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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자의 자비가 서린 눈물
by John Piper
2020-04-06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9-10).종려주일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그분은 비천한 짐승에 올라타 성읍으로 들어가셨고, 이제 곧 어떤 일이 닥칠지를 알고 계셨다. 즉 원수의 세력이 득세하여 자신을 배척하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리고 한 세대 안에 예루살렘조차 완전히 파멸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3-44).하나님은 자기 아들이신 그분 안에서 백성을 보살피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 1:11). 그들은 “보살핌 받는 날을”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예수님을 보며 자신들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돌(the stumbling stone)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분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버림당하셨다. 바로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예수님은 보셨다.왕이 우시다이에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눈먼 상태를 보시며 다가오는 비참한 상황 때문에 우셨다.당신이라면 이 눈물을 어떻게 묘사하겠는가? 나는 이를 ‘주권자의 자비가 서린 눈물’(tears of sovereign mercy)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리스도를 경배하게 만들고 또 다른 누구보다도 그분을 소중히 여기며 자비로운 주권자이신 그분만 예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자비에서 비치는 아름다움을 깨닫게 될 때, 우리도 비로소 그분과 함께(with him), 그분처럼(like him),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for his glory) 자비로운 마음을 품게 된다.그러므로 종려주일을 맞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다 함께 경배해야 한다.자비로운 주권을 생각하며 경배하라우리에게서는 상반되게 나타나는 여러 속성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모든 이들과 다르신 그분을 경배한다.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바는 이렇다. 곧 최고 통치자의 절대 주권 아니면 따뜻한 마음으로 베푸는 자비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게 되면, 자비로운 주권과 주권적인 자비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완전한 상태에 어떤 종교적인 또는 정치적인 리더라도 감히 범접할 수가 없다.우리가 종려주일을 소개하는 본문을 읽으며 예수님의 주권을 묵상할 때, 유념해야 할 세 가지 포인트가 있다.첫째로, 당시 군중은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 있는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눅 19:37).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시며 그 몸을 고치신 적이 있다. 또 눈먼 자로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한 자의 귀를 열어주셨으며, 못 걷는 자를 일으켜 걷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하시자 그들이 복종하며 떠나기도 했다. 나아가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거니셨으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의 사람을 먹이기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무엇도 그분의 입성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저 말씀만 하셔도 빌라도가 물러가고 로마 군대도 뿔뿔이 흩어질 수 있었다. 그분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둘째로, 군중은 이렇게 외쳤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눅 19:38). 예수님은 왕이지만 일반적인 왕이 아니셨다. 그분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지명하여 보내신 왕이셨다.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그분을 어떻게 묘사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영원히 쇠하지 아니하는 굳건한 나라의 통치자가 바로 그분임을 알고 있었다.“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는 영원한 나라가 언급되어 있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통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와 먼 은하계까지 두루 미친다. 또 그분 앞에서는 미국이나 ISIS 혹은 그 어떤 정치 집단이라도 한 줌의 모래나 사라지는 입김에 지나지 않는다.셋째로,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며 찬양하는 군중의 소리를 바리새인이 멈추게 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분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그 이유는, 예수님이 찬양받아야 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온 우주가 오직 그리스도를 찬양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들이 그분을 찬양하지 않았다면, 돌들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결국 예수님은 주권자이시기에 자신이 취하셔야 할 영광을 반드시 취하신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기쁨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다.실패가 아닌 성취를 보라그럼에도 예수님이 보이신 눈물을 지적하며 그분의 주권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 까닭은 자기 백성을 위해 세우신 계획이 결국 실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 백성이 구원받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완강하여 그분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끝내는 십자가 처형에 그분을 넘겨주게 되었다. 이로써 자기 백성을 향한 그분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의 주권을 반대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그분은 돌들로도 찬양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마찬가지로 돌같이 굳어진 마음을 가진 예루살렘 백성으로도 찬양하게 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저들의 반대와 핍박, 그리고 자신을 죽인 행위까지도 다 받아들이셨다. 이는 그 모든 일이 자신이 세우신 계획의 실패가 아닌 성취를 이루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예루살렘 입성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한번 들어 보도록 하자.“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즉 계획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눅 19:31-33).배신과 희롱, 능욕과 침 뱉음, 채찍질과 살인, 이 모든 일이 다 계획되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완강하게 거절하며 불신과 적개심을 품고 예수님을 대적한 일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 계획의 일부일 뿐이었다.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이미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이렇게 설명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이렇듯 하나님은 저들이 굳은 마음을 갖도록 내버려 두셨다. 이것이 그들에 대한 심판이었기 때문이다.전능과 자비를 함께 보이시다하나님의 자비는 주권자가 베푸시는 자비이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 종려주일에 깊이 묵상해야 할 진리가 여기에 있다. 바로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가 멸망을 앞둔 완고한 예루살렘 백성을 보며 우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수님의 자비가 깃든 눈물을 보며 마치 흔들림 없는 주권에 상반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그릇된 판단이다. 예수님은 슬픔 가운데서도 흔들림이 없으셨고, 또한 흔들림이 없는 주권 가운데서도 슬퍼하셨다. 예수님의 눈물은 자비로운 주권자만 흘리실 수 있는 눈물이었다.이런 차원에서 생각할 때, 그분의 주권적 능력은 더욱 찬란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상호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자비’와 ‘전능’ 같은 속성들이 서로 하모니를 이룰 때, 그분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부르는 찬송처럼 말이다(“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신 주여 성삼위일체 우리 주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비로우신 분의 능력이며 또한 그분의 자비가 전능하신 분의 자비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더욱 소리 높여 찬양한다.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종려주일에 그 진리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맛보기를 소망한다. 곧 주권자가 흘리신 눈물과 그분이 이루신 자기희생적 사랑, 그리고 고난주간의 모든 여정을 홀로 걸어가신 그분의 순종을 묵상하기를 소망한다. 더 나아가 이 주간에 우리가 그분을 예배하며 찬양을 올릴 때, 우리가 바라보는 그 진리로 인해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마침내는 더욱 부드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타인의 필요를 채워 주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Savior’s Tears of Sovereign Mercy번역: 장성우
눈물
찬양
경배
군중
성취
예수님
묵상
순종
복음
십자가
‘이단’에 대한 ‘관원’의 역할
by 장대선
2020-04-02
현대 우리 사회는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의식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주변국만 보더라도 여러 대에 걸쳐서 가업을 잇는다거나 전통과 역사를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존중하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아쉽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인식과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직은 미미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기독교 신앙 또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개신교 선교의 역사가 이미 백 년을 넘어선 시점이지만, 정작 그 기원과 전통에 대한 인식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헤롤드 브라운(Harold O. J. Brown)은 이단에 관한 그의 책 ‘Heresies: the image of Christ in the mirror of heresy and orthodoxy from the apostles to the present’에서 “기독교는 수 세기 동안 영속된 옛 관습이라는 측면에서 전통적 종교라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에서 전통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했다. 특히 그는 “기독교인들이 수 세대 동안 전해준 첫 번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경이다. 두 번째는 간결하고 신비로운 성경 구절을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면서, “지금 우리가 정통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전통적 이해를 말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헤롤드 브라운의 설명에서 보자면 한국의 기독교는 가장 중요한 성경은 비교적 잘 전달 받았으면서도, 다음으로 중요한 “성경 구절을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은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성경 구절의 의미를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이단을 정의하고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자 근거를 제공한다. 오랜 시간 정립하여 형성된 정통의 교리에서 벗어나는 주장들이 바로 ‘이단’(Heresies)이기 때문이다.이단의 문제는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있다. 다원화된 현대적 사고와 가치관 가운데서는 마치 ‘양심수’(prisoners of conscience)의 경우처럼 법으로 제한할 수 없는 자유로운 양심의 문제로 이해하는 실정이다. 자신의 윤리적·사상적·정치적 신념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어야 함과 같이, 종교 혹은 신앙의 문제 또한 개인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입장이나 견해의 차이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옛 라틴의 격언인 “Corruptio optimi pessima est”, 즉 가장 선한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악한 것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정통의 교리에서 살짝 이탈하여 벗어나게 된 이단의 문제는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극악한 피해를 주는 심각한 것이다.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추구한다거나 시한부 종말론에 바탕을 둔 집단적인 격리 생활, 심지어 광신적 집단자살이나 원시 공산제(primitive communal)의 추구 등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단들의 공통적인 양상이기 때문이다.이단은 이미 신약성경 안에서도 언급되었고, 그들을 정죄하고 있다. 베드로후서 2장 1절에서 사도는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라고 하면서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라고 했다. 이미 사도들의 시대도 이단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정죄하여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라고 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주 후 325년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로부터, 나폴레옹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이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있어서까지도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이 같은 중요성에 바탕을 두고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서부터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종교개혁의 시대를 거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교회의는 순수하게 교회와 신학자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위정자(군주)와 관원들이 함께 주관하는 가운데서 이뤄졌다. 중세 시대의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종교적인 권한(jurisdiction)뿐 아니라 사법적인 권한까지도 종교재판을 통해 사용했다. 교회는 군주 혹은 관원들과 긴밀한 협력 가운데서 이단의 문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사법적인 절차까지 단행할 수가 있었다.그러나 종교개혁 시대 이후의 수많은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기억은, 신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고집하게 했다. 그로 인해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후로 세속군주와 교회와의 긴밀한 협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체에서도 이미 세속정치의 야욕과 그로 말미암은 분열 및 쇠퇴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로 봉건적 왕조체제가 붕괴한 이후부터 시작된 ‘정교분리’(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은, 신대륙 아메리카에 전래한 기독교 신앙이 연방의 연합을 위해 가장 기본적이며 거스를 수 없는 대원칙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하지만 세속정치와 종교 사이를 완전하게 분리할 수는 없다. 현대적인 정교분리의 모범적인 예로 꼽는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여기서는 연방정부든 주정부든 공식적인 종교를 가질 수가 없으며 모든 국민은 그가 택한 신앙을 자유로이 믿을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는데, 한국의 제헌헌법 또한 이러한 맥락을 견지했다.)의 의도 역시 앞서 영국의 국교회에서 보여준 폐단을 차단하려는 것이었을 뿐이지 정치와 종교를 완전하게 분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교를 근거로 개혁된 교회와 신앙에 대한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도록 하는 세속정치의 권한을 헌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수정헌법의 바탕인 것이다.최근 몰아치고 있는 우리나라의 코로나19 사태가 ‘신천지’라고 하는 이단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이들에 대한 사법적인 절차가 필요하다고 널리 인식되고 있다. 이처럼 종교의 문제와 세속정치가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서로 관여하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이다. 역으로 신천지 이단은 이미 정치권과 상류 사회집단에 줄을 대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이번 코로나 사태뿐 아니라 이미 가정파괴와 같은 문제를 일으켜 왔다.)를 주는 그들을 사법적인 절차를 통해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와 세속정치의 적절한 관계의 설정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만일에 세속정치가 종교의 문제에 전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으로만 정교분리 원칙을 이해한다면, 기독교의 이단인 신천지의 문제에 사법적인 개입이 이뤄지는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역행하는 것이 된다. 그러한 이해가 정당화된다면 사실상 신천지와 같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와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 집단을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실정법에서 규정하는 심각한 범죄를 자행하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기독교 이단인 신천지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기성교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단에 대처하고 있지만, 그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기껏해야 ‘신천지 이단의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하는 경고문을 출입문에 붙여두는 정도의 대처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이단의 폐해와 해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1559)나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1578),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서 파악되는 세속정치와 교회의 관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종교에 관한 관원들의 분명한 역할과 기능이 부여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 제23장은 “국가의 관원”에 관해 3항에서 규정하고 있다. “관원은 말씀과 성례의 집행도, 천국 열쇠의 권세도 자기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관원은 교회의 일치와 평화가 유지되도록 하며,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한 상태로 간직되도록 하고, 모든 신성모독이나 이단들의 활동을 금지하며, 예배와 권징에 있어서 발생하는 모든 부패와 악습을 예방하고 개혁하도록, 또한 모든 하나님의 규례들이 정당하게 확립되고 시행되며 준수될 수 있도록 적절한 방안을 강구할 권한을 가지며,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으로서의 책무”라고 한다.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도 10장에서 “교회의 기독교 관원들의 직무”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비록 세상 왕과 군주라 할지라도 그들이 경건한 자들이라면, 때로는 그들의 권력으로 경건한 유다의 몇몇 왕들과 신약시대의 여러 경건한 황제들이 본을 보인 것과 같이, 타락하고 무너진 교회의 모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목회자들을 배치하고, 무너진 교회의 모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목회자들을 배치하고, 주님의 참된 예배를 복원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라고 했다. 로마가톨릭 교회가 이단에 관련한 관원들의 역할까지도 교회가 차지해서 변질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이후 개혁신학이 융성했었던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개혁된 교회들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국가의 관원들이 함께 협력하여 이단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제거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에서의 이단 문제 또한 교회뿐 아니라 국가의 관원들이 담당할 역할과 영역을 교회 스스로 규정해야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신천지의 경우와 같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들의 확장을 차단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교회가 스스로 찾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 상황은 바로 그러한 문제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신학
교리
이단
니케아회의
정교분리
신천지
코로나19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
제2치리서
불확실성의 공포와 싸울 용기
by Marshall Segal
2020-03-31
지난 며칠간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걸린 확진자와 감염된 국가 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그에 대한 공포감이 치솟고 있다.지금까지 이백 개가 넘는 나라에서 약 57만 명의 확진자가 보고 되었고(3월 28일 기준) 수만 명이 사망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미국과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국가가 거의 문을 닫은 상태이다. 대부분 대학이 강의를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디즈니랜드도 문을 닫았다. 대학스포츠 협회는 온 국민이 그토록 고대하던 대학 농구 토너먼트 ‘3월의 광란’을 취소했다. 프로 농구, 프로 하키 그리고 프로 야구도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모든 리그를 중단했다. 미국은 유럽에서 들어오는 대부분 여행객의 입국을 30일간 금지했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약 2억 명의 미국인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될 거라고 한다. 만약에 이 예상이 맞고, 또 현재의 사망률인 1.6%가 유지된다면, 이 통계가 의미하는 것은 미국에서만 3백 2십만 명이 죽는다는 말이다.이 바이러스에 관해서 점점 더 알아가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고, 상당 기간 그런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바이러스가 가진 가장 무서운 힘은 바로 이런 불확실성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다. 두려움 중의 두려움‘코로나19’를 향한 두려움의 근간에 숨은 것은 다름 아니라 슬금슬금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다. 이 공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세상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정도로 강력하고 교묘하다(히 2:15). 전쟁을 통해 그런 시절을 겪었던 C.S. 루이스(C.S. Lewis)는 지금 우리가 겪는 팬데믹 상황과 모든 면에서 관련이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전쟁(‘코로나19’ 바이러스)이 죽음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한 번 만날 죽음을 두 번 만나도록 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다 죽는 존재이기에 죽을 확률이 전쟁 때문에 더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전쟁은 죽음을 더 빨리 만나도록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게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전쟁은 죽음을 향해서 뭔가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더 생각하도록 한다…. 전쟁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생생한 실제로 느끼도록 만든다. 그리고 과거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사실은 축복으로 간주 되었을 것이다. (“전쟁을 통한 배움Learning in War-Time”)죽음이 가져다주는 현실은 바뀐 게 없다. 지난 몇 주간 바뀐 게 있다면, 우리 중 일부에게는 누구나 만나게 될 미래의 죽음을 지금 현실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조차도 생소하고도 쓴 자비(strange and bitter mercy)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기독교인은 이 전염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적절한 예방책을 취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동시에 ‘코로나19’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대사명을 상기시킬 뿐 아니라 경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사람이 감수하지 않는 위험을 대신 감수할 뿐 아니라, 두려움과 감염, 그리고 죽음 앞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소망을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육신을 부술 수 없는 것이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를 맞아서 많은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경고에 귀를 닫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 속 모든 아름다움과 분자 하나까지도 다스리는 하늘의 주님은 귀 있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사스 또는 메르스 바이러스와 비교하여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치사율이 낮다고는 하지만, 이 바이러스의 전파력은 훨씬 더 빠르고 광범위하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비록 수치상으로는 낮을지 몰라도, 여전히 수백만 명, 특히 약하고 환경이 취약한 사람 중 상당수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의 경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또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자들을 위한 놀라운 약속을 담고 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질병관리센터가 최선을 다해서 ‘코로나19’를 억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 당신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세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팬데믹도 다스리시고, 또한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신다. 만약에 이 전염병 때문에 당신 또는 내가 죽는다면, 그건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잊었거나 우리를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훨씬 더 뛰어난 그리스도생명의 축복을 받은 모든 사람은 다 죽음의 두려움을 알고 있다. 진리와 영원한 삶으로 이끄는 좁은 길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그리스도가 죽음의 두려움을 물리치는 것을 보게 된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던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1–23).요즘과 같은 위기의 시대는 우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지, 그 여부를 테스트하게 만든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게 별로 손해 보는 일이 아니고, 또 죽음이 멀게만 느껴지는 상황에서라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하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전염병이 우리 사이에서 퍼지고 있고, 우리가 아끼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말로 죽음이 좋은 소식인가?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새롭고 어두운 캔버스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캔버스 위에 하나님은 지금 “죽음 후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가장 달콤한 삶보다 훨씬 더 좋다”라는 말을 쓰고 있다. 죽음은 그 자체로는 결코 더 나을 게 없다. 죽음은 끔찍하고 증오해야 할 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죽음조차, 궁극적으로 만족을 주고 완벽하게 안전한 곳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라는 도구(servant)가 될 수 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 그건 그리스도인이 겪는 죽음이 덜 끔찍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것 때문이다. 아니 궁극적으로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그분(Who)” 때문이다. 죽음이 그리스도인에게 의미하는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불확실성의 시간에 용기를 내어 대면할 수 있는가? 기꺼이 위험 부담이 땅에서 몇 년 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사실을 바울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또한 남은 생애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3–25).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바울은 더 열심히 그가 섬겨야 할 영혼을 위해 사역하고 또 희생했다.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더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진액을 쏟았다. 세상이 모르는 위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가장 적절한 때에 나아가서 세상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더 성장하고 더 기뻐할 수 있도록,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교회가 보여줘야 할 용기가 방역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는 무모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금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이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최대한 막거나 늦추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라면 또한 가져야 할 용기가 있다. 그것은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나서려고 하지 않는 어떤 위기를 맞았을 때,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서는 것이다.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그런 상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1918년, 스페인 플루 팬데믹이 미국을 강타했다…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도시에서 일하는 의료 종사자들은 자원봉사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응급 의료 책임자는 아픈 아이들을 돌보아줄 봉사자를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아무도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만약에 우리 앞에 그런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돕겠다고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병원에 환자가 넘치고 그들을 도울 의료인력이 충분하지 않을 때, 그래서 봉사자들에 대한 요청이 있을 때 우리가 기꺼이 나설 수 있을까? ‘나는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1519년 흑사병이 종교개혁가이자 목사인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의 고향인 스위스 쮜리히에 이르렀다. 흑사병은 결국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쓸어버렸다. 쯔빙글리는 당시 휴가 중에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도시를 떠나 도망갔지만, 쯔빙글리는 용감하게도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아픈 이들을 보살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희망을 전했다. 이미 오염된 이 도시 안에도 그리스도가 구원할 사람들은 여전히 많을 뿐 아니라(행 18:9–10) 환난 중에도 그리스도는 함께 할 것이라는(사 43:1–3; 마 28:20) 믿음으로 쯔빙글리는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그 결과 그는 흑사병에 걸려서 거의 죽을 뻔했다. 그 모든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고 희망이 없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쯔빙글리가 사랑의 길(path of Love)을 걸으면서 받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쯔빙글리는 병마가 주는 가시 속에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믿음과 희망 안에서나는 이 땅을 떠납니다.천국이 주는 안전함나는 당신의 것입니다.그리고 병이 더 심해졌을 때는 이런 시를 썼다. 그는 내게 해를 입힐 수 없다나는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내가 지금 누워 있는 이곳은바로 당신의 십자가 아래이니까.천국을 향한 쯔빙글리의 소망은 병과 죽음 앞에서 무모하거나 이기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를 용기로 채웠고, 그에게 다른 이들의 필요를 볼 수 있는 눈과 그 필요를 채우는 능력을 주었다.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알았고, 죽음 저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엄청난 위기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위험을 받아들였고, 고통받는 자들을 도왔는데 특히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 처한 이들을 더 도왔다. 쯔빙글리의 모습이 우리 기독교인에게 그대로 드러날 수 있을까?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까? 병원이 환자들로 차고 넘칠 때 교회가 도움의 손을 내밀고, 우리가 위기를 기꺼이 감수함으로 이 두려움에 찬 도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채울 수 있을까? 지금이 바로 그때다세상이 평안할 때면 사람들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으니까. 그러나 이런 팬데믹 사태를 맞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런던에서 콜레라가 발병했을 때,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했다.영혼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람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경계심에 쌓여있고, 당신이 그런 사람들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열어놓아야 한다. 당신에게는 생명나무(Balm of Gilead, 길르앗의 향유)가 있고, 그들의 상처에 그것이 필요하다면, 그 생명나무를 바르도록 하라(역자 주: 복음을 전하라는 뜻).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은 이를 알고 있다. 그들에게 그를 전하라. 그들의 눈앞에서 십자가를 높이 들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고, 또 인간이 언젠가는 하나님 앞으로 들려 올려질 것이라고 말하라. 갈보리에 대해서, 갈보리에서 울려 퍼진 신음과 비명 그리고 피에 대해서 말하라.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말하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라.“저기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바라볼 때 생명을 얻을 수 있다.”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그들에게 말하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예수님이 강도에게 말한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라도 믿는 자를 예수님은 구원하신다고 그들에게 말하라.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엡 2:10). 하나님은 오늘날과 같은 위기에 대비해 우리를 준비시키셨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비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당신의 풍성한 자비함을 드러내시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Courage Might Corona Unleash?번역: 무제
찰스스펄전
C.S.루이스
두려움
코로나19
예수그리스도
COVID-19
쯔빙글리
팬데믹
복음
미리암을 재평가할 수 있을까요?
by 배경락
2020-03-25
장면 3. 모세에 맞서는 미리암홍해의 기적을 맛본 우리는 함께 기뻐 춤추며 노래하였습니다.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우리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광야에서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오면 앞으로 나아가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눈을 뜰 수가 없어 우리는 바람을 등지고 뒷걸음치며 걸어야 했습니다. 바람이 불 땐 눈, 코, 입으로 모래가 들어와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무도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행군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식량도 바닥을 보이자 다들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면서 웬만한 고생은 다 해보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백성이 먹을 것을 요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은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사실 60만 명을 이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세, 아론, 저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애굽의 제국주의를 경험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독재하면 백성이 얼마나 고통받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평화와 평등으로 가득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였습니다. 우리는 백성의 장로 70인을 불러서 그들에게도 리더십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이 일을 기뻐하셔서 70인 장로에게도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칠십 명의 장로도 모두 예언하였습니다(민 11:24-25). 심지어 함께 있지 않은 엘닷과 메닷도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예언하였습니다(민 11:26).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독재하는 전제국가가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 함께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후일 이스라엘이 12지파 연합 공동체가 된 것도 어떻게 해서든 제국주의만큼은 피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리더십, 새로운 국가를 향하여 나아갈 것입니다.1)이때 모세를 섬기는 여호수아는 강력히 반발하였습니다. 그는 모세를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원했습니다.“나의 주인 모세여! 저들을 말리셔야 합니다!”(민 11:28, 메시지성경)그때 지혜로운 모세는 대답하였지요.“네가 나를 위해 시기하는 것이냐?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다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그분의 영을 내려주셨으면 좋겠다.”(민 11:29, 메시지 성경)모세와 아론과 저는 이스라엘이 만들어가야 할 나라에 대해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속에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일인이 지도하는 체제를 주장하는 여호수아와 구스 여인 십보라가 모세 곁에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2)십보라의 아버지이자 미디안 족속의 족장인 이드로가 방문했을 때, 그는 애굽의 정치제도와 흡사한 계급제도를 만들라고 모세에게 권면하였습니다. 그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제도를 소개했습니다(출 18:24-25). 그건 명백히 계급제도(hierarchy)입니다. 십보라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도 애굽처럼 계급제도를 만들어서 일인이 지도하는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계속하여 설득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세워갈 나라의 방향성과는 반대입니다.아론과 저와 70인 장로는 이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제일 연장자이고 모세의 누나인 저에게 대표가 되어 모세에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누나를 존경하고 잘 따르니까 그렇게 하라는 거였지요. 저는 모세의 리더십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나아가 모세에게 말하였습니다.“구스 여인 십보라와 여호수아가 뒤에서 일인 지도체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계급제도를 갖춘다면 그건 애굽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나온 이유는 애굽과 다른 나라, 평화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미 70인의 장로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예언하게 하신 일을 기억하십시요.”3)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 그리고 저를 따로 불러내어 말씀하셨습니다.“모세는 다른 지도자들과 분명히 다른 영적 지도자이다. 그러므로 너희 두 사람은 모세를 잘 받들어 이스라엘을 다스려 나가야 할 것이다”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도 모세의 지도력을 부인하거나 시기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장래를 걱정하였던 것입니다.4)불행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고대에는 피부병이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진영에 피부병이 한 번 돌면 많은 사람이 자가 격리를 하며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환자를 돕는 일은 온전히 여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광야로 들어선 이후로 많은 환자를 만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치료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저는 제가 피부병에 전염되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하필 그즈음 저에게 피부병이 생겼습니다.5)제가 걸린 피부병은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잠시나마 모세, 아론, 제가 갈등과 불화한 것처럼 보였지만, 저의 피부병 덕분에 세 명은 다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에게, 모세는 하나님에게 제 피부병이 낫기를 간절히 구하였지요. 저는 율법이 정한 대로 진영 밖에서 일주일간 자가 격리하며 지냈지만, 하나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때마다 천막 앞에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장로와 백성은 제가 치료받기까지 한 명도 행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6) 제가 완치되어 다시 진영으로 돌아올 때 백성은 크게 기뻐하며 저를 반겨 맞이하였습니다.장면 4. 미리암의 죽음과 그 후저의 죽음은 민수기 20장 1절에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저를 비방하는 사람은 끊이지 않고 계속 나오더군요. 대부분 남성 구약학자들이었습니다. 제가 모세를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명예욕에 사로잡혀 모세를 비방한 것이라고요. 90이 넘어 죽을 날이 가까운 제가 무슨 권력을 탐하였길래 그렇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저를 오해하고 욕하는 것을 알지만, 저는 섭섭하지 않습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저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서 저를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시기를 소망할 따름입니다.하나님은 그런 저의 마음을 아시고 이스라엘의 족보를 이야기할 때마다 제 이름을 빼놓지 않고 꼭 넣어주시더군요. 민수기 26장 59절과 역대상 6장 3절이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모자라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저의 명예를 완전히 회복해 주셨습니다. 제가 죽은 지 몇백 년이 지났지만, 하나님은 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은 이러합니다.“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미 6:4).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 세 명의 공동 지도자(co-leader)를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맡았던 역할을 자세히 기록하진 않았지만,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선지자로 인정하셨고(출 15:20)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던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제가 꿈꾸었던 평화와 평등의 나라가 되지는 못했지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믿는 여러분 모두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에서 뵐 때까지 주 안에서 승리하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___________1) 최종원은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개념은 예언 현상을 통하여 새롭게 정의된다. 예언자적 권위가 특정인에게 전달되고 모든 일반 백성에게로 확장된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요엘서의 예언자적 사고와 비교될 수 있다.”“이 사고는 일반적으로 ‘평민 공동체’ (Laien -Gemeinde)를 지향하는 신명기 신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최종원, ‘소위 “불평”이야기의 문맥 안에 있는 예언자적 현상에 관한 연구’, 구약논단 제22권 3호 통권 61집, 105-136, p111-112)2) 구스 여인이 에티오피아 여인이었는지, 아니면 십보라를 지칭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모세가 80이 넘은 나이에 새롭게 젊은 구스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정황상 맞지 않다. 오히려 하박국 선지자는 미디안과 구스를 같은 지역으로 보고 예언을 한다(합 3:7). 이로 구스 여인을 십보라로 볼 수 있지 않을까?3) 유진 피터슨은 중립적인 견해로 이 본문을 해석하였다. “(모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구스 여인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이 뒤에서 모세를 비방했다. 그들이 말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셨다.”(민 12:1-2)4) 왕대일은 민수기 11장에서 지도력을 분배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민수기 12장 1,2을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왕대일,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민수기’,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7년, p309).5) 피부병의 특성은 체내에 세균이 들어간 후 당장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적어도 한 달부터 3달까지의 잠복 기간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리암의 피부병은 환자들을 대하며 치료하다 옮긴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정숙자, ‘출애굽 이야기에 나타난 여성폭력 극복’, 한국 여성신학 제58호, 2004.10, 64-72 p70). 6) “이에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기까지 행진하지 아니하다가”(민 12:15)
신학
구약성경
미리암
여호수아
모세
이드로
십보라
억울한 죽음? 어리석은 죽음?
by 김돈영
2020-03-21
웃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정말 억울하겠다, 궤가 떨어질 것 같아서 잡은 것뿐인데 죽다니 말이야”“무슨 소리야! 정말 어리석은 거지, 그걸 왜 만져, 만졌으니까 죽는 거지”웃사를 아는가? 억울함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바로 그 ‘웃사’ 말이다. 첫 번째 왕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통일된 왕국을 다스리게 된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윗은 7년 6개월 동안 다스리던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다. 다윗은 바알레유다(가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기로 했다. 새 수레를 준비하고, 악기 연주할 사람도 모였다. 드디어 수레에 실은 하나님의 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악기를 연주하며 여호와를 찬양한다. 웃사는 아효와 함께 궤를 실은 수레 곁에서 가고 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가 휘청한다. 수레가 흔들리면서 바닥으로 궤가 떨어질 것 같다. 웃사는 재빠르게 궤를 잡았다. 떨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죽었다. 외부의 요인으로 죽은 게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였다. 웃사는 궤 곁에 쓰러져 그렇게 죽었다.웃사의 죽음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나님의 심판이니 알 권리 공익의 차원에서 웃사의 죄를 낱낱이 파헤쳐야 할까? ‘불쌍하다’는 사람과 ‘억울하다’는 사람으로 나누어서 무엇이 옳은지 확인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며 자리를 피해야 할까?웃사가 죽은 이유는 분명하다“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수기 4장 15절)웃사는 몰랐다. 하나님 말씀을 몰랐기 때문에 손으로 만졌다. 우리는 웃사의 잘못이 분명하기에 그의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 보면 되는가? 그렇게 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부분이 있다. 그 찜찜한 이유를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레위인은 무엇을 했는가?웃사가 말씀을 몰랐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말씀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레위인은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지 않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신명기 33장 10절) 레위인은 땅을 분배받지 않았다. 각 지파에서 제공한 성읍에 거주하며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말씀에 무지하여 사망사고가 일어났다면 레위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하여 나라가 혼탁해졌던 경험이 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을뿐더러 개인의 제사장으로 고용되고 심지어 첩을 두는 일까지도 서슴없이 했던 과거가 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장 25절)라고 말할 만큼 타락한 사사시대를 지나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역할을 등한시 한 것이다.다윗은 어떠했나?이스라엘의 왕은 대리 통치자다. 왕이지만 제한 된 왕권이다. 자신의 신념과 소신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왕 위의 진정한 통치자, 하나님께 권한을 위임받아 다스리는 왕이다. 그가 할 일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야 그 뜻을 온전하게 전달하고, 대신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그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명기 17장 18~19절)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일에 다윗이 함께했다. 그가 법궤 운반의 모든 것을 기획했다면, 자신이 기획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래서 몰랐다고 해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의 직무가 바로 율법을 익히고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몰랐다면 왕으로서의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 만일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더 큰 일이다. 율법을 적용해야 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 사람을 죽게 했기 때문이다.웃사는 피해자인가?레위인과 왕 모두 직무유기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웃사는 자기 생각대로 행동한 것이다. 말씀을 벗어나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렇다면 웃사는 가르침을 받지 못한 피해자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출애굽기 19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모든 나라의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레위와 같은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가르치라고 말이다.“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명기 6장 6~7절)웃사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는 자로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레위족속이 아니라 다른 족속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말씀을 가르쳐야만 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단절되었는지는, 어떻게 하다가 단절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단절되었고 더 이상 말씀이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 웃사의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1. 총체적 문제다누구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왕과 레위, 웃사 그리고 다른 백성들도 모두 당사자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핑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을 아는 이가 있었다면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웃사의 잘못을 심판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전체,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신 것이다. 빨리 정상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웃사의 죽음에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서 안심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경각심을 가지고 돌아보아야 한다. 웃사 주변에 서서 불쌍하다고 억울하겠다고 말하면서, 돌아서서는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생각은 버려야 한다. 2. 변해야 한다누워있는 웃사를 바라보며 깨달아야 한다.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왕이 깨달아야 한다. 그가 변해야 한다고 말하지 마라. 레위인들은 정신 차리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곧 성도로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라.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듯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의 모습이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면 변해야 한다. 잘못 채운 단추를 풀어야 한다. 번거롭고 귀찮더라도 풀어헤쳐야만 제대로 채울 수 있다. 처음부터 잘 채워나가도록 변해야 한다.3. 함께 울어야 한다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충격은 오롯이 웃사의 가족 몫이다. 우리의 문제이고, 우리의 죄라고 말하지만 웃사의 가족에게는 갑작스러운 죽음의 충격이 더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라.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추측하지 마라. 판단하지 마라.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냥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는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갑작스러운 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웃사의 가족이다. 그 가족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다. 진심으로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며 위로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이다.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우리에게 주어진 모습도 이와 같다. 요즈음 ‘코로나19’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향한 시선, 우후죽순 생겨나서 손조차 쓸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문제이고, 그들의 잘못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려고 애써야 한다. 말씀을 따라 변해야 한다.그리고 팔을 걷어붙이고 이웃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나의 힘이 닿는 대로 안타까운 마음, 사랑의 마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려운 현장으로 직접 달려갈 수 있고, 후방에서 물질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응원하고, 격려하며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을 전할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이웃들,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을 향한 시선은 사랑이어야 한다. 참으로 복음을 안다면, 복음을 참으로 전한다면 말로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를 향한 그 사랑에 기초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본다면,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심판받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것이 심판인지 아닌지 우리에게 알려주신 일이 없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시선은 사랑에 기초한 안타까움이고, 애처로움이며 슬픔이어야 한다.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아픔을 나누고,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며, 먼저 믿은 사람의 행동인 것이다. 복음을 행동으로 전하는 것이다.믿음이 약하거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그의 부족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 뜻을 이루어가시고 완성해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단지 함께 아파할 뿐이다. 그 아픔을 보듬어주고, 더 큰 상처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뿐이다.웃사를 바라보면서 믿음 없는 사람에 대한 심판, 말씀에 무지한 사람을 향한 경고, 혹은 억세게 재수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된다. 사건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각자에게 주시는 대로 깨닫고 행하는 것이다. 만일 당사자가 아닌 관람객의 마음을 갖는다면 그 순간 웃사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를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아파야 한다. 아파해야 한다. 아니, 아파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극을 앞에 둔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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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곤의타작마당
다윗
아비나답
하나님의궤
변증학을 변론하다
by Stephen J. Nichols
2020-03-21
신학교 시절 변증학 교수님께서 직접 경험한 황당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사람들과 삶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은행 대출 상담원이 있었다고 한다. 교수님께서 대출 상담원에게 본인은 변증학(Apologetics) 교수라고 소개하자, 그녀는 “정말 놀랍네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요즘 같은 때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과(apology)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정말 필요하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출 상담원의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변증학이란 우리가 잘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이는 믿음을 변호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사실 신앙을 변호하는 일은 오늘날 매우 시급하기에 우리는 더 많은 변증학 교수들이 필요한 상황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변증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R. C. 스프로울의 최근 저서 가운데 ‘모든 사람은 신학자다’(Everyone’s a Theologian)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우리는 같은 맥락에서 “모든 사람은 변증가다”(Everyone’s an apologist)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과 진리와 복음을 깨닫도록 인도된 자들은 믿음을 수호해야 할 책임과 특권 둘 다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답변하도록’ 강요받는다. 단순히 철학적으로 뛰어난 자들이나 문화적으로 능숙한 이들에게만 의존해서 그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변증가이기 때문이다.명령헬라어 단어 ‘apologia’는 문자적으로 “~에게 말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의 의미는 “변호하다”라는 의미가 되었다. 아테네가 소크라테스를 향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고소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위한 변론을 해야만 했다. 그는 여기에 ‘변론’(Apologia)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자신에 대한 논리 정연한 변론을 제기하면서 “아테네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17번 사용한다. 많은 경우 법정의 상황을 고려하고 있는데, 가령 바울이 사도행전 22장에서 유대 공회 앞에 나갔을 때나, 25장에서 베스도 앞에 나타났을 때의 경우다. 바울은 또한 로마 감옥에 투옥된 사실을 복음의 변증으로 이야기한다(빌 1:7, 16). 헬라어 단어 apologia에 대해 가장 대표적인 성경 말씀은 벧전 3:15–16절이다. 베드로전서는 오늘날 터키의 소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던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기록된 성경이다. 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추방되었고, 핍박으로 고통받고 있었으며, 중상모략을 당했다. 그들 중 일부는 가족들의 손에 고통을 받기도 했다.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반대 세력 앞에 두려워하거나 움츠리지 말라고 명령한다. 대신에, 베드로는 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우리에게 언제나 변론할 것을 준비하라고 명령한다. 주동사인 “변호하다”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 apologia는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다. 명령형 단어는 명령의 상황에서 사용되며 여기에는 연기나 유예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명령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더 나아가 베드로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변론을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언제나 준비”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 믿음에 대한 질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경향이 있다. 언제나 준비되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을 알아야만 하며, 이는 우리의 신학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청중들을 알아야만 한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변증가로 있었던 바울의 예를 통해 이를 발견할 수 있다(행 17:16–34).베드로는 우리가 “온유와 두려움으로” 변론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벧전 3:15). 이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두려움’(respect)으로 변역한 단어는 ‘경외/숭배’(reverence)라는 단어로도 번역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사용되는 단어와 동일하다. 그래서 흩어진 우리는 우리를 시험하는 그들을 온유함과 존경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베드로는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하는 말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의 삶이 말로 인해 부끄럽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선한 행실이” 또한 믿음을 위한 변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한다. 현실바울이 일어나 아테네에서 그의 변론을 하기 전에, 사도행전 17장 16절은 바울의 “마음(영혼)이 격분했다“라고 기록한다. 만일 누군가, 특별히 미국 내에서, “립 밴 윙클”(Rip Van Winkle)수면(잠을 많이 자는 사람 혹은 시대에 뒤처진 사람을 일컫는 표현-역주)에 빠진 사람이 2011년에 잠들었다가 5년이 지난 후 2016년에 깨어났다고 했을 때, 아마도 그는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최근 격변하는 문화는 다양한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우리의 반응이 위축되거나 타협하는 쪽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베드로전서 3장 15–16절의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 되며, 우리가 교회이기를 중단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변증가가 되어 복음에 담대히 나아가며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향하여 연민의 마음 갖기를 원한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소망(복음이 절박한 가운데 있는 세상을 위한 유일한 소망)을 제시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있기를 바란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n Apology for Apologetics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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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학
미리암의 인생과 노래
by 배경락
2020-03-18
안녕하세요? 저는 모세의 누나 ‘미리암’입니다. 저를 좋아하는 분도 계시지만, 싫어하는 분들도 제법 있답니다. 여러분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장면 1. 모세와 미리암저는 어려서부터 매우 당돌했습니다. 우리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강제 노역하는 상황이 너무 부당해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온종일 사막에서 노동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 형제 중에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일을 시키는 애굽 사람들은 그늘에서 부채질하며 노닥거리는데, 우리는 소금물을 먹어가면서 일을 해야 했지요. 저는 어머니 요게벳에게 이런 상황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늘 한결같았어요.“어머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데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얘야!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해선 안 된다.” “애굽 사람들은 늘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는데 우리는 아무도 말을 못 하고 있잖아요.”실제로 히브리 민족의 수가 많아진다고 애굽 왕 바로는 명령을 내렸어요. 남자아이를 낳으면 다 죽여버리라고 말이죠. 그때 어머니가 임신했어요. 남동생 아론이 있긴 했지만, 어머니는 자식 욕심이 있었어요. 아들을 낳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식사 때마다 기도했어요. “하나님, 아들을 낳게 되더라도 좋은 산파를 만나 목숨만은 건지게 해 주세요.”열 달이 지난 후 출산할 때가 되었는데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찾아왔습니다.십브라와 부아는 매우 용감한 여인들이었어요. 그녀들은 바로 왕보다 하나님을 더욱 무서워했습니다. 어린 생명을 죽이는 일에는 절대로 동조할 수 없다고 하였어요. 십브라와 부아 같은 여인들이 우리 히브리 민족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얼마나 목청이 큰지 엄마는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걱정하셨지요. 저는 그런 엄마에게 말했어요. “엄마. 우리 아이는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는 하나뿐인 딸인 나에게 은근히 의지하는 것 같았어요. 무슨 일이든 나에게 상의를 했지요. 석 달이 지나자 더는 아이를 숨겨서 키울 수 없었어요. 엄마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지요. “엄마, 이제 이 아이는 우리 손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아요. 이 아이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할까 봐요. 역청과 나무 진을 사용해서 물이 안 들어오는 갈대 상자를 만들고 거기에 아이를 넣어 나일 강에 띄워 보내면 어떨까요?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실 거예요.”어머니는 그 생각이 옳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어요. 이런 엄청난 생각을 한 저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나일 강에 띄운 갈대 상자가 어떻게 되는가 따라갔어요.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 따라가리라 마음을 먹었지요. 다행히 갈대 상자를 사람들이 보았어요.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 상자를 보고 건져오라고 명령했지요. 저는 숨어서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는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제 입에 할 말을 담아 주세요.”저는 결례를 무릅쓰고 공주 앞으로 나아갔어요. 자칫하면 가난한 히브리인, 노예 소녀라고 멸시받고 쫓겨날지도 몰랐기에 최대한 겸손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나아갔어요. 저의 당당함에 공주는 당황하면서도 제 말을 들어주었지요. “제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찾아서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하면 어떨까요?저는 공주가 아이를 키우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필요로 하는 것이 있어요. 그 필요를 자극하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 ‘Yes’라고 답을 하기 마련이지요. 공주는 제 말을 옳게 여기고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생명을 구하고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의 출발은 이렇게 수많은 여자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요게벳, 히브리 산파, 애굽의 공주, 그리고 저도 미약하나마 힘을 보탰지요. 예수님의 족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출발에도 여러 명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장면 2. 미리암의 노래 세월은 흘러 80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동생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어요.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바로 왕을 굴복시키고 수많은 사람과 함께 애굽에서 나오는 장면을 여러분이 보셨더라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도 90년 넘게 살아왔지만, 이보다 더 큰 감격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감격스러운 장면을 목격했어요. 바로 홍해가 갈라지고 우리는 무사히 건너왔지만, 애굽 군대는 홍해에서 수장되었습니다. 그때 무뚝뚝한 모세조차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목소리나 음정이나 박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구원하심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모세는 홀로 소리를 높여 찬양했습니다.“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1).1)모세의 노래는 길게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 노래는 너무 길어 따라 부르기가 힘들었습니다. 높은 곳에 서서 소리 높여 노래하는 모세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은 존경과 감동과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저는 그 순간 생각했어요.2) 영광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한다. 그리고 노래는 모든 백성이 함께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쉽고 간단해야 한다. 저는 모세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소고를 치고 춤을 추면서 함께 노래하자고 했습니다. 90이 넘었는데 제가 노래를 하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그래도 정성을 다하여 노래하자 백성이 일제히 따라 부르기 시작했지요.“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21). 독창도 훌륭하지만, 합창은 더욱 훌륭합니다. 백성은 결코 이 노래를 잊지 못할 거에요. 유월절 행사 때마다 우리 민족은 이 노래를 부를 거예요. 이날의 영웅은 모세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닙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________________1) 중동의 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한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 교수인 S. D. Goitein은 모세의 노래가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로 시작하는 것과 달리 미리암의 노래가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명령형으로 쓰인 것에 주목하였다(S. D. Goitein, “ Women as Creators of Biblical Genres”, Prooftexts 8( 1988, 1-33 ), 7p). 국제성서 주석 출애굽기를 쓴 Martin Noth도 모세의 노래는 일인칭으로 되어 있는 독창이지만, 미리암의 노래는 회중을 향하여 찬송하라고 요구하고 함께 부른 회중 찬송임을 지적하였다(Noth Martin,’출애굽기’,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1, p147). 미국의 두 구약학자 F.M.Cross와 D.N.Freedman은 “The Song of Miriam”이란 공동 논문에서 미리암의 승전가가 모세의 노래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리암의 노래가 먼저이며 모세는 그것을 확장한 것이라고 하였다(이영미, “추락하는 것에도 날개는 있다: 여성 지도자 미리암을 회상하며”, 신학연구 56집 (2010, 43-69) p47).2) 미리암은 이스라엘 최초의 여자 선지자로서(출15:20)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지도적 역할을 했다. 탈굼은 출애굽 당시 세 명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모세는 전승과 율법 교사로, 아론은 사람들에게 화해를 가져오는 자로, 미리암은 여성들을 교육하는 자로 제시한다(김민정, ‘민중적 여성 지도자 미리암의 재부상’, 신학사상 183집 (2018년 겨울호, 353-388), p353). (장면 3,4는 다음호에)장면 3. 모세에 대항하는 미리암장면 4. 미리암의 죽음과 그 후
신학
구약
미리암
모세
요게벳
십브라
히브리산파
창조 문제, 어떤 자세로 논쟁해야 하는가
by Samuel Emadi
2020-03-18
상대방이 지구의 연대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이 얼마나 긴지를 따져 보기 시작하면, 금세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의혹의 시선을 그에게 보낸다.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그의 견해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 그러한 견해 차이가 신학적인 노선 차이로 여겨질 때면 더욱 그렇다. 흔히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라도 관대한 태도를 보이지만, 유독 창조 문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과 곧잘 싸울 태세를 갖춘다.지나온 상황을 한번 돌아보면,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이든 오랜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이든 서로의 도전에 직면할 때 느끼는 불편이나 의혹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령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신학계에서 창조론 대 진화론의 논쟁은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와 현대주의자(modernist)를 가르는 경계선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한 지난 역사가 한몫을 해서인지, 지구의 나이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의 실제 기간 따위를 따지는 문제는 소위 대속의 범위라든가 은사지속론 대 은사중지론에 관한 논쟁보다도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그 결과,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창조 문제가 언급되면 다소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지나친 일반화일지 모르겠지만, 젊은 지구 창조론자는 오랜 지구 창조론자가 경박스럽게도 다윈의 진화론에 이끌려 결국에는 자유주의 신학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길로 빠지게 되었다고 보는 반면, 오랜 지구 창조론자는 젊은 지구 창조론자의 논의가 창세기 1장의 문학적 장르에 대한 고려도 없이 진화론에 대한 우려만 느낀 나머지 지성적으로 천박한 근본주의 신학의 족쇄를 차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비판한다.신학적인 논쟁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라결국 창조 교리를 대할 때 우리가 겪게 되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취급해야 할 신학적인 주제를 올바로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특정 주제가 기독교 세계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또 복음의 메시지와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따라 그 중요성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르침은 1차적인 주제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한 가르침 없이는 복음을 포기해야 하거나 아예 상실하게 될 수도 있는 주제가 그에 해당한다. 2차적인 주제는 교단이나 교회를 분리시킬 정도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띠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는 신자와 비신자를 가를 만큼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령 침례교인과 장로교인 또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아니면 언약주의자와 세대주의자 등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달리 3차적인 주제는 복음이나 기독교 세계관에 훨씬 덜 영향을 미치는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는 한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이렇게 3단계로 구분하는 차등적인 접근이 모든 교리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우리가 지닌 신학적인 확신이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덜 본질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중요성을 달리한다는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1차적인 주제가 신학 자체의 신뢰성을 판가름하는 문제에 해당한다면, 2차 혹은 3차적인 주제는 형제자매들 간에도 의견의 불일치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와 같은 불일치를 감수할 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이처럼 신학적인 주제에 차등을 두는 일은 일부 교리를 가볍게 여기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교리가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어떤 교리는 다른 교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작업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삼위일체 교리를 포기하면 복음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천년왕국설에서 당신이 선호하는 견해를 포기한다고 해서 당신이 믿고 있는 신학 체계 전반에 손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저 특정 본문에 대한 해석을 양보하면 될 뿐이다.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여기서 지구의 나이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의 기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또 그러한 주제에 대해 어떠한 확신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문자적으로 6일 창조를 믿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지지한다). 지금 강조하려는 바는, 창조 교리에 있어 1차적인 주제를 2, 3차적인 주제와 구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의혹을 줄이고, 가능하다면 누군가를 가르칠 때 창조 교리에서 어디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지를 일깨워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적인 주제에 차등을 두는 일은, 어떤 지점에 있어 서로가 의견의 불일치를 가져도 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될 뿐 아니라 타협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해서는 자신의 확신을 공고히 세우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이와 관련된 한 가지 예로서, 최근 복음주의자들이 종말론에 대한 입장 차이를 서로 어떤 자세로 대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 글에서 내가 제안하고 있는 신학적인 차등을 고려하는 태도를 매우 잘 보여 주게 되었다. 원래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전천년주의를 부정하는 일은 대다수 근본주의자들에게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일과 다름없이 여겨졌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종말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최후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등이 1차적인 주제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중요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천년왕국이라든가 휴거 또는 적그리스도와 같이 부차적인 주제에 대한 견해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1차적인 주제를 설정하라창조 교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제를 구분하는 작업을 할 때, 이미 유사한 작업을 수행한 역사적인 선례를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창세기의 시공간성’(Genesis in Space and Time)이라는 작품에서 성경의 나머지 부분이 일관성과 진정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창세기 1-11장 본문을 통해 우선적으로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가 있음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럼으로써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선별하는 작업을 선보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도 창조와 관련된 일곱 가지 포인트를 1차적인 주제로 제안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각 포인트가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와도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이러한 포인트를 염두에 두고 창조 기사를 읽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1. 하나님은 무(無)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2.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피조물과 구별되신다.3.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4.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5.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6.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첫 조상이다.7. 아담과 하와는 태초의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께 실제로 불순종했던 역사적 인물이다.성경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포인트를 창조 기사뿐 아니라 여러 본문을 통하여 증언한다(롬 4:17; 고전 1:28; 고후 4:6; 히 11:3). 이 두 가지 포인트는 하나님이 스스로 영존하신다는 자존성의 진리를 대변한다. 세 번째 포인트는 독자가 창세기 1장의 장르와 해석에 대해 어떤 접근을 취하든지 간에 그 본문이 자체적으로 증언하는 사실이다. 게다가 창조에 반영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성경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기본 전제이며, 고금을 막론하고 발흥하는 모든 형태의 영지주의를 반박하는 기독교 변증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네 번째 포인트는 성경의 거의 모든 내용을 통해 확증된다. 이 포인트는 우리의 신학이 바른 궤도를 따라 돌아가도록 붙들어 주는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한다.다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 포인트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을 다룬다. 내가 보기에 창세기 1장의 연대는 복음주의자들 간에 혹 이견이 발생하더라도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창세기 2-3장의 역사성은 논의의 주제로 삼아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을 다스리게 하신 이야기, 또 배우자를 허락하시며 가정을 세우셨으나 이내 그들이 불순종하여 자신의 임재로부터 그들을 쫓아내신 이야기 등은 반드시 실제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특별하게 창조되었다는 다섯 번째 포인트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론의 신학적 토대를 상실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대한 의식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인류가 한 시조를 공유한다는 여섯 번째 포인트를 포기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인종이나 민족성 또는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인류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자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행 17:26). 마지막으로 아담의 타락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일곱 번째 포인트를 부정하게 되면, 원죄 교리 역시 부정해야 할 뿐 아니라 아담과 그리스도의 모형론을 위시한 핵심적인 성경신학도 세울 수 없게 된다(롬 5:12-21).서로를 받아주며 논쟁하라이와 같은 1차적인 주제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상대에 대한 의혹을 품지 않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신학적으로 논쟁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때로는 필요하기까지 하다. 물론 서로가 성경의 무오성을 힘있게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일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럴 경우에는 창세기 1장이 내포하는 물리적 시간이라든가 지구의 나이 또는 타락 이전의 동물의 죽음이나 포식 관계 등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1차적인 교리에 대한 확신과 모순되지 않는 선에서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놓고 논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따지기보다 그에 관하여 어떤 자세로 논쟁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결국 창조에 관한 대화 자체를 회피하거나 또는 그에 관해 아예 토론하지 않는 게 우리의 상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문제를 놓고 토론하며 자신의 견해를 엄격하게 방어하기 위해서는 펜을 들고 얼마간의 잉크를 거기에 쏟아붓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러나 서로의 피를 쏟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 글의 요지이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창조 교리에서 1차, 2차, 3차적인 주제가 무엇인지를 더욱 세밀하고 명확하게 구분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ological Triage and the Doctrine of Creation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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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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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자
역사성
근본주의자
프란시스쉐퍼
창세기
주님의 부활은 당신의 반응을 요구한다
by Jonathan Parnell
2020-03-14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 사건이다.만일 골고다 언덕에서 그분의 생애가 끝났다면, 우리는 그 희생이 정말로 무엇을 이루어 냈는지 알지 못하여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선한 목적을 위해 그분이 죽으셨다고 한들,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아직도 무덤 속에 계신다면, 그 죽음이 기약한 모든 내용은 사실상 희망 고문을 안겨다 줄 뿐이다.그러나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면, 그 불멸의 생명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 실제로 무엇인가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으로 무엇인가가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그 죽음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부활은 실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전체도 부활이 남긴 수많은 결과물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부활이 도대체 성경의 전체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이 복음의 메시지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예수님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복음이 그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님을 말해 준다.단지 독서용이 아닌 이야기기독교의 복음은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이야기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단지 독서용으로 기록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본질상 그 이야기는, 그냥 담담하게 내용을 관찰하는 태도가 아니라 뜨거운 마음으로 그에 반응하는 자세를 독자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 신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성경은 “단지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 내려가는 반응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살아 내는 반응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이 그와 같은 반응을 요구한다.만일 부활이 일반 전설과 같이 하나의 듣기 좋은 이야기일 뿐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반응도 필요 없이 그 이야기를 평가하기만 하면 된다. 아니, 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별로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저 흥밋거리로 읽고 머리로만 내용을 이해한 후에 원래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부활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바뀔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실제 사건이라면, 우리는 그 사건을 담고 있는 이야기에 완전히 사로잡혀야 한다.그렇다. 정말로 부활이 단순한 이야기 그 이상이라면, 우리는 그저 남들의 대화나 엿듣는 자세로 그 사건을 방관하며 지나가는 구경꾼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실제로 등장하는 군상들이기 때문이다. 저들과 똑같이 타락하여 똑같은 곤경에 처해 있는 자들이다. 결국 우리 각자는 영광을 쫓고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아직도 정작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는 자들이다. 고로 이야기를 읽다가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단지 우리에 ‘관해’ 말해 왔던 게 아니라,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고.그저 그런 사람이 아닌 그분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사건은 언제나 그 이야기의 정점에서 우리의 반응을 기다린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든 혹은 애써 무시하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심지어는 그 사건에 대해 아무 코멘트도 하지 않으려는 자세 또한 일종의 코멘트다.교회의 초창기 지도자들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영향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죽으신 금요일과 이어지는 토요일까지도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일 수밖에 없던 그들의 두려움은,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다 사라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한 저자인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에 이어 또 다른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은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불린다.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그 책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예수님의 생애가 아닌 초기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도록 기록되었다.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부활 사건이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메시지 자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최초에는 부활을 목격한 증인만이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가 될 수 있었다(행 1:22).누가가 기록한 첫 번째 설교를 살펴보면, 동요하는 군중을 향해 시종일관 부활에 초점을 두고 메시지를 전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메시아에 관한 구약 예언에 비추어 부활을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오랫동안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라고 담대히 선포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그러고 나서 부활과 뗄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을 언급한다. 곧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신분이 공적으로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하늘에서 통치하시며 성령을 보내어 그 부활 소식이 더 강력히 들리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이다(행 2:32-35). 그리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리면서 설교를 마무리한다.“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이에 대해 누군가가 단언했듯, “하나님이 그분을 주님이자 메시아가 되게 하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베드로가 전한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이 바로 오래전부터 약속된 메시아이며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 그분을 붙들 수 없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우리가 어찌할꼬이 설교를 들은 자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베드로가 마지막 말을 전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청중은 “마음에 찔려” 당혹스러워했다(행 2:37). 마음에 찔렸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을 문자적으로 옮긴 표현이다. 우리 식으로 옮기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의미이다.이에 그들의 영혼은 진동하고, 인생의 위기감이 찾아들었으며, 그저 세상에서나 잘살아보려 애써 온 자들의 마음속에 그 모든 사실이 소용돌이치며 혼란을 자아냈다. 진짜 현실이 그들 앞에 드러난 것이다. 베일에 가려 있던 현실이 원색적으로 그들 앞에 펼쳐졌다. 정말로 중요한 사건이 이제 그들에게도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었다.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도 무언가 달라져야 했다.이와 같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꾸준히 언급된다.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이나 매한가지였다. 사도들은 그 메시지를 듣는 자들이 분개하든(행 4:2),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하든(행 17:32), 부활의 소식을 계속 전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든 부활의 현실은 모든 자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말이다.당신에게 선포되는 복음우리는 바울이 안디옥에서 전한 설교를 통해서도 부활을 선포하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안디옥은 오늘날로 치면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1세기의 대도시다. 그 도시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성경 이야기의 요점을 되짚어 본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같이 메시아에 관해 언급하는 구약 예언에 비추어 부활 사건을 해석한 후, 그 사건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져다주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우리는 다시 한번, 이렇게 선포된 메시지가 청중의 삶 속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볼 수 있다. 곧 바울의 설교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 소식을 듣는 자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부활은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나 교훈이 아니다. 또는 현실과 동떨어진 신앙의 사색거리도 아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다. 진짜 뉴스가 여기에 있다. 그분이 살아 계신다.이처럼 부활은 우리를 위한 죄 사함의 소식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 소식을 듣는 자는 단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믿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부활은 우리의 반응을 요구한다. 이에 무응답으로 일관할 수 있는 중간 지대란 없다. 그 소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든가, 아니면 그 소식을 거절하고 멸망의 길로 걸어가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다.“예수님은 당신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그 생명을 바치셨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 결과 이 순간에도 살아 계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자유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분을 받아들이고, 신뢰하고, 따르라.”저 복음의 사자들이 여기에 있었다면, 이 같은 메시지를 당신에게 전했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Resurrection Demands Response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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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은 이해 못하는 십자가 의미
by Matt Bennett
2020-03-07
지난 1,400년간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대화 주제는 “예수가 정말 십자가에서 죽었는가?”라는 역사적인 질문에 대한 논쟁에 집중되었다. 코란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반면(수라 알-니사 [4]:157),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 장사, 그리고 부활을 복음과 직접 연결한다(고전 15:3-5).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하기에 이야기한다.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질문이 중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논쟁의 중점이 되었을 때 “예수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가?”라는 근본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하게 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속죄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은 구약의 레위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구약의 제물에 관한 제도를 알지 못하면, 무슬림 친구들은 대속하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세 가지 부분에서 오해하게 될지도 모른다.1. 속죄의 의미첫 번째 오해는 언어에서 온다. 코란은 “카파라”(Kaffāra)라는 단어를 사용해 죄에 대한 보상을 말한다. 이 단어는 아랍 성경에도 “속죄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키퍼”(유대교의 대속죄일, 욤 키푸르가 여기서 나옴)를 번역했다. 성경에서 속죄가 포함하는 것은 대표 역할을 하는 제사장과 대체 제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쳐진 생명을 상징하는 피이다. 속죄의 결과는 죄에 대한 용서와 불결함의 정화이다.코란에서는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이 속죄의 대리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경건함, 선행, 혹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뉘우침을 보고 죄를 덮거나 없앤다. 이슬람에는 용서를 받거나 정결해지기 위한 제사장, 우리를 대신하는 희생물이 없다. “카파라”라는 단어는 이슬람의 코란과 기독교의 성경 모두에 쓰였지만, 그 뜻은 매우 다르다.2. 제사의 목적코란에도 제사가 등장한다. 세계 곳곳에 있는 무슬림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이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한 것(수라 알-사파 [37]:99-111)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르기 위한 하나의 행사로 생각하지만, 코란은 이 제사를 각 신앙의 공동체가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린 의식으로 보고 있다(수라 알-하지 [22]:34-67). 그렇다면 이슬람에게 있어 매년의 희생 의식은 유대교와 기독교보다 먼저 있었다는 주장과도 같다. 이 주장은 코란의 한 부분(수라 알-임란 [3]:67)에 나타나는데, 이 부분은 아브라함이 유대인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닌 무슬림이었다고 말한다. 희생 제사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기보다는 어떤 사람을 이슬람 전통에 속하는 무슬림으로 확인하고, 이슬람교 신앙을 종교의 최종적인 은혜 베풂으로 확립하는 역할을 한다. 3. 같은 인물, 다른 이야기속죄와 제사가 이렇게 다른 견해를 가진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무슬림에게 설명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려움의 가장 큰 이유는 피조물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속죄와 제사가 완전히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다.코란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복종할 것인지, 그의 지도를 따를 것인지, 그의 방식을 기억할 것인지를 알아보는 시험으로 삶을 제시한다. 피조물이 조물주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초연하고 냉담하다. 코란은 자신을 정결케 하는 방법과 악행의 용서를 구하는 방법을 규정한다. 사람은 사는 동안 그들이 한 행동을 기준으로 마지막 날에 심판받을 것이다. 무슬림에게는 1세기의 어느 한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슬람의 속죄 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세 가지 장벽은 이슬람 추종자들에게 기독교의 속죄에 대한 이해를 전달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 세 가지 문제, 즉 속죄와 희생, 그리고 양쪽 모두 관련된 성경의 메시지는 더욱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피조물과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이 세계를 창조했다.하나님은 한 민족을 부르시고 이끄시며, 그 사이에서 함께 하시기 원하신다. 레위기(특히 16-17장)는 거룩하고, 정결하며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 많고 불순하며 의롭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하시기 위해 만든 계명을 목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레위기의 가르침에 익숙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레위기의 대제사장, 그리고 그 이전의 제사와 다른 단번에 드려진 제사로 여긴다.이 세 가지에 비추어 볼 때, 히브리서는 왜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희생과 제사장직에 그렇게 높은 가치를 두는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히브리서는 성육신 훨씬 이전부터 그의 사람들과 함께 거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슬림 친구를 초대해서 히브리서를 공부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속죄의 의미와 용서, 그리고 정화를 담은 제사의 목적을 보여줄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신학적인 부분에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속죄를 정의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성경적 제사가 올바르게 자리 잡기를 기도한다. 성령님께서 일하시기를 구하면서 말이다. 그 구원의 이야기는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큰 감사와 기쁨을 주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to Help Muslims Understand the Cross번역: 허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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