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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하지 않는 세 가지 이유
by Matt Smethurst
2023-09-23
세속 시대에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쉽지 않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들 너무 바쁘다거나, 심각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애초에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어색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침묵하는 이유에 관해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뭐가 나올까? 뭔가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법의 하나는 애초에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침묵하는 데에는 세 가지 공통되는 이유가 있다.1. 맥락을 무시한다. 지금은 탈 기독교 시대이다.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에 관해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쉽게 가정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방식에 동참하기 위해서라도 주의 깊게 잘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오해를 사거나 완전히 거부당할 용어를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거기에는 심지어 성경의 용어까지 포함되어 있다. •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좋은 소식이지만, 하나님의 본질(또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쓴다면 의미 없는 말로 전락한다. • “당신은 죄인입니다.” 사실이지만, 죄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죄에 대해 그다지 나쁘게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은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이 말도 사실이지만,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성경에 따르면요….” 훌륭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꺼내려면 조건이 있다. 성경이 구식, 가부장적 동화 모음집으로 치부되지 않는 경우이다. 복음을 멋있게 치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해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주변 문화를 연구하는 목적이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지배적인 가치관과 희망, 두려움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복음이 그들이 갖고 있는 가장 깊은 갈망을 충족시키고 또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우상까지 전복시킬 수 있을까?오늘과 같은 문화 환경 속에서 효과를 높이려면 질문에 능숙해야 한다. 전도하는 핵심 목표가 단지 당신의 말을 듣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런데도 오로지 전문 성경 용어로만 나열하는 데 그친다면, 회의론자들은 기껏해야 혼란에 빠지거나 최악에는 도망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목표가 효과를 높이는 것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해하기 위해서 듣고 또 이해받기 위해서 말하게 된다. 더불어서 당신과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이웃이 곧 듣게 될 최고의 소식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도록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유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전도는 단지 허공을 때릴 뿐이다. 2. 사랑하는 데에 실패한다.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했다.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살전 2:8).잃어버린 자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영적 미덕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실용적이기까지 하다.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는 메시지도 들리지 않는다. 신뢰는 필수이며, 당신이 상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기본이다. 사랑에 실패하는 순간 복음 전파가 허사가 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을 향한 그들의 마음도 완고해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들을 향한 전도의 문은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결코 실질적 전략의 범주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사랑이야말로 당신이 고백하는 바로 그 하나님을 당신이 진짜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가장 확실한 리트머스 종이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단언한다.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고전 13:1-3)당신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전도자일 수도 있다. 또 회심자도 적지 않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부족하다면, 당신은 단지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위험과 이해관계는 없다.제대로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가 잘 들어주는 것이다. 경청은 단지 힘든 시기를 겪는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조언이 아니다. 그건 감성 지능의 기초 중 기초이다. 경청과 사랑받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흡사해서 사람들 대부분이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성경이 무어라고 하는가?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약 1:19) 권고한다. 하지만 이 말씀을 무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하는 데에 바빠서 상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위험까지 무릅쓰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여전히 길을 잃었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는 것처럼 상대에게 말해야 한다. 지금은 분노의 시대이다. 문화를 역행하는 사랑의 말투가 없다면 복음이라는 반문화적인 메시지도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 3. 두려움에 굴복한다.전도하기를 꺼리는 진짜 이유 중 하나가 두려움이라는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어쩌면 그건 어색한 상호작용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또 노골적인 거부나 당혹감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회의론자의 반대에 대응할 준비가 되지 않다는 두려움일 수도 있다. 두려운 이유는 수없이 많다. 두려움 중 일부는 소심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현실이다.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두려움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복음 전파의 기회를 낭비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러나 전도는 복잡하지 않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면,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복음을 제대로 나누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완벽한” 상태가 되어서 전도하는 날은 아예 꿈꾸지도 말라. 그런 날은 없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혼을 붙잡고 관리하겠다고 결심하라. 언제가 될지 몰라도 그 순간이 오면, 당신은 갑자기 대화의 방향을 영적인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적으로는 괴로울 것이다. 뱃속이 울렁거릴 수도 있다. 그건 정상이다. 맥박이 마구 뛸 수도 있다. 그것도 정상이다. 목소리가 떨릴 수도 있다. 이제 당신은 진정한 복음 전파자의 세계로 들어왔다. 환영한다. 기억해야 한다. 이런 불쾌한 감정이 결코 도망치라는 신호이거나 다음으로 미루라는 신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대로 지금 당장 두려움을 정면으로 직면하고 전쟁을 선포해야 할 바로 그 순간이다. “그래, 두려움아, 너는 실재하고 또 강력하지. 하지만 넌 전능하지 않아. 넌 나를 지배하지 못해. 나는 너에게 굴복하지 않을 거야. 나는 오로지 왕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볼 거야. 지금 나는 그분께 기대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겠어.” 당신이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지금 한번 상상해 보라. 당신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두려움에 얼어붙었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이, ‘주님, 저는 아닙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이 아직 준비가 안 됐고, 게다가 게다가 환경도 이상적이지 않아서 당신이 복음을 듣지 못했더라면,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위대하시며 동시에 선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복음서를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의 하나를 선포하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 12:32).감을 잡았는가? 목자. 아버지. 왕. 하나의 작은 구절, 그러나 세 개의 거대한 진리.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는 목자이시며,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 아버지이시며,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왕이시다. 이천 년 전, 목자이신 왕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되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라는 구절만큼이나 위로가 되는 게 있다. 바로 “어린양이 나의 목자이시다”(계 7:17)라는 약속이다. 영광으로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이다”(마 28:20).전도가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Matt Smethurst,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 (10Publishing, 2022)에서 간추린 글입니다.원제: 3 Reasons We Avoid Evangelism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김선일의 심플리 미셔널
by 김선일
2023-07-03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 탈교회화, 비종교화의 길에 들어선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1. 신에 관한 소문2. C. S. 루이스에게 배우는 정감적 전도3. 프란시스 쉐퍼와 합일적 복음제시4. 뉴비긴에게서 배우는 전도의 자신감 5. 팀 켈러의 깊고 단순한 복음전도Special 왜 이단에 끌리는가?: 일탈적 전도에 관하여6.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7. 자기 정체성의 시대와 ‘균열적’ 전도8. 소명을 깨우는 전도: 좁은 의미의 ‘영혼구원’을 넘어서9. 우리의 전도가 너무 작다: 창조세계 돌봄으로서의 전도10. 다음세대 전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Special 팀 켈러의 질문에 답함 Special 팀 켈러 이후 기독교 변증의 과제는 무엇인가?
팀 켈러의 질문에 답함
by 김선일
2023-06-19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교인들은 이제 아직 “집” 안으로 들어올 준비가 되지 않은 외부인에게 레모네이드를 대접할 수 있는 포치를 그들의 교회에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외부인을 준비시켜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될까? 교회의 포치는 어떤 모습일까? 위의 글은 지난 5월 19일 별세한 팀 켈러 목사의 (지금까지 나온) 마지막 글에 실린 한 대목이다. “포치에서 나누는 레모네이드 한 잔: 탈 기독교 사회에서 복음전하기”라는 이 글에서 그는 미국 교회가 처한 전도의 위기 상황과 아울러 그 해결방안을 논한다. 비슷한 문제의식 내용이 팀 켈러의 탈 기독교시대 전도라는 책에서도 나왔다. 이 책의 원제는 “어떻게 다시 서구 사회에 전도할 것인가”(How To Reach the West Again)이다. 사실 이 질문은 은퇴한 선교사 레슬리 뉴비긴이 1984년 프린스턴신학교 워필드 강연에서 최초로 제기한 것이다. 그의 강연 제목 “선교학적 문제로서 후기 계몽주의 문화: 서구 사회는 회심할 수 있는가?”(‘Post-Enlightenment Culture as a Missiological Problem: Can the West be Converted?)였고, 팀 켈러는 2017년 프린스턴신학교 카이퍼 강연에 초대받아 33년 전에 제기된 질문을 염두에 두고 “뉴비긴에게 답함”(Answering Newbigin)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상황에서 답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팀 켈러의 탈기독교시대 전도가 그 강연의 내용을 확장하여 전도의 방향을 위한 담론을 제시했다면, “포치에서 나누는 레모네이드 한 잔”은 전도에 대한 고민과 해법을 포치와 레모네이드라는 일상의 은유로 표현하며 실제적인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아쉽게도 그는 이후에도 계속 구체적인 전도의 사례들을 다루겠다고 밝힌 상태에서 운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작이 나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신, 팀 켈러 역시 뉴비긴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필자가 처음 인용한 “교회의 포치는 어떤 모습일까?”는 미국과 서구 교회만의 질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한국 교회의 질문으로 마주해야 한다. 한국 교회 역시 20세기의 폭발적인 기독교 성장을 경험한 뒤 현재 교세의 감소뿐 아니라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 저하로 인해 복음을 증언하는 과업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레슬리 뉴비긴이 서구 기독교 문명의 침식을 목도하면서 던진 질문에 대해 미국의 상황에서 팀 켈러가 대답하고자 했다면, 이제 그 질문은 한국의 상황에서 우리가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할 과제이다. 포치와 레모네이드팀 켈러와 이 글에서 말하는 포치와 레모네이드의 의미를 잠시 살펴보자. 1) 포치(porch)라는 곳: 포치는 집 입구에 마련된 테라스와 같은 공간으로 길과 접하고 있다. 포치는 집 안과 밖을 잇는 중간 지대이다. 안전하고 이웃끼리의 왕래가 빈번한 동네는 포치에서 사람들끼리 만나고 인사하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팀 켈러는 포치를 오늘날 활기찬 동네의 핵심이라고 했는데 집을 교회로, 거리를 세상으로 본다면 포치는 세상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교회와 접촉하는 공간이다. 포치는 지리적 의미에서의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비록불신자라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에 우호적인 의식을 갖고, 교회와도 어느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에게는 관념적, 정서적 포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중립적 공간에서 사람들은 교회나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고 기독교에 대해서 듣고, 신앙에 관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포치란 “사람들이 일반적인 교회 예배와 교육 이에 유익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기독교에 노출되는 장소를 말한다”고 한다. 장소는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일련의 관계라고 한다. 불신자들이 환영받고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공간도 될 수 있고, 그들과 맺는 좋은 관계도 될 수 있다. 2) 포치의 상실: 팀 켈러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인용하며 유럽의 문화는 그 자체가 교회를 위한 (포치가 자리한) 앞마당이었으나, 세속주의가 유럽인의 의식을 지배하면서 포치가 사라졌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는 복음전도에 제기되는 근본적 도전이다. 미국에서도 문화적 앞마당이 급속하게 소멸하고 있다. 2001년 전까지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였으나, 이후에는 문명충돌의 시대에 기독교가 과격한 또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경계심이 있다. 또한 동성혼이 합법화된 이후로 기독교의 성윤리는 혐오를 조장하는 위험한 편견으로 간주된다. 코로나 기간은 사회적 거리는 사람들의 모임과 만남을 더욱 동질화시켰다. 이러한 양극화 속에서 복음주의 기독교가 자유와 공감의 적이 되었고, 이는 미국에서 교회 개척과 교회성장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3) 전통적 포치에서의 전도: 한때 서구의 사람들은 일생에 교회를 최소한 몇 번은 다녔다. 교회를 안 다녀도 신 존재, 사후세계, 천국과 지옥과 같은 기독교의 대략적 신념 체계를 암묵적으로 따랐다. 그러한 공유된 가정 위에서 사영리, 전도폭발 같은 전도사역들은 희미한 신념들을 성경적으로 더욱 명확히 해주었다. 전통적 포치에서의 전도들이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메시지가 소통되어야 할 맥락이 바뀐 것이다. 과거에는 함께 공유했던 공동의 신념 체계가 와해됐기 때문이다. 교회의 포치가 사라진 것이다. 오히려 도로 위의 사람들은 교회 앞의 텅 빈 포치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4) 새로운 포치에서의 전도: 팀 켈러는 미국의 교회들이 더 이상 과거의 기독교 문화라는 포치에 대한 환상에 머무르지 말고 새로운 포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교인들은 이제 아직 ‘집’ 안으로 들어올 준비가 되지 않은 외부인에게 레모네이드를 대접할 수 있는 포치를 그들의 교회에 만들어내야 한다.” 그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프란시스 쉐퍼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는 신앙은 없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을 맞이해서 삶을 공유하며 신앙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곳이었다. 양질의 교육으로 지역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얻는 기독교 학교도 믿지 않는 부모를 위한 포치가 될 수 있다. 교회의 봉사 및 구제 프로젝트도 비신자들에게 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사람들의 필요와 관심을 위한 독서나 취미 소모임, 또는 비신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성경공부나 기독교 신앙학습 모임도, 특히 교회 밖에서 이루어질 경우에는 포치 역할을 할 수 있다. 라브리 공동체가 사역하는 간사들의 집으로 찾아온 이들을 초대했듯이, 사실 기독교 가정은 원래부터 이웃을 환대하며 기독교 신앙이 스며들게 하는 모범이었다. 단순히 초대와 환대만이 포치의 전부는 아니다. 포치에서는 안전하고 중립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탐구와 토론만 하지 않는다. 불신자들의 가치와 신념이 기독교 세계관과의 대면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전복되는 성취가 일어나야 한다. 그들의 세계관과 라이프스타일을 넘어서는 더 큰 세계의 일관된 진리를 만나야 한다. 한국 교회를 위한 전도의 포치는 무엇인가?팀 켈러는 마지막 글에서 새로운 포치에서의 전도 사례들을 더 많이 나누겠노라고 예고했다. 하지만, 그의 유작이 나오지 않는 한, 이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글로 보인다. 이제 그가 남긴 미완의 과제는 우리 몫이 되었다. 우선 그는 유럽과 미국 교회의 상황에서 복음으로 이웃과 만나는 포치에 대해 논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에도 이러한 포치의 존재와 부재가 적용될 수 있을까? 한국 교회는 비서구권 국가들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20세기에 가장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필자는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 그 자체가 교회를 위한 앞마당이었다고 본다. 근대 한국 사회는 안보의 문제, 산업화 열망, 문화적 욕구에서 서구사회, 특히 기독교 국가로 대표되는 미국을 선망했다. 근대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는 제국주의 식민통치자들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도와준 우방의 종교였다. 따라서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이 시기에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 이와 같은 안보, 산업화, 문화적 선망의 내러티브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에 다니는 것을 꽤 괜찮은 선택으로 보이게 했다.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저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 내러티브(CLC, 2019)에서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 열어놓았던 앞마당, 즉 포치가 점점 위축되기 시작했다. 안보, 경제, 문화의 영역에서 한국 사회는 독자적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더 이상 교회는 선진문화의 유일한 통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윤리적 모범을 보이지 못함으로 인해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실망과 부정적 인식은 더욱 고조됐다. 따라서 교회 앞에는 이웃과 편하게 만날 수 있는 포치가 아닌 서로를 가르는 높은 담장이 쳐졌다.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교회 모두에서 포치를 갖추려면 의도적인(intentional) 관계와 공동체 형성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익히 들어온 ‘관계 전도’로 너무 쉽게 비약하진 말자. 왜냐하면 복음이 관계를 통해서 가장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칫 관계를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는 태도는 인간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관계로 존재하며, 인간 간의 관계는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진심이어야 한다. 관계 전도의 기술을 개발하기 전에, 먼저 관계적인, 혹은 관계에 진실하고 성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이 되는 모험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첫째로,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관계들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날마다 많은 관계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한번 자기 삶의 주변 반경을 살펴보라. 나는 누구와 자주 접하는가? 나의 경우, 산책하는 동네 주민, 아파트 경비 아저씨, 얼마 전 하수구가 터져서 협상을 했던 윗집의 부부, 자주 가는 동네 이발소 주인 등이 떠오른다. 집 근처 이웃뿐 아니라 나의 일터나 자주 가는 매장에서도 같은 사람들과 종종 마주할 수 있다. 그런 일상의 스치는 만남들에서 한발자국 더 다가가는 것이다. 먼저 인사하라. 아는 사람을 늘리고 관계의 거리를 좁히라.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라.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가 잔존하는 사회에서 낯선 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일상의 선교적 실천을 위한 첫걸음이다. 둘째로, 그 동안 다소 소원했던 관계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가족, 친척, 친구, 동료 중에서 무심하게 대했던 이들, 특히 나에게 먼저 연락을 했거나 친분을 표시했는데도 내 쪽에서 반응을 안 했거나 소극적으로 응대한 경우가 있다면 다시 성의 있는 대화를 시도하라. 꼭 전도를 위한 포섭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먼저 관계에 진실하고 예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이웃 사랑의 한 가지 실천일 뿐이다. 교회 차원에서 공적인 봉사만이 이웃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서 이러한 관계적 성실함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새로운 관계들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 차원의 사역도 필요하다.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나 구제 사역을 할 경우, 참여하는 교인들은 자신들이 돕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단순히 의로운 시혜적 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인격적인 교제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 구제와 봉사의 참여는 새로운 만남을 여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 또는 주변의 믿지 않는 이들을 이러한 교회의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을 몸으로 경험하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먼저 신앙 공동체의 삶의 규칙을 경험하고 나서,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고 수용하기도 한다. 교회가 교회 밖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공동의 실천이 있다면 그것도 효과적인 포치가 될 것이다. 교회들이 이웃과 공유하는 삶 속에서 포치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최근에 자주 거론되는 마을 목회도 좋다. 지역사회의 취약계층을 돕는 디아코니아 사역이나, 이웃과 함께하는 문화 활동을 시도하는 것도 필요하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확장하는 것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더 큰 선물이다. 복음은 그러한 진실한 관계를 타고 흘러 들어간다. 함께 기도하고 상상한다면 팀 켈러가 남긴 포치 테이블에 우리의 이웃을 위한 새로운 레모네이드를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팀켈러
전도
다음세대 전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by 김선일
2023-06-12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아이들은 중요한 전도의 대상이다. 전도는 교회 밖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전도는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진다. 교회 안에 있으나 믿음이 불분명한 명목상 신자들도 전도의 대상이다. 현재 부모를 따라 교회에 나오는 믿음의 자녀들도 앞으로 성인이 되면 신앙에 관한 주체적 선택을 해야 한다. 많은 교회에서 경험하듯, 초등학생에서 중고등학생으로, 그리고 중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성장할 때마다 아이들이 신앙을 떠난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다음세대가 신앙을 지속할 것인지는 개 교회를 넘어서 한국 교회 전체가 떠안아야 할 과제다. 다음세대를 위한 문화적 맞춤 사역에 주력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교회가 지루하고 고리타분해서 아이들이 오지 않으니 교회를 재미있는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디즈니 만화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들이 기독교 이름으로 채워지는가 하면, 예능프로나 드라마 콘텐츠를 기발하게 모방한 교회 프로그램 포스터와 문구들이 경쟁하듯 선보인다. 세상에서 즐길 만한 게임이나 운동을 교회 안에서 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춰주면 미래를 대비하는 과감한 혁신으로 주목받는다. 또는 다음세대 사역을 독립 부서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간섭 없이 안전하게 그들만의 예배와 프로그램을 실행하도록 보장해주는 것이 교회가 다음세대를 소중히 여기며 “꼰대력”을 포기하는 결단이라고 여기는 목회자들도 본 적 있다. 아예 어린이교회, 청소년교회, 청년교회 등과 같은 ‘교회 안의 교회’를 지향하기도 한다. 다음세대의 문화적 요구를 파악하며 영적 부흥을 이루려는 이러한 노력은 귀한 헌신이다. 또한 젊은이들에게 교회에 대한 편견이나 종교적 엄숙주의를 해소해 주며 기독교를 더욱 가깝게 하는 시도 또한 현대 사회를 향한 선교적 관점에서 상당한 필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러한 시도들이 다음세대에게 신앙을 전하고, 그들의 신앙이 자라 영적으로 성숙하고 제자의 삶으로 살게 하는 필수적 해법이겠냐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앙의 성숙이고 뭐고 간에 교회가 재미없어 오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아야 하지 않느냐?’ 나 또한 다음세대에게 교회가 딱딱하고 지루한 곳으로 비치기를 원치 않는다. 아울러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성경 읽고 기도하는 생활이 그들에게 무의미한 형식이나 강요 사항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교회의 다음세대 사역이 현대 문화와 엔터테인먼트 코드를 창의적으로 활용한다고 해서 신앙의 전수와 성장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든다.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서구 기독교도 이와 관련해서 의미 있는 자기반성을 하고 있다. 수년 전 미국의 권위 있는 기독교 잡지인 Christian Century에 기고한 한 청소년 사역자는 처음에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창의적이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소년 맞춤 예배에 현대적 음악과 (성, 이성 교제, 음주 등의) 흥미로운 주제 토론 및 교육적 게임 등을 도입했으며, 정기적으로 사회봉사나 행사도 기획했다. 이 사역자는 교회의 청소년들이 대부분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안다고 생각해서 주로 기독교 문화에 주력했다. 그 결과 자신이 그때 사역했던 청소년들 가운데 여전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으며, 자신의 다채로운 문화 사역은 아이들에게 영적으로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결론 내린다. 이 사역자는 자신이 아이들의 관심과 기호에는 민감했지만, 아이들이 평생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역점을 두지 못했다고 술회했다.꽤 오래전부터 교회학교 사역에서 중요한 과제는 교회 전체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통합될 수 있느냐가 되었다. 성인 회중과 분리된 독립적인 다음세대 사역은 한동안 활성화될 수는 있지만, 아이들 자신이 성인으로 자라면서 원 교회에 소속감을 갖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성인이 되어서도 신앙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이들은 성인 회중과 자주 접촉하고, 성인 예배 또는 세대통합 예배에서 봉사했던 경험이 있었다는 조사가 있다(김선일, 모든 사람을 위한 가족전도, 161-162). 30년간 청소년 전문 사역자로 일한 바 있는 역사신학자 토마스 버글러는 The Juvenilization of American Christianity(미국 기독교의 청소년화)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의 연구를 통해서 미국 기독교가 시대의 청소년, 청년 문화를 수용하고 모방함으로 신앙의 전승과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지목하는 오늘날 청소년문화가 교회에 스며든 현상은 낭만주의나 정서주의, 즉 내 기분을 좋게 해주는 데서 교회 분위기나 프로그램의 의의를 찾는 현상이다. 이는 복음 메시지의 연성화를 초래하는데, 예를 들어 “예수, 나의 연인” “나는 예수와 사랑에 빠졌다” 같은 표현들이나, 신앙생활에서 성화나 제자도보다는 선택이나 ‘여정’(journey)이 더 중요한 개념이 된 것이라 한다. 교회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에서 영적인 삶의 습관을 형성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소비심리를 만족시키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화적 적응력은 항상 매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의 대가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문화를 교회에 접목한 대표적 사례인 윌로우크릭교회가 자기들의 사역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면서 사람들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을 제자로 성장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고백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Reveal). 현대 대중문화의 가벼움과 신속함은 강한 휘발성을 지니고 있어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스쳐 지나가게 만들 수 있다. 디지털미디어에 둘러싸인 아이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적으로 유일무이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고민하고 성찰하게 하기보다, 통속적인 마블 영화 세계관의 유사품으로 취급할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기프티콘을 제공하며 교회 출석이나 성경 읽기를 유도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소비주의 문화의 이해관계로 인식시킬 위험이 있다.그렇다면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계승하는 데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 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앞선 세대에게 익숙한 전통적인 신앙훈련을 익히게 하며 순종과 성숙을 요구하는 것일까? 그러한 퇴행적인 방법은 더더욱 아니다. 여전히 문화는 중요하다. 문화는 내용의 핵심을 덮고 있는 외피이자, 내용을 이해시키는 소통 창구다. 따라서 문화를 통한 신앙의 표현과 대화는 사역자들이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과제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문화의 전부가 아니며, 사역에서 문화를 적절히 활용하는 데 필수 통로도 아니다. 물론 현재 대중문화의 흐름과 언어를 잘 알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접촉점을 갖고 대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아이들도 영적인 탐구자라는 것, 그리고 기성세대는 그들을 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다음세대의 아이들도 영적 관심과 열망을 지닌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영적 관심이란 종교활동에 대해서라기보다 삶의 의미에 대한 관심이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지’와 같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서만 진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왜 다음세대의 아이들은 가벼운 재미만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가? 미국의 한 조사에 의하면, 기독교 가정의 청소년들 대부분은 부모의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며 알고 싶어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도덕적 치료주의 이신론으로 잘못 알고 있다고 한다(Christian Smith, Melina Lundquist Denton, Soul Searching). 신앙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 혹은 문제 해결하는 것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긴급한 과제는 다음세대 아이들의 신앙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필자가 교육목회를 할 당시에 동역자들과 함께 개신교 영성수련원을 다녀온 적이 있다. 얼마 뒤에 여름 성경학교가 열렸는데, 그때 담당 전도사가 아이들을 위한 묵상기도 훈련을 시도했다. 영성수련원에서 경험했던 미로기도를 아이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아동부실에 기도코스를 만들어 놓고 천천히 걷다가 한 번씩 멈춰서 기도하는 방식이었는데, 아이들이 진심으로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에 필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 무슨 예능적 요소는 가미되지 않았다. 다만 곁에서 같이 기도해주고 격려해주는 교사들이 있었을 뿐이다.둘째, 아이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존중하고 환대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다음세대를 신앙의 성숙과 헌신에 이르게 한다고 일방적인 지시나 강요의 신앙 교육을 하면 오히려 그들을 교회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든다. 교회와 신앙에 관해서 아이들이 제기하는 의문과 비판에 개방적이고 포용적으로 대한다면, 이는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주며 결국에는 신앙에 더욱 긍정적이 될 수 있다(Vern Bengston, Families and Faith). 다음세대는 전도의 대상일 뿐 아니라 환대의 대상이기도 하다. 환대라는 단어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다음세대의 아이들을 환대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세대로 신앙 전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믿는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상호존중의 분위기가 형성된 곳에서 신앙이 잘 계승된다고 한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거나 의심에 대해서 질타하고 정죄한다면 오히려 신앙에 대한 반발과 이탈을 불러일으킨다. 가정에서 아이들이 부모의 이해와 관용 속에서 신앙에 관한 대화를 자유롭게 나누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가정예배나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성경읽기와 기도생활도 유익하다. 하지만 그 조차도 신앙에 관한 안전하고 자유로운 대화가 보장되는 가정에서 그러한 경건의 훈련도 더욱 효과적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현재 교인들의 최초 신앙 시기는 모태신앙(26.4%)과 초등학교 때(34%)까지 합하면 60.4퍼센트에 이른다. 여기에 중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신앙을 가진 이들까지 더하면 그리스도인의 무려 78퍼센트가 미성년 때 신앙을 갖는 것으로 나온다(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한국기독교분석리포트 2023, URD, 근간). 이 통계는 신앙을 갖는 데 있어서 다음세대의 영적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다음세대 신앙 전수의 문제는 사실 나중 과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과제이다. 그들은 다음세대가 아니라 지금세대이다. 그들을 위한 사역은 더욱 면밀하고, 더욱 반성적이고, 더욱 깊은 헌신을 요구한다.
다음세대
전도
세대통합
우리의 전도가 너무 작다
창조세계 돌봄으로서의 전도
by 김선일
2023-05-08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전도를 뜻하는 영어―evangelism―는 ‘복음’(evangel)에 이념이나 행동을 뜻하는 어미(ism)가 붙은 말이다. 곧 전도는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전도는 복음, 즉 좋은 소식이 무엇인가에 기초한다. 로마서 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라고 선언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하며 듣기 위해서는 좋은 소식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롬 10:15). 여기서 그가 말하는 좋은 소식은 이사야 52:7을 인용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류에게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골 1:20)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사건이다. 즉, 구원의 좋은 소식은 인간뿐 아니라 만물의 회복을 포함한다. 선교학자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의 책 제목처럼 “구원은 창조세계의 치유”(Salvation Means Creation Healed)이다.전도사역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창조세계의 회복과 치유는 얼마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 교회에서 피조물에 대한 돌봄의 과제를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주이심을 전하는 만큼의 사명으로 강조한 적이 있는가? 환경 주일과 같은 연례행사를 통해 그저 잊지 않을 정도로 언급되는 것은 아닌가? 기껏해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기울이고 실천해야 할 여러 윤리적 과제 중 하나 정도는 아닐까?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전파가 우선이고, 창조세계에 대한 돌봄은 그에 따른 부차적이고 결과적인 선행으로만 인식되고 있지 않은가? 그나마도 최근의 기후 위기를 비롯한 환경문제에 대한 위협으로 부상했을 뿐 본래부터 복음 안에 내포된 메시지로 보는 인식은 여전히 낯설지 않은가? 창조세계는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었다. 청지기의 책임을 맡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창조세계는 손상을 입었고 피조물은 신음하고 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라진 땅은 인간 세상에서만 악이 창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경고한다.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호 4:3). 이 고통은 오늘날 더욱 확산되고 있다. 대기는 오염되어가고 가축들은 잔인한 방식으로 대량 사육과 도살을 당한다. 산림은 고갈되고 홍수와 기후 이변이 빈번해지면서 많은 인류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 지구가 병들어 가는데, 그 지구에 존재하는 교회가 건강하게 생존하는 것이 가능할까?(Salvation Means Creation Healed, xiii) 스나이더는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라고 한다. 교회의 가장 큰 관심은 구원인데, 이 구원이란 바로 치유된 창조세계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롬 8:21)을 원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창조세계를 원래 의도된 모습으로 치유하는 사명에 참여한다. 그러한 치유 사역에 참여하는 자체가 복음, 즉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전도의 개념은 사실 이처럼 창조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를 알리는 것으로 확장되지 못했다. 그래서 창조세계와는 무관하게, 인간 중심의 영혼구원 사상에 머물렀다. 사람들을 교회라는 종교적 공간으로 더 많이 끌어들이는 것이 전도의 목적이 되었다. 한때 교회가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욕구를 해소하는 기능을 한 적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어렵고, 사회는 불안정하며, 문화적인 자원은 부족할 때, 교회는 고단하고 불안한 삶에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이때 환경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의제로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인생과 세계를 넓은 안목에서 접근한다. 환경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도 중대한 실존적 과제다. 더 나아가 인간을 중심으로 주변 세계를 규정짓는 환경이라는 관점을 넘어서, 인간도 더 큰 자연세계의 일원이자 일부로서 다른 피조물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생태적 감수성으로의 전환이 요청되는 시대다. 이러한 생태적 감수성은 인간 또한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서도 사랑의 주권을 발휘하신다는 성경적 신념과도 조화된다. 이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하나님이 설계하신 더 큰 세계 속에서 동료 인간 및 피조물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소속감과 관계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할을 다른 피조물들과 같은 대열에 놓거나, 심지어 자연세계를 신적으로 미화하거나 승격시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중심으로 예배하는 성경적 세계관과 배치된다.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신 4:19). 기독교 생태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청지기 책임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지구를 어머니로 모시거나 범신론적인 현대적 정령주의나 무신론적 생태주의와는 다르다. 죄로 인한 총체적 부패를 믿는다면, 훼손된 창조세계에 대한 영적 관심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인이심을 믿는다면, 창조세계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믿음 또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기독교 환동운동가 데이브 부클리스(Dave Bookless)는 생태계의 위기는 영적 위기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치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나의 지구를 부탁해, 앵커출판&미디어, 104). 기독교 역사에서 의미 있는 영적 각성에는 창조세계에 대한 돌봄이 수반되기도 했다. 5세기부터 8세기에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의 켈트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사들은 꽃과 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알리고 사역에서 동물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13세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새들을 향해 설교하면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역설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창조세계의 돌봄은 윤리적 실천의 문제이기에 앞서 본질적으로 구원에 내포된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전도는 어떻게 창조세계의 돌봄과 연결될 수 있을까? 첫째, 창조세계 그 자체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증언한다.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시 19:1)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자연은총을 경험한다. 종교가 없는 이들도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는 계기가 자연의 신비와 장엄함과 마주할 때였다고 한다. 필자는 오래전에 한 유명한 기독교 수련회에 한 구도자와 함께 참석했다. 3박 4일의 프로그램은 시종일관 정교하고 체계적이었으며 중간중간 감동의 순간들도 있었다. 둘째 날 아침 식사 후 습관을 따라 산책하러 나갔던 필자는 수련회 봉사자에게 제지당했다. 주변이 산속이라 잠깐 하이킹하기에 좋을 것 같은데, 봉사자는 준비된 실내 프로그램만 열심히 참여하라며 우리를 돌려보냈다. 당시 필자는 동반했던 구도자와 신앙에 관한 대화를 하는 중이었고, 자연 속에서 함께 창조주를 묵상하려고 했지만, 그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수련회들에서도 자주 경험한다. 기껏 도심지를 벗어나 시간을 내어 자연과 가까운 곳으로 가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생생히 묵상하는 시간은 갖지 못하곤 한다.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과 손길을 증언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 것일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선지자 요나에게 큰 물고기, 벌레, 바람을 통해서 그분의 뜻을 알리셨고,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도 자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둘째, 교회는 생태적 감수성과 습관을 형성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창조세계의 돌봄은 개인윤리가 아니라 교회의 공동체적 윤리다. 교회의 공동체적 윤리는 만물을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드러낸다. 우리의 교회 생활은 얼마나 환경에 민감하며 생태적 삶을 실천하고 있는가? 교회의 각종 행사와 의전에서 엄청난 일회용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진 않는가? 음식과 에너지의 낭비는 어떤가? 교회학교의 아이들에게 간식을 줄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러한 먹거리를 위해서 땀 흘려 수고한 모든 손길을 기억하게 하는가? 주일에 많은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발생하는 자원 고갈과 대기 오염을 줄이고자 하는 고민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교회가 세상의 환경운동에 응답해서 솔선수범하자는 차원에서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하려면 창조세계에 대한 돌봄과 사랑은 부차적인 윤리가 아니라 교회의 선교적 소명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생태적 감수성은 창조세계를 회복하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알리기 위한 기초가 된다. 셋째, 우리는 창조세계의 돌봄에 참여하면서 영적인 돌봄에도 민감해지게 될 것이다. 생명에 대한 관심과 돌봄은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상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고 의존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너무 치여서 동식물을 돌보는 데로 관심과 취미를 전환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창조세계에 대한 돌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결과여야 한다. 나의 지구를 부탁해에서 저자 데이브 부클리스는 자연과 교감하다 보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오용하거나 착취하는 일이 적어지고 인간에 대한 돌봄과 관심이 더욱 깊어진다고 말한다. “아내가 최근에 주민 텃밭을 분양받았다. … 놀랍게도 이 일로 아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졌다. 아내는 어린 씨앗에 물을 주면서 예수님을 새로 영접한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다. 잡초를 뽑을 때면 자신의 양심을 돌아보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190-191). 오늘날의 삭막하고 단절된 사회에서 돌봄의 정신은 복음전도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갈급한 것은 진실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도가 숭고한 명분을 지녔다 해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도 프로그램의 대상이 되어 그리스도인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전도를 위한 목적에서 관계를 맺는 것보다, 생명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내면화하는 훈련이 더 필요하다. 창조세계의 돌봄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공중의 새와 들풀도 돌보시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마 6:26-30) 느낄 것이며,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20세기 기독교의 고전으로 꼽히는 J. B. 필립스의 책,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는 그 제목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신앙에 대한 관점에 각성을 준다. 창조세계와 복음전도의 관계에서도 이 제목을 패러디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복음전도는 너무 작지 않은가?
창조세계
전도
복음전도
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 3호
한국로잔위원회
by 한국로잔위원회
2023-05-01
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 3호전체 내용 보기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 3호 (소식지는 매월 말에 발행됩니다)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에서는 한국 준비위원회의 로잔대회 준비 현황과 더불어 한국 교회 성도님들에게 로잔운동을 소개하기 위한 다양한 내용들을 다룹니다.로잔운동의 특별한 소명은 다양한 지역, 다양한 주제, 다양한 연령의 지도자들이 복음의 진보를 위해 함께 연대하고, 기도하며, 일할 수 있도록 인플루언서와 아이디어를 연결함에 있습니다. 로잔언약에 동의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 세계 복음주의 운동입니다.로잔운동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1차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의 결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세계교회는 서구 중심의 기독교왕국(Western Christendom)에서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로의 본질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의 앤드류 월스(Andrew Walls) 교수는 20세기 후반에 발흥한 세계 기독교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습니다. “서양 중심의 교리적 교회사는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현상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합니다. 기독교 복음이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전달될 때, 현지 문화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글로벌한 관점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2024년 한국에서 열릴 제4차 로잔대회는 세계 기독교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세계 모든 대륙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세계교회가 함께 듣고 나눌 때, 세계 복음화를 위한 우리의 열정이 새롭게 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향한 비전이 회복되는 제4차 로잔대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국제 로잔운동 이사, 제4차 로잔대회 한국 준비위원회 총무 | 문대원 목사대구동신교회 저널팀 모임 4월 7일(금), 대구동신교회(문대원 목사) 참신관 4층 선교회실에서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제4차 로잔대회 한국 준비위원회 총괄기획본부장 이대행 선교사(엠브릿지)와 대구동신교회 저널팀(박주용 목사, 김태수 목사, 김용음 목사, 권오경 전도사)이 한자리에 모여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제4차 로잔대회의 의의와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깊게 나누었다. 또한 대구동신교회 저널팀을 중심으로 앞으로의 제4차 로잔대회에 관한 기사와 홍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들고,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며 진행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여러 방안을 논의하였다.
소명을 깨우는 전도
좁은 의미의 ‘영혼구원’을 넘어서
by 김선일
2023-04-24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영혼구원은 전도의 언어가 아니다.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전도의 또 다른 말이 구령사역인데, 왜 영혼구원이 전도가 아니란 말인가? 만일 전도가 개인의 영혼이 죽은 뒤에 천국에 가도록 하는 것이라면, 성경은 그러한 의미로 영혼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영혼과 육신을 나누는 이원론은 성경적 사상이 아닐뿐더러, “영혼구원”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베드로전서에서도 그러한 내세주의적 구원을 가리키지 않는다. 물론 신자가 죽은 뒤에도 그리스도의 품에서 영원히 거하며,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는 것은 확실히 믿는 바다. 내세 중심의 개인주의적 전도 이해는 영혼구원의 진정한 의미도, 또한 전도사역의 깊은 차원에도 이르지 못한다. 베드로전서는 로마제국 아래서 흩어져 소외와 배척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책이다. 특히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순종과 선한 행실에 힘쓰는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최종 결과가 영혼구원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벧전 1:9).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베드로가 영혼구원을 믿음의 출발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혼구원은 신자들이 현세의 고난을 감당하며 인내와 정절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삶이다. 고난과 유혹 속에서 세상과 타협하려는 “육신”의 정욕에 굴복하지 않고, 일터에서(2장), 가정에서(3장)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삶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영혼의 구원이다. 따라서 영혼구원은 (자연스럽게 전도의 열매를 수반할 수 있지만) 전도의 언어라기보다는 성화의 언어이자 제자도의 언어다. 복음주의 운동은 회심과 전도의 중심성을 일깨운 소중한 유산을 계승해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전도를 좁은 의미의 영혼구원이나 사후천국행에 머무르게 하거나, 혹은 이미 구원받았다는 자기 확신에 안주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라는 복음의 더 큰 비전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교회 갱신 운동인 선교적 교회론을 제안한 레슬리 뉴비긴은 근대 서구사회가 기독교로부터 멀어지고 세속화, 이교화한 것은 바로 복음이 공적 영역으로부터 후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독교 신앙이 내면의 평안과 사후의 위안을 위한 사적 영역에 머물고, 과학과 소비주의가 삶의 지식과 의미를 채워가자 사람들은 기독교의 역할과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한 것이다.모든 실천은 그 실천의 궁극적인 목적(telos)에 부합해야 한다. 복음전도는 실천이다. 따라서 전도활동은 복음을 전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내용과 실천을 담아야 한다. 복음전도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전도가 어떠한 신학적 패러다임 안에 있느냐와 관계된다. 전도가 육체로부터 분리된 인간 영혼을 우주 저 너머의 다른 세계인 천국으로 가게 하는 것이라는 신학 안에 있다면, 아마도 내세 지향의 개인적, 이원론적 복음전도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러나 전도가 창조세계를 지으시고 죄로 인해 부패했으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치유하시고 갱신하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케 하는 것이라면 전도는 좁은 의미의 영혼구원 그 이상의 메시지와 사역을 담아야 마땅하다. 이런 의미에서 전도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삶으로의 초대, 또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응답하는 삶인 제자도로의 초대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종종 전도는 기독교 신자를 만드는 것이며, 제자도는 신자가 된 다음에 주어지는 옵션처럼 취급되곤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음을 기억하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그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셨다. 그것은 기존의 생활방식에 평안과 위안을 제공하는 보조수단으로서의 종교적 메시지가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을 전환하라는 요청이었다.전도와 깊은 관련을 지니는 단어로 “중생”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 등이 있다. 이 단어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나 제자도와 거리를 둘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 단어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더 큰 목적에 필요한 조건으로 역할을 한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3:3-5).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위해서라고 말한다(고후 5:17-19). 따라서 복음전도는 일차적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더 큰 목적과 소명을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복음전도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공동선을 위한 새로운 삶을 살도록,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변화된 가치와 더 큰 목적을 갖고 살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사람들이 회개와 믿음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하는 청지기적인 삶을 살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소명을 깨우는 전도’는 오늘날의 자아중심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적 해법이 될 수 있다. 현대인에게 좋은 삶의 기준을 나누는 가치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다. 이에 근거해서 성윤리는 개인 성향의 문제가 되었고, 인간의 사회적 활동은 취향이 중심 원리가 되었다. 자아중심주의 사회에서는 자아실현이 인생의 목적이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한 개인의 성향과 취향은 절대 존중되어야 할 성역이다. 개인의 선택과 성향, 자유와 취향이 최고의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의 성향과 취향이 무엇인지부터 혼란스럽다. 나는 이러한 문화 자체가 사실상 근대 서구의 자율적 개인주의라는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허상일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한다. 개인이 홀로 자신의 성향과 취향을 발견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그것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인지 혼란스럽다. 당장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많은 이들이 개인의 다양한 주체성을 표현하고 추구하기보다, 타인의 욕망을 따라서 욕망하고, 유행과 풍조에 예민하며 세태에 뒤처지지 않으려 강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SNS에 보정되고 설정된 이미지를 올리며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으려 애쓴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취향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는가?이와 비교할 때, 약 400년 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의 첫 항목은 인생의 목적에 대해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내놓는다.문: 사람의 첫째 되는 가장 높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익히 들어봤을 법한 이 문답은 놀랍게도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깊이 심취하는 동시에, 매우 혼란스러워하는 문제와 대면하고 있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과 즐거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생과 세계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활동(“먹든지 마시든지”)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자 기준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충분히 수용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직 우리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각 개인을 사랑하신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민족과 계급에 종속되지 않는 개인의 소중함과 존엄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자아중심주의와 취향의 세계관에서 혼란스러워하는 현대인에게는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 더욱 크고 견고한 소명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소명과 목적이 없으면 인생은 방향을 잃는다. 변덕스러운 개인의 성향과 취향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삶은 원래 설계된 고유한 궤도에 안착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망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못을 박는 것이다. 못을 박기 위한 망치의 고유한 목적이 불확실해지면, 망치는 때로 기물을 파괴하거나 심지어는 생명을 살상하는 흉기가 될 수 있다. 망치는 좋은 건축을 위한 도구로 쓰일 때 그 고유한 소명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 모든 인생에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소명의 이야기가 있다. 나의 관심과 취향, 은사가 더욱 선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복음전도는 이러한 더 큰 이야기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좌절과 낙심에 빠진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의 인생을 설계하시고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고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의 비전 안에서 은사와 소명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삶으로 초대해야 한다. 또한 부족한 것이 없고 강한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주어진 조건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선포하며 감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각종 선한 일에 참여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해야 한다. 소명은 의무나 강요가 아니다. 소명은 인간이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유효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에 존엄한 인간적 삶의 조건이다. 그 조건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기 정체성의 시대와 ‘균열적’ 전도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4-10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첫째 물음과 답은 이렇게 시작한다.문: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답: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이 선언은 내 인생은 전적으로 나의 것, 나의 선택이라고 외치는 자기 정체성 시대에 저항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기독교 메시지이다. 서구의 근대사회는 인간의 ‘자아’가 세계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사상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더욱 맹렬히 추구한다. 20세기에는 인종, 젠더, 국가, 민족, 문화가 제각기 고유한 권리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면, 21세기에는 이러한 거대 정체성이 개인과 사회집단의 차원으로 분화되고 있다. 다문화 사회는 단순히 인종적, 종교적, 언어적 다문화가 아니라,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신념적 취향이 동등하게 공존하는 사회로 진화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 사회를 떠받치는 신념은 ‘표현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가 되었다. 이 용어는 원래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와 그의 동료들이 함께 쓴 Habits of Heart(마음의 습속)에서 처음 사용했고,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도 현대 서구 사회를 규정하는 특징으로 세속시대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인간이 외부의 간섭이나 제약을 받지 않고, 또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롭게 자기의 신념과 취향을 선택하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는 표현적 개인주의 시대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일성, 곧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고백은 누군가에게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떤 누군가에게는 그의 신념적 기반을 뒤흔드는 균열적 메시지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스도인 영문학자 알란 노블(Alan Noble)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을 그의 은혜 안에서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투명하게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소속의 고백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을 내세우는 현대의 지배적 신념과 정면으로 맞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인생에 관한 진리를 나눠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항상 기억하고 그것을 삶의 실체로 보여줘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Alan Noble, You Are Not Your Own, IVP, 7/218) 필자가 정식 MBTI 검사를 받은 것은 20년 전이다. 그때도 제법 많은 이들이 MBTI를 알고 있었고, 그 뒤로 애니어그램, DISC 등의 성격 검사들이 관심을 끌었다. 그러다가 지난 몇 년 전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 다시 일어난 MBTI 열풍이 여전히 맹위를 떨친다. 친구들이 서로 만나서 각자의 MBTI를 묻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MBTI까지 공개된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심지어 어떤 회사들은 특정 MBTI 유형은 채용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기 정체성 시대의 대표적인 욕구를 반영한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할 뿐 아니라, 적절한 인간관계를 조성하고자 한다. 라이프스타일과 성격유형을 파악하며 자기와 잘 맞는 사람들을 분별하려는 것이다.“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은 위선적으로 들려요. 그것은 고상한 영적 명분 아래 결국 개인을 위축시키고 권위에 순응하게 만들 거라고 봐요.” 수년 전에 필자와 함께 기독교 공동체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나눈 대화에서 한 청년이 던진 말이다. 그는 당시 전통적인 교회와는 조금 다르게, 사회적 고민과 비판 의식을 지닌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공유하는 수평적 관계, 신앙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 생태주의적 사고와 기독교 신앙이 조우할 가능성에 관심을 갖게 된 필자는 모인 그들이 어떻게 영적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문해 주었다. 그러나 맞닥뜨린 한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였다.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이 그 공동체의 중심적 가치로 기능을 할 때,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고 목양의 섬김과 돌봄을 제공하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자기 부인의 영성은 더 큰 권력의 위계질서를 복무할 뿐이라고 냉소한다. 사람들은 굳이 자기를 양보하고 희생하면서 특정한 공동체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실제로 필자가 관심 가졌던 이 실험적 청년 공동체도 오래 가지 못했다.오늘날 부쩍 떠오른 단어가 ‘취향’이다. 사람들의 개인적 관심사와 기호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고 침해나 제한받을 수 없는 권리가 되었다. 취향의 시대를 떠받쳐주는 기둥은 자유와 선택이다. 이러한 문화에서 사람들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는 공동체를 선호한다. 더 이상 학연, 혈연, 지연으로 맺어진 전통적인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에 따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관계를 맺으려 한다. 자신의 취향과 관심에 따라 소모임이나 커뮤니티를 선택하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라고 번역해서 쓰지 않고 ‘커뮤니티’라고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도 특이하다.) 지금도 인터넷과 SNS를 통해 수많은 소모임과 커뮤니티들이 만들어진다. 또한 새로 만들어지는 만큼, 많은 모임이 회원 간 반목과 불화로 금세 문을 닫는다. 인간은 상호의존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자기 발견과 표현에 두는 것은 스스로를 취약한 기반 위에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각자도생과 능력주의가 판을 치고, 전통적인 끈끈한 연대들이 와해하고 있는 마당에, 서로에게 진정한 관심과 돌봄을 제공하는 공동체를 찾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팀 켈러는 기독교는 시대의 문화현상에 적응하고 상관성 있게 맞추려고 하기보다, 고유한 이론(high theory)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고유한 이론이란 먼저 이 시대 문화의 서사가 안고 있는 주요 결점을 폭로하여 그것들이 실제 인간의 본성이나 삶에 관한 우리의 가장 깊은 직관과도 맞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그럼으로써 기독교의 고유한 이론은 복음의 아름다움과 진리를 시대 문화의 서사보다 더욱 충만한 대항적 서사로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Tim Keller, How To Reach the West Again, Redeemer City to City, 16) 자기 정체성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태도와 자신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태도 사이에는 실제로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알란 노블은 흥미로운 예를 하나 든다. 만일 한 평범한 젊은 남성이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을 봤다고 치자. 그가 자기 정체성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자신은 저렇게 아름다운 여성에게는 접근도 할 수 없다고 좌절하며 욕망의 충동으로 갈등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의 종착지는 그 남성의 머릿속에 머무른다. 이것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존중하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하며 자신을 더욱 열등하게 느끼게 만들 수 있다. 노블은 자기 정체성과 표현적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지고한 가치가 될 경우 각양각색의 상황에서 이러한 경험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보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그러한 아름다움의 경험에서 나 자신이 중심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포기하는 습관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Alan Noble, Disruptive Witness, IVP, 96) 자기 정체성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 찰스 테일러가 말한 갇힌 자아(buffered self)로 살아가야 한다. 개인의 취향과 자유가 최고의 선이 되면서, 더 큰 세계의 이야기와 경이로움은 차단될 수 있다. 종교적 신앙도 취향의 하나로 취급되곤 한다. 노블은 이러한 시대에 교회가 할 일은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의 또 다른 취향의 선택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기반에 균열을 가하는 증언(disruptive witness)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균열적 증언에는 복음을 언어로 제시하는 것뿐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독특한 실천들(안식의 실천, 식사에 대한 감사기도 등)도 포함된다. 그러면 어떠한 구체적 언어로 문화를 균열시키는 복음의 증언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개혁신학자 앤드류 퍼브스(Andrew Purves)가 사람들의 상황을 분별하면서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는 예문들을 응용해 본다(앤드류 퍼브스, 십자가의 목회, 새세대, 82). • 과거의 죄나 실수로 인해서 자책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용서해 주십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용서하십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봅시다.”라고 선포하라.• 자신의 자존감이나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미래는 태초부터 당신을 사랑하신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선포하라.• 극심한 좌절로 살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당신은 인생을 포기했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라고 선포하라. • 현재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아픔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은 당신이 겪는 현재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 함께 하십니다. 당신이 살든지 죽든지 그 무엇도 그분의 사랑에서 당신을 떼어놓지 못합니다”라고 선포하라.위의 진술들은 기독교 신앙의 체계 안에서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갇힌 자아의 세계관에 사는 이들에게는 더 큰 세계의 이야기를 증언하는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변화된 역사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적 상관성을 갖춘 전도가 아니라, 문화적 신념을 근본적으로 균열시키는 전도다.
표현적개인주의
자기정체성시대
균열적전도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 2호
한국로잔위원회
by 한국로잔위원회
2023-04-02
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 2호전체 내용 보기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 2호 소식지는 매월 말에 발행됩니다로잔운동은 다양한 지역, 다양한 주제, 다양한 연령의 지도자들이 복음의 진보를 위해 함께 연대하고, 기도하며, 일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특별한 소명을 완수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로잔운동의 국제본부에서 인사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제4차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리는 것은 꿈만 같은 일입니다. 그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과 사랑, 협력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귀한 사명을 위해서 한국로잔위원회와 이재훈 목사님과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서울 2024 대회를 사용하셔서 세계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도 더욱 선교에 동참하고 연합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서울에서 시작되는 글로벌 선교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일하는 복음의 아름다움과 능력이 전 세계와 한국 사회에 나타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국제 로잔운동 총재 | 마이클 오 박사2024년 제4차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자 섭리입니다. 지난 50년간 로잔운동은 세계 선교를 위한 인플루언서와 아이디어를 연결하는 글로벌 플랫폼으로서 귀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기반한 복음주의 선교가 전 세계로 확산하는 데 로잔운동은 영적인 활력과 창의적인 전략들을 제공했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세계 선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해 온 한국 교회가 이번 로잔대회를 통해서 로잔의 정신인 겸손(Humility), 정직(Integrity), 단순(Simplicity)을 체득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2월 미국 애즈베리 대학에서 일어난 부흥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분을 간절히 찾는 이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로잔대회 월간 소식지를 읽으시며 한국 교회와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에 동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4차 로잔대회 한국준비위원회 총무 | 문대원 목사제4차 로잔대회 네트워크 교회 모임더사랑의교회(이인호 목사) 블레싱홀에서 2월 28일(화)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전국 25개 교회 담임 목사들이 모여 제4차 로잔대회를 위한 전국거점교회 모임을 했다. 공동대회장과 한국로잔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는 이재훈 목사(온누리교회)의 환영과 인사를 시작으로 참석자들이 서로를 환영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4차 로잔대회 한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 총괄기획본부장 이대행 선교사(엠브릿지), 한국로잔 실행위원회 총무 최형근 교수(서울신학대학교), 그리고 이인호 목사(더사랑의교회)가 순서대로 제4차 로잔대회의 의의와 정체성, 그리고 한국준비위원회의 준비 상황을 나눴다. 이후 진행된 Q&A 및 나눔 시간에는 교회들의 역할과 대회 준비과정에 한마음 한뜻으로 동참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섬기기로 다짐하고, 대회를 위한 중보기도운동과 7월 14일 송도 컨벤시아에서 진행될 ‘714 기도대성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3-20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폭발적 관심을 끌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는 그리스도인 시청자라면 더 불편하게 보았을 캐릭터가 있다. 중견 교회 목사의 딸로 성경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게 분명한 ‘이사라’이다. 악랄한 학폭 가해자 중 하나이고 마약에 찌들어 사는 화가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서고, 성경을 곧잘 인용하며, 피해자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경고한다. 그의 어머니는 마약을 한 남녀가 뒤엉켜있는 자리에 무슨 조직의 보스인 양 아주 익숙하고 태연하게 경호원들을 데리고 등장하여 잠든 딸을 깨우며 현장을 수습한다. 목사 아버지가 그 딸을 윽박지르는 이유는 딸의 학폭과 마약중독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자신의 위신을 추락시켰기 때문일 뿐이다. 그 또한 탈세 혐의자다. 다소 과도한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담은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드라마가 묘사하고 있는 기독교의 메시지와 그 삶의 괴리를 뼈아프게 되새겨 보아야 한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몇몇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소위 ‘교회를 대표하는 이들’(목사와 사모, 그 주변인들)이 함께 보여주는 삶의 행태다. 그것은 교회가 ‘전하는’ 복음과 교회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 사이의 간극이다. 이러한 불일치, 부조화, 부조리가 복음을 공허한 ‘좋은 소식’으로 전락시킨다. 필자는 오늘날의 전도는 개인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이동한다고 자주 말한다. 그러면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와 난색을 표명하는 이들이 있다. 집회 전도나 노방전도에서 탁월한 메신저나 신실한 개인이 복음을 제시하는 형태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도에서 복음을 나누고 설명하는 중요한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개인이다. 그렇지만 그 복음의 내용을 삶의 경험으로 확증하고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공동체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추구하는 삶의 양식은 복음의 언어를 습득하게 하는 통로다. 모든 언어는 그 언어가 쓰이는 문화를 경험함으로써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습득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종교나 사상이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또한 그의 가르침과 성품으로 빚어지는 특유한(peculiar) 공동체여야 한다.예수 그리스도께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하여, 타인에 대하여 어떠한 관용과 환대의 삶을 사는지가 속죄의 언어를 깨닫는 중요한 경험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며 서로를 돌보는지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을 맛보는 계기가 된다. 자기의 권리와 욕구보다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 진심 어린 신자의 모습이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이러한 실천을 하는 개인도 본보기가 되고 소중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과제는 공동의 실천과 습관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이 교회 안에서의 사랑과 용서와 친교를 반복해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다.오늘날은 개인의 정체성과 선택, 취향과 자유가 최우선의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뀐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대표되는 끈끈한 연줄의 관계가 관심과 취향에 따라 모이는 느슨한 연대로 대체되고 있다. 개인주의가 심화하고 있지만, 본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와 공동체를 갈망한다. 그래서 SNS나 소셜 앱을 통해 소모임과 커뮤니티들이 번창한다. 단지 관계와 모임의 문법이 변화할 뿐이다. 자신의 관심과 취향을 밝힌 소모임을 만들면 비슷한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드는 방식이다. 언제든지 들어가고, 언제든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자율성과 취향이 가장 존중되어야 할 모임의 기준이다.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본질적이지만, 그러한 욕구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변화한다. 코로나 이후 교회들도 소그룹과 같은 공동체적 모임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위에서부터 구역이나 소그룹을 구성하고 획일적인 의제를 던졌던 교회들이 이처럼 개인의 관심과 취향에 부합하는 관계와 공동체의 문법을 담아낼 수 있느냐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참고: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공동체의 형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핵심 가치이다. 공동체의 형식에 있어서 교회는 현대인들의 변화된 관계 문법인 자율성과 수평성을 최대한 이해하고 그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의 핵심 가치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그 공동체의 문화와 습관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세속주의와는 분명히 차별되어야 한다. 심지어, 오늘날의 세속적 윤리에서도 비판하는 위계주의, 학벌주의, 배타주의와는 더더욱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 청년 공동체로 인도되어 처음 신앙을 갖게 된 청년의 고백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여러 사정으로 또래들과는 달리 정규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취약했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소개받았고, 이들이 표방하는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사회, 문화적 가치에 매료되어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또래 청년들은 다들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전공에 따른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지만, 이 청년은 함께 어울릴만한 학력과 경험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공동체는 이 청년을 동등한 일원으로 받아주었고, 그에게 대학 진학에 필요한 무료 과외도 돌아가면서 제공해주었다. 이 청년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환대하고 자신이 제기하는 신앙에 대한 의문에도 포용적이고 개방적으로 대화해주는 공동체에 깊은 고마움을 표했다. 포용성과 개방성만이 기독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가치는 아니며, 인간을 온전한 회심에 이르게 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위의 공동체는 시대에 부합하는 매력적인 특성을 지녔음에도 그리스도를 오롯이 신뢰하는 교회로 발전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사역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또한 그의 본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상호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대속 사역으로부터 환대와 용서와 사랑과 존중이 생성되어야 한다. 오늘날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자율적인 취향과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과연 그와 같은 기초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고유한 관계에 대한 필요와 진정한 공동체적 소속 열망이 해소될 수 있을까?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자기 부인의 영성과 타인에 대한 환대와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견고하게 뿌리 내리며, 그의 가르침과 삶을 기억하고 재연하며 살아내는 공동체다. 이러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관계를 갈망하지만 관계를 지속하기에는 너무도 취약한 문화에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유력한 방식일 것이다.그러한 공동체적 삶은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에 따른 결과나 부산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 3:15에서 바울은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라고 선언한다.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순서다. 진리가 교회의 기둥과 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이다. 진리의 기반 위에 교회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기반 위에 진리가 서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전하는 진리의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제자들의 공동체 위에서 온전하고 굳건하게 전파될 수 있다.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은 공동으로 전도를 위한 행사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각자의 은사에 따라 협력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보다 더욱 근본적인 공동체적 전도는 기독교 공동체의 고유한 존재 양식과 공동의 습관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이루느냐가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하는 증거가 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평소에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 공동체를 접하면서 점진적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존 사회적 자본, 곧 인간관계보다 더욱 강력하고 따뜻하고 매력적인 사회적 자본을 제공하는 기독교 공동체에 끌린 것이다. 기독교의 공동체가 함께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은 믿지 않는 이들의 삶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때 초월적인 복음의 메시지와 조화를 이룰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전도의 어려움은 바로 이처럼 차별화된 공동체를 경험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조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 청년들의 개인 윤리적 생활에서 비그리스도인 청년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정치적 적대성과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목회자와 교인들에게서 복음으로 인한 화해와 환대를 경험하기란 만무하다. 환경 문제에 대한 아무런 고민 없이 쓰레기를 양산하는 교회의 행사와 모임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 있는 감수성을 발견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그 복음의 내용이 가리키는 삶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복음전도 방법의 부재가 아니라, 복음의 실체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공동체의 부재가 문제이다. 초기 기독교는 박해와 위협 가운데서도 실질적인 전도를 이루었고 교회는 성장했다. 공개적인 전도가 금지된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는 그들의 대조적인 생활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2세기의 기독교 철학자 아리스티데스는 당시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이렇게 전한다.오 왕이시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두루 찾다가 발견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책들에서 배운 것처럼, 그들은 열방의 어느 백성들보다 진리와 진정한 지식에 더 가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신뢰합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부터 만물이 존재하며 그분에 비견될 그 어떤 신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도래하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대 안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통과 음란한 행동을 하지 않고, 거짓 증언을 하지 않으며, 맡겨진 재물을 사취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에게 친절을 다합니다. 사람의 형상으로 만든 우상들에게 기도하지 않으며, 남들이 자신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남에게 행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을 설득하여 친구로 삼으며, 원수들에게는 선을 행합니다. 오 왕이시여, 그들의 여성들은 처녀와 같이 순결하며 그들의 딸들은 단정합니다. 그들의 남성들은 모든 불법적인 연합이나 불결함을 멀리하며 다가오는 다른 세계에서의 보상을 희망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노예들에게도 차별 없이 그들을 향한 사랑 안에서 형제라 부르며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권면합니다. 그들은 이상한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며, 어디에서나 겸손과 친절을 다합니다. 과부들을 멸시하지 않으며, 고아들을 그 학대하는 자들로부터 풀어줍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에게 우쭐거림 없이 내어주고, 나그네를 보면 자기네 집으로 맞아들여 친형제처럼 반깁니다. 그들은 육체를 따라 형제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하나님 안에서 형제라 부릅니다. 그들 가운데 어느 가난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각 사람이 능력에 따라 조의를 표하며 정성껏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구세주의 이름 때문에 투옥되거나 곤란을 겪으면, 모두가 그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여 가능하면 그를 옥에서 나오게 합니다. 그들 속에 가난한 사람이나 궁핍한 사람이 있다면, 이삼일 동안 단식을 해서라도 궁핍한 사람의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줍니다. 그들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신중하고 정의로우며 진중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 오 왕이시여,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법이 담긴 계명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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