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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TULIP이 주는 기쁨
by David Mathis
2019-11-27
최근 개혁신학이 다시 각광을 받으며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젊은 기독교인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스스로가 주장하는 신학에 어울리는 영적 성숙을 이루지 못한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칼빈주의 신학에 부합한 신앙의 덕목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 TULIP(칼빈주의 5대 강령: Total depravity, Unconditional election, Limited atonement, Irresistible grace, and Perseverance of the saints)에 짝을 이루는 또 다른 TULIP을 제안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 삶에서 열매 맺어야 하는지를 강조하고자 한다.전적 겸손(T: Total Humility)“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위의 두 구절에서 야고보와 베드로는 잠언 3장 34절을 인용했다(“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성경이 다루고 있는 위대한 주제는 이처럼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낮은 자리에 있는 자를 돌보며 세워 주신다는 내용이다(눅 1:48, 52; 14:11; 18:14; 약 4:10; 벧전 5:6).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낮춰 비천한 자를 도우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분의 기이한 영광을 보게 된다. 바로 여기에 칼빈주의의 핵심이자 정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 속에 내재하는 죄는 그와 달리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지식을 왜곡시켜 우리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려고 한다.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이다(마 18:4).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겸손한 왕으로서 오셨다. 그래서 건장하고 멋진 준마가 아니라 짐을 싣는 나귀에 올라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슥 9:9; 마 21:5).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만일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따르고자 칼빈주의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빌 2:3)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존 뉴턴(John Newt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야 할 칼빈주의가 악의와 분노와 경멸이 가득한 논쟁으로 훼손되고 말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물었다. “과연 당신이 신봉하는 칼빈주의는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었는가?”무조건적 친절(U: Unconditional Kindness)“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친절은 현대인의 시선으로 볼 때 하찮은 덕목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초대 교회의 이야기를 다룬 사도행전은 친절을 베푼 작은 행동들을 의미 있게 소개하고 있다(행 10:33; 24:4; 27:3; 28:2). 그뿐 아니라 신약의 다른 본문들도 친절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고후 6:6; 골 3:12; 딛 2:5). 이렇듯 모든 성도들은 “서로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엡 4:32). 교회에서 공인된 지도자라면 더욱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해야 한다(딤후 2:24). 친절은 성령의 열매일 뿐 아니라(갈 5:22),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고전 13:4).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절한 성품을 함양하라고 명하시는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세상에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다(눅 6:35). 그처럼 인자하시기 때문에, 또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신다(마 5:45). 더 나아가 그 인자하심은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만들기도 한다(롬 2:4). 그래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믿음을 통해 원가지에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롬 11:22).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며(딛 3:4), 또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시는 계획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에(엡 2:7),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자비가 타인의 삶 속으로도 흘러가도록 기도한다. 따라서 ‘인색한 칼빈주의자’라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한다.제한 비판(L: Limited Criticism)“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중략]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딤후 2:24-25).우리는 ‘4대 강령주의자’(four-pointer)와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참고로 4대 강령주의자란 칼빈주의 5대 강령에서 ‘제한 속죄’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 교리만을 수용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칼빈주의자는 비판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간혹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며, 세부적인 논점을 짚어 내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을 갖춘다고 해서 반드시 다툼을 일삼아야 하는 건 아니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이 “다투지 아니하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고 말했다.물론 성도들에 대해 책망해야 할 때가 있다(눅 17:3; 딤전 5:20; 딛 1:9, 13; 2:15). 이때 목회자는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딤후 2:2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바울은 종을 부리듯 회심한 성도들을 대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와 같이 그들을 대하며 권고했다(고전 4:14). 그 결과 때로는 눈물로 훈계했으며(행 20:31), 교회의 장로들에게도 그런 자세로 성도들을 대하라고 요구했다(살전 5:12, 14). 따라서 우리 모두는 사랑 가운데 서로의 잘못을 친절하게 고쳐 주며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해야 한다(골 3:16).이때 우리의 비판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또한 그 목적은 언제나 상대방을 세우는 데 있지 넘어뜨리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후 13:10). 그러니 날카로우면서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시선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담대하면서도 친절한 태도로 상대방에게 다가가 겸손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잘못을 짚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비판은 가급적 제한해야 한다.불가항력적 공손(I: Irresistible Graciousness)“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 4:6).이 구절은 젊은 칼빈주의자가 귀를 기울여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여기서 바울은 놀랍게도 ‘항상’이라고 강조했다. 누군가의 오류를 지적할 때에든,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릇된 문제에 맞서 싸울 때에든, 항상 은혜 가운데 말을 하려고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사람들에게 잘못을 알려 주거나 또는 그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할 때에도 은혜 가운데 말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평상시에 말을 하는 태도 자체가 공손한지 불손한지를 한번 돌아볼 필요도 있다. 그렇지 않고 영광스러운 ‘은혜의 교리’를 내세우면서 타인에게는 불손한 태도로 말을 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비극적인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토록 강조하는 칼빈주의자라면, 자신이 정말로 그 은혜 가운데 말하고 있는지도 신경 써야 한다.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다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눅 4:22). 그러므로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볼 때도, “은혜를 입술에 머금”었다고 말할 만큼 공손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시 45:2).만일 우리가 은혜 가운데 공손히 말한다면, 5대 강령을 둘러싼 논쟁도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게 될지 모른다. 바울은 은혜로운 말을 할 때 뒤따르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혔다.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참음 속의 인내(P: Perseverance in Patience)“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에 관해 묘사한 첫 번째 속성은 “사랑은 오래 참고”이다(고전 13:4). 또한 그는 인내야말로 자신의 사역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는 특징으로 여겼다(고후 6:6; 12:12 딤후 3:10). 그렇기에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참으라고 반복해서 권했다(살전 5:14; 딤후 2:24; 4:2). 심지어 디모데 후서 4장 2절에서는 단순히 참으라고 말하지 않고 “오래” 참으라고 명했다.분명 우리의 신학이 점점 더 하나님 중심적인 성격을 갖출수록, 우리의 삶도 점점 더 인내하는 모습을 갖춰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인내를 보여 주신 위대한 모델이기 때문이다(롬 2:4; 9:22; 벧전 3:20; 벧후 3:15). 그래서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도 우리에게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셨다(딤전 1:16).감출 수 없는 기쁨훌륭한 신학이 그에 못 미치는 행동으로 비방을 받는다면, 이는 얼마나 큰 수치겠는가! 하지만 그와 같은 행동으로 혹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다시 용기를 내야 한다(빌 1:6; 2:13). 이와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바울은 기도했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바로 이러한 인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혹 우리는 아무 기쁨도 없이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마땅히 깨달아야 할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우리가 지닌 기쁨을 드러내야 한다.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온유한 태도는 둘 다 중요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에 따라 최적의 타이밍이 되었을 때, 우리와 생각을 달리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실 것이다(빌 3:15). 이때 우리는 은혜 받은 자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바로 그 사역에 참여할 수가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Doctrines of Graciousness: Five More Points for Young Calvinists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칼빈주의
겸손
친절
공손
인내
비판
기쁨
복음을 앗아가는 두 대적
by 고상섭
2019-11-23
팀 켈러(Tim Keller)는 그의 저서 ‘센터처치’(Center Church)에서 오늘날 설교 강단에서 복음과 그 혜택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복음의 능력을 앗아가는 두 가지 오류가 발생되는데 그것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이다. 터툴리안은 “예수님께서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복음은 두 오류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했다. 이 두 오류는 ‘종교’, ‘비종교’ 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도덕주의, 상대주의라고도 불리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가리키는 말이다(팀 켈러, ‘센터처치,’ 59).복음과 복음의 혜택이 분리되지 않는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그 일로 인해 구원을 받은 은혜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복음과 그 혜택이 분리가 되면, 구원을 얻었으니까 이제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흔히 설교자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설교’를 행할 때 성도들이 ‘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율법주의’란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율법주의’에 걸린 성도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노력하기를 포기하면서 ‘반율법주의’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은 ‘온전한 그리스도’(The Whole Christ)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했다(109).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동일한 뿌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누가복음 15장을 설교한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일 것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어떻게 등장하는가?누가복음 15장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말하고 집을 나가는 탕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둘째 아들인 탕자는 반율법주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없이 자신 마음대로 삶을 살아가고 싶은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집나간 동생이 돌아오자 잔치를 여는 아버지를 못 마땅하게 생각해서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눅 15:29) 왜 나에게는 이런 잔치를 열어준 적이 없냐고 분노하는 첫째 아들은 아마도 율법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두 아들은 모두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두 종류의 신앙이다. 늘 우리는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다가 또 반율법적인 삶을 살 때가 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은 이유는 그런 순종을 통한 또 다른 보상을 얻고 싶은 마음의 동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분노했고, 자신의 순종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율법주의는 늘 이렇게 숨어 있다가 결정적일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교회를 개척해서 열심히 했는데 무언가 숫적인 부흥이 없거나 뜻 대로 되지 않을 때 “왜 하나님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좋은 직장을 버리고 선교지로 나간 선교사들도 “내가 주를 위해 이렇게 많은 것을 버렸는데 왜 선교지에서 예상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지?”라는 원망이 들기도 한다. 이런 모든 생각들이 바로 율법주의의 모습이다. 이렇게 율법을 지킴으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쟁취하려고 하던 노력들이 너무 힘들어지면 반율법주의로 바뀔 때가 있다. 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런 제약을 주실리가 없다는 잘못된 오해가 반율법주의적 삶으로 인도할 때도 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오해하여 “이런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실텐데” 라는 적용을 할 때도 있다. 이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두 가지 잘못된 대적들이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나님을 엄하고 두려운 분으로 오해한다. 반율법주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제약도 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정도로 오해한다. 모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것의 출발은 바로 에덴동산이다. 에덴에서 하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호의를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여 죄를 범하였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가 사탄의 거짓말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였다고 말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사랑한다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금하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고 그저 순종만 하라잖아”라고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많은 것이 있고 금지한 한 가지가 있지만 하와의 눈에는 오로지 금지 명령만 보였다. 하와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율법폐기주의’로 간 것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복을 주는 ‘율법주의’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두 가지 길을 추구한다. 한 가지는 모든 도덕률을 깨뜨리고 스스로 자유롭게 길을 정하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모든 도덕률을 다 지키고 지극히 선한 삶을 사는 길이다. 이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해결책은 무엇일까?복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팀 켈러는 목회자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한 가지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그것을 오해할 때 율법주의의 해결책으로 반율법주의를 또 반율법주의의 해결책으로 율법주의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아들 모두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들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며, 자신의 사랑과 잔치 속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두 아들 모두를 초대한다. 이는 예수의 메시지(복음)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길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종교도 비종교도 아니고, 도덕도 비도덕도 아니며, 도덕주의도 상대주의도 아니고, 보수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니다. 그렇다고 두 극단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예수의 복음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팀 켈러,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56-57).싱클레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다. “율법주의의 진정한 치료제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복음이 율법 폐기주의에 대해 처방하는 치료제와 동일하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고 실제로 맛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새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이제 그리스도가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할 힘을 주신다. 이것만이 율법주의(율법이 더는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는다)와 율법 폐기주의(우리가 율법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제 율법이 그리스도의 손에서 우리에게 오며, 우리 마음에 그 율법을 쓰신 성령이 그것을 지킬 힘을 주신다)의 속박을 모두 깨드리는 유일한 치료제이다. 이 치료제가 아니면 율법주의자든 반율법주의자든 모두 하나님의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올바르게 연관될 수 없다. 의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결합되지 못한다”(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211).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한 “의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결합되지 못한다”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 그 대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가장 큰 기쁨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기쁨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참된 목적이다. 결국 바른 복음을 선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 그분 자체를 향한 사랑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향한 자발적인 순종이 흘러나오게 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경건한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그저 형벌에 대한 끔찍스러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기리기 때문에, 또한 그를 주로서 경배하고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거스른다는 것만으로도 끔찍스러워 견딜 수 없는 심정일 것이다”(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 원광연 역, 48).설교자들여! 복음을 먼저 누리라, 그리고 바르게 선포하라.그때 우리의 양떼들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길이 아닌 복음이라는 아름다운 길로 걸어갈 것이다.
복음
변증
율법주의
반율법주의
칼빈
팀켈러
센터처치
싱클레어퍼거슨
온전한그리스도
해결책
예수님 승천이 갖는 특별한 의미
by Eric B. Watkins
2019-11-16
짧은 분량이지만 시대를 앞서간 통찰을 담은 책,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기독교를 ‘사건 중심의 종교’라고 정의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어떤 사건이 벌어졌고, 거기 등장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무엇을 믿었고 어떤 행동을 했는가가 기독교를 이루는 사건들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이루는 역사적 사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만약에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느니 차라리,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하면서 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기에 기독교인은 그 부활에 비추어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오로지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을 반영하는,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 부활이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의 마지막은 아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후, 그리스도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이 증거하듯이, “하늘로 올라가셨다.” 승천이 주는 특별한 뉘앙스는 부활하시고 또 부활 후 여러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난 이후에,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다”(사도신경)는 것이다. 부활이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였다면, 승천은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약속한 보좌, 다윗의 보좌에 예수님이 앉으셨음을 의미한다(삼하 7장).제자들에게 반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할 뿐만 아니라 영광 중에 하늘로 승천할 것을 말씀하셨다(요 20:17 등). 그의 승천은 성령님이 오시기 위해 꼭 필요한 선행 과정이었다(눅 24:49-52). 사도행전 1장은 승천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셨듯이 성령 강림을 예언하고 있다. 성령님이 교회 위에 임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먼저 하늘로 올라가셔야 했다. 승천이라는 사건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만,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중에 거하실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인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또한 성령님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믿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마 28:20).승천에는 생각해봐야 할 실용적인 측면이 하나 더 있다. 시편 68편은 하나님을 정복하는 전사로 표현한다. 68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1절). 그러나 의로운 자는 기뻐할 것이라고 한다(3절). 왜 그럴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치 성을 떠나 적들과 싸울 준비를 마친 왕처럼 전쟁의 사람이 되어서 성전에서 나왔다. 68편에 따르면 하나님은 단지 적들을 물리칠 뿐 아니라 포로가 된, 억울한 그의 백성을 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이며 과부의 재판장이다(5절). 그는 또한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언약의 백성을 적으로부터 구하시는 분이다. 시편 68편이 보여주는 전쟁의 모습은 놀랍고 또 두려울 정도이다. 하나님의 발소리에 땅이 진동하고(8절), 하나님은 왕들을 흩으시며(12절), 그리고 마침내 승리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언덕과 성소로 다시 올라가 포로들들 이끌어내며, 그가 사로잡은 자들(captives)로부터 선물을 받는다(18절).어떤 이들은 ‘사로잡은 자들’이 하나님의 적, 그러니까 강제로 붙잡힌 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해당 구절이 일종의 정복당한 자들이 벌이는 죽음의 행진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로잡은 자들’에 대한 훨씬 더 타당성 있는 이해는 그들이 하나님의 적에게 잡혔던 자들, 다름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이 전쟁을 치러서라도 구하려고 했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할 때 해당 시편의 주제와 흐름과 더 자연스러워질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단지 신적 전사로만이 아니라 신적인 구원자로도 바라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해석만이 바울이 에베소서 4장에서 인용하고 주해한 시편 68편 18절과 조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시편 68편을 성취했는지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지 부활만이 아니라 그의 승천을 통해서도 성취했음을 말하고 있다(엡 4:8-10). 그리스도는 죄와 (가장 큰 적인) 죽음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사로잡힌 자들을 구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단지 자유를 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온갖 은사까지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68편 18절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으셨다’라는 구절 때문에 시험에 들기도 하는데, 에베소서 4잘 8절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물을 ‘주셨다’라고 썼다. 그럼 뭐가 맞는 걸까? 둘 다 맞다. 하나님이 구한 사람들도 하나님에게 선물을 주었다. 바로 그들 자신이 선물이다. 그들은 또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필요한 은사를 받았기에, 부활하고 승천한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교회에 주는 선물이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 그는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 재창조하신다(엡 2:10). 그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하신다(엡 4:23-24). 그래서 우리가 단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받기만 하는 수혜자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 필요한 은사를 소유한 존재가 됨으로 이제는 선물을 주는 자로 바꾸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단지 부활 이후에 일어난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왕이 자신에게 합당한 보좌로 다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 왕은 그가 구원한 백성들에게 은사를 제공함으로 그의 왕국에 필요한 자로 만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주시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 바로 그 분 자신이다. 이와 관련해서 웨스트민스터 요약 교리 문답서의 질문 23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삼중 직분(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을 “이 땅에서도 또 하늘에서도”(both in his estate of humiliation and exaltation) 수행하시고 있음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승천해서 영광을 받는 중에도 선지자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질문 24).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쉬지 않고 간구”하신다(질문 25).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며 보호하시고 자신 및 우리의 모든 원수를 막아 이기도록” 하신다(질문 26).부활이 기독교 역사의 가장 주요 사건이자 기독교 서사의 클라이막스라면, 승천은 영광의 보좌에 그가 앉으시면서 면류관을 쓰는 사건이다. 그곳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훌륭한 선물을 주시며, 그 중 가장 훌륭한 선물은 성령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연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 거룩한 구원자이자 우리 영혼이 가장 갈망하는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에게 우리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우리가 신앙의 기반으로 삼아야 할 역사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구성하는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메이첸이 주장한 것처럼 부활과 승천이 없다면, 기독교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역사 속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 생활과 마찬가지로 확고부동한 닻을 지니게 된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며 지금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Ascension of Jesu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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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내게 어떻게 적용할까?
by R. C. Sproul
2019-11-13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율법과 그것의 역할에 대한 연구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십계명부터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명기를 읽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시편을 읽으면서 율법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편이야말로 율법에 관한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어야 하는 곳이다. 시편에서 가장 긴 119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놀라운 찬양으로 가득 찬 글이다. 119편은 이합체시(역자 주: 시의 형식 중 하나로, 각 구의 첫 글자를 조합하면 다른 뜻의 말이 나온다. Acrostic)이다.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수와 동일한 22개의 절(stanza)로 이뤄졌는데, 각각의 절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한 문자를 상징하고, 또 해당하는 문자로 내용이 시작된다. 왜 이렇게 구성했을까? 알파벳으로 치면 A에서부터 Z까지,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통틀어서 율법을 기뻐하고 즐긴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이다. 신약의 가르침에 더 익숙한 우리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한다는 개념은 완전히 고풍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오히려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뻐한다. 성경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라고 말하고 있다.그 결과 우리는 구약에 나오는 율법을 기독교인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는 현대에 만연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우리는 다음 시편 저자의 말을 숙고해야 한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 119:97–104).119편의 이 부분은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감탄으로 시작한다(한글 성경과 달리 영어 성경에서는 ‘Oh’라는 감탄사로 97절이 시작된다-역주). “오우!”라는 말은 실로 깊고도 심오한 감정을 드러낼 때 쓰는 표현이다. 여기서 저자의 감정은 다름 아닌 ‘애정’이다. 이렇게 말하는 기독교인을 본 적 있는가?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 하나님의 율법이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만난 적이 있는가? 당연히 대답은 No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는 왜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더 깊은 감사와 애정을 느끼지 않는지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구약 성경 속 성도들의 삶에서 기쁨의 초점이었던 그 어떤 것을 지금 와서 경멸하거나 무시하도록 만드는 게, 그리스도의 삶 자체와 그분의 사역이었다는 게 말이나 될까?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구약의 율법이 신약 성경 속 기독교인들과 더 이상 관련이 없으며, 우리의 영적 성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잘못된 가정 때문일 것이다. 율법은 구약 시대의 신자들을 위한 것이지, 오늘날의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표본은 모세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고,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생각에 기인한다.오늘날 교회에서, “오, 예수님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또는 “오, 주님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와 같은 열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기독교인을 만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감정에 뭐라고 응답하실까? 초기 교회에 대한 그분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는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나도 한 때는 율법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율법은 무시합니다.”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음식이자 음료는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요 4:34) 우리에게 알려 준다. 예수님은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율법의 한 획, 한 획을 다 준수했고, 또한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사명으로 보셨다. 그분의 동기는 율법의 항목 하나하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율법을 통해 당신의 뜻을 분명히 나타내셨다.시편 119편에는 ‘율법’과 ‘말씀’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강한 애착을 드러내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예 제외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교차해서 사용하며 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이 시편 119편에서 이런 이분법은 찾을 수 없다. 시편 기자는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애정을 반복적으로 찬양한다. 그럼, 시편 기자는 왜 하나님의 율법을 그렇게 깊이 사랑했을까?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건 다른 말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이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는 왕, 회장, 지도자 또는 다른 사람들이 지시를 내릴 때, 그들의 명령은 도전받지 않는다. 그들은 권위의 최종 목적지(the final court of appeals)이기에 그들의 명령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말이 바로 법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건 혹시 아닐까? 그분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율법인가? 그분은 구약 성경에서와 같이 여전히 절대 주권자이신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신약 시대 교회의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인가? 그분의 말씀은 율법이며, 그분의 율법이 그의 말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즉 율법은 꿀보다 더 달콤하다(시 119:103).시편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축복으로 시작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이 구절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지향하는 행태, 관습, 그리고 일반적인 지혜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구절을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대중적인 지혜를 따르지 않는, 또 우리 사회의 문화적 풍습과 패턴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여기 1절에서는 어떤 특정한 것을 ‘하지 않는 사람’, 즉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며 축복이 선포된다. 그럼 긍정적인 측면, 그러니까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절).오늘날 기독교인이라면 이 구절을 이렇게 다시 쓰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겠다. “바보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율법주의자 같은 사람들이나 율법을 기뻐하고 일 년에 5분 이상을 그것을 묵상하는 데 쓸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복 있는 사람은…”시편 기자는 이렇게 계속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절). 시편 기자와 그의 독자들에게 익숙한 유대 광야를 한번 상상해 보자. 불모의 황무지인 땅에서 나오는 마른 싹과 타는 듯한 태양 아래에서 바싹 마른 땅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그나마 살아 있는 잎사귀를 상상해 보자. 그리고 저기 멀리 수풀에 심겨져서 과실을 주렁주렁 맺은 나무가 무성한 오아시스를 한번 그려 보자. 또는 요르단 강가의 입구에 심겨진, 뿌리가 땅속 깊숙이 들어가서 수분과 영양분을 마음껏 흡수하는 나무들을 상상해 보자. 이 나무들은 건강하고 가지마다 맺는 과실은 풍성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복 있는 사람은, 밤낮으로 내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막 한가운데에 심어져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뿌리 없는 작은 나무 같지 않다. 그는 생명이 넘치는 강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계절에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이다.”현대 기독교인의 눈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면, 그 비밀은 비단 율법뿐만 아니라 예언서와 지혜서와 같은 구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 성경은 하나같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마치 외계인 또는 우리의 삶에 불쑥 들어온 침입자처럼 느껴진다면, 그뿐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항상 넘어지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고 있다면, 그리고 시시때때로 사소한 산들바람에도 멀리 날아가는 겨처럼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바로 그때야말로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의 율법을 깊이 묵상해야 할 때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w Does God’s Law Apply to Me?번역: 무제
신학
구약성경
시편
구약
축복
말씀
명령
성품
묵상
기쁨과 슬픔은 늘 공존한다
by Winston T. Smith
2019-11-09
용서와 기쁨은 내 신앙의 오랜 초석이었다. 복잡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으므로 나는 기뻐한다는 식의 생각으로 교회를 다녔으며, 내가 출석하는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일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쁨으로 찬양하기에 열광적인 곡들을 불렀으며, 또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들었다. 내가 아는 한 그것이 ‘복음’이었다. 한동안 그럭저럭 도움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전문 상담가로 일하면서, 죄 용서와 기쁨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고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하루 일과 중 많은 시간을 어려움을 겪고, 깨어지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 보내야 했다. 그 결과 나 자신도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주일 교회에서 내가 보고 느낀 것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을 보는 일이 점점 더 힘들게 다가왔고, 내 솔직한 감정들을 숨겨야만 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정말로’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불협화음이 나를 진지하게 만들었다. 예수께서 내 고통을 알고 계시는지 간절히 알고 싶었고, 내가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내가 영적인 실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침내, 기쁨과 슬픔은 영적 대차 대조표에 적힌 자산과 부채처럼 서로를 상쇄하는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기쁨과 슬픔은 똑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주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고전 12:27).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다(골 3:12).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 안에 거한다(요 15:4). 이곳 및 다른 본문에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아들과 연합시키셨음을 가르치는데, 이는 단순한 법적 거래 이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비하고도 지극히 실제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우리의 인생은 점점 더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 우리가 성숙해갈수록, 그리스도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고 그리스도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이 되어간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목회자들이 특히 잊지 말아야 한다. 목사의 소명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그가 섬기는 성도들에게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비춰 보여주는 것도 포함한다. 바울이 썼듯이, 진정한 사랑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게 한다(롬 12:15). 즐거워하는 것과 우는 것 모두 자기 백성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사명은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섬기는 과정에서 그 둘이 적절하게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기뻐하고 있다면 나도 그 기쁨에 동참한다. 슬픔에 잠긴 이를 보면 그 슬픔에 동참한다. 종종 기쁨과 슬픔은 마구 섞인 채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자주, 오랜 기쁨 또는 오랜 슬픔의 시기를 통과하기도 한다. 또한 너무도 자주, 목사는 슬픔에 빠진 이를 기쁨으로 인도하고, 즐거워하는 이들을 주어진 상황에 맞게 슬픔으로 인도하기도 해야 한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지난 6년은 내게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이 시기에 부모님뿐 아니라 내 형님까지 세상을 떠났다. 가까운 지인들은 만성 질환, 우울증 등 다양한 비극들을 겪었다. 최근 친구 한 명과 함께 내 어려운 시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놀랍게도 그 시기 내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사랑하심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를 생각하고 있었을 때, 내 친구가 라 스토르타(La Storta)에 있던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Loyola)를 그린 작은 그림 하나를 보여 주었다. 그 그림에서 이그나티우스는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부르시는 환상을 본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다른 사제들이 상처 입은 어떤 사람을 업고 걸어가는 모습을 배경에 그려 넣었다. “목회는 단순히 ‘자네’ 십자가만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네. ‘다른 이들’ 역시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거기서 자네가 위로를 얻기 바라네.” 슬픔을 겪는 이들을 받아주고 심지어 그들을 업고 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고, 이는 목사 소명의 중요한 부분이다. 다른 이들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회라는 것을 깨닫자 내게 힘과 용기가 생겼고, 역설적이게도 소망이 생겨났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넌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야?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을 때가 많지만, 우리가 확신하는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랑 안에서 서로의 슬픔을 나눠 지고 함께 걸어가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슬픔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억제되고 또한 성숙된다. 부활의 삶당연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복음의 결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표현이나,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완전한 형태로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가 경험할 부활을 보여 준다는 약속에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기쁨이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죄와 죽음이 승리하고 우리 삶에 고통이 끝없이 일어나는 것 같아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것들을 비춰볼 때 그것들은 일시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지닌 기쁨은 이 세상에서는 잠시 억눌려질 수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미래의 구원의 약속 위에 굳게 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승리는 ‘전적으로’ 미래 시제인 것만은 아니다. 부활의 사역은 아주 실제적인 방식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라. 그는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 1:19–20)라고 하였다. 달리 말해 부활의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고통의 시간을 통과할 때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기쁨의 근원이 된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우리는 부활의 삶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육체가 약해지고 있지만, 달리 보면 우리는 매일 새로워져 간다(고후 4:16).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관찰하고 실제로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기쁨을 배가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삶 속의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심에 뿌리를 둔 기쁨을 경험하면, 특히 어두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할 때에, 지속될 뿐 아니라 자라기까지 하는 기쁨을 계속 누릴 수 있게 된다.균형이라기보다, 사랑우리는 바울의 신학을 흔히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구속하셨으나 우리는 아직 우리의 영광스러운 최종 상태에 이르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삶은 여러 가지를 뒤섞어 담아놓은 봉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구원으로 인한 기쁨을 경험하기도 하나, 이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는 계속되는 죄악과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 현실이 그러하므로, 그 안에서 균형을 잡는 것보다는 그것들을 사랑으로 마주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기쁨이나 슬픔은 올 때가 있고 갈 때가 있다.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이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지도록, 우리는 그저 사랑 안에서 그것들을 대할 뿐이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In Ministry, Joy and Sorrow Don’t Cancel Each Other Out번역: 이정훈
복음
부활
죄악
고통
능력
기쁨
슬픔
사랑
이그나티우스
십자가 빛 아래에서 사는 삶
by John Smith
2019-11-02
많은 개혁주의 신자들처럼 필자 역시 내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 뿐 아니라 이후 이어지는 삶에서 은혜의 교리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한다. 내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마침내 알게 되었던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오래 전에 내가 중생했던 것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닌(요 1:13) 나를 사랑하시고(엡 2:4) 오직 그리스도만 믿는 믿음만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로 나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2:8)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1:11), 그리고 내 삶과 미래가 그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요 10:28)을 깨닫게 되었다. “놀라운 사랑! 날 위해 죽으신 주 하나님”이라는 찬양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나는 새롭게 발견한 개혁주의 신앙을, 심지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마저도, 파괴적이고 사악한 영적 교만을 쌓아 올리는 데 사용했다. 계속 겸손해지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 속한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에서 자라는 일에 헌신하기보다, 나는 나의 신학적 우월성을 뽐냈다. 내 안에 남아있는 깨어짐과 약함을 보여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내 구주의 놀라운 사랑이 내 삶으로부터 흘러나와 내 주위의 모든 깨어지고 약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친 성령님의 성화 사역이 필요했다. 성경은 일반 계시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확인해준다. 이 땅에서의 삶은 연약함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가시덤불, 엉겅퀴로 인해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된 저주(창 3) 아래 있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또한 믿음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도(롬 3:24–25), 십자가의 말씀의 힘으로 구원을 얻은 후에라도(고전 1:18), 우리는 이 약한 육신 안에서 탄식하며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롬 8:23)이다. 또 우리가 기다리는 중에는,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7)고 약속하신 바 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의 지체로서 이 타락한 세상 한 가운데서 섬기고 사역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엡 4:12)을 성경은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를 둘러보고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시키시는 일을 인식하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눈을 뜨는 일이다. 탁월한 신학 지식을 자랑하기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후 5:14)고 ‘권고’하신다.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사실 주께서 약한 자들을 만지실 때 사용하시는 도구가 아닌가? 우리에게 주신 진군 명령은 명확하다. 솔로몬의 시편에서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시 72:12–13)라고 하였고, 바울은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2)라고 선언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내 삶의 전환점은 내가 살던 카운티 교도소에서 시간제 목사로서 “약하고 궁핍한 자들” 속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에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나는 요한계시록 2장에 묘사된 에베소 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신학적 이단은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으면서도 사랑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카운티 교도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나의 눈이 비로소 열렸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과 그의 권능의 성령께서 행하시는 사역이 가장 깨어지고 약하고 길을 잃고 상처받은 이들 가운데 어떻게 실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중미 출신의 한 젊은 재소자를 만났던 그 날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그 친구는 소위 ‘고상한’ 이들은 경멸할만한 중범죄로 기소되었는데, 절망에 빠진 그가 자살을 시도하지 않도록 감시받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스페인어로 된 성경을 갖다 주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나온 부분을 펴준 후(눅 18:9–14) 크게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했다. 그의 뺨을 타고 내려온 눈물이 그가 수감된 방 문 창살 사이에 놓여 있던 성경 위로 떨어져 누가복음의 페이지들을 적셨다. 거기 나온 세리처럼 그 재소자는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울부짖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히 역사하셨던 거룩한 순간이었다. 그는 그날 밤 하나님께 의롭다 칭하심을 받고 자기 침대로 돌아갔고, 나는 잊을 수 없는 감격 속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나와 그 재소자가 이제 동일한 영적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약하고 상처 입은 죄인들이며, 아무런 희망이 없고 오직 은혜를 필요로 하는 이들인 것이다. 그 재소자와 나는 이전에는 서로 멀리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엡 2:13).바로 지난주에, 재소자 중 새로 신자가 된 이 한 명이 내게 ‘고백할 뭔가’가 있다고 했다. 그가 아직도 로마 가톨릭 식으로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만났을 때 그가 내게 겸손히 말하길, 이전에 있었던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이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 나에게 용서를 구하기까지 잠을 제대로 이룰 수도 없었다고 했고 심지어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긴 한 것인지조차 의심이 든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과 성령의 권능이 행하시는 사역이 이 새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역사하는 걸 보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로마서를 펼쳐 그가 마음의 고통을 경험했던 것은 칭의의 열매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고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투는 매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롬 6–7)임을 알려주었다. 8장을 펼쳐서는 그로 하여금 죄를 고백하도록 격려했던 것은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임을 알려주었다. 나도 그를 용서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에(3:24–25), 복음의 약속 때문에(10:13), 또한 그의 안에 권능 있고 확신을 주시는 사역을 하시는 성령님이 계시므로, 구원의 확신을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십자가, 그리고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 아래에 설 때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향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생각한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겔 34:4)약하고, 길 잃고, 궁핍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 개혁 교회를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인가?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한다. 또한 내 자신을 위해서도 계속 그렇게 기도한다. “주님, 저로 하여금 만나게 하시는 모든 영혼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을 했는지, 또는 얼마나 약한지 상관없이, 그들을 향해 제 눈을 여시고 제 마음을 부드럽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빛 아래에 사는 삶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Life in Light of the Cross번역: 이정훈
복음
십자가
개혁주의
연약함
보혈
기도
궁핍
사랑
교리
제자로 세워가는 하나님의 훈계
by J. Mark Beach
2019-10-30
부모들은 자녀들보다 훈계의 유익을 더 잘 안다. 나는 어렸을 때 벌을 받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벌을 받았더라도 그것을 그리 크게 생각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나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받은 벌의 심각성을 고심하고, 부모님이 내리신 평결의 성급함과 죄와 벌의 불균형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었다. “불공평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서야 나는 좀 더 명확한 시각으로 부모님의 훈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 나는 그때 부모님이 사랑으로 훈계해 주셨음에 감사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훈계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 그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보는가?우리는 믿는 자들로서 이러한 어린 시절의 교훈을 신앙의 삶에 적용하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때로 철없는 아이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훈계를 바라보곤 한다. '왜'라는 질문이 충동적으로 일어나 괴로워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우리는 놀람이나 불만 혹은 의심으로 어리둥절해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문을 갖는다. 하나님의 동기를 묻는다. 아이로서 부모의 훈계를 대하듯이, 우리는 고난의 심각성과, 적절성 그리고 판결의 정당성을 묻는다. 내가 왜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이것은 히브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상황과 잘 맞아떨어진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의 청중인 유대 크리스천들에게 현재의 시험과 고난을 영적 성숙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라고 촉구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을 인도하는 방식이라고 기억하도록 격려한다. 우리 모두는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히 12:5). 이 말씀은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앞에 나오는 권고의 일부분이다. “십자가와 죄인들의 거역을 참으신” 분을 기억하라는 훈계이다(12:2-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이 마치 아버지가 그러함과 같이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이나 “격려”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사용된 특정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성령에 대해 사용된 단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옹호자” “위로자” 혹은 “조력자”로 불렸다. 요한복음에서 그 단어는 파라클레토스(paraclētos)이며, 히브리서에서는 파라클레시스(paraclēsis)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청중들에게 잊지 말라고 하면서 말한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러한 위로의 단어는 사실 잠언 3장 11-12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잠언의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전에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하며, 둘째, 징계를 받았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훈계는 마치 아버지같이 우리를 돌보심에 근거하고 있다. 요점은 명백하므로 우리가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고난당하여 씨름하고 있을 때, 실망과 핍박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잊지 않으셨고, 우리를 불량품이나 달갑잖은 존재로 취급하지도 않으셨다. 정반대로, 우리를 그분의 아들과 딸로 대우하고 계신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주제를 확장한다. 그는 이것을 사방으로 포위된 신자들을 사랑으로 양육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린다. 우리의 육신의 부모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한다”(히 12:9)고 말한다. 저자는 “자기의 뜻대로”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부모들에게 잘못이 없지 않다는 점을 밝힌다. 부모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우리를 키우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그들을 공경한다. 일반적인 상황 안에서, 성인으로서, 특히 자녀들을 두고 있는 우리는 자신을 키워주신 부모님의 노고에 감사한다. 우리를 더 나아지게 하고 우리의 품성을 더 발달시키려고 노력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공경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방법, 충동을 저지하거나 혀를 제어하는 방법을 부모로부터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부모들처럼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훈계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 아신다. 그분은 자신의 자녀를 키우는 데에 있어서 어느 것이든 모르거나, 잘못 인도하거나, 불공평하게 하신 것이 전혀 없다. 훈계가 즐거워 보이는가? 히브리서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12:11). 훈계가 불쾌하다는 점은 피할 길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교정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훈계는 우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죄된 태도와 행동, 생각과 말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만든다. 우리의 습관을 더 나은, 더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게 한다. 그 길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는 보상으로 복을 받는다.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절). “그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은 자들은”이라는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유대 크리스천들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도록 권고받는다. 다시 말하면, 훈계가 효과를 얻으려면, 그들이 고난받는 것을 그냥 견디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그로 인해 배워야만 했다. 왜냐하면 학교에 가는 것만으로 배움이 거저 보장되지 않듯이, 고난을 받는다고 “연단”이 그냥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큰 고난을 당했지만 그다지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훈계로 “연단”받은 이들은 하나님과 우리가 볼 수 있는 “의의 열매”를 맺는다. 욥의 이야기는 이 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욥은 가장 심한 믿음의 시련을 당했다. 그의 삶을 강타한 비극은 그가 죄인이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의 죄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신실했기 때문에 시험을 당했다(욥 1:1, 8; 2:3). 사탄은 욥의 시련을 통해 그가 신앙을 저버리는지를 보려는 한 가지 목적만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그가 연단을 받아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욥은 거의 모든 가족을 상실했고, 그의 부와 건강까지도 잃었다(이 모든 것이 지독하게도 시기가 잘 짜 맞춰졌다). 그의 아내도 그를 버렸다. 그녀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 조언했다. 욥은 이 모든 무지막지한 일을 겪었다. 그 다음에 친구들이라 하는 사람들로부터 추궁을 당했다. 그들은 그에게 선한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며, 그가 그의 죄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회개하라”(욥 8:5-6; 15:4-5 등)고 조언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 말씀을 교훈으로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위로자들이어야 했던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경우를 변론했다. 그는 하나님께도 추궁했다. 혼란스러움으로 비틀거리는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요청했다. 하나님이 설명해 주시기를 원했다. 마침내 하나님은 말씀하셨지만, 추궁을 받은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욥이었다(38장).결국,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다(42:6). 고난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것을 회개했다. 그는 “낙심”한 것과 하나님께서 정의와 고난을 통해 그를 향한 선한 목적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의심한 것을 회개했다. 하나님의 지혜와 호의와 사랑에 의문을 품은 점을 회개했다. 하나님이 그 시련을 그를 위하여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점을 회개했다. 그리고 그것이 히브리서 저자가 유대 크리스천들에게 말하고 있는 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련을 “우리를 위한” 훈계로 사용하신다. 이것을 믿으려면,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를 훈계하신다. 하지만 상황들은 우리를 주목하게 하고,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이목을 끄는 상황들을 사용하신다. 실직, 장난이 심한 어린 아이, 문제가 있는 십대 자녀, 부상, 질병, 이혼, 사고 등 수없이 많은 상황들을 모두 사용하신다. 그 짐들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욥의 경우는 거대했다. 그의 시련과 비교하면 우리의 것은 작을 수도 있다. 시련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는 이들을 훈계하신다. 시련과 어려운 상황에 주목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교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수정하고, 위로하며, 책망하고, 훈련시키기 위해 귀에 들리는 음성으로 작용한다. 이것이 아버지 같은 “훈계”이다. 훈계(discipline)라는 단어가 또 다른 성경적 단어인 제자(disciple)와 얼마나 가까운지 주목해 보라. 하나님의 훈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 우리가 맞이하는 시련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더 봉사하는 제자가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설계이다.당신이 겪는 어려움으로 인해 바르게 되고 “훈련”받고 있는가? 하나님의 훈계로 그리스도의 적합한 제가가 되어 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훈계는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한다. 그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도 생의 역경을 통해 많을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도 시련을 겪은 후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경이 그들을 성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훈계하시지만, 이는 그들을 성화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훈계는 사랑의 조치이다. 그것은 우리를 망치려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함으로 사랑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훈계를 통해 우리를 제자로 만들고 계신다. 하나님의 훈계하시는 음성이 귀에 들린다면(아마도 우리가 대면하는 어려운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추고 그분의 음성을 경청하게 할 것이다), 불신앙에 작별을 고하고, 죄의 고리를 끊으며, 고집스런 습관과 태도, 악한 감정과 의문, 혹은 자기 연민으로부터 후회 없이 떠나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지혜로운 그리고 순종하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이라고 기도하기를 배우라.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lessing of God’s Discipline번역: 정은심
신학
신약성경
제자
하나님의훈계
히브리서
욥
그리스도
사랑의조치
훈련
왜 교회서도 기독교 신앙을 변증해야 하는가
by R. C. Sproul
2019-10-26
출애굽기 3장은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큰 임무를 맡기시는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모세에게 맡겨진 임무는 곧 바로를 찾아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고 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모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분부하신 또 다른 임무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백성에게 찾아가 역사상 가장 큰 탈출을 준비하라고 명해야 했다. 곧 바로의 통치와 권위에 대항하여 애굽을 벗어나서 광야로 나아가 하나님이 지정하신 산에서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이로써 출애굽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여기서 모세의 임무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는 수십 년 간 광야에서 양을 치며 세월을 보내다가 노인이 다 되었는데, 갑자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인 바로를 만나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었으니,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애굽의 전차나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리라!” 모세가 이러한 말을 전해야 했던 백성은 도대체 어떤 노예였던가. 출애굽기 4장을 보면, 그 백성에 대한 모세의 걱정이 잘 기술되어 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 4:1).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표적을 그에게 나타내셨다.이 장면에서 모세는 사실상 변증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이치에 맞는 방법으로 설명해야 하듯, 모세는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이 확신할 수 있게끔 설명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내부자를 위한 변증인데,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상대로 하여 그분의 말씀이 지닌 진실성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 그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설득시키는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은 변증의 사명, 즉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는 사명에는 최소한 세 가지 목표가 있다.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그중 두 가지 목표에 대해서는 익숙하리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목표는, 기독교의 이성적 토대를 약화시키려 하거나 또는 다른 철학이나 종교의 관점으로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려는 자들에게 답변을 제공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그 당시 대중적인 철학 사상이었던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에 속한 사람들을 상대로 시도했던 변증이 그런 목표를 가졌다. 또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과 같은 교회 역사의 초창기 변증가들 역시 로마 황제에게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려는 목적으로 편지를 쓰며 그런 성격의 변증을 하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신들을 거부하며 그에 대한 경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 무신론자라는 거짓된 비난을 받거나 (이교도들이 성만찬 의식을 오해하여)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다는 그릇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변증을 하는 두 번째 목표는, 세속 문화에서 형성된 지성적인 우상들을 타파하는 것이다. 이때의 변증은 다른 신념이나 세계관에 자리한 모순과 오류를 지적하며 공격적인 접근을 취하게 된다.그리고 변증의 세 번째 목표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성도를 격려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다. 모세가 처음에 가졌던 우려가 바로 이와 같은 변증과 관련이 있다. 그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라고 명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이런 생각이 그와 같은 변증을 가져온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변증가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개인적으로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3년의 기간이 있다. 바로 신학교에 다녔던 시절이다. 그 이유는 당시 열렬한 신앙인이었던 나와 달리 그 신학교에는 불신앙적인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매일 교수들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교리들을 서슴지 않고 공격하곤 했다. 어느 교수는 우리 클래스의 한 학생을 맹비난했는데, 다름 아니라 그 학생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같은 전제를 너무 많이 받아들인 상태에서 신학교에 들어왔다는 게 이유였다. 또 다른 교수는 어떤 학생이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하자 그를 나무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대속 교리에 관해 설교하는가!” 이처럼 그 시절에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적개심이 만연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나를 낙담시켰다. 학교에서는 온갖 종류의 질문이 제기되었는데, 나는 그러한 비판자들의 공격 이면에 있는 철학적인 전제를 이해하면서도, 그 수많은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직관적으로는 그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틀리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왜 그런지는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그 당시 미국 전역에서 역사적 개혁신학에 충실한 입장을 견지하는 주요 신학교는 단 한군데였다. 바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였다. 그래서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웨스트민스터 교수들의 책을 읽곤 했다. 예를 들어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 존 머레이(John Murray), 에드 스톤하우스(Ed Stonehouse), 에드워드 영(Edward Young)의 글을 읽었다. 그러자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그들로부터 얻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나보다 깊어 내가 답변하지 못하는 회의적인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들을 하나님이 많이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수년 전에 리고니어(the Ligonier) 단체의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추진하는 변증의 내용을 접하는 모든 신앙인들이 그 세부적인 내용까지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하며 기독교의 신뢰성을 보여주게 된다면, 교회 안에 있는 그들은 회의주의의 목소리가 자신들을 둘러싸며 엄습해 올 때 그로 인해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속한 교회의 학생들 가운데 심지어 ‘기독교’ 기관이라고 불리는 대학에 들어갔다가 신앙의 위기를 맞은 경우들이 있다. 그들은 거의 가까스로 신앙을 연명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매일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조롱을 받거나 비웃음을 사며 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학생들을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변증의 사명을 감당하며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는 사역을 해야 한다. 또 비단 그런 학생들만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와 같은 변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탄이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거두어 갈 수는 없을지라도, 그 신앙이 무력해질 때까지 우리를 두렵게 하여 이전과 같이 담대하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이 전문적인 변증학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어도, 변증의 논점들을 공부하여 자신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할 소명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Most Valuable Aim of Apologetics번역: 장성우
복음
변증
기독교신앙
모세
바울
출애굽기3장
사도행전17장
개혁신학
리고니어
예수님, 당신은 알고 계셨나요?
by D. Blair Smith
2019-10-19
대중적인 크리스마스 노래인 “마리아,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Mary, Did You Know?)는 마이클 잉글리시(Michael English)가 1991년에 처음으로 부른 곡이다. 이 드라마틱한 노래는 발표 이후로 꾸준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가사를 보면, 장차 폭풍을 잠잠케 하고 죽은 자도 살리게 될 한 아기의 어머니(곧 마리아)에 대해 우리가 궁금하게 여길 만한 물음들을 다루고 있다. 이 노래에서 연속되는 그 물음들은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모아진다. “마리아, 당신은 그 아기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나요?”이 노래에 담긴 신학적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존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진리일 것이다. 이 곡의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하여 낳게 된 여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신비를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게 만든다.마리아는 분명 알지 못했다.천사 가브리엘이 그녀에게 전달해 준 소식이 있었지만(눅 1:26-38), 그녀는 자신이 낳을 아기가 감당하게 될 모든 일을 알지 못했다. 이는 마리아를 비하하는 게 아니다. 우리와 같이 그녀는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그녀가 가진 지식은 그 범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그분은 정말 다 아셨을까?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기 자신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을까? 정말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니케아 신경의 고백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으로서 피조되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한 본체”이신 그런 분이라면 말이다.그리 간단하지 않은 질문어떻게 보면, 이런 질문은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처럼 여겨진다. 단순한 삼단논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몇몇 본문만 떠올려 봐도,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식을 가지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분은 어느 물고기의 입속에 동전 한 개가 들어있다는 사실(마 17:27)과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요 4:1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다른 장소에 계시며 소식을 듣기도 전에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다(요 11:14).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보면, 위의 질문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기만 하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인으로 자라야만 하는 아기이기도 하셨다. 누가복음 2장 52절은 예수님이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설명한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육체와 정신의 성장을 이루는 인간의 일반적인 발달 과정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그렇다면 이 사실은, 그분이 알지 못하신 일들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까? 이를테면 목수의 집안에서 크신 분이 낚시하는 법에 대해서는 아셨을까? 또 1세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성장하신 분이 5세기 영국 섬에서 자라는 게 어떤 경험일지를 아셨을까? 나아가 소년이셨던 분이 당시 소녀로 살아가는 게 어떤 과정일지를 아셨을까?모르시는 내용도 있음을 말씀하시다물론 성경은 이런 문제를 간단히 취급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 자신도 모르시는 내용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놀라운 구절을 우리에게 보여 줄 뿐이다. 곧 마태복음 24장 36절과 마가복음 13장 32절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그렇다. 예수님도 알지 못하셨다.이 놀라운 구절에 대해서는 지난 교회 역사 동안 다양한 방법의 접근이 이뤄졌다. 가령 4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이 구절이 함축하는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님이 선언하신 지식의 한계는 말씀 자체[곧 성자]의 불완전이 아니라 그 특성상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인성(the human nature)에 관한 내용이다.” 이는 단순해도 그 의미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설명이다. 즉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그분이 지치거나 허기지는 모습과 같이 오직 그분이 지니신 인성의 표현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좀 더 까다로운 설명을 제시한다. 바로 자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요 17:1)에 관해 주석하면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인가를 아시면서도 또한 모르시는 일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신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독론적 개념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참고로 기독론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신학의 분야이다).본성과 위격에 관한 고전적인 기독론우선 주후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회의 진술을 살펴보며 도움을 받도록 하겠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처녀 마리아의 자궁에서 성육신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신성에 인성을 결합하셨다. 이는 새로운 본성을 더하신 일이지, 원래의 본성을 감하신 일이 아니다. 즉 바울의 진술과 같이, 그리스도는 신성을 버리신 게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써 “자기를 비”우시는 일을 하신 것이다(빌 2:7). 칼케돈 신경은 이를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고 부른다. 곧 “혼합이나 변질이나 구분이나 분리 없이” 완전한 두 본성이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칼케돈 공회가 이 진술을 확정한 목적은, 두 본성 중 하나를 감하거나 또는 두 가지를 혼합시키거나 구분하려고 한 당시의 이단 사상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러한 사상과 대조적으로 성자의 한 위격 안에 두 가지 본성이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이 진술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 즉 예수님도 모르시는 내용이 있다고 말씀하신 문제를 설명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겠는가? 바로 신성만이 아니라 인성도 지니고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줌으로써 우리가 그 문제를 풀 수 있게 도와준다.이 두 가지 본성은, 마치 스위치를 작동하여 켰다가 껐다가 하듯이 예수님의 의식 속에서 조절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이신 성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전지성(omniscience)을 상실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그분의 인성이 신성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신 성자는 그 몸이 무소부재하지 않듯이 그 지식에도 전지성을 지니지 않으시는데, 이는 그분의 신성이 인성을 변형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가지 본성은 각각 고유한 특성을 지닌 채로 한 사람 안에서 교통하기에, 그분은 두 본성을 따라 동시에 행동하실 수 있는 것이다.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행동을 하는 주체는 본성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성에 따라 행동을 하는 주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다른 이들과 동일하신데, 다만 그분은 두 가지 본성을 지니셨다는 사실이 문제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간혹 예수님의 특정 행동을 보면, 어느 한 가지 본성이 다른 본성보다 더 반영될 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배에서 주무시는 모습은 그분의 인성을 반영하지만, 물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은 그분의 신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배에서 주무실 때조차도 그분은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며, 또 물위를 걸으실 때조차도 그분은 인간의 발을 사용하시는 사람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행동은 결국 한 동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된다. 이러한 성경의 묘사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7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그리스도는 중보 사역을 하시며 그 고유한 특성대로 작용하는 두 가지 본성에 따라 행동하신다. 그러나 두 본성은 한 위격 안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때로 어느 한 가지 본성에만 해당되는 행동을 보여 준다고 할지라도 다른 본성 역시 지니고 계신 위격에서 비롯되는 행동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눅 1:43; 요 3:13; 행 20:28).신비의 영역 속으로만일 마태복음 24장이나 마가복음 13장처럼 예수님이 자기 지식의 한계를 언급하시는 구절이 성경에 없다면, 우리는 어떤 진리를 놓치게 되었을까? 아마 예수님의 전지성에 대해서는 매우 정돈된 관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돈된 관점이란 게 사실은 우리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견해일 때가 많다. 믿음은 우리에게 푸아티에의 힐라리오(Hilary of Poitiers)가 한 말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바로 그 존재가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그분을 다 파악한 듯 완전히 정의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그분을 경배하는 태도를 지녀야만 한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아시면서도 동시에 모르신다고 말씀하는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순 없지만 여전히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또한 우리는 우리 모두가 가진 지식의 한계 역시 죄성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조차 지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분의 인성으로 인해 우리의 인성이 회복되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알도록 허락되지 않은 사실을 불편하게 여기기보다 오히려 그 한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신 29:29). 즉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인내로써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이 글에서 나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말씀하신 내용은 다름 아닌 사람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인성을 따라 말씀하신 모습을 보여 준다고 논증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성을 따라서는 동일한 내용을 아신다는 사실도 함께 설명했다. 예수님은 그 무한한 지혜 가운데 자신의 백성이 알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셨던 것이다.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은 알기도 하시고 모르기도 하신다.이는 성육신이 지닌 역설의 신비를 보여 준다. 이 역설은 외견상 드러나는 불합리한 모순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좌절시키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즉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 Did You Know?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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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교리에 대한 세 가지 의문
by Tim Keller
2019-10-16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신 사람들만 그분께로 나아가게 된다는 선택 교리는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이해하기는 쉬워도 받아들이기는 어려워서, 사려 깊은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교리는 오랫동안 어려운 주제로 여겨졌으며 오늘날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그렇다면 선택 교리가 불러일으키는 가장 일반적인 의문은 무엇일까? 여기에 그 세 가지 예를 소개하도록 하겠다.1. 만일 선택 교리를 믿는다면, 하나님이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지 않으셨는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이 의문은 선택 교리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된다. 선택 교리 자체가 이 문제를 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교리는 다만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끌 뿐이다. 다시 말해 선택 교리를 부정한다고 해서 이 문제를 피할 수는 없다. 즉 모든 기독교인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거기에 호소하여 선택 교리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선택 교리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도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3)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이는 결국 미스터리이다. 단순히 선택 교리에 반대한다고 해서 그에 답변할 수 있는 게 아니다.이에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어떤 사람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하나님은 그 사람이 선택하는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렇게 묻고 싶다. 왜 선택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어야 하는가? 가령 내 아들이 가진 선택의 자유를 내가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잘못된 선택으로 죽게 된다면 그때는 자유를 존중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잠시간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여 영원히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든, 우리 모두는 이 문제를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는 난해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선택 교리에 대한 반론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여기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선택 교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해 보자. 이를테면 하나님이 창세 전에 다음의 논리에 근거하여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고 가정해 보자.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겪게 될 죽음과 부활의 소식이 복음을 통해 제시될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한테 동일하게 주어져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면, 그 계획을 세우시는 순간 누구는 구원에 이르고 또 누구는 심판에 이르는지를 정확히 아셨을 것이다(그분은 전지하시니까 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구원 계획을 세우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사실상 누구를 선택하시고 또 누구를 선택하지 않으시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동일한 문제에 다시 직면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 이에 대해 오직 두 가지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첫째로 이 문제는 그분의 완전한 성품과 관련되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공의를 함께 지니신 분이고, 그중 어느 성품도 다른 성품보다 우선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즉 어느 한 성품이 다른 성품에 비해 완전하지 않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가 자신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이 문제는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보다 더 자비로운 방법으로 성취되는 구원을 생각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수준보다 절대적으로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완성하실 전체 그림을 우리가 보게 되는 날에야, 그 안에 어떤 오류도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2. 만일 누군가의 구원 여부가 확실히 정해져 있다면,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우선 이 의문은 근시안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만일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구원 여부를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일조차 두려워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별 생각 없이 이뤄지는 우리의 행동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낳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정말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누군가의 구원이 계획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도할 때 어마어마한 부담을 지게 된다. 우리의 어눌한 말 한마디로 인해 상대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견해인가!다음으로 우리가 전도하며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구원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 각자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아버지가 벽난로에 땔 장작을 마련하기 위해 혼자서 나무를 자를 수도 있지만, 장작을 패고 불을 피우는 법도 가르칠 겸 아들한테 같이 하자고 요구했다고 치자. 이때 그 아들이 이렇게 반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무를 자른다고 특별히 얻는 것도 없잖아요. 제가 땔감을 굳이 만들지 않아도, 아버지가 그 일을 다 하실 걸요. 저를 얼어 죽게 놔두진 않으실 테니까요.” 이에 아버지는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일은 나 혼자서 할 수도 있단다. 하지만 너와 함께 일을 했으면 좋겠구나.” 당연히 하늘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특권과 권위에는 매우 큰 축복이 뒤따른다. 그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추측해서는 안 된다. 즉 누가 선택되었는지를 예측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전도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선택 교리는 우리에게 큰 소망을 안겨다 준다. 왜냐하면 그 누구에 대해서도 소망이 없다고 함부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수많은 이들이 너무나 완고하여 마치 선택받지 않은 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상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죽은 자를 살리시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전도에 ‘동기’를 부여하지 절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사도행전 18장에 가면,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9절)고 격려하셨다. 곧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10절).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와 보호 및 ‘선택’에 대해 바울이 확신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그래서 바울은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11절)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요점은 이것이다. 곧 우리 각자가 기도하며 복음을 나누게 될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 중 한 명일 수 있으며,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쓰임받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3. 나는 성경을 믿고 선택에 관한 모든 가르침도 이해하는데, 왜 마음으로는 그 교리를 받아들이기가 여전히 힘든 것인가?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의 성격은 초자연적이어서(supernatural) 우리의 자연적 이성이나 문화로는 통합할 수 없는 내용들을 서로 결합시킨다. 예를 들어 칭의 교리는 복음을 바라보는 한 가지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관점에서 율법과 사랑은 그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 결합된다. 그 결과 우리는 율법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아 율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복음 외에 다른 모든 철학 사상은, 율법이 최상의 가치가 되는 율법주의나 율법이 결여되어 있는 반율법주의로 기울어질 뿐이다. 칭의와 마찬가지로 선택 교리도 복음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서로 결합된다. 다시 말해 이 교리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문화나 철학이 통합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두 가지 사실이 결합되어 있음을 본다.우리가 누구이든, 우리 각자는 한 문화 속에서 성장하며 그 문화가 제공하는 견해를 깊이 받아들인 상태이다. 그리고 그런 견해는 편향되어 있기에, 우리는 선택 교리를 실제보다 더욱 단순하고 극단적인 내용으로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동양의 철학이나 종교는 언제나 숙명론에 가까운 시각을 견지한다. 이런 시각에서 개인의 자율성이란 일종의 착각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은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내용을 ‘개인주의적인’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와 달리, 서양의 세속주의는 스스로 진로와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개인의 권리와 능력을 강하게 신뢰한다. 그 결과 이와 같은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은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내용을 ‘숙명론적인’ 메시지로 생각하게 된다.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문화에서 어떠한 입장이나 성향을 가지고 성장했든지 간에, 선택이나 칭의로 표현되는 복음이 아주 미묘하게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관점이 균형을 갖출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Objections to the Doctrine of Election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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