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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후 우리 몸은 지금 모습 그대로일까
by Matt Perman
2021-04-06
부활을 이야기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새로운’ 몸을 입는 부분을 빠뜨리지 않는다. 만약에 이런 생각이 우리의 지금 몸이 ‘새 것과 같은 또는 새 것보다도 더 나은’ 몸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해서 지금 이 땅에서 입고 있는 이 몸과 전혀 다른 종류의 새로운 몸을 입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활과 관련해서 고민하는 기독교인이 한번 더 되짚어봐야 할 문제다. 사실 성경은 우리가 부활하면 지금 이 땅에서 입고 있는 ‘바로 이 몸’이 변화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영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육적인 존재다. 우리의 정체성에 있어서 우리의 몸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몸은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입고 있는 이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나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새롭게 변화되어 부활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그것 또한 평생 이 땅에서 짊어지고 살았던 병마와 같은 약함을 그대로 가지고 부활한다는 것이고, 그 경우 부활은 우리에게 어떠한 소망도 줄 수 없게 된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장래의 은혜(Future Grace)’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옛 몸은 새 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당신의 몸이다. 거기에는 연속성이 있다. 우리는 상상도 못하는 일을 하나님은 할 수 있다. 부활은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대신 부활은 옛 창조의 변화라는 측면으로 이해해야 한다”.우리는 같은 몸을 입을 것이다죽은 사람이 같은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근거는 그에 관한 성경 구절이 많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그리스도는 죽었을 때와 같은 몸을 입고 부활했다. 우리는 그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로 이 점을 알 수 있다(눅 24:1-6). 게다가 그의 부활한 몸은 십자가의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요 20:25,27).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대로 따라서 부활할 존재이기 때문에(빌 3:20-21; 고전 15:49), 우리도 같은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다. 두 번째로 “죽은 자의 부활”(고전 15:13, 등)이라는 말 자체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 말은 죽은 몸이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만약에 다시 살아난 몸이 죽은 몸이 아니라면 바울은 결코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애초에 부활이 될 수도 없다.세 번째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고전 15:52)라는 말이 그 사실을 보여준다. 존 파이퍼는 이 구절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몸과 부활해서 입을 몸 사이에 아무런 연속성이 없이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면, 왜 바울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라고 썼을까? 왜 바울은 ‘죽은 자들은 다시는 살지 못하고(왜냐하면 그들의 몸은 다 썩고 몸 속 모든 분자는 다 흩어져 수 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온갖 식물과 동물 속으로 들어갔을 테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라고 쓰지 않았을까? 바울이 그렇게 쓰지 않은 것은 그게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장래의 은혜').네 번째로 빌립보서 3장 20-21절에 보면 이 땅에서의 몸은 부활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하나님이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몸을 만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다섯 번째로 예수님은 부활을 언급할 때 무덤에서 나오는 것까지 포함했다. 그것은 부활이 애초에 죽어서 휴식에 들어간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여섯 번째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it is sown… it is raised)”(고전 15:42)라는 바울의 말은 지금 우리의 몸과 부활한 몸 사이에 연속성이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심고’ 와 ‘다시 살아나며’라는 두 동사를 지배하는 주어가 동일하기 때문이다.(역자 주: 영어의 경우에는 같은 ‘it’이 주어다)일곱 번째로 53절은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죽음의 지배를 받는 몸이 나중에 죽음을 이긴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우리는 새롭게 된 몸을 입을 것이다고린도전서 15장 35-37절을 보면, 바울은 마치 우리가 이 땅에서 입고 있던 몸과는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는 것처럼 썼다.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그러나 다음에 따라오는 문맥을 살펴보면 바울은 결코 같은 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우리가 부활해서 입게 되는 몸은 지금 입고 있는 몸보다 더 좋은 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사실 이 구절은 농업이라는 비유를 써서 지금의 몸과 부활한 상태의 연속성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부활한 몸을 뿌려진 씨가 자란 식물에 비교한다. 부활한 우리의 몸이 지금의 몸보다 훨씬 더 나은 것처럼 자라난 식물도 애초에 뿌려진 씨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다. 그리고 씨와 식물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는데 그것들은 다 동일한 유기체다. 땅에 뿌려진 씨에서 해당 식물이 자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몸이 나중에 부활한 몸이 된다. 그러나 자라난 식물이 애초에 뿌려진 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부활한 몸도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입고 있는 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우리가 아직도 가져야 할 몸을 입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 몸이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아직도 부족하다는 의미다(42-44절). 지금의 몸은 아직 미래의 몸이 아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서 부활은 지금 현재의 몸이 변화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했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연속성) 그리고 죽은 자는 변할 것이다(새 몸은 사라지지도 죽지도 않는다)”(‘장래의 은혜’).그럼 도대체 우리의 몸이 변화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바울은 42-44절에서 그 점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약하고, 사라질 수 있고, 영광스럽지 않으며, 육적이다. 그러나 부활하게 되면 이 몸은 능력있고, 사라지지 않고, 영광스럽게 되며 영적으로 바뀐다. 우리의 몸은 능력있게 될 것이다. 몸이 더 이상 스트레스, 피로 또는 연약함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의 몸은 사라지지 않게 될 것이다. 몸이 더 이상 아프지도, 죽지도, 노화되지도 또는 부상을 당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의 몸은 영적이 될 것이다. 몸이 오직 성령님만을 바라고 오직 성령님만으로 충만하다는 의미다. 우리의 몸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진리에 대해서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영광'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아주 밝게 빛나는 빛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 몸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도 밖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피조물에 대한 승귀와 통치의 지위에 대해서 적절한 외적 증거가 되는, 일종의 빛 같은 것이 우리 몸 주위에서 빛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은 마태복음 13장 4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표현되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다니엘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원제: Do We Receive the Same Body We Had on Earth at the Resurrectio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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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연속성
고린도전서
다니엘
장래의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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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이후: 속죄일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사를 돋보이게 하...
by Bobby Jamieson
2021-04-05
정리와 청소에는 차이가 있다. 나는 정리에 관심이 많은 반면, 내 아내는 청소를 더 중시한다. 신발을 선반에 놓고, 옷을 서랍에 넣고 또 책을 선반에 꽂는 것 등이 정리라면, 청소는 진공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묵은 때를 지우는 것 등을 의미한다. 내가 볼 때 정리가 눈에 바로 보이는 즉각적인 차이를 만든다면 청소는 좀 더 차원이 깊으면서도 긴 효과를 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매년 ‘봄 청소’라는 의식을 치른다. 최소한 일년에 한 번은 집 전체를 샅샅이 뒤져가며 깨끗하게 치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 속에 일 년에 한 번 백성들에게 집을 청소하라는 명령이 들어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 명령은 어떤 식으로 하는 걸까?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레위기 16장: 하나님의 백성과 장소를 깨끗하게 하는 것레위기 16장은 익숙한 말씀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 속에 담긴 중요한 부분을 놓친다. 이 장은 속죄일(히브리어로 욤 키푸르)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뿐 아니라 그 장막까지도 정결케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집에 왜 청소가 필요한 걸까? 레위기 16장이라는 문서의 중심에,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규정하는 행동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심을 상징하는(레 16:15-19) 성막의 가장 안쪽 방인 지성소로 가져온 속죄 제물이 있다. 그리고 이 날이 유일하게 사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사람은 오로지 대제사장뿐이었다(참조, 히 9:6-7). 대제사장은 속죄 제물인 염소를 죽이고 그 피를 그릇에 모으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앞에 그 피를 뿌린다(레 16:15).그러면 이것은 어떤 효과가 있는 걸까?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그렇게 하면 지성소 가장 안쪽 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에게 효과를 미친다.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의 집안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레 16:16).레위기 16장은 죄가 우리에게 무거운 죄책감을 줄 뿐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만지는 모든 것까지도 더럽힌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죄는 우리를 더럽게 만들고 또한 우리를 더러움의 전달자로 만든다. 성막을 통해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셨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죄였다. 백성의 죄가 하나님의 집을 더럽혔다. 죄는, 은혜를 통해 그들과 함께 거하시기로 선택하신 하나님을 밀어내겠다는 위협이었다(출 29:45-46; 레 26:11-12).따라서 해마다 행하는 신성한 의식인 하나님의 정결함은 두 가지 영향을 미쳤다. 속죄일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장소를 정결케했다. 우리는 레위기 16장 33절에서 이 두 가지를 다 볼 수 있다. “지성소를 속죄하며 회막과 제단을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할지니.”히브리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사그러나 죄의 문제는 레위기 16장에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이스라엘의 죄는 결국 주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바와 같이 땅이 그들을 '토해 낼' 정도로 쌓였다(레 18:24-25).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는 주님을 그의 성소에서 멀리 몰아냈다(겔 8:6).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성소에서 떠났다(겔 10:1-22). 비록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고 그들이 성전을 재건할 수 있게 하셨지만, 근본적인 죄의 상태는 지속되었다.그 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 때까지 지속되었다. 히브리서가 말하듯이, 매년 속죄일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속죄일이 죄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마땅한 대가를 치르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 지금도 메아리 치는 레위기 17장 11절과 히브리서 9장 22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그리고 셋째 날에 그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얻었다(히 7:16). 그런 다음 예수는 욤 키푸르 때 대제사장이 예표한 일을 행하셨다. 그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완전하고 충분한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아버지께 자신을 바쳤다. 레위기 16장에서 살펴본 내용에 비추어 이해할 때에만 다음 구절이 비로소 제대로 된 의미를 갖게 된다.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4–26; 참조, 9:11–12).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2, 28; 참조, 9:15; 13:20).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7–10; 7:11–28).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히 4:14; 7:26),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8:1–5; 9:11–14, 23–28; 10:10–14; 12:24).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거처를 깨끗하게 하는 것 외에도, 우리를 위해 드린 예수님의 하늘 제사는 우리에게 온전함(히 10:14)과 구속(히 9:12), 용서(히 10:18), 그리고 하나님께로의 무제한 접근(히 4:16; 10:19-20)을 가능케 하셨다.가장 깊은 정결함이런 식의 히브리서 읽기가 생소할 수도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제사는 오로지 십자가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레위기 16장을 더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히브리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속죄일의 절정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순간이다. 히브리서는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히 9:7).대제사장은 언제 어디서 제물을 바쳤는가? 하나님의 지상 성소에 들어갔을 때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 어디서 제물을 바치셨는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하늘로 올라간 후 하나님의 천상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고, 죽음을 물리치고, 옛 언약의 저주를 지고도 새 언약을 시작하신 곳이기 때문에 레위기 16장은 결코 십자가를 경시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히 2:9, 14-15; 9:15–17; 13:20).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신 자신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보여주심으로 지상에서의 죽음이 이룬 것을 아버지께 똑똑하게 드러내셨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성취한 것을 하늘에서 하나님께 드렸다.이런 청소는 우리가 매년 봄에 하는 청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청소다. 그리고 너무도 깊은 의미를 가지는 청소이기에 한 번만 하면 되지 다시 할 필요가 없다. 원제: After Calvary: How the Day of Atonement Highlights Jesus’s Heavenly Offer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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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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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아침에 묵상해 보는 오늘의 기쁨
by Matthew Westerholm
2021-04-04
“오늘 하루를 잘 보낸 건가?” 침대로 기어 들어가 잘 준비를 하는 내내 내 마음은 조급하게 지난 24시간을 평가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조합한 복잡한 메트릭스를 사용해서 나 자신을 검토했다. “성공적인 하루였나? 목표를 달성했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은 하루였나?” 내 생각이 이렇게 요동치는 사이 나는 금방 잠에 들지 못한다. 그리고 잠을 잔다고 해도 그렇게 깊게 잠들지 못한다. 내 문제는 언제나 하루가 끝나고 나면 그 하루를 너무 지나치게 분석한다는 것이다. 하루가 끝나고 초조한 마음으로 그 하루를 분석하는 대신, 시편 기자는 걱정 근심을 단숨에 뒤집어 버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기도를 소개한다. 시편 90편 14절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영어의 경우) 이 구절 속 19개 단어를 빨리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그 하루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실로 영광스러운 진리를 담고 있다. 궁극적인 요구: 우리를 만족시키소서첫 번째 단어인 ‘만족’은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다. 시편 기자는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께 만족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그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달라는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런 요청이 허락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수많은 요인들은 잠 못 드는 밤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만족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의지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만족함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이 시편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시선을 돌리도록 하고 또 그에게 우리를 만족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함을 일러준다. 여러 다양한 환경에서 만족을 위한 기도는 어떤 모양일까? 만사에 관심이 없어지거나 무기력한 때라면, 나를 매료시키고 내게 생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지루하거나 산만하다면, 내 맘을 기쁨으로 사로잡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외롭거나 비참할 때면, 나와 함께 하고 위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매일 아침에다른 사람들이 만족을 찾아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하루가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의 자녀를 만족시킨다. 아침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함을 믿는 자들은 이제 그 하루를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데만 열중할 수 있는 자유함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하루를 살 수 있는 자유함을 준다. 개인적인 성취를 통해서만 만족을 찾는 이 세상에서는 만족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일을 통해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으로 자유하게 되었다. 이 세상은 또 레크리에이션을 통해서 기쁨을 추구함으로 만족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으로 인해 자유로워진 우리는 이제 어떤 환경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통해서 만족을 추구하도록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으로 자유로워졌기에, 도리어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하면서 그들을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마음이 환경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어떤 환경도 받아들이고 또 그 환경을 적절하게 해석하도록 도와준다. 하루 스케줄을 보면서 좋은 하루가 되기를 바라거나 또는 어떤 술수를 써서 좋은 하루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대신,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이 자비하심으로 허락하시는 사랑, 우리를 만족하게 하는 그 사랑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신실하고 새롭게하나님의 사랑이 행여나 희미해지거나 사라지지는 않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처럼 언제나 신실하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신실하고 새롭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두 형용사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그의 자녀를 항한 그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우주를 새롭고 창조적인 에너지로 오늘도 붙잡고 있기에, 그는 결코 고갈되지 않는 사랑으로 그의 자녀를 아침마다 새롭게 하신다. 선지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애 3:22-24).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자비로운 사랑을 매일 주신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매일매일 희망을 가지는 이유가 된다. 매일 누리는 만족, 영원한 행복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시는 병렬구조를 사용한다. 이것은 보통 시편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두 줄(또는 그 이상)을 사용하여 말하고 싶은 주장을 전달한다는 의미다. 엄격한 병렬구조 구성은 우리로 하여금 시를 읽을 때 “우리를 아침에 만족하게 하시고 그 만족이 저녁까지 이어지게 하소서”와 같은 식으로 시가 전개될 것을 예상하도록 한다. 만약에 하루가 시작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만족시킨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루가 끝날 때까지 그 행복이 지속될 것을 기대한다.그런데 바로 여기서 시편 기자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복음 속에 숨겨진 수학이라고 말해야 할까? 하루(아침)의 만족을 위한 기도는 삶 전체(일생 동안)의 기쁨과 행복으로 응답받았다.어느 날 아침의 만족이 어떻게 평생의 기쁨을 줄 수 있을까? 분명히 그 대답 중 일부는 시편 구절 속에 있다.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은 우리의 평생 지속될 것이다. 부활절 아침에나머지 성경은 바로 이 수학 공식을 보다 더 풍성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느 날 아침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하나님 아들의 부활 능력은 하나님의 자녀 모두에게 다 주어졌다(롬 8:11). 그러므로 이제는 가장 위대한 그 아침 때문에 우리는 평생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오늘이 좋은 날인지 여부를 평가하기 위해 저녁까지 초조하게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변치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신다. 주 예수께서는 부활절 아침에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다. 우리가 그에게 속하기 때문에 오늘은 아주 좋은 날이다.원제: Evaluate Your Day Before It Begin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복음
부활
만족
자유
신실
기쁨
행복
부활절
시편
성령 없이 형벌적 대속은 없다
by Gregg Allison
2021-04-03
크리스천은 속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주된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옳다. 하지만 삼위의 하나님 중에서 성자만이 인간의 죄를 위해서 희생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물론, 우리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성부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는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는 십자가에서 터져 나온 예수님의 잊혀지지 않는 호소는, 결국 아버지를 향한 외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내쉬며,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숨을 거두기 직전에 터져 나온 예수님의 말들은 속죄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부각시킨다.하지만, 성령의 역할은 그다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신학이 창조, 구속, 완성에서 성령과 그분의 사역을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속죄 사역에서 성령의 역할이 가장 조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성령의 역할과 형벌적 대속이라는 두 가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형벌적 대속론에 대해 공격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반면, 다른 이들은 형벌적 대속이 속죄의 핵심이라고 본다. 먼저 형벌적 대속이 무엇인지 정의를 할 필요가 있다.형벌적 대속의 정의형벌적 대속론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성취한 것에 대한 해석적 모델이다. 형벌적 대속론의 주요 교리는 다음과 같다.1. 속죄는 죄를 미워하시고 벌하시는, 완벽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함에 근거를 둔다.2. 죄에 대한 대가는 지불되어야 한다.3.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대가는 죽음이기 때문이다.4.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지만, 인류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본성을 가지셔야 했다.5.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예수님이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셨다.6. 그 속죄는 이러한 방식으로 성취되어야 했다(형벌적 대속론).이 정의는 예수님의 중심 역할을 강조하지만, 예수님 홀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펴봐야 할 사항들이 더 있다.성삼위일체의 분리불가한 작용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두 번째 위격의 사역은 첫 번째와 세 번째 위격의 사역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작용의 교리로서 알려져 왔다. 모든 신성한 일에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은 하나의 의지와 하나의 힘으로 개별적으로 활동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창조의 신성한 행위에서 성부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 처음 혼돈한 수면 위를 운행하고 계실 때(창1:2) 아들 하나님의 작용, 즉 말씀(요 1:3)을 통해서 세상이 존재하도록 하셨다. 세 위격은 또한 속죄의 신성한 사역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셨다. 구체적으로,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도록 보내셨으며 인류의 죄를 위한 형벌적 대속물로서 아들을 희생시키셨다(요 3:16-17; 갈 4:4-5; 요일 4:10). 성자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기꺼이 형벌적 대속을 완성하기 위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인간이 되어 성부 하나님에 의해 보냄 받는 일에 기꺼이 복종하셨다.그러면 성령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성령님은 모든 단계에서 활동적이셨다성령 하나님은 속죄의 신성한 사역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활동적이셨다.첫 번째, 성육신에서, 성령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자궁 안에 아들을 잉태시킨 신성한 위격이셨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이 '새로운' 창조에서 성령님의 생산적인 역할은 '오래된' 태초의 창조(창 1:2)에서 열매 맺게 하는 성령님의 역할과 유사하다. 그때처럼 성령님의 사역은 필수적인데, 왜냐하면 성육신이 없으면 속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히 2:9, 17).두 번째, 잉태될 때부터 지상에서의 모든 삶에서 예수님은 “한량없으신”(요 3:34) 성령으로 충만했다. 즉, 성육신한 아들은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성령님과 영원한 관계 속에 계셨지만, 또한 성령님이 그 안에 전적으로 거주하셨고 그분의 능력을 부여받으셨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존재라는 것은, 성육신하신 아들이 활동할 때마다―그를 보내신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유혹에 저항하며, 신성한 말씀을 전하고,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며, 복음을 선포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며, 귀신을 쫓고, 종교 지도자들과 대면할 때―성령 충만함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눅 4:18; 마 12:28; 행 10:38 참조). 세 번째,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내재하신 성령님은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으셨다. 성육신하신 아들은 성령님에 의해서 끝까지 지지된 형벌적 대속의 사역을 감당하셨다. 여기서 핵심 구절은 히브리서 9장 14절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정화 능력을 강조하는 이 구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음에서 성령님의 역할은 삼위일체의 분리불가한 작용을 강조한다. 누가 자신을 드렸는가? 아들 하나님이다. 아들은 누구에게 자신을 드렸는가? 아버지 하나님이다. 그리고 아들은 어떻게 자신을 아버지께 드렸는가?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다. 즉, 그것은 권능을 부여하는 성령님에 의해서였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12:2), 그의 형벌적 대속을 성취하셨다.네 번째,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었다. 십자가 처형 후 부활이 뒤따랐는데(행 2:24), 그것은 부활이 없는 속죄는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여기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신다. 예를 들어, 바울은, 아들을 들어 올리시는 아버지의 초기 사역을 성령님을 통해 수행하셨다고 강조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성령님의 역동적인 사역에 놀랄 필요가 없다. 예수님 스스로, “살리는 것은 영이니”(요 6:63)라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부활의 신비에 대해 아들의 부활이 '정당화' 되었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딤전 3:16)라고 예수님 자신이 언급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롬 1:4)라고 강조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롬 4:25).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모든 과정에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 행위에 관여하셨다.원제: No Holy Spirit, No 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현석
신학
교리
성령
형벌적
대속
활동적
성삼위일체
성육신
끔찍한 십자가에 나타난 놀라운 사랑
by Jon Bloom
2021-04-02
‘십자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극도로,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십자가는 원래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십자가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공포를 심어주는 것 말이다.로마제국 십자가형의 실체로부터 이천 년 이상 떨어져 있고 ‘십자가’를 추상적인 신학 용어로만 이해하는 데 익숙해진 지금, 십자가형이 정말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우리의 정서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십자가형은 로마가 최악의 범죄자들에게만 행한 끔찍한 처형 방법이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다. 그는 최악의 범죄자 중 하나로 치부되신 것이다. 그의 죽음은 실제였을 뿐 아니라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분노 표출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의 분노의 대상이긴 했지만, 사실, 그들의 분노는 주된 것이 아니었다(요 19:11). 예수께서는 무엇보다 그의 아버지의 분노의 대상이 되셨다. 그의 아버지의 노여움은 가장 정의롭고 의로우며 무서운 분노였다. 인간으로서의 그의 본능은 그 잔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스스로 그 분노의 대상이 되셨다(막 14:36).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예수께서는 상황이 급박하게 변해 자신을 십자가로 몰고가기 훨씬 이전부터 자신의 사명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던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자신도 '들려야' 할 것임을 처음부터 말씀하셨다(요 3:14).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분명히 경고하셨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눅 9:22).예수께로부터 신령한 떡을 더 얻어먹고자 하던 군중들을 향하여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제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때가 가까왔을 때, 그의 고뇌가 더욱 깊어져 감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더욱 단호한 의지로 이를 받아들이고자 하셨다(눅 9:51).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예수께서는 '이를 위하여' 오셨다. 무슨 뜻일까?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요 12:28). 예수께서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요일 3:8). 그가 오심은 우리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과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롬 5:8). 또한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 오셨고(요 12:32), 온 세상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온 세상의 죄를 지시기 위해 오셨다(요일 2:2).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셨다 그가 위대한 화목제물로 오시리라는 것은 이미 수 세기 전에 예언되었다.“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그의 오심의 대속적 성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대속하실 진노가 누구의 진노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0–11).속죄제는 하나님께 범죄한 이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친히 감당하지 않아도 되도록 그들을 대속하는 의미로 드려졌기 때문에, 옛 언약 시대의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이해했을 것이다. 옛 언약은 위대한 화목제물이 되신 위대한 종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최종적으로 단번에 대속제물로 드리는(히 9:26) 새 언약을 암시했다(렘 31:31; 눅 22:20; 히 12:24).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오신 이유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 성부 하나님은 죄 없으신 성자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죄로 삼으셨다(고후 5:21).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한 성부의 진노를 감당하셔서 그 진노가 완전히 거두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성부의 사랑을 영원히 누릴 수 있게 되었다(요 3:16). 다음 찬양에서 노래하듯 말이다.예수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졌네예수께서 지신 온 세상의 죄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내가 사네이 안에 사랑이 있다‘십자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니, 이 얼마나 무섭고도, 또한 영광스러운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최고의 온유함으로 최악의 잔인함을 감당하셨다. 가늠할 수 없는 공포를 넘볼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감당해내셨다. 가장 은혜로운 용서로 가장 의로운 심판을 감당하셨고 최고의 자비로 최고의 정의를 감당해내셨다. 가장 혹독한 진노가 가장 풍성한 호의를, 그 놀라운 사랑을 만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인류가 고안한 최악의 고문 도구인 로마 십자가가 인류에게 주어진 최고의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하셨다(롬 5:9).원제: The Wrath of God Was Satisfied: Wondrous Love in the Awful Cross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십자가
예수그리스도
죄
대속
하나님의사랑
복음
어떻게 예수님은 영원한 형벌을 단 몇 시간 만에 다 받으셨...
by Andrew Menkis
2021-04-01
겉으로 보기에 속죄의 논리는 간단하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그는 우리의 형벌을 감당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된다.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성경에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르침 두 개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죄는 영원한 형벌을 부른다(마 18:8; 살후 1:9; 계 14:11; 20:10). 둘째,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영원히 형벌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이제 더는 하나님의 진노를 겪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히 9:25–26). 성경이 가르치는 이 두 가지 진리로 인해 우리에게 질문이 생긴다. 예수께서 영원히 형벌을 받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그가 죄에 대한 전적인 형벌인 영원한 저주를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답하려면 우리를 속죄의 논리로 인도해주는 네 가지 질문에 대해 더 깊이 고찰해봐야 한다. 1. 사망이란 무엇인가?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고 말한다. 사망은 하나님께 반역한 것에 대한 형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망은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라고 경고하셨다. 아담이 그 열매를 먹자마자 죽은 것은 아니나, 그는 에덴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므로 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말하고, 사망의 최종 단계는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는 것이다. 지옥이라 해도 하나님의 존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주받은 이들에게 하나님은 재판관과 형벌을 집행하는 자가 되신다. 2. 영원한 지옥이란 무엇인가?영원한 형벌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존재로 지으셨기에 반역과 불신을 택할 경우 그 결과 역시 영원하다. 둘째, 무한한 창조주에게 범한 죄에 대해서는 무한히 비통해해야 옳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벌 선고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지만, 위와 같은 생각으로 인해, 예수께서 지금도 계속 성부 하나님께 형벌을 받고 있다고 추론할 수도 있다. 또는 예수께서 우리가 받아 마땅한 영원한 형벌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우리 죄를 속하는 데 부족하다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죄에 대한 형벌은 시간이라는 차원에 있어 영원하다. 하지만 질적인 차원에서도 무한하다. 달리 말하면, 형벌에는 ‘시간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 ‘완료성’(completeness)의 요소도 있다는 뜻이다. 어떤 선생님이 학생에게 “친구들에게 욕을 하지 않겠습니다”를 100번 쓰게 하는 벌을 준다고 생각해보자. 이를 쓰는 데 30분이 걸리건 세 시간이 걸리건, 그 학생이 100번을 다 써야만 이 벌이 끝나는 것이다. 속죄도 마찬가지다. 형벌이 지속된다는 개념과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하게 퍼부어졌다는 개념을 잘 구분하여 생각하면, 무한한 존재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영원을 보내지 않고도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지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3. 속량이란 무엇인가?'속량'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네 번 사용되었다(롬 3:23–25; 히 2:17; 요일 2:2; 4:10). 속량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가라앉히거나 잠잠케 하는 희생제물을 말한다. 이 희생제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진노의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변화된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본문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속량임을 가르친다. 완전한 희생제물로서, 그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죄인들을 화목케 하실 수 있다. 성경은 이것이 단회적인 사건임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형벌을 완전히 짊어지셨다. 이런 희생제물을 드리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히 9:24–28). 그렇다면, 예수께서 영원히 형벌을 받지 않으셨는데도 그가 우리의 속량이 되실 수 있을까? 다시금 딜레마에 빠지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이에 답하려면 우리는 지옥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4. 지옥에 죄인들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사람들이 지옥에 있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이라 가르치셨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자신들의 반역 상태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 내내 원하던 것, 즉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과 반목하는 삶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내어주신다. 하나님을 영원히 예배하는 삶이 아닌 그를 영원히 증오하는 삶으로 내어주시는 것이다. 그들은 이생에서도 바로 그런 삶을 원했다. 누구도 지옥의 고통을 겪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 떨어지고자 했던 이들을 지옥으로 보내신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구분해야 할 점이 있다. 사람들이 지옥에 ‘들어가는’ 이유는 죄를 짓기로 결정하고 회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옥에 영원히 ‘있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과거에 지은 죄 뿐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죄인인 상태라서 지옥에서의 그들의 삶이 영원한 것이다. 죄인들과 죄 없으신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가 이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서 완전하셨다. 그러므로 그가 죄에 대해 완전한 형벌을 다 받기까지 그 기간이 영원할 필요는 없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 위에 남김없이 부어졌다. 한정된 시간 안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그 사실이 모순적인 것으로 여겨지거나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고 영광 중에 그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사실이 그가 우리의 구주라는 확신을 더해준다.이상하게 들리지만 논리적인 복음을 전하라복음은 불합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구원 계획에 있어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되거나 논리적 오류를 범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제시하는 복음 역시 듣는 이들에게 이해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논리를 더욱 잘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삶에 더 잘 적용할수록 다른 이들에게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복음을 듣는 모든 이들이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적어도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는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이상하고, 불쾌하며, 완전히 바보 같은 소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는 놀라운 논리에 대해 충분히 묵상했다면, 복음이 일관성이 없고 자기 모순적이거나 비논리적으로 들리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원제: How Did Jesus Suffer Eternal Punishment in Only 3 Hour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복음
변증
형벌
사망
속량
지옥
구원
하나님의진노
완료성
영원한지옥
타락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됐을까
by 이승구
2021-03-31
모든 인간은 첫 인류 아담의 첫 번째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성 전체가 오염되어서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지도 못하고, 진리의 빛이 비쳐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다(요 1:5, 10). 그리고 그 빛을 향해 나아오지도 않는다(요 3:20). 이 무서운 타락의 현실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과연 어떻게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잘못된 생각첫째로,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으며, 혹시 타락했어도 하나님을 알고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는 별 지장이 없다는 생각이 있다. 사람들은 부족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고,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은 이런 생각과 이것의 변용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합리성과 합리적 의사소통 방식을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를 인간 스스로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상담학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힘을 합치면 문제를 능히 극복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혹시 뜻대로 안 되어도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선택해서 믿고, 순종하면 구원을 얻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펠라기우스 사상(Pelagianism)이라고 한다. 이것은 타락의 심각한 결과를 말하는 성경의 선언과 대조되어 오래전부터 이단시됐지만, 역사 안에서 계속 존재해왔다. 현대에는 성경을 그대로 철저히 믿으려는 사람들 외에는 이런 사고가 거의 승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어떤 신학들도 이런 방식으로 나아가니 다른 영역에서는 얼마나 더하겠는가?둘째는, 인간은 타락했으므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의 원죄와 그 결과를 해결해 주시면, 우리의 그 순종이 구원에 작은 역할이라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다. 예전에는 천주교회(Roman Catholic Church)가 이런 생각을 널리 펼쳤다. 그래서 종교 개혁 시기에 이런 천주교적 사유 방식과 구원 이해를 반(半)펠라기우스 사상이라며 종교개혁자들은 강하게 지적했다. 성경이 말하는 타락의 심각성을 철저히 받아들이는 개신교의 교회는 믿기 이전은 물론이거니와 믿은 후에도 사람은 늘 부족하고 흠이 많아 아무리 순종을 잘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고,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의 공로만을 의지할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런 철저한 개신교의 입장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그저 교파적으로 개신교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구속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천주교회에서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게 성령님의 능력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든 것이 고려되어서 마지막 날에 최종적 칭의를 인정받게 된다는 주장을 한다. 이로 인해 개신교 내에 분열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결국 천주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좀 더 가깝게 가려는 사람들과 성경의 원리에 충실했던 개신교의 본래적 칭의 이해를 고수하는 사람들 사이의 내적 분열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근본적 이유를 부정하는, 이와 같은 일이 개신교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성경적인 생각 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그저 하나님의 자비로, 타락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타락한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을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로 우리가 믿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도록 해주신 그 분의 놀라운 자비에 대한 찬양과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하나님의 자비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영원 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것에서 드러난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16항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신적 작정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이 타락 가운데서 구해내시는데, 그들의 행위를 전혀 보지 않으시고 순전히 당신의 선으로써 구원하시며 자비를 베푸신다.”‘벨직 신앙고백서’의 작성자였던 귀도 드 베레(Guido de bres)는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4-7).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1)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셔서 (2)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즉 죄값이 치러졌고 자유한 사람이 되어(속량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는데 (3) 그 목적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며,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해 왔다. 그러므로 (1)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창세전에 선택된 사람들이 (2)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건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데 (3) 우리를 이렇게 선택하신 목표는 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면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을 향해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누가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라고 말한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반드시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과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작정이 이루어진 것이 창세전임을 에베소서 1장이 말하고, 이에 근거하여 다른 것들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요일 4:19)라고 하셨고,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 4:10)라고 하신 말씀에 언급된 그 하나님의 사랑도 이미 창세전부터 있었음을 배운다. 그러므로 존 칼빈의 말처럼, 과거의 좋은 신앙의 선배들과 함께 지금 여기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믿음이 창세전에 있던 선택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신학
교리
타락
펠라기우스
세미펠라기우스
천주교회
자비
벨직신앙고백서
신적작정
십자가
기독교를 증명하는 최초의 증거
by Justin Bass
2021-03-29
기독교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적 증거는 무엇일까?이 질문과 관련한 분야, 즉 고대사, 고전, 그리고 성경 연구 분야에서 가르치는 학자들은 종교적 배경과 관계없이 나사렛 예수와 관련한 몇 가지 기반 사실에 있어서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공생애를 시작했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자 귀신 쫒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Caesar)가 통치하던 시절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그를 따르는 어떤 무리가 예수가 부활해서 자신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고 증거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과거 그를 반대하던 바울도 있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다.그러면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 관한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가장 주된 자료는 1세기에 쓰인 신약 성경이다. 그럼 이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나사렛 예수에게 얼마나 더 시간적으로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역사적 증거는 과연 무엇일까?”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당신을 놀라게 할지도 모르겠다.기반 사실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기독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증거 중에는 4세기 초에 만들어진 코덱스 바티카누스(Codex Vaticanus) 즉 바티칸 사본과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 즉 시나이 사본과 같은 필사본이 있다. 콘스탄틴 폰 티셴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는 신약 사본 연구에 있어서 인디애나 존스와 같은 인물인데, 그는 1859년 이집트에 있는 성 캐서린 사원에서 시나이 사본을 발견했다. 콘스탄틴 폰 티셴도르프는 나중에 기록하기를, 자신이 사실상 불에 타버릴 뻔한 시나이 사본을 구했다고 주장하면서 수도원 사제들이 이미 두 뭉치의 사본을 땔감으로 썼고 나머지도 불태우려고 하는 것을 자기가 막았다는 것이다. 그는 시나이 사본을 '현존하는 가장 가치 있는 성경 보물'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상당 부분에 있어서 시나이 사본보다 더 오래된 파피루스 사본(papyri manuscripts)이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 중에는 3인치짜리 양피지에 요한복음(18:31-33, 37-38)의 다섯 구절이 적힌, P52(역자 주: 고대 사본에는 이렇게 번호가 붙는다. P52는 학계에서 특히나 유명한, 상징적인 사본이다)라고 불리는 사본이 있다. 이 작은 보물은 학계에서 서기 125년에서 17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50년보다 더 긴 간격을 두는 학자도 많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것들 외에 또 하나의 혁명적인 발견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발견은 시나이 사본보다 더 위대하고 또한 P52 사본보다도 더 탁월하며, 내가 생각할 때, 그 어떤 고고학적 발견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훌륭하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3절부터 7절에 나오는, 바울 이전(pre-Pauline)에 이미 사람들이 암송하고 있던 신경(creedal tradition)의 발견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진주'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사도적 신경 진술은 신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해 다른 어떤 고대 문서를 뒤져봐도 이런 구절은 찾을 수 없을 정도다. 비록 초기 기독교 운동의 흔적이 바로 이 다섯 구절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고 다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복음의 진수와 기독교 신앙이 토대를 두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가 이 구절을 통해서 확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기독교의 역사적 기반 사실을 발견하기자, 그럼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증거를 살펴보도록 하자.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고전 15; 3-4)바로 이 부분이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바울이 나중에 추가한 부분을 뺀, 바울이 받아서 쓴 실제 신경이라고 한다.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다. 신약 학자이자 무신론자인 게르트 뤼더만(Gerd Lüdemann)은 이 발견을 '최근 신약 학계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성취의 하나'라고 평가했다. 초대 교회, 중세 신학자, 그리고 우리가 아는 종교개혁 학자들, 그들은 하나같이 이 구절을 인용했고 또 주석까지 썼지만, 20세기가 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이 구절이 애초에 바울이 쓴 게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서기 49년에서 50년보다 적어도 10년 더 이전부터 이미 성도들이 암송하던 신경, 즉 신앙고백을 인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성경 구절 안에서 이런 사실을 발견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바울은 이 구절을 소개하면서 “내가 받은 것을”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전 15:3).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 그는 자신이 받은 어떤 특정한 전통을 고린도인에게 전했는데, 그 전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복음을 더 밝히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다(고전 11:2 참고). 그것은 예수님에 관한 어떤 가르침과 이야기(고전 7:10; 9:14; 11:1; 고후 10:1), 최후의 만찬(고전 11:23–26), 찬송(고전 8:6; 고후 8:9), 그리고 바로 예수님의 죽음, 장사, 부활 그리고 다시 나타나심에 관한 바로 이 신경이다(고전 15:3-7).두 번째는 언어적인 이유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서 어디에서도 쓴 적이 없는 단어와 구절을 여기에서 쓰고 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다시 살아나사”, “사흘 만에”, “보이시고” 그리고 “열두 제자” 등은 오로지 여기에만 나오거나 아니면 다른 데서 사용되었어도 당시 전통의 영향을 받아서 쓰였다. 이런 점들 때문에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예외 없이 고린도전서 15장 3-7절은 바울 이전에 성도들이 고백하던 신경이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이 신경은 심지어 바울이 가장 먼저 쓴 서신서보다도 앞선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앞서는 걸까? 언제 어디서 바울은 이런 신앙고백을 받은 걸까?학문적인 배경 또는 (무신론을 포함해서) 신앙의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학자들은 사실상 만장일치로 이 신경이 예수가 죽고 5년 안에 만들어졌다는 데 동의한다. 예수가 죽고 10년 정도 흐른 후에야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몇몇의 학자도 있지만, 또 어떤 이는 심지어 예수가 죽고 일 년 안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약 학자인 제임스 던(James Dunn)은 이렇게 주장한다. “이 신앙고백은 예수가 죽고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신자들 사이에서 만들어져서 정형화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나는 제임스 던이 가장 뛰어난 예측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고작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새롭게 믿게 된 사람들은 아마도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던 시기에 이 신경을 외우고 또 그 내용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신경은 회심한 사람들에게 입문 교리 교육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서, 고린도전서 15장 3-7절은 사도행전 속 설교(행 10:39–40; 13:28–31)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 속 예수 수난 이야기의 교리적 요약이자 기본이 되었다. 그럼 바울은 언제 어디서, 도대체 누구로부터 이 위대한 진주를 전달받은 것일까? 학자들은 아마도 그건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직후(서기 34)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로부터 3년 후인 서기 37년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2주를 함께 보냈고(갈 1:18), 또 그 기간 중에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갈 1:19)를 만났다. 나는 후자가 맞으리라고 본다. 그래야 이 신경 속에 나오는 내용과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게바에게 보이시고……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고전 15:5,7). 신약 학자이자 불가지론자인 바트 어만(Bart Ehrman)도 이 점에는 동의한다. “그 예루살렘 방문에서 아마도 바울은 그가 언급한 모든 전통, 그리고 그가 전통이라고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아서 의심됨에도 불구하고 전통으로 간주되는 내용을 전수 받았을 것이다.”기독교인은 공격적으로 나가야 한다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이 땅을 밟고 있는 것은 단지 기독교를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와 최초의 증거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강력한 변증을 통해서 21세기 불신자들에게 도전해야 한다. 서기 30년,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고 다시 살아나 만유의 왕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 수제자 베드로 그리고 예수의 적이었던 바울까지, 이 세 사람 모두가 부활한 예수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 세 사람은 부활이 역사적으로 도무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임을 확신했다(고전 15:11 참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세 사람이 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그들이 가진 신앙의 진실됨을 증거하고 있고, 이는 바트 어만과 같은 회의론자조차 설득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이 세 사람이 목격한 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내어놓은 게 아깝지 않게 느낄 정도로 가치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오래된 신경에 따르면 열두 제자와 500명이 넘는 사람이 예수를 보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천 년이 지난 지금에는 예루살렘에서 파푸아뉴기니에 이르기까지 수십 억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예수를 믿음으로 만나고 있다. 회의론자였다가 오로지 부활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 A. N. 윌슨(A. N. Wilson)은 이렇게 썼다. “바하는 이 이야기를 믿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지난 1,500년 간 가장 위대한 작가들과 사상가들이 이 부활 이야기를 믿었다.”우리는 이제 고린도전서 15장 3-7절이라는 역사적인 근거에 깊이 뿌리를 박고, 이 믿지 않는 세상 속으로 나아가서 과감하게 다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들에게 대답을 요구해야 한다. “사도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로마 제국을 송두리째 뒤집었으며, 인류 역사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수십 억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이 능력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당신은 생각합니까?”도대체 그들이 누구를,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 바뀌었던 걸까? 원제: What’s the Earliest Evidence for Christia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복음
변증
공생애
본디오빌라도
십자가
바티칸사본
시나이사본
파피루스
신앙고백
고린도전서15장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듣는 마음’
by 이종훈
2021-03-17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왕상 3:26)성경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는 바로 솔로몬 왕일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왕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런 모습을 좋게 여기셔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을 하십니다. 그때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솔로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을 알지 못하고 …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즉, 솔로몬은 자신은 너무 어리고 그가 다스려야 하는 백성들의 숫자는 많은데 자신이 어리석어서 백성들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을 잘 재판하여 선악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간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을 지혜롭게 한 기도입니다. 여기서 ‘듣는 마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의 하소연을 잘 들을 수 있는 마음이고, 둘째는 그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잘 아뢰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솔로몬의 ‘듣는 마음’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어느 날 두 여인이 솔로몬을 찾아와 재판을 청합니다. 그 두 여인은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창기입니다. 그리고,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밤중에 실수로 자기 아들 위에 누워 어린 아기가 죽게 되자, 이 여인이 자기의 죽은 아이를 한 집에 살고 있던 다른 여인의 아이와 바꿔치기를 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여인이 서로 살아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친자 확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 그런 방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 집에는 두 여인만 살고 있어서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다라고 판단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 아이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놀라운 판결을 내립니다. 살아있는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서 두 여인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황당하기까지 한 판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황당한 판결에 두 여인의 반응이 갈립니다. 한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내가 100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0점을 받으면 그 사람은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또는 내가 100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100점을 받는다면 물론 내가 100점 받은 게 기쁘기는 하지만 나 혼자 100점을 받았을 때만큼 행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0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0점을 받았습니다. 내가 0점을 받은 것 때문에 속은 상하지만 다른 사람도 0점을 받았으니 그나마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0점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은 100점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마 가장 최악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는 내가 100점 받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점점 내가 100점 받는 게 쉽지가 않다면 다른 사람이 0점 받기를 은근히 바라게 됩니다. 이유가 뭘까요? 최악은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 잘 되는 것 이상으로 남이 잘 안 되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 점점 커지기 시작합니다. “내 것도 되지 말고, 네 것도 되지 말게 하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둘 다 0점이 되자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0점인데 상대방은 100점이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둘 다 0점이 돼서 내 최악의 비참함은 피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 인간의 죄성이 있습니다. 내가 소망을 잃어버리면 다른 사람도 소망을 잃어버리길 바랍니다. 내가 비참해지면 다른 사람도 비참해져야 내가 조금 덜 비참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내 인생에 소망이 끊어진 사람은 때때로 다른 사람 역시 자신처럼 비참해지기를 바라며 삽니다. 이것이 범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엄마는 어떻게 합니까?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진짜 엄마는 마음이 불붙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아이를 안 가져도 좋으니 이 아이가 죽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가 엄마 안 해도 좋으니 이 아이가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것이 진짜 엄마입니다. 가짜 엄마는 자기의 비참함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해 다른 아이가 죽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진짜 엄마는 자기 아이를 살리기 위해 엄마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즉,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의 자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들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진짜 목회자라면 교회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자존심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가짜 목회자는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교회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짜 성도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합니다. 그런데 가짜 성도는 자기의 권리를 위해 공동체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아기에 대한 태도를 보고 진짜 엄마와 가짜 엄마를 구별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대한 태도, 공동체에 대한 태도를 본다면 우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내가 진짜라면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덕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짜라면 내 자존심을 위해 그리고 내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죽이는 것에 아무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기준을 갖는다면 진짜와 가짜를 쉽게 분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듣는 마음’이 있을 때 이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셨던 듣는 마음이 있어서 나를 잘 분별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솔로몬
지혜
일천번제
듣는마음
판결
진짜
공동체
‘판단하지 말라’는 명령을 오용하지 말라
by Donny Mathis
2021-03-12
스티브 커(Steve Kerr)는 심판에게 항의하는 데 있어서 전형적인 코치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Golden State Warriors,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연고지로하는 프로농구 팀-편집자주) 코치인 그는 심판이 틀린 판정을 내렸을 때, 종종 그들을 거의 잡아먹을 듯이 달려든다. “평상시에 만나는 사람한테는 내가 심판한테 하는 식의 그런 말은 절대로 안 합니다.” 스티브 커는 최근 마이클 루이스(Michael Lewis)와 나눴던 팟캐스트에서 말했다. “심판이 판정을 잘못 내릴 때, 나는 내 자신이 개인적으로 모욕을 받은 느낌을 가집니다. 말도 안 되는 불평등한 일이 생긴 것처럼 말이죠.” 나는 스티브 커의 말을 백분 이해한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대학농구 팀인 켄터키 와일드 캣(Kentucky Wildcats)이 불리한 판정을 받을 때면 심판에게 외치곤 하니까. “이 심판아, 부끄러운 줄 알아라!!” 누구라도 듣기 싫어하는 말, 틀렸다는 말을 듣는 것이 단지 심판과 스포츠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힘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실은 걸음을 막 뗀 아기에서부터 은퇴한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다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화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심판이 틀린 판정을 해도, 그 판정은 상대팀에게 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친구와 가족이 우리의 선택을 다 좋아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SNS에서 만나는 모두가 다 나를 지지하기를 바란다. 사실 우리는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단지 그 판정이 내게 유리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우리는 판사 옷을 입은 사람 중에서도 내 편이 되는 변호사를 기대한다. 결과적으로 마태복음 7장 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은 오늘날 자율을 우상화하고 심판을 경멸하는 문화에서는 아주 멋진 말(mantra)이 된 셈이다. 어떤 사람이 나의 행동을 판단하려고 할 때, 우리는 단지 이렇게만 말하면 된다. “판단하지 말라.” 바로 이런 예수님의 말씀 덕분에 오늘날은 의문의 여지가 있는 투표 결과로 선출된 정치인, 최근 스캔들에 휘말린 연예인, 또는 누구라도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결정을 한 사람을 도와달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나사렛 예수에게 요청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함축성 있는 짧은 구절은 논쟁에서 확실한 승리를 보장하기 위한 최고의 카드가 되었다. 이 구절이 어떤 식으로 활용되는지 한번 보자.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비판받지 않으려면 너부터 비판하지 말라.”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거나 포용력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 다음 예수님과 함께 차를 타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마이크 드롭(mic drop) 중에서도 최고의 마이크 드롭이다. 슬프게도, 이런 장면을 보는 사람들 중에서 이니고 몬토야(Inigo Montoya)의 말을 기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내 생각에 이 구절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를 말하는 것 같지 않은데요.”번영과 판단 예수님의 이 유명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들어있는 그 유명한 설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중들의 귀에 생생한, 근심을 이기는 해독제를 알려준 예수님은 설교의 방향을 바꾼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잠깐, 뭐라고? 조금 전에 예수님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매일 해야 하는 판단,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하늘나라 시민이 되는 데 중요한 열쇠 중 하나가 그런 일을 걱정하지 않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판단을 정죄하고 있는 거지? 산상설교는 번영을 향한 길을 보여주는데, 그 길은 온갖 판단으로 가득차 있다. 예수님은 지금 타락한 세상에서 살면서 그의 통치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도덕적이고 관계적인 판단을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다. 5장 17-20절에서 예수님은 듣는 이들의 의사 결정에 필요한 율법과 선지자의 명령을 버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취시킨다. 그런 다음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율법의 명령을 지키고 가르침으로 하나님이 주신 의를 드러내라고 명령하고 있다. 5장 21-48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왕국에서 순종은 단순히 율법을 범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관해 율법이 가르치는 내용의 핵심과 정신을 설명한다. 6장 1-2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나누고, 기도하고, 금식하라고, 그리고 사람의 칭찬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동기로 부를 추구하라고 말한다. 그런 순종은 하나님에 의해서 긍정적으로 판단될 것이다. 7장 13-14절에서 예수님은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과 그의 왕국 아래에서 번영으로 이끄는 좁고 험한 길을 비교한다. 7장 15절-19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선지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의 삶과 가르침이 맺는 열매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명한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예수님은 지금 여러 다양한 종류의 판단을 사용해서 번영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설교를 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판단을 정죄하는 것일까? 부서진 저울로 무게를 재지 말라마태복음 7장 2절에서 예수님은 '판단하는 것'이 재는 것과 여러모로 비슷하다고 설명한다(막 4:24-25; 눅 6:37-42). 우리가 사는 문화는 실제로 균형을 맞추는 저울을 가지고 정의를 묘사함으로써 이와 비슷한 비교를 한다. 시적인 병렬 구조를 통해서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불공평한 저울이 아니라, 공정한 저울을 가지고 판단하라고 말한다. 위선이 아닌 온전함과 공감을 가지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긴장이 고조되면서 예수님은 농담을 한다. 이것은 확실하게 기억에 남고 재미있으며 또 확실한 한방을 가진 이야기다. 예수님이 말하는 시나리오를 한번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은 눈에 작은 티가 있고, 다른 사람의 눈에는 가로 2인치, 세로 4인치의 들보가 들어있다. 누구나 눈을 불편하게 하는 작은 티가 들어올 수는 있지만, 들보가 들어온다면 단지 눈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비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로, 어떻게 거대한 들보는 보지 않으면서 작은 티는 볼 수 있을까? 두 번째로, 어떻게 얼굴에서 튀어 나올 정도로 큰 들보를 가진 사람이 이웃에게 고통스러운 눈 수술을 하라고 권유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들보를 가진 사람을 위선자라고 부른다. 그럼 해결책은? 예수님이 그 두 사람에게 다 거울을 들고 눈을 살펴서 문제점을 스스로 해결하라고 했던가? 아니다. 예수님은 들보를 눈에 갖고 있는 사람이 먼저 그 들보를 빼고, 그 후에 티끌이 들어간 사람을 도우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죄를 발견하고 그 죄를 없애도록 하는 신자의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7:5).이 구절은 예수님이 판단하지 말라고 금지하기 때문에 어려운 게 아니다. 이 구절이 어려운 이유는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판단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겸손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예수님은 위선자가 되지 말라고, 위선적인 판단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판단하지 말라’의 원칙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 또한 말씀하지 않는 것을 살펴볼 때 최소한 네 가지의 원칙이 두드러진다. 1. 말하고 싶은 포인트를 강조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 딱 하나를 사용하는 것을 주의하라누구라도 자기가 한 말을 다른 사람이 비틀어서 곡해하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도 마찬가지다. 2. 공감과 은혜를 가지고 판단하라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도덕적인 판단을 할 때 자기 자신의 죄성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해야 한다(갈 6:1-2).3. 위선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라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에게 죄에 대해서 판단하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죄를 짓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4. 분명한 판단을 해야 할 때 두려워서 숨지 말라우리는 인기없는 진리(복음)를 선포하지 않는 우리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를 악용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고 가장 갈구하는 바를 옹호하신다. 예수님은 의로우시고 또한 그를 믿는 자들을 의롭게 만드신다(롬 3:26). 그는 죄를 못 본 체 하지 않으신다. 대신 그는 죄를 정면으로 보고 우리에게 필요한 판단을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게 되고 또한 그의 현명한 통치 아래에서 바로 살 수 있도록 하신다.예수님이 다스리는 왕국에서 함께 번성하자. 명확함, 겸손, 용기, 그리고 눈에 들보를 넣지 않고 판단하는 힘을 달라고 그분께 기도하자. 원제: ‘Judge Not’ Isn’t the Ultimate Mic Dro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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