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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조금씩 꾸준히 거룩
거룩에 이르는 바른 길
by Josh Moody
2022-07-06
기사 예고: 내일(목) J. C. 라일의 명저 거룩을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에서 소개할 예정입니다. 19세기 초, 복음주의 사역자들이 정기 모임을 만들어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성장할 수 있을지 함께 토론했다. 모임을 이어가면서 이 모임(Eclectic Society)에는 존 뉴턴과 찰스 시므온 같은 유명한 사역자들도 참여했다. 이 단체는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는데, 그중에는 “분열의 본질, 해악, 해결책은 무엇인가?”와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교도들의 계획에 맞서기 위해 현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도 있었다. 1812년 6월 22일, 이 단체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은혜 가운데 성장한다는 것에 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프리체트 목사(Rev. C. R. Pritchett)는 이렇게 답한다.1. 은혜 안에서의 성장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2.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살아 있는 연합에서 비롯된다. 3. 이것은 성령의 지속적이고 즉각적인 주도로 만들어지고 계속된다.우리가 거룩(holiness, 성결)을 주제로 이런 비슷한 대화를 나눈 게 언제였을까? 우리 교회들이 윌리엄 로의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경건하고 거룩한 삶으로의 진지한 부름)에 견줄 만한 거룩으로의 권면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언제였을까? 세속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이해할 만은 하지만, 우리가 요즘 집중하고 있는 주제는 ‘어떻게 문화에 참여할 것인가’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성품의 온전함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염려스럽다. 이제 우리는 다시 거룩을 이야기해야 한다.어떻게 하면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을 분명하게 권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숙한 성품을 기를 수 있을까? 여기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1. 정확한 정의부터 챙겨라.거룩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에는 여러 가지 변주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은 바리새파 율법주의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이 마치 주사 한 방 맞으면 얻게 되는 영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거룩이란 따분하고 편협한 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히드라의 머리만큼이나 많은 거룩의 정의에 대한 혼란상을 해결하려면 거룩에 대한 바른 생각을 길러야 한다. 명확하고 성경적인 정의가 도움이 될 수 있다. 거룩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2. 복음에서 시작하라.존 오웬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에 관해 가지고 있는 가장 나쁜 생각의 하나는 우리의 출발점과 관련이 있다고 썼다. 우리는 행동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 삶에서 하신 일과 함께 시작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떨어져서는 거룩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우리는 먼저 거듭나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고 선언 받아야 한다. 반드시 거듭남이 출발점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당신이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라면 당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 거룩의 진일보를 가져오기 위해서 내디뎌야 할 가장 중요한 단계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거룩과 씨름하는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별된 삶을 살기 전에 먼저 살아남을 받아야 한다.3 생각에 집중하라.당신이 거룩에 대해 가르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생가해 보라고, 그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해 보라고 격려하라.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애정을 쏟는 것들을, 우리의 감정이 가닿는 것들을, 그리고 우리의 이성이 향하는 것들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이 줄어드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며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내가 많은 시간을 거룩하지 않은 것들에 집중한다면 거룩하게 성장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서 멀어질 때 거룩은 쇠퇴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것들과 복음의 경이로운 것들과 하늘의 영광스러운 것들을 묵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도록 격려하라.4. 죄를 그 뿌리부터 도려내라. 때로는 최고의 성경 선생들도 앞의 세 가지만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거룩을 기르는 네 번째 방법은 우리가 “죄 죽이기”(mortification)라 부르는 것이다. 생각과 행동으로 죄를 일삼아 틀이 되어버린 습관과 버릇을 반드시 잘라내야 한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뿌리까지 파 내려간다는 이미지를 사용했다. 잡초를 제거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잡초를 잘라버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잡초가 다시 나온다. 다른 방식은 잡초를 그 뿌리부터 파내는 것이다. 우리 죄를 뿌리부터 파내려면,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죄는 왜 이토록 나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이 죄를 포기하기가 왜 이토록 힘든 것일까?” 예를 들겠다. 음욕과 중독 뒤에는 흔히 고통이 따른다. 포르노나 마약, 술로 자가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인을 상담하고 있다면,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깊이 파 내려가서 그 교인의 뿌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찾아내라. 그냥 “왜”라고 질문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질문하면 겁을 먹는다. 당신이 찾아낸 것들을 함께 나누라. “화가 나 있는 것 같네요.” 교회 지도자로서 당신은 그 뿌리에 성경적이고 목회적인 해결책들을 적용할 수 있다. 5.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옷 입어라.바울은 이 단순한 비유를 반복해서 드는데, 그만큼 유익하기 때문이다. 새 사람이 되었으니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으십시오. 이 말이다. 당신의 진짜 신분에 어울리는 성품의 옷을 입으십시오. 이 말이다. 거룩에 대한 한 가지 흔한 오해가 있다: 나는 거룩하지 않아. 이건 거룩한 척하는 것일 뿐이야. 이건 가짜야. 그렇다. 거룩은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빚어져 가는 것이다.그러니 그리스도를 날마다 닮아가는 옷을 입어라. 성령께서 우리의 성품이 차츰차츰 우리 구주를 더 닮아가도록 일하신다.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거룩하게 서게 될 그날까지. 온전히 그분 앞에 서게 될 그날까지. 원제: 5 Ways to Pursue Holine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거룩
성결
그리스도의성품
죄죽이기
거룩의정의
목사는 꼭 교회 안에 친구를 가져야 하는가? 정말로?
by Jeremy Todd
2022-07-04
[7월의 토론: 목회자에게 ‘친구 같은 교우’는 가능한가? 적절한 질문이기는 한가?]“그렇다.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에 이은 두 번째 글입니다. 두 편의 글이 여러분의 생각을 자극하고 넓히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우리 교회의 현실을 천착한 반응과 기고가 복음과도시에 쇄도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 분의 글(“우리의 글”)을 환영합니다. 팟캐스트, 블로그 시대가 열리기 전에 라디오가 있었다. 폴 하비는 라디오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60년 가까이 하비는 편안한 목소리와 분명한 전달력으로 청취자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들려주는 에피소드에는 뉴스와 논평과 흥미로운 인간사가 섞여 있어 정보와 함께 재미도 선사했다. 내가 특별히 재미있게 청취한 그의 라디오 방송 중에는 5분짜리 방송 “나머지 이야기”도 있었다. 그가 들려주는 (주로 유명인사와 관련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소소한 역사적 사실을 듣고 놀랄 때도 자주 있었다. 그는 늘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이 말로 끝을 맺었다. “자 이제 그 이야기의 나머지를 여러분은 알게 됐습니다.”내가 전에 쓴 “그렇다.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를 아내와 함께 다시 살펴보다가 폴 하비의 이 멘트가 떠올랐다. 앞서 쓴 글에서 내가 밝힌 입장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나머지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목회는 외로울 수 있다그렇다. 목회자에게는 또 목회자 부부에게는 교회 안에 가까운 친구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저절로 가까운 친구가 생기는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말은 문장으로 쓰기도 어렵거니와 현실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교회 안에서 우애를 나누기란 목회자와 목회자 가족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일 때가 많다. 외로움은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사람과 그가 하는 일을 떼어 놓고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구체적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외로움은 목회자과 교인들이 사람을 그의 지위와 (종종 의도하지 않게) 떼어 생각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될 때가 많다. 이런 현실은 목회자 아내의 삶에서도 다르지 않다. 모든 우연한 만남, 점심 약속, 커피 모임 및 교회 밖 행사가 목사와 교인이라는 관계의 우산 아래에서 일어난다. 이런 만남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교회 이야기로, 다시 말해 교회의 사역, 프로그램, 또는 교회 정치 관련한 이야기로 회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벽돌과 모르타르가 되어 결국 여리고를 둘러싼 성벽처럼 단단한 담장을 만들어 진정한 우정을 가로막는다. 교회를 화제로 나누는 대화를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 사람들, 택함 받은 사람들, 그리고 양자로 입양된 사람들을 주제로 나누는 대화와 혼동하면 안 된다. 교회의 사업에 관해 토론하는 것과 예수님과 그의 신부에 대해 토론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단지 교회라는 기관에 관해서만 논의하는 것도 때때로 필요하지만, 그런 대화는 우리 영혼을 고갈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지위라는 이분법을 설정함으로써 진정한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멀어지게 할 수 있다. 교인들에게, 목사는 있는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대로의 한 사람이 아니라 직책을 맡아 할 전문가로 보일 수 있다(친구가 훨씬 적다). 반면에, 예수님에 대한 대화와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역은 생명을 주는 에너지를 제공하고, 영적 친밀감을 키우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일치를 돈독하게 한다. 이러한 진실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화는 목회자의 전문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 위에 세워진 우정의 기초를 제공한다.교인의 눈에 목사가 (꼭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목회자라는 직책을 맡은 전문가로만 보일 수도 있다. 반면에 예수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대화는 생명을 주는 에너지를 제공하고 영적 친밀감을 키우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일치를 돈독하게 한다. 이러한 진실들에 중점을 두고 나누는 대화는 목회자라는 직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 위에 세워갈 우정의 기초가 된다. 깊은 우정은 보장된 게 아니다 우정에는 다양한 수준의 친밀감이 따른다. 단지 표면에서 노는 수준이 있고, 또 어떤 우정은 공통의 이익과 바람, 상호 신뢰에 터하여 자라기도 한다. 모든 우정이 다 나름 중요하지만 우리 목회자가 바라는 깊은 수준의 우정은 매우 드물다. 목회자가 섬기도록 부름 받은 교회가 깊은 우정을 바라는 목회자 가족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교회 안에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교인들이 당신이 바라는 수준의 우정에 대한 개인적인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설혹 그렇다고 해도, 목회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좌절감을 그들 탓으로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우정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주님께 말씀드리되,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주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마도 하나님은 당신이 은혜로 허락하신 수준에서 우리가 자족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관계가 좀 더 성숙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려는 것이다. 깊은 우정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한두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교인 전체라는 집단을 통해 충족될 것이다. 예수님이 더 가까운 친구이시다잠언의 저자가 쓴 것처럼, 예수님이 이런 친구다.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알고 또 채워주는 친구다. 분명하고 단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 되시기에 충분하다.잠언 저자의 이 말을 기억하라. “친구를 많이 둔 사람은 해를 입기도 하지만 동기간보다 더 가까운 친구도 있다”(잠언 18:24) 예수님이 바로 그런 친구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아시고 또 채워주시는 친구이시다. 이건 분명하고 간단한 사실이다. 예수님으로 충분하다. 욕심 부리지 말라.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하게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데 방해가 되는, 인간을 의지하는 관계의 벽을 세우고 싶은 우리의 죄성에 맞서 싸우자.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친밀함과 인정을 교회가 줄 수 있다고, 교인이 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사람과의 우정이 살고 죽는 것도 결국은 다 예수님과 맺는 수직적 관계에 달려 있다. 원제: Pastors Should Have Friends in Church. Do The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예수님과의관계
친구욕심
과욕
우정
외로움
외로움의뿌리
영적친밀감
진정한친구는예수님뿐
교인에게뒤통수맞지않기
그렇다. 목회자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
by Jeremy Todd
2022-07-01
[7월의 토론: 목회자에게 ‘친구 같은 교우’는 가능한가? 적절한 질문이기는 한가?]자신이 목회하는 교회 안에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교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단, 전제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교회 공동체의 성원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그러니 결국 목회자의 ‘친구 같은’ 교우는 특히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미국 목회자의 글입니다. “친구”라는 말에 담겨 있는 의미 자체가 우리와 굉장히 다른 문화에서 목회하는 이의 글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 글은 말하자면 “비판적 읽기”를 더욱 요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예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로, 제목에 물음표를 달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글쓴이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접었습니다.) 개인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미국에서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는 미국 목회자의 마음에 성급하게 동화되거나 공감을 표한다면 자칫 오독에 빠지지 쉬운 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독에 기초한 잘못된 적용이나 주장은 (탱자에게는 미안한 비유지만) 귤을 탱자로 만들 것입니다. 애초에 “관계” 중심의 문화가 강한 데가 한국이라면, 이 글은 어쩌면 우리에게는 반대의 논의를 촉발하는 부싯돌의 역할만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도 외로울 자유가 있어야 한다!/있어야 하지 않을까?!” “목회자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대폭 허하라!/허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비판적으로 읽고, 우리 교회의 현실을 천착한 반응과 기고가 복음과도시에 쇄도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 분의 글(“우리의 글”)을 환영합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방에 있으면서도 혼자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고독과 외로움은 가장 외향적으로 보이는 목회자조차도 흔하게 느끼는 괴로운 감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양 떼를 치도록 부름 받은 사람도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막 목사가 되었을 때 나는 교인과는 친한 친구로 지내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조언이었지만, 그건 내가 느끼던 고립감과 절망감을 더 심화시켰다. 나는 가까이 지내면서 일상을 나누는 관계를 갈망했다.교회를 가족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고, 또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 교회 가족은 우리가 잘할 때에도 또 못할 때에도 다 지켜보고 있고, 그건 당연한 것이다. 목회자가 교회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꺼려한다면 어떻게 교인이 교회를 가족으로 여기기를 기대하겠는가? 이런 필요를 인정하면서 차차 사역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관점과 경험이 바뀌었다. 목회자에게 교제가 필요하다는 점에 있어서 다음 네 가지를 이해하게 되었다.1. 목회자도 교인이다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교회에 고용되었다고 해서 교인 자격에서 벗어난 건 아니다. 직분으로는 목회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교인들과 동일한 교우로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에 속한다. 누가는 교회를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신자들로 이루어진 한 몸이라고 말한다(행 2:42). 그리고 사도들도 그 교인에 포함된다.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묘사된 친밀한 공동체는 멀리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목사와 그 가족은 단순한 상담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를 더 많이 알아가고 돌보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친구이다. 목사는 회중을 “나와 그들”이 아니라 “우리”로 보아야 한다. 2. 교인은 서로를 안다공동체 생활을 하려면 다른 사람이 내 삶에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본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그를 멀찍이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예수님의 삶 속으로 초대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일반 교인들과 분리되어 있거나 교인들의 관찰 대상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목회자와 그 가족에게는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 되려면 단지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stage persona) 또는 소셜 미디어 속 과장된 모습을 넘어 진짜 나의 모습을 알려주고 서로 알아가겠다는 진정한 노력과 열망이 있어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알겠다는 의지가 먼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결혼을 생각해 보자. 신혼 기간도 좋지만, 결혼생활을 몇 년 이어가면서 경험하는 친밀감과는 비교할 수 없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부임하고 처음 몇 개월은 종종 이런저런 모임으로 바쁘겠지만, 그건 다 표면적인 관계일 뿐이다. 진정한 친밀감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눅 9:20]. 예수님과 보낸 시간이 많았기에 가능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에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깊은 관계를 갈망한다면, 의도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당신은 교인을 집으로 초대하고, 교인 집으로 가고, 당신의 취미에 교인을 부르고 또 다른 사람들을 당신이 즐기는 활동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또한 그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3. 공동체는 연약함마저 노출하게 한다목회자는 종종 공동체의 중요성을 설교는 하지만 실천은 못한다. 진정한 공동체는 연약함(vulnerability)의 노출까지 요구한다. 동네 카페에서 눈물 고백을 하라는 게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까 물으면, 진짜 기도제목을 나누라. 자존심 때문에 연약함을 숨겨서는 안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겟세마네에서 함께 기도하자고 청했다. 제자들은 결국 잠이 들었지만, 예수님은 어쨌든 가장 힘든 시간에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하셨다. 진짜 연약함은 기도 너머로까지 확장될 수 있지만, 기도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로 도움이 필요했을 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진지한 요청을 한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혹시 기억하는가? 4. 목회자도 돌봄을 받아야 한다 최근에 한 교인이 우리 가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우리 집에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제안은 그냥 사랑에서 나온 친절이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고맙게도 그녀는 나를 만났을 때 신속하고도 또 꼭 필요한 책망을 해주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가족에게 베푼 섬김에 감사했고, 동시에 이번 일을 자신이 내게 베풀어야 할 하나의 섬김의 기회로 보았다는 말을 솔직하게 했다. 교인이 베푸는 진정한 환대를 거부함으로써, 양 떼에게야 끊이지 않는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그런 돌봄이 필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본의 아니게 전달할 수 있다. 목회자로서 우리는 교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목회자의 필요가 믿음의 가족인 교인에 의해 충족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도 돌봄을 받으셨다예수님은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충실히 가르치셨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친절과 환대와 격려를 받으셨다. 자신이 가르치고 보살펴 준 사람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셨다.예수님의 모범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의 돌봄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바란다. 우리의 삶을 교인에게 맡기고, 우리도 그들처럼 두렵고 불안해하는 존재임을 인정하자. 하나님께서 오로지 은혜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가족과 하나 되기 위해 더욱 더 힘차게 노력하자. 원제: Yes, Pastors Should Have Friends in the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외로움
친구
목회자의외로움
공동체의중요성
연약함의노출
겸손함
깊은관계
관계의갈망
교회가족
교회개척 첫 5년에 만들 좋은 습관 열 가지
by Taylor Burgess
2022-06-19
크로스 커뮤니티 교회가 시작되고 이제 5년이 지났다. 교회개척에 참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회개척 5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목회자의 사역 보장 기간은 짧아지고 목회자가 탈진하는 시대다. 나는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우리 세대는 건강한 지도자가 이끄는 건강한 교회에 대한 요구가 절박한 세대이다. 개척교회 사역 첫 5년 동안 만드는 습관이 앞으로 10년의 우리 모습을 만들 수도 있고 우리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 이 중대한 요구에 따라 교회개척 첫 5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는지, 그 핵심 열 가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생명력 넘치는 경건 생활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성경강해 이상으로 당신이 교회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력 넘치며 만족을 누리는 마음,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한 열정으로 타오르는 마음이다.목사들이여, 날마다 주님을 찾으라. 말씀 안에서 주님을 찾으라. 기도하면서 주님을 찾으라. 금식과 침묵과 고독 속에서 주님을 찾으라. 조지 뮬러가 자신의 경건의 삶에 대해 얘기했듯이, “주 안에서 행복한” 영혼을 갖는 것을 하루 중 “가장 중요하고 우선하는 일”로 삼으라. 2. 건강한 가정교회개척 1년 차에 레이 오틀런드(Ray Ortlund) 목사가 한 이 말을 들었다. “목사의 결혼생활은 그의 복음설교만큼이나 중요하다. 그의 결혼생활이 곧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결혼생활은 움직이는 복음이다. 첫 번째 사역의 장인 가정에서 실패하면 두 번째 사역의 장인 교회에서도 온전하게 사역자의 자격을 유지하지 어렵다. 목사들이여, 당신의 가정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 당신은 목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단히 의도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겠지만 이를 위해 당신의 가정에 최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라.3. 신실한 친구들예수님에게는 친구들이 있었다. 바울도 친구들이 있었다. 찰스 스펄전도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목사들에게 친구가 별로 없거나 전혀 없다.목사들이여, 당신에게는 당신을 격려하고 도전하고 책임을 지우기도 할 친구가 필요하다. 당신을 우러러보지도 않고 “사역”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도 당신과 세 시간은 너끈히 보낼 수 있는 친구들이 필요하다. 교회개척은 고독과 낙담의 여정이 될 수 있다. 친구 없이는 오래 버틸 수 없다.4. 규칙적인 휴식의심의 여지없이, 교회개척에는 기꺼이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휴식은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임을 일깨워 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목사들이여, 쉬는 날을 준수하라. 휴대전화를 끄고 낮잠을 자라. 좋은 음식을 먹고 영화도 보라. 유익한 책을 읽고 취미 생활에 흠뻑 빠지기도 하라. 이렇게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휴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휴식에서 얻은 힘으로 일을 한다. 안식일의 원리를 기억하라! 그리고 이를 거룩하게 지키라.5. 훈련과 경계지속가능한 생활 규칙을 설정하고 따르도록 하라. 교회개척 초반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혼란스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일정을 당신이 통제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주도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배우자와 핵심 리더들과 함께 일정과 해야 할 일에 대해 지속해서 의논하라. 자신의 한계를 알고 기꺼이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하기로 한 일에 마음을 쏟고,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떠맡지 말라.6. 리더십 개발“론 레인저”(Lone Ranger, 서부영화에서 홀로 서부를 누비며 사람들을 돕고 악과 싸우며 정의를 지키는 외로운 영웅_역주) 사역은 건강하지 않을뿐더러 성경적이지도 않다. 슬프게도 많은 개척교회 목사들이 장로나 리더들을 세우지 않음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교회의 중심으로 만들어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방해물이 된다.목사들이여, 혼자서 짐을 다 져서는 교회가 부흥할 수 없다. 리더들을 세우고 그들을 인정하고 치하하라. 중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기꺼이 위임하여 중요한 결정의 부담을 함께 나누어라.7. 연구시간의 확보끝 모를 요구사항의 연속인 개척교회에서 연구 시간을 확보하기란 정말 어렵다. 연구시간을 준수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당신 스스로 연구시간을 확보하고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연구시간을 방해받지 않으려면 당신 일정에 표시해 놓으라. 이 시간을 교회 리더들과 회중과 가족들에게 말해 놓으라. 열매 맺는 말씀사역을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8. 의도적인 단순함개척교회는 즉각적인 변화에 대한 열망 때문에 정신없이 분주한 게 다반사다. 그러나 이는 이제 막 시작하는 교회의 건강을 해치는 가장 큰 위협의 하나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의 사역은 무르익지 못한 채 너무 과하게 확장할 수 있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동역자들과 함께 그 일을 실행할 것인지 하지 않을지 명확한 틀을 세우고, 교회개척 첫 5년 동안 자를 것은 자르도록 하라. 그리고 이 원칙을 고수하라.9. 새 가족을 맞이하는 건강한 절차건강한 교회의 궤도를 걷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는 교회의 성원이 되는 절차를 탄탄하게 설계해 놓는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모임을 단계별로 또는 그룹별로 나누어 교회의 이념, 정책, 사명, 비전, 가치, 전략을 설명해 주고, 성경의 기본 진리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다. 앞으로 교회의 일원이 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한 이해, 개인적인 간증을 들을 수 있는 만남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중에 적절하다고 판단될 때는 다른 신실한 교회를 추천해 줌으로써 주의 백성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쓰임 받도록 기쁨으로 보내주어야 한다.10. 견딤과 오래 참음때때로 교회개척이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고 무기력증이 찾아올 수도 있다. 반대자들의 가차 없는 공격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낙심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잠수를 타더니” 떠나 버린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 당신의 의도, 그리고 당신이 최선을 다해 섬기고자 하는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점점 지치고 싫증이 날 것이다. 어쩌면 가까운 친구들을 잃을지도 모른다. 실패하고 포기하고 싶은 날도 올 것이다. 그러나 목사들이여, 포기하지 마라. 당신을 부르신 이는 신실하시며 당신이 겪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언젠가 내 아버지께서 내게 써 주신 편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네가 홀로 있게 된 그때에도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란다. 하나님께서 네 곁에 계신단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그러니 그 길을 계속 가라. 나는 이제 5년이 지났고, 주님이 원하시면 35년을 더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오래도록 사역하는 우리가 되자.원제: How to Survive the First 5 Years of Church Planting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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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친구
복음설교란 무엇인가?
by 고상섭
2022-06-18
복음이란 무엇이 아닌가? 복음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일 것이다. 다양한 ‘복음’에 대한 정의가 있지만, 팀 켈러는 센터처치(Center Church: Doing Balanced, Gospel-Centered Ministry in Your City)를 시작하면서 “복음은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복음을 설명한다. 왜 ‘복음은 ~이다’라는 긍정문으로 시작하지 않고, 이처럼 부정문으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면 ‘복음은 ~이다’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그는 ‘복음은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 같다. 그래서 팀 켈러는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지 말라’라는 소제목으로 논리를 이어간다.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한다는 말은 복음의 결과를 복음으로 착각한다는 말이다. 결국 ’복음이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는 ‘복음의 결과’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복음의 결과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복음을 잘못 이해할 때 생기는 두 가지 오해인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생겨나게 된다.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한다는 말을 싱클레어 퍼거슨은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말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말라는 말은 인간의 행위가 먼저 있고 그 행위에 따른 축복을 누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있고 그 은혜의 반응으로서 인간의 순종이 있다는 말이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게 되면, 칭의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인간적인 노력으로 성화를 이루어가야 된다는 율법주의를 양산하게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명령법 앞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먼저 베풀어 주신 은혜가 있다. 출애굽기에 십계명은 이렇게 시작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출 20:4)‘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명령형은 단순히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다. 이 명령에는 그 명령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이 먼저 행하신 은혜가 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은혜를 선포한 후에 십계명을 요구하신다. 즉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명령 앞에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즉 은혜가 있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동일하다. 우리의 순종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칭의와 연결되어야 한다. 칭의와 성화의 순서를 놓치게 되면, 복음을 왜곡하게 되어서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첫째아들처럼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이 순종했지만 아버지에게 분노하는 율법주의자가 된다. 첫째아들이 순종한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순종으로 인해 받을 유익 때문이었다. 칭의와 성화의 순서가 연결되지 않으면 복음이 왜곡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자신의 마음대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둘째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결국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결과이며,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려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품이 분리되면 율법주의자 또는 반율법주의자를 양산하게 된다.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설교 그렇다면 복음설교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설교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이 동기가 되어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설교란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대신 행하신 것을 믿는 것이다. 브라이언 채플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FCF,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인간의 타락한 상황 드러내기(The Fallen Condition Focus)라 말한다. FCF는 설교의 진정한 주제를 결정해 준다. 왜냐하면 그 구절이 쓰인 진정한 목적이 바로 FCF에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설교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FCF에 대처해 나가는 방법을 성경 본문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성경본문을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결국 FCF가 설교의 주제와 그 접근법을 결정하고 내용까지 구성한다(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54쪽).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억지로 드러내려 하다가는 자칫 성경을 왜곡할 위험에 빠칠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란 본문 안에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대안으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해서 행한 일을 선포하는 것이다. 즉 칭의가 성화의 도구가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 적용설교팀 켈러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단순히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칭의를 성화와 연결시키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설교’라 할 수 있다. 이 설교가 도덕주의 설교와 다른 이유는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에 있다. 인간적인 결단을 통해 “내가 ~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하겠다”라는 것은 도덕주의,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지만, 행위의 동기가 칭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혜의 동기로 순종하는 칭의와 성화가 연결되는 설교가 된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가 되면 도덕주의 설교가 되지만,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면 ‘그리스도 중심 적용설교’가 된다.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복음 즉 칭의를 통해 다양한 삶의 자리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복음이 적용되는 다양한 주제들을 언급한다. 낙망과 우울, 사랑과 인간관계, 성, 가정, 자기관리, 인종과 문화, 전도, 인간의 권위, 죄책감과 자아상, 기쁨과 유머, 다른 계층에 대한 태도 등이다. 이런 주제들이 모두 복음의 동기 즉 칭의와 연결되어 성화 되어야 하는 구체적인 적용점이다. D. A. 카슨도 바울의 고린도전서를 설교의 적용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고린도전서는 복음이 어떻게 태도나 정신기강, 인간관계, 그리고 문화적 상호작용들에 광범위한 변혁을 일으키는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을 향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이 작동해야 함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동일하게 그래야한다. … 복음이 다음의 영역들에서 어떻게 삶을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복음이 어떻게 사업 관행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상업상의 우선순위들을 바꿀 수 있는지 등을 생각해야 한다. 이 작업은 복음으로부터 사회적 원칙을 추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선지자적 목소리를 내려는 헛된 노력으로 끊임없이 부수적인 것들에 관심을 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우리의 복되신 구주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교회들 속에서 전파하고 가르치고 살아냄으로써 되는 것이다(센터처치, 93쪽).복음 설교와 설교자아마도 가장 탁월한 성경 설교자들의 (성경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탁월성은 본능에서 나온다. 그들의 공식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멍한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원리들은 무의식 가운데 발전된 것이고, 타고난 능력과 은사, 청중과 설교자로서의 경험을 조합해 터득한 것이다. 성경적 설교는 그들의 모국어가 되었다. 그들은 성경신학의 문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 지금 언어 체계의 어느 부분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말이다(설교, 118쪽).팀 켈러는 설교에서 복음설교를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를 ‘본능’이라고 언급했다. 이 말은 많은 설교자들을 좌절시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설교를 잘하는 사람은 타고났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팀 켈러가 여기서 말하는 ‘본능’은 단순한 타고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설교는 복음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선포되는 것이다. 설교자의 내면이 설교보다 더 중요하다. 또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설교할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과 거의 같다. …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설교할 때도 일어나지 않는다(설교, 228쪽).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면, 설교 전의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절한 감격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목매어 통곡하는 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설교자의 삶을 통해 설교가 선포되는 것이다. 결국 복음설교 즉 그리스도 중심 설교란, 단순히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는 설교자의 뜨거운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핵심일 것이다. 복음설교를 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설교자인 나는 오늘 복음에 감격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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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교사의 세 가지 징후
by Jon Bloom
2022-06-15
이리가 양을 바라보는 이유가 뭘까? 잡아먹고 싶어서이다. 양을 돌보거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잡아먹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양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늑대는 기만전술로 양을 속여 이런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를 양 떼를 아끼지 않는 “사나운 이리”라고 불렀다(행 20:29). 바울은 아마도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힌트를 얻어 이런 비유를 썼을 것이다.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마 7:15). 거짓 예언자들이라는 게 단지 거짓 교리를 가르쳐서만이 아니다. 중요한 건,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 예언자들의 목표는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딤전 1:5)이 아니다. 다른 무엇이다. 자신의 목표를 철저하게 숨기는 그들에게 사실상 양 떼는 불경건한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비유를 바꾸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마 7:16). 바울은 양 떼 가운데로 침투하는 가면 쓴 “이리”의 “열매”를 분별할 수 있도록 돕고자 애썼다. 그가 디모데후서 3장에서 설명한 열매 중 세 가지를 살펴보자.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가 사역을 하는 중에 만날 가능성이 있는 “반대하는 사람들”(딤후 2:24-26)에 관해서 설명한다.경건한 가면바울이 묘사한 첫 번째 특징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사람이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디모데후서 3:1-5.바울이 말하는 이러한 지도자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이리의 목적: 방종• 양의 옷: “경건의 모양”• 눈에 띄는 열매: 개인적 거룩함이 없음(“경건의 능력 부인”)바울의 조언만 잘 따르면 이런 거짓 지도자는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리는 양에게 속내를 숨기는 데에 선수이다. 그들의 “경건한” 모습이 처음에는 설득력이 있었기에 지도자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영향력은 교회의 영적 건강을 쇠퇴시키기 시작한다. 내가 수십 년 전에 함께 일했던 지도자 중 한 명은 정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오랫동안 목회자의 위치에 있었다. 명확한 증거가 나오기 전이었지만, 그의 주변에서 드러나는 몇몇 상황에서 느꼈던 어떤 직관적인 불안을 지금도 기억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이상하다고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영적 진정성이 부족했다. 그의 가르침과 모범에는 능력이 없었다. 마침내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고, 분별력 있는 여러 지도자가 비밀스럽고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목적이 드러날 때까지 그를 압박했다.직감으로 느끼는 불안함이 항상 정확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열매가 익어 형태가 변하는 것처럼 조금씩 달라지는 패턴을 확인하라. 아무 곳이나 “은혜”을 갖다 붙이지는 않는지, 세속성과 방종에 쉽게 빠지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라. 돈을 다루는 방식을 잘 살펴보라. 성 윤리는 어떠한가? 느슨하지 않은가?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지는 않는가? 지적을 받았을 때 투명하지 않고 방어적 태도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일관하지는 않는가? 그런 지도자를 중심으로 주변에 교묘한 조종과 두려움의 문화까지 만들어졌다면, 상황은 심각하다. 마침내 사랑은 없지만 경건하게 보이는 늑대가 등장한 것이다. 진리를 배반한다이리 같은 지도자의 또 다른 특징은 “진리를 배반하는”(딤후 3:8)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거짓 교사인 이리로부터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이리는 보는 즉시 바로 알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영향력은 적을지 몰라도, 일반적으로 초창기에 늑대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모호하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 가운데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서 약한[weak, 개역개정과 새번역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여자들은 여러 가지 정욕에 이끌려 죄에 짓눌려 있고, 늘 배우기는 하지만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전혀 이를 수 없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배반한 것과 같이 진리를 배반합니다. 그들은 마음이 부패한 사람이요, 믿음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도 그 두 사람의 경우와 같이, 모든 사람 앞에 환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6-9.이런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이리의 목적: 자기 홍보(이기적인 야망)• 양의 옷: 영적 능력이나/과 신학적으로 박식함의 갖춘 듯한 이미지• 눈에 띄는 열매: 취약한 사람들을 조종함, 인상적인 영적 능력을 드러내지만 사실상 복음을 훼손하는 교리를 옹호하고 경건한 지도자를 반대함바울이 이리 같은 지도자가 수행하는 전략적 진행을 설명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초창기에 그들은 교활하게 고개 숙이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영향력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고 공공연하게 진리에 대적하는 경우가 많다.‘교묘한’ 지도자 거짓 교사는 보통 교묘하게 들어온다. 그들이 “약한 여자들을 유인한다”는 바울의 말에 우리는 #MeToo를 옆에 붙이고 싶은 충동까지 들지만, 바울의 말이 반드시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건 아니다. (물론 일부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런 경우지만 말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이리는 다양한 속임수를 활용해 특히 잘 속는 취약한 사람을 골라내 그들을 충동한다. 충성스럽고 겸손하며 경건한 지도자가 지향하는 사역보다 더 강력하고 영적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역사에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그들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거짓 교사에게 빠지는 이유는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영적인 능력으로 감동적인 모습을 연출하는 능력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은사지속론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마치 놀라운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은사중단론 맥락에서 봐도 대단한 신학적이고 영적인 지식을 소유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들이 가진 여러 은사나 지식은 처음에는 경건한 지도자들조차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좀 이상한 사람도 하얀 양 가죽을 걸치면 그럴 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빨을 드러낸다그러나 결국에 이리는 이빨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그런 교사를 “야네와 얌브레”라고 말한다. 모세를 대적하여 인상적인 마법의 힘을 휘두른 이집트 마술사에게 붙인 이름이다(출 7:10-12). 바울은 그들을 “부패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성경에 대한 단순하고 순진한 오해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려는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서 성경을 악용한다. 참된 복음이 공개적으로나 또는 사적으로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사회적 자본(대부분의 경우 돈)을 위협할 때, 그들은 공격적이고 무자비하게 “진리를 대적”한다. 비로소 거짓된 모습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리더십의 전형적인 패턴을 살펴보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환멸과 상처를 남기고 떠난 과거의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넘쳤던 인물을 떠올려 보라. 과거에 많은 교회가 열광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영적 능력의 사례를 살펴보라. 그러나 특정 지도자에 대한 심각한 의존과 충성으로 이어질 때 그 모든 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되새겨 보라. 오로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는 그룹이 있다면, 게다가 모이는 사람들이 주로 취약하고 영적으로 약한 사람이라면, 그런데 그들 중에서 서서히 경건한 교회 지도자를 향한 불신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경건한 지도자를 향한 갈등과 지도자에게 순종을 거부하는 일반적인 패턴을 살펴보라. 고난을 회피한다이리 같은 지도자의 세 번째 특징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한 “박해와 고난”을 회피한다는 것이다(딤후 3:11). 이 특성은 디모데에게 쓴 바울의 편지에 암시되어 있다.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행동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따르며,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내가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박해를 견디어냈고, 주님께서는 그 모든 박해에서 나를 건져내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악하여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0-13.바울이 말하는 이러한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리의 목적: 자기 보존• 양의 옷: “주장”(딤전 1:7)과 용기를 풍기는 통제력 있는 리더십• 눈에 띄는 열매: 명성, 지위, 부, 안락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 어떤 개인적인 희생과 공개적인 박해를 피함.이리 같은 지도자는 매우 자신감 있는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고, 횡포와 교묘한 행동을 오히려 “강한 지도자”의 특성으로 합리화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여러 가지 황당한 행동을 오히려 “희생”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자신감과 지도력과 “희생”을 신중하고 객관적으로 조사한다면, 그의 “헌신”이 유익을 끼친 건 교회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다른 데서처럼 여기서도 바울은 박해와 고난을 그리스도를 닮은 진짜 지도자의 열매라고 말한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고후 11:23). 이렇게 바울이 인내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위대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열매를 말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는 바울과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박해와 고통을 겪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따라서 이리 같은 지도자가 훨씬 쉽게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은 참된 지도자는 여전히 이리 같은 지도자가 추구하는 자기 증진, 자기 부요, 방종과 같은 목적과 대비되는, 그리스도의 백성을 위해 명성과 지위와 부요함과 안락함마저 기꺼이 희생하는 열매를 맺는다. 주의를 기울여 눈을 뜨면 볼 수 있다.자세하게 살펴보라다음은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예수님을 위한 투옥과 죽음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작별을 고하며 한 말이다.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8-30.“사나운 이리들”이 양의 옷을 입을 것이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출현은 교묘할 것이다. 심지어 (가롯 유다처럼) 장로가 되어서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들은 경건한 모습에 인상적인 영적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자신감과 용기가 넘치는 이미지를 발산할 것이다. 많은 양이 그들에게 미혹될 것이다. 장로들은 예수께서 “열매로 그들을 알아볼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자신과 양 떼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정말로 눈을 뜨고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열매를 통해 우리는 이리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 같은 지도자는 자신의 불경건한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양을 잡아먹는다. 원제: How to Watch for Wolve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연관 주제 함께 읽기 ▶ 이리 식별법 ▶ 거짓 선생에 관한 놀라운 진실▶ 그래도 목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
복음은 ‘대중적’인가?
by 김형익
2022-06-13
복음은 대중적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대중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중적’의 의미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수많은 사람의 무리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 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popular”인데, 국립국어원 한국어-영어학습사전은 ‘대중을 중심으로 한’ 또는 ‘대중의 취향에 맞는’이라고 풀이한다. 이 영단어는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되면, 대중주의(populism) 또는 대중주의자(populist)라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용어들은 일부 엘리트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전체를 동등하게 대변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한 가치중립적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인기영합주의라는 부정적 뉘앙스, 즉 오로지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 대중의 인기에 기대고 영합하는 정치 행위나 정치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곤 한다. 이렇게 ‘대중적’이라는 말은 얼마든지 가치중립적이면서도 부정적 뉘앙스를 가진 말로 사용될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복음은 대중적인가?”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가치중립적 의미로 복음이 대중적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복음은 만인에게 선포되어야 하는(막 16:15) 좋은 소식이기에 대중적이다. 만일 ‘대중적’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용례를 알고 오해될 위험성을 피하려고 한다면, ‘복음은 대중적이다’라는 표현보다는 ‘복음은 보편적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추천할 수도 있겠다. 복음은 모든 민족, 모든 죄인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좋은 소식이고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딤전 1:1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복음은 보편적이다(딤전 2:4). 설교는 대중적인가?여기서 내가 던지고 싶은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설교는 대중적인가?” 오래 전 일이다. 미국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하고 두어 달이 지나던 즈음 내게 설교와 관련하여 한 가지 요청을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의 요청은 “대중적인 설교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요청을 한 분은 바로 그 영단어 “popular”를 사용했다. “좀 ‘popular’한 설교를 해주십시오.” 그렇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단어 자체는 부정적 가치를 전달하지 않는다. 대중적 설교에 대한 그의 요청은 설교가 대중적일수록 교회가 성장할 테니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설교를 해 달라는 의미였다. 그가 요청한 ‘대중적 설교’는 보다 많은 사람(대중)이 좋아하고 반응할 수 있는 설교였다. 이런 의미를 전제하고 다시 한 번 묻겠다. 설교는 대중적인가? 그저 쉽게 ‘대중적 설교는 틀렸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도 ‘대중적 설교’는 부정적 가치를 지니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설교는 그 성격상 대중적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는 복음이 대중적인 만큼 (혹은 보편적인 만큼) 대중적이어야 한다. 설교가 교회와 예배의 맥락에서 전해질 때 그 설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지만, 설교가 언제나 하나님 백성의 예배의 맥락에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가 기존의 틀을 깨고 들판과 광산에서 설교를 했을 때, 그것은 반제도적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들의 설교는 사도행전 2장에서 보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나 사도행전 17장에서 보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 가까운 설교였다. 베드로는 정확한 장소를 누가가 지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루살렘의 한 넓은 거리에서 (아마도 성전이 가까운 곳에서) 설교를 했을 것이고, 바울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설교를 했다. 사실, 설교가 대중적일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을 꼽으라면 우리 시대의 빌리 그래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73년 서구의 기독교 국가도 아닌 대한민국의 여의도 광장에 100만 명을 모을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는 그 ‘대중’에게 설교를 했다. 들려지는 설교를 하는 것은 설교자의 정당한 수고이다 설교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모두를 향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설교가 보편적 (혹은 대중적) 복음을 그 내용(contents)으로 전하는 것이라면 설교는 대중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복음의 진리일지라도 듣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 전해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설교자의 책임이다. 설교는 그 내용만큼이나 전달(delivery)도 중요하고, 설교자는 내용을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전달의 방식을 위해서도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나팔 소리로 백성들에게 신호를 보내던 전통에 근거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고전 14:8). 보편적 복음의 진리는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정교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설교되어야 한다. 나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설교가 대중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의 중요성을 축소하거나 간과하는 사례를 우려한다. 바른 복음은 보편적 복음이고, 그 보편적 복음은 가능한 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설교되어야만 한다. 들려지는 설교를 하기 위해 고민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은 설교자의 정당한 책임이다.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하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사탄이 설교자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쳐놓은 덫이 있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교회 성장의 욕구는 종종 정당함을 넘어 많은 목회자-설교자에게는 유혹의 미끼가 되곤 한다. 교회를 개척하고 자립할 수 있을 만큼의 교인들로 구성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사실 이것은 시간의 문제만도 아니다. 개척교회가 아니더라도 성장이 지연되거나 지체될 때 목사는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을 받는다. 여기서 나는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이라고 말했다. 이 유혹은 설교의 전달 방식이 아니라 설교의 내용인 복음의 진리를 대중영합적으로 비틀고 싶은 마음 속에서 힘을 얻는다. 그렇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복음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진리이고(딤전 1:15),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할 좋은 소식이기에 대중적이다. 그러나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이 설교자의 내면에서 힘을 얻을 때에는, 불변하는 보편적 복음의 내용을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믿을 만한 복음’으로 비틀고 왜곡하는 일이 일어난다. 교회 성장의 욕구에 못 이겨 이런 방식의 ‘대중적’ 설교를 하게 되는 순간, 목사는 진리의 매춘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진리의 매춘 행위를 통해 성장한 교회의 화대를 받아 누리게 되면, 따라오는 것은 교회가 사탄의 회당으로 변질되는 일이다.복음은 보편적이지만 ‘대중주의적’일 수는 없다실수는 대중적 복음의 성격을 ‘대중주의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일어난다. 보편적 복음은 그 본질상 언제나 대중을 둘로 가르는 역할을 한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 심지어 예수님의 설교는 모두 대중적이었지만, 언제나 대중을 둘로 가르는 결과를 낳았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적 설교가 교회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신화는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접근했던 뱀의 거짓말과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물탄 메시지와 복음을 전했던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과 신약의 거짓 사도들, 거짓 교사들에게 깔려 있는 전제였다.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설교했을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장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어떤 인물에게는 비범한 설교의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도 안다. 고대 교회에서 황금 입으로 불렸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나 18세기의 조지 휫필드, 19세기의 찰스 스펄전, 20세기의 마틴 로이드존스와 같은 이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비범한 능력을 지닌 대중적 설교자였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조금도 비틀지 않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대중이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했다. 우리 시대에는 존 맥아더와 존 파이퍼, 팀 켈러와 같은 분을 들 수도 있겠다. 이들의 교회는 모두 보편적 복음 설교의 결과로 외적 성장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들의 설교는 대중의 취향에 맞추려는 대중주의적 설교는 아니었다. 반면, 우리는 아더 핑크나 윌리엄 스틸 같은 분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더 핑크는 동일한 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강단이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었다. 윌리엄 스틸도 동일한 복음을 일평생 한 강단에서 전했지만 교회는 성장하지 않았다. 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타협 없이 전하되, 대중에게 들리는 방식으로 설교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고 몫이다. 그리고 교회의 외적 성장이라는 결과는 하나님께서 주권 가운데 주시는 은혜다.
대중적설교
대중주의적설교
대중영합주의적설교
대중영합주의
대중주의
보편적설교
아이들에게 가르치라, 성경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을
by Sally Lloyd-Jones
2022-05-30
방문하는 교회에서 나는 늘 아이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첫째, 하나님께 사랑 받으려면 착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아이들은 머뭇거리며 손을 든다. 나도 따라 든다. 그리고 두 번째로, 착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아이들은 주변을 살피다가 다시 손을 든다. 이 아이들은 성경 이야기를 알고 있고 또 어떤 게 정답인지도 십중팔구는 다 알고 있는 그런 주일학교 아이들이다. 그런데 이런 주일학교 아이들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이 아이들처럼 나고 그랬다. 어린 시절 (그때도 그리스도인이었다) 나는 성경에는 지켜야 하는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실) 규칙과 모범으로 삼고 따라야 하는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실) 영웅이 넘쳐나는 책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다.나는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다. 정말 그랬다. 나는 꽤 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규칙을 항상 지킬 수는 없었고, 그럴 때면 하나님이 틀림없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도저히 다니엘처럼 용감할 수가 없었다. 그 시절 주일학교 성가대가 “다니엘처럼 되고 싶어요”를 부를 때면 얼마나 괴로웠던지,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다니엘처럼 용감하다고 아무리 마음속으로 외쳐도, 사자에게 던져져도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아무리 상상해도…. 다니엘처럼 그런 상황이 되면, 나는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나를 사랑하실 수 있겠는가?내가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실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그 이야기얼마 전 주일이었다. 나는 주일학교 수업시간에 여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스토리 바이블: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The Jesus Storybook Bible) 중에서 “다니엘의 무서웠던 하룻밤” 이야기를 읽어주고 있었다. 여자아이 하나가 내 무릎에 닿다시피 바짝 다가와 앉았다.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그 아이의 낯빛이 빛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린 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야기가 끝날 때였는데 다른 선생님들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거의 무심결에 이렇게 질문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니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내가 내뱉은 그 말은 말 그대로 큰 짐을 그 어린아이에게 지운 것이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그 여자아이를 내가 깨운 것 같았다. 아이가 내 바로 앞에서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숙였다. 절대 못 잊을 것이다.우리가 이야기를 도덕 교훈으로 바꾸면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깔끔한 작은 상자에 담아 잘 포장하고 모든 질문에 답을 제시할 때, 우리는 신비가 있어야 할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발견을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아이들을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그래서 나는 스토리 바이블: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썼다. 그래서 아이들은 내가 몰랐던 것을 알 수 있도록. 성경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님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님을.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것임을. 하나님이 하신 일에 관한 것임을. 성경은 거의 전부가 한 이야기, 곧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고 구원하러 오신 이야기임을.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대가를 치르시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놀라운, 결코 멈추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깨어지지 않는, 한결 같고 영원한 사랑으로. 성경은, 단언컨대, 하나의 이야기임을, 규칙집이 아님을, 오직 한 분의 영웅만이 있는 이야기임을.나는 스토리 바이블: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썼다, 아이들이 그 영웅을 만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분의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규칙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기에. 하지만 이야기, 하나님의 이야기는 그리 할 수 있기에.원제: Teach Children the Bible Is Not About The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경
성경이야기
어린이성경
성경의주인공
우리는 어떤 이야기에 속해 있는가
by Tom Nelson
2022-04-30
끝없이 빛나는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며 내게 늘 영감을 준다. 어렸을 때 수정처럼 맑은 여름 하늘을 넋을 잃고 바라본 적이 있다. 등을 대고 누워, 아직 땅에 남아 있는 온기를 느끼며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세상을 보면서 문득 커다란 궁금증이 생겼다. 이 모든 것은 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중에 내 자리는 어디일까? 나는 정말 중요한 존재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목회자의 소명은 확고히 정립하려면 인간으로서 가장 깊은 수준에서 풀어야 하는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질문을 먼저 던져 보아야 한다. 세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논리적이고 온전한 일관성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자 한다면, 기원이나 운명, 인식, 고통, 의미, 목적에 관한 질문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실존적 질문들에 대한 충분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성실하고 선의에 차 있는 목회자라 하더라도 그의 소명은 모래 위에 세워진 것과 같다. 목회자는 자신의 삶과 사역에 궂은비가 쏟아지기 시작할 때에도 그 어려움을 겨우 견디어 낼 힘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회복하고 부흥하는 힘을 갖기를 원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목회자의 소명은 우리의 참이 되시는 하나님과 복음에서 시작한다. A. W. 토저는 우리의 가장 깊은 실존적 질문은 하나님에게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인류의 역사는 아무도 그 인류의 종교를 뛰어넘지 못함을 보여줄 것이며, 인간의 영적 역사는 그 어떤 종교도 하나님에 관한 생각보다는 위대하지 않음을 보여줄 것이다.토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교정해 준다는 것을 제대로 일깨워 준다.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가 모든 현실의 기반이며, 여기에 목회자는 확고한 소명의 닻을 내려야 한다. 목사가 이런 기본적인 수준에서 흔들리게 되면 그의 소명은 의심과 환멸과 절망의 암초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목사의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몸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실재하시며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자신을 친히 드러내셨다는 이 명제에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이 부인할 수 없는 명제가 세상의 참 진리이다.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창조된 세계를 통해 드러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66권의 정경과 그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드러난다. 이는 우리가 이야기의 사람들임을 의미하며, 동시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 시공간의 위대한 이야기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함을 의미한다.우리가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기억할 때 목회자는 자신뿐 아니라 성도들이 영적으로 부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네 국면의 이야기성경의 복잡성과 그 신비는 헤아리기 매우 어렵지만,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네 가지의 일정한 틀 안에서 발견하는 것에는 목회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 최초의 창조, 타락, 구속, 새 창조, 이렇게 네 국면의 신학적 구분은 인간의 실존적 범주를 재조정한다. 나는 교회에서 이 네 국면의 이야기를, 당위와 현실과 가능과 미래의 차원에서 풀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첫 번째 국면, “최초의 창조”는 이 세상이 마땅히 취해야 할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마땅히”는 하나님의 완벽한 디자인, 그가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허무주의의 세계가 아니라 도덕적 세계라는 진리를 나타낸다.두 번째 국면, “타락”은 지금 세상 그대로의 모습이다. 지금의 상태는 붕괴된 우리의 삶과 세상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 우리의 관계와 현실 정황에서 이러한 죄의 결과와 붕괴의 조각들을 날마다 경험한다. ‘지금의 상태’는 목회자들에게 신정론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근본적인 답을 줌으로써 세상의 악과 고통에 대한 일관성 있는 이해를 제공한다.이 이야기의 틀은 각자의 삶에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하는 성도들을 목회자들이 돌볼 때 필수적이다. 또한 목회자들은 ‘지금의 상태’를 타락한 인간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로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싫어하여 하나님이 디자인하시고 사랑하신 세상을 속이고 파괴할 궁리를 하는 사탄이 활개 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세 번째 국면, “구속”은 앞으로 실현될 모습을 묘사하며 이 세상에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 이 ‘실현될’ 이야기는 죄 많은 인간을 위해 속죄 제물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고 새로운 창조의 생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이 잘 보여준다. 목회자들은 고통과 불의의 한 가운데서도 영혼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메신저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선하지만 망가져 버린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를 구속하실 것이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왕 예수를 통해 당신의 통치를 세상에 가져오실 것이다.네 번째 국면, “새 창조” 또는 “완성”은 성경적 관점에서 마지막 단계이다. 이는 언젠가 이루어질 모습이자, 우리의 지향점이다. 새 창조는 세상에 커다란 소망을 선사한다. 우리는 역사의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악을 심판하시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함이 온전케 되는 결말로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복음 중심이 네 국면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인격을 중심으로 한다. 즉, 목회자들은 단지 아이디어나 이야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격을 통해서 재조정됨을 의미한다.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도 이 네 국면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셨다고 하는 영혼 깊숙한 소망과 역사적 확신이 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떠나 죄악 가득한 이 땅에 오셔서 죄의 모양을 입고 죄 없는 삶을 사셨다. 하나님 나라를 몸소 보이셨으며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놓으셨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으며 하늘에 오르셨고 언젠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떠한 공로가 아닌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지금 여기,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서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새 창조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목회자의 소명은 이러한 성경적 이야기의 맥락에서 우리에게 찾아와 세상과 그 안의 우리 위치에 대한 일관된 이해, 그리고 우리 삶과 일 한가운데서 복음의 소망을 선사한다. 목회자의 소명의 중심에는 예수님에 대한 이 이야기에서 살고 사랑하며 숨 쉬고 좋은 소식을 나누는 우리의 삶이 있다. 인류와 대속의 역사는 힘차게 행진하며, 목회자의 소명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발맞춰 걷는 것이다. 시간 밖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 위해 시간 속에서 당신의 목적을 주권적으로 성취해 가신다. 복음이 사람에 관한 것이라 할 때, 목회자의 소명은 매우 관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선포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도덕적 체계나 교리적 신념의 집합이 아니라 이것들만큼이나 중요한 한 사람이다. 최초의 창조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복음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친밀함에 대해 말한다. 목회자는 일생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알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친밀하게 여김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져 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갈 4:9). 현재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함, 성령의 내주하심은 이후 다가올 삶을 먼저 맛보는 것과 같다. 바울은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묘사한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왜’로 시작하기목회자의 소명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을 명확히 알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있다. 우리의 궁극의 목적(telos)는 재조정되어야 한다. 사이먼 사이넥은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가장 먼저 ‘왜’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당신의 목적, 명분, 신념은 무엇인가? 당신의 회사는 왜 존재하는가? 당신은 왜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는가? 목회자의 소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왜 우리가 그것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의 소명은 ‘왜’가 흐릿해질 때, 열정은 퇴색하고 사명은 표류하게 된다.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의 첫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무엇인가?”로 시작한다. 그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데, 목회자의 소명은 그들이 섬기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포함하는 목적의식을 기초로 세워진다. 교회의 목사로서 이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예수와 그의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가 사람들에게 세상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나의 전존재적 믿음이, 목회자로서의 나의 소명을 활기차게 하며 매일 아침 나를 일으키고 맡겨진 일에 매진하게 한다. 나의 목회 기간은 30년이 넘는다. 산꼭대기에 서는 높아진 순간도 있었고 깊은 골짜기까지 낮아진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에나 영적으로 풍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부르심의 이유를 명확히 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우리 시대의 지평선개척 교회 목사로서 처음부터 고려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시작한 교회의 건축 디자인과 사명을 어느 시대 지평선에 가장 부합하게 할 것인가였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지평이었지만 여러 세대에 걸쳐 섬길 수 있고 우리 삶보다 더 오래갈 수 있는 시기적절한 지평이 우선 중요했다.건물을 세우든, 조직을 구성하든, 삶을 꾸리든,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은 멀리 보는 안목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때 목회자의 소명은 영원을 아우른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시대에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를 소망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벧후 3:8). 우리의 직업적 소명을 단순히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성취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생각의 범위가 비참할 정도로 빈약한 것이다.반면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매우 짧다는 것과 청지기의 삶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시편 기자는 영원한 시간의 지평뿐만 아니라 짧은 시간의 지평 또한 언급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우리 마음속에 영원에 대한 이 힘든 줄다리를 하며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지혜로운 삶을 구현하고자 애쓰는 것이다.우리는 한 분의 청중 앞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시간 속의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신다. 우리는 그 계획안에서 우리의 시간 지평을 재조정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우리가 속하여 있다고 믿는 이야기에서, 우리의 새로운 시간 지평으로, 나침반이 가리키는 자북(磁北)에서 진북(眞北)으로 목표를 재조정하는 것은 목사인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와 목사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모든 실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가장 분명하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재조정된 목표점에 의해 길 잃은 목자는 마침내 길을 찾게 된다. 이러한 방향 전환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비로소 바르게 따를 수 있다.원제: Pastors, Remember What Story You’re Living I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목회
목사의소명
하나님의시간지평
목사의삶의지평
A.W.토저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표면적으로는 이상하지만 영광스러울 정도로 좋은
by Hayden Hefner
2022-03-30
나는 초기 오순절주의를 ‘신학을 찾아가는 체험’이라고 표현하는 이를 만난 적 있다. 오늘날 많은 개혁파 은사지속론자(Reformed continuationists)가 체험 추구의 신학을 갖고 있는 현실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바른 행동(orthopraxy)을 추구하는 하나의 정통(an orthodoxy, 바른 교리)일 뿐이다. 믿음은 분명하지만, 실천은 그렇지 않다. 이론적으로야 얼마든지 계시의 은사가 지속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은사 추구로 인한 혼란을 두려워하여 그들은 은사 추구 자체를 주저한다.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내 말이 당신에게 반향을 일으킨다면, 이 기사는 당신을 위한 것이다. 어느 분별 블로거의 꿈확실히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는 종종 이상하고 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계시적 은사의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실수할 가능성 자체를 없애려고 하지 않으신다. 대신 하나님은 조직적 틀(고전 14:26-33)과 더불어 사랑으로 은사를 추구하고 실행하도록 격려했으며(고전 13:1), 지체로서 몸을 세우도록(고전 14:12) 만드는 내적 동기를 제공하셨다. 나는 적지 않은 이론적 은사지속론자가 교회 안에서 계시의 은사를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경우에 필연적으로 많은 혼돈을 초래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4:33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나 문맥을 주목해서 보라. 이 구절을 쓰기 직전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계시의 은사를 어떻게 추구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설명한다(26-33절). 그렇다면 바울이 33절에서 말하는 화평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39-40).바울이 추구하는 평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혼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 따르면 은사를 소홀히 한다고 해서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혼란을 피해야 하는 시점은 계시적인 영적 은사를 열렬히 추구하며 공개적으로 그 은사를 실천하는 시간 동안이다. 그럼 “정직하게” 그리고 “질서대로”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이 최소한 바울이 39절에서 언급한 예언과 방언의 은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계시적 은사에 대한 추구는 지혜로운 열심보다는 불길하고 부적절한 경고에 의해 더 많이 언급되기에 교회 안에서 종종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두려움을 가지고 아버지가 주시는 선물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피상적 이상함을 두려워함몇 주 전에 경건하고 존경받는 한 여성이 교회 앞에 나가서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부엌에 서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녀는 네 명의 자녀, 그러니까 두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어요. 그 여성은 오렌지 또는 산호색 어떤 기구를 들고 이렇게 외치고 있어요. ‘하나님, 당신이 진짜라면 날 좀 도와주세요!” 만약에 여러분 중에 이 여인이 있다면, 이 예배가 끝나고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싶습니다.”이 여자의 선언 속에 담긴 피상적인 이상함과 무작위성은 피할 길이 없다. 선언이라는 단어도 표면적으로는 이상하다.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피상적인 이상함이 꼭 잘못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성경도 표면적으로는, 그러니까 피상적으로는 이상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맹인의 눈에 침으로 범벅을 만든 진흙 혼합물을 비비는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이상하기 그지없다(요 9:6-7). 다리를 저는 사람에게 일어서서 걸으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요 5:8-9). 우물가에서 무작위로 만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마실 물을 청하는 것도 문화적으로 이상하고 외적으로는 임의적이다(요 4:7-9). 게다가 그녀가 분명 숨기고 싶었을 비공개 세부 사항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도 낯설기 그지없다(요 4:16-19).이런 식의 피상적으로 이상한 사역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의 지상 사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약 성경은 표면적으로 이상한 방식으로 사역하는 사도들과 더불어 다양한 그리스도인이 벌이는 이상한 예들로 가득 차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 이상한 사역도 얼마든지 “예의바르고 질서 있게” 수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표면적 이상함을 볼썽사나움(indecency) 내지 무질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따라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계시적이라고 주장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이상한 사역의 순간에 교회는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명확성과 식별 가능한 정확성에 비추어 분별한다. 앞에서 언급한 “오렌지색 기구”가 등장하는 예언적 단어의 경우가 그러하다. 첫째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에 성경과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회중에게 그들의 삶에 비추어 그 예언을 저울질하도록 요청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예언의 말씀 후에 기도의 자리로 초대했다. 그날 그 예언이 회중 중에 있던 한 특정 여성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했다. 그날 그 여성은 그리스도의 몸인 다른 지체로부터 기도를 받았고, 이 신령한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의 두 부분인 영과 육을 모두 세우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 두 명의 용감한 여성뿐 아니라, 그 예언이 가진 피상적 기이함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예언을 분별한 회중 모두에게 감사를 표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역을 경멸하지 말라깨어진 그릇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을 멸시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분별 블로그(discernment blogs)와 타락 포르노(failure porn) 등의 분위기를 타고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복음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두려움이 주는 죄악된 관성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시애틀에서 소리치는 설교자는 권위 있는 설교를 두려워하게 해서는 안 되며, 마법사의 지팡이를 들고 무대에 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는 신자로 하여금 은사 추구를 두려워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은사의 남용이라는 위험 때문에 은사를 피하는 것도 아니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령에 내재된 위험이 있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두려움은 결코 그분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은사를 마치 우리에게서 나온 척하는 우리의 타락된 경향을 겸손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고전 4:7). 우리는 정당한 은사의 남용과 더불어 은사가 자신의 것인 척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순종의 길에서조차 쉬지 않고 죄를 짓는 죄성(propensity)을 인식한다고, 그것 때문에 그 길에서 아예 멀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이다. 우리는 설교와 예언의 말씀을 시험하도록 부름을 받았지(살전 5:21), 결코 그것을 피하거나 멸시하라는 부름을 받지 않았다(살전 5:19-20).운전대 뒤에 서기피상적인 기이함에 대한 두려움과 이상주의라는 우상숭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계시적 은사를 열렬히 추구하도록 우리는 어떻게 우리 백성을 목양할 수 있을까?내가 존경하는 목사인 샘 스톰즈(Sam Storms)는 종종 이렇게 말을 한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규칙은 이거야. ‘다른 사람이 제대로 못하는 건 아예 시도도 하지 말라.’” 영적인 은사를 추구하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쉬운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폐쇄하는 데에는 아무런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카리스마가 그냥 활개 치도록 놔두는 데에도 별 다른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 가진 본질적인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를 부두에 묶은 채로 두거나, 배가 파도에 요동치는 동안 해안가에 서서 편하게 지켜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방향타 뒤에 서서 배를 운행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그 자리가 내가 서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원제: Superficially Weird and Gloriously Goo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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