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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
by Scott Hubbard
2021-06-23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추악한 죄인으로 여기는지와 관계없이 회개한 죄인들은 여호와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을 때에도 나아갈 수 있고, 죄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 순간에도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우리 내면이 미지근하거나 죽은 것처럼 느끼는 순간에도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이룬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가장 위대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 때문이다.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수 세기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언제쯤 그 길을 열어 주실지 고대하며 하나님의 임재의 빛이 가리워진 성전 밖에서만 기다려야 했다.90피트 밖에서만일 여러분이 옛 언약 아래에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특별히 레위 족속에 속하지 않았다면, 지성소에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약 90피트(약 28미터-역자 주) 떨어진 곳까지만 접근 할 수 있었다.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약속(레 26:11–12)을 성취하셨지만 그분의 거룩함은 멀리 떨어질 것을 명하셨다. 그분은 가까이에 계셨지만 반면 신중하셨고, 나타나셨지만 감추어지셨으며, 우리를 초청하셨지만 두렵게도 하셨다. 성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백성들과 가까이 있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성전이 말하는 모든 것은 결국 “너희는 감히 나에게 접근해서는 안된다”이다. 한때 에덴의 입구를 화염검으로 막고 있던 그룹들(Churubim)은 이제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섰다(창 3:24; 왕상 6:31–32). 그 막힌 장벽을 돌파하려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시내산의 소멸하는 불 앞에서 멸망하게 될 것이다(레 16:2). 사람이 태양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죄인이 보호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보다 더 안전할 것이다.매일 성전은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을 향하여 고요한 말씀을 선포하였다. 너희들에겐 속죄를 위한 중보자가 필요하다. 너희들에겐 중보해 줄 변호인이 필요하며 길을 만들어 줄 제사장이 필요하다.레위 지파시내 광야 시절부터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지파로서 사역을 감당했다. 나머지 지파들이 금송아지 앞에 절하는 동안에도 오직 레위 지파만큼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위한 열정을 보여 주었다(출 32:25–29). 그때부터 그들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 있었다(민 3:5–10). 하지만 머지않아 레위의 후손들이 그 조상들의 열정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백성들의 식량을 빼앗고, 수종드는 여인들을 욕되게 하였다(삼상 2:12–17, 22). 그들은 거룩한 것을 속된 것으로, 정한 것을 부정한 것으로 오염시켰다(겔 22:26). 그들은 물질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그분의 임재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미 3:11; 렘 2:8). 하지만 레위 지파의 몰락과는 별도로 지각이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권의 문제가 성전의 가장 밑바닥까지 점차 심각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위의 자손들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여전히 아담의 후손들이다. 그 중보자들 또한 자기 스스로를 위한 희생제물이 필요했다. 그들은 결국엔 죽었고 제단 위에 뿌려진 동물들의 피는 결코 죄를 씻을 수 없었다.우리가 필요로 하는 제사장은 레위로부터 올 수 없으며 아담으로부터도 올 수 없었다. 우리 제사장은 반드시 전적으로 다른 나무의 가지여야만 한다. 그는 마치 창세기의 멜기세덱과 같은 미지의 인물처럼 반드시 다른 줄기에서 온 자여야만 한다.멜기세덱의 반차시편 110편에서 다윗 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다른 “주님”께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우리들의 완전한 제사장 - 다윗의 시편 속 두번째 “주님” - 은 당신이 따를 패턴을 레위 지파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나타난 것처럼 구속의 역사 속에 갑자기 등장하는 멜기세덱에게서 찾았다. 독자의 입장에서 멜기세덱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는” 것처럼, 우리의 제사장도 반드시 그래야 한다(히 7:3).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는 반드시 제사장으로서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이” 계속 영원하셔야 한다(히 7:3).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장 – 왕, 또한 다윗의 후손이며 다윗의 주이신 그분! 그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렸던 분이다. 레위의 자손들이 제사장 중의 제사장이신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물러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주님의 대제사장 직을 통하여, 모든 제단의 연기는 마침내 멈추게 될 것이며, 스랍들(Seraphim)은 마침내 그들의 화염검을 거둘 것이며, 지성소의 문도 마침내 열리게 될 것이다.제사장 중의 제사장다윗이 시편을 기록한 지 수십 세기가 지나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다가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 주셨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로 오셨고,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할 왕으로 오셨으며,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제사장으로 오셨다.성금요일에 그 제사장은 당신의 성전에 들어가셨다. 골고다가 곧 그의 성전 산(Temple mount)이었고, 십자가는 그의 제단이었으며, 그의 몸은 열납된 제물이었다. 그 즉시, 세상의 모든 살인, 간음, 신성모독, 모략, 이기심, 앙심 그리고 증오까지도 그분의 어깨에 올려졌다. 하늘에서 칼날이 내려 왔고, 화염이 일어났다. 성자께서는 불타는 화염 가운데 죽으셨다. 만일 예수께서 레위 지파의 또 다른 자손이었다면, 그는 이미 먼지가 되어버린 다른 제사장처럼 잿더미 가운데 영원히 누워 계셔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레위 자손이 아니셨다. 그는 시작한 날도 없으며 생명의 끝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당신의 사역을 마치시고, 그는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히 7:16)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곧 하늘로 올려가셔서 아버지 우편에 앉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시든지예수님께서는 레위 족속이 결코 될 수 없는 제사장이시다. 그는 “거룩하시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는”(히 7:26) 분이시다. 그러나 또한 주님은 이 땅에서 유혹받는 그의 형제들을 불쌍히 여기신다(히 2:11–12; 4:15). 그는 가장 높은 곳에 앉아 계시며(히 10:12), 그럼에도 죄인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히 7:25). 이 땅에 살았던 모든 남자와 여자들 중에서 오직 주님만이 그 어떤 희생 제물도 필요없으셨다. 하지만 상상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히 7:26–27).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죄, 죄책 혹은 수치심 등 그 어떠한 것도 당신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90피트나 떨어진 성전 뜰에 마냥 세워 두도록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가까이 나아오라”(히 10:22)고 속삭이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동으로 만든 제단과 물두멍, 진설병과 촛대를 지나 지성소의 문을 열어라. 위엄하신 보좌는 우리의 높은 제사장 되신 예수께서 승리 가운데 좌정하신 은혜의 보좌가 되었다(히 4:14–16). 그리고 그가 계신 어느 곳이든지 우리는 환영받는다. 원제: Wherever He is, We Are Welcom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정진호
지성소
90피트
제사장
임재
죄인
성전
거룩함
복음
예수그리스도
멜기세덱
내가 선택받은 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by Keith A. Mathison
2021-06-15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썼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3-10).바울은 지금 에베소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창세 전에 택했다고, 그의 뜻에 따라 그들을 아들이 되도록 예정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에베소 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다 해당된다. 이 서신서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선택 교리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이 구절을 쓴 이유가 다름 아니라 에베소 교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이 이 구절에서 조금도 힘을 얻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이 구절 때문에 더 걱정하는 게 현실이다. 왜 그럴까? 바울이 교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쓴 선택 교리가 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에게 스트레스의 원인이 될까? 그 대답은 바로 다음 질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내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창세 전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면, 내가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들의 몸에 특별한 표시를 남기지 않았다. 선택받은 자들은 ‘선택받음’이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어떤 특별한 문신을 오른쪽 귀 뒤 또는 몸의 다른 곳에 가지고 있지 않다. 선택받은 자들은 어떤 특정한 인종 또는 민족도 아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세상 모든 족속과 나라에 다 있다. 그러면 내가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은 선택받은 사람인지 어떻게 안다는 것인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고 17세기 초에 열린 도르트총회(Synod of Dort)에서 다뤄진 문제이기도 하다. 도르트총회는 개혁 신학자들의 모임으로서 당시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의 가르침 때문에 야기된 논쟁을 처리하기 위해서 모였다.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여러 교리에 있어서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다른 노선을 취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선택 교리였다. 알미니안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진실한 믿음 속에 있는 믿음과 인내’는 ‘선택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가르쳤다. 다른 말로 하면, 알미니안은 ‘조건부 선택’ 교리를 가르친 것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하나님은 누가 믿음을 가지고 또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킬지를 미리 알고 있고, 그 예지에 따라서 구원할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상충한다는 믿음을 근거로 도르트총회는 그 교리를 거부했다. 그 대신 도르트총회는 조건없는 선택 교리를 가르쳤다. 바로 이 교리는 도르트신조(Canons of Dort)의 첫 번째 부분에서 자세히 설명되었다. 1장에서 6장까지 선택 교리의 맥락을 설명한 이후, 7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에 따라서 이뤄진 것인데, 그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순전한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른 은혜를 따라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 속에 사는 전체 인류 중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일정한 숫자의 사람들을 선택했다. 이것은 선택받은 자들이 그 본성에 있어서 택함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가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택받은 자들도 동일한 비참함 가운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부터 중보자로, 또한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서 세운 그리스도를 통해 이 일을 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 죄에서 벗어나게 하고 말씀과 성령으로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교통에 이르게 한다.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 믿음을 갖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의롭다 하고 더 나아가 영화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과의 교제를 통해 그들을 보호하고 영화롭게 만든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스런 은혜의 풍성함을 찬양하게 함으로 당신의 자비함이 드러나도록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우리 중에서 앞으로 믿을 것 같은 사람을 미리 알아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선택했기에 우리가 믿게 되는 것이고, 이는 오직 한 가지 조건에만 달려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른 은혜’라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른 은혜’에 따라 선택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신조는 바로 12장, ‘선택 받았다는 확신’에서 그 문제를 다룬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원하고 불변하는 구원을 받는 선택에 대한 확신은 그 확신에 대한 정도와 방법이 다양하지만, 선택받은 자에게 때가 될 때 반드시 주어진다. 그런 확신은 결코 하나님의 숨겨진 깊은 일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의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구원받는 자의 열매를 확실하게 맺을 때 주어진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과 충성스런 경외심, 죄에 대한 거룩한 탄식, 그리고 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과 갈증 등이다.이 내용을 토대로 해서 살펴볼 몇 가지가 있다. 1. 모든 기독교인이 다 같은 강도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확신은 종종 의심과 뒤섞인다. 2. 하나님의 숨겨진 일들을 조사한다고 선택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귀 뒤에 있는 신령한 문신 같은 것을 찾는 이들이 많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일에 접근할 수 없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시점에서 이뤄진 선택을 놓고 우리가 지식을 통해서 그 여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3. 선택 여부를 아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구원받는 자의 확실한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과 충성스런 경외심, 죄에 대한 거룩한 탄식, 그리고 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과 갈증 등”이다. 예수님은 열매를 통해서 알 것이라고 말했다(마 7:16). 당신 또한 당신의 열매를 통해 자신을 알 수 있다고 도르트신조는 말한다. 자, 어떻게 선택받았음을 알 수 있을까? 선택받은 자의 열매가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봄으로써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직하게 자신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는지, 내 죄를 놓고 애통하고 또 회개하는지, 성령의 열매를 나날이 더 맺고 있는지,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지,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선택받은 사람의 열매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선택은 보이지 않는 원인이다. 그러나 영적 열매는 눈에 보이는 결과다. 우리 눈에 선택의 원인은 보이지 않아도 선택의 결과는 관찰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삶에서 선택받은 사람의 열매가 드러난다면 나도 또 다른 사람도 선택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만약에 죄를 범한다면, 그것은 내가 선택받지 않았기 때문일까? 현재 우리는 죽음의 육신 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결코 죄 없는 완벽한 상태에는 이를 수 없다(롬 7). 그러므로 선택받았다면 죄가 없는 완벽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간주하는 한, 계속해서 의심에 뒤덮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의 열매는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벽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쳤다. 애초에 예수님이 제자들이 당장에라도 죄없는 완벽함에 이르기를 바랐다면, 그런 기도를 가르쳤을 리가 없다. 육신의 정욕을 죽여야 하지만, 그럼에도 죄를 지었을 때, 선택받은 사람이라면 거룩한 애통과 진실한 회개라는 선택받은 자의 열매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요1 1:9).하나님의 숨겨진 일을 찾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도르트신조가 가르쳐주는 대로 선택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에베소서 1장을 읽고 이 선택에 관한 교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은혜로 인한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모든 영광을 받아야 한다. 원제: How Can I Know if I Am Elect?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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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itlin Miller
2021-06-11
나는 내가 가진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일반 대학을 다녔는데, 지금은 그때의 경험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당시 접한 사상들과 사람들은 내게 정보를 주었고 또 도전이 되었으며 무엇보다 오늘날까지도 매일 확신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도록 나를 단련시켰다. 교회에서 받은 훌륭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한 해 한 해가 지남에 따라 나는 인간적인 교리가 가진 교활함과 교묘함의 강하고도 미묘한 설득력에 점점 더 빠지기도 했다(엡 4:14).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반대하는 다양한 논쟁과 의견은 바람처럼(고후 10:5) 교실, 캠퍼스, 학교 간행물, 학생 단체 및 복도에서의 대화를 휩쓸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조차 제대로 준비되지 않는다면 이런 설득력 있는 거짓말에 얼마든지 좌초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경계심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오직 변하지 않는 진리를 향해서만 준비한다면, 그들의 거짓말은 도리어 우리의 믿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할 것이다(마 5:13-14). 캠퍼스에서 싸운 네 가지 거짓말대학에 들어가 만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려 하거나 그들이 우리를 세상 속으로 밀어넣지 못하도록 하려면, 무엇보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대학 환경과 교실은 기독교인에게 위험한 곳이다. 어린 기독교인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이런 위험에 닥치더라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캠퍼스에서 만나는 다음 네 가지 거짓말을 잘 숙지해햐 한다. 1. 믿음은 종교에만 필요하다영어 또는 과학 과목 첫 번째 시간부터 교수들은 종종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는, 분열적인 가정 하에 학기 전체 커리큘럼을 짠다. 통상적으로 이런 가정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자연주의나 무신론의 대척점에 둔다. 마치 자연주의와 무신론은 그 자체로 그 안에 다양한 믿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이론들도 우주의 시작, 삶의 의미, 경이감의 체험, 인간 존엄성의 근원 그리고 선과 악을 규정하는 보편적인 도덕 논리 등에 대한 아주 취약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과학적인 관찰만으로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그 어떤 가치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그들의 많은 주장이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은 그들 중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나는 단지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교수를 만난 적이 없다. 누구나 다 원자, 바람, 자력, 중력 그리고 팽창하는 은하계와 같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인정한다. 우리는 힘이 일으키는 영향을 관찰함으로 또 그 원인을 관찰함으로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말이다(롬 1:19-20). 게다가 모든 교수는 성경보다 훨씬 더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에 근거해서도 얼마든지 과거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이다. 우리가 증거에 근거해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증거에 근거해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단지 경험적인 증거에만 의존하는가 아니면 기독교가 바탕을 두는 것처럼 역사적, 논리적, 도덕적 그리고 철학적 증거를 통합한 내용을 근거로 하는가이다.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논할 때 생기는 문제는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었듯이(롬 1:18-19), 죄성을 바탕으로 그 증거를 거부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성향이다. 2.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이 세상에서는 어떤 종류가 되었든지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믿을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절대로 없다’는 이런 식의 일방적인 주장 자체가 절대적 진리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또 어떤 이들은 누군가가 특정 관점으로 치우치는 순간 그 관점은 더 이상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족, 문화, 그리고 경험이 주는 영향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특정 믿음에 치우치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영향이 우리로 하여금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믿게 한다면, 그 사실 때문에 지구가 덜 둥근걸까? 그런 환경적인 영향을 받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은 친구들에게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이유를 교실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편협하고 고집스런 인간이 되는 걸까?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강요하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드러낸 진리와 대항하는 모든 주장이 믿을만한지 테스트해야 한다(살전 5:21; 행 17:11).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우리가 어떤 특정한 믿음에 더 치우쳐져 있기에 그 믿음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거짓말에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개인적인 경험이 선입관을 주어 어떤 특정한 믿음을 갖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 경험에만 의존하는 또 다른 종류의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그 자체다(요 14:6). 진리의 사람은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믿는다고 예수님이 말했다(요 18:37). 3. 네 자신만의 진리를 따르라어떤 이들은 신앙의 필요성과 절대 진리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 속에서 그것을 찾으라고 말한다. 대학 캠퍼스의 많은 학생 그룹과 각종 운동은, 인생에서 가장 고귀한 추구이자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이 “당신만의 진리를 살아내는 것”, 즉 “당신 스스로 하고” 또 “당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육체가 갈망하는 대상에 따라서 당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도덕 여부를 판단하며 또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탄은 수 세기 동안 인간에게 미끼로 던진 유혹을 교묘하게 숨겨왔다. 호색과 욕정, 그리고 불의에 빠짐으로 우리의 마음은 무감각해질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졌다(엡 4:18-19; 롬 1:24-25). 하나님이 정한 경계 안에서 그 부요함을 누리며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경계를 숨 막히게 하는 것으로 바라보라는 속임수에 빠짐으로써 우리는 영혼을 만족시키는 하나님을 떠나 지속적으로 이 세상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 계좌가 바닥을 드러낼 때,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표준이 절망을 가져다줄 때, 세상 명성 뒤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 그리고 밤새도록 이어진 광란의 파티가 끝나고 찬란한 아침을 맞을 때면,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음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진리가 가져다 주는 굳건한 반석 대신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이 세상의 모래에 갇히고 지배받을 때, 사탄은 우리를 죄의 공허함, 무력감의 불안, 그리고 불만족의 피로에 빠지게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내면의 시선에 의존하여 삶을 사는 것은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고, 사실상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주는 생명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말한다(엡 4:17-18). 우리가 살아 움직이고 또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오로지 창조자 안에 있을 때 뿐이다(행 17:28). 그리고 언제나 선하고 믿을 만하며 끝까지 지속되는 갈망은, 내적인 모순투성이인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4. 문화는 언제나 진보한다대학생의 용기, 추진력, 창의성 및 기술 혁신은 세계에 놀라운 영향을 미치곤 한다. 이는 교회가 그들에게 투자하고 또 그들로 인해 새롭게 되는 유익을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대학 시절에 열린 가능성이 가져다주는 모험에의 열정을 느꼈다. 특히 세상의 영원한 선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라는 부르심을 느끼며 인생의 모험을 하고 싶은 강한 충동까지 느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문화적 흐름에 이끌리는 것을 보았다. ‘진보의 길’과 ‘역사의 옳은 편’이라는 미명 하에 이것은 사실상 파괴로 이어지는 넓고 넓은 길이다(마 7:13). C.S. 루이스는 수십 년 전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당신이 지금 잘못된 길에 있다면, 진보는 바로 거기서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 바른 길로 가는 것이다. 바로 그 경우에는 가장 먼저 몸을 돌리는 자가 가장 진보적인 사람이다… 인류가 뭔가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우리는 지금 잘못된 길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인생 어디에서나 우리는 선한 싸움을 기꺼이 싸우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딤전 6:12). 그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현실을 관장하고 있는 영적 세력인 사탄을 대적하는 것이다(엡 6:12). 우리를 향한 조롱이나 호전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듣는 인간의 칭찬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 만날 하나님의 선한 기쁨이 가져다 줄 상급이기 때문이다(갈 1:10). 아무도 당신을 속이지 못하게 하라누구도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속이게 하지 말라(살후 2:3). 당신의 믿음과 희망을 유식한 교수에게 두지 말라. 인터넷에서 만나는 믿지 않는 자들의 헛된 논쟁에 설득당하지 말라. 세속주의와 과학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굶주림을 해결하고 신에 대한 필요성을 없애겠다는 건방진 주장에 낙심하지 말라. 믿음의 길에서 만나는 불과 같은 시련에 결코 놀라지 말라(벧전 4:12). 대신 믿음을 가진 지혜로운 교수들을 찾으라. 영감 받은 성경 저자들, 교회의 신실한 리더들, 지금 당신과 함께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을 찾으라(히 12:1).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라(요 1:1).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라(약 1:5). 그리고 당신 자신이 교수가 되어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이 되라. 그리고 궁극적으로 당신이 뿜어내는 기쁨을 통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아깝지 않은 진리의 보물을 찾았음을 증명하고(마 13:44), 또한 당신이 믿는 것이 진리임을 사랑을 통해 증명하라(요 13:35). 원제: Four Lies My Teachers Told M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복음
변증
진리
문화
루이스
정체성
세속주의
예수그리스도
기도
지혜
이단적 만인구원론에 물든 세상
by Jonathan Tjarks
2021-06-10
대부분의 미국인은 유니테리언 만인구원론을 신봉하는 자(Unitarian Universalist)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들 스스로가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물론 미국에서는 오직 0.3퍼센트 인구만이 유니테리언 만인구원론을 종교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로 확인되지만, 그들의 신앙관은 우리를 둘러싼 문화에 광범위한 영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객관적으로 옳고 그른 신념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는 게 유니테리언 만인구원론이 내세우는 핵심적인 메시지다.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현대 사회에 그런 메시지는 매력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가 상위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창조주 없이 인간은 있을 수 없다. 이 땅의 어느 농작물이나 나무처럼, 인간 역시도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창조되었다. 만일 우리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면, 그에 따른 결과는 반드시 주어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이는 사실이다.그런 점에서 이사야 5장에 소개되는 포도원 비유를 잠시 생각해 보겠다.포도나무와 권리이사야는 유다를 침공한 앗수르 군대가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할 때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는지를 처음 네 장에 걸쳐 설명한다. 그 침공에는 영적인 의미가 깔려 있었다. 즉 유다 백성이 그들의 창조주를 버리고 그분의 계명을 무시했기에 바로 그 반역에 대해 심판받게 된 것이다. 이는 처음에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부터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심판이다.이 심판은 매우 엄중했다. 이에 이사야는 그 백성에게 들이닥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어떠한지를 일깨워 주고자 했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는 포도원 비유를 소개하게 된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이사야도 좀 더 친숙한 이야기를 들어 새로운 맥락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면 그 백성이 더욱 선명하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1-2).이사야가 설명하는 대로라면, 유다 백성은 포도원이고 약속의 땅은 기름진 산에 비유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기에 포도나무를 심으신 분이다. 또한 이 맥락에서 좋은 포도 열매는 공의를, 나쁜 포도 열매는 죄악을 나타낸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어 이제 그분이 열매를 제하고 땅을 갈아엎고자 하시는 계획을 보여 준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사 5:5).우리는 포도나무의 관점으로 이 비유를 바라보아야 그에 함축된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왜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가?’ ‘포도나무가 스스로 원하는 열매를 맺을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도대체 무엇이 나쁜 열매고 무엇이 좋은 열매인지를 포도나무에게 알려 주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미국에 만연한 종교이러한 물음에 답변하는 일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의 과제다. 즉 대부분의 미국인이 가진 세계관에 대항하여 답변을 찾아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문화는 독립성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누구도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든가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우리 스스로 인생을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연방대법원 대법관직에서 은퇴한 앤서니 케네디(Anthony Kennedy)는 이러한 시대정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표현했다. “자유의 중심부에는 바로 존재의 개념과 이 세상과 인생의 신비에 함축된 의미를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자리한다.”이와 같은 케네디의 발언처럼, 하나님도 그러한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는 이 세상에 관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믿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아무 답변이나 하도록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만일 이 세상이 우연의 산물이고 인간이란 자의식을 가졌을 뿐 지구상의 여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가치를 지닌 존재라면, 이 짧은 인생에 어떤 의미도 있을 수 없다. 그저 인생을 즐기는 일 외에는 바랄 게 없다. 그러나 혹 반대로,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가 계시며 인간은 바로 그분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라면, 우리의 존재 목적은 그분을 알고 경험하는 데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이러한 믿음을 갖는 이상, 선악은 더 이상 우리 스스로 규정할 수 없는 개념이 된다.이사야는 후반부에 가서, 지음 받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에게 의문을 품는 일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이렇게 설명한다.“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아버지에게는 무엇을 낳았소 하고 묻고 어머니에게는 무엇을 낳으려고 해산의 수고를 하였소 하고 묻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사 45:9-12).유니테리언 만인구원론을 따르던 어린 시절나의 경우는 부모님이 유니테리언 만인구원론을 주창하는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유니테리언 사상과 만인구원론 사상을 함께 받아들이며 성장하게 되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이 두 가지 사상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유니테리언 사상은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일신론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예수님에 대해서는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견해다. 또한 만인구원론 사상은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이 결국에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다고 믿는 견해다. 이 두 가지 사상은 서로 융합되어 하나의 종교로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핵심에는 우리의 믿음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무엇이든 믿을 자유가 있다는 신조가 자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종교는, 진정한 신앙이 필요 없는 교회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딱 맞는 교회를 제시하고 있다.나는 어린 시절 그런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배웠다. 당시 우리에게 성경은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였고, 주기도문은 다음과 같은 버전으로 대체되었다.“사랑이 우리 교회의 교리고, 진리 탐색이 우리 교회의 성례며, 봉사가 우리 교회의 기도다. 평화 가운데 더불어 살고, 자유 가운데 지식을 추구하며, 교제 가운데 인류를 섬기자. 그렇게 우리 모두 선언하노라.”여기서 ‘진리 탐색’(quest for truth)이란 독립선언문에 언급된 ‘행복 추구’(pursuit of happiness)와 유사한 표현이다. 무엇인가를 탐색한다는 말은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음을 함축한다.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이 새로운 나라에 살게 된 시민들에게 행복을 보장하지 못했듯이, 유니테리언 만인구원론을 세운 자들도 그 교인들에게 진리를 보장하지 못했던 것이다.객관적으로 좋은 (혹은 나쁜) 열매나는 어른이 되면서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실제로 그 교단에서 자란 아이들 중 12.5퍼센트 정도만이 끝까지 남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미국인의 삶 자체에 그러한 사상이 기본적으로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늘상 경험하는 그 사상을 쫓으려고 굳이 일요일에 교회에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정말로 그 사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러한 교단에서 탈퇴하는 데서 나아가 전혀 다른 신앙을 가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이 세상과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는 신앙, 우리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우리 자신에 관한 타인의 생각을 초월하는 진리에 근거한 신앙을 가져야만 한다. 나의 경험으로는, 기독교인이 될 때 일어나는 가장 강력한 변화가 바로 거기에 있다. 자신의 정체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에게도 그럴 듯하게 보일 필요가 없다.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든, 나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더 나아가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를 결정하는 이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나는 그 모든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어떤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이 땅의 삶에서 모든 이에게 주어진 선택 사항은 바로 그 객관적인 진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인 답변을 찾아 헤맬 것인가이다.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선악의 개념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선악이 실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백성에게 바로 그 사실을 일깨워 주고자 했다. 이 세상에는 객관적으로 좋고 객관적으로 나쁜 열매가 존재한다. 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과일가게에 한번 가 보라. 제정신이라면 누구라도 포도원에 나무를 심고 계속해서 나쁜 열매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쁜 열매만 맺는 포도나무를 땅에서 뽑아내는 일이 혹 가혹해 보일지라도, 그게 실은 유익한 일이다. 포도나무는 특정 열매를 맺기 위한 목적으로 거기에 심겨졌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복음의 진리만이 유니테리언 만인구원론에 물든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운 물음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만들어 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또 그렇게 애써 찾아낸 답변이 왜 그리 시원찮은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열매를 맺는 인생의 답변은 따로 있다. 그 답변은 이천 년 전에 우리에게 주어졌다.원제: Your Neighbor Is Probably a Unitarian Universali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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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의 노크 소리
by Christopher Gordon
2021-06-05
수년 전이다. 앞마당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는데, 대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계십니까! 혹시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는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소리친 사람은 광신도가 아니었다. 내 영혼의 상태를 진심으로 염려하며 전도하려는 평범한 성도였다. 그는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간청했다. 나는 전도하고자 하는 그 열의에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런 접근에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면, 그 문은 결코 열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흔히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오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 오해는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라고 외치는 복음의 일꾼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는 왕이 아니라(시 2:2), 우리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를 받아주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하인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전락시킨다. 마치 우리의 승낙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마냥 그분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이 없으면 안 되는 자신의 절망적인 필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정말 오늘날 전도할 때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면,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모시는 일이 그리 중요하게 여겨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이처럼 예수님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다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근거해서 강조되고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구절은 신자 개개인의 마음 상태를 다루고 있다기보다 라오디게아 교회 전체에 회개를 요청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의 사명에서 이탈해 있었기 때문이다.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라오디게아는 깨끗한 물이 부족해서 수로를 통해 주변 지역의 온천수를 끌어와야 하는 조건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물이 그 도시에 이를 때가 되면, 물은 자주 오염되고 미지근해져서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그처럼 악취 나는 미지근한 물에 빗대어 설명하셨다. 때때로 그런 물을 마시다가 역겨워서 토하게 되듯, 예수님도 쓸모없게 되어 버린 교회의 상태를 보시며 토하여 버리겠다고 경고하신 것이다.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지닌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그 교회가 스스로를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지적하셨다. 한마디로 자신이 영적으로 빈곤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었다(계 3:17). 그러면서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겉으로 드러나는 번영만을 추구하며 복음은 뒷전으로 미루고 있었다. 그들의 사역은 교만과 자신감으로 채워져 있었지, 영혼을 살리는 말씀 증거를 위해 예수님을 의지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의 메시지는 스스로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해 선포하며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이끄는 사역은 더 이상 급선무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교인들 자신의 계획이나 역량 또는 교회에 대해 저마다 품은 기대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그들의 사역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이끌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의만 드러내는 사역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눅 5:32).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심각한 경종을 울리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여기서 문을 두드리는 이미지는 자신의 사명을 망각한 교회를 훈계하고 다스리고자 하시는 그분의 의지를 보여 준다. 즉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분의 음성 듣기를 거부한다면, 그분이 직접 교회를 심판하기 위해 문을 여시겠다는 경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교회가 문을 열고 회개하라는 그분의 음성에 순종한다면, 그분이 교회에 거하시며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자신의 임재를 누리게 하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이처럼 요한계시록 3장 20절이 보여 주는 예수님은 결코 마음의 문을 열어 달라며 우리에게 애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구절을 각 개인에게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겉으로만 내세우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 엄중한 징계를 받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차원에서 이 본문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구절은 문맥상 교회를 향한 회개의 부르심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타락한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메시지를 등한시하고 외형적인 번영만을 추구하며 자신만만해하는 교회에 회개를 요청하고 있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만일 그와 같은 회개의 요청을 거부한다면, 교회는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도 스스로의 능력을 확신하며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에 소홀하게 된다면, 더 이상 참된 교회로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주님이 토하여 버리시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이는 1세기 라오디게아 교회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경고다. 우리가 교회를 키우려고 수행하는 모든 프로젝트와 노력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전하기 위해 지속하는 수고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기 위해 추구하는 열심인지 돌아볼 문제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노크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러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결국 교회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길 잃은 영혼이 주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하는 본연의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원제: Revelation 3:20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회개
믿음
라오디게아
전도
복음
교회
기독교와 성육신의 신비
by 이승구
2021-06-04
타락한 사람들을 위한 구원자를 보내주신다고 우리의 첫 부모인 아담과 하와(창 3:15)와 거룩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때가 찼을’ 때에(갈 4:4) 참으로 그 ‘구원자’를 보내주셨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다. 그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구약의 약속을 중요시하고 그 약속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그 성취를 말해왔다. 놀라운 것은 다른 이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 즉 ‘성자’(God the Son)가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성자를 때로 ‘말씀’(Logos)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말씀이 인간성을 취하신 일을 우리는 전통적으로 ‘성육신’이라고 부른다(요 1:14).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나사렛 예수로 사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셨다.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다가(행 3:21) 다시 오셔서 구속을 온전히 이루실 것이다. 이 ‘그리스도’가 없다면 기독교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기독교에서는 가장 기초가 되고, 핵심적인 일이다. 과연 이 성육신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진 것인지를 살펴보자.성육신에서 이루어진 일성자는 참된 인간성을 취하셨다. 또한, 성자는 영원하신 신격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의 위격성을 신격이라고 하며, 그중에서 ‘성자’는 그가 영원부터 가지신 신성에 더하여 인간성을 취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성이 인성을 취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성부나 성령은 이렇게 인성을 취하지 않으셨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직 성자만 그가 본래 가지신 신성에 더하여 인성을 취하시는 놀라운 일을 하신 것이다.그것도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그 강하고 순수한 인간성이 아니라, 타락으로 인해 연약해진 인간성을 그가 취하셨는데, 죄는 없으신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셨고, 일정한 기간 동안 이 세상에 살았어도 죄가 없는 분이셨다는 것이 성육신의 신비인 것이다. 성자는 성육신을 위해서 성관계 없이, 즉 남성의 관여가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복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 수태되셨다. 이런 일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이런 일이 그녀에게 일어 날 것이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나는 남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눅 1:34: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성자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동정녀에게 수태되는 방식을 통해 영원하신 신성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성을 취하심으로 성육신 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갈 4:4), 그것도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것(마 1:23, 25, 눅 1:27, 29, 사 7:14)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라고 말한다. 그것이 기독교라고 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님이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취하셨음을 명확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인간성을 취하셨으므로 그는 목마르기도 하셨고(요 19:28, 4:7), 주무시기도 하셨다(마 8:24;막 4:38). 신성으로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시 121:4)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으로는 졸기도 하시고 주무시기도 하신 것이다.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운 성육신의 신비의 한 측면이 여기에 있다.이 때 성자는 인간의 몸만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의 영혼도 취하셔서 참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신성을 가지신 한 사람이 있게 된 것이다. 오직 나사렛 예수만이 그런 분이시다. 오직 그만이 신인(the God-man)이시다. 이 신인을 인정하고 그 앞에 있을 때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성육신과 관련하여 기독교가 아닌 것들그러므로 성자가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부인하면서 예수님은 그저 온전한 사람이고, 우리의 좋은 선생님이며, 모범이라고만 하는 소시니우스주의나 유니테리언주의, 여호와의증인이 참된 기독교가 아니듯이, 성자의 온전한 신성을 부인하면서 ‘성부 보다는 조금 못하신 하나님’, ‘피조된 하나님’, ‘하나님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아리우스주의도 진짜 기독교가 아니다.또한 성자는 온전히 하나님이시니 졸지도 아니하셨다고 하는 생각은 비기독교적인 것이며, 성자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몸만을 취하셨다고 하면서 그가 인간의 영혼을 취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이단이며 기독교적 가르침이 아닌 것이다.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따로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 그는 신성의 인격과 인성의 인격, 즉 두 인격을 가졌다고 하는 것도 이단적 가르침으로, 이런 것을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는 이단이라고 한다. 또 그것의 변형으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셨을 때는 더 이상 인간성이 필요하지 않아서 이제는 그가 다시 신성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옳은 것이 아니다.그리고 성육신에서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에 있다는 것을 잘못 이해해서, 이제는 그 인성과 신성의 혼합이 일어나 인성도 아니고 신성도 아닌 제3의 성질로 변하여 신성화된 인성을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단적 생각이다. 그것을 주장했던 유티케스 또는 유티쿠스란 이름을 따서 유티케스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열한 모든 것들은 칼케톤 공의회(451년)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있는가?그러므로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 16:15)라고 질문하고 계신다. 열두 사도의 대표자로 베드로가 잘 대답하여 칭찬을 들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바르게 고백해야 한다. 나사렛 예수가 ‘신적인 메시아’이심을 제대로 고백하는 곳에 기독교가 존재한다. “예수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다”라는 것이 최초의 기독교적 선포(kerygma)였고, 우리의 본래적 신앙고백(credo)인 것이다.이 대답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타락했을 때, 그 몸과 영혼이 다같이 타락했기에 인간의 몸과 영혼을 다 취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구속과 부활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심으로써 영혼과 몸 전체로서의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인간성의 몸과 영혼을 다 취하셨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은 취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하던 라오디게아의 감독 아폴리나리우스와 같이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이단적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인간성 전체를 취하셨음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해오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도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라고 했다(히 2:14). 우리의 몸과 영혼을 다 구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간성 전체, 즉 인간의 몸과 영혼을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고 믿는 것이 성육신을 바로 믿는 것이다.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마 1:23). 이것을 바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기독교를 없애는 꼴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 그와 함께 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유일한 참 사람됨이 있음을 천명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참 사람됨을 구현해가며,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도록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신학
교리
성육신
구원자
삼위
로고스
소시니우스
유니테리언
아리우스
신앙고백
호세아에게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하신 이유
by Derek Bass
2021-06-01
만일 그리스도인인 친구가 하나님이 자기더러 행실이 건전치 못한 여자와 결혼하라고 명하셨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뭐라 말해줄 것인가? 적어도 지지해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결혼이나 데이트를 선교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해 주고 싶을 것이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그렇게 하도록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호세아의 예언이 유명한 이유는 호세아와 고멜의 수치스러운 결혼 때문이다. 우리의 질문은 명확하다. 왜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 명하셨을까?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은 말뿐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사 20:2–4; 겔 24:15–27). 그들은 듣는 자들이 돌이켜 언약을 지키도록 촉구하는 언약을 위한 기소자였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메시지를 몸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울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고통을 육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하고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생생한 예가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이다.여호와를 버리고 부정을 저지르다호세아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신랑이며, 이 언약을 배신하는 것은 결혼 생활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는 토라(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편집자 주)의 주제를 이용한다. 결혼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매춘은 우상 숭배를 나타내는 은유로 쓰였다.황금 송아지 사건 직후, 출애굽기 34장은 그 땅의 주민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교제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들과 섞이면 그들과 결혼하기 시작한다. 민수기 25장에서 보여주듯 종국에는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출 34:15–16) 범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에 결국 이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고 모세는 선언한다(신 31:16). 언약의 남편을 버리고 부정을 저지르고 다른 신들을 음란하게 섬겨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키고 그들의 부정함으로 인해 여호와가 그 백성을 버리실 것이라고 모세는 말한다(신 31:17).호세아가 몸으로 표현하는 예언은 정확히 이것이다. 호세아의 사역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는 여호와의 명령으로 시작하는데, 이 명령은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호 1:2)라는 사실에 그 뿌리를 둔다. 이 사역은 자녀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에서 계속된다. 딸을 ‘로루하마’(호 1:6)라 짓고 아들을 ‘로암미’(호 1:9)라 지은 것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여호와의 언약의 핵심 국면이 뒤집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부정을 저지르며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출애굽의 약속은 파기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하지만 이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호세아 3장 1절에서 여호와는 그의 선지자에게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같은 여자를 말한다. 여기서 무게 중심은 선지자적 상징 행위(sign-act)로 호세아에게 그대로 모방하라고 하신 여호와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믿음이 없다 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시지 않는다. 호세아 11장 8–9절은 선언한다.“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중략]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그리스도인들은 종종 호세아 1–3장을 읽고는 “정말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선지자에게 ‘멍에를 함께 메지도 않은’ 여자와 결혼하라 명하실 수가 있지? 결혼이나 데이트를 선교로 생각해도 괜찮은 건가 봐”라고 말한다. 그것은 호세아를 잘못 읽은 것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남편 되신 여호와께 이스라엘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재현된 비유로서 결혼 관계에 들어가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 본문이 주는 핵심은 하나님이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속하심에 있어서 지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부정을 저지른 여인의 남편이 되셔서 부정한 아내를 다시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놀랍고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선지자를 불러 똑같은 일을 하라 명하셨다. 듣는 자들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의 위협에 대해 더 깊이 숙고하라고 도전하신다. 우리의 수치를 드러내는 복음선지자의 상징 행위로서 호세아의 결혼은 죄악으로 인사불성 상태에 빠진 우리를 깨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이 본문이든 다른 본문이든 우리가 텍스트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진실로 텍스트를 이해하고 아버지의 위대한 사랑이 그 텍스트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치(scandal)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을 피하지 말고 바라보아야 한다. 죄인을 위한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죄 없으신 구주, 즉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찢긴 옷을 입고 로마 제국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생각할 때 충격적이고 놀랍기까지 하다. 호세아의 결혼과 갈보리 십자가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우리 같은 반역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를 보여준다. 선교적 목적으로 데이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이 음란한 창기와 같으나 하나님은 당신의 음란하고 부정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당신을 창기라 칭해서 기분이 상했는가? 우리의 죄는 우리를 창조하신 거룩한 하나님께 그렇게도 모욕적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반역을 꾸짖으시는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질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압도당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죄인을 위해 죽기까지 하시고, 그의 말씀의 물로 우리를 씻어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엡 5:26–27; 계 19:6–10)하시는 그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자.원제: Why Did God Command Hosea to Marry an Immoral Wo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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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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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부정
야웨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by David Mathis
2021-05-27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보기에 따라서 이 구절은 바울이 쓴 서신서의 그 어떤 글보다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다른 사도들보다 자신이 더 열심히 사역했다는 말이다.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또 쑥스러워 하지도 않으면서 바울은 지금 자기가 과거에 예수님과 함께 사역했던 선택받은 사람들, 그 누구도 게으르다는 말을 들은 적 없는 그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했다고 담담하게 사실을 열거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서와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야말로 정말로 여간해서 만나기 힘든 에너지와 열정을 가지고 사역한 사람이다. 아마도 그는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아예 다른 종류의 열정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복해서 바울은 자신의 그 희귀한 열심을 칭송해야 할 예외적인 업적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본받기를 바라는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바울이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기억되는 점은 그의 열심이 아니라 그가 드러낸 놀라운 진리, 우리가 흔히 “믿음만으로 얻는 의로움”이라고 부르는 교리다. 바울은 가장 열심히 살았지만 동시에 그가 가르친 진리는 이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애쓰고 노래하고 또 환난을 극복하면서 경주를 힘껏 달린다고 해도, 그런 노력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역자들이 온 힘을 다해서 사역하는 삶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도 이제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의 것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은혜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첫 번째로, 완전한 용서순서를 바로 잡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장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인정, 다른 말로 해서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만”(롬 3:24) 가능하지 결코 인간의 노력 또는 공로로 받을 수가 없다(롬 3:28).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는 것은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심”(롬 9:16)으로만 말미암는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것은, 하나님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그의 백성으로 승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이지 결코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롬 4:4–5; 딤후 1:9; 딛 3:5).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안식이 되고 노력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가 된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다 그에게로 와서 쉼의 선물을 받으라고(마 11:28) 초청하셨다. 그리고 이제 이런 안식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은 실로 놀랍고 때로는 초월적인 열망을 우리 속에 불어넣음으로, 우리가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힘써서 사역하도록 하신다. 이제는 새로운 능력으로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것은 단지 의롭다함만이 아닌 다른 선물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약속된 성령”(엡 1:13)이다. 성령님은 단지 우리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게 하는 믿음만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워진 삶을 선물한다. 새로운 욕망, 새로운 끌림, 새로운 본능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다. 아무리 믿음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고 해도 바로 이런 성령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결코 게을러질 수는 없게 되었다. 그 대신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성령님은 이제 우리를 “선한 일에 열심을 하는 자”(딛 2:14)로 또 “선한 일을 위해서 언제라도 준비가 된 자”(딤후 2:21; 3:16–17; 딛 3:1–2)로,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언제라도 헌신하는 자”(딛 3:8, 14)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노력으로는 결코 전능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미소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음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이제 자유함을 누리면서 얼마든지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모든 능력과 관심을 오로지 다른 이들을 축복하기 위한 곳에 쓸 수 있게 되었다.바울의 노력과 맞먹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바울이 자신을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묘사한 구절 안에서조차 바울의 열심을 보면서 은근히 열등감을 가질 수 있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단어 하나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라고 쓰면서도 또한 동시에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다른 서신서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바울은 그가 겉으로 보기에 지치지 않고 사역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고백을 했다(빌 2:12–13; 골 1:29). 바울이 이룬 모든 사역은 그의 능력이 만든 결과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그를 강하게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딤전 1:12; 빌 4:13).나는 이것을 붙잡는다바울은 아마도 오늘날 가장 열정적이고 공격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모든 노력은 결국에는 다 헛된 것이라는 진리로 강하게 도전할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 때때로 게으름 때문에 후회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영어 성경에는 ‘행하게’가 ‘걷게’라고 되어 있다 - 역자 주)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걷자, 우리 뛰지 말고 걸어가자. 우리의 하나님은 결코 우리 혼자 애쓰고, 노래하고 환란을 극복하고 또 경주를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는 이 세상이 지어지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은사를 준비해 놓으셨고, 또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심으로 그 은사가 우리를 통해서 더 크게 쓰이도록 도우신다. 하나님은 달리다가 쓰러지는 경주를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와 함께 걷자고 그리고 결국에는 기쁨에 차서 이렇게 고백하라고 하신다. “내가 아닌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원제: Labor Like You’re Loved: How Grace Unleashes Effor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바울
은혜와공로
바울의열심
하나님의은혜
칭의
성령의내주
사역
수고
신학
신약성경
교리, 어떻게 선을 그을 것인가
by Kevin DeYoung
2021-05-25
“본질에 있어서는 일치를, 비본질에 있어서는 자유함을,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는 명확함을.”듣기에 괜찮지 않은가? 문제는 뭐가 뭐냐는 것이다. 누구나 다 진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서는 적당하게 양보하기를 원하며 게다가 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진짜 중요한 문제고, 적당히 중요한 문제고 또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지,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만큼이나, 어느 지점에 너와 나를 가를 울타리를 쳐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오히려, 그것은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교리에 있어서 어디에 또 어떻게 선을 긋는가의 문제는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고 복잡하다. 거기에 필요한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그리고 실질적인 탐구를 이 글에서 모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단지 그에 필요한 몇 가지 중요한 고려 사항들에 관한 개요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교리적 경계를 확립하기 위해 추구해야 할 일곱 단계가 있다. 그 목록을 따라가다 보면 설명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짧아진다. 1. 믿음의 본질을 확립하라이것이 가장 중요한 단계다. 우리는 사도적 복음에서 더 축소할 수 없는 핵심을 구성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 본질을 결정하는 한 방법은 목회 서신(디모데전후서, 디도서)을 보는 것이다. 이 서신서를 보면, 바울은 바른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 서신에 나오는 다음 몇 구절을 살펴봄으로 어떤 교리가 가장 중요한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가장 먼저, 우리는 ‘믿을 수 있는 말씀’(딤전 1:15; 3:1; 4:9–10; 딤후 2:11–13; 딛 3:4–8)을 가지고 있다. 디모데전서 3장을 제외하고는, 각각의 ‘믿을 수 있는 말씀’은 다 구원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여기서 예닐곱 개의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진리를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하러 온 구원자다. 구원은 공로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이 새롭게 하심으로 생겨나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진실되게 믿는 자는 좋은 일에 인생을 바치고 또한 끝까지 인내한다.두 번째로, 다양한 신앙 고백의 형태가 나온다(딤전 1:17; 2:5; 3:16; 6:15–16; 딛 2:11–15). 이런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신앙 고백이 바른 복음의 내용을 형성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고 그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다. 구원자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 뿐이다. 예수님은 위대한 하나님이자 구원자이며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또한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는 다시 오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세 번째로, 바울은 거짓 가르침과 관련한 몇몇 교리를 반대한다(딤전 1:8–11; 4:1–3; 딤후 2:18; 딛 1:16). 이런 잘못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율법주의와 자격증이다. 어떤 거짓 선생들은 어둠을 빛이라고 부르고 또 죄의 삶이 복음과 일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해로운 금욕주의와 또 사람이 만든 규칙을 강요했다. 이 두 가지 모두 다 복음을 위협하는 잘못이다. 네 번째로, 믿음은 복음 및 바른 교리와 명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딤전 1:8–10; 2:8; 딤후 3:14–17). 우리는 이 구절들을 통해서 바른 믿음은 오직 성경 말씀만을 붙잡을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복음은, 이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에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따른 은혜로 인함이지, 결코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네 가지를 통해서 우리는 본질이 어떤 것인지 대강 윤곽을 잡을 수 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시다. 우리는 죄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이자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는 하늘로 승천했다. 그는 다시 온다.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 성령님의 중생의 능력에 따른 주권적 은혜로 가능한 것이지 우리의 공로로 인함이 아니다. 성경은 온전히 영감 받은 진리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했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우리를 구원했고 또 우리를 거룩함으로 새롭게 했다. 이런 본질적인 내용을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또는 사소하게 취급한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내용을 의심하도록 만들거나 또는 이런 내용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것이 어떤 복음이든지간에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2. 성도의 교통함에 귀를 기울이라전통이 성경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또한 교회의 전통에서도 배우게 된다. 우리는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들이 아니다. 또한 성령님을 모시고 산 처음 사람들도 아니다. 하나님은 지난 수 세기에 걸쳐서 당신의 교회를 통해서 진리를 만들고 또 지켜왔다(딤전 3:15). 이 사실이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과거 그 어떤 기독교인도 결코 믿지 않았던 사실(예를 들어, 동성애의 선함)을 믿기 전에는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또한 과거 모든 교회가 다 예외없이 받아들였던 사실(예를 들어 실재하는 지옥)을 거부하는 데에도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신자들을 분열시켰던 문제들(예를 들어 밀레니엄)에 관해서는 보다 덜 교리적일 필요가 있다.사도 신경, 니케아 신경 그리고 칼케돈 정의와 같은 고대 신경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신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켜주는 효과적인 방패가 되었다. 이런 고대의 신앙 고백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려면, 실로 놀라운 깨달음 내지 엄청난 오만함이 필요할 것이다. 고대의 신앙 고백은 믿음의 핵심 교리에 대한 가장 믿을 수 있는 요약이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믿어야합니까?”(Q&A 22–23)라고 물을 때 사실상 우리로 하여금 ‘의심할 바 없는, 온 세상을 통해 고백되는 신경’인 사도 신경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존 칼빈(John Calvin)은 ‘종교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포함한다고(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서술했다. “하나님은 한 분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함에 달려있다”(기독교 강해, 4.1.12). 존 오웬(John Owen)도 비슷한 항목을 놓고 다음처럼 서술했다. “기독교 신앙의 원칙적인 근본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또한 성령님의 개인적인 도움과 신성을 통해서 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임을 확증한다”(존 오웬 전집, 15:83). 시간이 지나서 오웬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부해서 목록을 늘였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을 바라는 것, 그분에게 순종을 고백하는 것,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 건진 것을 믿는 것, 개인적인 거룩함을 고집하는 것, 그리고 “동일하게 중요한 다른 많은 거룩한 진리들”(84). 이런 신앙 선배들의 짧은 진술을 통해, 이미 앞에서 다룬 1번 내용을 붙잡고 있는 우리가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3. 결론 신학(landing theology)과 시작 신학(launching theology)의 차이를 구분하라 어떤 교리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전제에서 시작했는데도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교리는 애초에 시작점부터 아예 다른 궤도를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의 경우, 시작점은 다르지 않다. 단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몇 가지 구절에서 양측이 서로 다른 해석을 할 뿐이다. 이런 경우는 바로 결론 신학의 문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에 관한 교리는 (하나의 예만 든다면) 어떤 신학이 되도록 만드는가를 결정하는 시작 신학의 문제다. 만약에 이런 교리에서 틀리게 되면, 우리는 나머지 모든 신학에서 다 엉망이 될 수밖에 없다. 4.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는 가르침과 성경적 원칙을 적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라성경은 부모가 주님의 길로 자녀를 교육하라고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아이들이 공립학교에 가야하는지, 기독교 학교에 가야하는지 아니면 홈스쿨링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비록 선한 의도로 기독교적인 원칙에서 다들 시작한다고 해도 사람마다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주제와 관련해서 성경이 명확하게 이것만을 말한다고 교리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구시대의 유물로 만드는 것이다. 5. 교회의 존재와 교회의 건강을 구분하라(교회가 건강하지 않다고 교회가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교리를 상실하게 되면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다른 어떤 교리를 상실하게 되면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정상적인 교회가 되지 못한다. 그래도 후자의 경우는 고칠 가치가 있는 문제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까지 도달하기 전에 당신은 최대한 인내와 온유함을 발휘해야 한다. 6. 어리석은 논쟁을 피하라목회 서신에는 또 하나의 공통된 주제가 있다(딤전 1:4–6; 4:7; 6:4, 20; 딤후 2:14, 16, 23; 4:4; 딛 1:14; 3:9). 어떤 교리는 생명을 걸고라도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럴 가치가 전혀 없는 교리도 있다. 신학 논쟁을 할 때 다음과 같은 경우는 피해야 한다. 바로 추측하는(성경이 알려주는 수준을 뛰어넘는), 쓸데 없는(도움이 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내가 옳다는 데에 치중한), 끝이 없는 (정답이 불가능하거나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는), 불필요한(단순한 의미론적) 신학적 논쟁들이다. 7. 특히 ‘회심 관련한 복잡한 문제들’에 관해서라면 이견의 여지를 인정하라바울은 새롭게 믿게 된 사람들이 기존에 지키는 관습에 관해서는 특히나 유연성을 보였다. 그는 어떤 특정한 날이나 음식에 관해서는 기독교인이 그들의 마음에 확신을 갖기를 원했다(롬 14:5). 이것은 바울이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습관은 중요한 게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행동할 때라도 자기의 양심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하기를 원했다. 사순절 기간 동안 금요일에 술을 마신다거나 고기를 먹는 것은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보면서 상처를 받는 신실한 신자들을 생각한다면, 굳이 그런 고집을 부리는 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 모든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선을 긋는 것은 옳은 것에 대한 것도 아니고 용기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 모든 목표는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다. 또한 늑대를 막고 녹색 초원을 지키는 울타리를 세움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다. 경계를 설정하는 힘든 노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분의 영광과 선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원제: Where and How Do We Draw the Line?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본질
교통함
신학
가르침
원칙
교리
사랑
비본질
오순절이 없다면, 우리는 영적 고아다
by Sam Allberry
2021-05-23
24시간만 뉴스를 듣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이에 깊은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명의 상실, 정의의 상실, 존엄성의 상실, 희망의 상실이 우리 목전에 널려 있다. 내 삶과 나와 교류하는 사람들만 보아도 이런 현실이 나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서 끝임 없이 일어나고 있는 엄연한 현실임을 알 수 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 비극과 질병, 트라우마, 죽음이 닥친다. 이 슬픔에서 다음 슬픔으로 비틀거리며 넘어가는 삶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런 상실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신과 체포로 이어지는 몇 시간 동안 강렬하게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기도 하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을 떠날 것이고 자신이 가는 길에 제자들은 함께 할 수 없다는 폭탄을 터뜨리셨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들은 3년을 동고동락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가족과 직장을 버린 제자도 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걸었다. 따라서 그들이 느낀 감정은 믿었던 CEO가 회사를 떠난다는 소식에 슬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예수님은 약속하셨다(요 14:18). 이것은 동료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 느끼는 슬픔이 아니다. 이것은 부모를 잃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다. 그들이 느꼈던 두려움은 버림받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분리가 주는 깊은 상실감이었다. 제자들이 그토록 힘들어한 것은 그래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우리의 괴로운 마음우리의 마음도 종종 괴로움에 고통스러워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제자들과 똑같지 않다. 우리는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떠나는 예수님을 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재를 의식한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진짜로 계신지 의구심을 가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삶의 어려움은 하나님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버겁게만 느껴진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소중한 약속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떠나실 것이다. 예수님의 약속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요 14:16-17).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셨다. 아들의 떠남은 성령의 오심으로 이어질 것이다. 오순절은 단지 권능을 받는 분수령이 아니었다. 오순절은 위로이기도 했다. 오순절은 이 땅에서 우리가 영적 고아로 버려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영예수님이 가장 먼저 강조하시는 것은 성령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그것’이 아니라 ‘그’라고 하신다. 신약 성경의 다른 구절들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성령은 결코 비인격적인 영적 물품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기 위해 성령이 오셨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해도, 우리는 이 놀라운 성령이 얼마나 인격적인가 하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요점은 예수님이 약속하시는 그가 어떤 분인가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요 14:16)라고 묘사하신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예수님이다. 그는 어떤 면에서 예수님을 대신하고 계승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과 동일한 영이다. 바울은 그를 ‘그리스도의 영’(롬 8:9)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성령은 담임 선생님과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과 스타일, 우선순위를 가지고 오시는 대리 교사가 아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설명한다. “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직접, 육체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신다. 이 점은 예수님이 강조한 두 번째 포인트로 이어진다.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성령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임재를 누린다. 예수님은 성령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임재할지를 강조하신다.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4:17).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는 한순간도 혼자일 수 없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바로 성령을 통해서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이것은 그 자체로 놀랍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많은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성령을 단지 충실한 보안요원처럼 가까이 두는 게 아니라 아예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 친히 거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요 14:23).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 6:19).하나님의 성전과 우리의 위로몇 년 전 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헤롯 대왕이 세운 이 벽은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있었던 구조물인데 아직까지 남아 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면서 기도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성전과 또한 성전 자체가 의미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애통하고 또한 그 복원을 위해서 기도한다. 따라서 이 벽의 오랜 별명은 ‘통곡의 벽’이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깊은 슬픔에 잠겨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근처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 단지 성전을 약속하시는 게 아니라 아예 우리와 하나가 되겠다고 하신 예수님을 묵상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순전히 성령의 은사로 인해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 자신이 진정한 성전이시다. 성경은 이 세상이 주는 깊은 상실과 트라우마라는 현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러한 상실로부터 면제가 된다고 약속하지도 않는다. 대신 성경은 이 모든 상실 가운데서도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귀중하고 그 자체로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약속한다. 바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이다. 성령의 오심으로 우리는 영적 고아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다. 예수님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신다. 원제: You’d Be a Spiritual Orphan without Penteco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오순절
성령의오심
영적고아
그리스도의임재
요한복음14장
하나님의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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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영
보혜사
성령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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