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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놀라운 사랑
by John Piper
2019-10-12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사랑은 그 고난을 스스로 받기로 의도적으로(intentionally) 선택하신 매우 의식적인(conscious) 행위였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 그리스도가 자신의 목숨을 의도적으로 버리셨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우리를 위함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갈보리 길로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모두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기 위하여서는, 그것이 얼마나 완전히 의도적인 선택이었는지를 알면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죽임 당하셨음을 알 수 있는 5 가지 증거들을 살펴보자.첫째,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에게 칼을 휘둘러 그 귀를 떨어뜨린 바로 다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그분의 죽음이 얼마나 의도적인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마 26:52–54).이 말씀을 통해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성경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선택을 정확하게 그것에 맞추셨다는 사실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고통을 피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한 성경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라고 한 말의 의미가 이것이다. “나는 성경말씀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를 피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을 하지 않고 있다. 내가 이루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선택은 하나님 말씀에 나의 죽음에 관하여 예언하는 모든 것을 이루고자 함이다.”라고 말이다. 예수님의 의도가 드러나는 두 번째 증거는 사지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 하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2-24).예수님에게는 자신의 죽음이 어떠해야 한다고 정해진 한 가지 방식이 있었다. 그것은 성경말씀에 따라서 죽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을 때 담대하게 자신의 길을 가야 함을 알았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으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세 번째 증거는 이사야 선지자의 입으로 하신 말씀에 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만일 내가 이러한 고난과 고통에 맞닥뜨릴 상황이라면, 나는 모든 상상력을 총 동원하여 나를 보호하고 방어할 강력한 대책을 생각할 것이다. 인간은 고통이 올 것 같으면 움찔하고 뒷걸음질 친다. 불의하고 험악하게 남을 괴롭히며, 야비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내게 고통을 주려고 한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과 수모의 순간마다, 자신이 당하는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기로 선택하셨다. 그분은 세차게 내려치는 사람에게 자신의 등을 맡기셨다. 자신의 뺨을 철석 때리는 사람에게 얼굴을 내어 주셨다. 수염이 뽑히도록 내어 맡기셨다. 침 뱉음을 당하도록 얼굴을 가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이러한 고통을 당하기로 스스로 선택하셨다.예수님이 스스로 고난 받으시기로 선택하신 네 번째 의도는 베드로의 설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라고 말했다.예수님은 “불의가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다만,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심으로 불의를 다루셨다. 하나님은 정의가 이루어진 것을 보셔야 했다. 예수님을 갈보리의 그 길을 가게 한 부르심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었다.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셨음을 가장 명백하게 서술하고 있는 다섯 번째 증거는 요한복음 10장 17-18절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여기에서 예수님의 요점은 자신이 완전히 자발적으로 행동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못하며, 어느 상황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순간적으로라도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휩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라고 말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고난 받고 죽으신 행위의 정도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지를 느껴야만 한다. 나는 당신이 그것을 온전하게 느끼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온전한 경험이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치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중략]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출처: www.ligonier.org원제: Amazing Love번역: 정은심
복음
예수그리스도
목숨
놀라운사랑
의도적으로
의식적인
그리스도의사랑
베드로
요한
증거
삶으로 드러낸 부활의 산 소망
by Elliot Clark
2019-10-05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셨을까? 이 질문은 답이 자명한 기본적인 질문인 것처럼 보인다. 부활 주일에 아이들에게나 하는 뻔한 질문이라고 여길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부활을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하게 하는 질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베드로전서를 읽다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예상치 못한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고통과 수치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를 도우려는 것이었다.베드로전서는 현재의 고통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베드로 서신의 독자들은 여러 가지 시험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벧전 1:6). 그들은 신앙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그들의 도덕성에 대해 비방을 받았다(벧전 4:4). 거절과 사회적 소외를 경험했다. 그들은 순전함과 선으로 행했지만, 그들을 비방하는 이들은 그것을 악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부당하게 고난당하고 끝없이 슬픔을 견뎌야 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조롱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했다. 베드로는 이러한 어려움을 최소화하고 일시적이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보다, 불같은 시련을 망명 생활로 인식하도록 그의 독자들을 독려했다. 그들이 겪은 고난은 일종의 ‘가벼운’ 박해로, 현대 세속 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들과 유사했다. 베드로는 이러한 고난을 받는 이들에게 소망의 언어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소망은 우리에게 고난이 없기를 바라는 그런 종류의 소망이 아니다. 불같은 시련과 고통은 우리 삶에서 언제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베드로는 제안한다(벧전 4:12). 수치와 사회적 배척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상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구세주의 이야기를 알기 때문에 소망이 있다. 반전된 이야기베드로가 말하듯이, 예수님은 스스로 선택한 망명자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었지만,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다(벧전 2:4-5). 아버지에게 소중했던 그분은 예언된 아들이었지만, 수치와 배척을 당하셨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과 권세 있는 정치인들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외면당했다. 살아 있을 동안 치욕을 당하셨고 머리 둘 곳도 없었다. 죽음에 이를 때는 구타를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고, 비방을 받고 욕을 당했다. 그리고 가장 흉악한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다. 자신의 제자들과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만 거부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하지만, 3일 후에 그 대본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하나님은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의 무죄를 입증하셨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었다(벧전 1:3). 지금 우리가 힘들고 고독을 경험하더라도 소망이 되도록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보통 기독교 신앙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은 적절하고 성경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베드로전서 1장 21절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는지를 강조한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계속 읽어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그분에게 두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영화롭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 부분은 우리가 보통 예상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 아버지를 믿고 그분에게 소망을 둘 수 있게 된다는 사실 말이다. 베드로의 서신에 나타난 논리를 내가 이해한 바는 이것이다. 나의 삶이 예수님의 삶을 반영하는 것을 보면, 나의 고난과 그분의 고난이 어떻게 만나는지 알게 되면, 예수님이 신실하신 아버지에게 자신을 맡기심으로 고난을 견디신 바를 내가 깨달으면, 그리고 선택받은 귀하신 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사실을 내가 인지하면, 내가 그와 유사한 고난이나 거절을 당하더라도 그리 놀라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리신 나의 왕 예수님을 알게 되면, 나의 삶이 많은 원수들 앞에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더라도, 내게 여전히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유를 내가 알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고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예를 회복시키셨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렇게 하셨으니 나 자신의 삶이 어두워질 때도, 내가 거절과 비웃음을 당하고 신체적 고통을 대면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된다.하나님이 그분의 섬기는 자를 어떻게 다루실 줄 내가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분의 아들을 어떻게 다루신 줄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계속 영광을 향하여 이러한 대답은 우리가 보통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이유는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가 그분을 신뢰함으로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을 받으면, 그를 따라 영광을 받으리라는 소망이다. 세상의 비웃음과 수치는 끝이 나고 우리는 높이 들려 하나님으로부터 영예를 받을 것이라는 소망 말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말하듯이,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다. 그의 부활과 영광 받으심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추수의 시작일 뿐이다. 그분은 믿음으로 그를 따르게 될 이들, 그리고 같은 고통을 받은 후에 오는 영광의 길을 가게 될 여러 다른 이들의 선구자이며 원형이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끔찍한 죽음과 그의 견줄 수 없는 영광 둘 다를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았고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은 오늘날 우리가 끝없이 당하는 배척을 잘 견딜 수 있도록 돕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수치와 배척으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시고 명예를 회복하게 하셨음을 알았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끄러워하고 부인함으로 무거운 짐 아래 허물어졌지만, 영광에 대한 소망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대담하게 증인된 삶을 살게 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 이러한 소망은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정화시키고 이 땅에서 망명의 삶을 사는 동안 영예롭게 살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해 준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안에서 얻는 이러한 확증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조차도 우리가 존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한 미래의 소망은 또한 우리의 입을 열어 복음을 담대히 선언하게 하며, 사회적 수치를 견디게 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과 확증을 얻으려는 우리의 갈망을 극복하게 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설명하고 있듯이, 이러한 자신감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복음에 마음을 열도록 본이 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산 소망을 보고 그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Surprising Purpose in Christ’s Resurrection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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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소망
영광
성경 전체를 보여주는 요셉 스토리
by Samuel Emadi
2019-10-02
모세는 다른 캐릭터보다 요셉에게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창세기를 기록했다. 이는 아담이나 노아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족장들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에도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창세기 이후로 성경 전체에서 요셉이 그리 중요하게 거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놀라움은 더 커진다.그렇다면 요셉 이야기를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왜 그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그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일까?많은 크리스천들은 요셉 이야기가 어떻게 창세기의 서사라든가 전체 구속사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흔히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예증하기 위해 요셉 이야기를 활용하곤 한다. 주로 창세기 50장 20절 본문에 집중해서 말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요셉의 인생을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창세기 37장에서 50장에 이르는 긴 본문의 중심 주제일 뿐 아니라, 요셉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45:1-9).하지만 요셉 이야기를 예컨대 양립주의(compatibilism)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스토리로만 축소시켜 읽는다면, 그의 인생이 성경 전체의 줄거리에 얼마나 풍성하게 기여하는지를 놓치게 된다(참고로 양립주의란, 하나님의 결정과 인간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 견해이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언약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섭리를 독자한테 보여 주기 원하셔서 자신의 주권이 요셉 이야기 전반에 나타나도록 하셨다. 따라서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떻게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내는 인물인 셈이다.이러한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요셉이 어떻게 독특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된다.갈등의 해결을 드러내는 이야기창세기는 언약 백성의 생존과 순결을 위협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계속해서 소개한다. 곧 37장에서 50장에 이르는 내용을 읽어 보면, 야곱과 그 자녀에게 온갖 종류의 시련이 들이닥치며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는 장면을 볼 수 있다.1.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가족 간의 분열과 다툼이 다시금 언약 백성의 생존을 위협한다(창 37장; 참고 4장).2. 이방 민족과 통혼하여 드러나게 된 불의가 언약 백성의 순결을 위협한다(창 38장; 참고 12:10-20).3. 세계적인 기근이 발생하여 언약 백성이 위태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창 42:1-2; 참고 3:17-19; 12:10; 26:1).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해서 아브라함 가문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갈등을 해결하신다.1. 요셉은 형제들에게 받은 대로 복수하기보다 관대한 용서를 베풂으로써 그들과 화해하고 가족 간의 연합을 이룬다(창 45:1-15).2. 요셉은 그의 가족을 고센 땅에 정착시켜 이방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 그리하여 애굽인의 미움을 받지 않게 된 가족은 이방 민족과 통혼하지 않고 그 땅에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창 46:33-34).3.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행정 능력을 발휘하여 심각한 기근으로부터 가족의 생명을 지킨다(창 41:25-35; 47:13-26).결국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언약 백성을 위협하는 문제를 역전시키신다. 곧 용서를 통해 다툼을, 의를 통해 불의를, 그리고 지혜를 통해 기근을 해결하신다.약속의 성취를 나타내는 이야기더 나아가 창세기 37-50장은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시는지를 보여 준다(창 12:1-3).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열방에 은혜를 베푸신다.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집을 그에게 다 맡긴다. 이에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보디발에게 복을 주신다(창 39:4-5). 그리고 요셉은 또다시 바로의 집에서도 총리가 된다(창 41:40). 그 결과 열방에 복이 미친다. 요셉이 심각한 기근 중에도 애굽인과 각국 백성에게 양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창 41:56-57).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으로 번성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요셉을 통해 성취하신다. 일단 요셉이 그의 가족을 고센 땅에 정착시키고 나자, 아브라함 자손은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다(창 47:27). 이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표현은 창세기 전체에 걸쳐 등장하지만, 지금 이 경우에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그 백성에게 명령하거나(창 1:28; 9:1, 7; 35:11) 그와 같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지만(창 16:10; 17:2, 6; 22:17; 26:4, 24), 이번에는 처음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동일한 표현이 여기서는 직설법으로 서술되었다. 요셉의 리더십 하에 아브라함 자손이 실제로 번성하게 된 것이다.심지어 왕에 대한 약속도 요셉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한다. 창세기 37장에 소개된 요셉의 꿈은 장차 그가 수행할 통치자의 직분을 예견한다. 곧 애굽의 궁정에서 요셉이 차지하게 될 위치를 암시한다. 더군다나 그가 입었던 ‘채색옷’은 왕가의 의복을 상징한다(삼하 13:18). 따라서 이 장에 앞서 예언되고 모형론적으로 제시되었을 뿐 아니라 언약의 약속으로 언급된 통치자(창 17:6, 16; 35:11), 즉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나타나리라고 기록된 왕의 도래를 기다려 온 독자들에게는 창세기 37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장에서부터 소개되는 요셉이 그 예견을 더욱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요셉을 보며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이후 왕궁에서 높은 직위에 오르게 된 요셉 이야기는 단지 하나님이 그의 결백을 입증해 주셨다는 내용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인간의 통치가 회복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언약에 그분 자신이 얼마나 신실하게 역사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이 한 나라를 이루고 그로부터 통치자가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요셉은 바로 그 통치자를 보여 주는 첫 번째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열방에 전해 주는 새로운 인류의 모습을 드러낸다. 곧 사랑받는 아들이자, 섬기는 왕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 준다.그렇다면 이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섭리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비록 모세는 창세기 37-50장 이야기의 중심 무대에 요셉을 세웠지만, 사실상 그 무대의 주인공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요셉이 어떻게 성취하는지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버림받은 한 사람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언약을 지키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언약의 성취 여부는 인간의 악한 행동마저도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주권자의 손에 달려 있다(창 50:20).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모든 위협적인 상황을 역전시키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신다.이와 같은 요셉 이야기는 단지 창세기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아니다. 그보다도 창세기의 전체 스토리가 안고 있는 갈등에 대한 해결책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창세기는 형제를 미워하는 사건으로부터 형제에 대한 용서로, 그리고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근으로부터 가족이 재회하여 잔치를 벌이는 축제로 독자들의 걸음을 인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이야기이러한 관찰은 요셉이 과연 장차 나타날 메시아에 대한 ‘모형’(type)인지, 즉 하나님이 의도하신 예시적인 인물이 맞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지난 교회사에서 수많은 성경 해석자들은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이 맞다고 설명해 왔다. 요셉과 그리스도 간에 존재하는 명백한 유사점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요셉도 사랑받는 아들로서 형제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며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과정을 통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요셉과 예수님의 상관성을 드러내는 유사점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요셉의 인생은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여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고 죄인에게 내려진 저주의 결과를 무효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흥미롭게도 창세기는 야곱이 유다를 위해 축복한 내용이 이미 요셉의 삶에서 모형론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창 49:8).이 축복에서 야곱은 유다의 후손으로 장차 오실 왕을 묘사하는데, 그 이미지가 요셉의 인생에 펼쳐진 장면과 너무도 흡사하다. 여기서 유다의 형제들이 그 앞에 절하게 된다고 언급되는데, 이처럼 절을 한다는 표현은 요셉의 꿈에서 형제들이 그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이미 세 번 사용되었고(창 37:7, 9, 10), 또한 그들이 애굽의 궁정에서 실제로 요셉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기술하기 위해서도 세 번 사용되었다(창 42:4; 43:26, 28). 이처럼 창세기 49장 8절에서 열한 명의 형제들이 한 사람 앞에 절을 하는 이미지는 지금까지 들려준 요셉 이야기를 요약하는 한 편의 그림과 같다. 이런 유사점은 의도적인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장차 나타날 메시아의 모습이 어떠할지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은 바로 이 야곱의 축복에서 힌트를 얻게 된다. 곧 메시아가 요셉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게 되리라는 답변을 얻는 것이다.이처럼 요셉과 유다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은 이 구절만이 아니다. 사실 모세는 요셉 이야기 전체에 걸쳐 두 인물을 자주 병행시켜 놓았다. 예를 들어 가장 결정적인 세 차례의 대목을 살펴보면 그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곧 서론 부분에서(창 38-39장), 절정 부분에서(창 44-45장), 그리고 야곱의 예언 부분에서(창 49장) 그렇게 등장하는데, 이 단락들은 요셉 이야기만이 아니라 창세기 전체 스토리의 백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요셉과 유다는 서로 엮여 있다. 따라서 야곱의 예언에서도 두 사람은 장차 나타날 이스라엘의 왕을 함께 예시한다.이처럼 모세는 요셉이라는 모형론적 인물을 통해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미래의 왕을 묘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메시아를 통해 절정에 이르게 될 이스라엘 역사의 거시적인 스토리 안에 요셉 이야기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그의 이야기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이는 모세가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왕적 인물로서 요셉을 바라보도록 뚜렷한 장치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셉 이야기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미래의 소망을 제시하는 이야기창세기 37-50장은 단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내용만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에 관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하여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의 결과를 역전시키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신다. 하나님은 모든 게 불리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자기 가족에 의해 노예로 팔려 나간 한 사람을 들어 자신의 권능을 펼쳐 보이신다.아마도 모세는 자기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보잘것없는 한 인생을 통해 불가능한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자 요셉 이야기에 그 많은 분량을 할애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죄인에게 임할 저주를 완전히 역전시키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실 미래의 진짜 요셉(a coming Joseph)을 기대하도록 그 많은 분량을 할애했을지 모른다.이런 점에서 요셉 이야기는 성경의 전체 스토리를 보여 준다. 즉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비하를 통해 승리로 나아가는 스토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the Joseph Story Is Really About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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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아름다운 눈물
by Makoto Fujimura
2019-09-28
요한복음 11장의 예수님이 우시는 장면은 매우 인상 깊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이를 슬퍼하는 마리아와 막달라로 인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 예수님의 눈물은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의 구체화된 표현이다.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요 11:4)고 예수님은 베다니에 가기를 연기하셨고, 도착해서는 마르다에게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25절)이라고 알려주셨다. 만일 그분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베다니에 왔다면, 그가 정말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능력이 있는 메시아가 사실이라면, 죽음과 나사로의 질병의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으셨을 것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그랬으면 모두가 바로 기뻐했을 거고 모든 눈물은 필요없었을텐데 말이다.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면, 굳이 눈물은 헛되고 필요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능력을 사용하시는 대신, 스스로 취약해지는 것을 택하시고, 죽음의 아픔을 느끼셨다. 소망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몸소 행하셨다. 눈물을 흘리신 후에,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43절)고 선언하셨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비틀거리며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한 자신의 행로를 계속 가시게 되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주님에 대한 마리아의 관점을 변화시켰다. 예수님의 눈물은 굳어진 베다니의 땅을 흠뻑 적시면서 마리아의 눈물과 함께 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구세주일뿐만 아니라 친밀한 친구도 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사람의 아들과의 깊은 우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 요한은 이 부분을 주목했다. 고대 일본인들에게 아름다움은 순간적인 것을 성스러운 것과 함께 연결시키는 개념이었다. 벚꽃은 꽃잎이 떨어지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그 감격은 일본인들에게 도덕성을 생각하게 한다. 하카나이 비(순간적 아름다움)는 슬픔을 의미하지만, 생명에 대한 연민에서, 일본인들은 심오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야스나리 카와바타(Yasunari Kawabata)는 전후 작가인 류노스케 아쿠타가(Ryunosuke Akutagawa)가 자살 전에 쓴 유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하지만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의 맨 마지막 상황이 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Japan, the Beautiful, and Myself)라고 말했다. 카와바타도 몇 년 뒤에 자살을 했다. 일본인들에게 아름다움을 감지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연결된, 매우 비극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눈물도 순간적이며 아름다웠다. 그분의 눈물은 우리에게 우시는 구세주로 계속 기억하게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물은 절망이 아니라 부활의 위대한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자살이 아닌 풍성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마리아는 나중에 자기의 가장 중요한 보물을 가지고 예수님께 달려감으로 그분의 눈물에 보답했다. 그녀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자신의 결혼식에 사용하기 위하여 보관하고 있었던, 일 년 임금에 해당하는 지극히 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를 깨뜨렸다. 그녀는 예수님의 눈물에서 직감적으로 그분이 기적을 행할 때마다 자신의 희생적 죽음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직접적이고 직감적이지만 의도적이며 헌신적인 행위로 응답해야 했다.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녀의 행위를 책망했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중략]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6-9).예수님의 눈물은 마리아의 희생의 행위, 즉 베다니의 방 안에서 퍼진 나드 향으로 이어졌다. 거기에서 한 여인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향기, 즉 복음의 실재가 단절된 세계 속으로 불어 넣어져, 고통으로 깨진 곳을 채워넣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능하게 했다.예수님의 눈물과 마리아의 나드와 같이, 예술은 삶의 깊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일 수 있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그들의 삶을 장식하는 여가와 같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쇼팽의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까? 큰 무대에 서야 하는 무용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부수적이고 낭비가 심하다고 여기는 삶이 어쩌면 우리 인간성을 정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날 저녁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엎지른 나드향 속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 있었고, 공기 중에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칸타타가 흘렀다. 감사하게도 큐레이터이며 화가인 제임스 일레인의 이러한 표현과 관찰은 실로 대단하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직간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 즉각적으로 드리는 보답이다. 우리는 이러한 직감을 왜곡시켜서 죄악되고 해로운 것을 만들 수도 있지만, 이러한 창조적 충동은 창조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에 화를 내고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도 있었겠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책망했다(막 14:5). 실용주의와 율법주의, 그리고 탐욕은 순간적 아름다움의 힘을 이해할 수 없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천천히 영혼을 옥죄이는 경직된 결정론이다. 율법주의는 우리의 고통에 대해 실용적 대답을 하려 함으로 상처를 입힌다. 그것은 나드를 주님의 발에 흘리지 못하도록 금함으로 생명력을 빼앗아가 버린다. 마리아처럼, 예술가들은 직감적으로 생산해 내고, 억압된 것을 깨뜨려 열 수 있다. 교회 안팎에서,실용주의와 율법주의는 순간적이지만 성스럽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우리가 알고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예술가들은 창조를 위하여 예수님의 눈물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해야만 한다. 마리아와 예수님처럼, 예술가들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율법주의자의 책망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누어 주는 행위는 우리에게 넘치게 베푸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단지 기쁨으로 보답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넘친다거나 낭비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베푸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넘치게 베푸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내가 보기에 모든 예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린다. 예술은 마리아의 나드처럼 ‘깨끗하다’라고 여겨지는 곳에 스며든다. 그러한 예술은 진정으로 마리아의 헌신처럼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동시에 유다의 책망처럼 진정으로 해로운 것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카와바타처럼, 예술가들은 또한 절망하기 쉽다. 율법주의와 절망은 둘 다 악마가 사용하는 도구이다. 자살은 이 두 행로의 종착점이다.나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네랄 재료를 섞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나는 페인팅이라는 행위로 은혜를 추구한다. 내가 사용하는 미네랄 물감은 엄청나게 비싸다. 금, 플래티넘, 은, 희귀한 종이와 실크, 그리고 백년이나 된 수미 잉크 등 모두 내 작품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나는 스스로 마리아와 같이 되기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을 떠올려 본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예술가이다. 아마도 그분이 마리아 안에서 본 것은 작은 예술가였을 것이다. 그분의 위대한 희생을 모방하고 따라하는 작은 예술가의 모습 말이다.마리아는 감사로 전율하며, 왕이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사랑의 헌신으로 문화적 규범을 깨뜨렸다. 이 행동으로 그녀는 신비의 순간을 열었다. 그녀의 나드는 흘러넘쳤고, 그 향기는 그 방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그녀가 미처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매우 순간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그녀도 자신의 순간적인 행동이 영원한 유산으로 남아 기억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놀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마리아가 한 이 행동이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우리는 이 확실한 선언의 결과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리아의 나드 향기를 담은 그 복음이 영원히 기억되도록 우리가 사역을 하고 있는가? 마침내 도래할 우주적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우리가 아름답고 넘치게 나눠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eautiful Tears번역: 정은심
복음
예수그리스도
아름다운눈물
요한복음11장
부활
생명
십자가
마리아
복음과 율법은 모순되지 않는다
by Tim Keller
2019-09-21
나는 칼럼니스트나 학자 또는 언론인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대며 기독교인이 일관되지 않다고 비난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규범 중 일부만 취사선택하여 따른다.” 가장 흔히 듣는 비난은 이런 말이다. “기독교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내용을 무시한다. 가령 날고기나 돼지고기 혹은 생선을 먹지 말라고 한다든가 안식일을 어긴 죄에 대해서는 처형하라고 한다든가 아니면 두 가지 종류의 직물로 짠 옷을 입지 말라고 한다든가 하는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성애에 대해서는 정죄한다. 그러니 자신들이 믿고 싶은 부분만 취사선택한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물론 나는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준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게 되기를 기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성경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신앙이 모순을 드러낸다고 비난하기 전에 자신들이 가진 상식을 먼저 확인해 보기를 (또는 신학적으로 훈련된 교사와 최소한 이야기라도 한번 나눠 보기를) 바라고 있다.우선, 구약성경만 동성애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부터 생각해 보자. 사실 신약성경 역시 그 문제와 관련된 많은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다. 심지어 이혼에 관한 지침을 제시하는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결혼을 통해 의도하신 본래의 목적이 남자와 여자가 한 육체로 연합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밝히셨는데, 여기서 그 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결혼이나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마 19:3-12).그렇다면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서, 신약 시대의 하나님 백성은 구약에 언급된 내용을 일관성없이 따르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비난에 직면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잘 모른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간단한 설명부터 제시해 보겠다.일단 구약성경은 속죄를 위하여 성막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다양한 희생 제사에 관해 수많은 본문을 들어 설명한다. 그리고 그 제사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원리를 소개한다. 이와 관련하여 의식적인 정결을 위한 복잡한 규례도 함께 밝힌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특정 음식만 먹고 다른 음식은 먹지 않으며 또 정해진 의복만 착용하고 다른 여러 가지 대상들은 만지지 않는 가운데 오직 예배를 통해서만 그분께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생생한 규례를 통해 반복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인간은 영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정결해지는 절차 없이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나 구약성경의 많은 저자들은 희생 제사와 성전 예배의 규례가 그 자체의 내용을 초월해서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삼상 15:21-22; 시 50:12-15; 51:17; 호 6:6).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이분은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막 7:19), 구약의 정결법을 뛰어넘어 나병환자나 죽은 사람의 몸까지도 만지셨다.그 이유는 명확히 드러난다. 즉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갈라짐으로써 정결법을 포함한 모든 희생 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예수님이 몸소 죄에 대한 궁극적 희생 제사를 드리심으로써 우리 각자를 정결하게 하신 것이다.이런 차원에서 히브리서 전체는 구약의 의식법이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언제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히 10:19).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의식법을 계속해서 준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되지 않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여전히 효력을 지닌 율법이와 같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관해 신약성경은 또 다른 가이드를 제시해 준다. 곧 로마서 13장 8절 이하에서 바울은 구약의 도덕법이 여전히 우리에게 효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는 바뀌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도덕법은 하나님의 완전하심, 인자하심, 신실하심과 같이 그분 자신의 성품을 보여 주는 삶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진 소유를 관대하게 나눌 뿐 아니라, 가정에도 충실하게 헌신해야 한다는 구약성경의 가르침은 여전히 효력을 지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신약성경도 살인이나 간음을 계속 금하고 있으며, 구약성경이 제시하는 성윤리도 다시 명시하고 있다(마 5:27-30; 고전 6:9-20; 딤전 1:8-11). 이처럼 신약성경이 또 다시 요구하는 계명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효력을 미치는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신약성경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래서 죄는 변함없이 죄이지만,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구약성경에서 간음이나 근친상간과 같은 범행은 이스라엘 국가의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죄목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하나님 백성은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집행되었다.그러나 신약 시대에 하나님 백성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의 모임이며, 각 교회는 서로 다른 정부의 통치 아래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어떤 정부 기관이 아니기에,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권면이나 충고를 통해 그 문제를 다루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멤버십에서 제외함으로써 그 문제를 처리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근친상간의 문제를 처리한 방법이 그와 같았다(고전 5장; 고후 2:7-11).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은 어느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문화에 전파되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성경의 전제를 받아들이면,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이루신 구원 사건의 우선적 의미를 인정하게 되면, 그때부터 성경의 다양한 부분들은 모순 없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의식법은 그리스도로 인해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로 인해 더 이상 교회는 국가적 차원의 형벌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교회가 처한 장소에 따라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경우에 성경은 기껏해야 영감 어린 구절이나 지혜로운 말씀이 일부 수록된 문서일 뿐 그 대부분은 어리석고 잘못된 내용으로 가득한 책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오직 두 가지 결론이 가능하다. 먼저 그리스도가 정말 하나님이라면, 지금까지 설명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접근은 전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와 같은 기독교의 기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즉 예수님을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면, 성경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실한 가이드를 제시해 줄 수 없는 것이 되고만다. 물론 이 경우에 기독교가 구약의 도덕 조항 중 일부만 준수하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는 모순된 신앙이라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건 공정한 접근이 아니기 때문이다.그처럼 모순을 운운하는 비난에 대응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되받아치는 것이다. “당신은 저한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부인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까?” 이에 상대가 “왜 그렇게 묻죠?”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정말 예수님을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저는 음식이나 관습에 대한 어떤 정결법도 따를 수 없고 동물을 바치면서 희생 제사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가져다준 효력을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구약 계명 중 일부는 준수하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아야만 합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aking Sense of Scripture’s Inconsistency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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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말의 의미
by Don Carson
2019-09-18
요한복음 3장 5절에는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새로운 탄생 혹은 중생을 일컫는 ‘거듭남’에 관해 예수님이 설명하신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그야말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이 거듭남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꺼내셨을 때(요 3:3), 니고데모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흔히 사람들은 니고데모가 꺼낸 이 질문을 보며, 그가 얼마나 꽉 막혔는지 예수님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그 표현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선생’(요 3:10)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 가혹한 평가이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사실만큼은 이해하지 않았나 싶다. 즉 사람은 반드시 다시 시작해야 하며, 전혀 다른 생명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출생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다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다시 시작하며, 정말로 새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자랑하면서 그 출발을 기뻐할 수 있겠는가? 오마르 카이얌(Omar Khayyam)이 그 어려움을 다음처럼 잘 표현했다. “움직이는 손가락이 기록한다 기록한 후에도 / 또 계속 움직인다 그대의 모든 경건도 지혜도 / 그 손가락을 되돌려 반 문장도 지우게 할 수 없다 / 그대의 모든 눈물로도 단 한마디도 씻어낼 수 없다.”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때가 있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잘못과 죄악만이라도 지워 버리면 좋겠다는 소원을 품기도 한다.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은 이렇게 기록했다. “오, 내 안에 일어나는 한 사람이 있으니 /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 더는 아니기를.” 또 다른 시인인 존 클레어(John Clar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인생에도 개정판이 있다면, 그 원고를 어떻게 수정할꼬.” 니고데모는 사람이 새로운 출생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비현실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항해길에 오른 지가 한참이니,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기엔 늦지 않았는가(요 3:4,9). 만일 그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라면, 소망은 아주 없어 보인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그런데 예수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거듭나야 한다는 요점을 다시 강조하신다. 다만 ‘거듭나야 한다’라는 표현을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으로 확장시켜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이 어떤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관건이 된다.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로 그 표현을 사용하셨을까?불충분한 설명들이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제시되어 왔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은 그리 충분치 못한 답변으로 판명이 났다. 그중에는 예수님이 이 표현을 통해 두 가지 출생을 가르키신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즉 사람은 (물로 태어나는) 자연적인 출생뿐 아니라 (성령으로 태어나는) 영적인 출생까지 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 표현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한 번 태어나는 데서 더 나아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1) 이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의 표현은 새로운 의미가 결여된 진부한 내용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 표현의 첫 번째 부분(즉 ‘물로 나야 한다’라는 부분)이 다음과 같은 내용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너는 존재해야 한다. 너는 자연적으로 출생하여 이곳에 존재해야 한다.” 이 경우 예수님이 의도하신 진짜 의미는 오직 두 번째 부분(즉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2) 고대 사회에서 자연적인 출생을 가리키기 위한 어구로 ‘물로 나다’라는 표현이 사용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자연적인 출생에 앞서 자궁에 있는 양수가 터져 나오는 현상을 보고 ‘물로 나다’라는 표현을 생각해 낼 수도 있겠으나, 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대 문헌이나 헬라 문헌에서 그런 의미로 이 표현이 사용된 예는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두 가지 문제를 고려해 볼 때, 이 해석이 맞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또 다른 견해로서 성례적 해석이라고 불리는 설명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새로운 출생이란 물과 성령 모두와 관련되어 일어나는데 이때의 물은 세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맥락에서 니고데모가 ‘물’이라는 표현으로부터 기독교의 세례 의식을 떠올릴 거라고 예상하며 예수님이 그 표현을 사용하셨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바로 그 다음 장에서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베푸시지 않고 그 의식을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실을 소개한다(요 4:2). 이는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시는 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더 나은 설명그렇다면 더 나은 설명이 있을까? 먼저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의 유사성이 잘 드러나도록 아래와 같이 배열해 보도록 하겠다.(요한복음 3장 3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요한복음 3장 5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여기서 금방 알 수 있듯이,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5절)은 ‘거듭나다’라는 표현(3절)과 병행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은 자연적인 출생과 영적인 출생으로 구분되는 두 차례의 출생을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표현은, 예수님이 앞서 언급하신 ‘거듭나다’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단회적인 출생’을 나타낸다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사용하신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은, 그분이 ‘거듭나다’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고자 하신 내용을 부연하며 이는 다름 아닌 니고데모의 질문(4절)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설명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답변이 니고데모에게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질책하셨다(요 3:9-10). 왜냐하면 당시 니고데모는 성경에 정통한 지식을 갖춘 바리새인으로서 현재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책을 연구하며 그에 대한 엄청난 분량의 신학적 이해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학식을 가진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제(곧 거듭남이라는 주제)를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부가하신 표현(즉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표현)을 들었을 때, 과연 어떤 내용을 파악해야 했을까?그 구체적인 내용이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를 푸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구약성경 어디에 ‘물’과 ‘성령’이 한 문맥 안에 같이 언급되어 새로운 변화를 약속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몇 가지 답변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명확한 대답을 제공하는 본문은 에스겔 36장 25-27절이다.“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하나님은 주전 6세기에 활동했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백성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가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그 변화는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을 제거하는 맑은 ‘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도 설명된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즉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로 그와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예언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강조하실 수밖에 없었다.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여기에 설명을 좀 덧붙이자면,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에 대한 지금 이 해석은 본문의 이어지는 내용과 요한복음 전체와도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예수님은 새로운 출생이 일어나야 한다는 자신의 선언이 다름 아닌 계시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말씀이라고 주장하신다. 즉 그분 자신이 하늘로부터 가져오신 계시라는 것이다(요 3:11-13; 참고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 기록된 계시인 구약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죄악과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그 권능으로 구원하시는 패턴도 이미 구약에 제시되어 있다고 가르쳐 주신다(요 3:14-15; 참고 민 21:4-9).결국 이 모든 진리는 그 무엇에도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요 3:16-21).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위대한 진리를 믿게 만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Does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Mean in John 3:5?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물
성령
요한복음3장5절
오마르카이얌
알프레드로드테니슨
존클레어
형벌적 대속론을 정립해준 세가지 사실
by Daniel Hames
2019-09-14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메시지를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하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나는 어릴 때부터 자랐다. 여름 수련회, 휴일 특별 성경공부, 그리고 주일학교 토론회 등의 모든 모임에서 핵심 메시지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였다. 나를 대신해서 나의 죄와 내가 받아야 할 형벌까지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이 죽으셨다. 그 결과 이제 나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고,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신학책을 찾아 읽기 시작하면서 또 내 믿음을 점검하면서,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던 믿음에 대해서 나는 점점 더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여태 알고 이해하던 기존의 십자가와 구원에 대해서 전혀 다른 방향에서 진지한 질문을 던진 몇 분의 저자들의 책을 읽게 되었다.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이 쓴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인’(A New Kind of Christian)과 스티브 초크(Steve Chalke)와 알란 맨(Alan Mann)이 쓴, 이제는 꽤나 유명해진 ‘잃어버린 예수의 메시지’(The Lost Message of Jesus) 중 다음 부분도 읽었다. “십자가는 우주적으로 저질러진 아동 학대 범죄가 아니다. 십자가는 복수하는 아버지, 아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아들을 벌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중략] 만약에 십자가가 정말로 하나님에 의해 저질러진 인류를 향한 폭력의 행사라면, 단지 아들이 대신 그 폭력을 당하도록 한 것이라면, 그거야말로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스스로 우습게 만드는 꼴이 된다. [중략] 하나님은 화가 난 신이고, 그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희생제물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은, 정말로 고대 이방신의 모습에 더 가깝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의 모습일 수는 없다.”나는 안셈(Anselm)의 만족설(theory of satisfaction)에 관한 비판을 읽었다. 비록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론이지만, 그것도 결국 고작해야 중세 서구의 법의학 수준에 그친다는 비판이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진노한 신이라는 생각, 그러니까 그 진노를 달래기 위해서 반드시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정말로 고대 이방신에게나 어울리는 생각이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추측도 가능하다. 초기 기독교 작가들은 이런 이교도 신들에게서 모티브를 가져왔지만, 거기서 한 걸음 벗어나서 하나님의 진노와 죄의 대가, 그리고 대속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 형태로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고는 브래들리 저색(Bradley Jersak)이 이야기했듯이, 단지 “칼뱅의 상상이 만들어낸 법정 드라마” 정도로만 부각될지 모른다. 결국 이런 시각은 다 하나님을 화난 존재로, 아들을 희생자로 그리고 나는 감사해야 하는 존재로, 무엇보다 십가가형이 주는 폭력적인 공포의 수익자로 만든다.어릴 때부터 들어서 익숙해진 속죄에 대한 이런 그림은 끔찍할 정도로 왜곡되고, 단순하고 또 역사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좀 앞으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거기로 다시 돌아가서그러나 몇 년에 걸쳐서 신학적인 혁명을 가져온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그들의 결론이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릴 때 이해한 십자가가 정말로 너무 단순하고 순진했던 걸까? 물론, 난 아이에 불과했다. 따라서 주일학교 이야기를 비판한 성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과 함께 내 과거를 코웃음 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중고등부 시절 붙잡았던 믿음을 해체하고, 내가 좋아하게 된 새로운 작가들의 생각에 근거해서 당당하게 그 믿음을 던져버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심각한 수준의 속죄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진정한 신학적인 혁명일까? 나는 칼뱅, 이레니우스(Irenaeus), 안셈 또는 아나스타시스(Athanasius)의 글을 읽은 적은 없다. 솔직히 성경을 진지하게 읽은 적도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사실은 내게 심각하게 경고하는 듯 보였다. 기존의 신학을 제대로 모르면서 새로운 신학에 파고드는 것은 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어처구니없는 길이었다. 나는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한 때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던, 복수심에 불타는 이방신의 이미지를 닮은 하나님, 사랑없는 하나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믿고 있던 진짜 하나님과 조금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새롭게 인지했던 하나님에 대한 여러 생각들은 도대체 얼마나 믿을만했던 걸까?다음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을 다시 정립시켜 주었다. 이제 나는 신앙이 처음 뿌리내린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1. 진짜 성경을 제대로 읽기누구든지 이사야서 53장 5절과 고린도후서 5장 21절과 같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았다는 ‘결정적인’(clobber) 구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동시에 얼마든지 이런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고, 또 다른 구절들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전혀 다른 십자가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보다 깊이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성경의 위대한 주제와 유형에 비추어 이 본문들을 보게 되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동물 가죽,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숫양, 유월절 양과 맏아들, 출애굽할 때 닥친 심판의 날,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을 때 온 세상을 뒤덮은 어둠, 이 모든 사건을 대속과 우리를 대신해서 흘린 피라는 의미를 빼고 나는 도저히 다른 방법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실제로 전체 주제를 고려해 통합적으로 성경을 읽음으로, 또 구약을 복음의 예시라는 관점에서 읽음으로, 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졌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메시지이지 결코 곁다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결코 의도적으로 조작된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삼위일체어린 시절에 들었던 십자가에 대한 설명 중 일부는 삼위일체에 근거한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죄를 너무 싫어하기에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할 방법을 찾는 분이었고,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든 일종의 제3자였다. 이런 설명도 일부는 맞다. 그러나 너무도 단순한 이런 설명은 복음과 삼위일체를 왜곡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나를 가르친 주일학교 선생님 중에서 그 누구도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없었고, 나는 고작해야 열 살이었다. 그런 우리였기에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런 부족함에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성경에 따르면, 성삼위 하나님의 삼위 모두가 다 죄로 인해서 손상을 입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 모두가 다 이 죄를 함께 진멸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세상을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로 결심했다. 예수님은 영원한 아들이고 그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영원을 위한 계획에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기로 선택되었기 때문이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까지 보면, 인간이 되기 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체를 입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종이 되어 죽기까지 죄인들을 위해서 순종했다. 진노의 잔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에서 드리는 그의 기도를 보면,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마 26:42).‘복수하는 하나님’과 ‘죄 없는 예수님’을 굳이 서로 대척점에 놓을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이 바로 죄를 싫어하고, 또 죄인을 구하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저주하는 바로 그 사건에 스스로 참여한 아들의 공모(complicity)는 복음의 가장 영광스러운 진리 중 하나이다. 이 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됨으로 우리는 믿음을 더 굳건히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까지 더 잘 보게 된다.3. 역사 속에 드러난 교회의 증거예수님이 마지못해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형벌적 대속(penal substitution)이 속죄 이론 중에서도 나중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그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비난을 여전히 되풀이하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형벌적 대속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듣는 건, 왜곡과 혀가 꼬이는 이상한 소리(lisping) 뿐일 것이라는 비판도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초창기 변증에 관한 글을 하나 보도록 하자. 2세기에 쓰인 마테데스(Mathetes)가 디오그네투스(Diognetus)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얼마나 달콤한 교환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사하심! 모든 기대를 뛰어넘는 혜택! 많은 사람의 사악함이 한 명의 의로운 이로 인해 숨겨지고, 그 한 의로운 이가 수많은 범죄자를 다 의롭게 만들다니!시편 51편 주해를 하면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썼다.“주님조차도 죽음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건 죄로 인한 게 아니었다. 그분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아들였고, 그리고 우리의 죄악을 없앴다. [중략]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 다름 아닌 원죄 때문에 말이다. [중략] 그렇기에 화해를 위한 중보자가 필요했다. 한 번의 희생을 바침으로써 율법과 선지자가 행한 모든 희생이 예시하던 그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졌다. [중략] 이제 하나님이 화가 났다고 할 때, 우리는 이제 그것을 분노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왜곡된 감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감정을 기초로 해서 비유로 전달된 단어, ‘분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단지 죄에 대한 그의 불만이라고 부른다.”심지어 고대의 노래조차 진노를 대신 받아서 짊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을 찬양한다. 1500년 전에 쓰인 베난시오 포르투나토(Venantius Fortunatus, AD 530–607)의 아름다운 찬양, ‘보아라 예정된 날이 시작된다’(See the Destined Day Arise)는 이렇게 시작한다. “보아라, 예정된 날이 시작된다. 기꺼이 희생제물이 된 이를 보아라. 예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저 부끄러운 십자가에 달렸다. 예수, 그가 아니면 다른 그 누가 하나님의 위대하고 공의로운 진노를 감히 대신 질 수 있을까? 모든 고통, 모든 가시, 저주받은 너의 삶을 회복한다.”나는 또 현대 복음주의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와 제임스 패커의 ‘십자가가 성취한 것은 무엇인가?’(What Did the Cross Achieve?)를 읽고 그들의 관점 또한 내가 과거 신학 고전 속에서 발견한 것과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구세주인가!아마도 어렸을 때 내가 이해한 십자가는 얕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신학을 통해서 또 교회 역사를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죽음을 응시했고 또 동시에 나의 위치와 내 죄를 바라보았다. 십자가에 대한 각종 사례는 잘못된 것들이 적지 않기에 제대로 된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대표성, 머리됨과 하나됨, 악한 세력이 전복, 십자가를 통한 전 우주적 승리 등의 가장 중요한 개념만은 달라질 수 없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모든 진리는 다 어릴 때 배운 말씀을 통해 내 속에 저장되었던 ‘좋은 기초’(good deposit)가 있었기 때문에 더 강화되고 풍성하게 될 수 있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Reasons I Changed My Mind About Penal Substitution번역: 무제
복음
십자가
희생
이방신
심판
삼위일체
진노
형벌적대속
어거스틴
우리는 이미 홍해를 건넜다!
by Tim Keller
2019-09-10
신약성경의 안내에 따라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 구약의 한 본문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패러다임을 보여 주는 출애굽 기사의 본문이다.지금으로부터 한 40년 전, 펜실베이니아주의 어느 작은 마을에 위치한 R. C. 스프로울(Sproul) 박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날 그 집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그 집에는 영국의 구약학자 알렉 모티어(Alec Motyer)가 머물고 있었고, 나 외에도 다른 대학이나 신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프로울이 모티어에게 청했다. “어떻게 구약이 신약과 연결되는지 우리에게 좀 이야기해 주실래요?” 이에 모티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말을 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중 한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시죠?’라고 물었다면, 그는 이렇게 답했을 것입니다. ‘저는 타국에서 종살이를 하며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린 양의 피를 집에 바르고 도망치게 되었지요.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지도자를 따라 도망쳐 나온 후로는 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약속의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죠. 갈 길이 아직 멀었지만 말입니다. 이 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고 또 성막을 주셔서 그분의 은혜와 용서를 경험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본향에 도착할 때까지 언제나 함께하시죠.’라고 말이지요.”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도 거의 똑같이 고백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나는 그 말에 놀라며 생각했다. ‘과연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를 읽으며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다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지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이 사실을 말해 왔다. 지금도 다른 종교들이 어떠한지를 수시로 확인한다. 혹 누군가가 “그렇다면 여기 이 종교는 어떻습니까?”라고 지적하며 나한테 마치 속았다는 듯 비난할 때, “그 종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라고 반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사실 기독교 외의 다른 모든 종교는 다리를 놓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먼저 다리를 지탱하는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더 이상 다리를 놓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중단된 다리를 가끔씩 볼 수 있다. 다른 모든 종교 생활이 그와 같다. 이러한 종교 생활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노력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다 건넜다는 느낌을 가질 순 없으며, 그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들은 모든 종교를 통해 그처럼 저편으로 건너가려는 노력을 계속한다.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방금 전까지 거듭나지 않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거듭난 사람이 될 수 있다. 조금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순식간에 그분의 자녀가 된다. 여기에는 과정이 없다. ‘흑암의 권세’에 속했든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에 속했든지 둘 중 하나다(골 1:13). 기독교의 유일성을 드러내는 이 진리, 즉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구절이나 이미지를 한번 떠올려 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이와 같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즉각적으로 옮겨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가 사람들의 신앙을 점검할 때 참고하던 일종의 시금석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고자 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이에 겸손하게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영국 사람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글쎄요,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로이드존스는 설명하기를, 그런 대답은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라고 했다. 조금도 알지 못하기에 그렇게 대답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래와 같이 단번에 일어나는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1. 이전에는 ‘저’ 나라에 속해 있었지만, 이제는 ‘이’ 나라에 속해 있다.2. 이전에는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 ‘외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가족’이 되었다.3. 이전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4. 이전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칭의’를 얻은 상태에 있다.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렇다면 정말로 당신은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하는 권능에 대해 알고 있는가?믿음의 정도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2002년에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은 ‘헤븐’(Heaven)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 작품은 비록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거기서 블란쳇은 여배우로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영화는 어느 도시의 특정 지역에서 활동하는 마약 거래상이 그 지역에 사는 아이들의 삶을 망쳐 놓는 상황을 소개하며 바로 그 상황에 분개한 어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이야기에서 그녀는 경찰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고 판단하고는 스스로 마약 거래상의 사무실을 폭파시켜 그 거래상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야간 경비원이 쓰레기통에서 폭발물을 발견하고 엘리베이터 안에 두는 바람에 그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다른 네 사람이 죽게 된다. 그런데 그 사망자 안에는 어린아이들까지 포함된다. 결국 아이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살리기 위해 일을 계획했던 블란쳇은 자신의 노력이 오히려 아이들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대로 주저앉게 된다. 이 대목에서 블란쳇이 보여 준 탁월한 연기 덕택에, 우리는 육신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한 사람이 망가지는 모습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결국 그녀의 삶은 타다 남은 잔해와 같이 황폐해져 죄책감과 수치심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이런 종류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똑같이 느꼈던 사람이 성경에 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바울이다. 그런데 그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어떻게 이처럼 말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단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인생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 왔다.” 율법에 갇히게 된 인간의 마음은 그런 말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울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는 거짓된 겸양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단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내면의 변화가 막 시작되었을 뿐이지만,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놀랍게 변화되었다.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나 도덕적인 노력과 상관없이 은혜로만 구원받죠. 하지만 믿는 것만큼은 우리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면, 전심으로 믿는 것이야말로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 구원받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이에 대해 성경 본문이 이야기하는 바가 있을까?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출 14:21-22). 이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바다를 건넜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마음으로 건너갔다고 할 순 없다.누군가는 바닷물로 세워진 벽을 따라 걸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와, 이 광경을 좀 봐!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잖아! 애굽인들아, 이제 너희는 상대가 안 돼!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고!”하지만 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따라갔을 것이다. “이러다 물이 덮치면 어떡해! 죽을지 몰라. 죽을지도 모른다고!”어찌 되었든 그들은 모두 바다를 건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믿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이 구원을 받았다. 모두 다 바다에서 건짐을 받았다. 왜 그럴까? 우리는 믿음의 정도로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은 믿음의 ‘대상’으로 인해 받는다. 다시 말해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이에 대해 성경은 바다를 건너는 일이 오직 은혜로만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한다.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중략]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라고 외친 모세의 말에 관해 설교한 적이 있다. 거기서 스펄전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하려는 순간, 구원은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자신이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분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확신하건대, 여러분은 ‘가만히 서 있기’가 매우 쉽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서 있기는, 주님의 군사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 수년의 가르침을 통해서야 겨우 배울 수 있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전사에게는 가만히 있기보다 빠른 속도로 진격하는 일이 훨씬 쉽기 마련입니다. 가만히 서 있기란, 사람이 세운 일반 군대에서는 처음에 배우는 기초 훈련이지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대장의 지휘 아래서는 가장 배우기 힘든 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며 그 어려움을 나타냈습니다.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시련의 한복판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자세는 노련한 정신과 오랜 경험, 그리고 엄청난 은혜가 아니면 보여 줄 수 없습니다.”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바다를 건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의 죄와 사망을 하나님이 다 처리하셨기에, 지금 붙들고 있는 그 문제들은 사소한 일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앞에서 큰 난관을 만난 것처럼 두려워하지 말라. 오히려 그분이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똑똑히 보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et Out! Tim Keller on the Exodus Story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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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모티어
마틴로이드존스
찰스스펄전
출애굽
로마서 1장으로 회의론자 살려내기
by Nancy Pearcey
2019-09-07
고등학교 때부터 딜런은 타고난 리더십을 보였다. 풋볼 팀에서 MVP로 뽑히기도 한 그는 모두로부터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이후 딜런이 갖고 있던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신은 말 그대로 들어가는 수업에서마다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학 수업에서 배운 다윈의 자연주의 철학은 가정(assumption)에 불과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영어 수업에서 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에 관한 여러 주장들에 대해 가면을 쓴 채 이뤄지는 일종의 파워게임으로 보고 있었다.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각종 심리학의 이론들은, 프로이드의 심리분석에서 스키너의 행동주의까지, 하나같이 기독교를 하나의 정신 병리학적 증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딜런이 다녔던 교회는 지극히 기본적인 복음을 가르쳤을 뿐이지,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만나는 각종 도전에 대응하는데 필요한 어떤 준비도 시키지 않았다. 근본에서부터 흔들린 딜런은 결국 대학을 중퇴했고, 기독교가 과연 진리인지를 바닥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프랜시스 쉐퍼가 스위스에서 운영하는 라브리에 가게 된 딜런은 그 곳에서 그의 눈을 뜨게 한 기독교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라는 말이 진리임을 딜런에게 확인시켜 주었다.그럼 교회가 어떻게 해야 떠나간 젊은이들이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게 할까?왜 젊은이가 신앙을 거부할까딜런 같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 연구에 따르면 평생 믿던 신앙에서 왜 떠났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답변을 한 것이, 사라지지 않는 의심과 질문을 교회가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해당 연구를 수행한 사람들은 적지 않게 놀랐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았거나 사람들과의 깨어진 관계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내어놓은 첫 번째 대답은 그들이 가진 질문에 교회가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 도전하는 세상의 온갖 세계관들을 다 알고 대응하려면 평생을 공부해도 부족하다. 모든 ‘주의(ism)’를 다 암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대답은 성경이 모든 사고 체계에 다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보편타당한 전략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로마서 1장이다. 로마서 1장을 바울이 주는 ‘변증 훈련 매뉴얼’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말이다.바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믿음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한 편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역사의 위대한 줄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줄다리기이다. 한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스스로를 드러내신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대용품을 창조함으로써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억누른다.바로 이런 로마서 1장의 서사는 모든 변증에 필요한 신학적 바탕이 된다. 진리에 관한 모든 논쟁은 예외없이 다음 두 가지의 카테고리에 속한다. 우리는 외부적으로 철학을 테스트함으로 철학의 주장이 과연 실제 세계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또 동시에 철학의 논리적 일관성을 확인하기 위해 내부적으로도 테스트한다. 로마서 1장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왜 이런 테스트가 효과가 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또 동시에 이런 테스트에 필요한 전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진짜 세상 테스트로마서 1장은 초월적인 창조자를 거부하는 자를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었다’라고 말한다(롬 1:23,25). 그들은 우상을 창조했다. 궁극적인 실체인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우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오늘날 학문 세계에서의 지배적인 철학은 유물론이며, 유물론은 물질을 신의 위치에 놓는다. 물질은 영원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스스로 존재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대용품이다. 딜런이 교실에서 공부한 세속적 사상가(다윈, 프로이트, 푸코)는 하나같이 모두 유물론자였다.이런 유물론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물질적이지 않은 실재는 모두 부정해야 한다. 결국 인간은 복잡한 생화학 기계 또는 의지, 정신, 영 또는 혼이 없는 로봇으로 축소된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인간을 유전자에 의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생존 기계 또는 로봇”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관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본성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로봇처럼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선택을 한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자유 의지를 부정한다면 그건 식당에 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 철학자는 농담처럼 말했다. “자연의 법칙이 내가 오늘 먹기로 이미 결정한 그 음식을 갖다 주세요.”물질주의가 우리가 아는 인간 본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 꼭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피조물 중의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영광과 뒤바꾸는 철학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로 바꾸는 꼴이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보다 낮은 무언가로 시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항상 인간에 대한 낮은 시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이런 시각을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부른다. 즉, 인간을 온전히 인간보다 더 낮은 그 무엇인가로 낮추기 때문이다. 유물론은 바로 이런 점에서 첫 번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 본성과 유물론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논리 테스트비 성경적인 모든 세계관은 이 두 번째 테스트도 통과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인간에 대한 환원주의적 견해도 정신 또는 인지 능력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환원주의는 이성을 이성보다 낮은 그 무엇으로 떨어뜨린다. 그런데도 어떻게 환원주의가 존재할 수 있을까? 환원주의도 이성을, 그러니까 논리적 논증을 사용해야 가능한 게 아닌가? 따라서 환원주의가 이성을 왜곡하는 순간, 환원주의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덫에 걸리고 만다. 바로 자기모순(self-refutation)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유물론은 생각에 대해 뇌에서 일어나는 뉴런 작용으로 이해한다. 유물론자들에게 인간이 진리를 믿는 것은 진리가 가진 논리적인 주장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뇌에서 일어나는 뉴런의 특정 패턴 때문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이런 주장이 물질주의자들이 가진 견해에 대해 암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똑같은 추론을 적용해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유물론도 합리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단지 두뇌에서 일어나는 뉴런 활동의 산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뉴런 활동의 산물에 불과한 이런 유물론의 주장에 우리가 귀를 기울일 필요가 뭐가 있을까? 어차피 논리적인 결론이 아닌데 말이다. 변증가 그렉 쿠클(Greg Koukl)이 말했듯이, 이것은 유물론과 같은 세계관이 스스로 ‘자살하는 방식’이다. 진리를 향한 세계관의 정의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순간, 지금까지 논리를 근거로 한 그들의 모든 주장은 말이 안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이것은 ‘자기 참조적인 부조리(self-referential absurdity)’라고 불리며, 로마서 1장이 취하는 접근법은 왜 그것이 효과가 있고, 어떤 세계관에 적용 가능한지를 알려준다. 환원주의를 잘 살펴보라. 환원하는 바로 그 지점이 바로 환원주의가 스스로 모순이 되는, 자살하는 지점이다.로마서 1장의 서사는 모든 변증론 주장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딜런과 같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소식은 성경적 전략이 보편적으로 다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더 이상 이런 저런 ‘주의’를 다 암기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로마서 1장 하나로 모든 세상 주장에 다 맞서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One Strategy to Rule Them All: How to Answer Skeptics from Romans 1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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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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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쿠클
언약으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
by Richard Phillips
2019-09-04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구약성경 다음에 신약성경이 나온다는 정도는 안다. 성경에 대해서 조금 더 아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모세오경이 나오고 따라서 역사서, 시가서, 그리고 선지서가 나온다는 정도를 안다. 신약에 들어서는 가장 먼저 복음서가 나오고 이어서 사도행전, 서신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뒤따른다는 것도 안다. 이런 순서는 교회가 정경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과연 성경의 구조 자체가 구원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충분할까? 종교개혁 신학자들이 오랫동안 이해했듯이, 성경은 '언약 신학'이라고 부르는 데 필요한 충분한 구조를 제공하고 있다. 언약 신학은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통해서 구속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신학이다. 그러나 언약 신학은 단지 종교개혁자들만이 바라본 성경의 이해가 아니라 성경 스스로가 드러내는 구원의 방식이다.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백성의 역사미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여러 가지 다양한 접근법으로 바라볼 수 있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는 과정을 전쟁이라는 기본틀을 통해서 이해할 수도 있고, 또는 대통령 제도, 놀라운 발명품들, 혹은 개인의 자유 확대라는 틀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이해를 위한 이런 기본틀은 미국 역사를 구성하는 많은 데이터를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그렇다면 성경은 어떤가? 성경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가? 최근 나는 비행기에서 바로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기회를 만났다. 한 젊은 유대인 여자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내게 이렇게 물었다. “기독교인은 뭘 믿나요?” 이 얼마나 놀라운 기회인가? 나는 다양한 교리를 통해서, 그러니까 창조와 죄, 심판 구원 그리고 영생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있었다. 교리를 통한 접근은 꽤나 신선하고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교리 대신 성경 속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언약 신학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내가 이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그녀가 가진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기독교 신앙을 연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이 그분의 구원 메시지를 자신의 백성들에게 알려줄 때 쓰셨던 바로 그 방법이기 때문이다. 먼저, 언약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과 축복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이라는 축복 안에서 언약을 맺을 때에도 약속을 한다. 우리가 혼인 서약이라고 부르는 공식적이고 강제적인 계약이 바로 그 약속이다. 혼인 서약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그들을 하나로 묶는데, 이 안에는 그들만이 누리는 특권과 더불어 책임이 포함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그분의 주권적이고 강제적인 조건에 따라 스스로를 인간과 묶으셨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내가 그 유대인 여자에게 한 대답을 살펴보자. 나는 이렇게 시작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온전히 내게 순종하기만 하면 너를 영원히 살게 하시겠다'는 생명의 언약이죠. 그런데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 언약을 깨 버렸고, 그렇게 죄를 지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그의 모든 후손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희생의 피를 통해, 그러니까 오로지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을 주시겠다는 또 다른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후에 하나님이 홍수를 통해 죄악에 찬 인류를 멸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분은 또 하나의 언약을 노아와 맺으셨습니다. 이는 믿음을 가진 인간을 구하고 또한 자신을 위해 그 거룩한 백성을 보존하시겠다는 언약이었죠. 나중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또 언약을 맺으셨어요. 그 언약은 아브라함이 믿기만 하면 그에게 축복의 땅과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나는 기독교인이 가진 믿음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것,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겠다는 언약을 맺으신 것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 그의 자손을 통해서 영원한 왕국을 세우겠다고 하신 그 언약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 즉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서 그분의 완전한 삶과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 그리고 이를 믿는 이에게 바로 그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 설명은 언약 신학을 떠받드는 성경적 기초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이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을 드러내는 성경의 방법이고,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야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언약 신학을 믿는 것이다.두 개의 언약 이야기성경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 죄와 구원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각각 다른 두 가지의 언약과 연결시킨다. 하나는 언약을 깨뜨린 인간이고, 또 하나는 언약을 충족하신 그리스도이다. 이 두 가지 언약, 즉 행함에 의지하는 언약과 은혜에 의지하는 언약은 성경의 가르침이 제대로 세워지는 데 필요한 구조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가 구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내가 유대인 여자에게 말했듯이,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후손이 이 언약 조건에 근거하여 에덴동산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다. 그 언약 조건은 다름 아닌 “완벽하고도 개인적인 순종”이다(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7.2). 바로 그 언약에 관한 하나의 테스트는 나무와 관련된 것이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순종을 통해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언약을 깼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다. 개혁 신학은 이것을 “행함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아담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그가 살지 죽을지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행함의 언약을 파기한 아담의 불순종은 커다란 문제가 되었고, 성경의 나머지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대답을 기록하고 있다. 파괴되어 버린 행함의 언약에 대한 처방으로 하나님이 들고 나오신 대답은 은혜의 언약이다. 악마를 상징하는 뱀이 첫 번째 인간을 죄에 빠지게 한 이후, 하나님의 은혜는 뱀의 패배라는 장면을 통해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신학자들은 이것을 최초로 제시된 원시복음(Protoevangelion)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이에 이어서 은혜의 언약이 어떻게 이어질지를 보여 주셨다. 즉 죄인을 대신해서 죄 없는 자가 희생될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의로움이 죄인들에게 주어지며 그들이 져야 할 형벌은 그의 피로 대신 치르게 될 것을 보여 주셨다. 창세기 3장 21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은혜의 언약은 그 이후 이어진 세대를 통해 드러나는 복음의 이야기에 놀라운 통일성을 제공한다.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다. 그 언약 덕분에 인류는 멸망하지 않고 구주가 탄생할 때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단지 많은 후손만을 약속한 게 아니었다. 그건 언약을 온전히 성취할 단 한 명의 후손에 대한 언약이기도 했다(갈 3:16). 모세 시대가 되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한 나라를 이루었고, 모세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죄 용서를 위해 희생 제사를 집례할 제사장을 제공했다. 하나님 왕국도 통치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신 언약은 결코 실패하거나 죽지 않는 왕을 약속했다. 그러나 파괴된 행함의 언약은 길고 긴 세대를 통해서도 여전히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은 여전히 완벽한 순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의로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이 구절이야말로 언약 신학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분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마 5:17). 다시 말해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서 행함의 언약을 완성하러 오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심으로써 죄인들이 은혜의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새 언약”을 세운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의 언약이 온전히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자신의 대속 죽음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언약 신학은 구약과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서신서에 실린 사도적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나님은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라고 하실 수 있을까? 언약 신학은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성취하신 행함의 언약뿐 아니라 은혜의 언약에 의해 바쳐진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의롭게 된다. 여기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있다. 우리가 하는 행함과 별도로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어떻게 의롭게 만드는가? 이에 대하여 언약 신학은 성경의 대답을 들려준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함의 언약을 어김으로 하나님께 진 빚을 대신 갚으셨고,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은혜의 언약에 따라 오로지 믿음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 역사는 결국 그분의 이야기이다언약 신학은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을 드러내어 구원에 필요한 성경의 구조를 잘 드러낸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고후 1:20). 이 기록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은 은혜의 선물로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그 답은 그의 언약 속에 다 들어 있다. 이는 바로 생명, 지키심, 약속의 땅, 영광스런 백성, 선지자, 의로운 왕, 그리고 속죄양이다. 이 모든 약속들은 우리가 언약의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온전히 '예'와 '아멘'으로 받을 때에만 주어진다. 그러므로 언약 신학이 말하는 성경의 역사는 실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맛볼 수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Redemptive History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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