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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흔한 오류 여섯 가지
by Mark Jones
2021-01-03
나사렛 예수가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믿음은 지난 2천년 동안 무관심, 음모, 논쟁, 추측, 조롱, 그리고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이런 믿음이 그의 성육신 이후(눅 1:41) 전 세계에 흩어진 신자들로부터 예배와 헌신 그리고 기쁨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숭배하고 높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도 여전히 그 분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무지와 오해 그리고 오류가 남아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정확하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결과는 언제나 다양한 영적 손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려면 무엇보다 구세주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주님을 오해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무지는 결코 영적 성장의 친구가 아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형상(골 1:15)이므로 예수님을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게 된다(요 14:9). 또한 그 누구도 아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바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셨는데, 그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이 세상에 그 어떤 질문이 이 보다 더 격렬하게 논쟁되었던가? 이 세상에 또한 그 어떤 질문이 이 질문처럼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오해를 받거나 또는 아예 무시당함으로 누군가를 지옥의 위험에 빠뜨리고 또는 정확하게 대답함으로 누군가를 영원한 천국을 얻도록 만들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육신이 된 “말씀”이라고 묘사했다(요 1:14). 도마는 예수님을 그의 “주” 그리고 “하나님”(요 20:28)으로 고백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특히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 그리고 그는 “혈과 육을 함께 지닌 자” (히 2:14)라고 표현했다. 사도 바울은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라고 했으며 신성한 이름을 받은 “사람인 그리스도 예수”(딤전 2:5)라고도 표현했다. 또한 바울은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님이자 모든 뛰어난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은 자라고 말했다(빌 2:9-11).이런 증언들 뿐 아니라 성경 속에 있는 더 많은 증언들을 종합할 때 우리는 아주 충격적인 현실을 대하게 된다. 나사렛 예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육체를 입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도 가질 수 없는 특징, 또한 다른 어떤 사람과도 구분되는 신인(God-man)이다. 그는 실로 독특한 분인데 우리기 흔히 쓰는 그런 독특함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그와 비슷할 수 없다는 면에서 독특하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 신앙을 영광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감스러운 오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교회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이 영광스러운 신인(神人)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역사를 망각한 채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동일한 오류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 그는 정말로 사람인가?1세기 후반에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세라피온(Serapion, 190-203)을 통해 그리스도 가현설(Docetism)을 믿는 이단이 생겼다. 그는 예수님의 육신이 “영적”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 아니었고 그냥 겉으로 인간처럼 보였다는 주장을 했다(그리스어, dokeō = “…처럼 보이다”). 그 후 4세기에 들어서는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15-392년 경)가 그리스도에 대한 또 다른 잘못된 견해를 제시했다.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는 부분적으로 그의 견해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아폴리나리스는 영원한 아들인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취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마음(mind)까지 입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반대자들은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이 ‘성육신은 단순히 마음과 영혼이 없는 육체에 거했던 아들의 신성일 뿐이다’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17세기에 들어서자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은 “요즘 들어서 그리스도가 가졌던 인간 본성의 진실성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슬퍼했다. 그럼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우리가 육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참된 인간이셨다.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AD 451)에 따르면 그는 “진정한 사람이고 동일한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다. … 인간다움에서 우리와 동일한데 단지 그는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서술한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다(히 2:17). 이런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성경적 증거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는 배고픔(마 4:2)과 갈증(요 19:28) 그리고 피곤함(요 4:6)과 같은 신체적 반응을 경험했다. 그는 울었고(요 11:35), 통곡했으며(눅 19:41), 한숨을 쉬었고(막 7:34) 또한 신음했다(막 8:12). B. B. 워필드(B. B. Warfield)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지금 나와 똑같은 인간을 앞에 놓고 만나고 있다라는 강한 인상을 받는데에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나지안조스(Nazianzus)의 그레고리(Gregory)가 서신 101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그가 입지도 않은 것을 입은 것처럼 하고 인간을 치유한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속이 필요한 영혼이 있는가? 그렇기에 예수님은 영혼을 소유해야만 했다. 합리적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몸이 있는가? 그렇기에 예수님도 합리적인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몸을 입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다양한 오류와 관련해서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인간으로서 주 그리스도는 그의 영혼의 합리적 능력과 능력, 그의 이해력, 의지 및 애정으로 모든 은혜를 베푸셨다. … 오래 전 사람들이 헛되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의 영혼에 자리잡고 있던 것은 신성한 본성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신성이 그가 행한 모든 일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대신 완전한 사람으로서 그 분 안에 있는 이성적인 영혼이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다 그렇듯이 그의 모든 도덕적 활동의 즉각적인 기초(principle)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도덕적 행위는 진정한 인간적 행위였다. 그는 진정한 인간으로서 성장했는데, 자라면서 힘이 강해졌고 또한 지혜도 더 자라났다. 지혜와 지식이 성장하기 위해서 그에게는 새롭고 더 큰 지식이 필요했다(눅 2:52). 이것은 그가 참된 인간의 본성이자 인간의 유한함을 반영하는 유한한 마음과 영혼을 가졌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필수 조항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순종은 진정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순종이 아니게 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구원에 관한 온갖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 구세주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복음서와 히브리서의 필자들이 수사적 효과를 내기 위해 만든 단지 속임수(phantom)가 아니었다. 그의 피는 우리 몸이 잘리거나 찔릴 때 나오는 진짜 피였다. 핏방울과 같았던 그의 땀은 십자가의 끔찍한 현실에 대해 괴로워하는 영혼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은 인간을 정복한 죄의 영향을 바라보며 느낀, 진정으로 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비극은 오로지 그가 혼자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서만 통해 고칠 수 있었다. 그는 진정한 인간이라는 우리의 본성을 취함으로 우리를 영원히 치유했다. 2. 그는 도움을 받았는가?만일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에 필요한 순종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받았다면(요 4:34; 5:19, 30; 6:29, 42, 57), 그를 도울 가능성이 가장 높은 두 존재는 누구일까? 축복받은 삼위일체 안에 있는 다른 두 격이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와 성령님이시다.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주의 영이 주의 종인 메시아에게 안주하실 것이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그리고 이 사실은 나중에 42장 1절에서 다시 확인되는데, 바로 첫 번째 종의 노래이다.“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61:1도 참조하라)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종(그의 아들)에게 그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를 붙잡는다. 이사야서 세 번째 종의 노래를 읽게 되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사 50:7).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실로 아름다운 삼위일체를 증거하는 구절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많은 언급을 읽는다. 성육신(눅 1:31, 35), 세례(막 1:10), 광야의 유혹(막 1:12; 눅 4:14), 설교(눅 4:18), 기적(마 12:28), 죽음(히 9:14), 부활(롬1:4, 8:11), 그리고 승천과 영광 받으심(행 2:33, 시편 45:1-7)까지, 우리는 성령님이 그리스도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였으며 결코 그를 떠나거나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참된 인간으로서 아버지께 순종하고 아버지를 온전히 기뻐하실 수 있도록 아버지가 내려주신 선물이다. 성경을 보다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냥 자신이 가진 신적 본성에 의존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될 때 진정한 종으로 오신 성육신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에게 주어진 일을 하셨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그를 맞추고 준비시키셨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네가 명령하는 것을 주고,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명령하라.”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관계에 대한 탁월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아들이 순종하는데 필요한 (성령님의) 은사를 주시고,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명령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못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오로지 자신만이 구세주라는 사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면서 사는 참된 종교적인 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3. 예수님도 죄를 지었을 수 있지 않을까?예수님도 분명 유혹을 받았었기에 혹시나 죄를 짓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특히 두 가지가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잘 살펴봄으로 이 문제에 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된다.첫째, 그리스도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진 두 가지 의지(will)의 관계에 관해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는 각각 다른 두 본성에 적합한 두 가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 바로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이다.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신앙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 두 가지 자연적 의지는 불경한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서로 상충되는 게 아니다(하나님이 그렇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가 가진 인간적인 의지는 주저하거나 저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신성하고 전능한 의지에 종속된다.” 예수님의 인간적 의지는 결코 그의 신적 의지에 어긋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이 공유하는 신성한 의지는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신적 의지에 종속되지만 결코 신적 의지가 인간적 의지에 종속될 수는 없다.이것은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지는데, 즉 그리스도가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신격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적 일치는 한편으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묵상하면 할수록 영광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관여하지 않고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가진 인간적 본성은 추상적인 의미로 볼 때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추상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행위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행동하는 인간이지 단지 행동하는 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됨(personhood)은 사실상 신인이기에 그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W.G.T. 쉐드(W.G.T. Shedd)는 이렇게 말했다. “로고스가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한 사람으로 드러날 때, 그 사람은 이 본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 행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으신다면, 그건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지으신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우리가 이론적으로 예수님이 죄를 짓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하나님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된다. 이 세상에 그 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그는 우리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았지만 죄의 가능성조차도 없었다(히 4:15). 그가 받은 유혹의 현실은 그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이나 진짜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영광스러운 선언이기도 하다. 4. 그는 진짜 사람인가?많은 신자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진짜 인간이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영광 가운데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지금도 예수님이 여전히 완전한 인간인지를 물으면 약간 혼란스러워 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가장 큰 오해는 예수님이 승천 후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한테 지금 굳이 인간성(humanity)이 있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오웬은 말했다. “그가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고, 또 같은 이성적인 영혼 뿐 아니라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사항이다.” 신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존재함은 우리가 믿는 종교의 기본 항목이다. 뛰어난 네덜란드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요한복음 1장 14절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다시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그런 육신이 되었다! 보좌에 앉아계신 지금조차도 그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오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이제 와서 “신성화”되지 않았다(즉, 신이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 본성이 “하늘에서 신적인 본성과 결함해서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본성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토록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그의 인간적 본성은 결코 인간이 아닌 방식으로 전달되는 어떤 신성한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상태에서도 항상 참된 인간적인 본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다시 말해서, 영광스럽게 된 몸을 입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간됨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인간적인 공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또한 한때 약함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히 4:15) 약점 때문에 허덕이는 우리를 공감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지금도 제사장이다. 신부된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권능으로 할 수 있는 능력 뿐 아니라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이다. 5. 그는 완전한 하나님인가?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많은 수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인지 여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고 한다. “예수님, 놀라운 분이죠.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임명하신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 250-336년 경)는 아들이자 로고스인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다는 사실을 부인한 가장 유명한 이단자일 것이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했고,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일 수 없다며 그의 참된 신성을 부인했다. 나사렛 예수의 완벽한 신성의 증거, 즉 아버지와 나누고 있는 동질성(동일한 본질)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진리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편을 들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정말로 교회에 혼란을 주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예 : 빌 2:5-11, 히 1:1-14, 골 1:15-20 참조).요한복음의 프롤로그는 교회가 예수가 참 하나님이라는 주장과 관련해서 그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다. 시작하는 단어를 한번 살펴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프롤로그 후반부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라는 놀라운 요점을 말하는데 이 진리는 아마도 1세기를 살았던 유대인이 믿는 가장 믿을 수 없는 구절이었을 것이다. 1절의 “계셨다(was)”는 14절의“되셨다(became)”와 대조되어야 한다. 말씀(로고스)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되신 게” 아니다. 이전에는 그 말씀이 단지 “계셨을” 뿐이었다.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들도 이 진리를 확인하고 뒷받침한다(요 3:13; 6:62; 8:57–58; 17:5; 20:28).나중에 요한은 이사야가 “만군의 주인되신 왕”(사 6:5)을 보았을 때를 언급한다. 이사야 6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후, 그는 이사야가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영광을 주는 법이 없다고 쓰여있다(사 42:8). 그러나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스스로 속았을 뿐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요청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런 일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서 묘사하는데 바로 예수님과 구약의 야훼를 연결하기 때문이다.이런 병행이 가르쳐주는 건 무엇인가? 예수님이 바로 다름 아닌 야훼, 그분이라는 사실이다.본질적으로 아버지 그리고 성령님과 동등한 바로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필연적으로 모든 신성한 속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아버지에게 위엄이 있는가? 아들도 그렇다. 아버지의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하고, 또 변함없이 강력한가? 아들도 그렇다. 아버지가 거룩하고 또 거룩하신가? 아들도 그렇다. 신성한 본성과 관련하여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 그는 단지 영광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무한하고 변함없이 영광스럽다. 6.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인가?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언어(theotokos)는 무엇인가? 이 진술 속에 들어있는 진실이 단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오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아들이 육신이 되었을 때(요 1:14) 그는 보통 인간(human person)이 아닌 단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만을 취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인격 아래에 존재한다. “두 인격으로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자 같은 아들이며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칼케돈 공의회).신학자들은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을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고 불렀다.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결합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인간 본성이 이랬다” 또는 “그의 신적 본성이 그랬다”고 말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적 또는 신적 본성에 따라 이렇게 또는 저것을 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의 시작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로마서 1:3). 주체는 인간, 아들이고 그는 인간적 본성(예: 먹는 것, 눅 24:43) 또는 신적 본성(예: 세상을 유지함, 히 1:3)에 따라 움직인다.따라서 마리아는 추상적인 인간의 본성을 낳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낳았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것이 칼케돈 신조(AD 451)의 가르침이자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정통성 여부를 확인하는 테스트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고한 이유이다. “여러분은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아들이신 하나님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의 피로서 교회를 얻으셨다. 당신은 이제 예수님이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죄인인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죄 없는 사람만이 죄인을 위한 보상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것(“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창 22:17)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는 죄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하나님이 임명하신 메시아이다. 베드로는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달음으로 자신에게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믿음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했다(마 16:16). 이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도 같은 영광을 볼 것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유일한 소망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신에게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신인(神人)이시다. 원제: Christ Confusion: Six Common Errors About Jesu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복음
예수그리스도
성육신
아리우스논쟁
니케아신조
그리스도가현설
신성
인성
칼케돈공의회
칼케돈신조
예배는 어떻게 용서를 이루는가
by 이춘성
2020-12-31
산상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윤리(마 5:23-26)1. 위선 없는 용서는 가능한가?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인인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용서에 대한 에세이를 통해 무조건적인 용서만이 진정한 용서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무조적인 용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꿈꾸며 내가 생각하는 그 자체의 이름으로서의 가치있는 용서의 순수성이란 권력 없는 용서일 것이다. : 무조적이지만 권능이 없는 용서(On cosmopolitanism and forgiveness (Thinking in action). Routledge, 2001, 59.)데리다가 말한 조건 없는 용서란 권력 없는 용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가해자가 용서를 빌었을 때, 피해자는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이러한 권리와 힘을 얻었을 때 용서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혹은 피해자는 미래에 자신이 직접 가해자를 응징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자 한다. 가해자를 응징한 후에 무릎 꿇리고 용서를 빌게 하고 멋있게 용서하겠다는 영화 같은 상상을 한다. 데리다는 이런 것은 용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응징, 복수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주장하는 용서란 극단적으로 말해 가해자가 뉘우치지도 않고, 용서를 빌지도 않았으며, 피해자는 피해를 지속해서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는 용서를 의미한다. 이러한 용서가 가능할까?데리다 또한 이러한 용서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가 조건 없는 용서를 주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용서, 그 자체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그는 용서 속에 있는 위선의 요소를 철저히 경계한다. 많은 사람이 용서라는 형식을 빌려 또 다른 가해와 복수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용서는 화해 없는 용서를 부추긴다. 진정한 용서란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이유가 없는 화해가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용서하지만 화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미워하는 감정이 무감각해지는 것, 이것이 다수가 생각하는 용서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용서의 말을 하지만, 몸은 상대를 증오한다. 피해자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과해 보인다. 그렇지만 화해 없는 용서는 결국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이것이 데리다가 경계한 용서를 위협하는 ‘위선’의 문제이다. 위선은 용서의 거룩함과 순수성을 해친다. 불행히도 데리다는 용서에서 위선을 제거할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위선 없는 순수한 용서는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2. 위선과 이원론예수님은 분노와 살인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라카(바보)’, ‘모레(미련한 놈)’라고 욕과 분노로 결국 살인을 저지른 어떤 사람에 대해서 가르치셨다(마 5:22).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폭력을 행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누구보다 경건하고 종교적이었다. 마태복음 5장 23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은 이 사람에 대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는 하나님에게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 성전으로 가고 있다. 그는 형제를 향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하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용서받고자 하는 이율배반의 태도를 지니고 성전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이 사람의 상태를 표현하는 한 단어가 있다. ‘위선’이다. 그리고 위선의 뿌리에는 기독교 세계관에서 주로 언급되는 이원론(dualism)이 자리한다.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위선의 뿌리인 이원론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실존적 이원론’이다. 이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자신의 잘못, 문제를 인정하지 못하고 모든 문제는 외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높은 자존감 때문에, 스스로 실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도 인정하기 싫어한다. 외부의 평가에 민감하며, 수치의 감정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이는 일종의 완벽주의라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완벽하지도,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자기 자신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이 때문에, 결국 이런 사람은 현실과 다른 자아를 만든다. 이것은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부케(부 케릭터)를 주케(주 케릭터)로 착각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이 사람의 실체를 알기 때문에 수군거리고, 그는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시기한다고 생각하면서 더 깊은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간다. 사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위선적이다. 주케와 부케를 오가면서 현실보다 더 나은 나를 추구한다. 이러한 실존적 이원론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에게나 있다.둘째는 ‘문화적 이원론’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은 열등하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고 영적이며, 신에게 속했으며,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기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손으로 하는 노동은 노예들과 여자의 일이었다. 반면 성인 남자 자유인들은 여가의 시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추구하였다. 폴라톤(Plato)은 이러한 문화적, 사상적 이원론을 주장한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당시 로마는 정치에 있어서는 로마의 고유 스타일을 따랐지만, 문화와 사상은 그리스의 것을 따랐다. 그래서 당시를 그레코-로만(Greco-Roman) 사회라 부른다. 당연히 로마의 통치를 받았던 유대인들도 문화적으로 그리스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그리스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하는 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이 더 가치 있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에 비해서 중요하지 않거나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지금 성전에 가고 있는 이 사람은 단순히 둘 중의 하나의 이원론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실존적 이원론은 모든 인간이 지닌 위선이다. 또한, 문화적 이원론은 당시 그레코-로만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위선이었다. 지금도 이 두 이원론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빈틈없이 완벽한 사람으로 칭찬받고 싶어 한다. 또한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에 두려워할 뿐 아니라 분노한다. 더하여 이를 막기 위해 살인에 준하는 잔인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위선은 진실한 사과와 용서를 불가능하게 한다.3. 우리 주변의 위선스마트폰을 소재로 하여 위선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재규 감독의 “완벽한 타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실존적 이원론의 영향에 얼마나 깊숙이 빠져있는지 깨닫게 해 준다. 멋진 새집에 친구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모두 교수, 의사, 작가 등 사회에서 인정받는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추문과 돈 문제, 거짓으로 얼룩진 어두운 면을 숨기고 있다. 이들은 스마트폰에 온 메시지와 통화 내용을 공개하는 놀이를 시작한다. 예상할 수 있듯이 각자의 위선이 들추어지고 모든 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그러나 영화는 이 모든 것이 상상이었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상상이 아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기독교 변증가인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는 강의 도중에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온종일 녹음기를 옆에 둔 후에 녹음기를 틀어보면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 바로 알 수 있다.”더하여 한국 사회는 문화적 이원론에 깊숙이 젖어있다. 한국 사회는 사농공상이라는 오래된 사회문화 구조에 영향을 받아 왔다. 지금은 덜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교수나 의사, 법조인이나 정치인, 학자를 더 우대하고 노동자들을 열등하게 여긴다. 외적으로는 노동이 중요하다고 말하나, 여전히 건설 노동자, 배관공들, 공장의 하청 노동자의 일은 대기업 사원이나 의사의 소득에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험은 배나 감당해야 한다.이러한 문화 구조와 실존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만 위선자가 아니라고 그 결백을 주장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세상에서 보내며, 기도하며 말씀을 보는 시간보다 세상의 이론과 논리에 더 잘 길들어져 있다. 그런 상황과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에 가감 없이 실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타성에 빠지고, 영적인 무감각증에 빠져 세상의 문화와 개인의 이기적인 실존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 그러다 혹시 모를 죽음에 대한 불안이 엄습하면,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일요일, 하루 중 몇 시간을 예배에 투자하는 것으로 불안을 해소한다. 만약 이것이 우리 신앙의 본모습이라면 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4. 예배의 신비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위의 사람과 같이 실존적 이원론과 문화적 이원론의 위선에 빠진 사람에게도 변화의 기회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다. 이는 데리다가 포기했던, 위선 없는 용서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이 사람이 제사를 드리러 가고 있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 5:23) 이 사람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제사장에게 제물을 건네려 하는 그 순간,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불현듯 생각난다. 하나님 앞에 서니, 자신의 위선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아무 문제없이 경건으로 위장된 위선의 삶을 잘살고 있던 사람에게 이질적인 자각, 각성이 일어났다.처음에 그는 이 이질적인 생각과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단지 자신이 하나님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생각해 보면서, 자신의 제물이나 헌금에 어떤 문제는 없는지, 자신이 혹시 절기나 주일을 잘 지키지 않았는지, 아니면 성전에 오기 전에 나쁜 생각을 한 것은 없는지 점검해 본다. 그러나 이 문제가 어제 옆집에 게으르고 가난한 사람을 향해 무심하게 던진 말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는 그런 욕을 얻어먹어도 되는 그런 무가치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위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잉여 인간 같은 존재, 기생충과 같은 존재에게 정신 차리라고 모진 말 한번 한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뒤에서 욕하지만, 이런 말이라도 해주는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대다수 사람은 이런 경우 예배드릴 때 느껴지는 찔림이 자신이 누군가를 향해 행한 구체적인 사건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가 당연히 들어도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찔림은 그가 만난 특정 사람을 향한 구체적인 말과 행동 때문이라고 가르치신다. 더 정확하게는 그 행동 때문에 상대방이 품게 된 미움과 적개심 때문이다.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멸시-증오-복수’의 시스템을 작동하게 만든 엄청난 사건이다. 한번 시작된 ‘멸시-증오-복수’의 시스템이 무서운 이유는 무한 반복하기 때문이다. 주먹만 한 눈덩이가 돌고 돌면서 집채만 한 눈덩이로 불어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눈사태를 일으키듯 말이다. ‘멸시-증오-복수’의 시스템은 죄악 된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지만, 동시에 종국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핵폭탄과 같다.5. ‘멸시-증오-복수’ vs. ‘회개-용서-화해’그런데 예배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예배는 ‘멸시-증오-복수’가 아닌 ‘회개-용서-화해’의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예배는 이것을 예배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이 예배를 중단하게 만든다. 예배의 요구가 이들에게 너무나 무겁고 감당할 수 없는 요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예수님이 제사를 통해 용서의 요구에 관해서 설명하신 것은 구약의 제사는 ‘회개(각성)-용서-화해’의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사람은 죄를 각성하고 이를 용서받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나온다. 그리고 제사장은 제물을 받아 죄인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낸다. 그런 후에 제사장은 제물을 다 태워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런 후에 사람은 하나님과의 원래의 관계로 돌아간다. 화해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용서-화해’의 시스템이다.이는 하나님과의 우리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화해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영적인 관계만이 아닌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으로 확장된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예배의 완성은 하나님과의 화해와 사람과의 화해가 교차하는 지점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마 9:23-24). 예수님은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깨워 각성하게 만들며, 이때 예배를 잠시 중단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단순한 예배의 중지가 아니다. 이는 예배의 확장을 의미한다. 예배의 잠시 중지는 성전과 예배당 밖으로 예배를 확장해서 우리의 삶의 터를 지성소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가 삶 속에 침투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공적 예배의 기능이다.그리스도인들은 공적 예배 장소 밖으로 나가 또 다른 예배를 마쳐야 한다.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 또는 형제에게 죄를 용서받는 것, 이후에 회복하는 것이다. 마치 성전에서 ‘회개-용서-화해’의 시스템이 제사를 통해 성취되듯이 말이다. 참 그리스도인의 예배란 ‘회개-용서-화해’의 거룩한 시스템이 예배당 바깥세상에서 작동하게 한다. 바울은 이를 산 제물로 드리는 참 예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또한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의 기도(주기도)로 정하셔서 매일, 매순간 기억하고 고백하도록 명령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6. 용서와 예배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철저히 이원론과 위선을 거부하는 예배이다. 하나님과의 화해와 사람과의 화해는 동전의 양면이다. 만약 사람과의 화해가 없다면 하나님과 화해도 없다. 한쪽만의 용서와 화해란 위선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가 없는 세상에서 용서는 위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의 용서는 정치의 차원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도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데리다가 제시하는 순수한 용서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예배 속에서만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는 이를 마지막까지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있는 인간의 종말의 모습이다.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교만을 인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오만함 말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예수님은 ‘멸시-증오-복수’를 반복하는 위선적인 사람은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위선은 자각 증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한 듯,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 하나까지 ‘멸시-증오-위선’의 씨앗이 하나님 나라에 뿌리 내리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위선이 뿌리내릴 땅은 단 한 곳도 없다. 이것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화해하신 성부 하나님의 단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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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까?
by 이승구
2020-12-27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섭리하신다는 것에 이미 포함된 것이지만 인간의 창조와 그들에 대한 섭리를 따로 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전 신앙고백서들도 하나님의 창조 일반에 대해서 말한 후에 다시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말한다. 예를 들어서, 1561년에 공식화된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는 창조와 섭리에 대한 고백 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부터 사람들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만드셔서, 그들의 의지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도록 하셨다”(제 14조 앞부분)라고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따로 언급한다. 다른 신앙고백서들도 대개 그렇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창조를 과연 어떻게 믿는가 하는 것이 잘 나타난다. 과거 신앙의 선배들의 진술을 생각해 보면서 지금 우리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믿고 있는지와 비교해 보겠다.창세기 기록에 따라서 인간 창조를 이해함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과거의 진정한 신앙인들은 인간 창조를 창세기 기록에 따라서 믿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인간들을 땅의 고운 흙으로부터 만드셨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다는 말은 모두 창세기에 기록된 말이다. 창세기 기록을 믿지 않으면 인간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의 고운 흙을 사용하셔서 성경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언급되는 인간을 만드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우리들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그 구성 요소들이 결국 땅의 있는 모든 요소들과 같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과연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매우 정교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그 화학적 구성 물질만 계산하면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아주 정교하고 놀랍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는 매우 놀랍다(Francis Nigel Lee의 ‘성경에서 본 인간_도서출판 토라, 2006’ 제2장 참조).최초의 남녀가 창조의 여섯째 날 맨 마지막 피조물로 만들어졌음을 창세기 1장에서 배운(27절, 31절) 우리는 그 마지막 창조의 과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창세기 2장에서 배우게 된다. 먼저 땅의 고운 흙으로 남자(아담)을 지으시고(창 2:7) 그로 하여금 동물들과 새들의 이름을 짓는 일을 하게 하시고(창 2:18-20), 그 가운데서 자신이 홀로 있음과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자”(우리 말 돕는 배필의 더 정확한 표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시고,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셔서(21절) 그 남자(아담)에게 이끌어 와(22절) 그들이 혼인하게 하시고, 이를 기점으로 하여 이후로는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선언하여(창 2:24) 혼인 제도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음을 창세기 2장에서 배우는 것이다.이 땅에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오셨을 때, 사람들의 이상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질문하신 일이 있다(마 19:4-5). 예수님께서 창세기 1장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말씀과 2장의 말씀을 다 그대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대로 본래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창세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과 같이 간다. 더 놀라운 것은 최초의 사람들만 그렇게 놀랍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오늘도 창조하시는 새로운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는 그 놀라운 인간 창조의 일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최초의 남자(아담과)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혼인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는 말로 명령(creation mandate)하시면서 복주셨다(the benediction of God). 이 명령과 복 주심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생육할 때에 새롭게 창조되는 아기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최초의 창조 때에 땅의 고운 흙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더 인격적인 존재들인 부모될 이들을 사용하시지만 그들이 제2의 원인으로 작용해도 결국 개별적인 인간 생명은 다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자와 난자가 합하여지는 그 때부터를 인간 생명의 시작으로 보며, 결국 자궁 외 임신처럼 어머니와 자녀의 생명 모두가 위태로운 때 외에는 모든 낙태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인간 복제, 그 위험한 도전’ 이승구, 2006). 그래서 우리들은 인간 영혼은 다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적절하다.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영의 아버지”(히 12:9)이시다.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인정함그와 같이 놀랍게 창조된 사람을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한다. 이것도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하신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하신(창 1:26) 말을 따라 기독교에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이 때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을 이전 교부들이나 천주교회처럼 각기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일종의 병행법적인 표현으로 보면서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을 보는 것이 창세기에 대한 유대인 해석자들을 따르는 종교개혁의 전통이다. 그리고 다른 존재가 그렇게 고귀한 명칭으로 불린 일이 없고 오직 사람만이 이런 식으로 창조되었음을 확인하고서 우리들은 오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이는 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단순히 인간은 고귀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직 기독교 전통에서만 그 인간의 고귀성을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만 인권(人權)을 제대로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인간을 진화된 존재로 말하면 아무리 인간의 존귀함과 고귀성을 말한다고 해도 진정한 인권의 토대를 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인권운동은 언제나 한계를 드러내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진정한 인권을 말살하는 결과를 낸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 미명 하에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심지어 억압하며 죽이는 일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는 진정한 인권의 토대로서 하나님 형상 개념이 회복되어야 함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본래 이 형상(imago)이라는 이 말은 결국 ‘반영’이라는 뜻을 지닌다. 여기 피조물인 사람이 있는 데, 그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그럴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부여 받아 지음을 받았다는 놀라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할 때가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성경에 근거해 잘 궁구해서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그의 존재 전체로 드러낼 때가 참사람의 모습이 드러날 때인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회가 말하는 참 인간화이다.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어떠함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잘못 반영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형상의 왜곡하는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deformed image of God)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 온전한 참 하나님 형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하나님을 잘 반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는 분들은 성경 전체를 더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회복된 상태를 표현하는 바울 사도의 말이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되는 것”(골 3:10)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엡 4:24)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것은 본래 사람들이 창조된 모습을 표현하며 하나님을 반영하는 일을 제대로 못했던 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새롭게 되었을 때, 아주 잘 이루어진다고 바울이 말한 것을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바울이 이것을 강조했지만 다른 분들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칼빈을 위시한 개혁파 사람들이 주로 이를 강조하여 말한다고 해서 이것을 ‘하나님 형상에 대한 개혁파의 해석’이라고 말한다. 이 신약 구절의 빛에서 이제 우리들은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개혁파 사람들은 “의롭고, 거룩하게 만드셔서, 그들의 의지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도록 하셨다”라고 강조한다.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하며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에 자신들의 의지를 부합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따라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것에 따라 하나님의 생각을 쫓으며, 그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의식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는 것을 자신들도 선하다고 여기며 사는 것이 하나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하는 것을 본래적인 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라고 해 왔고, 이를 좁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이것이 본래 창조된 인간의 상태였다. 이런 내용물이 채워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할 수 있는 기능을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기도 했다. 본래 사람은 이렇게 폭 넓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오늘날 우리들은?이것을 다 인정하면 참으로 기독교적 인간 창조의 이해를 가졌다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안타까운 일은 인간들이 원래 이런 고귀한 창조 상태(원상태)에서 떨어진 타락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들이 본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타락한 인간의 근본적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에 있는 타락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동물이 아닌 사람이기에 더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고귀성과 명확히 대조되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이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의 참 형상으로 오셔서 구속을 이루셔서 우리로 창조의 그 모습을 다시 회복하면서 이제 다시는 타락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하시는 그 분과 연합하여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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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인간창조
피조물
하나님형상
반영
개혁파
원상태
그날은 지났지만 이교도 기념일이었다고요?
by Kevin DeYoung
2020-12-26
크리스마스에 관해서는 사실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고대 로마인들은 12월 17일부터 7일간 ‘사뚜르날리아’(Saturnalia)라고 하는 겨울 축제의 기간을 가졌다. 그것은 방탕과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 숭배로 채워진 완전한 이교도적 사건이었다. 동지를 기점으로, 로마 황제는 12월 25일을 ‘솔 인빅투스’(Sol Invictus)라는 태양신을 기념하는 축제를 만들었다. 기독교는 로마인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고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 이 이교도의 축제에 교회가 함께 참여하였고 12월 25일에 구세주의 탄생을 끼워 맞춘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은 이미 자리 잡고 진행되던 이교도의 명절을 모방함으로 시작하였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면, ‘사뚜르날리아’와 ‘솔 인빅투스’에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이것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고, 자유주의 기독교인이나 보수적인 기독교인, 심지어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모두 그것이 사실이라 믿는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실이 아닌 사실이 숨어 있다.우선 이교도의 기념일로부터 가져왔다는 데에서 기원을 찾는 것과 거부감과 불편함 때문에 새로운 기념일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찾아보려는 것은 분명히 구별하여야 한다. 기독교의 축제와 이교도들의 축제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동시대에 잘나가는 이교도의 축제를 모방하여 기독교화한 것이란 의미일 수도 있고, 이교도들의 축제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에 기독교다운 새로운 것을 창조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 이후, 기독교인들은 이교도 축제를 변형하여 기독교화 했다. 그들이 지혜롭고 효과적으로 그 일을 진행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확인은 역사적 논쟁거리가 되겠지만, 그 동기는 로마의 이교도들을 멸절시키기보다는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설령 크리스마스가 ‘사뚜르날리아’와 ‘솔 인빅투스’로 인해 12월 25일로 정해졌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독교인들의 크리스마스가 이교도들의 축제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12월 25일의 크리스마스가 이교도들의 겨울 축제로부터 유래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예일대 신학교의 앤드류 맥고완이 “어떻게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가 되었는가”(Bible Review 2002 참조)라는 기고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통해 맥고완의 훌륭한 역사적 업적을 풀어보도록 할 것이다.기독교인들은 언제부터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축하하기 시작하였을까?훨씬 오래전부터 기독교의 기념일로 자리 잡았던 부활절과는 달리,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일을 축하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레나에우스 (130-200)나 터툴리안(160-225) 같은 크리스천 작가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에 관해서는 이야기한 바가 없었고, 오리겐(165-264)는 로마인들이 기념하는 탄생 기념 축제를 이교도의 관습으로 비웃기도 하였다. 이는 크리스마스가 아직 교회력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었고(적어도 널리 퍼지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유사한 로마의 축제일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증거이다.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탄생 일자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세기 후반 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가 내놓은 몇 가지의 제안 가운데는 예수의 탄생일을 추정해 보고자 하는 상당한 호기심이 있었는데, 그 중 어느 것도 12월 25일은 아니었다.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을 처음 언급한 것은 필로칼루스 달력이라 불린 4세기 중반의 연감이었다.수십 년 후, 서기 400년경,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4세기 초기에 북아프리카 기독교회에 출현한 교파)가 12월 25일에 크리스마스 축일을 지켰지만, 1월 6일 주현절(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러 베들레헴을 찾은 것을 기리는 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거부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현절이 후대에 의해 만들어진 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312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동안 일어난 도나트투스파는 로마의 압제자들과 어떠한 타협도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12월 25일의 크리스마스가 이교도로부터 기원하였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맥고완은 도나투스파가 오래된 북아프리카의 전통에 깊이 빠져 있었음이 틀림없고, 따라서 크리스마스의 가장 이른 기념일은 3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추정한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시대보다 앞선 것이며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교도와의 어떠한 교류도 확실하게 피하고자 노력했었다.언제부터 크리스마스가 이교도로부터 기원할 수도 있었다고 논의되기 시작하였을까?1세기 교회의 초기 교부 중 그 누구도 크리스마스와 ‘사뚜르날리아’ 그리고 ‘솔 인빅투스’ 사이의 연관성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물론 독자들은 ‘그들이 그랬을 리가 없지. 그건 정말 황당한 일이었을 테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기독교의 예수 탄생일을 이교도의 기념일로부터 찾고자 하는 목적이 기독교가 더 인기를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나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분명 누군가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맥고완은 “그것은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관계성을 찾고자 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과 같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그레고리 대왕은 601년,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이교도 사원을 교회로 바꾸고 이교도 축제의 의미를 기독교 순교자들을 위한 기념일로 바꾸기를 촉구하는 글을 남겼다.디오니시우스 바 살리비(Dionysius bar Salibi)가 크리스마스는 1월 6일에서 12월 25일까지 ‘솔 인빅투스’와 일치하도록 변경하였다고 말한 12세기까지는 예수의 탄생이 이교도의 축제 기간에 맞춰 정해졌다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 세기가 경과한 후, 비교 종교학의 계몽주의 학자들은 교회 역사의 첫 천년 동안 그 누구도 그런 연관성을 제시하지 않았음에도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동지 축제를 변형하여 채용하였다는 이론을 대중화하기 시작했다.왜 우리는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로 기념할까?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은 일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기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동방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1월 6일에 기념하는데, 아마도 다른 계산 방식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서양에서 12월 25일에 기념하게 된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로 정해지게 된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과 예수님의 잉태와의 연관성 때문이라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이러한 추론을 위해서는 필요한 세 종류의 날짜가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부터 시작해 보자. 서기 200년경,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은 예수님이 니산월 14일에 돌아가셨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로마 태양력으로는 3월 25일에 해당한다. 동방에서는 지역 그리스력에 의해 봄의 첫 달 14일을 기준으로 계산을 하였다. 로마력으로 환산하면 4월 6일이 된다. 누구에게 물어보느냐에 따라 예수님은 3월 25일이나 4월 6일에 돌아가셨다고 말할 수 있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수님은 그가 잉태되었던 날 죽었다는 동일한 추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4세기 북아프리카에서 나온 익명의 기독교 논설에 따르면 “3월 25일은 주님의 수난과 잉태의 날이다. 그날, 그는 고난을 겪었던 바로 그 날 잉태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에서도 비슷한 계산 방법을 이용했다. 4세기경 키프로스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오 주교는 4월 6일, 그리스도가 세상의 죄를 거두어 가셨고, 같은 날 “동정녀의 흠 없는 자궁에 잉태되셨다”라고 주장했다. 이 호기심을 일으키는 전통이 세계의 다른 두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한 추측 이상의 것에 뿌리를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적어도, 맥고완이 관찰한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인들은 창조와 구원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일 년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고 하는 고대 유대의 전승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나, 그가 잉태된 (동일한) 날까지,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날짜를 어떻게 추측할 수 있겠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3월 25일에 잉태되었다면, 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날짜는 9개월 후인 12월 25일 (또는 동양에서는 1월 6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12월 25일이 어디에서 왔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또한 날짜의 역사성에 대해 독단적으로 주장할 수도 없지만), 크리스마스의 날짜가 ‘사뚜르날리아’나 ‘솔 인빅투스’와 같은 이교도적인 기념일과 연관되어 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잉태와 관련되어 있다는 훨씬 더 확실한 증거들이 있다.원제: Is Christmas a Pagan Rip-off?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장명근
복음
변증
크리스마스날짜
사뚜르날리아
솔인빅투스
동방교회
이교도축제
크리스마스기원
터툴리안
크리스마스에 성령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
by Scott Hubbard
2020-12-25
자주 부르지 않는 크리스마스 찬양 ‘천사 찬송하기를’(Hark! The Herald Angels Sing)처럼 크리스마스의 경이로움이 자주 잊혀져간다.아담과 같은 우리 모습 지우시고그 자리에 주님의 형상 만드시네위로부터 오신 둘째 아담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키네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뿐만 아니라 둘째 아담으로 세상에 오셨다(고전 15:47-49; 롬 5:1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 하나님과 같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쓴]”(시 8:5) 모습으로 오셨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언젠가는 구속될 모습으로 오셨다. 마리아의 태에서 형성되신 분이 이제 우리 안에서 그분의 형상을 이루고 계신다(갈 4:19). 그리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아담의 모습 위에 그분의 형상을 만들고 나면 “우리가 그와 같아질 것이다”(요일 3:2).이러한 경이로움은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인간의 삶을 사시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분은 자신의 전능한 신성 덕분이 아니라 완전한 인성으로 섬기고 고난 받고 죽으신 후 부활하셨다. 우리가 찬양 드리면 그분은 “인간으로 인간과 함께 거하시기를 즐거워하셨다” 그리고 진정으로 인간으로서 그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최대한 충만해져야 했다.성령의 사람 이사야는 다가오는 메시아가 성령이 온전히 임할 것이라고 세 번이나 예언했다. 선지자의 말씀에, “그 위에 여호와의 영이…강림하시니라”(사 11:2). 아버지의 말씀으로,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사 42:1)이라고 했다.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으로,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사 61:1)라고 했다.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 모두는 그것이 메시아가 오신다는 예언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잉태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셨다.더욱 놀랍게도 성령은 그분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 교부 바실(Basil)이 말하듯이(Sinclair Ferguson, ‘The Holy Spirit, 37), 성령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동반자”로 섬기고 있다.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은 이에 더 나아가 분리할 수 없는 이 동반자의 10 단계 행보를 나열하고 있다(‘Works of John Owen,’ 3:162-83). 오웬에 의하면, 성령의 동반자 역할은 이러하다.* 마리아에게 임하여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셨다(눅 1:35)* 그리스도의 몸을 거룩하게 하시고 은혜로 충만하게 하셨다(사 11:1-3; 눅 1:35; 히 7:26)* 그리스도가 지혜와 총명으로 자라게 하셨다(눅 2:40, 52; 사 11:1-3)* 그리스도에게 메시아 사역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름을 부어(특히 세례 받을 때에) 주셨다(마 3:16-17; 요 3:34; 눅 4:1; 사 61:1)* 그리스도에게 능력을 부어 주셔서 기적을 베푸는 사역을 하게 하셨다(마 12:28; 행 10:38)* 그리스도를 이끌어 능력 있게 사역하도록 인도하셨다(사 42:4; 49:5-8; 눅 4:1, 14)*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하셨다(히 9:14)* 그리스도의 몸을 무덤에서 보존하셨다(행 2:27; 눅 1:35)*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롬 1:4; 8:11; 딤전 3:16)* 그리스도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다(고전 15:45)그러므로 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하듯이, “태에서 무덤까지, 무덤에서 보좌에 이르기까지, 성령은 성자의 영원한 동반자였다”(37).온전한 인간의 거룩성하지만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의 사역 성취에 왜 성령이 필요했는가?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에 의해 지혜로 충만했고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렇다. 예수님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그분이 그렇게 했으면, 우리는 이런 찬양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위로부터 오신 둘째 아담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키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오셨다는 의미이다그리스도가 우리의 둘째 아담이 되기 위해, 그분은 첫째 아담이 패한 그 전장에서 싸워 이겨야 했다. 첫째 아담이 인간으로서 패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도 인간으로 나셔야 했다. 그분이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그러나] 죄는 없으시니라”(히 2:17; 4:15)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말이다. 동물이나 천사는 아담에게 임한 원죄를 풀 수 없다. 그 임무는 완전한 둘째 아담에게 넘겨졌다.퍼거슨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려면, “그 거룩함은 인류 안에서 나와야만 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이다”(72).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새로이 거룩하게 된 인류의 선구자가 되셨다. 그리고 같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그분의 온전한 인간의 거룩성을 심어주신다.우리가 잃어버린 영광의 회복예수님이 배반을 당하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 예수님을 충만하게 한 바로 그 성령이 이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도 계신다(요14:17). 그리고 마크 존스(Mark Jones)가 말하듯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바로 그 성령이 “그리스도의 삶을 취하여 우리 안에 같은 애정과 열망을 갖게 하시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같아진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우리 인성을 그리스도의 인성의 틀에 부어 넣으신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사시면서 형성하신 그 인성의 틀에 말이다. 그 예들을 살펴보자.* 그리스도가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신다(막 14:36; 갈 4:6)*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를 덧입혀 주신다(눅 4:14; 행 1:8)* 육신대로 살지 않고 그 아들을 본받아 우리도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롬 8:13, 29)*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촉구하신다(벧전 4:13-14)*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 우리도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게 하신다(고후 3:18)* 장래에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우리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고전 15:44; 롬 8:11)세상에서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동반자”였던 성령이 보냄을 받아 “우리 안에 영광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제 우리와 뗄 수 없는 동반자가 되신다(‘The Holy Spirit,’ 92). 크리스마스의 영많은 이들이 이 시기에 “크리스마스 정신”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주로 애매한 선의와 길들여진 친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모호하거나 길들여지지 않은 또 다른 크리스마스 정신을 발견한다. 그분은 참으로 살아 계신 영이며, 주권자의 영이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우리 안의 모든 모습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우리 외부의 모든 모습에는 위험한 영이다. 그분은 세상에 침입하고 경이롭게 일하며 악마를 쫓아내고 죄를 잘라버리며 죽음을 파괴하는 영이다. 능력은 그분의 특징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분의 목적이다. 바람처럼 보이지 않지만 허리케인처럼 강력하다. 때로 그분의 사역이 느린 것 같아도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형성될 때까지 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 말이다.아담과 같은 우리 모습 지우시고그 자리에 주님의 형상 만드시네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여 용기를 가지라.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 그 이상의 의미이다. 크리스마스는 그분이 당신 안에 들어오신다는 의미이다.원제: The Untamed Spirit of Christma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정은심
복음
예수그리스도
크리스마스
성령
동반자
신성
인성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 자유케 되다
by James Cary
2020-12-24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21세기 크리스마스와 1세기 크리스마스가 충돌하는 곳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로맨틱 코미디이다.전체 영상을 여기서 시청하실 수 있고, 각각의 에피소드도 따로 시청할 수 있다.1편: 아웃사이더, 아기 예수를 만나다2편: 위장된 이타주의자, 아기 예수를 만나다3편: 정리광 엄마, 아기 예수를 만나다4편: 불통 아빠, 아기 예수를 만나다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인기영화를 “크리스마스 영화”로 분류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크리스마스에 대한 내용이 있어야 하는가?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만들어져야 하는가? 이에 근거하여, 어떤 이들은 ‘다이 하드’(Die Hard)가 크리스마스 영화라고 주장한다. 그 영화는 사실 인질 상황과 같이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영화이다. (어떤 이들은 보통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과정에 같이 보내면 어색한 사람들과 함께 갇혀 있을 때 느끼는, 마치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1편 아웃사이더 윌의 이야기처럼 그런 느낌일 수 있다.하지만 크리스마스 영화로 성공할 수 있는 안전한 길은 영화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담고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애매한 말은 여러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산타클로즈가 결국 실제 인물이라는 걸 발견하는 것이나, 크리스마스는 재고가 없는 마지막 장난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이나, 소유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 특히 제임스 스튜어트가 모기지 운용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배움을 의미할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그런 영화 말이다. 아닌가?크리스마스 분위기는 공격적이지 않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영화 제작자에게 매력적인 주제이다. 그것은 따뜻함을 주며 산타의 썰매가 공원 위에서 부서져 땅에 떨어지게 재미를 더하게 만들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나 그분의 탄생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것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리 스스로를 믿게 만들 필요가 없다.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서 윌, 클레어, 루스 그리고 켄은 모두 크리스마스 분위기 때문에 이끌린 것이 아니다. 그들은 뭔가 훨씬 더 강력하고 고귀한 것을 얻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들은 말구유 헛간에 들어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언급하신 그들 자신의 두려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분은 결국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들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신다.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잠시 조용히 내년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그리고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실수할 것이라고 미리 아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 심하게 분열된 사회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미래에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우리는 이러한 불안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겨우 유지해 내거나 아니면 그대로 살아가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며 첫 번 크리스마스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탄생하신 왕중의 왕 없이는 우리는 그러한 불안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 때 우리는 “오!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서 소망과 두려움의 모든 세월이 그분 안에서 오늘 밤 충족되도다”라고 노래할 것이다.원제: ‘Meet the Nativity’—and Be Free from Fea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복음
예수그리스도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영화
아기예수를만난사람들
불안
두려움
베들레헴
아기예수
십자가
애통과 위로 사이 성경 속 크리스마스
by Thomas S. Kidd
2020-12-23
블랙 프라이데이를 시작으로 해서 우리가 소비로 행복을 추구하는 크리스마스와 많은 이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크리스마스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 그 차이를 경험했을 만한 나이일 것이다. 이제 크리스마스를 축하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기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지금의 재정 상태로는 크리스마스가 스트레스로 느껴진다. 솔직히 말하면, 교회에 앉아 있는 많은 이들(교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은 이상화 된 크리스마스와 현실의 슬픔, 상실 혹은 불안 사이에서 오는 차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다행스럽게도 성경의 크리스마스가 그 차이를 잘 설명해 준다. 세속 문화 속 크리스마스가 우리를 더욱 실망스럽게 만들지 않도록 크리스천들이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이 때문이다. 성경의 크리스마스는 큰 소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세상의 죄에 뿌리를 둔 슬픔과 고통을 거의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아직은 말이다.성경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살펴보자. 두려움, 위험, 곤란이 그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선포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이 문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가 되어 오지 마을 말 먹이통에 누워 십자가에서 범죄자의 죽음을 맞이하기로 작정되었을 때 시작된다. 그분은 여관에 빈 방이 없어 배척을 당한 채 탄생하셨다. 그분의 부모들은 성전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하려” 했다고 기록되었으며, 이것은 당시 율법에 가장 가난한 자에게 허용된 제물인 것으로 볼 때, 아기 예수는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누가복음 2장에서 경건한 시므온은 아기 예수가 메시아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그는 메시아의 오심이 자신이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의미라는 걸 알아챘다(“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그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마리아의 영혼을 찌르는 칼이라고? 시므온의 송가(the “Nunc Dimittis”)가 크리스마스 예배가 아니라 장례식의 표준이라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보통 동방박사의 방문이 끝나는 마태복음 2장 12절에서 우리는 크리스마스 성구 읽기를 마친다. 하지만 그곳이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가장 어두워지는 곳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메시아를 멸하기 위한 헤롯의 유아 살인 작전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쳐야 했다. 실제로 헤롯은 성경에서 가장 끔찍한 행위인 베들레헴 근방의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태는 이렇게 기록한다.“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8).눈물이 나고 애통하며 위로가 부족한 이들이 있는가? 그것들도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일부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오해하지 말라. 내가 당신의 교회에 지금 가장 우울한 크리스마스를 만들라고 조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역대 최고로 즐거운 크리스마스”로 만들려고 하지도 말라. 성경이 크리스마스에 대해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무얼 하려고 하지는 말라는 얘기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다. 구속 역사에서 놀랍고 중요한 순간이다. 이 성육신은 성도들을 기뻐하고 경배하도록 인도한다.하지만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며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여전히 눈앞에 놓여 있다. 부활절 조차도 모든 문제와 슬픔을 해결하지 못한다.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완전한 해결과 화해는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셔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을] 때(계 21:4)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원제: Grief, the Holidays, and a Biblical Christm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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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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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시므온
헤롯
유아살인
크리스마스
십자가
성탄절에는 성육신을 묵상하자!
by 김선일
2020-12-22
성탄절은 지구촌에서 가장 큰 축제일이다. 축제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성탄축제의 이유는 물론 구주의 오심, 즉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우리 모두의 생일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축제인 것처럼 설레고 즐거워한다. 올해는 코로나의 확산세로 거리마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축제는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한번 되돌아보자. 우리는 왜 성탄을 경축하는가? 사실 예수께서 오신 날이 12월 25일인 것은 365분의 1외에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청교도들은 일부러 성경적 근거가 없는 성탄절을 택해서 메이플라워호의 하적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공동체가 특정한 날을 정해서 구주의 오심을 기억하는 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의례가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날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되살려야 하느냐는 것이다. 대체로 성탄절을 장식하는 이미지들을 돌아보자. 성경에 근거해서 나오는 이미지들은 동방박사, 천사, 목동, 마구간과 동물들,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중심에 계신 아기 예수! 여기서 그려지는 이미지는 매우 소박하지만 평온하고 따뜻한, 그래서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풍경이 물씬 난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탄 찬송의 가사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사실 성경이 실제로 그리는 예수께서 나신 상황은 훨씬 억압적인 상황에서 처절해 보이지만, 예수께서 성탄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전체 구도는 옳다. 성탄에 덧붙여진 부가 캐릭터들(산타클로스, 루돌프 사슴, 스크루지 영감 등)도 초점 일탈의 위험은 있지만, 축제의 기쁨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다만, “울면 안돼”와 같은 인기 있는 캐럴이 성탄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할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제공의 주체인 것도 그렇지만,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골라서 선물을 줄 것이라는 가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렇게까지 동요 캐럴을 심각하게 보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아이들에게 친숙한 동요에서 무의식적으로 스며드는 복음의 왜곡은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과거 교육목사 시절 “울면 안 돼”를 교회 성탄절 행사에서 부르지 말도록 권고한 적도 있다.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 정도로 나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이는 우리끼리의 충만한 흥겨움과 설렘 속에서 성탄의 본질적 의미가 희석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성탄절에 우리의 신성하고 소중한 한 아기의 탄생일을 낭만화시키는 것 이상의 본질적 묵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에 관한 묵상이다. 신학적으로 성탄절은 성육신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는 이 날에 왜 지극히 높으신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비천하고 죄 많은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에 신자들은 마태복음 1장이나 누가복음 2장에 그려진 예수님의 출생 묘사 외에도, 요한복음 1:9-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선언이나 빌립보서 2:5-11에 나오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비우심’이라는 성육신의 의미를 살펴보는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성육신의 의미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설명은 주후 4세기 당시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서 평생 목숨을 걸고 정통 기독론을 수호했던 교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문헌들에서 볼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딜레마를 해결한 신비한 사건이라고 한다. 그의 책 ‘성육신에 관하여’(On Incarnation)는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의 사건과 죽으심-부활의 사건을 하나님의 전체 구원 구도에서 본다. 성육신에 관한한 아타나시우스의 중요한 문장들을 고찰해보자(‘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_St. Athanasius ;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참조).육신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부합되지 않는다. 원래 그분은 육체 없는 말씀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분이 인간의 몸으로 입으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과 선함 때문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하나님의 대리자도 말씀이어야 한다.(2) 말씀이 이 땅에 내려오시게 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죄송해야 한다. 우리의 범죄가 그분의 사랑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고자 우리 중에 나타나셨다. 그분이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것은 우리 때문이며, 그의 크신 사랑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시고 나타나셨다.(4)인간은 악마의 꾀임을 받아 영원한 것에서 부패한 것으로 돌아섰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 부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인간은 본성상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말씀과 연합하는 은혜로만 인간은 본성의 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5)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했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범죄로부터 회개할 것을 요구하셔야 했는가?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범죄를 통해서 부패하게 되었으니 회개를 통해서 인간이 다시 부패함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회개는 신성한 일관성(the Divine consistency)을 막을 수 없다. … 회개는 인간을 그의 본성에 따른 것으로부터 불러내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인간으로 하여금 더 죄 짓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오직 범죄 행위만 문제고, 이어지는 부패는 문제가 안 된다면, 회개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범죄가 행해지면, 인간은 그의 자연적 본성에 부합되는 부패의 권력 아래 들어서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자신들에게 속했던 은혜를 빼앗기게 된다.(6-7)태초에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 외에 누가 은혜와 구원을 베풀 수 있겠는가?. … 말씀이신 하나님만이 부패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성부의 일관된 성품을 유지할 수 있다. … 말씀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아버지와 연합하며 거하셨고 만물에 충만하셨다. 그런데 이번에 그분은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에 들어오셨다. 몸을 낮추셔서 그의 사랑 가운데 우리의 수준으로 낮추셔서 자기를 계시하셨다.(7-8) 위의 문장들에서 엿보이는 중요한 통찰들은, 인간의 타락은 인간을 범죄자로 만들 뿐 아니라 육신을 부패하게 하는 죽음의 법에 종속시킨다. 회개마저도 인간의 부패를 막을 수 없다. 오직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본래 육신을 입으실 필요가 없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낮추사 육신을 입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 말미암은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다. 아타나시우스의 논증에서 전달되는 성육신의 분위기는 인간의 곤경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우심과 긍휼, 그리고 자기를 내어주신 전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다. 성탄절은 바로 이 성육신의 은혜를 기념하는 날이다. 필자가 성탄절에 성육신을 상기하자고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종종 성육신은 우리에게 사역의 원리로 제시되곤 한다. 우리의 성육신이 강조된다. 그래서 선교나 목회 앞에 성육신적~ 이라는 수식어가 유행으로 달라붙는 말이다. 필요하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성육신은 그에 앞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아타나시우스가 말한 것처럼, 성육신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계시하는 사건이다.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초대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대속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사역을 하신다. 우리 스스로도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얼마나 자주 입버릇처럼 말하는가! 이 모든 은혜의 선물이 성육신을 기점으로 이루어졌다. 아타나시우스의 성육신 사상을 신학자 앤드류 퍼브스(Andrew Purves)는 ‘십자가의 목회’라는 저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로 인간을 섬기고, 인간의 일로 하나님을 섬기신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요약한다. 하나님이 정말로 인간이 되신 것은 단회적인 구원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전적으로 인간이시고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대속제물이 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부활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구원 사역을 우리와 연합하사, 우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지속하고 계시다. 언제부터인가, 성육신이 우리도 인간의 숭고한 의지로 모방할 수 있는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모본’으로 전락되었다. 성육신을 많이 언급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친히 죽으신 전적인 은혜와 구원의 사건으로서 보다는 사역자의 바람직한 태도와 원리로 회자되고 있다. 물론 사역자에게 성육신적 태도와 헌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순서를 분명히 하자. 성육신은 인간에게 요구되는 권장할만한 행동이 아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가장 신비롭고 은혜로운 선물이다. 사역자의 성육신은 오직 이미 우리를 대신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이 모든 구원의 신비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을 때만 가능하다. 성탄을 앞두고 우리고 필히 되새겨야 하는 성육신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성탄은 지고지순한 아기의 탄생에 낭만적으로 젖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아지신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자기 계시를 기억하는 시간이다. 이 성육신이야 말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어린 은혜와 열심에 감격하게 하며, 성탄의 기쁨과 감사를 극대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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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사역
야고보서가 기독교적인가 의심하는 당신에게
by Michael J. Kruger
2020-12-20
신약성경 안에는 많은 책이 들어있다. 그 모든 책이 다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 속 모든 책을 다 열심히 읽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은 주로 바울 서신서(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복음서(요한복음 중심으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상 몇몇 책들, 예를 들어 요한3서와 같은 서신서는 거의 읽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을 고려할 때 왜 특정한 책이 신약성경에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 생긴다. 덜 유명한 책들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 걸까? 이런 질문은 야고보서에 이르면 특히 더 심각해진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epistle of straw)이라고 부른지 어언 500년이 지났지만, 야고보서가 도대체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은 여전하다. 물론 이러한 회의론이 진보적 신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마틴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는 한 때 야고보서에는 “신학이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의심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더 미묘하게 지속되고 있다. 때때로 야고보서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은 성경 같아 보이지 않는다. 예수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고(딱 두 번만 이름이 나온다) 주로 하는 이야기는 도덕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뭘 해야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만 주로 한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야고보서는 복음주의자로 훈련받은 우리들의 눈에는 율법책처럼 보인다. 구약 시대로부터 전해진 부적절한 유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불행하게도 야고보서에 대한 회의론은 구약과 신약 시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 각각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자.구약도 은혜에 관한 성경이다야고보서에 대한 이 비판 뒤에 숨어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미국 복음주의권 속에 널리 퍼져있는, 구약 시대가 주로 도덕주의에 의해 정의되었다는 깊은 인식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가혹하고 차가운 율법 준수라는 공로(works)였다. 게다가 내면에 대한 고려는 조금도 없는, 모든 것이 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정말로 야고보가 그런 구약처럼 들린다면 우리는 야고보서와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대부분의 캐리커처 초상화처럼 이런 생각에도 진실의 요소가 있다. 확실히 옛 언약은 의식에 초점을 두었다. 옛 언약은 눈에 보이는 유형과 그림자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옛 언약에는 질서라는 강력한 법적인 측면이 있었고, 십계명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이런 캐리커처에서 간과되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옛 언약도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공로가 아니라 앞으로 오실 구세주를 향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은혜와 구속의 맥락이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사람들이 옛 언약의 본질을 오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이 자주 싸웠던 바리새인들이 옛 언약의 이상을 구체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옛 언약 자체에 맞서 싸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산상 수훈과 같은 주요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반대하는 것은 옛 언약 그 자체가 아니라 옛 언약의 바리새인적인 왜곡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신약도 여전히 율법을 중요하게 취급한다야고보서의 비판 뒤에 있는 또 다른 오해는 신약 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이나 구절은 그 정의상 복음과 정반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야고보서에는 “율법”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또한 야고보서에는 그 어떤 신약성경보다도 많은 명령이 들어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단지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약 1:22). 그는 또한 편애(2:1-4), 혀 길들임(3:1-12), 탐욕(4:2), 교만(4:6) 그리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5:1-6) 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확장된 도덕적 훈계가 들어있는 책 또는 설교를 비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만약에 도덕적인 훈계를 구원받는 수단으로 제시한다면 그건 분명히 비기독교적이다. 그런 경우 확실히 복음에 반대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식의 율법이 주는 위험에 관해서 길게 썼는데, 특히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 즉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쓰인 서신서이다. 따라서 바울은 종종 율법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갈 3:10).그러나 율법을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에 필요한 긍정적인 가이드로 제시한다면, 그 속에는 그 어떤 “비기독교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진정한 신자라면 새로운 마음으로 율법을 사랑하고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한 힘을 성령님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한다(겔 36:27; 롬 8:4).물론 신자조차도 율법이 지향하는 완전한 표준에는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 율법은 친구이다. 우리는 첫 번째 시편을 기억해야 한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 1-2).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반대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복음에 대항하는 각각 다른 적과 싸우고 있을 뿐이다. 바울이 율법주의와 싸운다면 야고보는 반율법주의와 싸우고 있다(약 2:14). 야고보서가 우리의 사역을 형성하게 하라도덕에 대한 야고보서의 초점이 전혀 비기독교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 심오한 사역적 함의(implications)가 수면에 드러나게 된다. 첫째, 야고보서는 율법주의가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바리새인 외에 교회를 노리는 위협은 너무도 많다. 그렇기에 성경에 야고보서가 포함되었다. 야고보는 율법주의 뿐 아니라 반율법주의도 교회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야고보서는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러가지 이유로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단지 믿음만으로 얻는 칭의 설교와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복음과 칭의라는 두 단어는 이제 거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야고보서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하는지를 설교함으로써도 우리가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결국 기독교인이 된다고 해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두는 게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오해했었다. 칭의가 복음의 전부라면 야고보서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성화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야고보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성경이다. 원제: Is the Book of James Really Christi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신학
신약성경
야고보서
마틴루터
율법주의
바울
야고보
야고보서회의론
칭의
성화
야곱의 사다리와 바벨탑, 그 아래 예수님
by Russell Moore
2020-12-18
서평: 리처드 보컴의 새 책 ‘Who Is God?: Key Moments of Biblical Revelation’ 만일 성경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성경적 이미지를 선택하라고 하면, 여러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출애굽기 3장의 불타는 떨기나무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 장면이 복음서에 나오는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변형을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은 야곱의 사다리가 계속 떠올랐다. 왜 일까? 그 이유는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이 새로 출간한 훌륭한 소책자, “Who Is God?: Key Moments of Biblical Revelation”의 한 구절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보컴은 성경의 핵심 장면들 중의 하나가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닥다리 위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꿈을 꾸는 장면(창 28:10-17) 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곱의 꿈에 등장한 것이 실제로 사닥다리가 아니라고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계단 아래에 계신 하나님보컴은 문맥 상 여기서 사닥다리가 계단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한다. 그는 “아마도 그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지은 지구라트라고 알려진 인공 산 옆으로 올라가는 넓은 돌계단일 것이다”라고 본다. 야곱의 조상들의 땅 우르에 유명한 지구라트가 있었다. 그들은 하늘에 닿을 듯이 장대한 산 정상에 신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신들에게 경배하기 위해 진흙 벽돌로 쌓은 계단형 신전을 지었으며, 신들이 거기 유할 수 있도록 하고, 사람들이 신들을 경배하기 위해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을 것이다.”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학자 리처드 보컴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연구를 간략히 제공하고 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핵심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언급하기 위해 성경 이야기 속 유명한 순간들의 의미를 깊이 탐색하고 있다.일반인들이 읽기 쉽고 학자들에게는 중요한 내용을 제공하는 이 책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3개의 주요 사건을 탐구하고 있다: 벧엘에서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품성.각 경우마다, 보컴은 성경 전체를 통해 이 주제를 추적해 간다. 그 다음 그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삼위일체를 계시하시는 세 가지 사건(예수님의 세례, 변형, 십자가 사건)을 탐구함으로써 신약 성경이 어떻게 구약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BAKER ACADEMIC. 128 PP. 창세기에서 우리는 인류가 하나님의 능력에 도달하려 한 바벨탑 사건에서 자기 보호와 자기 영광을 표현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특징을 보았다. 모든 인간의 행동에서 이러한 충동적인 경향을 계속 볼 수 있다. 자연이나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려는 원초적인 시도에서부터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착각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가장 극단적으로는, 치유 받거나 부를 이룰 것이라고 주장하는 번영복음 교사들과 디지털 저장 공간에 자신의 의식을 다운로드하고 불멸성을 확보하고 싶어하는 기술 혁신가 둘 다 이러한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 미묘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보컴은 야곱의 꿈 이야기가 놀라운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계단 꼭대기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계단 밑에서 만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사들이 계단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 하늘과 땅의 소통을 중재하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우회하여 계단 아래에서 야곱과 함께 계신다.야곱이 잠에서 깬 후에 그 곳을 ‘벧엘’이라 명한 이유는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창 28:17)이기 때문이다. 보컴은 그 꿈은 더 원시적이라고 지적한다. “야곱이 발견한 것은 하나님이 야곱 자신이 있는 곳보다 더 특별한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시며 그가 가는 어느 곳이나 그와 함께 계실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고 네가 가는 곳마다 너를 지켜 주리라’(창 28:15).” 핵심은 “이제부터는 야곱이 잠드는 모든 곳이 벧엘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디서든 항상 야곱과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벧엘에서의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는 특수성과 보편성 두 차원 모두에서 신자의 일상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어떤 순간이 있다. 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경험은 단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잠깐 비추는 불빛과 같다. 그리고 야곱과 모세와 엘리야와 거의 모든 성경 인물들과 같이 이러한 경험은 보통 승리했을 때나 강한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의존적이고 취약한 순간에 일어난다. 이러한 순간들은 희귀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특히 하나님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말이다.또한 이것은 전부 예수님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나아간다. 그분의 함께 하심은 특히 베들레헴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셔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분의 함께 하심은 이제 하늘과 땅을 이어 통일하심으로 나타난다(엡 1:10).야곱 이야기의 울림야곱 이야기는 성경 전체에서 울린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가장 흥미롭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했다. 나다나엘의 반응은 TV 화면에서 “너는 재능이 있고 특별해!”라고 하는 말을 개인적으로 들었을 때 ‘네가 어떻게 알아? 날 모르잖아’라고 말하는 나의 반응과 똑같았다.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라고 말씀하심으로 나다나엘을 당황하게 했다.예수님은 나다나엘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에 놀라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0-51).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닥다리 이야기를 바로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중에 그분 자신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계단이지만 그 계단을 오를 수 없으며, 밑에서 우리를 만나실 것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셨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승천 후에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할지를 걱정하는 도마에게 하실 “내가 곧 길이다”(요 14:6)라는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같은 일이 조금 뒤에 요한복음에서 일어났다.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에서 한 여인을 만났을 때 말이다. 그녀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지 - 예루살렘에서인지 아니면 산 위에서 인지 - 에 대해 묻고 싶어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에 대해 숨기고 있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음을 드러내신다(요 4:16-17; 29, 39). 예수님에 대해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라고 묻는 그녀의 질문은 옳은 것이었다. 그렇다 그분은 야곱보다 크셨고 또한 크시다. 그분은 그저 우물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시다. 그분은 단지 계단의 꿈에 나오는 이일뿐만 아니라 계단 그 자체이신 분이다.그리고 물론 모든 우주의 역사는 한 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그때 천지가 하나가 되며,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계 21:3).하나님이 함께 하심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개념은 우리에게 지금 꼭 필요하다.기술은 도움이 되는 도구이지만 신으로서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경제 발전은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는 좋지만 우리의 깊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나뉘어져 있으며 물질적으로는 번성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하다. 우리의 계단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답은 위로 향한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닥다리 아래에 있는 분 - 자신의 임재로 우리의 잠을 방해하시며, 거기에서부터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 - 을 찾는 것이다.원제: Jacob’s-Ladder Christianity vs. Babel-Tower Christia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예수그리스도
하나님
함께하심
임재
벧엘
야곱의사닥다리
바벨탑
불타는떨기나무
지구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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