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성경과 신학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삼위일체가 그토록 중요한 다섯 가지 이유
by Kaitlin Miller
2021-05-22
흔히들 묘사하기도 힘들고,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게다가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것이 삼위일체라고 한다. 그런데도 왜 삼위일체의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는 그토록 그 주제에 신경을 써야하는가?삼위일체 교리가 왜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글이 나와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을 삼위로, 즉 겉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다. 여기 우리가 그 교리를 믿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추가된)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1. 삼위일체는 하나님을 다른 신 개념과 구분짓는다많은 이들이 무슬림과 유대인 그리고 기독교인이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무슬림과 메시아를 믿지 않는 유대인이 단지 하나로 이뤄진 신(a mono-personal god)을 믿는 반면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세 분으로 이뤄진 하나님(the tri-personal God of the Trinity)을 믿는다. 이런 차이는 중요하다. 단지 하나로 이뤄진 신도 얼마든지 영원히 사랑하고 영원히 은혜로울 수 있다. 문제는 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는 그런 신은 사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신이 할 수 있었던 사랑이라고는 고작해야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뿐일 것이다. 그런 신은 잘 정의해야 자기만을 섬기는 이기주의에 빠져 고독을 즐기는 신 정도다. 신에 대한 이런 식의 정의는 결국 권력만을 중시하는 세계관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반해 기독교의 세계관은 사랑을 가장 중요한 명령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가장 가치있는 덕목으로 여긴다(마 22:36–40; 고전 13:13).우리는 하나님이 변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믿는다(요1 4:8).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어떻게 사랑이었는지를 알려준다. 세 분의 하나님은 신적으로 또 영원히 서로를 사랑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 안에서조차 사랑으로 정의되는 분이다. 또한 동시에 세 분으로 이뤄진 하나님은 다신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브라흐마, 비슈누 또는 시바와 같은 신들 말이다. 우리는 그런 식의 세 신을 섬기지 않는다. 우리의 주님이자 하나님은 한 분이다(신 6:4). 세계 종교가 계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또 보편주의의 조류에 대항하는 측면이라는 면에서도 기독교가 가진 이 독특한 특징은 우리가 가진 믿음을 전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2. 삼위일체는 구약을 이해하도록 돕는다2세기 후반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난 비밀(엡1:9; 3:3)를 표현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복수의 모습이 처음 나온 것은 신약성경이 아니라 구약성경이다. 첫 장부터 하나님의 성령이 소개된다(창 1:2),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키면서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를 사용한다(창 1:26–27; 3:22; 11:7; 사 6:8). 하나님이 하나임을 강하게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하나’로 묘사하는 데 사용된 단어 ehūd는 다양성 속에 있는 통일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탄력적인 용어다. 이와 비슷하게 구약에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 ‘엘로힘’과 ‘아도나이’도 복수형이다. 아마도 앞으로 온전히 드러날 삼위일체의 실재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 역할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무려 백 번이 넘게 구약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을 쓴다. 또한 장차 적을 물리칠 자(창 3:15),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단7:9–14), 존경받아야 할 아들(시 2:11–12), ‘전능한 하나님’이며 ‘영원한 아버지’로 불릴 처녀가 낳을 아들(사 9:6), 그리고 하나님으로 인정받은 여호와의 사자(창 16:10–13; 22:12–16; 출 3:1–6; 사 2:1–4; 6:11–24; 슥12:8)가 있다. 출애굽기(3:14)가 말하는 ‘스스로 있는 자’(I Am)를 복음서는 그리스도가 ‘나는 있다’(I Am)라고 밝히는 것으로 말한다. 또한 광야의 반석(출 17; 고전 10:4) 그리고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자라고 한다(유 5). 부활한 그리스도는 성경을 풀어주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모든 성경에 다 있다고 말했다(눅 24:27). 또한 유대인이라면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가정, 하나님 안에 있는 두 번째 위격에 관해서는 시편 110편 1절이 잘 보여주고 있다. 3. 삼위일체는 신약성경 이해에 필요한 토대가 된다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고안해낸,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었다. 그는 온전한 인간이었지만, 또한 처음부터 존재한(요 1:1)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이었다. 이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여기에 도움을 준다. 또한 삼위일체는 삼위 모두가 다 드러나는 구절을 설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신다(요 14:26).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아들의 것이고 성령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선포하신다(요 16:15). 아버지는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신다(롬 8:9; 갈 4:6; 딛3:6).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마 28:19). 아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영으로 아버지께 나아간다(엡 2:18).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 아들의 은혜, 성령의 교통하심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한다(고후 13:14).4. 삼위일체는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우리의 관계에 기초가 된다이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은 사랑과 섬김 그리고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는 면에서 완벽한 하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본인이 가진 내적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욕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소식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공허를 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인간 없이도 완전히 충족하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기로 마음먹었고, 하나님이 스스로 누리는 그 넘치는 기쁨을 우리도 누리고 충족함을 느끼도록 우리를 초대했다. 하나의 교회로서 우리는 이제 아버지의 집이고(딤전 3:15), 아들의 신부고(고후 11:2; 엡 5:27; 계 19:7), 또한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다(고전 6:19).하나님과 사랑으로 하나되었기에 우리는 그분의 백성과도 연합할 수 있다. 그들과 함께 우리는 아들 안에서 성령으로 인해 아버지의 거처가 될 수 있다(엡 2:22). 삼위일체의 세 분이 신비롭게 하나로 통합된 것처럼, 이제 우리도 민족, 언어, 국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계 7:9)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5. 삼위일체는 우리의 사명을 설명한다아버지가 아들을 보내고, 아들이 성령을 보내는 것을 통해 우리가 가진 이 위대한 대사명이 삼위일체가 이 세상 안에서 가진 사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요 17:18; 마 28:18–20). 아버지의 미리 아심, 아들의 순종, 그리고 성령의 성화(벧전 1:2)에 의해서 우리도 보냄받았다.하나님 안에서 세 위격이 서로를 영화롭게 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분을 증거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양자의 영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아들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았을 때 우리는 아버지가 누린 궁극적인 영광을 볼 수 있었다(요 12:28; 롬 8:15). 이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버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부름받았다(요 15:13).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사명(missio Dei)을 수행하게 된다. 삼위일체는 핵심이다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결코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신이라고는 결국 우리 인간의 이미지를 투영시킨 신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지음받은 존재다(창 1:26-27).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더 드러낸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렘 29:12; 히 11:6). 하나님을 더 정확하게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마음 깊이 그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더 온전하게 예배하게 되며, 나아가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수행하는 사명 속에 더 열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원제: 5 Reasons the Trinity Matters So Mu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리
삼위일체
구약이해
구약속삼위일체
신약이해
기독교세계관
초대교회
엘로힘
사명
예배
잊혀진 그리스도의 승천 교리 회복하기
by Patrick Schreiner
2021-05-13
승천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종종 잊혀지는 사건이다. 교회가 워낙 십자가와 부활에 강조점을 두기 때문이다. 주로 논쟁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을 이루었고 또 부활이 역사적으로 증명 가능한지 등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승천 문제는 항상 뒷전에 밀리기 마련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완전히 잊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성육신, 십자가, 부활 그리고 재림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더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천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다른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승천에 대한 건강한 강조는 다른 교리를 더 강화시킨다. 예수님과 관련한 사건들이 구분될 수는 있지만 결코 분리될 수는 없으며, 그 모든 사건들을 하나로 통합해서 바라볼 때 우리는 좀 더 명확하고 정확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승천을 다른 교리들과 연관시킴으로, 다른 교리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한 교리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출 때 발생할 수 있는 과도한 강조가 파괴하는 균형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승천과 성육신승천은 그리스도 사역에 있어서 클라이맥스다. 그러면, 이런 승천을 어떻게 성육신과 연결할 수 있을까? 몸을 입은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떼는 대신, 승천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이룬 사역을 다시 돌아보도록 한다. 성육신은 어쩔 수 없이 잠시 거쳐야만 하는 덜 중요한 단계가 아니다. 승천을 통해 성육신의 목적은 충족되었고 또한 지속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육신을 구속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승천하셨다. 그렇기에 일시적, 물질적, 그리고 물리적 차원은 승천에서 거부되지 않고 오히려 확증된다. 메시아의 승천을 통해서, 육체가 하나님이 계신 영적 영역으로 올라가 인류와 함께 영원히 살 것임을 보여준다. 육신을 입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유지함으로써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을 더 높은 차원으로 높였다. 그렇기에 승천은 성육신을 보증한다. 그러면, 이 둘이 어떻게 서로 연결된다는 것일까? 처음에는 내려왔고, 다음에는 올라갔다. 그러면, 승천은 성육신을 뒤집는 것일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 땅에 내려오심과 하늘로 올라가심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이 둘은 하나의 움직임으로까지 간주된다(참조, 예 4:9-10; 빌 2:5-11). 예수님은 승천하기 위해서 이 땅으로 내려왔다. 이 두 가지 행동은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 대신 타락으로 인해 부서진 것을 회복시킨다.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은 두 가지 움직임이다. 예수님은 처음에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고, 그 다음으로 그는 육신을 입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인류 속으로 모셔 오기 위해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는 인류를 하나님께로 데려가기 위해 올라가셨다. 승천과 십자가혹자는 예수님의 왕권과 승천에 집중하게 되면 십자가를 경시하게 되는 올무에 걸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승천이 그리스도의 높임과 관련이 깊다면, 당연히 그리스도가 겪은 수모를 소홀히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굴욕과 높임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압도함으로 결코 두 갈래로 나눠질 수 없는 문제다. 성경에 따르면 굴욕과 높임은 같이 온다. 승천과 십자가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그 둘 모두를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둘 사이의 관계성이 적지 않지만, 나는 딱 한 가지만 얘기하려고 한다. 승천(그리고 부활)은 십자가의 진리를 드러낸다. 승천 전까지 십자가의 실체는 사실상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승천으로 인해 그 실체가 드러났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처럼 현대 기독교인도 십자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십자가에 대한 모든 기록은 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쓰였다. 그렇기에 성경 저자들은 처음으로 십자가를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느꼈는지와 다르게 십자가에 대해서 서술한다. 두려움, 애통, 혼란의 감정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박혔을 때 당시 사람들이 느낀 감정이다. 예수님이 범죄자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어둠은 단지 하늘만 덮은 게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도 덮었다. 십자가는 실로 그들이 만난 최악의 비극이었다. 성경 저자들이 나중에 십자가를 복음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된 데는 하나님 아버지가 십자가에 박힌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역할이 분명해진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굴욕은 영광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었다. 굴욕과 높이심은 함께 오지만 그 높이심은 별도로 수여되어야만 한다. 승천은 결코 십자가와 예수님의 높이심 사이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승천을 통해서 예수님은 영원히 굴욕당한 존재에서 높임을 받은 존재가 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이끈다. 따라서 메시아의 높이심은 십자가의 본질을 드러내고 확증한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눈에는 굴욕으로,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셨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굴욕을 승리로 만든 것이고, 신약성경의 대부분 내용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주제다. 승천은 그리스도가 달린 영광스런 십자가 위를 덮고 있던 천을 벗겨버렸다. 승천은 바로 스스로를 선언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승천과 부활승천과 가장 구분하기 어려운 교리가 부활이다. 성경 저자 중에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바로 높이심으로 넘어간 사람도 있고, 그렇기에 부활과 승천을 높이심이라는 주제 아래 그냥 하나로 묶기도 한다(행 5:31-31 참조). 부활과 승천은 서로 속해있는데, 승천은 단지 부활의 자연스런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두 개는 구분되어야 한다. 마리아가 부활한 에수님에게 매달렸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아직 아버지에게 가지 못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요 20:17). 승천은 단지 그리스도가 부활한 삶의 자동 연장이 아니다. 그의 삶은 이제 새로운 장소에서 이뤄지는데, 다름 아닌 그가 거하는 장소가 높임을 받은 그의 삶을 확인한다.부활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육신을 입고 다시 살아났음을 의미하는 반면, 승천은 높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육신이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했고, 승천을 통해서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높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단지 살아만 있는 게 아니라 다스리고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 재림할 것을 믿는다. 승천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부활과 승천 사이에 없었던 탁월한 영예를 얻었다. 부활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아들 되심을 보장한다면, 승천은 그가 주님 되심을 드러낸다.비록 부활과 승천이 같은 맥락 속에 있지만, 이 둘은 분리되어야 한다. 부활이 그리스도임을 입증하였다면, 승천은 그 입증을 확증해준다. 승천은 단지 부활 이후에 따라오는 부록 같은 것이 아니다. 승천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다. 승천과 종말론마지막으로 승천은 성육신,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고 그 가치를 더 드높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승천은 클라이맥스도 이야기의 끝도 아니다. 승천은 다가오는 마지막의 시작이다. 지금 이 시대는 끝에 다다르고 있다. 메시아의 승천이 꼭 필요하지만, 그 승천 또한 임시적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재림할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을 단지 다가오는 것으로만 보는 대신에 이미 시작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주권은 현재로는 하늘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가 재림하면, 그는 그 주권을 온 세상 모두가 온전히 볼 수 있도록 드러낼 것이다. 교회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외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높으심에 대한 믿음도 고백한다. 예수님께 빨리 오시라고 간청한다는 것은 아직도 이 세상에 모든 이가 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이미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 사이의 시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가 일을 끝내기를 기다린다. 예수님의 재림은 교회가 계속 미래를 바라보며 준비하도록 만든다. 재림은 우리가 현재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감사하고 또한 지금도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해 감사하게 만든다. 그의 재림을 갈망한다. 원제: Recovering the Forgotten Doctrine of Christ’s Ascens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리
승천
부활
십자가
재림
승천교리
마라나타
성육신
종말론
내려오심
성경 권위의 효과성이 믿음의 분수령이다
by John Piper
2021-05-02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과 성경이 드러내는 실재에 관한 효과적인 권위의 문제다.왜 나는 그냥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과 성경이 드러내는 실재에 관한 권위의 문제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단어 사용이 조금 미숙할 수도 있다. 분수령이라는 단어도 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모든 빗물과 눈이 녹은 물은 협곡을 통해 거칠게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물은 흘러가며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물이 흘러들어 가는 목적지인 바다는 한참 전 상류에서, 그러니까 분수령에서 이미 결정된다. 분수령이 되는 이슈도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의 지성과 마음이 분수령이 되는 이슈를 만날 때면 생각과 느낌이 이리저리 달라지는 모호한 변화들을 겪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미 정해진, 이 바다 아니면 저 바다라는 목적지를 향하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이슈가 다 분수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주제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가지면서도 서로 간에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항상 서로 간에 점점 더 멀어져서 아예 다른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수령이 되는 이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또 결정적이며 게다가 워낙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비록 흐르는 물의 주변 모양이야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강은 전혀 다른 경로로 흐르게 된다.‘성경의 권위’다음으로 명확하게 해야 할 용어는 '성경의 권위'다. Desiring God은 성경의 권위를 우리의 신앙 고백(Affirmation of Faith)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명시했다.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옳은가에 관한 모든 주장에 관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 성경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과 관련해서 무엇이 진리고 옳은가의 여부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기준에 근거해서 판단한다.우리가 이런 확신을 갖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66권이 책으로 구성된 성경은 완벽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구두로 영감을 받고, 원전에 비추어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간단히 말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 속에 있는 모든 가르침이 옳으며, 성경의 모든 명령은 다 순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만이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최종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구절을 통해서 그 점을 스스로 증거하는 성경을 믿는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만들어졌다(딤후 3:16).어떤 예언도 사람의 뜻에 의하지 않았고, 오직 성령에 감동을 받았을 때에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벧후 1:21).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 말씀을 전한다(고전 2:13).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마 24:35).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전하다(잠 30:5).말씀은 폐할 수 없다(요 10:35).하나님이 인간의 눈을 열어 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성경이 말하는 이런 주장의 진실 여부에 대한 증거는 평범한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런 우리의 입장에 대해 가장 온전한 설명과 논증은 내가 쓴 ‘존 파이퍼의 성경과 하나님의 영광’(A Peculiar Glory: How the Christian Scriptures Reveal Their Complete Truthfulness)에서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효과적인 권위’그럼 나는 왜 그냥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과 성경이 드러내는 실재에 관한 권위의 문제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왜 나는 ‘효과적인’이라는 단어를 추가했을까?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과 성경이 드러내는 실재에 관한 효과적인 권위의 문제….”왜냐하면 성경의 권위가 말씀에 기꺼이 동의하는 마음과 변화된 인식을 갖춘 지성을 만드는 데 효과성을 가지지 않는 한, 성경의 권위는 결코 분수령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이 믿음을 확증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경이 말하는 바를 실재로 인정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느끼지도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진짜라고 하는 것을 나도 진짜로 받아들일 때까지, 성경이 기뻐하는 바를 나도 함께 기뻐할 때까지, 내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권위가 결코 내 속에서 효과성을 발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 문제는 내게 분수령이 될 수 없는 것이다.예를 들어서, 성경은 기독교인을 향해서 “죽었다”(골 3:3)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골 3:1)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너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골 3:3)라고 말한다. 이것이 실재다. 그러나 수많은 기독교인의 삶을 보면 성경이 말하는 이런 실재를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에 그들에게 당신의 삶 어떤 부분이 이 말씀이 말하는 바를 구현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성경의 가르침은 그들의 마음에서 전혀 효과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성경이 가치있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들과 관련해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빌립보서 3장 8절과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유한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존재다. 그러나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소유물을 그리스도보다 더 가치있게 여긴다. 그리스도야말로 나를 기쁘게 하는 무엇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리스도 대신 그들의 분주한 생각과 활기찬 대화를 채우는 것은 소셜 미디어와 스포츠 그리고 정치다.이것은 다름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궁극적인 아름다움과 가치가 그들에게 있어서 효과적인 권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에게 성경의 권위는 마치 선물을 싼 예쁜 포장지를 보면서 “이 선물 너무 좋아. 정말로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식으로 인정받을 뿐이다. 그러니까 예쁜 포장지 속 내용물에는 관심도 없고, 행여 선물이 불쾌할 수도 있고, 또는 그냥 무시해도 되는 수준이지만 그냥 포장지가 예쁘니까 괜찮다는 식이다. 드러난 발화점성경이 말하는 실재와 선에 관해서 특별히 개인적으로 반대하지 않거나 또는 문화적인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라면, 성경 권위에 관한 효과성의 문제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묻혀있는 경우가 많다. 그냥 말로는 얼마든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는 이유 중 하나는, 그냥 내가 사는 문화와 내 개인적인 윤리가 성경이 말하는 바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성경이 정말로 내 삶 모든 영역에서 권위의 효과성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다가 문화적 발화점을 만날 때가 있다. 바로 논쟁이 생긴다. 동성애가 죄인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범하는 동성애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고전 6:9-10)? 만약 이 사회 문화가 동성간의 연합을 '결혼'이라고 부른다면, 그게 결혼이 되는가(엡 5:31-32)? 동성간의 성교가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본성에 거스르는'(롬 1:26-27) 것인가? 남자와 여자 간의 결혼만이 유일하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결혼인가?갑자기 발생한 문화적인 발화점(매우 개인적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은 그 사람이 평소에 갖고 있는 성경의 권위가 실제로도 효과적인지 아닌지를 드러낸다. 성경의 권위가 말씀에 기꺼이 동의하는 변화된 마음을 만드는 데 효과적인가? 무엇이 진짜고 참인지를 확신하는 데 성경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는가? 아니면 성경의 권위는 단지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가르침을 싸고 있는 선물 포장지에 불과한가? ‘드러난 실재’따라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 권위가 가진 효과성의 문제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이 글의 첫 문장에서 말하고자 한 모든 의미를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구절을 첨부했다.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과 성경이 드러내는 실재에 관한 효과적인 권위의 문제다.” 추가한 이 구절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권위 그 자체는 그 어떤 효과성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짜고, 또 진짜 아름다움을 누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보여줌으로 우리의 인식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권위 있는 말씀이 드러내는 실재다. 성령님은 진짜가 진짜로 보이도록 만들고, 진짜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되도록 한다. 권위는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다. 그러나 권위만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 단지 권위와 함께 성경의 가르침과 실재가 주어졌다고 해서 우리 속에서 실재가 실재가 되고 아름다움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부모로서 권위를 가지고 자녀로 하여금 먹기 싫어하는 채소를 억지로 먹일 수는 있지만, 자녀가 채소를 좋아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권위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권위는 자녀로 하여금 식탁에 앉도록 하고 맛있을 것이라고 장담은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권위가 맛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권위만으로도 실재를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권위가 당신으로 하여금 그 실재를 보도록 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모범 답안을 말하면서도 당신은 여전히 성경이 진짜라고 말하는 실재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성경이 드러내는 아름다움을 보고 누리는 변화된 지성과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신령한 은사우리의 지성과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단지 권위에 굴복하는 것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은사다. 은사를 받음으로 우리는 비로소 보고 또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실재를 진리이자 또 진짜로 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눈이 필요하다. 성경이 드러내는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음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미각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성경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한다(엡 5:24). 그리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한다(엡 5:24). 이것이 실재다. 그러나 아무리 엄청난 권위가 이 가르침을 진짜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아름답게 포장해서 들고 오더라도, 당신은 그 진리를 보지 못하고 또 당신의 마음은 그런 가르침을 사랑하지 않는다. 권위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얼마든지 권위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효과적이지 않다. 오직 성령님에 의해 당신 속에서 실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드러날 때에만, 권위는 효과적이게 되고, 당신은 비로소 진짜를 진짜로 보게 된다. 비로소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끔찍한 것을 진짜 끔찍하게 여기게 된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경의 실재가 드러내는 진리와 아름다움을 보고 또 맛볼 수 있도록 성령님이 우리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진짜와 성경이 드러내는 아름다움을 비로소 보고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성령님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이런 역사를 이루신다. 그렇게 될 때, 권위는 비로소 효과성을 갖게 되고, 가고 오는 세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분수령 앞에서 바른 길을 가게 된다. 원제: The Watershed Issue in Every Generatio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신학
교리
성경
권위
분수령
존파이퍼
효과성
발화점
실재
신앙고백
‘복음 중심’의 참된 의미
by Thomas Kidd
2021-04-30
지난 15년 동안 미국 복음주의에서 ‘복음 중심’(gospel-centered)이라는 말보다 더 큰 유행어는 없었다. 책 제목만 검색해도 복음 중심이라는 말은 결혼, 상담, 일, 제자도, 학생, 청소년 및 아동 사역, 입양, 육아, 장례식, 해석학, 지역 사회, 회복, 전도, 시민권 등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 그럼 이 복음 중심이라는 문구는 어디에서 온 걸까? 구글 엔그램(Google Ngram)은 하이픈으로 연결된 단어가 2000년대 중반부터 점점 더 인기를 얻었고, 약 10년 전에 그 인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물론 ‘복음’은 영어권에서 아주 오래된 단어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1900년대 초만 해도 훨씬 덜 사용되었지만(출판물에 사용된 빈도수를 기준으로) 2000년에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복음 중심’ 및 ‘복음 주도’(gospel-driven)라는 단어의 영향 때문이다.‘중심’은 1900년경 까지만 해도 드물게 사용된, 그러니까 아주 현대적인 단어다. 1900년대까지만 해도 ‘복음 중심’ 또는 그 파생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심지어 ‘중심’이라는 단어는 아예 KJV뿐 아니라 ESV 또는 NIV 성경 번역에도 나오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신조어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복음 중심’은 영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역사에서 거의 새로운 용어다. 그리고 이 말이 1960년대 들어 형용사로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에도 복음주의 교회보다는 진보적인 교회를 표현하는 쪽으로 더 많이 쓰였다. 처음 사용‘복음 중심’과 비슷한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영국 본머스 복음주의 회중교회의 목사인 존스(J. D. Jones)의 설교에서였다. 존스는 선교 운동과 더불어 다른 세계적인 종교가 부상하면서 제기하는 도전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교회가 따라야 하는 권위 있는 지침으로 삼은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며 지중해 세계를 여행했다고 선포했다. “그들은 복음을 선포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중심을 둔 복음이었다.”(“They want to preach a Gospel and their Gospel centered on the cross.”) 여기서 ‘Gospel centered’는 명사면서 또한 동사인데, 그의 설교는 앞으로 이 말이 현대에 어떻게 사용될지를 예시하고 있다. 사회적 복음의 초창기에 존스는 복음적 호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십자가만이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루터교와 자유주의‘복음 중심’은 1960년대에 들어 형용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근대 독일 루터교 신학자인 폴 알타우스(Paul Althaus)의 저술을 포함하여 주로 루터교에서 자주 발견되었다. 큰 영향력을 끼쳤던 그의 책, ‘마틴 루터의 신학’(The Theology of Martin Luther, 1966)에서 알타우스는 루터가 왜 ‘복음 중심의 해석’에 집착했고, 또는 왜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복음’을 고수했는가에 대하여 길게 설명했다. 그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알타우스는 복음 중심의 해석이 종종 성경 본문의 의미를 대체하고, 성경 본문 속 ‘모순’과 ‘부정확함’까지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복음 중심’은 사실상 ‘성경 중심’의 반대에 가까운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복음주의 해석자에게 ‘복음 중심’은 사실상 ‘성경 중심’과 같은 의미다.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메시아 예수에 대한 좋은 소식을 완벽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2001년에 낸 ’미국 자유주의 신학의 형성‘(The Making of American Liberal Theology)에서 진보적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개리 도리엔(Gary Dorrien)은 ’복음 중심‘을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사회 복음을 위한 신학‘(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1917)을 저술한 북부 침례교 목사이자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와 같은 사회 복음 개척자들의 철학을 설명했다. 21세기 초에 들어서 ‘복음 중심’의 복음주의적 사용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용이 하나의 표준은 아니었다. 이 구절은 이제 성경 해석에 대한 주류 또는 진보적 토론이나 사회 사역에 대한 견해를 표현하는 데 더 자주 사용된다. 가톨릭과 몰몬교를 포함하여 다른 그룹도 ‘복음 중심’을 간헐적으로 사용한다. 놀라울 정도로 인기있는 몰몬교 작가이자 리더십 전문가인 스티븐 코비(Stephen Covey)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The Seven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 1989)을 쓴 저자이기도 한데, 그는 한때 모든 몰몬교 성도가 추구해야 할 사역의 중심으로 ’복음 중심의 가정 생활‘을 언급하기도 했다. 개혁주의와 보수주의‘복음 중심’이 어떻게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수사학의 정착물로 바뀌었는가? “[특정 텍스트]를 읽었기 때문에 [특정 아이디어]를 믿기 시작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지적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복음 중심’을 향한 복음주의적 추세에 있어서 두 가지 주요 촉매제는 2005년 TGC(The Gospel Coalition) 창립과 2006년 그레엄 골즈워디(Graeme Goldsworthy)가 발간한 ’복음 중심 해석학‘(Gospel-Centered Hermeneutics)이다. 골즈워디는 시드니에 있는 무어 신학대학에서 가르친 적이 있는 호주 국적의 성공회 신학자다. 골즈워디가 그의 책에서 주장한 내용 중 일부는 복음 중심의 해석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기초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알타우스와 별반 다르지 않게 들린다. 그러나 골즈워디에게 복음 중심의 해석은 결코 성경 본문 자체를 앞설 수 없고, 또한 성경의 핵심 메시지와도 일치한다. “구속 계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라고 그는 결론을 내린다.저스틴 테일러(Justin Taylor)는 2006년 TGC에서 골즈워디의 책에 대해서 글을 썼다.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은 2007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복음 중심의 삶을 살기’(In Christ Alone: Living the Gospel-Centered Life)를 출간했으며 2010년에 이르러서는 복음 중심의 댐이 터진 것처럼 보였다. 2011년에 이르기까지, 매트 챈들러(Matt Chandler)와 트레빈 왁스(Trevin Wax)는 ‘복음 중심’이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를 주목했고, ‘가짜 복음들’(Counterfeit Gospels, 2011)에서 왁스는 이 말을 ‘유행어’(buzzword)라고 불렀다. TGC는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TGC ‘창립 문서’의 하나인 ‘사역을 위한 신학적 비전’(Theological Vision for Ministry)은 ‘복음 중심’이라는 구절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TGC와 Crossway는 2011년에 D. A. 카슨(D. A. Carson)과 팀 켈러(Tim Keller)가 공저한 ‘복음 중심 사역(Gospel-Centered Ministry)’을 출간했다. 최근 TGC 웹 사이트에서 ‘복음 중심’을 검색한 결과 무려 8,612건이 나왔다. “TGC의 경우 복음 중심이라는 용어는 설교와 전도에 대한 강조, 개혁주의 전통에서 은혜를 강조하는 데에 대한 존경, 정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는 성경 신학적 강조 등 세 가지를 통칭하는 하나의 약칭이다”라고 팀 켈러는 말했다. 그는 또한 리디머 교회에서는 우파의 근본주의 교회뿐 아니라 좌파의 주류 교회와 구별하기 위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너무도 복음 중심?그러나 2010년이 되면서 복음 중심의 추세에 대한 의구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데인 오틀런드(Dane Ortlund)는 TGC에서 ‘과도한 복음 중심’이 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제기했다. 가장 현명한 접근 방식은 적절한 개념 내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잘 구분하는 것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이런 식의 신중함은 지난 10년 동안 복음주의 및 개혁주의 매체에서 정기적으로 나타났다. 2019년 Desiring God은 용서와 의로움에 모든 초점을 맞추게 되면 기독교적 순종이 주는 기쁨이 손상될 수 있다고 주장한 존 파이퍼(John Piper)의 메시지를 게시했다.2020년 9Marks는 “오늘날 복음 중심의 설교가 왜 잘못되었는가?”를 주제로 저널을 발간했다. 그 발간은 TGC 이사 중 한 명인 데이비드 헬름(David Helm)에게 영감을 받은 결과였는데, 그는 복음 중심이 되기 위해 너무 서두르는 경우, 9Marks의 조나단 리만(Jonathan Leeman)이 설명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리만은 이렇게 말했다. “(만사를 다 복음 중심으로 바라볼 때) 젊은 설교자들은 게으르고 자신의 텍스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너무 빨리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간다. 그들은 주의 깊은 주석 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다. 또는 특정 텍스트가 전하는 요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정경이 말하는 복음을 향해 나아가는 바른 길을 제대로 취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주해적 게으름은 결과적으로 사실상 성경 본문이 항상 신뢰할 수 있거나 신앙을 세우는 데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전파하기 위해서는 알타우스와 같은 모더니스트가 권장하는 유형, 즉 성경적 해석보다는 무조건 ‘복음 중심적인’ 설교를 하는 게 우선이라는 경향으로 되돌릴 것이다. 복음적이거나 개혁주의 복음 중심의 설교가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경 전체를 면밀히 연구하도록 이끌어야만 한다. 엔그램은 2019년에 이르러서 ‘복음 중심’의 사용이 약간 감소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특히 복음주의 교회가 정치에서 도덕주의, 그리고 ‘생활 설계’ 전략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벗어난 다른 문제에 지나치게 집중하려는 유혹 앞에서 바른 방향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나름의 역할을 유지할 것은 확실해 보인다. 복음 중심이 온전히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메시지일 때, 또한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한 구원이라는 메시지로 우리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할 때, 우리는 더 열렬한 복음 중심이 되어야 한다.
복음
복음중심
복음주도
복음줌심사역
TGC설립문서
신학적비전
개혁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팀켈러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
by 이승구
2021-04-25
인간이 그 온전한 지위에서 떨어져 타락한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지금까지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라고 한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한 일을 함으로써 타락했고, 그 후 인간의 죄는 점점 더 많아져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타락하여 죄인된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사람은 죄를 계속 범하면서 그것 때문에 두려워 떨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최초의 죄인이었던 아담과 그의 아내도 타락한 자신들의 상태가 비정상적임을 어느 정도는 의식하면서(“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아” 자신들을 가리고(창 3:7), 하나님께서 동산 사이로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 3:8). 이는 타락 이후의 정황이 과연 어떠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며, 동시에 죄에 빠진 인간의 반응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인간은 자신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음을 어느 정도 느끼면서 나름대로 노력을 한다. 최초의 죄인들이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듯이 죄인은 자신이 파악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역부족임을 결국 느끼게 된다.더 나아가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회피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적인 사유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타락한 사람도 나름대로 '타락한 이성에 부합하게' 설명을 시도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때로는 도적적인 것을 최고의 것으로 제시하면서 결국 하나님도 도덕적인 것을 위해 있다는 식으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가치를 최고의 가치나 최고선으로 제시하기도 하고, 또는 그 이상의 어떤 종교적인 것을 추구하기도 한다.아니면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아 나선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거나 명예를 추구하고, 권력을 획득하는 방식을 추구하기도 한다. 또는 주어진 문제를 잊어버리려고 술, 마약, 도박 등에 마음을 내어 주어 그 안에서 쾌락을 누려 보려고 한다. 그러다가 이런 것들에 중독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도 사람에게 만족을 주지 못함을 깨닫고, 결국 사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며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이렇게 문제 해결을 위해 자기가 나름의 방법을 추구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타락하여 죄인된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가장 위험한 것과 비슷하다.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상황을 제대로 보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놀라운 지혜와 선하심으로 인간이 이렇게 어렵고 매우 비참한 상황 속에 있음을 보시고 인간을 찾아 오셨다. 최초의 죄인인 아담과 그의 아내가 영적 죽음 가운데 살면서 결과적으로 육체적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지 위한 일을 시작하셨다. 이를 위해 그들에게 오셔서 놀라운 약속을 주신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에덴동산의 뱀에게 한 것으로 보이는 다음 같은 말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라는 매우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다. 이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성경 전체를 통해 살펴보면 이 말은 결국 뱀의 배후에 있는 세력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옛날 유대인들도 그렇고,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은 사탄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여기셨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하시면서,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라고(요 8:44) 말씀하셨다. 이 때 예수님은 창세기 3장의 타락 사건을 염두에 두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사탄이 거짓말로 인간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탄과 사탄의 후손들(즉, 사탄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과 대적하여 최종적 전투를 하실 분을 '여자의 후손'이라 했으니, 결국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신 분을 통해 인간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이다. 여인이 나은 사람(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세력을 멸망시킬 존재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를 '원복음'이라고 불러왔다.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성경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선포한다. 그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 사역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과 그가 행하시는 구원 사역에 온전히 의존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최초로 이 약속을 받은 아담은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의 선언 한 가운데 포함된 구원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을 의존하였다. 그랬기에 죽음을 선언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도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생명)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이때부터 아담 아내의 이름이 생명이라는 뜻의 하와가 되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구원 약속을 믿고, 자신의 아내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될 것이며, 그 여자의 후손 가운데 언젠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원자가 이르러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믿은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태초부터 믿음의 종교였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잘 받고, 파악하고, 믿어, 순종하는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최초의 타락 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교리
타락
선악과
무화과나무잎
최고선
허무주의
최초죄인
원복음
하와
어떻게 복을 받을까(시편 84편)
by Matt Smethurst
2021-04-22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시편 84편을 가장 달콤한 시라고 불렀다. 그는 84편에 '시편의 진주'라는 별명까지 붙였을 정도였다. 게다가 84편은 장엄하기까지 하다.그러나 84편은 승리의 노래가 아니라 절망의 울부짖음이다. 시편 저자는 예루살렘에 있고 싶다고, 하나님의 존전인 성전에 있고 싶다고 갈망하며 이렇게 외친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2절). 그는 성전 서까래에 둥지를 틀고 있는 새들을 부러워할 정도로 성전을 사모한다(3절). 그가 왜 성전을 향한 순례를 할 수 없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시편 기자가 지금 자신이 있고 싶은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를 둘러싼 삶의 정황이 그의 마음속 갈망을 방해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상황에서도 반복해서 복에 대해서 말하는 시편 저자는 우리에게 놀라움을 준다. 나는 지난 수년간 84편을 묵상해왔지만 지금 코로나 시대를 맞아서 이 시편 속에 담긴 아름다움과 지혜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길어 올린 세 가지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복을 받는 것은 단지 해시태그를 다는 것이 아니다오늘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를 단 복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니까 무려 1억 3천만 개가 나온다. 대부분은 다 재미있는 장소에서 찍은 셀카에 붙어있다. 대부분 사람이 굳이 드러내지 않더라도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헤이, 여러분, 나 좀 봐.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한번 보라고.” 그리고 따라오는 사진에 바로 '복'(#blessed)이 붙어있다.여기서 말하는 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굳이 추론한다면, 그건 뭘까?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시적인 복을 주신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가 당신에게 주신 가장 최근의 복이 사진찍기에 완벽한 휴가가 아닌,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전염병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은 일종의 급여 삭감? 아니면 분열된 관계를 의미하는 건가?그럼 복 대신 ‘저주’라는 말을 쓰고 거기에 해시태그(#cursed)를 달아야 하지 않나?감사하게도 그렇지 않다. 짧은 84편을 통해서 시편 저자는 복을 세 번 이야기한다.“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4절).“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5절).“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절).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복 받은 사람이다. 시편 기자는 좋은 삶이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는 삶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좋은 삶이란 가장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소유하는 삶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이 '복 받은'이 갖는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가 되어서야 정확하게 드러난다. 신약성경에 112번 나오는 복 중에서 물질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복은 과연 몇 개나 있을까?단 하나도 없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멋진 사진을 SNS에 올리면서 남발하는 복과 비교할 때 성경이 말하는 복의 차원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2. 단지 마음을 따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5절에서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정말로 놀라운 구절이 아닌가? 복에 관한 성경적인 정의와 마찬가지로, 이 말 또한 오늘날 놀랍도록 반문화적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마음의 나침반을 연구하고 그 열정이 이끄는 곳을 따라가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항상 듣는 말은 “네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라”는 것이다.84편은 그런 헛소리에 관심이 없다. 진정한 기쁨은 “나를 따르라”는 마음속 나침반을 따라갈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라”는 음성에 순종할 때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중에서 당신의 마음이 달려가고 있는 길은 어떤 것인가? 복은 자존심을 세우다가 만나는 막다른 골목과 같은 마음이 아니다.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 자신을 표현하고, 또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그런 막다른 골목이 아니다. 대신 오히려 혼잡한 도시에서 빠져나와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달리는 시원한 고속도로와 같은 마음 속에 복이 있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는 자가 바로 복 받은 자다.3. 하나님은 갈급한 마음에 힘을 주신다어떤 특정한 도전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런 적이 있다. 게다가 성경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아직 미래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존재다.1956년에 C. S. 루이스(C. S. Lewis)는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안 생기면 어떡하지 등의 걱정으로 고통받는 한 여성과 편지를 나눴다. 어느 시점에서 루이스는 간단히 이렇게 썼다.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와 관계없이 발생한 일 자체를 견딜 수 있는 힘이 있는 존재입니다.”그러면, 그런 능력이 언제 당신에게 도착할까? 딱 필요한 바로 그때 도착한다.루이스가 위의 편지를 보내기 약 십 년 전에, 네덜란드 기독교인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몇 년 후 이제는 고전이 된 자서전에서 그녀는 하나님의 공급 타이밍에 대해 묵상했다. 그녀는 자기가 느꼈던 불안감을 여섯 살 소녀의 모습을 통해서 표현했다. 아버지가 침대 끝에 앉아서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코리, 우리가 함께 암스테르담에 간다면, 내가 언제 너한테 열차표를 줄까?”나는 몇 번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기차에 타기 직전에요.”“맞아. 하늘에 계신 우리의 지혜로운 아버지는 우리가 언제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셔. 절대로 그분보다 앞서 가려고 하면 안 돼, 코리.”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시며 영적 성장은 결코 전자레인지 요리처럼 속성으로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길고도 힘든 순례이며 한 번에 한 걸음씩 믿음을 통해서 전진한다. 진정한 성전물론 오늘날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성전은 시편 저자가 생각하던 성전과는 다르다. 84편이 쓰이고 천 년이 지나고 나서 한 남자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다음과 같은 과격한 말을 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유대인들은 코웃음을 쳤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20절).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얼마 후 십자가에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할 자신의 육신이었다(21절). 시편 기자가 가졌던 애끓는 갈망의 본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참된 만남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하나의 전조다. 그리고 신약 성경의 모든 페이지는 다음 소식으로 가득하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새로운 영적 성전에서 살아있는 돌이 된다(고전 3:16, 엡 2:22, 벧전 2:4-5). 하나님의 성전은 더 이상 우뚝 솟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구조물이 아니다. 그의 성전은 이제 예수님이라는 인간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의 영광이 특별히 거하는 장소인 교회다. 복 받고 싶은가? 정말로 자유로운 마음을 갖고 싶은가? 힘든 세상을 이겨내는 능력을 얻고 싶은가? 그렇다면 시편 84편은 바로 당신을 위한 시다. 희망을 하나님에게 두어라.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신다.원제: How to Be #Blessed (A Lesson from Psalm 84)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신학
구약성경
시편84편
코로나바이러스
찰스스펄전
성전의의미
해시태그
인스타그램
CS루이스
축복
팀 켈러가 설명하는 복음의 세 속성
by 고상섭
2021-04-20
레슬리 뉴비긴은 “기독교의 이야기는 단지 옆에 두고 바라만 보는 렌즈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눈에 쓰고 들여다보는 렌즈가 된다.”라고 말했다.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실제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1-11장에서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교리를 풍성하게 제시한 뒤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말한다. 성경은 복음이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팀 켈러는 신약학자인 사이먼 개더콜(Simon Gathercole)이 말하는 복음의 개요를 통해 복음의 무궁무진한 영향력을 볼 수 있는 세 가지 공통적인 진리가 있다고 말한다. 1. 성육신과 위에서 아래로 임하는(Upside-down) 복음의 속성 ‘위에서 아래로 임하는’ 복음의 속성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고자’하는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속성이다.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종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방식으로 임한다. 성경은 세상적으로 잘살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무대 중앙에 세우면서 가치가 역전된 ‘거꾸로의 나라’임을 선언한다. 팀 켈러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여인’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레아’를 언급한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인이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다가가셔서 “내가 너의 진짜 신랑이다. 나는 남편없는 자들의 남편이며,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시고, “설령 레아의 남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나는 레아의 남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팀 켈러는 하나님이 이렇게 레아를 사랑하고 선택하시는 이유는 단지 약자를 편애하셔서가 아니라 그것이 복음의 속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여인을 세상의 구원을 담당한 분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로 만드는 것이 바로 ‘위에서 아래로 임하는’ 복음의 속성이다. 이 레아의 모습은 예수님을 닮았다. 예수님도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자기 백성마저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으며, 심지어 하나님도 예수님을 원하지 않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시며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셨다. 어째서 예수님은 아무도 원치 않는 사람이 되셨을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다. 예수님은 친히 사람이 되셔서 겪으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연약함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구원은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희망이 없고, 윤리적 실패자며, 죄인이어서 완전히 망했으며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레아와 레아의 자손을 위해 위에서 아래로 임한 것이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2. 속죄와 안에서 바깥으로 임하는(Inside-out) 복음의 속성 바리새파 사람들은 내적 측면보다 외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언제나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은 내가 무엇을 행하면 그 대가로 상을 받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 반대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고 은혜로 값없이 사랑하셨음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내면의 기쁨과 감사가 생기고 그 은혜로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종교는 바깥에서 우리 내면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우리 안에서 바깥으로 솟아나는 것이다.팀 켈러는 누가복음 15장을 설교하면서 집을 나갔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향해 분노하는 첫째 아들을 언급한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첫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명을 섬겨 어김이 없었다"라고 항변한다. 율법에 순종하고, 교회 생활을 충실하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첫째 아들은 외적인 행위를 통해 보상을 얻으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팀 켈러는 “자기가 주인이 되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는 도덕률을 깨뜨리면서 마음대로 사는 길이고, 또 하나는 모든 도덕률을 지키고 지극히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첫째 아들은 선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선함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것이다. 첫째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장애물은 그의 죄가 아니라 그의 선한 삶이었다. 그의 악행이 아니라 의로움이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이 첫째 아들에게 가장 필요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아버지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며, 아버지의 사랑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도 이미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확신해야 한다. 그것을 확신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정한 첫째 아들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온 우주의 주인이 우리를 사랑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모든 변화는 결단과 결심을 통한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속성을 누리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미 용납되었고, 나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 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자녀라는 그 내면의 확신으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이렇듯 복음은 내면에서 시작하여 바깥으로 임한다. ('탕부 하나님')3. 부활과 미래를 앞서 경험하는(Forward-back) 복음의 속성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 나라는 완성되지 않았다. 메시아의 왕국은 두 단계로 도래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처음 오셨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두 번째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already)' 임하였지만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고 있다.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할 것임을 그리스도인들은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고, 미래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보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셨다. 신약학자 조지 래드는 이것을 ‘미래의 현존(The presence of the Future)'이라고 말했고,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님과 동행하며 오늘 현재 맛보며 사는 삶이다. 팀 켈러는 에베소서 2장을 설교하면서 우리의 몸이 종말에 부활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신의 부활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이미 부활했다고 말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바울은 구원받은 우리가 이미 영적으로 승천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변화가 단순히 개과천선의 차원이 아니며, 새로운 종교 단체에 가입한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면 땅에서 하늘로 옮겨진다는 말이며, 내세의 능력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연합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죽어있었던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들을 수 있는 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영적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우리가 믿을 때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객관적 진리와 미래의 원리를 바탕으로, 천국의 삶이 지금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에게 주관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미래에 처할 최종상태를 이미 지금부터 맛보기로 경험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자유롭게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실재와 영광과 사랑을 느끼며,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로 더불어 새로운 사랑의 연대를 이룬다. 영적 부활이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 하늘에 산다는 뜻이다. 현재 속에서 미래를 산다는 뜻이다.” ('부활을 입다')사이먼 개더콜이 언급한 복음의 세 가지 속성은 다양한 성경 본문에서 복음의 부요함을 드러내주는 좋은 도구가 된다. ‘위에서 아래로 임하는 속성’은 교회를 진실한 공동체, 헌신적인 구제와 자원의 나눔 그리고 영적 훈련, 계층간 화해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모습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속성’은 개인의 회심, 은혜에 대한 각성, 복음 전도, 교회 개척 등으로, ‘미래를 앞서 경험하는 속성’은 도시와 이웃의 복지, 사회 참여, 문화 변혁,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사람들을 훈련하게 하고 직업과 신앙을 통합하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복음의 세 가지 속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좀 더 풍성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 영향력은 더 크고 넓게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게 된다. 복음은 단지 옆에 두고 바라만 보는 렌즈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눈에 쓰고 들여다보는 렌즈가 된다. 그렇게 복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신약
팀켈러
레슬리뉴비긴
사이먼개더콜
복음
성육신
속죄
부활
복음렌즈
약함으로 죽음을 이긴 십자가의 능력
by Marshall Segal
2021-04-12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골 2:13–14).십자가에 달리는 것보다 더 약해질 수 있는 때가 있을까? 그의 손과 발은 고통에 못박혔고, 벌거벗은 채 만신창이가 된 몸은 모든 이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고통스러운 숨을 내쉴 때마다 그의 폐는 피할 수 없는 최후의 순간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대적들은 비웃음으로 그의 죽음을 조롱했고, 친구들은 달아나 몸을 숨겼다. 예수는 고통과 수치라는 냉정한 대적자들 틈에서 죽으셨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예수의 약함을 드러내고 이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그에게 고초를 가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중략]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41–44). 그를 조용히 처형할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예수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온 천하에 보여주고자 했다. 그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모든 이들에게 공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약함처럼 보였던 그것이 사실 그 무엇보다 강한 것이었다. 자기를 방어할 어떠한 것도 없어 보였던 예수를 죽이려 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렬하고 찬란한지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약한 그 순간에, 예수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두 가지 대적, 바로 나의 죄, 그리고 나를 대적하는 사탄의 군대를 무너뜨리셨다. 예수의 약함은 당신의 정죄를 짊어지셨다사도 바울은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 [중략]”(골 2:13)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그리스도 밖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진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죄 가운데 ‘죽었던’ 이들이다. 아팠다거나, 망가졌다거나,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거나 흠이 좀 있었다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다. 우린 ‘죽었던’ 존재들이다. 태어났던 그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판 무덤에 누워있던 이들이었고, 우리의 마음은 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예수를 사랑할 능력이 없었다. 죄는 우리 소망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집어삼켜 버렸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를 사랑했다(요 3:19).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기 없는 영혼을 무덤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다. 바울은 계속하여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지심으로 우리 죄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감당하셨다. 우리가 짊어져야 했던 하나님의 진노를 그 몸으로 온전히 받으셨고, 우리가 결코 갚을 수 없었던 빚을 그가 없애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조롱하고 거부했을 때조차도 그의 풍성한 긍휼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 큰 사랑’(엡 2:4)으로 사랑하셨다. 이러한 긍휼에 대해 묵상하며, 바울은 이렇게 기도한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19–20). 이전에 죽었던 우리의 마음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그의 능력이 어떠한 것인지를 정말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 그리고 그의 능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십자가에 능력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수의 약함은 당신에 대해 선포된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다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만 승리하신 것이 아니다. 악에 대한 그의 오랜 전쟁에서 십자가의 못들로 승리를 거두셨다. 그 전쟁은 인류의 첫 아이가 나기도 전에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5). 가장 약해지셨던 그 순간,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악의 세력을 무장 해제시키셨다. 무장 해제시키셨을 뿐 아니라 그는 승리를 쟁취하셨다. 승리를 쟁취하셨을 뿐 아니라 그는 그들을 부끄럽게 만드셨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이면에 어떤 세력들이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배회하고, 유혹하고, 속이며, 우리를 더럽히는 어두움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당신의 집 문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죄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에 대한 우주적인 강력한 반란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매일매일 예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열을 정비하는 엄청난 영적 세력들에 대한 위기 의식을 갖고 살고 있는가?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라고 썼다. 지금 우리가 씨름하는 상대는 우리 자신보다 훨씬 강한 세력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구주께서 그의 손에 박힌 못들로 그들을 무장 해제시키셨고 십자가에서 최후의 숨을 내쉼으로 그들을 무너뜨리셨다는 것을 앎으로 이 싸움에 임한다. 우리는 또한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는 말씀을 앎으로 이 싸움에 임한다. 우리 왕께서 다시 오셔서 악을 단번에 영원히 멸하실 그 날을 기다리는 지금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최후의 승리를 믿는다. 약함 속에 드러난 그의 능력은 우리를 정죄하는 모든 것을 다 감당하셨다. 그의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다 멸하셨다. 원제: Death Was Crushed by Weakness: The Wondrous Power of the Cross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복음
십자가
통치자
권세
전쟁
승리
능력
무할례
창조주
삶 속에 적용되는 칭의 교리
by Nate Pickowicz
2021-04-09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John Calvin,1509–64)은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야말로 “기독교를 지탱하는 근본 원리다”(기독교 강요, 3.11.1)라고 강하게 선언했다. 16세기 종교 개혁의 실질적인 원리로 알려진,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는 교회에 꼭 필요한 개혁을 가져오려는 영적 전쟁에서 중심이 된 주제이기도 하다. 로마와 갈라디아 교회에 쓴 바울의 편지에 성경적인 이 교리가 분명하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여겨지는 교리이기도 하다. 칭의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볼 때, 교리의 세밀한 측면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좀 거칠게 말해서, 만약에 이 칭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 전체를 아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를 담은 성경의 가르침을 용기있게 지켜온 신실한 신앙 선배들이 남긴 풍부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칭의에 관해서 명확하고 간결한 정의를 제시한다. “칭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이며, 그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우리에게 전가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WSC 33).다른 말로 하면,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것에 기초한 우리의 믿음을 향한 하나님의 합법적인 행위다. 그러나 종종 칭의 교리가 가진 실질적인 본질이 간과되고 있다. 그것은 때로 이 교리가 가진 용어와 개념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교리가 얼마나 실질적으로 적용 가능한지를 아예 놓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단순하게 지식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적용할 수 있는 것도 많겠지만,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 교리를 적용하는 데는 다음 네 가지의 실질적인 방법이 있다. 확신믿음으로 인한 칭의 교리를 실제로 적용하는 첫 번째는 바로 확신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생각되지 않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낙담한 날, 흔들리는 날, 죄를 많이 지은 날, 그래서 “이런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일까?”라는 질문에 하루종일 괴로운 날도 있다. 그러나 이럴 때 칭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내가 다시 태어났고, 나는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갈 2:20) 있음을 확신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 사업을 완성하셨고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으며, 또 우리를 성령으로 인치셨다. 칭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칭의가 필요없음을 보증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법정 앞에 선 타락한 죄인들이 이제는 “칭의로 인해 의롭게 되었다”라고 선언하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칭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따라서 낙담하는 날을 만나거나, 또 불안함을 느낄 때, 우리는 오로지 믿음만으로 영원히 솟아나는 의로움의 샘을 마시면서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으며, 또한 “너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방어로마서 8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이렇게 주장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33-34절).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칭의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신자를 보호한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고 고발할 때,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단단한 기초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우리의 죄가 너무 크다고 정죄할 때, 또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진짜로 구원 받았다고 분명히 말한 적은 없잖아?”라고 속삭일 때,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의지해서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내 내면에는 의로운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치거나 드릴 것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9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그렇게 할 때 사탄은 우리로부터 도망갈 것이다. 고발당할 때, 의심의 유혹을 받을 때, 우리 영혼의 대적으로부터 커다란 정죄함을 당할 때,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주는 높은 칭의의 탑으로 피하자. 그의 독생자를 통해서 우리를 받아들인 하나님 안에서 위안과 피난처를 찾도록 하자.겸손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당신의 능력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왜? 바울이 그렇다고 말하니까, 그래서 아무도 자랑하지 말라고 하니까. 정말로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 것이라면, 우리는 자랑할 게 없다. 오히려 칭의 속에 숨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겸손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묵상할 때, 거기에는 조금도 자만심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사실, 우리의 반응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제거하셨고, 우리의 죄를 아들에게 두셨으며, 그 아들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심으로 결국 아들의 공로를 통해 우리를 의롭게 여기셨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어떤 진리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만든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이 교리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27절). 이것은 마치 바울이 우리 어깨를 붙잡고 우리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뭐야? 네가 도대체 자랑할 게 뭐가 있냐고? 자랑할 건 아예 없어. 여기에 인간의 자랑이 들어갈 여지는 아예 없다고.” 바울이라면 자만심에 찬 그리스도인은 아예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할 것이다. 칭의는 은혜 그 자체다. 우리 자신의 은혜가 아니라 자격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므로 자랑과 찬양과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해야 한다. 감사칭의에 대한 바른 성경적인 관점을 갖게 되면 감사가 우러난다. 칭의가 공로와 관계 없이 오로지 믿음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될 때, 칭의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될 때, 우리가 용서 받고 의롭다고 선포되고 또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무한한 감사가 우러나오게 된다. 그런 감사는 타락한 죄인들이 의롭게 받아들여질 방법을 무한한 지혜로 생각해낸 하나님을 향해 쉬지 않고 예배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믿음으로 인한 칭의는 모든 신자들이 천사의 군대와 그들의 목소리에 합류하도록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거룩하며 거룩하신 분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시다”라고 부르짖게 만든다. 칭의를 생각하면서도 우리 속에 예배와 감사의 삶이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칭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게 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럼으로써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는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믿음으로 인한 칭의는 단지 토론 또는 신학적인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확신을 얻고, 사탄의 공격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되고, 겸손한 마음을 키울 수 있으며, 또한 지속적인 감사의 삶을 누리게 된다. 원제: Practical Applications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신학
교리
존칼빈
칭의
확신
믿음
감사
방어
겸손
세계 역사를 바꾼 사건
by Brandon D. Crowe
2021-04-07
사람들이 사도행전을 읽는 이유는 보통 초대 교회에 관해서 알기 위해서지만, 만약 그게 사도행전이 전하는 내용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누가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 즉 예수님에 대한 메시지를 놓치게 된다. 사도행전 도입부에 이미 하늘로 승천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사도행전 내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이 그리는 예수님은 부활하고 승천해서, 이제는 영광스런 왕중의 왕으로 그의 교회를 인도하고 성령을 부어주시며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사도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선교의 사명을 맡은 사도들은 이제 예수 부활의 산 증인이 되어야 했다(행 1:21-22). 사도들은 그리스도 사역의 많은 부분을 전파해야 했지만, 만약에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성패가 달린 핵심이 되는 것,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활이었다. 누가는 또한 부활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을 때 모든 것이 변했다. 동시에 성경 말씀이 다 이뤄졌는데, 다른 말로 하면 부활은 결코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기다리던 목표이기도 했다는 의미다.사도행전 속 부활이 가진 다섯 가지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1. 부활과 성령님의 시대사도행전은 구속사에서 어떻게 부활이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100여 년 전에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는 부활의 시대는 다름 아닌 성령의 시대라고 말했다. 이 둘은 나란히 간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한 부활의 시대는,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규정할 수 있는 시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사도행전은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성령의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을 자세히 서술한다. 비록 우리가 최종적인 성취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지만, 부활의 시대는 죽음에서 살아난 첫 열매인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 역사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동시에 우리는 지금 성령이 풍성하게 부어주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성령은 예수님의 부활 전에도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성령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사역했다(예를 들어, 마리아, 엘리자베스, 사가랴, 시므온), 또한 선지자의 시대에도 성령은 활동했다(행 7:51), 모세 시대에도 그것은 다르지 않았고(민 11:17, 25; 참조, 신 32:11) 심지어 세상이 창조될 때에도 성령은 활동했다(창 1:2). 그러나 부활과 함께 과거와는 뭔가 다른 역사가 시작되었다. 성령은 보다 더 풍성하게 부어졌고, 이제 성령은 모든 인간들이 다 풍성하게 체험하는 존재가 되었다. 2. 부활과 전 세계적인 운동부활의 시대는 또한 열방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으는 시대이기도 하다. 부활해서 승천한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의 주다(행 10:36). 하나님의 언약이 주는 축복은 유대 민족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유입되는 엄청난 숫자의 이방인 문제는 1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질문을 불러 일으켰지만, 그럼에도 이 사실은 사도행전 속 로마 백부장 고넬료(행 10-11; 참조, 갈 3:13-14)를 통해서 여실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수천 년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징표인 할례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 이 문제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다뤄졌다. 이 장면을 통해서 어떻게 해야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존하면서 같은 공동체 속에서 함께 번영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고민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할까? 그들도 전통적인 유대인 음식법을 지켜야 하는 걸까?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핵심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영을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모두 다 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차별은 전혀 없었다(행 15:8-9). 그렇기에 할례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영향을 받은 사도들의 편지에 이제 할례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공의회 서한에서는 특정 음식을 금지하는 것과 관련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 있지만, 그런 모호함은 바울 서신서를 통해서 깨끗하게 정리된다. 즉, 음식에도 어떤 구분을 할 필요가 없고, 또 누가 어떤 음식을 먹는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점은 베드로가 내린 결론과도 일치한다(행 10:34-35; 15:9-11).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방인이 초대 교회 공동체에 유입되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게 다 바뀐 것은 아니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성적 부도덕함과 관련해서는 구약의 율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사도들은 구약의 율법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비추어서, 특히 그의 부활과 관련해서 구약의 율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3. 부활과 칭의그리스도의 부활이 종종 사도들의 설교를 이해하는 논리적인 핵심이 되지만, 그들의 설교는 보통 회개하라는 권고로 끝이 난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뜬금없는 메시지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부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해야 한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고, 이제는 부활해서 살아있으며, 앞으로 모든 민족을 다 심판하는 권한을 받았기 때문이다(참조, 2:36-39; 13:38–41; 17:30–31). 참으로 사도행전을 보면 부활은 칭의 및 죄 용서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정복한 의로운 존재다(참조, 3:14–15, 20–23; 26; 5:30–31; 13:38–39).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칭의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다른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칭의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칭의와 죄 용서도 이미 구약에서 현실로 드러나있다. 그렇기에 바울은 믿음으로 인한 칭의의 사례로 다윗과 아브라함을 들고 있는 것이다(롬 4). 그럼에도 모든 믿는 이를 의롭다하는 역사는, 구약과 신약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4. 부활과 성경성경 속 가장 흥미로운 구절 중 하나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성경을 열어서 엠마오로 가는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선지자들을 관통하며 예수님은 성경 전체가 어떻게 오로지 자신만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설명한다(눅 24:25-27).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전하는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고난을 당해 죽고, 부활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눅 24:44-47).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런 성경 주해를 듣고 싶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구약의 어떤 구절들을 사용해서 제자들을 가르쳤는지 알 수 없어서 애통해 한다. 누가는 우리를 그냥 추측만 하도록 남겨둔 것 같다. 그러나 누가가 우리를 추측하도록 남겨놓지 않았다면 어떨까? 만약에 그가 쓴 후속작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다 실현이 될, 성경 속 모든 디테일을 다 알려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이게 바로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초기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그들은 특히 부활과 관련해서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을 어떻게 실현했는지에 관해서 아주 자세한 내용을 보여준다. 비록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가 100퍼센트 모든 내용을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설교를 보면 성경이 모두 다 예수님과 그의 부활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 더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나는 누가가 사도행전을 쓴 이유 중 하나가 단지 초대 그리스도인과 바울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경말씀을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바울이 재판정에 섰을 때, 그는 일관되게 조상의 전통과 성경을 위반한 적이 없다고 자신을 향한 고소를 강하게 거부한다(24:14; 26:6).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아그리파 왕에게 만약에 당신이 성경을 믿는다면, 당신은 또한 죽은 자의 부활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26:22,27).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성경의 참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그리고 성경 전체가 부활을 드러내고 있다고 믿는 것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길이다. 5. 부활과 초기 기독교 신학초기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가 몸으로 부활했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었고 단지 고통을 겪는 시늉을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진짜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았고,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 부활했다. 부활의 실질적인 의미는 초대 교회에게도 중요했다. 초대 교회 교부였던 예루살렘의 시릴(Cyril of Jerusalem)은 부활이야말로 모든 선한 일의 근본이 된다고 말했다. 부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다 중요하다. 부활은 또한 기독교의 공적 본질을 강조한다. 부활은 공적인 사건이었지 단지 몇 명에게만 알려진 은밀한 사건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전문 지식을 통해 누구나 다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일련의 철학적 지식이 아니다.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가 죽었고 그런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한 공적인 인물에 관한 공적인 메시지다. 부활이 사도행전의 중심이라면, 또 사도행전 속 사도들이 행한 설교의 중심이기도 하다면, 부활은 우리가 전하는 기독교 메시지에서도 중심이 되어야 한다. 독특한 메시지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진 중요함이 내게 생생하게 다가온 것은 몇 년 전 어떤 사람이 나와 내 친구에게 도대체 기독교가 무엇이 특별하기에 다른 종교와 다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였다. 그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누구라도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으면 다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부활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한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오늘도 여전히 관련이 있는 사건이다. 부활은 예언되지 않은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사건이며 모든 민족, 모든 장소와 관련성을 가진 사건이다. 원제: Turning Point of World History: The Resurrection According to Ac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복음
부활
사도행전
성령
칭의
성경
게할더스
할례
사역
처음
이전
26
페이지
열린
27
페이지
28
페이지
29
페이지
3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