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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무기는 문을 여는 것이다
by Rosaria Butterfield
2019-09-05
오늘날이 위험한 시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리지 않은 생각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관을 ‘상호 교차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건 진짜 당신이 누구인가가 얼마나 많은 종류의 차별(victim-statuses)을 받는지에 의해 측정됨을 의미한다. 또 이는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종류의 불일치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만 지켜진다는 믿음을 뜻한다.바로 이런 세계관이 그리스도인을 탈(포스트)-기독교 세상에 상륙시켰다. 탈-기독교 세상에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취는 자치적이고 독립적이며 오로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 개인이다. 이처럼 기독교 전통이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지워지게 된다면, 조만간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로마의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아마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충분히 이와 같이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조류에 밀려 후퇴하는 것은 얼마나 유혹적인가? 우리 자신과 자녀들이 악에서 피할 때에, 그 마음이 두려움에 휩싸이는 게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또 성경적 진실성에 근거해서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하는 말은 모두 증오심의 표현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때, 두려움에 떠는 것은 또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의 가장 좋은 무기는 문을 여는 것이다.하지만 과연 어떻게 문을 열 수 있을까? 특히 과거에 크게 상처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을 향해 어떻게 문을 열 수 있을까?1. 듣는 법을 배워라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다는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전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죄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진짜 구원은 그리스도인 이웃으로부터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지닌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먼저 말하지 말고 들어야한다. 그것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탈-기독교 공동체에서, 당신의 말이 가진 효과는 당신이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의 수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청중을 알아보고,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선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선의 영적 무기는 문을 열고, 테이블에 신선한 커피와 눈물이 쏟아질 때 필요한 크리넥스를 준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물은 반드시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영원을 기록하셨으며, 그 심겨진 영원의 일부는 존엄성에 대한 갈망이다. 주님이 없는 삶은 힘들다. 그런 삶은 딱딱한 가장자리와 가파른 경사면으로 가득하다. 그런 삶에는 희망이 없고, 그런 삶이 주는 고통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만 구속의 고통을 준다. 이웃 사람들이 가장 아파하는 곳이 어딘지 알 정도로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한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라. 예수님이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이웃에게 시간을 낸다는 것은 내가 즐길 오락 거리를 줄이고 대신 하루의 여유 시간을 준비하고 또 예산을 책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미 내 이름을 아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받지 못한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들을 위해 과감하게 새로운 길에 도전하라. 2. 당신의 마음과 집을 준비하라탈-기독교 세계에서 호의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이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그 이웃을 하나님의 가족이 되도록 초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은 이 일을 성취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가정은 교회와 세상을 이어 주는 다리이다.첫 번째 도전은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계급과 시간의 장벽은 이 중요한 기독교 사역을 이어 가는 데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러나 교도소, 난민, 위탁 양육 프로그램은 얼마든지 당신 주변에 있으며, 이들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안전한 가정은 기독교가 제시할 수 있는 위탁 보호에 대한 대안이며, 교회의 많은 가정이 이미 참여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 낯선 사람을 찾을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집을 성이나 요새 또는 박물관이 아닌, 병원과 대사관 혹은 인큐베이터로 생각해야 한다. 두 번째 도전은 상대와의 대화를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바꾸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매일 밤 드리는 가정 예배를 통해 대화의 주제를 오락 거리에서 영원함으로 바꾸는 어려운 과제를 자연스럽게 다루어 왔다. 그 방법이 궁금한가? 가장 중요한 건 매일 밤 예배를 거르지 않는 것이다. 저녁 식사 후, 남편이 짧게 성경 말씀을 전하고 나면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또 때로는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마감한다. 우리는 매일 밤 이와 같이 가정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 시간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예배에 참여시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식사 후 접시는 알아서 싱크대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대신 성경과 커피잔이 놓였다. 이렇게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가정 예배에 자연스럽게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오랜 시간 잘 준비해서 펼치는 전도 이벤트보다 훨씬 더 성공할 확률이 높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초대와 모임을 진행했다. 교회에 다니는 결혼하지 않은 싱글들과 또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웃들이 일을 마치고 우리 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돕는다. 이건 아주 재미있는 일이었다. 종종 식탁은 엄청난 세탁물이 놓이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수학 수업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이가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힘을 합쳐서 많은 세탁물과 마치지 않은 수학 숙제를 처리할 때, 우리는 그 일을 훨씬 더 잘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이웃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실 마약 흡입 또는 외도와 같은 비밀스런 삶을 가진 사람은 쉽게 계획을 짜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점에 특히 더 민감해야 한다. 아무리 계획을 짜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약속한 시간에 과연 그 정신이 멀쩡한 상태일지 혹은 몇 주 후에도 여전히 안전한 상태일지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초청이 언제나 열려 있고 또한 무엇보다 규칙적이라면, 그런 사람들도 당신의 식탁에 함께 앉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이든 아닌 사람이든, 모두 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투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물과 난장판 속에 살지만, 우리가 이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이제 식탁에는 평화가 내려앉는다. 우리는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때로는 의자를 더 들고 와야 할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바닥에 앉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가진 것을 다 내어놓았다. 대화를 위해 전화기는 잠시 치웠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꺼내 놓았고, 우리가 가진 질문도 말했다. 믿지 않는 이웃이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말을 할지에 관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함께 저녁을 먹고 성경을 펼쳤고, 동시에 우리의 마음도 함께 열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들어와 달라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대화를 멈추는 게 아니라 그 대화가 더욱 깊어지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도록 기도했다.3. 집 열쇠를 주어라지금 우리는 삶을 파괴할 정도의 깊은 외로움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외로움을 결코 정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고아가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당신의 삶이 친밀함과 소속감을 가진 인생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인이 성취, 소유, 자만심으로 가득한 허영과 같은 우상들을 허용하는 순간, 그 결과는 복음의 훼손으로 이어진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우선순위를 그만 생물학적 피가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다고 말하는 거짓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건 마치 가장 취약한 형제 자매들을 달려오는 버스 밑으로 밀어 버리는 것과 같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과거에 누리던 삶(때로는 가족과의 삶)을 포기할 때 오는 것이지, 결코 기존의 삶 위에 추가되는 게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잃는 것이 곧 얻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그렇게 될 수 있다. 마가복음 10:28-30의 내용이다.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보자. 그들은 모든 것을 다 포기했다. 이에 따라오는 상실감은 자연스럽게 슬픔과 괴로움, 몸의 기억과 야간 공포 등등, 복음을 전하는 삶이 당연히 치러야 하는 복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모든 것을 버리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이 생애에서 백배의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말한다. 그 백배의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과 나로부터 온다. 아니,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백배의 복은 따뜻한 포옹, 정기적 혹은 밤에 먹는 식사와 기도, 서로의 짐을 지는 것, 그리고 서로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복잡하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또한 이는 기혼이거나 싱글인 사람들, 젊거나 나이 든 사람들, 튼튼한 몸을 가졌거나 약한 사람들 모두를 포함한다. 백배의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속함은 영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육적이고 물질적인 측면도 포함한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약속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이 하나님의 가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함께 식탁을 나눌 장소가 있음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 현관문을 지나 식탁으로 갈 수 있을까? 당신, 그리스도인은 열쇠를 갖고 있다.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에게, 복음은 현관 열쇠와 함께 온다. 무엇이 당신을 멈추게 하는가?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족들이 모여 또는 독신자와 아이들이 다 함께 모여 생명을 주는 공동체, 시간을 들여서라도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건네는 그런 공동체로 보인다면, 아마 그들도 시편 시인의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아마 구원받지 못한 이웃은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로 생각할 것이다. 가장 은밀한 비밀도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온 힘을 다 바쳐서라도 기꺼이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우리를 그러한 사람들로 바라볼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이 가진 악의 문제를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는 사람들로 우리를 볼 것이다. 우리가 삶을 투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만이 인간을 치유하고 도우며 또 발전시킨다는 사실을 볼 것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내미는 손길로 인해 그들은 차마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환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가 된다. 당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원제: The Best Weapon Is an Open Doo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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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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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가 장악해버린 위험한 세상
by Jason Thacker
2019-08-22
우리는 데이터가 장악한 세상에서 살아간다. 어제의 온라인 쇼핑과 클릭했던 동영상부터 내 차의 이동 경로와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나에 대한 데이터는 모든 순간 수집되고 있다. 그리고 대중은 그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최근 우리는 페이스북이 수집한 사용자에 대한 데이터가 어떻게 2016년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았다. 또한 우리는 캘리포니아의 법조인들이 가계도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무려 30년이 지난 골든 스테이트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도 보았다. 며칠 전, 나는 친구와 통화하며 어느 식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우리가 언급한 바로 그 식당의 광고가 나와 친구의 인스타그램에 등장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스마트폰이 사용자의 이해나 인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양의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 활용되고 있음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우리는 데이터로 연결된 세상에서 많은 편리함과 혜택을 누리고 있다. 예를 들어 웨이즈(Waze, 구글에서 제공하는 GPS 네비게이션 어플리케이션-역주)는 최단 경로를 탐색하여 운전자가 원하는 목적지에 보다 빠르게 도착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넷플렉스는 사용자들에게 좀 더 흥미롭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찾아 준다. 그러나 데이터가 장악한 세상은 그 혜택 못지않은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개인 정보의 유출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의 주권자이시다. 그 어느 것도 그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분의 눈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세시는 분이고(마 10:30), 나와 당신의 덧없는 생각도 모두 읽으시는 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숨기기를 원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분께 자신을 완전하게 드러내어 온전히 사랑받기를 원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넘치는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기쁨인 것이다. 하지만 데이터와 사생활 수집에 집착하는 이 세상은 우리에게 결코 그러한 사랑을 주지 않는다. 나와 당신의 정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회사와 판매자들에게 노출되어 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결코 사랑을 주지 않는다. 그들이 나와 당신에 대해 알기 원하는 이유는 우리가 제공하는 정보를 통하여 달성해야 할 수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집을 행하는 주체들이 개인 정보를 받은 대가로 우리에게 약속한 혜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혜택마저도 늘 그들이 추구하는 유익이 성취된 이후에야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행한 생각이나 행위의 어느 것도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그분이 나와 당신의 모든 것, 즉 악한 부분까지 알고 계심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고자 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분의 위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보여 주신 그 형언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를 알고자 하신다.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무엇도 숨길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곧 당신에게 유익한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상품으로 존재하는 사용자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부터 음원 제공 사이트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이 세상은 여러 혜택과 즐거움을 주는 서비스로 넘친다. 그러나 이러한 무료 혹은 저가의 서비스들은 사실 ‘나’라는 상품을 지불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것들이다. 이용 약관이 고지하는 사항들을 주의 깊게 읽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당신이 법을 전공하지 않는 한, 그 길고 복잡한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많은 경우, 나 역시 스크롤을 빠르게 내려 간단하게 ‘동의’ 버튼을 클릭하고 서둘러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곤 한다. 그러나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조건은 당신의 개인 정보를 양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우리에 대한 데이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집되고 있다. 시청 목록, 무심코 누른 ‘좋아요’, 심지어 글이나 영상을 보는 데 걸린 시간까지도 다양한 목적을 위해 어딘가에 기록되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을 둘러싼 페이스북의 데이터 수집이 논란을 일으킨 직후, 한 남성은 구글이 사용자당 대략 5기가 바이트에 해당하는 방대한 개인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이를 그 사용자에게 제공할 인기 검색물이나 온라인 광고 등을 선별하기 위해 다각도로 이용한다고 폭로했다. 과연 우리는 나에 관한 정보가 어떻게, 또한 어느 곳에 사용되는지에 대해 어느 만큼 알고 있을까? 아마 당신이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실패로 끝난 ‘페이스북삭제’(#DeleteFacebook) 운동에서부터 새로운 개인 정보 보호법을 추진하는 국회에 이르기까지, 대중은 지금까지 데이터와 관련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주도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주로 그때그때의 논란에 반응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깊은 분별력과 지혜를 가지고 이러한 논란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지혜가 부른다잠언 1장 20절은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데이터가 장악한 세상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개인 정보와 관련된 논란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첫째로,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 정보에 관한 약속이나 보장은 깨질 위험이 높다. 세상의 어떤 회사도 그들이 보유한 데이터를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다시 말해 당신이 편리하거나 혹은 재미있는 서비스를 누리려고 쉽게 제공한 개인 정보는 결코 데이터 유출이나 해킹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하게 보호받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데이터가 장악한 세상에 살고 있는 한 나의 사생활, 특히 온라인에서의 행적은 쉽게 외부로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비난의 여지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 기술이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그리고 이 세상을 더욱 유익하게 관리하도록 우리에게 기술이라는 도구를 선물해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기술을 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기술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 그 예로 많은 사람들이 유행하는 어플리케이션들을 큰 고민 없이 수동적으로 다운받는다. 그것들이 어떻게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또한 얼마나 나의 영성을 약화시킬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기술과 그것이 주는 편리함을 누리기에 앞서, 그 기술이 나의 신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심해 보아야 한다.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행위, 그리고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선택은 ‘클릭’도 포함한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지식 또는 지배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더 통합적으로 연결되고 방대해져가는 데이터 세상 안에서, 그 어느 곳으로도 쉽게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와 당신은 우리의 개인 정보를 올바르게 관리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는 무언가 숨길 것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누군가 우리의 데이터에 접근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유익하지 못한 방향으로 사용할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나의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은 무척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과연 내 삶의 개인적인 부분들을 그저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기업과 마케터들에게 지나치게 양도하는 것을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Lie of Privacy in a World of Data Mining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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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의 시대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든다
by A. Trevor Sutton
2019-07-25
우리는 하루 중 평균 얼마나 되는 시간을 미디어와 함께 보낼까? 스마트폰, 태블릿, 텔레비전 그리고 노트북에 쏟는 시간이 하루 평균 11시간이다.최근 세계보건기구는 2살 미만의 아이들은 스크린을 봐서는 안 되고, 2살에서 5살 사이의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 시간을 하루에 한 시간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권고 내용을 발표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스크린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이라는 사실이다. 한 최근 보고에 의하면, 성인은 하루에 평균 150번 스마트폰을 확인한다고 한다. 스크린에 쏟는 시간을 조절하기 위해 스크린 보는 시간을 추적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앱까지 출시한 회사가 있을 정도이다. 우리가 스크린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과도하다는 것은 아주 명확한 사실이다. 디지털 기술은 중독성이 강하기에 무려 하루의 반 이상을 반짝거리는 스크린을 보면서 보내는 것은 이제 우리가 그만두어야만 한다.그럼 대신 뭘 봐야 할까?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봐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다시 보도록 배워야 한다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아이폰을 가진 적 없는 한 철학자로부터 들을 수 있다.20세기 독일의 가톨릭 철학자인 조세프 피퍼(Josef Pieper)는 보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사람이다. 피퍼는 이 세상 속에 있는 ‘시각 소음’이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각의 과잉’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 디지털 시대의 70인치 텔레비전 스크린, 인스타그램 사진, 그리고 엄청난 메가픽셀 화면들이 우리를 장님으로 만들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노래할 수 있다’(Only the Lover Sings)에서 피퍼는 이렇게 썼다. “나는 지금 인간의 눈이 가진 생리적 민감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가시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다.”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보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진짜, 진실,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는 우리의 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막혀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유명한 실험은 이런 피퍼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하얀 셔츠를 입은 세 명과 검은 셔츠를 입은 세 명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비디오를 보여준다. 실험 주제는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몇 번이나 패스를 하는지 세는 것이었다. 비디오가 중간 정도 진행되었을 때, 고릴라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가슴을 치고는 곧 다시 사라졌다. 그런데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 중 무려 반이 이 이 고릴라의 등장을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패스 숫자를 세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고릴라가 나왔는데도 그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디지털 시대의 ‘시각 소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보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하루에 151번이나 전화기를 확인하고 있으니, 나무에서 싹이 움트는 그 조용하지만 희망에 찬 순간을 간과하고 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스크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우리의 눈을 태양빛의 아름다움과 대지의 푸르름에서 스크린으로 빼앗아 버린다. 페이스북의 끊임없는 알람은 우리 앞에 있는 이웃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이런 장님이 되면 심각한 후유증이 따라온다. 피퍼가 말했듯이, “어느 정도의 한계 수준을 지나 바닥에 내려가면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완전성이 위태롭게 되는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 요즘 우리가 바로 그 위험한 바닥에 도달한 것 같다.”참으로 주변에 가득한 ‘시각 소음’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의 의미를 가진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37).어려운,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은디지털 시대에 다시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다.비록 스마트폰 시대 이전에 살았지만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피퍼의 충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움을 준다. ‘시각 소음의 시대’에서 보다 잘 보기 위해서 그는 다음 두 가지 행동을 권고한다. 첫 번째로 ‘시각 단식’은 다시 보는 데에 도움을 준다. 피퍼에 따르면, “금식과 금욕 의식을 통해서 일상 속 의미없는 시각 소음을 멀리 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요즘으로 말하면 ‘디지털 단식’이다. 하루 또는 일주일 중 시간을 정해서 스크린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우리 일상에서 의미없는 시각 소음을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와 비슷하게 스마트폰을 꺼두는 것도 과도한 전화기 사용을 줄이는데 도움을 주는 또 하나의 ‘시각 단식’이 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예술은 디지털로 인해 손상된 우리의 시각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준다. 예술 창작에 몰두하거나 또는 감상하는 것은, “보다 깊이 있고 수용적인 비전, 보다 강렬한 인식, 보다 선명하고 명확한 이해,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끈기 있는 개방성, 달리 말해서 이전에 간과되었던 것들을 보는 눈”을 갖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피퍼는 강조한다. 예술가라면 표면에 있는 아주 사소한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보는 능력과 함께, 여유를 갖고 감상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예술 작품을 천천히 감상하는 것이야말로 급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스크린을 옮겨 다니며 도파민 호르몬을 자극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레트(René Magritte)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The Treachery of Images)은 예술 작품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다시 보는 능력을 키울 수 있을지를 알려준다. 마그레트의 이 작품은 파이프 그림과 함께 이런 불어가 쓰여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 당연히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림은 그냥 파이프의 이미지일 뿐이다. 마그레트는 이렇게 우리의 눈을 열어준다. 비록 작지만 다시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라는 그림의 본질에 관심을 기울이게 함으로, 그림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파이프의 실재를 보도록 만든다. 이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파이프와 더불어 그림까지, 이 두 가지를 다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도록 한다. 시편 저자는 건강하게, 그리고 주의 깊게 보는 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하나님의 창조가 가진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비록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디지털 시대에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다시 보기 위한 노력’은 가치 있는 싸움이다. 우리 모두 ‘시각 소음’을 제거하고 갇힌 우리의 눈을 열어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눈앞에서 다시금 펼쳐지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Is Our Visual Age Making You Blind?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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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에 관한 주의 사항
by Kevin DeYoung
2019-06-27
사회과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다른 누구보다 상관관계가 원인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운전 교육을 받던 중에 나는 대부분의 교통 사고가 집에서 몇 마일 이내에서 일어난다는 놀라운 통계를 접한 적이 있다. 이 통계가 젊은 운전자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익숙한 곳에서 운전할 때 부주의하기 쉬우니까 더 조심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 교훈은 상관관계(집에서 떨어진 거리와 연결된 사고 발생 횟수)를 원인(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운전할 때는 운전을 제대로 안 한다)과 동일시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은 이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집 근처에서 주로 운전을 하니까 당연히 집 근처에서 사고가 많이 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두 가지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해서 하나가 반드시 다른 하나의 원인은 아니다. 또 동시에 그 두 가지 사이의 연결이 분명하거나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확실한 경계는 없다데이비드 파울슨(David Powlison)은 기혼의 상태에서 레즈비언 환상으로 고생하는 아멜리아(Amelia)에 관한 글, ‘모호하게 치료된 영혼’(The Ambiguously Cured Soul)을 저술했다. 이 글은 그 우수성을 인정 받아 ‘성경적 상담 학술지’(The Journal of Biblical Counseling) 2001년도 판에 게재되었다(참고로 저자는 2003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성경적 관점으로 본 상담과 사람’[Seeing with New Eyes]의 12번째 챕터에도 동일한 이야기를 실었다). 주인공인 아멜리아는 기독교 상담을 통해 자신이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과거의 경험 때문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즉 어린 그녀를 학대했던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남성을 멀리하게 되었고, 또한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은 어머니로 인해 같은 여성이 주는 사랑을 갈구하게 되었다고 믿게 된 것이다. 비록 이는 단편적으로 보기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는 진단이지만, 파울슨은 이 상담에 한 가지 큰 오류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아멜리아와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했더라도 이후 나타날 수 있는 결과는 수도 없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저스틴 테일러(Justin Taylor) 역시 파울슨과 같은 관점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남성이 주는 사랑을 너무 갈구한 나머지, 오히려 부도덕한 이성 관계를 갖는 경우도 있다. 자기를 학대하던 아버지와 비슷한 성향의 남성에게 이끌려 결혼하는 예도 있으며, 아예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삶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부모처럼 살지 않기 위해 그 누구보다 경건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물론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현재를 해석하는 데에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를 보면서, “그래, 나는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어”라는 결정론적 그릇된 망상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진실은 이것이다. 과거의 어떤 특정 경험이 인생에서 언제나 같은 결과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문화는 무엇을 가져왔는가? 이처럼 카운슬링에서 배우는 진실은 비극의 현장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개혁주의 개신교를 지지하는 우리로서는 포웨이 유대교 회당 총격 사건의 용의자가 정통 장로교에 소속된, 우리와 같은 신학적 사고를 가진 젊은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과 슬픔을 느낀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사건은 우리 중에 행여 조금이나마 반유대주의 증오가 있는 건 아닌지, 또는 교회가 유대인을 향한 이런 살인적인 행동을 행여 조금이라도 충동질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 용의자의 환경을 보면 그의 부모와 목사는 모든 면에서 그를 바르게 가르쳤고 결코 살인자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굳이 인과 관계를 찾는다면, 8chan과 같은 게시판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의 급진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정도이다. 용의자가 복음주의 언어를 훔쳤거나 또는 개혁 신학을 지지했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 전체가 그로 인해 욕을 먹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제자들이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내려서라도 예수님의 명예를 지키려고 한 것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이다(눅 9:51-55). 중요한 점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했다는 사실이고, 우리들 또한 가르침을 왜곡해 열심을 폭력으로 변질시키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처럼 강하게 꾸짖어야 한다. 정치 양극화 시대에 우리는 종종 비극 A가 “증오하는 문화”의 결과이거나 끔찍한 잔혹 행위 B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선한 사람들”의 산물이라는 등의 비난을 접한다. 틀린 말이 아니긴 하지만 원칙적으로 이런 주장은 증명이 힘들 정도로 불투명하거나 손에 딱 잡힐 정도로 구체적이지 않다. 같은 '문화'에 속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단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그렇다면, 도대체 문화가 가진 효과는 어느 정도일까? 다시 말해서, 가족이나 종교 공동체 또는 보다 포괄적인 어떤 사회 요인이 폭력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비록 유일한 원인은 아니더라도 때로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작정 ‘문화’를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아니다. 정교하게 검증된 자료와 충분한 근거를 토대로 과거를 분석하는 학자 중 일부가 현재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무작정 인과 관계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상황은 복잡하다자, 이제 가장 논쟁적일 수도 있는 마지막 지점에 다다랐다. 한 나라의 인종 문제를 논의하는데 있어서 심각한 장애물 중 하나는 바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이 현상을 아주 단순한 인과 관계로만 설명한다는 것이다. 시험 점수에서부터 교육 수준에 이르기까지, 또 가계 소득 뿐 아니라 감옥에 가는 비율에 이르기까지, 인종 간의 웰빙 지수에 엄청난 불균형이 있다는 건 불편한 진실이다. 혹자는 이런 불균형의 원인을 단지 개인의 자질과 노력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는 이 모든 원인을 차별주의와 인종 우월주의 때문으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의 쉬운 설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이 말이 인종 차별의 유산이나 개인이 가진 책임이 오늘날 사람들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는지 설명하는 데에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복잡하기에 역사도 복잡하다. 인간 또는 우리의 과거가 아주 단순하고도 통일된 이론으로 깨끗하게 이해되고 요약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확실한 사실은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모두는 다 예외 없이 유전자와 가족, 친구들과 학교, 동료와 교회, 책과 경험, 그리고 암묵적인 가정과 암시적인 규칙, 그리고 때로는 과분한 기회와 부당한 장애물 등등을 포함한 백만 가지 이상의 개인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 손에 쥐어진 모든 것들과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겸손해야 할 이유뿐 아니라 너무도 단순한 인과 관계 이론에 대해 신중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모든 조각이 어떻게 맞춰졌는지를 완전히 아신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만물의 시작과 결과를 아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주적이고 또 완전한 정의가 어떤 것인지 아신다. 이것은 지적 게으름에 대한 핑계가 아니다. 어떤 설명은 다른 것들 보다 낫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수사학적으로는 마냥 화려해 보이지만 지적으로는 게으른 생각의 함정, 즉 현재의 인간과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단지 과거의 재료가 완벽하게 혼합된 결과로만 생각하는 그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utious about Causation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데이비드파울슨
확실한경계
상황은복잡
인관관계
저스틴테일러
주권
그리스도인이 너무 세련되어도 괜찮을까
by Greg Forster
2019-06-13
과거에는 물건을 사면 부서지거나 고장이 날 때까지 쓰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가령 스마트폰 한 대를 1년 넘게 쓰거나, 10여 년 동안 부엌을 리모델링하지 않으면, 스스로 시대에 뒤쳐졌다고 느끼곤 한다. 물론 오래된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 것을 선호하고 또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앞다투어 그것으로 바꾸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새로운 물건과 서비스에 많은 관심을 두며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게 바람직할까?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균형 잡힌 복음의 시각이 필요하다. 체조 선수들이 평균대에서 균형을 잃으면 떨어지듯이, 어느 한쪽으로만 답을 구하다 보면 결국 넘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나는 취미 생활에 필요 이상의 돈을 쓰며 새로운 물건을 사는 버릇이 있다. 반면, 너무 사지 않아 문제가 되는 정반대의 예도 있다. 언젠가 아내는 내 구두를 가리키며,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신발에 구멍 날 때까지 신고 다니냐며 지적한 적이 있다. 낡아빠진 구두를 혼자 멋있다고 생각하며 계속 신고 다니는 모습이 심지어 게을러 보이기까지 한다고도 말했다. 아내는 비 오는 날 괜히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얼른 가서 새 신발을 사라고 나를 재촉했다.우리가 이 평균대에 올라가 어느 한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균형 잡힌 삶이란, 자랑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쓸데없는 사치를 하지 않고, 그렇다고 성경적인 근거도 없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며 지나친 율법주의를 추구하지도 않는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모습에 이르고 또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맛보며 즐거워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지으신 세상을 마치 누리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또한 지나친 금욕주의를 신앙의 척도로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접근이다. 칼빈이 들려주는 어느 수도사의 이야기가 있다. 이 수도사는 자신이 얼마나 적은 양의 빵과 물만 먹고 살 수 있는지에 도전했다고 한다. 결국 하루에 빵 한 조각만으로 살게 된 이 수도사는 옆방에서 탐욕스럽게 과식하는 동료를 비웃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터무니없게도, 하루에 빵 두 조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칼빈이 이를 통해 지적하려던 바는 실제로 우리의 영혼에 큰 위협이 된다고 할 수 있다.현대 사회는 대량 생산과 기술의 빠른 발전을 특징으로 한다. 즉 과거 어느 때보다 좋은 상품이 빠르게 또 끊임 없이, 그리고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소비 패턴을 완전하게 바꾸어 놓았다. 먼저 기술의 발전에 따른 변화를 살펴 보자. 예를 들어 내 경우는, 크리스천에게 검소한 생활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3년 이상은 쓰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만일 폰을 앞으로 10년 동안이나 더 쓰겠다고 결심한다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의 속도로 인해 나는 수많은 불편함을 겪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기술과 상품에 대한 구매 주기가 이전보다 자연스럽게 짧아진다. 이번에는 대량 생산에 따른 변화의 예를 들어보자. 산업의 발달로 인해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상품과 서비스의 시장 가격은 점진적으로 하락했다. 만약 내가 새로운 양말을 사서 신는 데 천 원 내지는 이천 원의 비용이 드는데 굳이 오래되어 다 떨어진 양말을 꿰매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부가 가치가 높은 다른 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 시간에 하나님과 그분이 지으신 세계를 위해 더 잘할 수 있는, 더 큰 가치를 이룰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이는 합리적인 소비라고 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이 두 가지의 예를 통해, 소비 문제의 중심은 결국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의 물음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우선순위와 균형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 소비를 죄악시하는 관점을 조심하고 합리적 소비를 감안해야 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검약과 절제 및 섬김은 금욕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각자가 가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인생의 모습을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 치고, 정욕을 일삼는 행위가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 심각성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현실은, 자신이 소유한 돈으로 무엇을 하는지도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은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크리스천이 어떻게 검소하게 행하며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원칙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과 동일한 문화권에 살면서 비슷한 수입을 얻는 사람들의 소비 생활과 나의 생활을 비교해 보라고 조언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상대보다 눈에 띌 만큼 적은 수준의 소비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라고 제안한다. 우리는 이러한 평가를 통해 욕심에 탐닉하는 소비는 점차 줄이고, 타인과 나누기 위한 소비는 더욱 늘려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크리스천의 검소함이 매일의 생활에 반영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 원칙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어떠한 소비 생활을 이루어야 할지를 판단하도록 도와준다. 나와 당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사회적 맥락과 자신의 경제 활동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Is It Morally Okay to Keep Updating My Things?번역: 장성우
문화
세계관
균형잡힌삶
합리적소비
우선순위와균형
루이스
검소
절제
섬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가족
by Tim Keesee
2019-05-29
인생을 돌아보니, 나는 언제나 우리 가족의 역사가 담긴 물건을 수집하고, 그 이야기를 기록하며, 서로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모두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자신에게 소중한 이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그에 대한 기억을 귀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 맺은 가족 관계는 너무도 귀하지만 결국에는 끊어지고 사라지는 법이다. 마치 우리의 인생살이와 같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맺게 된 가족만이 영원히 남는다. 나는 세계에 흩어진 그 믿음의 가족을 돌아보느라 지난 20여 년을 보냈다. 주로 기독교 신앙에 적대적인 국가의 크리스천들과 함께 했는데, 과거에는 ‘철의 장막’ 너머에 있는 나라들에서부터 최근에는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보스니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80개국 이상의 나라를 다녀왔다. 그런 곳을 오가며 보고 들은 소식을 함께 나누며 그 긴 세월을 보낸 것이다.믿음의 가족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거듭날 때 세워진다. 이는 그분이 우리를 입양하여 하나가 되게 하신 가족으로서 영원히 존속될 뿐 아니라 그 구성원도 모든 대륙과 문화 및 역사 속에 널리 퍼져있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통치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물론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선배들까지 다 한 가족이다. 이와 같이 널리 흩어진 다양한 민족과 세대가 모여 조화로운 대가족을 이룬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가? 피보다도 진하고 죽음보다 강한 그 관계를 생각하면, 오직 은혜만이 그런 가족을 세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교회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수년 전, 알바니아에 간 적이 있다. 발칸 반도에 자리한 그 나라는 지난 오십 년간 잔혹한 공산주의 독재 정권을 경험했다.냉전 시대의 알바니아는 동유럽의 ‘북한’(North Korea)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십 년 동안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된 상태였고, 국민들은 빈곤과 핍박 등으로 고통받았다. 1990년에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졌을 때, 그 나라 전역에서 교회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알바니아 국민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깊어, 시간이 흐르며 나라의 구석구석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 결과, 20년 만에 모든 도시와 대부분의 마을에서 예배의 처소인 교회가 세워졌다.그렇게 알바니아에 복음의 자유가 선포되며 확장되던 때에, 거기서 사역하던 한 친구가 자신이 돌보는 작은 회중을 대상으로 교회사에 관해 강의해 달라고 내게 요청해왔다. 그 회중은 알바니아의 1세대 크리스천들이었다. 나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매일 밤 그들과 함께 지난 역사를 누비면서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랐던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그 시간을 통해 그들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는 자신들이 듣고 믿게 된 복음이 다름 아닌 바울과 폴리캅(Polycarp) 그리고 페르페투아(Perpetua)가 믿고 순교했던 바로 그 복음과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또 자신들이 가진 믿음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그토록 변호하고자 했고, 또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가 지구 반대편에서 중국어로까지 설교하며 전파하고자 했던 그 믿음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이 영어로 번역하고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가 벵골어로 옮기고자 했던 그 책,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제는 자신들의 모국어인 알바니아어로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이러한 깨달음이 생기자, 그들의 눈에서는 빛이 나고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해졌다. 그리고 지난날 미신에 속아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이제 그들이 바라보는 교회란 그저 한 아파트 거실에 둘러앉은 4, 50명의 사람들이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있으나 분리될 수 없는 모든 크리스천이 되었다. 그들은 곧 역사와 국경을 뛰어넘어 모든 나라와 세대 가운데 자신의 가족을 부르고 계시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교회사에 등장하는 ‘믿음의 영웅들’을 만나자 마음에는 강철과 같은 담력이 생기고, 여전히 직면해야 했던 박해와 조롱도 견뎌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런 확신에 차서 그들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의 다음과 같은 찬송시를 고백하게 되었다.“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과 사랑을 고백하라위아래에 있는 모든 성도여하늘과 땅에 있는 교회여그 사랑을 늘 고백하여라”한 가족의 여러 얼굴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대자연에서 경이롭게 드러난다. 나 역시 만물을 지으신 그분의 솜씨에 많은 순간 감탄한다. 크레용처럼 빨갛게 세상을 물들이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았을 때, 나뭇가지로 엮인 둥지 안에서 지저귀는 아기새들을 발견했을 때, 또 아프가니스탄의 메마른 골짜기에서 깊고 어둔 밤하늘로 쏟아지던 은하수를 바라보았을 때, 그 모든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처럼 그분의 창조 사역이 자연을 통해 드러난다면, 그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펼쳐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구름처럼 빽빽한 믿음의 증인들과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통해 큰 감명을 받곤 한다. 그리스도를 쫓아가고자 했던 그들의 걸음은 언제나 나의 걸음을 더욱 재촉한다.그중 한 예로, 언젠가 중동에서 만났던 한 사역자가 생각난다. 그의 이름은 무함마드(Mohammad)였는데, 한 10년 전에 헤즈볼라(즉 레바논의 시아파 이슬람 조직)의 본거지 안에 교회를 세웠다. 그 옆에는 거대한 이슬람 사원이 자리하고 있고, 주변의 거리 곳곳에는 자살 테러범을 칭송하는 포스터가 나붙어 있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돌보는 교회에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자 매주 사람들이 모인다. 협박이나 감옥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들은 침묵하지 않는다. 한때는 이슬람의 사슬에 매여 있던 그들이 이제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생을 소유한 그들을 회유하며 협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무하마드의 사역은 이렇듯 복음의 진전이 얼마나 놀랍게 이뤄질 수 있는지를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또 나는 셰릴(Cheryl)이라고 불리는 친구도 기억한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순교 당하기 전에 이사야 43장을 묵상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 적이 있다.“물이 넘쳐 흐르고 강은 더욱 깊어져밀려오는 파도가 내 위로 덮치네물에 빠져 절망하며 숨조차 쉴 수 없을 때나를 부르시는 그 음성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노라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부르노라오늘 내가 너로 마른 땅을 밟게 하리라이제 너와 함께하리니 아무도 너를 휩쓸지 못하리라”지금도 나는 이 시를 읊는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떠올릴 때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고난 받으신 주님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한 가족의 닮은 모습마지막으로 나는 또 다른 친구들인 이반(Ivan)과 오크사나(Oksana)로부터 받은 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들은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보내 온 편지를 읽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결국 이슬람 급진파 신도들이 우리 형제들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언젠가 한 율법학자가 베레조브카에 있는 형제들을 찾아와서는, 3일 간 시간을 줄 테니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해서 그런 일은 없을 테니, 3일 동안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현장에서 답변했지요. 그때 그 목소리에는 사랑과 온유가 느껴지면서도 단호함이 서려 있었어요.”가족이 서로 닮는 건 어쩔 수 없다. 베레조브카에 있는 형제들이든, 무함마드이든, 셰릴이든, 또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 중에 속한 그 누구이든 간에, 이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가족이기에 그분이 보이신 부활의 능력을 함께 증언한다. 나는 죽음도 불사하며 참된 기쁨을 추구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전할 때, 주님의 빛나는 영광과 변치 않는 구원의 약속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앞서간 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모두도, 그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큰 믿음의 격려를 얻게 될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Across Continents and Centuries: Why Church History Is Our History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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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 복음의 다섯 가지 오류
by David W. Jones
2019-05-15
간단히 말해서, '번영 복음'은 신자가 건강하고, 부자가 되고, 그래서 행복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는 가르침이다. 번영 복음의 대변인으로 유명한 로버트 틸턴(Robert Tilton)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번성하는 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말씀이 이를 증거합니다. 나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 주목합니다. 우리를 부유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번영 복음의 전도사들은 기도를 넘어 아예 하나님에게 물질적 번영을 요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신학적인 다섯 가지 오류러셀 우드리지(Russell Woodbridge)와 나는 ‘건강, 부, 그리고 행복: 번영 복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고 있는가?’(Health, Wealth, and Happiness: Has the Prosperity Gospel Overshadowed the Gospel of Christ?)라는 책을 저술하며, 번영 복음 주창자들의 주장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책 전체를 다룰 순 없지만, 그들이 저지르는 다섯 가지 교리적인 오류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관련한 이 오류들을 잘 분별하여, 번영 복음의 위험을 제대로 볼 수 있기를 바란다.1.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물질적인 번영을 위한 수단이다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창12, 15, 17, 22장)은 번영 복음의 신학적 토대이다. 번영 신학자들이 성경의 많은 부분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성취로 보는 것은 좋지만, 이 언약에 대한 정통적 견해를 견지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그들은 언약의 시작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언약의 적용까지 완전히 잘못 이해한다. 에드워드 푸손(Edward Pousson)은 자신의 저서 '불꽃의 확산'(Spreading the Flame)에서 번영 신학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어떠한 시각으로 적용하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이며 그의 믿음이 가져다 준 축복의 상속인이기도 하다 [중략] 바로 이 아브라함으로 인한 유산을 주로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번영 신학이다." 즉 번영 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가장 큰 목적은 그를 물질적으로 축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신자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물질적 축복을 이미 상속받았다고 주장한다. 케네스 코플랜드(Kenneth Copeland)는 1974년에 그의 책, '번영의 법칙'(The Laws of Prosperity)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립되었고, 번영은 그 언약의 핵심 조항이므로, 번영이 바로 지금 당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번영 교사는 갈라디아서 3장 14절을 종종 인용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그러나 그들은 정작 갈라디아서 3장 14절의 후반부는 완전히 무시한다.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약속하는 것은 물질적인 축복이 아니라 구원이 가져다주는 '영적인 축복'이다. 2. 예수님의 속죄는 물질적 빈곤이라는 '죄'까지도 해결한다신학자 켄 살레스(Ken Sarles)는 한 학술지(Bibliotheca Sacra)에 기고한 '번영 복음에 관한 신학적 평가'에서, 번영 복음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육체적인 치유와 재정적인 번영까지 다 보장되었다"라고 주장한다고 서술했다. 그의 진단은 번영 복음 지지자인 코플란트의 말에 비춰볼 때 매우 정확하다.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하는 삶의 기본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질병, 슬픔과 애통, 그리고 빈곤까지 갈보리의 예수님께 맡기심으로써 모든 고통을 이미 다 해결하셨다." 속죄 범위에 대한 이런 오해는 주로 번영 복음 옹호자들이 저지르는 다음의 두 가지 오류 때문에 발생한다. 첫 번째로 번영 신학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에 대해 근본적인 오해를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존 아바니지(John Avanzini)가 한 프로그램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멋지고 커다란 집"을 가지고 있었고, "큰 돈"을 소유했으며, 심지어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입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왜곡된 견해는 자연스럽게 그의 죽음에 대한 비뚤어진 착각으로 이어진다. 속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갖게 하는 두 번째 오류는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마치 바울이 물질적 부의 증가를 언급하는 것 같지만, 전체 문맥에 비춰볼 때 사실 바울은 정반대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통해 너무나 많은 것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구세주를 위하여 각자의 부유함까지 버려야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기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고전 8:14)이라고 말하면서 가난한 형제들에게 자신의 부를 나누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3.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보상을 얻기 위하여 기부한다번영 신학자들이 가진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기부에 관한 집착이다. 그들은 아낌 없이 헌금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진정한 번영이란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또는 "우리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부름 받았다" 등의 멋진 말을 한다. 그러나 박수를 받기에 마땅한 그런 언행은 순수한 자선에 기초하지 않는다. 헌금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은, 로버트 틸톤(Robert Tilton)이 말한 '보상의 법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마가복음 10장 30절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진 이 법칙에 따르자면, 기독교인은 타인에게 관대하게 베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돌려주시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무한 증대하는 번영이 쌓인다는 주장이다. 글로리아 코플랜드(Gloria Copeland)가 2012년 출간한 책, ‘하나님의 뜻은 번영이다’에 썼듯이, "10 달러를 주고 1,000 달러를 받아라. 1,000 달러를 주고 100,000 달러를 받아라 [중략] 간단히 말해서, 마가복음 10장 30절은 정말로 수지 맞는 장사"이다. 번영 복음이 가르치는 기부 교리는 매우 잘못된 동기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눅 6:35)라고 가르치셨지만, 번영 신학자들은 큰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주라고 가르치고 있다. 4. 믿음은 번영을 불러오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힘이다정통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이해하한다. 이와는 다리, 번영 복음의 교사들은 전혀 다른 가르침을 준다. "믿음은 정신적인 힘, 에너지, 능력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번영의 법칙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의 힘이다." 코플랜드는 ‘번영의 법칙’에서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분명한 번영의 법칙이 있다. 믿음은 그 법칙을 작동하도록 한다." 이것은 분명히 믿음에 관한 그릇된, 심지어 이단성을 가진 이해이다. 번영 신학에 따르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 중심의 행동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만든 영적 힘이다. 믿음을 물질적인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는 무관하다. 진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축복이라고 말한다. 5. 기도는 하나님의 팔을 비틀어 우리에게 번영을 주시도록 하기 위함이다.번영 복음 설교자들은 종종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라는 구절에 주목한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모든 분야에서 성공을 위해 기도하라고 촉구한다. 크레플로 달러(Creflo Dollar)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기도한 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으면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중략] 이 믿음이 바로 기독교인으로서 결과를 얻어내는 열쇠이다."개인적인 축복을 위한 기도가 본질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행위에 대한 번영 복음의 과도한 강조는, 기도마저 욕망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변질시킨다. 즉, 번영 신학 안에서의 기도란 하나님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된다. 흥미롭게도 번영 설교자들은 기도에 대한 야고보서의 가르침 중에서 다음의 후반부를 종종 무시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존중하지 않는 이기적인 요구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모든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빌 4:6). 그러나 번영 복음은 인간의 갈망에만 너무 많은 초점을 맞추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 커녕 이기적이고 피상적인 기도만을 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헛된 시도까지 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당신의 뜻이 이뤄지게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와는 동떨어져도 너무나 동떨어진 행위이다. 거짓 복음성경에 비추어 볼 때, 번영 복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된 관점을 지닌 거짓 복음이다. 간단히 말해서, 만약 번영 복음이 진실이라면 은혜는 쓸모 없고, 하나님은 무의미하며, 사람은 만유의 척도이다. 번영 복음이 아무리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속죄, 기부, 신앙, 또는 기도에 관한 것을 말할지라도,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일회성의 거래로 변질시키는 근원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제임스 고프(James Goff)가 1990년 '크리스처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번영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한 피조물을 시중드는 일종의 '전우주적 벨보이'로 전락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실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전적으로 부적절하고 비성경적인 견해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Errors of the Prosperity Gospel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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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왜 아파하며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
by Becky Pippert
2019-05-08
요즘 사람들은 죄의 개념을 우습게 여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자존감 부족, 노이로제, 중독, 불안, 심리적 아픔 등의 결과만을 내놓는다. 물론 이런 현상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가진 고통의 뿌리를 파헤칠 만큼 세상의 진단이 그리 깊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제 많은 사람들은 죄가 낡아빠진 관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도 거의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세상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반드시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전쟁과 인종 차별, 대량 학살과 테러, 그리고 인신매매와 아동 착취 등의 실상을 접하며 그 사실을 깨닫는다. 또 개인의 삶에서도 깨어진 관계, 분노, 중독 등을 통해 그 잘못을 확인하게 된다.그렇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세상은 처음 낙원의 상태에서 이토록 망가진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을까?최초의 반역창세기 3장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의 통치를 거절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곧 그들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결과, 인류의 역사 속으로 죄가 들어오고 이로써 사람의 인격에는 죄로 물들지 않은 영역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또한 창조시부터 사람에게 반영되었던 하나님의 형상도 그저 희미하게만 남아있게 되었다.이처럼 하나님이 지으셨던 온전한 모습이 깨진 후로, 인간은 줄곧 죄에 붙들려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어떠한지는 창세기 4-11장에 잘 그려져 있다. 이러한 죄는 인류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아담과 하와처럼,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통치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따라서 재난과 기근 및 학살과 아픔 등 삶의 실재와 우리의 내면에서 직시하는 그 모든 문제들은, 다름 아닌 인류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반역했던 그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중에 요한계시록이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계 20:2)이라고 밝히는 사악한 뱀이 처음부터 동산에 들어왔던 것이다. 성경은 이 사탄의 정체 및 그와 함께 하나님께 대적하고 인류를 죄 가운데로 유혹하는 영적 존재를 가르친다. 그러면서 온갖 형태의 악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또한 보여 주는데, 그중 무엇보다도 모든 죄의 중심에는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인간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타락의 결과언젠가 정신과 의사이자 비크리스천인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드러내는 전형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잠깐, 그런데 너는 크리스천이니까, 우리가 가진 진짜 문제는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데 있다고 생각하겠네?” 그래서 내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죄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다. “마약, 섹스, 락 같은 거 아냐?”여기서 친구가 놓치고 있는 사실은,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단순히 나쁜 행위나 비행을 죄의 핵심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오히려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 죄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내면에서부터 비틀어 놓는다. 그 결과,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혼합시켜 마치 스스로가 하나님인 것처럼 자기 자신을 다스리며 살아가게 만든다.이때 죄는 이중적으로 작용한다. 즉 하나님을 주인으로서 예배하며 신뢰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게 만들고, 그와 동시에 우리 인생에 대한 권리를 교만한 마음으로 주장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죄는 불신앙과 우상 숭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에 의존함으로써 인생의 정체와 의미를 스스로 창조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죄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항한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곧 죄다.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낳은 결과는 무엇일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하며 그분으로부터 등을 돌렸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따라 그들에게 정의로운 심판을 선언하셨다. 그리하여 고통과 사망이 인류를 찾아왔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의 반역이 낳은 결과는 참혹했고, 인류는 비참하게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부터 분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최초의 인류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린 그 완벽했던 신뢰와 따뜻하고 친밀했던 교감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대신 인간은 죽음의 심판 아래서 살게 되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졌고, 그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관계의 단절이 일어나 하나님과 영적으로 분리되고 말았다.이처럼 타락한 인류가 처하게 된 곤경은 너무나 심각하고 중대할 뿐 아니라 안팎으로 모조리 잘못되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과연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타고난 죄성을 변화시켜 내면에서부터 그 본성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탄을 무찌를 수 있을까? 혹은 사망을 정복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할 수 없다.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건져내어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까? 누가 이 끔찍한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분명 우리 자신보다 강력한 능력을 가진 자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하나님의 개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타락한 세상을 위한 소망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개입이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비록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몸을 가리기 위해 만들었던 옷보다 더 나은 옷을 지어 그들에게 입히셨다. 이는 곧 동산 밖에서 살게 될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4-15절에서 사탄에게 선전 포고를 하시며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는 말씀대로 사탄을 무찌르게 될 약속된 그 후손에게 초점을 맞추고 진행된다. 바로 마리아라고 불리는 여자에게서 태어날 구원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대적 마귀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는 가운데 이야기를 완성해 가신다. 이로써 최초에 주어진 복음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다.성경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인류의 반역이 있기 전, 심지어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구원하실지를 미리 계획하셨다고 가르친다(딛 1:2; 엡 3:11). 바로 당신의 거룩한 아들이자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고통과 사망을 대신 겪게 하심으로써 죄인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이 계획 때문에, 인간의 반역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 처음부터 제시되었던 것이다.이 복음은 우리에게 죄와 심판이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는 소식을 들려 준다.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를 베푸셔야 할 책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그 거룩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속함과 더불어 만물의 회복에 이르는 역사를 펼쳐 가신다. 곧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는 것이다(엡 1:10).이 빛나는 복음의 영광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쟁취하신 승리, 그리고 그 우주적 사건에서 드러나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어찌 그 아름다운 소식을 고통받는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가서 이 소식을 전하자. 주님이 우리에게 가라고 명하신다(마 28:19).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Evangelism Must Explain What’s Wrong with the World번역: 장성우
문화
세계관
최초의반역
타락한결과
소망
하나님의사랑
복음
구속함
만물의회복
갈등 없는 창조 이야기
by Matthew Miller
2019-05-01
유대인 후손이 아니라면, 당신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이교도의 후손일 것이다. 당신의 족보를 추적해 보면, 쥬피터(Jupiter), 머큐리(Mercury), 그리고 아폴로(Apollo)를 숭배했던 로마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투타티스(Toutatis), 에수스(Esus)나 인간 희생 제사를 했던 타라니스(Taranis)를 숭배했던 켈트족이었을지도, 오딘(Odin)과 토르(Thor)를 숭배한 스칸디나비아인이었을지도, 또 둔다리(Doondari)와 시다 마툰다(Shida Matunda)를 숭배했던 아프리카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여러가지를 나열해 봐도 그것은 수많은 이방인들이 섬겼던 많은 신들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교도인 우리 조상들은 바울이 성경에서 "육체로는 이방인"이라고 불렀던,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으며"라 말했고, 또 그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던 사람들이 분명하다(엡 2:11,12,17).성경 속 ‘복음’의 메시지를 이교도인 우리 조상들이 처음 들었을 때, 전혀 다른 종류의 구원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완전히 새로운 창조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창세기의 첫 두 장이 강조하듯 하나님이 ‘무로부터’(ex nihilo) 창조했다는 사실로 이교도들이 갖고 있는 신화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매우 중요하지만 그에 비해 덜 알려진 그 창조 이야기는 우리 조상들의 신화들과 비교할 때 놀라울 정도로 대조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이교들의 창조 신화는 창조 과정을 설명할 때, ‘갈등’을 추진력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인데, 성경 속 창조 이야기는 그 점에서 매우 대조적이다. 몇 가지 예를 생각해보자.바벨론의 창조 서사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 따르면, 육지와 하늘이 없고 오로지 물만이 있었을 때, 담수 아프수(Apsu)와 바닷물 티아마트(Tiamat)가 생겼다. 그 두 종류의 물이 융합함으로 서로 갈등을 겪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신들의 가족이 태어났다. 그들의 후손 중 하나인 마르둑(Marduk)이 티아마트(Tiamat)와 대결했고, 마르둑의 화살이 티아마트를 반쪽으로 쪼개버렸다. 승리한 마르둑은 죽은 티아마트의 절반을 높이 올려서 하늘로 만들었고, 나머지 반으로 땅을 만들었다. 또 365일과 행성의 질서를 만든 마르둑은 신들이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들어서 신을 섬기게 했다. 이런 ‘갈등과 투쟁’이 지금 우리가 아는 세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노르웨이 신화에 따르면, 반 신이며 반 거인인 오딘(Odin), 빌리(Vili), 그리고 베(Ve) 삼형제는 얼음과 불이 우연히 만나서 낳은 자웅동체 신인, 이미르(Imir)를 죽인다. 그들은 죽은 이미르를 벌어진 공간(Yawning Gap) 중앙으로 옮기고 그의 시체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한다. 땅은 이미르의 살로, 그리고 산은 그의 뼈로 만들고, 이미르의 두개골을 높이 들어 하늘을 만든다. 이 창조 신화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죽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태초에는 혼돈만이 있었지만 여러 신들이 태어나면서 창조 이야기를 담은 거대한 서사시가 시작된다. 그들의 사랑과 미움, 질투와 분노, 갈등과 속임수로부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상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삶의 ‘갈등’은 이 신들의 불안정성과 내분을 반영하는 것이다. 몇몇 이교도의 창조 신화는 불확실성과 긴장감으로 끝난다. 예를 들어, 인도 북동부에 사는 미뇽(Minyong) 부족의 창조 신화는 지구와 하늘,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는 인간과 동물의 세계를 보여준다. 지구(Sedi)와 하늘(Melo)이 결혼하기로 하는데, 그로 인해 지구와 하늘이 하나로 합쳐질 경우 그 가운데에서 부서지게 될 것을 두려워한 인간과 동물이 살아남기를 의논했다고 전해진다. 마찬가지로 미국 남동부에서 가장 큰 인디안 부족인 체로키(Cherokee) 부족은 지구를 바다에 떠있는 커다란 섬으로 보았는데,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하늘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코드가 섬의 중요한 네 군데 지점을 붙잡고 있어서 유지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구성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인디언들은 세상이 오래되고 닳아 없어지면 사람들이 죽을 것이고, 줄이 끊어지면 지구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되어 다시 물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그 상황을 두려워한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세상의 신화들은 ‘안식’이라는 마무리 대신 오히려 불안한 긴장감만이 맴돌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왜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한 ‘갈등’이 이교도들의 창조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이는 갈등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기억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왜 삶이 이토록 불일치로 가득하고, 왜 역사가 칼부림을 통해서만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항상 불안하고 갈대처럼 흔들리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이처럼 갈등으로 가득 찬 이유가 애초에 세상이 그렇게 존재하도록 창조된 것이라는 가정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인다. 다윈의 진화론이 가진 매력의 일부도 다름 아니라 이교도 창조 신화의 핵심인 ‘갈등’이라는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연 선택이라는 메카니즘으로 모든 생명 형태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흔히 ‘자연, 피로 붉게 물든 이빨과 발톱’으로 상징되는 진화론은 삶을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힘으로, 또 생명 자체의 근원으로 ‘갈등’을 꼽는다. 또 칼 마르크스(Karl Marx),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그리고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이제 갈등을 경제적, 심리적, 그리고 사회적 영역으로까지 확대함으로, 힘은 오로지 힘으로만 대응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타락한 인간의 귀에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겠는가? 복음이 우리 이교도 조상들에게 처음 소개되었을 때, 그들은 투쟁과 폭력, 그리고 죽음의 암시가 전혀 없이 창조된 하늘과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주권적이고 비길 데 없는 하나님은 그의 아름답고 (심지어 시적이기도 한) 순차적이며 완전한 계획에 따라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긴장감이 드러나는 결말이 아니라 안식일에 쉼이 주는 만족스러운 ‘안정감’에서 그 절정을 이뤘다(창 2:1-3).갈등이 없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우리 이교도 조상들이 알고 있던 ‘갈등으로 가득한 신화’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인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C.S. 루이스가 언젠가 삼위일체의 증거로서 말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삼위일체는 인간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진실이다.” 창세기의 처음 두 장을 통해 그 창조 이야기를 들으면 루이스와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육지와 바다에서 초목, 천체, 바다 생물, 파충류, 포유 동물, 그리고 인간까지, 갈등의 흔적 없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타락해서 갈등으로 꽉 찬 인간이 오래 전에도, 또 오늘 날에도 결코 생각해낼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이며, 특별히 타락 전에 창조주가 이 세상에 증거를 심어 놓으셨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갈등과 투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성경에 따르면, 갈등과 투쟁은 창조 때문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 다음 사건, ‘인간의 타락’에 기인한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이교도 창조 신화의 한 페이지처럼 읽히지만, 그건 창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아담이 지은 죄의 여파와 관련이 있다. (이는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오로지 그 분을 통해서 세상이 만들어졌고, 그 분의 순종을 통해서만 생명과 구원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예표한다.) 이교 신화는 성경이 뚜렷하게 구분하는 창조와 타락을 시공간을 초월해서 마구 섞어 놓아버린 꼴이다. 자, 그럼 이런 창조가 왜 중요할까? 타락한 세상에서 그 창조의 의미를 통해 우리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이 글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삶이 궁극적으로 갈등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면, 생존과 성공은 그런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의 문제로, 얼마나 갈등에 강한 인간이 되는가에 달려있다. 위협에 대응하며,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수없이 많은 잠재적인 결과들을 계산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삶을 치닫게 되면 우리는 방어적이고, 실용적이며, 능수능란한 영이 자라나, 결국은 암묵적으로 권력을 숭상하게 되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대부분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고 또 이런 삶은 소모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삶이 궁극적으로 갈등이 아닌 초월적인 창조주에 의해서 형성된다면, 우리는 신앙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조화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관심사만을 가지게 된다. 만약 그분이 우리를 대적하신다면, 우리가 만들거나 계획하는 그 어떤 피난처(금전, 군사, 정치, 인간관계)도 우리를 보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를 대항하는 그 어떤 무기도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 안에서 우리는 안식할 수 있다(사 54:17). 다윗이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 25:21)라고 기도했을 때, 그는 인간의 일을 관장하는 것은 밀물과 썰물같은 갈등이 아니라 의롭고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은혜 속에 주어진 경건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했지, 결코 자신의 지혜, 방패 또는 인간 관계를 찾지 않았다. 갈등이 없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우리 이교도 조상들이 들은 갈등으로 가득한 신화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 결과를 그 분께 맡기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간다. 세상이 창조되던 바로 그 때처럼, 지금도 우리 삶에 궁극적인 결과를 만드는 주체는 혼돈과 갈등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만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ible’s Conflict-Free Creation Story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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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이라는 말의 의미
by William B. Barcley
2019-04-24
결혼 주례를 할 때, 나는 공동기도문을 주로 사용한다. 이 기도문을 바탕으로 신랑과 신부는 반지를 교환할 때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당신을 공경한다는 서약의 상징으로 이 반지를 드립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고백은 현대인들에게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누군가를 공경한다는 말은 조금 구식처럼 들리기도 한다.공경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듣기 어려운 표현 중의 하나이지만 성경 말씀에 자주 등장한다. 성경은 특정한 이들을 ‘공경’하라고 명령하는데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말한다(계 4:11).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출 20:12), 연장자(레 19:32), 다스리는 들(벧전 2:17), 교회 지도자(딤전 5:17), 그리고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섬기는 자들(빌 2:29)을 공경하고 존대하라고 언급한다. 또한 안식일(사 58:13)이나 결혼(히 13:4)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들을 귀히 여기라고 명하며, 마지막으로 존귀하게 여기는 행동과 그렇지 못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묘사한다. 예를 들어, 음란을 버리기 위해서는 “거룩함과 존귀함으로”(살전 4:3-4) 우리 몸을 다스리는 일이 요구된다고 설명한다. 반면, 동성애적 행동은 자신의 몸을 존귀하게 대하지 않는, 또한 순리대로 쓰지 않는 부끄러운 욕심에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롬 1:26).그러면 공경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공경’이라는 말로 번역된 성경의 단어들은 종종 여러 숨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경은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혹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를 존경하고 존중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가치와 대가 및 품격의 의미를 가진다. 가치 있고 존중 받는 것은 공경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때로 누군가의 가치를 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이 단어가 사용된다. 또한 성경에서 공경이라는 말은 전형적으로 공동의 그리고 공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하면, 공경은 공동체에 의해서 인식되거나 부여되는 말로 쓰였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공경과 동일한 의미의 표현이 공적인 테두리 안에서 사용되는데, 예를 들어 가말리엘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행 5:34). 또한 구약성경의 에스더에서 모르드개는 공적으로 존귀함을 받은 반면 하만은 수치를 당하였다고 언급한다(에 6). 잠언은 지혜로운 자와 의로운 자가 존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지만(잠 3:35; 11:16),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않다”라고 명시한다(잠 26:1).역사가들과 학자들은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지중해 근방 국가들은 문화적으로 명예를 중시하고 수치를 혐오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공적 명예로서의 공경은 중요한 문화적 가치였던 반면, 공적 수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었다. 명예와 수치는 종종 동양 문화의 표현으로 간주되는데, 그렇다면 고대 동방 문화의 이러한 특징이 현대의 기독교 세계관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모든 사회는 문화적 특징이 혼합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 사람들이 공적 수치 보다는 개인의 죄책감에 더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명예와 수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수치와 혐오가 고대 동방 문화의 특징이었더라도 현대의 서양 사회에서도 이러한 개념은 분명하게 존재한다.다시 말해, 공경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시대나 문화를 초월한다. 안식일과 결혼 관계,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과 명령을 반영하므로 시대를 떠나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제도는 창조의 때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를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공경하라는 명령이 문화적 규범을 초월하는 예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과부를 존대하지 않는 문화에서 “과부를 존대하라”(딤전 5:3)고 말한다. 그는 또한 연장자들을 지혜와 덕의 본으로서 공경하는 시대에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딤전 4:12)고 촉구한다.사실, 성경은 크리스천에게 모든 사람을 공경하라고 말하며(벧전 2:17)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롬 12:10)고 명령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시 8:5). 믿는 자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고 촉구했다. 공경하는 일은 우리가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느끼는가에 관한 것과는 관련이 없다.다른 사람을 존대하라는 강조는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명령과 직결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 그들이 누구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에서 그분의 궁극적인 가치를 높이고 또한 입증하게 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hat Is Honor?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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