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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잠든 사이 인생의 포도원에서
by Marshall Segal
2019-05-28
우리는 밤새도록 게으름을 부리진 않는다. 그저 하루를 시작하는 그 짧은 시간에, 달콤하고 친숙한 이 속삭임에 오늘도 다시 녹아들 뿐이다.“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잠 24:33).이 “좀더”가 매일 아침 얼마나 소리도 없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좀더 자는 게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걸까? 다음 절에서 "좀더"의 결과에 대해 이렇게 경고한다.“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24:34).게으름이 안겨주는 변명거리는 늘 매혹적이다. 한 두 시간 더 자도 괜찮다고 우리를 설득할 뿐 아니라, 어떤 때에는 텔레비전, 인스타그램, 유튜브에 좀더 시간을 쓰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쉬려다가 까딱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앞선 잠언을 기록한 저자는 물질적으로 빈곤해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데, 이는 또한 영적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지침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게으름이 우리가 먹고 마시며 휴식하는 일상을 망칠 수 있다면, 이는 당연히 우리의 영혼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다.게으름이 부르는 결과여기서 잠언의 지혜자는 게으른 자가 당하는 처지를 관찰한다.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잠 24:32). 그는 게으른 자의 모습에 고개를 돌리기보다, 그 상태를 가까이서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마치 황폐해진 “밭”과 “포도원”에 들어가 꼼꼼히 살펴보듯(잠 24:30), 게으름을 방치했을 때 일어난 결과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이처럼 그 결과를 자세히 살펴보는 자세는 게으름의 덫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말하자면, 게으른 자의 포도원에 얼마나 많은 가시와 엉겅퀴가 올라왔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지혜자가 그렇게 관찰해 본 결과, 그 포도원은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는' 상태를 넘어 아예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한때는 비옥했던 땅이 이제는 온통 잡초로 뒤덮여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뭐든 잘 자랐는데, 지금은 무얼 심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땅이 되었다.게으른 자는 내년엔 반드시 포도원을 돌보리라고 늘상 다짐했다. 하지만 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게으름은 결국 도적 같이 그 포도원을 조금씩 약탈해 가고 말았다(물론 포도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소유에도 그 영향이 미쳤을 게 분명하다). 마치 삼손의 경우처럼(삿 16:19-20), 코골며 깊이 자는 동안 모든 것을 잃고 말은 것이다. 이 사람은 포도원을 가꾸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그 이상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좀더 자자는 욕구에 따랐을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게으른 자의 손에는 결국 남은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그에게 남겨진 게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제 지킬 가치도 없는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포도원을 지키려고 쌓아 놓았던 돌담이 무너졌는데(잠 24:31), 누구도 굴러다니는 돌로 다시 담을 쌓아 주지 않는다. 아무도 일하지 않는 포도원을 위해 누가 다시 돌담을 쌓겠는가? 게으른 자도 엉망이 된 돌담을 바라보다가 한두 개의 돌을 주어 한쪽에 놓아둘 뿐이다. 혹시 내일에나 일할까 싶어서 말이다.우리라면 그런 포도원을 볼 때 무엇을 느껴야 할까? 내가 방치하는 작은 게으름이 결국에는 인생의 포도원을 병들게 하고 망가뜨릴 수 있다는 교훈이 아닐까?포도원을 지키기 위한 네 가지 기도 앞선 지혜자의 관찰은 우리를 낙담시키기 위해 주어진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일깨우기 위해 주어졌다. 그리하여 삶을 올바로 살게 하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마음의 눈은 쉽게 감기는 버릇이 있다. 따라서 불침번과 같이 깨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잠 4:23).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기 위해 게으름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게 하신다.그렇다면, 영적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여기에 네 가지 제목이 있다.1. 하나님, 가시떨기를 경계하게 하소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눅 8:14). 만일 우리가 게으름으로 무엇인가를 심고 가꾸면, 덜 자란 식물밖에는 거두지 못한다. 또한 함께 올라오는 가시떨기는 결국 우리의 신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신앙을 자라게 하는 습관은 잘 관리하되, 그 믿음을 둔화시키는 행동은 뿌리째 뽑아야 한다.2. 하나님, 믿음의 뿌리가 더 깊어지게 하소서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눅 8:13). 포도원을 망치는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식물은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해 제대로 생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뿌리가 짧으면, 인생이 순탄할 때밖에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 혹 비바람이라도 몰아치면, 그 믿음은 금세 꺾이고 만다. 그러므로 강한 시련이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그분 안에서 내 믿음의 뿌리가 깊어지고 튼튼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3. 하나님, 도적의 침입을 막아 주소서우리의 포도원을 망쳐 놓기 위해 벼르는 자는 사탄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 8:12). 교회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한번 상상해 보라. 매주일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지면, 마귀는 교인들의 마음을 헤집고 다니며 마치 길가에 떨어진 돈을 주어 모으듯 그 말씀을 낚아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내 마음의 포도원은 마치 총알이 날아다니는 영적 전쟁의 한복판과 같아서 그 안에 뿌려지는 씨앗을 잘 품어야만 한다. 따라서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도적의 침입을 막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4. 하나님, 인내로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비유를 마치신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신앙의 여정은 서두를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인내해야 하는 길이다. 따라서 그 길을 가는 자는 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잠자기 위해 그 길을 가진 않는다. 그 걸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거룩한 열심이 있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인생은 오랜 농사와 같다. 즉 게으름을 물리치며 인내함으로써 풍부한 열매를 거두는 과정과 같다.소중하지만 위험한 선물 잠은 우리의 대적이 아니다. 이에 대해 한 시편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게으른 자의 휴식도 헛되지만, 바쁜 자의 수고도 헛되다. 마땅한 휴식은 하늘에서 보낸 선물과 같고, 이 선물을 바르게 사용할 때 우리는 삶을 망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헛된 수고의 떡을 먹느니, 잠을 자는 편이 낫다.그런데 성경은 또 다른 경고도 한다.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잠 20:13). 우리에게 지혜가 있으면, 언제 잠을 자야 할지(잠 3:24), 또 언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잠을 삼가야 할지를 알게 된다. 또한 우리에게 잠이 소중한 선물일지라도, 그 자체가 참된 안식이 될 수 없음도 깨닫게 된다. 다윗의 고백처럼 말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결국 포도원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선물 받은 잠을 누리되, 그분보다 선물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 4:27). 우리는 깨어있는 동안 심고 물을 준다. 묵상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섬긴다. 그런 후 목격한다. 그 모든 시간에 우리를 키우시는 분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Love Not Sleep번역: 장성우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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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늘을 지키시는 하나님
by Vaneetha Rendall Risner
2019-05-21
올해 초 팔이 완전히 망가졌다.옷도 혼자 입을 수 없는 상태여서, 아침 9시도 되기 전에 이미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나는 후소아마비 증후군(현재로서는 원인이 명확치는 않으나, 소아마비를 앓았던 사람이나 다른 유전 요인으로 인하여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인 이후 신경 세포의 이상으로 근육의 약화가 진행되고, 이로 인해 관절염이나 연골 손상 등 여러가지 후유증이 나타난다-역주)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이로 인한 어려움은 어느 때에 어떤 종류의 고통이 닥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통이 당장 오늘 하루를 힘들게 할지, 혹은 어느 만큼의 엄청난 고통일지도 알 수 없다. 나는 오늘 하루 또다시 얼마나 큰 싸움을 버텨내야 할까?내게 왜 이런 부당한 일이 생겼냐고 주님께 울부짖었다. “이렇게는 못 살아요. 남은 인생을 이렇게는 못 산다고요. 정말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요.” 나는 절망했고 화가 났으며, 또 너무도 힘들었다. 이 외침이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정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육체적 고통을 짊어진 채로 남은 인생을 살 수는 없었다. 잠잠함 속에 찾아온 말씀그렇게 한참의 울부짖음이 끝나자 나는 잠잠해졌다. 할 말을 다 했고 이제 기다리는 일이 남았다. 하나님이 과연 응답하실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는 듣기 위해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곧 조용함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의 마음에 들어왔다. “나는 너에게 남은 평생 동안 고통 속에서 살라는 게 아니야. 오늘 하루를 살아내라는 거란다.” 나는 이 울림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라고 느꼈다.그리고 그 즉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왔다. 상황은 달라진 게 없지만,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오늘이라는 한정된 시간 만큼은 아마도 내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남은 삶' 전체보다 훨씬 덜 무서웠다. 단 하루라면, 그것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안도의 홍수가 나를 감싸고 지나간 후, 아까의 그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너에게 남은 평생 동안 고통 속에서 살라는 게 아니야. 오늘 하루를 살아내라는 거란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었을까?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 말씀인가? 성경이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나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기억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그렇다. 하나님은 오늘 내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고, 나는 그렇게 오늘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에 관해서, 아니 내일에 관해서 초조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하루의 근심은 그날 하루로 족하다(마 6:34). 미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분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기 때문에(애 3:22-23; 눅 1:37), 주님은 내일 아침은 또다시 새로운 기쁨과 자비를 내게 주실 것이다(시 30:5).이는 성경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사르밧의 미망인에게 기름과 밀가루는 필요한 만큼 계속 주어졌고(왕상 17:14-16), 이스라엘 군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도 주님의 천사가 185,000 명의 앗수르인을 전멸시키는 기적을 경험했다(왕하 19:35). 또한 기드온은 미디안의 막강한 군대를 고작 300명으로 패배시켰다(사 7:1-25). 사실, 그들 중 아무도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종종 우리에게도 그런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막 9:23).하나님은 미래에 대해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나를 안심시키셨다. 그러나 내가 그분을 믿으면 상황이 바뀔 거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단지 오늘을 견디라고, 그리고 내일을 믿으라고만 말씀하셨다. 기뻐하라, 기도하라 그리고 감사하라그러나 오늘을, 어떻게 매일의 오늘을 견뎌낼까? 나는 궁금했고 다시금 불안했다. 오늘 하루는 여전히 내 앞에 버티고 있고 거기에는 어려움이 가득했기 때문에, 또다시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그때,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충분하다는 사실과 이를 말해주는 성경 구절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그렇다. 그분의 능력은 나의 약함으로 더 완전해진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그분을 나를 강하게 하시고 내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사 40:30-31; 빌 4:19).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다(시 34:18). 그 말씀대로, 내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그분은 더 가까이 나를 붙잡으실 것이다(약 4:8).우리는 오늘 하루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뻐해야 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며, 또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살전 5:16-18).고난의 순간마다 하나님께로 고난 중에 기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광야를 걸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집중해서 보아야만 한다. 또한 시련은 무겁고 끝이 없지만 영원과 비교하면 순간적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고난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내게 안기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후 4:17).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육체적이든, 감정적이든 또는 영적이든, 모든 통증은 나의 정신을 사로잡고는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순간마다 나는 내 자신에게 함몰되어 더 깊은 절망으로 빠질지, 아니면 예수님께 집중함으로써 은혜를 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선택한다. 이제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고난은 나로 하여금 숨 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만든다.순간 순간 나누는 그분과의 대화는 나를 변화시켰다. 그 방법이 아니고는 나는 도저히 하나님의 충분함과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이다(고후 3:18). 고난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도록 함으로써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보게 하는 주님의 특별한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고통을 당하지만 부서지지 않음을 아는 믿음오늘 하루가 어떻게 끝났는지를 생각해보면 솔직히 힘들었다. 하지만 남편이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고, 간신히 운전해서 물리 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에는 치료사가 문 앞에서부터 나를 기다리다가 부축해주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것을 어떻게 공급하시는지를 오늘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종종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었고, 집중하기가 힘들었으며, 또 고통은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절망의 순간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다시 오늘의 남은 일상을 사는 것. 나는 이제 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중략]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나의 하루가 아무리 힘들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 하루가 나를 무너뜨리게 하지는 않으셨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고통과 위로는 밀물과 썰물처럼 서로 교대한다.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오늘 하루 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건 감정적인 고통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고통이 더 심한 날이라도, 나는 하나님이 내 남은 인생 전부를 고통 속에서만 살지 않도록 하심을 알기 때문에 위로를 받는다. 어떤 날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시기도 하지만(엡 3:20), 또 어떤 날은 내가 그냥 폭풍 속에서 간신히 하루를 버틸 정도로 도우신다.그렇게 매일매일, 그분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신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Will Sustain You a Day at a Time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말씀
일용할양식
하나님
고난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믿음
‘여가 시간’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by Paul Heintzman
2019-05-17
누구나 여가 시간(free time)을 좋아한다. 직장 일이나 (자고, 씻고, 빨래하고, 아이들 돌보는 일 같은) “해야 할” 일들을 마쳤을 때 주어지는 시간 말이다.‘여가 시간’은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또한 아무도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고, 아무도 나의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간을 뜻한다. 이 시간에 우리는 정말 하고 싶은 무언가에 즐겁게 집중할 수도 있고, 혹은 목표를 향해 계속 일을 할 수도 있다. 어떤 결정을 하든지 그것은 자신에게 달려있다.그리고 그 결정과 시간을 통해 우리는 자유를 느낀다. ‘여가 시간’이 가져오는 세 가지 문제현대 문화가 정의하는 여가 시간은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도 이렇게 생각해야 할까?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현대인의 여가 활용에서 세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첫 번째는 우상숭배다. 누군가는 일을 숭배하듯이, 어떤 이들은 여가 시간을 통해 여행, 운동, 취미, 음악, 독서를 숭배한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여가 시간을 창조주를 섬기는 데 쓰기보다는 피조물을 섬기고 숭배하는 데 사용한다(롬 1:25).두 번째 문제는 쾌락주의다. 삶의 최상의 목표를 쾌락에 두는 것은 큰 문제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여가 시간 전체가 쾌락을 위한 것이라는 가정에 전혀 의문을 갖지 않는다. 패커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사치를 좋아하고 쾌락에 끌리고 있다. … 쾌락(지식, 감각, 예술, 맛있는 음식, 술, 자기애)의 추구는 사회의 타락을 보여주는 단면이다”라고 지적했다.세 번째 문제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다. 이는 여가 시간이 생산성에 기여할 때만 가치가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여가의 목적은 사람이 더 생산적으로 일하도록 ‘다시 만드는 것’(to re-create)이다. 그리스도인도 일중독에 빠지면 이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신다(딤전 6:17)는 성경의 가르침을 간과하고 있다. 여가 시간은 이러한 누림을 위하여 필요하다. 다시 말해, 여가 시간은 일에 미치는 생산성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아마도 그리스도인에게 여가 시간과 관련된 가장 일반적인 문제는 이러한 공리주의적 관점일 것이다. 개신교는 전통적으로 강한 노동 윤리를 장려해 왔고, 이에 따라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은 여가보다 노동을, 쉼보다 활동을 강조하게 되었다. 패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God’s Plans for You)>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대 그리스도인은 분주함을 그들의 종교로 삼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바쁘게 사는 사람들을 우러러 보며 일에 중독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다.” 많은 이들이 휴식을 취하기 어려워하고, 때로는 과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기도 한다. 칼 존슨(Karl Johnson)이 노동과 여가 시간에 관한 세 권의 책을 평하는 글에서 썼듯이, 우리 사회는 시간의 빈곤, 급속도로 돌아가는 삶, 과로, 일 숭배, 과다 지출로 인해 시름하고 있다.(여가) 시간 구속하기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도인이 여가 시간에 대한 세속적 정의를 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쉼을 제대로 누리려면, 여가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이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먼저,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일을 하든지 여가 시간을 가지든지 모든 시간이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동에만 관심을 두시지 않는다. 우리의 시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하나님의 관할 아래에 있다. 우리는 쉼의 시간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해도 되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두 번째, 여가 시간을 종종 양적인 개념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주말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곤 한다. 구약 성경도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지시한다. 하지만 성경은 휴가를 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가에도 질적인 차원이 분명히 있다. 우리는 쉴 때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의 선물을 기뻐하고 축하해야 한다(출 20:9-11). 또한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완성하신 구속을 상기하며, 쉼이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도록 해야 한다.이 진리를 삶에서 실천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매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오해한다. 이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 주간의 시간 사용을 기록해 보고, 당신의 활동을 (1) 일상생활, (2) 노동, (3) 여가 시간으로 분류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당신의 삶이 주로 일상생활과 노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여가를 위한 기회를 더 만들 필요가 있다. 휴식을 위하여 되도록 많은 시간을 갖도록 하라. 우리는 점점 시간을 세분화하여 사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쉼과 천천히 걷는 삶을 위해서 시간을 내는 것이 좋다. 매주 찾아오는 안식일을 통해 긴 휴식을 누리고, 또한 주중에도 짧은 안식의 실천으로 여유를 가지라.여가 개념을 알려줄 성경 구절에 친숙해지는 것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안식일은 일할 때와 일하지 않을 때를 포함하는 삶의 리듬을 가르쳐 준다. 안식일과 성경적 쉼의 개념은 모두(창 2:2; 신 12:9–10; 시 95:11; 히 4:9–11; 마 11:28–30) 휴식, 평화, 기쁨, 자유,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에 대한 축하를 강조하며 여가의 질적 차원을 제안한다. 같은 맥락으로, 절기(신 16), 잔치(창 21:8), 춤과 음악(시 149:3), 환대(요 12:1-8), 친구 관계(눅 7:34)에 대한 성경 구절은 여가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는지를 제안한다.마지막으로, 전도서가 가르치는 진정한 여가란 일중독(전 4:4-12)이나 쾌락주의(전 2:1-11)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 안에서 내게 주신 삶을 누리는 것이다.주 안에서 여가 시간을 누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게 된다.원제: Your ‘Free Time’ Isn’t Fre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휴식
쾌락주의
실리주의
여가시간
제임스패커
우상숭배
칼존슨
참된 기독교 영성에 관하여
by David Strain
2019-05-07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 생활의 뼈대를 이루는 구조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이 글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의 영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확실히 ‘영성’(spirituality)이란 개념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개념을 흔히 개인이 추구하는 주관적인 영적 체험과 관련지어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정신적인 행복 내지 정서적인 만족과 연결시킨다거나, 때로는 동방 정교회의 명상이나 자아 성찰 등을 의미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 영성은 그런 활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영성의 대상, 다시 말해 그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속한 문화에서 유행하는 영성의 모델들은 각자의 자아를 중심으로 삼는다. 그래서 경험 그 자체, 또는 자신의 행복감을 위해 영적 체험을 추구한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영성은 경험 그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으며 우리의 자아를 중심에 두지도 않는다. 기독교 영성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이 그 핵심이다. 즉 그분을 알고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에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이 글에서 나는 영성을 이렇게 정의하고자 한다. 곧 성경의 방법대로 삼위 하나님과 점점 더 깊어지는 교제를 추구하는 신앙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모든 교제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또한 그 교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은혜의 방편 역시도 그 연합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연합은 사귐을 가져온다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진리의 영인 또 다른 보혜사를 아버지께 부탁하여 보내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다.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another Helper)라는 표현은 예수님과 동일한 성품의 다른 보혜사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신은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써 아버지께로 떠나게 되었지만, 자신과 동일한 성품의 또 다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이 보혜사는 장차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 속에 거할 성령을 의미했다. 그런데 18-19절에서 우리는 흔히 생각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그리스도와 그 성령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요 14:18-19).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비록 떠나겠지만 제자들에게 이내 오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부활이라든가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재림을 가리키는 내용이 아니라 성령의 강림을 언급하시는 내용이었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와 성령이 연합되어 있어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져다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여기서 예수님은 성령이 행하시는 사역으로 인해 우리가 예수님 자신과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그러면서 이 연합의 경이로움을 이렇게 표현하신다. 우선 예수님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하신다. 이는 복되신 삼위일체의 내적 교통 가운데 성부와 성자 간의 연합과 사귐이 있다는 말씀이다. 이처럼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서로 매개함으로써 연합과 사귐을 이루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결국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또 다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경험하며 누리게 된다.이 사실은 사도 요한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라고 말한 구절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진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요한이 묘사하는 교제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서로 간에 사귐을 갖는다는 데서 머물지 않다. 그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가 서로 간에 사귐을 가질 뿐 아니라 그 사귐을 아버지와 아들과도 함께 누린다는 데에 있다. 이 교제의 범위와 영광을 생각하면 놀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곧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는 상태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이 사실을 에베소서 2장 18절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즉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분 안에 살게 하시며, 이로써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여기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기독교의 경험적인 요소, 즉 경험적으로 알고 느낄 수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이 있는 교제, 즉 영혼을 살찌우는 교제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누리게 하신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이성에 의존하는 합리주의자(rationalists)가 아니라, 초자연주의자(super-naturalists)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도 소통과 사귐과 교제를 갖도록 이끄시는 성령의 역사를 믿는다. 혹시 누군가가 이런 설명이 불편하게 여겨진다면, 그래서 오직 교리와 관습에 대한 신학만 추구하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친밀히 나누는 사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면, 아마도 그는 아직 회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연합이 가져오는 사귐은 은혜의 방편을 통해 경험된다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더욱 깊어지는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을까? 그 사귐이란 오싹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어떤 체험을 말하는 것일까? 아주 영적인 사람들이나 체험할 수 있는, 이를테면 오순절주의에서 말하는 두 번째 축복 같은 경험을 의미할까? 아니면 극단적인 관점을 가진 어떤 이들이 말하듯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은 인위적인 행위를 통해 이끌어 낼 수 있는 현상을 의미할까? 정말 영적 체험을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가령 촛불을 켜 놓는다거나 그럴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의 154문은 이렇게 질문한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외적 방편을 통해 자신이 행하시는 중보 사역의 혜택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염두에 두고 이 질문을 다시 해 본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그분과의 사귐을 경험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대요리문답이 무엇이라고 답변하는지 한번 주목해 보자. “그리스도가 자신이 행하시는 중보 사역의 혜택을 교회에 전달할 때 사용하시는 외적이며 통상적인 방편은 그분의 모든 규례인데, 그 가운데 특별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이 방편들은 택함 받은 이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데에 효력 있게 사용된다.”이 가르침에 따르면, 성경에서 그분에 의해 제정된 모든 규례가 외적이며 통상적인 방편이 되지만, 그중에서도 다른 모든 방편의 근본이 되는 세 가지 핵심적인 방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역으로 예비된 혜택을 우리에게 전달하신다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이 방편들을 믿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사귐 가운데 성장하며 우리가 그분과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과 더 깊은 사귐을 갖고자 한다면, 그렇게 우리의 신앙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의 임재를 더욱 느끼고 싶다면, 어떤 특별한 모임이나 행사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영적 카타르시스라든가 두 번째 축복 등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교회에서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다. 매주 말씀이 신실하게 선포되는 자리에 앉아 그 설교를 들어야 한다. 또한 성찬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떡과 잔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집에서는 성경을 펴고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섭취하며, 더 나아가 우리 마음을 성령이 주관하시도록 하나님께 늘 기도해야 한다.이런 방편들을 통해 그리스도는 자신의 약속대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키우고, 죄악은 죽이며, 우리의 심령에 평강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도우셔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자가 누리는 영광 가운데 그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며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가지고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게 하시기를 소망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hat Is Real Spirituality?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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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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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귑
은혜
경험
웨스트민스터대요리문답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
by Jerry Bridges
2019-04-09
귀신들린 소년을 치유하신 사건(마 17:14-20)은 언뜻보면 마태복음에 기록된 여러 치유 기적들 중의 하나일 뿐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예수님이 치유의 과정에서 믿음의 역할을 강조한 점이 좀 독특하다. 마태복음 9장에 기록된 기적들 중에서는 믿음이 현저하게 나타나지만, 17장에서는 예수님이 강조하신 그 믿음이 모자라게 나타난다.마태가 기록한 다른 기적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분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 인간의 믿음에 의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귀신들린 소년을 치유하신 사건에 바로 앞서 일어난 예수님의 변형 사건은 매우 중요한 예다. 그 기적은 장관이었으며, 인간의 믿음이 관여되지 않았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이 오천 명(마 14:13-21)과 사천 명(마15:32-38)을 먹이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항은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을 행할 때에 우리의 믿음에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두 번째 사항은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을 종종 요구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것을 귀신들린 소년의 치유 사건에서 알 수 있다. 마가는 예수님이 소년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 이것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소년의 아버지는 심히 괴로워하며 예수님께 말한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22). 그는 이미 제자들이 소년을 고치지 못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고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여기에서 그의 믿음은 제자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님이 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불확실하게 소망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소년의 아버지에게 대답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 성경적 신앙은 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묘사하는데, 그것은 히브리서의 수신자인 유대인들에게는 적절한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각한 거부에 직면해 있었고, 그들의 소망을 그리스도 안에 확실하게 두고 있도록 격려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에게 믿음은 예수님이 그의 아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그 아버지와 같다. 우리는 곤란해 보이는 상황을 대면할 때도 있다. 우리가 오래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에게 능치못할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믿어야 한다.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나이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들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였고, 하나님은 이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라고 대답하신다. 수백 년 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갈대아인들의 침략을 당할 위협에 직면해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밭을 사라고 말하자 그의 믿음은 약해졌다(렘 32:6-26). 하나님의 응답은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27절) 였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기도 응답이 없을 때도 혹은 불가능한 상황인 것 같아도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믿는다는 말이다.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 17:19)라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대답에는 믿음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가 그들의 작은 믿음 때문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 전에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마 10:1-8). 그런데 그들의 믿음이 이번에는 왜 그렇게 약해졌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명령에 귀신이 즉시 반응하지 않자,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아마도 그들이 이전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성공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에 확고하게 의지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또한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마태복음 17장에서 세금을 내는 일상의 일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행동으로 보이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세금 걷는 자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내며 물고기를 잡으면 그 입에 필요한 만큼의 세겔이 있을 것이니 가져와 세금을 내라고 하신다. 간결한 이 설명은 의문을 일으킨다. 물고기의 입에 어떻게 세겔이 들어가게 되었을까? 베드로는 어떻게 주변에 있는 다른 물고기가 아니라 바로 그 물고기를 잡았을까?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물고기 입 안에 동전이 있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사역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누군가 ‘우연히’ 바다 속에 한 세겔을 떨어뜨렸는데 한 물고기가 그것을 물어서 그 입에 있게 되었고, 그 물고기는 베드로가 그물을 던진 바로 그 장소에서 헤엄치고 있다가 붙잡히게 되었을 수 있다. 이 일들은 모두 기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필요했으며, 예수님은 이 일들 각각을 주도하셨다.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실 때만큼이나 섭리 하실 때도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따라서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이 약하여 씨름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섭리하심으로든지 우리를 돌보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자.출처: www.ligonier.org원제: Faith and the Power of God번역: 정은심
영성
신앙과소명
우리의믿음
하나님의능력
예수님
제자들
마태복음17장
섭리
사역
믿는자
하나님이 내 직장에서 함께 일하신다
by Keith Welton
2019-04-05
출근했는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지고 아예 이곳에는 안 계시다는 생각까지 든다. 사방에서 유혹이다. 질끈 눈을 감고 조금만 반칙하면 잡을 수 있는 기회도 적지 않다. 아무도 직장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고 그런 대화만 오갈 뿐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신다고 믿는다. 이 말은 곧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지금 그 직장에 보내신 것도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하신 주권적인 일이었다고 믿는다는 뜻이다.당신은 스스로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믿음을 가지고 직장에서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면서 그 수많은 회의와 업무를 감당하는 믿음의 거인이 된다는 게 애초에 가능하기나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이 저기 멀리 계신, 바로 그런 직장에 있는 셈이다.현실적으로, 직장은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어떻게 일하실지가 드러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 속에서 일하시는 곳, 그래서 당신이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 닮아가도록 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다음 여섯 분야에 관심을 가지도록 지금 직장에서 만나는 어려움과 스트레스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 하나님은 당신이 믿음에 집중하도록 직장을 사용하신다.하나님의 영광에 비추어볼 때 인생에 무의미한 순간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창조하셨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전 10:31).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즐거움, 쾌락, 자기계발, 또는 유익을 위해 일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존재이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주일 예배에서 특별 찬송을 했을 때, 또는 슈퍼볼 트로피를 드는 것과 같은 위대한 순간에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을 통해, 평범하기 그지없고 때로는 힘들 때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성경의 위대한 영웅들은 바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에서 난파를 당했을 때에도, 옥에 갇혔을 때에도, 또는 들에서 양을 칠 때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일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또 동시에 궁극적으로 받을 상급을 잊지 않도록 한다. 그렇다. 인생에서 만나는 시련은 힘들지만 하나님이 주실 상급의 위대함은 그 어려움을 가볍고 일시적인 것으로 만든다(고후 4:17).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직장에서 접하는 모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2. 하나님은 당신이 마음에 집중하도록 직장을 사용하신다.바울은 한마디로 매순간을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때문에 살아간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일을 하도록 했다. 그 사랑은 우리도 그렇게 만든다. 복음이 만들어 내는 변화는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 겉으로 드러난다.직장에서 의욕이 없을 때, 지치고 동기를 부여하기 힘들 때, 그냥 포기하고 싶을 때, 일을 대중 때우는 것으로 몰아붙이는 상사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우리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이다. 어려움 때문에 아무런 영감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바로 그때 예수님을 생각하라.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히 12:2).3. 하나님은 당신이 손에 집중하도록 직장을 사용하신다.손은 마음의 도구이다. 우리 내면이 무엇을 믿는지 알고 싶다면, 손을 보면 된다. 우리는 일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더 높은 차원의 소명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이 땅에서 받는 보상이 아니라 더 위대한 보상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의 수준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나사렛 목공소에서 나온 물건 중에서 다리가 비뚤어진 테이블이나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서랍은 결코 없었다고.”우리가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다(롬 12:1). 승진이나 보상, 출세를 위해서만 일한다면, 그 결과는 언제나 낙담과 실망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최선을 다해 일함으로써 예배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산만함과 장애를 극복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하라. 그리고 오로지 그분만이 제대로 보상하실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일을 해 내라.4.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에 집중하도록 직장을 사용하신다.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당신이 일을 어떻게 하는지, 그것이 보면서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다. 어떤 일이 놀라운 결과를 낼 때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기에 주변 사람들을 제대로 섬기면서 일해야 한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를 통해서 그들을 섬길 수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성령의 열매로 가득 차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성령의 열매가 드러나는 일터를 상상해 보라. 즐겁고 활기로 넘칠 때 지금과 얼마나 달라질지를. 그런 직장을 만드는 시작은 바로 당신이다. 그런 직장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간절히 구하라. 그런 변화를 일으키기에 직장 규모가 너무 작은 것 같다면, 또는 당신이 하는 일이 변화를 만들기에는 너무 사소한 것 같다면, 들에서 자기 일꾼들과 가난한 과부 시어머니와 며느리에게 친절과 자비를 베푼 한 남자와 그가 일으킨 놀라운 결과를 기억하라(룻 2:3-13).5. 하나님은 당신이 마음에 집중하도록 직장을 사용하신다.지금 직장에서 가장 필요한 변화는 새로운 환경이 아니라 직장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우리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롬 12:2).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하나님이 이 직장에 계시지 않거나 또는 내 일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미 우리가 성경적 세계관이 아닌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빠져 있음을 말해 준다. 6. 하나님은 당신이 증인에 집중하도록 직장을 사용하신다.복음은 우리를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곳으로 이끈다(고후 10:13-16).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만드는 물건에 대해서도, 또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당신이 지금 함께 일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과 일의 의미에 대해서 아무런 동기부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직장에 그토록 높은 스트레스가 있는 이유도 아마 함께 일하는 그들이 눈에 보이는 일 그 자체 외에는 믿을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지금 그 직장에 있는 이유는 그런 환경에 일조하는 단순한 온도계가 아니라 그것을 바꿔 내는 온도조절기가 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당신에게는 그들과 나눌 복음이 있다. 복음으로 자극해서 그들이 일과 삶에서 최고의 가치를 뽑아내도록 지금 도울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을 왜 그 직장에 부르셨는지 제대로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성경에서 읽은 것을 나누고 성경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직원과 팀원이 되기 위한 이 여행에 동참하라고 초청하라. 당장은 거절할지 몰라도, 그들은 자기 자신과 직장을 더 좋게 만들려는 당신의 귀한 열망을 높이 살 것이다. 그리고 당장 들려오는 거절도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는 더 깊은 차원의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주일 아침에 당신과 함께하시는 만큼이나 월요일 아침에 직장에서도 함께하신다. 그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우리 대부분은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일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누구도 피자를 만드는 데, 프로그램을 짜는 데, 제품을 선적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의 삶 모든 부분에서 함께하신다. 문제는 깊은 묵상을 통해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할 때, 그 사실을 잘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하는 모든 일 뒤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하셨던 하나님이 계셨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직장에서 경험하는 당신의 모든 게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원제: Six Ways God Works in You at Work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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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
집중
복음
사랑
제물
성령의열매
그리스도의 은혜를 어떻게 온전히 소망할 수 있을까?
by Jen Wilkin
2019-03-18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베드로는 ‘그러므로’라는 중요한 말로 이 권고를 시작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당신에게 가져다 줄 은혜를 온전히 소망하라는 말로 마친다. 베드로가 말한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분이 재림하시는 날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 날은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진 이들에게는 슬픔이 가득한 날이 될 수도 있다. 즉,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내게 주어지는 그날의 모습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가 내려 주실 은혜를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을 대비하고 또한 깨어있으라는 의미이다.마음을 대비하라‘마음을 대비하라’는 말은 전투를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고대인들은 주로 긴 외투를 입었는데, 이는 그들이 싸움을 할 때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따라서 전투를 하러 나서기 전, 그들은 움직이기 쉽도록 허리를 띠로 묶었다. 움직임을 제한하는 옷을 입고 그대로 출전한다면, 이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자세가 아닌가?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악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베드로에 따르면, 은혜를 소망하는 행위는 좋은 의도를 갖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거룩한 전투는 싸움에 방해가 되는 부분이 없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행동을 우선 요구한다.그렇다면 전투에 방해가 되는 부분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신자의 마음이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분투할 때, “나는 욕을 줄여야 해”, “나는 충동적으로 소비하는 습관을 멈춰야 해”라고 하면서 종종 그릇된 행동을 줄이려는 시도를 먼저 행한다.하지만 베드로는 바로 우리의 생각이 죄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모든 그릇된 행동은 죄를 열망하도록 이끄는 악한 생각의 결과이다. 따라서 소망을 진정으로 은혜에 두기 원한다면, 우리는 죄의 근원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유혹은 나의 생각이 정당하다고 착각하도록 그 마음에 거짓을 속삭인다. 이러한 거짓된 유혹에 넘어가 나의 생각이 정당하다고 결정하면, 그 생각은 행위를 향한 욕망에 불을 붙이게 된다. 야고보가 말하듯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행동이나 욕망을 새롭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추구하라고 충고한다(롬 12:2).우리는 생각이 욕망을 잠재우고,줄어든 욕망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과정을 일상에서 종종 경험한다. 밀크쉐이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하지만 어느 날 용기에 적힌 영양 성분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이를 통해 밀크쉐이크가 내 건강을 매우 나쁘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밀크쉐이크를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이를 먹고 싶은 욕망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제는 건강에 좋은 다른 음료를 고르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마찬가지로 죄의 결과를 먼저 이해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죄에 내어주려는 욕망을 보다 쉽게 끊어낼 수 있다. 죄가 사망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달콤해 보이던 죄가 더 이상 나를 쉽게 유혹하지 못할 것이다. 바른 생각은 욕망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다시 바른 행동으로 이어진다. 다만, 바르게 생각하는 일은 마치 전투와 같이 격한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깨어 있으라두 번째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 모든 소망을 두는 일에는 마음의 근신, 즉 깨어 있음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깨어 있는 모습의 반대는 취한 상태이다. 술 취한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보라. 인지 능력은 왜곡되어 명백하게 생각할 수 없고, 욕망이나 행동을 다스릴 수도 없다. 또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며, 지혜로운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에게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통제와 바른 마음을 가지라고 촉구한다.진정으로 모든 소망을 그리스도께만 두고자 한다면, 모든 생각과 행위를 그리스도의 기쁨에 온전히 맞추어야 한다.베드로가 ‘온전히’라는 말을 언급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소망을 은혜에 두라고만 표현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우리의 소망을 은혜에 '온전히' 두라”라고 강조했을까?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저 소망의 일부만 은혜에 두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 두는 불순종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신자들이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우리 자신의 선한 행위, 배우자나 자녀, 또는 심지어 목회자에게 소망을 두는 경향이 있다. 아니면, 은행 잔고나 직장에서의 지위, 혹은 SNS 계정의 인기 여부에 소망을 두기도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망한다고 스스로 고백하지만, 많은 경우에 이는 그리스도와 세상적인 무엇인가에 함께 소망을 두고 있다는 의미이다.소망을 결코 나누어 두지 말라. 우리는 야고보서 1장 6절부터 8절에서 언급되는 의심하는 자, 곧 두 마음을 품은 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재물을 하늘과 땅에 모두 쌓아 놓는 일에 대해 경고하신 사실과 내가 바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임을 기억하라. 베드로는 소망을 온전히 주님의 은혜에만 두고, 의심과 유혹에 대한 전투를 준비하며, 깨어 있는 상태에서 나의 순종을 항상 세심히 살피라고 조언한다. 소망을 은혜에 온전히 두는 사람은 이 세상의 헛된 쾌락을 멀리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는 자이다. 그러한 백성은 현재의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미래에 얻을 유산을 귀하게 여긴다. 베드로 당시의 청중은 회심의 결과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 관계적 안정감을 상실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들은 세상에 소망을 둘 여지가 거의 없는 고단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들에게 온전한 소망을 미래에 두라는 말로 자비를 표현하며 장차 맞이할 영원한 구원을 기뻐하도록 격려했다.우리도 역시 이생에서 불안과 상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베드로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할 것이다. 헛되고 잠시 뿐인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대비하는 마음과 깨어 있는 상태를 통하여 미래의 은혜에 온전히 소망을 두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wo ways to fix your hope on future grace번역: 정은심
영성
신앙과소명
그리스도
은혜
소망
대비하라
깨어있으라
베드로
근신
기쁨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
by John Piper
2019-02-21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히 11:37-39).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가르치셨다(막 8:34). 또 만약 사람들이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부르면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라고 하시며, 예수님 자신을 귀신의 왕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저주하고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라고 분명히 예고하셨다(요 15:20).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자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고난이 따를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바울에 관해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라고 하셨다. 이러한 고난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신자의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설계에 따라 주어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설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빌립보서 2장 30절에서 ‘무엇인가를 채운다’라는 표현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담겨 있는 물질을 바울에게 전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와 비슷한 차원에서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도 그 표현은 바울이 자신의 ‘고난’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세상에 전달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바울이 당한 많은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현하여 세상에 드러내 보이기 위한 하나님의 설계에 의해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선교사들의 고난을 세상이 목도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사랑을 보게 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 선물을 세상에 주신다. 히브리서 11장 37-38절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세상이 이러한 선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말씀한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은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선물로 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없다는 의미이다. 즉 그들에게는 과분한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고난 받는 성도들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가? 바로 그 성도들의 믿음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히 11:39). 즉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 그들의 고난은 믿음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받는 고난의 가치는 그들의 믿음 안에서 확인되었다. 왜 그러한가?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을 그 고난에서 건져 주시는 기적을 행하신다(히 11:27-35). 어떤 때는 고난을 다 겪게 하시되 참고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히브리서 11:35-39). 고난에서 건짐 받는 믿음과 고난을 인내하는 믿음, 이 두 믿음의 공통분모는 모두 신체의 자유나 육체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더 소중히 여김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고난에서 건짐 받은 신자는 “내가 얻은 자유나 생명보다 예수님이 더 낫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죽임을 당하는 자는 “내가 잃는 모든 것들, 심지어 내 생명보다 예수님이 더 낫습니다”라고 외친다. 이것이 믿음의 정수이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 신뢰하고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믿음의 정수이다.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특별히 고난 받는 선교사들)은 이런 이유로 인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 된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 중에도 믿음을 유지하고 견디어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이 세상에 복음의 영광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삶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나 죽음이 앗아갈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보다 예수님이 더욱 소중하다는 복음의 진리를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 준다. 이는 얼마나 생생한 십자가의 선포인가! 이 진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안겨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다. 세상은 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이 선물을 감당할 수도 없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세상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는 그러한 선물을 세상에 안겨 준다. 마침내 세상이 고난의 쓰디쓴 선물을 받는 시점이 도래하였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 안에 있는 자로 드러나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을 깊이 알아 감으로써 그때를 대비하자. 세상에 그런 선물을 주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준비하는,존 파이퍼 목사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s Undeserved Gift to the World: Christian Sufferers번역: 개혁된실천사
영성
신앙과소명
하나님의선물
예수님
바울
그리스도인
고난
성도
선교사들
일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by John Piper
2019-02-20
두 주 동안 이어진 릴레이 컨퍼런스를 마치고 집으로 막 돌아왔을 때, 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과 함께 사역했던 시간을 생각하며 너무나 감사했다.그때 진행되었던 한 컨퍼런스의 주제는 '고용'이었는데, 특히 '젊은 노동자'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었다. 나는 컨퍼런스의 리더로서 이 주제가 바람직한지에 대해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이에 나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가르치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인용하여 그 주제가 적실하다는 입장을 대변했다.그러자 "젊은 직장인들이 일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서 당시에 내가 대답했던 내용을 이 지면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의존성 을 길러라하나님께 철저히 의지해서 일하라(잠 3:5-6; 요 15:5). 하나님 없이 당신은 숨쉬거나, 움직이거나,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말할 수 없다. 물론 영적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절실함을 고백하고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라.진실함으로 일하라업무의 세심한 부분까지 진실하고 신실하게 처리하라. 우리는 시간을 엄수하고, 업무에 온전히 충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도적질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함이 없는 사람들은 업무 태만으로 고용주에게 손해를 끼친다.실력을 키우라맡은 일을 잘 처리하라. 하나님은 당신에게 진실성뿐 아니라 실력을 선물로 주셨다. 그 선물을 소중히 여기고 잘 연마하라. 실력의 향상은 의존성과 진실성 위에 세워진다.하나님을 향한 기업 풍토를 조성하라당신에게 영향력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직장의 방침 및 목표가 예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기풍을 조성하라.회사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힘쓰라당신의 회사가 영혼을 파괴하지 않고, 또 삶의 질을 높이는 선한 영향력을 갖도록 기도해야 한다. 일부 기업들은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포르노, 도박, 마케팅 사기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와 기회을 통하여 힘쓸 때, 회사는 영혼을 돌보는 방향으로 영향력을 옮겨갈 수 있다. 우리에게 그 기회가 왔을 때, 담대하게 옳은 방향으로 이끌라.하나님의 빛이 드러나도록 대화하라직장은 관계의 장이므로 의사소통을 통해 관계를 형성한다. 동료들과 일상적인 대화에서 당신의 기독교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라. 당신의 빛을 등잔 '아래'에 숨기지 말고, 등잔 '위'에 세우도록 연습하라. 호감이 가도록, 자연스럽게, 그리고 즐겁게 실천하라.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40:16). 사랑으로 섬기라동료들을 사랑으로 섬기라.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커피나 점심을 사러 가야 할 때, 먼저 자원해 보라. 또한 소소한 부분을 기억하고 관심을 보이는 방법도 괜찮다. 단순히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 월요일의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을 함께 지는 사람으로 당신을 각인시키라. 이는 그들이 죄와 인생의 짐을 대신 지시는 위대한 예수님을 바로 당신을 통해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돈 에 대한 지금까지의 접근을 바꾸어라직장은 당신이 돈을 버는 곳이다. 하지만 그 돈은 하나님의 것이지 당신의 소유가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청지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버는 돈이라도 하나님의 재정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그 흐름이 관대하게 넘치도록 하라. 축적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남에게 베풀고 예수님을 높이는 기업에 투자하기 위해 돈을 벌라. 돈을 관리하는 그 모습을 통해 예수님이 당신의 가장 귀한 보물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다.감사하라삶과 건강, 일과 예수님에 대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다음 직장에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불평만 하는 사람들 틈에 끼지 말고,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감사가 동료에 대한 겸손한 섬김으로 드러나게 하라. 반드시 오늘의 일터에서 희망적이고, 겸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직장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더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예들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빛을 비춰 주실 때마다, 위의 목록에 나만의 방법을 계속해서 추가하라. 핵심 포인트는 직장에서 무엇을 하든지, 곧 먹든지 마시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대하게 증거하는 데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12 Ways to Glorify God at Work번역: 개혁된실천사
생활
직업
의존성
진실함
실력
선한영향력
청지기
감사
증거
사랑
사별의 고통을 다루는 신학과 신앙
by Christopher Catherwood
2019-01-29
내 아내는 8년 동안 파킨슨병과 합병증을 앓던 중, 지난 달 겨우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장수하는 집안의 유전자를 받은 덕분에 의사의 예상보다는 좀 더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죽음은 내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아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도 교회의 소그룹 성경공부에 참석하였고, 요양원에서도 끝까지 그 모임에 참여하였다. 나는 그녀가 온 생애 동안 섬겨 온 바로 그 주님의 품에 안겨 있을 거라고 믿는다. 아내는 하늘에 있고, 63세의 홀아비인 나는 여기 이 세상에 남아 있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80대와 90대까지 살기 때문에, 나는 아내의 죽음이 비교적 이르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지난 사십 년 동안 오래된 청교도 교회에 행복하게 다녔다. 그래서 아내의 이른 죽음에 관해서도 교회에서 배운 나의 신학적 관점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말한다. 그 관점이란 깊은 슬픔이 비록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바라보는 눈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상실의 고통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내 아내를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는지 혹은 그렇게 신실한 여성을 왜 파킨슨병에 걸리도록 허락하셨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다.삶의 미스터리아내와 나는 아기를 가질 수 없었다. 이 문제가 우리에게는 큰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앞으로 남은 내 생애 동안에도 그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전에는 그 원인을 알지 못했던 일들이 이제는 명확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1982년에 나는 캠브리지대학교(Cambridge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위한 논문 심사를 받았다. 내부 심사위원은 매우 정직한 학자였고, (돌아가신) 외부 심사위원은 표절 문제를 엄격하게 다루기로 유명한 학자였다. 외부 심사위원은 내게 논문 작업을 1년 더 하라고 요구하였다. 내부 심사위원은 깜짝 놀랐지만, 더 저명한 심사위원의 결정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석사 학위를 받는 데 그쳤고, 그것으로 내가 학적인 직업을 가질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그 후 1991년, 나는 아내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내가 학적인 면에서 은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1997년, 아내의 조언에 따라 나는 이전의 내부 심사위원이었던 교수를 만나러 갔다. 그는 여전히 캠브리지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날 그 교수가 해외 연구 프로그램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 담당자는 마침 20세기의 역사를 가르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역사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6년, 나는 노리치(Norwich)에 있는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University of East Anglia)의 역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는 내가 논문 심사를 받던 날로부터 꼭 24년만의 결과였다. 하나님은 내가 1997년과 2006년에 어떻게 될지를 1982년에 이미 알고 계셨지만,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절망처럼 보일 때, 나는 그 어느 것도 예상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욥기서를 읽을 때, 우리는 곧 뭔가 독특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욥이 그에게 왜 그런 고난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통 중에 부르짖는 욥의 외침에도 하나님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속성에 대해서만 묘사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대답은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어떠한 설명도 되지 않았다. 세속적 독자들은 이러한 부분에서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성경이 고통의 문제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하나님이 바로 그 대답이다하지만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대답이 사실은 제대로 된 답변이다. 아무도 예수님의 고통과 구속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우리는 결국 구원을 받게 된다. 욥처럼 우리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영원의 이편에 있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아내와 나의 친구들은 우리가 욥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말하고는 했다. 우리는 욥의 생애와 비슷하게 고통을 겪고 있지만, 예수님과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내 아내는 왜 그리 일찍 세상을 떠났을가? 아내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그녀의 고통은 끝났고 이제 더 이상 통증과 질병이 없는 하늘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 바로 그 사실 외에 우리는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논문 심사에서 떨어지던 1982년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는지 이제는 비로소 안다. 그리고 그 해의 주권자인 주님은 올해에도 동일하게 우리 삶의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은 그때 나와 함께 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시며, 미래에도 여전히 함께 하실 것이다. 바른 신학을 따라가는 것은 추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냥 교리적 신념을 믿는 일이 아니다. 개혁주의적 신앙은 이와는 달라야 한다. 매우 깊은 슬픔에 빠져있을 때조차 말이다. 성경적 관점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말하곤 했던 것처럼, 이는 참된 진실이다. 우리의 감정이 어떠하더라도, 비록 슬픔이 너무 크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하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안다. 그분에게 우리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한 시간에 한 번씩 아내에게 문자를 보낼 수는 없지만, 이제 그녀와 함께 거하시는 구세주께 기도할 수 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하찮고 미미한 대상까지도 돌보신다. 참새도 그만큼은 알고 있다. 내가 사별하고 홀로 되면서, 개혁신학과 이를 신뢰하는 신앙이 결코 내 아내를 되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신학과 신앙이 사별로 혼자 남겨진 나로 하여금 오늘을 살아가도록 돕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아내를 다시 보겠지만, 나는 그 전에 여러 해 동안 이 땅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과 더불어 모든 것이 그분의 주권 안에 있다는 교리는 내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사별로 인한 깊은 슬픔이라 하더라도, 내가 남은 생애를 잘 살아가도록 지탱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 Grief Sanctified: How Reformed Theology Helps Deal with Death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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