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성경과 신학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하나님이 내게 천국이 될 때
by Marshall Segal
2022-09-22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복음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는 길이 아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사람들은 종종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하나님께서 내 세계를 뒤집어놓으신 날”로 묘사한다. 생각지도 못한 어떤 경험과 대화, 또는 시련이 자기 자신과 삶, 인간관계, 주변 세계를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내 경우에는 대학교 2학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생각하던 천국을 뒤집어놓으셨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사랑이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와 함께 자랐다. 그 사건이 생긴 그 시점 대학생이었던 나는 당시에도 분명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거의 매일 성경을 읽었고 기도를 빼먹지 않았다. 정통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고, 내 주변에는 성숙하고 주를 닮으려는 그리스도인 친구들로 넘쳤다. 심지어 나는 고등학생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믿음으로 제자 삼는 사역에까지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즈음 어느 순간 한 사건이 생겼다.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갑자기 복음이 전혀 새로운 의미로, 전혀 새로운 색채로, 그리고 새로운 강렬함과 기쁨으로 나를 휘감았다. 나를 복음 속으로 더 깊이 인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먼저 나를 만나셔야 했다. 그 만남은 실로 가장 달콤한 대면이자 가장 만족스러운 훈계였다. 내가 만난 문장은 나를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꼼짝 못 하게 했으며, 그 이후로도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보고 음미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가 없는 천국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복음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는 길이 아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존 파이퍼, 하나님이 복음이다, 47).우리 시대를 향한 질문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복음은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것은 황폐함과 황홀함을 동시에 주는 희귀한 깨달음이다. 왜 황폐함이냐고? 복음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황홀함은? 한 번도 발을 디딘 적 없는 땅, 한 번도 항해한 적 없는 바다를 만나는 것 같고, 상상도 한 적 없는 기막힌 음식을 먹는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끝나지 않는다. 천국이 천국인 건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훌륭한 식사이다. 거칠고 경이로운 바다이다. 밭에 감춰 있는 보화이며 값진 진주이다(마 13:44-46). 존 파이퍼는 도무지 잊을 수 없는 놀라운 질문으로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탁월한 선물인지를 강조한다. 우리 세대뿐 아니라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이 천국에 갔다고 치자. 병도 없고, 원하는 모든 친구가 옆에 있고, 매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각종 여가 활동에 또 날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움, 맛볼 수 있는 모든 육체적 쾌락에 인간관계의 갈등이나 자연재해가 없는 천국, 거기서 지금 당신이 살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단 하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없다면, 그런데도 거기가 당신에게는 천국인가? 여전히 당신은 만족할 수 있겠는가(하나님이 복음이다, 15)?당신은 어떤가? 나는 어떤가? 이건 내게 천국 자체를 뒤흔든 질문이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없는 천국에서도 만족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러니까 영원히 갈망할 정도로 천국을 진정 가치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게 그리스도라면, 나는 지금 왜 이 땅에서 그분을 더 알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 더 노력하지 않는가? 누가 천국인가? “복음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는 길이 아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그가 자신에 관해서 그리고 복음과 천국에 대해서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시는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복음 속 가장 큰 선물임을 알았다.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빌 3:7-9). 세상 모든 것을 능가하는 진정한 보물은 그를 아는 것, 그를 얻는 것, 그리고 그를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사도 베드로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벧전 3:18). 그분은 우리가 단지 용서받아 지옥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가질 수 있도록 고난받고 피를 흘리며 죽으셨다. 죄가 가져다주는 최악의 결과는 유황불이 아니라 분리이다(살후 1:9). 여러 가지 이유로 지옥은 고통스럽고 비참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것이나(계 14:10), 그것은 은혜와 기쁨이 아니라 무서운 진노이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구속받은 자들은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시편 43:4)라고 노래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기쁨과 즐거움이 단지 그분 옆 또는 주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분 안에 기쁨이 있다. 그는 기쁨 그 자체이다. 그는 즐거움 그 자체이다. 그가 거하는 곳이 낙원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다른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그분만 계신다면, 그곳은 낙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지금도 부분적으로 그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렇다. 우리 속에 남은 죄와 그 결과가 그의 임재를 방해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이 되실 때 우리는 지금도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지금도 쾌락, 영원한 쾌락을 음미한다. 그렇기에 시편 42편과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 42:1-2). 구원이나 용서, 치유나 공급, 안도나 화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을 갈망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하고 온전한 은사를 갈망하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은사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선물, 바로 하나님 그분을 갈망한다. 새 천국 속 진짜 천국천국을 기다리고 열망할 때,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요한계시록 21:4과 같은 약속에 매달린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눈물도, 더 이상의 죽음도, 더 이상의 애통과 울부짖음, 고통도 없다. 우리는 이런 모든 고통이 사라진 세상이 주는 달콤함, 그러니까 그림자가 아예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그러나 천국은 단지 안 좋은 것이 없는 곳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천국은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있음(presence)으로 정의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천국이 되실 때, 3절은 4절이 담고 있는 귀한 약속조차도 가려버린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21:1, 3)죄와 슬픔, 죽음이 없는 세상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세상이다. 그렇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질병을 치료해 주실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마침내 그 무서운 적, 죽음을 없애실 것이다. 그 모든 축복이 무한하게 크지만,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에 비하면, 그 모든 축복은 바다 옆 웅덩이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흘리는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다. 모든 암을 고치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보잘것없는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무덤을 비우고 죽음을 전복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영원히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에 눈이 멀어 하나님 그분 자체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잊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자. 웅덩이에서 노는 데에 정신이 팔려 광활한 바다를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는 그 어떤 천국에도 만족해서는 안 된다. 원제: When God Became Heaven for M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천국
존파이퍼
종말
요한계시록
새하늘과새땅
우상타파
참된즐거움
가장큰은사
천국갈망
하나님은 진짜 화를 내실까?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의 용어로 표현하시는 이유
by Mark Jones
2022-09-16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창세기의 시작 부분은 하나님이 관계를 맺는 분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이 삼위일체 안에서 관계를 갖는 분이기에 참된 신학은 언제나 관계의 신학이다. 하나님은 피조물, 특히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피조물과 적절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신다. 지혜롭고 선하신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아담과 결코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지 않으셨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 속에는 아담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단순함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겸손에 바탕을 둔 하나님과의 우정이었다.우리가 욥이 만났던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을 더이상 직면할 수 없게 된 건 아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욥이 만났던 하나님의 위엄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은 완전함에 있어서 무한하시다. 그는 변하지 않는 전지함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영원하신 전능을 누린다.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우리는 다윗처럼 말할 수 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욥 37:22).그러나 우리는 또한 인간으로서 우리와 관련된 많은 부분이 하나님께도 귀속되어 있음을 안다. 하나님의 “얼굴”(출 33:20), “눈”(그리고 “눈꺼풀”, 시 11:4), “귀”(사 59:1), “콧구멍”(사 65:5), “입”(신 8:3), “입술”(사 30:27), “혀”(사 30:27), “손가락”(출 8:19) 및 기타 많은 신체 부위가 그렇다. 더욱이 우리는 때때로 인간의 감정을 소유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읽는다. 그는 종종 질투하거나 슬퍼하신다(신 4:24; 32:21; 시 78:40; 사 63:10). 아담이 죄를 범한 후,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으로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창 3:9).열정 없는 하나님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발언들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신가, 아니면 하나님도 인간처럼 수시로 변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정말로 고통을 느끼거나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일까? 영이신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어디 있냐면서 찾아다니신 것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불변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견해를 받아들인다는 (시 102:26-28 참조) 것은 하나님에게는 시간(그분은 영원하다)이나 위치(그분은 편재하시다), 본질(그분은 순수한 존재 그 자체이시다)에 있어서 그 어떤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며 변할 수 없으시다(말 3:6, 사 14:27, 41:4).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열정(passions)의 변화”가 없다. 본질상 하나님은 때때로 더 행복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는, 그런 일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신성한 “축복받으심”이라고 부르는, 무한한 행복과 축복 속에서 항상 계셨고 앞으로도 그건 바뀌지 않을 것이다(약 1:17).불변하는 하나님에게는 열정이 없다. 또는 존 오웬이 말했듯이 “변하는 신은 배설물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진노와 미움 같은 어떤 감정(affections)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진노와 같은 감정은 겉으로 드러난 의지의 행위 또는 비유적으로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쓰인다. 열정은 인간에게나 적합한 내적 감정의 변화를 의미한다. 분노와 함께 상승하는 혈압을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질투(하나님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는 우리로 하여금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벌을 받기를 원하실 때, (노아 시대의 홍수처럼) 때로는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우리는 “여호와의 진노”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벌하셔야만 한다. 겉으로 드러내어 벌을 집행할 때, 성경은 종종 하나님의 분노나 진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아간이 하나님을 화나게 했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상황에 따라서 감정이 바뀌어 덜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아간을 하나님으로, 또 하나님을 아간으로 만드는 꼴이 된다(여호수아 7장).놀라운 하나님의 낮추심하나님은 구속의 역사를 공의롭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은 자신을 숙이고 낮추신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때때로 인간에게 있는 “열정”을 하나님 자신에게 전가하는데, 이는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전혀 적절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목적과 의지의 측면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헤르만 바빙크(1854-1921)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대하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이 신성한 자신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어떤 피조물도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우심으로 창조의 순간부터 피조물에게 몸을 숙여서 인간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나타나셨다”(Reformed Dogmatics, 1:100).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흑암의 구름 속에 남아 지금까지 헤매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숙이심”과 “나타나심”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를 쓰신다는 점에서 말하는 단순한 의인화가 아니다. 오히려 구약에서 사용한 하나님에 관해 쓰인 인간적 언어는 성육신을 통해서, 즉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놀랍게 성취되었다.의인화된 그리스도아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심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고전 10:4). 오웬에 따르면, 아들은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약에서 인간의 감정(affections)을 끊임없이 자신에게서 취한다. 그리고 조만간 인간의 본성을 입은 하나님이 움직이는 때가 올 것을 암시한다. 타락 후,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어떤 제도에 대해서도, 또 교회를 다루는 방식과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단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련해서만 있을 뿐이다(Works, 1:350).이것은 구약을 이해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방법이다. 하나님께 귀속된 이러한 의인화는 그의 백성과의 언약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그의 편에서 볼 때 편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그러나 아들은 만물의 근본(reason)이시기에(골 1:16), 하나님에 관한 의인화된 언어는 예수님에 관한 관점(prospective)일 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에게서 파생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오웬은 아들이 “인간의 감정이 깃든 본성”을 취한다는 사실을 성경 저자들이 의도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관해서 계속해서 의인화 방식(슬픔, 분노, 회개 등)을 써서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덧붙인다(350).하나님께는 결코 적절하게 귀속할 수 없는 의인화된 모든 표현이 실제로는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순간 적절하게 귀속된다. 팔과 눈, 마음과 영혼이 있는 예수님은 슬퍼하셨고(막 3:5), 또 분노하셨다(막 10:14). 불변하시는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모든 일이 성육신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가능하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인간의 열정을 표현하는 능력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두 본성을 가진 한 인격이시다. 그는 불변하시지만 변하실 수도 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무한한 기쁨을 경험했지만 또한 지상에 있는 동안 인간의 몸을 입고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까지 경험했다.항상 사람으로우리 주 예수는 자신 안에서 아멘이 터지게 하는 모든 약속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고후 1:20), 피조물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모든 진리의 성취이기도 하다. 주님의 손(팔)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결코 짧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손”이 다름 아니라 끝까지 구원을 완성하시는 메시아이기 때문이다(히 7:25). 우리는 손을 사용해서 일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의 손(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하나님은 종종 인간의 용어를 써서 자신에 관해서 말씀하신다. 그건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이신 아들이(골 1:15) 참 인간이 되도록 설정되었기에 그렇다. 또한 하나님은 신실한 이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셨고, 심지어 다가올 미래까지도 볼 수 있는 복을 주셨다. 주님의 신성만큼 중요한 것은 그의 인성이다. 인간의 언어에 맞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숙이고 드러내신 모든 표현이 항상 바라보고 기대하던 것이 바로 성육신의 인성이다. 원제: Does God Actually Get Angry? Why He Reveals Himself in Human Term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성육신
그리스도의성품
하나님의성품
의인화
하나님의분노
감정
열정
불일치라는 팬데믹
우리는 지금 왜 세상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는가?
by Randy Alcorn
2022-09-09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는 사실상 마귀의 자녀처럼 행동한다” 다른 참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을 드러내지 않는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얼마든지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판단할 권리가 있다. 나는 1970년 출간된 프란시스 쉐퍼의 ‘그리스도의 특징’(Mark of the Christian)을 나오자마자 읽었다. 쉐퍼는 요한복음 13:35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리고 이어서 요한복음 17:21의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기도를 인용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쉐퍼는 이 두 구절을 연결했다. [요한복음 13:35에 따르면] 세상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향해 가짜 그리스도인이라고 판단할 권리가 있다. 여기 요한복음 17:21에서 예수님은 훨씬 더 예리하고 심오한 다른 뭔가를 말씀하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과 예수님의 주장이 참되고 기독교가 참이라는 것을 믿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26–27).아름답지만 너무도 아픈 말씀에 근거한 지적이다. 최후의 변증막 열여섯 살이 된 나는 친구와 가족에게 복음 진리를 어떻게 증언할지 고민하던 초신자였다. 쉐퍼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일치를 “최후의 변증”이라고 불렀다. 사랑과 일치는 사실상 우리가 가진 신앙의 궁극적인 변호이다. 쉐퍼 덕분에 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믿는 이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가장 큰 증거이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복음을 믿고 따라야 할 이유를 별로 찾지 못할 것이다. 그건 가정과 가족 또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1977년에 각자가 다니는 교회에서 힘들어하는 몇몇이 따로 모여서 예배하고 성경을 공부했다. 우리가 알기도 전에 사실상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새로운 교회 하나를 세우셨다. 스물세 살 순진한 공동 목사로서 나는 우리가 하나 될 비결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교인 수는 급격히 늘었지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떠나는 교인도 많았다. 그러니까 쉐퍼가 말한 “참된 그리스도인이 하나 되는 현실”(27)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깊어진 분열예수님을 믿은 지난 52년 동안, 나는 성도들 사이의 갈등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러나 작년만큼 심한 적은 없었다. 많은 사람이 한때 사랑했던 교회를 향해 화를 내며 떠났다. 이전에만 해도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가르침과 예배를 기반으로 교회를 선택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정치적 관점과 코로나바이러스 프로토콜을 포함한 각종 비본질적인 문제를 토대로 교회를 정한다. 교회는 부족주의, 비난, 그리고 불가능한 용서라는 전염병을 겪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과 일치에 치명적이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만연한 생각은 미묘함과 뉘앙스를 위한 조금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다. 때때로 다른 관점의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공정함과 자비로 인식되기보다는 비겁한 타협으로 여겨진다. 슬프게도 복음주의자조차도 분노와 경멸을 바탕으로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치”를 공유하는 다른 특수 이익 단체와 하나 다를 것 없이 보일 때가 적지 않다. 성마르고 싸우려고 안달인 부정적인 심성(negativity)이 우리가 형제자매를 적으로 대하는 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건 꿈도 꾸지 말라는 쉐퍼의 말을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다.사탄의 전략에 빠져들다 비본질적인 사안을 놓고 다투는 그리스도인이 늘어나는 현상은 일시적인 게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전도의 문을 막고 있으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게 부추기고 있으며, 심지어 신자들조차도 교회가 도움이 되기보다는 상처를 주는 곳이 아닌지 고민하게 만든다. 사탄의 특기가 하나님의 가족을 참소하는 것이다(계 12:10). 너무도 자주 우리는 사탄을 위해 일한다. 사탄의 목표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못하게 유혹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는 사실상 마귀의 자녀처럼 행동한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마귀를 대적하려면,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그 중심 원리야말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마음과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4-15).다른 의견을 하나로 만들기바울은 로마서에서 어떤 고기가 “불결”한지, 또 예배는 언제 드려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하나같이 당시 엄청나게 논쟁의 여지가 많은 문제였다. 오늘로 따지면 정치 이슈 또는 코로나 대응 같은 주제였다.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공유한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계시는 다음과 같다. 진정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겠다고 가장 중요한 성경의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것을 포기함으로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희생해야 한다. 우리는 “의견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롬 14:1). 또는 NLT 성경이 표현했듯 “그들이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그들과 논쟁하지 말라.” 사랑에는 굳이 도매급 계약이 필요하지 않다.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바울은 똑같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람들도 얼마든지 서로 다른, 심지어 반대되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롬 14:5).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얼마든지 상반된 입장을 가질 수 있지만, 여전히 내 의견보다 사랑을 가치 있게 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평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믿음과 선한 양심을 바탕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상반된 사람까지도 다 인정하신다. 구약의 율법이 금지한 특정한 음식을 먹거나 먹지 않아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면, 안식일 또는 다른 요일에 예배하는 사람들 모두를 하나님이 다 받으신다면, 백신을 맞든 안 맞든, 마스크를 쓰든 안 쓰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다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롬 14:4). 마치 우리가 전지전능한 존재라도 된 것처럼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우리는 왜 다른 형제자매의 결정과 마음,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 14:12-13). 우리는 궁극적으로 서로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우리가 대답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롬 14:19, 22). 평화와 교화는 자연스럽게 오는 게 아니다. 성령의 권능이 필요하다. 평화를 “추구하라”(또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 NIV)는 명령이 의미하는 것은 굳이 말하거나 온라인에 게시해야 할 강력한 이유가 없다면, 또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뿐 아니라 그 인도를 느끼면서 은혜롭게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언제나 성경대로 행하고 당신이 아는 사실은 오로지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비밀로 간직하라는 것이다. 의견이 강하다고 그게 꼭 하나님이 그것을 표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관해서 분명하게 말한다.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잠 18:2).-“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잠 12:18).사랑과 일치를 위해 전진하기분열된 시대에 사랑과 일치를 위해 취할 수 있는 실제적인 조치는 뭐가 있을까? 1. 야고보서 1:19을 연습하라.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것만 지켜도 놀라운 정도로 사랑과 일치가 자라날 것이다. 2.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가능하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라. 공개적으로 서로를 비난하지 말라. 3. 당신이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 스스로에게 물으라. 내 말이나 소셜미디어 게시물이 불신자를 예수님께로 이끌 가능성이 높은가 아니면 반대인가?4. 교회가 줄 수 있는 사랑과 일치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라. 사랑과 일치가 자연스럽게 또는 쉽게 올 거라는 생각을 버리라. 5. 선동자가 된 것을 회개하라. 피스메이커가 되겠다고 다짐하라. 6. 교회 지도자와 이야기하라. 문제를 솔직하게 설명하고 사랑과 일치를 촉진하는 데 당신이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을지 물어보라. 7.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한 형제와의 관계가 완전히 바뀐 적이 있다. 내 아내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위해 수십 년 전부터 중보 기도를 하고 있다. 8. 교만을 물리치고 진정한 겸손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라. A.W. 토저(A. W. Tozer)는 이렇게 말했다. “겸손한 사람만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만이 자신의 크기와 한계를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Tozer on Christian Leadership, 11). 명확하게 생각하는 것은 겸손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진정한 일치는 다음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에 대한 기본 진리를 향해 공유하는 믿음,-이차적 믿음을 일차적 믿음 위에 두는 것을 거부함,-예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해 진심 어린 사랑을 보여줌,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신뢰함.50년이 지나 분열이 숨 쉬는 공기가 되어버린 지금 ‘그리스도의 특징’을 다시 읽었을 때, 그 책의 메시지는 내게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쉐퍼의 메시지는 진실이다. 오로지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겸손한 사랑과 일치 안에서 살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을 기울일 때만,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또 그중 어떤 사람들은 그를 믿게 될 것이다. 원제: A Pandemic of Disunity: How We Drive the World Awa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프랜시스쉐퍼
분열과일치
코로나바이러스
교회의분열
사탄의전략
천로역정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Derek Thomas
2022-09-08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J. R. R.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 3부작처럼,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일종의 로드 트립이다. 파괴의 도시에서 천상의 도시로 가는 크리스천’(Christian)의 여정과 그 과정에서 그가 겪은 많은 만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기술적으로 천로역정은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두 번째 부분은 ‘크리스천’의 아내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네 아들이 겪는 동일한 여정을 서술한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두 번째 부분이 보통 그리스도인이 겪는 천국 여정을 더 균형감 있게 묘사한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천로역정과 나름 익숙한 것은 ‘현자’, ‘유연’, ‘완고함’, ‘형식주의자’, ‘수다쟁이’, ‘거대한 절망’ 같은 등장인물과, 세계의 황야, 허영의 시장, 길가의 초원, 절망의 수렁, 의심의 성, 맛있는 산 등과 같은 이야기 속 장소를 일상 대화에서 자주 사용하기 때문이다.C. H. 스펄전을 비롯해 천로역정을 여러 번 읽었다고 자랑할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이 책을 처음 손에 잡은 사람이 기대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구절구절마다 성경이 넘친다첫째, 천로역정은 성경의 절대 권위에 대한 번연의 믿음을 보여준다. 거의 모든 행이 성경 구절 또는 문단을 반영한다. 번연을 쿡 찌르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올 피는 “성경”일 거라고 말한 사람은 스펄전이었다.두 번째 부분 중 한 내용에는 어린 ‘매튜’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분별’(Prudence)이 나오는데, 이 대화는 성경에 대한 번연의 깊은 존경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분별.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매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입니다.분별. 성경에는 네가 이해 못 하는 내용도 많지 않니? 매튜. 많아요. 분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을 만나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매튜. 하나님이 나보다 지혜로운 분이세요. 그리고 내게 유익하다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부분은 꼭 알려주실 것이라고 믿고 저는 기도해요. (천로역정, 228)죄의 짐을 내리고둘째, 천로역정은 회심을 특히 강조한다. 큰 죄의 짐이 제거되어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가 무덤으로 들어가기까지, ‘크리스천’에게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크리스천’에게는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까? 안도감과 확신을 찾기 전까지 왜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죄로 인해 아파하고 싸워야 했던 걸까? 번연은 모든 회심이 다 이런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지금 은근히 값싼 은혜를 비판하면서,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죄와의 고통스러운 투쟁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걸까? 1678년 이 책의 초판이 나오고 번연이 받은 비난이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일종의 “준비주의”(preparationism)의 시도와는 거리가 먼 번연은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구원의 확신에 이르기까지 그는 몇 년 동안 죄가 주는 죄책감과 씨름했다. 그렇기에 실제 회심의 순간이 아니라 ‘크리스천’의 어깨에서 죄의 짐이 떨어진 바로 그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번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살짝 덧붙이자면, 2부에 나오는 ‘크리스티아나’와 네 소년의 개종은 훨씬 더 쉽게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도 나름 흥미롭다.)죄인을 의롭다 하심셋째, 천로역정에는 대속 속죄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담겨있다. 어느 시점에선가 소망 (허영의 시장에 살았지만 ‘믿음’이 사망한 후 ‘크리스천’에게 합류함)은 ‘믿음’과 ‘크리스천’에게 그의 회심과 관련해서 자세하게 설명할 것을 요구받는다. ‘믿음’은 죽기 전에 ‘소망’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누군가의 의로 구원받지 못한다면, 나 자신의 의는 말할 것도 없고 온 세상의 모든 의를 다 합쳐도 나를 구원할 수 없어.” ‘크리스천’이 이렇게 묻는다. “그럼 그 죄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봤어?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해서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데?” ‘소망’은 이렇게 대답한다. 응, ‘믿음’이 얘기해줬어. 그분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우편에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어. 그리고 또 ‘믿음’이 말하길, 그가 육체를 입고 스스로 행한 일과 또 그가 나무에 달려 고난 당하신 것을 네가 믿음으로서 너는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한다고 했어. 내가 또 물어봤어. 어떻게 그분의 의로움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정당화하는 효능을 가질 수 있는지 말이야. ‘믿음’이 이렇게 말했어. 그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하셨다고 말이야. 또 그분은 죽음을 죽이셨는데,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그래서 나 같은 죄인도 그분을 믿음으로 그의 가치가 내게로 전가된다고 말이야. (143)그리고 ‘소망’은 사실 그 이야기를 얼마나 믿기가 어려웠는지, 그러나 결국에는 “참회의 기도”(sinner’s prayer)를 드리게 되었다면서 회심의 과정을 설명한다. 나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믿게 하신 하나님의 긍휼이 너무도 크십니다. 내가 보니, 주님의 의가 없거나, 내가 그 의를 믿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완전히 버림을 받았을 겁니다. 주님, 당신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을 구할 구주로 정하셨습니다. 더욱이, 당신은 저와 같은 불쌍한 죄인에게 기꺼이 그를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참으로 죄인입니다.) 주여, 지금 이 시간을 통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영혼에 구원을 주시고, 나로하여금 당신의 은총을 더 크게 알게 하소서. 아멘. (144)‘소망’은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자신에게 보여주실 때까지, 이 기도를 “수없이” 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아들을 육신의 눈이 아니라 이해의 눈으로 보았다. 그랬다. 어느 날 나는 매우 슬펐다. 내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슬펐다. 그리고 이 슬픔은 내 죄의 거대함과 사악함을 비로소 제대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때에는 내게 주어진 길은 지옥밖에 없다고, 내 영혼에게 가해질 것은 영원한 저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주 예수께서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드리라.’ (145)발췌를 하려면 얼마든지 더 할 수 있겠지만, 번연이 가진 개종 교리가 얼마나 복음주의적 성격을 가지는지는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고통받는 자가 이긴다’ 넷째, 천로역정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자리 잡은 고난을 중심 무대로 삼는다. 번연은 온갖 시련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도 바울 못지않게 얼마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대의 청교도 설교자 존 기어(John Geere)와 더불어 번연도 자기 삶의 모토로 얼마든지 ‘vincit qui patitur’, 곧 “고통받는 자가 이긴다”를 채택할 수도 있었다.번연은 1660년 불법 설교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리고 무려 12년을 영국 베드포드에 있는 감옥에서 보냈다. 석방되고 3년 후에 다시 체포된 그는 다시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다. 천로역정은 감옥에서 시작되어 두 번째 투옥 중에 완성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 한 현대 정신과 의사가 “강박 장애”라고 명명한 깊은 불안에 시달렸다.천로역정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고통으로 가득한지, 그 사실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다. ‘크리스천’과 ‘소망’이 거대한 절망과 그의 비슷한 수준으로 침울한 아내의 손에 잡혀 의심의 성 지하 감옥에서 보내며 거의 자살 충동을 느낀 며칠의 시간, 그리고 나중에 나오는 ‘아폴론’과의 전투 장면은 모든 문학을 통틀어 시련과 환난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내용 중 하나이다. 그리고 ‘믿음’이 순교한 장소, ‘바알세불’이 담당하는 허영의 시장이 있다.여정이 주는 괴로움으로부터 ‘크리스천’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믿음’은 그를 처음에 통역사의 집으로 데려가는데, 그곳에서 ‘크리스천’은 무엇보다도 칼로 무장하고 투구로 보호되는 “가장 맹렬하게 베고 또 베는”(36) 용감한 사람들을 본다. 이 모든 것이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인 군사에 관한 묘사를 떠올린다. 마지막 강다섯째, 청교도 정신의 정수를 보여주는 천로역정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준비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준비시킨다. 천상의 도시로 이어지는 강을 건너는 ‘소망’과 ‘크리스천’의 이야기는 가장 감동적인 비유 중 하나이다. 놀랍게도 ‘크리스천’은 마지막까지도 의심에 차서 몇 번이고 물에 빠지지만 친구에 의해 구출된다. ‘소망’이 이렇게 말한다. 이 물을 건너면서 네가 겪는 고난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너를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야. 단지 너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야. 환난 중에도 여전히 네가 그의 선하심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지 아닌지를 보시기 위한 거야. ‘크리스천’은 이렇게 대답한다. 오, 나는 그를 다시 보고 있어. 그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내가 함께 있으리라, 강이 너를 집어삼키지 못할 것이다. (159)18세기 감리교도들은 그 누구보다 죽음을 잘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번연은 목회자의 심정으로 ‘크리스천’이 막판에 의심하는 장면을 넣은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죽음을 앞에 놓고 행여라도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시험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꼭 필요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1부의 가장 마지막 단락은 내가 읽은 것 중 가장 충격적이다. 십대 시절 천로역정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번연의 글을 제대로 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나는 읽다가 큰 소리로 “안 돼!”라고 소리쳤던 것을 기억한다. 여기에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참겠다. 단, 천로역정을 처음 읽는 독자에게 충고를 하나 하자면, 마지막 단락을 읽고 싶은 충동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꾹 참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으라는 것이다. 원제: The Pilgrim’s Progress: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천로역정
여행
천국
지리 정보가 빼곡한 본문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by Bryan Murawski
2022-09-05
구약의 내러티브는 흥미진진하다. 여호수아를 예로 들어보자. 이 내러티브는 독자를 서사시에서 서사시로 이끌어간다. 기생 라합은 스파이 둘을 숨긴다. 요단강이 갑자기 그 흐름을 멈춘다.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린다.그런데 여호수아서의 피날레 전에, 마치 아름답게 채색한 지도책을 워드 문서로 변환해 놓은 것처럼, 지리 정보가 가득한 열 장이 이어진다. 설교자는 여호수아 15장에서 하살 수알, 브엘세바, 비스요댜, 엘돌랏 같은 지리 정보가 들어 있는 총 63절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의 주일학교 교재에 들어 있는 색칠 공부 페이지는 보통 이런 긴 장소 목록은 건너뛴다. 설교자들도 많이들 그렇게 한다. 태양이 여호수아 10장에서 멈추어 서고, 강해 설교 시리즈도 거기서 멈추어버린다.지리학 정보로 가득한 장이 여호수아서에만 많은 것도 아니다. 민수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에스겔, 느헤미야 같은 성서도 도시, 성읍, 복잡한 여행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지리를 설교한다는 게 까다롭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음은 이런 까다로운 장들에 접근할 때 도움이 될 몇 가지 조언이다.1. 설교 전에 먼저 위치를 추적하라.어떻게 사용하는지 안다면, 지리는 설교자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 설교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 도시에서 마을로, 산에서 산으로, 호수에서 해안으로 플롯의 지리적 이동을 추적하라. 지리 추적을 성경 연구의 루틴으로 만들라. 설교 본문에 등장하는 지명이 성경책 뒷면에 있는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면, 기운이 빠질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성경 소프트웨어나 웹사이트가 수고를 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로고스의 도움을 받기 전에 직접 지리 경로를 추적한다면 설교 준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주석을 참고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주해하고 공부하면서 훈련을 쌓는 것처럼,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지리를 연구하는 습관을 들여라.2. 지리 정보가 많은 본문의 신학적 목적을 기억하라.신학이 항상 지리학을 이긴다. 너무 역사에 사로잡혀 본문의 신학적 중요성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여호수아 15:33-63에는 100개가 넘는 마을과 성읍의 이름이 나온다. 최고의 성서 지도책도 따라잡기가 어렵다! 이런 본문에 접근할 때 “이 장소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만 할 게 아니라, 이 질문도 해야 한다. “이 본문의 핵심은 무엇일까?”여호수아 15장은 유다의 기업의 경계, 곧 하나님의 축복의 경계를 추적한다. 열거하고 있는 모든 계곡, 산, 성읍은 이 지파를 위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해 들려준다. 상세 지도 속에서 쉽사리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 디테일 속에서 들어 있는 보물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장 중간쯤에서 우리는 옷니엘의 영웅적인 정복과 그에 따른 보상을 본다(15:13-19). 그러나 이 위대한 승리조차도 유다가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여호수아서 화자의 논평과 함께 그 빛이 바랜다(수 15:63). 모든 축복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장은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는 우리에게 여호수아나 옷니엘보다 더 나은 구주가 필요함을, 가나안 땅보다 더 영구적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필요함을 가리킨다.3. 메시지를 보강할 때만 시각 자료를 사용하라.대부분의 교회 역사에서 지도 부록이 있는 성경책을 가져본 사람은 많지 않다. 마르틴 루터는 라마가 베들레헴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지도에서 찾아본 적이 없다. 그런 지도가 없다고 종교개혁을 못한 것도 아니다. 지도나 시각 자료 없이 설교하려는 당신에게는 무수히 많은 동료가 있는 것이다.그러나 시각 자료가 설교를 풍성하게 할 수는 있다. 그게 본문의 요지를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면 말이다. 예를 들어, 지도에서 숙곳, 에담, 비하히롯의 위치를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죄 때문에 짧은 거리에 있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먼 길을 돌아 여행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4. 본문의 지리를 회중이 익숙한 장소와 연결하라.“단에서 브엘세바까지 거리는 150마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대신에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의 거리는 디트로이트에서 그랜드래피즈까지 거리와 거의 같습니다”라고 말하라. 진정한 미시간 사람이라면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두로는 고대 세계의 마서즈빈야드[미국의 유명한 휴양지]였습니다”는 “두로는 북이스라엘의 부유한 해상 도시”보다 더 맛깔스럽고 더 수월하게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지리 정보가 빼곡한 본문에 접근할 때 겸손한 마음과 희망적인 기대를 똑같이 가지길 바란다. 그런 본문을 공부하거나 설교하기가 쉽지만은 않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설교자들은 이러한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며, 배우고 성장하는 데 힘써야 한다(딤후 3:16-4:5).원제: 4 Tips for Preaching Geography-Heavy Tex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경지리
상한 갈대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Nick Roark
2022-09-01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한 문장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400년 전에 쓰인 글 하나가 그렇게 내 인생을 바꾸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더 크다”(Works of Richard Sibbes, 1:47)이 말을 한 이는 청교도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명인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이며, 이 문장은 그의 가장 위대한 책, 스펄전이 일찍이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양손으로 흩뿌려놓은 책”(Lectures to My Students, 778)이라고 부른 상한 갈대(The Bruised Reed)에 나온다. 이 책과 이 문장은 나를 살아계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글을 쓴 십스 같은, 이미 천국에 간 목사들의 작품을 매달 읽어야겠다는 열정에 불을 붙였다. 상한 갈대는 당신 속에서도 똑같은 열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스위트 드롭퍼십스는 1577년 영국 서퍽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18세에 케임브리지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1603년 그리스도께 회심한 후에 신실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30년 동안 케임브리지와 런던에서 십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복음의 위대한 신비를 달콤한 방식으로 펼치고 적용하는”(Works, 3:4) 따뜻한 은사 때문에 그를 종종 “부드럽게 떨어뜨리는 자”(Sweet Dropper)라고 불렀다.그가 1627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사람들은 그를 “천국에서 사는 십스 박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천국을 품고 사는 그의 삶과 교리 때문이었다. 1635년 7월 6일,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기리는 이런 글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 선한 사람에게 이 높은 찬사를 돌릴지어다: 그가 천국에 가기 전에 그는 이미 천국에 있었노라”(Meet the Puritans, 535).십스는 꾸준히 설교를 집필했고, 무려 200만 단어가 넘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상한 갈대는 그중 단연코 가장 기억에 남고 소중한 책이다. 이 책은 청교도 경건의 고전, 실천 신학의 패러다임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이 책은 이사야 42:3,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에 대한, 그리스도를 높이는 주석이요 적용이다. 십스는 마태를 따라(마 12:18-20) 종이신 주님, 하나님이 마음에 기뻐하시는 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이로 묘사한 이 예언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이해한다.16개의 짧은 장을 통해서 십스는 논지를 세 부분으로 전개한다. (1) 그리스도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실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실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승리로 심판하실 때까지 이 둘 중 어떤 것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지친 신자를 위한 위로오늘의 그리스도인이 거의 400년 전 런던에 살았던 한 설교자가 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이유에서다: 1630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로 수많은 지친 그리스도인이 상한 갈대에 가득 담겨 있는 낙심한 자를 위한 격려를, 약한 자를 위한 능력을 발견했다. 이는 이 책이 죄인을 사랑하는 자비롭고 전능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에서 이렇게 썼다. “한때 너무도 극심하게 지쳤던 나는 악마의 공격에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복종했었다. 바로 그런 시기에 내 영혼을 진정시켜준 이가 리차드 십스였고, 나는 그런 그에게 감사를 멈출 수 없다. … ‘천국의 의사 십스’는 만병통치약이다. … 그의 책 상한 갈대가 나를 진정시키고, 달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또 치유했다”(Preaching and Preachers, 186-187).17세기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백스터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그리스도께로 회심하게 할 때 바로 상한 갈대를 사용하셨다고 고백했다. “상한 갈대는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고, 구속의 신비와 더불어 내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께 단단히 매여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이해하도록 했다”(Richard Sibbes, vii).그리스도, 강하고 부드러우신십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영적 문제에 직면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향한 모든 헌신과 그에게서 오는 위로의 원천이 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성품과 직분”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한 갈대에서 십스는 용서받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찾을 수 있는 “연민과 사랑의 놀라운 달콤함”(Works, 1:38)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다. “예수님처럼 은혜로우신 중보자(딤전 2:5)에게서 어찌 은혜를 기대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우리의 본성을 취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병을 잘하는 의사이시며 특히 상한 마음을 고치는 데에 능하십니다”(Works, 1:45).십스는 상심하고 괴로워하며 낙담한 그리스도인, 그러니까 진짜 “상한 갈대”를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결코 그들을 깨뜨리거나 소멸하지 않으실 것임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긴다. 십스는 아프고 지친 그리스도인에게 위로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초대한다. 우리를 위해 사역을 완성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속에서도 시작한 일을 확실하게 마치실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우리는 구원이 능력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또한 달콤하게 제공되고 있음을”(Works, 1:40) 보게 된다.이사야 42:3의 예언에서 그리스도는 연약한 자의 결점을 부드럽게 사랑할 뿐 아니라 자비롭게 참아주시는 부드러운 구주로 묘사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승리를 가져오는 전능한 은혜를 그리스도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Works, 1:40).“우리는 약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것이다”(Works, 1:71).지친 이들의 기도상한 갈대를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모든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에게 시선을 돌리게 하려고 십스가 얼마나 일관되게 모든 내용의 초점을 맞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큰 악과 두려운 원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하시는 그리스도 은혜의 언약 안에 자신을 두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 그 안에는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합친 모든 것보다 더 높고 깊고 넓은 긍휼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심입니다”(Works, 1:39).우리의 죄는 인간의 죄이지만, 그리스도의 자비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내는 소리는 우리 죄가 내는 소리보다 더 크다(Works, 1:89). 그리스도의 이 은혜로운 마음이 바로 십스가 모든 페이지를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놀라운 은혜 안에 드러나 있는 자비롭고 전능하신 그를 볼 때, 우리는 그의 영광을 위해 그를 섬길 능력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십스는 그리스도인이 자주 실패하고 영혼이 빠르게 지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가 기도 훈련에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진 신자에게 이사야 42:3의 영광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들어보라.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이 탄식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하나님은 혼란 속에 드리는 기도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고, 우리의 기도가 성령으로부터 오기에, 또한 그 기도가 그분의 뜻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기도가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쉬는 거룩한 한숨과 눈물 중에 헛되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Works, 1:65-66).순전한 은혜의 하나님십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성을 입으신 순수한 은혜”(Works, 4:519)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삶을 통해 “심판을 승리로 이끄시기” 위해 헌신하셨기에, 우리는 그 은혜에 의지하며 그가 지역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제공하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여 응답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면(약 4:8), 규례대로 그는 우리를 가까이하십니다.”우리는 은혜로 싸우지만, 궁극적으로 승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기시는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십스는 상기시킨다. 우리는 오직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해지려고(엡 6:10) 노력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기와 같이 되게 하시고, 안팎으로 다 영화롭게 하시고, 또한 아버지 앞에 흠 없는 자로 세우시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유 1:24).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마음으로 갈등을 겪을 때,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항상 그런 상태로 살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조금만 더 노력합시다. 그럼 우리에게는 영원히 행복이 주어질 것입니다”(Works, 1:98).죄인을 죄인의 구주와 연합시키기에 믿음이 위대한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강한 믿음이 아니다. 강하신 그리스도를 향한 연약한 믿음이다. “거인의 손에 들린 작은 것이 큰 일을 해낼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굳세게 된 작은 믿음이 역사를 행할 것입니다”(Works, 1:84).왜 상한 갈대를 읽어야 할까?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원제: The Bruised Reed: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리처드십스
상한갈대
꺼져가는심지
이사야42:3
국경 없는 하나님 나라
by Tim Keesee
2022-08-26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악한 정권이나 심지어 지옥의 문도 결코 그리스도를 이길 수는 없다. 이 세상의 국가와 정부에는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국경이 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국경이 없다. 복음은 한 번도 제한된 지역에 갇히지 않았다.30년도 더 지난, 내가 사역을 시작하고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베를린 기차역에서 출발하여 그 도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회랑을 따라 걸었다. 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무인 지대”였다. 그러나 이제 지뢰와 철조망이 철거되었고, 그 베를린 장벽은 무너진 채 잔해가 쌓여 있었다. 그 철의 장막은 그렇게 무너지고 있었고, 지도는 새롭게 그려지고 있었으며, 새로운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우리는 그 무렵에 처음으로 동유럽에 들어갔다. 교회에 주어진 자유와 아이러니한 기회가 믿기지 않아 나는 자주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그때 모스크바에서 전도지를 찍었는데, 우리가 사용한 인쇄기는 과거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진리’라는 뜻의 러시아어)를 찍어내다가 용도 폐기된 바로 그것이었다. 지난날 프라우다는 거짓을 전파하고, 소련의 그리스도인들을 우롱했다. 그런데 그 프라우다를 찍어내던 그 인쇄기가 복음의 참 진리를 인쇄하다니!그 철의 장막의 심장부였던 그곳에 서 있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동-서로 분단되어 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 장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장벽을 아예 무너뜨리는 것이 낫겠다고 여기셨던 것 같다. 나는 무너진 장벽 더미에서 제법 큰 덩어리 하다는 주워서 배낭에 넣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오래된 기념품이 내 앞 책장에 놓여있다. 베를린 장벽의 잔해 앞에 서 있던 그날 이후로 줄곧 내 머릿속을 맴돌면서 나의 생각, 나의 기도, 나의 소망에 영감을 주고 있는 문장이 있다. 아라비아의 선교사였던 사무엘 츠베머(Samuel Zwemer)의 이 말이다. “이 세상의 국가와 정부에는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국경이 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국경이 없다. 복음은 한 번도 제한된 지역에 갇히지 않았다.”이 짧은 문장으로 츠베머는 복음의 능력과 진보를, 그리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부활하신 우리 왕의 강력한 권세를 잘 표현하였다.어떤 경계선도 없다오늘날의 세계 지도를 보면 국가의 경계를 드러내는 긴 국경선과 서로 다른 색깔로 국가들이 어지럽게 표현되어 있다. 지금 전 세계에는 200개에 이르는 국가들이 있으며, 그 수는 지난 20세기에 네 배나 늘었다. 이처럼 지금 우리 세계의 지도들은 국경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왕국의 지도를 보면 국경선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왕국의 백성은 모든 민족, 언어, 나라, 백성 가운데서 구속받은 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츠베머는 지역, 민족, 정치, 종교의 벽을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과 진보를 잘 말해주었다. 복음을 가로막을 수 있는 벽은 없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땅끝까지 그 어디에서나 그의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악한 정권이나 심지어 지옥의 문도 결코 그리스도를 이길 수는 없다. 어떤 나라도 그리스도를 가로막을 수 없다. 그들이 우리에게 비자를 주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의 입국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없이도 얼마든지 그의 선교를 이루어 내신다.지금까지의 선교사들의 이야기보다는 덜 인상적일지 모르지만, 국경을 넘어서 지옥의 문을 무너뜨리는 복음 전파의 이야기를 한번 말해보려고 한다.뜻하지 않은 선교사1995년에 가난한 농부였던 마라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베트남 국경을 넘어서 캄보디아로 넘어갔다. 그들은 가난을 피해서, 그리고 새로운 일을 찾기 위하여 다른 나라로 넘어갔다. 그들은 자라이족이었다.자라이족은 소수 부족이었지만, 중부 베트남의 산지에서 오랫동안 강인하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온 부족이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 때 남베트남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멸망한 후에 자라이족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파괴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자라이족의 교회였다. 복음은 전쟁 중에 자라이족에게 심어졌다. 처음 복음이 전해질 때는 자라이족 중에서 회심한 사람이 수백 명에 불과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부흥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수만 명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마라였다. 이 가난한 가족이 국경을 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캄보디아 국경지대는 지뢰밭으로 유명했고, 악명이 높은 크메르루주 군사 정권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가난과 새로운 삶을 향한 소망이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마라는 캄보디아에도 자라이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치적, 지리적 경계가 가로막고 있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과 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있기에, 마라는 그곳에서 새로운 일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베트남에 있는 자라이족과는 달리 캄보디아에 있는 자라이족에게는 단 한 번도 복음이 들어간 적이 없었다.복음을 소문내다마라는 솜 트록이라는 지역으로 가서 일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였다. 마라의 증언을 통하여서 두세 명의 자라이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들은 폭우가 쏟아지기 직전에 내리는 첫 빗방울과 같았다. 마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처럼 캄보디아의 자라이족에게도 “복음의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1년 만에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앞서 말하였듯이 이는 대단한 선교사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에는 미전도 종족을 향한 거대한 선교의 전략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특별한 선교 훈련도 없었고, 엄청난 선교비가 사용되지도 않았으며, 단기 선교팀이 다녀가지도 않았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그저 복음의 열정을 가진 증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다. 그 결과 무속신앙과 악령숭배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변화되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마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막대기가 그들에게 임한 것 같았다. 이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 1:28-29).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마라가 솜 트록 지방에 들어간 지 20년이 지났을 때 나는 그곳에서 여전히 부흥하고 있는 교회에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자라이족은 또 다른 교회들을 개척하여 세웠으며, 그 지역에 있는 다른 부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국경을 넘어서 라오스에까지 모든 민족을 위한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서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었다.불가능한 곳까지 다스리시는 왕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 번도 제한된 지역에 갇히지 않았다”는 츠베머의 외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기초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를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지상명령을 통하여서 자신의 종들에게 문화를 넘어서 모든 대륙으로, 땅끝까지 그의 제한이 없는 복음을 들고 가라고 명령하신다. 복음은 제한이 없고 막힘이 없다고 할지라도 복음 전도자는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역경이 있을 수 있으며, 때로는 좌절이 있을 수 있다. 그들 앞에서 문이 닫힐 때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츠베머는 이렇게 말한다. “기회가 막힌다고 해서 선교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열린 문이 손짓하고 있다. 닫힌 문은 그것을 열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자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우리의 왕은 가장 힘들고 가장 불가능한 곳까지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그의 구속 사역은 국경, 장벽, 철조망으로 가로막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전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함께 전진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 평생토록 신실한 사역을 통해서든, 아니면 죽음 이후의 증언을 통해서든, 복음은 그런 곳까지도 들어갈 것이다.복음은 결코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무엘 츠베머의 확신은 한순간의 감정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박해가 심한 지역인 아라비아에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이 진리를 깨달았다. 지금도 세상에는 전도자들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나라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그 어떠한 장벽도 그의 손에 못 자국을 가지고 계시는 만왕의 왕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수많은 나라에서 온 그의 종들이 제한될 수 없는 복음을 들고 세상 모든 나라들로 나아가고 있다. 원제: A Kingdom Without Border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박광영
하나님나라
선교
복음의능력
지상명령
신앙감정론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Joe Rigney
2022-08-25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은 엄청난 책이다. 무엇보다 잠재적으로 파괴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이 제기하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를 구별하는 표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라면 피할 수 없다. 내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위선자인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내 믿음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이 책이 바로 그 거짓을 밝혀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책에 잠재적 파괴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파괴는 좋은 것이다. 내 믿음이 근본적으로 잘못 인도되고 있거나 부족하다면 또는 나아가서 아예 거짓이라면, 마지막 심판에서 예수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심판 날 그리스도로부터 거부당해 황폐하게 되는 것보다는 에드워즈의 이 책 때문에 황폐하게 되는 게 훨씬 낫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나마 복구가 가능하다. 회개는 여전히 가능한 선택지로 남아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라면 회복은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그러나 이 책에는 또 다른 이유로 인해 잠재적 파괴성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신앙감정론은 18세기를 목사와 신학자로 산 진정한 천재가 쓴, 당시 분위기를 여실히 풍기는 복잡하고 정교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부흥과 종교 체험, 도전받는 구원의 확신,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제대로 분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수십 년을 성찰한 신학적 결실이다. 같은 주제를 담은 에드워즈의 네 번째 책인 신앙감정론은 18세기 중반에 유럽과 미국을 휩쓴 첫 번째 대각성운동 직후에 쓰였으면, 그 부흥 운동이 제기한 여러 도전에 대한 그의 가장 성숙한 성찰을 담고 있다. 주제의 복잡성과 저자 특유의 명확한 산문은 이 책이 오해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그 오해 때문에 우리는 황폐해질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 우리의 신앙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그건 우리 믿음이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에드워즈가 말하는 표시를 자신에게 잘못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하면서 나는 지금 말한 두 가지 유형의 황폐함 또는 파괴성을 염두에 둔다. 필요하다면 첫 번째는 더 키우고 싶지만, 그럴 수 있다면 두 번째는 피하고 싶다. 이 목표를 위해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필요한 열 단계 오리엔테이션을 제안한다. 어렵지만 가치 있는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열 가지 항목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1. 구조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주제를, 그러니까 대부분 경우에 진정한 종교는 거룩한 감정(affections)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감정이 의미를 정의한다. 2부에 들어서 저자는 신뢰할 수 없는 거룩한 감정의 열두 가지 표시(signs)를 서술한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 신뢰할 수 있는 거룩한 감정의 열두 가지 표시를 소개한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다. 용어의 정의, 신뢰할 수 없는 거룩한 감정의 표시,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거룩한 감정의 표시, 이것이 이 책의 기본 구조이다. 2. 감정의 의미에드워즈에게 감정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려면 인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몸에는 외부 세계의 인상을 받아들이는 오감이 있다. 우리의 영혼 또는 마음(mind)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기능(faculties) 또는 능력(powers)이 있다. 첫 번째가 이해력이다. 이해력은 우리가 지각하고, 분별하고, 보고, 또 판단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두 번째는 이해력으로 인해 지각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또는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의지력(will)이다.“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감정을 살펴야 합니다.” 미식축구 경기에서 보라색과 금색 유니폼을 입은 팀을 미네소타 바이킹으로, 그리고 녹색과 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팀을 그린베이 패커스로 식별하는 것은 이해를 통해서 이뤄진다. 하지만 바이킹을 향해서는 응원의 함성을 보내지만 패커스에게는 야유를 퍼붓는다면, 그건 다 의지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의지의 성향이다. 의지가 가진 일부 성향은 단순하고 사소하다. 그런 의지는 거의 의식하지 않고 이뤄진다(예를 들어, 오늘 어떤 양말을 신을지 선택하는 것). 그러나 또 다른 성향의 의지는 강하고 끈기 있고 역동적이다(예를 들어, 배우자 선택). 저자는 오로지 후자에 해당하는 의지만을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의지를 더욱더 강력하고 분별 있게 활용하는 것이다. 3. 감정의 중요함감정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감정은 종종 인간 행동의 원천이 된다. 감정은 세상이 움직이도록 한다. 살아 움직이는 누군가가 감정 없이 일한다면 제대로 된 결과를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행동에 활력을 주는 것은 사랑과 미움, 두려움과 욕망, 그리고 슬픔과 기쁨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정이 마음의 근본 방향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원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내 감정을 살펴보아야 한다.4. 감정 평가감정을 평가할 때 실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감정이 드러내는 즉각적인 강도보다는 습관적 감정이 가지는 고정성과 끈기, 강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점을 에드워즈는 분명히 한다. 명료성은 우리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잘못 평가하지 않도록 한다. 번뜩이는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즉각적인 외적 효과((그중 일부는 성격과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로 감정의 강도를 측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습관적 감정의 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다양한 도전을 거치는 내내 우리 마음이 바라보는 방향에 주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누구라도 만나는 비정상적으로 나쁜 날에 (또는 비정상적으로 좋은 날에) 생기는 순간적 감정이 가져다주는 성급한 결론을 막을 수 있다. 5. 믿을 수 없는 표시우리는 에드워즈가 쓴 믿을 수 없는 표시라는 말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믿을 수 없는 표시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단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삶에 믿을 수 없는 신호가 있다는 것은 결코 결함이 있다는 게 아니다. 단지 결론을 내릴 만큼 결정적이지 않다는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이건 불리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유리한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을 수 없는 신호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강렬한 감정은 신뢰할 수 없는 표시이다. 한편으로는 강한 강도가 좋을 수도 있다. 시편에 나오는 다윗을 생각해 보라. 반면에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육체적 표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임재를 접한 선지자는 엎드린다. 이것은 좋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정치 집회와 록 콘서트에서 기절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우리는 격렬한 감정이 가져다주는 육체적 표현에 너무 큰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표시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다. 에드워즈가 정한 법칙은 다음과 같다. 불신자에게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표시는 신뢰할 수 없다. 마귀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을 어떻게 믿겠는가? 우리는 결코 믿을 수 없는 표시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그런 표시에 의지해서도 안 된다. 6. 믿을 수 있는 표시열두 가지의 믿을 수 있는 표시에는 뚜렷한 진행 과정이 있으며 또한 몇몇을 모아 묶을 수도 있다. 지난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나는 그것들을 나무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네 가지 표시는 뿌리이다. 그것들은 나무의 기초가 되지만 종종 숨겨져 있고 식별하기 어렵다(특히 다른 사람들 속에서). 참된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갖게 하는, 우리 영혼에 새로운 기초를 놓는 성령의 구원 사역의 결과이다. 이런 새로운 감각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가지는 도덕적 탁월함과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지식을 낳는 하나님의 거룩함 속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책을 읽고 꿀이 달다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꿀의 단맛을 맛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을 아는 것(악마도 그 사실은 안다)과 그의 거룩하심이 주는 달콤함과 기쁨을 맛보아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거듭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더 깊고 체험적인 지식이며, 또한 진정한 종교적 감정을 느끼는 데에 필수적이다. 뿌리에서 우리는 표시 5에서 7까지 해당하는 줄기로 이동한다. 진정한 종교적 감정은 이러한 표시가 “따라오게” 되어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맛보았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실재하심을 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 속 영원한 죄가 더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죄를 후회하는 게 아니다. 죄가 역겹고 혐오스럽기 때문에 미워한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 우리의 본성까지도 변화된다. 줄기에서 나오면 8에서 11까지의 표시로 이동하게 되고, 각각의 표시가 훨씬 더 잘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새로운 본성은 예수님의 사랑과 온유와 자비를 반영한다.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양심은 남아있는 죄에 민감해진다. 거룩함의 추구는 포괄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남에게 소홀히 하면서 어떤 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모든 열매를 전반적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더 중요한 것은, 단지 지금까지의 발전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과 은혜를 더 많이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점이다. 에드워즈는 마지막 표시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른 모든 표시가 향하는 곳이 바로 이 표시이다. 가지에 달린 마지막 표시는 바로 거룩한 삶의 열매이다. 우리는 열매를 통해 어떤 나무인지를 안다. 이 경우에 마지막 표시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에 대한 보편적이고 진지하며 끈기 있는 순종이다. 보편적이라는 게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순종과 관련해 금지된 영역이 없으며, 순종의 예외로 두는 그 어떤 죄도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서 주님께 순종하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내가 맛본 은혜의 열매, 나를 안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은혜의 열매를 드러낸다. 7. 에드워즈의 통찰을 테스트하기에드워즈가 특별히 강조한 특정 표시에 관해서 그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내 경험에 따르면 여섯 번째 표시와 관련해서 겸손에 대한 그의 조언이 항상 도움이 되는지를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그가 말하는 기본적인 요점, 그러니까 우리가 느끼는 법적 굴욕(우리가 벌을 받고 있기 때문에 슬픔을 느낌)과 복음주의적 굴욕(우리가 심각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괴로워함)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내가 교만하지 않은지 또는 내가 겸손하다는 사실 때문에 설혹 도리어 교만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평가하라는 에드워즈의 권고는 사람을 지치게 할 수 있다. 자기 성찰이라는 러닝머신에 갇히게 될지도 모를 뿐 아니라, 내면만 관찰하다가 지칠 수도 있다. 이건 단지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 모든 지혜와 성경적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 또한 하나의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글도 성경으로 검증해야 하며 그가 권유하는 적용 사항도 지혜를 활용해 적절하게 평가해야 한다. 8. 몸과 환경, 그리고 죄표시와 관련해 우리의 감정과 확신을 방해하는 것으로 에드워즈가 몸과 환경, 그리고 죄를 지목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몸의 변화는 우리의 상상력과 마음과 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우울증(에드워즈가 멜랑콜리라고 부르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며,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얼마든지 영향을 주는 신체적 측면이다. 실제로 에드워즈는 사탄이 이러한 육체적 약점을 이용하여 지치고 우울한 성도를 공격한다고 말한다. 즉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위한 완전한 처방에는 영적 조언뿐 아니라 육체적 도움이 모두 포함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에드워즈가 주로 초점을 맞춘 것은 영적인 차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확실히 육체적 차원이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3부 시작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라.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상황과 죄가 우리에게서 구원의 확신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받은 은혜가 적고 깊은 죄에 빠진 사람이라면 구원의 확신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확신이 없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전심으로 그분을 찾게 하려는 하나님의 자비이다. 은혜가 낮은 자의 눈에는 하나님이 마치 먹구름에 덮여 숨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더군다나 은혜가 낮은 사람은 영적인 시력마저 흐릿하다. 따라서 먹구름과 흐릿한 눈이 뒤섞일 때 결코 하나님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없다. 이 책이 제시하는 그 어떤 처방도 그런 경우가 가져다주는 좌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는 없다. 유일한 치료법은 오로지 새로운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향하고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9. 확신을 구함이제 구원의 확신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에드워즈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진술이 이어진다. 은혜와 확신이 부족해서 내가 정말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의심되고 두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이 책을 읽고 황폐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에드워즈가 이 책에서 한 다음 말을 기억하라.각 사람이 죄악됨을 멸하고 은혜가 자라가며, 그 은혜를 활발하게 행사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확신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록 자기 성찰이라는 것이 대단히 유용하고 중요한 의무이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의무이지만, 그것은 결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얻은 구원으로 만족하게 하는 주된 수단이 아닙니다. 확신은 자기 성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얻어져야 합니다다(신앙감정론, 195).확신이 자라는 길은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를 최대한 사용하는 것이다. 확신은 내면을 들여다봄으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또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감으로 생기는 것이다. 10. 겸손한 자세이 마지막 항목은 책에 관해서가 아니라 목회적 조언에 가깝다. 겸손하게 이 책을 읽으라. 다른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평가하려는 마음으로 읽지 말라. 사실 에드워즈도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진정성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는 판단할 수 있겠지만, 타인의 진정한 거듭남 여부를 확실하게 아는 길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마음을 볼 수 없다. 결국 주님만이 당신의 양을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진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이 책은 우리의 시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함으로써 그러한 확신에 이바지한다. 이 책을 겸손하게 주의 깊고 또 현명하게 읽는다면,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혜로운 목회자 또는 상담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읽는다면, 이 책은 단지 파괴적인 것 이상이 될 수 있다.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선물을 진정으로 깨닫고 소중히 여기도록 인도하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다.원제: Religious Affections: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조나단에드워즈
신앙감정론
대각성운동
구원의확신
확신의표시
우울증
감정의의미
구원의표시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었다?
by Greg Lanier
2022-08-23
하나님이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이)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울”이라고 부르는 중요한 인물의 이름을 바꾸셨다는 ‘접착성 강한’ 오해를 나는 지금도 계속 마주하고 있다.“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최근에 들은 설교의 한 대목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한 학생이 시험 답안지에 “복음의 주요 메신저는 바울로 개명된 사울”이라고 썼다. 한 교인은 나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잠깐만요.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지 않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문제는 이런 개념이 널리 퍼져 있지만 맞지 않다는 것이다. 나도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인기 있지만, 성경에는 근거가 없다이런 생각이 어디서 유래하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몇몇 부지런한 사람들이 연구한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이 ‘바울로 개명된 사울’ 개념은 구약의 이야기를 위대한 사도의 이야기로 영리하게 다시 읽은 데서 연유한 것 같다.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구약의 두 족장의 이름을 분명히 바꾸셨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창 17:5), 야곱을 이스라엘로(창 32:28). 이 이야기를 기초로 해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사도행전 9장)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 같다.그러나 성경에는 사울-바울 이름 변경을 지지하는 증거가 없다. 다음은 이 인기 있는 개념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여섯 가지 성경의 증거다.1.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신다(행 9:4).이 이야기에는 예수님이 그때부터 사울의 이름을 바꾸셨다는 어떤 내용도 없다. [자신이 사도가 된 내력을 밝히는] 갈라디아서 1:15-17에서 바울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으로 구별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2. 아나니아는 회심한 그를 “사울”이라고 부른다(행 9:17).이름 변경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이, 그리스도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나타나신 이후의 그를 여전히 “사울”이라고 부른다.3. 성령이 첫 선교 여행을 앞둔 그를 “사울”이라고 부르신다.사도행전 13:2은 이렇게 전한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있다.’” 앞서 9장에서 성삼위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시며 이름을 바꾸셨다면, 여기 13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번째 위격께서 굳이 그를 “박해자” 시절의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건 정말 어색한 일이다. 4. 회심 후에도 그는 열한 번이나 더 “사울”이라고 불린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셨다면 이건 어색한 호칭이다.5. 사도행전에서 “사울”에서 “바울”로 분명하게 바뀌는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 선교 여행을 떠난 후에 한 번만 나온다.이 미묘한 변화는 사도행전 13:13에서 일어난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건너갔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의 이름을 “바꾸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누가이다.6. 사울과 바울은 줄곧 같은 사람의 두 가지 이름이었다.사도행전 13:9이 핵심이다. “그래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술사를 노려보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회심한 사람은 “그리스도인 바울로 개명된 박해자 사울”이 아니라 사울과 바울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사울과 바울은 회심 전과 후에 모두 사용된 이중 이름이다.바울은 사울이다밝혀진 바와 같이, “사울”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초대 왕이자 사울/바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에서 유래한 이름으로(빌 3:5), 단순히 이 사람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일반적인 코이네 이름인 “바울”은 라틴 성씨 파울루스에서 나온 그의 그리스어 이름이다.다소에서 태어났지만(행 21:39)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바리새파 교육을 받은 사람(갈 1:14; 빌 3:5-6)인 그에게 이는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영어권 세계로 이주한 많은 이민자가 민족 이름에 영어식 이름을 더하여 사용하는 것처럼, 바울 시대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많은 유대인이 유대인/히브리어 이름과 헬레니즘/그리스 이름을 같이 사용했다.스모킹 건은 여기 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 때에 히브리 말로 나에게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하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행 26:14). 바울은 예수께서 자신을 히브리 이름으로 부르셨다고 주의를 기울여 설명하면서도, 지금은 그 이름이 버려졌다고는 말하지 않는다.사울/바울이 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방인 중심의 사역을 시작할 때(사도행전 13:9에서 시작),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그를 헬라어 이름으로만 부르기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바울”로 언급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예루살렘에도 헬라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누가는 사도행전의 더 넓은 주제(예: 1:8)를 고려하면서, 13장 즈음에서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을 바꾸어 주제를 제시한 것이다. 결국 그 교회의 핵심이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에서 로마와 같은 그리스 중심의 “땅끝”으로 옮겨 가고 있다.이 사도만 두 가지 이름을 가진 것도 아니다. 신약에 나오는 다른 몇몇 인물들도 두 가지 이름이 있다. 요셉은 나중에 바나바라고도 불린다(행 4:36). 시므온은 니게르라고도 불린다(행 13:1); 도마는 디두모라고도 불린다(요 21:2). 이들이 전부도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까닭그렇다면 이 문제를 명확히 따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울(나쁜 사람)에서 바울(좋은 사람)로 이름이 바뀌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가치 있는 실례라면, 왜 내가 그 사람의 앞길에 비가 내리기를 바라겠는가?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신학적 아이디어는 매력적이고 유용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박해자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 예수님이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다는 개념에서 강력한 적용점을 끌어내기란 정말 수월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들 설교하려고 할 것이다. 성경에서 이름과 정체성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이들로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성경에 없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설교가 재미없어지더라도 말이다.이러한 원칙은 이 상황을 넘어서도 물론 적용되어야 한다. 또 다른 흔한 오류는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이 구유 앞에 함께 있는 그림이다. 동방 박사들은 같은 시간에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건 몇 달 후였다. 우리는 잘못된 본문에서 올바른 교리를 도출할 수도 있고, 올바른 본문에서 잘못된 교리를 도출할 수도 있다.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고 가능한 한, 모든 영역에서 말씀에 충실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경에서 끌어낸 것으로 보였는데 사실은 성경과 무관한 적용이었다는 걸 아는 순간―그것이 아무리 유용하거나 멋진 적용이라 하더라도―자신이 내내 속았다고 생각하게 될 터이고, 그러면 정말 믿음이 약해질 수도 있다.원제: No, ‘Saul the Persecutor’ Did Not Become ‘Paul the Apost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사울과바울
바울의회심
베드로의 장모의 눈으로 보는 예수
by Rebecca McLaughlin
2022-08-22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만나신 사람들은 대부분 익명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많은 여성 역시 익명이라는 사실에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사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남자들을 고쳐주신 이야기들 가운데서도 이름이 나오는 이야기는 다음 사례들이 전부다: 마가가 유일하게 이름을 밝히는 맹인 바디매오(막 10:46), 요한이 유일하게 이름을 밝히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요 18:10), 그리고 나사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여성들도 한 명을 빼고는 모두 그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신원이 드러난 그 여인도 이름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여인의 신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그녀가 예수님의 한 제자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 뿐이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더러운 귀신 들린 남자가 소리쳤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막 1:24). 예수님이 그 귀신을 꾸짖으신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그 악한 귀신이 그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그 남자에게서 떠나간다. 이 사건 때문에 온 갈릴리에 예수님의 명성이 퍼졌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다.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정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막 1:29-31).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사람들은 대부분 낯선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은 익히 아시고 계셨을 사람을 고치신다. 상세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 그 여인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고치시자마자 그녀는 시중을 든다. 우리 모두를 위한 모범마태, 마가, 누가 모두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우리는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예수께서 치유를 베푸신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이 여성을 유독 조명을 받는 것일까? 여성이 시중을 들었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복음서 이야기 전체의 틀 안에서 읽는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가 그저 한 여성의 위상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여인, 곧 베드로의 장모를 가리키는 ‘섬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디아코네오)는 예수님이 광야의 유혹을 물리치셨을 때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다고 했을 때도 사용된다(막 1:13; 마 4:11). 이 동사는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고 있을 때, 시중을 드는 베다니의 마르다를 묘사할 때도 등장한다.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셨다(눅 10:38-42).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이 동사가 예수님을 묘사할 때도 쓰인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 10:43-45). 베드로의 장모가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보인 반응은 단지 여성들을 위한 모범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모범이다. 예수님의 나라에서 섬김은 여성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의 일이다.스스로 섬기는 이 여성의 눈을 통해서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우리를 손수 이끄시어 높이 세우시는 분이다.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우리를 만지시기만 하면 바로 우리의 고통을 들어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그를 섬길 힘을 가지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다. 1662년 성공회 공동기도서는 하나님을 “그의 섬김은 완벽한 자유”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그 본을 본다.우리는 현대인의 삶에서 섬김과 자유가 상반되는 걸 너무나 자주 목격한다. 그러나 2천 년 전에 베드로의 장모는 현대 심리학자들이 최근에야 발견하게 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 인간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길 때 번성한다. 끊임없이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자유”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육체의 치유와 영혼의 치유마태, 마가, 누가에서, 베드로의 장모와 악마에게 사로잡힌 남자의 치유 사건은 수많은 병자와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예수께로 밀려오는 계기가 되었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마을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또 병자를 모두 고쳐 주셨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여기서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치유가 함께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주께서 어떻게 히브리 성경을 성취하시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마태가 예수님의 행동들을 구약의 예언으로 거슬러 올라가 함께 묶는 것을 본다. 이 문맥에서 인용된 구약의 예언은 이것이다.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사 53:4-5).“고통”(grief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에는 “병”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그리고 “슬픔”(sorrow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에는 “고통”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여기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의 신비를 본다. 그는 하나님 백성의 병과 죄와 고통을 대신 지신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육체와 영혼이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실 때, 그는 그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하신다. 부활의 삶예수님이 우주적 진리의 위대한 교사로 자주 묘사되지만 온 우주의 위대한 하나님으로는 자주 묘사되지 않듯이, 사람들은 종종 우리의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일을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벌을 받으시는 그의 일과 분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마태는 우리가 이렇게 쐐기를 박는 걸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형벌을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의 다가오는 새 창조로,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여셨다(계 21:4).우리는 지금 여기서 죄와 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열쇠 구멍을 통해 완전히 새롭고 다른 세상을, 예수님과 그의 부활의 삶이 죄와 고통을 영원히 없애버리는 곳을 들여다보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주러 오신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또한 그의 삶을 우리와 함께 나누러 오셨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다. 그때 그녀는 예수님의 부활의 삶을 조금 맛본다. 그리고 그렇게 맛본 그 부활의 삶으로 그녀는 섬긴다.원제: Jesus Through Peter’s Mother-in-Law’s Ey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고난받는종
섬감과자유
섬김
부활의삶
고통
천국
처음
이전
11
페이지
12
페이지
13
페이지
열린
14
페이지
1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