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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원 마태가 전하는 크리스마스
by 박용기
2020-12-16
로마제국 세무원이었던 마태는 숫자 계산에 능숙했다. 그는 숫자 14를 사용해서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마 1:1-17)를 의도적으로 몇 사람을 누락시키면서까지 14세대, 14세대, 14세대로 구분했다(17절). 마태가 숫자 14를 통해서 전하고자 했던 성탄의 기쁜 소식을 찾아보자. 스스로 존재하는 구원자족보는 한 사람의 뿌리와 근본을 보여준다. 족보의 첫 줄에는 뿌리가 되는 조상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로’로 시작한다. 헬라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아들)’ ‘아브라함(의아들)’ 순서로 이름을 기록했고(마 1:1) ‘그리스도’로 마친다(17절).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그리스도로 마쳐진다(마 1:1-17). 예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 되신다. 예수님의 근본은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구원자 하나님이시다(마 1:21). 14, 14, 14와 영원한 왕히브리문학을 해석하는 게마트리아(gematria) 기법이 있다. 이는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 22개에 숫자 값을 부여하고, 그 숫자 값을 합산하여 단어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알파벳 네 번째는 달렛(D)이고 여섯 번째 바우(W)이다. 달렛, 바우, 달렛(DWD:4+6+4)은 14이다. DWD는 다윗 이름(자음)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 전체를 다윗 이름(DWD)을 기준으로 다윗의 숫자 ‘14’를 3번이나 사용해서 기록했다(17절).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17절).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이후 600년 가까이 흐르면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영원히 견고한 나라를 세우겠다는 다윗 언약은(삼하 7:12-13) 모두에게서 잊혀 갔다. 구원의 소망이 끊어진 듯한 상황에서 마태는 다윗 언약을 상징하는 숫자 ‘14’로 아브라함, 다윗, 포로기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촘촘하게 연결한다. 유대인들은 다윗 언약의 숫자 ‘14’로 족보 전체가 구분되는 것에 놀랐고, 포로기 이후부터 정확하게 14세대 만에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이 태어나심에 전율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다윗 언약의 성취자로 오시는 왕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언약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장자와 형제들 그리고 모든 민족 마태는 첫 번째 14대에서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기록했다. “…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2절). 두 번째 14대에서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기록했다.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11절). 데이비드 갈랜드(David E. Garland) 교수는 세 번째 14대에서는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형제들’의 새로운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 Reading Matthew: A Literary and Theological Commentary). 예수님은 족보에 기록될 수 있는 ‘형제들’을 육체적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형제와 자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모든 민족들’(마 28:18-19)로 확장하셨다. 다말(4절), 라합과 룻(5절), 우리야의 아내(6절)는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여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한 ‘형제와 자매’로 족보에 기록되었다. 다말(4절)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언약들을 듣고, 믿고, 목숨을 걸고 쌍둥이를 낳았다(창 38:26).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수 2:11), 목숨을 걸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정탐꾼 2명을 숨겨주었다.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믿고 목숨 걸고 끝까지 나오미를 쫓아갔다(룻 1:16-17). 밧세바는 아도니야가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한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약속을 믿고 목숨을 걸고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세웠다(왕상 1:17).42 이후에 오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옥스포드 대학 신약학 교수였던 R. T. 프랜스(R. T. France, 1938-2012)는 14숫자에 숨겨진 의미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4는 완전수 7이 두 번 더해진 숫자이다…. 숫자 14가 3번 반복된 숫자(42)는 완전수 7을 6회 반복한 숫자(42)이고, 완전수 7이 7회 반복될 순서를 가르치는데, 이는 아브라함 시대부터 계속된 그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Gospel of Matthew, NICNT). 팀 켈러(Tim Keller)도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14,14,14. 네, 42입니다. 아직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곱, 일곱, 일곱, 일곱, 일곱, 일곱(42). 예수 그리스도는 일곱이 일곱 번째 시작되는 시점이십니다”(2008년 12월 14일, 1994년 12월 25일, 주일 설교). 예수님은 족장 시대(14세대), 왕정시대(14세대), 포로기(14세대)를 지나 하나님 나라 시대로 전환되는 시점에 탄생하셨다. 하나님은 안식년 7년을 7 회 계수한 후, 희년을 선포하여 모든 종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다(레 25:8-10).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 시점을 일곱이 여섯 번째 반복된 후(42), 일곱 번째 시작되는 시점으로 기록했고,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자유와 회복을 상징하는 영적 희년을 선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눅 4:18-19).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자유케 하는 구원자로 탄생하셨고(마 1:21), 깨어진 관계를 회복케 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다(마 1:23).
신약성경
마태
예수님족보
히브리어
영원한왕
구원자
팀켈러
마태복음
Matthew
성탄
욕설, 분노, 살인: 결코 작은 죄는 없다
by 이춘성
2020-11-27
산상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윤리(마 5:21-22)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인류는 폭력을 다양한 형태로 확장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 안에 있는 잔인한 폭력의 실체를 십자가를 통해 고발하였고, 이러한 신의 죽음은 인간 폭력의 부당함을 세상에 폭로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르네 지라르의 십자가에 대한 해석은 전통 교리와는 결이 다르지만, 윤리적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에서 제거해야할 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교묘하게 포장된 자기중심성의 폭력이다. 이제부터 제6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통해 은폐된 자기중심성의 폭력에 대해서 파헤쳐 보고자 한다.1. 제6계명의 원 뜻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다(마 5:21). 이는 십계명의 제6계명이다. 제6계명은 단순한 사고나, 뜻하지 않은 실수로 일어난 살인보다는 의도적인 살인에 적용되는 계명이다. 악의를 품고 죽이는 행위가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에 해당하는 죄이다.구약성경은 살인이, 첫째는 분노, 둘째는 시기와 미움, 셋째는 정의, 공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이 세 요소는 인간의 첫 번째 살인 사건이었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창 5).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 때문에 분노하였다. 그리고 그 탓을 동생 아벨에게 돌리며, 아벨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결국 동생 아벨을 죽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정의롭지 않고 불공정하게 대했다는 자기 합리화가 있었다. 이러한 분노의 성격에 대해서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분노는 단지 감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고도의 이성적인 합리화의 과정이라고 하였다. 만약에 가인이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받지 않는 이유를 수용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면, 아벨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살인과 분노에는 그 행위에 앞서는 더 복잡한 근원 이유가 있다. 이 때문에, 6계명을 단순히 살인이라는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것으로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6계명은 단지 단죄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법이란 처벌 보다는 죄와 고통을 막기 위한 경고의 차원이 선행한다. 하나님도 6계명을 사람들에게 주셨을 때, 살인자를 처벌하기 위한 단순한 의도보다는 살인을 막고,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상대의 생명과 존재를 보존하고 귀하게 여기길 원하셨다. 6계명은 살인을 일으키는 악한 의도인 분노, 미움, 불공정과 같은 사람 속에 은폐된 살인의 씨앗, 그 악한 의도를 제거하는 것을 의도한다는 것이다.2. 악한 의도예수님은 산상설교(21-22절)에서 살인의 세 가지 악한 의도를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가르치시고 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헬라어 원문의 순서에 따라 번역해 보았다. 이를 보면 시의 운율처럼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선조들에게 한 말을 들었다. “살인하지 마라” 그리고 누구든지 만약 살인한 사람은 법정에서 유죄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의 형제에게 분노하는 모든 사람은 법정에서 유죄다.그리고 누구든지 만약 그의 형제에게 말하면, ‘라카’산헤드린에서 유죄다. 그리고 누구든지 만약 말하면, ‘모레’불의 지옥에서 유죄다.본문의 배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유죄”라는 공식적인 판결을 각각의 조건문 뒤에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아차렸다. 예수님은 ‘살인’, ‘분노’, ‘라카’, ‘모레’, 모두 십계명의 제6계명을 어기는 중대한 죄로 가르치셨다. 3. 탐정 예수님위의 각각의 죄목과 판결을 하나의 사건에 대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예수님의 이러한 배열과 접근은 마치 형사나 탐정이 살인 사건의 원인을 찾아가는 추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살인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노다. 그리고 그 분노의 원인은 누군가 어떤 사람을 향해 ‘라카’라 부른 것에서 시작했다. 또 다른 원인은 어떤 사람을 향해 ‘모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보’, ‘미련한 놈’ 등의 뜻의 ‘라카’, ‘모레’라는 욕을 들은 사람이 화가 나서 살인을 했다는 뜻일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답이다.그런데 만약 이들이 모두 동일 인물이라면, 답은 달라진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살인자’, ‘분노자’, ‘라카라고 말한 자’, ‘모레라고 말한 자’가 모두 재판정에서 유죄로 판결을 받았다. 이들이 동일 인물이라면 살인자는 욕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욕을 한 사람이 된다. 이제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살인 동기들의 순서를 거꾸로 배열해서 살인을 재구성해 보자. 먼저 살인자가 살해당한 피해자에게 한 말들을 보면, 살인자는 평소에 피해자에게 ‘라카’, ‘모레’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라카’(רֵיקָא)는 ‘속이 빈’, ‘머리에든 것이 없는’, ‘무가치한’, ‘바보’ 등의 뜻이다. 특별히 이 단어의 시리아어 기원을 보면, 라카는 노예를 부르거나 지칭할 때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라카는 주인이 종을 인간 이하의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면서 “거기, 너 바보 같은 놈” 혹은 “이 쓸모없는 놈”의 뜻으로 사용하였다.또한 ‘모레’는 우리말로 하면 ‘천치’에 가깝다. 신체보다는 정신적 장애를 지닌 장애인들을 빚대어 사용하는 모욕적인 욕설이 ‘모레’였다. 당시에 그리스에서는 장애를 지닌 자녀가 태어나면 들에 버리도록 법으로 정하였고, 고대 시대에 장애인은 사탄의 하수인 등으로 취급받았다. 이러니 이 같은 무지막지한 욕설을 들은 사람이 얼마나 격분하고 원통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 유죄로 판결받은 사람이 모두 동일 인물이라면, 분노하고 살인한 사람이 욕설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욕설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4. 자기중심성의 폭력일제 강점기 동안 일어난 항일 투쟁과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다루었던 “암살”이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중반부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급하게 길을 건너다 일본군 장교와 부딪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장교는 사과하는 여자아이를 향해 감히 너같이 하찮은 존재가 고귀한 자신에게 손을 댈 수 있느냐는 표정과 분노를 발산하면서 아이에게 총을 쏘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적 상상력과 극적 효과를 위한 의도였겠지만, 이 장면은 한편으로는 타락한 인간의 자기중심성의 잔인한 폭력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예로든 살인자는 어린아이를 죽인 장교처럼 자신보다 열등해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에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욕하며, 살인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살인의 실행이 없었을 지라도, 살인에 필요한 조건은 모두 충족된 상태였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속에도 동일하게 자리하고 있다. 5. 생명의 주관자더하여, 죽여도 된다는 최종 판단은 단지 감정에 따른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분노한 살인자의 말하는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살인자, 분노자는 상대에게 자신이 신적 권위가 있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였다. 그 이유는 앞의 21절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의 ‘말하다εἶπον’와 이후에 살인자와 분노자가 형제에게 라가와 모레라고 말하는 것(εἶπον)이 같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eipon(εἶπον)이란 이름을 지어주거나 권위자가 선언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 단어를 하나님이 십계명을 모세를 통해 제정해 주실 때의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로 21절에서 사용하셨다. 그런데 분노자이자 살인자가 형제에게 ‘라카’, ‘모레’라고 욕하면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이것은 이들이 자신을 창조자 하나님처럼 여기거나,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하는 정당한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말씀하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는 선언과 정반대이다. 이들은 사람을 향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제각기 규정하고 판단한다. 이들은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규정하면서 인간 이하의 표현과 욕설을 사용하고, 분노를 서슴없이 표현하며, 이런 분노와 욕을 얻어먹는 것은 저들의 행실로 볼 때, 정당하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의 폭력은 스스로 자신을 거짓 하나님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진정한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향해, 하물며 자신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인간에게도 ‘너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위해 자기 독생자 아들을 죽게 하셨다.6. 무엇이 더 큰 죄일까?마지막으로 살인이라는 행위와 분노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큰 죄일까? 분노하는 것과 남을 나보다 더 열등하게 생각하고 멸시하는 말을 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큰 죄일까? 많은 사람은 그래도 살인이 더 큰 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예수님은 살인과 그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지방의 심판관에게 심판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라카’라고 말하는 자는 대법원이라 할 수 있는 최고 판결 기관인 산헤드린 법정에서 유죄로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 ‘모레’라 말하는 자는 불의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형벌이 더 강해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는 직접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사람을 차별하고 미워하는 태도와 말들, 그리고 사람을 무가치란 존재로 규정하는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말들이 살인 죄 만큼이나 큰 죄라는 것을 의미한다.얼마 전, 네이버에서는 스포츠 기사에 댓글을 잠정적으로 달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전에는 연예인들의 기사에 댓글을 달지 못하게 했다. 그 이유는 한 여자 배구 선수가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가 자살 한 사건 때문이었다. 또한, 이전에 걸 그룹의 한 여자 멤버가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의 분노와 막말이 이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특정한 살인자는 없을지라도, 이는 분명히 살인이다. 또한 우리도 이런 종류의 은밀한 살인에 참여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된 것처럼 사람들을 규정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악한 습관이 이들의 행동과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이런 죄를 살인보다 결코 작다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 윤리는 작은 것을 작게 여기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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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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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지라르
아퀴나스
살인
분노
제6계명
신약성경엔 삼위일체 설명이 없다?
by Greg Lanier
2020-11-26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그 어떤 비유도 다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어정쩡한 비유를 썼다가는 오히려 의도치 않게 오래 전 이단들이 저질렀던 오류에 빠지기 딱 좋다. 주변에 곧 안수를 받을 후보자가 있다면 한번 물어보라. 행여 우연이라도 당신이 “하나님은 세 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주변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또는 다섯 살짜리 자녀가 던지는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똑같아요?”라는 질문에 어떤 식으로 정통 교리를 반영한 대답을 할 것인지, 주변에 아는 부모에게도 한번 물어보라. 이런 개념적 어려움에 더해서 더 큰 문제는 삼위일체에 관해서 제대로 설명하는 신약 성경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이 난 회의론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단어 자체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믿음 좋은 신자들까지도 왜 하나님이 삼위일체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셨는지 곤혹스러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왜 사도들은 어거스틴이 쓴 ‘삼위일체론’(De Trinitat)과 같이 성경에 삼위일체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삼위일체가 그토록 신앙고백에 핵심이 된다면서 말이다.성경은 하나님이 삼위라는 사실을 가르친다신약 성경 저자들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왜 더 많은 기록을 하지 않았는지 조사하기 이전에 삼위일체에 관해 이미 밝혀낸 내용을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약 성경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그의 백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구속사역을 행하시는, 온전하게 드러난 사랑의 하늘 아버지의 모습- 여러 중요한 방식으로 드러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 선재(pre-existence), 고유한 신성한 아들됨의 확정, 구약의 구절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자신에게 적용함, 그를 향한 초기 숭배, 그리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에게 적용함- 기꺼이 행동하고 기도하고 또 생명을 창조하고 계시하는 개인의 대리인으로서 완전한 인격체인 성령님(예: 요 6:63; 행 20:28; 롬 8:26-27; 고전 12:7-11), 비인격적인 에너지장(energy field)이나 생명력이 전혀 아님 - 신성한 삼위 간의 상호 관계(예 : 마 28:19; 눅 10:21-22; 24:49; 요 20:22, 행 2:32-33; 롬 8:9-11).신약 성경 저자들은 우리에게 조직신학 교과서를 남기진 않았지만, 성경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단지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말이다.삼위일체의 숨겨짐이 설명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는 삼위일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게 문제가 될까? 불신자가 정통 기독교를 향해 슬램덩크를 때리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신약성경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삼위일체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데에는 여러 중요한 이유가 있다.1. 카테고리 조절하기신약성경은 구약성경적 개념으로 가득한 “백과사전”을 바탕으로 유대인 저자들이 대부분이 유대인인 청중을 위해서 쓴 글이다. 고대 이스라엘로부터 물려받은 주요 신앙고백은 참되신 한 분 하나님, 즉 유일신 고백이다(신 6:4). 물론 그럼에도 구약은 정기적으로 성령님을 드러내고 있고 또 가끔은 신성한 아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한 신비, 즉 삼위일체적 일신론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고 오순절 날 성령이 부어질 때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따라서 초대교회 당시 수십 년 동안 유대인 청중에게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1980년대 초 십대에게 오늘날 스마트 폰을 설명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카테고리는 분명하게 존재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적절한 조절(stretching)이 필요했다. 너무 빨리 진도를 나가는 경우 생기는 건 혼란이었다(사실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 요 5:18 참조). 따라서 신약의 저자들은 주로 청중에게 알려진 범주 내에서 삼위일체를 점차적으로 그리고 종종 암묵적으로 공개했던 것으로 보인다.2. 기본 지원새 언약을 기록한 주된 목적은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하여금 주님의 왕국을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고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마 28:19-20; 눅 24:47; 롬 1:16-17; 계 5:9–10). 이런 상황은 어떤 주제를 더 광범위하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자들로 하여금 선택과 집중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자들에게 당장 시급했던 네 가지 주제가 떠오른다.- 예수를 메시아로 변호함(복음서의 주요 초점, 예: 요 20:31)- 믿음으로 의롭게 됨(롬 2-5; 갈 2-4; 엡 2-3; 빌 3)- 새 언약 시대에 맞는 윤리(롬 12-14; 고전 3-14; 빌레몬서; 야고보서)- 종말론적 성취(막 13; 살전 5; 살후2-3; 고전 15; 요한계시록)이런 주제는 교회의 주요 과제에서 가장 중요했고 따라서 가장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이런 각각의 주제에 관한 주의 깊은 연구는 신약 저자가 삼위일체적 사고로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 뒷받침하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로마서에서 의로움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가르침은 아버지의 진노(롬 1:18)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행하시는 마음의 할례를 통해(2:29; 5:5) 아들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됨으로(롬 3:25) 가능함을 보여준다. 신약의 저자들은 삼위일체에 대해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철저하게 삼위일체적 사고로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3. 설명 대신 보여주다마지막으로, 신약성경 저자들은 보다 단순한 구약성경 저자들의 접근 방식을 사용해 교리적 주제가 아닌 개인적인 실체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접근하고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훌륭한 선생님처럼 구약성경은 종종 설명보다는 실제로 보여주는 방법을 채택한다. 사실 구약성경에는 핵심이 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설명이라는 면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한 교리들이 여러 개 들어있다. 하나님의 선택과 명령, 인류의 완전한 타락, 대속 속죄, 성경의 교리, 메시아에 대한 소망 등이 거기에 해당한다. 오히려 이런 근본적인 교리는 이야기와 율법, 그리고 시편 및 예언 속에서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모세 같은 사람은 이런 주제 중 하나에 대해 최소한 15 페이지 분량의 체계적인 신학적 내용을 서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선택한 방법은 이스라엘 민족의 삶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적인 말씀과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라는 근본적인 진리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한 장의 성경 또는 몇 개의 구절을 갖는 대신, 우리는 성경 전체에 걸쳐서 삼위일체가 드러나는 사실을 놓고 기뻐해야 한다. 삼위일체와 관련한 이런 접근법은 신약성경에서 너무도 분명하다. 사도들이 머리를 맞대고 조금만 고민하고 성경을 썼다면, 우리는 삼위일체에 관해 아주 쉬운 답 또는 아주 확실한 비유를 하나 건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경우 우리는 성경 모든 곳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며 모든 것을 만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인적인 실체를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고맙게도 우리는 이제 삼위일체를 교리가 아닌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바라본다. 그럼으로 우리는 단지 몇 페이지가 아닌 성경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보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원제: Why Don’t the New Testament Authors Explain the Tri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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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개혁적 알미니안을 한번 만나볼까?
by Jeff Robinson
2020-11-19
매트 핀슨(Matt Pinson)이 강연에서 여러 번 쓴 용어 하나가 며칠 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건 “개혁적 알미니안”이었다. 마치 점보 새우, 가열된 얼음 또는 좌파 보수주의처럼 이 말은 모순적으로 들린다. 매트 핀슨이 “개혁적 알미니안”이라고 말했을 때, 나름 훈련받은 교회 역사가로서 나는 그가 개신교 종교 개혁에서 나온 여러 인물 중 한 사람인 야곱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의 가르침을 긍정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아르니미우스의 신학은 오늘날 나름 인기를 얻고 있는 현대 알미니안 신학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 이런 내 추측이 맞는 걸까? 나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고, 아래 인터뷰는 내가 매트 핀슨에게 던진 질문의 결과이다. 내슈빌에 있는 웰치 대학(Welch College, 자유의지 침례교)의 총장인 핀슨은 예일대 신학 과정(Yale Divinity School)을 졸업했으며 벤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Perspectives on Christian Worship’, ‘Four Views on Eternal Security’,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Arminian and Baptist: Explorations in a Theological Tradition’을 포함한 수많은 책의 저자 또는 편집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대 아르미니우스의 교리와 오리지널 아르미니우스의 교리 등을 대조하면서 어떻게 같은 사람이 동시에 개혁주의면서 알미니안이 될 수 있는지를 토론했다. “개혁적 알미니안”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점점 더 많은 알미니안이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로 알려지고 있는, 비 웨슬리적(non-Wesleyan)인 다양한 알미니안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에서 이 운동의 주류는 자유 의지 침례교 교단(Free Will Baptist denomination)에서 발견되며, 그 기원은 17세기 영국 일반 침례교 운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접근을 지지했던 초기 신학자 중에는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및 토마스 그랜썸(Thomas Grantham)과 같은 17세기 영국인이 있다. 20세기 들어서 이런 입장을 지지한 사람으로는 자유 의지 침례교 신학자인 르로이 포린스(Leroy Forlines)와 로버트 피키릴리 (Robert Picirilli)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대부분의 현대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좀 더 정통 아르미니우스 신학에 가까운 알미니안주의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포린스와 피키릴리는 토마스 오덴(Thomas Oden)과 같은 일반/자유 의지 침례교 전통을 벗어난 학자들과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가는 복음주의자는 칼빈주의-알미니안 사이의 토론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 개혁적 알미니안은 성경이 예정, 은총, 자유 의지에 관한 전통적인 칼빈주의적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부분의 알미니안이 거부하는 개혁주의의 전통 교리인 전적 타락, 형벌적 대속, 칭의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그리고 (전적이 아닌) 점진적 성화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개인들에게 또 전반적인 칼빈주의-알미니안주의 간의 대화에 있어서도 개혁적 알미니안이 가진 이런 사상의 흐름은 여러 유익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개혁주의 복음주의자 대부분이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별로 읽은 적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의 글을 좀 더 접하게 된다면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우리의 견해도 바뀔까? 대부분의 알미니안 복음주의자들이 칼빈의 글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대부분의 칼빈주의 복음주의자들도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거의 읽지 않는다. 이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데,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이랬던 건 아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공동체에는 과거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편협함이 있는 것 같다. 기존에 고수하는 구원론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만 간다. 내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 구속, 성화, 기독교 세계관, 변증론과 인식론, 문화적 참여, 종말론 등과 관련하여(심지어 세례와 성령의 은사와 관련한 부분까지도) 일부 칼빈주의자들과 실로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이런 모든 공통점은 단지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종종 무시되는데, 그건 내가 칼빈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나는 무조건적 선택을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칼빈주의자만 이런 식인 건 아니다. 알미니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아 세례,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 및 성령의 은사와 관련해선 서로 간에 아무리 다른 의견을 가지도 있더라도 같은 알미니안끼리는 서로 협력할 수 있다. 그건 칼빈주의자끼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알미니안과 칼빈주의자 사이에서는 그런 협력이 거의 불가능하다. 달리 말해서, 여전히 칼빈주의자냐 아니면 알미니안이냐라는 편가르기는 같은 서클 안에서 복음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이야 말로 피차 상대편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상대편 신학을 피력한 책을 읽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는데, 이는 실로 건강하지 않은 현실이다.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통해서 칼빈주의자가 만나게 될 사람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항상 읽고 인용하는 기존의 칼빈주의 책을 쓴 저자들과 매우 흡사한, 복음을 향한 뜨거운 심장 박동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애초에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칼빈주의자가 가진 영성 및 교리적 신념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한 인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구원이 불가능한 전적 타락한 인간, 오로지 믿음만으로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 그리스도의 대속적 형벌의 의미, 신자가 어떻게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성화되는지, 율법주의 대 율법폐기론 등등에 관해서 칼빈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학을 만나게 될 것이다.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는 최근 내가 쓴 책 ‘알미니안과 세례자(Arminian and Baptist)’에 대해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칼빈주의자들은 개혁주의 알미니안을 통해서 ‘있는지도 몰랐던 사촌들’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를 읽게만 된다면,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비록 그가 예정 및 그와 관련한 교리에서 좀 더 칼빈에 가깝길 바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가졌던 선입관을 깨도록 만드는 완전히 새로운 아르미니우스를 발견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교수님이 속한 대학은 자유 의지 침례교 계통인데, 그 교단의 중요 특징이라면 어떤 것이 있는가?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강조한 사항에 첨부해서, 자유 의지 침례교는 교회와 관련한 교리에서 대부분의 다른 침례교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회의나 협회를 진행할 때 지역 교회 간의 상호 의존성 강화, 침례를 받지 않은 신자들과도 성찬을 나누는 것(물론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침례가 의무이다), 병자에게 기름바름과 같은 보다 다양한 전례 의식, 성도들의 발을 씻기고 (요즘보다는 과거에 주로 더 행해졌지만) 새로 침례받은 신자에게 기존 신자들이 손을 얹고 기도하는 행위 등등을 한다. 하지만 칼빈주의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의식이 비록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일 지 몰라도, 그렇게까지 이상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런 의식은 개신교, 가톨릭, 동방 정교회 등 대부분의 교단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웨슬리 계통 알미니안 신학과 개혁적 알미니안 신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개혁적 알미니안 구원론은 보다 더 광범위하게 개혁주의 범주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웨슬리 및 성결 모델(Wesleyan and Holiness models)과는 다르다. 성결 운동에서 발전한 웨슬리식 알미니안 신학과는 달리,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는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의 원죄와 급진적 타락을 이겨낼 수 있다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입장은 속죄에 대한 철저한 개혁주의 및 형벌 대속을 통한 구원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이며 또 동시에 수동적인 순종이 칭의를 통해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주의 알미니안인들은 대부분의 알미니안주의가 지향하는 완전주의, 완전 성화, 그리고 위기 경험 지향이라는 점에서 많이 다르다. 그들은 또한 기독교인들이 오로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인내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구원에서 배도할 수도 있고, 그 결과 구원을 잃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되지만, 이런 배도도 오로지 믿음을 저버릴 때에만 발생한다고 믿는다. 이런 관점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배도에 관한 개혁적 알미니안의 개념은 개개인이 개별적인 죄를 지음으로써 은혜에서 반복적으로 떨어질 수 있고, 또 동시에 회개를 통해 반복적으로 은혜의 상태로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웨슬리적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는 개혁적 알미니안주의가 현재의 알미니안-칼빈주의 사이의 대화(또는 대화의 부족)를 다시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는 속죄, 칭의, 성화, 영성의 본질에 대한 개혁주의 가르침이 가진 은혜 지향적 입장을 지지하는 동시에, 거기에 신성한 구원의 은혜에 저항하는 예정과 (개종 전후의) 자유에 대한 알미니안의 입장을 결합한 것이다. 그것은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또한 은혜를 붙잡고 있는 독특한 알미니안주의를 제공한다. 훨씬 대중적인 수준의 복음주의적 알미니안주의가 정작 아르미니우스보다 오히려 웨슬리나 성결 운동의 믿음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지? 불행하게도 그렇다. 가장 인기있는 알미니안주의는 사실상 웨슬리보다 피니(Finney)에 더 가까운 준 펠라기안(semi-Pelagian)이다. 이제 웨슬리는 오히려 우리보다도 더 개혁주의 신학에서 멀어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발전한 피니와 성결 운동만큼 멀어진 건 아니다. 웨슬리는 완전한 형벌 대속과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교리를 거부했다. 그는 신자들이 회개를 하지 않을 때 반복해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성화와 영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보다 더 위기 경험과 완전성에 대한 것이었다. 내 생각에 웨슬리는 율법폐기론에 반발했기 때문에 율법주의로 방향이 바뀐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후기의 피니보다는 훨씬 더 개혁주의자와 비슷했다. 특히 원죄에 대한 그의 신학은 그로 하여금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펠라기안주의에 반대하도록 만들었다. 칼빈이 사랑하고 즐겨 불렀던 복음으로 풍부한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를 생각할 때, 그 어떤 칼빈주의자라고 해도 “나는 사실 칼빈주의자와 별반 다른 게 없다”라고 말한 웨슬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웨슬리의 신학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알미니안주의 속에 숨은 개혁주의 요소를 찾아내는 나의 연구 경향 때문에 종종 사람들은 내가 웨슬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나는 칼빈을 사랑하는 만큼 웨슬리를 사랑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얼굴이 담긴 큰 액자 두 개를 사무실에 나란히 걸어놓을 생각이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웨슬리의 신학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했다. “칼빈과 웨슬리의 잘못을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고쳐야 할 잘못을 찾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칼빈과 웨슬리도 틀릴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큰 경건함, 더 뜨거운 불, 더 넘치는 은혜, 더 불타는 사랑, 더 강렬한 이타심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칼빈과 웨슬리의 결점을 찾고 비판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 내 경우를 말하자면, 태양 속의 반점을 보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게 여전히 태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태양 앞에서 내가 들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초라한 촛불이라는 사실에 흐느낄 뿐입니다.” 교수님은 칼빈주의적 개혁주의 전통에 근거한 동시대 및 고전 작가와 신학자의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그런 책을 좋아하는가? 나는 칼빈, 오웬(Owen), 번연(Bunyan), 에드워즈(Edwards), 호지(Hodge), 스펄전(Spurgeon), 카이퍼(Kuyper)와 같은 역사적인 칼빈주의자들의 책을 좋아하는 것처럼, JI 패커(JI Packer), 칼 헨러(Carl FH Henry),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 러셀 무어(Russell Moore), 마이클 헤이킨(Michael Haykin), 마크 데버(Mark Dever), 해리 리더(Harry Reeder), 데이비드 도커리(David Dockery), 리곤 던컨(Ligon Duncan), 알 몰러(Al Mohler), 로날드 내쉬(Ronald Nash), 칼 트루먼(Carl Trueman), 나단 핀(Nathan Finn),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 나는 현재 그의 책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 of Christ을 읽고 있다), 필립 젠슨(Phillip Jensen) … 등등 어디에서 멈춰야 할 지 모를 정도로 현대 칼빈주의자의 책을 읽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역사적인 개신교 정교회의 풍부한 유산을 소중히 여기며, 속죄받고 성화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개혁적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풍부한 복음주의적 영성을 찬양하며, 오늘날도 교회에서 은혜만을 통한 구원으로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개혁주의 인식론/변증법을 가르치고, 잘 짜여진 기독교 세계관과 그 세계관에 참여하는 문화의 중요성을 믿을 뿐 아니라 땅 끝까지 이르러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가 주신 큰 사명에 인생을 헌신하고 있다.개혁 교회 목사들이 읽어야 할 알미니안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누가 있을까?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알미니안 신학과 단지 그 신학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자들에 향해서 불공정한 풍자 만화를 그리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개혁주의 목사들이 읽어야 할 건실한 알미니안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적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몇 명만을 인용하자면, 르로이 포린스, 로버트 피키릴리, 스티븐 애쉬비(Stephen Ashby, 개혁적 알미니안)을 들겠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현존하는 웨슬리안 작가인 아지츠 페르난도(Ajith Fernando), 토마스 오딘(Thomas Oden), 로버트 콜먼(Robert Coleman), 티모시 테넌트(Timothy Tennent)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위에서 언급한 칼빈주의 저자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 작가들 뿐 아니라 아르미니우스 자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알미니안 저자들의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칼빈주의자들이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불공정한 풍자 만화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원제: Meet a Reformed Armini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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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적알미니안
아르미니우스
칼빈주의
존웨슬리
찰스스펄전
존칼빈
알미니즘
준펠라기안
복음, 정말로 궁금한 것에 답하게 하라
by Tim Keller
2020-11-13
언젠가 나의 선생님 한 분이 학계 저명인사인 독일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젊은 시절, 그가 신학교 교수로 근무할 때에 틸리히의 공개 강의 후 토론 진행을 맡았다고 한다. 학생들이 질문을 시작하자, 초청 강사인 틸리히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번번이 학생들의 질문을 재구성하고 수정하는 것이었다.그는 결국 용기를 내어 “틸리히 교수님, 그것은 그 학생의 질문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실제로 질문하는 내용에 대해 답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요청했다. 틸리히는 즉각적이고도 단호히 “아니요. 그들이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 부분적으로 맞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식의 대응은 학생들이 틸리히를 완전히 배척하고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예수가 답이다, 그런데 질문이 무엇이었더라?댄 스트레인지(Dan Strange)는 그의 책 ‘복음과 문화사이 ’(Plugged In: Connecting Your Faith with What You Watch, Read, and Play, 두란노)에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위에 예로 든 틸리히와 같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예수가 답’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의 영향에는 귀를 막고 있어서 때론 사람들이 묻지도 않은 것을 대답하기도 한다. 물론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있기에 ‘죄인 된 내가 어떻게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지낼 수 있을까?’라는 가장 궁극적인 질문을 하지는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댄 스트레인지가 이 책에서 보여주듯,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반 은총을 통하여 ‘나는 누구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진정한 기쁨과 성취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라는 제법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모든 문화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바탕으로 다양한 형태의 ‘매체’(보고, 읽고, 재생할 수 있는)를 쏟아 낸다. 댄 스트레인지는 내가 본 가장 쉬운 접근 방식으로 기독교적인 문화 분석 수행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우리에게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해 다양한 매체로 이루어진 문화 속에서 특정 답변을 구분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다음, 그런 답변에 대해 비평하되 기본적인 그들의 열망을 확인하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궁금증을 해소한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진정한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예수께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보여준다.전복적 성취*여기에서 사용된 방법은 20세기 선교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것이다. “전복적 성취”라는 명칭은 그 접근법을 완벽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복음이 기본적인 인간의 갈망과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종교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동시에 그들이 가진 갈급함을 해소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거짓 우상에 대하여 지적하고 비평하여야 한다. 전복적 성취는 종교 다원주의 또는 종교 무관심 주의가 보이는 오류도 피해 나간다. 죄를 일반적인 비난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문화 가운데에 나타날 수 있는 우상의 형태와 연관 지어 다룬다. 구원은 그냥 선포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우상을 향해 만족을 얻고자 하는 바를 대체할 수 있는 구체적 희망을 제시하여 줄 수 있어야 한다.댄 스트레인지는 이러한 방법을 21세기로 가져옴으로 독자들이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바울이 성경에서 보여준 방식이라는 것을 그는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그러나 이 접근법은 단순히 복음주의적인 대화를 위한 전략만은 아니다. (확실히 복음 중심적인 대화의 전략이기도 하겠지만….) 댄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세상에서 매일 생성되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와 매체들을 이해함으로써 세상을 위해 충실하게 사는 것이 아닌 세상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방법을 보여준다.더욱이 그는 설교와 교육, 제자 훈련 및 대화 등 우리의 모든 의사소통을 포함하는 접근 방식에서도 널리 적용할 수 있는 ‘전복적 성취’를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나는 절대적으로 옳고 당신은 완전히 틀렸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상처 주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얼마나 현대적이며 우월한 종교인지를 보여주라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인정과 반박을 모두 포함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일반적인 노력이 실패하였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고난의 의미, 주변 환경에 영향받지 않는 만족감, 사랑과 공동체를 훼손하지 않는 자유, 스스로 벗어나 망가지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자신을 세우는 정체성, 올바른 정의에 대한 생각,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죽음까지도 담대히 받아들일 수 있는 희망 등에 관한 것을 복음적 용어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우리 주위에는 세속적이고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서 복음 선포를 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이나 그들의 질문과 연결하도록 제안하는 책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기독교 이후의 서구 문화에서 그저 도피자로 살든지 아니면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알려 주는 책들도 있다. 이 책, ‘복음과 문화사이’는 실제로 이를 실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귀한 책이다.* 팀 켈러의 저서 ‘도시를 품는 센터 처치'(Loving the City, 두란노, 오종향역)에서는 ‘Subversive Fulfillment’를 ’전복적 성취’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리 용어로 표현하기에는 다소 제약이 있는 ‘전복적 성취’란 표현은 갈망하는 바를 만족하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법이나 생각하지 못한 대상을 통해 만족하게 하는 경우를 말한다. 복음이 비기독교인들에게는 그들의 갈망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충분히 충족시키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역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ian, Answer Questions People Are Actually Asking번역: 장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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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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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복적성취
팀켈러
매체
그리스도의 못자국은 영원하다
by David Mathis
2020-11-02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소중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죽으셨을 때와 같은 몸으로 부활하셨다. 하지만 그 몸은 다시 살아난 부활체였을 뿐 아니라 변화된 몸이었다. 여전히 사람의 몸이었으나 영광스럽게 된 몸이었다. 썩을 것으로 심었으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고전 15:42). 닫힌 문과 벽도 통과할 수 있는 몸이었으나(요 20:26) 생선 같은 음식도 드실 수 있었다(눅 24:42). 갈보리에서 죽임을 당한 그의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고전 15:44). 완전히 새롭게 된 그의 몸이었기에 그와 가장 가깝던 이들조차도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눅 24:16, 27; 요 20:14; 21:4). 하지만 머지않아 그가 실로 예수님임을 알아보았다(눅 24:31; 요 20:16, 20; 21:7).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멋진 사실 중 우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그의 못자국에 대한 것이다.내 손을 보라부활 후 변화된 몸을 입었지만 여전히 동일한 예수님 자신임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줄 때 예수님은 주로 그의 못자국을 보여주셨다. 누가는 예수께서 처음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 24:37) 라고 기록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못자국을 보여주셨다.“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눅 24:39–40)사도 요한도 예수께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요 20:20) 라고 기록한다. 요한은 곧이어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 20:24) 라고 쓰면서 도마의 의심에 대해 묘사한다. 도마는 예수님의 못자국을 직접 봐야만 믿을 수 있겠노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셨고, 여드레를 기다리신 후에 도마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마침내 다시 찾아오셨을 때 도마에게 못자국을 보여주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못자국 속의 보화누가나 요한이 그리스도의 못자국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그의 부활체에 못자국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예수님의 완전케 된, 새로운 차원의 육신에 못자국이 있다는 것은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 사실, 처음에는 못자국이라는 것이 어떤 결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는 썩어질 몸이었으나 부활 후에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개선되었기에, 이 땅에서 당한 고난의 흔적이 부활체에서는 남아 있지 않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 아닐까?그의 아들의 영원히 영광스럽게 된 몸에서 못자국을 없애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었을 거라 지레 짐작할 수 있겠지만, 못자국을 그대로 두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피부가 큰 상처로부터 회복된 후에는 흉터가 남도록 만드셨다. 어떤 흉터는 별 의미 없는 것일 수 있으나 어떤 흉터에는 얽힌 사연이 많을 수 있다. 어떤 상처였느냐에 따라 그 상처가 남긴 흉터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기도 하고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누가와 요한 모두 예수님의 부활체의 못자국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한다는 것은 그의 못자국이 수치가 아니라 영광이라는 뜻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영광스럽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못자국에 담긴 우리가 영원히 누릴 보화는 무엇일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라먼저, 예수님의 못자국은 그가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그는 완전히 인간이 되신 분이고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히 2:17)을 경험하심으로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우리처럼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의 못자국은 그가 인간의 고통을 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목회자요 시인이었던 에드워드 쉴리토(Edward Shillito, 1872–1948)는 제1차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했으나 인간이 겪는 고난이 무엇인지 잘 아시는 “못자국을 지니신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너무도 고요한 하늘은 우리를 무섭게 하고온 우주에 우리 쉴 곳은 없네상처가 쓰라릴 때 나의 위로는 어디에 있나?못자국 지닌 예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 받기로 자발적으로 선택하셨으므로 그의 못자국은 자신의 사랑,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찬송가 작가인 매튜 브릿지스(Matthew Bridges)는 못자국에서 그 사랑을 보았기에 1851년에 쓴 찬송시를 통해 “사랑의 주님”께 면류관을 드렸다.‘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그 손과 몸의 상처가 영광 중 빛나네’죽임 당하신 어린 양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못자국은 이제는 아문 상처이고, 그 못자국은 예수님의 최종적 승리를 우리에게 영원히 선포한다. 요한계시록은 그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주는데, 우리의 구주, 즉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하늘의 중앙에 서시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의 보좌에 앉으신다(계 7:9–10, 17; 22:1, 3).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 5:6)부터 시작하여 모두 스물여덟 차례에 걸쳐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다. 천국에서 찬송하는 천사들은 그 앞에 엎드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고 선포한다. 또한 생명책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계 13:8 및 21:27)으로 묘사된다.그의 고난과 그가 흘리신 피를 결코 잊지 않는 그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못자국을 지닌 양, 그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어린 양으로 영원히 송축한다(계 7:14). 또한 그의 백성들은 어린 양의 여전히 선명한 못자국을 통해 흘려진 피로 우리의 대적을 이긴다(계 12:11).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못자국을 보며 영원히 그를 경배할 것이다. 그의 못자국은 구속된 이들의 눈에는 결코 수치가 아니다. 이는 구원 받은 죄인들을 위한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영광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His Scars Will Never Fade: The Wounds Christ Took to Heaven번역: 이정훈
복음
부활
보화
어린양
도마
매튜브릿지스
부활체
사도요한
면류관
요한계시록
섭리 아래 사는 성도들의 올바른 태도
by 이승구
2020-11-01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소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그 정확한 함의를 다 생각하지 않고 섭리에 대해서 말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섭리에 대해서 말할 때 먼저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면 빠져 들어 갈 수 있는 잘못된 태도들에 대해서 말하고, 그것을 피하면서 바르게 생각하고, 그런 바른 생각에 따라서 참으로 섭리 아래서 사는 성도들의 바른 모습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에 따라서 우리들도 먼저 섭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의 있을 수 있는 잘못된 말과 태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섭리를 대하는 잘못된 태도들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니 하나님이 죄를 만든 분이라고 단선적으로 생각하며 말하는 일을 들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이다”(the author of sin)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자신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하나님은 죄를 비롯해 모든 것을 다 만드신 분임을 강조해야만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거의 결정론이나 운명론과 비슷한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외국에도 있고 우리나라에도 있어서 항상 사람들을 많이 오도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잘못된 태도를 지닌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가든지(즉, 불신의 모습으로 가든지, 결정론적 입장에로 가든지), 이런 생각은 생각이 너무 단선적이다. 이런 입장을 가지는 분들은 타락도 결국은 인간을 구원하는 선한 결과를 낳았으니 그것이 적극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하면서 타락이 결과적으로 좋은 것이었다는 함의를 전하려고 한다. 소위 ‘하이퍼 칼빈주의자’(Hyper-Calvinism)들이 여기에 속한다(‘코넬리우스 반틸’, 2007, 98-103쪽).섭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잘못 생각하는 또 다른 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들이 다 설명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면서 말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소위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은 결국 이상한 결론을 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입장의 궁극적 문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헤아릴 수 있고, 심지어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다가 사람들의 저항을 얻게 되는데, 이를 피한다고 하면서 결국 하나님도 전지적 관점을 가질 수 없는 분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이 겸손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영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실 수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며,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이 계시한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어떤 것은 알지 않기로 하셨고, 결정하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말하는 소위 ‘열려진 유신론’, ‘개방된 유신론’(Open Theism)도 이런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우리 이웃의 신학들’, 2014, 141-151쪽).섭리를 대하는 바른 태도이런 잘못된 생각의 태도에 반(反)해서, 성경적으로 바르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누구든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계획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죄를 만드신 분이 아니며, 죄를 일으킨 분이라는 혐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단언해 왔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의 발생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후대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이 세상에서 악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이런 악한 일을 만드신 분이거나 하나님께서 악한 일을 일으키신 분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적하는 사탄과 그 수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악한 사람들이 불의하고 공정하지 않게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잘 하시고 정의롭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은 크고 우리들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다”고 한 것이다. 결국 우리들로서는 모든 것을 정확히 파악하여 모든 것을 다 묘사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들도 선으로 변용시켜서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신다고 하나님을 무한히 믿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태도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옳으시다”는 것을 참으로 믿고 그것을 모든 정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악한 일들과 도덕적인 악인 죄가 발생하는 그 모든 것을 다 옳다고 하거나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저 우리들은 구체적인 정황은 잘 모르지만, 이 모든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모든 뜻을 다 온전히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을 “믿고 말하는” 것이다(Paul Helm, 이승구 역, 하나님의 섭리, 2004).이런 태도는 결국 우리가 호기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탐구하여 모든 설명을 다 할 수 있다는 입장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바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모한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를 탐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1)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가히 파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우리의 생각의 한계, 정당한 이성의 작용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며, (2) 하나님께서 파악하라고 한 것까지만 우리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3)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것이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각하는 기능인 이성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의 한 측면이 드러난다.이것은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칸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각한 “이성 비판”, 즉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함” 이상의 함의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칸트주의자들은 이성의 한계 내에서는 마치 이성이 주권자이며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하여서 그 한계 내에서는 겸손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종교도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구속 종교를 피하려고 하면서 그저 도덕 종교로 기독교를 변용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제대로 하면 오히려 이성이 “신앙의 한계 내에서” 작용해야 한다. 이성이 제대로 작용할 때 드러나는 또 다른 측면은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를 잘 정리하는 도구 역할을 제대로 하는 이성의 “도구적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Cornelius Van Til, ‘개혁주의 조직신학 서론’ 1995).이 두 측면이 “신앙하는 이성”, 소위 “중생한 이성”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입장이야말로 섭리에 대해 바르게 생각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다.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계시하신 것만을 배우고, 그 한계를 넘어 가지 않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감취어진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과 존숭의 태도로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높이고 찬송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는 이렇게 하나님만을 높이고 겸손히 그의 의로우심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한계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내로 기다리는 것이 포함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생각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매일 매일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며 겸손히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족하는 것이다. 섭리를 생각하며,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간다.여기서 나름대로 섭리를 강조하며 자연의 이법(理法)에 순응하면서 살 것을 권하던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같은 로마 시대의 스토아 철학자들과 성경적 섭리를 말하며 믿는 진정한 섭리론자들을 근본적 차이가 드러난다. 물론 근본적으로 섭리를 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이 인격을 가진 분이냐 아니면 무인격적인 자연의 이법이냐 하는 차이도 있다. 그러나 그 자명한 것 이상으로 “섭리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참으로 겸손하게 생각하고, 사는 일에서 기꺼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하며,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으로 만족한다.우리 상황에 적용하며다시 한 번 자문해 보자. 우리에게 코로나19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조금이라도 불평이 있다면 우리들은 바르게 생각하며 느끼고 사는 것, 즉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이 세상을 따라 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 모든 사태를 스스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오만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겸손하게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려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복잡한 상황의 한 가운데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나님에게서만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며, 우리에게 해결의 열쇠가 없음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사태는 타락한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는 그야 말로 “출구가 없음”(no exit!)을 잘 드러내어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타락한 우리의 삶 자체는 그야말로 닫혀진 세계(closed world)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이 세상이 문제를 해결하고 열려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이런 죄와 악들의 생성자가 아니시며 이런 죄와 악들을 조성하신 분이 아니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통제 하에 있음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들을 선으로 변하게 하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각도 겸손하게 하고, 살 때도 참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존해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여기 먼저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모든 정황 가운데서 그렇게 할 수 있기 원한다. 그리고 아직도 믿지 않는 분들이 우리 모두 살 수 있는 이 유일한 길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같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청유한다.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만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가장 바르게 나아가는 우리의 유일한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No other way!). 구원 문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문제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참으로 그를 그의 의도대로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신학
교리
섭리
죄의조성자
하이퍼칼빈주의자
코넬리우스반틸
열려진유신론
칸트주의
스토아학파
닫혀진세계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더 나은 의”
by 이춘성
2020-10-23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마태복음 5-7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산상설교’로 불린다. 산상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이 설교가 산 위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5장 1절에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만 보면 예수님만 산에 계시고 무리와 제자들은 산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핑크(Gerhard Lohfink)와 같은 신약학자들은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셨고, 무리 중에 제자들만이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갔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누가 예수님을 따라 산행을 하였는지, 특별히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고된 산행을 할 만큼 적극성이 있는 자들이며, 이들은 소수라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구약의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시내 산에서 갈릴리 이름 없는 산으로산상설교의 도입부는 시내 광야에 있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나안에 세울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와 법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모습은 출애굽기 19장 20절 이하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출 19:20) 하나님은 시내 산에 계시고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세와 장로들은 광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산상설교에서도 예수님이 산에 계시고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런 구도는 구약의 시내 산 설교와 신약의 산상설교가 서로 비교되도록 한다.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가르치시며 주신 것이 무엇인가? 십계명 두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이다.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지킬 삶의 원리, 윤리이며 법이다. 그렇다면 산상설교는 무엇일까? 예수님이 이루실 대속의 구원 사건 이후에 죄에서 탈출한 사람들로 만들어질 하나님 나라의 삶의 윤리와 법이 산상설교이다. 그러기에 산상설교는 오래전에 있었던 좋은 말씀, 혹은 따르기에는 너무 높고 숭고한 이상적인 말씀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며, 지켜야 하는 삶의 윤리이며, 법이 산상설교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이제 산상설교의 내용으로 우리의 삶을 판단 받고 우리가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의롭지 않은지 알게 된다. 더 높은 기준과 본질적인 기준으로 우리의 삶이 판단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알아볼 ‘더 나은 의’다.산상설교의 주제산상설교의 핵심 주제는 ‘더 나은 의’다. 이 내용을 담고 있는 17-20절에는 비교급으로 표현된 ‘더 나은 의’의 비교 대상이 무엇인지 나온다. 그리고 그 관계성을 규정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7) 예수님은 시내 산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고 한다. 완전이란 가득 채워서 부족한 부분은 메꾸고 채워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 시내 산의 윤리와 법에 부족함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시대와 상황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분히 요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앞으로 이룰 하나님 나라와 그곳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더 고차원의 완전한 법과 원리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를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 창세부터 발전하여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의 점진성, 하나님 나라 윤리의 완전을 향한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이 무엇이며, 신자들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율법 혹은 선지자우선 17절의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율법이나 선지자(τὸν νόμον ἢ τοὺς προφήτας·)”는 무엇을 의미할까? 앞과 뒤가 동일한 운율과 단어로 끝나는 시적인 용법인 대구법과 같이 ‘율법과 선지자’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인 7장 12절에도 나온다. 예수님은 설교의 마무리에서 “율법과 선지자(ὁ νόμος καὶ οἱ προφῆται)”라고 말씀하셨다. 차이점은 17절은 ‘율법 혹은 선지자’로서 이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하지만, 7장 12절은 ‘율법 그리고 선지자’로 둘 다를 뜻한다는 것이다. 당시에 7장 12절의 ‘율법과 선지자’는 일반적으로 통용하는 관용어로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은 토라로 불리던 율법이 기록된 모세 오경과 그 외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구전, 기록된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주신 하나님의 법, 말씀으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십계명과 그 외에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5개의 성경책을 가리킨다.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자(삿 21:25), 이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토라로 이끌기 위해 선지자들을 대언자로 보내셨다. 이들 선지자에 대한 기록은 역사와 시, 지혜, 예언 등의 다양한 문학적 장르로 기록되었고, 히브리어 성경은 이것들을 선지서라고 불렸다. 그러한 이유로 구약 성경은 토라로 불리는 모세 오경과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불렀던 것이다.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토라와 선지서에 대해서 이해하는 방식과 그 위상의 문제 때문에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이것은 성경 해석을 둘러싼 신학적 이유에 근거하였다. 먼저 성전의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 즉 토라만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이 직접 모세에게 말씀하여 주신 토라만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이와 달리 지방을 중심으로 개혁 운동을 일으키며 신앙과 삶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던 신진 세력이었던 바리새인들은 토라 외에 선지서의 말씀들도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토라를 재해석하고 토라로 돌아오라고 가르친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단지 토라를 쉽게 풀어쓴 것이 아니라 발전된 토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토라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선지자들을 통해 더 발전되고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바리새파는 토라도 중요하지만, 더 향상, 발전된 내용을 담은 선지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더 나아가 바리새파의 랍비들은 주석과 책들에 근거해서 십계명과 그 부속 조항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바리새파는 토라 외에 더욱 더 많은 항목의 법을 만들어 이것을 따르는 것을 경건의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두 세력의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시지 않았다.율법예수님은 율법(토라) 혹은 선지자 중 하나를 폐하고 이 중의 하나만을 선택하여 긍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긍정하였고, 더 나아가 이 둘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18절에서 율법(토라)이 무엇인지 가르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은 토라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루리라”는 헬라어의 중간태의 동사이다. 중간태란 능동태도 아니고 수동태도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능동태는 주어의 의지와 주도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수동태는 주어의 뜻이 아닌 타인의 뜻에 따라 주어가 움직인다. 하지만 중간태란 주어가 주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동적이지도 않은 상태,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유한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유진 피터슨은 중간태의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특유의 환경 속에는 극단적인 대비가 불가능한 순간이 너무나 많다. 두 가지 의지가 작용하지만, 두 가지 모두 상대편을 배척하지 않고, 상대편을 소멸시키지 않으며, 서로 존중하는 경우가 있다. 헬라어 문법책은 이렇게 말한다. “중간태는 어떤 행동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어들을 묘사하는 동사의 용법이다.” … 나는 다른 존재 - 창조와 구원을 이루신 주님 - 에 의해 시작된 행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 속에 참여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나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나는 이미 의도된 행위 속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 삶 속에서 촉진시키기 위해 줄을 잡아당기지 않는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단적인 정체성에 굴복하도록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작(능동태)하거나 하나님에 의해 조작(수동태) 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행위 속에 포함되고 거기에 참여하지만 그것을 조종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중간태).” (유진 피터슨, ‘묵상하는 목회자’, 좋은씨앗, 157-159쪽)선지자이어서 예수님은 선지자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19) 여기의 ‘가르치는 자’는 선지자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선지자들은 계명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르치며, 이를 따라 살아서 모범을 보였던 자들이었다. 선지자들은 토라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토라를 해석하고 당시의 사람들에게 토라로 다시 돌아오라고 가르친 사람들이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율법을 가르치고, 원래 의미를 밝혀 주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각성시켰고, 이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오길 그들의 삶으로 보여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법이 과거의 관습이나 문화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법, 불변하는 삶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삶에 대해서 긍정하시면서 이들을 천국에서 큰 자로 칭찬하셨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이러한 이들의 좋은 삶이 일종의 새로운 법과 규정이 되는 것을 경계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율법과 선지자예수님은 제자들이 취해야 할 바른 입장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20절의 말씀은 토라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던 사두개인이 다수였던 제사장과 서기관, 상대적으로 선지자를 중요시여긴 바리새파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양쪽을 다 취하라는 기회주의적 가르침도 아니다.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인정하시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이 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더 낫다는 것의 결론은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황금률이라 불리는 7장 12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또한 산상설교 전체는 이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기에 산상설교의 결론에 이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더 낫지 못하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더 나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 ‘정의’가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앞으로 “산상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윤리” 시리즈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논리를 따라서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그리스도인의 길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과거를 대표하는 보수와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진보라는 두 프레임 속에서 ‘더 나은 의’가 하나님 나라 윤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하는지 간략히 알아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서기관이 다수인 사두개파로 대표되는 사회의 보수주의자들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개혁적인 진보주의자들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들 중 하나의 편에 서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들 중 한 편에 서는 것이나 이 둘을 적절히 조화하고자 하는 중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뛰어넘는 더 나은 길에 서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과거를 보수하고 지키려는 사두개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과거에만 집착하고 현재와 미래를 무시하는 비전 없는 보수주의자를 보셨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새롭게 나가려는 진보파인 바리새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과거를 재해석한다고 하면서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 새로운 기득권으로 자리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위선을 보셨다. 이를 보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런 자들에게 농락당할 수 없는 거룩한 말씀이라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인 이 두 세력의 해석과 가르침보다 낫지 않으면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들 중의 하나와 같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강하게 경고하신 것이다(마 5:20).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강한 경고의 말씀이다. 보수 기독교, 진보 기독교와 같은 정치 진영화 된 기독교와 교회가 ‘더 나은 의’를 추구할 수 있는 교회라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강요받는다. 예수님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두고도 율법 혹은 선지자로 나누고 이를 현실 정치의 진영으로 나눠 싸운 것처럼, 지금도 보수 혹은 진보라는 선택지 속에 기독교인들을 프레임화 하려는 세력과 유혹이 있다. 결국, 이 때문에 교회 안에서 편 가르기를 하고 서로를 향해 미움을 만든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이 선택지를 모두 취하겠다는 어정쩡한 중립이 아닌 이것들을 모두 뛰어넘는 ‘더 나은 제3의 길’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분명한 것은 이 제3의 길은 보수와 진보를 모두 담을 수 있으며, 이 둘을 모두 조화롭게 하는 길일 뿐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더 나은 길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천 년 전이나 지금도 산상설교를 통해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신 예수의 길, 하나님 나라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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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
십계명
율법
선지자
더나은의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웃들이 고백하는 새로운 신조
by Brett McCracken
2020-10-20
2017년, 반 트럼프 저항의 일환으로 파생된 세속적 의미의 “종교적” 부흥이 시작되던 그해에, 나는 그런 사회적 변화를 처음 알아차렸다. 실버레이크(L.A.),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및 기타 진보적 정치 세력이 주도하는 지역의 커피숍과 빈티지 미용실 창문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여기서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다양한 소외 집단의 목록이 열거되어 있는 문구 또는 표지판(sign) 이야기이다. 이 표지판은 점진적인 동맹과 포용성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표지판을 내건 곳은 “안전지대”라는 말을 하고 싶겠지만, 사실 나처럼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성 윤리를 믿는 기독교인도 거기서 환영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나는 일반 주택 마당에 이 표지판의 2.0 버전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고백하는 신조(신앙고백)와 비슷한 언어로 시작하기 때문에 진보주의가 표방하는 “세속적 종교”라는 모티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집에 사는 우리는 믿기를 …” 외에도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가장 자주 본 것(남가주 지역에서만 최소한 12군데에서 보았다)은 다음과 같다.이 집에 사는 우리는 믿기를:흑인 생명은 소중하다여자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다불법적인 인간은 없다과학만이 진짜이다사랑은 사랑이다친절은 모든 것이다이런 표지판을 마당에 자랑스럽게 세워 두는 사람들의 정치관을 공유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 메시지가 가진 중요성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은 기독교인들에게 깨달음과 더불어 확신을 주어야 한다. 다름 아니라 진보적인 이웃과 해야 할 것은 논쟁이 아니라 공유점을 찾는 상호간의 연결이라는 점이다. 탈 기독교 신조표지판의 언어가 주는 깨달음은 이것이다. 한 줄 한 줄의 의미 속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정치적 부담을 내포한 정치적인 함의가 포함되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안타깝게도 그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이제 이 신조를 한 줄 한 줄 살펴보자.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문제 많은 BLM 조직은 잠시 잊자. 어느 특정 그룹의 생명만 중요시하는 게 내포한 부작용도 잠시 옆으로 밀어 놓자. 이 구호가 가진 핵심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인간 생명이 가진 고유한 존엄성의 확인에 있다. 이 경우에는 그게 흑인에게만 해당되지만, 이런 메시지는 사실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성경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창 1:27). 기독교인이라면 흑인 생명이 소중하다는 주장에 동의해야 할 뿐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다른 종교도 생명의 소중함에 관해서 기독교만큼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피력해야 한다. 여자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다안타깝게도 이 문구를 올려놓은 사람들은 ‘여성의 권리’ 속에 무제한적인 낙태의 권리가 포함된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인권’에 대한 도덕적 권위가 바로 그 순간 훼손된다는 점이다. 태어나지 않은 인권도 결국은 인권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여성의 존엄성과 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은 실제로 그리스-로마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존엄하게 했던 성경(창 1:27, 갈 3:28)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여성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게다가 레베카 맥래플린(Rebecca McLaughlin)이 지적했듯이, 보편적 인권에 대한 개념 자체는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불법적인 인간은 없다진보적 정치 신념의 맥락에서 볼 때 이것은 미국 이민 정책에 대한 진술이다. 그러나 국경과 정책의 특수성이라는 맥락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이 주장 또한 신학적 진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또는 골로새서 1장 21-22절 “전에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를 보라.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불법”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합법적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과학만이 진짜이다표면적으로만 볼 때 아마도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동의할 수 없는 진술이 이것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이 말하는 메시지는 특히 기후 변화와 과학 거부(science denialism)와 관련한 특정한 정치적 분열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 과학이 기독교 신앙에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말하는 현실과 모순되거나 과학의 가치를 저해하는 그 어떤 메시지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과 같은 과거의 과학자 또는 프란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와 같은 오늘날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사랑이다이 짧은 문장으로 된 슬로건은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등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모든 ‘사랑’을 다 긍정하려는 LGBTQ 운동의 주장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표지판에 적힌 내용 중에 가장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의미론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실로 성스럽고 소중한 것을 단지 “당신이 원하는 수준까지” 한없이 자유롭도록, 그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가 다 사랑이라면, 그건 결국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리스도인 또한 사랑이 사랑이라고 단언하지만, 반역적인 피조물이 아닌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식의 자기 참조 문장(역자 주: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것처럼 문장 자체가 역설을 담고 있다는 의미. self-referential sentence)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친절은 모든 것이다이 말이 의미하는 진보적 확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절이다.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친절하고(엡 4:32), 황금률에 순종해야 한다(마 7:12). 이것은 중요하고 또 성경적이지만, 이 슬로건이 틀린 부분은 인간의 친절이 마치 타락한 인간의 죄성까지 극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인간의 능력을 과도하게 신봉하는 점이다. 기독교적으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친절이 모든 것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중요한 단어를 추가해야 한다. 하나님의 친절은 인간의 친절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회개로 이끄는 친절(롬 2:4)이고 또 구원을 가져다주는 친절(딛 3:4-6)이다. 연결점(bridges)을 인식하자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진보 진영의 신조가 결코 성경적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평등, 존엄성, 사랑, 친절에 대한 진리를 생각할 때, 처음 형성한 기독교 문화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고, 또 기독교의 가치를 철저하게 담고 있는 ‘탈 기독교’ 신조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집에 사는 우리는 …”이라고 써서 마당에 세워놓은 표지판이 결코 정치적 도발의 상징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복음적인 초대가 되어야 한다. 종종 모든 문제를 다 휩쓸어버리는 정치적 욕지거리와 두려움만 뛰어넘을 수 있다면, 이 표시야 말로 얼마나 생산적인 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 표지판에 담긴 성경적 사상 중 일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심지어 파괴적인) 정치적 방식으로 왜곡되고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왜곡은 보수적 우파의 메시지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성경적 진리가 당파적 목적 때문에 왜곡되거나 잘못 사용되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고 또 필요한 도전을 던져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공통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은혜의 발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믿는다”라고 표현한 신조의 문장 구조는 모든 인간이 종교적이며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믿어야만 하는, 예배하도록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마당 표지판에 숨은 진짜 메시지가 무엇이란 말인가? 달리 말해, 이 표지판을 내건 사람들이 믿고자 갈구하는,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여기가 기독교인이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지점이다. 은혜와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사랑과 정의 그리고 진리의 원천과 표준 속으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종교적 감상주의로 가득한 이 표지판은 사실 기독교인을 향해 사랑과 호기심이 넘치는 대화를 하고 싶다는 간청이기도 하다.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흑인의 생명 또는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근거는 무엇이지요?”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에서 ‘사랑’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요?” “누군가 남들 앞에서는 친절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타락한 사람이라고 할 때, ‘친절이 모든 것이다’라는 이 말은 어떻게 되는 것이죠?”탈 기독교 시대를 맞아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는 과거와 다른 종류의 많은 새로운 도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조가 적힌 마당 표지판은 우리에게 여전히 새로운 기회가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r Neighbor’s New Creed: ‘In This House, We Believe . .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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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by Eric B. Watkins
2020-10-19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출애굽기 12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소개된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아니면 최소하나마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위안이란 위기의 한복판에서 찾아올 때가 많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을 때도 그들은 결코 안락한 상태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수백 년 동안 애굽인 아래서 거친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지만, 수세기 동안 철저히 침묵하고 계셨다. 그리고 애굽은 이방 신들로 가득한 땅이었으며, 그 신들 가운데 하나로 자처했던 바로는 앞서 활약한 요셉이나 그 요셉이 섬기던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이렇듯 세월이 흘러 과거의 따뜻한 기억은 서늘하게 식어 갔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인 전체를 위해 행하신 모든 역사조차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하나님 백성은 불타는 태양처럼 내리쬐는 바로의 허영 아래서 말라가며, 끊임없이 일하고 또 일하는 종살이로 수척해져만 갔다. 그렇게 위기의 시간이 무르익었다.바로 이러한 어두움을 가르는 서광은, 다름 아닌 구속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셔서 이전에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며 그 약속을 이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더불어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한 장면 한 장면이 지나며, 바로가 신봉하던 신들이 그분 앞에서 하나씩 무너진다. 마치 맹렬히 도전하는 성읍을 공격하기 전 그 성읍의 외곽 지역부터 짓밟아 들어가는 군주와 같이, 하나님은 바로의 신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신다. 그러나 바로는 지나치게 교만해진 자기 자아를 요새로 삼아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완고한 마음을 키워 나간다. 이에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이 더 완고해지도록 내버려 두신다. 이러한 긴장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분 앞에서 바로의 권력이 공중의 연기처럼 무력히 사라지는 장면을 통해 더욱 극대화된다. 바로가 신뢰하던 애굽의 모든 신들은 그분의 심판이 바로 자신을 향해 엄습해 올 때까지 차례대로 고꾸라진다. 그러다가 결국 마지막 재앙이 이르게 되자, 바로의 주변부를 치는 공격이 아니라 바로의 우상 숭배가 일어나는 그 현장, 다시 말해 그 마음을 치는 습격이 이루어진다. 곧 바로의 장자를 앗아가는 재앙이 들이닥친 것이다.우리는 이 대목을 급히 읽고 넘어가면 안 된다. 애굽인의 신앙에서 바로는 대대로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애굽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바로가 그들 중 하나로 간주되었고, 그 신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도 다름 아닌 바로와 그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점에서 바로의 장자는 단지 왕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아닌 미래의 왕, 즉 애굽의 왕좌에 올라 온 땅을 다스리는 신의 권세를 누릴 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로의 장자와 애굽인의 모든 장자를 치신 일은 바로의 그 마음뿐 아니라 전체 애굽인의 세계관에 결정타를 날리신 사건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애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는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를 덮쳤다. 심판자가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이로써 바로는 처참하게 패배해 무너졌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구속의 소망은 죄와 고통과 사망으로 얼룩진 흑암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곧 심판이 다가오는 중에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절망 가운데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지막 재앙이 들이닥치기 전날 밤, 이스라엘 백성은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죽이고 그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뿌렸다. 이는 예고된 그날 밤 심판자가 애굽 전역을 지나가다가 어린 양의 피를 보면 ‘넘어가게’ 되리라는 약속에 근거한 의식이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구속을 보여 줌과 동시에 그분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보여 주기도 했다. 즉 어린 양의 죽음에서 예시되는 그 끔찍한 심판을 상기시키면서도, 또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 대신하여 심판을 당하도록 다른 대속물을 제공하신다는 사실 역시 그 어린 양의 피를 통해 확신시켰다. 바로 여기에 이중적인 전가가 암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어린 양은 흠 없고 순결했으며, 눈에 띄는 결점도 없었다. 그런 양은 때가 묻지 않은 만큼 값도 비쌌다. 이처럼 흠 없는 어린 양이 각 집안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게 되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본성상 죄악되었지만, 어린 양이 그들 자리를 대신해서 자기 피를 대속 제물로 흘림으로써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를 가로막던 죄악이 속하여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심판자가 그 피를 볼 때, 그들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위안의 약속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가 역전된 것이다.오늘날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위안의 약속이 있다. 우리의 위안은 단순한 어린 양과 같이 한 마리의 짐승이 보여 주는 구속의 약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구속의 보혈을 통해 찾아오는 참된 위안이다(요 1:29). 이 어린 양은 혈과 육을 입은 세상의 대적들이 아닌 우리가 지은 죄의 삯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이에게 임할 캄캄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드려진 제물이었다. 이 모든 점에서 오랜 세월 애굽에서 종살이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 영혼의 노예 상태를 생생히 보여 준다.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자나 여자, 혹은 노예나 자유인이나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본성상 죄에 종노릇하여 그 죄의 삯인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지닌 가장 큰 위기가 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출애굽기에서 애굽 전역을 지나갔던 그 심판자가 마지막 날 종말론적 심판을 행하실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 최후 심판은 그분의 은혜 아래 몸을 숨기지 않은 모든 이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복음은 바로 그 구원을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증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가리셔서 최후 심판을 행하실 때 그 피를 보며 우리를 넘어가신다고 증언한다. 나아가 이보다 더 좋은 소식도 들려주는데,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하고 순결하고 거룩할 뿐 아니라 사랑 받는 자녀로 받아주신다고 증언한다. 왜냐하면 흠 없는 어린 양의 피가 우리를 가려 주기 때문이다.이처럼 복음은, 유월절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 주던 진리를 오늘날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 진리는, 우리의 어떤 능력이나 성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은혜와 자비 때문에 이처럼 죄악된 우리에게 소망과 위안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복음은, 율법이 요구하던 모든 사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다고 말한다. 이 복음의 위안을 어떻게 받겠는가? 오직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뿌려야 했듯이, 오늘날 하나님 백성인 우리 역시도 믿음으로 그분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졌기에 마지막 심판 때 심판자가 우리를 넘어가게 되리라는 그 약속을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종살이하던 시절의 두려움을 벗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그 거룩한 임재 가운데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실 하나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위안이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Christ Our Passover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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