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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설교에서 배운 열 가지 교훈
by Sam Storms
2018-12-27
나는 지난 6월, 서른 여덟 번의 계시록 설교 시리즈를 마쳤다. 지금 그 순간들을 돌이켜 보면 열 가지 진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이 글은 숫자적 상징, 666, 짐승, 음녀, 천년왕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힌다.1. 성도의 삶은 박해와 동떨어질 수 없다현대를 사는 크리스천은 불신과 우상숭배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강한 핍박을 받을 것이다. 이는 모든 크리스천에게 예외 없는 일이다.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을 실망시켜서 받는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겸손과 용기로 이 고난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완전하고도 아름다운 모든 일들을 이해하게 된다. 2.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다하나님은 모든 인간사(affairs)에 대해서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신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권세 밖에 있을 수 없다. 오늘날 전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연이은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종려주일에 ISIS의 폭탄 테러로 수십 명의 크리스천이 죽었다. 피비린내 나는 내란과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끊이지 않는다. 세상은 온통 극도의 불안과 혼란, 그리고 통제 불능의 상태로 보인다. 하지만 계시록은 하나님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을 완전히 통제하고 계심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3.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다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권세자보다 높고 강한 분이다. 하지만 죄로 가득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나 혹은 힘을 가진 누군가를 신으로 받들면서 예수 그리스보다 더 높은 존재로 추앙하고는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왕들 위에 군림하는 유일한 왕이시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들의 주인이시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주권자들을 자신의 완전한 통치권으로 다스리신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중남미뿐만 아니라 북한, 중국, 러시아에서 발생하는 온갖 일에도 예수님은 그 주권을 행사하신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을 다스리는 분’으로서 모든 권력 있는 자와 온 나라의 대통령들을 통치하신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왕과 대통령이 하는 일을 알고 있고, 종종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정리하며 통제하신다. 때로는 그들이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또 때로는 그들의 계획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일의 방향을 바꾸신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예수님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도록 이끌어 가신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 일을 행하시는지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은 분명히 그렇게 하신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노릇 하시리니”따라서 성도는 신문을 문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인터넷 기사의 표면적인 의미만 파악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통해 그 모든 기사와 사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통치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상황을 통찰력 있게 바라보며 예수님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4.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완성에 이를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목적대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이끄시고 마침내 완성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는다. 우리 눈에는 현재의 상황이 나빠 보일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여러 모양으로 핍박을 받을 수 있다. 당장은 세상과 악한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고, 악인의 길이 형통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한다. 그 어떠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여시고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방해받지 않는다.5. 교회는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교회에 대한 전 세계적인 핍박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심지어 교회가 완전히 파괴된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다가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교회의 외침은 들리지 않고, 심지어 교회의 존재 자체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외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이 보내신 추수꾼들이 영혼의 추수를 진행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들림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가? 계시록 11장을 천천히 읽어 보기를 바란다.6. 사탄은 두려운 존재이지만 이미 패배한 적이다사탄은 하나님을 증오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와 교회도 증오한다. 사탄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성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려 한다. 또 성도로 하여금 믿음을 포기하도록 한다. 그러나 사탄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우리의 고백으로 사탄을 이기고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을 때, 우리는 온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보장받게 된다(계 12:11).7.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다재림의 때가 다가올수록 죄와 우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더 크고 넓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때 성도는 그 진노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이르기까지 안전하고 확실하게 성도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종들을 성령으로 인봉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과 역경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을 수 없다.8.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이 보이실 크고 놀라운 일들을 다 헤아릴 수 없다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에 예비하신 형언할 수 없는 복에 대하여 직접 보고 들은 이는 없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9.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날 것이다핍박으로 가득한 세상을 사는 성도는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마음을 갖기 쉽다. 이를 위해 계시록이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말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며, 그때 하나님은 이 땅에 그분의 공의를 시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날 진리는 밝히 드러나고, 악은 합당한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 10.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계시록에는 상징, 이스라엘 문제, 휴거, 그리고 환란과 관련된 논제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인격을 가진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모든 성도에게 가장 기쁘고 복된 소망이다.그러므로 다음을 기억하라. 어떤 이들은 계시록이 어렵고 이해하기 모호한 부분이 많다고 말한다. 그들은 계시록을 읽거나 묵상하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는 정반대로 말씀하신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계 22:7).계시록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믿고 순종하기 힘든 책이 아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모든 자에게는 약속된 축복이 임할 것이다. 이를 놓치지 말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Lessons I Learned from Preaching Revelation번역: 김재덕
신학
신약성경
계시록
설교
교훈
성도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교회
하나님의공의
복음이 주는 도전과 위로
by Trevin Wax
2018-12-26
나는 상담을 하며 두 부류의 사람을 만난다. 한 부류의 사람은 자기가 참 성도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복음이 주는 도전을 받아야 한다. 다른 부류의 사람은 자기가 참 성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성도이다. 그들은 복음이 주는 위로를 받아야 한다.어떤 형제의 이야기샘(Sam)은 최근 사업 수익이 줄어들어 하나님한테 화가 난 20대 청년이다. 그는 하나님과 교회에 화가 난 채로 내 사무실에 저벅저벅 들어왔다.내가 그를 진단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 바로 그가 여자친구와 동거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교회에도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일이었다.요약하자면, 그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서 진심 어린 회개의 열매를 볼 수 없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가 기독교 공동체에 헌신하고 있지 않은 모습에 대해 거리낌이 없는 마음과 잘못된 우선 순위, 그리고 성적 부도덕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나는 그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질문을 건넸다. 그는 10년 전 참석한 한 청소년 집회에서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는 그날 손을 들었고, 카드를 작성했으며, ‘천국 입장권’(ticket to heaven)을 얻었다. 그는 이 경험으로 인해 자신이 확실히 구원받았다고 우겼다.이런 형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복음이다.그는 자기 인생 가운데 열매가 없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삶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교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진정한 구원이 선행의 열매를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사실을 들어야만 한다. 그의 인생 가운데 열매가 없다는 사실은 그가 참된 성도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나는 그가 믿음 안에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자기 생애를 돌아보도록 권면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돌아보도록 권면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하도록 권면했다. 그의 인생 가운데 열매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새사람으로 바꾸어 가신다는 복음 진리로 그를 도전했다. 그는 자기 죄에 대해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복음을 제대로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어떤 자매의 이야기제니(Jenny)는 내가 사무실에서 아내와 함께 만나는 20대 청년이다. 그녀는 다정하며 태생적으로 내성적인 사람이다. 그녀는 날마다 짓는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님을 실망시킨 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죄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은 그녀로 하여금 구원을 의심하게 했다.나는 그녀를 진단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서, 그녀가 교회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했다. 또한 자기 죄성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구원을 증명할 충분한 열매가 없다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 곳곳에는 회개와 믿음의 열매가 있었다.이런 자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복음이다. 앞서 언급한 형제나 지금 소개하고 있는 자매, 이 두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이지만, 나는 형제에게 접근한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매의 문제를 다루었다. 형제에게는 자기 삶을 살펴보고 그의 삶 가운데 맺히는 열매를 통해 자신이 병든 나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전했다. 그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해야 했다. 그가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복음에 직면하도록 도왔던 것이다.하지만 자매에게는 그런 접근을 결코 취하지 않았다. “당신의 삶을 보세요! 당신은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선행을 하고 있고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매에게 삶을 돌아 보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정죄할 것이다. “저는 제 구원을 증명할 만큼 충분히 잘 살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대신에 나는 우리 죄성을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덮어 감춘다는 진리를 돌아보도록 도와주었다.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구원은 당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크리스천이 된 이후에 행한 일에도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의로움이십니다.” 그녀는 자기 구원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위로가 필요했다. 따라서 나는 그녀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했다.도전과 위로우리 모두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어떤 사람은 삶 가운데 진정한 열매를 맺지 않았으면서도 한 번 내린 결정에 의해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복음으로 도전을 받아야 마땅하다.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또 어떤 사람은 죄성 때문에 자신이 크리스천이 아니라며 의심한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주는 위로가 필요하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한다.’복음은 불안한 자에게는 ‘위로’를 주고, 편안한 자에게는 ‘도전’을 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spel Confrontation and Gospel Comfort역자: 하늘샘
복음
변증
도전
위로
구원
영적상태
열매
거룩하심
크리스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오해들
by 박태양
2018-12-25
성탄절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는 날로서 부활절과 더불어 기독교 최대의 축일이다. 안타깝게도 성탄절을 기뻐하는 모습이 한 세대 전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약해졌다. 그렇지만 성탄 시즌이 되면 여전히 아기 예수님과 목자들 그리고 동박박사의 그림을 곳곳에서 볼 수 있고, 또한 미디어를 통하여 즐거운 캐럴과 경건한 찬송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사실 사람들이 성탄에 대해 상식으로 여기는 어떠한 것들은 오래된 오해이다. 그 중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오해 1. 예수님이 탄생한 해는 기원전 0년이다?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기원전(Before Christ, BC)과 기원후(Anno Domini, AD)의 기준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인 것은 맞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기원전 5년경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시점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이는 중세 수도사였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노스(Dionysius Exiguus)가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잘못 계산했는데, 이를 온 세계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사용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경과 일반 역사의 다양한 자료를 통해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비교적 정확하게 유추할 수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아기 예수님은 악명 높은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 죽기 얼마 전에 탄생했다. 헤롯 대왕이 죽은 때는 기원전 4년 4월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적어도 그 이전(기원전 5-8년쯤)에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이 활동을 시작할 때가 로마의 디베료 황제(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티베리우스) 재위 15년이었다. 그 시기는 기원후 26년이고,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사역 시작 시점이 30세 정도로 비슷했으므로, 결국 둘 다 태어난 시기가 기원전 5년 전후가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 헤롯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지고(정확히 말하면, 증축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헤롯 성전 확장 공사는 기원전 20년쯤 시작됐다. 즉, 예수님이 31세 정도일 때가 기원후 26년이니까 예수님이 태어난 때는 기원전 5년쯤 되는 셈이다. 이것 말고도 여러 자료를 통해서 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기원전 5-8년 정도로 확신하고 있다.(참고로, 기원전 0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원전 1년 다음은 기원후 1년이다.) 오해 2. 예수님 탄생일이 12월 25일이다? 최소한 12월이나 겨울이다?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겨울철에 목자들이 밖에서 노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키게 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근거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것이다. 교부였던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예수님이 3월 25일에 수태되고, 12월 25일에 탄생했다”라고 자신의 책에 기록했다. 사실 3월 25일은 당시 유럽 교회에서 그리스도 수난일로 지키던 날인데, 이날을 동시에 그리스도 수태일이라고 임의로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 12월 25일이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되는데 별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기원후 350년에는 로마교회의 대주교였던 율리우스 1세(JuliusⅠ)가 성탄절을 12월 25일로 공식화했고, 이후에 지금까지 그렇게 지켜지고 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12월 25일이 고대 로마의 태양신을 섬기던 동짓날을 계승한 것이라는 주장을 들어봤을 것이다. 교회가 의도적으로 이방 신의 축제일과 같은 날로 성탄절을 정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태양신을 섬기기 위함이 아니라 태양신 숭배를 없애기 위한 조치로 보아야 한다. 결국 그 태양신을 섬기는 축제는 얼마되지 않아 완전히 사라지게 됐으니 말이다. 오해 3. 세계 모든 국가들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킨다?그렇지 않다. 세계 3대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 개신교, 로마 가톨릭, 정교회 중에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정교회는 1월 6일 또는 7일을 성탄절로 지킨다. 이렇게 구분이 된 것은 표준 달력이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교회에 속한 러시아, 그리스, 이집트, 루마니아 등은 원래의 율리우스력으로 12월 25일에 해당하는 (그레고리력) 1월 7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이다. 몰도바, 레바논, 벨라루스 등은 두 개의 날짜를 모두 성탄절로 지킨다.오해 4. 동방박사와 목자들이 함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했다?절대로 그렇지 않다. 목자들은 아기 예수 탄생 직후에 마구간에 가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맞지만, 동방박사들은 짧게는 수주 후 길게는 1, 2년 후에 예수님을 만났다. 성탄절 그림에는 종종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 함께 등장하고 그것이 보기에도 아름답다. 그러나 헤롯 대왕이 동방에서부터 온 박사들을 만난 후 아기가 태어난 때를 자세히 묻고 얼마 후에 두 살 아래 유아들을 모두 죽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동박박사들은 이미 아기가 탄생하고 시간이 꽤 흐른 뒤에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부가적으로, 성경은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라고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지고 온 선물이 황금, 유향, 몰약 세 가지였지 사람이 셋이 아니었다.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목자들이 동방박사들처럼 들에서 밝은 별을 따라 예수님이 탄생한 마구간으로 온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천군천사들이 나타나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탄생했다는 말을 해줬고, 목자들은 별빛을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서 아기를 찾은 것이다. 예수님은 집 안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고 집 밖에 있는 마구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찾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고, 아마도 아기 울음소리도 있었을 것이다.오해 5. 성탄절은 해피 홀리데이다?그리스도, 즉 크라이스트(Christ)를 헬라어로 쓰면 맨 앞글자가 ‘키’라는 철자인데 이게 영어의 엑스(X)와 똑같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엑스가 아니고 키, 즉 그리스도다. X-마스라고 하면 미지의 대상인 X를 마스(mass), 즉 예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쾌락을, 돈을, 산타클로스를, 자기만족을 놓고 성탄절을 보내는 모습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한 채 평화를 말하고, 기쁨을 노래하고, 사랑을 외친다. 심지어 성탄절 조차도 구주의 탄생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는 공영방송이나 공공장소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이나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해피 홀리데이(Happy Holiday)라는 인사가 더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성탄절은 그냥 행복한 공휴일이 아니다. 성탄절은 구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을 즐거워하는 날이다. 이것을 망각하거나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성탄절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의 행위이다.
복음
예수그리스도
예수님의탄생
성탄절
동방박사
목자들
성어거스틴
율리우스1세
그레고리력
복음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크리스마스
by Tim Keller
2018-12-24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절기로서는 유일하게 일반 대중들도 중요한 휴일로 맞이하는 날이다. 아마도 기독교 문화에서는 가장 큰 휴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날을 기념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양측 모두에 불편을 끼치기도 한다. 먼저 기독교인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루어지는 대중적인 축제들이 점점 더 크리스마스 본연의 의미를 어떻게든 회피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현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간에 들리는 배경 음악들도, 이를테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Joy to the World)에서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Have a Holly, Jolly Christmas)로 바뀌는 추세이다. 또한 이 절기는 주로 가족, 선물, 아니면 세계 평화를 위한 시간으로만 선전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느 웹사이트의 열정적인 작가는 “크리스마스야말로 이 세상이 즐기는 가장 멋진 휴일이다”라고 묘사하기도 했다.그러나 비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크리스마스의 기독교적인 모습이 전통적인 캐롤 음악 따위를 통해 끼어들어와 불청객처럼 이 시즌의 분위기를 헤쳐 놓는 상황을 지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답하기가 짜증 난다. “이 노래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려고 나셨도다’(born to give them second birth)의 뜻은 무엇이죠?”세상의 축제일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일단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가치를 대중 사회와 공유하는 일이 즐겁다. 세상에서도 크리스마스는 세상을 밝히는 기념일로 여겨진다. 가령 가족 모임을 위한 따뜻한 시간이 된다거나, 주변에 사는 이웃 혹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날이 되기도 한다. 이런 관습은 모두에게 유익이 되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기독교적인 방식과도 참으로 조화를 이룬다.그러나 크리스마스 기간을 상업적인 목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늘 있기 마련이기에, 그날은 이 세상의 축제일처럼 계속 여겨지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대중들이 알기 어려워지는 현상을 보면 염려스럽기도 하다. 사실 이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빛(곧 소망)이라는 크리스마스의 이미지는 원래 이 세상 밖에서 우리에게로 찾아온 참된 빛이 있다는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는 행위는 원래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고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신 그 경이로운 행동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시작된 일이다. 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하나님의 아들이 귀족 가문이 아니라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나신 일을 상기시키려는 목적으로 일어났다. 즉, 우주의 주인이 가장 소외되고 배척 받는 인간 사회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다.바로 이런 일들은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를 함축하는데, 거기에는 진리의 두 가지 측면이 다음과 같이 자리하고 있다. 예수님은 왜 빛으로 오셨는가? 우리가 영적으로 어두운 맹인들이어서 스스로 바른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왜 육신을 입고 죽음을 당하셨는가? 우리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드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전 6:19).결국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불가사의하고 심상치 않은 메시지로 우리의 삶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피할 수 없는 성경의 진리서구 사회는 기독교 신앙의 근간에 역사적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더 빠른 속도로 그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일년에 한 번, 이 크리스마스에는 사람들이 잊어 버린 기본적인 진리가 바로 그들에게로 찾아가는 일이 일어난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모임들과 콘서트, 파티와 여러 이벤트에서, 심지어는 그 참석자들이 대부분 비기독교인일지라도,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그들 앞에 가시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예를 들어,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롤인 ‘천사 찬송하기를 거룩하신 구주께’(Hark! The Herald Angels Sing)가 백화점에서, 식료품 가게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들려온다면, 여러 가지 질문과 답변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날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이다. 여기서 노래하는 ‘예수’가 누구지? ‘하늘에서 내려와 처녀 몸에 나셔서 사람 몸을’ 입으신 ‘영원하신 주님’이다. 그러면 ‘왜’ 이 땅에 오셨지? ‘죄인들을 불러서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려고 오셨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지? ‘의로우신 예수는 평화의 왕이시고 세상 빛이 되시’기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크리스마스 문화는 매우 간결한 스타일로 기독교 신앙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요약해서 보여 준다.물론 대중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노래나 성경 구절이 많지는 않지만, 일년에 단 한 차례만큼은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본연의 메시지를 어디에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한다. 바로 그 상황에서 위와 같은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면, 피할 수 없는 기독교의 진리가 그들의 마음속에 밝히 드러날 것이다.이처럼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기독교의 핵심, 곧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Even As a Secular Holiday, Christmas Makes the Gospel Accessible번역: 장성우
복음
변증
크라스마스
성경의진리
기독교문화
기쁘다구주오셨네
기독교신앙
천사찬송하기를거룩하신구주께
영원하신주님
기독교의핵심
거래를 끝내기 위해 오신 예수님
by Sam Allberry
2018-12-24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이다. ‘E.T.’, ‘레이더스’, 그리고 ‘죠스’는 아주 유명한 그의 대표작들이다. 이 영화들을 보며 어린아이들은 꿈을 꾸고 공포도 느꼈다. 그런데 스필버그는 탁월한 재능 때문인지, 그의 작품들을 평범하게 끝마치기 어려워했다. 이를테면 그의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 너무 깔끔하게 결말이 맺어지거나, 관객들의 믿음이 필요한 엔딩 장면으로 문제가 자주 해결되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마이너리티 리포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그리고 ‘A.I.’이다.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복음서 이야기에 대한 멋지고 행복한 결론으로 본다. 마치 스필버그가 배신과 부인, 또 죽음이라는 어두운 배경에 결말을 위해 어떤 장치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의 영화에서처럼 붉게 타오르는 일몰이 배경으로 자리한 엔딩 장면으로 부활을 바라본다는 것이다.그러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에 이어지는 ‘속편’이 아니다. 부활은 복음서 이야기를 끝내기보다 완성시키는 요소이다. 사실, 부활 없이는 이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연대기적 문제가 아니라 장엄한 신학적인 문제이다. 부활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부활은 우리를 구원한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부활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바울은 부활의 필요성을 놀라운 방식으로 설명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그는 부활을 칭의와 연결시킨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구원이 절반 이루어지고, 또 부활하심으로써 나머지 절반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은 존재라고 말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의롭게 됨도 없다고 말하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만일 예수님이 죽은 상태라면, 우리가 지은 죄의 빚은 여전히 처리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우리는 죄의 영역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부활의 생명이 없었다면, 우리의 새로운 삶도 없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그렇다면 부활의 의미를 그처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무엇일까? 성경의 광대한 이야기가 보여 주는 사실이 있다. 곧 죽음이 갖는 특별한 의미 때문에 그분의 부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때에만, 예수님의 부활이 가지는 의미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다.죄는 죽음을 낳는다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창 2:17). 하나님은 생명이셨고, 그분에게서 돌아서는 일은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죄는 죽음이라는 삯을 받거나(롬 6:23), 또는 그 죽음을 출산한다(약 1:15). 다시 말해,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죄가 받아야 할 대가이다.왜 우리가 죽음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종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죽음을 출생과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일어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 중에 하나라고 여긴다. 그러나 죽음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우리가 가진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지하고 것 이상으로 우리가 많은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죄도 그렇지만) 죽음은 원래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경험하도록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죽음은 죄를 통해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죽음의 경험은 죄의 실재를 보여 준다.완료된 거래우리가 죽음의 의미를 파악하면, 부활의 의미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가 임의적으로 행하신 일이 아니었다. 단지 그분이 여전히 살아 계실 수 있는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기적도 아니었다. 그보다도 부활 자체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곧 죽음이 죄의 열매이고 증거인 것처럼, 부활도 구원의 열매이고 증거가 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은 죄와 죽음의 순환이 마침내 깨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고, 죄는 정복당했다.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고, 오직 부활만이 우리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삶으로 가는 관문이 된 것이다.십자가는 여행 배낭 같은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몇 개 챙겨 넣으시고 우리가 알아서 꺼내 쓰라고 주신 그런 배낭이 아니라는 말이다.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거래가 끝났다. 즉, 성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 성부는 그 거래에 서명하신 것이다.출처 :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 Death is Dead, Christ Has Conquered번역 : 김형용
복음
부활
성자
성부
거래
구원
죽음
예수님
크리스마스와 진정한 선물
by Leslie Schmucker
2018-12-21
이번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준비하지 말아볼까 또다시 고민한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은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이며, 나는 평소 식구들에게 선물하기를 즐거워한다.그럼에도 이런 별난 생각을 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는 크리스마스가 사람들이 으레 떠올리는 단상과는 조금 달랐으면 한다.크리스마스, 그리고 불안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선물이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온통 빼앗는다. 예수님 이야기는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인다.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나는 부모로서 못내 아쉽다. 크리스마스가 그 본질적 의미를 상실한 채 점점 더 소비를 위한 날이 되어가기 때문에, 이 문화로부터 아이들을 지켜 내고 싶다. 하지만 선물에 대한 가족의 기대와 그에 따른 나의 의무감은 생각보다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 해를 거듭할 때마다, 나는 선물 목록에 전부 줄이 그어질 때까지 여러 상점에서 동분서주한다. 한정판 변신 로봇부터 예쁜 아기 인형, 그리고 꽤 비싼 어그 부츠까지, 무엇이 나을지 고민하며 애를 쓰는 것이다.줄 때의 기쁨이야 두말할 필요 없이 설레는 일이지만, 사실 만족할 만한 선물을 준비한다는 건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선물을 건네는 순간까지도 종종 죄책감이나 불안감, 때론 이 두 가지 감정 모두가 내 마음을 지배할 때가 있다. 색상, 크기, 브랜드, 디자인, 활용도 등등 내가 제대로 된 선물을 고른 것인지 여러 번 고민하게 된다. 이 정도면 우리 아이가 흡족해 할까? 좀 더 괜찮은 것을 사야 했던 게 아닐까? 사랑하는 가족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부담감 때문에 내 마음은 한시도 잠잠할 수가 없다. 이러한 마음의 짐은 그 옛날 베들레헴의 별밤을 축하하려는 마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도시의 크리스마스 문화에서 홀로 빠져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블랙 프라이데이부터 신년 감사 세일까지, 나는 선물에 대한 의무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여러 상점을 돌며 물건을 찾아 헤맬 것이다. 더불어 한정된 예산은 나로 하여금 사고 싶은 선물 앞에서 아쉬운 마음이 들게 할 것이다. 결국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죄책감과 불안감 속에 아침을 맞이할 것이고, 가족들의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크리스마스, 그리고 기쁨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며, 그분의 거룩한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주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주고 싶어 한다(마 7:11). 물론 선물을 준비하고 나눌 때마다 물질만능주의, 낭비벽, 그리고 인간의 소유욕 등과 부단히 싸워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불황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에서 승리하겠다며 선물을 완전히 금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베풀려는 선한 마음은 좋은 것으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사랑과 온전히 닮은 모양은 아니라 할지라도, 좋은 것을 주는 일은 필시 선한 행위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라고 하셨다(눅 6:38).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도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라고 외쳤다(요일3:1). 따라서 주는 행위를 통한 즐거움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며 흡족해 하시는 것과 동일한 기쁨이다. 비록 그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크리스마스, 그리고 은혜예수님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하늘 영광의 화려함과 왕으로서의 위엄을 내려놓으셨다. 인간은 흠이 많고, 또 상 받을 자격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과 나를 선택하셨으며 영원하고 풍성한 은혜를 약속하셨다.그러므로 앞으로 크리스마스 선물 때문에 고민할 때마다, 나는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기억하며 붙들 것이다. 연말마다 발품을 팔아가며 좋은 선물을 준비하는 이유, 때로는 조금 과하더라도 매년 그렇게 하는 이유, 바로 그 이유는 내가 물질주의에 빠졌거나 완벽한 크리스마스를 욕심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받은 넘치는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며, 이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희생을 통해 내게 주어졌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도 그분의 본을 따라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해 가장 좋은 것으로 가족과 이웃을 섬기고자 한다.아기 예수가 쓰신 가시관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왕관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온 인류에게 주어진 진정한 의미의 선물이다. 크리스마스 아침,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선물을 기다리듯, 감출 수 없는 기쁨과 환호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릴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Guilt and Grace of Christmas Giving번역가: 정새롬
복음
예수그리스도
크리스마스
진정한선물
기쁨
은혜
베들레헴
크리스마스문화
크리스마스는 신비이다
by Michael Douglas
2018-12-20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익숙한 문구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크리스마스 음악, 트리와 쿠키 냄새, 그리고 장식들이 해마다 점점 더 일찍 등장하는 듯하다. 이처럼 이 기간에 대한 친숙함과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것들이 크리스마스를 일년 중 가장 멋진 시간으로 만든다.그런데 이때 우리는 행복한 시간과 더불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갑작스럽게 가족 중 한 사람의 빈자리 때문에 슬픔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상반된 정서의 갈등은 생각보다 큰 혼동을 가져다 줄지 모른다.그렇다면, 진짜 크리스마스는 어떤 이야기일까? 그 자체의 신비가 여기에 있다.동정녀 탄생해마다 의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질문을 받는 주제가 동정녀 탄생이다. 누가는 한 천사가 마리아라는 처녀에게 나타나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한다. 그뿐 아니라 그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다윗 왕의 자손이라고 한다. 그녀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사 7:14)이라는 약속을 분명히 기억했지만, 그것은 믿기 어려운 말이었을 것이다.그녀에게 있었을 혼돈스러운 마음과 기쁨, 여러 밀려오는 생각들을 상상해 보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사촌 엘리사벳도 임신을 했다고 말한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이 들었고 평생 아이를 갖지 못했었다. 예수님 시대에 불임은 저주받은 상태로 간주되었다. 어린 십대 소녀와 아마도 70이나 80대가 된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마리아가 방문하여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자 엘리사벳의 배에서 아기(세례 요한)가 뛰놀았다. 하나님은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미지를 반영하며 이 장면을 보여 주신다. 우리가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그 이미지는 여기서 더 큰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있다. 잉태한 적이 없었지만 새 생명을 잉태하는 이야기, 그처럼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다.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3개월을 지낸 후에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질문하기 시작했다. 또 그녀 앞뒤에서 소곤거리기도 했다. 그녀의 배는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녀가 임신하면 안 되는 처녀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그녀는 요셉과 약혼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러한 임신 소식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보라. 요셉은 이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관계를 끊으려고 한다. 그녀에게 부정하다는 죄책을 주기 보다는 파혼을 하려 했다. 그러나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고 알려 주었다.요셉은 다윗의 자손이며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목수의 삶에 일어나고 있는 일의 무게를 살펴보라. 한 아이가 그의 가계에서 태어나는데, 그의 아이가 아니다. 그가 곧 입양할 아이는 하나님이 장차 세상을 구원(입양)하기 위해 세상 한복판으로 보내신 분이다. 길고도 낯선 여행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을 하라는 명을 내렸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녀는 임신 8개월이었다. 그녀의 산파는 걸어올 수 있는 거리인 나사렛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항상 이 부분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날의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그들의 임산부들에게 임신 말기에 장거리 여행을 주의시키지 않는가?그러나 마리아는 돌아올 날에 대한 기약 없이 이 장거리 여행에 동의한다. 그들이 시골 마을에 있을 때, 마리아의 양수가 터진다. 그들은 집에서 먼 곳에 있고, 사람들로 붐비는 작은 마을이어서 방도 얻을 수 없다. 요셉은 여관 주인에게 그들이 그냥 따로 있을 만한 곳이 있는지 묻는다. 여관 주인은 손님들의 가축이 머무는 곳인 여관 뒤에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 낮아지신 하나님아기의 몸을 입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가축 소리와 냄새나는 광경에서 자신의 등장을 알리신다. 이 장면은 정말 낯설다. 하나님의 신기한 계획으로, 목자들이 왕의 탄생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처음으로 보게 되는 영예를 갖게 된다. 그 상황은 무엇인가 어색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왕을 알현하기에 알맞은 옷을 입고 있지 않은 가난한 목자들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요점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가장 예측하지 못할 장소에 오셔서 우리를 만나신다. 주변 상황이 복잡하고 실망스러우며, 우리 자신이 실패를 하고 있는 그 순간에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오신다.얼마 후, 헤롯은 동방박사들로부터 이 왕에 대하여 듣게 된다. 헤롯도 예수님을 찾으려고 계획을 세운다. 경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말이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을 피하여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을 떠나라는 말을 듣는다. 헤롯은 그의 왕권에 도전하는 자를 없애버리기 위하여 가장 끔찍한 대량 학살을 계획하고 2세 이하의 모든 어린아이를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정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정상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10대 소녀가 임신을 한다. 천사가 모든 일에 등장하여 개입한다. 대량 유아 학살이 벌어진다.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어떤 연극 작가가 한밤중에 쓴 일종의 비극 같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또 우리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역사적으로 이 사건들의 진정성을 따지기에는 우리의 상식을 훨씬 넘어서는 이야기가 전개된다.우리는 그저 정서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을 즐기기를 원한다. 우리 모두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장식과 선물과 음식, 그 이상이어야 한다.아마도 올해에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 울음소리나 재잘거리는 웃음소리 대신에 당신이 마주하는 현실은 계속되는 불임이라는 무언의 침묵일 수도 있다.어쩌면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로 예년과는 다른 느낌일 수도 있다. 만일 크리스마스가 그냥 외부적인 장식과 같은 것이라면, 그러한 장식이 전부 사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당신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읽어 보았던 다른 스토리들처럼 미스터리해서 그 이야기의 저자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요소들을 이제 어떻게 행복한 결말로 엮을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이야기에는 공통된 줄거리가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크리스마스의 신비는 믿는 자들에게는 매우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 신비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내몰린 날부터 계속해서 내려오는 한 가지 주제와 관련된다. 누가 구원자인가? 누가 메시아인가? 누가 그리스도인가?계시된 신비 크리스마스의 신비와 긴장과 계획은 말구유 안에 싸여 있다. 임마누엘 안에,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 속에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거나 우리 옆에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작고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힘입어 오셨다. 아기로서 배가 고파 먹을 것 때문에 울었지만, 그분은 생명의 떡이시다. 또한 낚시줄을 놓는 법을 배워야 했지만,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이시다. 감기에 걸리고 무릎이 까지고 운동장에서 발목을 다칠 수 있는 아이였지만, 그분은 위대한 의사이시다. 두려움과 유혹과 갈망을 가지고 성장한 아이였지만, 오직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왕이신 이 아이가 바로 계시된 신비이다. 그분이 크리스마스의 주인이시다. 십자가 고통 없이는 부활의 기쁨도 없다. 구유에 눕혀짐 없이는 십자가 고통도 없다. 짐승들을 먹이는 구유에 하나님의 양이 누웠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여관 뒤편에서 빌린 구유에 눕혀진 것처럼, 나중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빌린 무덤에 장사되셨다.이것이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이유이다. 우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흠 없으신 하나님의 양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바로 신비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오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흰 눈처럼 하얗게 하실 것이다. 나는 당신이 이 왕을 새롭게 찾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왕은 당신을 이미 찾았기 때문이다.와서, 그 놀라운 신비를 바라보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mas is a Mystery번역: 정은심
복음
예수그리스도
크리스마스
신비
동정녀탄생
낮아지신하나님
놀라운신비
임마누엘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
by Glen Scrivener
2018-12-14
“그가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8:19).이 구절을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처음부터 ‘곤란함’을 느꼈다. 도대체 이 구절을 성도들에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당신은 ‘그게 뭐가 그렇게 복잡한 것일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특히 당신이 이 구절을 읽으며 복음의 의미를 발견했다면 더욱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종종 하나님의 사랑을 본래적인 의미와는 정반대로 이해하고는 한다. 그런 나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도 어리석다는 생각을 한다.거꾸로 된 사랑내 생각의 오류는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수 있다는 착각이다. 즉,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에 앞서 구원의 작업이 필요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기에 앞서 정결하게 하셨고 은혜를 베푸셨다고 말이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 안에서는,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전제 조건과도 같다.그래서 시편 18편의 “주님이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라는 구절을 마주할 때, 성경이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음에 혼란스러웠다. 결국, 나는 이 말씀을 다시 살펴보아야 했다.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요 3:16-17).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이유도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엡 2:4). 더 나아가, 하나님은 무력하고, 사악하며, 죄로 가득 찬 원수들을 위해 그분의 아들을 죽이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기록한다(롬 5:6-11).이러한 구절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파악했는가?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즉, 사랑이 먼저고 구원이 그 사랑의 결과인 것이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하시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숨이 멎을 듯이 놀라운 사랑왜 이런 구절들이 중요한가? 한 가지 이유는, 죄인인 나를 그리스도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상태여야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악한 나도 사랑하신다. 그분은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정결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건 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나를 정결하게 해 주셨다.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의문이 찾아올 때면, 죄인인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일에 대한 증표인 십자가를 떠올려야 한다. 내가 구원받은 상태인지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현재의 정결함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단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 같은 자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분은 내가 가장 선한 상태일 때에 그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내가 가장 더러운 상태에 있을 때에 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그리스도가 흘리신 보혈을 통해 주어진 귀한 구원은 나를 향한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을 증명한다. 그분의 사랑은 경건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같은 것이 아니라 그분을 대적하던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하시는 모든 사역의 밑바탕에는 이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때, 나는 나를 구원하신 이유가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있는 것이다. 즉 나를 향한 변함없고, 고갈되지 않으며,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고 있는 것이다.“그가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8:19).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 Didn’t Die So He Could Love You번역: 주영식
복음
예수그리스도
하나님
거꾸로된사랑
놀라운사랑
구원
시편18
십자가
확증
누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by Mark Dever
2018-12-13
우리는 종종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설교자나 변증가, 또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그런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우리는 이 가르침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4). 또 사도행전 11장 19-21절은 모든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고 말한다.이와 관련하여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는 지침을 우리 모두에게 준다(벧전 3:15).더 나아가, 우리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자 한다면(막 12:31; 약 2:8),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섬김은 없다. 우리는 이 명확한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Who Should Evangelize?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복음
변증
설교자
변증가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바울
베드로
베드로전서3:15
조직신학이 없으면 성취할 수 없는 네 가지
by Stephen Wellum
2018-12-11
조직신학이 필수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조직신학의 정의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조직신학에 관한 일치된 하나의 정의는 없지만, 그 핵심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조직신학은 성경을 토대로 형성된, 신학의 구조를 세우는 중요한 학문 중 하나다. 또한 조직신학은 성경에서 취합된 진리들을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을 통해 우리는 마땅히 믿어야 할 대상과 지켜야 할 삶의 모습에 대해 교리적인 구체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구체화는 성경에 의해 보증되고 역사 신학의 관점에서 완성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신학은 교회가 올바르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돕는다. 또한 성경의 진리로 세속적인 가치관과 싸우도록 깊이 있는 세계관을 구성한다. 조직신학의 목표는 우리의 선, 교회의 삶과 건강, 크리스천의 핵심 가치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고후 10:1-5) 하는 것이다.조직신학이 없다면, 우리는 다음의 중요한 성취들을 이룰 수 없다.1. 하나님을 아는 것조직신학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서의 신, 창조자, 언약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이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 창조물들을 통해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시 19:1-6; 롬 1:18-32).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창조 세계를 연구하는 것만으로 그분을 알도록 만드시지 않았다. 그분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궁극적으로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 또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 주신 말씀으로(요 1:1-18; 딤후 3:16-17; 히 1:1-2; 벧후 1:20-21) 우리에게 다가오신다.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을 참되게 알려면 성경 전체만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바를 (신학적인 구체화를 통해) ‘결합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예를 들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자. 삼위일체는 성경의 특정한 한 구절이나 한 장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조직신학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혹은, 신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간의 관계를 떠올려 보라.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 관계에 대해 제대로 된 통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 대한 깊은 신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따라서 조직신학이 아니라면, 이 타락한 세계에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이해와 그분에 대한 신뢰는 마땅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2. 우리 자신을 아는 것조직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 자신을 알고, 또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조직신학은 성경이 창조, 타락, 구속, 새 창조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죄로 인해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과 그분의 궁극적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성취하셨는지 반드시 물어야 한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참된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또한 조직신학은 하나님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성경을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이해 안에서 해석하지 않은 채, 성경의 부분들을 우리의 삶에 임의대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에 적용되는 것과 적용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이는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가능하다.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분의 계획을 점진적으로 드러내셨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부분들이 어떻게 전체를 이루어 가는지 먼저 파악하고, 조직신학을 통해 다시 그 전체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부단히 고민해야 한다. 이처럼 조직신학은 성경을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잘 정립된 신학이 없다면, 우리는 많은 실책들을 범하게 될 것이다(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이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않음으로 모순에 빠진 것을 기억하라).종합하자면,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인 우리의 삶에 성경을 올바르게 적용하도록 도움으로써, 비로소 나 자신과 삶의 방향을 알게 한다.3. 교회로서의 부르심에 부응하는 것조직신학은 우리를 교회로서 부르시는 것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그분을 올바르게 알고 구속된 형상답게 살아가는 것, 즉 성경을 가까이 하는 일에 굳게 붙들리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복음을 열방에 선포하는 것 또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다(마 28:18-20). 그렇다면, 이 선포의 내용은 무엇인가?첫째, 그 선포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이때 그분에 대해 정의하기 위해서는 조직신학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분은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그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이면서 완전히 인간이신 영원한 성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조직신학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게 하므로 참된 유일신인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또 선포하도록 이끈다.둘째, 그 선포는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알리는 것이다. 십자가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우리 죄를 위하여”(고전 15:1-3)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사를 보면,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이 항상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신학은 그리스도를 열방에 올바르게 선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다.더 많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핵심은 이것이다.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로서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일에는 조직신학이 필요하다. 4. 믿음을 변호하는 것마지막으로, 조직신학은 성도에게 주신 믿음을 변호하는 데 필수적이다(유 3절).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조직신학적인 해석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믿음을 변호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부정과 맞설 진리의 세계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믿음의 변호,’ 즉 변증학 역시 조직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약 변증학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복음의 은혜를 사수하라는 그 부르심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딛 1:9; 벧전 3:15-16).조직신학은 크리스천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인정하든지 하지 않든지,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조직신학적 사고관이 이미 있다. 이는 좋든 나쁘든 그들의 삶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따라서 문제는 조직신학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조직신학적 사고가 성경의 진리에 매일 더 가까워짐으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살고 또 복음의 진리를 세상 앞에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Things You Can’t Do without Systematic Theology번역: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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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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