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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복음과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이중주
by 김선일
2020-09-02
팀 켈러는 ‘팀 켈러의 센터처치’에서 이머징 교회 운동가인 디이터 젠더(Dieter Zander)가 말하는 낯선 복음(alien gospel)과 왕국 복음(kingdom gospel)의 대비를 소개한다. 낯선 복음을 줄여서 AG로, 왕국 복음을 KG라고 부른다. AG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 하세요. 그러나 인간은 모든 죄를 지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를 대신 갚게 하셨어요.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지불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실 겁니다.” 젠더가 이를 낯선 복음이라고 부른 것은 성경이 온전하게 드러내는 복음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젠더는 복음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깨닫게 되면서, “다른 종류의 삶이 도착했는데, 이는 현존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의도적으로 만물을 회복하고, 치유하고, 구속하고, 화해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AG는 개인주의적이고 율법적이며, 사후에 천국에 가느냐, 아니면 지옥에 가느냐로 복음을 채색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해서 지옥의 위협으로부터 구출을 받는 것이 초점이다. 반면 KG는 이 세상의 개선과 변화에 무게를 둔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이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이 두 종류의 복음과 거리를 두며 평가한다. 먼저 AG 모델이 지니는 약점을 이렇게 말한다.① 이 모델은 규칙을 어기는 것을 죄로 판정함으로, 죄의 자기 주장성이나 우상숭배에 대한 이해가 약하다. 죄가 얼마나 내재적이고 파괴적인지를 오히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②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께 순복하고 자비를 간청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③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마치 나쁜 삶을 사는 것에서 죄를 용서받고 나은 삶을 사는 것으로 전환된 정도로 생각한다. 그는 또한 KG 모델의 약점을 이렇게 지적한다.① 이 모델은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대속자이신 예수님을 강조하기보다, 용기와 사랑의 특별한 삶을 산 모델로서의 예수님이 부각된다. ② 죄 용서와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온 삶을 다해 진리를 믿고 실천해야 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믿고 그 안에서 살도록 초청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삶에서 이타적이고 공적인 삶으로 방향을 바꾼 것처럼 보인다. 팀 켈러는 그가 가장 강력하게 지적하는 율법과 복음의 혼동을 이 두 모델의 대비에서도 발견한다. 두 모델 모두 ‘만일 내가 바르게 산다면 나는 용납될 것’이라는 전형적인 율법의 내적 논리를 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메시지는 죄의 모욕성, 깊이, 파괴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검의 ‘날카로움’을 놓친다.”나는 어릴 때 부흥회에 참석해서 AG의 메시지를 강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또는 ‘성령이나 방언을 받으려면’ 내가 지은 모든 죄를 다 실토하며 회개해야 한다는 부흥사의 엄중한 경고를 들었다. 그래서 기껏 초등학생 나이에 내가 몰래 지은 죄들까지 낱낱이 다 기억해내느라 안간힘을 썼지만, 특별히 뜨거운 확신도, 신묘한 경험도 일어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내 신앙의 여정에서 처음으로 가장 간절했던 순간이었으나, 동시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영적 열등감과 좌절감이 자리 잡은 시점이었다. 물론 회개하려는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복음과 대면함에 있어서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깊고 오묘한 은혜의 역사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철저한 회개의 성과를 이루었느냐에 맞춰질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어서 자의식 뿐 아니라 자기 인정의 욕구가 강해지면, 비록 신앙의 지식이 쌓이더라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위해서, 은혜에 보답하여 그분을 감동시키기라도 해야 한다는 욕구에 쉽게 넘어간다. 물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부응하는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KG의 메시지는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최근의 필요와도 잘 연관된다. 세상 변혁의 비전 자체가 비성경적이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AG와 마찬가지로 KG도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하신 일에 우선적으로, 깊이 천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이 있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다루셨는지,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급진적 은혜를 베푸시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셨는지에 천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시종일관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우리는 AG와 KG를 저울질하며, 상황에 따라 한쪽으로 쏠리는 편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이분법의 혼돈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종종 일어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복음의 계명(또는 예수 신경 Jesus Creed)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는 종종 예수께서 명시하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이유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기독교 복음의 대표 메시지로 제시한다. 그러다가,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하나님 사랑에 치중하고, 진보적인 신앙인들은 이웃 사랑을 더 강조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해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 계명은 복음이 아니다. 이는 말 그대로 명령이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큰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은 먼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셨다는 복음에 기초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도 아니다. 이 가장 큰 계명은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대 전제에 철저하게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은 나 개인에 대한 사랑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이 세상을 사랑하사 회복케 하시려는 창세 이전의 계획으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래서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 디이터 젠더는 낯선 복음(AG)을 극복하고자 KG(왕국 복음)을 제안했고, 팀 켈러는 그 두 모델 모두 복음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한 유형임을 지적했다. 이에 나는 갱신된 AG와 KG의 공존과 통합을 제안하고 싶다. 단어를 살짝 바꿔보자. A는 Atonement Gospel이라 부르고, KG를 His Kingdom Gospel이라 하자(인간의 이상향이 아닌,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라는 측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두 예수 안에서 나타난 것처럼, 속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도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 우리에게는 AG와 KG가 항상, 동시에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의 구원 사역은 깊이 있으면서도 광대하기 때문이다. 그의 은혜는 나의 모든 죄와 허물, 약함을 친히 아시고 어루만지시며 용서하실 만큼 섬세하고 심오하다. 또한 그의 구원은 나라는 개인 뿐 아니라 온 우주를 회복시킬 만큼 포괄적이고 총체적이다. 톰 라이트가 스콧 맥나잇의 책 ‘예수 왕의 복음’(The King Jesus Gospel)의 서문에서 개인적 속죄의 복음을 헬리콥터의 회전날개에 비유한 적이 있다. 회전날개 없이는 헬리콥터가 이륙할 수 없기에 회전날개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회전날개만이 헬리콥터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속죄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초적 추동력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속죄의 복음으로 새롭게 출발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며 지향해야 할 모든 여정이다. 속죄의 복음은 단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헬리콥터의 정상적이고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 회전날개는 지속적으로 기능을 해야 한다. 속죄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나라 여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력을 공급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피조세계를 회복하신다는 담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담대하고 멋진 희망의 이야기 속에서 왕이신 하나님이 바로 나와 같은 이방인이고 사소하며 희망 없는 개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복음은 나로 하여금 지옥을 면하게 하는 구원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이 복음은 나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 사역에 동참하게 할 정도로 존귀하게 하시고 자녀와 상속자로서의 권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나 뿐 아니라 이 복음을 듣고 나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말이다. 어찌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는가?
복음
예수그리스도
팀켈러
센터처치
이머징교회
낯선복음
왕국복음
예수신경
창조를 믿습니까?
by 이승구
2020-08-31
이전에는 성경을 믿는 사람이면 창조를 믿는 사람들이었고,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진리에 대해 단순함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생각들이 나오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복잡해진 이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된 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17세기까지는 거의 대부분이었고, 적어도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20세기 초까지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므로 넓게는 지난 300년 동안, 그리고 좀 좁혀 본다면 지난 100년 동안 사람들의 생각이 매우 교묘해졌다고 할 수 있다. 할 수 있으면 이전 시대의 순전함에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제2의 순진성이라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창조에 대한 기본적 논의를 해 보자.신조들과 신앙고백서의 관점에서고대 교회의 신조들과 종교개혁 당시의 신앙고백문들을 제시하신 분들은 창조에 대해서 믿는다고 할 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말했다고 할 수 있다.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②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이것을 설명하면서 대부분의 교부들과 개혁자들은 성자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③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결국에는 창조주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 그 존재와 형태와 외관과 다양한 기능들을 부여해 주셨다.④ 섭리와 연결시키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그의 영원하신 섭리와 무한한 능력으로 유지시키시며 통치하셔서, 인간들을 위해 있게 하시며, 다시 그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다.여기까지는 창조를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고대 신조들과 종교개혁기의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를 더해 ⑤ 이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창조를 믿는 것이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앞의 네 가지를 성경에서 이끌어낸 창조에 대한 가르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창조를 인정한다는 것의 함의우선 위의 ①~④까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믿고 주장하는 것인지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첫째로, 이런 의미의 창조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는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존재하셨었다고 단언해야 한다. 만일에 창조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든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지 실질적으로는 없는 것이라고 하든지, 창조자와 피조계는 이를 테면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으로 모두가 자연이라고 한다든지(Baruch Spinoa) 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에 의한 창조를 믿는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피조되지 않으셨으며 온 세상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홀로 삼위일체적 교제를 나누며 계셨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정에 따라서 그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유신론적 창조 이해이다.하나님에 대해서 아직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 전통적인 서구 철학적 유신론(the classic theism)인데, 이를 말하면서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고, 아직 삼위일체 개념을 생각하지 말자고 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 중의 상당수는 끝까지 삼위일체 개념을 넣지 말고 생각하자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분명히 하는 유신론을 기독교 유신론(the Christian theism)이라고 하고 있다. 오늘날 이렇게 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거나 지나치게 먼저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 접근은 창조에 대해서도 다양한 잘못된 이해를 이끌어 내며, 결국 하나님 이해도 왜곡하게 된다는 것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로 분명히 하였으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명백히 해야 할 것이다.우리들의 언어의 한계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창조 이전”이 있었으며, 그 때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하고 깊은 사랑의 교제만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성경이 말하는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그러므로 흔히 성경에서 “하늘과 땅”(天地)이라고 언급되는 것은 그저 하늘과 땅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온 세상 모든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그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이 창조를 인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도 처음 창조하실 때 창조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과 공간은 피조계 밖에 있는 것이 되어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의 오성형식(悟性形式)이므로 그저 사유의 틀일 뿐 사물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서 사유하려고 할 때는 항상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가지고 사유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칸트적인 틀보다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시간과 함께(cum tempore) 창조하셨다는 어거스틴적인 이해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진정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적 창조 신앙의 출발점이다.둘째로,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말했지만, 창조사역에서의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을 줄여서 말할 때,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창조하셨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말을 가지고 성부께서만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은 분명히 성부와 함께 성자께서 창조의 과정에 함께 하셨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에서는 “만물이 그로(즉, 요 1:1이 말하고 있는 로고스, 말씀으로 언급된 성자)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말한다. 또한 10절에서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라고 한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를 언급한 후에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또한 성령님께서도 창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는 사실을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또 창세기 1장에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영”(창 1:2)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과 창조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말씀으로 언급된 성자를, 창조의 객관적 원리라고 하고, 성령님을 창조의 주관적 원리라고 표현해 오고 있다.셋째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결국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피조된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이시다. 이 때 우리가 언급할 만한 유명한 구절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이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기원하였으며, 주를 통해서 이 땅에 있게 되었으며 결국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여 일종의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나 그것을 현대적으로 보충한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panentheism)으로 오해하면서 그와 같은 것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본래적으로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의 필연성과 비교하면서 이 세상 모든 것의 우연성(偶然性)을 강조한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연히 있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필연적 존재(必然的 存在)이신데 비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작정과 창조에 의해서 있게 된 존재이니 필연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을 옛날부터 그렇게 표현해 온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잠시 이 세상에 있다가 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그들이 신에게 속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피조물은 피조물인 것이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에게 들어가서 합류하는 것 같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형태의 만유재신론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이 세상에서 다양한 형태와 존재와 양상을 지닌 존재들은 그 다원성과 다수성과 독특성이 다 인정되나, 특히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서 이해되어야 한다(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의도에 비추어 우리의 당위를 찾는 방식의 윤리적 논의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판단 받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하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을 한 후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비롯하여 이 세상에 있는 존재들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에 따라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였는지가 나타나게 된다.넷째로, 창조된 것들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기독교적 창조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만 하시고 그냥 자연법칙을 따르게 하셨다는 이신론(理神論, deism), 즉 자연신론(自然神論)은 기독교적인 창조론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또한 섭리가 창조의 과정이라고 하면서 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어떤 과정이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기독교적인 창조론은 아니다.창조를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최소한 이 네 가지를 바르게 인정해야 기독교적 창조론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창조를 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① 그 창조의 하나님께 참으로 경배하며, 그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여 나가는가? ② 하나님께서 피조하신 피조계를 참으로 잘 돌보면서 하나님의 의도를 잘 드러내어 나가는가? 를 통해서 우리가 과연 창조를 실천적으로 인정하는 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면서 그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와는 관련 없는 것으로 생각하든지, 배제하려 하든지 하는 것은 참으로 창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 나가려는 책임을 가지게 된다. 참으로 창조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여기 하나님의 자녀들의 책임이 나타난다. 따라서 창조를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피조계를 잘 보호하고 돌보아야 할 책임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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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그 가치의 아름다움
by Greg Morse
2020-08-27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을 없애버릴 때 우리는 창조의 핵심이 되는 질서에 타격을 받게 된다. 하늘에서 별을 없애거나 땅을 바다로 덮거나 또는 태양과 달을 사라지게 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남자와 여자가 구분된다고? 하나님이 정말로 그렇게 이야기했어?”남자와 여자라는 그 아름다움을 손상하려는 사탄의 노골적인 시도에 대해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가? 평등한 사회라고 불리는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그 길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고후 10:15). 이 말씀처럼 훌륭한 정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용감하게 싸워왔다. 우리는 다 각자 할 일이 있다. 공식적인 변증을 하는 것 외에 미학적인 변증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가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또한 신앙 고백에 따라 행복하게 사는 모든 가정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경을 손에 들고 있다는 자체로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의 설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단 그 출발점을 삼아야 할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판단과 개혁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household of God)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남자됨’과 ‘여자됨’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 시대에 유행하는 자웅동체 양성과 그로 인해 결국 빚어지게 될 성적 혼란에 맞서 싸울 수 있다.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네 가지 초대장이 있다.1.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춤추라변태적인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는 것은 가정에서 시작한다. 단지 집 밖으로 몰아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결국 제대로 된 가정교육으로 연결되어야 한다.우리의 거룩함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을 통해서 발휘된다. 성적인 차이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리지 않는 것을 결코 기독교인의 미덕이라 말할 수 없다. 막연하게 예수님께서 성을 구분하지 않을 것 같은 분이라고 여기며 닮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닮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사실 위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예수님을 닮아서 빛이 나는 여인은 여자다움을 잃을 때가 아니라 점점 더 여자다워질 때 그 빛이 더 강해진다. 예수님을 닮아 강인함을 발휘하는 남자는 그 남자다움을 잃을 때가 아니라 점점 더 남자다워질 때 그 강인함이 더 두드러진다.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오로지 구세주만을 바라보며 산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남녀 구분이 없는 그냥 도덕적이기만 한 사람이 산다는 게 아니다. 점점 더 남자와 여자로 그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낼 때 우리는 스스로가 더 진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은 종종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기독교인에게 동일한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남자, 여자, 아이, 지도자, 독신자, 남편, 부인 그리고 과부를 구분해서 특별한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특히 결혼 생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리더십과 희생, 복종과 신뢰,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결혼 생활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적을 무너뜨리고, 세상 또한 우리 결혼 생활이 상징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통해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2. 자녀라는 축복을 만끽하라자녀는 단지 성경에 나오는 축복, 즉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할 때 주시는 새 소유물이나 지위 같은 수준의 축복이 아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 세상 전체에 떨치도록 하는, 인류를 향한 사명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존재이다.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함으로 이 세상을 채우고 또 다스리라고 했다(창 1:28). 여기에 새 언약으로 인해서 영적인 자녀를 낳는 일이 추가되었지만, 그렇다고 창조 당시에 받았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원래의 부르심이 무시되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 중 다음 시편 저자의 찬양에 동참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 127:3–5).이 땅에 살면서 기본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일 중의 하나는 자녀들을 주님 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훈련방식 대로 양육하는 것이다(엡 6:4).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는 결코 우리 삶과 목적에 있어서 곁길로 새는 게 아니다. 거룩한 가문이 되는 것은 여러 세대를 통해 이어지는 유산이 된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아이들을 기쁘게 맞이하셨다(마 19:14). 우리도 그래야 한다. 자녀들을 기뻐하지 않을 때 사탄의 속삭임은 더 커지게 된다. 자녀들을 향한 목표를 잃거나 귀찮아질 때, 남녀라는 성적인 문제는 오로지 우리 자신과 욕망의 문제로만 전락하게 된다. 우리들이 자녀들을 소중히 여길 때, 지금 이 사회가 겪고 있는 성적 비정상 상태, 특히 아이들을 죽여서 돈을 버는 의사까지 존재하는 이런 사회를 고칠 수 있다. 3. 잃어버린 학교 교육을 회복하라자녀를 낳고 그 자녀들 앞에서 남자와 여자로서의 소명 받은 삶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자와 여자로서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 대부분 학교가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를 똑같이,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교육한다.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나는 유니섹스적인 커리큘럼 외에 학교에 무슨 다른 커리큘럼이 있었는지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을 정도이다. 디도서 2장 3-5절을 보면 젊은 여자를 남자와 연결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늙은 여자로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늙은 여자가 옳은 것을 가르치며, 또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들,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또 남편에게 복종하고 집에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 등등이 다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집과 가정이야말로 여성적인 미덕이 꽃을 피우고 빛을 발하는 무대이다.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젊은 여자를 향한 나이 드신 여자 분의 책임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딸로서 받은 소명에 따라 순결을 강조하고 거룩한 아내와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교육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여인은 젊은 여자로 하여금 단지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자가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4. 성별 간의 싸움을 거부하라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은 서로를 보완하라는 것이지 경쟁하라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아담의 육신에서 하와를 만드셨을 때, 하와는 아담의 ‘돕는 배필’(창 2:18)이었지 결코 아담에 대항하는 라이벌이 아니었다.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들은 결코 서로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 문화적인 요인 때문에 우리는 종종 그 차이를 가볍게 여기는 교육을 받곤 한다. 오늘날 차이라는 말은 일종의 상하조직으로 인식된다. 공정함은 동일함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동일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이상적인 생각은 불평등을 초래한다. 그러나 G. K. 체스터턴(G.K. Chesterton)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그의 짧은 시, “비교”(Comparisons)를 통해서 전하고 있다.달 옆에 태양을 놓으면바다 옆에 땅을 놓으면과일 옆에 꽃을 놓으면나라 옆에 마을을 세우면남자를 여자 옆에 두면어떤 바보가 이런 얘기를 할 것 같아뭐가 더 나은 지에 대해서 말이야. 신부가 없는 아들남자와 여자가 중요한 이유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그분의 기쁘시고 자유로운 뜻에 따라서 신부가 없는 아들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결혼식,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결혼식들은 다 마지막 때에 한 남자와 한 교회 사이에 있을 어린 양의 결혼식 만찬에 대한 준비이다. 역사는 결국 신부와 성령님이 신랑에게 “오라”(계 22:17)고 하는 날 울려 퍼질 다음 선언을 준비하는 전주곡이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계 21:9).시간이 시작되던 때 하나님의 웃음소리와 함께 창조가 있었고,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형태를 역사의 중심에 두기로 결정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향해 바르고 신성한 기준을 세운다.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은 마지막 날에 있을 가장 성대한 결혼식 날까지 우리가 힘을 다해 보호해야 하는 가치일 뿐 아니라 기뻐서 함께 춤을 춰야할 아름다움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Lost Art of Male and Female번역: 무제
변증
창조
성정체성
자녀양육
창조질서
성별
결혼
그리스도의신부
남과여
체스터턴
‘집합제한 명령’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by 장대선
2020-08-23
전 세계적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잘 대처해 오던 우리 사회가, 최근 교회질서를 어지럽힌 한 목회자의 일탈로 심각한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특히나 그 목회자는 그동안 현 정부에 대해 좌파정권 혹은 종북세력으로 규정하며 온갖 시위를 해오던 상황이어서, 실질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해묵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까지 뒤엉켜있다. 더구나 이 문제에는, 단순히 방역상의 문제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올바른 이해의 요구까지 참으로 복잡하게 엉켜있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각 사안들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정리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현 사태는 극심한 대립과 갈등의 도화선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상황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먼저 바이러스의 문제와 관련해서 보자면, 공교롭게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질서의 상황 가운데서 그 확산이 급격해지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잘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동안 방역당국과 국민들 전체가 상당한 질서와 협조를 보여준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방역당국의 혼란과 국민들의 무질서 가운데 있던 사회에서는 심각한 피해와 확산을 보여 왔다. 이 점에 있어서 신천지 그리고 앞서 말한 그 목회자의 경우는 혼란과 무질서가 낳은 전형적인 결과를 입증한다. 특별히 신천지의 문제는 차치하고 지금 불거진 한 목회자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방역지침과 이데올로기 문제, 그리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무질서한 인물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이번 코로나 정국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국가와 교회 사이는 분리로서 규정지을 수 없는 지점이 있으며, 그 지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너무도 중요하다. 방역의 문제에 있어서 국가는 불가피하게 교회의 예배와 관련하여 지침과, 심지어 통제를 단행해야만 하는 경우가 명백히 있음을 지금 우리들은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로 모인 가운데서 수행한 행위가 실정법에 벗어나거나 저촉되는 경우, 예컨대 불미스런 스캔들이나 허위와 같은 것으로 인해 교회에서 소송이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국가의 공권력은 불가피하게 교회의 운영에 관한 조사와 행정적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정치의 사실상의 부재 가운데서 교회의 재산권과 관련된 무수한 분쟁들이 대부분 실정법의 판결 말고는 다른 중재가 되지 않는 형편에서, 교회와 관련한 국가의 역할이 부득이하게라도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통해서, 국가가 과연 교회에 대해 어느 정도로 그 역할을 행할 수 있는지의 문제, 혹은 여전히 정교분리의 원칙만을 고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 문제는 나중에 또 한 번 다루어 보기로 하고 우선 불거진 정부의 통치행위, 혹은 통제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지에 관해 논의해보도록 하자.그런데 정부의 통치, 혹은 통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와 관련하여 우리의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정교분리의 원칙이 확고한 편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는 신학적 전제들로서는 정확한 원리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6세기말 스코틀랜드의 교회가 산출한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 1578)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정교분리가 아닌 독특한 연계와 구별 가운데 아주 잘 규정되어 있어서, 비로소 이를 근거로 이 주제를 정확한 장로교회정치의 원리에 따라 정립해 볼 수가 있다.먼저 제2치리서는 1장의 “교회와 교회정치의 일반적인 의미, 그리고 세속정치와의 차이점”이라는 주제 가운데서 4항에 이르기를 “교회의 권세와 정치는 세상 권세 혹은 국가[공화국]의 시민 정부에 속한 권세 및 정치와는 속성상 다르다.”라고 하여, 교회와 국가 운영의 정치원리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곧장 4항은 이르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권세는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로서, 바르게 사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이는 것이 되고 경건하고 선한 백성들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했다. 즉 국가의 권세와 교회의 권세[권위]는 공히 하나님께 속한 목적에 따라 사용되도록 제정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후자의 문맥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서는 거의 상실했지만,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결코 교회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며 오히려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들을 자신의 주권과 뜻에 따라 다스리시고 섭리하신다는 우리의 기초적인 믿음으로 볼 때, 이를 인정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만일 이를 부정하고 현재와 같이 엄격히 정교분리의 원칙만을 고수한다면 국가의 정부와는 별개의 교회 정부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단적인 예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바티칸 시국’(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과 같이, 세속 정부와는 전혀 별개의 시스템으로 교회들이 성립해야만 할 것이다.그렇다면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인 국가와 교회의 권세를 시행하는 관원들과 직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이해와 자세로서 대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제2치리서 1장 9항에서 명확히 규정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9항은 이르기를 “교회에 속한 사역자와 그 외 모든 사람은 세상 관원(civil magistrate)에 순종해야 하며, 세상 관원도 영적으로는 교회에 순종해야 하고, 교회 정치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즉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인 국가와 교회의 권세를 시행하는 자들 모두 상호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로마서 13장1절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말씀에서 인출하는 것이다.그런데 제2치리서 1장 9항은 또한 규정하기를 “이 두 재판관의 권세는 일반적으로 한 사람에게 있지 않다.” 즉 국가의 권세가 교회의 권세까지 가져서는 안 되며, 마찬가지로 교회의 권세가 국가의 권세까지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어지는 규정에서 이르기를 “세상의 권세는 칼의 권세[사법권]이고, 다른 하나[교회의 권세]는 열쇠의 권세[영적 권세]다.”라고 한 것에서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즉 교회의 권세는 말씀[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하늘(Heaven)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수행하고, 세상의 권세는 ‘칼’[사법권]에 따라 악을 벌하고 선을 권장하는 권세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즉 두 권세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교회에 속한 사역자[목회자]와 그 외 모든 사람[신자들]은 세상 관원에게 순종해야 하며, 세상 관원도 영적으로는 교회에 순종해야”하는 것이다. 세상 권세도 말씀[성경]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이며, 다만 그 기능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에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세속 권세인 정부의 행정력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방역의 차원에서 기독교회들의 예배를 잠정적으로 비대면으로 수행하도록 했다. 그런즉 얼핏 그 모양이 그 권세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러한 외적인 수단 즉 칼의 권세로는 결코 영적인 교회의 속성을 통제할 수 없다. 영적인 교회의 속성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오히려 영적인 것, 곧 말씀의 권세다. 그런즉 말씀의 진리를 희석해버리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영적인 속성을 통제하거나 제거해 버릴 수 있는 방편이다. 심지어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할 수 없도록 예배를 폐지한다고 해도, “영과 진리로 예배”(요 4:24)하는 것을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칼의 권세로서는 결코 영적인 권세를 행사할 수가 없다. 바로 그 사실을 제2치리서 1장 13항에서 언급하기를 “관원은 칼과 다른 외적인 수단들에 의해 순종을 요구하지만, 목회자는 영적인 칼과 영적인 수단들로서 순종을 요구한다.”고 한 것이니, 칼로서는 결코 영적인 순종을 요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억지로 교인들을 강압하여 끌고 가는 방식은 전혀 영적인 방식인 목회의 방식이 아니다.사실 우리 정부는 현재 예배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외적인 형식을 일부 제한하려는 것이다. 예배의 본질이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영과 진리”에 있는 한, 그런 정부의 지침이나 행정력은 전혀 예배의 본질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지나친 월권이라 생각하여 저항하려고 하다가는 자칫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2)는 말씀에 스스로 저촉되려는 것이 아닌지 신중해야만 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롬 13:4)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를 제어하여 더 큰 불편과 위험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려는 일을 대적하는 악을 행하여서 공연히 칼의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이 아닌지 더욱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즉 정부가 기독교의 예배를 방해하려는 목적일 리가 없는 한, 지교회와 사역자들 모두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기독교 내의 일부 무분별한 사역자가 현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 상태에 관여된 상황에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대면하여 모이는 회중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진지한 상황인식을 토대로, 바로 지금이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임을 인식하고, “금식을 시행하도록 조언”하고 있는,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The Discipline of the Reformed Churches of France. 1559) 10장 3조의 문구를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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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표적과 이적을 행했나
by Greg Morse
2020-08-22
기적을 믿지 않지만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한 의대생을 알고 있다. 예수님이 보리떡과 생선으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 그는 “그런 종류의 일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원칙과 이성 그리고 과학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불과 연기를 보고 놀라던, 자연현상을 보면서 신이 인간 영역에 침범했다고 두려워하던, 그런 무식한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기적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가능한 방도는 다 취하고 싶어했다. 설혹 그가 이해하는 범위 밖의 어떤 일이 생긴다 해도, 그는 기꺼이 그런 일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누리고 싶어했다. 그는 예수님께 아픈 가족을 치료해 달라고 기도했고,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여자와 데이트하게 해 달라고도 기도했으며 또 종종 식사 기도도 하고,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도 기도했다. 그는 표적과 이적을 갈구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기적의 의미를 놓치고 있었다. 비비디 바비디 부(Bibbidi Bobbidi Boo)신데렐라의 요정 대모는 지팡이를 물결치듯 흔들어서 호박을 마차로, 쥐를 암말로, 말을 마부로, 개를 시종으로, 그리고 넝마를 가운으로 바꾸었다. 바로 비비디 바비디 부라는 주문을 통해서. 뜻도 없는 횡설수설을 늘어놓는데 기적이 일어났다.이것은 복음서에 있는 우리 주님이 일으킨 기적과 완전히 대조된다. 말(words)이 기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기적이 말씀을 위해서 존재한다. 예수님은 독백으로 하는 그의 말에 밑줄을 긋고, 강조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였다. 기적을 통해 침범해 들어오는 하나님 왕국은 그의 설교에 신성한 빛을 비추었다. 그 기적들은 선포하고 있다. “하늘의 왕이 여기 있다. 그의 말을 들어라.”선한 목자가 군중을 앉히고 기적적으로 많아진 빵과 물고기로 그들을 먹이고 있다. 그들은 지금 “나는 세상의 빵이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걸어감으로, 그는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 더 큰 논란의 여지를 줄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여기 죄를 용서하는 이가 있다.” 죽은 나사로를 일으킴으로 예수님은 바로 다음 메시지에 강력한 느낌표를 찍는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예수님의 목소리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풍랑이 잔잔해지며, 귀신들이 살려달라고 사정하며 돼지 속으로 들어간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다음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누구이기에”(막 4:41). 그런데 자기 스스로도 의심하는 기적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 의대생은 정작 물어야 할 질문을 던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무관심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나도 오랫동안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단지 요정 대모가 마술 지팡이를 돌리면서 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다음과 같은 주문을 외워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살라 가둘라 메칙카 불라비비디 바비디 부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마법사가 아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죄 안에서 그냥 죽도록 놔두지 않는다. 기적을 행하는 설교자우리 주님의 대속과 그에 따른 부활을 가장 잘 예언하는 구절 중간에 이사야는 이런 말을 넣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하나님의 종이 받은 이런 고통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지기 위해서다. 마태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가서 열병을 앓는 그의 장모를 고쳤을 때 이 구절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물론 그날 저녁 예수님이 병을 고친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마 8:14-17). 요점은? 예수님은 삶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들을 외면하지 않는 동정심이 많은 구세주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인류를 위해 기꺼이 가던 길을 돌려서 불편함을 감수하는 분이며, 또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듯이 우리를 고치는 분이다. 단지 영원한 생명을 말하기 위해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대신 지기를 원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 그리고 우리의 지금과 영원에 관심을 갖고 있다.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다. 사역을 시작하던 즈음,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기적을 찾는 와중에 돌연 기적을 행하던 동네를 떠남으로써 제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그는 동네에서 멀어졌다. 그는 물론 천국도 떠나 이 땅에 왔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갈릴리에 있는 아픈 사람들을 다 고쳐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기적, 표적 그리고 놀라운 일들은 다 청중으로 하여금 앉아서 열심히 듣고 메모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니고데모는 바로 이 점을 알고 있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지 단지 떠돌이 기적 연출자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나은 구세주다. 비록 그의 기적은 수천 명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 6:60) 라고 한탄하게 만든 가르침과 함께 왔지만, 그중에서 소수는 그와 함께 남아있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바로 “영생의 말씀”(요 6:68)임을 그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정 대모는 우리로 하여금 쇼를 구경할 준비를 시키고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준비하도록 하고 그의 영광과 탁월함에 걸맞는 수준이 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킨다(벧후 1:3).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 놀라운 일을 이루도록 했다. 우리가 사악한 이복 누이의 희생자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담 안에서 저주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비비디 바비디 부가 아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안전한 지시 사항을 주었고(마 28:20), 그로 인해 우리는 이제 그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게 되었다(요 15:10). 이스라엘도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고, 병을 고쳐주며 또 이적으로 놀라움을 주는 왕에 대한 생각을 사랑했지만, 그들은 (그리고 우리도) 막상 그 왕이 세상에 와서 회개하라고 말했을 때,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했을 때, 무엇보다 그를 가장 사랑할 뿐 아니라 그를 유일한 길, 하나뿐인 진리, 유일한 생명으로 받아들이라고 했을 때, 그에게 전혀 다른 왕관을 씌워 주었다. 우리는 하늘의 위로를 땅에 가져다 주는 선지자를 좋아했다. 우리는 우리의 벌거벗음을 드러내고 대신 당신의 의를 드러내신 하나님을 미워했다. 와인은 다 떨어졌고 식사와 함께 오락도 끝났다. 우리는 이제 이 정도면 하나님도 충분히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바라바를 예수 대신 선택했다. 기적이 돌아올 때왜 이것이 중요할까? 한 가지 이유는 공개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의 날이 반드시 다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불신을 자아내는) 자연주의라는 가짜 신은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적을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할 날이 올 것이다. 또 인터넷에서도 보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소위 말하는, “그런 것들”은 믿지 않는 계몽주의 시대의 사람들 조차 보고 놀랄 날이 올 것이다. 내가 알던 그 의대생은 그가 믿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상이 될 것이다. 기적은 이제 부정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연적인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해 우리의 배가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에게 해가 되는 이것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9-10).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많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계 13:13-14) 것과 같은 “큰 표적”이 올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불법의 사람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실제 표적과 놀라운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는 세상이 항상 원하는 그런 구세주가 될 것이다. 그는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를 치료하고 예언하고 또 우리의 배를 채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육체가 싫어하는 설교 없이 이뤄질 것이다. 이 불법의 사람은 너무나 설득력 있고, 매력있고,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고, 매력적이기에 심지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조차도 속을 수 있을 정도다. 그 위험한 날에 사탄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바로 지금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에 휩쓸려서 속은 사람은 “진리를 사랑함으로 구원받는 길을 거부한 자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자애롭고 능력에 넘친 기적과 표적 그리고 이적을 일으키면서 “가르친 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허락한 가짜 기적들, 우리가 과연 온 마음과 영혼으로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 하나님이 페이스 북 페이지와 저녁 뉴스를 채우도록 허락한 가짜 기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신 13:2-3).베들레헴의 별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인도했듯이, 그분이 자신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듣도록, 그리고 듣고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기적이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인도하게 하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Dangerous Miracles: Why Jesus Did Signs and Wonders번역: 무제
기적
복음
구원
구세주
의대생
마법사
이사야
예언
예수그리스도
용서받음, 하나님 경외의 원리
by Michael Reeves
2020-08-07
시편 130편 4절은 당신의 눈을 사로잡는 놀라운 구절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이 구절은 좀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리이다”라고 해야 맞지 않은가? 굳이 경외, 그러니까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오려면 구절이 “그러나 심판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닌가?그런데 시편 구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더 이상한 것은, 이 시편 저자가 도무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4절을 지나 그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5-6절). 그는 이렇게 확신한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7절).성경의 명령일 뿐 아니라 복음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은 사실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정반대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모인다.“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18–20).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새 언약이 주는 경외C. I. 스코필드(Scofield)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구약의 경건함을 표현하는 구절 중 하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단지 구약의 경건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건전한 경외감은 사실상 새 언약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축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과 관련해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렇게 약속하셨다.“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39–40).예레미야 33장에서 새 언약이 가진 경외감의 특징을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예상을 허물 정도로 충격적인 방식으로 설명한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8–9).물론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만, 이것은 결코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예레미야 33장에서 주님은 순전한 축복이 무엇인지 하나 하나 풀어놓으셨다. 그는 그의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용서하시고 또 그들에게 위대한 일을 하실 것이다. 바로 이런 모든 좋은 것들 때문에 그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의 반대편에 있는 두려움도 아니다. 오히려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을 통해서 묘사한 경외감의 일종이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 이것은 “주님과 그의 선하심을 향해서 가지는” 경외감이다(행 9:31 참조).효심으로서 경외이것은 또한 신학자들이 종종 “종들이 주인을 향해 가지는 두려움”과 비교해 “효심”으로 표현하는 경외감이기도 하다(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지는 마음). 사실상, 이것은 우리 예수님이 가졌던 효심이고, 믿는 자라면 누구나 다 그 효심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고, 이사야 선지자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사 11:1–3)효심은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지는 기쁜 공경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오로지 즐거움 만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다시 말하지만, 완전히 반대가 된다. 예수님 안에 거한 성령님은 주를 향한 경외감의 성령님이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런 효심은 예수님이 즐거이 가졌던 아버지를 향한 공경심이었다. 이는 참으로 그 경이로움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부분이다. 용서는 경외감이 자라는 토양이다시편 130편 4절은 용서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바른 경외감이 자라도록 하는 비옥한 토양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또한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십자가가 없다면, 하나님은 단지 공포스런 심판자고 우리는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떨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죄인으로서의 자연적인 두려움이, 사랑받는 자녀들이 가지는 떨리는 경외감으로 바뀌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용서와 믿음에 의한 칭의 때문이다. 존 번연(John Bunyan)은 이렇게 썼다. “위대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아무 가치 없는 자에게, 아무 자격 없는 자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는 일을 하려고만 하는 자에게 좋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떨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Could Forgiveness Possibly Lead to Fear?번역: 무제
구약성경
신학
시편130편
사유하심
두려움
스코필드
예레미아
이사야
호세아
존번연
창세기 1장에 삼위일체가 나오는가?
by Scott Swain
2020-07-31
창세기 1장에 삼위일체가 나올까?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성부, 성자, 성령이시기에 성경의 어디를 펴든 성삼위일체가 등장한다. 창세기 1장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 삼위일체가 나온다고 단언하는 것은 쉬워도, 성경 안의 다양한 본문에서 삼위일체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옛 성도들이 창세기 1장을 읽으며 과대 해석, 즉 해당 본문이 보여주는 것 이상의 삼위일체를 보는 오류에 빠지곤 했다면, 현대 독자들은 과소 해석, 다시 말해 그 본문이 보여주는 것보다 삼위일체를 덜 보는 오류에 빠질 때가 많다. 구약 안에 숨겨져 있는 삼위일체포괄적인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구약에서 삼위일체가 어떻게 등장하는가? 루터교 신학자인 요한 게하르트(Johann Gerhard)에 의하면 창세기 1장에서 삼위일체는 “그 당시에 꼭 맞는 계시의 방법으로” 나타난다. 성경 안에서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는 두 가지 경륜에 의해 나타난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 구약에서의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가 있고, 다음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후 신약에서의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가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즉 구약에서는 삼위일체가 ‘없었고’ 신약에서는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차이는 상대적이다. 신구약 모두 삼위일체가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 삼위일체는 “숨겨져 있고” 신약에서는 “드러나 있다.” 구약에서의 삼위일체는 말하자면 밭에 숨겨진 보화처럼(마 13:44; 골 2:2–3) “숨겨진 존재”여서, 신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드러난 존재”의 빛에 비추어볼 때에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안에 숨겨져 있는 삼위일체지금까지 정리한 대로 삼위일체가 창세기 1장에서 어떻게 “그 당시에 꼭 맞는 계시의 방법으로” 등장하는지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에는 숨겨진 삼위일체의 존재를 보여주는 단서가 적어도 세 개 등장한다. 이 흔적들은 신약에서 보게 될 완전한 삼위일체의 계시의 구조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이다. 1. 창세기 1장에는 주어-동사가 불일치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창세기 1장 1절에서 복수 명사인 “엘로힘(Elohim)”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으로 번역되는데 이에 대응하는 동사인 “창조하시니라”는 단수 동사다. “태초에 [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27절에서도 같은 형식이 등장한다. “[엘로힘]이 자기 형상 곧 [엘로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주어-동사 ‘불일치’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강조하려 한 것일까? 천지 창조는 하나님 한 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천상 존재들의 위원회 같은 것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홀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누구의 지도나(사 40:13–14) 도움도 받지 않았다(사 44:24; 렘 10:12; 27:5). 이 점을 강조하면서 창세기 1장에서는 삼위일체 신학의 첫 번째 근본적 구성 요소인 일신론(monotheism)이 등장한다. 하나님 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다스리시며 만물을 그에게로 인도하신다. 일신론을 무시하면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은 다신론(polytheism)의 형태로 가게 된다. 삼위일체 신앙은 일신론 안에서 이해해야 한 분 하나님, 세 위격에 대한 신앙이 될 수 있다. 2.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 한 분의 천지 창조 안에서 등장한다앞서 살펴본 예들을 통해 하나님이 홀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배웠다. 그 예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지닌 위치를 깨달을 수도 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영은 하나님이 만물을 생성하시고, 빚으시며, 채우시는 수단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다(창 1:3, 6, 9, 11, 14, 20, 24, 26). 하나님은 지으신 만물에게 ‘이름을 주신다’(창 1:5, 8, 10). 또한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신다’(창 1:22, 28).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 또한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아직은 혼돈하고 공허한 세상 위를 어미새처럼 운행하시며 생명의 근원이 되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생명, 에너지, 지성, 그리고 풍족함을 세상에 공급하신다(창 1:2; 비교: 신 32:11). 하나님이 만물을 생성하시고, 빚으시고, 채우시는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보여줌에 있어,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한 분 하나님의 창조 역사 안에 포함되어 등장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과 영으로 창조하신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홀로 창조하시며 다른 이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한다(시 33:6–9; 요 1:3; 롬 11:36; 고전 8:6; 골 1:16; 히 1:2). 창세기 1장에서는 여전히 “말씀”이나 “영”이라는 말이 삼위일체 신학에서 갖게 될 위상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이 단어들의 중요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야 전적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을 하나님 한 분의 창조 역사 안에 포함시켜 보여줌으로써 삼위일체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한 부분을 가르친다. 성경이 나중에 엘로힘, 그의 말씀, 그의 영에 대해 어떤 구분을 하든지, 그것들이 마치 한 분이신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과의 구별인 것처럼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 안에서의 어떤 구별들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 3. 그렇다면 그 복수 명사(plurals)는 무엇인가?위에서 다루었듯,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을 지칭할 때 계속 복수 명사인 “엘로힘”을 사용한다. 일부 성경 주석가들은 이 복수 명사가 하나님의 삼위적(三位的) 충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복수(plural)로 표현하시는 창세기 1장 26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가 창조는 한 하나님 그러나 세 위격의 작품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다. 이 복수 명사가 창세기 1장 안에 숨겨진 삼위일체를 보여주는 표식이 될 수 있을까? 창세기 1장 26절을 살펴보자. 창세기 1장 26절에서 자신을 복수 형태로 표현하신 이 부분은 종종 소위 말하는 “장엄복수(莊嚴複數, royal we)”의 한 예로 설명되곤 한다. 왕이 자기 자신을 복수 형태로 표현하는 관용적인 표현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이 천사들의 천상 모임을 가리키시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욥 1:6; 2:1). 이 두 가지 모두 타당성이 부족하다. 전자의 경우 이것이 고대 근동에서 정말 관용적인 표현이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다. 후자는 창세기 1장 전체의 메시지와 대치되고, 더 나아가 성경 전체와도 대치된다. 창조 역사를 위해 하나님은 천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천사들은 기껏해야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존재일 뿐이다(욥 38:7). 하나님은 그 자신만의 주권적인 권능을 통해 홀로 행하신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 44:24). 그렇다면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복수 형태로 말씀하신 수수께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로버트 젠슨(Robert Jenson)이 어디에선가 말했듯,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온 복수(plural) 형태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가장 강력한 후보는 창세기 1장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다. 하지만 여전히,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의 계시는 구약적 경륜과 신약적 경륜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구약 계시가 삼위일체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해석할 때 최종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고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구약 계시의 수수께끼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약 계시를 통해서만 풀린다. 창세기 1장은 무대를 설정해준다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자취들은 신약에서 계시되는 완전한 삼위일체 계시의 구조를 위한 중요한 구성 요소를 제공해준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의 주연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분은 만물을 자신의 말씀과 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를 설정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이 생성되고, 빚어지고, 채워진 것이다. 창세기 1장은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기 헌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자신의 형상으로 빚어진 피조물, 즉 인간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이 증거하는 성경의 주목적은 성삼위일체, 그리고 하나님 한 분을 위해 피조되고 구속되고 완전케 된 인간 사이의 연합과 교제를 증진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Is the Trinity in Genesis 1?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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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주일의 참된 의미
by 장대선
2020-07-23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함으로 말미암아 방역이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을 가로막는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 내에서는 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과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일시적으로 폐하고 각자 온라인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 세대 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치명적인 위협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무엇보다 코로나19로 말미암은 전염병 문제는, 주일예배와 관련된 신앙 전반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주의 날에 교회당에 온 회중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일시적으로라도 불가능하거나 곤란하게 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공적으로 예배해야 하며 어떻게 온전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의 중심에 위치한 주일예배와 관련해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믿음의 유산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자였던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는 그의 교리문답 ‘안식일의 거룩하게 함’(the sabbaths sanctification, 1641)을 통해 분명하고도 직접적으로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준다.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주님은 안식일 규정과 관련하여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사람이 편리한대로 모든 것들을 다 행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사람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을 수단으로 사람이 거룩하게 되며, 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4절에서 주님은 모세의 자리(율법의 자리)에 서서 율법을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도록 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 보이셨다. 앞서 3절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율법의 가르침]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로마서 2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그런즉 율법을 따라 실제로 행하는 가운데 신자들이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할 때, 율법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는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또한 개혁된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의 신앙은 전혀 개혁된 바 없이 여기저기 분란만 일으키는 사변적이고 문제투성이인 개혁자가 된다. 즉,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과 율법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율법의 거룩함과 의가 율법에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을 거룩하고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선후 관계를 크게 오해한 자들이었다.한편, 마태복음 12장 7절에서 주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주님 자신과 그의 제자들을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윌리엄 구지는 주일성수 교리문답(37문답)에서 “그것들(봉사의 일들)이 경건의 의무들(예배의 의무들)을 방해한다 할지라도, 안식일에 봉사의 일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혹은 [일이] 틀어지든지 간에, 반드시 교회당에 가야만 한다고, 우리를 그렇게 엄격하게 속박하지는 않으십니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호 6:6)라는 구절은, 때로 하나님께서 제사, 즉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들을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암시합니다.”라고 가르쳤다.사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돕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가 믿음을 보이고 율법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을 이롭게 만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식일로서의 주일을 거룩히 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자칫 그처럼 생각할 수가 있다. 특히 주일에 행하는 공적인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마치 마일리지를 적립이라도 하는 듯이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시대로부터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사(예배)나 율법을 준행하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우리가 제사와 율법을 준행할 때 오히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의를 행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율법과 제사가 전부 다 사실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이 아니라 예배의 주체인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따라 우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그 결과 실제적으로 이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우리 자신과 이웃인 것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 즉 예배를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도록 섭리하셔서 우리로 그 사실을 깨닫도록 일하시기도 한다.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오해와 우리의 타락한 습성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라는 말씀을 곧장 우리의 영적인 나태와 방종의 근거로 삼아버리려는 것이다. 사무엘상 21장 6절에서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먹은 이유는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안식일 규례에서 용인되는 경우는 사실 불가피한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는(마 12:11) 것이 당연한 이유는, 속히 꺼내지 않으면 양이 죽거나 다쳐서 적잖은 피해를 입기 때문이라는 불가피성이 전제되는 것이다. 윌리엄 구지는 주일성수 교리문답(38문답)에서 “그것들이 경건의 의무를 방해한다 할지라도 수행해야 할 그러한 봉사의 일들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보잘 것 없을지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들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필요라는 것은 사람의 요구와 관계됩니다. 말하자면, 이런저런 일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심각한 피해와 손실을 초래하게 되는 경우의 일들입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돌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고나 재해들, 혹은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되는 이런저런 일들로 말미암아 때때로 우리는 예배와 경건의 일을 수행하는 데 심각한 방해를 받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주님께서는 이미 분명하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때로 하나님께서 제사, 즉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들을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며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흩어져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는 실천에 진력해야 한다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도들이 신앙과 주일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오해를 하여 이 상황에 성경적으로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주일에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공적인 행사들에 참여하는 것 외에 각자의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과연 어떻게 행하는 것이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는 모습인지에 대한 이해나 훈련이 거의 전무한 것이 현실 아닌가?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하여 1641년에 윌리엄 구지가 작성한 이 문답들이 영적인 ‘백신’과 ‘치료제’를 제공하고 있음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봉사의 일들’과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는 불가피한 일들, 예배당을 향하기 전과 예배당에서 돌아온 후 가정과 개인으로서 행하는 예배와 경건의 묵상, 그리고 기도 가운데서도 참되게 안식할 수 있는 은혜와 기쁨이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정은 과연 얼마나 온전히 서 있는가? 이제 교회는 신자들을 모으려고만 애쓸 것이 아니라, 흩어져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는 성도들로 양육하고 훈련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수고해야 할 자들이 바로 장로들이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들의 열심만이 아니라, 다스리는 장로인 ‘치리장로’들이 성도들을 진실하게 돌아보는 본래의 직무수행 없이는, 각자 흩어진 가정에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도록 살피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착각했던 주일예배의 정의를 성경적으로 재정립하고, 예배당이 아닌 곳에서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경건을 생활 속에서 적용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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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은 누구인가
by Moses Y. Lee
2020-07-17
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가장 애매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이스라엘 왕 중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왕과 제사장이라는 영광스런 두 직분(dual honor)을 예수님이 어떻게 동시에 감당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이 신비스런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이 멜기세덱 왕조의 순서를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왕과 제사장 역할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만찬을 준비한 왕성경에 등장하는 아주 적은 양에 비해 구속사에 있어서 멜기세덱이 감당하고 있는 중요한 역할은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의 이름은 문자적으로 “의의 왕”이고 그는 살렘(“샬롬” 즉 조화로운 평화를 의미한다)을 다스렸다.그의 삶과 사역을 묘사하는 세 구절에서(창 14: 18-20) 우리는 살렘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그를 만난다. 그는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전쟁에서 이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권한다. 아브라함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멜기세덱에게 모든 것의 십일조을 드렸는데, 이것은 멜기세덱이 가진 영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이 속에는 성찬식에 대한 함의가 숨어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 나은 왕을 기다리며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시편인 시편 110편은 왕과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세심한 관찰이 필요한 구절이다. 다윗 왕은 미래의 왕을 생각하며 이 구절을 썼다. 어쩌면 기원전 971년 왕위에 오르기 전 솔로몬을 생각하면서 썼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다윗의 핏줄에서 나올 후대 메시아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 시편은 미래의 왕이 과거 그 어떤 왕보다 더 큰 영광과 능력 그리고 권위를 가질 것이라는 선포로 시작한다. 그는 야훼의 대리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런 자리인 야훼의 오른쪽에 앉을 것이다(110:1). 그렇게 함으로 그는 야훼로부터 받은 권위를 바탕으로 왕의 권능을 행사하며 주의 원수를 굴복시킨다(110:2). 또한 왕의 왕국과 그의 백성을 보호한다(110:3). 그러나 이런 메시아적 인물은 단지 왕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이기도 하다(110:4). 한마디로 이것은 새로운 게 아니다. 다윗 가문의 왕은 레위 지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경우에는 예배를 인도하고 전체 기도를 주관하며 또한 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제사장적” 역할까지 수행했다.그러나 이 구절은 다윗 왕조의 제사장 기능을 더 발전시켜서, 한때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여부스 가문의 왕-제사장과 완벽하게 연결하고 있다. 그 결과, 다윗 왕조는 약속의 땅을 통치하는 데 하나님의 신성한 지지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창세기 14장 18절부터 20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향한 멜기세덱의 축복도 성취하게 되었다.5-6절은 다윗 왕과 야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2-3절과 평행을 이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절을 보면 왕이 야훼의 오른쪽에 앉아있지만, 5절을 보면 야훼는 왕의 곁에서 그를 신성한 힘으로 지키고 도와주고 있다. 2-3절이 왕을 전쟁의 주역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5-7절을 보면 야훼, 또는 신성한 전사(Divine Warrior)가 주인공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왕으로 하여금 적을 물리치도록 돕는데, 그 적은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 그리고 우주적 차원의 적이다(“여러 나라”, “뭇 나라” 등). 이것은 기존 이스라엘 영토를 크게 벗어나는 확장이다. 달리 말해 그 적장 왕들은 혼란에 빠진 우주적 힘을 상징하는 것이며, 야훼는 그 적들을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나라를 대신해서 그의 궁극적인 멜기세덱 족속의 제사장-왕을 통해서 물리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야훼의 구원 속에 있는 적용점은 단지 개인의 영혼 차원을 넘어서 육체적 측면 또 집단적 시스템, 나아가서 전 우주적 힘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편은 시냇물을 마시면서 원기를 회복하는 야훼의 모습으로 마친다(110:7). 이 구절이 처음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상태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야훼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영원한 멜기세덱 족속의 왕-제사장신약에 가면 히브리서의 저자는 멜기세덱의 수준을 아예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pre-incarnate Christ-figure)의 모습으로까지 끌어올린다. 멜기세덱은 영원한데 그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3).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친 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위대함에 대한 확증이다(히 7:4). 멜기세덱을 따라서, 그 어떤 인간도 하지 못한 완전한 삶을 사신 예수님은 진정한 의의 왕(“멜기세덱”)이 된다. 또한 희생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온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의 왕(살렘)이다. 예수님은 또한 레위 계통이 아니기에(히 7:14), 그의 제사장직은 훨씬 더 우월하며(히 7:11)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히 7:17)이다. 그 결과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었다(히 7:22).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한다”(히 7:24).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예수님이 무한한 능력과 공의로 다스리는 완전한 왕이시기에 우리 믿는 자들은 안심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무한한 자비로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히 4:15) 완전한 제사장이라는 사실 때문에도 안심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결과, 이제 믿는 자들은 우리도 멜기세덱 족속의 한 사람으로서 소명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 왕국의 가족으로서 진리와 공의를 통해서 예수님의 왕국을 확장하고 또한 이 세상 뿐 아니라 언약의 공동체를 향해 자비와 치료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o Is Melchizedek?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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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시대, 어떻게 변증할까?
by 박용기
2020-07-16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은 ‘불변의 소망’에서 기독교 소망과 세상 소망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소망은 내가 뭔가를 해서 즉, 간절히 바란다거나 노력을 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미 받은 것으로 인한 소망이다.” 세상의 소망은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얻을 수 있지만, 기독교의 소망은 이미 받은 소망이다. 베드로 사도는 기독교 변증이란 신자가 소유한 소망에 대해서 불신자에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벧전 3:15).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항상 변증을 준비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기독교 변증을 준비해야하는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defense, 변증)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1. 삶을 통해서 변증은 헬라어로 ‘아폴로기아’(Apologia)다. 이 단어는 "from"(apo)과 "Reason" or "Logic"(logia)의 합성어로, 불신자들이 던지는 질문과 공격에 신자들이 이성적이면서 논리적으로 대답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1세기 변증은 삶과 동떨어진 사변적 논쟁이 아니었다. 불신자들이 신자가 소유한 소망을 보고 그 이유에 대해서 질문할 때 대답해 주는 것이 변증이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신자의 주관적 삶의 이야기와 객관적 변증의 관계를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에서 설명한다. ‘변증은 개인의 삶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반드시 객관적인 복음 교리가 들어 있어야 한다.’ 복음서 역시 여러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 스토리들을 잘 들여다보면 복음의 핵심 교리를 찾을 수 있다. 베드로가 말하는 변증은 어려운 신학, 철학적 주제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보다는 신자의 주관적인 삶 속에 녹아있는 객관적인 복음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개인의 간증을 통해서 객관적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2. 그리스도로 거룩해진 마음으로 15절의 헬라어 본동사는 명령형으로 “거룩하게 하다”이다. 이 본동사와 묶여서 형용사 “준비하되”가 해석된다.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always being ready to make a defense, NASB). 형용사 “준비하되”는 본동사 “거룩하게 하라”와 연결되어 해석되기 때문에 명령형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신자의 마음이 그리스도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곧 변증을 준비한다는 의미다. 결국 신자는 “예수님이 내 삶의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통해서 마음이 거룩하게 되면서 변증이 준비되는 것이다. 3. 소망으로 바울은 성도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성도들이 소망으로 영화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다(롬 8:30). 1세기 성도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 가운데서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고 선을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화로운 구원을 성령님 안에서 보증(고후 5:5)받았기 때문이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 시민권자였지만 억울하게 매질을 당하고 빌립보 지하 감옥에 갇혔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살전 5:8) 쓰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옥문이 열린 상황에서도 도망가지 않은 그들을 본 빌립보 감옥 교도관은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질문했다.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대답과 함께 자세하게 복음을 온 가족에게 변증했다(행 16:30-32). 4. 온유와 두려움으로 온유는 연약함이 아니라 절제된 힘이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변증은 신자의 경험이나 지식을 의지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실 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변증의 결과가 성령님께 있음을 인정한다면 인간적인 부담을 내려놓고 온유하게 변증할 수 있다. 신자들이 개인 간증을 할 때 내가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인간적인 부담감 때문에 부풀려 이야기하거나 상대방의 감정을 조작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신자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간증하고 변증해야 한다. 청년들 사이에서 ‘희망 고문’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될 것같이 헛된 희망으로 고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소망은 썩은 동아줄처럼 결국은 끊어진다(잠 10:28). 어릴 때 연날리기를 종종 했다. 중랑천 다리 위에 서서 연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하늘에 떠 있는 연이 움직였다. 1세기 성도들도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 영화로운 구원과 소망의 줄로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망의 삶을 보여줌으로 변증할 수 있었다. 2020년 7월, 한 해의 하반기로 넘어왔지만 수그러들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이웃들이 많다. 모두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는 때다. 산 소망을 소유한 성도들이 선한 행실과 진실한 믿음을 이웃에게 보여준다면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변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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