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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치어리더가 아니다
by Melissa Kruger
2019-03-28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전하는 경건한 책이든지, 블로그이든지, 혹은 거대한 컨퍼런스이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의 말씀이 주로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지하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당신은 훌륭해요! 잘했어요! 당신 자신이 되세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라고 하는 말을 매우 듣기 좋아한다.명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용기를 주신다. 예수님은 지친 자에게 힘을 주고 상처입은 자에게 위로하는 말씀을 하신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에 늘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기 때문에, 매일 그분의 격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메시지 중 일부에만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을 우리의 영적 기분을 북돋우는 치어리더로 축소시키는 잘못을 행할 수 있다. 또한 우리도 서로에게 영적 치어리더의 역할만을 하게 된다는 우려도 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칭찬의 말을 하지만, 조언이나 꾸짖는 말은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용서의 말을 하지만, 회개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분의 은혜를 바르게 기뻐해야 하지만, 죄를 슬퍼하는 일은 종종 잊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와 우리 서로의 관계가 생명을 주는 관계임을 놓치고 있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친구는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나를 불러서 직언을 해줄 친구이다. 그들은 내가 조언과 지혜를 얻기 위하여 찾고 또 찾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내가 바른 길을 걷지 않을 때 직언을 해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하신다. 그분은 가르치시고, 명령하시고, 꾸짖으시고, 부르시고, 촉구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관중석에서 우리를 응원하는 치어리더의 위치로 축소시키면, 우리는 우리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신실한 친구를 놓치게 된다. 당신의 사역에서 당신이 주로 듣는 말이 “당신은 훌륭해요!”라는 말이라면, 당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초대하고자 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보자.예수님은 가르치신다: ‘나는 ~이다’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명확하게 아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신다. 예수님은 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가르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참 목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어떤 사람들에게 이 목록은 모든 대화를 자기에게 집중시키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므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우리에게 다양하게 가르쳐 주신다.당신의 성경 공부 그룹이나 컨퍼런스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보다는 당신이 누구인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새 책을 선택하거나 다른 그룹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절실하게 그분에 대해 알아야 한다.예수님은 명령하신다: ‘말씀에 순종하라’예수님은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말과 행동뿐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감정 면에서도 진정한 순종을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온 삶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우리에게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때로 짐이나 고역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기쁨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명령대로 사는 것이 항상 기쁨이 넘치는 일은 아닐 수 있지만, 그것은 기쁨으로 가득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예수님은 꾸짖으신다: ‘죄에서 달아나라’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보고 “별일 아니다. 네가 즐거운 것이면 뭐든지 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 대신 예수님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라고 꾸짖으신다.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죄를 싫어하신다. 죄가 우리 영혼을 좀먹는다는 사실을 아신다. 죄가 만족함이 없고 항상 우리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아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서 달아나기를 원하신다(마 18:15-17). 가르치는 자가 자기 충족의 수단으로 죄악된 행동을 장려할 때, 예수님은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며 경고하신다(눅 17:1-3).예수님은 부르신다: ‘너의 십자가를 지라’종은 주인보다 크지 않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우리 자신의 삶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이 말했듯이, “십자가를 지신 자의 추종자가 되는 일은, 바로 십자가와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항상 상실을 수반한다.”우리의 교사들이 우리의 삶을 잃는 것보다 찾는 것에 관하여 더 말한다면, 우리는 놀라운 크리스천의 삶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좁은 길로 가도록 권하고 희생의 삶을 살도록 하는 일에 우리가 두려움을 느낀다면, 우리는 소망을 아직 이 현세에 두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고정시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열심히 살면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포기함으로써 정확하게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예수님은 촉구하신다: ‘온 세상으로 가라’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위한 놀라운 목적과 사역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당신을 포함하지만 당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 그분의 영광에 관한 것이다.형제자매들이여, 모든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목적은 없다. 예수님이 당신을 어디에 두시든지 그분은 당신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원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이 씨를 뿌리고 추수한 곡식을 즐기기 원하신다(마 28:19-20).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수용하기 힘든 가르침을 포함하여 그분의 말씀 모두를 필요로 한다. 예수님을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하여 그분의 진리를 축소시키는 일은 사실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온다. 그렇게 하면, 그분의 풍성함을 모두 잃게 되고, 그분을 본받는 일이 그저 무미건조하게 되어버린다.예수님은 구원하신다: ‘복음을 들으라’우리는 우리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구세주가 절실히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미래에 가게 될 천국을 그냥 약속하지 않고 오늘 우리를 변화시키겠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를 구속하신다. 우리를 양자삼으신다. 우리 안에 부활의 능력이 작동하게 하신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살 자유가 있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소식은 ‘괜찮아’라는 말보다 훨씬 더 좋은 말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용기를 가지라. 당신의 감정이 아닌 예수님 안에 당신을 심어라.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라. 예수님은 우리의 기분을 고취시키는 치어리더보다 더 낫다. 그분은 우리의 시작과 끝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isters, Jesus Is Not Your Cheerleader번역: 정은심
복음
예수그리스도
말씀에순종
십자가를지라
세상으로가라
복음을들으라
요15:11
엘리자베스엘리엇
당신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by Jon Bloom
2019-03-25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만나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 위안, 격려, 인도하심, 확신과 같은 보석을 숨겨 놓곤 하신다. 최근에 내가 묵상한 출애굽기 속 지루한 본문과 같은 그런 곳 말이다.솔직하게 털어놓자면, 큐티를 할 때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 삶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 분문을 뛰어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게다가 그런 본문은 내 두뇌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계보, 의식에 대한 지침, 성전 목록 등을 주로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건너뛰기도 하는데, 이번에 건너뛰지 않고 그 본문을 제대로 읽은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귀한 보석을 찾았기 때문이다.내가 찾은 보석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전에, 먼저 ‘보석 찾기’에 대해서 한 마디 하자. 우리가 성경을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보석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령님이 비춰주시는 본문은 그때그때 다르다. 출애굽기 속 뻔한 본문이 어느 날 생각하지도 못한 지혜를, 실로 놀라운 깨달음을 줄 때가 있다. 이런 재미야말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말씀과의 상호 작용, 성경 읽기가 끝나지 않는 즐거운 모험인 이유이다(히 4:12). 성령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신다. 이번에는 성막 건축에 관해 읽을 때, 성령님께서 나를 놀라게 하셨다.불가능한 사명을 받았을 때출애굽기 25장부터 30장에서 하나님은 길고도 자세하게 장막 짓는 방법을 모세에게 지시하신다. 성막의 청사진외에도 하나님은 언약궤, 빵 받침대, 등잔대, 등잔대의 기름, 희생 제단, 분향단, 향 자체, 물을 담는 대야, 제사장 의복, 바르는 거룩한 기름 조리법 등에 대해 세세한 지시 사항을 주는데, 이런 지침으로 무려 여섯 장이 다 채워질 정도이다.나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무도 자주, “너는 만들 것이며(you shall make)“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출 25:13). 이 말씀의 히브리어 원문을 확인해 보았더니, “너“는 2인칭 남성 단수 동사였다. 다른 말로 하면, “너, 모세는 만들 것이며”라는 뜻이다.모세는 이미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 그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는, 무려 200만 명에 달하는 불만으로 가득 찬 유목민을 이끄는 선지자, 국가 원수, 외무장관, 대법원장, 군사령관, 성경 카운슬러, 그 외에도 맡은 일이 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또 세세한 지시 사항으로 채워진 “너는 만들 것이며”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모세의 등에 지우고 있다. 모세는 놀라울 정도로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민 12:3). 만약에 내가 모세의 처지에 있었다면,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아예 나를 죽이시려는 건가요?” 이미 불가능한 일이 더 불가능해졌으니까 말이다.충분한 능력 제공그때 나는 바로 ‘그 보석’을 만났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중략] 무릇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출 31:1-6, 11).하나님은 다른 유능한 사람들을 모세에게 붙여 주심으로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셨다. “너는 만들 것이며”를 “그들이 만들 것이며”로 확장하셨다. 불가능했던 일이 이제는 좀 더 가능해 졌다.이번처럼 이 본문이 내게 희망과 기쁨을 준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모든 남자와 여자에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주셨다(출 35:25-26). 나는 특히 아버지의 역할을 더 잘 감당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느꼈다. 크리스천 부모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 앞에 부담을 느낀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명기 6:7). 그러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이들이 단지 알고 끝나는 게 아니라, 믿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불안함을 느낀다. 아이들을 가르쳐서 믿게 하는 데 있어서 내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섯 명의 아이들 중 밑의 세 명은 아직 십 대인데, 그들을 가르치고 믿게 할 시간이 점점 짧아져서 초조감을 느낀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면에서 그들을 제대로 양육하는 엄청난 일을 하기에는 내가 모자라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십대인 아이들의 시간과 관심을 뺏는 너무도 많은 세상 일들과 경쟁하는 일은 벅차기만 하다.그런 나에게 출애굽기 31장 6절이라는 보석은 하나님이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주실 뿐 아니라, 또 내가 혼자 못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능력 있는 다른 사람을 보내 주셔서 내 부족함을 채워 주실 거라고 깨우쳐 주었다(빌 4:19).당신은 혼자가 아니다이 진리는 단지 자녀 양육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사역에 적용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하나님은 제공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7:7).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이렇게 말했다. “이 진리를 의지하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이뤄질 때, 결코 하나님의 공급이 모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능력을 공급하실 때, 대부분은 내 부족함을 채우는 유능한 동역자의 형태로 온다. 하나님은 “너는 할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은 할 것이다”의 형태로 하신다.고린도전서 12장 18절부터 20절은 출애굽기 31장 6절의 신약 버전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성도들이 공동체 또는 “몸”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각각 자신이 부여 받은 능력을 기여하며 함께 일할 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는 하나님의 뜻은 이뤄진다. 바로 이것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출애굽기 31장의 한 구절에서 이런 위안을 찾게 될 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말씀을 통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은 것도 좋았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 위안과 격려, 그리고 인도하심과 확신을 불어넣는 보석과 같은 말씀을 숨겨 두시는 하나님까지 알게 되어 더 좋았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Will Provide the Ability You Need번역: 무제
신학
구약성경
능력
하나님
사명
출애굽기
모세
허드슨테일러
가룟 유다 이야기
by Colin Smith
2019-03-19
우리는 유다를 단순한 악인 또는 희생자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여러 면에서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고, 이 사실에 대해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유다는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였지만, 그 마음에는 확신이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한때 고백했던 믿음을 저버리고 말았다.유다의 이야기에는 쉽게 간과되는 네 가지 사실이 있다.1. 유다의 헌신유다는 예수님께 헌신한 사람이었다. 나머지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 사역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놀라운 영적 선물을 부여 받았다. 예수님도 유다를 포함하여 "열 두 제자"라고 칭하셨으며 ,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능력을 주셨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눅 9:1-2).가룟 유다는 바로 그 능력을 입은 복음 설교자였음을 기억하라. 그는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았고 귀신을 내쫓는 특별한 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그러한 행위가 영적인 삶 또는 영적인 건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2. 유다에게 주어진 기회유다는 무려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장 위대한 삶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다. 구세주와 함께 걷는 것보다 믿음을 형성하는 데 좋은 환경은 있을 수 없고, 또 예수님보다 더 나은 믿음의 모델 역시 있을 수 없다.그는 기적도 직접 목격했다. 바로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시는 그 자리에 유다가 함께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빵을 나누어 준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폭풍우를 잠잠케 하셨을 때도, 그는 거기에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도 유다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유다보다 믿음에 대한 더 나은 증거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유다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도 직접 들었다. 산상수훈을 통해 그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과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이 있음을 알았다. 또한 그는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를 통해 피해야 할 지옥과 갈망해야 하는 천국이 있음도 알았다. 더욱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까지 제대로 배운 사람이 바로 유다였다.그는 두 눈으로 똑똑히 가장 명백한 증거를 보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두 귀로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들은 사람이다. 유다는 자신의 두 발로 가장 위대한 모범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님을 배반했다.인간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으며(렘 17:9), 성경 말씀처럼 한때 믿음을 고백했다가 포기한 사람의 마음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분명 자리한다. 건강한 교회를 다니고, 경건한 부모에게 양육받으며 어린 시절부터 성경의 진리를 먹고 자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 덕분에 왜 기독교가 진리인지를 알면서도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포기할 수 있는지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유다의 이야기에는 믿음을 포기해 버린 자들과 그들 때문에 슬퍼하는 부모, 지도자 및 친구들이 귀기울여야 할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우리가 도대체 뭘 잘못한 것일까?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우리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인가?우리가 믿음의 본을 제대로 보이지 못했기 때문인가?애초에 우리 아이들이 다른 환경에서 양육받도록 했어야 했나?그러나 유다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최고의 모범, 가장 강력한 증거, 최상의 교육, 신앙을 키우는 가장 이상적인 환경도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3. 유다의 선택사탄은 유다의 영혼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을 계속해서 공격하는 행위, 이것이 바로 사탄의 주된 일이다. 성경은 사탄의 공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눅 22:3-4)."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요 13:27).사탄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에 관한 성경의 명확한 진술을 읽으면 이내 그에 대한 동정이 일어난다. "불쌍한 유다, 그가 무슨 힘이 있었겠어? 사탄이 이미 그 영혼에 들어갔는데, 유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어?"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다. 그것은 바로 유다가 사탄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다.유다가 돈을 훔치고 그 죄를 숨겼을 때,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갔다. 대제사장와 계약을 맺고 난 이후 예수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 사탄은 더 깊이 그의 존재를 파고들었다. 이처럼 고백하지 않은 죄는 사탄에게 나를 내어주는 통로가 된다.사탄은 예수님과 함께 빛 가운데를 걷는 사람들의 삶에는 결코 들어갈 여지를 찾지 못한다. 사탄은 오로지 우리가 문을 열 때에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클라우스 스키더(Klaus Schilder)는 그의 저서인 '고통 속의 그리스도'(Christ In His Suffering)에서 이렇게 말한다."예수님께 먼저 다가가지 않는 사람의 영혼도 주권적으로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소유한 특이한 위엄이다. 바로 거기에 사탄의 약점이 있다. 그러니까 영혼이 먼저 허락하지 않는 한, 사탄은 결코 그 영혼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종종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마음대로 접근하고 침입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걱정하면서, 정작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오지 못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는 크나큰 착각이다. 성경은 그 반대가 진리라고 명확히 가르친다.4. 유다가 받아들인 결과유다는 그가 선택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예수님과 가까워지면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의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즉 당신은 온전히 예수님의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결국은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다.그리스도를 강력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 중 일부는 한때 예수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했던 이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배타적이고 또 그분의 요구는 삶 전체를 포괄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전적으로 헌신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의 선택지만 있을 뿐 중간지대란 존재할 수 없다.오직 그리스도를 아예 모르는 이들만이 그분께 무관심할 수 있다. 주님께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이라면, 완전한 헌신 또는 전적인 대립, 이 두 가지의 결과만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이 두 방향 중 한쪽으로 조금씩 더 나아가고 있다.우리는 한때 신앙을 고백했던 수많은 이들이 이제 그 믿음을 버리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유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난파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경고한다. 또한 유다의 이야기는 현재 믿음으로부터 멀어질 위기에 처한 유다와 같은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교훈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유 22-23)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유다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선한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러도 따라야 하는, 결코 등져서는 안 되는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4 Things We Can Learn from Juda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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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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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신앙고백
예수님의 부활이 왜 중요한가?
by Matthew Barrett
2019-03-15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연 중요한가? 사도 바울은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라고 확신했다. 그는 고린도교회를 위해 서신을 쓰는 중, 그 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미래에 있을 육신의 부활을 부인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직면했다. 이는 당시 그레코-로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지닌 공통적인 관점이었다. 죽음은 곧 끝을 의미한다는 이러한 세속적인 관점은 사실 1세기 이후로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의 수많은 무신론자들이 이와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그런데 이 같은 시각이 특히 바울의 시대에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이 육신으로 부활할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자신의 육체적 부활은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강하게 지적한다. 만일 크리스천이 장차 경험할 육신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부인하는 것과 동일하다. 만약 그리스도가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크리스천의 삶과 믿음은 그 본질부터 달라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부활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왜 중요한지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고린도전서 15장을 시작한다. “내가 전한 그 말을 [중략]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 15:2). 바울은 복음이 전적으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고전 15:3)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이뤄졌다고 말하고, 그 죽으심과 함께 복음을 완성하는 역사로 부활을 언급한다. 그리스도는 죽은 채로 계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나타나기에 앞서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구속 사역을 통한 복음을 성취하셨다(고전 15:4).우리가 정말로 복음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복음으로 흠뻑 젖은 신자라면, 과연 복음의 메시지에서 부활을 제외할 수 있을까? 이 물음 앞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비신자에게 복음을 전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지하게 말했던 적이 없다. 이런 경험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자 모두의 공통된 경험일까봐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의 진리, 즉 그리스도의 부활이 결코 그분의 죽음과 분리될 수 없다는 진리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분리하는 실수를 범한다면, 이는 구원에 있어 부활이 가지는 위대한 가치를 전부 버리는 행위이다. 토마스 슈라이너(Thomas Schreiner)도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 결코 분리될 수 없다.”2.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이끌기 때문에 중요하다“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당신의 설교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당신은 지금 목회자로서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을 바꾸는 복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다”(고전 15:14)라고 그는 성토한다.그가 이토록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애초에 세상에 전할 기쁜 소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은 채로 설교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거짓으로 증거할 뿐 아니라, 세상에 전할 빛이 전혀 없는 무의미한 설교를 행하는 자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에 전해야 하는, 세상을 바꾸는 복음의 핵심이다.3.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원을 이루기 때문에 중요하다고린도전서 15장을 통틀어 가장 냉엄한 바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우리는 너무나 자주 구원의 통로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제한하고는 한다. 물론 바울이 로마서 3장 25절과 26절에서 말하듯이, 칭의에 있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핵심 그 자체이다. 오직 그분이 하신 “의로운 행위”(롬 5:18), 곧 “그의 피로 인한 속죄”(롬 3:25-26)를 통해서만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더 있다. 바로 그리스도가 행하신 대속의 죽음뿐 아니라, 그분의 부활도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바울은 로마서 4장 24절과 25절에서 하나님이 부활을 믿는 그 믿음 때문에 우리를 의로운 자로 간주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치른 대가가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은 그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확증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가 받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부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은혜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라고 말한 사실을 기억하라. 그의 발언은 과언이 아니다. 부활이 없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문다면 구원의 확신 역시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은 결코 거짓도 과언도 아니다.4.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래의 소망에 대한 초석이기 때문에 중요하다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며 슬퍼하는 이에게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고 잠들었다면,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5:18). 그들의 영혼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빌 1:23), 또한 그들은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온전하게 연합함으로써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그날을 기다린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가올 위대한 수확의 첫 열매이고, 그분의 백성들은 그 부활을 따라 곧 다가올 육체의 부활을 얻게 된다. 우리는 첫 번째 아담 때문에 죄의 결과로 죽음을 맞았지만,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로 인해 장차 “모두가 살아나게 될 것”(고전 15:22)이다.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 미래의 소망은 없다. 바울이 확실하게 언급했듯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더 불쌍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품은 우리의 소망이 그분의 부활 없이는 고작 현재의 삶을 뛰어넘지 못하는 초라한 열망에 그치기 때문이다(고전 15:1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영원한 삶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끝낸 방식이 특히 마음에 든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수고가 전혀 무의미하거나 목적 없는 행위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복음은 우리의 영원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고, 그 복음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된다. 부활이 없이는 우리에게 복음도, 구원도, 세상에 전할 구원의 메시지도 없으며, 무엇보다 미래의 소망도 없음을 기억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y the Resurrection Changes Everything번역: 무제
복음
부활
구원
미래
소망
초석
슈라이너
우리가 미가를 설교해야 하는 이유
by Mark Livingston
2019-03-12
어디에서나 피할 수 없는 정치적인 이슈가 있다. 대표적으로, 부를 누리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가난하고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평등과 고통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이처럼 어느 인간 사회에나 만연한 죄악의 그림자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소망의 여명은 아직 비춰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우리가 흔히 읽고 접한 적이 있는 이야기의 서막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그 상황은 ‘미가’라고 하는 구약성경의 한 책이 보여 주는 역사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몇 년 전인가, 나는 교인들한테 미가를 즐겁게 설교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 그 선지서를 연구하며 발견한 사실이 있었는데, 곧 미가라는 선지자는 개인적으로 우리와 동떨어진 시대에 살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본질을 깊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나는 미가가 소망을 전달하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에서 하나님은 자상하게도 우리에게 세밀한 경고를 주시고, 또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를 설득하시고, 더 나아가 은혜를 베풀며 우리를 구속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신다. 바로 이러한 선지서를 설교할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많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중 세 가지만 설명해보도록 하겠다.1. 미가는 평범하고 이름 없는 목회자에게 용기를 주는 책이다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미 1:1).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먼저는 ‘미가가 누구인가’, 다음으로는 ‘모레셋이 어디인가’이다. 일단 ‘미가’는 (성경에 열네 명의 미가가 등장하는 것처럼) 평범한 이름이었다. 당시에 이 이름으로 불린 선지자는 아마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또한 ‘모레셋’은 지방에 있는 한 작은 마을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미가 선지자는 성경에서 오직 두 차례만 언급되는데, 그조차도 명목적인 차원에서 거론될 뿐이다. 거기에 우리는 나중에야 등장하는 한 선지자를 통해 미가의 사역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렘 26:18-19). 결국 미가를 설교하는 일이란, 이름 없는 지역에서 성장했던 한 무명의 선지자가 남긴 설교문을 오늘날 다시 전달하는 행위나 다름없다.만일 당신이 미가가 설교했던 시절을 들여다본다면, 거기에서 훨씬 더 유명한 선지자 한 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사야이다. 이사야의 글은 매우 중요하게 인용되고 또 자주 회자되는 본문으로 채워져 있다(대표적으로 이사야 6장과 53장을 들 수 있겠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사야는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왕의 궁정에서 사역했던 선지자였다. 그런 배경을 갖춘 큰 선지자가 사역하고 있는 동안에, 미가라고 불리는 한 시골 사람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메시지 역시 대중적이지 않았다. 이처럼 미가는 동시대에 활약했던 다른 선지자보다 모든 측면에서 열등했지만, 하나님은 그 당시의 사회를 갱신하시는 데 그를 사용하셨다.여기에 목회자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be ourselves)는 교훈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출생하여 어떤 신분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만일 지금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우리는 일꾼의 요건을 다 갖춘 것이다. 미가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능력은 다름 아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에서 나타나는 능력이었다. 그 능력이 또한 우리의 설교를 통해서도 나타나야 하는 능력인 것이다.혹시 우리는 스스로를 이름도 없고 배경도 변변치 않은 목회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더 유명하고 잘 나가는 목회자들을 바라보며 그 대열에 끼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좀 더 큰 교회를 담임하면서 말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미가야말로 그런 우리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책이다.하나님은 세상에 잘 알려진 인물들만 사용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꼭 필요한 ‘무명의 사람’을 사용하실 때가 많다. 어떤 주석가는 미가가 무명했기 때문에 그만큼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했다고 설명한다. 미가는 그 당시에 두루 퍼진 문제였던 돈이나 인기에 말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낮은 신분이 그가 사역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부르신 모습 그대로, 그분의 주권에 따라 사역하게 하신 그 자리에서 충성되게 섬기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2. 미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와 그에 대한 성경의 답변을 제시하는 책이다처음 설교 사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미가와 같은 구약성경의 책들을 되도록 피해 갔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교만하게도, 그런 소선지서의 메시지는 우리 교회에 맞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20여 년 동안 설교를 계속하면서, 나는 모든 성경이 매우 뚜렷한 적실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딤후 3:16-17).특히 미가의 주제는 오늘날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를 대변한다. 예를 들어 정의라는 이슈를 미가는 중요하게 다룬다. 그는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미 2:1-2),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며(미 3:1-3), 빈곤한 자를 강탈하는 이들을 비난한다(미 6:9-11). 더 나아가 여자와 아이들에 대해서는 보호하는 메시지를, 무고한 사람을 착취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질책하는 메시지를 선포한다(미 2:8-9).그런 맥락에서 회개 역시 미가의 주된 관심사로 다뤄진다(미 3:8). 그는 사람들에게 ‘화’를 선언하며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선포한다. 그렇게 선포하는 메시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 우리에게 죄가 어떤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하나님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미가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듣게 된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그리고 이러한 회개에 하나님의 참된 용서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약속하는 데까지 메시지는 전개된다. 곧 미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죄악을 발로 밟으시며 우리에 대한 긍휼을 보이신다고 선언한다(미 7:18-19). 이처럼 그 선지자는 하나님이 누구와도 비견되지 않는 분이라는 희망찬 비전을 제시하면서 메시지를 마무리한다.물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는 아직 정의가 왜곡되고 죄악이 역사하는 일들이 있지만, 미가는 새로운 날이 도래하리라는 소망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미 4:1-2). 이 마지막 날은 정치적인 수단이나 군사적인 방편이 아니라 오직 메시아의 사역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미 5:4-5).이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미가를 설교하며 교회를 목양하게 되면, 온 성도는 세상의 불의 속에서도 성경이 제시하는 참된 소망을 보게 될 것이다.3. 미가는 사역의 열매를 맺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케 하는 책이다요나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는 미가를 읽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그 무명의 선지자가 어떤 영향력도 남기지 못했다고 판단하기가 쉽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미가가 활동한 시대로부터 약 100년 후에 등장한 또 다른 선지자를 통해 미가의 설교가 하나님께 훌륭하게 쓰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바로 서두에서 언급한 예레미야의 글에서, 우리는 미가의 설교 사역이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예레미야 26장을 보면, 사람들이 그 선지자를 죽이려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때 한 장로가 과거에 미가의 설교 사역이 이스라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언급함으로써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지 않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렘 26:18). 여기서 우리는 단지 예레미야가 죽지 않게 되었다는 내용만이 아니라, 미가의 시대에 전파된 설교가 히스기야 왕으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여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막게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중략]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렘 26:18-19). 결국 이 문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미가의 설교를 사용하여 그 당대에는 회개와 부흥을 촉발시키시고, 또 예레미야 시대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하셨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혹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면, 성경이 보여 주는 이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물론 우리가 전한 설교가 하나님께 사용되어 민족적인 부흥을 가져오거나 또는 우리가 죽은 후에 세월이 흘러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그리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과거에 역사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역사한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미가의 메시지를 사용하셨듯이, 지금도 그분은 그 메시지를 사용하신다. 그러니 이 책을 만일 충실하게 설교한다면, 그릇된 사역의 열매를 맺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3 Reasons You Should Preach Through Micah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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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기도
by Jeff A. Medders
2019-03-08
“하나님이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시는데 왜 기도해야 하지?” 아마도 은혜의 교리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런 질문이 불쑥 던져지면 말을 이어 가기가 힘들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냥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니까 기도한다”라는 식으로 대답하며 그 질문을 지나쳐도 될까? 물론 그러한 대답은 신학적으로 옳지만,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정말 그렇게 믿으며 기도하고 있는가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학적인 주장만큼이나 강력하게 그 주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최상위의 원인으로 전제하는) 칼빈주의 신앙을 단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대속의 범위보다도 기도에 관해 더 많은 설명을 남겼다. 왜 그랬을까? 케빈 밴후저(Kevin Vanhoozer)의 말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다면, 사실상 하나님이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참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이야기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고 마음을 다해 간청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대로 말이다.참된 칼빈주의자는 자신이 누구의 제자인지를 기억하며 기도한다어떤 신학 체계나 입장 또는 전통을 내세우기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충성과 신앙은 십자가 형틀에서 두 팔을 벌리고 매달리신 분, 수의에 쌓여 무덤에 장사되신 분,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 차가운 자리에 눕혀 계셔야 했던 그분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다. 바로 그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시며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으므로 우리는 모두 다 기도해야 한다(마 6:5-11).참된 칼빈주의자라면 다음과 같은 불신앙의 덫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은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역사의 궁극적인 결과와 수단과 방법을 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믿음을 따라 행동한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요청하고 간구하는 기도를 통하여 순종하는 과정도 바로 그분이 세우신 계획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 이때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사실에 따라 행하고 있느냐이다.우리가 참석하는 교회에서 열리는 기도 모임을 생각해 보길 바란다. 우리 각자는 그 기도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칼빈주의로 대변되는 우리의 신앙관은 기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기도가 없는 칼빈주의자는 그저 겉모습만 갖춘 극단적 칼빈주의자(hyper-Calvinists)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적이시므로 전도와 선교와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고 취급하는 극단적 칼빈주의를 신학적으로는 부정하면서 실제로는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그 입장을 실천적으로 논증하며 살아갈 수 있다. 참된 칼빈주의자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자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보좌에서 만사를 다스리시며 자녀들의 간구를 듣기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매순간 기도하는 자이다. 한 마디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자이다(살전 5:17).참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께 죄인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한다참된 칼빈주의자는 그가 속한 도시, 가정, 직장, 교회에서 더 나아가 미전도 종족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기도한다. 하나님이 복음 안에서 나타나는 그 저항할 수 없는 찬란한 영광으로 죄인들을 부르신다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기도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의 불을 지펴 타오르게 만든다.우리에게 믿음과 회개를 허락하시는 유일한 분은 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가린 수건이 제거되게 해 달라고(고후 3:18), 눈에 덮인 비늘이 벗겨지게 해 달라고(행 9:18), 또 죄인을 주님 자신께로 이끌어 달라고(요 6:44) 간청하는 것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는 구도자(죄인)의 선택으로 구원의 여부가 결정되는 실용적인 교회관을 반대하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교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죄인이 새롭게 변화되는 과정에서 그 은혜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보아야 한다.그와 같이 칼빈주의자는 하나님께로 사람들이 돌아오는 참된 부흥을 준비하며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고 그 응답이 있을 때까지 문을 두드리는 자이다.참된 칼빈주의자는 지역 교회와 세계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예수님의 피가 십자가에서 흘러내려 골고다의 흙을 적셨을 때, 그분을 위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은 구속을 받았다. 이 백성은 곧 교회로서 세계 전역에 있다. 예수님은 이 교회가 더욱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당신이 함께 대화하며 성찬을 나누는 교회의 구성원들은 예수님한테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분은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13:34). 교회는 이 땅에서 역기능적인 모습을 혹 드러낼지라도 예수님에게 매우 귀한 존재이기에 우리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교회의 연합과 확장과 사명을 위해 기도하셨다. 만일 우리가 구속 사역이 각 개인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 각자가 속한 교회에 대해서도 특별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장로와 집사와 리더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란다. 교회가 건강하고 그 신실함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라.그리고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박해 중에 있는 교회 또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교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중국 정부에 의해 추방당할 위기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그들을 우리와 하나로 묶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주일에 참석하여 눈으로 보게 되는 교회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 특별히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모든 교회, 이를테면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즐거워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칼빈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신의 교회로 삼으셨기 때문이다.참된 칼빈주의자는 거룩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다전적 타락의 교리는 우리가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의존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의 삶에서 맺히는 모든 열매는 그분과의 연합에서 비롯되는 결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우리의 성장은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성장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참된 칼빈주의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에게 자신의 존재가 의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의로우신 그분의 의를 매일 의지한다. 예수님은 타락한 존재로 태어나지 않은 유일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타락을 십자가에서 해결하셨기에, 우리는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될 수 있으며,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특정한 죄와 싸우고 있는 중이라면,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라. 다른 사람에 대한 악한 감정을 죽이고 싶은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바라보라. 단순히 ‘예수님이 나를 도우실 수 있다’라는 사실만을 상기시키지 말고, 아는 대로 행하라. 침대 옆에 무릎을 꿇거나, 부복하여 엎드리거나, 아니면 노트에 기록하면서라도 기도하라. ‘예수님, 저를 도와주세요. 주님이 없으면 저는 거룩하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제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줄을 압니다. 그러니 제가 구원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장은 오직 예수님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칼빈주의는 우리의 기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기도 생활을 되살릴 뿐 아니라 지속시킨다. 칼빈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면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된다.” 참된 칼빈주의는 우리가 죄인이지만 동시에 성도이므로,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크게 외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외쳐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바로 그 아버지가 만사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Real Calvinists Pray번역: 장성우
복음
변증
하나님의주권
우리의기도
칼빈주의자
제자
구원
지역교회
세계교회
거룩
왜 교리 학습이 최고의 명약인가?
by Tim Keller
2019-03-05
사도 바울은 그의 젊은 동역자였던 디모데에게 우리가 잘 아는 편지인 디모데전후서를 남겼다. 디모데는 가정교회가 생명력을 가지고 제 역할을 하도록 조직하는 사명을 받았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디모데를 돕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지만, 만약의 사태를 위해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4–15).이러한 지침은 오늘날 우리 자신과 모든 교회들에 적용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첫 번째로 가르치는 내용 중 한 가지는 “어떤 사람들에게 거짓 교리와 더불어 복음에 부합하지 않는, 즉 건강한 교리에 반대되는 어떠한 것이든지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딤전 1:3, 11)이었다.우리는 바로 그 '교리'라는 단어, 더 심하게는 '교의'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용어로 이해되는 시대에 살아간다. 하지만 교리에 기초한 믿음 없이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기 원치 않으며, 종교적인 자들까지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몇몇 견해에 대해서는 끔찍한 이단으로 여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잘 반영하듯이 “우리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오직 예수만 전파합니다”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음,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시며 그분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는 순간, 그들은 오직 교리적인 설명으로만 답변하게 된다.그러나 바울은 바른 교리의 필요성만이 아니라, 교리를 통한 영적 “건강”도 강조한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병든 상태가 아닌 “건강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잘못된 교리가 우리들의 영적 건강을 잠식해 버린다는 바울의 표현 방식이다. 다시 말해 만일 우리의 영적 활력과 열매가 부족하거나, 우리 마음속에 충분한 용기나 기쁨이 없거나, 또는 내적 상태가 사랑이나 소망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마도 성경 교리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얕고 피상적이거나 아니면 왜곡되고 잘못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교리의 바른 이해와 실천적 삶이 문제는 수년 전 내가 웨렌 & 룻 마이어스(Warren and Myyers)의 책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며 몇 주간 성경 공부를 인도할 당시에 강하게 다가왔다. 특별히 몇 가지 적용해 볼 수 있는 질문들이 있었다.1.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고 신뢰하지 않거나 혹은 그 속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 나를 방해하게 되는 거짓된 생각들이나 불안한 감정들은 무엇인가?2. 비록 나의 의식적인 사고가 그 속성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겉으로 드러난 나의 실천적 삶이 이를 입증하고 있는가?이러한 질문을 놓고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그분의 지혜와 주권, 그리고 사랑과 자비에 대해 시험해 보라. 이에 대해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면, 우리 대부분의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들의 상당수가 교리적인 것들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해할지라도 그것을 실제의 삶과 연결시키지 못할 때, 결국 우리 안의 영적 “건강”은 창조되지 못한다.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한 오늘날의 전략과 바울이 권면하는 내면의 평화를 얻는 방법 사이의 차이점은 언제나 인상 깊게 다가온다. 현대의 접근 방식은 휴가를 내서, 일과 휴가 사이의 더 나은 균형을 이루고, 부정적인 생각과 죄책감을 차단하며, 쉼의 기술을 배워 두기를 권한다. 오늘날 책들은 스트레스 받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고,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결단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여,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고 [중략] 이것들을 생각하라 [중략]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8–9). 실제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우리는 그분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분은 모든 것을 바르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이를 이해하고 믿는다면, 그 어떠한 것도 오랫동안 여러분들을 좌절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낙심하게 된다면, 여러분에게 건강과 평화를 가져올 때까지 기독교 교리를 묵상하며 붙드시기를 바랍니다.”간단히 말해서, 세상은 우리가 평화를 얻기 위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가 평화를 얻기 위해선, 더 깊이 있게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안에서 배우고, 이해하며, 기뻐하고 쉼을 누리면서 말이다. 따라서 성경의 교리를 배우라. 당신의 영적인 건강을 위하여.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y Studying Doctrine is the Best Medicine번역: 정진호
신학
교리
학습
명약
바울
디모데
영적인건강
바른교리
디모데후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를 위로하는 세 가지 방식
by Owen Strachan
2019-02-26
심판하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회의하는 현대 문명이 기독교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에 대한 대답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럼,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신뢰하지 못할 것 같다. 성경은 죄악으로 저주받은 세상이 하나님께 받아야 할 거룩한 심판 앞에 직면했을 뿐 아니라, 그 심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가르친다.바로 여기,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 성경이 제시하는 세 가지 관점이 신자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이다.1.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분의 성품을 온전히 신뢰하도록 만든다심판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심판은 그리스도의 몫이다. 왜냐하면 복수는 주님에게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롬 12:19). 우리는 약하고 타락했으며 또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 그분은 무한하시다. 무력하지 않고 모든 일에 능하시다. 또한 그분의 거룩한 본성으로부터 공의가 흘러넘친다. 우리는 바로 이 진리를 의지함으로 큰 위안을 받는다. 심판을 담당하고 세상을 공의롭게 만드는 짐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다. 이 얼마나 안도감을 주고 마음을 가볍게 하는 진리인가.2.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의 기준이 지켜진다는 의미이다 공의는 찾기 힘들다. 주변 어디를 돌아봐도 보이는 것은 고난과 죽음이다. 저주받은 세상이기에, 그냥 육신의 눈으로 둘러보면 이 세상은 전 우주적으로 우연 덩어리이자 인간이 궁극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도록 정해진 거대한 로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앞에 놓인 실재는 공의로우신 아버지, 용서하시는 구세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의 공의가 도래하고 있으며,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고, 거의 다 임박했다는 사실이다.신학을 거부하는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신성한 복수를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렸다. ‘신성한 복수’(divine vengeance)라는 교리는 그저 부드럽고 심신의 치유만 추구하며 이제는 최고의 인생을 살자고 외치는 변형된 기독교에는 도통 적합하지 않다. 그런 기독교 안에서는 ‘축복’은 넘칠지라도 공의는 찾기 힘들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저 지위 상승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달콤한 컨설턴트로 전락했다. 평등과 은혜, 더 나은 사회 조건, 급진적인 행위는 약속하지만, 악을 복수하는 왕은 사라졌다. 거짓된 기독교 정신에서 ‘신성한 복수‘라는 교리는 거의 찾기 힘들다.이처럼 오늘날 그리스도는 저항 운동에 은사를 가진 리더 정도로 내려앉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그 정도의 변질된 생각을 갖고도 사람들은 여전히 신성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순한 애정의 표시도 아니고, 일종의 행동 개선 프로그램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십자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유지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롬 5:12-21).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미래에 있을 심판을 취소시키지 않는다. 속죄는 오히려 하나님이 회개하지 않는 자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장하는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속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할 완벽한 대안이 없는 인간에게 장차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결코 악에 관해 너그럽지 않으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바는 언젠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잠시 지연되었던 심판이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3. 하나님의 심판은 악을 멸망시킨다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악의 종말을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낙태 산업과 인종차별의 종식을 위해 외쳐야 한다. 또한 살인과 잔혹한 학대, 대량 학살과 성적 잔인함 등 셀 수 없이 많은 악의 궁극적 종말을 간절히 염원해야 할 뿐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그에 반대해야 한다.이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자신의 신부를 그 보혈로 씻으셨다(엡 5:25; 벧전 1:19). 또한 무덤에서 나오셨을 때, 그분은 죽음을 이기고 자기 백성을 위한 승리를 쟁취하셨다. 죽음이 통치하던 세상의 끝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통해 이미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승리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강한 자(사탄)는 묶였고, 그의 집도 약탈을 당했지만, 그는 아직까지 불못에 던져지지 않았다(마 12:29; 막 3:27). 그러나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바로 그날에, 사탄은 그의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땅에서 사악함을 몰아내는 분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죄는 선(goodness)을 지향하는 우주의 모호한 궤도 속에서 자연적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죄의 종말은 예수님이 하늘을 찢고 온 땅을 타작마당으로 만들 때가 되어야 찾아온다(계 20:11-21). 교회는 이 진리를 깨달아 불붙는 소망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이 진리를 복음의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심판이라는 이 불편한 기독교의 교리가 때로는 가장 깊이 잠든 영혼을 깨울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단 한 명의 죄인도 하나님의 진노를 맛보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흥 시대의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이 소돔에서 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며, 또 간곡히 호소해야 한다.생각할 점들기독교는 앞을 내다보는 신앙이다. 존 번연(John Bunyan)이 상기시키는 천상의 도시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 역사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이 신앙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영원을 지향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하나님이 행하실 공의의 약속은 영광스럽다.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여기서 더 나아가 공의의 심판이 곧 영화로움의 완성이다(계 21:21-27). 그날에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죄를 속죄하고, 악을 멸망시키며, 뱀의 머리를 부숨으로써 오랜 예언을 성취하신 어린 양을 경배할 것이다.회의적인 문명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우리는 "예"라고 대답할 뿐 아니라, 죄를 완전하게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응답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집으로 부르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그분은 자비로우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God’s Justice Comforts Us번역: 무제
심판
위로
신학
교리
존번연
공의
조나단에드워즈
진노
예수님이 사람이시다는 사실에 관하여
by David Mathis
2019-02-22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사람이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 중에 어느 쪽의 내용을 붙들고 더 씨름하게 되는가?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자라신 예수님이 진정으로 사람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그분을 눈으로 보며 목소리도 듣고 몸을 만져보면서 시간을 함께 보낸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다(요일 1:1). 어느 누구도 공생애 기간 동안 그분이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일은 없었다.그런데 승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의문은 생각치 못한 방향에서 일어나게 된다. 우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며 그분이 사람이심을 알고 지내던 제자들은 이제 그분을 하나님으로서 높이고 경배하기 시작한다(마 28:17). 그런데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제자들과는 다른 조건에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즉 그들은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였기에, 그분이 또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교회가 첫 번째로 맞닥뜨린 이단은 예수님이 실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가르침을 전했다(요일 4:2; 요이 7).이처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진자 운동은 교회사의 처음 몇 세기부터 시작되어 지난 2천 년 동안 진행되었다. 기독교를 대적하는 자들은 주로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했고, 그분을 예배하는 자들은 그 인성의 범위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결국 신인(the God-man), 즉 신성과 인성을 완전하고도 충만하게 지니신 존재에 대한 의문은 오늘 이 시대까지 전달되어 심지어는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도 퍼지게 되었다.사람으로 완전히 낮아지심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사실만이 명백한 역사이지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가르침은 비상식적인 주장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신학적인 의미를 배제하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여 ‘과연 어떤 의미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그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질문하는 것이다. 한편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도 그들만의 과제를 안고 씨름한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범위를 과연 어디까지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려움을 겪는다.또한 현대의 복음주의자들도 예수님이 진정으로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한 경이로움을 잃어 가고 있다. 그분의 신성을 변호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싸우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되셨는지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이 글에서는 성육신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내용보다는 예수님이 완전한 의미에서 사람이라는 사실이 함축하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고 도전도 되는 내용을 다루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의 육체만이 아니라, 그 지성과 정서와 의지까지 모두 다 취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예수님이 지니신 사람의 육체신약성경은 일단 예수님이 사람의 육체를 지니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선언하는 요한복음 1장 14절이 그 사실을 설명한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분의 인성을 고백하는 일은 정통 신앙을 검증하는 기준이었다(요일 4:2; 요이 7).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으로 나셔서 성장하셨다(눅 2:7, 40, 52). 그래서 피로(요 4:6)와 갈증(요 19:28)과 허기(마 4:2)를 느끼셨다. 또한 육체의 연약함도 보이셨다(마 4:11; 눅 23:26). 무엇보다도 죽음까지 경험하셨다(눅 23:46). 그리고 심지어는 부활 후에도 사람의 몸을 지닌 상태로 나타나셨다(눅 24:39; 요 20:20, 27).예수님이 지니신 사람의 정서복음서 전체에 걸쳐 예수님은 인간의 정서도 분명히 드러내셨다. 이 사실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한다. 먼저 마태복음 8장 10절에서는 예수님이 백부장의 말을 들으셨을 때 매우 놀라워하셨다.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38절에서는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도 말씀하셨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 11장 33-35절에서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까지 흘리셨다. 이와 비슷하게 요한복음 12장 27절에서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하셨으며, 요한복음 13장 21절에서는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기도 하셨다. 또 히브리서 저자는 그분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도 기록했다(히 5:7).이러한 모든 내용을 기억하기 쉽게 잘 요약한 칼빈의 진술은 이렇다. “그리스도는 육체와 함께 우리의 감정까지 입으셨다.”예수님이 지니신 사람의 지성예수님이 사람의 지성까지 지니셨다는 문제는 생각하기가 좀 더 까다롭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지성만을 소유했기에, 누군가가 하나님의 지성과 사람의 지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상태가 어떠할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아래의 두 성경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이 난해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이 중에서 두 번째 구절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지식을 절대적인 수준에서만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난해하게 느낄 수 있는 내용을 전한다. 그런데 그 내용을 직접 이야기하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신성에만 우리가 집중한다면, 이 구절은 받아들이기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를 깊이 숙고해 본다면, 바로 그런 말씀이야말로 예수님 자신의 인성을 고백하는 영광스러운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람이시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을 경우, 그저 이렇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분이 정말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면, 어떻게 자신이 언제 돌아오는지를 모르실 수 있는가?’이런 물음에 대하여 교회 역사에서 제시된 주의 깊고도 성숙한 답변은, 예수님은 완전히 하나님이시고 또 완전히 사람이시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한 인격 안에 무한한 하나님의 지성과 유한한 사람의 지성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유한하고 전지하지도 않은 사람의 지성을 지니셨기에, 마가복음 13장 32절에서와 같이 어떤 내용을 모른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무한한 하나님의 지성도 지니셨기에, 요한복음 21장 17절에서 베드로가 한 고백처럼 모든 것을 안다고도 말씀하실 수 있다.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성경은 명백하게도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인간으로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독특한 두 본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신 존재만이 가진 영광을 반영하는 진리이다.예수님이 지니신 사람의 의지이처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시라는 사실은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문제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아마도 이 사실이 가져다주는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그분 안에 하나님의 의지와 사람의 의지가 공존한다는 내용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두 군데 성경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예수님은 그 아버지가 지니신 의지, 다시 말해 삼위일체 안에 있는 무한한 하나님의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면서 또한 사람으로서 유한한 의지를 지니셨다. 그런데 이 사람으로서 지니신 의지가 본래 하나님으로서 소유하신 의지에 완벽하게 복종하여 조화를 이룬다.이런 사실은 우리의 경험과 이해를 초월하고 또 앞으로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알게 될 그 어떤 지식도 뛰어넘는 큰 미스터리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이 신비는 혼란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 경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유일무이한 인격을 소유하신 분이다. 완전히 하나님이시며 완전히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이처럼 절대적으로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면, 과연 우리가 영원히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며 예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오직 한 분의 중보자밖에 없다. 바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딤전 2:5).진정한 사람이 베풀 수 있는 진정한 구원예수님은 죄를 제외하고, 사람의 육체, 정서, 지성, 의지까지 다 지니신 분으로서 모든 측면에서 우리와 동일한 존재이시다(히 2:17; 4:15). 바로 그 신성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가 가진 인성의 일부만 취하지 않으시고 그 전부를 가지고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자리까지 나아가시고 마침내는 하늘로 오르셔서 새 창조를 이루고 계시다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다.그분은 우리의 육체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육체를 가지셨다. 또 우리의 지성을 새롭게 하기 위해 사람의 지성을 지니셨다. 더 나아가 사람의 정서를 취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정서는 치유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의지까지 소유하지 않으셨다면, 깨지고 흔들리는 우리의 의지는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가 한 말처럼, “그분이 떠맡지 않고서 치유될 수 있는 문제는 없다.”예수님은 완전한 차원에서 사람이 되셨기에,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다. 따라서 오직 그분만이 사람의 진정한 구원자이시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Jesus Is Fully Human번역: 장성우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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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
복음주의자
칼빈
구원자
진정한구원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와 줄리어스 시저에 관한 사본 비교
by Darrell Bock
2019-02-19
복음서의 사본을 다른 고전 문헌들의 사본과 비교한다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과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의 경우처럼 신빙성이 있을까?흔히 사람들은 이러한 물음을 비판적으로 제기하면서, 시저의 생애에 대한 증거가 예수님의 경우보다 그 진정성을 더 명확히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줄리어스 시저에 관한 사본고대사를 추적하며 재구성하는 작업은 역사의 이면에 자리한 각종 자료와 사본이 담고 있는 여러 가지 내용과 주장을 검토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줄리어스 시저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핵심 사료로는 그 자신이 이야기한 갈리아 전쟁(Gallic Wars)에 대한 기사, 키케로(Cicero)의 연설문, 카틸리나 전쟁(Catiline’s War)에 관한 살루스트(Sallust)의 언급, ‘열두 명의 카이사르’(Twelve Caesars)에서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줄리어스를 다룬 섹션, 그리고 ‘영웅전’(Plutarch’s Lives)에서 플루타르크(Plutarch)가 시저를 소개하는 내용 등을 꼽을 수 있다.어떤 면에서 보면, 시저의 자서전적 기사는 예수님에 관한 기사보다 우리에게 생각할 만한 거리를 더 많이 제공한다. 그 내용은 시저 자신이 참여한 사건들에 관한 직접적인 증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살루스트와 키케로는 시저와 동시대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시저가 밝히는 사건들을 검증할 때 살펴볼 수 있는 외부 자료들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저의 인생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면, 단연 2세기 초반에 기록된 수에토니우스와 플루타르크의 작품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모두 시저가 죽고 100년도 더 지난 시점에 기록된 문헌들이다.물론 이러한 자료들 이면에는 해당 사본들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의 관심도 집중되어야 한다. 대략 12개의 사본들이 시저의 이야기를 검증하는 데 필수 자료로 사용된다. 가장 오래된 사본은 9세기의 것인데, 이는 실제 사건으로부터 900년 정도 떨어진 시점에 기록되었다. 필수 사본들의 전체 연대는 12세기까지 이른다. 이와 비교해서 키케로의 연설문은 더 오래된 사본을 지니고 있다. 약 15개의 사본들이 5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그 기록 연대를 나타낸다. 살루스트의 이야기는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기록된 20여 개의 사본에 기초하고 있다. 플루타르크의 ‘영웅전’ 또한 10세기에서 11세기 어간에 기록된 6개의 주요 사본들을 가진다. 수에토니우스의 사본은 그 기원을 대략 820년 정도로 계산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고전학자들은 실제 사건과 사본 기록 사이의 연대가 이처럼 넓게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료들을 기초로 해서 시저에 관한 많은 분량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낸다.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본그렇다면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 경우에는 4복음서에 의존하여 검증 작업을 하게 된다. 그 기록 연대는 수에토니우스 및 플루타르크의 시대와 맞물린다. 여기서 공관복음이 60년대에 기록되고 요한복음은 9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설명하는 보수적인 관점을 취하든 혹은 공관복음이 8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대안적인 관점을 취하든 간에, 4복음서는 실제 사건들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60년도 채 안 된 시점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과 실제 사건들을 목격한 증인들이 기록 시점에도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수에토니우스나 플루타르크의 기록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각 복음서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논란 중에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학자들은 사도 마태와 요한이 각각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내용을 직접 알고 기록했다고 설명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살루스트나 키케로의 이야기와 같이 작품의 주인공과 저자가 동시대에 살았던 경우에 해당한다. 다른 두 복음서의 경우도 전통적으로 저자들이 사도들과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기록했으리라고 이해되어 왔다. 즉 마가는 베드로와의 관계에서, 누가는 바울과의 관계에서 그 내용을 확인하며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2세기 초에 활동했던 파피아스(Papias)의 기록에 근거하여 확립된 전통이다. 혹 누군가가 이처럼 보수적인 관점에서 복음서를 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복음서의 저자는 (그 증언의 성격을 고려할 때) 예수님과 동시대에 속한 인물들 밖에서는 찾기 어렵다. 또한 공동체의 구전 전승을 포함하는 복음서의 성격과 역할을 전제하는 입장에서 더 나아가 단순히 세속사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예수님에 관한 전통을 역사적으로 존중해야 할 이유들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구전 전통과 공관복음에 관한 켄 베일리(Ken Bailey)의 연구(“Informal Controlled Oral Tradition and the Synoptic Gospels”), 제임스 던(James Dunn)의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Jesus Remembered), 또 내가 로버트 웹(Robert Webb)과 함께 편찬한 ‘역사적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Key Events in the Life of the Historical Jesus), 그리고 로버트 맥키버(Robert McIver)의 ‘기억과 예수 및 공관복음’(Memory, Jesus, and the Synoptic Gospels)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렇다면 복음서의 사본들은 어떠할까? 신약성경은 다른 고전 문헌들의 경우보다 그 사본의 신뢰도가 훨씬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사본은 그 연대가 원본이 기록된 지 불과 몇 십 년 안에 위치한다. 즉 파편으로 남아 있는 파피루스 52번 사본인데, 그 기록 연대는 125년 경으로 추정된다. 이 사본은 현재 요한복음 18장의 일부 내용만 보존하고 있지만, 4세기까지 기록된 다른 사본 전체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포함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사본은 인쇄술이 개발되기까지 기록되었는데, 현존하는 헬라어 사본은 총 5,800여 개가 넘는다. 이에 복음서를 포함한 전체 신약성경의 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확실하게 보존되어 있다. 혹 그 내용이 불분명한 부분은 ‘또는’이라는 표식과 함께 가장자리에 이문(異文)을 실어 놓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런 차이점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유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얼마나 많은 구절들이 그 가르침을 설명하는가 하는 문제 정도이다.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 시저에 대해 각 사본들이 전달하는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복음서가 고전 문헌들과 비교하여 우월한 역사성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다른 고전이나 시저 연구에 해당 사본들이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다면, 당연히 예수님에 대한 연구에도 복음서의 사본들이 유효하게 사용되어야 한다.최고의 자료를 신뢰하기그런데 이처럼 당연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바로 예수님에 대해 제시하는 복음서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비상한 이적들을 행하셨다고 증언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시저와 같이 역사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것이다.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에 관해서는 (복음서 외에) 다른 사료들도 비슷한 증언을 할 정도로 그분은 이미 대중적으로 큰 명성을 지니셨다. 따라서 그분의 사역 자체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분을 대적한 사람들에 관계된 자료들도 그 사역에 대해서는 동일한 증언을 한다. 가령 유대 문헌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고하며 그들이 예수님의 기적에 관해 사악한 힘에 그 원천이 있다고 믿었음을 전해 준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보고를 공관복음에서 확인하게 된다(마 12:24; 막 3:22; 눅 11:15). 2세기에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이 트리포(Trypho)와 논쟁한 내용을 살펴보면, 트리포가 예수님을 마법사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비슷한 내용이 탈무드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서 예수님은 마술사로 불린다. 이런 기록은 그 누구도 예수님의 사역 기사가 꾸며졌다거나 전설적인 내용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비판할 수 없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유행하는 비기독적인 주장도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며 그분에 대해 대중적으로 논의했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논리가 아니라 실제 역사로부터 동떨어진 입장에서 고안해 낸 현대의 산물이다.그렇다면 이런 사실들을 통해 우리가 인정해야 할 바는 무엇일까? 바로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엄연한 역사성을 지닌 고대사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줄리어스 시저에 관한 기사를 역사적 자료로 인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사의 역사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의 증언을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 역사 자체가 일어난 적이 없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만일 시저에 관한 자료들이 고전학자들에게 역사적인 연구 대상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면, 예수님에 관한 핵심적인 증언들은 실제 사건에 가장 근접한 조건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더욱 진지하게 평가되어야만 한다.다시 말해, 우리가 줄리어스 시저에 관한 최고의 자료를 신뢰한다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최고의 자료 곧 복음서의 증언을 신뢰해야만 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ources for Caesar and Jesus Compared: Examining the Manuscript Evidence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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