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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가 새롭게 풀어놓는 구약 이야기
by Patrick Schreiner
2021-03-06
나는 한동안 복음서의 진가, 특히 마태복음의 아름다운 특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태가 전달하려는 의미가 그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에서도 드러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확신에 차서 들려주는 메시지는 단지 본문의 기사뿐 아니라 그 기사의 배열, 즉 마태가 저자로서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을 고려할 때 더욱 선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이런 점에서 마태가 사용한 이야기의 형식을 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를 얼마나 정교하게 엮어 놓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기록한 복음서는 한마디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진전되는 이스라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더 쉽게 표현해서, 다음 세 가지 질문을 통해 마태복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 이야기는 어떻게 반영되는가?-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 이야기는 어떻게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는가?-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 이야기는 어떻게 진전되는가?그러므로 마태복음을 읽을 때, 한 눈은 옛 이야기에 두고 또 한 눈은 새 이야기가 보여 주는 변화에 맞춰야만 그 메시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마태가 풀어놓는 요셉 이야기먼저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예로 들어 보겠다. 얼핏 보면,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2장 23절에 소개되는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읽힌다. 여기서 예수님의 탄생은 요셉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초반부에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꿈을 통해 그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 장차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분이심을 알게 된다(마 1:18-25). 그러다 2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의 가족이 헤롯 왕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가족은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이후에는 라마로 올라와 결국에는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된다. 이 모든 여정은 환난을 피해 진행된다(마 2장).그런데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단순히 기술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에는 또 다른 요셉이 등장한다. 그도 꿈꾸는 자였으며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었다. 그리고 환난 가운데 자기 가족을 애굽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이후에는 그 가족(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떠나게 된다. 바로 이 이스라엘 이야기는, 이제 마리아의 남편인 새로운 요셉을 통해 반영되고, 성취되며, 진전된다. 창세기에서 요셉은 자기 가족을 애굽에 청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일시적으로 기근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했지만, 마태복음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써 아기 예수님을 살리게 되며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진짜 대적인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게 된다(마 1:21).물론 마태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탄생과 피신에 관한 내러티브는 그 자체로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이야기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처럼, 이스라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볼 때 독자들은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꿈쟁이 요셉과의 비교를 통해, 마태는 옛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이 비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마태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새로운 요셉으로 묘사하는 데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새로운 요셉으로 그려낸다. 이를테면 요셉과 예수님 모두 각자의 아버지에게 총애를 받았고, 형제들에게는 배척을 받았으며, 고난과 유배의 시간을 거치다가, 이방인의 법정에 세워지게 되며, 마침내는 자신을 배신한 형제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그 백성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소망이자, 새로운 구원이며, 누구라도 그 면전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통치자로 등장하신다. 이렇게 옛 이야기가 들려주는 메아리가 우리 귓가에 들리면, 그때부터 이야기의 깊이와 아름다움은 더 선명히 드러나게 된다. 마태가 풀어놓는 모세 이야기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예로 마태복음 17장 1-8절에 등장하는 변화산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이야기 역시, 일견 단순해 보인다. 예수님이 어느 산에 오르셨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그 곁에 함께 나타나더니 용모가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공관복음 전체가 바로 이 변화산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유독 마태복음만 모세와 시내산을 특별히 떠올리도록 독자들의 시선을 모은다. 즉 마태가 이 본문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옛 이야기를 반영하고, 성취하며, 진전시킨다.우선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모세처럼 6일 후에(출 24:16) 한 높은 산에 오르시는데(출 24:12), 이때 세 명의 사람이 동행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다(출 24:1). 그리고 구름이 산에 덮이더니(출 24:15-18), 그 구름 속에서 어떤 음성이 들린다(출 24:16). 그런데 마태복음은 여기서 다른 공관복음과 달리, 모세 이야기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 세 가지 요소를 포함시킨다. 첫째로, 마태는 마가와 달리 모세의 이름을 엘리야보다 앞에 둔다(마 17:3; 막 9:4; 여기서 누가복음이 아니라 마가복음과 비교하며 마태의 의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마가복음이 공관복음 가운데 가장 이른 저술로서 마태의 저술에 참고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로, 마태는 장차 오리라고 예언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암시한다(신 18:15). 가령 변화산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에 관한 음성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들려왔던 음성과 동일하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소개되는데, 여기에 한 가지 명령이 덧붙여진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이다. 이 명령이 첨가된 이유는, 모세가 훗날에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나타날 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했기 때문이다(신 18:15). 셋째로, 마태는 마가라든가 누가와 달리 예수님의 얼굴이 빛난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마 17:2; 출 34:30 참조).이처럼 뚜렷하게 드러나는 유사점을 통해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는 예수님을 새로운 선지자요 새로운 중보자로 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율법을 준수하여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변화된 자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는 분으로 묘사한다.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 그 역시도 변화되었다. 이는 율법의 목적이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는 데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출애굽의 목적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는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의 영광을 반영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 앞에서 변화되신 사건은 다름 아닌 모세 이야기를 완성시킨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새로운 중보자로서 새로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임재를 반영하셨던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통치 아래에 살며 그분의 영광을 반영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을 성취하는 사건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세 이야기를 진전시키셨다. 그리고 모세와 달리 예수님의 얼굴은 영원히 빛나면서도 그 얼굴을 가리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빛나는 얼굴을 통해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마태가 풀어놓는 ‘의로운 피’에 관한 이야기 마태가 이스라엘 이야기를 더 깊이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요소는 모세나 요셉과 같은 ‘인물’만이 아니다. ‘상징’ 또한 그 이야기를 반영하고 성취하며 진전시키면서 마태의 저술 목적을 이루어 낸다. 예를 들어 그는 ‘의로운 피’라는 주제를 들어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킨다. 다시 말해 구약의 서두부터 결말에 걸쳐 등장하는 피에 관한 내러티브를 하나로 묶어 예수님의 피를 통해 그 내러티브의 목적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 준다. 예컨대 마태복음 23장 34-35절에서 그는 (구약의 첫 살인 사건을 가리키는) “아벨의 피로부터” (구약의 마지막 살인 사건을 가리키는)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언급한다. 그리고 여러 메신저가 이스라엘에 보냄을 받지만 그들이 배척당하게 되리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에 닥치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 23:34-35).여기서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의로운 피’라는 주제를 사용한다. 이러한 ‘피’의 주제는 마태복음 26-28장 도처에 널려 있다. 아래의 여섯 가지 예를 한번 살펴보자.1.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에서 '언약의 피'와 '죄 사함'을 함께 언급하신다(마 26:28; 렘 31:27-40).2. 유다는 자신이 '무죄한 피'를 팔아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는데, 이는 아벨과 사가랴의 피에 관한 앞선 진술을 반영한다(마 27:4).3.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받은 돈을 '핏값'이라고 하며 그 돈으로 밭을 산다. 그래서 이 밭은 '피밭'이라고 일컬어진다(마 27:6, 8).4. 빌라도는 자신의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라고 선언한다(마 27:24).5. 이스라엘 백성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친다(마 27:25).6. 빌라도의 아내는 '저 옳은 사람', 즉 예수님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남편에게 전갈한다(마 27:19).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아벨이나 사가랴처럼 의롭지만 고난받는 자로 묘사된다.이렇게 피를 언급하는 예를 살펴볼 때, 독자들은 마태복음 23장 35절을 떠올리며 ‘피’에 관한 내러티브가 어떻게 이스라엘 이야기를 반영하고, 성취하며, 진전시키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장면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은, 그 백성에게 버림받은 목자, 다시 말해 무고한 피를 흘린 새로운 목자로 그려진다. 또한 이방인 적으로 인해 피신했다가 마침내는 그 손에 죽임을 당해 성전인 육체가 찢기는 고통을 겪은 새로운 이스라엘로 그려지신다. 바로 이분의 피는 완전무결한 피였기에, 그 피로 인해 새로운 출애굽이 일어나고 새로운 성전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이처럼 무고했으나 피를 흘린 이야기와 자신의 죄 때문에 대적한테 침략을 받아 피를 뿌린 이야기가 이스라엘 역사에 공존한다. 예수님의 피는 그 두 가지 내러티브의 목적을 함께 성취한다. 그분의 죽음을 다룬 마태의 이야기는 표면적인 수준에서도 의미를 전달하지만, 앞서와 같은 상징이 자리한 더 큰 문맥을 살펴볼 때 심층적인 수준에서 의미를 전달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결론이 글의 지면상 마태복음에서 어떻게 예수님이 새 아브라함이 되시는지(즉, 어떻게 동서로부터 많은 백성이 이르는지), 새 다윗이 되시는지(즉, 어떻게 진정한 왕으로 다스리시는지), 새 솔로몬이 되시는지(즉, 어떻게 참된 지혜를 가르치시는지), 또 새 예레미야가 되시는지(즉, 어떻게 예루살렘의 운명을 바라보며 슬퍼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밖에도 다루지 못한 요소는 많다. 가령 가룟 유다는 새로운 이세벨이나 아히도벨 또는 압살롬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 반역하는 유형에 속한 인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새 열두 지파로, 유대 지도자들은 애굽과 앗수르 및 바벨론의 새 통치자로 그려질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산들은 시내산과 비교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 나아가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닐던 광야를,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강물은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던 바다를 새롭게 연출할 수 있다.이처럼 마태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반영하고, 성취하며, 진전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다가오는 세대를 제자 삼고 가르치고자 했다. 바로 그 기록이 자신이 지상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감을 얻은 그의 지혜는 다름 아닌 마태복음의 ‘형식’ 속에 잘 묻어나 있다.그러므로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넓은 문맥에서 읽어 보도록 하자. 그리하여 새롭게 눈에 띄는 진리로 다시금 놀라운 깨달음을 얻도록 하자. 원제: Matthew’s Gospel as You’ve Never Read It Befor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마태
요셉
모세
예수님
의로운피
변화산
시내산
회의론자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다
by Dan DeWitt
2021-03-05
회의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당신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고, 무엇보다 당신 자신이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당신의 관점을 비웃고 복음에 대한 당신의 헌신을 조롱한다. 당신이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당신이 믿는 바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류의 많은 유혹들은 복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때, 그리고 회의론자들에 대한 사역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할 때 생긴다. 회의론자들을 겨냥한 전도는 주로 변증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는 너무도 좁은 시각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전도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확증하는 것과 복음에 대한 반대, 공격, 오해에 대해 방어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렇게 균형 잡힌 방법이 아니면, 그저 모호한 공통 분모를 붙잡기 위해 성경적 근간을 포기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다. 회의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 나는 여섯 가지 필수 요소를 제시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1. 진리의 인식 가능성을 선포하라그리스도인들은 소위 '인텔리' 계급에 속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쉽게 위축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실제를 설명함에 있어 기독교 세계관이 대부분의 견해들보다 더 풍성한 것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기본적인 논리 법칙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어떤 주장의 참ㆍ거짓 여부를 평가할 때 우리는 늘 비모순의 법칙(the law of noncontradiction)을 사용한다. 한 명제는 동시에 참과 거짓일 수 없다. 자연주의적 사상체계가 그런 법칙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불변하고 비지성적이고 비인격적인 물질이 어떻게 우리의 사유를 안내하는 그런 논리 법칙을 만들 수 있겠는가? 두뇌가 단순히 진화의 산물이라면 자신이 하는 생각들을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의심했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이러한 회의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다윈은, 만일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자연이 전부라면, 우리 두뇌가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과 우리 생각은 믿을 만하다는 것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변증학자들은 이러한 세계관의 약점을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자연주의의 이러한 난점을 일컬어 자기 모순이라 했다. G. K. 체스터튼(G. K. Chesterton)은 이를 “모든 사고(思考)를 중지시키는 사고(思考)”라 했다. 이성 자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독교 뿐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논증들조차도 영원하시고 최고의 지성이 있으시며 인격적인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으면 결코 성립할 수 없는 논리 법칙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합리적 토론을 위한 기반을 세워준다. 2.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듯 그분을 전하라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희석시키면, 종국에는 우리는 진정한 전도를 할 수 없게 된다. 어떤 무력한 신에 대한 흐릿한 이미지로 그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애쓰며 우리가 만들어낸 이 신을 팔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잘 팔기 위해 그의 하나님 되심을 희석시키지 말라. 우상숭배를 퍼뜨리지 말라. 성경은 인간의 담론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다. 바로 그 성경이 말하는 바 주권자 하나님을 전하라. 3.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전하라인간의 서사(敍事)는 죄책, 수치, 그리고 후회로 물들어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조차도 죄책의 존재 자체는 실제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 회의론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본성적 지식과 내재된 도덕적 죄책에 대한 그들의 인식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죄책은 그저 증상일 뿐이다. 진정한 문제는 죄, 그리고 그로 인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은혜 뿐이다. 가장 똑똑한 회의론자들에게 하는 전도 역시 단순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나야 한다. 우리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라고 하신 예수님 자신보다 결코 더 좋은 말을 할 수 없다. 기쁜 소식을 전할 책임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 우리 자신의 논리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4. 성경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선포하라우리가 지닌 모든 책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화해 가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이 책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히 4:12). 회의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경의 권위에 대해 얼버무리거나 다른 문서들과 비슷한 수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라. 당신은 하나님이 쓰신 원고의 편집자가 아니라 그 책의 홍보 담당자라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의 일은 하나님의 원고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이미 출판하셨다. 우리가 하는 모든 논증이 설교나 성경 주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회의론자들의 반대 의견을 완화시키기 위해 성경의 신뢰성에 대해 언어나 태도를 통해 타협하지 말라는 의미다. 전도에 임하는 당신에게 주어지는 권위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기억하라. 당신도 누군가가 성경을 펼쳐 단순한 복음의 진리를 당신에게 전했을 때 믿음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복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계시의 권위 위에서 당신이 전하는 이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치 말라(롬 1:16; 고전 1:18). 5. 중생(重生)의 역사가 반드시 필요함을 선포하라전도에 힘쓰는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이들은 회심으로 사람들을 이끄시는 성령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알고 있다. 나는 자신들의 논증 그 자체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변증학자들을 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자신들의 빈약한 시도들이라도 사용하셔서 지적인 장애물들을 제거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많은 이들은 만나보았다. 또한 그들은 성령이 복음 진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도록 같은 열정으로 기도한다. 회의론자든 누구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사탄이 다스리는 어두움의 영역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일이다. 당신 자신의 힘만으로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이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복음 안에 담긴 은혜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엡 1:18)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우리의 노력은 헛될 뿐이다. 6. 겸손하게 전하라교만한 변증가나 지나치게 날카로운 전도자만큼 해로운 것도 없다.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얼마나 옳으냐에 상관 없이, 우월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앙의 변증에 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함으로써 오만한 태도를 교정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기독교의 진리를 전할 때, 우리는 성육하신 은혜와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고 우리가 겸손하다면 회의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우리의 죄성, 그리고 그로 인한 성령의 필수성을 인정한다면 불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에게 하나님을 높이는 전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원제: 6 Tips for Sharing Christ with Skeptic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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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가장 평가절하된 성경
by Andrew Wilson
2021-02-26
사람들은 역대하를 과소 평가한다. 전편에 해당하는 역대상의 전개가 너무 느린 것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역대상 1–9장에 나오는 긴 족보는 역대기 저작에서 중요하지만 현대 독자들에게는 매우 지루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역대상 후반부 역시 제사 직분 맡은 자들과 찬송 직분 맡은 자들에 대한 지나치리만큼 상세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는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신학자들이나 열정적인 찬양 인도자들에게나 관심거리가 되는 내용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역대상을 마칠 즈음이 되면 독자들은 역대기 저자를 현학적이고 지나치게 작은 부분에 집중하는 사람, 즉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역대하가 열왕기상하의 내용 중 엘리야와 엘리사를 제외한 다른 이야기는 모두 동일하게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역대하에 엘리야가 잠시 등장하긴 하나, 흥미진진한 갈멜산, 세미한 주의 음성, 까마귀가 갖다 준 떡과 고기, 도둑맞은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나 불수레를 타고 하늘에 오르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성전 건축도 나오고 선한 왕과 악한 왕들의 이야기들 역시 등장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영웅들의 이야기들은 빠져있다. 역대기를 얕보는 독자라면, 저자가 그저 우리를 짜증나게 하기 위해 역대기를 썼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역사우리는 겸손한 태도로 역대기를 읽어야 한다. 역대하를 그 자체의 빛에 비추어 읽으면 역대하가 북왕국 이스라엘에 초점을 두지 않기 때문에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상세히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역대하는 여러 면에서 성경 중 가장 명확하고 예언적이며, 기도와 경배로 가득한 역사서다. 이를테면 역대하는 구약의 사도행전이다. 역대하는 하나님의 전이 건축되고, 하나님의 영으로 그 전이 채워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고 찬양하지만 또한 넘어지고 다시 회개하는 역사, 이스라엘이 적들에게 사로잡혀 가나 다시 풀려나 귀환하는 역사, 또한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오는 역사를 담고 있다.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는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 같은 영웅들이다. 아하스나 아몬은 헤롯 같은 악당들이다. 역대하에는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 같은 신실한 신자인 스가랴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악당에서 제자로 거듭난 바울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자리에서 은혜의 상징이 된 므낫세의 이야기도 있다. 남왕국 유다에 초점을 맞춘 역대하 저자는 유다의 왕들을 통해 당시의 복잡한 윤리적 상황을 보여주며 각 왕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솔로몬, 르호보암,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웃시야, 히스기야, 그리고 요시야 같은 이들을 각 인물이 지닌 미세한 차이들을 묘사하며 아주 자세히 다루는데, 소설가들이 사용하는 등장 인물 발전 기법이 엿보인다. 역대하에는 이 왕들의 생각, 말, 그리고 기도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바로 여호사밧 왕의 기도다.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대하 20:12) 선한 왕이 처참한 결과를 불러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그저 그랬던 왕이 지혜로운 결정을 내려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하며, 악한 왕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기도 한다. 이들은 여호와 경배는 선하고 우상 숭배는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순한 이차원적 만화 주인공 같은 존재들이 아니다. 이들은 전적으로 실제 인물들이다. 장점과 약점을 갖고 있으며, 겸손, 지혜, 순종, 그리고 기도의 중요성을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다. 목회자들을 위한 교훈역대하 저자는 제사장들도 비중 있게 다루는데, 오늘날 목회자들이 여기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역대하에 이르기까지 구약을 읽다 보면, 제사장들이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주관하던 이들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구약 제사장들과 오늘날의 목회 리더십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역대상과 역대하를 읽으면, 제사장들이 그러한 제사를 주관한 이들인 것도 맞지만 그들 역시 예배자들이요 성전 문지기로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역대하 31장 2절은 제사장의 세 가지 역할을 요약하여 보여준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여호와의 휘장 문에서 섬기며 감사하며 찬송하게 하고.” 제사장들은 음악, 노래, 찬송, 그리고 기도가 있는 예배 인도를 통해 백성들을 영적으로 지도했다. 휘장 문에 서서 하나님의 임재를 지키는 역할을 하며, 웃시야처럼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든, 아하스처럼 금을 훔쳐내어 적들에게 바쳐 그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든, 백성들이 함부로 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오늘날의 장로들은 역대하에 묘사된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면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선견자와 예언의 역할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역대하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선견자들과 그들이 하는 예언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열왕기상 및 열왕기하에서는 선지자들이 행하는 역할을 감당한 반면 역대기서에서는 선지자들이 ‘가르치는’ 일을 수행하는데, 이는 당시는 물론이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많은 적용점을 준다. 스마야는 겸손을 가르치고(12장), 아사랴는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한다(15장). 하나니는 평화(샬롬)와 '전심으로'(샬렘) 하나님께 향하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대하 16:9)미가야는 여호사밧에게 아합과 연대하면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흩어질 것이라 경고한다(18장). 예후는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19:2)에 대한 심판을 선포한다. 야하시엘은 남유다를 향해,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중략]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20:15–17)고 선언한다. 스가랴, 오벳, 훌다 및 다른 여러 선지자들에 이르는 많은 예들이 있다. 보화로 가득한 곳역대하는 보화로 가득한 곳이다. 아비야 왕, 그리고 히스기야의 어머니인 아비야를 통해 표현된 역대하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도 있고, 아사랴라는 이름을 지닌 선견자, 제사장, 왕, 그리고 족장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다. 이 등장 인물들 각각은 이 책의 주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역대기 저자가 쥔 붓을 통해 선견자, 제사장, 왕, 그리고 다른 등장 인물들이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이 책의 핵심을 형성해간다. 역대하의 핵심은 또한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회개하고, 믿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비하면 그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원제: Why 2 Chronicles Is the Most Underrated Book in the Bib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정훈
신학
구약성경
역대기
목회자
선견자
아비야
아사랴
보화
지금까지 이어져 온 최초의 죄와 그 결과
by 이승구
2021-02-20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역할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이런 정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혹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인간이 그 지위를 지키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 취하는 정보 선택의 오류를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적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명백하게 이야기하는 인간 창조와 타락이라는 두 사실을 다 받아들이고, 그 함의를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인류 최초의 죄“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창 2:16-17)에 불순종하면 죽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경고하셨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 5)는 뱀(사탄)의 말에 인간은 더 귀를 기울였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로 보였다. 이런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여인은 결단하고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다”(창 3:6). 그들은 자원해서 불순종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생명의 계명을 어긴 것이다.” 이 표현은 벨직 신앙고백서의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그 고백자들이 얼마나 성경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인류 최초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어긴 것이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며,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고, 자신들의 길을 스스로 해결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의지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죄다.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말씀 하나하나가 장중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또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금지 명령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 하시는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최초의 인류는 이 말씀들의 그 깊은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이를 지키기 위한 방도를 마련했다. 그래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라”는 말을 하면서 여기에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창 3:3). 죄에 빠지는 과정인류 최초의 죄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죄에 빠지는 과정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수준으로 낮추어 생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왜 이 금령을 주셨는지 이 금령이 왜 생명의 계명인지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어떻게 하면 이를 어기지 않을까 정도로 생각하여 나름대로의 방책을 찾는다.둘째,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여 판단한다. 단순하고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말씀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말을 넣음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오염시키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장로들의 유전을 더했던 것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또한 성경이 완성된 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면서 각종 이단들이 만들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성도들은 성경 자체가 항상 경고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계 22:18, 19). 그것은 반드시 죄에 빠지는 길이다.셋째, 하나님께서는 명백히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창 2:17)고 하셨고,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한 것 같은 명백한 반립(反立, anti-thesis)이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점차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 말씀에 반대되는 쪽으로 드러난다. 넷째,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고귀한 위치에 있게 하였는지를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사탄이 유혹하는 대로 “하나님과 같이”(창 3:5) 되려는 욕망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성을 중시하지 않으면 스스로 고귀하게 되려고 하다가 망하는 것이다.인류 최초의 죄의 결과이렇게 고의적으로 범과함으로써 인류는 죽음과 저주에 빠졌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선언하셨던 대로 되었다. 죄에는 항상 죄에 대한 책임, 즉 ‘형벌 받아 마땅함’이 발생하기에 이런 죽음과 저주가 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삶을 살고, 결국 물리적인 죽음에 넘겨지며, 그 이후에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사망과 저주의 상태에 빠지게 됐다. 죽음과 저주는 매우 심각한 결과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모든 인류는 최초의 죄 이후 그들의 본성 전체가 완전히 부패되었다. 따라서 악하고 왜곡된 존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잘못된 것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부여해 주신 모든 선한 것들과 뛰어난 것들이 그 흔적만 남기고는 다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전적 부패’라고 말한다.더 나아가서 이 최초의 죄로 인해 인류는 참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켰다. 사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라는 이 문제가 가장 큰 문제다. 그로부터 다른 모든 문제들이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의 구원 약속과 믿음만일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삼중의 난제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말씀을 전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저주와 죽음 가운데 영원히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곧바로 하나님께서 오셔서(창 3:8)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며 형벌을 선언하시면서도(창 3:14-19) 그 안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고(창 3:15) 말한다. 또한 그 구원의 약속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점점 구체적으로 보이시고, 결국에는 약속된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명백히 선언한다. 최초의 죄인들인 아담과 하와가 그들이 타락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듯이,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로 믿고 그를 따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믿으면 이 저주와 죽음의 상태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복된 소식이다.
신학
교리
창조
타락
선악과
벨직신앙고백서
창세기
죄책
원죄
전적부패
“네 아들을 죽여라” 이 끔찍한 명령을 어떻게 이해할까?
by Alex Duke
2021-02-19
성경을 진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그 중 하나다.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정말 사랑하는데, 단지 성경 속 몇몇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단어 하나까지도 사랑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21세기까지 우연히 운 좋게 살아남은 순진한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다. 또 어딘가 문제가 있거나 사악한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보통의 거듭난 기독교인일 뿐이다. 거듭난 기독교인이 정말로 사랑하는 성경 이야기 중 하나가 도킨스가 진짜 싫어하는 창세기 22장에 있다.여기 도킨스가 그 부분을 설명한 내용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토록 오래 기다리고서야 낳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한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장작을 얹고 그 위에 이삭을 묶었다. 이삭을 죽일 칼은 이미 그의 손에 들려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천사가 나타나 변경된 계획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결국 농담을 한 것이었는데, 아브라함을 '자극함으로' 그의 믿음을 시험한 것이었다...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 학대, 두 가지 형태의 비대칭적 권력 관계에서의 괴롭힘, 그리고 뉘른베르크 방어(나치 전범들을 재판한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을 의미한다. 나치 전범들은 거의가 다 ‘나는 그냥 시키는대로 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역주)가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다. “나는 단지 명령에 순종했을 뿐이야.”표면적으로만 보면 도킨스의 해석은 좀 지나친 면이 있지만 상당히 합리적인 해석처럼 들린다. 사실 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도킨스가 제기한 이런 의문들에 대해 침묵으로 동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 22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보여주는 것은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약자에 대한 괴롭힘일까? 은총일까 아니면 비은총일까? 아동 학대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믿음 좋은 아들에게로 전해지는 축복일까? 조금만 깊이 조사를 하게 되면 도킨스의 주장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사실, 그의 말은 완전히 틀렸다.창세기 22장은 일종의 ‘테스트’다거의 전지적인 서술자로서 모세는 사건을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이런 일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벌하셨다거나 아브라함을 유혹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 아마도 분별력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이 왜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하시지? 그건 여호와가 아니라 몰렉 같은 이방신이나 하는 짓이잖아?”라며 의아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의문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엔진의 소음처럼 왜 이런 이야기가 성경 속에 있는지, 하나님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다. “하나님이 이삭을 진짜 죽이라고 명령하신 건 아니잖아.” 그러나 이런 해석이 가능하려면 거의 올림픽 체조 선수 수준의 과감한 해석을 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이삭을 죽이려고 했다. 그것은 너무도 명확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부도덕한 행동을 명령하는 부도덕한 신이라는 이 힘든 매듭을 풀 수 있을까? '테스트'라는 단어가 핵심이 되는 열쇠다. “아브라함아, 너는 나를 믿느냐?”라는 이 한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그전까지 아브라함은 이 테스트에서 'F(실패)'를 받았다. 기억하자. 아브라함, 이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아내에 대해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고(창 12, 20),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키실 것을 의심했기 때문에(창 16) 아내의 종과 동침한 남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물론 하나님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계신다. 모세는 반 정도만 전지한 해설자인지 모르지만 여호와는 100퍼센트 전지전능한 신이다. 이 시험은 하나님이 모르는 이해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모르고 있던 믿음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잔뜩 미간에 주름을 잡고 이 본문을 읽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내가 최악의 국선 변호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주님을 위한 나의 방어가 감각과 감수성에서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 당신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배심원이다. 당신은 여전히 궁금하다.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이런 사람이 지금 당신이라면, 아마도 조금은 아브라함과 비슷하게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이 누구라고 말씀하시지만, 하나님과 관련한 당신의 경험은 하나님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증거로만 잔뜩 쌓여있다. 당신의 상황은 지금 주님을 기소하고 있고, 사실 정직하게만 본다면, 당신이 모은 증거는 종종 압도적으로 하나님에게 불리하다. 괜찮다. 우리는 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아마도 창세기 22장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테스트일 수도 있다. 창세기 22장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실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믿느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의 멘탈을 시험한다. 명령 자체만 본다면, 이것은 마치 도킨스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이삭을 죽일 칼을 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창 22:2). 모든 구절마다 칼날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그로 인한 심장의 상처는 깊어지면서 불꽃이 튄다. 하나님의 이 요구는 아브라함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믿을 수 없는 압력을 가한다. 그는 몇 년 동안 스스로를 갉아먹는 바로 이 질문을 던져왔다. “하나님께서 내게 한 약속을 지키실까?”이번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는 과연 바뀌었는가? 그렇다, 그는 바뀌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창 22:3).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그의 종들을 일부러 속일 생각이 아니었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신과 함께 다시 돌아올 것을 믿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그리고 모세가 자세히 서술하는 이어지는 사건을 보면 아브라함은 또한 이삭을 죽이겠다고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아브라함의 마음을 괴롭혔을 이삭의 이런 순진한 질문 때문에 아브라함의 결심이 흔들리지는 않았을까? 나무를 지고 올라가면서 이삭이 물었다. “불과 나무는 다 있는데, 번제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애매하게 대답한다.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 내 아들.” 우리는 지금 히브리어 해석이 주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아브라함이 말하는 “내 아들”이 애정 어린 말일까, 아니면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일까? 그는 지금 “내 아들아,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걸까, 아니면, “하나님이 어린 양인 내 아들을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걸까? 전자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나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한다. 모래 시계에서 모래가 서서히 떨어져감에 따라, 그는 스스로 계획한 줄 알았던 모든 일이 사실은 주님께서 하나하나 예비하셨음을 깨닫고 있었다. 신약에 들어가게 되면 창세기 22장을 덮고 있던 모든 안개는 사라진다. 리처드 도킨스의 황당한 설명은 잊어버리자. 이제 히브리서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1–12).아하! 우리는 지금 막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그게 뭔지 생각하기 전에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히브리서 저자는 모세가 창세기 22장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이 창세기 22장을 통해서 하시는 역사도 정확하게 알아냈다. 그는 이것이 '테스트'(히 11:17)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것을 알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최소한 비유적으로 볼 때 그게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히 11:19). 아브라함이 손에 쥔 도살용 칼은 이삭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창 22:10). 그런데 그때 그가 들은 소리는 엔진에서 나는 덜컹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덤불에서 나는 바스락 소리였다(창 22:13). 이삭은 사실상 죽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까지는 말이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하심인가!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던 진짜 중요한 두 번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삶 자체가 부활이라는 말로 정의되고, 아마도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님의 이상한 요청을 듣는 아브라함의 눈앞에서는 그의 전 생애가 순간적으로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마침내 올바른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므로 그를 신뢰하자고. 아마도 그는 아내와 자신이 이미 “나이가 많아 늙었고” 또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창 18:11; 히 11:11) 그럼에도 하나님이 자식을 준다고 약속하셨음을 기억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 봤던 사라의 웃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라던 사라의 냉담한 대답도 기억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주님의 부드러운 꾸짖음도 생각했을 것이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 아마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활, 부활, 부활이었다는 것을. 아브라함의 삶은 부활의 연속이었다.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처음 들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에게 부활의 능력을 계속해서 보여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삭과 사라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히 11:12)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아들이 없었지만 그에게서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2; 창 22:17)가 실현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하심인가!간단히 말해서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었다가 다시 일어날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사라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사람 하나를 부활시키는 것이 주님에게 어려울까? 당연히 아니다. 아브라함을 부활시킨 하나님이 이삭을 부활시키지 못하시겠는가?무엇을 보는가?창세기 22장에서 무엇을 보는가? 아브라함이 본 것을 여러분이 보기를 바란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물론 이 모든 사건은 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의 죽음을 가리키는 네온 사인과도 같다. 그 연결점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사건이 생긴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명하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순종적인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의 등에는 나무짐이 들려있다. 그리고 저기에는 대속하는 숫양이 있다.그러나 그러한 세부사항보다 더 예측 가능한 것은 창세기 22장 속 사건이 발생한 장소, 바로 모리아 산이다. 다름 아니라 미래에 성전이 들어선 바로 그 자리다(대하 3:1). 이것은 이삭이 피했던 희생이 대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제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에서 몇 번이고 희생을 바치는 사이에 아브라함의 역사와 경험은 이제 그들의 것이 되었다. 그들은 희생을 드렸고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공급하심을 찬양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 모든 것을 끝냈다. 그의 피는 더 이상 반복적인 희생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게 만들었다(히 9:11). 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이삭의 희생이 우리를 위해 제도화 될 필요가 없다. 이제 그 자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단지 믿고 또 믿을 뿐이다.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믿음은 이제 의로 간주된다(창 15:6; 갈 3:6). 그리고 이삭처럼 우리도 '아브라함의 아들'임을 증명한다. 이것이 바울이 인간적인 공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데 집착하는 한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한 이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6–7, 13–14)다시 묻겠다. 창세기 22장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바라건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신뢰, 그리고 믿음을 통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약속된 축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축복은 이제 당신에게까지 다다랐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함인가!원제: Kill Your Son, Abraham: Making Sense of a Shocking Comma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복음
변증
부활신앙
아브라함
창세기22장
히브리서11장
이삭
리차드도킨스
번제
노래는 성령이 주신 영적 무기입니다
by Peter J. Leithart
2021-02-09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을 왕권과 연결한다. 왕은 음악을 만들고 또 연주한다.창세기 4장에 처음으로 악기가 나온다. 타락과 가인의 동생 살인이 지나, 저자가 가인의 후손을 열거하는 시점이다. 가인이 첫 번째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후손이 창조 세계를 지배한다. 야발은 가축을 기르고, 두발가인은 청동과 철 도구를 만든다. 라멕은 인류 최초의 일부다처체를 행한 자다. 그들은 축산업, 야금술, 시민 질서, 실험적 결혼 등을 선보인 혁신적인 가족이다. 가인 부족은 창조세계를 다스린 왕의 일족이며, 이 왕실 족보의 한가운데 야발이 있는데,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창 4:21)이다. 양치기와 목축, 도구 만들기, 도시 건설과 함께 음악은 통치의 한 형태다. 노래와 대관식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가수로 선정된 자는 여성이었다. 출애굽 후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노래를 부를 때 가수는 미리암이었다(출 15:20-21). 이스라엘이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사령관 시스라를 물리친 후, 드보라는 승리의 노래를 작곡하고 그녀와 바락은 가나안 민족을 조롱하기 위해 그 노래를 부른다(삿 5). 사무엘이 태어난 후 한나는 시편과 비슷하면서 마리아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시를 만들어 기도한다(삼상 2).이 모든 노래는 다윗과 사울이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환영하는 여인들의 노래와 비슷하다. 야훼는 적을 물리치는 전사다. 승리 후, 그는 찬양의 노래로 둘러싸여 왕좌로 올라간다.노래는 성경 전체에 걸쳐 대관식을 동반한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야훼의 방주를 세우면 음악이 따라온다(대상 16). 야훼의 영광이 성전의 보좌를 채울 때 따라오는 것은 음악이다(대하 5:11-14). 어린양이 보좌에 앉은 이로부터 책을 받기 위해 올라갈 때도 음악이 있다(계 5). 야훼는 항상 노래와 함께 올라간다.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질 때면 음악이 급격히 많이 등장한다. 사울은 예언자와 연주자를 만났다(삼상 10:3, 5). 사울은 예언의 영에 사로 잡혀 예언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그가 노래한다는 의미다. 성령이 그를 새로운 사람, 노래하는 사람, 노래하는 왕으로 만든다. 다윗은 이스라엘 최고의 왕실 가수이자 음악가며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다(삼하 23:1). 그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조직하여 법궤와 성전 앞에서 번제의 찬양을 올렸다. 다윗은 새로운 악기를 발명한 새 시대의 야발이다(대상 23:5; 대하 7:6; 29:26-27; 느 12:36). 통치 형태로서의 음악 음악과 왕권이 연결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좋은 가수는 입술과 성대 뿐 아니라 온몸을 훈련한다.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 나무를 잘라 다듬고, 내장으로 줄을 만들며, 또한 필요한 재료를 뽑을 수 있도록 손가락을 훈련했다. 금속을 채굴하여 플루트와 파이프, 나팔을 만들고 또 연주하는 법을 배운다. 빵 만들기나 포도주 담그기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통치 패러다임이다. 바이올린 연주를 듣거나 보게 될 때마다 인간의 숙명을 알게 된다. 노동으로 아름다워진 창조 세계는 창조주를 찬양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음악은 또한 우리가 상황을 지배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준비시킨다. 음악은 우리를 왕과 여왕으로 만든다. 음악에 맞춰 병사들은 행진하고 노래를 부르며 전투를 준비하며 부대 역할을 하도록 훈련한다. 워밍업 할 때 듣는 강한 비트의 음악은 선수들의 정신을 각성시킨다. 순교자들은 하늘의 노래를 부르는 법을 배움으로써 마지막 전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갈 준비를 한다(계 14:1-5; 20:4-6).전쟁 무기로서의 음악전투 준비에만 음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노래 자체가 하나의 전쟁 형태다. 음악은 갑옷이고 노래는 무기다. 사무엘이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마치 사사가 된 것처럼 그는 즉시 전투에 돌입했다(삼상 16). 일반적인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다. 골리앗과 싸우기 전에 또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기 전에 다윗은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과 먼저 싸운다. 그는 하프로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을 물리친다.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있고, 또 칼로 모든 군대를 다 날려버릴 수 있다. 그러나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그가 들고 나온 무기는 바로 열 개의 현을 가진 수금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연주하고, 목소리로 노래하며 대적과 싸운 것이다. 다윗처럼 우리는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영적인 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노래라는 영적 무기를 포함하여 각종 영적 무기를 들고 다윗처럼 싸운다. 성령은 전쟁의 영, 전사 야훼의 영이다. 옷니엘, 기드온, 입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은 나가 싸웠다. 네 번에 걸쳐 성령은 삼손에게 임했고, 그는 사자를 죽이고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고 또 그를 묶었던 줄을 끊었다. 사울이 암몬 족속으로부터 야베스 길르앗 지역을 구원할 때 입었던 갑옷은 성령이었다. 성령이 임할 때 신자는 전투를 준비한다. 성령이 충만할 때 그분은 노래에 영감을 더하신다(엡 5: 18-20). 교회는 노래를 부르며 영적 전쟁터로 행진한다. 우리는 노래하며 영적 전쟁을 수행한다. 우리의 전쟁은 언제나 증거하는 전쟁이다(그리스어로, marturia). 노래는 우리가 위협과 위험에 직면하고도 예수님을 간증하도록 용기를 주지만, 또한 노래는 그 자체로서 증거하는 행위가 된다. 불평하고 시끄러운 세상의 소란 속에서 우리는 목소리를 높이고 모든 통치자와 권세자, 그리고 모든 권력과 지배 위에 즉위하신 또 다른 왕 예수님을 간증한다. 그렇기에 신자가 부르는 모든 노래는 또한 순교의 노래다. 원제: Why Kings Sing: A Biblical Theology of Monarchs and Music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신학
구약
음악과왕권
영적전쟁
다윗과음악
음악의중요성
창세기4장
전쟁과음악
무기로서음악
사람을 판단하라, 단 예수님처럼
by Matt Smethurst
2021-02-08
‘가장 잘못 사용된 성경 구절(The Most Misused Verses in the Bible)'을 쓴 에릭 바저허프(Eric Bargerhuff)는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참담할 정도로 오용되는 ‘인기 구절’을 조사했다.그 중에서 일등은 뭘까?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7장 1절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바저허프에 의하면 이 구절을 놓고 성경을 통틀어서 압도적으로 가장 잘못 사용되는 구절이라고 주장한 이도 있다고 한다. 예수님이 의미한 것이 아닌 것그럼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 예수님이 이런 것을 의미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비판적 사고를 하지말라.”“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말라.”“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말라.”그럼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이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문맥이다.예수님의 말씀이 도덕적인 판단을 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굳이 마태복음, 산상설교, 심지어 마태복음 7장을 다 훑어볼 필요도 없다.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후, 고작 다섯 구절도 지나지 않아서 그의 적을 개와 돼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들을 그렇게 보기를 기대한다(6절). 7장 후반에서 예수님은 양을 삼키는 이리와 같은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도덕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자, 그럼 믿지 않는 우리 이웃이 바라는 흔한 메시지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일까? 그의 기본 요지는 간단하다.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물론 신학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결코 우월감의 발코니에서 아래를 보며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J. C. 라일(J. C. Ryle)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주님이 정죄하는 것은 … 결함을 찾아내기에 급급한 마음가짐이다. 사소한 잘못 또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를 놓고 언제라도 다른 사람을 비난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성급함에 빠져 서투른 판단을 내리는 습관, 이웃의 잘못과 연약함을 확대하다가 결국 상황을 최악으로 만드는, 그런 성향 말이다."예수님의 말씀은 입을 열어 말하기 전에 눈과 마음부터 열어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날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을 잘못된 현미경 렌즈를 통해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비극을 맞이하지 않도록, 사람을 볼 때 정확하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정직한 적용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내가 느끼는 유혹은 그냥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대로 놔두고 싶은 충동이다. 그렇게 하면 맘도 편하고 또 나도 세상 기준에서 볼 때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순간,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다름없는 이 구절을 뒤집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말해버리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마태복음 7장 1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구절이 정말로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최소한 세 가지가 있다.1. 네 마음 속 위선을 뿌리뽑아라이 메시지가 바로 이어서 들려주신 예수님 말씀의 포인트다.“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이 말씀은 형제나 자매의 눈에서 티를 부드럽게 제거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당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을 때는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이 구절의 목적은 자기 인식의 겸손, 즉 위선의 사악함을 제거하는 겸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럼 그런 위선은 어떤 모습일까? - 누군가가 천박한 욕을 하거나 저급한 농담을 했을 때 잽싸게 그 사실을 지적하고는 다시 원래 하던 잡담을 이어가는 모습.- 사실상 개인 경건의 시간은 전혀 가지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의 기도 요청에 시큰둥하거나, 기도와 관련한 누군가의 신학을 바로잡는 모습. 간단히 말해서, 자기 의(self-righteousness)는 항상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고도의 기술이다. 정작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는 검정고시 수준이면서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는 박사 학위를 추구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죄를 놓고 애통하는 정도까지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애통함을 가져라. 나 자신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관심을 끊어라. 예수님의 말씀 중 진짜 무서운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사랑 또는 정죄만큼 하늘의 재판관이 내게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2. 비판에 앞서 먼저 격려하라 지난 주에 당신이 비판한 사람과 격려한 사람의 목록을 만든다면, 어느 쪽이 더 길까? 가장 친한 친구는 당신이 비판과 격려 중 어디에 더 능숙하다고 말할까? 예수님이 금지한 태도는, 수도 없이 다양한 형태의 교만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외모, 지성, 엔터테인먼트 선호도, 육아 철학, 학업 결정, 생활 방식 및 지출 선택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라도 뭐라고 판단하는 것을 포함한다. 단지 당신과 유사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하는 것, 좀 거칠게 말해서, 그들을 볼 때 단지 당신 자신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지르는 판단이다. 비판의 정신은 그럼 어떻게 생겼을까? 항상 강한 주장을 펼친다는 사실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가? 당신의 의견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겠다고 느끼는가? 당신은 언제나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다 파악하고 있다고 간주하는가? 그리고 역 판단주의(reverse judgmentalism)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 내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난 저기 저 사람처럼 남을 막 판단하고 그러지 않아요. 나는 하루에 두 번씩 자선을 합니다. 물론, 그게 최종 목표는 아니고요”라고 말하면서 다른 바리새인을 비난하는 바리새인이 될 수도 있다. 3. 다른 기독교인과 교회를 위해 예수님을 찬양하라어떻게 해야 “비판하지 말라”는 도전을 단지 개인이 아닌 전체 교인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일단 우리는 얼마든지 나 혼자만이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나만이 '교회를 이끄는 바른 방법'을 알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가장 먼저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를 깔봐서는 안 된다. 성숙은 결코 지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건강보다도 교회 자체를 사랑하라(Love the Church More Than Its Health)'는 글에서 조나단 리먼(Jonathan Leeman)은 좀 길지만 충분히 인용할 가치가 있는 말을 썼다. 우리는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보다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해’라는 비전을 더 사랑할 수 있다. 결혼을 하고도 눈 앞에 있는 아내가 아닌 여전히 머릿속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더 사랑하는 남편이 될 수도 있고, 평소 그리는 완벽한 딸에 대한 이상을 진짜 딸보다 더 사랑하는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교회보다 건강한 교회라는 꿈과 이상을 더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분의 이름을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셨다. … 그는 제대로 무르익지 않고 불완전한 신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교회의 건강보다 교회 자체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지, 그들이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선하고 성경적인 법칙을 지켜서가 아니다. … 누구나 사랑하는 자녀가 건강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부모라면 건강하든 아프든 관계없이 언제나 자녀를 사랑한다. 바울은 교회가 지닌 수많은 흠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기쁨', 그의 '영광', 그리고 그의 '면류관'(살전 2:19)이라고 불렀다. 당신은 어떤가? 교회를 함께 섬기는 형제가 당신의 기쁨이고 영광, 그리고 면류관인가?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길을 걷는 나그네, 형제 자매, 시민, 군인, 고통받는 자 그리고 상속자라는 진리를 가르친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말이 우리가 영원히 나눌 깊은 연합을 온전히 드러내도록 하자. 한 가지궁극적으로, 오직 한 가지만이 위선을 뿌리 뽑고, 비판하고 싶은 욕망을 격려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꿀 수 있으며, 또 남을 판단하는 마음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겸손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주는 바로 그 은혜로부터 오는 겸손이다. 행여 우월감의 발코니를 오르기 시작했다면 지금이라도 그 걸음을 멈추라. 당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여전히 죄를 짓는 성도, 여행하는 나그네, 여전히 미완성 작품이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올바른 자세로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이 어떤지 살펴보기 전에 나 자신의 성장을 추구하고, 무엇보다 가장 얕보기 쉬운 사람들과 그들의 평판을 높여주는 데 온 힘을 쏟으라. 은혜가 태양처럼 마음속에서 솟아오를 때 당신 속에 있던 위선과 남의 티를 찾기 바쁜 위선은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원제: Judge People! (Like Jesus Di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신학
신약성경
마태복음7장1절
판단과정죄
판단과교만
오용되는성경구절
형제사랑
건강한교회의함정
위선
J.C.라일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by 이승구
2021-02-02
섭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올바른 섭리론이란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비록 우리가 그 과정과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잘못되고 과도한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를 탐구하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타락하기 전의 인간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니, 타락한 사람이 그것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주어진 정황에 대해, 어떤 특정한 시공간의 하나님의 역사 전체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그러므로 섭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호기심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겸손과 경건으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바르고 공정한 판단을 존중하며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바르고 공정한 판단은 때로는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우리가 경험하는 코로나19 같은 것이 아주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반대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섭리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우리는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경건하게 그리고 모든 겸손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모든 정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들’이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들을 배우고, 그 한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오래전(1561년) 벨직 신앙고백서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던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계시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을 배우려고 하고, 그 한계를 넘어 가지 않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를 즐겨하며 자신들의 이해를 자랑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이는 매우 적실하고 중요한 생각이다. 그들은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니 그럴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 면에서 우리는 교만한 것이 된다. 16세기에도 하나님께서 그 말씀 가운데 드러내어 보여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한계를 넘어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런 신앙고백이 행하여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든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그 타락성을 따르면, 항상 주어진 말씀 안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 한계 밖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인간성을 만족시키기는 하나 항상 잘못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어 주는 한계 안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이 고루해 보이고 진취적이지 않으며, 탐구 의욕을 꺾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문제성과 피조물의 한계성을 참으로 인정하는 겸손이며 경건이다.이런 겸손과 경건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되는 것이라고 믿었던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한 사람들(the Epicureans)이나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우연히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또한 참으로 겸손한 사람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히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기계적인 섭리 과정만 있다고 하면서 그것에 우리가 노예적으로 순응해야 한다고 믿었던 스토아 학파 사람들처럼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했다(행 17:18). 바울이 그 사람들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의 철학적 사유와 그들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이 세상의 사유들이 옳지 않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분명히 천명하면서 그 말씀이 가르치는 한계 내에서 사유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진정한 모든 것은 다 말씀의 한계 내에 있는 것이다. 종교와 모든 것을 ‘이성의 한계 내에서만’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항상 모든 것에 대해서 이성이 아닌 말씀의 한계 내에서 생각해야 한다.말씀의 한계 내에서 섭리 과정을 보면 나타나는 놀라운 결과말씀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생각하면 섭리 교리야말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 교리’다. 왜냐하면 말씀의 한계 내에서 생각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덕분에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관리하심과 돌보심에 의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게 된다.하나님께서 아버지 같이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돌보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불러 왔다. 모든 것이 잘되는 순조로운 환경에서는 이것을 인정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죄와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예를 들어서 모든 시대의 순교 현장이나 전쟁 등의 상황에서, 그리고 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을까?그러나 바로 이런 데서 섭리 신앙의 묘미가 나타난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죽는다고 해도 그 존재 자체는 하나님에 의해 보호된다. 그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다가,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몸이 부활하여 영육간의 온전함을 화복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몸과 영이 하나 되어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사람들이 불행한 일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본질적 존재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물리적으로 죽는 죽음을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의 어려움과 죽음은 심각하고 큰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우리의 근본적 본질에는 아무런 손상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의 가장 위협적인 것이 사망과 음부고, 이 세상의 가장 큰 권세가 음부의 권세(음부의 문)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 속에 있으며, 고난과 물리적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배울 수 있다.우리가 무엇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버지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물리적 죽음 뒤에 더 심각한 영혼의 고통이 따르고, 예수님의 재림 후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들의 죄악에 대해 정죄받고, 그에 상당한 형벌을 선고받아 영원히 몸과 영혼의 고난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가르쳐 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심지어 성경의 그런 가르침을 무시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성경은 명백히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난 사람들(갈 2:20)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나의 자리에 서서 정죄를 받으셨다는 이 복음의 선언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내가 받아야 할 형벌과 저주를 나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받으셨음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갈 3:13) 바울처럼 선언한다.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삶의 과정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큰 고난이 있고, 심지어 자신이 물리적 죽음에 처해도 그것이 자신의 본질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그런 실재를 삶으로 드러내면서 산다. 이것이 섭리를 믿는 사람들의 삶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섭리인 소위 ‘아주 특별한 섭리(providentia specialissima)’에 대한 말이지만, 이것도 섭리의 하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그 백성을 위해 온 세상에 대한 주재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사이’의 구조 속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즉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을 위해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인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은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돌보심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혹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고난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능히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면서 마음의 안식을 가지고 고난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는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믿기 때문이며, 때로 그 고난이 이해할 수 없고 큰 것일수록 그 과정을 통해서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욥과 같이 고백한다. 그리하여 참된 성도는 결국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와 같이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다.
신학
교리
섭리
바른섭리론
벨직신앙고백서
제자
신앙고백
에피쿠로스
말씀의한계
하나님나라
잠언을 제대로 이해하는 네 가지 원리
by Robert Rothwell
2021-01-29
미국의 산업 현장에서 ‘지혜’는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져 왔다. 지금도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회자라든가 신문의 칼럼니스트는 지혜로운 조언을 구하는 청취자나 구독자에게 필요한 어드바이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규모를 막론하고 수많은 회사들 역시 전문적인 컨설턴트의 도움으로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다.지혜를 추구하는 인류의 오랜 갈망은 이처럼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지혜가 다름 아닌 성경의 가르침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구약성경 중에서도 솔로몬의 잠언이 특별히 지혜를 제시하는 책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책의 교훈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방법을 알아봄으로써 큰 유익을 얻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지혜란 무엇인가잠언이라는 책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를 얻게 하려는 데 있다(잠 1:2). 이와 같은 점에서 이 책을 이해하는 일은 바로 지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인생을 살아가는 ‘전문적인 기술’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인생을 올바로 살아간다. 다른 이들이 겪는 일반적인 문제들을 피해갈 뿐 아니라 통찰을 가지고 다양한 일들을 처리할 줄도 안다. 마치 작지만 영특한 동물들처럼, 지혜로운 사람들은 스스로 지닌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잘 꾸려 나간다(잠 30:24-28).잠언에 따르면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시작된다(잠 1:7). 따라서 그러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분의 법을 준수하고자 한다(시 34:11-16; 행 5:29). 바로 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에는 지성적인 요소가 수반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뜻을 알고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계명을 공부하고 기억해야 한다(신 6:4-9). 물론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에는 그분에게 사랑으로 반응하며 그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려는 정서적인 요소도 포함된다(막 10:28-31; 약 2:14-26; 요일 4:16). 사탄 역시 성경을 인용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기에 어리석게도 그분에게 대적한다(마 4:1-11). 예수님은 어느 부자에 대해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이유는 그 부자에게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눅 12:13-21).또한 잠언에서 지혜는 ‘공의’와 동의어처럼 언급된다. 예를 들어 그 서문을 보면 지혜와 공의를 추구하게 하려고 잠언이 지어졌음을 밝히고 있다(잠 1:3). 지혜로운 교훈과 공의로운 인생은 생명을 낳지만(잠 12:28; 13:14), 불경건하고 어리석은 자는 넓은 길에서 방황하다가 사망에 이르기 때문이다(잠 10:14; 11:7). 우리는 분명 거룩하지 않으면서 지혜로울 수 없고, 또 지혜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거룩해질 수 없다.더 나아가 잠언은 평범한 일상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성경의 다른 가르침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 중 대부분은 교회의 진로를 결정지을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인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모든 행위를 헤아리신다(잠 5:21). 잠언은 이 놀라운 현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며 우리가 그분의 법도에 순종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젊어서 만난 아내나 남편을 즐거워하면, 우리는 배우자와 정서적으로 만족스러운 관계를 누림으로써 결혼 서약을 위반하는 외도에 빠지지 않게 된다고 가르친다(잠 5:15-20).이러한 본문은 ‘평범한’ 사람들이 맺는 관계를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독불장군’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른 지체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서 (가령 28장 13절과 같이) 죄를 고백하라고 권면하는 잠언의 많은 가르침조차도, 결국에는 우리가 그 가르침을 이행할 때 하나님 및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연합할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공의로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추구한다. 그들은 누군가가 죄를 진실하게 고백할 때 다른 지체들이 그 짐을 함께 지는 교회를 이루고자 한다(갈 6:2).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결정을 내릴 때 경건한 지체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잠 15:22).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을 내리며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잠언은 우리 모두가 인생을 홀로 살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에서 드러내는 원숙한 지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잠 1:8; 4:1-6; 24:6).잠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물론 이 책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약 1:5). 그러나 다른 문학과 마찬가지로, 잠언 역시도 그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장르와 배경을 기본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잠언의 지혜로운 격언들을 오용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네 가지 원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첫째로, 하나의 교훈이 인생의 모든 상황에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원리다. 우리는 일반적인 세상 교훈을 아무 때나 적용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이러한 원리는 성령의 영감을 받을 솔로몬의 잠언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R. C. 스프로울(Sproul) 박사는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look before you leap)라든가 “망설이는 자는 기회를 놓친다”(he who hesitates is lost)와 같이 서로 상반된 속담을 들어 이 원리를 설명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처럼,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신중하게 살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주저하는 일이 오히려 어리석을 때도 있다. 가령 두 살짜리 아이가 혼자서 찻길을 건너려 할 때 우리는 그 아이를 붙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고민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잠언에 대해서도 한 가지 교훈이 모든 상황에 적용되기를 바란다면, 결국 실망과 혼란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미련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잠 26:4-5).둘째로, 당면한 문제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원리다. 민수기 35장 9-28절은 모든 살인 사건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오직 사전에 계획된 살인 행위에 대해서만 사형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사형 집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해당 사건이 처음부터 계획된 사건이었는지를 조사해야 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잠언과 율법을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이 적용되는 상황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늘 요구된다.셋째로, 한 가지 교훈을 읽더라도 다른 교훈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원리다. 왜냐하면 맥락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교훈을 올바로 해석하는 일은 다른 교훈을 염두에 두고 그 내용을 함께 생각할 때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잠언의 모든 내용을 마음에 두고 언제든 읊을 수 있으면 좋다(잠 22:17-18). 가령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는 교훈은 일반적으로 경건한 부모가 경건한 자녀를 양육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잠 22:6). 그러나 잠언 전체는 자녀가 올곧은 길을 떠나지 않으려면 그 자녀 편에서도 주의해야 할 교훈이 있음을 가르친다. 즉 진실한 신앙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자녀 역시도 부모나 인생의 선배가 주는 경건한 지혜에 주의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잠 1:8-9, 32-33; 3:5-6; 7:1-3). 따라서 우리가 다른 교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면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라는 교훈에만 집착한다면, 믿는 가정에서 사려 깊고 착실한 방법으로 아이를 양육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그 아이가 경건한 신자가 되리라는 착각을 하게 될 수 있다. 이와 달리 잠언의 전체 맥락을 기억하게 되면, 우리는 자녀가 신앙 안에서 자랐더라도 그 자녀가 나이가 들면 또 다시 가르쳐야 할 책임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자녀가 오래 전에 들은 가르침을 명심하지 않아 이제 와서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면, 현재로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라는 교훈을 다른 교훈과 함께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우리는 그 교훈만을 잣대로 삼아 경건하지 않은 자녀를 키우는 다른 부모의 양육 방식을 손쉽게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 전체뿐 아니라 잠언의 전반적인 맥락 역시도 경건한 부모가 때로는 경건하지 않은 자녀를 양육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어린 자녀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부모라고 할지라도(신 6:4-9), 자녀의 돌 같은 마음을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부모 스스로가 할 수 없기 때문이다.넷째로, 마지막을 생각해야 한다는 원리다. 잠언의 수많은 교훈은 의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려움을 피하고 타인과도 화평하게 살아간다고 말한다(잠 12:21; 16:7). 하지만 경건한 자들이 결국에는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현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주님의 신실한 일꾼들이 있음을 또한 알고 있다. 잠언도 그와 같은 현실을 간파하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가난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고 말한다(잠 15:16; 19:1). 또한 불의가 세상의 재물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잠 10:2).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현실을 다루는 교훈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 의인의 형통만 다루는 구절을 일방적인 약속으로 바라본다면, 그와 맞지 않는 현실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또 그럴 때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며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욥의 친구들처럼 말이다.그러나 잠언이 현재의 삶에 대해 무조건적인 성공을 약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인의 최종적인 형통이 보장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증언하는 성경의 여러 본문은 그분의 백성이 승리하고 악인이 멸망하는 때가 있음을 말해 준다(창 18:25; 계 16:5).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인해 그 거룩한 백성에게 행해진 악한 일들에 대해 사후에 반드시 심판하신다. 잠언은 이러한 장래의 소망을 직접적인 교훈으로 제시하기보다 그분의 섭리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이해하게끔 어렴풋이 제시한다(잠 10:2, 25; 11:21; 16:4). 이처럼 의인에 대한 축복을 언급하는 잠언의 약속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모두 다 사실로 드러나게 되기에, 우리는 그날을 학수고대한다(단 12:1-3; 계 20:11-15).잠언과 그리스도이처럼 잠언은 현세의 삶 이후를 바라보도록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변호하며 그들의 섬김에 따라 상 주시는 분을 기대하게 만든다. 만일 변치 않는 사랑과 공의가 왕위를 보전하는 성품이라면(잠 20:28), 이러한 성품을 완전하게 구현하는 통치자만이 자기 백성의 변호자가 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단연 메시아, 즉 잠언의 지혜를 완전히 반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전 1:24). 솔로몬은 어리석은 상태에 빠져 죽었지만(왕상 11장), 예수님은 시종일관 하나님을 경외하셨고 악을 피하셨다(잠 3:7; 벧전 2:22). 그러므로 우리가 잠언의 지혜를 온전히 반영하신 그분의 가르침을 빛으로 삼아 이 책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지혜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원제: The Proverbs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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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by 이춘성
2021-01-28
세상에는 악이 가득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소에는 그런 사람이나 현상을 보기 어렵지만 살다 보면 자신이 악행의 피해자가 되거나 악인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악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악의 노예가 되어 영혼을 팔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도 악을 행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고 변명이 있다. 그렇기에 악을 행한 것에 대해서 누군가 처벌하려 할 때, 부당함을 느끼고 자신이 지은 악보다 더 큰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복을 계획한다. 반대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에 비하여 가해자인 악인이 충분한 벌을 받지 않는다는 불만이 있다. 자신이 본 피해에 상응하는 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정한 처벌을 위해서 피해자의 피해를 어떻게 측정해야 정확할까?자연법으로서의 동해보복법이러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족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그것이 동해보복법(lex talionis)이다. 이 동해보복법은 성경에도 나온다. 이것은 일종의 창조의 원리인 자연법과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다. 또한, 동해보복법은 합리적이며 이상적인 법 원칙에 속한다. 그러한 이유로 이 법은 현실에서 지켜지기 어려운 법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사건 이후에 가인의 증손자 라멕에 의해서 행해진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 4:23) 라멕의 잔인한 복수는, 타락한 인간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언제든지 자신의 상처가 가장 아프고, 남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으로 여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해보복법은 자연의 인과 법칙의 원리지만, 인간의 자기 중심성의 주관성은 이를 결코 실현할 수 없도록 한다.이러한 자연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성경보다 먼저 문서로 남겨놓은 나라가 있다. 이것이 수메르의 함무라비 왕이 만든 함무라비 법전이다. 기원전 16~17세기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에도 동해보복법이 나온다. 하지만 이 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수메르의 동해보복법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노예나 이방인, 여자, 아이들은 법 적용의 예외 대상이었다. 이는 오직 성인 남자이며 귀족과 왕, 종교지도자에게만 적용되는 법이었다. 만약 노예가 귀족에게 상해를 입히면 동해보복법은 적용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노예를 죽여도 귀족 한 사람의 상처를 대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가치로 취급받은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 적용은 다른 나라들과 민족들과는 전혀 달랐다(출 21:23-25; 신 19:21; 레 24:17-22). 십계명이 누구나 지켜야 하는 법이었듯이 동해보복법도 남녀, 아이, 성인, 이방인의 차별이 없었다. 모든 인간의 권리와 가치의 평등에 기초한 동해보복법이 이스라엘의 율법이었다. 이 법은 당시에 누구도 과도한 복수와 보복을 당할 수 없도록 했으며, 감정에 치우친 사적 복수나 부당하고 이기적인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만나는 이상적인 법 집행이 가능하였다.라멕 효과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에는 동해보복법의 이상적인 원칙에 따라 그 정신과 원리가 잘 나타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성경에서 말하는 동해보복법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이 풀려야만 보복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피해와 남의 피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라멕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이나 현재 우리 기독교인 모두에게 예외가 아니다.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동해보복법은 유대교의 성경 연구 운동과 경건 운동을 이끈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었다. 또한 그리스 철학으로 계몽된 유대교 학자들은 동해보복법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하지 않았다. 당시의 랍비들은 동해보복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금전적 보상으로 전환하였다. 그렇지만 금전적인 보상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부자들은 진정한 회개와 용서 없이 피해자들에게 금전적인 보상만으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보상과 보복에서 진정한 사죄와 처벌이라는 인격적 요소가 제거되고 단지 경제적 보상과 물질만 남은 것이다.동해보복법의 비관주의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9절에서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은 가해자가 악한 자라고 한다면 이들을 향해 동해보복을 요구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동해보복법으로는 결국 온전한 정의와 사랑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주의가 내재해 있다. 이것은 법치주의라는 이상이 현실에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관주의에서 절망으로 나아가지 않고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셨다. 그리고 세상이 예상하지 못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셨다. 바울은 이것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하였다(롬 12:21). 예수님은 이를 산상설교에서 네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이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차례대로 소극적 방법 세 개와 적극적 방법 한 개다.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1“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6장 29절은 뺨을 때린다고만 하였지 그 방향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마태는 정확하게 오른편 뺨이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어느 쪽 뺨을 맞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증거다. 만약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왼손으로 때리지 않는 한 오른손일 경우 손등으로 때리는 수밖에는 없다. 당시 이런 행동은 상대를 구타하려는 목적보다는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오른 손등으로 상대의 오른뺨을 툭툭 치면서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다.그러면 이런 수모를 당할 때, 왼편을 돌려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상대가 나에게 도를 넘어 수치스럽게 하고 있다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본질이 아닌 것으로 약을 올리고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주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 많은 경우 참고 넘어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들의 행동이 정말 나쁜 행동이었다는 것은 알려주라고 하신다. 참고 있지 말라는 것이다. 오른뺨을 살살 건드려 사람들 사이에서 나에게 수모를 주려면 차라리 그 오른손으로 내 왼뺨을 세게 후려치라는 것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2“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 5:40)두 번째도 같다. 이런 상황은 금전적인 문제로 채무 관계일 경우다.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채무 관계로 이자를 받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채무로 인하여 전당물을 잡아야 하는 경우에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서 임의로 자기가 원하는 담보물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담보물은 채무자가 주는 것이어야 된다. 그런데 만약 채권자가 옷을 전당물로 잡았다면 옷은 반드시 저녁에는 돌려줘야 한다(출 22:26-27).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단벌이었다. 겉옷은 저녁에 담요 역할을 하였다. 즉, 옷을 담보로 잡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이었다.이러한 이유로 옷을 담보로 잡는 것은 최후에 어쩔 수 없는 경우며, 빌려주는 사람은 이것을 결코 요구할 수 없었다(신 24:10-13). 그런데 40절의 고발하는 자는 속옷을 요구하였다. 비록 겉옷은 아니기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해서는 안 되는 요구를 하여 상대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교묘하게 피하는 비겁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렇다면 겉옷도 줘버리라는 급진적인 행동을 명령하신다. 그래서 이 사람의 원래 의도, 겉옷을 원했지만 차마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그 악한 의도를 세상에 폭로하라는 것이다.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3“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41)당시 로마 군인들은 식민지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노역을 시킬 수 있었다.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시켜 강제로 짐을 들고 약 2km(5리)를 가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럴 때 그 두 배의 거리를 가 주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통해 부당함을 항변하라는 것이다. 부당함을 항변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러나 부당함을 항변하는 것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당함을 주장하는 사람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때다. 자신이 당한 손해에 대한 배상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으려 한다는 모습이 보이면 상대는 자신의 부당함을 깨닫지 못한다. 더하여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착각한다.동해복수의 법칙은 객관적으로 정량화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피해는 대부분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손해를 입힌 사람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황당한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상대가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고 악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내가 손해를 감수하여, 상대나 주변이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게 하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 4“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이 마지막 명령은 이전의 세 개의 예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전의 예들은 피해자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가해자를 향하여 그들의 위선과 부당함을 폭로하는 것을 통해 동해보복을 하는 소극적인 방법에 대한 예였다. 예수님은 일종의 갑과 을 관계에서 을이 당하는 구조적으로 허용된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한 부당함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동해보복의 예로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소극적인 방법을 제시하신 이유는, 사회 구조적인 악을 일시에 제거하고자 폭력적이고 혁명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을 때 오히려 구조는 개선되지 않고 약자의 피해만 가중되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폭로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보이지만 결국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깨고 갈라지게 하듯 변화를 일으킬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듯이 사회는 변하였다. 하지만 문제를 폭로하고 이에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변화의 한계가 있다.변화는 사람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돈이나 물건을 구하고 꾸려는 자들을 이들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차별한다면, 이 또한 신분에 따라 동해보복법을 차등하여 적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해보복법은 가난한 자도 그들의 필요만큼 돈을 빌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 동해보복법은 노인과 아이, 과부와 고아, 여자와 노예, 이방인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손해를 보상하는 소극적 법인 동해보복법을 역으로 하면 이는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고 차별하지 않는 적극적 법의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레 19:10; 신 15:7-11; 24:19-22). 긍정적인 실천이 많아질수록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는 더 가속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자선 실천이 이전에는 자선이란 개념이 없던 로마 사회에 공적인 자선을 제도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교회사가인 피터 브라운(Peter Brown)에 의하면 초기 교회는 교회 안에 가난한 자들의 명부를 관리하였다. 교회는 왕과 귀족들이 회심하여 교회에 맡긴 막대한 재물을 이 명부를 통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회복지를 실천하였다. 이를 통해 교회는 부의 불평등 구조 속에서도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교회가 약자들의 대변자라는 인식을 얻게 하였고, 자신이 어떤 이유로 과도한 처벌을 받게 되었을 때도 교회가 이를 바로 잡아 주어 동해보복법이 올바로 시행되게 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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