 무자비하게 대하며 노역을 시켰지. 심지어는 너보다 어린 아기들을 나일강에 던져 죽이도록 명령하기도 했어. 이에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들으셨던 거야.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전능한 손을 내밀어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 내셨지.”여기서 아버지는 아이가 묻는 질문에 대해 율법의 세부 사항들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 계획만을 이야기한다. 거대한 역사 속에서 율법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세는 일상 생활에서 있을 수 있는 대화를 연출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단지 율법 조항에 따라 살지 않고 사실은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을 암시한다. 그 내용을 보여 주기 위해 아버지와 아이는 특수한 배역을 연기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처음부터 구상하고, 엮으시며, 써내려 가시는 그 이야기를 아이에게 계속해서 들려준다.“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 내셨어. 노예로 살던 땅으로부터 빼내어 오래 전에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시는 거야. 바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즉 너와 나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말이야. 예전에 우리는 소망도, 믿음도 다 잃고 주저앉을 뻔했지. 그러나 하나님은 속박을 풀어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어.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자신의 규례를 지키라고 명령하신단다. 그래야 우리가 그분 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거든.”그분의 이야기를 들려주라이처럼 하나님의 이야기를 자녀에게 들려주라는 명령은 성경의 여러 문맥에 등장한다. 예를 들어 모세는 처음으로 유월절에 관해 설명하면서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이 예식의 뜻이 뭐예요?”라고 물을 것임을 짐작했다. 그리고 부모들에게 그 예식 자체에 관한 전문적인 설명보다 어떤 일이 실제로 그날 밤에 있었는지를 이야기해주라고 명령했다(출 12:26-27).여호수아도 비슷한 상황을 설명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요단강 주변에 서 있는 열두 개의 돌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면, 부모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사건, 즉 그분의 언약궤와 모든 백성이 아무 탈 없이 강을 지나도록 물을 멈추게 하신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명령했다(수 4:6-7, 21-24).심지어는 심판의 메시지가 주어지는 맥락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이야기를 통해 그 심판의 내용을 계속 전달하라고 명령하셨다.“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욜 1:2-3).그리고 현재 우리는 주의 성찬을 나눌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로 체결된 하나님의 언약을 이야기하며 기념한다(눅 22:19; 마 26:28). 비록 어린아이들은 성찬에 아직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부모들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예수님의 살과 피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를 배우게 된다.아이의 호기심을 놓치지 마라이렇듯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지으실 때 이야기에 끌리도록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자녀에게 전달해야 할 사명을 갖는다.물론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기보다 다루기 힘든 청중을 자녀로 둔 경우가 많겠지만, 부모로서 우리는 그 아이들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복음이라는 위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황금과 같은 기회임을 알아야 한다. 그 시간에 어린아이는 몸을 꼬고, 좀 더 큰 아이들은 투덜거리며 불만을 쏟아 놓겠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깊은 호기심을 심어 두었음을 기억해야 한다.혹 여섯 살 난 아들이 ‘왜’ 교회에 계속 앉아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그게 너한테 유익하니까”라든가 “그렇게 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니까”라며 뻔한 답변을 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얘야,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가족으로 삼으셨기 때문이야. 한때 엄마와 나는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하나님은 말이야, 우리에게 얼마나 그분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해 주셨어. 그렇게 하나님 자신을 신뢰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제는 그분을 계속 신뢰하고 사랑하기 위해 우리를 도와줄 가족이 필요하게 된 거야.”또 일곱 살인 딸이 ‘왜’ 자신에게는 바비 인형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너는 이미 인형이 많잖아”라고 답변하기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가지고 놀 수 있는 인형이 더 있으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똑같이 생긴 인형들보다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걸 생각해 본 적 있니? 그분은 우리 각자를 서로 다른 생김새로 지으셨지. 또 그런 우리를 바라보실 때, 어떤 옷을 입었는지, 피부색은 어떤지를 보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보시거든. 그렇게 우리도 서로를 바라보기를 원하신단다.”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물론 아이들이 ‘왜’라고 질문할 때마다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다 들려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기회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진실한 그분의 이야기를 아이들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여유를 갖고 잠시 멈추어, 아이들에게 우리 자신도 얼마나 절망적인 노예에 다름 없었는지 이야기해 줄 수도 있다.“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갇혀 노예 생활을 했던 이야기 기억하지? 사실 그 이야기는 아빠의 이야기이기도 해.”“아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이때 당신은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당신 인생에서 펼쳐 가신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그분이 하신 일을 소재로 삼아 기도하고, 이야기하며, 노래로 찬양할 때, 혹 우리의 노력이 아무리 불완전하고 부족할지라도 그런 과정은 아이들의 마음을 빚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를 위해 매일 아침 식탁에 앉는 짧은 시간에도, 혹은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몇 분 동안에도 우리는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Bring God’s Story to Your Child’s Curiosity번역: 장성우
가정
양육
기도
이야기
찬양
기회
대화
호기심
들려주라
존 칼빈이 매일 드린 네 가지 기도
by Justin Taylor
2019-04-30
1542년, 칼빈은 제네바 교리 문답서(Catéchisme de l' Eglise de Genève)를 출간했다. 그는 부록으로 ‘예닐곱 번의 거룩한 기도’를 첨부했는데, 그 안에는 하루를 위한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지금부터의 내용은 헨리 베버리지(Henry Beveridge)가 이를 번역한 것으로, 다음의 글은 ‘존 칼빈과 헨리 베버리지, 종교개혁과 관련된 관용구들’(John Calvin and Henry Beveridge, Reformation, Volume 2, 2009))이라는 전자책에서도 읽을 수 있다. 필자는 맞춤법과 구두점을 조금 수정했다. 하루를 시작하며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이고 나를 보호하시는 분이여, 당신의 선하심이 지난 밤 잠든 나를 지켰나이다. 그리고 이 하루를 통하여 가장 거룩하신 당신을 온전히 예배하고 섬길 수 있도록 내게 새날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루를 지나는 동안 당신을 섬기는 데에, 또 당신의 뜻에 복종하는 일에 거스르는 일을 단 한 번도 생각지도, 말하지도 또 행동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의 모든 행동이 오로지 당신의 영광과 형제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게 하소서. 이를 보는 자들이 이토록 당신을 섬기는 나를 본보기로 삼게 하소서. 이 땅에 빛을 허락하시고 태양을 통하여 우리 삶을 유지하게 하시는 이 때, 동시에 성령의 소원으로 내 마음도 밝혀주소서. 성령께서 당신의 의로운 뜻에 맞게 나를 인도하게 하소서. 내가 마음에 어떤 목표를 갖든지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당신을 높이고 섬기는 것이 되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의 은혜와 선하심을 통해서만 내가 행복을 기대할 수 있나이다.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라면 시도조차 하지 말게 하소서. 이 땅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음식과 옷을 마련하는 노동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적인 일을 하는 동안에도 당신이 자녀에게 약속하신 저 천국의 축복받은 삶을 더 마음에 두도록 하소서. 내 몸과 영혼을 보호하시고 이를 기뻐하는 하나님이시여, 악마의 모든 공격에 대비하여 나를 강하고 견고하게 만드시고, 또 이 세상에서 나를 괴롭히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건져주소서. 그러나 내가 인내하지 않는 한 그것은 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간구하오니 오늘 하루 나의 인도자와 감독자가 되어주실 뿐만 아니라 이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나를 당신의 보호하심 아래 두소서. 그리하여 내 인생의 모든 과정이 오로지 당신의 인도하심 아래에서만 이루어지도록 도우소서. 내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매일 은혜의 선물을 더하소서. 그리고 그 은혜가 진정한 태양인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충성하는 그 날까지 이어지게 하소서.차마 깊이조차 알 수 없는 위대한 그 축복을 얻고자 하오니,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나의 죄악을 용서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그 용서를 베푸소서. 이 아침에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하소서. 내 소망은 오로지 당신께만 있나이다. 내가 걸어갈 길을 보이소서.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 내 영혼을 높이 드나이다. 적으로부터 나를 구하소서, 오 주여, 내가 당신께로 피하나이다.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가르치소서, 당신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선한 영이 나를 정직한 자의 땅으로 인도하게 하소서.학교로 향하며오 주님, 당신은 모든 지혜와 학문의 샘입니다. 당신의 특별한 선하심으로, 내가 젊을 때 선량하고 거룩한 삶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선한 학문을 배우게 하소서. 나는 소경일 수밖에 없으나, 당신이 나의 마음을 밝히시어 지식을 얻기에 적합하게 하셨나이다. 배운 것을 잊지 않도록 나의 기억력을 도우시고, 내 마음을 다스리시어 당신이 주신 기회를 나의 게으름 때문에 잃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게 하소서. 당신의 영을 내 속에 부으소서. 깨달음의 영, 진리의 영, 판단과 신중함의 영을 내게 부으소서. 그리하여 나의 연구가 실패하거나 나를 가르치는 선생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하는 연구가 무엇이든, 올바른 관점에서 그 진정한 목적을 바라보게 하소서. 그 목적은 바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배우는 모든 것이 경건의 바른 규칙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은 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부어줄 것이며, 또한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지식을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셨고, 동시에 악한 자와 교만한 자를 내쫓아 사라지게 하겠다고 선포하셨나이다. 간구하나이다. 진정한 겸손으로 가장 먼저 당신께 배움의 기쁨과 순종하는 내 자신을 보여드리게 하시고, 그 후에 당신께서 권세를 허락하사 나보다 높은 위치에 두신 자들에게도 그러한 내 모습을 보이게 하소서. 또한 내 마음에 숨은 모든 사악한 욕망을 뿌리 뽑으시고 내 마음이 오로지 당신을 찾는 열심으로만 넘치도록 영감을 부어주소서. 마지막으로 바라기는 나를 가능한 한 젊을 때에 준비시키셔서 장성했을 때에는 당신이 맡기시는 어떠한 역할도 능히 감당하게 하소서. 아멘.식사를 앞두고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 먹여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주님께서 손을 펴 먹을 것을 주시면, 그들이 받아먹고 또한 만족해합니다(시 104:27).오 주님, 당신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며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우리에게 축복을 부어 주시고, 우리가 자비의 선물인 고기와 마실 것을 취할 때에 거룩함으로 행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가 맑은 정신으로 그것을 받는다면,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우리로 하여금 가슴으로부터의 진정한 감사를 입술로 선포하게 하소서. 당신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모든 선함의 근원이라는 것을 선포하게 하소서. 육체로 섭취하는 영양을 즐기는 가운데에서도 교리의 빵(the bread of your doctrine)을 먹고자 하는 특별한 갈망이 이 마음에 넘치게 하소서.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는 영원한 삶, 그 생명을 향한 소망 안에서 교리의 빵을 섭취함으로써 나의 영혼이 영양을 얻게 하소서. 아멘.잠자리에 들며노동에 전념할 수 있는 낮을 창조하시고 안식을 위한 밤을 허락하신 주 하나님, 이 밤에 몸이 충분히 안식함으로써 당신을 향해 깨어있는 내 마음이 멈추는 일이 없도록, 이 마음이 희미해지거나 무감각해지는 일도 없도록, 그리하여 당신의 사랑에서 잠시라도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루의 근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쉬게 하더라도 당신을 잊지 않도록, 그 선하심과 은혜가 내 마음에 항상 새겨져 있도록 도우소서. 이처럼 몸이 쉬기에 나의 선한 양심도 쉼을 누릴 수 있나이다.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이 자연 상태의 약함만큼은 허용하기에, 깨어 있는 동안 당신을 섬기는 데에 더 예민한 자가 되도록 이 잠을 사용하여 주소서. 몸 만큼이나 내 마음도 정결하고 깨끗하게 만드시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소서. 그리하여 잠자는 이 시간마저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쓰이도록 하소서. 그러나 이 밤이 어둠으로 덮여 있듯이 오늘 하루동안 악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여러모로 당신을 기쁘게 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내 속에 숨은 모든 죄악이 오늘 밤 당신의 자비하심 속에 모두 묻히게 하소서. 내 기도를 들으소서, 하나님, 내 아버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아들을 통해 나를 지키시는 이여. 아멘.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Four Daily Prayers from John Calvin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존칼빈
제네바교리문답서
종교개혁
교리의빵
절망하지 않으려면
by Marshall Segal
2019-04-26
결혼, 영원한 이별, 질병, 그리고 일과 사역-삶의 여기저기에서 절망할 때 어둠은 안개처럼 우리 삶에 스며든다.우리는 주변 상황을 영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마음의 눈은 삶의 어려움 속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의 빛의 단편이라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몇 주 또는 몇 년이나 계속될 수도 있는 절망의 시간 동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우리는, 수천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어둠을 몰아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참을성을 가지고 어둠을 더 깊이 탐색하는 대신, 스스로 만든 횃불로 그 어둠을 밝히고 싶어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기진맥진해진 상태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위험을 경고했다.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사 50:11). 하나님의 경고는 명확하다. 어둠이 닥쳤을 때 우리가 만든 횃불에 의지해서 걷는다면, 다름아닌 바로 그 횃불 때문에 우리가 타 죽을 것이다. 내가 든 횃불몇 년 전, 여러 해 동안 이겨내던 유혹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결국 또 다시 성적인 죄를 저질렀을 때 나는 실로 어두운 시절을 경험했다. 그 추락은 나로 하여금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했고, 그 전까지는 차마 상상도 못하던 절망에 빠지게 했다.(그러나 지금 보면 그건 은혜였다) 당시 괴로움은 나를 회개와 경각심, 그리고 순결함으로 이끄는 은혜가 되었지만, 그 시간은 쓰고 어두웠다. 내 죄성이 가져다준 쓴맛을 보아야만 했다. 게다가 그 죄성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까지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럴 때면 하나님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얼굴까지도 보기 힘들었다. 나는 절망감에 빠질 것만 같았다.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관계가 치유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미래 나의 모든 사역이 다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죄에 빠지면 어떡하지? 사탄은 바로 이럴 때에 온갖 잘못된 질문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두려움과 의구심의 바다 속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사라지게 하려고 시도한다. 내 경우처럼 내가 자초한 어둠이든, 또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 때문에 발생한 어둠이든, 우리에게 닥치는 어둠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고, 불이 꺼졌을 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구세주이자 도움의 근원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로 만든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의존하는 대신,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 어둠을 헤쳐나가려는 시도를 하곤 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나 자신에게 어떤 약을 처방할 수 있을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방법, 다름 아니라 피상적인 즐거움에 빠지게 만들어 우리를 둘러싼 어둠이라는 실재를 아예 잊도록 하는 처방이 가능하다. 재미있는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또 쇼핑을 즐기는 등, 뭐가 되었든 단 몇 초라도 어둠을 잊게 하는 무언가에 빠지는 것이다. 고통을 되새기고 되새길 때에야 비로소 약간의 위안을 찾는, 자기 연민이라는 처방도 있다. 바벨탑을 짓는 대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깊은 협곡을 팔지도 모르겠다. 절망감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는 방법도 가능하다. 산산이 부서진 내 마음 속 유리 파편을 남을 공격하는 무기로 바꾸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고통받는 것을 볼 때 더 이상 외롭지는 않으니까,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최소한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우리가 드는 이런 횃불은 자랑스러운 게 아니다. 이런 횃불은 나도 모르게 키우고 있는 우상을 드러낼 뿐 아니라, 우리가 시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준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죄악과 허약한 우리의 실체를 보여줄 뿐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대로 그런 횃불에 의지한다면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이런 횃불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나 절망에 빠졌을 때 우리는 오히려 그런 횃불을 의지한다. 황량한 인생어둠 속에 빠졌을 때 우리는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까? 인생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하기 쉽다. 인생이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그때는 기꺼이 하나님의 전능하고 전지한 품 안에 안긴다. 그러다가 인생이 다시 나쁜 쪽으로 방향을 틀면, 한때 전능하던 능력과 지혜가 갑자기 위험하고, 무관심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바뀐다.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주권자니까, 비난을 받을 때에도 그에 걸맞게 받아야 하지 않을까? 말 그대로, 하나님은 절대 책임을 진 존재니까 절대 비난의 대상도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횃불을 켜기 위한 성냥을 찾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에 불만을 품을 때, 불만과 불평 그리고 낙담에 빠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사 50:2). 내가 경고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나는 너희를 오래 참지 않았느갸? 내가 너희를 부를 때 어디 있었느냐? 너희의 고통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소홀함 때문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사 50:1). 인생이 황량한 것은 우리가 지은 죄의 어두움 때문이지 결코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인생이 어려워질 때,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계획을 망치기를 원치 않으신다. 대신 우리가 그의 사랑에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우리를 구하실 수 있다. 그 분은 우리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기 원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벧전 5:6-7).그의 귀는 우리에게 닫혀있지 않다. 그의 마음은 우리에게 둔감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가까이 두길 거부한다. 우리 속의 죄성과 우리를 둘러싼 어둠이 하나님을 볼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귀를 깨우치사사람들이 주님의 초청과 경고에 귀를 막고 대신 하나님을 경멸하는 횃불을 높이 들었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 중에서 들을 수 있는 자, 즉 약자를 돌보고 지키기 위한 애통함과 불의를 이겨낼 강인함을 가진 종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서 하나님을 향한 귀를 막고 주님을 향한 분노를 마음에 품고 있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담대하게 말한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사람들이 자기가 만든 횃불에 불을 붙일 때, 이사야 선지자는 역청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귀가 생명의 말씀으로 향하도록 했다. 빛을 볼 수 없을 때 대신 귀를 기울였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사 50:5). 어두운 시간에 하나님은 그의 종의 귀를 열어주셨다. 그보다 훨씬 더 어두운 시간을 겪은 그리스도에게도 하나님은 같은 일을 하셨다(요17:8). 만일 당신이 어둠의 시간 가운데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분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마 11:15).그는 당신의 마음의 귀를 이미 열어놓으셨다. 그의 목소리를 경멸하지 말라, 스스로 횃불을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어둠이 닥친 이 특별한 시간을,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걷는 방법을 배우는 기회로 삼으라(고후 6:7).나의 횃불을 버리고우리 자신이 만든 횃불을 의지해 걷는다면, 우리는 결국 그 불에 타고 말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절망의 어둠을 견딜 수 있을까? 이사야 선지자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귀를 기울여라. 의지하고 싶은 자신의 횃불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그의 목소리가 비추는 빛을 의지해서 걸으라. 오로지 말씀 속에서만 발견하는 바로 그 목소리 말이다. 회개하라, 믿으라, 그리고 다음 발걸음을 떼도록 하라.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건 그가 당신의 귀를 들을 수 있도록 깨웠기 때문이다. 그는 약속하셨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아무리 어두워도 나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어둠에 앉아 있을 때, 온갖 장애와 적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심지어 스스로 초래한 실패가 옥죌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 7:8). 바닥까지 떨어져서 절망감에 빠질 것 같을 때에도 그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모든 빛이 될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ow Not to Be Desperate번역: 무제
생활
감정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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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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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성
기다림의 예기치 못한 선물
by Vaneetha Rendall Risner
2019-04-25
기다림은 때때로 고통으로 다가온다.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확실히 모를 때 기다리는 일이 가장 어렵다.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만, 동시에 최악의 결과를 대비하고 있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보증이 있으면 기다리는 일은 훨씬 쉬울 것이다. 혹은 적어도 붙들고 있으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나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어떤 확신이 있다면 기다리는 일이 훨씬 쉬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기다리고 있을 때 종종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대답을 하실 것인지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마치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나는 시편 13편 1-2절을 읽고 또 읽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1-2).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는 이 질문을 수없이 했었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결국 ‘알겠다’라고 대답하실 것임을 내가 안다면 아마도 좀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보증이 없다면, ‘기다리라’는 말보다 ‘아니다’는 말이 더 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하실 때몇 해 전에 나는 고뇌의 기다림 중에 내게 도움이 될 약속을 발견할 성경 말씀을 찾아보았다. 궁극적으로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보증하는 말씀을 찾기 원했다. 어떤 것이든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그런 말씀을 원했다. 그런 말씀을 발견하기를 기다리면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를 읽었다.아브라함의 신앙을 사모하지만, 이 구절은 종종 나를 화나게 했다. 물론 아브라함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받았다. 만일 내게 대답하시겠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약속을 받았다면, 나도 기꺼이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내게 약속해 주시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어떤 사인을 주시기를 계속 구했다.아무 것도 오지 않았다. 아무 성경 구절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 확증도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그냥 침묵만 있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대답은 ‘아니다’였다.처음에는 불공평해 보였다. 그리고 무의미해 보였다. 나는 낭비한 오랜 세월의 의미를 찾으려고 분투했다. 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갔지만 왠지 나는 선물을 더 적게 받았다고 느꼈다. 나는 한동안 내 마음을 접었다. 이것을 계속 생각하는 일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로마서의 그 구절을 읽을 때마다 그것은 나를 아프게 했다.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대답을 하시지 않았을까?하나님의 신실함과 아브라함의 기다림몇 해 전 개인 큐티 시간에 로마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로마서 4장을 읽기를 주저했다. 이전에 내가 기도하며 기다리던 때를 고통스럽게 다시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잘 알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 창세기에 나타난 그의 생애를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때로 어떻게 의심했는지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하갈을 통하여 자기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이 그의 도움과 독창성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나는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의 생각에 일말의 동의가 되었다. 인내하지 못함으로 분투하는 아브라함의 입장이 모두 내게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주 여러 번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도록 도우려고 했다. 물론 그 계획은 내가 원하는 계획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기를 바라는 계획이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만하다고 생각했다.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아브라함이 기다리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일을 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성격을 다듬으시고, 그에게 인내를 가르치시며, 그와 친구 관계를 세워가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게 된 때는 25 년의 기다림이 있은 후였다. 낭비한 세월 같아 보였지만 그동안 하나님은 그를 변화시켰다. 수십 년의 기다림 끝에,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그의 믿음을 시험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아들은 그가 기다렸던 아들이었다.그제서야 나는 알았다. 이전에는 내가 왜 이것을 인식하지 못했을까? 아브라함의 신앙은 후손에 대한 약속에 근거하고 있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여러해 전에 그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삭을 놓지 않고 아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오래 기다린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이었다.하나님의 약속 성취는 아브라함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달려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이삭이 제물로 희생을 당했더라도 다시 살아나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이다(히 11:19). 따라서 궁극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놓여 있었다.가장 고귀한 대답, ‘기다려라’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에만 놓여 있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약속하신 분에게 근거하고 있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인가에 있지 않고 약속의 주체이신 하나님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위험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는 특정한 결과에 매달리고 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있었다. 아브라함의 기다림은 그의 믿음을 강화시켰다. 하나님은 그분의 방식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아브라함은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나는 이제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이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 약속을 충분히 인식하게 되자, 나는 기다림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마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다리게 하신 똑같은 이유로 나와 당신을 기다리게 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신뢰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사역을 준비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그분을 닮도록 변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신다.다시 살펴보면, ‘기다리라’는 대답은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대답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결과에 매달리기 보다는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을 아시지만 나는 모른다. 그분은 내 미래를 알고 계시지만 나는 알 수 없다. 그분의 관점은 영원하지만 나의 관점은 한정적이다. 그분은 내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알맞은 때에 주실 것이다. 폴 트립(Paul Tripp)이 말했듯이, “기다림은 기다림의 끝에 내가 무엇을 얻을지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기다리면서 내가 어떤 모습이 되어 가느냐에 관한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Unwelcome Gift of Waiting번역: 정은심
영성
영적성장
기다림
침묵
하나님의신실함
아브라함의기다림
고귀한대답
폴트립
독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네 가지 말씀
by Vaughan Roberts
2019-04-24
나는 영국인이고,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 인구의 약 35%가 독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신 문제는 자연스럽게 많은 성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독신의 형태는 다양하다. 먼저 연령 차이가 있는데 20대에 독신으로 사는 것과 30-40대 또는 70대에 독신으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상황 차이도 있다. 결혼한 적 없는 비혼자도 있고, 이혼 혹은 남편이나 아내가 사망하여 독신이 된 사람도 있다. 또한 경험적인 차이도 존재한다. 일부는 비혼으로 살면서 매우 만족하는 반면, 결혼을 간전히 원하지만 그러지 못해 절망하는 이들도 있다. 성경은 독신자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가?1. 독신의 삶은 은사이다많은 사회는 사실상 부부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어른이 되면 배우자가 있는 게 당연하고 나이가 들었는데도 배우자가 없다면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지금 사회의 시각이다.독신에 관한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1세기 랍비였던 엘레이자(Rabbi Eleazar)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없는 남자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볼 수 없다.” 탈무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20세가 되었는데도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이런 당시의 배경을 감안할 때, 독신에 관한 신약 성경의 긍정적인 관점은 매우 놀랍다. 바울은 독신을 "은사"(고전 7:7)라고 말하고, 예수님도 "타고난 사람"(마 19:11)에게는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내가 아는 한 모임의 이름은 '커플과 나머지'(Pairs and Spares)이다. 왜 하필 ‘나머지’일까? 독신자는 가족과 각종 사회 집단 및 교회에서도 일종의 여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직도 혼자에요?"라는 질문에 진절머리가 난 어떤 사람은 그런 질문에 이렇게 맞받아친다고 한다. "아니, 아직도 결혼한 상태에요?" 우리는 독신이 차선이라는 은근한 암시에 저항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독신도 좋은 것이다. 타고난 일부 사람에게는 말이다. 그런데 현재 독신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말한 독신의 은사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결혼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면, 그럼 나는 결국 차선에 머문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이 독신을 은사라고 말했을 때, 이는 독신인 상태에 반드시 큰 흡족을 느끼는 어떠한 특별함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독신으로 머물 수 있는 상태를 뜻했다. 당신이 독신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이다. 이는 결혼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독신이든 결혼을 했든 우리는 내게 주어진 삶의 상황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2. 독신의 삶에는 장점이 따른다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독신이 가진 두 가지 장점을 말했다.독신자는 결혼이 불러오는 여러 '문제들'에서 해방된다. 결혼 생활에는 많은 축복이 따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어려움도 적지 않다. 주변에서 흔히 보듯이, 기독교인 부부는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사이 좋은 부부도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결혼 생활은 독신의 삶보다 복잡하다. 시간, 휴일, 여행, 메뉴 등 어떤 결정을 하더라 고려할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한 사람 이상을 신경써야 한다. 또한 양육 역시 큰 즐거움을 주는 만큼 많은 고통(anxiety)도 안겨 준다. 결혼한 삶에 대해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고전 7:28)라고 바울은 묘사했다. 그가 먼저 결혼 생활이 가진 문제를 주로 언급하는 이유는 이어서 독신으로서의 삶에 따르는 장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독신자는 하나님의 사역에 더욱 열중할 수 있다.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고전7:32-34). 결혼한 기독교인의 중요한 책임은 배우자와 자녀를 돌보는 것이다. 이는 막대한 시간이 소요되는 임무이다. 그렇기에 그 시간만큼은 전도하거나, 수련회에서 일손을 돕거나, 교회의 재정을 처리하거나, 성경 공부를 하는 일 등에 쓸 수가 없다. 개인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지만, 독신자는 그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다. 교회가 사역의 많은 부분을 독신자에게 크게 의존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부 독신자들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기 위해 의지적으로 비혼을 선택하기도 한다. 비록 그런 이유로 독신을 선택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독신자는 시간의 분배 면에서 비교적 덜 제한적이라는 동일한 장점이 있다. 혹자는 독신 생활이 갖는 어려움에만 포커스를 맞추기도 하지만, 독신의 은사가 있다면 그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3. 독신의 삶은 힘들다에덴 동산에 혼자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아담의 동반자로 하와가 창조되었고, 그 두 사람은 평생 지속되는 결혼의 성적 관계를 통해 하나가 되었다. 신약 성경은 독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만 또한 결혼을 당연한 규범으로 간주한다. 결혼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이자 우리의 성적 욕망을 구현하는 허락된 방식이다. 그렇기에 독신자는 외로움과 성적 유혹으로 고통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한 고통이 물론 독신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혼자 사는 사람에게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결혼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지만, 비혼자를 포함한 독신자들에게 외로움과 성적 유혹은 평생에 걸쳐서 싸워야 하는 힘든 문제가 된다. 외로움과 성적 유혹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외로울수록, 성적 환상에 더욱 시달리고 쉽게 죄에 빠질 수 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인간은 혼자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따라서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결혼을 하지 않을 계획이라면, 결혼 외의 다른 관계를 통해서라도 친밀함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야 한다. 즉, 친구 또는 가족과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긴밀한 유대를 맺는 것이 유익하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음행을 피하"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한다(고전 6:18). 이를 위해서는 이 부분과 관련해서 믿을 수 있는 한두 명의 친한 친구를 갖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4. 독신의 상태는 영원하지 않다현재 독신인 자들 중의 상당수는 결혼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평생동안 비혼의 상태로 살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독신인 기독교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인간의 결혼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영원히 누리시고 싶어하는 영적 결혼의 맛보기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언젠가 그분의 신부인 교회와 함께 완전한 새 창조 속 사시는, 그런 신랑으로 그리고 있다. 그 날에는 결혼 또는 독신의 생활에 따르는 어려움은 물론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고, 이어서 큰 소리가 울려퍼질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계 7:17, 19:7).천국의 이러한 모습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때, 한 나이든 독신 여성이 이렇게 화답했다. "내 결혼식이 너무나 기다려지네요!" 우리 모두는 바로 이 소망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독신자라도 이미 이 땅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결혼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인간 관계도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영원한 관계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독신자에게 주는 마지막 권면 독신의 은사에 감사하라. 독신으로 겪는 모든 경험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인식하라. 그리고 그 독신의 은사를 소유하는 한 최대한 활용하도록 하라. 또한 모든 일을 경건함으로 하라. 많은 결정에 있어서 자유로운 만큼 생각 또는 행동에서 자기 중심적으로 변할 수도 있고, 또한 성적인 범죄에 빠지기도 쉽다. 그러므로 자기 통제력을 잃지 말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 또한 천국에 눈을 고정하라.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관계이다. 결혼한 사람에게 주는 마지막 권면독신을 차선책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설교자이자 작가인 존 채프만(John Chapman)은 함께 긴 산책을 하는 동안 자신에게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권면했던 친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네가 성경을 읽었다면 결혼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이야기 했을텐데 말이야." 당신의 가족이 교회라는 것을 기억하라. 교회에는 외로운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핵가족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가족의 차원에서도 서로의 가정을 개방하고 교류해야 한다. 또한 천국에 눈을 고정하라. 결혼은 중요하지만 영원한 건 아니다(막 12:25).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Things God Says to Single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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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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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채프만
천국
그리스도
육신의 고통으로 마음이 상한 자의 고백
by Russ Ramsey
2019-04-19
몇 년 전에 심각한 병을 갖게 되었다. 바로 심장에 있는 승모판이 감염되어 심부전 초기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때 나는 의료진이 제시한 방안을 따르면서도 혹 회복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집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2년 동안 겪게 된 모든 과정을 노트에 기록했다. 진단에서부터 심장 절개 수술과 회복과 재활을 거쳐 재입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기록해 두었다.인생에서 겪게 되는 이런 종류의 경험은, 그 전에는 질문하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나 역시 수술을 한 후로 몇 달 간 씨름했던 한 가지 물음이 있었다. 바로 내가 느끼고 있던 분노에 관한 물음이었다. 화가 나는 일은 고통받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 분노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서 나타나기도 하고, 또는 본능적으로 거부해 온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항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나는 내 자신의 분노와 씨름하면서 노트에 이렇게 기록했다.“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지 내 몸 안에서만이 아니라, 내 생각과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목하는 것이다. 지금 내 안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분노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이는 고통에 대한 이유를 찾고자 하는 인간 본성에 일치하는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원인(cause)이라면 몰라도, 이유(reason)가 늘 있을까? 글쎄, 나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고 확신하진 않는다. 우리는 슬픔의 여러 단계, 가령 고통을 부정하다가 이내 분노하고, 스스로를 설득하다가 다시 우울해 하며, 마침내는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이클을 겪는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진상을 따져보려고 하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과제에 직면한다. 그런데 나 역시도, 내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다루려면 그 과제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마음을 상하게 한 자나는 그렇게 내 마음을 상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여전히 지속되는 이 고통을 나한테 주신 이유야 내가 다 모르지만, 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그분의 손에서 비롯되었으며 결국은 나의 유익을 위해 허락되었다고 믿는 것이다.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루실 때 그 마음을 깨뜨리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벼랑 끝으로 인도해 보이지 않는 지경으로 밀어 넣으실 때가 있다. 또 우리가 높이 쌓아 올린 탑을 무너뜨리기도 하신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던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하신다. 그래서 한때는 분명 옳게 여겨졌던 일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된다.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그처럼 나를 좌절시키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조금이라도 그분에게서 독립할 수 있다고 여기며 계획하는 모든 시도를 맹렬히 반대하시는 분이다. 오히려 그 뜨거운 사랑으로 나로 하여금 그분 자신을 더욱 의지하는 자세를 취하게 만드신다. 그리하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분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악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신다.물론 나도 좌절하는 일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아무 어려움 없이 그저 좋은 일만 일어날 수 있을까? ‘얼른 회복하여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내면의 음성은 이렇게 상한 몸으로 살아갈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은혜를 알지 못하는 목소리이다.그렇다면, 왜 내가 경험하는 이 상태를 은혜라고 부를까? 이유인즉, 내가 누리던 안정감이 혹 계속되었다면, 나는 내 인생의 다음 단계에 대해 고민해 보기도 전에 현재의 편한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향해 남은 여정을 계획하기란 쉽지 않다. 보통 그런 여정은 예측할 수 없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간혹 인생의 폭풍이 지나가며 우리가 붙들고 있는 지식을 흩어 놓고 밑바닥까지 낮추지 않는 이상, 진정한 성장과 변화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흔히 일어나지 않는다.만일 내 스스로 이 여정을 계획했다면, 나는 내 자신이 처음부터 바라고 있던 경험만을 기대하며 이 여정을 제한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놀라움이나 궁금함, 또는 신뢰함도 자리할 수 없다. 단지 현재 내 자신이 가정하는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일만 내게 필요한 전부가 된다. 그 길은 믿음의 여정이 아니라 통제의 여정이기에, 결국은 헛고생으로 마치는 길이 된다. 믿음은 내가 볼 수 있는 대상 너머에 선한 세계가 있으며, 이는 하나님 자신이 드러내지 않으시면 추구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세계임을 신뢰하는 자세이다. 나는 그 영광스러운 세계를 보기 원한다.그처럼 나는 하나님이 펼치시는 여정을 걷기 원했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통제하는 여정을 멈춰야 했다. 오히려 상한 마음이 필요했다. 고통 속에 처할 필요가 있었다. 왜 그럴까? 나는 내 인생을 결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의를 가지고 자녀를 낮추시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열망을 일깨우려고 그렇게 하신다. 마치 허기진 고통이 독수리로 하여금 날개를 펴고 비상하려는 열망을 일깨우듯이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세상을 달리 보게 하기 위해 고통을 주신다. 또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추고 새로운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주신다. 결국 그분이 우리에게 약함을 허락하시는 목적은 우리 자신의 강함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혹독한 자비하나님의 신적 지혜는 지상에 있는 피조물이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는 인생의 폭풍이 지나간 후에 일어난 변화를 살펴보지만 그조차 다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그 변화가 갱신의 길을 걷도록 우리를 이끌 뿐이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자신이 그 길 위에 있음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 길을 걷고 있을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내 심장에 있는 박테리아조차, 어쩌면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허락하신, 즉 그분 자신의 지혜와 사랑이 깃든 은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은혜가 바로 C. S. 루이스가 하나님의 ‘혹독한 자비’(severe mercy)라고 표현했던 그런 선물일지도 모른다. 자기 만족감으로 채워진 나의 인생을 쳐서 이 마음을 그분에게로 돌리려는 사랑의 행위 말이다.정말 나의 고통이 하나님을 향한 내 안의 갈망을 일깨우려는 혹독한 자비라고 한다면, 이는 그분의 손길에서 주어진 지혜로운 선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그렇다면, 그 선물에 뒤따르는 분노로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오직 그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알아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깨닫게 되는 바가 있다. 곧 내가 처음부터 가지게 된 분노의 불꽃은 내 마음이 깨어나며 이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다고 외치는 소리와 같았다는 것이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퉁명스럽게 굴듯이 말이다.결국 내가 경험하는 이 분노는 이전에 내가 알았던 인생과 갑자기 단절된 데서 찾아오는 새로운 느낌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적인 자기 본능과 같다고 할까? 마치 갈기가 다 깎여 버린 사자가 여전히 크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몸부림치는 반응과 같다. 이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내 안의 분노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나는 이 분노에 주목해야 하고, 그에 관해 질문해야 하며, 그 감정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는 사과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분노는 마음속에 있는 상처를 드러내고 있는데, 나는 이 상처가 언제 즘이면 아물지 잘 모른다.비록 이 분노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곧 나의 분노는 다름 아닌 고통에 대한 항변이라는 것이다.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생을 향한 신음이다. 괴롬과 죽음이 그치게 될 날을 향한 쓰라린 열망인 것이다.나는 반드시 그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물론 그때까지는 이 감정이 사자처럼 일어나 나를 삼켜버리지 않도록 늘 예의 주시하고 있어야겠지만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God Who Broke My Heart번역: 장성우
생활
건강
분노
좌절
고통
여정
자비
상처
은혜
루이스
화를 내지 않으며 양육하는 비결
by Emily Jensen
2019-04-17
내가 시리얼에 우유를 부을 때 쌍둥이 아들 둘은 식탁에서 붙어 앉아 서로 쿡쿡 찌르고 장난치며 킥킥거렸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막내는 자기 빨대컵을 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식탁을 탕탕 치고 있고, 맏아들은 어제부터 자기가 지난 달에 그렸던 그림을 찾아내라고 야단이었다. 쌍둥이 중 하나가 소리쳤다. “야! 그만 좀 해! 저쪽으로 좀 가! 엄마아아아!”아침마다 우리 집 식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나의 반응 역시 이에 덜하지는 않았다. “얘들아, 그만 좀 해!” 첫 숟가락을 뜨기도 전에 나의 노여움은 비명으로 튀어나왔다. 그때마다 죄책감이 바로 밀려왔다. 그러고 나면 나는 진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내가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자 내 목소리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가만 살펴보면 아이들의 행동에도 화가 났지만, 특히 나 자신의 행동에 화가 났다. 나는 아이들과 대화하면서 평온하게 아침 식사 시간을 즐기기 원했다. 나는 아이들이 사려깊게 생각하며 행동하고 스스로 챙길 수 있기를 원했다. 내 기대가 너무 컸었나? (그렇다.)우리 집에서 이와 같은 상황은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벌어진다. 학교 가려고 집을 나설 때, 집안 청소를 할 때, 잠들어야 하는 시간에, 식사 시간에, 아마 당신도 이런 상황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여러 해 동안 다자녀 양육을 해 본 결과, 이러한 상황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제어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며 우선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와 같은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부모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내가 터득한 몇 가지 원리를 소개하고자 한다.절제되지 않은 분노 표현은 죄다모든 분노가 죄는 아니다(엡 4:26).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악함, 불순종, 무자비한 행동에 대항하여 분노가 올라올 때, 우리는 정의와 공평의 하나님을 모범으로 삼는다. 자녀들이 불평하거나 다른 아이들에게 고통을 가하면, 우리는 당연히 화가 난다. 이유 있는 정당한 분노는 자녀들에게도 사악함을 싫어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며, 이는 부모의 중요한 책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자녀를 혹독하게 다루는 일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또 고함치는 모든 것이 죄는 아니다. 아이들이 복잡한 길거리로 뛰어들어간다면, 나는 할 수 있는 한 크고 강한 소리로 그들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 지르는 일이 그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이미지를 통해 삶의 균형을 잃고 있는 우리에게 강한 경고를 보내시는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다(롬 6:23).하지만 커피를 마실 틈도 없이 아이들이 다시 장난을 치고 있을 때마다 매번 고함을 치는 것은 정당한 양육법이 아니다(약 1:20). 아이들에게 절제 없이 분노를 터뜨리고, 부당하게 대하며, 즉각적으로 격노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이 아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심을 보이[고]”(딤전 1:16)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다]”(시 145:8).아이들이 내가 원하는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벌을 주거나 제어하려 한다면, 그러한 양육 방식을 잘한 대응이라고 해야 할까? 단지 운이 없는 날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엄마로서 실패했다고 해야 할까? 진지하고 신실하게 생각해 보자. 그것은 죄이다.모든 다른 죄처럼 우리는 그것을 고백해야 하며,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그리스도 안에 소망을 두고, 되돌아서서, 죄에서 자유함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순종하려는 새 마음을 기뻐함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요일 1:9).누군가에게 이야기하라아이들에게 고함칠 때마다 배우자나 친구들에게 말하거나 메시지를 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절제되지 않은 분노를 터뜨렸을 때, 나는 늘 누군가에게 그것을 한결같이 고백해 왔으며, 그것은 나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약 5:16). 절제되지 않은 나의 분노 이야기를 꺼내면, 다른 사람들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경청해 주고 또한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준다. 보통 분노가 어떻게 진행되고, 이를 어떻게 회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고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히 10:24) 등에 대해서 말이다.부모, 시댁 식구들, 친구들 등 다른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자녀를 양육하는지를 자주 보는 경우 내가 더 조심하며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에는 ‘좋은 엄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아이들에게 혹독하게 대하는 엄마라면, 내 양육 방식을 빛 가운데서 살펴보기를 권한다(요일 1:7).부모의 겸허하고 솔직한 태도는 자신이 자녀를 학대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꼭 필요한 안전망이다. 점검되지 않은 분노는 제어되지 않고 밖으로 분출될 수 있다. 자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부모는 누군가에게 이야기 하여 바로 도움을 얻을 필요가 있다.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매우 핵심적인 곳이다.기도로 대비하라자녀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려는 경향이 감지될 때, 떠오르는 패턴들을 나는 안다. 내가 숙면을 취하지 못한 날 아침에는 아침 식사 시간이 마치 서커스처럼 소란스럽게 느껴진다. 내 영혼이 건조해진 오후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자동차에 태워 집으로 갈 때, 으르렁 거리는 곰으로 가득한 승합차에 갇힌 느낌이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특히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신다(고전 10:13)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말씀과 실용적인 양육 전략으로 나를 무장시킨다.우리가 원하는대로 상황을 항상 제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는 있다(약 1:5). 어떤 지혜로운 엄마가 한번은 내게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순간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 순간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 아이들이 울음을 그치고 징징거리지 않게 해주세요”에서 “하나님, 제게 힘을 주시고 내 감정을 조절하게 하시며, 자녀들을 훈육할 수 있도록 말씀을 주세요”라고 바뀌었을 때였다고 말했다. 그 순간은 바로 자녀의 변화를 구하는 기도에서 자신이 인내로 기다릴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기도로 바뀌었을 때이다.폭발하는 분노를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인 우리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셨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롬 3:25). 우리가 복음의 확신이 있으면 자녀들에게 잘 하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큰 죄를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겸손히 기억할 때, 아이가 신발 한짝을 잃어버린 사실에 화를 낼 가능성이 훨씬 적어진다. 아이들이 자가용 안에서 옥신각신 하거나 가구에 낙서를 한 일로 화가 나면, 버럭 화를 내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음을 생각해 본다.내일 아침 해는 다시 뜰 것이며, 나는 이미 우유가 조금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막내 아이는 분명히 또 징징거릴 것이고 쌍둥이는 장난하다가 그릇을 건드려 시리얼을 바닥에 엎을 것이 분명하다. 내일은 다른 날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아이들의 울음 소리와 옥신각신 하는 상황 속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로 결정했다는 사실 외에는 달라질 것은 없다. 내가 그 상황을 완벽하게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나를 하나님 앞에 무릎꿇게 하며, 그것이 엄마가 되는 길임을 믿는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o Fight in Motherhood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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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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