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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울이 죄 짓도록 하셨을까?
by Richard McDonald
2020-02-19
판사가 교통법규를 많이 위반한 운전자의 면허증을 정지하겠다고 경고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경고를 받은 운전자는 다시 붙잡히게 되었고, 결국 그의 면허증은 정지되었다. 이 상황을 보면서 판사는 운전자가 또 다른 위반을 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경고만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면허 정지는 반복된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하나님도 같은 의미로 심판하신다하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우리 삶의 죄를 심판하신다(겔 18:23–32; 히 12:10). 이러한 심판은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그렇게 심판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 하신다.재판관 되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은 사무엘상 16–19장에 나타난 사울과 악령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말씀을 읽고 나면 즉각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다.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사울을 꾀어 다윗을 죽이도록 하신 것인가(삼상 18:10–11; 19:9–10)? 하나님께서 사울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하셨던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그가 살인을 선택한 것인가?얼핏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심으로 사울을 실패로 인도하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야고보서 1장 13절에 비추어 이 말씀을 읽어볼 때,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무엘상 16–19장과 야고보서 1장 13절 말씀 간에 조화를 어떻게 이루어야 할까? 사울과 악령의 이야기에서 두 가지 핵심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1.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악령을 보내셨다사울 통치 초기를 볼 때 그가 왕으로서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인상을 준다. 사울은 전도유망한 왕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며 몇 차례 중요한 승리를 이루었고(삼상 11; 13:1–4; 14:16–23), 또한 지혜와 자비를 행사했던 왕이었다 (삼상 11:12–13).하지만 그의 통치 기간 중 일어난 두 번의 사건은 모든 게 완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사울은 자신과 군대가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 번제를 드리는 일을 감행했다(삼상 13:5–14).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모습을 꾸짖었고, 주님께서 마음에 다른 왕을 이미 택하셨다고 주장했다.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을 오해한 점, 하나님을 반역하며 불순종한 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점 때문에 사무엘은 또 한 번 사울을 꾸짖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호와께서는 사울의 왕권을 폐지하셨고(삼상 13:14; 15:23) 그에게서 성령이 떠나게 하셨으며(삼상 16:14), 그에게 악령을 보내셨다(삼상 16:14). 하나님께서는 악한 영을 통해 사울을 유혹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사울의 완강한 불순종에 대응하는 심판의 행위로써 악령을 보내신 것이다.성경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에 따라 모든 영적 세계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삿 9:23; 삼하 24:1; 대상 21:1; 눅 22:31).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울의 고집스러운 불순종을 심판하시기 위해 악한 영을 보내셨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사울은 다윗의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은혜와 자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삼상 16:23).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를 회개로 인도하려는 목적이었다(롬 2:4). 그런데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셨다면, 다윗을 죽이려고 한 일의 책임이 어떻게 사울에게 있는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저항할 수 없는데 말이다.2. 사울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이 있다사울은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방향키를 잃어버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제불능의 배와 같지 않다. 사울은 그의 삶에 있어서 키를 잡고 선장이자 주인공이었다. 그는 사무엘상 16–19장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고 이는 다윗을 죽이려 했던 책임이 그에게 있었음을 보여준다.사울은 다윗을 궁전 주변에 두어 하프 연주를 하도록 했다. 악한 영이 사울을 지배할 때면 언제든지, 다윗은 하프를 연주했고 사울을 회복시켰다(삼상 16:23). 사울은 연주를 위해 다윗을 소환함으로써 다윗의 사역을 수용했다. 더구나 버림받은 왕인 사울은 하나님의 선택된 종이었던 다윗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의 성공을 질투하며 그의 의도를 매도하는 선택을 했다(삼상 18:8–9).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사울의 밑에서도 다윗은 형통할 수 있었다. 다윗은 왕의 무기를 드는 자가 되었고(삼상 16:21), 골리앗을 죽였으며(삼상 17),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으로 승격하였다(삼상 18:5). 다윗의 형통함과 그를 향한 백성들의 사랑(여인들이 그를 찬양했던 것도 포함해서)은 사울이 받아들이지 못했다(삼상 18:7–8). 사울은 그날부터 다윗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질투와 불신의 마음을 품기로 작정했으며, 이는 결국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질투와 불신을 품기로 선택했던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베푸시는 평화의 방편을 거절했다. 그리고 스스로 악한 욕구를 쫓았다. 사울은 다윗을 향해 두 번이나 창을 던졌고, 이 두 번 모두 악한 영이 그를 지배했을 때였다(삼상 18:10; 19:9).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다윗의 음악은 더 이상 사울을 회복시킬 수 없었고, 사울은 스스로 악한 욕구에 몰두하였다. 사울에게 야고보서 3장 16절은 꼭 맞는 말씀이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사울 인생의 열매는 그가 신자가 아니었음을 말해주지만, 그의 삶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적용점을 제시한다. 사울과 악한 영에 대해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이 복수심에 사로잡힌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하시지 않는다. 야고보서가 말씀하는 대로 우리는 자신의 악한 욕심에 미혹될 때에 유혹을 받는다(약 1:14).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임의대로 하지 않으시고)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 하지만 그 목적은 회개에 있다(겔 18:23, 32; 롬 2:5–11; 히 12:10).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타락한 세상의 판사는 너무 성급하거나 가혹하게 판결을 내릴 수도 있지만, 하늘의 재판관께서는 놀라운 모습으로 인내하신다. 사울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완강하게 불순종했다는 사실을 증명한 후에야 심판을 받았다. 그렇다. 하나님의 인내가 만료될 수 있다(시 103:9; 벧후 3:8–10). 반면 심판 가운데서도 신자와 불신자들을 향한 자비를 연장하시면 그들이 돌이키기도 한다(롬 2:4).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울은 죽을 때까지 회개치 않는 불신앙과 반역을 고집했다(삼상 31). 비록 신자의 구원이 확실한 것이지만, 우리는 유혹이나 죄를 완전하게 이겨낼 수 있는 면역성이 없다(고전 3:3; 약 4:1). 사울이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통해 악한 영을 대항할 의지를 갖게 된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내주하는 죄악을 대항할 의지를 갖는다. 불신자의 경우, 불신과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롬 1:24; 2:8)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회개하는 믿음을 통해 진정된다. 우리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들을 유혹하고, 그들을 멸망시켜 복수하시려는 재판관이 아니시다. 그는 정의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며, 모두가 회개하고 생명 얻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딤전 2:4).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d Made Me Do It!’ Why Did God Tempt Saul with an Evil Spirit?번역: 정진호
신학
구약성경
회개
심판
선택
책임
설교
불순종
미혹
자비
믿기지 않을 만큼 좋은 소식
by Robert B. Strimple
2020-02-15
나는 1935년 세례(침례)를 받은 이후로 규모가 큰 ‘주류’ 개신교 교단에서 자랐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시절 유행했던 옛 자유주의를 설파하는 목사님들에게 많은 실망을 해서 부모님께 다른 지방의 정통 장로교회로 옮기자고 말했다. 우린 교회를 떠났고, 그곳에서 하나님은 깊은 성경적 믿음을 주셨다.오늘날 미국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주류 교회들은 성경적 신앙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어떻게 성도를 끌어모으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 결과 매년 성도의 수가 줄어들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하다. ‘신생’ 교회들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복음주의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상은 과거의 낡은 자유주의와 많은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성경적 복음을 고수한다고 여전히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의 풍성한 기쁨과 성령의 힘으로 설교하기보다는 청중을 지나치게 의식 한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배우자, 부모, 자금 관리자가 되는지와 같은 ‘실용적’인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설교한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이고 견고한 토대 없이 이런 설교만 듣는 청중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제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와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빠져서는 안 된다. 성도의 수가 증가하고 신앙이 깊어지는 것에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이 선포돼야 하고 그것이 믿어져야 한다(롬 10:13-15). 복음이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핵심적으로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참담한 여론조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최근 본 자료에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1950년대에(내 세대)는 75퍼센트에 달했으나, 다음 세대(내 자녀 세대)는 35퍼센트로 줄었다. 그리고 진행되는 연구 프로젝트에 의하면 그다음 세대(나의 손주 세대)에는 15퍼센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 연구에서는 “교회에서 자란 십 대들은 신앙을 급격한 속도로 거부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들이 신앙에 다가서도록 할 수 있는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그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소위 말하는 ‘실용적’ 설교 주제가 왜 복음을 대체하게 되었는가? 1960년대 캐나다인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전달 도구가 마사지다”(the medium is the massage)라는 말로 유명하다. 그는 “교회의 문제는 나쁜 소식이 뉴스인 세상에서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있다”라고 주장했다. 성경의 메시지는 좋은 소식일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살린 기적의 소식이다. 이러한 소식은 이웃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방법에 관한 일상적인 뉴스보다 더 믿기 힘들다. 복음의 내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큰 것이기에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증거들로 참되고 입증되었기 때문이다(히 2:3-4).나는 당신에게 요한복음 11장 17절부터 45절에 있는 놀라운 이야기를 한 번 더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주님이 마르다에게 하신 질문, 그분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믿느냐”(26절). 마르다가 “예 주님, 믿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성령은 우리 각자가 대답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신다.마르다의 대답은 얼마나 통찰력이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절). 하나님 말고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고 나서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믿느냐?” 마르다가 대답했다. “네, 주님. 내가 곧 오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마르다는 부활이 하나님이 행하실 엄청난 구원의 행위라는 것을 정확히 보았다. 그녀는 구원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메시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이다. “예 주님, 당신 안에 생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마르다는 사실상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이 세상에 오기로 약속하신 분입니다.”우리는 그분이 행하신 권위적인 기적을 알고 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예수님이 부르시자 실제로 죽은 자가 나왔다(43-44절). 예수님은 부활의 능력을 행하셨다.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참된 마지막 구원자이자 참된 말씀이심을 증명하셨다.대학 시절에 꽤 유명했던 프랑스의 실존주의 무신론자인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그의 저서 “페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원은 나에게 너무 큰 단어야. 나는 그렇게 높은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아.”라고 말이다. 구원은 예수님에게 너무 높은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소식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크고 놀라운 소식이기에 믿어지지 않을 수 있다.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출처: www.ligonier.org원제: Too Good to Be True? 번역: 송유희
복음
부활
자유주의
복음주의
실용적
생명
마르다
마샬
입양 교리가 왜 그토록 달콤한가!
by Aaron Menikoff
2020-02-11
판사가 몇 마디 선언과 함께 망치를 친다. 그러면 한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이 주어진다. 미국 전역에 있는 법정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일이다. 씁쓸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일이라고 할까. 친부모에게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이 없거나, 그 부모가 아예 양육 자체를 거부할 때, 아이는 입양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판사의 판결이 내려지면 그 아이는 따뜻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새로운 부모에게 완전히 소속된다.최근 몇십 년 동안 입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특히 크리스천에게 그 관심은 야고보서 1장 27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구절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순결한 신앙에 대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크리스천으로서 이 구절을 적용하기 위해 실제로 고아를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 자체로 훌륭한 신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볼 때 입양이란 어느 한 구절에 근거해서 이뤄진다기보다는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입양 교리가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우리를 입양하신 하나님입양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신 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자비로운 행위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으로부터 긍휼과 보호와 공급과 훈계를 받고, 결단코 버림받지 않으리라는 약속과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의 획득으로 입양을 설명한다.세상에서는 판사의 판결에 따라 입양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정이 얼마나 지속될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정말 새로운 가정에 소속되었으며 그 가정이 자신에게 주어진 게 맞는지 의아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입양하시는 일에는 그와 같은 의심이나 불안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 백성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다른 누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죄인을 자기 자녀로 삼으신다(요 1:12). 이와 같은 의지는 완전하여 결코 바뀌는 법이 없다.하나님의 입양은 그분의 영원한 계획과 그칠 줄 모르는 사랑에 기초해 있다. 산맥이 형성되고, 강물이 흐르며, 하늘에 새가 날기 전부터 그분은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5).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죄인을 자기 가족으로 입양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지는 그렇듯 창조 사역보다도 선행한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를 향해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실 뿐 아니라(사 41:8; 약 2:23) 자녀라고도 부르신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이러한 자비에 우리는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다.가장 달콤한 교리입양을 가장 달콤한 교리로 표현하면 좀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신학자는 그 교리가 얼마나 우월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지 강조해 왔다. 예를 들어 존 대그(John Dagg)는 “칭의보다 높은 수준의 은혜를 보여 주는 축복”이라며 입양을 칭송했다. 누군가를 사면하는 일은 판사가 하지만, 그 사람을 입양하는 일은 아버지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도 입양이야말로 칭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표현했다. 로버트 웹(Robert Webb)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우리 모두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그 자녀를 부드러이 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달콤하게 느낀다. 때로 고난이 우리를 덮치고 근심이 홍수처럼 밀려오면, 우리는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아버지께 도움을 구하는 손을 뻗친다. 혹 죽음의 천사가 문간에 들어서며 사랑하는 이를 데려갈 때조차,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며 가장 친밀한 위로를 얻는다. 그리하여 세상의 위협이 물결치며 크게 범람할지라도, 우리는 저 별들 너머로 빛나는 언덕을 바라보며 거기에 세워진 아버지의 집을 묵상한다. 그러면 무너져 가는 이 땅의 장막 가운데서도 큰 격려를 받게 된다.”이러한 교리는 단지 전문적인 신학자들만 음미할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입양에 내포된 보석 같은 진리는 미국의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크리스천 노예들을 붙들어 준 가르침이 되기도 했다. 즉 그들로 하여금 잔혹한 속박을 견디게 하고 때로는 생명을 걸고 자유를 찾아 떠나도록 만들어 준 진리가 바로 입양 교리였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단지 주권을 행사하시는 통치자만이 아니라 한없이 자애로우신 아버지로도 보였기 때문이다. 그 예로 한 가정의 노예로 살았던 앨런과 윌리엄 크래프트 부부(Ellen and William Craft)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성경의 입양 교리를 묵상하면서 주인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출발할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불을 끄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기도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셨듯이, 이제 우리도 잔인한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입양을 주제로 한 성경 이야기크래프트 부부에게 성경이란 입양을 주제로 한 이야기였다. 이는 모든 크리스천이 알아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원래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에게도 아버지가 있었다.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돌보시며 모든 필요를 다 채워 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계시면서 동산을 거니시는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창 3:8).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동산 밖으로, 즉 아버지의 임재 밖으로 그들은 추방되었다(창 3:24; 롬 5:12).이후 아브라함을 통해 번성한 아담의 자손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성경은 놀라운 이야기를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즉 하나님이 그 자손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며 다시금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출 4:22-23). 하나님은 타락한 그 백성을 불러내어 자기 곁에 두고자 하셨다. 그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그들이 자기에게 순종하면 다시 한번 그들 가운데 거하겠다고 약속하셨다(레 26:12). 마치 지난날 에덴에서 그러하셨듯이 말이다.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법도와 사랑을 거부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그분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가 되시건만(시 103:13), 그 누구도 그분을 그렇게 경외하지 않았다.이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전율을 일으키는 큰일을 행하셨다. 바로 완전한 주권자요 공의로운 창조자이신, 그 영원하신 아버지가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죽으시며 아버지의 진노를 감당하셨다. 이 끔찍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큰일을 이루셨다.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을 이루신 것이다. 또한 그 대속을 적용하여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고(롬 3:24),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신다(고후 5:17). 그리하여 자기 가족으로 그들을 입양하신다(갈 3:26; 4:4-7).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은 있을 수 없다.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다 깊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어딘가를 찾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하늘 아버지만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권능을 따라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소속감을 주실 수 있다. 곧 세상의 죄인들을 자신의 자녀이자 상속자로 받아주시는 일을 행하실 수 있다(롬 8:17).입양 교리가 달콤한 이유그러므로 입양 교리는 달콤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진리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첫째로 입양 교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구든지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확신을 갖게 된다(롬 8:15-16). 이 확신은 방탕한 아들을 한없이 품었던 그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마음이다(눅 15:11-32). 그러므로 당신이 구원의 확신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라면, 당신을 자기 자녀로 입양하신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기 바란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당신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로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둘째로 입양 교리는 교회의 정체성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혹 당신이 해외에서 다른 신자들을 만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면, 그들에게서 당신과 비슷한 모습들을 발견하며 즐거워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언어나 문화에서 느껴지는 차이와 상관없이, 모든 크리스천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깊은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 모두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가 된다. 이처럼 우리는 전 세계에 가족을 둔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해야 한다.그와 같이 하나님은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를 우리에게 가족으로 허락하셨는데, 특별히 우리 각자가 속한 지역 교회에서 그 가족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를 때 기존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바가 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도 함께 주셨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우리의 신앙생활은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정이 있다. 곧 우리 각자가 속한 지역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들의 모임이다. 우리는 그 모임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군가가 고독감을 느끼며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실 뿐 아니라 교회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가 자신의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셋째로 입양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우리 역시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마음을 품게 도와준다. 몇 년 전에 아내와 내가 한 아이를 입양했을 때, 우리는 어떤 의무감에서 그 일을 한 게 아니었다. 당시 우리는 야고보서 1장 27절이 우리 부부를 포함한 모든 크리스천에게 고아를 돌보며 가정을 제공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는 성경 전체가 입양에 대해 가르치는 진리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즉 우리 자신이 약하고 추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진리,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될 수 있는 길이 주어졌다는 진리에 사로잡혀 있었다(롬 5:6-11). 그렇기에 우리 부부가 딸아이를 입양한 일은 그저 우리를 향해 쏟아부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일 따름이었다.그러므로 당신도 입양 교리를 한번 묵상해 보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그 교리가 얼마나 달콤한 진리인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으로 하여금 그 사랑을 드러내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혹 언젠가는 고아를 입양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처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을 입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당신의 삶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doption: The Sweetest Doctrine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입양
성령
사랑
로버트웹
정체성
존대그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라
by David Mathis
2020-02-08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것만 찾는 시대에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던(행 17:21) 옛 아테네 사람들과 같아지고 있다. 어쩌면 이미 그들을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IT와 디지털 혁명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즉 문자 그대로 “뉴스”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오래된, 영광스럽도록 오래된 진리들을 붙든다. 이 진리는 뉴스에 탐닉하는 이 시대와는 맞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의 현위치를 파악하고 영적 판단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D. A. 카슨(D. A. Carson)은 한 가지 위험을 감지한 바 있는데, 그 위험은 한 세대가 지난 현재도 여전히 시급한 문제로 남아있다. “상대적으로 비본질적인 생각들에 지나치게 주목한 나머지, 사람들이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십자가가 응당 누려야 할 중심적 위치로부터 밀려날 위험에 늘 처해 있다”(‘십자가와 목회’[The Cross and Christian Ministry]). 동일한 경고가 더 오래 전에도 있었다. 목회자이며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1808–1889)는 그의 책 ‘거룩을 향한 하나님의 방도’(God’s way of Holiness)에서 이렇게 썼다. 성도의 거룩한 여정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피로 보증된 삶으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이 만들어내는 귀한 열매들, 죄 용서, 평강, 그리고 거룩함은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온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닌 공상의(fancied) 성화는 바리새주의와 다를 바 없다. 거룩해지고자 한다면 십자가로 가서 그 아래 머물러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 금식, 기도, 선행 같은 행위에도 불구하고 참된 성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겸손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얻을 수 없다.보나르의 권면은 우리 시대의 흐름에 대한 처절한 도전이다. 또한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오래된 진리를 붙잡고자 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각을 보나르의 오래된 언어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부터모든 진실한 거룩함과 선행이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온다”라는 말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못 박히셨다’라는 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성자 하나님께서 못 박히셨을 때 모든 것이 변화된 것이다.부활 직후 일어났던 사건에서 “못 박히심”은 우리 주님을 나타내주는 표현이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 28:5–6; 또한 막 16:6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오십일이 지난 후 행한 오순절 설교의 절정에서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라고 선포한다.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고친 후에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그 앞에 섰다. 그들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라고 묻자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 4:10)라고 답한다. 예수님을 구별하여 보여주는 “못 박히심”이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의 사역 안에서 그야말로 진가를 발휘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1)이라 선포한다.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못 박히셨다’라는 것은 우연하거나 부가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계시적인 사건이었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숨기지 않고 밝히 드러내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살과 피를 입고 오셨을 뿐 아니라 죄 없으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이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그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 된 것이다(롬 5:8). 카슨이 십자가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행위 중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대표적인 묵상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부터 2장 5절에 등장한다. 거기서 바울은 우리의 생각을 허물어버릴 만큼 놀라운 계시적인 십자가의 속성에 대해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즉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메시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18)이라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할 때(고전 1:23)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다(고전 1:20). 새롭게 태어나지 않은 죄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나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거부한다(고전 1:23).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해 십자가의 영광을 본다. 못 박히셨다가 다시 사신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 거룩함과 구원함이”(고전 1:30) 되신 분이라 믿는다.십자가는 불신자들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데 쓰는, 복음 메시지를 구성하는 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하시는지(“지혜”), 우리는 하나님과 어떻게 화목하고(“의로움”) 거룩해질 수 있는지(“성화”),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지를(“구속”) 보여준다. 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와 에베소뿐만 아니라 그가 간 모든 곳에서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행 20:27) 전하였다. 십자가가 지극히 중심적이고, 모든 분야에 연결되어 있으며, 지극히 계시적이어서 어떠한 주제를 이야기하든지 그가 말한 모든 것(“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은 보나르의 표현처럼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왔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대한 카슨의 주석처럼 “바울이 뜻하는 바는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윤리, 교제, 하나님에 관한 교리, 또는 어떠한 것이라 해도 십자가와 연결하지 않고 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바울은 복음 중심적이다. 그는 십자가 중심적이다.” 초기부터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빈 무덤보다 십자가가 그리기 쉬웠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가치를 축소하지 않고 부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가볍게 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신앙 전체를 대표한다. 세상의 지혜와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내세적인 힘을 보여주고, 십자가는 인간의 관점을 부끄럽게 만든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 전에는 부활에 나타난 능력을 볼 수 없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십자가는 특별히 구별되고 기독교 신앙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들도 부활을 꿈꾸기는 할 것이다. 자신들이 결코 이룰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오직 기독교에서만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다.공상의 성화와 참된 성화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중략] ‘거룩함’ [중략] 이 되셨으니”라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어로 ‘하기아스모스’(hagiasmos)이다. 보나르는 공상적인 성화와 참된 성화라는 두 종류의 성화에 대해 논하는데 “공상의(fancied) 성화”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기반”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존 오웬(John Owen)도 말한다. 시편 130편 4절(“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 이다”)을 주석하면서, 용서하심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 “시편 기자는 이 경외함과 예배의 기반, 즉 죄인들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경외하고 예배하고자 하는 유일한 동기가 바로 이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죄 용서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어떠한 죄인도 그분을 경외하거나, 섬기거나, 예배할 수 없다”(‘존 오웬 전집’[Works of John Owen]).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참된 예배와 “참된 성화”는 십자가 구속으로부터 흘러나올 뿐 아니라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믿는 믿음으로 그 힘을 얻는다. 우리의 옛사람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롬 6:6).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한다. 우리도 똑같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거룩한 여정의 비밀그렇다면 보나르의 권면처럼 어떻게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 것”인가? 보나르는 “성도의 거룩한 여정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피로 보증된 삶으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는 것에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보증”이라 함은 객관적 사건과 사실로서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향해 드러내시는 은혜로운 마음이며, 그의 영원하신 호의를 보장해주는 것을 가리킨다. 보나르는 십자가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시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라고 권면한다. 카슨 역시 바울의 십자가 중심의 시각을 분명히 보여주며 복음의 실제를,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자기 것으로 삼으라”고 권면한다.바울과 보나르, 그리고 카슨도 “지속적으로” 또한 “계속하여”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십자가 앞에 머물기 위해 당신이 취하는 구체적 방식은 내 방식과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정말로 십자가로 다가가고 있는가? 십자가 앞에서 머물고 있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항상 물어야 한다. 얼마나 ‘지속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다가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가 다르겠지만, 우리는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든지” 아니면 세상 속에 머물든지 해야 한다. 우리의 성화는 진실한 것이든지 아니면 공상적(fancied)이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보나르는 “매일”이라는 다른 일반적 기준도 제시한다.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못 박히신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결코 피곤한 일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오래된 진리와 더불어 살아온 지 어느덧 십오 년이 되었다. 이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진리는 날마다 새로운 진리라는 사실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Get to the Cross and Never Leave번역: 이정훈
성화
용서
보나르
구속
의로움
카슨
지혜
복음
십자가
바리새주의
야고보와 바울의 모순 들여다보기
by Chris Bruno
2020-02-05
성경 속 난제 중 하나는 서로 모순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이다.- 바울: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롬 3:28).- 야고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약 2:24).성경을 좀 읽은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놓고 한 번쯤은 고민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 문제를 풀려고 애를 쓴 것도 사실이다. 종교 개혁 논쟁 중에도 일부는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있는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성경이 성령님의 영감과 하나님의 권위로 된 책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당연히 두 사도간에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두 사람 사이의 모순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인가?야고보서 2장 24절을 문맥과 상관없이 읽는다면 우리는 문제에 빠지게 된다. 만약에 야고보가 로마서 3장 28절 또는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로 그 “믿음”을 여기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야고보는 정말로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칭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 중 하나는 모든 구절을 전체 맥락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만으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맥락을 먼저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믿음”이 무슨 의미인지 19절에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귀신들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에 불과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고 한다. 귀신들은 일명 쉐마(Shema)로 불리는 신명기 6장 4절이 말하는 바를 믿고 있다. 귀신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분이고 진정한 신이며, 그가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알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무서워서 떨고 있다. 진리를 믿을 뿐 아니라 그 진리가 가져다줄 결과 때문에 감정적인 반응까지 보인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아브라함 사례야고보는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며 의롭다 하시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설명한다. 이 사례야말로 야고보와 바울이 의롭게 하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서로 같은 말을 하지만 단지 믿음의 측면에 관해 다른 강조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바울과 야고보 두 사람은 똑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그러나 이 두 저자가 고려하고 있는 아브라함 인생의 시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야고보서 2장에서 우리는 창세기 22장,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하는 그 시점에 서 있다. 이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든, 이삭을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의 삶에서 가장 궁극적인 순종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 사건은 창세기 15장 시점보다 수십 년이 지나서 발생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불렀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 정도였다(창 12:4). 그리고 창세기 15장은 12장의 사건이 있고 오래지 않아 발생했다. 그 이후 수년간,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기 전까지 이삭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갔을 때 이삭은 아마도 십 대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히브리 전승에 따르면 창세기 22장은 이삭이 37살이 되었을 때라고 한다. 최소한 우리는 이삭이 제사에 필요한 나무를 지고 산 정상까지 갈 정도로 컸다는 것은 알 수 있다(굳맨Goodman, 130-131).이 모든 것을 다 종합할 때, 우리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고 수십 년이 지나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야고보는 바로 이런 순종을 가리키고 있다(약 2:23). 믿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한 아브라함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의로운 상태(status)는 믿음만으로 계속 유지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이게 야고보서 2장 21절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즉, 의롭다함을 받는 데에 있어서 행위의 역할은 믿음의 역할과 다르다. 아브라함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을 때 의롭다함을 받았다, 즉 의로운 상태를 부여받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 의로운 상태는 그가 행하는 신실한 행위로 완성되어야 한다. 진정한 칭의를 가져다주는 믿음은 자연스럽게 변화(transformation)를 가지고 온다고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 믿음은 단지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거기에 따른 감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 이상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고 그 약속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 믿음은 궁극적으로 선한 행실과 분리될 수 없다. 바울과 다른가?야고보는 소위 말하는 선한 행위를 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로 이런 주장이 바울이 로마서 3-4장과 갈라디아서 2-3장, 그리고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는 믿음과 다른 것인가? 믿음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비판하는 야고보와 달리 바울은 행위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비판한다. “율법의 공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관계없이, 어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들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어떤 행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믿음으로 하는 선한 행함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한 말을 생각해보자. 그는 거기서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다. 창세기 22장에서부터 창세기 15장으로 되돌아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주목한 야고보와 달리 바울은 창세기 15장에서 시작해 그 이후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고 있다. 아브라함이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그 시점 이후 그의 생애를 바라보았을 때 그 결과가 무엇인가? 바울은 이렇게 썼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이 커갈수록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 견고하여졌다. 이 말은 당연히 거룩함과 선한 행실이 더 많아졌다는 것으로 들린다. 의롭다함을 받은 기독교인이라면 순종은 당연한 것이다(롬 6:1-14 참조). 야고보가 우리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는 분명히 바울이 로마서 3-4장에서 말하는 믿음, 그러니까 의롭게 하는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바울이 “율법의 공로”와 관계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라고 했을 때, 그는 결코 야고보가 말한 그런 선한 행실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말씀을 이처럼 적절한 문맥 속에서 이해할 때, 야고보는 결코 바울과 모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으며, 강조점을 다르게 하여 적절하게 보완하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es James Really Contradict Paul?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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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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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약속
변화
예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by Sam Allberry
2020-02-01
1966년 영국은 풋볼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주장 바비 모어(Bobby Moore)는 웸블리 스타디움 연단으로 올라가 여왕으로부터 트로피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이후 그 역사적인 순간에 기분이 어땠는지 물었을 때, 모어는 겁에 질렸었노라고 답했다. 여왕은 때 묻지 않은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모어는 경기로 인해 지저분해진 손으로 여왕과 악수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며 미친 듯이 바지에 손을 비비며 닦으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더러워졌던 경험이 있다. 물론 더러워진다는 것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 내면도 더러움을 느낄 수 있다. 더러운 것 같은 느낌마가복음에는 더러움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한 사람이 나온다. 마가복음 1장 40–45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를 만나신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그는 부정한 자였다. 나병은 특히 끔찍한 병이다. 불치병이었고 전염성이 매우 강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병 환자들은, 나병에 걸린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립되어야 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전염병자 취급을 받았다. 당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가? 자신에게 독성이 있고 방사능을 뿜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당신 자신이 마치 전염병 같은가?만일 그렇다면 당신이 과거에 한 일 때문일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맥베스(Macbeth)에서 맥베스 부인은 던컨(Duncan) 왕을 암살하라고 부추겼다. 그것이 그녀의 양심을 짓눌렀고 자면서도 손을 비비며 핏자국을 지우려 했다. 그녀는 “이 손은 정녕 다시는 깨끗해질 수 없는가!”라며 울부짖었다. 셰익스피어는 죄책감에 눌린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성폭력으로 인한 더러움우리 자신의 행위로 인해서만 더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다른 이가 행한 악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이로 인해 당신은 자신이 말할 수 없이 더럽혀졌다고 느끼게 될 수 있다. 어느 성폭력 피해자 여성이 그 일을 왜 입 밖에 내지 않았는지에 대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다음과 같이 밝혔다.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내 생각에 그 사건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공격해서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죠. 난 파티에 초대받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여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나는 그저 아무도 없는 주차장으로 끌고 가 성폭행이나 할 만한 여자인 것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봐야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생각할 게 뻔했어요. 가해자의 범죄를 드러내는 데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말이죠.성폭력으로 인해 이 여성은 그 가해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더러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예수님과 나병 환자의 만남에 주목해야 한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막 1:40)다시 말하지만 이 사람의 나병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율법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자신을 회복시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하시면”이라 한 것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치유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고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경험한 어려움을 예수님은 아신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관심하거나 기피 하여 뒷걸음질 치지 않으신다.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시며 그를 만지신다. 아마도 십수 년 넘게 아무도 그에게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예수님은 이 나병 환자처럼 그에게 나오는 자들의 부정함을 어떻게 해결하실까? 혐오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신다. 우리로부터 멀리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오신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1). 예수께서 ‘원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즉각적이고 놀랍기까지 하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막 1:42). 그리스도 안의 풍성한 은혜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위험한 존재이거나 전염시키는 요인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격리시켰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가 아닌 나병을 문제의 요인으로 보셨다. 아무리 더러운 흙이 묻은 채로 예수님께 나아간다 해도 예수님의 정결함은 훨씬 더 강력하다. 예수님 안에는 우리의 불의를 능가하는 의가 있고, 우리의 범죄를 능가하는 은혜가 있으며, 우리의 죄를 넘어서는 용서가 있다. 우리의 최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최선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더럽힐 수 없다. 그분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뿐이다. 우리의 더러움의 농도가 아무리 진하다고 해도 그분의 거룩함은 그보다 더 진하고 강력하다. 그분이 지우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그냥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내 악함이 너무 커서 예수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런 자조(自嘲)적인 생각을 사람들은 겸손이라 착각한다. 사실 그것은 교만이다. ‘내가 너무도 대단한 사람이어서 예수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 보는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나병 환자를 고치신 후, 예수님은 그에게 엄히 경고하시며 아무에게도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제사장에게만 보여서 깨끗해졌음을 입증하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신다. 아직은 예수께서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할 단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명령과는 반대로 행동하여 예수님에 관한 소식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을까?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예수님과 그 나병 환자가 서로 자리를 바꾼 것이다. 이전에는 나병 환자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외진 곳에서만 살았다. 이제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바깥 한적한 곳으로 가셔야 했다.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의 역할이 바뀐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병이 예수님께로 옮아간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예수께서 어떻게 더러움을 제거하시는가?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깨끗게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와 당신의 더러움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옮기셨기 때문이다. 모든 죄, 모든 상처, 모든 깨어짐과 더러움을 그가 짊어지셨다.예수님은 완전히 버림당하셨다. 사람들로부터 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로부터도 말이다 (막 15:34). 그는 독한 냄새를 풍기게 되었고, 나는 향기를 내게 되었다. 그가 밖으로 쫓겨났기에 내가 안으로 초대를 받았다. 내가 앞으로는 더러움을 ‘느끼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를 참소하는 자는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할 것이다. 사단은 영원히 사단이다. 하지만 죄와 더러움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피할 곳이 있다.바비 모어는 바지에 손을 계속 문질렀지만 더러운 손을 완전히 깨끗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더러운 죄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신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Stains That No One Sees: How Jesus Removes Our Shame번역: 이정훈
바비모어
셰익스피어
죄
상처
깨어짐
아웃사이더
인사이더
복음
예수그리스도
왜 구원의 투구라고 할까?
by Iain Duguid
2020-01-25
이 투구는 공격으로부터 날 지켜주는 것. 하지만 날은 덥고 투구는 무겁네. 그래서 벗어 던지네, 그래서 벗어 던지네.길버트(Gilbert)와 설리반(Sullivan)의 합작 오페라인 ‘이다 공주’(Princess Ida)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가 결투를 시작하기 직전에 이렇게 노래한다. 필자가 펜싱 클럽 회원으로 활동했던 적이 있기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무딘 플뢰레(foil)를 쓰는 펜싱 시합이라 해도 요구되는 장비를 착용하면 정말 덥고, 무겁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노래에 나온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펜싱에 동반되는 위험을 알고 있다면, 필요한 장비를 반드시 구입하려고 할 것이다.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장비는 뭘까? 어떤 인생을 목표로 하는가에 따라 다른 대답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평범한 삶을 원한다. 인생을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옷차림도 간편하다. 티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헐렁한 슬리퍼와 같은 마음가짐이다. 그들은 강력한 적의 공격을 대비하여 매 순간 깨어 있을 수 없다. 꼭 필요한 영적 안전 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채 그저 무심히 햇살이나 즐기며 종일 빈둥거리며 유유자적할 뿐이다.구원의 투구바울이 “구원의 투구”(엡 6:17)라 부르는 것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이걸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이 투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의의 호심경처럼, 구원의 투구도 이사야 59장 17절에서 묘사된 전사(warrior)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빌려온 개념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구원자로서 모습은 이사야에서 자주 등장한다. 자기 백성에게 한 약속을 신실하게 시행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모든 대적으로부터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강력한 적인 그들의 죄, 그 죄로 인한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죄인을 하나님은 구원해주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의 환란과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한 소망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서 이 투구를 “구원의 소망의 투구”로 완전하게 묘사한다. 그리스도인이 쓰는 이 투구는 구원의 확실한 소망이다.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투구를 분실해버린 듯하다. 대부분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소망”하는 수준인데, 바울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구원받기를 소망하는” 것은 전쟁에 나갈 때 투구 대신 햇볕만 가리는 헐렁한 모자를 쓰는 것과 같다. 전투가 치열해지면 그 모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결국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식의 모호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영원한 삶을 어디에서 살 것인가에 대한 안정된 확신을 가리킨다.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은 전적으로 확실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준비도 되어있다(벧전 3:15). 반면 자신이 천국에 갈 것 같다는 모호한 느낌에 대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어떤 전도 프로그램에서는 “만일 당신이 오늘 밤 이 세상을 떠나 천국 문 앞에 섰는데, 그때 하나님이 ‘내가 너를 나의 천국에 들어오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라고 사람들에게 묻게 한다. 많은 이들이 대답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주위 사람들을 사랑했어요” 혹은 “저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라 답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소망에 대해 불확실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얼마나 선한가에 따라 천국에 가는 것이 결정된다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만큼 선한가? 인생 후반기에 뭔가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라.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악한 일들을 볼 때, 내 개인의 노력과 공로에 의지해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이 분명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 자신의 선함에 의지하는 것으로는 결단코 천국 입성을 확신할 수 없다. 확실하고도 견고한 소망성경은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라고 말한다. 요한은 우리가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길 바라며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라고 선언한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다면 생명이 있고, 우리에게 예수님이 없다면 생명도 없는 것이다. 영생은 그의 아들 안에 담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의와 더불어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동시에 천국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이다. 천국을 얻는 것이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이라면 우리에겐 언제나 불확실성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천국이 거저 주시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천국을 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완전한 선하심을 받고 우리의 모든 실패와 죄악을 그분께 맡기면 분명 천국을 얻은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인 그리스도의 의의 호심경을 붙이면, 우리가 누릴 영생에 대해 전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우리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제대로 쓴 것이고, 이제 삶의 폭풍을 마주할 준비가 된 것이다.삶은 고단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왕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사방이 고난과 유혹으로 포위당해있다. 외적인 환란은 물론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도 씨름해야 한다. 전투 장비를 제대로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갑옷으로 무장하고 삶의 환란을 대할 때, 흑암의 세력이 총공격을 감행한다 해도 전장의 안개가 걷히면, 소망 안에, 성령이 주시는 능력 안에 굳건히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at is the Helmet of Salvation?번역: 이정훈
복음
변증
소망
천국
확신
그리스도인
이사야
부활을 향한 달리기
by Quina Aragon
2020-01-18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달리기를 했다. 나는 내 몸이 더 빠르게, 더 멀리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다리는 음악에 맞춰 움직이고 폐는 공기로 가득 찬다. 눈은 자연의 예술성을 감상하며 엔돌핀은 땀에 젖은 내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한다. 내가 생각보다 느리게 달릴 수도 있겠지만 포장도로에 내딛는 내 걸음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나는 자유롭다. 2011년, 나는 빠르게 뛰거나 많이 뛰면 왼쪽 무릎과 엉덩이에 고통을 느끼는 장경인대증후근(ITBS)에 걸렸다. 이 통증은 내가 앉아있거나 서 있을 때, 혹은 침대에 누워있을 때 확 올라오기도 한다. 이것 때문에 몇 달 동안 달리지 못했다. 지금은 내 스포츠 카이로프랙터의 도움을 받아 매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느린 속도로 짧은 거리를 달리지만 말이다.나는 지금 내가 뛸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내 몸은 늙어가고 있기에 언젠가는 뛸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완전하게 확정된 것은 아니다. 나는 미래에 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더 빠르고 더 강할 것이며, 내 병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을 것이다.이것은 그저 부활이 주는 소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부활의 소망랜디 앨콘 (Randy Alcorn)은 그의 ‘천국’(Heaven)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영원한 집은 새로운 땅이라고 말한다. 천국이 땅에 임하여 하늘과 땅을 하나로, 그리고 같게 만들 것이다(계 21:1-4).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주기도문에 응답하실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우리는 천상계에서 떠다니며 구름 위에서 하프를 연주하듯이 사는 영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아름답고 활기찬 땅에서 영광스럽게 부활한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 것이다.이 기쁨의 소식은 우리가 죄인이며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먼저 이해할 때 진정한 기쁨과 소망이 된다. 죄는 하나님이 “심히 좋게”(창 1:31) 만드신 모든 것, 즉 사람과 동물과 모든 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창 3:16-19; 롬 5:12; 8:20). 그로 인해 우리는 고통 받고 죽는다(창 3:16-22; 고전 15:56). 이 땅에 가시와 자연 재앙을 가져 왔다(창 3:17-18). 우리의 죄악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우리에게 그의 재판을 받게 한다(롬 3:10-20).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 땅, 그리고 모든 피조세계가 비록 손상되었더라도 쉽게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들어오기 전보다 더 영광스럽게 고치고, 새롭게 하시며 회복시킬 것이다(롬 8:18-25; 엡 3:7-10).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통해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엡 1:9-10; 골 1:19-20 참조)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고 계시다. 부활이자 생명이신(요 11:25) 예수님은 우리의 자리에서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셨고, 우리 죗값으로 그의 삶을 내려놓으셨다(요 3:16; 고전 15:3-6; 사 53).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심으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셨다(고전 15:20-23).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의 부활”(요 5:29)이라는 귀한 약속을 받는데, 이 약속에는 “우리 몸의 속량”(롬 8:23)도 포함된다.부활의 영광죄 하나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사람들과 완전한 사랑의 모습으로 지내는 것은 어떤가? 당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은 어떤가? 어떤 방해나 육체적인 제약 없이 심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떤가? 이것들은 모두 부활할 때 당신이 경험할 것이다.우리의 고통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고후 4:17)이다. 부활은 단순히 우리가 경험한 고통의 저울에 균형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영광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현재 고통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롬 8:28 참조)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죄에 맞선 몸부림, 믿음 방해하는 박해, 관계의 문제, 건강 문제, 심지어 내 인대의 병(ITBS)까지도 모두 나의 영원한 기쁨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부활한 육신에서 내 삶을 돌아보며 “그 고통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내 상처는 이제 나의 전리품이다. 오직 주님만 찬양받으실 분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부활의 육신앨콘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당신의 몸이 약하더라도 그 몸 안에는 부활의 육신이 설계되어 있다. 당신은 현재의 육체나 정신에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부활할 때 개선되는 몸을 매우 기뻐할 것이다. 그 몸으로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을 돌릴 것이며,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과 경이로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나는 오염되지 않은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새로운 땅 위를 힘차게 달리는 것을 상상해본다. 티 없이 푸른 하늘과 나를 둘러싼 자연의 선명한 색들을 상상해본다. 내 발이 심장박동의 리듬에 맞춰 뛰는 것을 상상한다. 물론 내 달음박질을 방해할 나의 병도 없을 것이다. 나는 기쁨으로 뛰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터질 것 같이 벅차오르는 내 영혼을 상상한다. 현재 이 땅에서 달리며 그 기쁨을 짧게 경험한다. 실재하는 부활의 달콤한 맛을 잠시라도 느끼게 하신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지금 여기 나의 병(ITBS)이나 다른 질병, 또는 부상으로 인해 고통을 느낄 때, 나는 이런 쓰라린 고통이 부활에 대한 더 큰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을 알기에 그리스도를 찬양한다.현재 상황이 어떻든지, 난 나의 새로운 몸을 위한 준비가 되어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unning to the Resurrection번역: 허예송
복음
부활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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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육신
생명
기쁨
랜디앨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by Dan Dodds
2020-01-14
중세 시대에 로마가톨릭이 점점 타락하면서 교회는 미심쩍은 교리들을 공표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교회와 말씀이 갖는 이중적인 권위에 대한 교리였다. 물론 교회와 말씀이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는 로마 교회가 자신의 판단대로 우선적인 권위를 차지했다. 이렇듯 로마가톨릭은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성경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최종적인 발언권을 거머쥐었다.바로 이 말씀 해석에 대한 권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이 비판하고자 한 주요 대상이었다. 그들의 비판은 오직 성경을 의미하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라는 표현으로 요약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양자가 충돌할 때는,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로마 교회에 상반되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즉 신자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매여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이러한 정신은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진술한 루터의 답변 속에 잘 묻어나 있다.“저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이 아닌, 교황이나 의회에 설득당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주 스스로 모순된 주장을 펴 왔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행위는 올바르지도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할 수 없고, 저의 입장을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바로 이 솔라 스크립투라의 원칙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교리가 주어진다. 이 교리는 하나님 백성의 양심을 속박하려는 어떠한 사람이나 기관의 불법적인 권위도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 교리에 의하면, 성경이 (혹은 성경에서 합법적으로 도출된 진리가) 특정한 윤리 문제를 다루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그 문제를 판단할 수 있으며, 이때 그 양심은 누구에 의해서도 속박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의 권위나 견해가 그리스도인을 억압할 수 없다.이렇게 신앙의 본질과 관련 없는 자유의 영역에 대해 신학자들은 ‘아디아포라’라는 용어를 들어 설명한다. 이 용어는 헬라어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아’와 판별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디아포라’가 합성된 개념이다. 그 두 가지 의미가 결합된 아디아포라는 판별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결국 성경이 아무런 도덕적 명령을 제시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선호에 따라 자유로운 입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그리스도인에게 있다는 게 아디아포라의 적용이다.바로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교리는 종교개혁 당시에 중요한 논제로 취급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 교리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까지 여겨졌다고 주장한다. 왜 종교개혁자들이 그 문제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을까? 칼빈이 그 답변을 제시한다.“[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흔히 생각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양심이 일단 함정에 걸려들면 길고 복잡한 미로에 빠져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아마포를 가지고 시트나 셔츠나 손수건 또는 냅킨에 사용할 수 있는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는 곧 대마포에 대해서도 불확실한 마음을 갖게 되고, 결국에는 삼베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된다. [중략] 이러한 의심에 빠진 자들은 어디를 보아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만 보이게 마련이다”(기독교강요, 3권 19장 7절).어떤 그리스도인이 성경적으로 중립적인 행위를 마치 보편적으로 그릇된 행위처럼 규정하며 자신과 타인을 위해 그 행위를 억제한다면, 그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멈춰 세울 수 없는 미끄러운 비탈길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이런 태도가 율법주의 한 형태이다. 그와 같은 율법주의는 자유와 동떨어진 율법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신자의 양심은 억압되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는 자세그처럼 사람이 만든 율법이 교회 안에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섬기는 교회의 경우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되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이 달린 과정을 새가족반에 첨가했다. 현재 이 과정에는 스물다섯 개가 넘는 주의 사항이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심사를 가지고 교회에 와서 다른 신자의 양심을 억압하려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마련되었다.그런데 간혹 그런 일이 발생하듯, 우리는 이편에 있는 도랑을 피하려고 방향을 바꾸다가 저편에 있는 도랑에 빠지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그 교리를 오해하며 부주의하게 다루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잘못 사용될 수 있다. 바울은 그런 잘못을 예방하고자 다음과 같이 교훈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이에 베드로도 동일한 원칙을 제시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이렇듯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에 대한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로마서 14장에는 좀 더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지침이 소개된다. 마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마셔도 되는가를 놓고 토론을 벌이듯이, 초대교회 당시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가 이슈였다. ‘그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이에 바울은 두 가지 원리를 제시했는데, 이는 우리가 숙고해야 할 내용으로서 다음 한 구절에 잘 요약되어 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먼저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을 정도로) 믿음이 강한 형제가 (그런 음식을 먹지 못할 만큼) 믿음이 약한 형제를 업신여기는 교만을 범하지 못하도록 경계시킨다. 그러면서 또한 음식을 먹지 않는 자에게도 음식을 먹는 자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죄로 규정하지 않으신 행동을 죄로 여기며 형제를 판단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한다]”(롬 14:19).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를 섬기는 일을 할 때, 우리 자신의 자유를 과시해서도 안 되고 또한 그 자유를 사용하는 자를 경멸해서도 안 된다.결국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불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여러 모양새로 실천하되, 다른 지체를 판단하기보다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그 자유를 행사해야 한다(마 7:1; 롬 14:22-23).출처: www.ligonier.org원제: Christian Liberty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루터
양심
아디아포라
자유
판단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by Albert Mohler
2020-01-11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가 쓴 ‘백치’(The Idiot)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기독교적 취지와 신학을 깊이 반영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이야기에서 다소 이상해 보이는 개념을 상정한다. 곧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개념이다. 흥미로운 아이디어이긴 한데, 기독교의 사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이에 대해 두 가지 성경 본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사야 53장과 시편 27편이다. 먼저 이사야 53장은 메시아를 묘사하며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말한다(사 53:2). 그런데 이 말은 시편 27편이 주님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있는 내용과는 좀 다르게 들린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이 두 구절을 병행시켜 묵상할 때, 우리는 어떤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일단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아는 사람들이 지켜볼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분으로 그려진다. 그분은 매를 맞고 고통을 당하신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분으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여기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외모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메시아의 대속 사역과 그분의 위대한 사역을 통해 이루어질 죄에 대한 심판을 예견하고 있다. 이와 달리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기를 간구한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이란 메시아의 사역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어떻게 보면 성경은 아름다움으로 시작해 아름다움으로 마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그분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창 1:4, 10, 12, 18, 21, 25). 심지어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도 말한다(창 1:31). 그런데 이 좋다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보다 의미가 깊다. 히브리어에서 그 표현은 아름답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는데 심히 아름다웠다는 내용을 전달한다.이렇게 시작하는 성경은 어떻게 마칠까?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2-27).이와 같은 새 예루살렘의 모습과(22장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생명수의 강은 아름다움의 회복을 증언한다.결국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에 끌리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과 미술 전시회 또는 그랜드 캐니언에 간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어떤 개념일까? 또한 구속 사건에서 그 아름다움은 어떻게 드러날까?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아름다움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인간이 아름다움을 봐도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지각하는 우리의 감각이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마트의 계산대에 진열된 온갖 잡지들만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 잡지들이 인위적으로 그려 내는 모델의 외관은 세상이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혹 그들의 이미지가 좋아 보일지는 몰라도, 그런 이미지는 성경이 바라보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기독교 세계관은 진실로 선한 아름다움이란 스스로 계실 뿐 아니라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그 근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초월적인 가치인 진(the true), 선(the good), 미(the beautiful)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가르쳐 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편 27편 기자가 말한 여호와의 아름다움에는 그분의 선하심과 진실하심까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우리는 타락한 상태에 있기에,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서로 분리하려 한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인가가 진실하다면, 그 대상은 또한 선하고 아름답다고 가르쳐 준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선하다면, 그 대상은 또한 아름답고 진실하다고 가르쳐 준다. 그렇기 때문에 진열대의 잡지들이 언뜻 보기에는 좋은 이미지를 그려 낼지라도, 그런 이미지는 진실로 선한 모습을 전달하지 못하기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기독교 세계관은 다운 증후군을 가진 아이의 얼굴이 전문 모델의 조작된 이미지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관점에서 매력적이지 않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희생하면서 피를 쏟아내는 그 끔찍한 광경은 보기에 좋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좋지 않을지 몰라도, 십자가는 분명 아름답다. 예수님이 거기서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십자가가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거기서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진실하고 선한 일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에 참으로 아름답다.그러니 도스토옙스키가 옳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아름다움이 그저 눈으로 보기에 좋은 상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선재하는 아름다움우리는 더 나아가 인간 내면에 있는 아름다움의 선재성(the priority of beauty)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진리에는 우리 모두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심지어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세속주의자도 해가 지는 광경에 놀라곤 한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모든 인간의 마음은 아름다움에 끌린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아름답지 못한 대상에 사로잡힌다는 게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드러내는 문제이다. 물론 어거스틴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단지 감성의 작용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의 객관적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갈망 역시도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우리의 상태를 드러낸다고 고백했다.세상을 구원하는 아름다움우리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역은 아름답기에 진실하다. 또한 그 희생은 진실하기에 선하다. 결국 예수님의 대속 사역은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보기에 좋지 않은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아름답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ill Beauty Save the World?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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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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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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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
진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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