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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에게서 예수님을 보는 여섯 가지 방법
by Jonathan J. Routley
2021-07-24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대한 서사적 기록이 담긴 여호수아서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경이다. 놀라운 기적이 많이 담긴 이 성경은 강력하고, 그렇기에 읽는 이의 머리에 오래 남는다. 요단 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벽이 무너지며 해와 달이 멈추는 기적이 담겨있다. 여호수아는 주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하여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경건한 방식을 잘 보여주는 위대한 신앙 선배이다.여호수아서의 역사적 서사 안에는 여호수아의 탁월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들여다보도록 암시하는 몇 가지 측면이 들어있다. 여기 여섯 가지를 소개한다. 1. 주님의 율법에 순종한 지도자여호수아서 전체에 걸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따르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며 그것을 묵상하고 그 율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신다(수 1:6-8). 그는 주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경우에 군사적으로 성공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 이보다 더 위대한 방식으로, 예수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셨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기를 기뻐하셨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전부였으며, 그의 목적이자 또한 사명이었다. 인간에 불과한 여호수아가 주님의 말씀을 잘 지켰다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은 얼마나 탁월하게 율법을 잘 지키셨겠는가?2. 죄인을 구하는 구속자(Deliverer)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전투에서 라합에게 지켜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잊거나 무시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라합이 구한 정탐꾼으로 말마암아 그녀를 구하게 함으로 그 약속을 지킨다(수 6:22-23). 라합의 난잡한 삶은 여호수아에게 있어서, 그가 그녀와 그녀 집안 전체를 “구하는 것” 데에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수 6:25).여리고성과 아이성의 멸망 후, 이스라엘을 속였던 기브온의 변덕스러운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구원을 부르짖었다(수 10:6). 이스라엘 백성은 불과 얼마 전에 이웃 백성에게 속았던 경험이 있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이중성을 이유로 기브온 백성의 처형을 원했다(수 9:18-21).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그가 했던 약속에 충실했고 남부 가나안의 왕들의 연합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했다. 라합과 기브온 백성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다 여호수아에 의해 구출되었다.예수님은 또한 은혜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도 구원을 베푸신다. 바울은 로마서 5장 6-8절에서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삶과 행동이 구원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이들에게조차 구원을 가져다주신다. 3. 적을 정복한 전사여호수아는 종종 가나안 군대를 멸망시킨 전사 또는 정복자로 기억된다. 아이성 전투에서 그는 성을 불태우고 그 왕을 처형하는 공적을 세웠다 (수 8:28-29). 그는 남부 가나안 연합군 왕들을 처형했고(수 10:26), 북쪽에서는 하솔성을 불태웠다(수 11:11). 여호수아의 평생에 걸쳐서 감히 그를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수 1:5)은 그의 정복 기간 내내 진리였음이 증명되었다. 예수님 또한 신약성경에서 특별히 영적인 영역과 관련하여 종종 승리하는 전사로 묘사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천사 세계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골 2:15).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음을 물리치셨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그리고 여호수아가 원수의 목을 밟았던 것처럼(수 10:24), 미래에 그리스도께서도 재림하셔서 모든 통치와 권위를 그의 발 아래 두실 것이다(고전 15:25).4.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여호수아는 정복 과정에서 여러 번 이스라엘의 선지자 역할을 한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말함으로 백성들에게 신성한 계시를 전달한다(참조, 수 3:7-8, 9-13). 그는 여러 세기 후에 벧엘의 히엘에게 제정되어(왕상 16:34) 여리고 성을 재건할 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으로 저주를 약속한다(수 6:26). 가장 극적인 장면은 여호수아가 해와 달이 하늘에 머물도록 명령하고, 그 시점에 맞춰서 이스라엘 백성은 적들을 추격할 때이다(수 10:12-14).예수님은 놀라울 정도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역할을 감당하신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유대 민족에게 말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으로서, 즉 하나님의 참된 성품과 본성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자로서도 말씀하신다(요 1:18). 예수님의 사역 곳곳에는 예언적 예언이 뿌려져 있다(요 2:19; 마 20:18-19; 24:2). 그가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여호수아가 원형인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전통 안에 예수님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5. 그의 백성과 함께 유업을 나누는 승리자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기업으로 분할한 것은 정복 이야기의 종말론적 후속편으로 비췰 수도 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런 결말은 이집트에서 노예가 한참 전부터 그들이 추구했던 행복한 결과이다. 4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오고 있다(창 15:18, 17:8). 그리고 승리를 거둔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각각의 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에 제사장 엘르아살 옆에 섰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기업이 실현되었다(참조, 수 21:43-45).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후에 자기 백성에게 큰 기업을 주신다. 그 기업의 일부가 이미 신자에게 제공되었다. 죄의 용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화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됨, 그리고 내주하는 성령이라는 기업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언약적 약속의 상속자가 되었다(갈 3:29).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때에 이르러서 완전한 형태로 계시될 상속에는 종말론적인 측면도 들어있다. 여호수아가 그의 백성에게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주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스러운 새 창조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는 영원한 고향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요 14:1-2; 계 21-22).6. 주님의 뜻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종여호수아서의 핵심 질문은 모세의 후계자가 과연 모세의 명성과 유산에 부응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여호수아에게는 실패의 순간이 있었지만, 그의 생애를 놓고 내리는 최종 분석의 결과는 그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수 24:29).여호수아의 비문에 그의 승리나 성공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비문이 드러내는 것은 오로지 하나, 그가 주님의 충성스런 종이었다는 사실 뿐이다. 바로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떠올리게 된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땅에 종으로 오셨다(막 10:45).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히 살아가신 하나님의 종이다. 원제: 6 Ways We See Jesus in Joshu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신학
구약
종되신예수
여호수아
지도자
신앙선배
구속자
정복자
선지자
진실된종
오웬이 정리해 준 복음 전파의 의미
by J. I. Packer
2021-07-19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 소천 1주기를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J. I. 패커의 유명한 에세이’를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부 ‘오웬의 성경신학적 탐구와 칼빈주의’에서 이어집니다.복음 전파가 무엇인지, 그 개념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다.첫 번째로, 우리는 오웬의 옛 복음이 결코 현대의 복음보다 덜 완전하거나 덜 자유로운 구원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충분한 믿음의 근거(그리스도의 충분함과 하나님의 약속)와 믿음에 대한 설득력 있는 동기(죄인의 필요와 구속주의 초대라고 볼 수 있는 창조주의 명령)를 제시한다. 새 복음은 여기에서 보편적 구속을 주장함으로써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 확실히 옛 복음에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체질상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는, 그런 식의 값싼 감상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또한 인간의 불신으로 인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받고 당황하는 굴욕적인 구세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실망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식의 비참한 호소에도 탐닉하지 않는다. 옛 복음 속에는 현대 강단이 전파하는 가엾은 구세주와 한심한 하나님이 존재한 적이 없다. 옛 복음이 전파한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필요하지, 하나님에게 인간이 필요하다는(현대의 거짓말) 게 아니었다. 옛 복음은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동정하라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동정조차 받을 가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동정이 필요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가르쳤다. 옛 복음은 스스로가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위엄과 주권을 결코 잊지 않았고 동시에 그의 자유로운 전능을 가리는 모든 표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이 옛 복음의 설교자가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초대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제한했다는 것을 의미할까? 전혀 아니다. 사실상, 그들은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비를 제대로 인식했기에 오히려 새 복음을 전파하는 설교자 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위치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초대는 모든 죄인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의 본성의 필연성, 따라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 어떤 메시지보다도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굳이 인간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타락한 인류를 얼마든지 자비로움 없이 영원히 추방하셨을 수도 있는 거룩하신 창조주께서 실제로 그들 중 일부를 구속하기로 선택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아들이 기꺼이 죽음을 겪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지옥까지 내려가셨다는 사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불경건한 사람을 향해 회개하라고 그리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생명을 선택하라는 자비로운 초대의 말씀을 믿으라는 명령을 촉구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옛 복음의 전파가 중심으로 삼은 메시지의 핵심이다. 그 어느 것도 당연하게 여길 수 없기에, 모든 것이 훌륭하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놀라운 것은 복음 진리가 전파되는 모든 거룩한 땅에서 가장 성스러운 자리에 계신 ‘주 그리스도’(오웬이 부르기를 좋아하는 형태처럼)가 죄인들을 향해 내려와서 영혼의 안식을 찾으라며 반복해서 거저 주시는 초청이다. 다른 이도 아닌 전능하신 왕이 이 초대를 주시다는 것이 바로 이 초대가 영광스런 이유이며, 그가 여전히 죄인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신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주요 부분이다. 그리고 설교자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은 복음 사역의 영광이며,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죄인에게 개인적으로 왕의 초청을 전하고 그들 모두를 불러서 돌이켜 살도록 촉구하는 것이 그가 받은 임무이다. 오웬 자신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구절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명, 구원, 자비, 은혜, 평화, 영원한 구원을 위해 그에게 나아오도록 당신을 초대하고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겸손과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초대와 부름에 대한 수많은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길을 잃었으나 확신을 갖게 된 죄인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적합하다는 축복된 격려로도 가득합니다. … 이런 말씀의 선언과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죄인 앞에 서서 그들을 부르고 초대하고 격려하십니다.이것은 그가 지금 여러분에게 하는 말씀의 일부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멸망하겠느냐?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느냐? 다가오는 진노의 날에 네 마음이 견딜 수 있겠느냐? 네 손이 감히 강할 수 있겠느냐? … 나를 보고 구원을 받으라.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의 모든 죄와 슬픔과 두려움과 짐을 덜어 주고 너희 영혼에 안식을 주리라. 자, 내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미루는 모든 일을, 모든 지연을 제쳐두라. 더 이상 나를 거부하지 마라. 영원이 지금 문 앞에 있으니, 마치 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멸망할 것처럼 나를 미워하지 마라. 이와 비슷하게 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의 영혼에 대하여 끊임없이 선언하고 선포하고 간청하고 촉구하십니다. … 마치 그가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 가운데 서서, 여러분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는 말씀을 전파할 때 그렇게 하십니다. … 그는 복음의 일꾼들을 세워 여러분 앞에 나타나게 하시고 자기를 대신하여 여러분을 대하게 하시며 자기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진 초청장을 그 분이 주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고후 19, 20).이러한 초대는 보편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초대하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온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초대는 이론이 아닌 진짜이다. 그리스도는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로 자기 자신을 바치고, 진실로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구원자가 되신다. 속죄의 범위에 관한 문제는 전도 설교에 필요하지 않다. 전해야 할 메시지는 오로지 하나, 죄인을 위해 죽으신 주권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금 이 순간 죄인들을 당신께로 거저 초청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명령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평화를 약속하신다. 이러한 초대는 실로 놀랍도록 은혜롭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자신들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이런 초대를 멸시하고 거부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신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초대하신다. “나에게로 오라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그의 말씀은 결코 취소될 수 없으면 이 세상에서 쉼 없이 전파되어야 한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모든 백성의 구원을 보장한 그분은 완전한 구세주로서 세계 도처에서 선포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그를 믿도록 초대되고 또 강권함을 받고 있다. 옛 복음의 전도는 바로 이런 이 세 가지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진행되는 복음주의적 설교를 알미니안주의자의 설교와 비교해서 빈약하고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가정이다. 번연(John Bunyan)의 설교(오웬이 특히 좋아한 설교)나 휫필드 또는 스펄전과 같은 옛 복음의 가치를 아는 설교자들의 설교 본문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예외없이 그들이 구세주를 내세우고 있고, 또한 죄인들을 향해 그에게로 나오라고, 소위 말하는 개신교 강단의 설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함과 강렬함 그리고 역동성을 가지고 초대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자세한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것이다. 그들의 설교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통해 상한 마음까지도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 뿐 아니라, 완고한 마음을 녹이는 따뜻함까지 겸비해 오늘날 독자까지도 움직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 데에는 다름 아니라 설교 메시지의 핵심에 은혜가 거저라는 사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굳이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선택을 하실 필요가 없었고, 또한 그의 아들을 죽게 하실 이유도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그 신성한 사랑의 차원이 가지는 가치의 채 절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대속적 저주를 짊어지실 필요도 없었고, 그가 지금도 행하시는 것처럼 무차별적으로 죄인들을 초대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온전히 그분의 자유로운 목적에서 비롯한 당신의 은혜를 통해서 이런 역사를 이루신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옛 복음의 설교자들은 그런 사실을 강조했고, 바로 그런 강조가 그들의 복음적 설교를 지금까지도 다른 설교와 구분되는 클래식으로 만든 것이다. 피상적이고 또 깊은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학을 소유한 다른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복음 설교에서 중점을 두는 사실은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나 평화 또는 능력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런 죄인이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함”으로써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도록 돕는 방법론이다. 비록 이러한 유형의 전도가 너무 인간 중심적이고 경건주의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들의 빈약한 설교를 통해서도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필연적으로) 칼빈주의자와 웨슬리와 같은 이에게 남겨진 것은 칼빈주의적 사고에 빠지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값없는 사랑, 인간이 되신 겸손과 오래 참음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자비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복음을 설교하는 가장 성경적이고 교화적인 방법이다. 죄인을 향한 복음 초대에서 핵심은 이것이다. 은혜가 흘러나오는 자유로운 자비의 전능성에 온전히 무게를 두는 것 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방법이 없으며, 또한 그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믿음을 일깨우고 확증하는 방법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때때로 옛 복음을 선포한 설교자들만이 마치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계시를 제대로 선포할 수 있는 지위를 가졌던 유일한 사람들처럼 보일 정도이다. 두 번째로 옛 복음은 새 복음이 잃고 있는 가치를 보호한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편적 구속과 보편적 신성한 구원의 목적을 주장하는 새 복음이 아버지와 아들이 구원에 있어서 주권자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은혜와 십자가를 값싸게 만들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렇기에 새 복음에 따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할 수 있거나 또는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이미 다 하셨고, 이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지 여부는 결국 각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는 두 가지 불행한 결과가 담겨있다. 첫 번째로 그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복음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초대가 가지는 의미를 오해하도록 우리를 강요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복음을 전능한 왕이 보여주는 부드러운 인내의 표현이 아니라 무력한 욕망이 표출하는 한심한 탄원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늘 보좌에 즉위하신 주님이 갑자기 나약하고 헛된 모습으로 변하더니 결국은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열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의 문을 쓸쓸히 두드리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신약이 드러내는 그리스도에 대한 수치스러운 불명예이다. 두 번째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견해는 사실상 중요한 결정에 관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부인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게 하고,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한 결론을 죄가 이끄는 대로 내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나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고, 나의 운명과 내 영혼의 지배자도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주와 맺는 종교적 관계의 기초 자체를 훼손한다. 그렇기에 새 복음을 통해서 개종한 사람들이 특히나 불경하고 비종교적이라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 복음의 가르침이 가져다준 자연스러운 경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복음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전혀 다른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할 때 옛 복음은 새 복음이 특히 무시하고 있는 지점, 즉 죄인들이 마음의 회복 없이는 율법에 순종할 수 없는 것처럼 복음에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선언할 때, 옛 복음은 그리스도를 회심의 저자이자 주요한 대리인으로 선포한다. 또한 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분이 성령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한다. 따라서 옛 복음은 메시지를 적용할 때 믿음이 사람의 의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믿음이 결코 사람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주셔야 한다는 사실도 같이 강조한다. 옛 복음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와야 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끌지 않으시면 아예 올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선언한다. 따라서 옛 복음은 복음을 적용할 때 자기 확신을 무너뜨리고 죄인들에게 그들의 구원이 그들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을 확신시키며, 그들의 의로움도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그럼에도 죄인들이 절망에 빠지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구원이 주권적인 구주의 영광스러운 은혜에 달려있음을 올바르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 복음의 설교자가 현재 유행하는 구호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단하라”는 식으로 복음을 적용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게다가 이 구호는 잘못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 구호는 구원을 마치 선거에 출마한 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독립적인 유권자의 판단만을 기다라는 후보자처럼 오해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투표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의 구세주로 임명하지 않는다. 게다가 예수님은 설교자들이 그를 대신하여 운동을 하도록 방치하는 수동적인 존재도 아니시다. 전도를 이런 식으로, 일종의 선거운동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구호는 회개와 믿음에 필수적인 바로 그것, 즉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나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자기 부인을 모호하게 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이라는 게 도대체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인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죄에서 돌이키는 것인지 또는 일종의 자기 노력을 말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죄에서 돌이키고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것보다는 이 구호가 훨씬 쉬운 것처럼 들린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복음이 실제로 죄인에게 요구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심어주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국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다지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옛 복음은 이렇게 대답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는 추가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심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독선과 자신감을 버리고 용서와 평화를 위해 전적으로 그에게 당신 자신을 던지라. 또한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태생적인 적대감과 반항을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이 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옛 복음은 이렇게 대답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에게 말하고, 또 그리스도께 부르짖으라. 당신의 죄와 회개하지 않은 것과, 또 불신앙을 고백하고 그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라. 참된 회개와 확고한 믿음으로 새 마음을 달라고 구하라. 불신앙의 악한 마음을 제거하고 당신 안에 하나님의 새로운 법을 기록해 달라고 간구하고, 이후로 그에게서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에게 의지하고 최선을 다해 그를 신뢰하고 더 철저하게 돌이키고 또 신뢰하는 은혜를 위해 기도하라. 그분께로 가까이 가려고 애쓰는 동시에 당신에게로 가까이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은혜의 수단을 기대하며 또 활용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기도하고, 읽고, 듣고, 예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하며, 자신이 참으로 변화된 존재이고, 회개한 신자이며, 주님이 원하는 새 마음이 내 속에 담겼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없이 알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라. 이 조언의 강조점은 무엇보다 첫 번째 단계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불러야 할 필요성에 있다.양심이 당신을 머뭇거리게 하거나허황된 바람을 갖지 말게 하라. 그분이 요구하는 전부는 당신이 그분에 대한 필요를 더 느끼는 것이다.그러므로 당신이 나아졌다고 생각할 때까지 행동을 미뤄서는 안 된다. 정직하게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당신을 더 낫게 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께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을 바치라. 그리고 성경이 약속한 대로 그의 빛이 당신의 영혼에 떠오를 때까지 그를 기다리라.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것 보다 더 못한 것은 복음에 대한 불순종이다. 이것이 바로 옛 복음이 청중을 부르는 영혼의 훈련이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이것이 그들의 외침이 되어야 한다. 복음이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라는 성경의 초청이 제대로 설명되고 적용될 때, 사실상 설교자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확신 속에서 옛 복음이 선포될 때, 결코 복음은 수동적으로 앉아서 사람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 대신 전능하신 분은 말씀과 함께 일하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고 또한 그의 백성이 자신을 믿도록 강하게 인도하신다. 그러나 새 복음의 전파는 그리스도가 가만히 서 있는 동안 사람만 움직이면 된다는 식으로, 따라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는 과업으로 종종 묘사된다. 그러나 옛 복음을 전파하는 과업에 대한 적절한 묘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람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눈앞에 두고 있으며 동시에 자신들이 선포하는 전능하신 구세주가 지금 그들의 설교와 심방 등을 통해 자비로 그들을 자신에게 이끄느라 바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오웬이 우리에게 전파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 옛 복음이다. 곧 믿음과 구원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복음이다. 그것은 오웬의 원칙에 따라 전파될 수 있는 유일한 복음이지만, 그 단맛을 맛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복음을 찾지 않게 된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믿고 전파하는 문제에 있어서 예레미야의 말은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오웬이 우리에게 금지한 것처럼, 유행하는 현대의 대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를 금지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나, 결코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할 말이 여전히 많이 남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면 서론의 한계를 뛰어넘을 것이다. 앞선 내용은 단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에 대한 오웬의 분석에 진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오웬의 작업에 대한 몇 마디논문 자체에 대한 몇 가지 설명만 추가하도록 하자. 이것은 오웬의 두 번째 주요 작품이자 그의 첫 번째 걸작이다(오웬이 26세였을 때인 1642년에 출판된 그의 전작인 ‘알미니안주의 연구(A Display of Arminianism)’는 본격적인 연구 논문이라기 보다는 유능한 견습 작업에 가깝다).‘죽음의 죽음(The Death of Death)’은 상세한 설명과 면밀한 논증으로 구성된 견고한 책이며 오웬이 강조했듯이 독자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대충 봐서는 결코 많은 것을 얻을 수 없다. (“독자들이여…. 만약에 당신이 이 가식의 시대에 단지 간판이나 제목을 응시하는 사람이고 그냥 극장에 가는 것처럼 편하게 이 책을 읽으려고 생각한다면, 그냥 나가라. 가서 당신에게 어울리는 오락거리를 찾아라. 안녕!!!”) 오웬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이야말로 실로 열심히 노력한 각고의 산물이기에 독자에게 열심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칠 년이 넘는 산고의 노력 끝에 나온 결과물… 이 주제에 관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내가 확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진지하게 숙독한 결과, 인간의 지식은 언제나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을 출판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쓴 내용에 어떤 의미로 볼 때 결말이 붙어 있다는 사실도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성공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쓴 내용에 대한 확실한 답을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살지 않겠다고 나는 확고하게 결심했다.”) 시간은 그의 낙관주의를 정당화했다.오웬의 적들에 대해서 몇 가지 말할 필요가 있겠다. 그는 보편적 구속이라는 주제가 가진 세 가지 변형에 반대하여 글을 쓰고 있다. 앞서 지적한대로 전통적인 알미니안주의의 주장, 소뮈르(Saumur)의 신학 교수진(대표적인 주창자의 이름을 따라 아미달리즘(Amyraldism)으로 알려진 입장) 그리고 이스트 앵글리아의 평신도 신학자인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주장이다. 이러한 견해 중 두 번째는 소뮈르의 스코틀랜드 교수인 존 카메론(John Cameron)이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두 제자인 아미라우트(Amyraut, Amyraldus)와 테스타드(Testard)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나아가서 아미라우트, 달레(Daillé) 그리고 블로델(Blondel)이 한 편이 되어서 리베트(Rivet), 쉬판하임(Spanheim) 및 마레시우스(Des Maret, Maresius)와 다투는 장기간의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 소뫼르의 입장은 영국의 개혁파 신도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얻었으며, (특히) 어셔(Usher) 주교와 데버넌트(Davenant) 그리고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에 의해 수정된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오웬이 이 글을 썼을 당시 이들 중 그 누구도 인쇄물을 옹호하지 않았다.소뫼르의 입장에 관한 굴드(Goold)의 설명을 인용한다. 하나님의 목적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이 구원의 누림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 소뫼르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구원을 주신다는 선행 작정을 주장하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들의 체계는 가설적 보편주의라고 불렸다. 소뫼르파와 엄격한 알미니안 이론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전자에 의해서 주장되는 택함 받아 영적 회복을 이룬 자들의 확실한 구원 보장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속죄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보편성을 부여하고, 또한 그 점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특정 조건에서 모든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범위 내에 구원이 존재한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 그리고 모든 사람은 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다 준 혜택을 누릴 수 있다.굴드는 이렇게 계속한다. 오웬의 독자들은 이해할 것이다. … 그가 조건부 시스템을 논박하는 데에 있어서 특히나 독특한 예리함과 반복적인 진술을 하는 이유를. … 그런 주장은 그럴듯했다. 그의 주장은 많은 지식인들을 옹호자로 만들었고 또한 외국 교회들도 지지를 보냈다. 더불어 토마스 모어까지도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토마스 에드워즈(Thomas Edwards)는 모어를 “링컨셔, 노퍽, 케임브리지셔에 많은 상처를 준 위대한 종파, 보스톤과 (왕의) 린, 심지어 네덜란드에서까지 유명했으며 어디를 가나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백스터의 설명은 조금 더 친절하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위스비치와 린의 직조공.” (물론 모어의 구속 교리는 실질적으로 백스터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오웬은 모어의 능력에 대해 좋지 않은 견해를 갖고 있으며, 그 사실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모어의 책,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보편성(The Universality of God’s Free Grace in Christ to Mankind)은 1646년에 나왔고(굴드가 말한 것처럼 1643년이 아님), 당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삼 년 안에 그 책에 대한 전체적 또는 부분적인 논쟁 내지 반박을 가하는 비중있는 책이 네 권이나 발간되었다. 토마스 위필드(Thomas Whitfield)가 1646년에 쓴, ‘토마스 모어를 ... 반박함(A Refutation ... of Thomas More), 존 스탈함(John Stalham)이 1647년에 발간한 ‘속죄 변증(Vindiciae Redemptionis)’ 그리고 오바댜 호웨(Obadiah Howe)가 1648년에 쓴, ‘보편주의자 심문받고 유죄 판결 받다(The Universalist Examined and Convicted)’, 그리고 마지막으로 같은 해에 출간된 오웬의 책이다.모어의 설명에는 본질적인 중요성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오웬은 그 책을 당시 영어로 나온 보편적 구속에 대한 가장 완전한 진술로 선택하고 무자비하게 박살낸다. 그러나 현대 독자는 오로지 무어를 논박하기 위해 쓰여진 부분들(I. viii, 그리고 II. iii. IV. Vi의 마지막 페이지)은 건너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스타일에 대해 한마디 할 필요가 있겠다. 오웬의 작품이 무겁고 읽기 어렵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모호한 배열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 번째는 그의 느릿느릿한 문학적 걸음걸이이다. “오웬은 코끼리의 우아함과 단단한 발걸음으로, 때로는 보기 흉한 움직임으로 그것(주제)을 통과합니다.”라고 톰슨은 말한다. 이건 아주 좋게 말한 것이다. 오웬의 산문 대부분은 키케로가 라틴어로 쓴 생각의 일부를 대충 번역한 내용처럼 읽힌다. 그의 글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어떤 서투른 위엄이 서려있다. 그런 위엄은 스톤헨지(Stonehenge)와 같은 고대 유물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독자가 문장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두세 번 반복해서 문장을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노력은 그의 논증을 따라가는 과정을 훨씬 더 힘들게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웬의 어려운 부분이 대개 소리 내서 읽으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모호한 요소는 성경 주해자로서 오웬의 엄격함 때문이다. 그는 마음을 부드럽게 주제로 끌어들이는 광범위한 서론과 흩어져 있는 점들을 작은 공간으로 모으는 포괄적인 요약을 아주 경멸한다. 그의 머리 속에는 분명한 전체 디자인이 들어 있으며, 그는 독자들에게도 그것을 기대한다. 그의 장 구분은 결코 담론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신뢰할만한 조력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주제의 변경은 일반적으로 장 구분으로 표시되지만 오웬은 종종 전혀 생각의 중단을 고려하지 않고 새 장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문학적 비율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않는다. 주제에 부여되는 공간은 상대적 중요성보다는 본질적인 복잡성에 의해 결정되며, 사물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독자 스스로 주목함으로써 기본과 부차적인 문제가 해결되도록 남겨 둔다. 따라서 독자는 책을 공부할 때 연필과 종이를 사용해서 논증의 진행 상황을 그때 그때 기록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추가된 하위 분석이 독자로 하여금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주길 바란다. 오웬의 작품을 읽어서 얻는 보상오웬을 공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오웬 공부와 관련해 투자하는 모든 노동의 가치를 보상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반복해서 말하고 싶다.(1) “독자에게”라는 서신으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거기가 오웬은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와 그 이유를 짧은 나침반의 형태로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2) 논문 전체를 있는 순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하며, 오웬이 지향하는 입장의 성경적 토대를 드러내는 1부와 2부의 내용을 마스터하기 전에 3부와 4부로 건너뛰지 않아야 한다. (3) 단 한 번 읽어서 이 방대한 저작물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제대로 그 가치를 알려면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야 한다.원제: J. I. Packer’s Famous Essay on Christ’s Dea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리
존오웬
복음전파
구세주
복음사역
복음주의자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복음초대
회개
오웬의 성경신학적 탐구와 칼빈주의
by J. I. Packer
2021-07-18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 소천 1주기를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J. I. 패커의 유명한 에세이’를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부 '칼빈주의는 튤립이 아니라 세계관이다'에서 이어집니다.이제 칼빈주의적 구원론의 본질이 명백해진다. 인위적인 기이함도, 지나치게 대담한 논리의 산물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고백은 성경의 진술이자 동시에 믿는 자의 고백이다. 칼빈주의자는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믿는 것을 고백하는 자이자, 또한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신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다. 또한 다른 모든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구원을 위해 간청할 때, 또는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예배의 충동에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구원의 영광을 오로지 구세주에게만 돌리려고 할 때에 조차도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만을 생각하고 말하는 자이다. 그리고 구원의 모든 영광을 오로지 구세주에게만 돌린다. 칼빈주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사람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새겨지는 신학인 반면, 알미니안주의는 지적 연약함이 빚어내는 죄이며, 심지어 중생한 사람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같이 죄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만 알미니안주의가 자연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주의적 사고는 지적인 수준에서 기독교인이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알미니안적 사고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찾는 데에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교회가 논쟁과 거짓 전통에 빠져서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 실패했을 때를 빼고는 항상 일관되게 주장하고 가르쳤던 것이 바로 칼빈주의다. 그렇기에 ‘5대 강령’의 가르침에 대해 인용할 수 있는 과거 교부들의 많은 증언이 중요하다(오웬은 구속에 관해서 몇 가지를 덧붙였다.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존 길(John Gill)이 쓴 ‘하나님와 진리의 원인(Cause of God and Truth)을 참조하라). 그렇기에 이 구원론을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어찌 보면 가장 잘못된 것이다. 이 구원론이 단지 존 칼빈과 도르트 총회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분명하게 말씀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일 뿐 아니라 개신교를 넘어서 가톨릭 기독교 신앙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지난 수세기 동안 수많은 편견을 양산한 ‘혐오스러운 이름’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 성경의 복음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이제는 우리가 시작한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웬의 작업은 분명히 제한 속죄를 옹호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 그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오웬의 책의 목적은 방어가 아니라 건설이다. 그것은 성경적, 신학적 탐구이다. 그 책의 목적은 단순히 복음의 중심 주제인 구세주의 성취에 관해 실제로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는 구속과 화해, 그리고 그 공로와 그로 인한 완성(satisfaction)에 관한 논문”이다. 기존에 있던 도르트 신조와 마찬가지로 오웬이 정말로 대답하려고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기독교인 모두가 복음이란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의 구속 사역의 성격과 범위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성경은 여기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부여하는 목적과 성취는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오웬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주제를 노골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가 반대하는 건 이런 신학이다. “일반 대속에 대한 생각을 퍼뜨리기 …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그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단순한 일회적인 논쟁이 아니라 체계적인 해설 논문이다. 오웬은 문제가 되는 이 논쟁을 활용해서 적절한 순서와 연결을 통해 구원에 관한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후커(Hooker)의 책, ‘교회 정치법(Laws of Ecclesiastical Polity)’에서처럼 그에게 논쟁 자체는 부수적이며 부차적인 관심사이다. 그의 책이 가진 핵심 가치는 오웬이 스스로 구축한 디자인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주장을 수행하기 위해 그 디자인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다.그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매우 단순하다. 오웬은 그의 글을 낳게 한 질문, 즉 속죄의 범위가 단지 그 질문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속죄의 본질에 대한 추가 질문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속죄가 결국에는 멸망해서 지옥에 갈 사람에게까지 제시된다면, 그것은 애초에 모든 이를 구원하겠다는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는, 즉 모든 이의 진정한 구원을 보장하는 거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웬은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래의 종류라고 말한다. 그의 논문 첫 두 권의 내용은 구속주의 죽음이 애초에 의도한 대로 그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사실에 대한 대규모 실증이다. 세 번째 책은 보편적 구속의 가설에 반대하는 일련의 16개 논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논증은 모두 다 한편으로는 성경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멸망하는 자들까지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효과적으로 거부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만약에 애초에 의도된 구원의 범위가 보편적 인류라면, 그 결과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거나(성경은 이를 분명하게 부인하고 있음에도, ‘일반적인 대속’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점을 확인하지 않음) 또는 아버지와 아들이 애초에 가졌던 구원 계획은 완전히 실패한 것,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다. 오웬은 이렇게 말한다. “보편 구원을 주장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완전함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가해를 입힌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는 가치에도 심각한 훼손을 가하고 있다.”오웬의 주장은 이 딜레마에 대한 일련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책에서 오웬은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 부류의 텍스트(그것은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구절, ‘모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구절, 그리고 마치 그가 대신해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구절을 말한다)가 건전한 주석적 원칙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에 결코 신학적 가르침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 그런 구절에 근거하여 보편 구속 이론을 성립하는 신학적 추론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논증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심지어 멸망하는 자들까지 위해 죽으셨다는 주장에 대한 진정한 복음주의적 평가는 오웬의 책에서 계속해서 나온다. 지금까지 이 주장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대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사랑을 무력한 소망으로 축소시키고, 소위 말하는 ‘구원하는’ 은혜(여기서 ‘구원하는’이라는 말 자체도 잘못된 것이다)를 신이 저지른 기념비적 실패로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와 가치를 확대하기는커녕 그리스도를 헛되이 죽게 만들어 그 가치를 훼손한다. 마지막으로, 믿음에 추가적인 격려를 주기는커녕 성경적 확신의 근거 자체를 완전히 파괴한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구원이 영원하다고 추론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결국 나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내가 나중에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게 된다. 따라서 이 견해는 성경이 마땅히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부터 그 영광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명시적으로 말하는 지점에서조차 셀프 구원이라는 반성경적 원리를 도입한다. 둘 다를 가질 수는 없다. 보편적 범위로까지 확장된 속죄는 감가상각된 속죄이다. 거기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구원은 이제 내 능력에 달린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일반 대속의 교리는 오웬이 거부한 것처럼 심각한 잘못으로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오웬이 제시한 교리는 성경적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 교리는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오직 십자가만을 영광으로 삼고 그들의 희망과 확신은 오직 구주의 죽음과 중보에서만 얻을 수 있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높인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진정한 복음인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복음이며 우리 모두가 공통적(catholic)으로 가져야 할 신앙이다. 성경적으로 복음을 이해하기오웬의 책이 출간된 이후, 삼위일체 여호와께서 구속 사역에 관해 그보다 더 나은 책을 계획하고 실행하신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 오웬의 작업을 연구하면서 앤드류 톰슨(Andrew Thomson)은 이렇게 말한다. “오웬이 다루는 주제의 막바지에 도달했을 때, 그 글을 거기까지 읽은 당신에게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주의해서 살펴보라. 오웬은 실로 그 주제와 관련해서 다룰 수 있는 모든 영역을 다 다뤘다.” 그건 정말로 사실이다. 텍스트에 대한 그의 해석은 확실하고, 그가 구축한 신학적 구성의 힘은 대단하다. 논의할 필요가 있는 그 어떤 것도 생략되지 않았으며(작가가 발견할 수 있는 한), 그가 다루지 않은 주제와 관련해서는 그의 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그 어떤 찬반에 관한 논의가 있은 적이 없다. 누군가가 개혁주의 신학자가 입장을 확립해야 하는 분명한 분야에서 논리의 도약 또는 비약을 행하고 있는 부분을 찾기 위해 그의 책을 읽는다면, 그 사람은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다. 그가 발견하게 될 것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견고하고 공을 들인 주석과 성경적 사고방식을 주의 깊게 따라가는 연구뿐일 것이다. 오웬의 작업은 복음의 핵심에 대한 건설적이고 광범위한 성경적 분석이며, 그렇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오웬의 주장이 결코 전통적 입장에 대한 특별한 탄원의 일부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제한 속죄가 구속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텍스트에 근거하고 있다는 오웬의 논증을 제대로 논박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제한 속죄 교리를 칼빈주의라는 논리가 만든 괴물이라고 일축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누구도 오웬을 제대로 반박한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지금 복음 회복을 주장하는 당신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이 우리 모두가 다 칼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이렇게 질문했었다. 이 질문이 문제를 삼는 건 아마도 단어가 아니라 사물일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상 역사적 칼빈주의가 이해하는 것처럼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안은 복음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현대 복음주의가 대체로 옛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말했고, 옛 복음에서 벗어나는 정도로 판단할 때, 새 복음은 우리 눈에 성경의 메시지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가진 신학적 화폐의 가치가 떨어졌다. 우리의 마음은 이제 십자가를 제대로 구속하지 못하는 십자가로, 그리스도를 제대로 구원하지 못하는 구세주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도움이 없이는 그 누구라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줄 수 없는 취약한 사랑으로 생각하도록 조정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구원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믿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의 복음을 믿거나 전파할 자유가 없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 인간이 힘을 합쳐야 가능한 시너지 효과의 수고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는 더 이상 복음을 믿을 수도 없다. 믿음과 불신앙이 책임 있는 행위가 되려면 반드시 그 둘은 독립적인 행위여야 한다는 알미니안의 생각에 우리는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 그러므로 구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갈보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믿음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자유는 우리 안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우리는 구원에 대해 당혹스러울 정도로 이중적인 생각을 하며,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다가, 또 다음 순간에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로 인한 정신적 혼란이 초래한 결과는 이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창시자이자 완성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박탈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알 때 얻을 수 있는 많은 위안까지도 나 자신으로부터 박탈하고 있다. 복음 전파와 관련해서, 잘못된 선입견은 우리로 하여금 의도한 것과 정반대로 말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선포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구원을 가능하게 하신 건 맞지만, 사실상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영화롭게 하기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음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자비의 영광이 이러한 사실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간다는 보편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전에 칭찬했던 모든 것을 평가 절하하게 되는데,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결국 뭔가를 추가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는 결정적 요인은 우리 자신의 믿음이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리고 그 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우리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허한 용두사미(anticlimax)의 결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사랑을 갖고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죽음을 죽으셨음을 확증하는 것으로 시작하면서도 보편주의자가 되는 것을 주저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처리했을 때, 우리가 했던 일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우리는 은혜와 십자가를 높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 가치를 깎아내렸다. 아니, 칼빈주의보다도 훨씬 더 과격하게 속죄의 한계를 제한했다. 칼빈주의는 그래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자체로 구원받도록 예정된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그 자체로는 아예 그 어떤 사람도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비록 하나님조차도 그들을 강제로 회개하고 믿도록 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 있는 능력이 그들 자신에게는 있다고 확신시켜 줌으로써 아첨했다. 아마도 우리는 그런 확신을 좀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신앙과 회개를 아주 하찮게 여겼을 것이다(“구원받는 건 아주 쉽습니다. 그냥 주님께 마음의 문만 열면 되요.…”).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효과적으로 부인했으며, 사람이 항상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종교의 기본 신념까지 훼손했다. 그 결과, 실로 많은 것을 잃었다. 오늘날 우리의 설교에서 경건함과 겸손이 사라진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스스로를 회심자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교만하고, 지식에 있어서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고 무엇보다 성경이 참된 회개의 열매로 간주하는 선한 일에 너무도 부족한 것은 그래서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오웬의 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분야가 바로 이런 타락한 믿음과 이런 종류의 설교이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는 우리에게 성경의 복음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복음을 어떻게 전파하는 게 바른 방법인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첫 번째로, 그는 우리를 인도하여 진정으로 구원하시는 주권자, 구세주 앞에 엎드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대신 죽음으로 구원한 사람들은 반드시 모든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구속의 죽음이라는 진리 앞에서 그를 찬양하게 하실 것이다. 도르트 신조가 드러내는 방식으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 그러니까 중심에 복음이 위치하며, 그 한편에는 전적 타락과 조건 없는 은혜가,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거부할 수 없는 은혜와 최종 보존이 위치하고 있는, 그런 형태로 복음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결코 십자가의 완전한 의미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십자가의 완전한 의미는 속죄가 이 네 가지 진리로 정의될 때만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값없는 구원의 사랑을 주시기로 결정한 무력한 죄인들이라는, 일단의 무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들이 지은 모든 죄를 감당하며, 그들에 대한 부르심과 보존, 즉 현재와 미래의 최종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한다. 그것이 바로 갈보리의 의미이다. 십자가는 구원했다. 십자가는 지금도 구원한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이다. 카우퍼(Cowper)는 이렇게 노래했다.죽어가는 어린 양, 당신의 보배로운 피그 힘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며,하나님이 대속한 모든 교회에 이르기까지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구원받도록이것은 신약 전체뿐 아니라 옛 복음의 기초가 되는 승리의 확신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웬이 우리에게 분명히 믿도록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오웬은 우리가 그의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성경적 복음을 전파하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 주장은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고 설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종종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신약의 복음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웬이 이 점에 관해서는 간략하고 부수적으로 다루지만, 그의 코멘트는 통찰로 가득하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각각의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셨고, 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각각을 다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고 회중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바로 이해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경우, 청중 모두가 다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되지만, 결코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죽음의 대상이 된다는 지식은 개인의 확신에 속하며, 그 본질상 구원의 믿음을 행사하는 것보다 앞설 수 없다. 따라서 이런 확신은 왜 믿어야 하는지에 관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믿었다는 사실에서 추론해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전적으로 모든 사람이 믿고 행동해야 하는 하나님의 진리로서 다음 네 가지 사실을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선포하는가의 문제이다. 1.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 심지어 최악의 죄인까지도 구원하는 완전한 구세주이다.3. 아버지와 아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은 은혜를 받은 후 결코 쫓겨남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이 약속은 “(소수 또는 그 이상) 누구를 위한 것이든,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봉헌하는 것이 충분하다는 사실에 근거한 무오한 진리”이다.)4.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와 믿음을 의무로 삼으셨다. “복음의 약속 안에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또 구원할 수 있는 만유의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향해 당신의 영혼이 다가가도록 하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그의 피의 소중함과 십자가 대속물의 충분함을 통하여, 또한 구원의 목적을 위해 값없이 자신을 바치심으로 모든 영혼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준비와 능력 그리고 의지를 통해 이제 구원받았다.”설교자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왜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만으로 왜 구원이 충분한지, 그에게 진정으로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 안에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구세주가 되는지, 그리고 앞에 있는 청중들이 어떻게 이 진리를 스스로에게 적용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건 결코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지는 묻는 것도 아니고, 또 청중이 그 질문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누구를 특별히 구원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의도에 관해서 조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유익할 것임을 완전히 확신하는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을 행사한 후에는, “믿는 사람이 자기 안에서 그리고 자기를 향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를 발견함에 따라, 그리고 특히 나 자신을 위해 죽도록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나에 대한 하나님의 선의와 영원한 사랑을 보여주셨음을 확인함에 따라, 자신의 영혼을 확신시키는 책임은 각각의 신자에게 있다.” 그러나 이런 확신은 구원받기 전에 오는 게 아니다. 복음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의해 보증되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오웬이 정리해준 복음 전파의 의미’로 이어집니다. 원제: J. I. Packer’s Famous Essay on Christ’s Dea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리
칼빈주의
존오웬
구원론
알미니안주의
도르트총회
복음
구속사역
십자가
복음전파
칼빈주의는 튤립이 아니라 세계관이다
by J. I. Packer
2021-07-17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 소천 1주기를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J. I. 패커의 유명한 에세이’를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부 ‘구원 교리와 칼빈주의를 향한 편견 제거하기’에서 이어집니다.우선, 칼빈주의는 ‘5대 강령’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온 세상의 창조주이며 왕으로 믿는 명확한 시각에서 비롯된 세계관(whole worldview)이다. 칼빈주의는 창조주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모든 일을 그분의 뜻대로 행하려는 한결같은 노력의 결과물이다. 또한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지시와 통제 아래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으로 삶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칼빈주의는 성경에 입각한 성경의 신학이다. 즉 창조주를 자연과 은혜 안에서 모든 만물들의 근원이자, 수단과 목적으로 바라보는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이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유신론(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자 종교(만물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의존)이며, 또한 복음주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고, 이 모든 것에서 가장 순수하고 고도로 발전된 형태이다. 그리고 칼빈주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과 사건의 다양성을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과 교회를 위해 미리 정하신 위대한 계획의 성취로 보는 통일된 역사 철학이다. ‘5대 강령’은 사실상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주장하는 것 이상도 아니지만, 칼빈주의는 구원의 영역을 넘어서서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훨씬 더 광범위한 주장이다. 다음 두 번째로 살펴볼 점은 칼빈주의 자체는 본질적으로 설명적일 뿐 아니라 또한 목가적이며 건설적인 반면, ‘5대 강령’은 칼빈주의적 구원론을 부정적이고 논쟁적인 형태로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칼빈주의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언급 없이도 얼마든지 성경의 관점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정의할 수 있으며, 그 주장을 지속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또는 가상의 세상에서 굳이 알미니안과 계속해서 싸울 필요가 없다. 칼빈주의는 부정적인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칼빈주의자가 싸운다면, 그건 오로지 긍정적인 복음주의적 가치를 위해서이다. ‘5대 강령’이 던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주로 세 번째(제한 속죄 또는 특정 구속)와 관련한 것인데, 이는 종종 형용사를 강조함으로 마치 칼빈주의자가 하나님의 자비를 특정 사람들에게 제한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의 목적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살펴보겠지만, 사실상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구속주’라는 복음의 핵심 진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건적 선택과 저항할 수 있는 은혜라는 교리를 거부하는 이유도 구원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시라는 긍정적인 진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진짜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건 알미니안주의이다. 알미니안주의는 선택과 구속을 부인하고 또한 부르심이 하나님의 구원 행위라는 사실도 부인한다. 칼빈주의는 믿음을 강화하고 교회를 세우는 긍정적인 목적을 위해서, 또한 복음의 긍정적인 내용을 주장하기 위해서 알미니안주의의 부정을 부인할 뿐이다. 세 번째로, 칼빈주의적 구원론을 5대 강령이라는 형태로 만든 행위(굳이 다섯 개가 된 이유는 도르트 총회가 답해야 할 알미니안의 선언이 다섯 개였기 때문이다)는 구원에 관해 칼빈주의가 가지는 유기적 성격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비록 이 강령이 다섯 개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도르트 신조’가 의미하는 측면에서 볼 때, 다섯 개 모두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들은 서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 칼빈주의 관점의 구원론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단 한 가지,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삼위일체 여호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택하신 백성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주권적인 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함께 일하시는 세 인격이시다. 성부께서 택하시고, 구속하심으로 성자가 성부의 뜻을 이루시며, 새롭게 하심으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목적을 이루신다. 구원하심 - 죄 안에서 죽은 이를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며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행하신다. 구속을 계획하고 성취하며 전달하며 부르고 지키며 의롭게 하고 또한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한다. 죄인 – 하나님 앞에 인간은 죄를 지었고, 비열하고, 무력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거나 스스로의 영적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이런 고백이 가진 능력은 삼위일체 사역의 통일성을 깨뜨리거나, 구원의 성취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누어 결정적인 부분을 사람의 것으로 삼거나, 인간 타락의 정도를 살짝 약화시킴으로 죄인이 자신의 구원에 대한 찬미를 구주와 함께 나누도록 하려는 모든 시도를 막는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 구원론의 한 가지 요점인데, 이는 다름 아니라 ‘5대 강령’이 확증하려는 내용인 동시에 알미니안주의가 어떻게 하든지 부인하려는 사실이기도 하다. 결국 핵심은 이것이다. 죄인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과거에도 또 현재와 미래에도, 온전하고 완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오로지 그분께만 영광이 영원하길! 아멘.이 사실은 우리를 네 번째 사실로 이끈다. 즉, 5대 강령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구원론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깊이를 모호하게 한다. 바로 이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강령에서 강조점은 형용사에 가해지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세 가지 위대한 구원 행위와 관련한 논쟁이 형용사에 관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즉, 두 진영 다 명사에 해당하는 선택, 구속 그리고 내적 은혜라는 선물에는 동의하지만 단지 이 명사들과 관련한 인간의 위치에 관해서만 다르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믿음과 관련한 선택이 조건적인지 아닌지의 여부, 두 번째로 구속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의도하는지 아닌지의 여부, 그리고 세 번째로 내적 은혜가 거부할 수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각 경우에 있어서 형용사의 변경은 명사의 의미 자체를 바꾼다. 조건부 선택, 보편적 구속, 저항할 수 있는 내적 은혜는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선택, 구속, 내적 은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적절한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양측은 논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우리도 그 점을 똑바로 보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사이의 논쟁을 어떤 목적으로든지 제대로 논의할 수 없다. 각각이 내린 정의를 나란히 살펴보는 것은 가치가 있다.1. 알미니안파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 행위는 정당하게 자격을 갖춘 부류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아들 자격과 그에 따른 영광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해결책(resolve)으로 정의된다. 이것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건,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믿게 될 우발적인 사건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겪을 사람들은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는 경우, 최악의 경우에는 단 한 사람도 믿는 자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믿도록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칼빈주의자가 정의하는 선택은 죄에서 구원받고 영광에 이르는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속받고 성령의 확실한 부르심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자격 없는 특정한 사람들이 하는 결정(choice)이다. 알미니안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선택받은 것은 내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믿음은 내가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이라는 명사(단어)의 개념이 완전히 다르게 쓰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알미니안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믿는다는 조건 하에 죄인들을 기꺼이 용서하려는 하나님이 그 과정에서 만나는 장애물(정의_justice에 관해서 충족되지 않은 주장)의 제거로 정의된다. 알미니안주의에 따르면 하나님은 구속을 제안할 수 있는 권리는 갖고 있지만, 문제는 그 자체로만 볼 때 하나님의 제안을 인간이 받아들일 지 여부에 대한 보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믿음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획득하는 것이지 결코 갈보리에서 오는 선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하는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그것으로 전부였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구속을 특정한 죄인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견딘 실제적인 대속의 인내라고 정의한다. 그 결과 이제 하나님은 죄인들과 화목하게 되셨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인간의 죄는 영원히 사라졌으며, 그들에게는 영생이 선물로 주어졌다. 더불어 그들에게는 이제 하나님 보시기에 기업을 받아 누리게 될 유일한 수단인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을 권리가 생겼다. 다시 말해서, 갈보리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자들의 구원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믿음에 이르게 하고, 그 결과 그들의 구원이 현실이 되도록 한다. 십자가는 구원을 이룬다. 알미니안은 이렇게 말할 뿐이다. “갈보리가 없었다면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칼빈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나를 위해 구원을 이루셨다.” 전자가 십자가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간주하지 않는 반면, 후자는 십자가를 구원의 실제적인 원인으로 보고, 믿음을 포함한 모든 영적 축복의 근원을 오로지 갈보리에서 이뤄진 하나님과 그의 아들 사이의 위대한 사역의 결과로 판단한다. 양측은 분명히 구속에 대한 개념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3. 알미니안파에 의하면 성령이 주시는 내적 은혜의 선물은 ‘도덕적 설득’으로, 즉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해로 정의된다.이 사실은 그들이 인정하는 대로, 사실상 그 자체로만 볼 때 그 누구도 믿음의 응답을 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이 은사를 단순히 계몽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으로 정의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그들의 뜻을 새롭게 한다.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선한 것으로 결정하시며,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끈다. 그러나 그들이 값없이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원함을 입었기 때문이다.” 은혜는 저항하려는 성향 자체를 파괴하기에, 거부할 수 없음이 증명된다. 알미니안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결정했다”, “나는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회심에 대해 보다 신학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싶어할 것이다. 누구의 공로인지에 대해서 좀 더 단순하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갇혀있던 나의 영혼, 오랫동안 누워 있었네죄악과 어둠에 억눌린 영혼당신의 눈은 나를 살리는 광선을 쏘았네나는 깨어났고, 지하감옥은 빛으로 타올랐고쇠사슬이 풀려진 후 자유로와진 나의 마음나는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당신을 따라갔네분명히, 내적 은혜에 대한 이 두 개념은 서로 첨예하게 대척점에 있다.이제 칼빈주의자들은 선택, 구속, 부르심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위로 보지 않는 알미니안 사상이 성경적 의미의 핵심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한다. 그건 다른 말로 해서, 알미니안적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이 선택하는 건 오로지 믿는 자들이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건 모든 사람을 위해서이고, 성령이 소생시키는 대상은 오로지 말씀을 받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이건 사실상 성경적 의미에서 하나님은 아무도 택하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는 그 누구를 위해서 죽은 것도 아니며, 성령 또한 그 누구도 소생시키지 못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쟁에서 문제가 되는 건, 이러한 성경적 용어들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은혜의 언약, 동사 ‘구원하다’와 같이 구원론적으로도 중요한 일부 다른 용어들을 그 동의어까지 포함해서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는 점이다. 알미니안주의자는 구원이 하나님의 어떤 선포나 행위에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독자적 활동에 달려있다는 관점에서 이 모든 용어들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그런 원칙 자체가 비성경적이며 비종교적이고, 무엇보다 용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의미를 명백하게 왜곡할 뿐 아니라 성경이 적용되는 모든 지점에서 복음을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알미니안 논쟁의 주제이다. 다섯 번째 ‘5대 강령’의 부족한 점이 있다. 강령의 형태(알미니안 주장에 대한 일련의 부정) 자체가 칼빈주의가 알미니안주의의 수정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알미니안주의는 자연적 순서로 볼 때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거기서 발전된 칼빈주의는 그 파생물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것이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입관이 이 두 가지 견해의 상관성에 대한 바른 설명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왜냐하면 알미니안주의(지금 드러나는 바와 같이 우리 시대의 새 복음과 매우 밀접하게 일치하는 생각)는 성경을 ‘자연스럽고’ 편향되지 않고 또한 단순한 방식으로 읽은 결과이며, 칼빈주의는 그에 반해 자연스럽지 못한 해석, 텍스트 자체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텍스트를 왜곡해 뽑아낸 불경한 논리의 산물, 텍스트가 전혀 제공하지 않는 논리의 틀을 사용해서 텍스트를 강제함으로써 본문이 가진 평범한 의미를 왜곡하고 균형을 뒤엎었다는 것이다. 개개인으로 따지자면 이런 비난에 어울리는 칼빈주의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만, 칼빈주의자 전체에 대한 평가로 볼 때 이것처럼 심각하게 왜곡된 평가도 없을 정도이다. 확실히, 알미니안주의의 해석은 구원에 있어서 조차도 주도권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 내 운명과 영혼의 주인은 오로지 나 자신이라는 망상을 도무지 포기할 수 없는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기에 성경의 가르침을 타락한 인간이 심각하게 왜곡한다는 점에서 매우 ‘자연적’이다. 이런 식의 변태적 왜곡은 교부 시대의 펠라기우스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를 통해서 또한 후기 스콜라주의에서 이미 나타났으며, 17세기 이후 로마 신학과 개신교 사이에서 다양한 유형의 합리주의적 자유주의와 현대 복음주의 가르침에 이르러서까지도 끊이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런 왜곡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그대로 있는 한, 알미니안적 사고 방식은 인간에게 극히 자연스럽다는 허울을 쓴 왜곡된 형태로 계속에서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볼 때 이 사고 방식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사실상 칼빈주의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의미로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칼빈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바 그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구원하신다. 구원하시려고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은 분명히 구원하시며, 공로가 아닌 은혜로만 구원하시기에 그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자이며, 그 구원은 오로지 십자가에서부터 흘러나온다. 그렇기에 구속 사역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서 끝난다. 이처럼 다른 곳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에게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게 바로 칼빈주의이다. 칼빈주의자는 그렇기에 이렇게 노래한다. 저 멀리 푸른 언덕, 성벽 없는 곳 바로 거기서 주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셨네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분우리가 용서받도록 그가 죽었다우리를 선하게 만들기 위해 그가 죽었다.우리가 마침내 천국에 갈 수 있도록,우리는 그의 보혈로 구원받았다이렇게 찬양할 때 칼빈주의자는 진심이다. 이 찬양을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아들의 죽음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단지 실질적인 효력이 없는 희망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그의 구원 계획이 오로지 믿겠다는 인간의 결심 여부에 달려있기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까지 몰고도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칼빈주의자는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무력함이 아닌,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가상의 신자들을 위해 가상의 구원의 길을 연 게 아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믿을 지도 모르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위해 확실한 구원의 길을 열었다. 그분의 보혈은 실제로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 예수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침으로 이뤄낸 결과는 애초에 예정한 계획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바로 구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 위에 추가로 믿음이 더해지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다.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믿음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신 모든 사람의 완전한 구원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오웬의 성경신학적 탐구와 칼빈주의’로 계속됩니다.원제: J. I. Packer’s Famous Essay on Christ’s Dea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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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교리
튤립
5대강령
세계관
창조주
존오웬
십자가
알미니안주의
구원 교리와 칼빈주의를 향한 편견 제거하기
by J. I. Packer
2021-07-16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 소천 1주기를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J. I. 패커의 유명한 에세이’를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부‘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만나는 죽음의 죽음’(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은 만민 구원 교리가 얼마나 비성경적이며 복음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논쟁적인 작품이다. 이런 주제에 관심 없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교리적 정확성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또는 고작해야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분열이나 드러내는 이런 주제의 신학적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주제 자체를 논하는 것 조차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웬(John Owen)이 다루는 주제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의 책을 읽는 것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다. 열정이 지나쳐서 편견이 되거나, 신학적 당파성(shibboleths)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출간되는 그의 책(역자 주: 존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만나는 죽음의 죽음’을 의미함)이 독자들 안에서 새로운 영을 깨우길 바란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 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급증하는 양상을 목격하고 있다. 여기에 맞춰서 우리는 전통을 시험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믿음을 통해 생각하는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오웬의 글이다. 그를 통해서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긴급한 과제 중 하나인 복음을 회복하는 일에 큰 도움을 받기를 소망한다. 조금 전 마지막 문장에 다소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있을 수 있지만,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그리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오늘날 복음주의가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전도의 실천, 성결의 가르침, 건실한 교회 생활, 영혼을 다루는 목회자의 방식과 권징의 실천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지금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지에 대해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그래서 불확실성이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은 여러 증거가 드러나 있는 분명한 현실이다. 이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일이며, 많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근원을 파헤쳐보면, 이러한 혼란이 초래된 궁극적인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바른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는 복음을 다른 제품(product)으로 대체해 버렸다. 그 다른 제품은 세부 사항 하나하나만 보면 복음과 유사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전혀 다른 복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그 대체 제품이 과거의 참된 복음이 그토록 능력 있게 증거하던 복음의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새로운 복음이 특별하게 실패하는 분야는 깊은 경외심, 깊은 회개, 깊은 겸손, 예배의 정신, 교회에 대한 관심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나는 새로운 복음 그 자체가 가진 특징과 내용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새 복음은, 인간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지향하게 하는 것을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이 새 복음의 핵심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 복음과 옛 복음(old gospel)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이것이다. 새 복음은 오로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화평과 위안, 행복,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에만 집중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이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옛 복음은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 아니, 사실상 진짜로 제대로 된 도움을 준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문제였고, 첫 번째 관심은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다. 옛 복음은 따라서 항상 그리고 본질적으로 자비와 심판에 관한 하나님이 가진 신적 주권의 선언이었고, 자연과 은혜, 즉 선한 모든 영역에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전능하신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라는 명령이었다. 옛 복음이 가리키는 곳은 언제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새 복음에서 그 중심이 사람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옛 복음이 방식이, 새 복음이 지향하지 않는 방식으로 종교적이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옛 복음의 주된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지만, 새 복음의 관심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데에 국한된 것 같다. 옛 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이고 또한 인간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이에 반해 새 복음의 주제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도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복음 전파의 전체적인 관점과 강조점이 아예 뒤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주된 관심의 변화로부터 그 내용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왜냐하면 새 복음은 사실상 “유용함”(helpfulness)이라는 새로운 관심 영역을 통해 성경 메시지를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태생적인 믿음의 무능력함이나,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이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가 아니라 그의 양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등의 주제는 설교하지 않는다. 이런 교리들은 “유용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그들 자신의 힘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교리는 도리어 죄인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을 뿐이다(그런 절망이 유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이 교리는 인간의 자존심에 너무나 큰 타격을 주기 때문에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고 간주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러한 생략의 결과는 성경적 복음의 일부가 마치 복음 전체인 양 전해진다. 그리고 완전한 진실인 것처럼 흉내를 내는, 그러다가 반쪽 진리는 결과적으로 완전한 비진리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됨으로 이제 사람들에게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진 구원의 능력도 우리가 믿어야 비로소 효과를 발휘하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사랑도 스스로 돌이켜서 믿고 의지하겠다는 사람이 있을 때에나 가치를 드러내는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주권적이며 강권적으로 죄인들을 자신에게로 부르는 분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문 앞에서” 조용히 또 무력하게 서서 기다리며 오로지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존재로 묘사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런 복음이 우리가 진짜로 믿는 복음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뒤틀린 반쪽 진리의 총합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설교할 때 성경은 우리를 꾸짖는다. 그리고 이런 설교가 오늘날 우리 사이에서 거의 표준적인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검토하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문제인지를 보여준다. 오래되고 참된 성경적 복음을 회복하고 우리의 설교와 실천을 그 복음에 다시 맞추는 것이야말로 현재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구속(redemption)에 관한 오웬의 논문이 도움이 될 수 있다.칼빈주의를 향한 편견 제거하기“하지만 잠깐만요. 복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오웬의 작업은 분명히 제한 속죄를 옹호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까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 중 하나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복음 회복을 주장하는 당신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이 우리 모두가 다 칼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너무도 예상 가능한 이런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나름 가치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질문 속에는 많은 편견과 무지가 담겨있기도 하다. “제한 속죄의 옹호”, 마치 복음의 핵심을 설명하는 개혁파 신학자가 정말로 원했던 것이 오로지 이것 하나뿐이었던 것처럼 생각하다니? “우리 모두가 다 칼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마치 개혁파 신학자들이 자기 정당을 모집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고, 칼빈주의자가 되는 것이 신학적 타락의 마지막 단계이자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다니 말이다. 이 질문에 직접 답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칼빈주의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그 기저에 깔려 있는 편견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지금부터 설명할 일반적인 칼빈주의와 특히 칼빈주의의 “5대 강령”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사실에 주목하길 바란다. 첫째, 소위 말하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은 17세기 초 특정 ‘벨기에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내놓은 5대 선언문(항변)에 대한 칼빈주의적 답변에 불과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5대 선언문 안에 포함된 신학(역사 속에서 알미니안주의로 알려짐)은 두 가지 철학적 원칙에서 유래되었다. 첫 번째는, 신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는 고로, 따라서 인간의 책임과도 양립할 수 없다. 두 번째는, 능력은 의무의 범위를 제한한다(따라서 반펠라기우스주의의 공격은 완전히 정당화된다). 이러한 원칙을 근거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두 가지 추론을 이끌어냈다. 첫 번째로, 성경은 믿음을 자유롭고 책임 있는 인간의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에 믿음은 결코 하나님에 의해 야기될 수 없을 뿐 더러, 믿음은 하나님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상태에서 행사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경은 믿음을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하는 의무로 여기므로 믿음을 갖는 인간의 능력은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인간은 복음이 그의 앞에 놓였을 때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까지 죄로 인해 완전히 부패하지 않았다. 2. 인간은 복음을 도무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존재가 아니다. 3.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개념은 스스로의 힘으로 믿게 될 인간까지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서 촉발되었다.4.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누구의 구원도 보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도 믿음의 선물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애초에 그런 선물은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다 믿으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5. 믿음을 유지함으로써 은혜의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신자들에게 달렸다. 실패하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다. 따라서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게 함으로, 구원하는 믿음을 전체적으로 사람 자신의 행위로 간주한다. 그러니까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이루는 것이지 인간 안에 계신 하나님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입장이다. 5대 선언문에 관한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 1618년에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t)가 소집되었으며,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5대 강령은 전혀 다른 원리, 즉 “구원은 오로지 주께로만 말미암는 것”이라는 성경적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1. 타락한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복음을 믿을 능력이 없다. 이것은 마치 인간에게 확장될 수 있는 모든 외적 유인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믿을 모든 능력이 없는 것과 같다.2.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고 믿음을 받고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해 죄인들을 향한 자유롭고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인 선택이다. 3.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택하신 자들의 구원을 최종 목적으로 삼고 있다.4.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역사는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지 않는다.5. 신자들은 영광에 이르기까지 사라질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과 은혜 안에 거한다. 이 5대 강령은 흔히 각 강령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튤립(TULIP)으로 편리하게 표현된다.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이다. 자, 이제 우리 앞에는 성경적 복음에 관해 서로 명백하게 반대되는 두 가지 일관된 해석이 있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강조의 차이가 아니라 내용 자체의 차이이다. 하나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스스로를 구원하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한 견해는 잃어버린 인류의 회복을 위한 성삼위일체의 세 가지 위대한 행위, 즉 아버지에 의한 선택, 아들에 의한 구속, 성령에 의한 부르심과 같은 각각의 위격을 향한 것과 더불어 구원을 확증하는 건 삼위일체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다른 견해는 각각의 행위에 대해 다르게 언급(reference)하고 있는데(구속의 대상은 온 인류, 부르심의 대상은 복음을 듣는 자들, 그리고 선택의 대상은 복음에 응답하는 자들), 그 누구의 구원도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따라서 두 신학은 구원의 계획을 전혀 다른 용어로 이해한다. 하나는 구원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존하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능력에 의존한다. 하나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 중 일부로 간주하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인간의 공로로 간주한다. 하나는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모든 영광을 오로지 하나님께 돌리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기계를 만드신 하나님과 믿음으로 그 기계를 작동하는 사람으로 영광을 나눈다. 분명히, 이러한 차이점은 아주 중요하며, 무엇보다 칼빈주의를 요약한 ‘5대 강령’이 가지는 영구적인 가치는 다름 아니라 이 두 개념이 불일치하는 지점과 그 정도를 분명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단지 ‘5대 강령’으로만 단순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부터 살펴볼 다섯 가지 사실이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칼빈주의는 튤립이 아니라 세계관이다'로 이어집니다. 원제: J. I. Packer’s Famous Essay on Christ’s Dea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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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기대를 성취하는 하나님 나라
by Iain Duguid
2021-07-13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지상 사역을 시작하셨다(마 4:23). 그러나 복음서 어디를 살펴봐도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명확히 제시하시는 장면을 찾을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의 청중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정의하실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알고자 했던 문제는, 예수님이 오신 일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의 기대에 부합하는가였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 하나님 나라, 또는 마태복음 식으로 표현하면 ‘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는 새것과 옛것 모두와 관련이 있다. 그 나라는 천지창조만큼이나 오래된 개념이지만,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 땅에 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아티클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구약적 기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그 나라가 새롭게 실현된 방식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우선 하나님 나라는 그분의 창조 행위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만유 위에 계신 왕으로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신다. 그분은 하늘의 모든 별과 행성을 통치하시는데, 이 통치는 낮과 밤과 계절과 연한을 이루는 해와 달의 움직임을 통해 반영되도록 하셨다. 그분은 또한 지구와 그 안에 있는 전 피조물을 통치하시는데, 이 통치 역시 아담과 하와에게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명하신 사명을 통해 반영되도록 하셨다. 처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그 위대한 왕의 법도에 순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특별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주어졌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던 최초의 시절은 바울이 그 나라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묘사했던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 지배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게 되자, 모든 게 상실되었다. 창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인간의 반역이 침범했던 것이다. 그로써 의가 불의로 대체되어 왕과 그 백성이 함께 누리던 평강과 희락의 조화로운 관계는 깨어지고 말았다.그렇지만 하나님은 인류를 향한 자신의 은혜로운 통치를 다시 확립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이교 문화가 지배하던 지역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그에게 새롭게 거주할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출애굽 시대가 되었을 때는, 아브라함 자손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그들을 향해 자신의 특별한 백성이 되리라고 선언하셨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백성이자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출 19:5-6).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상의 목자가 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지혜롭게 다스릴 지상의 목자도 허락하셨다(신 17:15). 또한 자기 백성을 위해 정의와 공의로 온 세상에 주권을 행사하기로 작정하셨다(시 99편).그러나 인간의 범죄는 일찍이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듯이, 이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그분의 주권에 도전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곧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분에게 반역하여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주인을 대신 섬기고자 한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지도하라는 사명을 부여하며 세우신 왕들도 우상을 따로 세워 숭배하게 함으로써 그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의와 평강과 희락 대신 언약의 저주를 경험하며 마침내는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었다. 위대하신 왕이 성전, 즉 예루살렘에 있는 지상의 처소에서 떠나시자 그 장소는 무방비 상태로 적군의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겔 9-10장).다행히도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간의 범죄로 역사가 종결되게 놔두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스라엘과 유다가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도 선지자들은 새로운 미래가 도래하리라고 선언했다. 곧 새로운 언약에 기초한 새로운 나라가 수립되리라고 예언했다(렘 31:31-33). 더 나아가 하나님이 친히 새 하늘과 새 땅을 펼쳐 보이시는 날이 오리라고 선포했다(사 65:17). 이는 에덴동산에서 누리던 평강과 풍요를 다시금 경험할 수 있는 창조 세계를 의미했다(사 11:6-9). 또한 하나님이 새로운 출애굽 사건을 일으켜 이전까지 마른 뼈와 같던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도 주어졌다(겔 37장). 이와 같은 새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새로운 왕에 의해 지도를 받게 되며(겔 34:23-24), 그 결과 이방인까지도 그분의 백성에 속하리라고 예언되었다(사 2:2-4; 56:6-7).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작은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바벨론 유배에서 귀환한 후에도 그 백성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어떠한 왕도 없이 생존해야 했다(슥 4:10). 사실 그들은 다니엘 선지자를 통해, 종말이 아직 멀었으며 하나님과 그 백성이 함께 다스리는 통치가 시작되려면 길고 험난한 여정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 세상의 모든 나라를 종식시킬 새로운 나라는 긴 시련의 역사를 거쳐야만 도래한다는 예언을 이미 들었던 것이다(단 8장). 그러한 차원에서 앞서 겪은 유배 기간은 그와 같은 시련과 환난을 잠시 보여 주는 시간일 뿐이었다. 다니엘은 환난의 때가 단지 칠십 년이 아니라 “일흔 이레”의 기간이 되리라고 예언했다(단 9:24; 참고 마 18:22). 또한 그는 하나님 나라가 작은 돌 하나로 시작하여 온 세상을 지배하는 태산을 이루게 되리라고도 예언했다(단 2:34-35). 그래서 종국에는 그 나라에 대적하는 어떠한 인간의 반역과 영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나라가 기필코 승리하게 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지상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그분은 바로 이러한 구약의 기대를 배경으로 삼아 말씀을 전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새롭고도 구체적인 방식으로 임했다고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을 세우고자 사람들 가운데 몸소 거하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분이 오심으로써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도 함께 임하게 되었다(눅 4:18-19). 바로 이 하나님 나라는 새 이스라엘이신 예수님 자신의 출현을 통해 임하는 나라였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계보는 그분이 곧 새 이스라엘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또한 다윗의 아들로서 바벨론 유배 이후로도 남은 자임을 보여 준다(마 1:2-16). 그래서 예수님은 과거 이스라엘과 같이 어린 시절에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결국에는 그곳을 빠져나오신다(마 2:13-15). 또한 세례의 물을 통과하시고 사십 주야를 광야에서 보내신 후에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주기 위해 산에 오르신다(마 3-5장). 이는 모두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보여 주는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이렇듯 그분은 이스라엘이 지키지 못했던 율법을 성취하러 오셨다(마 5:17). 또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하시는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고자 하셨다(눅 9:31). 그리하여 그분 안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뿐 아니라 다른 이방인까지 모두 하나가 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세워졌다(요 4장; 엡 2:11-22).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다시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는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임하기는 했지만, 그 나라의 최종 완성은 아직 미래의 소망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마 6:10). 그리고 그 나라가 혹 더디 임할지라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깨어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5장). 이처럼 하나님의 통치는 그 백성에게 평강과 희락을 이미 가져다주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아직 목격하지는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죽음과 부활을 겪으심으로써 이미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계 11:15). 그러나 우리는 아직 새 예루살렘에 당도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에덴동산의 모습과 인류의 역사가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결말을 지금 당장 볼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결론은 확실하다. 이미 돌 하나가 세상의 권력 구조로 세워진 신상의 발을 부서뜨리며 그 파편을 공중에 먼지처럼 흩어 버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단 2:34-35). 또한 세상의 왕과 제국이 스스로의 영광과 자태를 뽐낼지라도 그 종말이 머지않았음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단 5장). 결국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히 존속한다.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우리는 가슴 뛰는 소망을 안고 승천하신 왕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그분은 자신의 통치에서 비롯되는 열매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성령 안에서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하여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부름 받은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며 그 통치를 온 세상에 편만하게 이루실 것이다. 결정적인 전쟁은 이미 치러졌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승리도 명백해졌다. 이처럼 그분 안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하였다. 그리고 그 통치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원제: Old Expectations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성우
신학
구약성경
불순종
선택
책임
회개
소망
통치
당신의 교만과 싸워야 한다
by Scott Hubbard
2021-07-10
그리스도인은 ‘미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인생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다.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이렇게 쉽사리 단정하는 전도자의 판단이 혹 의심스럽다면, 특별히 한 가지 죄를 떠올려 보기 바란다. 그러면 솔로몬이 옳았다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 죄란 바로 ‘교만’이다.우리 모두는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든 이 땅에서 스스로를 과시하며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 노골적으로든 교묘하게든 그러한 자세를 드러내며 살고자 한다. 마치 우리의 체력은 끄떡없고, 지식도 부족하지 않으며, 숨도 전혀 차오르지 않는 것처럼 인생을 뽐내며 활보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호흡을 주신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말이다. 그러니 ‘미친 마음’이라는 표현이 참 적절하다.물론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 사악하고 비정상적인 마음이 아니라 정결하고 순수한 마음을 얻게 되었다(겔 36:25-27).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미친 마음을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비록 용서받을 때 교만한 자아가 꺾여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지배할 수 없게 되긴 했지만,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은 여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려 준비하고 있다. 한 마디로, 미친 마음을 지닌 몸을 일으켜 기상하고 노동하고 이야기하고 활동하고 잠을 자며 살아가는 게 우리의 삶이다.그런데 최근 나는 사도 바울의 도움으로 내 자신의 교만과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통해, 그가 교만으로 표현되는 미친 마음과 겸손으로 드러나는 행복하고 온전한 정신이 어떻게 다른지를 반복해서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1. 인간의 교만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바울은 인간의 교만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세대의 통치자들”에는 헤롯이나 빌라도만이 아니라, 바울이 “지혜 있는 자”나 “선비” 또는 “이 세대의 변론가”라고 부른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다 포함된다(고전 1:20). 간단히 말해, 교만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 복음의 메시지를 듣게 되면, 그분을 곧 십자가에 못 박고자 한다.만일 교만이 무엇인지를 더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교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헤아려 보면 된다. 일단 우리 안에서 교만이 자라나면, 서슴없이 누군가를 죽이게 된다. 꼭 손으로 죽이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살해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마 5:21-22). 이처럼 자기 안에 교만을 키우며 즐거워하는 사람은 가인을 따라 들로 나가며(창 4:8), 이세벨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뿐 아니라(왕상 21:5-14), 헤롯 왕의 잔치에도 참여하는 자이다(막 6:25-27).교만이 막 싹트기 시작할 때는 그리 해로워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는 숨겨진 욕망이나 혹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무시하는 생각을 소셜 미디어의 사진이나 글을 통해 얼핏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교만이라는 짐승이 자라나면 영광의 주님을 대면해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바울은 지적한다.그렇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청교도의 기도를 그저 무뚝뚝한 태도로 묵상할 수가 없다.내 안에 높아진 모든 생각을 무너뜨리소서이 교만을 부수어 사방으로 흩으소서내 마음에 달라붙은 자기 의의 찌꺼기를 다 제거하소서그리고 내 속에 회개의 눈물이 샘솟게 하소서그렇게 나를 찢고 다시 싸매소서2. 교만은 십자가 앞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2-23).교만한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를 죽이고 말았지만, 그 사건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는 일이 되었다(행 4:28). 하나님의 지혜로운 섭리 가운데 교만은 그리스도를 못 박게 만들었지만, 그리스도가 못 박히심으로써 교만은 살아남을 수 없게 된 것이다.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십자가 앞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그 나무의 거친 표면과 거기 박혀 있는 차가운 못을 만져보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고백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러한 십자가 사건을 망각하거나 왜곡할 때 교만이 자기 안에 기승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골고다의 공기를 들이마실 때만 자기 속에 있는 교만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십자가 앞에서는 왜 교만이 살아남을 수 없을까? 첫째로,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원인이 우리의 교만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다시 말해,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해악한 입술과 마음속에 감추어진 욕망, 그리고 자신만만한 태도와 거만한 눈빛을 깨닫게 된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보려면, 그 앞에서 우리가 행한 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둘째로, 십자가는 우리 입술에 진정한 자랑을 심어 줌으로써 교만을 내세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랑을 제거한다기보다 이제까지 우리 자신을 추구하던 자랑이 비로소 그분을 향하도록 방향을 바꾸신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1). 이처럼 십자가는 죄 가운데 자랑하던 우리로 하여금 사죄의 은혜를 누리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역사하던 사탄의 세력을 멸하여 우리가 받아야 했던 영원한 사망과 하나님의 진노를 철회하고 마침내는 우리에게 의를 부여함으로써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준다. 이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호흡하며 온전한 정신으로 그분을 찬양하게 된다.결국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자랑할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우리에게는 그분을 자랑해야 할 이유밖에 남지 않았다.3.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까지 ‘예수’는 그저 역사 속의 한 인물을 지칭하는 이름일 뿐이었고, 복음이란 주일학교 시절의 기억이나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였으며, 구원은 평범한 종교적인 사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예수’는 가장 고귀한 이름으로 들리게 되었고, 복음은 유일하게 좋은 소식으로 다가왔으며, 구원은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부귀보다 더 값진 선물로 여겨졌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유를 밝히는데, 이는 곧 우리 각자가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도 아니고 그분의 정체성을 알아차릴 만큼 똑똑해서도 아니며 심지어는 구원자가 필요한 우리 자신의 상태를 의식할 만큼 깨어 있어서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가 어떠한 환경에서 회개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갔든 간에, 그 배후에는 우리를 부르신 성부와 우리를 찾아오신 성자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신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 시작만이 아니라 중간 과정과 최후의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역을 하며 심고 물을 주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고전 3:7). 그리고 경건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모든 노력조차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고전 15:10). 결국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었고, 또 우리를 자라게 하시므로 영혼이 성장하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를 붙드시기에 마지막까지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고전 1:7-9).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재능이나 성과를 드러낼 때 그 원인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리라고 교만이 부추긴다면, 얼른 이 질문을 던져 정신을 차려야 한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 그 어떤 일에 대한 공로도 우리 자신이 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모든 일에 진정 감사할 수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주어진 선물로서 찬양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4. 만물이 다 우리의 것이다“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4:21-23). 우리는 교만에 설득당할 때가 있다. 우리가 추구해 온 무엇인가를 한순간이라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교만은 우리를 설득한다. 동료들의 찬사라든가 주위에서 보내는 존경의 시선, 또는 사람들의 환호나 특별한 소속감을 누리는 즐거움을 경험해 보라며 설득한다. 그러나 가볍게 보이는 그 제안에 따르는 대가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다. 교만은 우리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네면서 다른 모든 것을 대가로 요구하기 때문이다.D. A. 카슨(Carson)은 ‘십자가와 기독교 사역’(The Cross and Christian Ministry)에서 바울이 단순하게 진술한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라는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논리를 이렇게 풀어낸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 또 만물이 하늘 아버지의 것이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면, 만물은 우리의 것이 된다.”그러므로 인생의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말라며 교만이 속삭인다면,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곧 만물을 소유하신 우리 아버지가 인생의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기에, 우리는 다윗처럼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교만한 마음을 품으려는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고작 몇 마지기 땅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왕자와 같다. 아버지께 속한 모든 게 이미 자신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 말이다.교만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듯하지만 일시적으로 그렇게 할 뿐이다. 오직 하나님만 이 순간에도 모든 일이 합력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게끔 역사하시고 마침내는 우리에게 온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마 5:5; 롬 8:16-17).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했으며 그리스도는 성부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속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 하나님이 만물을 소유하신다. 그러므로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할 것이다(시 34:2)원제: Argue with Your Prid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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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를 풍성하게 읽는 다섯 가지 방법
by Bill Kynes
2021-07-05
모든 성경은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에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또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우리는 믿는다(딤후 3:16-17). 그러나 성경 속 몇몇 책은 다른 책들에 비해서 어렵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욥기를 읽을 참이라면, 당신은 여러 면에서 잘 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욥기는 특히 어려운 책이기 때문이다. 욥기는 어렵다욥기는 고통이라는 특히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책이다. 욥은 정말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공동체 안에서 그가 누리던 지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는 부요함, 자녀 그리고 건강을 한 순간에 끔찍한 방법으로 다 빼앗겼다. 이건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감당도 할 수 없는,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욥기가 어려운 이유는 이 책은 우리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선하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고통받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하지만, 이 책은 그 질문을 제대로 던지지도 않는다. 사실상 욥이 당한 재난 가운데서 드러난 하나님의 역할을 보면, 그건 당황스럽기조차 하다. 욥기가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이 욥의 친구들이 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데, 문제는 나중에 하나님이 그 친구들의 이야기가 다 틀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욥기 내용에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까? 그리고 만약 당신이 욥기를 본문으로 설교를 한다면, 하나님이 틀린 의견이라고 결론을 내린 구절을 가지고 도대체 어떤 설교를 만들 수 있다는 건가? 그럼 욥, 당사자는 어떤가? 겉으로 보기에 끝이 안 날 거 같은 욥과 하나님의 대화를 보면, 욥이 말하는 모습은 인내하는 게 아니라 아주 짜증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하나님과 논쟁하고 또 자신의 처지를 불평한다. 욥기는 그래서 하나의 아주 긴 한탄으로 구성된 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게다가 욥기는 전체 내용의 95%가 시로 구성되었기에 더더욱 어렵다. 욥기라는 이 시적 문학은 은유와 직유의 기술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히브리어 평행어가 주는 미묘한 뉘앙스까지 파악해야 하는 엄청난 민감성을 요구한다. 거기에 더해서 욥기 이해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욥기 저자와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거대한 문화적 차이이다. 욥기가 어려운 마지막 이유로는 이 책이 무려 42장으로 이뤄진 긴 책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장이 반복적이고 또 노골적일 정도로 우울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고, 욥과 친구들은 서로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서로 설전을 벌인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은 욥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욥의 인내’라는 말은 사실 ‘욥기를 읽는 사람들의 인내’라는 말로 바꾸는 게 더 말이 된다.” 아주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럼 어떻게 욥기를 읽어야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욥기를 읽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엄청난 유익을 얻을 수 있는데, 당신이 욥기라는 보석을 캐는데 도움이 되는 다섯 가지 힌트를 주려고 한다. 1. 욥기의 문학 형태를 이해하라욥기의 시작과 끝은 하나의 형태를 제시하지만, 욥기의 핵심은 이 책이 시라는 사실이다. 욥기는 고통의 본질에 대해 현실과 분리된 철학적 논문이 아니다. 실제 고통 속에 있는 한 사람과 그 사람이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다. 욥기가 산문이 아니라 시로 쓰였다는 것은 욥기가 우리의 이성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까지 감동을 주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시라는 형태는 욥이 경험하는 감정적 혼란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독자는 어떻게든 욥이 느끼는 감정 속에 동참해야 한다. 덤덤한 마음으로 욥기를 읽으면서 이 책이 가진 가치를 알겠다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욥이 느끼는 감정을 같이 느끼려고 노력해야 한다. 2. 욥기는 속독하는 책이 아니다무려 42장으로 이뤄진 욥기가 긴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통과 슬픔이 주는 감정적인 혼란은 길 수밖에 없다. 거기에 쉬운 답, 쉬운 해결책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치료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욥과 친구들이 주고받는 긴 대화, 그 속에 담긴 갈등과 혼란, 이 모든 것은 진짜 삶에서 만나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책은 욥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 결코 깔끔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답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실제 삶 속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흔히 경험하는 현실이다. 욥기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이 겪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는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정답은 만날 수 없는 것 같다. 욥기는 독자로 하여금 긴 여행에 초대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은 흔들리겠지만, 결국은 변화될 것이다. 3. 욥기 속 극적인 주인공들에게 주목하라세 친구가 욥을 대면하는 방식의 미묘한 차이점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그들과 욥의 논쟁이 더 격화될수록 친구들의 주장은 날카로워지고 더 적대적으로 바뀌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이라는 맥락에서 욥기 28장 속 지혜에 관한 담론이 어떤 기능을 하는 지 생각해보라. 그건 마지막 섹션이 등장하기 전에 잠깐 끼워넣은 일종의 간주극 같은 것일까? 왜 하필이면 욥의 마지막 이야기 후에 갑자기 신비로운 인물 엘리후가 욥기 32장에 등장하는 걸까? 욥기에서 엘리후의 역할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데에 있어서 저자는 독자에게 어떤 단서를 주고 있는 걸까? 욥기는 극적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걸작품이다. 이 책의 구성이 이 책의 메시지를 더 잘 전달하도록, 독자는 욥기의 구성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읽어야 한다. 4. 욥의 말을 공감하면서 읽으라욥은 처음에 우리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는 신앙고백과 함께 자신의 시련에 실로 거룩하게 반응한다(욥 1:21; 2:10).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가 잃어버린 것들이 그의 마음에서 점점 더 강하게 다가왔고, 슬픔과 불만의 말은 급류처럼 빠르게 그의 입술에서 분출했다. 고통의 처음에 욥이 경험했던 빛의 섬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깊은 어둠이, 영혼의 밤이 차지했다. 욥의 반항은 겉멋으로 치장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그것은 격렬한 고통과 슬픔의 강에 갇힌 사람에게서 터져나오는 폭발이다. 그러나 한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거칠게 말하고 있지만 욥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대면하고 싶어한다. 그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올 대답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관심이 있다.그리고 마침내 욥은 하나님의 칭찬을 듣는다. 그는 믿음 안에서 인내했다(약 5:11 참조).5. 욥이 제기한 문제들을 놓고 당신 스스로 씨름하라당신은 단지 하나님이 주는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라는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마지막 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책의 핵심 질문이 되어서 당신에게도 도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에 있어서, 나는 나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더 믿고 있는가? 불편하지만 그래도 안전한그렇다, 욥기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욥기는 신비함으로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당신이 눈을 뜨도록 만들 수도 있다. 또한 욥기를 통해 당신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더 공감하게 되고, 무엇보다 당신 자신이 고통을 만났을 때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준비될 것이다. 원제: 5 Ways to Rewardingly Read the Book of Job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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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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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읽기
엘리후
문학형태
시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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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놀라운 긴장
by Marshall Segal
2021-07-03
그들은 물에 빠져 죽을까봐 두려웠다. 내가 그들 처지였다면, 발목까지 찬 물이 점점 더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면, 그래서 조만간 배가 무서운 풍랑에 침몰될 거 같다면, 나는 아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미처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그들을 생각할 거 같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하다, 죄로 물든 인간이라면 그건 더더욱 그렇다(히 2:15). 단 풍랑이 치는 내내 잠을 자고 있던 그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배에 물이 차고 배를 뒤집을 것처럼 바람이 세차게 부는 무서운 자연의 재앙을 그는 자느라고 전혀 몰랐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낮잠이 이 사람의 낮잠처럼 엄청난 능력을 드러냈던가? 이 세상에 그 어떤 잠이 이 사람의 잠처럼 아름답게 빛났던가?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얼마든지 쉴 수 있었다. 사실, 나중에 제자들이 알게 된 것처럼, 그는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그는 너무 피곤해서 풍랑을 지나면서 잠을 자는 정도가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얼마든지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풍랑을 잔잔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의 제자들이 그를 깨워야 할 만큼 피곤을 느끼기도 했다.단 두 마디, “잠잠하라 고요하라”에 물결은 잔잔해지고 바람은 물러갔다. 제자들을 한번 상상해보자,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떨던 그들은 그 다음 순간, 하늘이 그들 앞에서 항복한다고 백기를 흔드는 광경을 목격했다. 세상 어디에서도 만난 적 없는 능력과 또 약함, 즉 그의 하나님되심(Godness)과 인간됨을 동시에 목격한 그들은 우리 중 누구라도 생각했을 바로 그 질문을 던졌다.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제자들이 바다에서 만난 그날 밤은 분명 말할 수 없이 웅장했겠지만, 그런 밤 조차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로부터 30년 전 어느날 밤에 비하면 초라해질 수 밖에 없다. 베들레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기 전에 수도 없이 많은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아이의 태어남은 완전히 그리고 영광스럽게 달랐다. 하나님의 아들, 온 우주를 손에 쥐고 있는 존재(히 1:3; 골 1:17)가 지금 연악한 아기의 모습으로 누군가의 팔에 안겨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우주 속 모든 은하계의 구석구석을 다스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놀랍게도 글을, 색깔을 그리고 동물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하나씩 배워야 했다.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그는 이미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사 9:6)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하나 더 생겼다. “태어난(newborn)”이다. 놀라운 십자가 아래에서 또 그가 부활하고 남긴 빈 무덤 앞에서 우리는 늘 찬양하곤 하지만, 그리스도의 위엄이 주는 신비함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그의 어린 시절이 더 짜릿하지 않은가? 어떻게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존재를 멈추지 않고 평범한 여자의 자궁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요 1:18), 그럼에도 일개 인간이 그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고?그리스도가 누구인가(christology)가 주는 신비함이 너무도 깊고 어렵다는 이유로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고 포기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의 놀라움이 가진 깊이와 무게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바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엡 3:8)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실은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실제로 누구였는가라는 문제 속에 담겨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일수록, 그것들을 제대로 보게 될 때 그는 우리의 필요와 상처 그리고 갈망을 더 잘 채워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무슨 우주항공 기술에서나 나올 것 같이 들리는 이 위격적 연합이라는 말은 사실상 놀라울 정도로, 아니 너무 밀접할 정도로 친밀(personal)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지고 있고, 그 둘은 결코 나눠질 수 없는 한 인격(person) 속에 온전하게 들어있었다.초대 교회에서 논쟁을 하던 당시, 그리스어 단어 hypostasis는 신성과 인성이 각기 가진 본성(물리, physis)과 구별되는 신격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쓰였다. 그렇기에 이 위격적 연합은 한 사람 안에 두 가지 본성, 신성과 인성이 다 들어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처럼 한 가지 본성만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사실 논쟁을 할 필요도 없고 혼란을 느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다 그의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만나는 이 매혹적인 긴장(tension)을 묘사하기 위해서 위격적 연합이라는 단어가 필요하다. 그는 진짜 하나님인가? 그는 진짜 사람인가? 우리는 성경이 분명하게 역사 속에 존재한 예수에 관해서 말하는, 하나님이자 또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최소한 이름을 붙이는 방식으로라도 답을 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긴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진짜 긴장이 아니다. 대신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또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본성이 한 사람 안에 거하는, 완전한 조화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는 하나님이 아닌 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고, 우리처럼 인간이 아닌 적이 없었다. 위격적 연합은 단지(또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두 가지 본성, 하나님되심(Godness)과 인간되심(manness)이 놀라운 한 사람 안에서 신비롭고, 분리할 수 없고 또 완전하게 구현된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가 잉태된 날 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원한 존재(eternal person) 위에 완벽한 인성을 덧입혔을 뿐이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격인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었다. 그럼으로 그는 상처와 고통, 유혹 그리고 죽음 앞에서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신성을 포기하지 않았고 또 다른 이의 몸을 빌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진정한 하나님이었고, 또 그렇기에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십자가에서 죽은 그가 누구이던지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은 아니고, 그가 흘린 피가 하나님의 피가 아니라면 그 어떤 다른 피도 우리의 죄를 사하지 못한다(히 10:4). 또한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물이 될 수 없다(히 2:17). 칼케돈서기 451년 10월, 교회 교부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이고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 불거진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 함께 모였다. 521명의 참석자는 칼케돈 신조(Chalcedonian Creed)를 작성했고, 그 신조는 그날 이후 하나님-인간(God-man)에 대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이해의 기초(ground zero)가 되었다. 이 신조는 예수님 속에서 어떻게 온전하고 완전한 신성과 인성이 서로 연결되어 함께 있을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어떻게 그 두 본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지도 말이다."우리는 이제 거룩한 신앙 선배들을 따라서 지금 한 마음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한 분이자 동일한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완전하고 동일한 하나님이자 또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분: 진정한 하나님이자 진정한 인간으로 고백하도록 가르치려 한다. … 이 두 본성을 인정할 때,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나뉘지 않으며, 서로 떨어질 수도 없으며…" 이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본성이 온전한 한 사람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위격적 연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고백은 신성과 인성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널리 퍼진 네 가지의 잘못된 생각을, 매우 주의깊게 선택한 다음 네 가지 부사를 통해서 바로잡아준다.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나뉘지 않으며, 서로 떨어질 수도 없으며” 첫 번째로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은 한 사람 안에서 아무런 혼란(confusion)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의 신성과 인성이 서로 혼란을 일으켜, 그 결과 세 번째 본성을 만들지 않는다. 신성과 인성은 서로 구분되어 있다. 그의 신성은 진정으로 또 철저하게 신적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다. 그의 인성은 진정으로 또 철저하게 인간적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인간이다.두 번째로 그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육으로나 영으로나 인간의 모든 경험을 다 하면서도 그는 결코 신적 존재가 아닌 적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 아닌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은 적이 없다. 성육신은 결코 어떤 중단(interruption)이 아니며 동일한 아들의 새로운 발현으로 인한 감소(subtraction)가 아닌 추가(addition)이다. 세 번째로 두 본성은 서로 구분되지만 그들은 서로 나뉘어있지 않다. 아마도 이 점이 제한적인 인간의 머리로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으로 목공일을 배우면서 동시에 그의 신적 능력으로 이 우주를 주관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어떤 구분이 없다. 그것은 우리 미천한 인간의 경험과 상상을 뛰어넘는 영역이다. 스테판 웰럼(Stephen Wellum)은 이렇게 썼다.“그리스도의 삶을 볼 때면 이렇게 묻게 된다. 누가 이런 일을 한 거지? 누가 이런 말을 한 거지? 누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은 거지? 그 대답은 언제나 같다. 하나님 아들(God the Son). 왜? 그것은 신성 또는 인성은 결코 그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것은 아들이 된 인간이 신성과 인성 모두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아들이 태어나서 세례를 받고, 시험을 받고, 변화하기도 하며, 배신당하며, 체포되고, 정죄받고, 그리고 죽을 때에만 가능하다. 바로 이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피를 흘렸다. 바로 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요구한 모든 의가 채워졌고 그렇기에 우리의 구원은 결국 하나님으로 인해서 가능했다. 바로 이 아들이 죽음에서 일어나 왕의 왕이 되어서, 주의 주가 되어서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하나님, 성육신한 아들’[God the Son Incarnate], 306-7).마지막으로 신성과 인성은 그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서로 떨어질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도 그건 마찬가지였고, 완전한 인간으로 하늘 보좌에 앉아있는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고 언제나 인간이며 언제나 한 위격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단순하지 않다인간인 우리 자신도 얼마나 신비하고 복잡한지를 생각해 본다면, 위격적 연합이 너무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자신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무한한 하나님, 하나의 본질에 세 개의 격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진 존재이니까 말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썼다.“우리는 죽는 존재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우리는 비참한 존재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열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약하지만 놀라운 일을 꿈꾼다. 우리는 일시적인 존재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영원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의 다양한 탁월함이 결합하여 우리 인간의 복잡함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더 밝게 빛난다”(‘예수님이 복음입니다’[Seeing and Savoring Jesus Christ], 32).우리가 스스로를 단순한 인간으로 치부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긴장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경이감을 가지고 더 깊은 예배를 체험하게 하는 대신 우리를 그로부터 오히려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 속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 근처에서만 머물게 되고, 가장 깊고 은밀하고 복잡한 우리의 영혼을 채우고 치료하는 예수님의 신비함을 결코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데에 있어서 얕은 곳에만 머무르게 되면, 예수님에 관한 진리는 우리 영혼에 아주 피상적이고 사소한 영향만을 미칠 것이고, 그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는 은밀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그의 자비함, 그의 공의로움, 그의 주관하심, 그의 겸손, 그의 용기, 그의 자애로움, 그의 하나님되심, 또는 그의 인간되심에 끌리기 마련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간이 아닌 단지 하나님으로만 본다면, 그는 때때로 너무 멀고 차갑게만 느껴질 것이다. 반면에 너무 그의 인간됨에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그의 초월하심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가 나와 가까이 있고 나와 관련이 있다고 느껴도 그의 거룩함과 존엄함은 조금씩 그리고 비극적으로 그와 관계를 맺으려는 내게 오히려 장애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복잡하고 매혹적인 긴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우리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모든 것이 다 필요하다. 자비로움과 공의로움, 주권과 겸손, 담대함과 자비로움, 인내함과 무서운 진노, 진정한 하나님과 진정한 인간.원제: No Mere God, The Fascinating Tension in Jesus Chris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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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
위격적연합
칼케돈신조
스테판웰럼
성육신
칼케돈 정의와 그리스도의 양성
by 이승구
2021-06-29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모두 성육신을 믿는다. 그런데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성육신 되었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와 그 성육신의 함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너무 지나치게 나아가면 성경에서 벗어난 이단(異端)이 되는 것이고, 지나치지는 않지만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아 비성경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생긴다. 우리들은 이런 점에 주의해서 이단이 되지도 말고, 이단은 아니지만 성경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성육신에서 일어난 일과 그 함의영원하신 성자의 인격이 인성(人性, human nature)을 취하여 들이신 일이니, 그 결과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신성의 한 인격 안에서 “나뉘어질 수 없게 연합된”(inseparably united and joined together)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성과 인성이라는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양성(兩性, two natures)이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united in a single person)는 사실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결과이다. 여기서 다음 세 가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이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일어난 일이다. 이와 꼭 같은 것이나 비슷한 것이 다른 존재나 사람에게서 나타난 일도 없고, 또 다시 반복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 1:5)고 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오직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만이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성질(divinity)도 가지시고, 참된 인간성(humanity)도 가지신 것이다. 둘째로, 오직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이 일로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변화됨 없이, 혼합됨 없이, 그리고 완전히 나뉘어짐 없이, 분리 불가능하게 한 인격 안에 연합되었다.셋째로, 그러므로 성육신 이전과 이후에 성자의 신성의 변화가 조금도 없고, 역시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이 신성이 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가 참된 인간성을 취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성육신 이해와 관련된 이단들과 그 극복성육신에 대한 요점들을 바로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서 이단[기독론에 관한 이단]이 되기 쉽다. 먼저 이렇게 지나치게 성경 밖으로 나가서 이단적 주장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겠다.첫째로, 예수님의 신성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은 그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 전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고, 계몽주의 이후의 사람들 중 상당수는 바로 이런 문제에 집착했다.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이후에 살면서, 또 계몽주의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을 분명하게 주장해야 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는 것은 이단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보다는 조금 못 하시다고 하든지, 그 권위와 영광에 있어서 차등이 있다 한다든지, 본래는 하나님이 아니었다가 하나님이 되신 분이라든지 등의 생각은 다 이단적인 생각들이다.둘째로,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다. 1세기 신약 성경이 기록될 때에도 이런 이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라고 말한바 있다. 이 말의 문맥 전체를 보면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 앞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그와 같이 고귀하고 거룩하신 분은 인간성을 실제로 취하실 수 없다고 주장하던 초기 영지주의자들과 궤를 같이 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오셨고 성경이 잘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의 인간성, 즉 인간의 영혼과 몸을 가지신 분이셨으나 죄는 없는 분이셨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히 2:14)고 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잘 생각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의 말을 유념해야 한다.셋째로, 예수님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있기에 두 분의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며, 신성의 인격과 인성의 인격이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의 한계 때문에 이점을 이해하는 일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다. 잘 생각해서 언어의 한계에 감금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언어의 한계 속에 있는 분들 중에는 인성을 취하셨으면 당연히 인간의 인격을 가진 것이 아니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처음부터 신성의 인격으로부터 생각해 왔다. 그래서 신성이, 더 정확하게는 신성의 인격이 성육신할 때에 인간성을 “취하셨다”(assumed)로 표현하고, “취하심”(assumptio, assumption)이라는 말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신성과 인성이 있어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게 “두 인격”(two persons)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셨던 신성의 한 인격 안에 인성을 취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를 잘 표현하고자 조금 어려운 말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은 그 자체로 인격을 지닌 것은 아니다, 즉 비인격적(anhypostasis)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인성이 비인격적인 것은 아니니, 그 인성은 영원하신 신성의 인격, 즉 로고스의 인격 안에, 즉 내인격적(enhypostasis)으로 취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조금 어려운 말이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성경적 가르침을 잘 유지하려는 분들이 이런 용어를 사용해서 성경적 진리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정리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유익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용어들을 불편해 하지 말고, 참으로 유용하게 사용하여 이단적 가르침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계신 그 예수님을 참으로 믿고, 섬겨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넷째로,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에 있으나 성육신 이후에도 그 신성이 인성에 영향을 미쳐서 인성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거나, 역으로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 신성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고, 성육신 상황에서도 각 성은 그 자체의 독특성을 그대로 유지한다(each nature retaining its own distinct properties)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이단이 된다. 유티케스(Εὐτυχής, c. 380–c. 456)가 생각한 것처럼 성육신 이후에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적인 인성(the divine human nature)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점에 대해서 이단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며,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대로 그분 자신과 그의 뜻을 잘 배워 나가야 한다. 과거 교회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공의회를 열어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바른 가르침을 따르도록 촉구하였다. 이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공의회 중의 하나가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역의 한 구역인 오늘날 카디쾨이[Kadıköy]라고 불리는) 칼케돈(Χαλκηδών, Chalcedon)에서 열린 칼케돈 공의회(451)이다. 여기서 520명의 대표자들이 함께 모여 5세기 기독교의 최선의 노력이 집중되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 없이(ἀσυγχύτως, inconfuse, inconfusedly), 변화됨 없이(ἀτρέπτως, immutabiliter, unchangeably), 분리됨 없이(ἀδιαιρέτως, indivise, indivisibly), 나뉘어질 수 없게(ἀχωρίστως, inseparabiliter, inseparably) 신성의 한 인격 안에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을 칼케돈 정의(the Chalcedonian Definition)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따라가려는 노력의 일환이었고, 이렇게 하여 기독교의 정통적 교의가 선언되고, 모든 교회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서는 이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정통파 사람들은 항상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자신들이 믿는 바를 표현하여 왔다.성경적으로 좀 더 철저하게 생각하기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개혁자들 역시 그리스도에게는 양성이 혼합 없이, 변화됨 없이, 분리됨 없이, 그리고 나누어질 수 없게 신성의 한 인격 안에 있다고 선언한 칼케돈 정의를 충실하게 믿었고 그렇게 표현했다. 루터파도 개혁파도 정통파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양성이 한 인격 안에 있으며, 그 때 신성과 인성은 그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고백한다.그런데 공의회 이후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에서 달리 생각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 모든 논의는 이미 칼케돈 정의를 받아들인 사람들 사이의 의견의 교환이므로 어떤 쪽으로 생각해도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좀 더 성경에 충실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복잡한 논쟁점들은 생략하고, 필자가 생각하기에 좀 더 성경적으라고 생각하는 개혁파적인 견해들을 요약해서 제시해 보려고 한다. 신성과 인성이 변화됨 없이, 혼합 없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인성의 특성들(its properties)을 상실하지 않고 인성인 한 피조물의 특성을 여전히 유지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시작이 있고, 유한성을 지니며,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몸에 속하는 성질을 가진다. 인성을 취하셨기에 그는 실제로 죽으실 수 있었고 그가 죽을 때 몸을 떠난 자신의 영혼(a real human spirit which left his body)을 성부에게 부탁하실 수 있었다(눅 24:46). 또한 부활로 말미암아 그의 인성이 불멸성을 얻은 후에라도 그의 인성의 성질은 변하지 않았다.그런데 그의 신성은 항상 창조되지 않는 신성으로 있고(his divine nature has always remained uncreated),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항상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다(filling heaven and earth). 심지어 그가 죽어 무덤에 계실 때조차도 그의 신성은 그 안에 함께 하기를 그만두지 아니하셨으므로(벨직 신앙고백서 19항, “even when he was lying in the grave; and his deity never ceased to be in him”) 죽음에 의해서도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아니하였다(they are not even separated by his death)고 표현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 신성은 하늘과 또한 온 세상을 가득 채우며 계셨다. 많은 사람들이 이점에 잘 유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성육신 이후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신성이 인성 안에만 있고 그 안에서만 작용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유명한 “그리스도의 인성 밖에서도”(extra humaum) 작용하시는 신성에 대한 주장, “인성은 인성이고 신성은 신성이다”는 주장, 그리고 “유한은 무한을 가둘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신성이 불변함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주장이다. 다만 우리들의 제한된 사고가 이를 잘 따라가지 않으려고 하는 문제점을 드러낼 뿐이다. 성경을 잘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로부터 제대로 추론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성경에 좀 더 충실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인성 안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 밖에서도 작용하였다고 말해야 한다.성경에 충실 하려던 칼케돈 정의에 좀 더 집중했던 개혁파의 강조들을 이해하고 따라가야 할 것이다. 이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전능한 능력으로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서 참 하나님이셨으며(true God in order to conquer death by his power), 몸의 연약성을 갖고 우리들을 위해 죽으실 수 있기 위해서 참 사람(truly human that he might die for us in the weakness of his flesh)이 되신 것임을 확신하며, 그 신성과 그 인성의 독특성이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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