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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
by John Piper
2019-02-21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히 11:37-39).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가르치셨다(막 8:34). 또 만약 사람들이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부르면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라고 하시며, 예수님 자신을 귀신의 왕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저주하고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라고 분명히 예고하셨다(요 15:20).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자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고난이 따를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바울에 관해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라고 하셨다. 이러한 고난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신자의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설계에 따라 주어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설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빌립보서 2장 30절에서 ‘무엇인가를 채운다’라는 표현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담겨 있는 물질을 바울에게 전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와 비슷한 차원에서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도 그 표현은 바울이 자신의 ‘고난’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세상에 전달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바울이 당한 많은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현하여 세상에 드러내 보이기 위한 하나님의 설계에 의해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선교사들의 고난을 세상이 목도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사랑을 보게 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 선물을 세상에 주신다. 히브리서 11장 37-38절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세상이 이러한 선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말씀한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은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선물로 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없다는 의미이다. 즉 그들에게는 과분한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고난 받는 성도들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가? 바로 그 성도들의 믿음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히 11:39). 즉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 그들의 고난은 믿음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받는 고난의 가치는 그들의 믿음 안에서 확인되었다. 왜 그러한가?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을 그 고난에서 건져 주시는 기적을 행하신다(히 11:27-35). 어떤 때는 고난을 다 겪게 하시되 참고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히브리서 11:35-39). 고난에서 건짐 받는 믿음과 고난을 인내하는 믿음, 이 두 믿음의 공통분모는 모두 신체의 자유나 육체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더 소중히 여김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고난에서 건짐 받은 신자는 “내가 얻은 자유나 생명보다 예수님이 더 낫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죽임을 당하는 자는 “내가 잃는 모든 것들, 심지어 내 생명보다 예수님이 더 낫습니다”라고 외친다. 이것이 믿음의 정수이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 신뢰하고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믿음의 정수이다.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특별히 고난 받는 선교사들)은 이런 이유로 인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 된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 중에도 믿음을 유지하고 견디어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이 세상에 복음의 영광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삶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나 죽음이 앗아갈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보다 예수님이 더욱 소중하다는 복음의 진리를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 준다. 이는 얼마나 생생한 십자가의 선포인가! 이 진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안겨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다. 세상은 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이 선물을 감당할 수도 없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세상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는 그러한 선물을 세상에 안겨 준다. 마침내 세상이 고난의 쓰디쓴 선물을 받는 시점이 도래하였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 안에 있는 자로 드러나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을 깊이 알아 감으로써 그때를 대비하자. 세상에 그런 선물을 주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준비하는,존 파이퍼 목사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s Undeserved Gift to the World: Christian Sufferers번역: 개혁된실천사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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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by John Piper
2019-02-20
두 주 동안 이어진 릴레이 컨퍼런스를 마치고 집으로 막 돌아왔을 때, 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과 함께 사역했던 시간을 생각하며 너무나 감사했다.그때 진행되었던 한 컨퍼런스의 주제는 '고용'이었는데, 특히 '젊은 노동자'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었다. 나는 컨퍼런스의 리더로서 이 주제가 바람직한지에 대해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이에 나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가르치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인용하여 그 주제가 적실하다는 입장을 대변했다.그러자 "젊은 직장인들이 일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서 당시에 내가 대답했던 내용을 이 지면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의존성 을 길러라하나님께 철저히 의지해서 일하라(잠 3:5-6; 요 15:5). 하나님 없이 당신은 숨쉬거나, 움직이거나,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말할 수 없다. 물론 영적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절실함을 고백하고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라.진실함으로 일하라업무의 세심한 부분까지 진실하고 신실하게 처리하라. 우리는 시간을 엄수하고, 업무에 온전히 충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도적질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함이 없는 사람들은 업무 태만으로 고용주에게 손해를 끼친다.실력을 키우라맡은 일을 잘 처리하라. 하나님은 당신에게 진실성뿐 아니라 실력을 선물로 주셨다. 그 선물을 소중히 여기고 잘 연마하라. 실력의 향상은 의존성과 진실성 위에 세워진다.하나님을 향한 기업 풍토를 조성하라당신에게 영향력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직장의 방침 및 목표가 예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기풍을 조성하라.회사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힘쓰라당신의 회사가 영혼을 파괴하지 않고, 또 삶의 질을 높이는 선한 영향력을 갖도록 기도해야 한다. 일부 기업들은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포르노, 도박, 마케팅 사기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와 기회을 통하여 힘쓸 때, 회사는 영혼을 돌보는 방향으로 영향력을 옮겨갈 수 있다. 우리에게 그 기회가 왔을 때, 담대하게 옳은 방향으로 이끌라.하나님의 빛이 드러나도록 대화하라직장은 관계의 장이므로 의사소통을 통해 관계를 형성한다. 동료들과 일상적인 대화에서 당신의 기독교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라. 당신의 빛을 등잔 '아래'에 숨기지 말고, 등잔 '위'에 세우도록 연습하라. 호감이 가도록, 자연스럽게, 그리고 즐겁게 실천하라.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40:16). 사랑으로 섬기라동료들을 사랑으로 섬기라.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커피나 점심을 사러 가야 할 때, 먼저 자원해 보라. 또한 소소한 부분을 기억하고 관심을 보이는 방법도 괜찮다. 단순히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 월요일의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을 함께 지는 사람으로 당신을 각인시키라. 이는 그들이 죄와 인생의 짐을 대신 지시는 위대한 예수님을 바로 당신을 통해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돈 에 대한 지금까지의 접근을 바꾸어라직장은 당신이 돈을 버는 곳이다. 하지만 그 돈은 하나님의 것이지 당신의 소유가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청지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버는 돈이라도 하나님의 재정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그 흐름이 관대하게 넘치도록 하라. 축적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남에게 베풀고 예수님을 높이는 기업에 투자하기 위해 돈을 벌라. 돈을 관리하는 그 모습을 통해 예수님이 당신의 가장 귀한 보물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다.감사하라삶과 건강, 일과 예수님에 대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다음 직장에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불평만 하는 사람들 틈에 끼지 말고,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감사가 동료에 대한 겸손한 섬김으로 드러나게 하라. 반드시 오늘의 일터에서 희망적이고, 겸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직장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더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예들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빛을 비춰 주실 때마다, 위의 목록에 나만의 방법을 계속해서 추가하라. 핵심 포인트는 직장에서 무엇을 하든지, 곧 먹든지 마시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대하게 증거하는 데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12 Ways to Glorify God at Work번역: 개혁된실천사
생활
직업
의존성
진실함
실력
선한영향력
청지기
감사
증거
사랑
사별의 고통을 다루는 신학과 신앙
by Christopher Catherwood
2019-01-29
내 아내는 8년 동안 파킨슨병과 합병증을 앓던 중, 지난 달 겨우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장수하는 집안의 유전자를 받은 덕분에 의사의 예상보다는 좀 더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죽음은 내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아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도 교회의 소그룹 성경공부에 참석하였고, 요양원에서도 끝까지 그 모임에 참여하였다. 나는 그녀가 온 생애 동안 섬겨 온 바로 그 주님의 품에 안겨 있을 거라고 믿는다. 아내는 하늘에 있고, 63세의 홀아비인 나는 여기 이 세상에 남아 있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80대와 90대까지 살기 때문에, 나는 아내의 죽음이 비교적 이르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지난 사십 년 동안 오래된 청교도 교회에 행복하게 다녔다. 그래서 아내의 이른 죽음에 관해서도 교회에서 배운 나의 신학적 관점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말한다. 그 관점이란 깊은 슬픔이 비록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바라보는 눈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상실의 고통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내 아내를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는지 혹은 그렇게 신실한 여성을 왜 파킨슨병에 걸리도록 허락하셨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다.삶의 미스터리아내와 나는 아기를 가질 수 없었다. 이 문제가 우리에게는 큰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앞으로 남은 내 생애 동안에도 그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전에는 그 원인을 알지 못했던 일들이 이제는 명확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1982년에 나는 캠브리지대학교(Cambridge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위한 논문 심사를 받았다. 내부 심사위원은 매우 정직한 학자였고, (돌아가신) 외부 심사위원은 표절 문제를 엄격하게 다루기로 유명한 학자였다. 외부 심사위원은 내게 논문 작업을 1년 더 하라고 요구하였다. 내부 심사위원은 깜짝 놀랐지만, 더 저명한 심사위원의 결정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석사 학위를 받는 데 그쳤고, 그것으로 내가 학적인 직업을 가질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그 후 1991년, 나는 아내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내가 학적인 면에서 은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1997년, 아내의 조언에 따라 나는 이전의 내부 심사위원이었던 교수를 만나러 갔다. 그는 여전히 캠브리지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날 그 교수가 해외 연구 프로그램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 담당자는 마침 20세기의 역사를 가르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역사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6년, 나는 노리치(Norwich)에 있는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University of East Anglia)의 역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는 내가 논문 심사를 받던 날로부터 꼭 24년만의 결과였다. 하나님은 내가 1997년과 2006년에 어떻게 될지를 1982년에 이미 알고 계셨지만,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절망처럼 보일 때, 나는 그 어느 것도 예상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욥기서를 읽을 때, 우리는 곧 뭔가 독특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욥이 그에게 왜 그런 고난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통 중에 부르짖는 욥의 외침에도 하나님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속성에 대해서만 묘사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대답은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어떠한 설명도 되지 않았다. 세속적 독자들은 이러한 부분에서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성경이 고통의 문제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하나님이 바로 그 대답이다하지만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대답이 사실은 제대로 된 답변이다. 아무도 예수님의 고통과 구속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우리는 결국 구원을 받게 된다. 욥처럼 우리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영원의 이편에 있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아내와 나의 친구들은 우리가 욥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말하고는 했다. 우리는 욥의 생애와 비슷하게 고통을 겪고 있지만, 예수님과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내 아내는 왜 그리 일찍 세상을 떠났을가? 아내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그녀의 고통은 끝났고 이제 더 이상 통증과 질병이 없는 하늘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 바로 그 사실 외에 우리는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논문 심사에서 떨어지던 1982년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는지 이제는 비로소 안다. 그리고 그 해의 주권자인 주님은 올해에도 동일하게 우리 삶의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은 그때 나와 함께 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시며, 미래에도 여전히 함께 하실 것이다. 바른 신학을 따라가는 것은 추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냥 교리적 신념을 믿는 일이 아니다. 개혁주의적 신앙은 이와는 달라야 한다. 매우 깊은 슬픔에 빠져있을 때조차 말이다. 성경적 관점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말하곤 했던 것처럼, 이는 참된 진실이다. 우리의 감정이 어떠하더라도, 비록 슬픔이 너무 크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하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안다. 그분에게 우리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한 시간에 한 번씩 아내에게 문자를 보낼 수는 없지만, 이제 그녀와 함께 거하시는 구세주께 기도할 수 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하찮고 미미한 대상까지도 돌보신다. 참새도 그만큼은 알고 있다. 내가 사별하고 홀로 되면서, 개혁신학과 이를 신뢰하는 신앙이 결코 내 아내를 되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신학과 신앙이 사별로 혼자 남겨진 나로 하여금 오늘을 살아가도록 돕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아내를 다시 보겠지만, 나는 그 전에 여러 해 동안 이 땅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과 더불어 모든 것이 그분의 주권 안에 있다는 교리는 내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사별로 인한 깊은 슬픔이라 하더라도, 내가 남은 생애를 잘 살아가도록 지탱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 Grief Sanctified: How Reformed Theology Helps Deal with Death번역: 정은심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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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vin Ortlund
2019-01-22
삶은 늘 분주함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기에 정신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반면, 차분하고 정돈된 상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이는 각별하게 신경 쓰지 않는 한 어느새 삶의 저편으로 멀어지고는 한다.지난 몇 년간, 나는 매우 바쁜 삶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쉼의 시간을 갖고 있다. 이 시간을 통해, 나는 일과 휴식의 균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몇의 깨달음을 얻었다. - 일상이 바쁘게 흘러갈수록 안식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분주하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영혼이 휴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해 보았을 때, 역설적이게도 쉼은 쉽지 않은 일이다.이제부터 일과 안식의 균형에 대한 나의 깨달음을 조금 더 자세하게 나누고자 한다. 이 내용들이 분주함과 피로 속에서 오늘도 부단히 애쓰고 있는 당신에게 괜찮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1. 완전히 지치기 전에 휴식하라에너지가 완전히 소모되기 전까지 일하는 것은 당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위협이다. 물론 업무가 많더라도, 체력이 허락한다면 그 일들을 처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경험상 단기간에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것보다는 장시간 적절하게 유지시키는 방식이 훨씬 더 유용하다. 그리고 이렇게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 효과적인 휴식을 위해서도 유익하다.특히 그날 그날의 느낌을 중심으로 일의 양을 조절하는 것보다는, 적절한 스케줄을 미리 짜고 이에 맞춰 계획적으로 일하는 것이 훨씬 건강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아직 체력이 남아 있더라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 하루를 정리한다면, 이는 다음 날의 활기찬 노동을 위하여 에너지를 비축해 두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나름의 규칙과 계획이 필요한 일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휴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하지도, 또한 쉽지도 않다. 2. 일과 휴식의 리듬을 맞춰라그리스도인들은 십계명 중 네 번째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계명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구약의 언약에 대한 당신의 관점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이 계명을 통하여 안식의 중요성이 얼마나 오랫동안 강조되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안식이란 단지 이스라엘인들을 향한 계명이 아니라(출 20장), 창조 질서의 한 부분이며(창 2장), 복음의 한 축이라는 사실을(히 4장)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주일에 어떠한 스케쥴을 가지고 있든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이 위대한 법칙에 순종해야 한다.나는 쉼의 시간을 따로 떼어 놓는다. 만약 이렇게 의식적으로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춰 놓지 않는다면,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혹은 노동에 대한 기쁨이 줄어들거나, 또는 스스로를 과하게 소진하고 있다는 부담감 때문에 마음이 무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업무 후 가족과의 시간이 예정되어 있음을 인지한 상태에서는, 그 기대감과 자유에 대한 만족으로 일에 더욱 매진할 수 있다. 그렇게 업무에 완전하게 집중하여 내 안의 에너지를 마음껏 쏟아붓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오늘도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고는 한다. 또한 퇴근 후 안식을 취할 때에도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3. 쉬는 동안 진정으로 휴식하라우리는 종종 휴식하는 중에도 “이메일 하나만 더 처리해야지. 30초면 되는데 이 정도는 별 것 아니야”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외부에 의해 방해받지는 않는 진정한 쉼의 중요성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메일을 작성하는 것 자체를 위해서는 30초의 시간이 충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잠깐을 위하여 일에 대한 생각의 끈을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당신이 소비해야 하는 정신적 에너지는 잠깐의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휴식에 있어서는 적절한 경계선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적당한 정도의 선을 정해놓고 이를 실천해 보는 것은 좋은 시도가 될 것이다.4. 휴식하는 동안 스마트폰 등 각종 기기로부터 잠시 떨어져 있으라소셜미디어는 분명 우리의 삶을 좀 더 빠르고 다채롭게 해준다. 또한 훌륭한 정보의 창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남용 혹은 오용할 때에는 오히려 우리의 삶이 불안정으로 출렁이게 된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소셜미디어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나는 최소한 토요일 낮부터 주일 낮까지는 스마트폰을 멀리하고자 노력한다. 이 노력은 나로 하여금 주일에 드릴 예배와 교회 생활에 좀 더 집중하게 만드는 좋은 효과를 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가 이러한 실천을 행하기 전까지는 미디어로부터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점이다.우리는 이미 스마트기기에 완전하게 압도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종종 이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미디어에서 한 발 물러서서 잠시 객관적인 눈으로 그 영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매일 저녁 한 시간 정도만 스마트폰의 전원을 꺼두어 보라. 아마 당신이 그 기기와 매체에 얼마나 중독되어 있는지를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5. 취미를 찾아라나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취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취미는 즐거움을 느끼는 일에 흠뻑 빠지도록 이끌기 때문에, 건강한 쉼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취미를 즐기면서 안식하는 것은 단순하게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것보다 훨씬 강한 심신의 회복을 선사하고, 또한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도 더 효과적이다. 안식이란 단지 활동을 멈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우리에게 생동감을 부여할 수 있는 다른 대안적인 활동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정한 휴식은 생각만큼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다.취미를 선택할 때에 당신이 이미 잘 할 수 있는 분야보다는 전혀 새로운 영역에서 대안을 찾으라고 조언하고 싶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의 직업이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다루어야 하는 유형이라면, 사내 스포츠 동아리에 한번 가입해 보라. 혹 당신의 일이 빠른 업무 처리와 타인들과의 협업을 기본으로 한다면, 이와 반대로 느긋하고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활동을 찾아서 일과 취미의 균형을 맞추어 보라. 만약 당신이 목회자라면 비그리스도인들과도 접촉할 수 있고, 또한 리더의 역할에서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활동을 택하는 것이 좋은 시도가 될 것이다.당신이 일주일 중 6일을 목사로서 교회 사역에 완전히 집중했다면, 나머지 하루 정도는 그 압박에서 한숨 돌릴 수 있는 다른 건강하면서도 평범한 시간을 가져 보라. 내가 아는 한 목회자는 권투 모임에 가입했는데, 그는 매주마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것에 매우 만족한다. 심지어 그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까지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운동과 복음의 전파, 그리고 심신의 회복까지. 그 목회자의 취미 생활은 건강한 휴식의 롤모델과도 같다.6. 가족과 함께 안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결혼 생활과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에는 많은 노력과 노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가족은 당신이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추도록 만드는 좋은 원동력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웃고 대화하는지가 행복한 가정의 척도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완전하게 동의한다. 지친 하루, 혹은 한주의 끝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영혼을 살찌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이들과 노는 시간, 그리고 배우자와 함께하는 시간을 또 하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신성하고 건강한 안식이라고 인식하라.나는 매일 저녁 30분 정도 어린 아들을 데리고 놀이터로 향한다. 처음 이를 시작한 이유는 아내에게 혼자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또 아들과 놀아 주기 위해서였다. 즉, 이는 내가 아닌 가족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자신을 위해서도 하루 중 이 시간을 가장 손꼽아 기다린다. 저녁 식사 전, 아들과 밖에서 느긋하게 하루를 마무리 짓는 것이 참된 휴식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7. 안식의 시간 속에서 복음을 떠올려라일과 휴식의 균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복음과도 연관된 일이다. 만약 혹시라도 당신이 일에 몰두하는 이유가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함이거나,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이 불행해질 것이라고 여겨서라면 이는 그리스도인의 복음 중심적 삶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만약 당신이 일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는 이유가 어떠한 성취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 무언가를 계속해서 더 이루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면, 이것도 복음과는 거리가 먼 행위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구원이라는 궁극의 만족을 나와 당신을 대신하여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분이 허락하신 휴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기억하며 자신의 마음을 매일 새롭게 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십자가 사역을 기억하며 내가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을 기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말한 모든 것을 넘어서는 정말 중요한 한 가지를 나누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종종 쉼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할 경우, 나는 약간의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이 바로 내 삶의 참된 휴식 그 자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안식의 본질적 의미를 되새겨 볼 때, 진정한 쉼은 안식을 취하는 그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그 분 안에 있음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7 Ways to Work Hard at Rest번역: 정새롬
생활
직업
휴식
분주함
소셜미디어
취미
쉼
가족
안식
복음
편안한 기독교와 불편한 기독교
by Brett McCracken
2019-01-15
오늘날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기란 참 쉬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있을까?나는 기독교 신앙이란 본래 ‘불편’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마 16:24), 십자가를 지고(눅 14:27), 박해를 받고(요 15:20; 딤후 3:12), 집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하며(눅 9:58), 가족이라는 우선순위를 저버리고(눅 9:59-62; 14:26), 모든 소유물을 포기할 마음을 가지고서(마 19:21; 눅 14:33),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갈 2:20)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종교를 찾지 않았다. 나는 와인 한 병이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알고 있었다. 만약 당신을 정말로 편안하게 만들어 줄 종교를 찾는다면, 나는 분명 기독교를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소비주의 사회에서 편안함을 찾는 일은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이고, 그래서 우리는 종종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중에 ‘편안한 기독교’를 추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기독교가 신약성경이 보여 주는 날카로운 기준을 적용하기보다 기분 좋은 와인 한 병처럼 편안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편안한 기독교바로 여기에 당신의 기독교가 너무 편안해져 버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여덟 가지 신호가 있다.1. 당신이 믿는 기독교와 당신이 지지하는 정치 관점이 서로 전혀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만약 당신이 어떤 정당을 온전히 지지하면서 당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과 그 정치 관점 사이에 아무 긴장도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어쩌면 너무 편안한 신앙일지 모른다. 평생 어떤 정당을 지지했든 간에, 확고한 기독교 신앙은 당신의 정치 관점과 여러 지점에서 불일치를 일으켜야만 한다.그렇지 않고 한 가지 정치 성향과 완전히 일치하는 신앙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편안하며 선지자적 증인으로서의 기능을 잃어 버린 신앙이다.2. 역설이나 긴장 또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없다(삼위일체, 성육신,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주권, 성령의 임재 등) 기독교 신학의 난해한 교리에 대해 고민하거나 씨름해 본 적이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너무 편안한 신앙일지 모른다.건강하고 불편한 신앙은 당신을 지속적으로 흔들고 들쑤실 뿐 아니라 당신을 들뜨게 만들 것이다. 그런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더 알기 전에는 당신을 쉴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3.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듣고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이 놀란다당신의 신앙이 너무 편안하다는 확실한 신호는, 당신을 잘 아는 사람조차도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삶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편안하게 사는 크리스천은 진리를 모르는 이웃들과 동일한 삶을 살며 똑같이 이야기하고 행동해서 쉽게 그들과 어울리는 사람이다.4. 월요일이 되면 주일에 들었던 설교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만약 주일예배에서 들은 설교를 쉽게 잊어버려 교회를 벗어난 뒤에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믿는 기독교는 너무 편안한 기독교일 것이다.성경적 설교는 우리가 무관심하거나 도전 받지 않은 상태에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기 때문이다(히 4:12).5.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당신을 짜증나게 하지 않는다언제나 대화하기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기 좋은 사람들, 당신의 견해, 취향, 기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만 교회 생활을 하고 있다면, 당신의 기독교는 너무 편안한 기독교이다.복음의 가장 영광스러운 측면 중 하나는, 복음이 아니면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을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는 점이다.6. 도전은 받지 않고 지지만 받는다만약 당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당신의 우상을 깨닫도록 하지 않고, 어떤 죄악된 습관들도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지지하기만 한다면, 당신의 신앙이 너무 편안하다는 신호이다.건강한 신앙은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답지만 불편한 과정을 통해 당신을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격렬하게 다듬고 빚어간다.7. 동료 크리스천과 ‘사랑으로 이야기하는 진리’의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범죄나 죄에 대해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오히려 각자도생하며 서로의 삶에 참견하지 않는 편이 언제나 더 편안한 선택이다.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결정을 내릴 때, 그저 무시해 버리는 것이 더 편안한 선택이다.하지만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사랑은 진리와 대치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의 믿음이 사랑 가운데 진리를 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너무 편안한 믿음이다.8.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당신의 성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일은 변화를 수반한다. 비록 언제나 곧게 성장하지는 않겠지만, 크리스천의 삶은 앞을 향해 성장하는 삶이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이다.만약 당신이 거의 자라지 않아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성장한 부분에 대해 언급해 주지 않는다면, 당신의 신앙은 너무 편안한 신앙이다.불편한 기독교그렇다면, 왜 ‘편안한 기독교’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까? 편안한 기독교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대가가 크고 불편한 길을 걸으며 우상을 부수도록 도전하지도 않고 십자가를 지는 고난도 감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안한 기독교는 편안하고 소비지향적인 세상에 어떤 선지자로서의 역할도 할 수 없는 기독교이다. 편안한 기독교에는 선교에 대한 절박함도 없고 성장을 향한 능력도 없다.반면 ‘불편한 기독교’는 생명과 변화로 이어진다.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김을 주는 사람이 되도록, 자기 희생을 특징으로 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 가장 어려운 일을 하셨던 그분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하기 힘든 일을 하도록 하고, 어려운 진리를 끌어안도록 하며, 어려운 사람들과 더불어 살도록 한다. 그러한 삶은 불편할 수 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 불편함의 이면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8 Signs Your Christianity Is Too Comfortable역자: 하늘샘
영성
신앙과소명
편안한기독교
불편한기독교
기독교신앙
CS루이스
삼위일체
성육신
하나님의주권
성령의임재
은사에 대한 고민
by Thomas Schreiner
2019-01-11
은사를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과연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임무일까? 아니면 현대 사회의 대표적 문화인 ‘자기애 추구’의 한 측면일 뿐일까?자신의 은사를 파악하고자 하는 현상은 오늘날 마치 사람들이 에니어그램(Enneagram)과 같은 성격 유형 테스트에 심취하는 것과 비슷한 흐름일지도 모른다. 에니어그램은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유형을 아홉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며, 누구나 이 중 하나의 유형을 타고난다고 설명하는 조사 방법이다. 이 프로그램은 대중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에게도 큰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복음주의 리더 중 한 명인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에니어그램이 성경의 말씀들과는 여러 측면에서 그 궤를 달리 한다고 경고한다. 러셀 무어(Russell Moore) 역시 이러한 조사 방법은 은사의 본질을 통찰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다만 그에 따르면, 이러한 설문 조사는 작성자의 잠재적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기 위한 참고 자료로서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으며, 특정한 바람에 대한 동기 부여에 사용하거나, 개인의 성향에 대한 대표적인 방향성 정도를 알아보는 데에 이용할 수 있다.나는 성령의 은사를 파악하려는 노력에 있어서도 에니어그램이 내포하는 것과 유사한 한계점이 있다고 생각한다.은사 유형 테스트는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지난 몇 년에 걸쳐 에니어그램과 비슷한 형태의 은사 유형 테스트가 유행하였다. 하지만 이는 은사를 파악하기 위한 입문 단계 정도에 그친다는 제한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설문 방법은 정작 답안의 작성자가 지역 교회 안에서 어떠한 신앙적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정확하거나 세밀하게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신앙 생활에 대해 1부터 5까지의 숫자로 순위를 정한다고 가정해보라. 이것이 과연 정확할 수가 있는가? 그러한 방법은 결국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더불어, 각각의 질문 역시 그 질문을 만드는 연구자의 편견이나 선입견, 혹은 유도하는 바가 스며들 수 있기 때문에, 질문지 자체에 부분적인 결함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답안을 작성하는 사람이 그 질문과 결과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부여받지 않은 은사를 받았다고 착각하거나, 반대로 이미 받은 은사에 대해 간과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각각의 사람에게 타인과는 완전하게 다른 독립적인 은사를 부여하셨는데, 유형 테스트는 단 몇 가지의 종류로 모든 은사를 구별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전혀 분석하지 못한다. 은사는 DNA를 검사하듯이 추적하고 분석해서 알아낼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다.교회에서의 삶을 통해 은사를 발견하라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하는 최고의 방법은 이와 같은 테스트가 아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는 그러한 프로그램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의 많은 성도는 그 선물을 발견했고 또한 잘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역사를 통하여 은사를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배울 수 있는데, 이는 바로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와 교제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스스로의 은사를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아마 어떤 성도는 이미 교회 안에서 사랑으로 교제하고 있지만 아직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은사에 대한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은 은사를 행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 신앙의 선배들은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도 명확히 몰랐고, 이를 알고자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여러 방법으로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강력한 영향력으로 자신들이 받은 선물을 베풀었다. 만약 당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다른 성도를 위하여 기꺼이 시간과 열정을 내어줄 때, 당신은 그 시간 속에서 필히 주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게 되기 때문이다.은사 유형 테스트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만약 당신이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중에 그러한 테스트를 받게 된다면, 이러한 경우에는 그 조사 방법이 유용하게 작용할 것이다. 종종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에, 다른 성도의 조언이나 특정 프로그램의 보조를 받아 자신의 은사를 헤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테스트와 같은 장치들은 분명 자기애를 만족시키는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진 특별한 역량을 알게 된다면 이를 통해 교회 사역에 좀 더 효과적으로 헌신할 수 있으므로, 그러한 조사 방법은 도움이 될 수 있다.나 자신을 파악하라나 자신을 아는 것의 중요성은 로마서 12장 3절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삶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이 본문에서 바울은 스스로를 너무 높게 여기지도, 그렇다고 평가 절하하지도 말라고 조언한다. 그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제대로 알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라고 가르친다. 은사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양면의 위험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예를 들자면, 어떠한 이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착각한다. 반대로 다른 이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다른 성도의 역량이나, 심지어 자신 이외의 다른 지체들은 필요하지 않다고 자만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 안의 성도는 모두가 소중하며 각각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공동체의 구성원 그 한 명 한 명이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각자 받은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제대로 사용할 때에, 이는 교회의 사역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비록 은사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 사항은 아니지만 말이다. 바울 역시 섬기는 은사가 있으면 섬기는 것으로,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것으로, 혹 위로의 은사를 받았다면 위로하는 것으로 서로를 도우라고 권면한다(롬 12:7-8). 만약 당신의 은사가 상대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라면 그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물론 이 조언이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봉사나 전도 등을 하지 말거나 혹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바울의 권고를 자기 합리화의 방패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은사에 집중하라는 진정한 뜻은 우리의 인생이 결코 길지 않으니 각자가 소유한 강점을 십분 발휘하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렇게 행함으로써 이 땅에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좀 더 효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우리가 각자의 은사를 알고 그에 힘쓰는 것은 다른 성도와 교회에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다만, 지속적으로 언급하였듯이 은사를 모른다고 해서 걱정하지는 말라. 교회를 섬기는 길 위에서 다른 성도의 입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당신의 은사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이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받은 선물에 대해 한시라도 빨리 알고자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판단과는 방향이 다르다. 하나님은 분명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당신을 사용하실 명확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리고 그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주님과 성도를 섬기는 오랜 시간 속에서 서서히, 그리고 또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파악하기에 앞서 인내를 가지고 당신의 교회를 섬기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Not) to Discover Your Spiritual Gifts번역: 정새롬
영성
신앙과소명
은사
고민
그리스도인
자기애
교회
에니어그램
러셀무어
케빈드영
불완전한 삶의 아름다움
by Chad Bird
2019-01-02
아직 유치원에서 색칠 놀이를 할 즈음, 혹은 세발자전거를 겨우 탈 즈음의 어린 시절부터 그 영혼의 밭에 뿌려지는 씨앗이 있다. 그 씨앗은 TV와 각종 미디어를 통해 물과 거름을 공급받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그 후 때가 차면 곧 꽃을 피우고, 벌과 바람의 도움을 받아 다시 무수한 씨앗을 사방으로 퍼뜨린다. 우리는 이 씨앗을 경쟁심, 성취욕, 또는 우월감이라고 부른다.“일등이 되어야 해.” “특별해야만 해.” “남들보다 돋보여야 해.” “친구를 밟고 일어서.” “너의 이름을 높여.” “평범은 안돼.”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현대 사회를 장악한 성취주의에 세뇌된다. 완벽에 대한 열망은 서구는 물론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다. 하지만 과도한 성취주의는 감당하기 힘든 사회적 악몽이 되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곤 한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성공 만능주의는 타인에 대한 믿음을 사그라뜨리고, 관계의 희망을 부수며, 사람을 향한 사랑을 말살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인격적인 개념이자 사회적 문젯거리가 된다.성공주의의 폐단이제야 막 빛을 보기 시작한 내 상실의 여행은 사실 20년 전인 18살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이 기나긴 여행의 열매부터 말하자면, 나는 야망을 향해 허우적거린 끝에 길을 잃었고, 졸업장이 보장하는 행복을 내려놓았으며, 성취에 대한 과한 집착과도 이별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지난 20여 년의 시간 동안 줄곧 성취주의에 사로잡힌 채 살아왔다. 학창 시절에는 우수한 성적을 위해서, 목회자가 된 이후에는 탁월한 찬양과 월등한 헌금액을 향하여 고군분투하였다. 나는 인생이라는 사다리의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고자 매번 그렇게 기를 쓰고는 했다. 원하던 학위를 손에 쥔 후에도, 그 다음의 학위, 또 그보다 높은 학위를 계속해서 움켜쥐며 나아갔다.결국 나는 라틴어와 히브리어, 독일어를 넘나들며 여러 신학 고전들을 막힘없이 읽고 쓰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이토록 화려한 성취와는 달리 내 삶은 실패를 경험하고 있었다. 많은 학위와 지식을 얻었지만, 나는 정작 어린 내 딸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동물을 무서워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타인들의 박수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의 가장 소중한 영역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이 실패의 뒷이야기가 궁금한가? 역설적이게도 나는 실패하는 것에 성공함으로써, 성취 만능주의에서 벗어난 삶의 행복을 뒤늦게나마 알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평범한 삶의 추구를 통하여 안정을 배우고 있다. 원대한 꿈을 따르기 위해 목표 이외의 것은 보지 못하는 생활, 그 인생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만족을 주는지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다.조용한 삶이 주는 아름다움바울은 조용한 삶을 추구하라고 조언하였다(살전 4:11). 그가 만약 이 내용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아닌 오늘의 우리에게 쓰고자 했다면, 아마도 그가 가진 두루마리 종이로는 지면이 모자랐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마치 우스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야망을 잠재우는 연습을 하라고, 겸손의 옷으로 자신을 드러내라고, 그리고 소소한 삶을 추구하라고 말이다. 즉, 바울은 우리에게 개인적 성취에 도취하지 말고, 그 성취를 앞세워 관계의 주도권을 확보하지 말며, 그 성공을 통해 나의 무게감을 입증하려 하지 말라고 지적한다. 또한 본인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드러나야 하는 자리를 은근슬쩍 탐내지 말라고 조언한다. 다시 말해, 그는 우리에게 성공주의라는 그릇된 문화를 경계하라고 요구한다.화려함 대신에 고요한 삶을 추구하라는 조언은 인생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조언의 정확한 뜻은 첫째, 위로만 향했던 눈을 아래로 돌림으로써 당신 주변의 사람들을 살피라는 의미이다. 인생의 사다리를 어떻게 뛰어오를지, 어떤 트로피를 거머쥘지 골몰하느라 오직 나밖에 보지 못하는 삶을 경계하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는 눈을 돌려 하나님이 내 곁에 머물도록 하신 가족과 이웃을 둘러보고, 이들을 깊이 섬겨야 한다. 그는 나 자신보다는 이웃들이 어떠한 문제로 고민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 조용히 생각하라고 조언한다(빌 2:3). 더 크고, 화려하고, 강력한 성취를 끝없이 갈망하는 행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이러한 우상을 바라보는 대신 가족 및 이웃과의 작고 소소한 행복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고요한 삶을 추구하라는 의미는 둘째, 하나님이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일상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라는 것이다. 대단히 짜릿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굉장한 성취를 통하여 주님의 역사를 보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부서진 심정으로 죽음의 골짜기를 다니는 자들과 함께하신다. 주님은 이리저리 헤매느라 상하고 새카매진 자녀의 발을 만지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상한 심령을 소생시키려 마지막 피와 땀까지 모두 쏟아 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다. 한없이 높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낮은 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약속한 때가 되어 주님의 나라가 열리는 그날, 우리는 하나님께 칭찬받을 자가 누구일지 기억해야 한다. 분명 하나님은 작고, 연약하고,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아이와 같은 자에게 그 왕관을 씌워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최고라고 말씀하실 자는 일등의 자리에 선 자가 아니요, 낮은 곳에서 겸손히 거하는 자일 것이다.하나님은 언제나 그 위대함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분은 한계가 없는 장엄함을 지녔지만, 좁고 낮은 당신의 공간에 거하신다. 또한 세상을 창조하신 그 영광의 목소리를 약한 목회자의 입을 통하여 나타내신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대단한 업적으로 우리를 복종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기 원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란,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선물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평범하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생명과 같은 것이다.예수님을 닮아가는 겸손한 신앙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라는 고전에는 고참 사탄이 등장한다. 그는 웜우드(Wormwood)라는 이름의 신참내기 사탄에게 “변함 없는 것에 질색하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라”라고 지시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불변에 대한 거부감은 사탄이 “인간의 마음에 심어 놓은 가장 효과적인 약점”이다. 하지만 불변이란 질색해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도리어 크리스천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은 물론, 지금 이후로도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실 분이다. 인간은 이전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죄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부터 지금까지 성령을 통하여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성취를 위해 끊임없이 방황할 것이 아니라, 그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연약함과 평범함 속에 있는 이웃들이 알아가도록 도와야 한다.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그 영광 안에서 크리스천이 누리는 기쁨은 전혀 빛나거나 화려하지 않다. 이는 아기 예수의 탄생이 말구유에서 시작되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예수님의 부활을 빈 무덤으로 증명하셨던 것과 역시 같은 이치이다. 주님과 그 백성들의 영광은 우리의 대단한 성취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오히려 그 영광은 겉보기에는 마치 소박한 선물처럼 보이는 삶의 작은 면면에서 발견된다. 그것도 화려한 포장지가 아닌, 재생지로 감싼 듯 평범하고 겸손한 삶 속에서 말이다. 구유에서 태어나신 연약한 아기 예수와 죽임 당하신 메시아. 우리는 낮고 곤궁한 자리를 자처하셨던 예수님을 상기하면서, 지금 그와 같은 자리에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웃을 바라보아야 한다. 바로 우리 주위의 배고파 하는 이웃들과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 말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온전한 삶을 이루는 길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약함 속에 처한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우리의 사랑을 모두 비워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비워진 자리가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시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고요한 삶이 주는 하나님의 큰 영광을 맛보게 될 것이다. 원제: The Joy of an Unaccomplished Lif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새롬
영성
신앙과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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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주의
조용한삶
고요한삶
하나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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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영광
의심에 대해 기억해야 하는 다섯 가지
by Emma Scrivener • Glen Scrivener
2018-12-19
신앙에 대한 의심의 문제에 있어 가장 힘든 부분들 가운데 하나는 의심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의 믿음은 마치 도미노와 같아서 한 곳에 의심이 생기면, 전체가 다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불안을 줄 수 있다.의심은 보통 작은 데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빠른 속도로 증폭된다. 예를 들어, 종종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로부터 시작된 의구심은 곧 ‘하나님이 과연 들으실까?’ 또는 ‘하나님이 나에게 신경을 쓰실까?’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하나님이 계시긴 한 건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대된다.이런 신앙적 의심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할 때, 우리는 심지어 무신론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불신이 겉으로 드러나지 못하도록 가슴앓이 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주일학교 교사, 구역장, 또는 기독교 단체에 몸 담고 있다면, 이러한 의심을 어떻게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혹은 당신의 가족이 모두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마음 속 불신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하지만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 의심은 당신의 마음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당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그 존재는 마치 잡초와 같아서 모른 척 내버려 두어도, 어느새 한 뼘이나 자라나 곧 당신을 삼킬 듯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심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다음의 다섯 가지 사실을 기억하라.1. 모든 비기독교인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믿지 않는 친구들을 바라볼 때, 마치 그들은 믿음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대상인 듯 부러워하지 말라. 모든 사람들, 심지어 가장 완고한 무신론자조차도 정신적으로는 의지하는 구석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 존재를 자신이 눈으로 보거나 입증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는 우주의 지속성, 감성과 이성의 실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진, 선, 미, 그리고 사랑 같은 보이지 않는 가치에 매달리기도 한다. 이들 중 그 어떤 것들도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하지만 그들이 믿는 그 대상 안에는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이 붙드는 진, 선, 미, 그리고 사랑의 뿌리에는 사실상 변치 않는 어떠한 진리도 자리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이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무신론과 비교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2. 모든 성도들도 의심을 가지고 있다의심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다. 때때로 나는 나의 결혼, 친구들, 합리성, 요리, 저술,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의심한다. 가끔씩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다. 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의심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8:26)라고 책망하셨다.나는 종종 죄를 짓고, 의심도 한다. 양자 모두 그 자체로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놀랄 일도 아니고 예상치 못할 일도 아니다. 의심 없는 기독교인은 마치 죄 없는 기독교인이 존재할 수 없듯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죄의 모든 시작은 불신이므로 사실 의심과 죄는 함께하는 것이다(요 16:9).요한1서 1장 8-9절을 이러한 관점에서 풀어보는 것도 지나친 확대는 아닐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의심]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의심]을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의심]을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3. 믿음은 감정이 아니다감정은 혈당과 함께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호르몬의 작용이다. 만일 감정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감정은 나의 직장과 결혼, 신앙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선천적 기질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요르(즉 곰돌이 푸에 나오는 캐릭터로 이요르는 항상 우울한 당나귀)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티거(마찬가지로 곰돌이 푸에 나오는 캐릭터로 활기찬 호랑이)이다. 티거가 밝고 명랑하다는 이유로 믿음의 영웅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단지 운 좋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 물질인 세로토닌 복권에 당첨되었을 뿐이다.정신적 건강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병적인 우울증은 누군가에게는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아래 5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금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우울증에 걸렸더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 4. 믿음은 환상이 아니다우리는 증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설득되었기 때문에 믿는다. 믿음은 배의 근육에 힘을 잔뜩 주고 어둠 속으로 대담하게 발을 내딛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이미 반짝이는 찬란한 빛을 향해 우리의 눈을 뜨는 일에 더 가깝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눈 뜰 수 있을까?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라고 말씀한다. 로마서에서 이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무려 274개의 구절이 앞서 배치된 것을 생각하면, 이는 무척 중요한 메시지임을 알 수 있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당신에게 읽고 들을 말씀이 있음을 기억하라.믿음은 반이성적인 것이 아닌, 이성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설득력 있는 진리에 대한 응답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계속해서 들으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어떤 의심이 생기더라도, 복음의 길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라. 성경과 성경의 인물들로 당신을 둘러싸라. 그러면 당신은 계속 참된 것에 젖어 있게 될 것이다.5.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믿음은 우리가 애써서 끌어당기거나 혹은 밀어내는 무언가가 아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와 그의 이름을 ‘믿는’ 자가 병행을 이루고 있다. 이는 구원을 위해 힘껏 통과해야 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관문이 아니다. 이들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두 가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혼인을 ‘결혼하다’(능동적)와 ‘아내가 되다’(수동적)의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믿음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두 가지 묘사이다.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의심의 시간 속에 있다면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 성경, 성례, 기도,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해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갈 때,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은 다시 살아난다.우리가 ‘믿음’이 무엇인가에 골몰하는 것보다 예수님께로 시선을 옮길 때, 의심은 줄어들고, 상대화되고, 대체되며, 심지어 새롭게 승화된다. 의심의 여정은 어쩌면 당신이 예수님에 대해 보다 깊고, 풍부하게 알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방법인지도 모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Things to Remember About Doubts번역: 주영식
영성
신앙과소명
의심
믿음
감정
환상
존재
하나님
예수님
하나님의 No에 Yes로 답하다
by Ann Swindell
2018-12-18
하나님이 항상 치유와 온전함을 보장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나를 즉각적으로 치유하시는 것이 그분에게는 정말 작은 일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과 씨름했다.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쯤, 10여 년 동안 나는 털을 잡아 뜯는 병과 투쟁하고 있었다. 나는 그 병을 싫어하고 멈추기 원했지만, 매일 내 속눈썹과 눈썹을 쥐어 뜯어 냈다. 신경학적으로 나의 뇌는 그 행동을 멈출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었다. 치유를 요청하는 기도에 대해 계속 ‘아니다’(no)라는 답변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침묵하고 멀리 계신 것 같았다.어느 날, 하나님께 불일 듯 불만이 일어나자, 나는 기도실로 향했다. 일기장에 분노와 경솔한 말들을 막 쏟아냈다. 하나님이 나쁘고 냉담하며 멀리 계셔서 이런 문제를 잘 다룰 줄 모르시는 것 같다고 써 내려갔다. 속눈썹을 일기장 여기저기에 흩어 놓은 채, 나의 행동에 수치심을 느끼며 앉아 있었다.울며 눈물을 흘린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는 외쳤다. “하나님 내가 계속 묻고 있잖아요. 왜, 왜 나를 치유하여 주시지 않는 건가요? 그 많은 시간의 기도와 간구들, 금식한 날들까지, 그것들은 다 무엇인가요? 아무것도 아닌가요?” 나는 스스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지. 그것들은 아무 변화를 주지도 않았어! 이제 더 이상 나빠질 수도 없게 되었다고.”나는 그분을 밀어내기 원했다. 어디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기를 원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씁쓸해지고 분노의 씨가 불신의 뿌리로 깊게 자리잡는지를 알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쓴 뿌리와 하나님과 싸운 방식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정신이 혼란스러웠고 마음이 상했다.반항이라는 선택우리가 하나님께 간청하고 요청했는데도 우리의 상황을 바꿔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반항 아니면 순종 밖에 없다. 반항은 우리를 재판관의 자리에 앉힌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당연히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선언한다. 그분이 우리의 계획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마음이 상한다. 또한 우리는 그분이 잘못했다고 외친다.물론 하나님께 솔직해야 하겠지만, 진정한 솔직함과 반항적인 솔직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진정한 솔직함은 하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겸손과 신뢰로 간구한다. 반항적인 솔직함은 하나님의 잘못을 지적한다. 우리의 솔직함이 반항적으로 변하면, 결국 우리는 거칠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그분을 판단하고 그분으로부터 도망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정말로 필요한 위로의 원천을 거절한다.순종이라는 선택두 번째 선택은 순종이다. 우리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할 때라도 ‘네’(yes)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단기간 동안에는 더 힘들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계속 동행하려면, 오직 이 길 밖에 없다.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그 교만한 반항심으로부터 나를 끄집어내셨다. 그 결과 작은 순종의 걸음들을 옮기자, 그분은 자신의 진리와 온유를 내게 상기시켜 주셨다. 그분은 나의 마음을 두 가지 방법으로 어루만져 주셨다. 첫 번째 방법은 내 교수님의 아내인 니타(Nita)라고 하는 분을 통해 나를 도우시는 것이었다. 그녀와 나는 한 달에 두 번씩 만나 주님과 동행하는 삶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이야기하고 기도했다.어느 날 오후,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의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분노, 불만, 상처 등이 거품처럼 커져서 식탁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니타의 말이 아니라 그녀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 손위에 올려놓고 함께 울었다. 그녀는 꾸짖거나 즉각적으로 나를 바로잡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어딘가로 억지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지도 않았다.그녀가 이 말을 했을 때, 그 목소리는 바이올린 소리처럼 울림이 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앤(Ann),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항상 아는 것은 아니지. 그렇지만,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늘 알고 있어. 항상 알고 있지.” 내가 말했다. “그분의 응답을 때로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아니다’라는 대답이 서로 조화가 된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렵네요.” “앤, 이해해요. 나도 그래요.”나는 니타가 감내해야 했던 상실들, 겪어야 했던 슬픔들을 떠올렸다. 나는 그녀가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 쉬고 다시 말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내가 동의했다. “아무것도 끊을 수 없지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어느 누구도요.” 물론,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실 때도 그 말씀은 사실일 것이다. 그날 니타가 건네 준 친절하고 진실한 말은 내게 축복이 되었다. 그녀는 성경 말씀을 들어 이야기해 주었고 내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날 하나님은 나의 상처와 불평, 불만을 치유하기 시작하셨다.두 번째 방법으로 나는 순종하며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와 만났을 때, 그분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시간을 보낸 성경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이해할 수 없을 때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게 되었다. 진정으로 겸손한 기도로 그분께 마음을 쏟아내자, 나는 그분의 위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치유보다 더 나은 것하나님께 조금씩 순종하자, 그분은 내가 반항심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다. 나의 진정한 필요는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다. 반항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은 어떤 병이나 원치 않는 증상을 계속 다루는 것보다 더 비참하다고 할 수 있다.치유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얻었다. 그리고 그분이면, 내게 충분하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Fighting to Say ‘Yes’ When God Says ‘No’번역: 정은심
영성
신앙과소명
하나님
반항
순종
선택
치유
yes
no
그리스도
일이 우상이 될 때
by Daniel Darling
2018-12-13
친구들이 휴일에 집에서 쉬거나 누군가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시간에 나는 새벽부터 무거운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두툼한 옷을 여러 겹 입고서 곧 아버지와 집을 나섰다. 건설업에 종사하시던 아버지는 내가 아직 십대임에도 배관 수리 기술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 휴일이나 방학 때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고객 집을 방문해 구리 수도관, 플라스틱 배수관, 강철 가스관 같은 걸 설치했다. 나는 건설 분야의 다른 기술에는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 않았지만, 배관 작업만큼은 꽤 야무지게 해냈다. 그 일을 하면서 용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게는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성실과 하나님의 부르심, 이 둘의 관계를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배관 수리를 그만두어야 하는 날이 올 때까지도 나는 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직장을 갖고 나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신학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성실한 모습은 나의 삶에 강력한 교훈이 되었다. 아버지는 말수가 별로 없으셨다. 하지만 하시는 일에서 보인 뛰어난 역량과 성실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일을 능숙하게 익히려면 내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긴 기간 동안 이 일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내 ‘조금 더’에 대한 내 나름의 계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완벽주의자에 가까울 만큼 일을 철저하게 하셨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의 완성도에 이르려면 며칠 더 배우는 것으로는 아무 성과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쟁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아버지께 직접 배웠지만 나는 결국 따져 물었다. “벽 안에 있는 파이프는 아무도 볼 수 없는데 왜 그렇게 줄을 맞춰 곧게 세우세요? 그렇게까지 균일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얘야, 남들은 못 보더라도 내가 지금 보고 있잖니.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신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을 닮아가는 선물내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은 인간의 존재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곧 일은 선하다는 점이다. 이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일곱째 날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마치시니”(창 2: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그러므로 일이란 창조주께서 당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선물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창 2:5).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이 없이는,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일하고, 땅을 갈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는 사람 없이는 미완성이다. [창세기의 이러한 기록은] 마치 모세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사람이 가꾸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또 돌아갈 수도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는 이 땅을 숭배하라고 지음 받은 것도 착취하라고 지음 받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는 가장 좋은 의미에서의 ‘환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을 지으시고 우리에게 가꾸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은 단지 인간 삶의 부산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일은 우리를 인간되게 하는 필수 요소다. 우리는 이 땅을 다스리도록, 곧 혁신하고 탐구하도록 지음 받았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함으로써 그리고 이 세상을 돌봄으로써 하나님을 닮는다. 저주받은 노동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다른 모든 선물들처럼 우리의 노동은 그 죄(the fall)로 말미암아 부패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다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자.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창 3:17-19)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가꾸어야 할 곳으로 완벽한 조화 가운데 창조된 이 세상이 이제 썩어짐의 종이 되어 신음하고(롬 8:22), 저주의 고통을 겪고 있다. 땅이 반격한다. 일이 힘들고 지치게 하는 고역이요, 때로는 결실조차 없는 노역의 반복이다. 일하고, 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자고…. 그리고 죽는다. 우리는 일에서 만족감을 얻고 싶어 한다. 이는 온당한 바람이다. 우리는 일에서 언제나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틀린 생각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러나 타락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일을 하면서 만족도 좌절도 모두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복음은 우리의 노동에 새로운 목적을 부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예술가, 장인, 뛰어난 행정가, 법률가, 완벽한 주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노동의 창조적 가치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곧 우리의 노동이 인간 존엄성을 좀먹는 엉겅퀴와 가시에서 마침내 우리의 노동이 해방되는 나라를 바라보게 한다는 의미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원래 목적, 하나님을 닮아가는 목적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우리가 일하는 것은 구원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해야 할 선한 일이 있다. 일이 우상이 될 때안타깝게도, 우리는 일을 가장 중요한 것, 곧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 아니라 숭배와 경배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다.예를 들어, 경력이 정체성과 가치를 드러내는 이름표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대화를 어떻게 시작하는지 떠올려 보라. 교회에서 새 신자를 맞이할 때, 기차에서 옆자리 승객과 인사할 때, 혹은 새로운 이웃 가정을 만날 때, 아마 별생각 없이 이렇게 물을 것이다. “무슨 일 하세요?” 그리고 상대방의 대답에 따라 우리는 그 사람을 이러저러하게 판단하게 된다. 나는 많은 시간을 내슈빌이나 워싱턴DC에서 보낸다. 이 두 도시에서는 직업에 대한 질문이 특히나 중요하다.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사는 복을 받은 내슈빌에서는 종종 사람들의 창조적인 활동이 그들을 규정하는 기준이 된다. “작곡가입니다.” “아무개와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제품/기업/비영리단체에서 마케팅 일을 하고 있습니다.” 워싱턴DC에서는 직업을 묻는 것은 곧 파워 게임(power game)이다. 명함을 교환하고 영향력 순으로 접촉 순서가 정해진다. “의회 세입세출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이 싱크탱크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 정부기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 하면 어떤 질문이 떠오르는지 생각해 보라.• 내 직업은 중요한 직업인가? • 내 직업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인가?•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사람들은 내 직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할까? 물론 이런 질문을 입 밖에 내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일이 우상이 되어버렸을 때는 한걸음 물러서서 그 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강요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하던 일을 집으로 가져가고 있지는 않은가?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는 않은가? 이메일에 눈을 떼지 못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긴급 프로젝트에 매달려서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일이 우리 귀에 속삭인다. ‘너는 신과 같다. 쉴 필요 없다.’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직업(vocations)에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쏟아 부은 것이 불필요한 희생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고서야 그동안 얼굴 없는 신을 숭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게 되기도 한다. 일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나 하나님 대용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지 우리의 급여나 직위, 직장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 이 좋은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이것들이 우리를 공허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러하기에 매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효용성이나 우리의 영향력이나 우리의 급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형상을 지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터 잡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단지 직장인이 아니라 그와 함께 영원한 공동상속인이다. 원제: Your Work Matters-But Don’t Deify I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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