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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름’과 ‘좋은 이름’
by 정현구
2023-04-19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전도서 7:1). ‘이름’과 ‘기름’라는 두 단어는 히브리어로 각각 ‘쌈’과 ‘쉐멘’입니다. ‘좋은 이름’이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아름다운 평가를 얻는 삶을 의미한다면, ‘좋은 기름’은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소유를 말합니다.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을까요? 성경은 ‘좋은 이름’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마 25:14-30)와 열 므나 비유(눅 19:11-27)를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세 사람의 종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세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한 은사와 조건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열 므나 비유는 주인이 열 명의 종에게 각각 한 므나씩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인생을 선물로 받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들을 잘 사용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많이 끼치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인생은 사람들로부터 아름다운 평가를 얻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았습니다. 즉 이 사람은 ‘좋은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받은 소유와 달란트를 자기를 위해서 쌓아두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좋은 이름’은 만들지 못하고 ‘좋은 기름’만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좋은기름
좋은이름
달란트비유
열므나비유
죽는날
태어나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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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기억나도록
‘거룩에 다가가는 습관’ 기르기 연습
by 박혜영
2023-04-17
‘거룩에 다가가는 습관’ 기르기 연습· 나의 아름다운 습관 만들기· 마음에서 기억나도록먼저, 자신에게 던질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또는, 성경 말씀)으로 거듭났습니까? 아니면, 생활의 일부가 되어, 교회 생활이란 게 나름 안정감을 주는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질문에 해당한다면, 하루 일에 지쳐서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상태는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감각이 아직 없기 때문에, 피곤한 몸과 지친 정신을 일으켜 성경을 읽는다는 건 불가능입니다. 하루 일에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쉬고 싶은 분에게 책을 읽으라, 그것도 성경책을 보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권면을 따르지 못한다고 미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주일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습관을 기르시길 당부합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첫째 주는 꼭 참석하겠다, 셋째 주는 반드시 참석하겠다, 이렇게 결심하고, 그날에는 친구나 친척들과 약속하지 않고, 돈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다고 해도 외면하고, 교회로 발걸음을 돌리는 훈련을 하시면 됩니다. 모든 훈련은 어떤 외부의 시간표에 자신을 맞추는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까? 건강을 위해 운동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시간과 요일을 정하지 않고, 시간 날 때만 한다면, 과연 효과를 볼 수 있을까요? 신앙의 훈련도 그렇습니다. 그저 시간 날 때 참석해 보는 식으로는 신앙의 유익을 얻기 어렵지 않을까요? 하나라도 마음먹은 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혹시 직분자라면 교회 순서에서는 빼 달라고 조용히 요청하면 됩니다. 그러면 저는 기억하고 그분의 회심을 위해 분명히 기도할 겁니다.이제,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났지만, 그래서 분명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행 2:36)로 모셨지만, 하루 일에 지친 나머지 성경책을 펼쳐 읽을 힘이 남지 않은 분에게 권면합니다. 그럼, 주중에는 그렇게 지내다가 주말에는 반드시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물론 다른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해야겠지요. 자신의 영혼을 위해 시간을 좀 써야 한다고…. 이런 분들은 ‘성경 읽기 달력’의 분량을 다 따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 줄 중에서 한 줄만 읽고 본문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하는 훈련을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생각한 내용을 기록해 둔다면, 자신의 영적인 감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주말이 왔다고 그냥 쇼핑에다 약속에다 여행에다 자신을 써버린다면….하루 일에 지쳐서 성경을 본다는 게 어렵지만, 그래도 남은 힘이 소립자만큼은 있어 성경을 펼치고 읽고자 하는 분들은 성경 한 절이라도 매일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면 한 장을 빠르게 훑으면서 뭔가 의미심장한 표현을 찾아 그 표현만 좀 더 생각하시면 됩니다. 보기를 들면, 저는 지난번에 이런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신 30:1). 자신들의 고향과 재물과 체면조차 다 잃고 쫓겨난 곳에서, 무엇이 잘못되어 이렇게 된 것인지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날 때만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다시 예전 땅으로 회복시키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기록하고,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여기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기억은 단지 인지 작용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이라는 겁니다. 어떤 경우가 있을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눅 15:14, 17). 서로 통하는 본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에 대해 가끔 후회하고, 가끔 아쉬워하는 걸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이라고 하진 않을 겁니다.물론 성경 읽을 때, 뭐가 중요한 표현인지 그걸 모른다는 게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역시 성경은 어려워’ 하면서 성경을 덮지는 말아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마음 저 깊은 곳에는 하나님 말씀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기 마련이며, 그 본능은 성경 말씀이라는 영혼의 양식을 향해 뿌리를 뻗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연습을 해야 하고,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경 읽는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하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모든 교인은 주일 저녁에는 반드시 그날 설교에 대해 복습하는 시간을 작정해야 합니다. 주보를 교회에 두고 가지 말고, 갖고 가서 본문과 제목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기억을 되살려 중요 표현은 무엇이었으며, 무슨 말을 들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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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의 ‘진정한 부흥의 필수 요소들’
by Ben Bailie
2023-04-16
1925년 2월 6일, 왕립 내과의 협회(Royal College of Physicians)에서 스물다섯 살의 젊은 회원이 “현대 웨일스의 비극”(The Tragedy of Modern Wales)이라는 제목으로 논란을 일으킬 만한 강연을 했다. 그는 은행가, 교육자, 그리고 설교자-정치인(preacher-politicians)이라는 “가증스러운 것”을 싸잡아 비난했다. 이들은 실크 스타킹, 무선 라디오, 매일 목욕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 웨일스의 근본적인 “비극”은 나날이 증가하는 교회의 무능과 하루가 다르게 감소하는 교회의 생명력이었다. 의사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영적으로 무의미한 교회와 영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설교를 한탄했다. 웨일스 교회에 대한 그의 진단은 냉혹했다. 생명 보조 장치에 의지해서 간신히 숨만 쉬는 그 교회에 부흥이 필요하다고 그는 외쳤다.그의 진단은 그 뒤로도 바뀌지 않았다. 그 뒤로 55년 동안 로이드 존스는 당시의 진단을 전 세계 영어권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몸으로 확장했다. 의사였을 때도 또 목사였을 때도, 그의 목회 전부를 지배한 주제가 바로 부흥의 필요성이었다. 매주 정기 기도회와 설교에서 그는 회중과 교회 전체를 앞에 놓고 주님을 찾으며 부흥을 갈구했다. “내가 이 시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교회의 본질과 성령의 역사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 교회의 희망은 오로지 부흥에 달려있음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단언해야 합니다.”이처럼 부흥은 20세기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부흥 정의하기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관해서 조직신학에 근거한 주석을 쓴 적이 없다. 부흥에 관한 그의 신학은 1859년 대서양 횡단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59년에 한 스물네 편의 설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연속 설교에서 그는 그간 수도 없이 언급했던 부흥이라는 주제를 완전히 풀어헤치고 탐구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지향한 부흥 신학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출발점은 1957년 6월 9일에 에베소서 4:4-6을 본문으로 한 설교이다.이 설교에서 로이드 존스는 바로 전주에 설교한 성령의 일상적 역사와 특별한 역사를 구분했다. 그가 정의하는 부흥은 비범한 방법으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그리고 부흥은 어느 정도까지는 많은 성도에게 동시에 강력하게 임하셨던 오순절 성령 역사의 반복이기도 하다. 로이드 존스에 따르면 부흥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교회를 다니는 신자는 새로운 수준의 경험과 이해를 통해서 각성한다. … 그리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온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중요하다. 기성 교인은 교리적 진리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고 주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느끼는 강력한 체험을 한다. 믿지 않던 사람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강력한 복음을 경험한다. 로이드 존스에게 부흥이란 성령의 특별한 역사이다. 부흥은 우리가 만들어내거나 사고팔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부흥은 성령의 불이 내려오는 특별하고 주권적인 역사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불을 내려달라고 간구하는 것뿐이다. 갈멜산의 엘리야처럼 누구나 제단을 쌓을 수는 있지만, 불을 내리는 건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시다. 부흥 갈망하기그러면 어떻게 제단을 쌓아야 할까? 어떻게 특별하고도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할까? 비록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을 부흥에 관한 핵심 패러다임으로 이해했지만, 그는 출애굽기 33장을 핵심 본문으로 해서 부흥이 무엇이며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를 설교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총 8회 설교했으며, 부흥을 갈망하는 이를 위한 필수 4단계를 제시했다. 단계 1: 필요를 깨닫고 죄를 직시하라(출 32:30-33:3)모세는 가장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직시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상태와 집단적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백성들의 적대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죄의 한 가운데에 서서 진리를 설교했다. 이것이 바로 로이드 존스가 부흥 시리즈의 첫 일곱 번의 설교에서 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마가복음 9:28-29에 대한 설교로 시작했는데, 제자들이 귀신 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한 사실이야말로 당시 능력 없는 교회의 실패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믿었다. 제자들은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만 귀신을 쫓는 능력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악마의 세력은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다. 무력한 제자들처럼 이전 세대에서 목회에 성공을 가져다준 방법과 전략으로는 결코 오늘날의 영적 필요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단계 2: 죄에 슬피 울라(출 33:4)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부재를 깨닫고 슬퍼할 때 시작한다. 자신의 상황을 깨닫게 되면, 그러니까 죄를 직시하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부재가 주는 위협을 인식한 사람은 애통해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한 약속의 땅에는 들어갈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는 어떤 축복이 쓸모없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없는데 외적인 번영과 풍요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외침이 된다. 이 단계에서 물어야 할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과연 우리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실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도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하나님의 선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이 연속 설교 전반에 걸쳐 로이드 존스는 “결함을 가진 정통”으로, 그리고 더 나쁘게는 “아예 죽은 정통”으로 표현할 수 있는 교회의 현실을 놓고 슬피 울라고 강권한다. 단계 3: 긴급한 기도와 중보(출 33:7-17)이제 특별 기도와 중보 기도의 계절인 부흥의 세 번째 단계로 이어진다. 로이드 존스는 이 단계를 다시 세부적인 세 단계로 나눈다. 첫 단계(7절)는 기존 진영 밖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특별 장소인 “회막”을 세우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곳을 일반적으로 한두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장소로 보았다. 현재에 적용하면 기존 진영 밖, 그러니까 정기적인 교회 생활 외에 따로 모여서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곳이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의 노력을 특히 귀하게 보시고 아주 빠른 시간에 은총을 내린다고 믿었다. 거기에는 일반 은총의 수단으로 특징되는 새로워진 영적 따뜻함, 자유, 기대, 부드러움이 있다. 그리고 설교에는 긴박함이, 기도에는 고뇌가 새겨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여전히 1단계에 불과하다. 두 번째 단계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회막으로 들어와 더 큰 은혜와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은혜를 맛보았지만, 더 큰 은혜를 갈구한다. 더 원하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모세가 알려준다(13절).첫째, 모세는 개인적으로 더 확신하고 싶었다. 단지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다는 지식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실하게 보기를 원했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모든 부흥의 공통된 측면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부흥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개인적인 사랑에 대해서 더 깊은 지식을 갖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둘째, 더 큰 능력에 대한 욕구가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모든 중보기도자는 원수 앞에서 느끼는 연약함과 무력함을 깊이 인식한다. 진정한 부흥에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통렬한 자각이 수반된다. 그와 더불어 예수님과 떨어지지 않겠다는 강렬한 소망이 있다.셋째, 모세는 교회의 사명에 특별한 인증을 해달라고 기도한다(16절). 부흥을 추구하는 깊은 동기는 빛나는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리고 교회가 애초에 하나님이 의도했던 모습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세상과 분리되고, 독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능력이 넘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함으로 열방이 경탄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교회이다. 따라서 약하고, 얻어맞고, 망가지고, 무능한 건 결코 교회의 모습일 수 없다. 그렇기에 부흥을 간구하는 사람은 교회를 살려달라고 외친다.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제단을 쌓는 것”은 긴급한 중보기도이다. 모세의 기도가 모델이 된다. 그의 기도는 담대하고 구체적이다. 감히 하나님과 “논쟁”하고 하나님께 애초의 약속을 지켜달라고 간구하다. 단계 4: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올 때(출 33:18-23)단계 3이 부흥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 부흥은 없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모세의 외침은 부흥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외침이다. 그리고 여기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모든 참된 부흥의 선물이다. 모세는 일부분만 보았을 뿐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주 잠시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부흥이다.로이드 존스는 모든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오순절의 반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오순절은 시내산의 반복이다. 부흥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이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교회와 세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불이 내린 첫 번째 징조는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분명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때때로 독특한 물리적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모든 부흥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 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자각,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에 대해서 새롭게 깨어난 감각이다. 부흥에는 하나님의 다양한 임재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느낌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확신도 따라온다. 복음 속에 담긴 위대한 성경의 교리가 폭발적인 수준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십자가 사건 후에 비록 제자들이 흔들리고 산산이 부서지고 낙담하고 절망했지만, 오순절 후에 그들은 확신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담대하게 선포했다. 이처럼 교회도 큰 기쁨과 축하와 감사로 충만해진다. 이런 경험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로이드 존스는 이천 명이 넘는 교인에게 이렇게 설명했다.성도 여러분,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사람들이 하나님, 성령의 임재를 의식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 있는 우리 대부분은 그게 뭔지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성령의 찾아오심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정상적인 삶과 교회 사역에서 가장 차원 높은 경험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교회 모임에 참석한 교인들이 갑자기 그들 사이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영광을 느낍니다. 어떤 존재를 느낍니다. 물론 그게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합니다. 설명할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이전에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다는 새로운 체험이라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은 때때로 “지상에서 누린 천국의 날”이라고 묘사합니다. 정말로 천국에 있다고 느낍니다. … 시간의 흐름을 아예 잊습니다. 아니, 그들은 시간 너머에 존재합니다. 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 그들이 있는 곳은 영적인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강림하셔서 영광스러운 임재의 느낌으로 그 장소와 백성을 충만케 하셨습니다.이것이 부흥이다. 아주 잠깐 이 땅에서 누리는 하늘의 영광이다. 그럼 세상은 어떻게 반응할까? 오순절 사건을 보면 세상은 다양하게 반응한다. 일부는 조롱하고 또 궁금해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회개를 외친다. 그러나 중요하고 또 오래 지속되는 변화가 분명히 있다. 교회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교회로 몰린다. “술집”이 텅텅 비고 세상이 뒤집힌다. 원제: Martyn Lloyd-Jones on the Ingredients of True Revival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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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이 일어났을 때 해야 할 일
by Don Carson
2023-04-14
최근에 나는 복음을 적대시한다고 알려진 한 지역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교회 개척은 힘든 일이다. 거기에서도 열정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소수의 교회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리다. 나는 그런 곳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와 전도자, 교회 개척자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한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기쁨이자 특권이다. 그들 중 몇 명과 함께 식사하던 중, 한 목사가 말했다.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큰 곳에서, 복음을 향한 격렬한 반대 속에서 사역하면서 평생을 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에서든 더 큰 지역에서든 진정한 부흥이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말입니다. 그런 일이 생길 때 내 우선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의미심장한 질문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형제가 염세주의에 빠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고작해야 작은 역사가 일어나는 날에 충성을 다하면서도, 주님의 팔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다. 적지 않은 목회자가 복음을 향한 반대가 심할 때 경건하게 사역하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이다. 주님의 자비하심이 개혁과 부흥의 축복으로 쏟아질 때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 꽤 많다. 나는 부흥이 도래한 곳의 가장자리에 몇 번 있었던 적이 있다. 1970-71년, 이른바 캐나다 부흥이 캐나다 서부 지역을 휩쓸었을 때 (수테라 쌍둥이가 이끄는 사역에서 촉발), 나는 브리티시 컬럼비아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로 섬기고 있었다. 나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교회가 서른다섯 개에서 고작 8년 만(1972-80)에 오백 개 가까이 증가하는(퀘벡의 경우) 전례 없는 부흥의 역사를 목격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부흥과 가짜를 구분하기 위해서 내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를 공부했다는 사실이다. 나의 경험과 독서, 성경 이해를 바탕으로 부흥이 올 때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목록은 다음과 같다.1. 진짜 부흥과 가짜 부흥을 진지하게 다루는 문헌을 읽자.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놀라운 부흥과 회심 이야기]과 ‘A Treatise Concerning the Religious Affections’[신앙감정론]로 시작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에드워즈는 부흥이 드러내는 다양한 현상에 매우 개방적이지만, 진정한 분별은 결코 단지 눈에 보이는 드러남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의와 복음으로 가득한 진실함(integrity)에 달려있음을 강조한다. 에드워즈 이후 약 백 년 후에 켄터키와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일부 “부흥”은 9개월 후에 눈에 띄게 많은 숫자의 사생아를 만들어냈다.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감정적 강렬함은 종종 친밀감과 결합한다. 따라서 그 감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게 아닌 경우, 부흥의 결과로 의로움을 낳기보다는 아기를 낳을 가능성이 더 크다. 남용에 대한 지식은 거만한 냉소주의를 낳기 쉽고, 반대로 부흥에 대한 지나친 열광은 어리석은 순진함을 낳는다. 냉소하지 말라. 그렇다고 속아서도 안 된다.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2.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라.자신의 마음을 계속 주시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불꽃을 부채질하라. 일상적인 은혜의 방편(ordinary means of grace)을 많이 사용하라. 부흥이 가져다주는 강렬함에만 의지하지 말고 성경 읽기, 기도, 자기 성찰과 고백, 자기 이익에 대한 죽음, 십자가를 향한 기쁨의 집중, 신실한 전도와 섬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는 간절한 기대감을 쉬지 말고 의지하라. 일성적인 은혜의 방편을 무시하고 대대적인 부흥 운동에만 영적 생계를 의존한다면, 아주 잠깐은 만족을 느낄지 모르나, 한때는 미친 듯 열광하더라도 지속적인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쳐 쓰러질 것이다. 3. 모든 에너지를 예수님께 향하라.부흥이 오면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에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 복음의 사역자로서 넘치는 에너지를 성경 공부와 기도, 그리고 말씀으로 충만한 회중 예배로 향하도록 하라. 부흥의 체험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을 향해 모든 초점을 맞추라. 부흥의 시대는 경건을 가장한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으로 넘치는 대화가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강해 설교에 대한 강화된 헌신을 요구한다. 퀘벡 운동과 관련하여 일어난 위대한 일 중 하나는 선견지명으로 넘치는 SEMBEQ(Séminaire Baptiste Évangélique du Québec)의 설립이다. SEMBEQ는 그 세대와 다음 세대의 신학 및 목회 훈련을 위한 통로가 되었다. 부흥이 가져다준 에너지가 훈련으로 올바로 전환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운동을 단지 어리석음과 아련한 향수 속에 시들어버린 추억으로 착각하기 쉽다.4. 언론을 멀리하라.투명하게 하라. 이게 일반적으로 불가능하고 사실상 엄격하게 권장되지도 않지만, 투명함이라는 목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말로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큰 축복의 시기에 봉사하고 있다면, 굳이 알리려고 애쓰지 말라. 부풀리거나 홍보하려고도 하지 말라. 최선을 다해서 사역을 확장해야 한다. 그러나 술수가 아닌 오로지 봉사와 가르침, 설교로 역사를 이루라.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언론이 찾아올 것이다. 당신이 강조해야 할 것은 비길 데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자신을 낮추며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리고 “스타”와 “유명 인사”를 홍보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라. 부흥을 분석하고 그것을 다른 데로 퍼트리기 위해 부흥을 “포착해 내려고” 떼를 지어 도착하는 “전문가”를 온 힘을 다해 피하라.1972년에서 1980년 사이에 퀘벡에서 일어난 부흥 사역에 참여한 사람들이 누린 큰 이점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언어 장벽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낼 만큼 프랑스어를 제대로 아는 미국 언론이 거의 없었다. 물론 오늘날 가장 빠른 형태로 배포되는 (악의적인 공격을 포함해서) 형태는 전통적으로 “언론”이라고 표시된 기관이 아니라 소셜 미디어와 연결되었기에 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그러나 당신의 영향력이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올바른 초점을 가지도록 장려하라. 자제력을 키우고 분노로 얼룩진 블로그에 휘말리지 않아야 한다. 평소의 사역에 조용한 인내로 충성하는 동시에 당신의 명성을 높이는 소문이 들릴 때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5. 조작을 피하라.캐나다 부흥 기간에 나는 즉석에서 있었던 간증 하나를 기억한다. 부흥 전까지 직업에 몰두하던 행복한 세속주의자가 갑자기 부흥이 시작된 서스캐처원(Saskatchewan)에 있는 교회 건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곳에서 복음을 듣고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에 압도된 그는 극적으로 구원받고 변화되었다. 그의 간증은 설득력 있고 강력했다. 사람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인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슬프게도 어떤 목사가(그 지역 목사가 아니었다) 그를 설득해서 캐나다 전역의 주요 장소에서 간증 집회를 하도록 했던 것이다. 나는 그의 간증을 밴쿠버에서 다시 들었다. 전에 들었던 것과 내용은 똑같았지만, 능력 있던 간증은 어느새 뻔한 이야기로 전락한 상태였다. 자발적이고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간증이 부흥을 다른 곳으로 퍼뜨리기 위한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 한낱 조작물로 전락한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라면 최소한 그런 조작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설교하는 대신에 감동적인 간증에 더 의존한다. 자발적이고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다. 열정과 조작 사이의 경계가 위반된 사례를 찾는 것은 오늘날 조금도 어렵지 않다. 6.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부흥 운동이 당신에게 달려있다고 착각하지 말라.20세기 동안 한국은 회심자의 숫자와 신학적 성숙도가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반면에 일본은 반대로 지지부진하며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 지도자가 일본보다 훨씬 더 유능하거나 재능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 왜 요시야는 민족의 부흥을 주관했는데, 예레미야는 평생을 오로지 눈물로 지새고, 용기를 떨어뜨리는 예언을 선포하고, 심판을 외치면서 보내야 했을까?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위대한 갱신의 시간에 참여하는 특권을 주신다면, 기회를 주신 그분께 감사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신실하게 전달하는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바치라. 무엇보다 겸손을 길러야 한다. 7. 운동의 인기에 따라다니는 위험을 조심하라.많은 전문가가 오늘날 북미의 많은 지역에서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수가 급감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변화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을 소외시키고 반대하는 사회적, 문화적 세력이 확산하면서 촉진되고 있다. 반대가 많은 곳에서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수가 감소한다. 그러나 동시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분별하기가 더 쉬워진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운동이 대중화되면 새로운 위험에 직면한다. 비록 처음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히는 개혁과 부흥 운동이라고 해도, 일단 대중화에 성공하면 많은 사람이 거기에 승선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지도자들이 하나님께 분별력을 간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8. 그저 자연주의적 설명으로 그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라.진정한 부흥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리고 그 운동의 여파가 남아있는 이후에라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촉발한 상황이 무엇인지 물을 것이다. 일반적인 이유를 작성하는 것은 쉽다. 기도하는 형제자매 모임, 갱신을 열망하게 만든 영적 타락의 시간, 문화적 불안과 격변(퀘벡에서는 “조용한 혁명”으로 불렸다) 등등이다. 그러한 현상을 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 섭리의 손길을 찾는 것은 전적으로 합리적이다.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을 보고하는 건전하지 못한 설명 방식이 있다. 이러한 현상이 그 자체로 부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인상을 주는 설명, 그리고 이런 현상을 다른 곳에서 복제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도 얼마든지 부흥을 가져올 수 있음을 암시하는 식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문화 현상에 수반되는 모든 것이 부흥 없이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이러한 현상을 근거로 부흥의 시작을 예측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 의해서 길들지 않으신다. 지나치게 자세한 분석은 나 자신의 홍보 외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지나치게 자세한 분석은 인간이 운동을 통제한다는 인상마저 줄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 중에서 그렇다고 드러내서 말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역사와 문화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를 깊이 숙고하라. 그리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섭리의 손길을 분별하라. 그러나 “이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로서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말할 수가 없습니다”[창 24:50]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도록 하라. 이 글은 “When Revival Comes”(Themelios 43, no. 2, August 2018)을 간추린 것이다.원제: What to Do When Revival Com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부흥
가짜부흥
부흥의분별
부흥의특징
캐나다부흥
조용한혁명
생명을 주는 암
by Rachel Ho
2023-04-11
2022년 7월, 뇌 왼쪽 전두엽에 종양 진단을 받았다. 논리적 사고와 집중력을 관장하는, 흔히 말을 잘하게 하고 중요한 두뇌라고 의사들이 부르는 바로 그곳이다. 진단 이후 내가 만난 모든 의료 전문가가 물었다. “어떻게 처음 알게 되었습니까?” 뇌종양이 발생할 확률은 평균 1퍼센트이며 종양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내 경우는 언니와 함께 발리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에 발작을 일으켰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때 나는 서른 살이었고 많은 보람을 느끼던 직장에서 갓 사직하고 8월에 석사 학위 취득을 위해서 독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생을 맞으며 나는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6개월이 흘렀고, 나는 선제적인 치료를 마쳤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두 번째 인생을 기대하고 있다. 사실 나는 지금보다 더 행복하거나 더 큰 축복을 받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그 이유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죽음이라는 두려움아마도 내가 아는 한 나는 가장 조바심 내는 사람일 것이다. 일이 잘 풀려도 더 완벽하고 싶어서 안달한다. 상황이 나빠질 때는 그보다 더 나빠질 가능성이 적어도 세 가지 이상 항상 머리에 떠오르는 게 나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은 암 때문에 조금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다. 말 그대로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 왜 암에 걸리고도 나는 믿음의 위기를 겪지 않았을까?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곁을 떠나지 않은 형제자매와 교제를 이어간 덕이라고 말하고 싶다. 수년간의 훌륭한 설교, 성경 연구, 기도 모임, 그리고 빛과 소금이 되는 여러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관찰한 것이 모두 다 내 마음을 준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또한 내가 뻔한 질문을 놓고 고민하지 않도록 했다. 나는 이미 다음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미래에 관해서 100퍼센트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또한 다음 사실도 알고 있었다. • 내가 고통받는다고 그게 꼭 하나님이 나를 벌주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설혹 죽는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다 잃는 건 아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완성될 것이다(롬 8:37-39).그러나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두술(뇌 수술) 전날 밤, 나는 수술 후 내가 아예 말을 할 수 없게 될지, 또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서 깨어날지, 행여라도 수술대 위에서 숨을 거둘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욥기를 읽었다. 하나님이 욥을 기뻐하신 이유와 고난을 겪는 욥의 반응을 더 잘 알고 싶었다. 나도 어떻게든 잘 견디고 싶었다. 그날 나는 두 가지를 배웠고 또 결심했다.첫째, 나는 고통을 견뎌낼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수술이 끝나면 다음 단계는 어떻게 될 건지 등등의 질문을 놓고 안달복달하면서 고통을 배가시키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서 증상과 통증, 괴로움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모두를 견뎌내야 하니까 말이다. 둘째,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든 공개적으로든 하나님께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욥처럼 눈물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진짜로 큰 슬픔과 충격에 휩싸여서 내가 울었던 유일한 시간은 종양이 3등급 핍지교종, 그러니까 암으로 밝혀졌을 때뿐이었다.실망해서 울었다.무서워서 울었다.그리고 무엇보다 죽기 싫어서 울었다.그때도 물론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일 그분은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 내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셨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셨고, 또 복잡한 의학적 결정을 통해 나를 인도하셨다. 나를 안심시키고 매일 매일 기쁨을 새롭게 하셨다. 그분을 온전히 더 신뢰하도록 가르쳐 주셨고, 내 삶을 놀라움으로 채우셨다. 그러나 내 믿음은 여전히 너무도 부족했다. 하나님은 부족한 나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고 계셨다. 하나님의 섭리우리가 암을 그토록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하나님 없이도 죄인인 인간이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은 암을 통해서이다. 불멸한다고 알려진 유일한 인간 세포가 암세포(HeLa)이다. 암은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다른 세포를 먹을수록 더 배가 고파지고, 아예 세포로 기능하는 것까지 포기한다. 죽음을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숙주를 죽이는 게 암 세포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신도 죽는다. 죄성에 찬 인간의 몸이 만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마지막 모습이다.중추신경계에서 가장 흔하고 또 가장 빠르게 진행될 뿐 아니라 가장 치명적인 것은 4등급 뇌암이다. 그런데도 이 암은 일반적으로 너무 늦게 발견된다. 암 덩어리가 너무 커지면 뇌가 두개골 공간 속에서 압축된다. 방사선과 화학 요법이 할 수 있는 건 최소한의 효과에 불과하며, 수술은 너무 위험하다. 뇌암을 처음 발견한 7월부터 그것을 절제한 10월 사이에, 나의 뇌 질량은 25퍼센트 증가했다. 뇌가 더 이상 확장할 공간이 없는 상황에서, 암은 자연스럽게 변이된 4등급이 되었을 것이다. 언어는 물론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나는 수시로 발작을 일으키고 분노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자는 중에 고통 없는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언니가 나를 급히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신속하게 행동하는 대신에 한 외과 의사의 조언, “일단 지켜보면서 기다립시다”를 받아들였다면, 생검을 먼저 하고도 암 덩어리를 놓쳤다면, 부분 절제를 선택했다면, 조직 검사에서 악성이 아닌 양성으로 판단되었다면, 나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매일매일 죽음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의 마지막 성탄절과 새해를 맞았을 것이다. 그림자가 물러가다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하게 개입하셨고, 사형집행인의 수렁에서 나를 구하셨다. 할렐루야!다시 살아났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림자가 열 걸음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는 히스기야와 같은 느낌이다(왕하 20:10). 무덤에서 걸어 나오던 나사로와 같은 느낌이다(요 11:38-44).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내가 과연 그동안 제대로 살았는지를 자문하곤 한다. 암은 내가 그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도록 했다. 나는 제대로 살아왔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것, 그리고 겸손히 주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 말이다. 그러나 선을 행하면서도 과연 내가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고 있는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궁금해하던 옛 삶과 오로지 풍요함이 주는 기쁨을 맛보는 지금의 새로운 삶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전하고 나의 노력으로 더할 수 없음을 안다. 그리고 그 선한 일에 나의 전부를 바치고 있다. 물론 히스기야와 나사로도 결국에는 다 죽었고 나도 죽을 것이다. 암이 재발할지 여부도 모르고, 결국에 나를 죽이는 것은 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하나 확실하게 아는 게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축복을 배가시키는 데 남은 인생을 보낼 것이다. 내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내 시간은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내 손이 닿는 데까지 정의가 이뤄지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앞에서 한 나의 서약을 이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임을 확실히 안다(시 116:18).우리 날을 계수하도록 가르쳐주소서당신이 다음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첫째,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 고통이 다가오고 있다. 젊었든, 늙었든, 그리스도인이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다. 당신 품에 안긴 아기, 갓 결혼한 당신의 아내에게도 고통이 오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이미 너무도 많은 일을 겪었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고통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다. 시간문제일 뿐이다.고통을 만났을 때 당신에게는, 또 당신의 내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신을 결코 놓아주지 않는 진짜 사랑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속에서도 하나님이 엄청난 선을 행하실 수 있다고 누군가 말할 때, 당신은 거기에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둘째, 하나님의 축복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당신이 내게 축복하기 전에는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고 말한 야곱에게 축복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도대체 어떤 축복을 위해서 씨름한 것일까? 땅도, 소유물도, 건강도, 또 장수도 아니었다. 그가 간구한 축복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는 축복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에게 응답하셨고, 이스라엘을 떠나지 아니하셨다.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을 때도, 사랑하는 두 자녀를 빼앗겼을 때도, 약속의 땅에서 이방 땅으로 끌려갔을 때도, 죽어서야 그토록 뼛속까지 그리워하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한시도 그를 떠난 적이 없었다.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매년 성탄절에 듣는, 임마누엘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당신과 내가 어떤 고통을 겪든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마음이 바라는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나다. 내 몸이 아무리 쇠약해지더라도, 나의 믿음과 삶은 불시험을 이겨낼 수 있다. 전쟁, 역병, 파멸의 소문이 돌고 또 우리 같은 어린 양의 눈에는 바로 앞에 닥친 위험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언제나 바로 곁에서 들려주시는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안심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항상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간구한다. 원제: A Life-Giving Brain Canc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암
죽음
생명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by 최창국
2023-03-29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한다(요일 4:7-8). 요한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관계 이론과 훈련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마르틴 부버는 어느 날 한 청년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종교적’ 열정이 가득한 어느 아침 이후에 오전 시간, 한 낯선 청년이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딱히 친절히 대해 주지도 않았다. … 말을 열심히 들어주기는 했지만 그가 끝내 꺼내지 않은 질문을 헤아리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친구들에게서 그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이 그가 하지 못한 질문들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그가 우연히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운명에 이끌려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잡담을 나누러 온 것이 아니라 결정을 내리러 온 것이었다(Martin Buber, Between Man and Man, 16) 부버는 이 청년이 찾아왔을 때 자신은 매우 종교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상적인 삶보다는 신비로운 경험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 당시 그의 사상은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 일상보다는 신비로운 경험, 세상보다 세상 이면에 있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자신을 찾아온 청년이 자살하면서 그의 사상은 크게 변한다. 그의 죄책감은 청년을 절망에서 구하지 못했다는 것보다 자신이 청년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부버는 그 청년이 자신을 찾아온 시간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 그 청년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에게 그 일은 자기가 살아온 삶 전체에 대한 심판처럼 느껴졌다(Kenneth Paul Kramer with Mechthild Gawlick, Martin Buber’s I and Thou: Practicing Living Dialogue, 174-75). 그의 경험은 그의 사상과 삶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는 그 후 관계의 틀을 개발했다. 바로 ‘나-그것’과 ‘나-당신’의 관계다. 그에게 이 관계의 틀은 상대방을 대하는 방식과 관계된다. 사람들을 인격이 아닌 사물이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면 ‘그것’으로 대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을 신성하거나 거룩한 존재로 보면 ‘당신’으로 대하게 된다. ‘나-그것’ 관계에서는 학벌, 출신, 돈, 직장, 가문 등으로 사람들을 평가한다. ‘나-당신’ 관계에서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존재, 비할 데 없이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본다. ‘나-당신’ 관계에서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보며 나와 다른 모습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는 “모든 진정한 삶은 만남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격적인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Martin Buber, I and Thou, 5). 부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사람들 사이의 ‘나-당신’ 관계가 하나님과의 ‘나-당신’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즉, 나와 다른 사람을 인격으로 보는 모든 진정한 관계는 ‘영원한 당신’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부버는 그의 삶의 여정에서 어느 날 자신과 종교적 믿음이 다른 그리스도인이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엘리어트(T. S. Eliot)와의 만남이 끝난 후에 사람들이 사상적 갈등을 예상하고 질문을 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사람을 만날 때 사상이 아닌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갖습니다(Kenneth Paul Kramer with Mechthild Gawlick, Martin Buber’s I and Thou, 32). 부버의 ‘나-당신’의 관계적 틀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의미를 제공해 준다. 즉,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신성한 하나님의 형상인 ‘당신’으로 보고 진정한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한다. 물론 사람들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도 사랑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진리를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는데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자리지 않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을 잘 알고 여러 형태의 영적 훈련을 열심히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는 방어적이고, 비판적이고, 엘리트주의적 자세를 가졌다. 예수님이 원하는 제자는 성경과 교리의 지식으로 넘쳐난 엘리트주의자가 아니다.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통합한 제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라는 제자의 모습을 분명히 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누구보다도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와 생각이 다르거나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것은 사람들이 신뢰가 되지 않을 때도 사랑하는 것이며, 확신을 가지고 함께 계속 걸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Ken, “Ethnography and Congregational Transformation at a Protestant Church,” 최창국, 실천적 목회학, 42에서 인용). 그런 의미에서 사람 사랑에 관한 제자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하워드 스나이더의 말처럼 “하나님 나라가 서로 사랑하는 우리의 관계를 통해 입증되기까지는 우리가 믿지 않는 깨어진 세상을 향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Howard Snyder, The Community of the King, 35). 한국 교회는 무엇보다 영성 형성을 통한 공동체적 삶의 함양과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의지를 가꾸어 나가야 한다. 린더 켁이 Interpretation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는 기고문에서 했던 말처럼, “지금은 성경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멈추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걱정할 때다. 지금은 성경을 이용하려는 것을 멈추고 성경과 더불어 살아야 할 때다”(Leander Keck, “The Premodern Bible in Postmodern World,” Interpretation 50, 135). 성경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도 성경을 통해 변혁적 삶과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타자적 실체로 남을 뿐이다.
사랑
마르틴부버
더 소중한 순간
by 정현구
2023-03-22
인생에는 세 가지 가장 중요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태어난 때입니다. 대부분 태어난 날을 복된 날로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생명을 얻은 날이니 얼마나 복된 날인가요! 그래서 매년 이날을 잊지 않고 축하의 잔치를 엽니다. 그런데 태어난 순간보다 더 중요한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오늘 이 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삶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의 소중한 가치를 자주 잊고 살지만, 현재가 곧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그런데 우리에게는 살아 있는 이 순간보다 더 소중한 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좋지 않은 시간으로, 또는 피하고 싶은 순간으로만 여깁니다. 그 시간의 가치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인생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소멸하고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음의 순간만큼 피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죽음은 가장 두려운 순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와 정반대로 말합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전도서 7:1). 죽는 날이 다른 날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어떤 날보다 더 좋은 날이라고 말합니다. 죽는 날이 더 좋은 날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처럼 죽음의 순간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알고, 인생의 마지막을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감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태어난 순간과 현재 살아 있는 순간의 의미가 훨씬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전도서
죽음
죽는날
존경하는 목사님이 추락했을 때
by Hannah De Cleene
2023-03-21
살다 보면 누구나 사람에게 상처받지만, 매주 강대상에 서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차원이 다르다.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했고, 내 결혼식 주례까지 한 존경하는 목사님이 알고 보니 그간 여러 교인을 영적으로 학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교회 축구팀을 후원하고 종종 같이 공까지 차며 우리를 돌보던 중고등부 목사님이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아내와 가족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목사에 대한 기억이 더럽혀지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그 목사가 그동안 내게 행한 선과 그가 다른 이에게 행한 악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도덕적으로 실패한 목사 또는 교회 지도자를 만날 때 교인은 보통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한다. 먼저 목사의 실패를 아예 부인하거나 변명한다. “그분이 지난 세월 교회에 끼친 은혜가 얼마나 큰데, 그게 사실일 리가 없잖아? 말이 돼?” 아니면, 아예 사역 전부를 불신하는 경우이다. 달리 말해서, 지난 세월 그 목사의 설교 외 삶에서 배운 모든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이런 양극단의 태도를 피하려면 적절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끼치는 목사라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그게 사역의 모든 열매를 다 허사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긴장 유지성경에는 엄청난 실패를 겪었으면서도 선을 향한 하나님의 쓰임에서 제외되지 않은 사람과 지도자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친숙한 사례이다. 아브라함은 주님을 믿고 고향을 버리고 미지의 땅으로 간 사람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부활의 권능을 온전히 믿으며 아들까지 제물로 드린 믿음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그는 두 번이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했으며,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자는 사라의 나쁜 계획에 동조했다(창 12:12-14; 16:2-4; 20:2).모세는 또 어떤가?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낸 인물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십계명까지 맡기셨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난 직후에 그는 불신앙으로 물을 내겠다며 반석을 내리쳤다(출 20; 민 20:10-13).그 외에도 결함으로 가득한 다른 사람과 함께 이름이 거론된 이 둘에 관해서 히브리서 11장이 칭찬하는 게 무엇인가? 믿음이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때때로 실패했지만, 그들은 순종함으로 주님께 돌아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이 그들의 실패로 인해서 무력해지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교회 지도자가 저지르는 죄가 무죄 판결이라는 프리패스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헤어졌고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죄의 결과는 심각하고 고통스럽다. 목사의 경우 진정한 회개와 화해가 이뤄질 때까지, 그리고 교회 권징이 온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아예 목사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수도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더라도, 온전한 사역 회복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또는 사역 복귀라는 시도 자체가 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목사의 추락이라는 충격 속에 남겨진 우리에게 이 모든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때 사랑하고 존경했던 교회 지도자가 더 이상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본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슬픈 현실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아예 다른 교회를 찾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그들을 통해서 주신 모든 은혜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깨어진 교회를 놓고 주님께 상처와 실망, 심지어 분노를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통해서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자세가 의미하는 것이다(벧전 5:7). 목사의 추락이 초래한 감정을 억누르기만 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원망의 쓴 뿌리라는 죄가 나를 파괴하도록 놔둬서도 안 된다. 대신 말씀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 히브리서 12:1-2은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누구나 예외 없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경주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교회 지도자의 죄와 연약함이라는 장애를 만나기도 한다.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나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내 속에 깊이 뿌리박은 죄성을 삶에서 떼어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억하자. 오로지 예수님만이 완벽한 삶을 사셨다. 이 세상에서 만나는 지도자의 실패를 볼 때마다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분만이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시다. 지도자가 가진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다 균형감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붙잡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분이다. 원제: When a Beloved Pastor Fall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사의타락
아브라함의죄
모세의죄
거의 다 잊어버리더라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by Trevin Wax
2023-03-18
한 번 읽고 세세한 그림뿐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하는 사진 같은 기억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어쩌면 당신의 기억력은 평균치에 못 미칠 수도 있다. 지난 여름 방학 때 꼼꼼하게 읽은 소설책의 주인공 이름과 줄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 휴일을 맞아서 읽은 신앙 서적에서 한두 가지 요점을 빼고는 아예 생각나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 가을 교회 소그룹에서 읽었던 평신도를 위한 신학 과정에서 읽었던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차피 읽어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데, 굳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것 말고 다른 활동을 통해서 시간을 더 효율 있게 활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1퍼센트의 능력1981년에 젊은 목사 존 파이퍼는 매주 수많은 시간을 TV 시청에 보내는 아이들을 보면서 고작해야 몇십 분에 지나지 않는 주일학교 성경공부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며 “양적 절망”을 느끼는 주일학교 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노력했다. 파이퍼는 거룩한 만남의 가치를 간과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그 만남 속에 숨은 “단지 시간의 양으로 측량할 수 없는 순간”과 “지속적이고 변화시키는 통찰의 능력”을 바라보라는 촉구였다. 파이퍼는 독서를 하나의 예로 들었다. “나는 읽은 책의 99퍼센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책 전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지요.”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인생을 바꾸는 것은 책 전체가 아니라 문장입니다. …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처한 현실이나 진실을 새롭게 보도록 하는 통찰력, 어떤 강력한 도전을 받는 것, 또는 사라지지 않던 오랜 딜레마에 대한 어떤 해결책입니다. 그리고 통찰력, 도전, 해결 같은 대부분의 것을 만나는 데에는 아주 짧고 작은 공간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를 일깨우는 문단 하나 또는 문장 하나, 우리는 그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평생 그 영향을 받습니다. 읽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게 핵심이 아니다. 나를 통찰력으로 놀라게 하는, 잘 짜인 한 문장은 나머지 99퍼센트를 얼마든지 고생해서 읽도록 만들 충분한 가치를 가진 축복이라는 게 파이퍼의 말이다. 하지만 기억할 점이 있다. 비록 인생을 바꾸는 새로운 통찰력을 주는 문장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머지 99퍼센트의 독서가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99퍼센트의 능력죽어라 준비한 설교의 요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교인을 만날 때면 목사는 실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요점을 기억하도록 하는 게 설교의 목표인가? 교회를 나서는 교인이 하나의 통찰이나 문장 또는 예화만 기억해도 의미 있는 설교가 아닐까? 더군다나 교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설교는 그들의 영적 삶을 구성하는 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할까? 물론 설교 속에 “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목회자가 본문을 다루는 방식, 즉 그 의미를 주의 깊게 설명하고, 좋은 예화로 장식하고, 더 넓은 기독교 가르침의 세계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향해 나아가도록 설교를 다듬는 모든 과정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교인들의 영적 생활을 구성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책도 마찬가지이다. 오스틴 카티는 이렇게 말한다. “뇌에 단지 정보를 업로드하는 것이 독서의 주된 이유가 아니다.” 그러면서 카티는 휴대전화의 사진 앱에 있는 필터라는 훌륭한 비유를 들었다. 구형 전화기에는 이미지만 있었다. 이미지를 볼 수 있는 다른 렌즈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양한 필터를 사용해서 풍부함을 끌어내는 여러 방식으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카티의 말이다. 요점은 이것이다. 독서의 핵심 목적은 읽은 내용을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렌즈를 꾸준히 다듬는 것이다. 읽은 것의 90퍼센트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읽은 내용은 우리 속에 들어온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내 속에서 자리를 잡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이로 말이다. 책은 그렇게 우리의 필터를 강화한다. 내가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관계없다.독서가 우리의 비전과 이해력을 어떻게 확장하는지, C. S. 루이스도 비슷한 말을 했다. 평생 책을 사랑하며 읽은 사람이라도 작가 덕분에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크게 확장되었는지에 관해서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 자기 자신으로만 만족하는 사람, 따라서 항상 자기 잠재력 아래에서 사는 사람은 감옥에 갇힌 것과 다르지 않다. 나의 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게는 다른 사람, 저자의 눈이 필요하다.책을 읽는 이유읽은 내용을 다 기억하는 게 핵심이 아니다. 물론 통찰력으로 나를 일깨우고 내 삶을 변화시킬 한 문장을 기대하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다른 모든 단락과 장을 읽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 모든 내용은 비록 내가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나의 생각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독서가 주는 효과는 단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내용 또는 밑줄을 그은 문장을 훨씬 뛰어넘는다. 독서는 나의 필터를 강화한다. 내가 인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음에 울려 퍼지는 지식과 통찰력을, 그리고 독서가 아니고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지혜와 폭을 제공한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책이라 해도 읽었다는 게 중요한 이유이다. 원제: Why Read If You Forget Most Everything Anyw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독서
책읽기
설교
게으름과 한계는 다르다
by Tim Shorey
2023-03-16
평상시 입는 땀복과 티셔츠를 입은 나는 체육관에 가는 대신 최대한 편한 자세로 안락의자에 누워서 아침 낮잠을 즐겼다. 그리고 아내 게일린에게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게으름 피우는 날이야.”나에 대해서 스스로 판사와 배심원 역할을 한 나는 안락의자, 땀복, 체육관에 가지 않는 것, 그러면서 활동적인 아내와 달리 활동하지 않는 내 삶을 게으름이라고 해석했다.그러나 이런 양심의 책망을 듣자마자, 성령님이 나를 위로하셨다. 그리고 “게으르다”라는 양심의 목소리를 향해서 “그렇지 않아!”라며 반박할 수 있도록 하셨다.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린 판단은 사실 틀렸다. 나는 게으른 게 아니라 한계를 만난 것이다. 그 차이가 중요하다. 나에 관한 진실겉으로만 봐서는 아픈 사람 같지 않지만, 나는 사실 이 세상에서 살날이 그리 길지 않은, 4기 암에 걸린 예순네 살 노인이다.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제대로 말하는 의사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암시하는 예후는 하나 같이 다 “오 년 미만”이며, 실상은 훨씬 더 짧을 수도 있다. 내가 걸린 암은 치료할 수 없으며 최선의 희망은 일시적이더라도 최대한 느리게 퍼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개입하시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따라서 게으름에 대한 나의 자기 평가는 암과 항암 치료로 인해 손상된 몸으로 발버둥을 치는 남자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여도, 실상은 몹시 아파서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쉽지 않았고, 체육관에 가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겉모습이나 이런저런 정황과는 달리, 그날이 내게는 결코 게으른 날이 아니었다. 한계에 부딪힌 날이었다. 게으른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도 안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어서 못 한 것이다. 전자는 게으름이지만, 후자는 한계이다. 그 차이를 바로 알아야 정죄하는 비난(나 자신 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과 현명하고도 건강한 자기 인식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다. 왜 중요한가?“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나름의 괴로움이 있지만 죄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과 항상 연결되어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을 게으름이라고,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예 죄라고까지 느끼기 쉽다. 그러나 게으름과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게으름은 성경이 정죄하는 분명한 죄이지만(예, 잠 18:9; 21:25), 한계와 유한함에 대한 인식은 도리어 지혜로 칭송받는다(예, 시 90:1-12). 게으름은 의무를 게을리하는 것이고, 할 일을 하지 않겠다는 교만이다. 그러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으름과 한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쩌면 암보다 더 나쁜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불필요한 수치심과 끊임없는 죄책감에 직면할 것이다. 꼭 암이 아니더라도 몸을 갉아 먹는 만성 질병에 시달리는 모든 환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신을 현실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부정확한 자기 비난은 영혼의 파멸이라는 잘못된 길을 이끈다. 실직은 매일 아침 출근하지 않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생아 간호는 몇 시간 동안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편두통이나 불면증과의 싸움은 다른 사람이 바쁠 때 당신은 잠을 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모두는 다 죄의 문제가 아니다. 한계일 뿐이다. 두 번째 적용은 삶 전체를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첫인상을 적극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종종거리는 사이에 나는 차 안에서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그 사람은 내 아내가 아주 게으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쉽게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틀렸다. 아무리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도, 나는 아픈 사람이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이해하자우리는 하나 같이 첫인상으로 성급하게 타인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항상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겉모습으로 틀린 판단을 한다(삼상 16:7; 잠 31:30; 사 11:3-4; 요 7:24; 약 2:1-13; 4:11-12, 벧전 3:3-4). 그 결과 인간관계, 결혼, 양육, 교회 생활, 다문화 상호작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까지 죽이고 있다.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계급, 문화, 피부색, 조건 또는 기타 다양한 차이와 관계없이 사람을 구분하는 외모로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라. 대신 더 깊이 알고 이해하기 위한 선택을 하라. 진리와 이해심에 바탕을 두고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판단하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의 무한한 수준의 용납하심을 체험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안락의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또는 다른 고난이나 불의함 또는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갇힌 사람들)은 암이 아니라 오히려 수도 없이 반복되는 비난 속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진짜 정죄 받아야 할 대상은 우리 스스로 내리는 자기비판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누구에 대해서 말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스스로를 모든 사람의 판사라도 되는 양 타인을 향한 은밀한 비난을 멈추지 않는 누군가이다. 원제: Know the Difference Between Laziness and Limitati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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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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