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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가진 교회
by Derek Thomas
2020-01-08
이 땅에서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한 가지 계획이 있다. 바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셨다. 그러다가 빌립보 가이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예수님은 과연 어떤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을까? 어떤 구조와 조직을 갖춘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야 주어지게 된다. 우선 오순절 사건 직후에 탄생한 교회는 그 조직이 뚜렷하게 잡혀 있지 않았다. 그 교회는 사도들이 감독하는 하나의 모임으로서 네 가지 사역에 헌신했을 뿐이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 성도 간의 교제, 성찬, 그리고 기도에 집중했다(행 2:42).그러다가 초대교회의 리더십은, 특별한 구성을 갖추지 않은 가정 모임에서부터 조직화된 회중으로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집사와 장로라는 뚜렷한 직분을 통해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신약교회의 ‘직분’에 관해 연구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그리고 이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쟁점은, 항구적으로 부여되는 직분과 일시적으로 부여되는 직분을 어떻게 서로 구별할 수 있느냐이다.이러한 직분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서 다루기가 쉽지 않은 또 하나의 논점은,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예외적인 은사가 항구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인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주어진 은사인가 하는 문제이다. 나와 같은 은사중지론자는 신약에서 언급되는 일부 은사가 “사도의 표”(고후 12:12)로 주어졌다고 믿는다. 즉 구속 역사의 목적상 교회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약성경에 의존하고 있던 시기에만 주어졌다고 믿는다. 당시 초기 단계에 있던 교회를 이끌고 지도하는 데는 그처럼 예외적인 은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신약의 정경이 완성되고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사도라고 일컬어진 모든 사람이 죽은 후에는, 집사와 장로 혹은 (해석자가 따로 구분할 경우에는) 목사와 같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직분만 존재하는 규범적인 상황이 교회 안에 확립되었다.교회의 조직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는 디모데서나 디도서와 같은 후기 서신들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이 서신들은 더 이상 특별한 직분이나 은사를 언급하지 않고, 집사와 장로 그리고 디모데가 수행했던 복음 전파자의 역할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는 어떤 직분이나 은사가 교회의 유년기에만 허락되었고 성숙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집사의 직분집사라는 직분은 교회의 위기 상황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처음부터 다양한 인종이나 민족을 수용하며 성장하자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문제의 정황은 이렇다. 당시 1세기 문화에서 과부는 취약 계층에 속했는데, 교회는 공동체 의식에 따라 그처럼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는 자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평등하게 음식이 배분되어 실망하는 과부들이 발생하게 되었다(행 6:1-7). 이를테면 아람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과부들을 교회가 편애하여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과부들이 음식을 받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차별 대우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익숙하게 경험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시 사도들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곱 사람을 선택해서 문제 해결에 나섰다. 이런 해결책을 실행하여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자 하였다(행 6:4).물론 그런 편파적인 행동의 책임이 사도들에게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도들이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음식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행 6:2). 교회를 키우고 양육하는 데 자신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이런 차원에서 일곱 사람이 선택되어 따로 세워졌다. 그들에게는 일정한 자질이 요구되었다. 즉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했다(행 6:3).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이라는 지역 교회에서 세움을 받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임명을 받게 되었다(행 6:6). 이처럼 안수식과 임명식이 있었던 사실은 그들에게 분명히 구별된 사명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그렇다면 이 일곱 사람은 정말로 집사로 세워졌던 것일까? 이에 대해 성경은 그들의 직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디아코네오’라는 용어는 (‘집사’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디콘’(deacon)과 근접한 관계성을 지닌다. 그리고 일곱 사람이 집사라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어도, 그들은 성도들을 돌보고 섬기는 사역을 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 일곱 사람을 집사의 원형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직분은 교회가 말씀 사역과 좀 더 실천적이고 물질적인 사역을 어떻게 구분하였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결국 집사라는 직분은 성도의 실생활과 관련된 문제, 가령 재물과 음식을 나누거나 서로를 돌아보는 일을 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섬기는 리더십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섬기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일정한 자격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은 언제나 섬기는 리더십을 전제로 한 직분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집사와 장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하며 자신보다 타인을 더욱 돌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집사와 장로의 두 직분 가운데 어느 한 직분이 다른 직분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경건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집사에게 요구되는 영적 자질을 나열할 때, 장로에게 요구되는 자격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제시했다. 집사는 가르치는 은사를 제외한다면, 그 신앙의 덕성과 영성에 있어 최고의 수준을 보여야 했다(딤전 3:8-12).앞서 언급한 사도행전 6장의 구제 사역은, 집사에게 일반적으로 부과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샘플과 같다. 이에 따르면, 집사는 구제뿐 아니라 교회의 재물과 소유 전반에 관련된 일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직분임을 알 수 있다. 이후에 바울은 집사의 사역 범위 안에 특별히 과부에 대한 섬김을 중요한 항목으로 포함시킨다(딤전 5:3-16). 그리고 일반적인 과부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과부에게 초점을 맞추고 교훈을 제시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내용은, 과부를 섬기는 일에 교회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사는 교회의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관행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자원을 바르게 사용하는 분별력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지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영적 은사를 갖춰야 한다. 그리하여 어려운 문제를 처리할 때 정확한 사리 분별을 해야 한다.여성 집사에 관하여그렇다면 모든 집사는 남자여야 할까? 신약성경에는 여성 장로와 관련해서는 참고할 만한 본문이 없기 때문에 별문제가 안 되지만, 여성 집사의 경우는 다소 애매한 언급이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가령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자매 뵈뵈”를 로마에 있는 교회에 추천하는데, 이때 그녀에 대해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언급한다(1절). 여기서 ‘일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는 안수식이 요구되는 직분은 아니어도 집사의 사역에 참여하는 직무를 의미할 수 있는 단어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3장에서 바울은 집사의 자격을 설명하는 가운데(8-13절), 여자들에 대한 조건을 첨가한다(11절).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동일한 장에서 장로에 관해 설명할 때는 말하지 않는다(1-7절).이와 같은 사실을 감안한다면,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서 “여자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귀나이카스’는 여성 집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의미로 읽을 경우에만 본문의 흐름이 산출하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내가 속한 개혁교단은 이러한 성경 해석의 전통을 따라 여성 집사를 인정하며 그 직분을 공식적으로 제정해 놓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입장이 여성 장로에 대한 논쟁으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장로의 직분이 글에서는 (오늘날 장로교단에서 ‘가르치는 장로’라는 명칭으로 구분하는) ‘목사’가 (‘다스리는 장로’에 해당하는) ‘장로’와 분리된 직분인지에 관해서는 다룰 수가 없다. 그 주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상당한 분량의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만 신약성경이 교회 안에 있는 또 다른 규범적인 직분으로서 ‘장로’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이 직분을 언급할 때 신약성경은 세 가지 타이틀을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한다. 그 세 타이틀은 ‘감독’(에피스코포스), ‘장로’(프레스뷔테로스), ‘목자’(포이멘)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장 17절과 28절에서 그 세 가지 개념은 모두 동일한 사람들에게 사용된다. 이 사실만으로도 지난 수백 년 동안 엄청난 분량으로 논의되며 쟁점이 되어 온 주장, 즉 각각의 타이틀이 독립된 직분을 가리킨다는 주장을 일축하기에 충분하다.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1-7절과 디도서 1장 5-9절에서 장로가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지녀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를 열거한다. 집사와 마찬가지로 장로 또한 특정한 덕목을 갖추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리더십이다. 성품의 결함은 그 어떤 재능으로도 메꿀 수 없기 때문이다.집사와 달리 장로가 갖춰야 할 특징이 있다면, 바로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딤전 3:2). 물론 모든 장로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딤전 5:17). 이는 일반 장로와 다른 역할을 감당하는 장로가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이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집사 또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로서(딤전 3:9), 그중에서도 가령 나이든 여자는 젊은 여자를 가르쳐야 하고(딛 2:4), 나아가 전체 회중 또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를 가르쳐야 한다(골 3:16). 그리고 모든 신자는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벧전 3:15).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능력만으로는 장로의 직분을 얻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능력이 장로에게는 더욱 분명하게 요구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또한 권한에 있어서도 집사와 장로 간에는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집사의 권한은 그 집사가 속한 지역 교회에 제한되지만, 장로의 권한은 그와 같은 지역 교회를 넘어서 행사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의 장로들은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해서 신약교회 전체에 구속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행 15:6-21).이와 같이 신약교회의 리더십은 집사와 장로라는 두 가지 직분을 통해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교회 안에 그 두 직분을 공고히 세워야 한다. 잘 훈련받은, 경건한 직분자를 세우는 일은 교회가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이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그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전 14:40).출처: www.ligonier.org원제: Leaders in the Church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여성집사
직분
디아코네오
디콘
집사
장로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
by Stephen M. Coleman
2020-01-04
시편 110편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약성경의 본문이다. 다윗 왕이 저술한 시편 110편은 미래에 오실 메시아, 왕의 승천과 통치를 예언하고 있다. 다윗은 이 왕이 주의 권능을 가지고 오시며(2절),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세울 것이라고 말한다(5절). 그는 뭇 나라를 심판하며(6절), 하나님의 원수들을 내치시고(1, 6절),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신다(3절). 특히 눈에 띄는 구절로, 다윗은 이 왕을 “나의 주”라고 부르며, 왕의 혈통을 가진 그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다.이 놀라운 예언의 한 중심에 구약성경의 가장 모호한 인물 중의 하나가 나온다. 다윗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4절)라고 말한다. 멜기세덱은 구약성경에서 단 한 번만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북부 연합의 네 왕을 물리치고 조카 롯을 구해낸 후에 살렘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알려진 그를 만났다(창 14:18-20). 다윗은 이 신비한 인물에게서 위대한 왕이며, 그의 백성들의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인격과 사역을 발견한다.왕권을 가진 제사장고대의 왕은 보통 제사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민간의 영역만이 아니라 성스러운 영역도 다스렸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러한 제사장적 왕이 가능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왕권을 유다 지파에게(창 49:9-10), 특히 다윗의 자손에게만 허락하셨다(삼하 7:12-16). 제사장직은 레위 지파에게만, 특히 아론의 자손들에게만 맡기셨다(민 17장).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실 왕은 제사장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영역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이해했다. 어떤 근거로 이스라엘의 왕이 제사장으로서도 섬길 수 있을까? 사울 왕의 제사장적 특권 행사는 결국 거부되지 않았는가(삼상 13:13-14)? 다윗이 멜기세덱에게서 발견한 것은 여느 제사장직이 아니라 더 나은 제사장직에 대한 소망이다. 유사한 논리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노략물 중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고 그에게 축복을 받은 점을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사람임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히 7:4-10). 그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으면, 그는 분명하게 아브라함의 아들인 레위보다 높은 자이다. 멜기세덱의 이름은 “의의 왕”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그의 제사장직은 왕권을 가진 것으로 더 나은 제사장직을 대표한다. 예수님의 사역을 예시하는 멜기세덱은 제사장이며 왕이었다.예수님이 왕권과 제사장직을 함께 행사하신다는 사실은 믿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격려가 된다. 예수님이 왕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의 의로운 심판을 두려워하며 바르게 살아야만 한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이 의로운 왕이 또한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고 아버지 앞에서 중재자로 서시는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기”(히 4:15) 때문에,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16절). 우리는 궁극적인 제사장이며 왕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슬픔을 아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며, 우리의 은혜로운 주님으로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영원한 제사장예수님의 제사장직은 영원한 제사장직이기 때문에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보다 우위에 있다. 다윗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말한다(시 110:4). 합법성을 얻기 위해 족보가 본질이었던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과는 대조되게, 멜기세덱의 족보는 창세기나 다른 곳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출생이나 죽음, 그의 혈통 또는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 히브리서 저자가 통찰적으로 말하듯이,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의 등장은 그에게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의 영원성을 보여준다(히 7:3).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이 감당해야 하는 책무 중의 하나는 제사장으로 섬길 때 불행하게 죽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희생이 끊임없이 필요했던 것처럼, 새로운 제사장도 끊임없이 필요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다르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스스로 완벽한 마지막 희생을 했더라도, 죽음은 그분을 붙들 수 없었다(16절).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의 오른편에 영원히 서 계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은 매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원천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고 그분이 우리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님을 상기시킨다. 불순종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다(히 13:5).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죄인을 구원하신 그분을 믿고, 회개하도록 이끄는 완전한 중재자가 있다. 시편 110편은 영원한 제사장이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며 축하하고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Eternal Priest번역: 정은심
멜기세댁
레위지파
대제사장
중재자
시편110편
영원성
승천
우월성
복음
예수그리스도
악의 문제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by R. C. Sproul
2019-12-28
악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고전적인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아킬레스건으로 여겨져 왔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같은 철학자는 주장하기를, 악의 존재는 하나님이 전능하시지 않거나, 또는 선하시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의 사실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서 벗어난 악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하나님이 악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의 성품을 선하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악의 문제가 함축하는 이러한 논리 때문에, 교회는 소위 신정론(theodicy)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변증 작업을 시도해 왔다. ‘신정론’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헬라어 단어가 합성된 개념이다. 즉 하나님을 의미하는 ‘데오스’(theos)와 정의를 의미하는 ‘디카이오스’(dikaios)가 조합되었다. 결국 신정론은 악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시도는 이를테면 존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Paradise Lost)에서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은 신정론은 악을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 직접적인 결과라고 이해하는 단순한 설명에서부터 라이프니츠(Leibniz)가 철학적인 접근으로 제시한 더욱 복잡한 논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중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은 볼테르(Voltaire)의 캉디드(Candide)에서 풍자적으로 다뤄지기도 했는데, 라이프니츠는 거기서 세 가지 유형으로 악을 구분했다. 바로 자연적 악, 형이상학적 악, 그리고 도덕적 악이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3중 도식에서 특별히 도덕적 악에 대해서는 유한성(finitude)의 필연적 결과라고 주장했다. 즉 완전한 존재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론적 결여가 불가피하게 그와 같은 악을 발생시킨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모든 피조물은 무한한 존재에 이를 수 없는 부족함을 지니기에, 그 부족함이 우리가 목격하는 도덕적 악과 같은 결함을 낳게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신정론은 성경이 규정하는 악의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만일 피조물이 그 존재상 필수불가결하게 지닐 수밖에 없는 조건이 악이라면, 아담과 하와는 타락 이전부터 악을 내포한 상태에 처하고 만다. 심지어는 천국에서 영화된 후에도 피조물로서 악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나는 개인적으로, 신학자들이 “불법의 비밀”(the mystery of iniquity)이라고 부르는 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는 경우를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역주: 원래 “불법의 비밀”이라는 표현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7절에서 사용되었으며, 이 어구가 KJV 영어성경에서 “the mystery of iniquity”라고 번역되어 전통적인 표현으로 굳어졌다. 여기서는 악의 문제를 가리키는 개념으로만 언급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설명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설명하는 일에 얼마나 큰 부담이 따르는지를 놓치고 있는 듯하다.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는 악의 기원을 설명해 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선한 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악을 선택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고자 하는 경향이 의지에 있는 한, 이미 죄악이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악의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접근이라면, 어거스틴(Augustine)이 처음으로 개진하고 나중에 아퀴나스(Aquinas)가 발전시킨 신정론을 들 수 있다. 이 신정론을 통해 그들은 악이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논증했다. 악은 그 자체로 어떤 대상이나 실체 혹은 존재로 규정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 대신에 악은 하나의 행위, 즉 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행위로 규정된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는 악을 선의 부정(negatio) 또는 결핍(privatio)으로 정의해 왔다. 그리고 악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에 대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 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어거스틴의 주장처럼 악은 선에 기생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은 정의상 선에 의존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이 비록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는 그 어려움이 배나 되는 과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악의 문제를 설명하려면 선의 존재부터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하나님을 상정하지 않고는 선에 대한 궁극적 기준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현대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악과 선을 둘 다 부정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을 취해 왔다. 하지만 그런 접근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악한 행동으로 실제적인 고통을 가한다면, 유지되기가 매우 어렵다. 자신이 악한 행동의 피해자가 되어보기 전에는 악의 존재를 부인하기가 쉬운 법이다.결국 우리가 악의 기원에 대한 완전한 답변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전능하심과 선하심 속에서만 악의 존재를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도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 즉 악을 행하지도 만들지도 않으시지만, 악이 존재하도록 주관하신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므로, 당연히 악이 존재하지 않도록 막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악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용하셨다. 그렇다면 악의 존재는 그분의 주권적 결정을 반영한다고 봐야 한다. 또한 그 주권적 결정은 그분의 완전한 성품을 따른 일이었기에, 우리는 악의 존재를 허용하신 그분의 결정이 선한 결정이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여기서 우리는 악을 선하다거나 선을 악하다고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악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신 결정이 선하다”라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다. 나의 요점은, 악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신 결정은 선하며 그 결정에서 벗어난 다른 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정론 조차도 ‘어떻게’ 악이 피조 세계에 유입되었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 접근은 오직 ‘왜’ 악이 존재하는가만 설명할 뿐이다. 우리는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다른 곳은 몰라도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 행동 가운데 악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악의 세력이 현저하게 드러나 이 세상에 큰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 악을 다스리시며 마지막까지 악이 득세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시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악은 언제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선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 가운데 악을 최종적으로 정복하시며 우주에서 그 악을 제거하기로 작정하셨다. 바로 이 구속 계획에서 우리는 안식과 기쁨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계획이 이뤄지기까지만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갈 뿐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Mystery of Iniquity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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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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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라이프니츠
복음
변증
흐름에 역행하는 크리스마스를 보내자!
by Dave Harvey
2019-12-25
그날은 1984년 1월 22일이었다. 수퍼볼XVIII를 시청했을 만큼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3쿼터가 진행되는 중에 애플은 첫 번째 매킨토시 컴퓨터의 출시를 홍보하는 블록버스터 광고를 방영했다. 80년대 초반을 기억할 정도로 나이가 많지 않다면, 지금 유튜브를 통해 그 광고를 확인해도 된다. “1984”라는 제목의 이 광고에는 큰 화면 속 영상을 보고 있는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그 큰 화면에서 빅 브라더, 즉 독재자는 검열의 미덕을 찬양하고 있는데, 갑자기 금발의 여자가 나타나 앞을 향해 도전적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망치를 화면을 향해서 던지자 독재자의 연설을 보여주고 있던 큰 화면은 산산조각이 난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그녀는 모두가 다 획일화된 기술로 정체되어 있는 세상에서 개인을 해방시키고 있다. 아니, 어쩌면 마이크로소프트부터 해방시키는 건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스티브 잡스의 팬이든 아니든 그를 칭찬해야 한다. 그는 기억에 남는 방식으로 어떤 순간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애플에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기고 있다면, 잡스는 그 일을 특별하게 알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애플 제품 출시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고 소비자들이 흥분하기에 충분했다.하나님의 출시 이벤트나는 최근 이사야 9장 6-7절을 읽으면서 이 일을 생각했다. 이 구절은 아마도 인류 역사에 기록된 가장 커다란 뉴스일 것이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것은 공식적인 크리스마스 구절 중 하나이다. 이 구절과의 친숙함은 우리로 하여금 얼음에 구멍을 뚫어 흐르는 물 아래를 보게 하는 대신 표면에서 스케이트를 타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잠시만 이 얼음 아래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구절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이 구절 속 좋은 소식은 출생 발표이다. 한 어머니에게 한 아기가 주어졌고, 그 아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신성을 가질 것이다. 여자에게서 태어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아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는데,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린다. 아들은 또한 독특한 권세, 즉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평화가 증진되고 영원히 확장되는 그런 독특한 권세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뉴스는 가장 위대한 뉴스임에 틀림이 없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영원한 평화의 권세를 만든다는 뉴스 말이다.이런 뉴스는 단순한 위대함을 뛰어넘는다. 이런 뉴스는 애플이 발표하는 신제품 광고를 하찮게 만든다. 자, 그럼 하나님은 이런 아들이 세상에 오는 순간을 위해 어떤 종류의 놀라운 프로모션 행사를 준비했을까?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청중과 무대는 단지 몇 명의 목자와 양이 있는 들판이었다. 누가복음 2장 9-11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스티브 잡스라면 이런 사실에 당황했겠지만, 하나님은 기뻐하셨다.평범함 속의 비범함자정 이후 들판에서 한 무리의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이런 당황스러운 탄생 스토리를 지켜보았다. 파파라치들이 놓친 이 특별한 소식은 평범한 목자들을 통해서 그 반향이 울려 퍼졌다. 그렇기에 이 소식은 아름답다. 하나님께서는 이 좋은 소식을 힘 있고 고귀한 사람들과 IT 전문가와 네트워크 전문가들이 듣도록 하지 않았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과 교육받은 엘리트는 이 소식에서 제외되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 뉴스는 궁전 발코니에서 발표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호위하는 측근에게 둘러싸여 도착하지도 않았다. 천으로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약한 아기로 오셨다. 하나님의 복음은 평범하고 겸손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었다.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세주를 보내셨고, 그것을 믿은 겸손한 이들만이 복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나는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정말로 온 세상의 왕이고, 그런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시는 상황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종종 회심한 사람들의 화려하고 강력한 간증을 들었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간증은 하나님이 나를 만나러 오실 때 분명히 충격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큰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의 회심에 화려한 불꽃놀이는 없었다. 적과의 치열한 세력 다툼도 없었다. 독창적이거나 특별한 것도 없었다. 내가 회심한 것은 확실하지만, 그게 언제인지 날짜와 시간도 모른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 화려한 불꽃, 기억에 남는 기적을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겪은 회심 과정은 훨씬 더 초라했다. 회심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기적이지만 때로는 화력이 뛰어난 대규모의 군대보다 잘 훈련된 소규모의 저항군에 더 가깝다.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나의 욕망을 새롭게 혁신시켰고, 불가사의할 정도로 나를 예수님에게 끌리게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엄청난 갈망과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회심의 역사하심은 내게 하나님에 대해서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었다. 하나님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여기 이 세상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만든 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수 있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1. 표면 아래를 보기내 인생 대부분 크리스마스는 큰 행사였다. 집에 장식을 하고 교회에 가기 위해서 옷을 차려입었다. 산타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행동도 제대로 해야 했다. 이러한 전통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낼 때 ‘평범’이라는 주파수에 맞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크리스마스를 화려하게 보내면 보낼수록 그 위대한 거룩함이 겉으로만 번쩍이는 화려함에 묻히게 된다. 진짜 아름다움, 진짜 의미,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주는 초월성은 외면의 화려함이 우리를 산만하게 만들 때 사라지게 된다. 성경적인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문화적인 요란함과 마케팅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로 하여금 표면 아래를 보도록 만든다. 크리스마스 때에 하나님은 최고의 선물을 가장 평범한 광경 속에 감추었다. 그는 그 선물을 거룩한 단순함으로 포장했다. 선물을 열기 전에 말씀을 읽는 것, 선물이 열린 후에 감사를 표하는 전통, 식사 전에 하는 감사의 기도, 아이들과 베들레헴 드라마를 나누는 것, 나이든 손님에게 지난 1년 동안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했는지를 나누는 것, 친척과 함께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예수님이 들어간 그 이야기를 함께 하는 것 등이다. 이런 단순한 행동들 속에 어떤 번뜩이는 천재성은 없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을 간증하고 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게 된다. 바로 이런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이제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게 된다. 크리스마스를 영원히 중요한 사건으로 만드는 진정한 보물인 예수님이 구유 안과 밖에서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2. 크리스마스는 당신이 기대하는 것을 가져다주지 않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기억하라당신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도 있을 것이다. 또 좋지 않은 크리스마스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산타가 아이 (또는 마음이 아이인 사람)에게 선물 대신 양말에 석탄을 넣어두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우리가 받을 선물과 관련된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크리스마스 전통에 동조한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구세주는 모든 것을 다 비우고 이 세상에 도착함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 때문에 그분의 진노를 받아 죽는 것이 마땅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 땅에 아기로 오셨다. 인간의 모습으로 살면서 성장하신 후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침으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도록 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심판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지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회복시키는 방법을 찾았음도 상기시켜 준다. 크리스마스 희망 목록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받을 것이다.3. 크리스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기회로 활용하라“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성탄절 이야기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을 모두 비웠다는 사실이 차지하고 있다. 바로 종이 된 예수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참된 능력을 볼 수 있다.크리스마스에 소파에 누워서, 풋볼을 보면서 프레즐을 먹으며 나무 늘보처럼 퍼져있는 것은 재미있다. 내게는 TV 리모컨을 완벽하게 제어할 자격도 있다. 그러나 저녁 식사 후 설거지를 하기 위해 싱크대 앞에 서게 되면 완전히 다른 크리스마스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두 가지 형태로 다가온다. 하나는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이들이 수고하도록 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내 이기심을 역행하는 방식이다. 구세주는 아기로 이 땅에 온 왕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할 뿐 아니라 또한 아기에 불과한 우리가 그를 닮아 이 세상에 역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부르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이 세상에 역행하는 구세주라고 부를 수 있다. 놀랍고도 또 대담한J. I. 패커(J. I. Packer)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관해서 이렇게 썼다.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더 놀라게 된다.” 그런데 생각할 점이 있다. 애플처럼 엄청난 돈을 들여서 광고를 하기 때문에 놀라는 게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또 해냈어!”라고 외치면서 놀라는 게 아니다. 놀라운 이유는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가장 예상치 못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처녀의 몸에서 아기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 아기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함으로 영원까지 변화시키도록 했다. 단지 “놀랍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적인 위대함이 가진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제대로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렇기에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면서 우리 모두 이렇게 외치자.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크리스마스를 보냅시다!”원제: Have Yourself a Subversive Little Christm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신학
구약성경
패커
역행
섬김
회심
아기그리스도
구세주
성탄의 큰 기쁨, 그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다
by David Mathis
2019-12-24
성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는 것 같다. 성탄의 분위기와 매력, 그리고 신비한 느낌마저 드는 매혹적인 느낌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니, 오히려 성탄은 특별히 어른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성탄에 대해 무뎌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방 점성술사들이 서쪽을 향해 길고 힘든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에 뭔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악한 왕이 죄 없는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한 것을 보면 뭔가 놀라운 일이 임박했음이 분명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목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다가 자기 양 떼를 놓아두고는 갓 태어난 아기를 찾아 나선 것, 그리고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파했던 것을 보면 뭔가 특별한 일인 것이 분명하다.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눅 2:18). 주님 되신 그리스도천사들이 선포할 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알릴만한 이 위대한 신비의 핵심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에 담겨있다. 이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리스도, 메시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대하고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특별히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오신 것일 뿐 아니라, “주님”의 오심 이기도 하다. 하나님 자신이 오신 것이다. 오랜 기다림 후, 마침내 진정한 임마누엘이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 이는 너무도 장엄한 소식이어서 한 번에 다 말할 수 없다. 이 아이의 삶 속에서 매일 가르침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이 사람에게 이스라엘과 열방의 “주”이신 하나님의 신성이 있음을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복음서의 각 페이지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분명히 인간이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점진적으로 더욱 잘 보여줄 것이다. “육신이 되어”(요 1:14) 오신 이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동일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요 1:1–3). 그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 본 위대한 장관이 이것이었고, 이는 이 진리를 앎으로 복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 성탄을 생각할 때마다 맛보기를 갈망해야 하는 경이로움이기도 하다. 그분의 오심은 단순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 구주 되신 그리스도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할 때, 이는 재미를 위하여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창조주가 마음만 먹으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공개 시연 같은 것도 아니다. 이 불가사의는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이다. 죄, 그리고 죄의 영향, 덫, 그리고 파괴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천사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눅 2:11)라고 선포한다. 이 사자는 요셉에게 이르기를,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라고 한다. 히브리어 ‘예슈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내셨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의 순간마다 여호수아, 사사들, 그리고 왕들을 구원의 도구로 보내셨다. 그리고 이제는 그분 자신이 오신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보화 되신 그리스도하나님 자신이 오시는 것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하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속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최종적인 값을 치르시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벧전 3:18)이고, 부활하신 그분께서 우리의 ‘큰 기쁨’(시 43:4)이 되신다는 사실이 큰 기쁨의 이 좋은 소식(눅 2:10)의 근거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청교도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에 따르면,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이 있다.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지극히 큰 기쁨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성취된 모든 유익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그의 인격보다 훨씬 가치가 낮고, 그의 인격의 영광에 비교하면 그 가치는 더욱더 낮다. 그러한 유익들을 다 합쳐도 그리스도의 무한한 가치에 비할 수 없다”(‘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3쪽에서 발췌). 우리가 얻은 구원의 기쁨이 극대화되는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지극한 기쁨이 되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밭에 감추인 보화이시다(마 13:44). 그는 극히 값진 진주(마 13:45–46)이시다. 그를 단순히 임마누엘이나 우리의 구주로만 묘사할 수는 없다. 그분은, 하나님이요 인간이며, 인간의 영혼을 영원히 살게하시는 가장 큰 기쁨이요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이시다. 영광 되신 그리스도성탄은 기쁨을 누리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자는 수많은 천군과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선포한다. 원한다면 이를 성탄 희락주의(Christmas Hedonism)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가 신인(神人)으로 오셔서 자신의 인격을 통해 선사해 주신 그 기쁨은 모든 창조의 위대한 목적에 부합하고 그 목적을 성취한다. 성탄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짜릿한 기쁨을 흘려보낸다. 굿윈은 계속 이르기를, 하나님의 “주된 목적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부르시기 위함이었다 [중략] 그리고 모든 타락하는 것들을 작정하신 것, 심지어 구속 그 자체마저도, 그리스도의 영광이 발현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했다. 마크 존스(Mark Jones)도 예수님이 주님이시오, 구주이실 뿐 아니라 보화가 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탁월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부록이 아니다 [중략]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가 그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극치이기에, 우리는 그의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가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의 부요함을 이루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보다 우리 구원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부분적인 진리에 불과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4쪽). 성탄에 난 그 아기는 주님 이상이시다. 심지어 구주 이상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의 위대한 보화이시고, 우리가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안에 그의 영광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존재한다. 성탄의 참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가 태어나신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당신은 성탄의 큰 기쁨을 위해 창조되었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You were made for Christmas번역: 이정훈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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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굿윈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것!
by Brandon D. Crowe
2019-12-21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 교리는 보통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과 연결된다. 그러나 처녀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처녀에게 탄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떻게 구약 성경의 맥락 속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걸까?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 예언을 이루었다는 걸까? 이사야 7장 14절은 처녀 탄생과 관련해서 중요한 핵심 구절 중 하나이다. 그러면 이 구절이 어떻게 예수와 연결되는지 살펴보자.먼저 여러 각도로 살펴보기 위해 구약적 맥락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사야 7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는다.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는 명령을 주기 위해서이다(10-11절). 이것은 앗수르와 북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생길 수 있는 잠재적인 재앙을 대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보통 하나님께 어떠한 징조를 구하는 것이 믿음 없는 행동으로 비추어지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징조를 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믿음 없는 행동이다(12절). 앗수르와 정치적인 결탁을 하는 대신(왕하 16:1-9) 아하스 왕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선지자의 말에 대한 아하스 왕의 거절, 즉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그의 결정은 결국 앗수르에게 침략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사 7:17-25). 아하스 왕은 징조를 구하지 않았지만, 그는 징조를 받았다. 이사야 7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징조를 주셨는데, 바로 특별한 아기의 탄생이다. 그 아기가 히스기야 왕인가? 아니면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 중 하나인가? 여기서 이 아기가 어떤 아기인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단지 그 아기는 아하스 왕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징조라는 것만 명확한 것이다. 아기가 누구인가보다 더 명확하지 않은 것은 여기서 말하는 여인이 과연 처녀인가에 대한 것이다. 혹자는 이사야 7장 14절 속 히브리어가 처녀를 의미하지 않고 단지 지금껏 아이를 낳지 않은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는 처녀 탄생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비약적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분명히 처녀를 말하고 있다.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는 그 단어는 구약에서 계속적으로 처녀를 의미했던 단어이다. 게다가,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 성경은 이 단어를 분명히 그리스어 “처녀”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했다.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약 성경의 저자가 이사야 7장 14절은 분명한 처녀 탄생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마 1:22-23).여기서 약속된 아이는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이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말은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생각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맥락에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아하스 왕에게 주어진 경고였다. 그에게 있어서 임마누엘은 축복이 아니라 아하스 왕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는 경고이자 저주였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적용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복과 저주를 함께 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 안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반응해야 한다.요약하면,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약속한 아이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의 표시이며, 아하스의 믿음 없음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은 우리의 도움과 피난처이며,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 신뢰와 희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가까운 미래에 그 결과가 나오는 것이었다. 아이가 자라기 전에 아하스 왕이 두려워한 모든 정치적 위험은 사라질 것이다(사 7:16). 그럼에도 아하스에게 징조로 보여진 그 아이는 보다 더 완전한 성취를 가리키고 있다. 아하스 왕 시대에 이사야 7장 14절이 말하는 임마누엘 아기가 정말로 태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분명한 징조였고,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면 저주였다. 이 예언은 틀림없이 아기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이라는 더 위대한 사건을 드러내고 있다. 이사야 7장 14절에서처럼 우리와 맺은 언약적 존재인 예수님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것에 따라 복이 되거나 저주가 된다. 아하스 왕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힘을 주거나 경고의 메시지가 된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에 대한 경고가 된다. 아하스 왕은 이방 신에게 제사하는 방식으로 그의 아들을 불에 바쳤던 것 같다(왕하 16:3; 대하 28:3).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축복을 가져다줄 아이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으며,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의 회복을 약속하셨다. 마지막 임마누엘은 희생적인 죽음으로 그 희생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 임마누엘이 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찬송하는 “천사 찬송하기를” 속의 가사처럼, 처녀의 자궁에서 태어난 이 아기는 “죄인들을 불러서…영생하게 하시니”를 실현하신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Of the Virgin’s Womb번역: 무제
복음
변증
예수님
처녀
이사야7:14
임마누엘
선지자예언
언약백성
피난처
예수님은 왜 성령이 필요하셨을까?
by Mark Jones
2019-12-14
흔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러 기적을 행하셨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 맞다. 그런데 그분의 신성이 인성을 통해 늘 역사하여 기적을 행하도록 만들었다면,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그분의 생애에서 성령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정말 예수님의 신성만이 유일하게 그 인성에 작용하는 역할을 했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예수님은 성령이 필요하셨을까?’ 많은 기독교인들은 (때로는 뛰어한 신학자들조차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있어 성령이 무슨 역할을 하셨는지를 확실히 모를 때가 있다.성령을 따라 사역하신 예수님예를 들어 로마가톨릭이나 루터파 신학자들의 경우, 각자의 전통에서 내세우는 기독론을 고수하는 한 성령의 의미심장한 역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로마가톨릭과 루터파 신학자들은 (가령 믿음이나 소망과 같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사나 은혜를 성령과 어떻게 연관지어 설명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이와 달리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논증하며 통찰력 있는 성령론을 발전시켰다. 내가 아는 한, 오웬 이전에 그처럼 선명하게 그 관계를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온전하게 통합된 상태에 있음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오웬은 성자의 신성이 아무런 매개 없이 인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일은 단 한 번으로서, 오직 성육신을 통해 인성이 실재하도록 결정하는 일을 할 때만 그러했다고 주장했다.그에 따르면,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모든 활동의 주체는 성령이 되신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적 권능이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권능을 베푸셨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시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위격적 연합’(the hypostatic union)에 의해 ‘직접적으로’(immediately) 활동하는 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 ‘매개적으로’(mediately) 활동하기 때문이다(여기서 위격적 연합이란,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이 함께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오웬의 접근과 달리, 그리스도의 기적에 관해 통상적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그분 자신의 신성에 의해 기적이 행해졌다는 주장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오웬과 다른 개혁신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성령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직접적인 주체가 되신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성령의 관계를 이해할 때만,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와 관련된 성경 본문을 읽을 때 마주하는 수많은 물음들에 답변할 수 있게 된다.인간의 영혼을 지니신 예수님기독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분의 영혼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은 순수한 의도에서 나왔을지는 몰라도 잘못된 추측이다. 예수님은 여느 인간과 같이 이성적인 영혼을 지닌 순전한 사람으로 성육신하셨다. 자신의 도덕적 행동에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영혼을 지니셨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의식을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성자의 위격이 곧 그리스도의 자의식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자들이 설명한 바와 같이, 위격이란 한 존재의 양식 내지 정체성이지 영혼의 활동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그분의 위격을 가리키는 물음이며, 이에 우리는 (그분의 정체성을 가리키기 위해) ‘예수님은 신인(the God-man)이시다’라고 답변한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분의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그 신성에 묻혀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성령을 필요로 했다. 또한 하나님께 올려진 그분의 기도도 단순히 사람의 기도이거나 심지어는 신인으로서 성부께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바로 성령의 권능 가운데 성부께 드려지는 성자의 기도였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입을 열어 간구한 어떤 기도도 그분의 인성에 강력하게 역사하신 성령의 도움 없이 드려진 기도는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도 주님의 간구와 같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이렇듯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그분과 동행하신 분은 성령이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일어난 모든 주요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신 분도 성령이셨다. 이를테면 성육신을 일으킨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원인 자체도 성령께 있었다(마 1:18, 20; 눅 1:35).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처럼 성령에 의해 시작된 사실은, 메시아가 성령을 받게 될 사람이라고 말했던 이사야의 예언과도 잘 들어맞는다(사 42:1; 61:1).실제로 신약성경은 이사야의 증언을 여러 군데서 확증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에 대해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라고 언급한다(요 3:34). 또한 세례 시에는 성령이 그분 위에 내려오셨다고 묘사한다(마 3:16). 그리고 광야의 시험 전후로도 성령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인도하고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하셨다고 설명한다(눅 4:1, 14).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시작하는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으시며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다(눅 4:21). 그래서 그 선언대로 성령의 권능을 따라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마 12:18; 행 10:38).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영혼이 지닌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치셨다(히 9:14).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처럼, 그분의 부활 역시도 성령에 의해 일어났다(롬 8:11). 그 결과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롬 1:4; 참고 딤전 3:16; 벧전 3:18).이처럼 성령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 동안 계속해서 동행하셨다. 따라서 그분이 성부께 기도하실 때도 성령의 능력을 따라 간구하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로마서 8장 26-27절 본문도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를 언급하는 수많은 성경 본문은 개혁신학의 해석 전통을 따를 때 가장 잘 설명된다.연약한 사람이 되신 예수님지금까지 설명한 기독론을 전제했던 휴 마틴(Hugh Martin)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약하고 힘없는 상태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 의존성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간구를 담고 있는 그분의 기도 속에 잘 드러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그분이 여자의 몸을 통해 율법 아래에서 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갈 4:4). 율법 아래에서 나셨다는 말은, 다른 규례나 의무와 마찬가지로 기도해야 할 책임 역시 그분에게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도의 율법은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늘로부터 응답받지 않고는 그 무엇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조건을 가리켰기 때문이다(겔 36:37).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인성에서 나오는 믿음, 사랑, 존경, 기쁨을 하나님께 기도로 표현하셨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는 하늘의 모든 은혜를 성령의 권능을 따라 체험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간구와 소원을 늘 아뢰기 원하셨고, 또한 자신이 신뢰하는 그 아버지를 언제나 찬양하고자 하셨다. 나아가 거룩한 결정을 내리실 때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과의 교제를 다른 어떤 의무보다 우선하는 최고의 본분으로 여기셨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 속에서 그분의 참된 인성이 구현되었다.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예수님그렇다면 이 모든 내용이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세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에 대한 사역을 지속하신다는 사실이다(행 2:33).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사역을 이제는 천상에서 적용하는 일을 하시는데, 이 일을 다름 아닌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심으로써 행하신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후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역할을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그분의 이름을 지닌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활동하신다(롬 8:9).둘째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이끄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은 그리스도 자신의 의로운 생명을 우리 안에 두셔서 그분의 정서와 갈망을 갖게 만드신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인도하신다(롬 8:29).셋째는, 성령이 우리의 인생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 생애를 통해 역사하신 성령이 이제는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 다시 말해 성령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듯이, 지금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그 아들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결국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성부와 성자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다.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그 사실을 떼 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성령을 이제는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루셨다(요 14:18).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y Jesus Needed the Holy Spirit번역: 장성우
복음
예수그리스도
성령
사역
영혼
사람
필요
성육신
존오웬
기독론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구약의 하나님
by Miles Van Pelt
2019-12-11
구약에 등장하는 자비(mercy) 또는 긍휼(compassion)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이는 출애굽기 32장부터 34장까지의 내용, 황금 송아지 이야기에 잘 드러나 있다. 이집트로부터 기적적으로 탈출한 이스라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산 아래에 천막을 쳤다. 거기서 그들은 연기 나는 산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천둥처럼 들리는 체험을 통해서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었다(출 20:22). 이때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출 20:4, 23).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로부터 고작 40일 정도가 지났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금지한 일, 바로 우상을 만드는 일을 했다(출 32:1-6). 이 한 번의 불순종은 시내산 언약을 어긴 것이었고,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는 죽음이었다(출 32:10).그러나 서사는 계속된다. 모세가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지 않기로 하셨다(출 32:11-14). 모세는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계속해서 지켜주실 것을 요청했다(출 33:12-26).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놀라운 요청을 한다(출 33:18).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출 33:19).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위 뒤에 숨기시고 그의 영광이 지나가게 하여 모세가 영광을 보도록 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신다. 바로 이 마지막 내용, 출애굽기 34장 6-7절에 나오는 거룩한 이름의 선포 부분이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볼 부분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후략]’”출애굽기에 깊이 묻혀 있는 이 두 구절에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핵심적인 사고 체계(paradigmatic expositions) 중 하나가 들어있다. 이렇게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이 가지는 풍부함에 깊이를 더하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의 근원인, 모세에게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 자신이다. 이 구절이 보여주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다음 두 가지 핵심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6절의 첫 부분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섯 가지로 보여준다. 자비, 은혜, 화내기를 더디 함, 변치 않는 사랑 그리고 신실함이 그것이다. 그리고 7절에 나오는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대할 때, 특히 “악한 행위와 죄를 용서” 하는 데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한다. 무한한 탁월함(His limitless excellence), 측량할 수 없는 능력(immeasurable strength), 그리고 더없이 완전함(complete perfection), 이러한 하나님을 완전하게 이해하기에 한없이 부족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incomprehensibility of God)을 생각해보자.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존재 중 일부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겠다고 결심하셨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또는 성품)과 관련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로 한 첫 번째 속성이 바로 자비하심이다. 이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자비로우신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다.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신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기록한 구절의 원래 문맥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본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언약을 어겼다. 그들은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거두셨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자비는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출 34:7) 라는 구절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 약한”(weaker) 속성을 알려주려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이 특정 속성은 구약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뤄지는 데에(시 78:38; 86:15; 103:7–14) 있어서 중심이 되고, 참되고 진실한 회개에 대한 동기를 부여한다(욜 2:12-13; 대하 30:9).하나님의 자비가 구약 속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 자비하심은 모든 피조물에게로 확장된다. 시편 145편 8절이 출애굽기 34장 7절에 처음 기록된 이 하나님의 속성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한번 보라.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편 145:9) 성경은 편협하게 제한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모든 현실을 형성하는 무소부재한 힘(ubiquitous force)이며, 희망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동기(pervasive impetus)이다.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품성이 먼지 쌓인 건조한 신학책 속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은 죄인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준다. 이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우리의 삶에 가장 잘 적용하는 사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특히 도움이 필요한데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미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단지 죄인에게 내릴 벌을 참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손을 내미신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컸는가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여러 곳에서 잘 드러난다. 돈을 빌려줄 때 가난한 자들은 이자를 면제받았다(출 22:25). 판결을 내릴 때 절대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면 안 되었다(출 23:3; 레 19:5). 제사를 지낼 때도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의 형편에 맞추어 제물을 준비하면 되었다(레 14:21). 신명기 15장 7절에서 11절까지를 보면,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 그 구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1절). 잠언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은 지혜라고 말한다(잠 14:21; 17:15; 22:9, 16; 28:27). 선지자는 가난한 자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자를 정죄한다(사 3:14–15; 10:2; 렘 5:28; 겔 22:29; 암 5:12). 시편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하나님을 찬양한다(시 68:10; 72:13; 112:9; 113:7; 140:12).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 궁핍하고 배고픈 자, 억눌린 자를 돌보지 않고 외면하신다는 말씀 구절은 구약의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 외에도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신다. 물론 과부라고 함은 남편이 죽고 다시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말한다. 구약에서 고아란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말한다. 고아를 영어 성경에서는 “아버지 없는 자”(fatherless, 특히 ESV 성경에서)로 표현하기도 한다. 나그네는 이방인 또는 외국 땅에서 사는 외국 거주인인데,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자기 나라를 떠난 사람들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지역에서 나그네였다(창 23:4). 모세는 미디안에서 나그네였다. 사실 모세는 미디안에서 낳은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 즉 “그 지역의 나그네”라는 뜻으로 지었다(출 2:22).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도 나그네 취급을 받았다(레 25:23).그러면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가 하나님의 자비로운 관심을 받는 특별한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취약함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정치적, 사회적, 또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억압을 받거나 학대받았다. 사회적 제도로 보호받거나 이웃에게 보호받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셨다. 신명기 10장 18절은 이렇게 말한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언약은 그들을 착취하는 것을 금지했다(출 22:22; 신 24:17). 그들이 먹을 것을 구할 기회를 주도록 했고(신24:19, 21; 26:12), 매년 열리는 축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신 16:11, 14). 그리고 행정적인 처리에서도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했다(신 24:17). 반대로 과부나 고아, 또는 나그네에게 공의를 베풀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신 27:19). 이 죄가 가진 심각성을 말라기 선지자는 거짓말, 마법, 그리고 간음과 동일시하였다(말 3:5)고 말한다.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고 찬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이웃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는 자비의 모습을 세상에서 보여야 한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시 82:3-4).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율법은 그것을 명령하고 지혜는 그것을 가르친다. 선지자들은 거기에 동참하고 시편은 그것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가장 극적이고 위대하게 드러난 것은,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서 발견된다. 신약 성서의 자비와 긍휼은 구약 성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자비와 긍휼이 극치의 상태에 도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약 성경이기 때문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Old Testament God of Compassion and Mercy번역: 무제
신학
구약성경
은혜
자비
긍휼
하나님의속성
창조주
호프 씨의 마지막 희망
by Michael A. Rogers
2019-12-07
나는 최근에 호프 씨를 묻었다. 호프 씨는 성숙한 기독교인 여성이고 86세였다. 그녀는 이름이 호프인 것처럼 내가 그녀의 목사로서 알고 지낸 20년 동안 희망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재활센터에서였고, 그녀는 교통사고로 거의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 호프 씨는 균형을 잡기 위해 지팡이 두 개나 필요할 만큼 매일 고통 속에서 살았다. 이런 그녀는 여러 가지 건강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기뻐하며 조금도 절망하지 않았다. 호프 씨는 애초에 4개였다가 갑자기 6개로 늘어난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다. 수술 전에 나는 다른 목사 한 명과 병원에 방문했다. 야고보서 5장에 근거해서 그녀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치유를 위한 기도를 했다. 그녀는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호프 씨는 48시간에 이르는 엄청난 심장 수술을 견뎌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야고보서 5장 15절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마지막 날에) 그를 일으키시리라.”목사들은 이제 종말이라는 궁극적인 주제, 다시 오실 그리스도, 주님의 날에 있을 모든 영혼을 향한 심판, 믿지 않는 자들을 필연적으로 기다리는 지옥,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에게 준비된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좀 더 자주 설교해야 한다. 요즘 주로 들리는 얕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복음주의 설교는 기독교인이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룬다. 당연히 선포해야 할 궁극적인 희망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시간조차 할애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몇 세기 앞선 성도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급작스러운 죽음과 마주했다. 높은 영아 사망률과 전염병의 위험 속에서 살았다. 훨씬 더 짧은 수명이었지만 그들은 우리처럼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를 좇지 않았다. 주변에 산재한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강단에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희망을 선포하는 설교가 울려 퍼졌다. “죽어가는 한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듯, 나는 다시는 설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심정으로 설교했다.”라고 말하는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설교자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성경을 보면서 환상적으로 멋진 천국에 관한 이야기가 원하는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구약에서는 믿는 이들에게 현재를 넘어서는 내세의 구원 약속이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 극히 드문 약속도 고통이라는 우울한 배경에서 나온다. 욥기 19장 25-26절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시편 16편 11절도 욥기와 유사한 위로를 보여준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사람들조차도 기독교인은 죽은 뒤에 두 단계를 거친다는 신약의 가르침을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가장 먼저는 죽은 후 몸을 떠난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즉각적인 경험이 있다(빌 1:23). 히브리서 12장 23절에서는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그 위대한 부활의 날까지 주님과 함께 있는 왕국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불린다. 오로지 홀로 죽지 않는 존재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의 영과 혼은 불사(immortality)의 선물을 받았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의식을 가진 영혼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육신 없이 영혼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육신을 실재로 간주하고, 영혼은 형체가 없는 일종의 유령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영혼의 무게를 재거나, 영혼을 측정하거나, 영혼을 셀카로 찍은 사람이 있던가? 그러나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중요하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영적이지만, 실질적인 존재를 영유한다. 바울은 이어서 고린도후서 5장 7-8절에서 말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죽을 때에 육신은 무덤에 남기고 떠나지만,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으로 들어간다. 신학자들은 보통 죽음을 통하지 않고 영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라고 부른다. 이 말은 사이(between)와 불완전함(incompleteness)을 함축한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영원의 단계로 들어가는 첫 과정을 “즉각적인 천국”(immediate heaven)이라는 좀 더 긍정적인 말로 부르고 싶다. 강조할 부분은 바로 이 시작 단계에서 접하는 ‘즉각성’이다. 예수님은 회개한 십자가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성경적인 희망은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아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이 육체적으로 사망한 즉시 주 안에서 다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with)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기독교인의 희망에는 두 번의 단계가 있다. 놀라운 예수의 재림은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시작이 된다. 그리고는 다음 단계가 급작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 앞에서 분명하고도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는 신자들의 영혼과 함께 온다(살전 4:13-18). 모든 믿는 자들이 부활의 몸으로 새로워진다(고전 15:51-57). 그 놀라운 날에 기뻐하며 왕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은 구세주의 확실한 보호 아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호소해도 정죄함을 받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차단된다(마 25:31-46). 창조는 이제 그 자체로 새롭게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뀐다(롬 8:20-21; 벧후 3:10-13). 성도가 누릴 미래 경험의 정점은 성경의 마지막 두 장에 적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3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예언한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이것은 모든 악, 죄, 죽음, 슬픔의 흔적이 사라진 궁극적이고 완전한 상태이다. 요한계시록 22장 4-5절은 주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마지막 핵심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중략]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마지막 때 하늘 전체를 덮는 파노라마는 너무나도 놀랍기에 수백만 명의 회의론자들이 성경의 결론을 환상 또는 신화로 여긴다. 냉소주의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기에 “과장된 상상속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들이 냉철하고 현실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무엇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만연해있는 고통과 죽음을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보고 판단한다. 단지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악과 고통을 마지막 결론이라고 믿지 않을 뿐이다.‘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 S.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희망은 미래 세계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중략] 그런다고 지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방치하라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했던 그리스도인은 다음 세상을 가장 열렬하게 기다렸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희망은 미래로 확장되는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것이 그분의 확실한 약속이라고 믿는다. 약속한 존재가 하나님이기에 약속의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지 반드시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희망을 한번 살펴보자. 로마서 4장에서 백세가 된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죽은 것처럼 자식을 낳을 수 없고, 태가 죽은 것처럼 임신하지 못하는 아내 사라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을 약속한 존재가 하나님이었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절망하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중략]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바울은 선언한다.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라고(21절)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살아있는 희망의 핵심이다. 육신의 죽음으로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그의 역사적인 재림을 상상하는 것, 놀라운 부활의 몸을 받는 것, 그리고 새롭게 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을 여행하는 것, 이러한 미래의 희망을 모두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고, 경험해본 사람도 없기에 그것을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세상에 희망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약속의 당사자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청교도 작가인 토마스 아담(Thomas Adam)은 이 문제를 이렇게 결론 내렸다.“희망은 맑은 얼굴을 가진 현숙한 여인이다. 그녀는 이 땅에 앉아 있지만, 그녀의 목표는 하늘에 있다. [중략] 믿음은 그녀의 변호사, 기도는 그녀의 간청자, 인내는 그녀의 내과의사 [중략] 감사는 그녀의 귀중품 보관소, 자신감은 그녀의 해군 제독, 하나님의 약속은 그녀의 닻 [중략] 그리고 영원한 영광은 그녀의 면류관.” 우리 부부는 아직 일흔이 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묻힐 땅에 놓을 비석을 작년에 샀다. 누구나 맞이해야 할 죽음에 대항하여 희망의 간증을 새긴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거기에 빌립보서 1장 21절을 새겨 넣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은 부활 신앙에 근거하여 오늘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확신으로 서 있는가? 출처: www.ligonier.org원제: Our Final Hope번역: 무제
복음
부활
중간상태
재림
천국
희망
루이스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순종
by John Piper
2019-11-30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된다고 가르친다(롬 5:19; 고후 5:21; 롬 4:6, 11: 10:3). 이 가르침은 그분이 공생애 마지막 순간,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돌아가신 사역만으로는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거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이런 질문은 칭의의 원인을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해서 설명하는 본문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본문은 이러한 것이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4-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9).“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위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죄 사함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무죄한 생애를 주장하는 가르침은 흠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사역만으로는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충분하지 않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의 죗값이 탕감받고 용서받는 일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본문을 찾을 수 있다.“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만큼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려면, 그 죽으심이 바로 ‘무죄한 생애의 절정으로서’(as the climax of a sinless life) 이해되어야만 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처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완전하고 죄가 없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밝힌다.“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 7:27-28).“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9).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사건은 그분이 사신 무죄한 생애의 절정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덮는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 사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설명이 아니다. 또한, 그 사건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설명도 아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공생애의 절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분의 전 생애가 바로 그 십자가를 향하도록 계획된 삶이었다고 증언한다(막 10:45; 요 12:27; 히 2:14). 그분이 태어나서 이 땅에서 사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죽으심이 지닌 구원의 효력을 논하는 일은 그분이 사신 무죄한 삶의 절정이자 결론으로서, 그 죽으심이 과연 어떤 효력을 갖는지 논하는 일과 같다고 볼 수 있다.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마지막 순종은 무죄한 생애의 절정에서 이뤄진 행위로서 그 백성을 의롭다 하기에 충분하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순종을 십자가에 이를 때까지 보이신 순종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과연 어느 시점에서 그 둘을 분리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십자가에 못이 박히도록 자신을 내어주신 시점에서인가? 아니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던 시점에서인가? 마지막 만찬에서 자리를 떠나는 유다의 모습을 지켜보시던 시점이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눅 9:51)하신 시점에서인가? 그도 아니면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라고 말씀하시며 세례를 받으시던 시점에서인가? 그 어떠한 시점에서도 예수님의 순종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인위적인 결과만 낳을 뿐이다.따라서 바울이 칭의의 원인으로서 예수님의 순종에 관해 설명할 때도 그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보이신 순종만이 아니라 공생에 전체를 통해 보이신 순종의 절정으로서 십자가 사건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빌립보서 2장 7-8절은 그와 같은 생각을 잘 보여 준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바울의 생각은 이렇게 진행된다. ‘그분은 사람이 되셨다. 즉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 그리하여 자기를 낮추셨다. - 자기를 낮추신 방법은 복종이었다. - 그 복종은 죽음도 기꺼이 감수할 만큼의 완전한 순종이었다. - 심지어 그 죽음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사건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다.’이 본문은 예수님이 사신 생애의 시작점에 일어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사건’과 그 생애의 종결점에 일어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사이에는 자기를 낮추시어 순종하신 삶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순종의 삶이 결국에는 가장 끔찍하면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루었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그분의 모든 순종이 지향한 절정이자 결론으로서 설명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몇 시간의 순종을 그 이전까지의 순종, 즉 처음부터 그 죽음의 시간을 향해 철저하게 계획된 삶을 살아오며 보이신 순종과 분리한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을 그 이전의 모든 순종과 구분해서 말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여기서 아담의 경우에는 한 가지 죄로 인해 완전히 실패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생애 전체를 통해 완전히 승리하게 되셨다.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의 불순종과 순종은 대비된다.바울이 아담의 “한 범죄”와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를 비교할 때, 그는 아담이 금기의 열매를 먹은 행위에 상응하는 어느 한 가지 행위가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담처럼 또다시 실패하지 않으려면 전 생애에 걸친 순종이 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 한 가지 범죄만으로도 아담처럼 실패하기에는 충분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둘째 아담이 되기 위해서는 생애 전체에 걸친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이 바울의 요지이다. 이처럼 완전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생애는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와 ‘죽음’이란 결코 그 이전의 삶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그분이 보여 주신 순종의 절정이자 결론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관한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 십자가 사건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의 죄악을 처리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분이 완전하게 순종하신 삶과 동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완전한 순종의 삶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를 얻게 만드는 최상의 행위,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동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완전한 순종으로 무죄한 삶을 사신 생애의 정점에서 이루어진 행위였기 때문에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는 칭의의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Sufficiency of Christ’s Obedience in His Life and Death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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