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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신자와 결혼해야 한다. 왜?
by Matt Boga
2023-08-08
지난 수년간 대학생과 이십 대를 제자훈련하면서 끊임없이 받은 질문이 있다. “불신자와 연애해도 되나요?” 그리스도인의 데이트 목적은 배우자를 찾기 위한 것이기에 이 질문은 결국 “불신자와 결혼해도 됩니까”로 바꿔도 무방하다. “안 된다”라고 성경은 여기에 아주 간단하게 답한다. 그러나 나는 이 짧은 대답에 많은 사람이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당신이 이 질문과 씨름하고 있든, 아니면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제자훈련시키고 있든, 성경이 왜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씀을 검토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결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관해서, 그리고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전이 얼마나 놀라운지에 관해서 발견할 것이다. 결혼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의 명령 앞에서 불평하기 보다는 그 속에 숨은 보화를 기대하며 갈망하는 게 마땅하다. 한 몸이 됨으로써 이루는 연합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다 그렇듯,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결혼해서 안 되는 이유에 대한 답도 그 동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가복음 10:2에서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을 받은 예수님은 과거를 회상하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결혼이 태초에 어떻게 설계되었는가를 살펴봄으로 현재에도 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대답도 그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태초에 일어난 창조의 정점은 하나님이 그의 형상대로 만드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류(남성과 여성)였다(창 1:27). 비록 하와가 나중에 아담의 몸에서 나와서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결론은 오히려 더 단단하게 하나가 된 두 사람의 모습이다. 성경은 그들을 “한 몸”이라는 결합된 형태로 표현한다(창 2:22-24).아담과 하와라는 한 몸의 결합은 풀로 붙인 것이 아니라 아예 용접한 상태였다. 나무 조각 두 개를 강하게 붙이기 위해서 우리는 주로 접착제를 쓴다. 접착제는 두 개를 강력하게 하나로 묶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붙어있는 두 개는 여전히 두 개이다. 그러나 용접은 전혀 다르다. 용접이 하는 것은 접착이 아니라 융합이다. 융합에 의해 두 조각은 아예 하나가 된다. 접착제로 붙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각각의 금속이 녹아서 아예 새로운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 금속이 녹는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특징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결혼이 이와 비슷하다. 단지 남자가 주도한 계약에 따라서 결합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결혼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 따라서 새로운 창조물이 되기 위해서 융합된다. 물론 창세기 3장의 타락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까지도 영원히 바꿔버렸다. 원칙의 목적타락의 여파로 성경의 구속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죄 많은 인간의 손에서 결혼은 이제 추악한 일탈을 겪는다. 족장들의 실패를 지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로 나간 하나님은 그들에게 결혼에 관한 법을 주셨다. 이방 여자들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도망쳐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을 우려한(출 34:11-16) 하나님은 앞으로 정복할 땅의 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단히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신명기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반복된다(신 7:3-4). 그리고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포로들에게 선포된 10장의 언약 갱신 의식 과정에서 이 주제를 다시 강조한다. 이 명령이 21세기 서양인의 귀에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하나님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순결한 혈통이 아니라 순결한 예배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순결하게 예배드리는 것을 중시한다. 그리고 이 명령의 중요성은 솔로몬 왕의 생애에서 생생하게 드러났다. 솔로몬: 케이스 스터디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오로지 하나, 백성을 인도할 지혜였고 그 사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왕상 3:10). 하나님은 상으로 그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부와 지혜를 주셨다(왕상 4:29-34). 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지혜와 다스림을 기이히 여기고 그로 인하여 여호와를 송축하였다(왕상 10:1-10). 그러나 비극적으로 솔로몬은 그를 여호와에게서 돌아서게 한 많은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 “솔로몬은, 자기의 주 하나님께 그의 아버지 다윗만큼은 완전하지 못하였다”(왕상 11:4).하나님의 풍성한 지혜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에서 여전히 돌아섰다. 나는 솔로몬과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주변의 이야기지만, 나는 여태껏 믿지 않는 배우자를 만나서 믿음이 더 깊어지고 주님과 더 가까워진 그리스도인을 만난 적이 없다. 불신자와 결혼한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거부하는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단지 불경건한 길에 들어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과 융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스라엘 이야기가 아닌가? 교회는 다르지 않을까?’구속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옛 언약으로 정의되는 이스라엘이라는 지정학적 실체를 초월한다. 따라서 새 언약으로 정의되는 교회 시대에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결혼은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변하지 않았다. 비록 그리스도의 왕국은 물리적 경계로 정의되지 않고 대신 땅 끝까지 확장되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거룩한 나라”이며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도록 부르심 받았다(벧전 2:9, 15).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로 이 결혼 윤리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신자와 결혼한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라면 이혼하지 말라고 말한다(고전 7:12-17).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결혼인 경우에 그 자체로 인정하신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미혼자를 향한 그의 명령은 전혀 다르다. 반드시 “주 안에서만”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7:39). 교회에 대해서 보다 더 광범위하게 설명하는 다른 서신서에서 바울은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매지 말아야”(고후 6:14) 한다고 말한다. 결혼의 최고 목적우리가 결혼을 갈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제일 수도 있고, 함께 정착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좋은 사람”을 찾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이것이 나쁜 욕망은 아니지만, 우리는 모든 욕망을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아래 두고 그분의 목적에 따라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결혼의 목적은 무엇인지 우리는 쉬지 않고 물어야 한다. 돛이 올라간 배는 의도하든 아니든 바람을 타고 떠내려가기 마련이다. 배는 그렇게 움직이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결혼도 다르지 않다. 불신자와 평생을 약속하고 서로에게 충실하며 가정을 꾸리게 되면 누구라도 세상 바람에 휩쓸릴 것이다. 하나님은 결혼제도를 사랑하신다. 불신자도 얼마든지 좋은 결혼생활을 할 수 있고, 불신자 간의 결혼을 통해서도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지 결혼이라는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데에 만족하면 안 된다. 결혼이라는 배를 만드신 분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결혼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 살 때 우리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남편이 자기 자신을 죽이고 또 아내가 십자가와 같은 남편의 리더십에 사랑으로 복종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자(엡 5:21-33).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는 예수님의 사랑의 산 증거로서 함께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는 불신자와 어떻게 예수님을 중심에 둔 결혼의 성약을 맺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결혼 생활이 어떻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심오한 결혼의 신비를 온전히 반영할 수 있겠는가? 연합이라는 목적을 삶의 정면과 중앙에 위치시키자. 결혼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른 방법일까? 하나님의 영광과 명성,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더 멀리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망을 중심으로 결혼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배우자는 오늘도 믿음의 경주를 인내하면서 달리도록(히 12:2) 돕는 사람, 하나님을 더 경배하도록 돕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도록 도와줄 사람이다. 믿는 자는 믿는 자와 결혼함으로 하나로 연합한다. 원제: Christians Should Marry Christians?but Wh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과거에 얽매인 삶을 넘어서
by 정현구
2023-08-07
내일이 더 좋은 삶을 위해서는 과거에 묶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과 타인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교훈을 얻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지금 해야 할 것에 더욱 매진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은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아라. 이런 질문은 지혜롭지 못하다”(전도서 7:10). 과거의 영광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과거만 되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현재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찾고 그것에 집중해야 합니다.전도서 7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는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그런 과거가 있습니다.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은 후회되는 결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거에 사로잡혀 늘 후회하고 살면 안 됩니다. 어떤 이유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건 과거는 이미 끝난 일이고, 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일입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셨다면 그것을 내가 곧게 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붙잡고 후회하면서 고민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지난 과거를 큰 섭리 안에서 받아들이고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과거에 대해서 자랑거리가 많았던 사람이었지만 과거의 영광과 추억에 매여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도 할 수만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 과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매이지 않고 회심 이후 훌훌 털고 일어나서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립보서 3:13-14).바꿀 수 없는 것, 이미 지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체념적이고 운명적 자세로 살면 안 됩니다. 바꾸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추구해야 할 목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그런데 이와 함께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또 바꾸어야 할 것은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잘 알려진 기도문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하나님,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도록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나에게 허락해 주소서.”전도서 7장 14절이 그런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살다 보면 형통한 날도 오고, 또 곤고한 날도 옵니다. 언제 어떤 일이 찾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형통함과 곤고함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모든 사건 속에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과거에 매이지도 말고 다만 푯대를 향하여 나아갈 일입니다.‘해 아래의 관점’으로 볼 때 결코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해 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 경기를 시작하던 그 첫 출생의 날, 가족들로부터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그날만이 좋은 날은 아닙니다. 인생의 경주 속에서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 날이 있지만 그런 날이라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이 모든 좋은 날들은 추억의 뒤안길로 물러갑니다.우리에게는 더 좋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골인 지점에 들어섰을 때 주님에게서 받을 박수갈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소망이 있을 때,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을 수 있고,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내일이 두렵고 불안한 것이 아니라 내일이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되는 것입니다. 내일이 더 좋은 삶, 이 삶이야말로 우리가 열정을 품고서 추구해야 할 참으로 멋있는 인생이 아닐까요! 내일이 더 좋은 삶, 이 삶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요 영생입니다.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온라인 식단
by Trevin Wax
2023-08-01
우리가 하루에 보고 듣는 정보의 양은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끊임없이 밀려드는 정보 과부하로 우리의 감각, 특히 영적 감각은 점점 더 무디어진다. 무감각이 미치는 영향은 단지 사소한 사건까지도 쉬지 않고 스크롤하는 엄지손가락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점점 차가워진다. 단지 기사 하나를 통해서 자연재해나 끔찍한 비극을 접한 우리는 즉시 다음 기사로 넘어간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논평, 아이들이나 동물이 나오는 재미있는 비디오, 그리고 건강과 웰빙을 개선하라는 각종 기사를 스크롤하기에 정신없다. 그 결과가 뭘까? 모든 게 흐릿해진다. 너무 많은 정보, 지혜라고는 찾을 수 없는 시끄럽기만 한 배경이다. 나는 매일 소셜 미디어에 시간을 할애한다. 때로는 꽤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더불어서 신학, 정치, 문화 분석 등 다양한 경향이나 주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다양한 팟캐스트를 듣는다. 나는 다양한 미디어와 각종 정보 채널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서 얻은 유익에 감사한다. 그러나 아무리 소셜 미디어에서 좋은 것을 찾아도, 오로지 유익하고 교육적인 팟캐스트만 들음으로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자료만 섭렵한다고 해도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예를 들어, 우리는 얼마든지 팟캐스트 피드의 메뉴에 있는 “지금 듣기”(listen now)에 중독되어 그때그때 올라오는 최신 정보를 받지 않으면 조바심을 느낄 수도 있다.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모든 최신 소식을 듣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갈망은 우리의 영혼에 깊고 미묘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실온라인 세상에서 일어나는 최신 정보와 발맞추려는 욕구는 과거 아니, 최악에는 영원까지 희생하면서도 오로지 현재에만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지금 우리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시대에서 벌어지는 토론과 논쟁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앙의 기초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신실한 신앙을 유지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지 뉴스 속보나 이번 주 핵심 토론 주제 등을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바른 신앙인은 믿음의 기반에까지 더 깊이 파고 내려가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든든히 설 곳이 있음을 점검한다. 아무리 거센 문화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 없는 나무처럼 우뚝 서기 위해서 우리는 더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우리에게 뿌리가 없다면, 우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파편에 불과하다. 그리고 매일 소용돌이치는 뉴스와 정보에 현기증을 느낄 것이다. 내가 The Thrill of Orthodoxy를 쓴 목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이 주는 짜릿한 아름다움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교회가 만난 가장 큰 도전은 새로운 오류가 승리해서가 아니라, 오래된 진리가 더 이상 놀라움을 주지 않아서이다. 온라인에 종속될수록 성경의 깊고 풍부한 진리는 더 이상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은 마비되고 가슴은 쪼그라든다. 오늘 하루도 쓸모없는 정보로 머리를 가득 채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일에 대한 식욕을 느끼지 않는다. 얕은 곳으로 향하는 낡은 길세상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현재 일어나는 사건은 표면 아래 정도를 살짝 파헤치는 정도로 충분하다. 우리가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은 성경이 펼쳐놓는 이 세상의 위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우리는 왜 여기에 존재하나?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세상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기독교의 진리와 궁극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확실하게, 또 끊임없이 상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없이 천박해질 것이다. 두 마음을 품고 모든 길에서 헤매며(약 1:8), 오늘을 살아가는 데 가장 신실한 길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지혜조차 갖추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주의가 분산된 건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파스칼은 “혼자 방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인류에게 생기는 문제에 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산만함과 자극을 찾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독과 성찰의 시간을 피한다. 그러나 고독과 성찰이 사라진 기독교는 시들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정기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음미할 충분한 공간과 집중이 필요하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가장 상상하지 않았던 곳에서 기쁨과 안정을 찾을 것이다. 바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역사적 신경(creed)과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팟캐스트보다 신앙 신조? 수많은 신경에서도 특히 사도 신경, 니케아 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경, 이 셋이 두드러진다. 이 속에는 성경에 따라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분이 하신 일에 관한 설명이 담겨있다. 더불어서 기독교의 핵심인 삼위일체를 적시한다. 종교개혁 기간과 그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역사적 신앙고백서는 마치 잘 짠 직조물처럼 신앙의 충만함을 자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신경이 하나의 상부 구조, 그러니까 청사진을 제공한다면, 고백은 세부 사항을 채우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더 큰 명료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은 수천 페이지의 산문을 통해 세상에 대한 진실과 인간의 위치를 연구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물으셨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 신학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그분이 누구인가에 관해서 확신을 품고 고백하려는 우리의 시도이다. 신학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만나고 그의 의로운 성품과 구원 행위의 탁월함을 누리는 것이다. 고대의 신경은 끝없는 수다와 논쟁이 펼쳐지는 소셜 미디어 같은 온라인 세상과는 동떨어진 세계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신경이 중요하다. 신경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먼지투성이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지 문서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 우리와 우리의 사고방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신경은 신앙의 기초를 설명한다. 정통을 지키는 난간이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목소리이자 진리의 기둥, 그루터기인 교회의 증언이다(딤전 3:15). 신경은 모든 시대에 불어닥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를 안정되게 유지한다. 소음에 대항하는 전략소음이 진동하는 디지털 시대에 지혜를 기르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이라는 천박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실을 담은 우물에 우리 자신을 깊이 잠기도록 하는 관행을 구현해야 한다. 첫째, 매일 아침 “휴대폰보다 성경”이라는 규칙을 따를 것을 촉구한다. 휴대폰은 다른 방에 두고 구식 알람 시계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바로 옆에 성경과 기도 가이드를 준비하라. 세상의 소음이 끼어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시간을 보내자. 매일 아침 하나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삶이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나는 종종 Psalms in 30 Days(30일 시편 묵상)이라는 기도 여행 가이드를 따라서 아침 시간을 보낸다.) 둘째, 온라인 기술을 유익한 방향으로 전환하자. 영적 성장을 돕는 (성경에 깊이 잠긴 목소리, 신경 정통에 기반을 둔 조직 등) 소셜 미디어 계정을 팔로우하라. 팟캐스트 구독 리스트에 교회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을 추가하라. 셋째, 스크롤을 공부에 활용하자. 온라인 섭취에 대한 제한을 설정하라. 그리고 거기서 얻는 정보의 일부를 실질적인 신학 내용으로 대체하라. 하루에 15분 또는 20분 이상 앱을 사용하면 알림이 울리도록 휴대폰을 설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생각 없는 습관에서 마음을 스트레칭하는 습관으로 바꾸고 싶다면 최소한 소셜 미디어에 보내는 시간만큼은 책 읽는 데에 보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꿰뚫는 두꺼운 신학책을 하나 집으라. 가장 두꺼운 조직신학 교과서나 교회사 책이라도 하루에 두세 페이지씩 꾸준히 읽으면 일 년 안에 완독할 수 있다. 넷째, 혼자 하지 말라. 최신 뉴스보다 변치 않는 진리를 우선시하려는 믿음의 친구를 찾아라. 신경은 나 혼자 믿는 게 아닐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진술이다. 애초에 개인이 고백하는 믿음의 진술로 시작한 사도 신경은 세례 의식으로 발전했고, 세례식은 개종자의 선한 고백을 축하하기 위해 온 교회가 참석하는 축제가 되었다. 폭풍 속에서도 꾸준히 열매를 맺자마음 없는 스크롤에 대한 해결책은 오로지 집중뿐이다. 성경을 공부하고 고대 신경과 신앙고백을 숙고하는 것은 우리가 지식과 지혜를 키움으로 예수님을 더 잘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다 최신 소식에 요동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오로지 주님께 뿌리를 내림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변하는 뉴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다시 일깨워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만날 격동의 시대에도 꾸준히 열매 맺는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원제: Man Cannot Live on Feeds Alone: The Christian Diet for a Digital Ag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적 게토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by 최창국
2023-07-28
그리스도인은 영적 깨달음이나 경험을 종교적 차원에만 제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 경험은 일상의 영역에서도 경험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일상의 영역에서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일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대인 공동체는 뉴욕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병원과 의료 혜택을 확장하고, 예술과 문화센터들을 만들고, 노인들을 보살피며, 젊은이들을 길러내는 탄탄한 사회로 이끌었다. 성경의 유산과 신앙에 기대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에 헌신했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역사하셨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팀 켈러, 일과 영성, 227). 하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에 의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 깨달음이나 경험도 종교적 차원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성은 교회 공동체나 종교 기관에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일상의 여러 영역에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 덕분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일반은총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일반은총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적 게토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빠지기 쉽다. 영적 게토주의는 기도와 같은 종교적 활동만을 통해서 영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스도인이 일반은총의 개념이 없으면 “스스로 문화적인 게토에 들어앉아 자급자족하는 데 만족할 가능성이 높다. 크리스천 의사에게만 치료를 받아야 하고, 크리스천 변호사에게만 일을 맡기고, 크리스천 상담가의 말만 듣고, 크리스천 예술가의 작품만 즐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선물을 쏟아부으시면서 상당 부분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맡기셨다”(팀 켈러, 일과 영성, 237). 하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며, 영적 경험도 종교적 차원에만 종속되는 것도 아니다.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 또는 영적 장소와 세속적 장소로 구분하거나 범주화하는 데서 영적 경험의 장을 잘못 이해하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잘못된 구분이나 왜곡된 범주화는 영적 경험을 교회나 종교기관과 같은 특별한 곳에서만 할 수 있다고 여기게 하였다. 일상의 영역인 정치 사회 교육의 영역에서는 영적 경험을 할 수 없다는 왜곡된 신념을 갖게 하였다. 신학적 관점에서 영적 경험은 분명히 특별은총의 영역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일반은총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영적 경험과 생활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영적 차원, 윤리적 차원, 사회적 차원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바른 것이지만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범주화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범주화하여 일상의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차원들을 영적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길 때 영적 게토주의를 낳을 수 있다. 영적 게토주의는 영적 경험이나 깨달음의 장을 교회나 종교적 기관으로만 한정하거나 영적 또는 신령한 직분(spiritual estate)을 종교적 일이나 소명으로만 여길 때 심화될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고린도전서의 ‘부르심’(고전 7:24)이란 단어를 ‘직업’을 의미하는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해서 신령한 소명을 종교적 소명으로만 여긴 중세 교회를 비판하였다. 중세 교회는 신부와 수도사 또는 수녀만을 신령한 직분이라고 여겼다. 신령한 직분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관점은 일상의 노동이나 직업은 영적인 일과는 무관하다고 보았을 뿐 아니라 신령한 직분이 아니라 천박하지만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 루터는 “교황, 주교, 주부, 신부, 수도사들을 ‘신령한 직분’으로 정하면서 왕족, 귀족, 장인, 농부들은 ‘세속의 직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지어낸 허구이다. 철저한 기만이요 위선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였다(Martin Luther, Three Treatises, 12). 루터에게 직업이나 일을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관점은 영적 경험이나 깨달음도 교회나 종교적 기관이나 종교적 활동에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에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층 짜리 집에 비유했다. 아래층은 평범하게 지속되는 잘 정돈된 일상적인 삶을 가리키고, 위층은 기도하며 가꾸어 나가는 영적 삶을 가리킨다. 온전한 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체적, 정서적 세계와 영적 세계 모두를 가꾸어야 한다고 역설했다.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도 영적 거룩함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에게 전화하는 일에서 거룩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일기를 쓰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고, 설거지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차원들을 거룩한 삶 또는 영적인 삶과 일체화시킴이 없으면,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교는 인간의 상황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만큼 타당성을 잃게 된다. 일상을 떠난 영적 추구는 거룩한 것을 이상화시키거나 고귀하게 만들려는 의도와는 반대로 오히려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거룩한 것에 대하여 순전하게 느낄 감수성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적인 삶은 작은 일상의 활동 속에서 싹이 나고, 햇순이 돋고, 꽃이 피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일상적인 모든 것이 은혜의 통로가 된다. 그것을 세속에 맡기는 것은 이원론에 굴복하고 만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실체를 인정하는 사람은 삶의 부차적인 것과 본질을 더 명확히 구분할 수 있고, 또한 두 가지를 모두 유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모든 삶에서 영적인 렌즈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펼쳐지는 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넓게 충만하게 누리는 방법을 놓쳐서는 안 된다. 프란시스 휴댁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 생활이 건조해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를 기도나 교회생활 외에도 폭넓은 경험을 통해 역동적인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통 ‘쉼, 자연, 관계’ 같은 것을 통해 발견된다. … 기도가 갑자기 안 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삶에서 실제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 새로운 감격과 행복이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Francis Houdek, Guided by the Spirit, 88-9).하나님의 은혜는 기도를 통해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산책하고,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고, 가족과 함께 여행하고, 노동하고, 정의를 위한 사회 운동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숙면하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by Joe Carter
2023-07-21
취미가 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나는 “딱 하나, 낮잠.”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이 말이 올해 들어서 단지 농담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매일 퇴근 후 나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잤다. 그런데도 피곤이 풀리지 않아서 토요일에는 어김없이 늦잠을 잤고, 또 주말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낮잠을 잤다. 그런데 그건 상황을 악화시켰다. 자도 자도 항상 피곤해하는 내가 혹시 계절성 정서 장애(SAD)나 겨울 우울증 같은 병이 있는 건 아닌지, 아내가 의사를 만나보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내게 문제가 된 것은 만성으로 굳어져 버린 나쁜 수면 습관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굳이 의사까지 만날 필요가 없었다. 젊었을 때는 카페인의 힘으로 나름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 더는 이 문제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나쁜 수면은 가족과 직장, 신체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나의 영혼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잠, 영성 훈련시편에서 다윗은 평화로운 잠이 믿음의 행위이자 겸손의 표시임을 보여준다. 다윗은 “내가 누워 곤하게 잠 들어도 또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시 3:5-6)라고 했다. 또한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시 4:8)라고도 고백했다. 숙면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가장 연약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제하시고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나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잠은 믿음과 겸손의 표시이자, 동시에 영성 훈련이라고 D.A. 카슨은 말한다. 우리가 이 우주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일이 숙면을 취하는 것이다. 철야 기도가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다. 밤새도록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영성 훈련을 하려면 몸이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성 훈련과 마찬가지로 가장 효과적인 수면을 위해서도 태도뿐 아니라 습관의 변화까지 필요하다. 다음은 휴식이라는 영적 활동을 더 잘 발전시키기 위해 내가 배운 몇 가지 사항과 실제적인 실천 단계이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라. 휴식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밤 얼마나 오랫동안 잤는가이다. 사람마다 수면 시간은 다르며 또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일생을 두고 변한다. 그러나 당신이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충분한 쉼을 위해서 꼭 필요한 양의 수면을 지금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다음은 나이에 따라서 매일 필요한 평균 수면 시간이다.6-13살: 9-11 시간 14-17살: 8-10 시간 18-25살: 7-9 시간 26-64살: 7-9 시간 65 이상: 7-8 시간 당신에게 필요한 수면의 양은 주로 유전적 구성에 기인한다. 그것은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통계를 참고해 말하자면, 잠을 적게 자도 별문제가 없을 그룹에 당신이 속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조금 자도 괜찮아 식의 농담은 그만두고 실제로 필요한 수면 시간을 계획하라.밤에는 블루라이트를 피해야 한다. 우리 몸에는 잠들 때와 일어날 때 영향을 미치는, 흔히 일일 주기 리듬이라고 알려진 자연 시계가 들어있다. 호르몬 멜라토닌을 언제 생성하는지 알려주는 게 바로 이 일일 주기 리듬이다. 멜라토닌 수치는 잠을 준비하는 저녁 중반에서 늦은 저녁 사이에 상승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밤 시간 내내 높은 수치가 유지되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기 직전에 떨어진다. 멜라토닌 수치를 방해하는 한 가지 요인이 빛, 특히 스펙트럼의 파란색 파장 영역에 있는 블루라이트이다. 하버드 대학의 신경과학자 앤-마리 챈은 이렇게 설명한다. “과거 연구에 따르면 빛은 멜라토닌을 억제한다. 이른 저녁에 접하는 많은 양의 빛은 일일 주기 지연을 일으켜서 생체 시계를 아예 나중 시간으로 재설정한다.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에 접하는 빛은 생체 시계를 앞당겨서 이전 일정으로 재설정한다.”당신과 눈과 뇌에 가장 많은 블루라이트를 쏘아대는 게 무엇인지 아는가? 맞다. 취침 전에 사용하기 좋아하는 모든 기기이다.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TV. 취침 전에 블루라이트를 방출하는 전자 장치를 사용하면 뇌는 명령한다. “멜라토닌을 분비하지 마라. 해가 떴고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가장 확실한 방법은 취침 전에 이런 장치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항상 가능하지는 않다. 다행스럽게도 노출을 제한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밤에 랩탑이나 데스크톱 컴퓨터를 사용한다면 무료 소프트웨어 f.lux를 다운로드하여 추가하라. 이 프로그램은 컴퓨터 디스플레이의 색상을 하루 중 시간에 맞게 조정해서 밤에는 따뜻한 색깔로, 낮에는 햇빛과 같이 만든다. 더 나은 솔루션은 블루라이트 차단 보안경을 사용하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 TV를 보거나 아이패드를 읽을 때마다 나는 Uvex S1933X Skyper Safety Eyewear를 착용한다. 저렴하고(아마존에서 $8.52) 비교적 편안하다. 파란색을 모두 걸러내므로 TV를 시청할 때 화면 색상이 아예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찾은 최고의 수면 도구 중 하나이다. (잠자리에서 보안경 끼고 있는 거 좀 웃기지 않나? 물론 그렇다. 하지만 나는 취침시간에 아이패드로 즐기는 독서를 그만 둘 생각이 없으니 사람들의 놀림 정도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다른 빛도 차단하라. 안타깝게도 블루라이트가 멜라토닌 수치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빛이 아니다. 외부에서 침실로 들어오는 빛―가로등, 자동차 조명, 달빛―도 수면에 영향을 준다. 방을 최대한 어둡게 해야 하므로, 창문에 암막 커튼 추가를 권장한다. 암막 커튼은 어디에서나 쉽게 살 수 있다. 차단 효능이 가장 높은 것을 선택하라. 빛은 99.9퍼센트 이상, 자외선은 100퍼센트 차단해야 한다. 암막 커튼이 아니라면 수면 마스크 착용을 고려해보라. 비행기에서 주는 것과 같이 저렴한 제품은 편안하지도 않고 효과도 없다. 제대로 된 제품을 구입하라. 내가 찾은 최고의 제품은 Sleep Master Sleep Mask이다. 눈을 완전히 덮고 벨크로 스트랩으로 단단히 고정하기에 나처럼 머리 크기가 농구공 정도 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된다. 25.90달러로 다소 비싸지만, 한번 사면 수십 년 동안 쓸 수 있고, 한 달만 제대로 써도 본전은 뽑을 것이다. (한 가지 단점은 새틴 소재로 만들어서 통기성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머리가 평소보다 더 따뜻해질 수 있으므로 침실이 덥고 습할 때는 권장하지 않는다.)시원한 상태를 항상 유지하라. 수면에는 온도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머리는 시원하고 (그래서 우리는 항상 베개의 시원한 쪽을 찾는다), 몸은 그보다 따뜻해야 한다. (뜨거운 머리로 고생하는 사람에게는 쿨링베개나 쿨링캡을 추천한다.)보통 실내 온도를 65도로 설정하면 이 두 가지 상태를 모두 다 달성할 수 있다. (나는 60도를 선호한다.) 너무 시원해서 편안하지 않다면 잠옷이나 시트, 이불을 덮어라. 방 온도는 65도에 불과해도 피부 온도는 90도 범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명심하라. 경제력이 허락하는 한 최고의 침구를 장만하라. 평균 수준의 자동차를 타고도 출퇴근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좀 더 편하게 출퇴근하려고 수만 달러를 추가로 차에 지출하는 게 미국인이다(예: 더 고급스러운 좌석, 더 많은 헤드룸). 하지만 이런 사람도 잊고 있는 게 있다. 자동차보다 보내는 시간보다 무려 네 배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침대에 투자하지 않는다. 고작 수백 달러를 쓰면서 많다고 투덜거린다.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이집트산 면을 구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더 비싸다고 해서 반드시 품질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몇 수”로 뽑았다는 소리에 솔깃하지 마라.) 그러나 생필품을 사고 여윳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침구류에 투자하라. 다른 건 몰라도 베개만큼은 최고의 제품을 사라. (나는 푼돈을 모아서 65달러를 주고 Palais Royale™ Pinnacle Goose Down Side Sleeper를 클리어런스에서 구입했다. 현명한 지출이었다.)알코올과 카페인에 시간제한을 두라. 알코올은 수면 패턴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늦은 시간에는 마시지 말라. 나는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대신에 다이어트 콜라를 정말 많이 마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다이어트 콜라를 마셨고, 자정에도 별생각 없이 마시곤 했다. (그렇지만 새벽 2시 30분 이후에는 안 마시려고 했다.)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내가 섭취한 모든 카페인이 30분 이내에 “내 몸에서 빠져나갈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살았다.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트레비스 브래드베리의 설명이다. 카페인의 반감기는 6시간이며, 이는 체내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데 24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이다. 오전 8시에 커피 한 잔을 마신다면, 오후 8시에도 아침에 마신 그 커피의 카페인이 25퍼센트가 내 몸에 남아있다는 말이다. 정오 이후에 마시는 음료는 취침 시간에 50퍼센트 수준으로 도수가 유지된다. 당신의 혈류에 흐르는 카페인, 복용량에 따라 부정적인 영향이 증가하는 모든 종류의 카페인은 숙면을 어렵게 만든다. 나는 낮잠 자기 전에도 또 밤에 자기 전에도 쉬지 않고 몸에 카페인을 들이부었다. 내가 잠을 자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게 당연하다. 요즘은 오후 두세 시 이후로는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는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하나의 시작이다. 규칙적인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도록 계획하라. 내가 어른이 된 이후 내게 “취침 시간”은 대부분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시간을 의미했다. 하지만 기상 시간은 그나마 규칙적이었는데, 시간에 맞춰서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의 취침과 그나마 규칙적인 기상 시간이라는 그 수학이 결코 몸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건 당신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토요일 늦잠으로 부족한 잠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의 생체 시계에는 따로 “주말”로 표시된 설정이 없기에 상황이 더 나빠져 갔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내 수면 패턴을 더 엉망으로 만들었고, 내 몸은 마치 시차 때문에 생기는 피로 비슷한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요즘 들어서 나는 취침과 기상 시간을 일주일 내내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규칙을 정했고, 페이스북을 확인하거나 넷플릭스 몰아보기를 하는 걸로 새벽 4시까지 깨어있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 시간에서 우선순위를 더 잘 조정하게 되었다. 이건 다 아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실행 여부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전혀 새롭지 않을 것이다. 나도 다 해봤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 “사람들에게는 지시보다는 자주 상기시켜주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취침 습관을 개선하기 위해 지금까지 내가 소개한 방법을 시도해보라. 되도록 다 활용해보라. 숙면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함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잘 관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라. (덧붙임: 위에서 소개한 제품이 팔린다고 내가 무슨 커미션을 받는 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글 속에 있는 Amazon 링크를 사용하여 구매하면, TGC가 약간의 수익을 얻는다.)원제: How to Love God by Getting More Slee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암에 걸린 은사지속론자의 고백: 나는 여전히 신유를 믿는다
by Tim Shorey
2023-07-20
나는 예후가 좋지 않은 4기 암 환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만지심으로든 또는 중보 기도를 통해서든, 신유를 믿는 사람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상황을 초월하여 또는 우회하여 즉각적이고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순간이 있다고 확신한다(고전 12:7-9). 그리고 그런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다른 이유가 필요 없다. 오로지 사랑으로 인한 하나님의 능력이 치유의 기적을 만든다고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 그런 역사가 일어날 때 육신은 해방을 맞고 영은 기쁘게 뛰며 입술은 찬양하게 된다. 한 가지 분명히 하자면, 나는 사기꾼 신유 은사자, 믿고 외치면 다 이뤄질 거라고 주장하는 종교 호객꾼, 번영 복음을 파는 행상인 또는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종교 전문가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은 나의 믿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몸과 영과 마음을 치유하는 실제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신유 능력을 믿는다. 진짜로 병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이름이 가진 권위에 의해서 완벽하게 치료되고 또 종종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으로 기도하는 중보에 의해서도 치료가 촉진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믿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암 환자이다. 나를 위한 수많은 기도가 있었다. 믿음도 충분하고 또 안수까지 받았음에도, 나는 여전히 암 환자이고 지금도 시계는 똑딱거리고 있다.이런 현실은 나를 믿음의 곤경에 빠뜨린다. 나는 치유의 은사를 확신하는 은사지속론자이지만 또한 동시에 낫지 않는 병이라는 현실에 빠진 사람이기도 하다. (콧물이나 모기에 물린 상처, 또는 종이에 베인 상처 등등의 자연 치료를 놓고 치유의 은사가 지속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치유도 나름 중요하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방을 차지한 두 마리 코끼리치유 은사 신봉자로서 나는 방을 꽉 채운 거대한 코끼리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첫 번째는 35년 동안, 365일 24시간 7일, 나를 떠나지 않는, 의사가 진단한 신경 손상 유발 두통이다. 두 번째는 4기 암이다. 이 두 가지 다 치유되지 않았다.아이러니는 고통스럽다. 나는 환자를 위해 기도했고 또 기도로 치유되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치유가 내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도 아마 나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바울도 치유의 하나님을 믿었지만 고쳐 달라는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다(고후 12:7-10). 마찬가지로 그의 동역자 드로비모도 낫지 않는 병 때문에 남겨져야만 했다(딤후 4:20).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사랑한 디모데의 고통스러운 위장병과 (낫지 않는) 병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위해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은 고작해야 적당한 양의 포도주를 처방하는 게 전부였다(딤전 5:23).비록 내 경험이 전혀 다른 현실을 반영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치유하실 수 있고 또 반드시 치유하신다고 믿는 것은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땅히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세이다. 내 경험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믿어야만 한다. 성경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과 경험 그리고 선호도 및 인식은 종종 틀리기 마련이다. 중간에서 살기그러나 이런 현실은 나를 실존적 수렁에 빠뜨린다. 사랑이 많으신 하늘의 아버지, 치유하실 수 있고, 또 치유하고자 하는 자비로운 사랑도 있으신 아버지, 게다가 종종 치유하시기도 하는데, 왜 나는 아닌가? 이럴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하나밖에 없다. 나를 위한 더 좋고, 더 현명하고, 더 사랑스러운 계획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기 위해 나 자신과 싸우는 길밖에 없다. 내가 아직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 그분의 놀라운 목적, 내가 알려야 알 수 없는 신비, 내가 아직 분별할 능력이 되지 않는 계획, 그리고 내가 아직 볼 수 없는 영광이 그분 안에 숨겨져 있음을 믿어야 한다. 나는 지금도 하루하루 암과 싸우며 살고 있다. 내 삶은 다음 두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끼어 있다. 겉보기에는 충만한 믿음으로 “믿고 선포하면 다 이뤄진다”며 모든 병이 다 낫는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뜻이면 낫게 하실 거야”라며 마치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상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 변명에 지나지 않는 믿음을 읊조리는 사람들 사이에 말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 중심을 아신다. 전자의 말투는 믿음을 가장한 주제넘음으로 들리고, 후자의 말투는 겸손을 가장한 의심으로 들린다. 나는 최대한 중도를 취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나의 하나님이 치유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성경과 실생활에서 그가 항상, 심지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전혀 치유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자기 백성이 영원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우주 최강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용광로 속의 하나님나는 점점 더 조심스럽게 침묵하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은 결코 예측할 수도 없고 내가 마음대로 길들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아간다. 그분은 회오리바람과 폭풍우 속에 계시고 천둥소리는 그분의 권능에 비추어 속삭임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무한히 자유롭고 길들지 않는 존재이다. 그분은 영원토록 거하시며 빛으로 어둠을 삼키시며 온 땅을 밤낮으로 두루 다니시며 자신의 강함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돌보심을 나타내시고 또 그때그때 목적을 이루어가신다. 그분은 무엇보다 자신의 영광을 펼치시는 분이다. 하나님 같은 분은 세상에 없다. 엇비슷한 존재도 없다. 할렐루야!(창 1:1-3; 대하 16:9; 욥 26:12-14; 사 46:9; 57:15; 나 1:3; 고후 4:6; 계 21:22-25).비록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나는 내 병이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고 시급한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세상에는 처리해야 할 죄와 구원, 사탄과 사망의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종종 질병을 사용해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 죄로부터 우리를 정화하고, 사탄과 세상에 신자의 삶을 유지하는 그분의 은혜를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 물질을 향한 육욕적인 사랑에서 멀어지도록 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궁극적인 목적지로 인도하신다. 죽음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를 더 이상의 질병과 죽음이 없는 영광 속으로 데려가신다. 하나님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현장으로 달려가는 우주의 119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고 항상 현장에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콧물감기 또는 암 4기에 걸리는지 아닌지의 문제보다 훨씬 더 깊고 개인적 또 우주적으로 중요한 일에 마음을 쏟고 있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이 모든 사실은 내게 세 명의 히브리 청년이 가졌던 믿음을 갖도록 했다. 하나님이 구원과 치유의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또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확증하는 믿음이다. 그러나 나도 그들처럼 하나님이 언제 그렇게 할지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오늘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변함없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자족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단 3:17-18).하나님은 용광로와 불 속에 빠진 나와 지금도 함께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상상하기에는 너무나도 놀랍고 지혜로운 무엇인가에 지금도 열중하고 계시다. 이것이 바로 영혼까지 지치게 하는 암에 걸려 약해지는 내가 매일 매일 쉬지 않고 싸워가며 지키는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이 내 앞에 놓인 길이 치유일지 아니면 천국일지 몰라도 오늘 하루 나를 지탱하는 생명줄이다. 원제: I’m a Continuationist with Cancer. I Still Believe in Healing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은사지속론
신유
치유
‘빈스’와 흙
by 양혜원
2023-07-19
서울에 있는 큰이모네 집은 마당이 있는 양옥집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많은 집이 그랬듯 마당에는 개가 있었다. 울산에 살던 우리는 방학을 이모네 집에서 보낼 때가 많았는데, 어느 여름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꼬물거리는 강아지가 여러 마리 있었다. 그해 여름, 또래의 사촌들과 나와 여동생은 각자 강아지를 한 마리씩 안아 들고는 신나게 데리고 놀았다. 원래 집 안에는 들이지 않는 강아지를 집 안에까지 안고 와서 놀다가 강아지가 마룻바닥에 쉬를 하는 바람에 이모에게 혼을 나기도 했다. 자아의 경계가 아직 분명하지 않던 그 어린 시절, 나는 망설임 없이 강아지들을 끌어안았고 이뻐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털 달린 것들을 꺼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무서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다시 털 달린 것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둘째 아이를 보내고 나서였다. 힘들게 진통해서 낳은 아이를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심지어 보지도 못하고, 바로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보내서였을까. 불어난 젖을 물릴 아이도 없이 말려야 했던 나는 아무런 열매 없이 푹 꺼진 배가 그리 허전할 수가 없었고, 아이를 안아야 할 품은 너무도 공허했다. 그리고 그 공허함이 털 달린 것들에 눈을 돌리게 했다. 어느 가게에서 내 다리를 쓸고 지나가는 고양이가 사랑스러웠고, 품에 안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양이를 들일까 생각했다. 그 무렵 지인도 마침 고양이를 막 키우기 시작해서 한참 이야기를 늘어놓았기에 솔깃했지만, 개냥이 같은 고양이를 만나는 것은 확률에 의지해야 했기에 우리는 강아지를 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온 녀석이 빈스(Beans)다. 하지만 원해서 들였음에도 나는 쉽게 친해질 수가 없었다. 처음에 그 강아지 녀석이 부엌에서 일하는 내 다리를 스쳐 지나갔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라 ‘엄마야’ 비명을 지르기까지 했다.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으니 돌아다니는 게 당연한데도 내 예상 안에 들어오지 않는 행동 패턴은 제법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빈스는 식구들이 일터로 학교로 나가고 나 홀로 집에서 번역 일을 할 때, 내 곁을 지키는 동지가 되어 주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한 번씩 집에 올 때면, 이러다 숨넘어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정신없이 좋아서 매달리며 나를 반겼다. 그 빈스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일본에서 연구원으로 머물 때였다. 저녁에 일이 있어 나갔다가 아들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 길거리에 서서 전화를 붙들고 나는 수화기 건너편의 아들과 같이 한참을 울었다. 이유를 모른 채 둘째를 보내고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들였던 빈스가 또 이유를 모른 채 떠났다. 그러한 빈스의 죽음은 이제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하나의 신호처럼 내게 다가왔다. 일본에서 체류 연장을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면서 가능성이 별로 없겠다 생각하던 차이기도 했지만, 그냥 그 모든 것이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모아졌다. 돌아와서 취직을 하기는 했으나, ‘코시국’으로 나가는 날보다 집에 있어야 하는 날이 많던 그 시절, 나의 외출은 글을 쓰거나 연구를 하다가 마스크를 쓰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게 거의 전부였다. 사람과의 만남이 극히 제한되었던 그 시절에 내가 자주 마주쳤던 또 다른 털 달린 것은 비둘기 떼였다. 비둘기에 대한 기억은 강아지에 대한 기억과 달리 썩 좋지 않다. 어린 시절 동네 놀이터에 늘 무리로 구구거리던 비둘기 떼 틈새로 자전거를 타고 휙 지나갈 때 사방으로 흩어지던 그 모습은 재미가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생물체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느 날,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장이 다 드러난 비둘기 사체를 보고 난 이후로 비둘기는 조류 공포증이 생길 만큼 꺼리는 대상이 되었다. 대영 제국의 전성기를 자랑하는 트라팔가 광장의 높디높은 넬슨 제독 석상에, 인간의 업적을 비웃듯 그 머리와 어깨와 얼굴에 사정 없이 배변을 해대는 비둘기 떼의 광경도 비둘기에 대한 인상을 개선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마스크를 끼고 귀에는 이어폰을 낀 채 음악이나 오디오북을 들으며 또 하루의 산책을 하던 어느 날 나는 비둘기 떼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고, 무심결에 비둘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빈스의 눈에 비하면 아주 작은 팥알 같은 눈이었지만, 그와 비슷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빈스가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아, 나는 언제 한번 내가 사는 세상을, 그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제대로 살을 맞대어 본 적이 있던가? 이런 털 달린 것들이 밟고 다니는 흙의 질감을 한 움큼 제대로 만지며 느껴본 적이 있던가?’ 사실 내게 이 세상은 가능하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세상이었고, 거리를 두고 싶은 세상이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라고,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는 기독교 세계관도 배웠고, 그런 책들도 여러 권 번역했지만, 결국 거기에서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을 판단하여 뒤집으라는 말뿐, 내가 사는 세계와 친밀해지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내가 비둘기를 새삼스레 보며 빈스를 떠올리고, 인간의 원료인 흙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더듬어 보니 그 시작은 아무래도 내 아이를 잃은 그 일이었지 싶다. 그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강력한 힘으로 나를 세상의 밑바닥으로 던져 넣었고, 그 바닥에서 아마도 나는 조금씩 세상의 것들을 제대로 마주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 시작에 빈스가 있었다. 나의 글쓰기가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글쓰기와 이 바닥의 경험, 나의 흙됨을 마주하는 이 경험이 가지는 관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미국의 가톨릭 여성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소설 쓰기는 손에 흙을 묻히는 행위라고 했다. 소설은 인간에 대한 것인데 인간은 흙에서 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에 흙 묻히는 게 싫은 고상한 사람들은 소설을 쓰지 말 것을 권했다. 나는 이 말이 비단 소설 쓰기에만 국한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다는 이 땅, 이 세상, 그 안의 인간을 알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은 모두 손에 흙을 묻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신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알기 위해서도 흙의 것들을 알아야 한다. 혹 흙을 경유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수단이 없는 나와 같은 범상한 사람들은 계속 손에 흙을 묻히기로 택하는 수밖에. 글과 흙. 생뚱맞은 조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머슴은 땅에서 비로 마당을 쓸고, 선비는 몇 계단 올라 있는 방 안의 책상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글을 읽었던 시절의 습성 때문일까. 우리는 글을 높은 단상에 올리고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습성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글을 통해서 아주 특별한 한 사람을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본 사람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에 대한 기록, 곧 글을 통해서이다. 이 글을 처음 기록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우리에게 만지는 것처럼 전달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흙의 모습으로 오신 이분을 글로밖에 전달할 수 없다면, 분명 그 글은 손에 흙을 잔뜩 묻힌 글일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시간과 공간과 문화를 건너 우리에게 전달된 이 글에서 우리는 흙은 툭툭 털어버리고, 경건주의자는 경건주의자대로, 자유주의자는 자유주의자대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 글을 이용할 때가 많다. 내가 번역한 작가들 가운데 이러한 식으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을 가장 강하게 비판한 사람이 유진 피터슨이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동네에서 축구를 하는 소년들을 보면서 그렇게 또래들과 땀범벅이 되어 흙바닥을 뛰어다녔을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그가 성경의 글을 통해서 알게 된 예수님은 그런 예수님이었다. 흙을 잔뜩 묻힌 글에서 그 흙을 제대로 읽어낸 셈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글과 흙의 조합은 사실 매우 중요한 조합이다. 그래서 나의 글도 어느 순간 흙을 초월해 거창한 이념의 세계로 넘어가 버리지 않을까 조심하게 된다. 그때 잃는 것은 단지 흙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흙이 된 한 사람을 앎으로써 얻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by 정현구
2023-07-07
내일이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늘 현재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분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을 생각하고 살 때의 유익은 현재를 더욱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현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함이라”(전도서 7:3). 이 구절이 말하는 슬픔은 삶에 대한 비관에서 나오는 그런 슬픔과 근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깊은 반성에서 나온 회개와 참회를 의미합니다. 또 이 구절이 말하는 웃음은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웃음이 아닙니다. 삼류 코미디가 주는 억지웃음을 의미합니다.세상은 억지웃음을 통해서라도 행복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만큼 삶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허무한 인생의 참된 해결책이 아닐뿐더러, 인생에 대한 깊은 고민도 고뇌도 갖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생을 깊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10).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는 그런 근심과 슬픔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참회의 눈물이 값싼 웃음보다 더 고귀한 것입니다.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회개에 이르는 근심으로 이끌까요? 그중의 하나가 고난입니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전도서 7:14). 고난은 자신과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회개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종종 고난을 주십니다. 또 하나는 타인의 죽음입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도 결국 관에 누울 것을 생각할 때 회개하게 되고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위로와 기쁨도 주지만 또한 책망하고 고민하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전도서 7:5). 지혜자의 책망 즉 말씀의 책망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타인의 죽음을 통한 진실한 고민이 없고, 말씀을 통한 책망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들의 값싼 웃음만 찾아다니거나 탐욕에 빠져 영혼이 어둡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전도서 7:6).고난을 만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회로 삼고, 가까운 친구나 가족의 죽음을 볼 때마다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것들이 나의 허물과 죄를 생각하게 해주거든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런 애통이 진정 내일이 좋은 삶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슬픔
애통
죽음
근심
벌레 함부로 부르지 마라. 듣는 벌레 기분 나쁘다.
by 필립 정
2023-06-26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은 대하기 어렵다. 마치 교회에 처음 간 사람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비난조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그의 소설 변신(The Metamorphosis)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주인공 그레고르는 잠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변한 자기 모습을 가족에게 보일 수 없어 출근을 미루다 어쩔 수 없는 책임감 (그는 생계 부양자이다) 때문에 방문을 열고 나선다. 그러나 자기의 외침은 제대로 들리지 않고 가족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를 죽이려 든다. 결국 아버지가 던진 사과의 한 조각이 몸에 꽂혀 벌레의 모습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이 이야기는 당연히 픽션이다. 그러나 작가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후반 그는 어느 사회에도 소속감을 느끼기 힘든 유대인 태생으로 비교적 세속적으로 성공한 아버지 밑에서 성공을 강요받으며 불안한 소년기를 보낸다. 심약하고 예민한 한 소년이 그 밑에서 느꼈을 불안감, 소외감, 죄책감까지 그 글에 잘 녹아 있다. 그런데 그의 글 ‘변신’이 요즘 한국에선 전혀 낯설지 않다. 자기들이 혐오하고 불쾌한 대상을 일컬어 각종 ‘충’이라 버젓이 부르고들 있다. 예전의 식충이, 좀 벌레, 돈벌레 따위보다 훨씬 모욕적인 표현이라 지면에 담기에도 불편한 정도다. 교회 안에서는 어떨까?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나도 엄격한 장로교회에서 그런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결코 유쾌하지 못한 설교가 있다. 이 설교는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을 인용하여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요지였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그리고 없어야 할 사람’이다. 난 이후에도 같은 설교를 브라질에서 선교사로 있는 분에게 들었고, 계속해서 몇몇 목회자들에게 여러 번 들었다. 얼마 전에도 잘 알려진 목회자 한 분이 설교 첫머리에 이 말을 인용하여 설교하는 것을 듣고 과연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분류해도 될까 싶었다. 이런 설교에 대해 오래 고민해 오다 이제 아니다 싶어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가 이 설교를 듣는 심정으로 글로 반박하려 한다.우선 프랜시스 베이컨의 비유, 세 부류의 사람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첫째, 없어야 할 사람은 “거미같이 줄만 쳐 놓고 덫을 놓아 남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둘째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은 “개미같이 자기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쌓아 놓는 사람”이라고 했다. 셋째 꼭 있어야 할 사람은 “꿀벌같이 자기를 위해서도 일하지만 남을 위해서도 좋은 일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벌레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우선 베이컨이 어떤 오류에 빠졌는지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생태계 속에서 필요 없는 무익한 벌레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면서도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거미는 덫을 쳐 인간에게 해로운 모기 파리 같은 온갖 벌레를 잡아먹고 자기도 참새의 먹이가 된다. 거미가 있어야 새가 살기 때문에 없어야 할 동물이 아니라 꼭 있어야 한다. 개미는 생태계 최고의 공헌자다. 땅을 갈아 영양 성분을 증진하고 씨앗을 옮겨놓는 과정에서 식물 종자를 널리 퍼뜨린다. 그들이 일군 땅이 얼마나 미네랄이 풍부한 비옥한 땅인지 알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란 생각이 달라진다. 꿀벌도 겨우살이를 위해 꿀을 모으지만 곰과 사람이 와서 빼앗아 먹어 다른 동물을 이롭게 한다. 그런데 사람 눈에 당장은 꿀이 가장 큰 소득이라 꼭 있어야 할 동물이라고 정의해 버린다. 아무리 해석자가 인간이라고 해도 너무 찰나적이고 근시안적이지 않은가!베이컨은 자연의 개체가 서로 연관되고 영향을 미치며 하나가 되어가는 하나님이 주신 생태계 전체의 큰 그림 안에서 한 벌레의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해 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비유를 인용해 설교하면 꿀이 탐나는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위치에서 설교하는 느낌을 주게 된다. 이런 베이컨의 비유는 자승자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기가 말한 ‘종족의 우상’(인간이라는 종족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믿음), 동굴의 우상(개인의 좁은 소견에 갇혀 비롯된 착각들) 에서 자신조차도 못 벗어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비유를 인간 사회나 교회에 적용할 때 더 큰 피해가 그 공동체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연 생태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기식(寄食)의 삶을 살아가며 도움이 되는 것처럼 인간 공동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상호작용하며 도움을 주고받는 인간 사회는 서로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안전한 망을 구축해 나간다. 이 기식의 삶이 프랜시스 베이컨 이후 삶과 문화를 얼마나 기름지고 풍성하게 했는가! 평생 그림 몇 장 못 팔며 동생의 생계비에 기대어 살던 광인 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결혼해 가족 부양을 하지 못하고 근근이 살면서 작곡만 하다가 결국 아내와 딸을 잃고 비참하게 살다 죽은 스테판 포스터(Stephen C. Foster, 1826-1864), 그들 역시도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들의 집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나라 잃고 방황하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못해 평생을 자기 시가 부끄럽다고 자기반성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윤동주(1917-1945), 19세기의 그 많은 낭만주의 음악가, 소설가, 인상주의 화가들도 거의 당대에는 사회에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들은 주위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빚을 져가며 겨우 살아야 했다. 이런 기준이라면 철학자, 사상가, 목회자도 결코 있어야 할 사람의 범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현대 영국의 작가 조앤 롤링(J. K. Rowling, 1965-)도 자신도 한때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는 최고의 실패자였다고 하버드 졸업생들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던가.물론 설교자들이 자본주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보려고 프랜시스 베이컨을 인용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신앙적 관점에서 있어야 할 사람과 없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려는 시도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설교가 결코 성경적이라는 근거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 문제가 발생한다.성경의 인간 분류를 보자. 의인과 악인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 분류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칭의론에서 출발해야 한다. 설교자는 이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설교자의 현재 시점에서 용서받은 의인과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있다는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의인은 교회에 있어야 할 사람이고 악인은 없어야 할 사람이라고 설교할 목회자가 어디 있겠는가. 다음의 분류도 마찬가지다. 영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고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 죄의 성향을 따르는 사람이다. 여기서도 현재 사람들의 영적 성향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분류를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사람과 없어야 할 사람으로 등치시켜버리는 잔인한 설교를 하고 싶은 목회자가 있을까 싶다.설교자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이런 죄인이나 육에 속한 사람은 사실 없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잃어버리면 안 되는 사람으로 성경에 나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눅 15:1-17)에 나오는 그 양은 줄곧 목자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목자는 자기의 뜻을 잘 따르는 이미 구원받은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제 갈 길로 간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찾은 후에는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어 그 기쁨을 같이 나눈다. 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서 죄인은 없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꼭 찾아야만 하는 있어야 할 양인 것이다. 이런 목자의 심정에서 설교가 출발해야 한다는 원리를 모르는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용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에 존재하는 교회에서 설교자의 말로 ‘있어야 할 사람, 없어야 할 사람’이 선포되는 순간 엄청난 역효과를 불러온다.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세상 속에 있다. 교회도 그렇다. 형식은 비영리 단체지만 영리 단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헌금을 걷어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보조해야 하고 토지를 마련하고 더 큰 교회로 이전을 하기 위해 헌금과 토지를 동산, 부동산 자본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남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게 못하면 어느 날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한다. 이런 사회와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라 세상에 속한 교인들도 설교를 자신들의 언어로 재해석해서 듣는다. 그래서 설교자들의 언어는 쉽게 오해된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없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언어들은 교회라는 조직에 필요한 사람, 필요 없는 사람으로 들려 버린다. 그 설교를 하는 순간 소통의 불능 상태가 와 버린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시장의 우상(단어의 정의와 대상의 불일치의 오류)을 교인들은 경험하고 만다. “여기 누군가 교회 필요 없는 사람이네. 성경에 그런 얘기 없는데….” 당연히 설교자와 듣는 자의 관계가 깨져 버리고 반박이 따를 수밖에 없다. 어떤 흉악한 죄인을 향해서도 “참 불쌍하고 측은한 사람입니다. 주의 은혜의 손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라는 설교가 아니면 끊어진 인간의 소통은 다시 회복될 수 없다.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and To Be), 사랑의 기술(Art of Loving)은 내 젊은 시절의 베스트셀러였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들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의 생존 양식에 있어서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이 있다고 하였다. 사랑은 그 인격과 삶, 존재에 대한 사랑이지 소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흔한 말로 “난 네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다른 필요가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야”란 뜻이다. 반대급부가 없는 무조건의 사랑이 교회가 들려줘야 할 메시지다. 조건을 붙이면 반대급부가 없을 때 사람을 벌레라 부르게 되어 있다. 벌레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르고 혐오의 표현으로 사람에게 없어져야 할 벌레라 부르는 열등감의 군상들…. 혹시 설교자들도 그런 자괴감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벌레의 비유를 가져다 쓰지 않았으면 한다. 벌레!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른다.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의미 없는 삶은 없다.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이야 오죽하랴.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가 그런 설교를 듣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람을 함부로 벌레라고 부르지 말자. 듣는 벌레 기분 나쁘다.”
사실, 감정,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
by Adam Mabry
2023-06-13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세요?”절망에 빠져 눈물 흘리며 이런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가족의 질병이든, 교회 문제이든, 죄가 초래한 마음의 상심이든,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없는 거 같이 느낀 순간이 적지 않다. 이건 비단 나 혼자만 느끼는 감정이 아닐 것이다. 살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어쩌면 아주 많은 시점에서)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강하게 느끼기도 한다. 고통과 트라우마와 슬픔을 겪으면, 머리는 하나님이 항상 곁에 계신다고 상기시켜 주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며 멀리 계신 하나님을 비난한다. 사실과 감정, 함께하심과 부재 사이의 불협화음을 해결하지 않고 방치하면, 그나마 다행스럽게 낙담 정도로 끝날 수도 있지만, 최악으로는 믿음 자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하나님이 떠나고 없다고 느낄 때,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에만 집착하면 마음이 굳어질 뿐이다인생이 무너질 때, 내가 의지한 것은 견고한 진리의 발판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facts)은 그 자체가 담고 있는 의미만으로도 측량할 수 없는 위로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인기 있는 어느 팟캐스터의 단골 메뉴 문장을 인용하자면, “사실은 당신의 감정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세상에는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수도 없이 빠진 시궁창이었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면서 내 인생을 향한 몇 구절의 성경 말씀을 고백하며 앞으로 더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곤 했다. 이게 내가 늘 하던 방식이었다.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은 단순하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니? 아니야. 전혀 그렇지 않아. 하나님은 지금도 네 곁에 계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걸 진짜 느낄 때까지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살아.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진짜 느끼게 될 테니까. 진리는 네가 느끼는 감정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러니까 그냥 믿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얼핏 보면 이런 식의 접근 방식에도 지혜가 담긴 것 같다. 감정이 하나님을 비난할 때, 성경 말씀을 고백하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은 우울증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여정의 시작으로 아주 좋은 방법이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무엇이 거짓인지를 제대로 분별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백하는 진리는 종종 진리의 그릇된 적용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록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분이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성경의 약속을 고백한다면, 나는 진실한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감정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는 어쩌면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거짓을 대면할지도 모른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하나님의 부재가 주는 느낌이야말로 나를 몹시 두렵게 만든다는 점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감정을 깊이 관찰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곧바로 하나님의 부재라는 거짓말과 대결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곤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나를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성경의 진리를 고백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성급한 마음에 감정을 무시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감정이라는 선물을 마치 무용지물인 양 취급하는 완고하고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 감정만 중시하면 불안정한 존재가 된다감정을 무시하는 접근 방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패하기 마련이고, 결국 나는 모든 통제력을 잃고 감정이 내 존재 전체를 장악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 고통, 슬픔, 연민, 두려움이 나를 장악하도록 허용한다. 심지어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감정까지도 오롯이 나를 잡아먹도록 방치한다. 결국 분노에 빠진 나는 울부짖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 가장 소중한 관계를 해치는 감정의 폭발까지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아담, 당신 지금 꽤나 불안정하게 보이는데.” 그렇다. 그게 바로 요점이다. 불안정이야말로 과잉 감정이 초래하는 결과이다. 세상에는 감정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감정이 존재 전체를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연민의 진창 속에서 뒹굴면서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공감까지도 무기로 만들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진짜 느끼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싶어? 그러면 내가 뒹굴고 있는 진창 속에 당신도 들어와. 안 그러면 나는 당신이 나를 정말로 공감하고 있다고 도저히 느낄 수 없으니까.” 서양인 대부분이 감정 표현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강조하는 이야기와 노래, 시트콤 따위에 물들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길이지 결코 교회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이 떠난 것 같아서 분노할 때, 우리는 결국 처음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에 놓일 뿐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감정과 믿음 시간과 시련은 세상의 방법이 지혜의 길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다.성경은 하나님의 부재라는 극심한 상황을 직면한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박국의 시작은 하나님의 오랜 침묵 이후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얼마나 더 살려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합 1:2)라는 기도로 시작한다. 다윗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라고 탄식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부재가 주는 감정, 심지어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극심한 감정을 경험하고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나님이 떠난 것 같아서 내 감정이 불타오를 때도, 그는 여전히 일하시며 내가 다가오기를 원하신다. 감정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은 것은 내게 혁명과도 같은 전환이었다. 하나님은 내가 내 감정을 온전히 느끼길 원하신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감정까지도 들고 당신께 나아오길 원하신다.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고 느낄 때도, 하나님이 귀를 막고 있다고 느낄 때도, 심지어 지금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에게서 원하시는 길이다. 정체성에 집착하는 거짓된 복음에 빠진 오늘의 문화는 내가 가장 진실하다고 느끼는 것만을 표현하면서 살라고 요구한다. 오로지 그런 표현만이 진실하고 진정성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부재라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최악의 경험조차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현실로 바꾸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게 가능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괜찮다. 감정은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려주는 데에만 유용할 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감정을 직시하고, 그 감정까지도 하나님께 가져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당신 영혼의 바늘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가까워진 하나님을 느끼면서 당신은 이제 이전보다 그를 더 잘 알게 된 것이다. 이런 값진 선물은 하나님이 떠나고 안 계시는 것 같을 때만 주어진다. 이 글은 The Good Book Company와 협약하에 Adam Mabry의 When God Seems Gone에서 간추렸다. 원제: Facts, Feelings, and the Faithfulness of Go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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