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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찾는 지성인에게 기독교는 가장 안전한 플랫폼이다
by Brett Mccracken
2021-05-17
자유로운 사고, 두려움 없이 나누는 열린 대화, 인기 없는 소수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의지, 이런 자세는 이제 조지 오웬(Orwellian)이 경고했던 세상, 사상 경찰에 의해 더욱 감시받는 사회에서는 멸종의 위기에 처한 종(species)이 되어버렸다. 철저한 충성(adherence)의 요구라는 신조와 함께 새롭고도 근본주의적인 세속 종교가 등장했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여성도 여성이다”와 같이 어떤 세속적 신조가 가진 논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증오받아 마땅한 이단자로 스스로를 낙인 찍는 행위가 된다. 오늘날 현존하는 정통에 논리적으로 도전하는 책은 지금 아마존에서 금지되고 있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무신론자의 영웅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트랜스젠더리즘에 대한 새로운 정통성에 대해 (매우 논리적인) 질문을 담은 트윗을 게시한 사실 때문에, ‘자유로운 사상(freethinkers)’을 옹호하는 것이 조직의 존재 목적 중 하나라고 명시적으로 표명한 무신론자 조직에서 탈퇴 당하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미국 휴머니스트 협회는 트랜스젠더리즘이라는 용어에 관한 새로운 정통성 부여에 관한 도킨스의 매우 합리적인 트윗을 논하기보다는 그의 트윗을 시대를 역행하는 오류(retroactive cancellation)의 근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상의 옹호’라는 말 속에 단지 주류의 생각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제명(canceling)해도 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오랜 기간 편협하고 반지성적이며 또한 어려운 질문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비난받아 온 기독교가 서구 문화가 유발한 빈틈을 채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하나의 반전이다. 논쟁의 대상이 되는 문제에 대해 언제 어떻게 또는 과연 공개적으로 말하는 게 가능이나 한지에 관해서 조마조마해야 하는 오늘날 사회에서 기독교는 호기심 많은 질문자, 의심을 품은 반체제자, 그리고 당파적 서사가 우위를 점하는 세상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로 가득한 안식처가 될 수 있다. 비록 최근에 들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기독교는 그래도 지난 이천 년 동안 인류 지성의 토대가 되어왔다. 간단히 말해서, 그런 기독교에게 오늘날 다시 한번 과거처럼 가장 비옥한 지적 토대가 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진정 풍요로운 지적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린, 기독교처럼 결코 흔들리지 않는 초월적 기초 위에 세워져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토대가 없다면, ‘진리’에 대한 모든 담론은 임의적이며 결국에는 권력 투쟁으로 이어질 뿐이다. 모든 주장은 공유된 지적 프로젝트를 구축하는 건설적인 벽돌이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 또는 나와 다른 정체성에 상해를 입히는 탄약에 불과하다. 성경적 토대가 지적 호기심에 영감을 주어야 한다담론에 대한 세속적 접근은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해체로만 이어질 뿐이다. 진리에 대한 합의를 얻을 능력 자체가 없는 세속주의는 취소, 비난, 금지, 침묵만을 자행한다. 이 모두는 다 근본적인 파괴다. 그러나 기독교적 접근 방식에는 토대를 놓을 견고한 기반이 있기에 얼마든지 건설적으로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쓴 ‘지혜의 피라미드(Wisdom Pyramid)’ 속 표제에서 성경이 모든 지혜의 기초가 되는 이유다.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은 ‘단단한 기초’를 이루는 수평적 토대가 될 뿐 아니라, 그 토대 위에 놓이는 모든 지식 체계가 흔들리지 않고 고정될 수 있도록 하는 수직적 질서까지도 제공한다. 인간은 책, 예술, 자연/과학, 이성, 공동체, 생생한 경험과 같은 모든 종류의 자료를 사용하여 지식을 구축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흔들리지 않는 기반 위에 구축되지 않는 한 결코 구조적으로 건전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객관적이고, 초월적이며, 또한 모든 사람에게 진실이 되는 하나님의 진리는 제한적이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를 검열하는 진리도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에는 자유함과 세상을 넓히는 확장성 그리고 활력을 불어넣는 목적이 있다. 그 진리는 지적 추구를 위한 공통된 언어와 방향을 제공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유롭게 하는 진리’(요 8:32)다. 자유를 주는 이 진리는 옥스포드, 하버드 및 대부분의 위대한 대학을 창립하게 했을 뿐 아니라 번영에 필요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holas Copernicus),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 아이작 뉴턴(Isaac Newton)과 같은 인물들이 이룬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견과 혁명적인 아이디어의 바탕이 된 진리도 바로 이 진리다. 수많은 예술가, 작가, 철학자에게 생명을 주는 깨달음과 탐험의 원동력을 제공한 진리이기도 하다. C. S. 루이스의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태양이 떠올랐음을 믿는 것과 똑같은 원리로 기독교를 믿는다. 내 눈으로 태양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으로 인해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지적 안일함을 흔들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신비한 깊이를 더 탐구하도록 만드는 흔들리지 않는 진리다. 이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광범위하게 읽고 공부하도록 독려하며 또한 나와 다른 생각의 상대적인 장점을 평가하는 프레임을 제공한다. 또한 이 진리는,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또 거짓인 각종 사상으로 가득한 이 타락한 세상을 탐색할 때 방향을 잃고 좌절하지 않도록 바른 길을 제공하는 나침반이기도 하다. 교회에 닥친 도전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역사를 되돌아볼 때 성경 속에서 심오한 지적 에너지와 호기심을 위한 촉매제를 발견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R.C. 스프로울(R.C. Sproul)이 지적했듯이,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바른 의미는 단지 성경이 기독교인에게 유일한 권위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만이 유일하게 오류 없는 권위라는 사실이며, 이 말을 모든 기독교인이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지적 싸움을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성경으로 시작해야 하지만 반드시 거기서 끝날 필요는 없다. 성경의 무오성은 우리로 하여금 타락한 창조 세계로부터 배우는 자유뿐 아니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자유까지 제공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에 눈을 뜬 기독교 공동체는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으로 비옥한 공동체가 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오히려 황당하게 들린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기독교 역사가 제공하는 지적 풍요로움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문화 현실은 교회에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 캠퍼스는 이제 상호간 대화와 그룹적 사고라는 측면에서 동질적인 단일체다.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유익한 공간이라는 말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오늘날 소셜 미디어다. 소셜 미디어에서 대중이 가진 ‘상식(commons)’은 이제 리처드 도킨스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단 한 번이라도 주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소셜 미디어는 한마디로 폭탄으로 가득한 지뢰밭이 되어버렸다.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교회와 기독교 기관이 가장 흥미롭고 은혜로 가득 찬 지적 활력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물론 여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1. 어려운 질문을 반갑게 받으라교회에서 양육된 많은 젊은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해체하는 여행 속으로 들어서는 이유는 그들에게 교회가 결코 의심하는 사람을 지켜주는 안전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서 과연 이런 질문을 해도 될까?” 이런 의문은 너무도 흔할 뿐 아니라 안타깝게도 너무도 당연한 두려움이다. 수많은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가 의심하는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질문을 막거나 어려운 교리를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좋지 않다! 활기찬 지적 문화를 교회 속에 회복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교회가 어려운 질문에 대한 안전한 장소가 되겠다는 의지를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 카렌 스왈로우 프라이어(Karen Swallow Prior)는 TGC가 출판한 그의 새 책, ‘신앙을 버리기 전에(Before You Lose Your Faith)’에서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했다. “올바른 방식으로 묻는 올바른 질문은 진리로, 그것도 참 진리(the Truth)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신앙을 버리기 전에 기독교에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기억하라. 우리가 손에 쥔 것이 지적 건설을 위한 도구인 반면에 세상이 갖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해체를 위한 도구라는 것을. 똑똑한 아이들, 호기심 많은 예술가, 과학자, 그리고 ‘자유 사상가’까지도 환영받고 영감을 받는 환경을 우리 기독교가 조성해야 한다. 세상은 플랫폼을 해체하고 또한 거부하며, 자유로운 토론마저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모두를 수용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무한히 견고하며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면밀한 까다로운 조사까지 다 이겨낼 수 있다. 선의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던지는 질문(잠 9:10)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더 많은 층(layer)을 발굴하고 그 안에서 더 많은 보물을 발굴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2. ‘비핵심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너그럽게 반대하는 모델을 만들어내라기독교인들이 지적으로 관대하고 ‘열린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선언하는 진리에 관해서까지 ‘마음을 닫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신앙의 지적인 활력은 정통 기독교인들이 수천 년 동안 믿어 왔던 명백한 ‘핵심 고백(first things)’에 대한 분명한 합의에 달려있다. 교회의 지적 건강을 위해서 단지 ‘대화’를 위한 대화 자체를 목적으로 삼거나 또는 이단적이고 명백하게 비정통적인 사상에까지 대화의 발판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건전한 토론과 ‘비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탐구는 교회가 과거보다 지금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 Z세대는 기독교 장로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담론을 보며 그것이 트위터에서 만나는 싸움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욕하기, 논리적 오류, 그리고 인종주의적 배타주의(깨어나라! 인종 우선!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는 의미 있는 대화 자체를 가로막는다. 아이디어는 날카로울 수 있지만 어조는 부드러우며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는 실제적이고 실질적이며 또한 너그러운 토론 방법을 만들어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는 다 진리를 찾는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핵심’과 ‘비핵심’을 결정하는 것조차 열띤 논쟁을 부르는 문제다. 신학적 분류는 중요하고 도전적인 목회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우리에겐 두려움 없이 함께 해야 할 또 하나의 대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함께 대화하자. 3. 호기심과 비판적 사고를 키우라‘자유로운 사고’는 경계가 없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내 눈에 맞는 대로 생각한다의 동의어가 아니다. 참으로 자유로운 사고는 탐구를 강화하는 초월적인 진리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 동료 크리스 콜킷(Chris Colquitt)이 성화된 개인주의(sanctified individualism)라고 이름 붙인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기초해서, 기독교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항상 홀로 설 준비가 되어있음.”기독교인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상가가 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진실을 상대화하는 당파적 의제에서 벗어나라. 총체적인 주관성이 주는 무의미함에서 자유로워지라. 주님의 말씀과 상충되는 시대의 정신을 거스르는 자유함이 있는가? 가능한 곳에서 시대 정신(zeitgeist)의 한 측면을 긍정하면서도 또한 반대할 것을 분명히 반대하는 용기가 있는가? 세상에 넘치는 책, 영화, 강의, 그리고 논쟁을 접하길 두려워하지 말라. 그 속에는 진리도 있지만 거짓도 있다. 전자로부터 배워서 후자를 버리거나 거기에 도전하라. 그러나 이런 자세는 교회뿐 아니라 오늘날 세상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도움이 되는 생각과 해로운 생각이 모두 포함된 작품을 감상하고 씨름하면서, 그 속에서 숨은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다. 예를 들어, 너무도 자주 우리는 책에 있는 모든 내용을 무의식적으로 다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는 그 반대로 무조건 무시하고 읽기조차 거부한다. 그러나 인간이 쓴 대부분의 책에는 옳고 그름이 섞여 있다. 이런 혼합된 가방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게 바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이여, 우리가 이런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의 피난처오늘날 이 세상에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전한 피난처란 거의 없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과 창의적인 사상가의 특정 질문이나 반대되는 생각에 대해서까지 충분히 편안하게 느끼면서 토론하는 포럼은 거의 없다. 교회여, 지금 이런 기회를 포착하여 우리의 세속적인 이웃을 교회로 초대하자.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전율을 주는 지적 커뮤니티를 그들이 경험하도록 만들자. 차마 트윗에는 할 수 없는 질문이 있는가? 교회에서는 해도 된다. 비슷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진리를 발견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가? 우리도 그렇다. 리처드 도킨스 씨? 당신도 여기 와서 우리와 함께 대화를 나누자. 얘기하다 보면 동의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겠지만, 당신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원제: Christianity Can Be the Safest Space for Truth-Seeking Intellectual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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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사상에 대응하라
by Andrew Hoffecker
2021-04-10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마다 다원주의 사상이 자리해 왔다. 성경적인 신앙생활에 비성경적인 사상과 관습을 양립시키려는 다원주의가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역사 가운데 늘 잔존해 오다가 이 시대에 특히 확산되어 신자들에게 깊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다원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도 과거와 현재 사이에 큰 차이가 생겼다. 이를테면 성경 및 초대 교회 역사에서 다원주의에 반대하던 모습이 오늘날에는 기꺼이 수용하는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다원주의의 흔적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 때부터 발견된다. 고대 예루살렘 안에는 전통적인 성전 예배와 더불어 우상 숭배가 공존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해마다 절기를 지키며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등 기존의 예배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비도덕적인 행위를 일삼으며 바알 신을 숭배한다거나 아니면 암몬 족속이 섬기던 몰렉 신에게 어린아이를 제물로 갖다 바치는 일을 겸하여 했기 때문이다(렘 7:8-10). 이에 선지자들은, 특히 신명기 18장에서 금지하고 있는 이교 관습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끊임없이 질책했다. 일례로 열왕기하 23장은 얼마나 많은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 사회에 유입되었으면 끝내 요시아 왕이 정화 운동을 벌이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여러 선지자들도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행위에서 단일한 토대가 되는 모세 언약을 기억하도록 그 백성을 일깨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후 초대 교회 역사에서는 다원주의가 몇 가지 형태로 출현했다. 먼저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며 반드시 유대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그중에서도 특히 할례 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도 등장하여 기존 복음서와는 다른 복음서를 제시하며 결혼이나 특정 음식을 금했으며 이를 통하여 더 높은 영적 지식을 획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어떤 이들은 천사 숭배라든가 일련의 금욕주의적 규칙들을 강조하기도 했다. 바울은 그러한 다원주의에 대해 “다른 복음”이라고 규정하며 비판했다(갈 1:6-9). 그는 복음만이 유일하게 “바른 말”로서 우리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설명했다(딤전 6:3; 딤후 1:13-14).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과 달리, 최근에 교회사 학자들이 입버릇처럼 내세우는 주장이 있다. 바로 초창기 기독교는 단일성을 갖추지 않았으며 매우 넓은 다양성을 띤 신앙 운동으로서 그 안에 서로 다른 견해들이 공존했지만 어떤 견해가 진짜이고 어떤 견해가 가짜인지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복음서 저자도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 다른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또 바울 서신도 이신칭의 교리에 기반한 또 하나의 기독교를 대변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교회사 학자들은 기독교를 더 이상 단수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에 각각의 본문과 신학 또는 관습에 따라 ‘기독교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리 및 관행의 단일화는 초대 교회 시대보다 훨씬 이후인 국교화가 이뤄질 때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단’과 ‘정통’의 구분도 공의회가 형성된 4세기부터 발생하여 로마 제국의 칙령에 따라 강제적으로 확립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영지주의 같은 운동은 완전히 진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승자가 역사를 기록하기 때문에, 이전의 수많은 기독교 견해들은 오랫동안 역사의 이면에 묻히게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주의 깊은 연구를 통해 다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이렇게 역사를 수정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는 분명한 오류가 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나 신약 시대의 바울이 거짓 교사들을 질책했듯이, 초창기 기독교의 변증가들 역시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의 가르침을 반박했다. 가령 3세기 초에 히폴리투스는 ‘모든 이단에 대한 논박’(Refutation of All Heresies)이라는 책을 저술했고,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도 교회가 4세기에 이르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단일한 메시지를 가르쳤다는 증거를 남겼다. 이를테면 이레니우스는 185년에 기록한 자료에서 교회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지만, “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며 마치 한 마음을 가진 것처럼 신앙하고 한 입을 가진 것처럼 설교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여러 언어가 존재하지만, 전통의 의미는 하나이고 동일하다”라고 말했다. 터툴리안도 200년 경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첫 번째로 강조하려는 원리는 이렇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명확한 진리 체계를 세우셨으므로 세상은 이를 수정하지 않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처음부터 기독교를 변증했던 자들은 사도들의 성경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단일한 진리를 자랑스럽게 여겼다.비록 다원주의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 역사와 초대 교회 시대부터 등장했지만, 그러한 사상은 근대 및 이후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러 더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와 맞지 않는 이질적인 세계관을 주창하는 자들이 다양한 철학적·문화적 현상을 들어 그들 나름대로 기독교를 재해석하며 여러 가지 대안적인 신앙관을 제시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를 전통적인 신앙에 포함시켜야 기독교가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수많은 ‘기독교들’이 19세기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견해들은 사도들이 전수해 준 역사적 신앙보다 당대의 문화적 규범에 더 어울리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예를 들어 영국 이신론이 유럽으로 확산된 이후 활동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기독교를 일종의 합리적인 도덕주의로 새롭게 규정했다. 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Religion within the Bounds of Bare Reason, 1793)라는 저술을 통해 명백히 도덕적인 행위만이 참으로 기독교적인 행위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구약성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타락의 역사성도 거부했으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 사역에 대해서도 도덕적 무책임의 정점에 있다며 경멸했다. 또한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러한 용어를 자주 차용했는데, 예를 들면 ‘거듭남’이란 사람들 속에 자리한 가장 깊은 내면의 경향성이 황금률을 따르게 되는 변화를 일컫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기도나 예배를 비롯한 다른 신앙 활동들은 모두 올바른 도덕적 행위에 대한 미신적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이러한 합리주의에 이어 낭만주의가 독일에서 주요한 세계관으로 부상할 때,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교회가 성경 및 종교개혁의 원리로 돌아가도록 함으로써 당대의 사조를 따라가려는 문화적 흐름에 그가 반대하였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그는 오히려 신앙을 재정의하려는 근대성의 영향을 쫓아 감상적인 기독교를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 의식이 객관적 교리보다 우선하게 되었다. 또한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기록한 문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리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종교적 의식에 관한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칸트와 같이 슐라이어마허도 인간의 타락을 부인했고, 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또한 미신적으로 취급하며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속죄 교리를 대체하는 신비주의적 관점을 주창하며, 예수님은 사람들이 내면에 있는 신 의식에 참여하도록 만드신 분이라고 주장했다.이렇게 칸트와 슐라이어마허는 바로 내재신학(즉 진리의 근거를 자기 내면에서 찾으려는 신학)을 대변하는 모델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의 범위를 그릇된 방향으로 확장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여러 신학자와 목회자가 잇따라 기독교를 새롭게 해석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전통적인 교리에 자기 해석을 끼워 맞추려고 했다. 그래서 정통적인 교파에서도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관용’이 되었으며, 자유주의 진영은 계속 성장하여 1920년대에는 개신교의 주요 교단을 거의 장악하게 되었다.이처럼 자유주의가 주류 교회들 안에서 다원주의를 확산시키는 일에 성공을 거두자, 그 여파로 오늘날 교계 안에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바로 복음주의 교회 안으로 다원주의가 그 세력을 광범위하게 미치게 된 변화다. 그래서 복음주의 계열의 대학이나 신학교 안에서, 그리고 목회자나 신학자 가운데 일어난 변화를 다방면으로 (즉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또는 사회학적으로) 조사하는 연구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연구에 따르면, 원래 복음주의란 역사적 정통주의의 가르침을 위협하는 외부적 세계관의 유입을 단호히 거부하는 입장을 대변했는데, 계속해서 부상하는 다원주의의 흐름을 따라 아이러니한 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곧 처음에는 세상의 사조에 맞서기 위해 설립된 학교들이 이제는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이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이와 같은 역사의 진행을 고려할 때 가장 긴급히 요구되는 교회의 사명은 세상의 사조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성경적 세계관을 분명히 제시하는 작업이다. 그 세계관은 통합적이고 일관적일 뿐 아니라 그 범위가 종합적이어야 한다. 또한 인생과 사상의 모든 측면을 성경의 내용을 사용해서 원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관점이어야 한다. 물론 그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창조자시고, 역사를 다스리는 통치자시며, 자신이 지으신 만물을 궁극적으로 회복시키는 구속자가 되신다는 근본적 전제 위에 세워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초월적인 주권자로 드러내실 뿐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궁극적으로 섭리하는 분으로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진리의 이면적 근원에는 바로 그분이 계신다. 그리고 그분만이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부합한 객관적인 법칙을 계시하신다.그러므로 우리의 세계관은 인간의 본성이나 구속의 수단 등에 관한 올바른 신학을 다룰 뿐만 아니라 인생의 전 영역에 그 범위가 미쳐야 한다. 결국 모든 인생은 신앙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1장 26절이 우리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하는 일에 혀의 사용을 시금석으로 제시하듯이, 우리의 사상이나 행동도 그와 같은 시금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학문적 주제를 연구하든지, 혹은 어떤 직업적 소명을 추구하든지, 아니면 어떤 문화적 활동에 참여하든지, 그 각각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경에 부합한 질서와 합법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신자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임무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데서 더 나아가(고후 10:5), 우리의 모든 삶을 그렇게 해야 한다. 즉 인생 전체를 그리스도와 그분이 계시하신 말씀에 복종시켜야 한다.우리가 인생의 모든 영역을 복음에 복종시키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성경의 원리를 회피하거나 위반하는 이 세상의 접근을 멀리할 수 있다. 가령 실재를 물질로 환원시키는 무신론적 자연주의라든가 권력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하는 마키아벨리식 정치학 또는 질의 문제를 양으로 환산하여 분석하는 과학주의 등이 우리 주변에 명백히 자리하고 있다. 나아가 일상적인 사고와 생활 속으로까지 미묘하게 파고든 세상의 전제를 파헤치는 작업은 더욱 까다로운 수고를 요구한다. 특히 결과로 과정이 정당화되는 실용주의라든가 명백한 논리적 분석을 모호한 감정이나 직관으로 대체하는 주관주의적 영성 따위가 그와 같은 전제로 깊이 자리하고 있다.이처럼 다원주의가 교회를 잠식해 가는 이상, 교회는 반드시 그에 대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성경적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임무는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에 주어진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와 신학자는 홀로 이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반드시 이 사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바울도 자기 당대에 개개인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편지를 보내며 그 사명을 감당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성경적 세계관의 대사가 되어야 한다. 매일의 소명 가운데 각자가 그래야 하며, 또한 교회의 가르침과 설교를 통해서 공동으로 그래야 한다.원제: Breaking Boundaries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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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것은 그리 대단한 급진적 결단이 아니...
by Brett Mccracken
2021-03-30
최근 몇 년 동안 인스타그램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자신의 역회심(deconversion)을 발표하는 것은 하나의 문화적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대충 이런 식인데, 전직 복음주의 작가, 목사, CCM 가수, 또는 교회에서 자란 이십 대가 뭔가를 깊이 고민하는 것 같은 엄숙한 표정과 함께 자유로움을 뽐내는 셀프 사진을 올리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뒤로는 보통 아름다운 호수나 산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심혈을 기울여서 찍은, “불완전하지만, 이게 나야”라는 식의 마음을 표현하는 셀카를 게시한다. 그런 게시물에서 흔히 만나는 문구는 이런 것이다. “차마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는 몰랐어.”, “이걸 게시하는 건 정말로 두렵지만”, 그리고 중간중간 '진화', '여행', '두려움', '발견', '정직', '진정함', '자유', 그리고 '희망' 등의 단어가 들어간 내러티브를 늘어 놓는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역회심을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졌을 진지한 고민과 괴로움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내 관심은 이런 움직임이 하나의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장르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제 예측 가능해지고 평범한 일로 전락하기에, '나 자신을 찾는' 시대가 만든 놀라운 결과물이라고 보기 어려워진다.시대에 역행하는 도발성과는 거리가 멀게도, 이제 누군가가 기존의 제도적 종교와 결별한다는 선언은 사실상 이미 그런 식의 발표를 주류 문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수십 년 전의 문화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을 움직이는 영성을 위해 기존의 교리와 제도적 신앙을 버리는 것은 결코 서구 문명을 거스리는 게 아니라 사실상 서구 문명과 발맞추는 것이다. 자신의 영적 자율성을 선언하는 것, 즉 죄와 도덕으로 대표되는 구식 사고방식인 기독교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프라(Oprah) 쇼에 나와 그녀의 생각에 찬성하는 중산층 엄마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한계와 경계를 정하고 분노하는 하나님 대신 내가 바라는 '최고의 삶'을 지지하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존 레논(John Lennon) 스타일의 '사랑'과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이고, “선포하라, 그럼 네 것이 될 것이다”라고 설교하는 조 로건(Joe Rogan)과 같은 번영 설교자에게 열광하는 어리석은 청년들 중의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며, 또한 지난 20년 간 나온 '종교, 영성, 그리고 신앙'에 관한 각종 베스트셀러들의 메시지에 동의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청소년 시절부터 믿던 기독교와의 이혼 서류에 사인하기 전에, 무엇보다 당신이 지금 하려는 게 결코 반문화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오늘날 흔해 빠진 이혼처럼 그것은 너무도 뻔한 이야기에 불과하니까. 나는 이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고 진짜 반문화적인 선택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엄청나게 힘들고 또한 무엇보다 현대의 시대 정신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진짜 기독교를 체험한 적이나 있는가?믿음을 지키는 것이 급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참된 성경적 의미의 기독교 신앙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기독교는, 교리에 관해서는 무식하면서도 총기를 소유하겠다는 열망과 국경의 장벽을 더 높이는 데는 열심인, 미국적 문화에 찌든 기독교가 아니다. 또한 동시에 사회 정의 캠페인을 위해 선택적으로 성경구절을 사용하면서 개인적인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는 진보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안락함을 추구하는 형태의 기독교를 '해체'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왜곡된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급진적이지 않다. 지금 행여나 기독교와의 단절을 고려하고 있다면, 일단 진정한 기독교를 한번 만나 보길 권한다. 이 기독교는 당신의 정치적 성향과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기독교는 끊임없이 여러 면에서 당신을 압박할 뿐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왜곡되거나 조작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이 기독교는 또한 단순히 당신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하지 않고 예수님을 더 닮아 가도록 끊임없이 당신을 밀어 부칠 것이다. 진짜 급진적인, 즉 진정한 반문화적 선택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게 아니다. 진짜 급진적인 선택은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이 기독교는 신비로움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무한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과 관련하여 세상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지적 씨름을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해체하려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또한 행여 모든 신앙을 다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신앙 속에 잠재된 모든 긴장은 다 해소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지적 멍청이를 위한 종교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이것이 당신이 경험한 기독교라면, 난 당신을 불쌍하게 생각한다. 당신이 기독교를 떠나려고 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떠나려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돌연변이다. 내가 원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길들여 내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패러다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일 뿐이다. 진정한 기독교는 항상 우리의 패러다임에 도전하고 우리가 편하게 생각하는 영역을 공격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기독교를 만나는 것은 보람 있지만 동시에 많은 대가를 치르는 일이기도 하다.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 중 하나가 지적인 부분이다. 경험적 증거 없이 계속되는 질문들과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역설들, '희미하게만 보는' 믿음(고전 13:12)의 부담을 계속 짊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만족하려는 겸손한 의지가 필요하다. 세상을 떠난 신학자 J. I. 패커(J. I. Packer)는 이렇게 말했다. “이해가 안 돼서 더 이상 믿지 않거나, 이해할 때까지 믿음을 미루는 것은 우리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대신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했듯이,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이 우선이고 보는 게 그 이후가 되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 정한 순서다. 결코 그 순서가 뒤집어질 수는 없다. 따라서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증거는 하나님이 정한 순서를 따르려는 의지다.” 정말로 이것이, 즉 “믿음이 먼저고 보는 것(이해하는 것)은 나중이다”가 기독교 신앙이 진짜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런 신앙을 계속 갖는 것이야말로 포기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 뿐 아니라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신앙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이성을 힘들게 하는 신앙의 요소들을 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맞춤형 영성의 외로움단지 제도적 종교의 해체를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완전한 무신론으로까지 전환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기독교의 일부 측면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유동적이며 기분과 필요에 맞는 다른 철학과 의식 또는 영성을 통합하는 식으로, 보다 직관적이고 맞춤화된 영성을 구축할 가능성이 높다. 다음은 종교 칼럼니스트 타라 이사벨라 버튼(Tara Isabella Burton)이 ‘이상한 의식: 신 없는 세상 속 새로운 종교(Strange Rites : New Religions for a Godless World)’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감성적 직관, 미학적이고 상품화된 경험, 자기 창조와 자기 개선, 그리고 셀카의 종교. … 제도, 신조, 신이나 우주 또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형이상학적 진리 주장과 결별했지만,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가치, 목적, 공동체, 의식 등 종교가 항상 제공하던 그 역할을 감당하는 새로운 종교. 이런 식의 '혼합 및 일치'를 내세우는 종교에서는 기도와 같은 전통 종교의 요소들 일부와 더불어 요가와 명상으로 대표되는 '웰빙' 관행의 일부, 그리고 타로 카드와 같은 뉴에이지 마법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사회 정의 또는 성소수자의 권리 등에 관한 도덕적 열성도 있을 것이다.이런 종류의 혼재된 맞춤식 영성이 급진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주류 소비주의가 지향하는 부르주아적 반복일 뿐이다. 이것은 특히 자본주의가 좋아하는 종교다. 왜냐하면 종교 기관의 울타리 밖에서 의미를 찾고 갈망하는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제품과 경험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문화적 시위와는 거리가 먼 이런 식의 나만의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당신의 방식대로 만들어 먹어라”라는 믿음의 버거킹 브랜드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극도로 소비주의적인 세상에서 맞춤형 영성을 선별하려는 충동에 저항하고 개인 취향에 맞지 않을 때에도 일관되고 확립된 종교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급진적이다. 또한 맞춤식 영성은 대개 특권층에게나 어울린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즉, 고급스런 영성을 추구하려면 어느 정도 돈과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가능하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제도의 틀 밖에서 얼마든지 '홀로' 영성이 주는 위험을 의식하지 않고 직관에 따른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생존뿐만 아니라 미래에 출세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구조, 제도, 전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저소득층과 개발도상국에서 무신론과 불가지론을 만나기 힘든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타인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있으려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조건이 갖춰져야 가능한 이야기다. 따라서 맞춤형 영성(또는 영성 없음)에 찬성하여 종교를 버리는 것은 편안한 소비주의와 완전히 일치하는 부르주아적 선택이다. 그것은 당신을 배신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외롭게 만드는 일이다. 기독교를 떠날 때 새롭고 더 넓은 자유의 문이 열리는 게 아니다. 정반대다. 당신은 자유와 가능성의 지평을 오로지 단 한 사람으로, 즉 당신 자신으로 좁히는 것이다. 대단하게 들리지만, 이것이 소비자주의자로 사는 내 세상(iWorld)의 방식이다. 이런 식의 나 중심의 영성은 결국 밀실 공포증과 외로움으로 귀결된다. 공동체가 주는 제약, 외부 권위의 요구 그리고 제도적 구성이 요구하는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처음에는 개방적이고 낭만적인 자유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약이 사라진 것은 자유가 아니다. 예수님은 “완전하고 무한한 자율이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32). 당신이 만든 진리가 아니라, 참 진리,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진리다. 그리고 그런 자유를 주는 진리는 내면을 들여다보고, 직감을 믿고, 혼자 가는 것으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가 주는 급진적 대가탈기독교와 세속화 문화에서 해체는 급진적인 행위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말이 된다. 역사적인 기독교는 오늘날 세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낯설고, 그 어느 때보다 변두리로 밀려났으며, 그 어느 때보다 반갑지 않은 존재다. 서구 문화가 지향하는 오늘날, 그 모든 규범을 파괴하는 진정한 기독교를 한번 생각해보자. “자신을 믿으라”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자신을 부인하고(마 16:24), 십자가를 지라고(눅 14:27) 요구한다. 표현을 중시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진정성, 그리고 튀는 개성을 강조하는 “당신은 당신이 만든다”라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라고(롬 8:29), 하나님을 본받으라고(엡 5:1) 요구한다.소비주의적이고 탐욕스러운 문화에서 기독교는 값비싼 관대함(눅 21:1-4)을 가지고 물질적 소유를 기꺼이 포기하라고(마 19:21; 눅 14:33) 요구한다. 자기 홍보와 자기 자랑 그리고 셀카로 대표되는 자기 지향적인 세상에서 기독교는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종으로 살라고 요구한다(빌 2:3-4; 갈 6:2; 마 20:26-28).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진정한 자유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요구한다(고전 6:20).서로 동의하는 한 자유로운 섹스를 승인하는 진보적인 성 문화에서 기독교는 성은 오로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나누는 언약적 결합이라고 말한다(창 2:24; 마 19:3-6.; 고전 7:2).'권력'과 '승리' 그리고 '최고의 삶'을 주는 성공을 특권으로 삼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연약함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한다(고후 12:9-10).당파성을 중시하며 적을 최대한 나쁘게 생각할 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적까지 '소유'하는 것이 삶의 방식인 세상에서 기독교는 그들을 사랑하라는 급진적인 도전을 던진다(마 5:44).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버리고 인종 차별, 성 차별 및 외국인 혐오를 통해 타인의 비인간화를 정상화하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창 1:27) 존엄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분열로 가득하고 또한 다른 사람과는 그 어느 때보다 헤어지기 쉬워진 세상에서 기독교는 화해하라고 요구한다(엡 2:11-22).'모든 길은 어차피 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게 위로가 되는, 다양한 신념의 다원주의 세상에서 기독교는 천국으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하나의 길 밖에 없다고 말하며, 그 믿음을 요구한다(요 14:6).과학적 합리주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기독교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아이를 낳은 처녀, 죽음에서 부활한 육체, 기적적인 치유).이것들 중 그 어떤 것도 실행하거나 믿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를 설명하는 목록은 이보다 훨씬 더 길 수 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기독교를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선호하는 정치, 음악 또는 성적 성향 등)에 편리하게 맞추는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또 그리스도의 사역에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가 요구하는 모든 대가를 받아들이고, 또한 기독교의 모든 주장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문화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반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힘들고 이상하기까지 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 자신들이 믿고 실천하는 것 때문에 '괴물'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성경이 말하는 좁은 길을 따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랄 이유가 없다(마 7:13-14). 그렇기에 인스타그램에서 역회심을 발표하는 게 일상이 된 현실을 보면서도 놀랄 필요가 없다. 정말로 반문화적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기독교를 버리는 게 아니라 기독교를 더 굳게 붙잡으라.편집자 주:이 기사는 브랫 맥크레켄(Brett McCracken)이 쓴 '신앙을 버리기 전에: 교회 속 의심을 해체하기(Before You Lose Your Faith: Deconstructing Doubt in the Church)에서 발췌한 것이다.원제: Deconversion Is Not as Countercultural as You Thin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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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기독교사회
좁은길
역회심
인스타그램
영적자율성
반문화적
JI패커
맞춤형영성
카이퍼 통신 9 : 영역 주권은 세속주의를 부추기는가?
by 김은득
2021-03-21
학문 영역을 중심으로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이전 카이퍼 통신 8호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영역에 절대 주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인간 삶의 각 영역들, 즉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은 하나님께서 영역 그 자체에 부여하신 일종의 파생된 주권을 가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각 영역의 주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각각의 영역들에 부여하신 것이기에 그 영역 자체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규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 영역은 정의와 공공선을 실현하려는 원리, 학문 영역은 진리를 추구하려는 원리, 예술 영역은 아름다움에 기여하려는 원리를 따라 운영됩니다. 이렇게 각 영역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충실히 따를 때 비로소 신자들은 각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나 불신자 모두 각각의 삶의 영역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역 주권을 기독교인에게만 부여하신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삶의 각 영역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따를 때, 굳이 신자일 필요가 있겠는가? 신자든 불신자든 누구든지 각 영역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충실하게 따라서 그 영역에서 주권을 행사한다면, 그 영역은 점차적으로 세속화되지 않겠는가?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라고 주장해 놓고서는, 영역 주권 원리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역 주권이 신정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주로 교회의 외부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영역 주권에 대한 위의 질문들은 주로 신자들에게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대답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아니나 다를까 영역 주권은 각 영역의 세속화, 특히 학문의 세속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염려와 걱정들이 현실화 되었습니다. 바로 제가 1880년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설립 기념으로 영역 주권을 연설한 날에 벌어졌던 에피소드입니다. 먼저 설립식에서 자유대학교의 관계자가 들고 서 있던 홀(scepter) 위에 새겨진 미네르바(Minerva)의 동상이 뜨거운 감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1834년 국가 권력에 종속된 화란개혁교회(NHK)와 분리되었던 성도들(the Seceder)의 비난이 상당했습니다. 로마 신화에서 지혜의 여신으로 여겨지는 미네르바 (그리스 신화에선 아테네)를 기독교 대학의 홀로 사용한 것이 '이교도적(heathen)'이라는 비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그런 비판은 '광신적 성상파괴주의(iconoclastic fanatisicm)'에 불과하며, 17세기 개혁파 정통신학자인 “푸치우스(Voetius)의 작품에도 배움의 상징으로서 미네르바를 다룬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자유대학교 설립식 이후에 벌어진 공식 만찬에서 연회 참석자에게 포도주가 제공되었다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상당했던 것입니다: “개혁주의자는 와인에 물 타는 그런 류가 아니야!” 즉, 술을 마심으로 기독교 진리를 훼손한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와인에 물 탄다는 그런 비판에 대해 저는 동일하게 물 탄 우유의 비유로 반박했습니다: “아무 쓸데없는 초콜릿 주전자나 물 탄 우유로는 결코 담대한 칼빈주의자들을 길러낼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정말 삶의 각 영역의 주권을 영역 자체에 부여하면, 그 영역들은 세속화될까요? 여러분이 세속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어떤 의미로 사용하십니까? 세속화라는 단어는 본래 교회나 성직자가 소유하고 관장하던 것을 평신도나 교회 이외의 기관에게 그 소유권 혹은 감독권을 양도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중세 교회는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들, 즉 정치, 학문, 예술 등을 그 날개 아래 두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이후, 정교 분리의 원칙은 근대화된 국가라면 반드시 따라야 할 헌법적 명제가 되었습니다. 1848년 네덜란드 역시 국가의 주권이 더 이상 왕이 아닌 의회에 있음을 헌법을 통해 명시할 때, 정교 분리의 원칙 역시 공표되고 실행되었습니다. 기독교 대학이었던 유럽의 수많은 대학들이 국립 혹은 공립대학으로 변화되는 등 학문 영역 역시 세속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기독교 수도원을 주축으로 발달한 모든 기독교 대학들이 더 이상 기독교 세계관 혹은 초월적 세계관을 통해 운영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연과학의 상업적 성공은 유럽의 대학들을 지식 혹은 진리를 전달하는 강의 중심에서 새로운 지식 혹은 진리를 발견하는 연구 중심으로 이끌었습니다. 모든 학문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따라 산업화된 세계에 경제적 기여를 할 수 있는 양적 연구로 진행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가장 잘 대표하고, 이런 방향으로 전환하여 가장 성공한 대학교가 독일 베를린의 자유대학교입니다. 물론 자유대학교의 슐라이어마허가 신학의 대상을 하나님에서 인간의 종교적 경험으로 제한하면서, 신학을 종교학의 일부로 격하시켰다고 부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과학 방법론을 강조하는 근대화된 대학교에서 점점 학문으로서의 입지가 좁아지는 신학을 위한 일종의 제스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술 영역, 특히 그림의 대상이 교회와 연관된 성스러운 것들에서 평범한 인간의 일상이나 정물화로 확대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의 원근법이 처음으로 적용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식으로 삶의 다양한 공적 영역들이 교회의 영향을 벗어나 그 자체의 독립된 영역으로 분화되는 것을 가리켜 '사회적 분화과정으로서의 세속화'라고 일컫습니다. 저 카이퍼는 이런 의미의 세속화 과정을 매우 찬성 했는데, 왜냐하면 칼빈주의 자체가 이런 사회적 분화과정으로서 세속화에 엄청난 기여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삶의 다양한 영역들 즉 가정, 경제, 학문, 예술 등의 영역이 하나님이 창조 때 부여하신 영역 원리에 따라 운영된다고 봅니다. 삶의 각 영역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리고 유기적으로 각 영역으로 발달되게끔 하신 것입니다. 가정 영역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남녀 간 연합을 통해 자녀들을 출산하게 하심으로 생겨납니다. 가정은 이런 영역 원리를 통해 세상을 충만하게 합니다. 인간의 지적 본성이 학문 영역으로, 인간의 미적 감각이 예술 영역으로 발달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영향 아래, 삶의 영역이 이렇게 각각 세속화되는 과정을 거칠 때, 저와 동시대의 경건주의 신자들의 반응은 그런 삶의 영역들을 포기한 채 교회 생활에만 충실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따라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속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장 능동적으로 극복한 것이 칼빈주의 세계관입니다. 무엇보다 세상 자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선합니다. 아무리 죄로 얼룩진 세상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창조에 기반한 영역 주권 원리는 사회적 분화과정으로 인해 이미 교회의 영향을 벗어나 각각의 독립된 원리에 따라 운영되는 각 영역에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냅니다.그러나 '사회적 분화과정으로서의 세속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초월적 세계관을 거부하거나 아예 적대시하는 '세속주의로서의 세속화'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우리가 한국 교회가 세속화되었다고 말할 때, 세속주의의 다양한 형태가 한국 교회에 만연하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세속주의의 양상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지식을 창출하는 학문의 세계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을 가지고 학문에 임하는 경우, 반지성적 혹은 비과학적이라는 즉각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순수과학이나 수학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학문에 참여하는 학자 역시 각자의 세계관이나 주관적 확신과 동떨어져 학문에 임할 수 없습니다. 특히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의 경우, 학자의 인격적인 요소가 학문 자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현대의 연구 중심 대학은 학문을 할 때 페미니스트 관점, 인종적 관점, 가난한 자를 위한 관점, 동성애자들을 위한 관점 등 다양한 관점들을 허용하지만, 기독교적 관점만 유독 반지성적 혹은 비과학적으로 치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많은 기독교 대학들(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이 세속화 (혹은 세속주의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런 세속주의화 경향성은 학문의 영역을 너머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대되어갑니다. 특히 이런 경향이 점점 심각해지면서 아예 기독교적 혹은 초월적 관점을 적대시합니다. 개인의 기독교적 신앙은 사적인 것으로만 치부되며, 결코 다양한 공적 영역들과 공론장에서 표출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런 세속주의화 과정에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삶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칼빈주의적 확신 아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개인의 구원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는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며,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역들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결단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 아래 회복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세상을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는 이런 성경적 근거 뿐만 아니라, 근대 국가가 약속한 자유와 평등의 관점에서도 세속주의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불신앙을 토대로 생겨난 프랑스혁명은 정교가 일치된 사회로부터 정교가 분리된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약속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기독교적 가치를 띄면서 정치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기독교적 가치를 가지고 정치 영역에 참여하면 신정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양심은 불편하며, 그들의 자유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억압됩니다. 현대의 연구 중심 대학에서 보여지듯이 기독교적 관점과 가치는 다른 관점과 가치와는 다른 불평등한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영역 주권 원리는 기독교인들에게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공적 영역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기독교인은 그 기독교적 신앙에 따라 사적 영역에 갇혀 있으면 안됩니다. 그 신앙을 따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 영역을 세속적 가치가 주도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후배 신학자 바빙크가 말했듯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떠나 경건한 신앙을 지켜내는 것도 소중하지만, 더욱더 값진 신앙은 이런 세상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신앙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거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거하는 이상,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속적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역 주권 원리는 기독교인들이 분화적 사회 구조 속에서 각각의 독립된 영역에 참여할 때, 그 영역의 운영 원리와 방식에 맞게끔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참여한 그 삶의 영역들을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문화
세계관
영역주권
아브라함카이퍼
미네르바
세속주의
개혁주의자
칼빈주의
세속화
바빙크
사탄의 존재를 잊지 말라
by Jon Bloom
2021-03-20
언젠가 A. W. 토저(Tozer)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내용이 우리 자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준다.” 이와 상반된 차원에서 C. S. 루이스(Lewis)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하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루이스의 말에 동의하지만, 토저의 말에도 간과해서는 안 될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진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우리는 영혼의 은밀한 법칙을 따라 우리 마음으로 생각해 낸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결정된다는 말이다.그렇다면, 사탄과 그에게 속한 악한 영들을 생각할 때는 어떤 내용이 떠오르는가? 물론 그 내용이 우리 자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탄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보다 하나님이 사탄에 대해 생각하시는 내용이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탄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는 없다.과연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악한 영들의 존재와 활동에 관해 말씀하시는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얼마나 진지하게 그 말씀을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단지 교리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도 그 말씀을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또 우리 마음은 영적 전쟁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 그러한 마음은 일상생활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우리가 기도하는 방식에는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나아가 우리가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유혹과 두려움, 가정의 문제와 교회 안에서의 갈등,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 고통, 그리고 복음의 열매를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나 대외적인 사건 등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는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그러한 문제들에 반응할 때 우리는 어떤 영적 전략을 가지고서 행동하는가?이러한 물음들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탄의 세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우리는 그의 계책을 알고 있는가신약 저자들은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영적 전쟁을 심도 있게 의식하며 본문을 기록했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과 이적을 살펴보면 “마귀와 그 사자들”(마 25:41)의 간섭이 계속해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사역을 시작하며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부터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온갖 사건에 휘말리시기까지(마 4:1-11; 요 13:27) 사탄과 그 세력은 항상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자 했다. 예수님은 사탄이 어떻게든 그분의 백성을 속박하고(눅 13:16), 종교 지도자들과 기관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요 8:44), 복음의 역사에도 힘을 다해 대적하며 그 결과를 약화시키고 훼손시키려 한다고 가르치셨다(눅 8:12). 또한 사탄이 막대한 영향력을 세상에 미쳐 '그의 나라'를 세우려 한다고도 가르치셨다(눅 11:17-18).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한 제자는 그분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사도들이 불신의 세상 속으로 들어간 목적도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데 있었다(행 26:18). 그들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전쟁에서 그리스도인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고 있다(엡 6:12).그래서 사도들은 반복해서 경고했다. “근신하라 깨어라!” 왜 그러한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이다(벧전 5:8).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탄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처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번 자문해 봐야 한다. ‘혹시 나는 사탄의 계책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자가 진단여기에 자가 진단을 해 볼 수 있는 질문이 있다. 혹 당신은 이 글의 서두에서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 고통”이 악한 영들에 의해 야기되거나 악화될 수 있다고 언급한 내용에 대해 어떤 정서적인 반응을 보였는가? 그러한 말이 현대 문화에는 맞지 않게 여겨져 좀 당혹스러웠는가? 너무 비과학적이고 심지어는 미신적이어서? 또는 그러한 말을 듣고 뭔가 변호하고 싶은 불쾌한 감정이 일어났는가? 특히 정신적 고통의 경우 누구도 함부로 그러한 고통을 마귀의 역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며 항변하고 싶지는 않았는가?그렇다면 어떤 결론을 내리기 전에, 당신의 정서적인 반응을 평가해 보는 시간부터 갖도록 하자. 만일 당신이 당혹감을 느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혹 뭔가 항변하려는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한 감정은 마귀의 역사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당신 자신의 경험이나 모든 현상에 대해 자연주의적 가정만을 인정하는 현대 문화에 근거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가?여기서 우리 자신의 반응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러한 반응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반응이 우리의 신앙에 자리한 비성경적인 불균형이나 그 안에 감추어진 사각지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에는 영적인 사각지대가 있다. 마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 약점을 이용하려 한다. 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듯이,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순진하게도 우리는 악한 영들이 우리 자신에게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신약 저자들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하며 사탄의 계책에 대해 결코 무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것이다.물론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 고통이 전부 다 악한 영들의 역사로 야기되거나 악화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며,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어링갓’(Desiring God; 다양한 기독교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미국의 선교 단체 - 편집자 주)에서도 영적 전쟁에 관한 여러 자료들과 더불어 정신적 아픔이나 질병 혹은 장애에 대해 다양한 접근을 취하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다.초자연주의를 배제하려는 현대 문화일반적으로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마귀의 역사를 지나치게 의식하며 그러한 관점을 특정 현상에 과도히 적용하려는 문제를 잘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능적이고 비성경적인 자연주의로 인해 그러한 관점을 거의 적용하지 않으려는 문제를 드러낸다. 이러한 문제는 현대 문화의 사각지대에 자리한 그릇된 전제에 어느 정도 기인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는 더 큰 이유는, 이 시대의 문화가 초자연주의를 계속해서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 세계관을 마치 암흑시대의 어리석은 종교적 유물처럼 취급하려는 후기계몽주의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면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혹 마귀의 역사로 누군가가 고통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하면 어리석게 생각할 뿐 아니라 무례한 독설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주장은 이미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수치심만 더하는 일로 비쳐진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과거의 세계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일 뿐이다.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앞서 언급한 정서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그 충격은 때로 우리의 영적 세계에까지 전달된다. 문제는 둘 중 하나다. 악한 영들이 실재하고 그들의 존재를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부정하여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든가 아니면 악한 영들이 실재하지 않은데도 그들의 존재를 들먹이며 어떤 현상을 진단하여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든가이다. 물론 우리 중 누구라도 끔찍한 결과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고통 받는 자를 가해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기를 원한다. 결국에는 둘 중 한 가지 문제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당연히 우리는 마귀의 존재를 부정할 때 그러한 결과가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견고히 맞서자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는 지상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행 26:18) 일을 보고자 한다면, 마귀의 역사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우리의 태도를 비웃고 마침내는 불편한 상황까지 야기할 수 있는 현대 문화의 시선을 기꺼이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마귀에 사로잡힌 희생자로 살도록 그들을 비참히 놔두기보다 우리 자신이 어리석게 비쳐지는 일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결국 우리가 사탄의 세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그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침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악의 현실을 직시하는 성경의 관점과 우리 마음이 더욱 일치할수록, 우리 각자는 더욱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고, 사람들에게 더욱 영적인 도움을 주며, 어둠의 권세에도 더욱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감당하신 치욕을 우리도 짊어질 수 있다(히 13:13).성경은 초자연적인 세계관을 확고히 제시하는 책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 그리고 마귀와 그에게 속한 악한 영들, 이 양자 사이에 벌어지는 영적 전쟁과 각 진영을 대변하는 사람들 간의 다툼이 성경의 전반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친다.“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0-13).우리 모두 이 지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그래서 사람들이 마귀의 계책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저들을 도와주자. 그리고 어떠한 공격에도 견고히 맞서자.원제: We Dare Not Ignore the Devil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토저
루이스
마귀
자가진단
초자연주의
‘미나리’, 아칸소에서 에덴동산을 추구하다
by Eugene Park
2021-03-16
이삭 정(Lee Isaac Chung) 감독의 영화 ‘미나리’의 예고편을 처음 보았을 때,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들떴다. 지역 사회 사람들은 이민 2세로서 어린 시절의 모습을 공감하는 카타르시스적인 눈물을 예상하며 전화기가 폭발할 정도로 내게 전화를 했다. ‘미나리’를 실제로 본 후로 내 어린 시절의 향수나 트라우마로 인한 눈물은 말라버렸다. 하지만 내 영혼은 충만해졌다. 정 감독은 자신이 양육받으면서 느꼈던 기분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적인 문제와 인간이 된다는 것, 남자가 된다는 것, 실패할 때의 느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크리스천인 정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써 보내 주었다.“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많은 공통점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그러기를 희망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때로 한국계 미국인들은 인종차별로 지역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낄 수 있으며 부모와 조부모 세대와의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장벽으로 인해 가족 내에서도 더욱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 소망은 이러한 분명한 분열을 뛰어 넘어 이 영화의 배경과 사람들 안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찾는 것이었습니다.”‘미나리’는 우리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이며 “본향을 찾는” 이들이라는 히브리서 11장 13-14절의 진리가 생각나게 한다.에덴동산을 향한 꿈엄선된 극장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이 영화는 ‘크고 위대한 정원’을 만들기 위해 캘리포니아의 안락함에서, 아름답지만 외로운 아칸소의 오자크로 가족을 이끄는 제이콥 이(스티븐 연 분)의 뒤를 따른다. 그는 “미국 최고의 흙”을 사용하여 자기 농장의 농작물이 풍부하고 수익성이 있기를 희망한다.정 감독은 관객들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을 공감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내게 자신의 이러한 바람을 말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대본을 쓰는 데 가장 크게 참고한 자료는 성경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정원과 농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으며, 성경 전체의 이야기는 정원 속의 배신과 구속의 중요한 순간을 배치하는 듯합니다. ‘미나리’는 이민자들의 이야기지만 그 중심은 새로운 삶을 찾으려는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한 정원을 떠나 다른 정원을 찾고 있습니다.”영화의 중심 갈등은 번성하는 정원에 대한 제이콥의 꿈이 그의 아내 모니카(한예리 분)의 생각과 충돌하면서 발생한다. 그녀는 가족 자체가 잘 되기를, 특히 심장이 약한 어린 아들(앨런 S. 김)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영화 속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제이콥의 정원 작업의 목표는 단지 건강한 작물을 생산하고 성공적인 농부가 되는 것 이상이 된다. 건강한 남자와 남편, 아버지와 친구로 자신을 일구는 것도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우리 정원의 샘물 찾기영화 속 이야기 전개의 대부분은 제이콥이 농장 작업의 필수 요소인 수원을 찾는 데서 비롯된다. 영양이 풍부한 우물―성경에서 참조한 “야곱의 우물”(요 4:6)―을 찾는 그의 탐색은 좌절로 가득 차 있다.모든 정원은 번성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 물이 필요하다. 종종 우리는 성취, 부, 권력, 인정 등으로 우리 영혼의 정원을 채우려 한다. 영화 속 제이콥처럼, 우리도 스스로 자신의 정원에 물을 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외부의 도움에는 회의적이다. 충분한 노력과 기지로 우리는 우리 영혼을 지탱해 줄 우리의 우물을 찾는다.크리스천으로서 정 감독은 우리가 어디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요 4:14)를 궁극적으로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영화 속 가족이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천이 아니긴 하지만, 정 감독은 잘못된 곳에서 물을 찾는 것에 대해 성경적 강의로 청중에게 교훈을 주려 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구속의 활로 감싸는” 교훈이 감춰져 있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미나리’는 신앙의 복잡성과 미묘함을 묘사하고 있다.정 감독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저는 스스로 다양한 믿음의 표현과 불신을 경험해 보았으며,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책에서 믿음에 접근했던 그 방식으로 저도 이 영화를 작업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다른 인물들이 작품 속에서 작가 자신의 내면 생활의 한 면을 표현하거나 씨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말입니다. 그는 자기 작품 속 인물들에게 자유로운 고삐를 주고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은혜와 구속을 찾도록 합니다.”주인공인 이(Yi) 가족이 어떤 계시나 기도 끝에 단순히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나로서는 기쁘다. 대신 그들은 기쁨, 고통, 웃음, 비통함 등 불완전한 행동의 결과를 함께 다룬다. 정 감독이 이 영화를 연출하는 방식은 생수이신 그리스도께 가는 길에 더듬거리는 이들의 삶과 스토리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 길은 종종 곧게 뻗어있지 않고 엉망이며, 잘못된 일들 가운데 제대로 된 것을 찾는 일이 계속 반복되는 길이다. 때로 우리는 성경의 진리로 정원에 물을 주는 것을 잊거나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실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은혜가 우리 마음에 스며드는 것은 우리가 완전할 때가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다(딤전 1:14-16).미나리의 회복력한인 이민자 가족의 아들로서 나는 ‘미나리’에서 부모님의 낯선 문화적 가치에 대한 정당한 분개심이나 오늘날 사회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받는 정체성에 대한 좌절감 대신 내 가족의 회복력에 감사함을 느꼈다. 우리 가족을 부양하려는 부모님의 투쟁 속에서 싸움 소리가 집안을 울리고 나름의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가족이 전부였기에 서로를 의지했다.대부분의 이민자 가족들은 젖은 토양에서 쉽게 자라는 한방 허브인 미나리와 같은 회복력을 지니고 있다. 순자 할머니(윤여정 분)는 농장의 개울 근처에 미나리를 심으며 ’잡초처럼 어디서나 잘 자란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물론 번성하는 농장에 대한 제이콥의 모든 꿈에 맞게 생산되는 수확 작물은 결국 미나리뿐이다.나는 미국 교회가 특히 지금 ‘미나리’에서 묘사된 회복력과 교회의 지체들인 수많은 이민자 크리스천들을 주목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신앙을 양육하기가 이미 어려워진 세속화된 시대에 인종이라는 날을 세워 분리하기보다는 다양한 그리스도의 지체 전체에서 힘을 발견한다면 어떨까? 우리 자신의 정원에서 홀로 열매를 맺으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다른 ‘정원사들’과 더 많이 협력하고 서로의 성공과 실패에서 배우면 어떨까? 모든 인간은 ‘미나리’가 훌륭하게 보여주듯이 에덴동산에 대한 갈망이 있는 정원사다. 하지만 우리의 갈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우리가 정착하거나 혹은 이주한 지상의 어떤 장소가 아니라 더 나은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할 ‘천국’(히 11:16)이다. 거기서 우리는 에덴동산을 다시 찾을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이주 농부며 그곳을 항상 쉼없이 찾고 있다. 그 여정에서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생수가 공급되는 토양에 뿌리를 두도록 서로 도움을 주고받도록 하자.‘미나리’ 속의 이(Yi) 가족이 보여주듯이, 계절과 농작물은 피고 지지만 가족은 항상 지속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인종이나 언어나 국가에 상관없이 영원히 가족이 될 것이다. 이제 그 빛 가운데 살아가자.원제: ‘Minari’ Searching for Eden in Arkans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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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력
이삭정감독
나그네
영혼을 파괴하는 뉴스
by D. J. Marotta
2021-03-11
평소에 알고 지내는 목사 아무에게나 이 질문을 던져보자. “교회에서 제자도와 관련해서 가장 큰 도전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뉴스요.”좀 더 자세히 파고들면,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교인들에게는 이제 각자가 선호하는 뉴스 미디어가 그들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목소리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뉴스는 이제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 문제와 관련해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누구의 잘못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까지 알려줍니다. 뉴스는 이제 아예 성경과 기독교 신앙, 또 교회까지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는지를 알려주는 렌즈가 되었습니다.기독교인이라면 아마도 다음 말에 동의할 것이다.네, 자극적이고 심하게 정치적으로 편향된 뉴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특정 미디어만을 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뉴스의 영향을 받지만 나는 아니에요.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영지주의 다시 보기뉴스가 매력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뉴스 콘텐츠는 우울하고 끔찍한 소식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런 뉴스를 보고 또 보는 걸까?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대부분의 뉴스 미디어가 일종의 영지주의적 복음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유사 기독교로 시작했다. 교부들은 즉각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판정했는데,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라는 가르침 대신, 특별한 신비적 지식이나 밀교적인 통찰력을 믿으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식의 특별한 통찰력이 오늘날 뉴스가 제공하는 것이다. 뉴스 미디어는 암묵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부 특종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리 말을 들으십시오. 당신은 이제 바보 무리가 아니라 진짜를 깨달은 소수 중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뉴스는 특별한 지식을 통한 구원을 제공한다.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뉴스는 이제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에게 던져진 유혹의 연장선상에서 작동한다. 바로 하나님처럼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편재하고 전지하심으로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관리하신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단지 우리가 사는 곳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사건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현대의 뉴스 미디어는 이런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해야 할 문제로 제시한다. 이제 인간이라면 지역을 초월하여 글로벌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무지’라는 어둠을 뒤로 하고 ‘속보’라는 빛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알고 신경쓰는,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런 메시지에는 중독성이 있다. 우리가 뉴스를 놓치지 않고 챙기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대단히 중요하고 가치있는 존재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 속에는 내가 신과 같이 되었다는 환상이 숨어있다. 조치 불가의 뉴스대부분의 뉴스는 나쁜 소식이다. 지진, 허리케인, 살인, 그리고 스캔들. 또한 대부분의 뉴스는 조치가 불가능하다. 당신이 뉴스를 접한 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 조치가 불가능한 나쁜 뉴스들을 자꾸 들어서 당신 속에서 생기는 결과는 뭘까? - 불안: 하루 24시간 내내, 마치 소방 호스의 물처럼 연중 무휴 당신 속을 파고드는 사악한 뉴스는 결코 당신의 얼굴에 평화와 만족 그리고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단지 더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 무력감: 고칠 수 없는 문제와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의 뉴스를 듣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면, 이제 당신 속에서는 심각한 무력감이 자라나게 된다. - 분노: 내면에 도덕적 나침반을 가진 사람이라면 뉴스를 보며 분노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기에 당신 속에는 불의를 볼 때마다 정의감이 주는 분노가 생긴다. - 미움: 분노는 마치 곡물을 발효할 때 증발하는 알코올과 같다. 그 알콜을 증류해서 조금씩 병에 담게 되면, 그 결과는 증오로 가득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뉴스를 많이 보거나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사랑이 아닌 이웃에 대한 미움을 품기 마련이다. 관음증적이고 어찌 할 수 없는 끔찍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접한 영혼은 아예 변형되어 버린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좋게 볼 때) 무지한 자, 또는 (최악의 경우) 악한 자의 강력한 무리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작지만 영웅적이며 소수에 불과한 선한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다시 물어보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뉴스를 자꾸 듣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온 뜻과 정성 그리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내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간단히 말해서, 쓸데 없는 짓이다.지역 뉴스를 선택하라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아예 사회 생활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아예 발을 빼라고요?”아니, 정반대다. 뉴스는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식의 참여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당신으로 하여금 현실의 사람들과 더불어 실제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악영향을 끼친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당신은 결코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모든 것에 다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회는 바로 당신이 사는 지역 사회 속에 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뉴스는 지역 뉴스다. 지역 뉴스라는 것은 내가 사는 도시 또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뉴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지역은 바로 내가 사는 ‘동네(hyper local)’를 말한다.- 암에 걸린 이웃에 관한 뉴스- 첫 아이를 낳은 이웃에 관한 뉴스- 실직한 교인 뉴스- 처음으로 교회에 온 아는 사람 뉴스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뉴스다. 이런 뉴스는 당신으로 하여금 사랑하고 기도하고 또 봉사할 기회를 준다. 같은 인간으로 함께 웃고 울도록 만든다.이런 지역 뉴스에 반응할 때 우리 속에서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일어난다. 불안이 자신감으로, 무력감과 분노, 미움이 기쁨과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 당신은 이런 지역 뉴스를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런 뉴스를 만나려면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어떻게? 이웃과의 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원제: News as Spiritual Deform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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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방법
by Terry Glaspey
2021-02-22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과거에는 비싼 카메라가 필요했다. 그리고 초점을 맞추는 방법도 알아야 했고 현상을 하려면 암실도 있어야 했다. 사진은 까다롭고도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그러나 스마트폰으로 이 모든 게 바뀌었다.이제 모든 사람이 거의 모든 것을 사진 찍는 세상이 왔다. 눈에 띄는 것이면 무엇이든 쉽게 찍어서 보관하고 또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을 많이 찍게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진은 느리고 신중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눈앞에 있는 사물에 집중하며 모든 신경을 다 쏟아야 한다. 물체, 사람을 둘러싼 빛, 사진을 구성하는 방법, 접근 각도, 그리고 색상이 배경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한마디로 사물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함을 의미하고, 자세히 본다는 것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오늘날처럼 빠르고 과도한 자극이 넘치는 디지털 시대에 영적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훈련인 집중하는 능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예술은 우리가 이 중요한 능력을 회복하도록 도움을 준다. 집중은 경건의 시작이다스스로를 “관조 사진작가”라고 부르는 더크 데브리(Dirk DeVries)는 이렇게 썼다.사진은 명상과 성찰의 수단, 기도의 방법, 상상력을 여는 열쇠, 그리고 고요함과 깊이 및 의미로 통하는 문을 제공한다.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관조 사진은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둘러보게 하며, 인식을 높이고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도록 도와준다. 사진은 명상 뿐 아니라 영적 훈련의 형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뭔가를 생산하고자 하는 욕망 대신 과정과 열림 그리고 현재 속에 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언제라도 새롭게 되어 깨달음을 얻고자 할 때 가능하다.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산책하다 중간중간 멈춰서서 흥미로운 질감, 화려한 색상, 신기한 형태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좋은 영적 훈련이 될 수 있다. 당신의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노력하라. 낙엽의 복잡함, 나무 껍질의 문양, 그리고 야생화의 다채로운 색의 향연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는 사진 찍을 게 없네”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자세히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카메라 없이도 얼마든지 이런 관조적 활동을 추구할 수 있다. 당신의 눈은 카메라 렌즈와 똑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속도를 늦추고 집중해서 사물을 보면서 사진을 찍는 바로 그 원칙을 육안으로 사물을 볼 때에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이다. 작업이 끝났을 때 자랑할 사진을 갖는 게 핵심이 아니라 사진작가처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내 눈을 훈련하는 게 핵심이다. 지금 바로 앞에 있는 사물에 주의를 기울이라. 당신도 그 사물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라. 마치 실사 사진 같은 시를 쓰는 메리 올리버(Mary Oliver)는 “집중은 경건의 시작이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단지 사진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인식하고 또 진정으로 존재하도록 가르침을 준다.예술은 현재를 살도록 돕는다우리는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 지금 이 순간을 누리지 못한다. 예술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금 이 순간 속에 대충이 아니라 온전히 거하도록 말이다.영적인 글을 쓰는 장 피에르 드 코사드(Jean-Pierre de Caussade)에게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삶은 다름 아닌 진정한 현존(the Presence)의 의미다. 그는 이러한 인식의 태도를 '현재 순간의 성찬'이라고 부른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각 개인의 삶에서 역사하고 계시며,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경험을 통해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는다.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때, 매 순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며, 삶에서 만나는 가장 작은 것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음성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잠재적 마이크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실천하는 것에 대해 쓴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라는 수도사가 있었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의 임재를 잃지 않고 매 순간 삶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도원 부엌에서 겸손하게 일하면서 냄비와 프라이팬, 접시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웠다. (아마도 그는 설거지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꿀지도 모르겠다...)이 위대한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영적 체험을 위해 어떤 압도적인 경험을 추구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 평범하고 사소한 곳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물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어떻게 깨어있을 것인가우리는 집중해야 한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이렇게 썼다.우리가 무시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임재를 피할 수는 없다. 온 세상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신분을 감추고(incognito) 이 세상 모든 곳을 걷고 계신다. 아무리 신분을 감추었다고는 해도 하나님을 알아보는 게 반드시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억하고 주의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실, 그것은 깨어나는 것이다. 또한 계속 깨어있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와 위대한 영적 작가는 다 한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우리로 하여금 깨어있도록 하는 것 말이다.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내면의 혼돈을 진정시킬 수 있다. 집중할 수 있다. 우리는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경향을 제쳐두고 단지 존재하는 것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그냥 가만히 기다리자. 그리고 사물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자. 낡은 부츠, 단순한 흰색 그릇, 빗방울이 어린 잎, 일출, 새들의 노래 등등.예술은 우리가 집중하도록 도움을 준다. 예술작품을 감상하거나, 음악이나 시를 듣거나, 소설의 문학적인 표현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은 나를 느리게 만들고, 불안한 생각을 잠재우고,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새롭게 엿볼 수 있도록 한다. 실로 평범함 속에 숨은 경이로움을 볼 수 있는 순간이다.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 평범한 것은 없으니까.* 이 아티클은 작가가 자신의 책 ‘Discovering God through the Arts: How Every Christians Can Grow Closer to God by Appreciating Beauty & Creativity' (2021)에서 요약한 것이다.원제: In a Distracted Age, Art Helps Us Pay Atten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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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는 데 시적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
by Jessica Hooten Wilson
2021-02-16
“누구든지 들을 귀 있는 자가 듣게 하라” 예수님은 말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씀하신다면, 만약에 우리가 그의 음성을 향해서 귀머거리가 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상황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만약에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만약에 비유적인 설교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듣지 못하는 상태라고 경고했다. 베일러 대학(Baylor University)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데이비드 라일 제프리(David Lyle Jeffrey)는 ‘성경과 영시의 시적 상상력’(Scripture and the English Poetic Imagination)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단서를 제공한다. 제프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님이 굳이 허구적이고 비유적이며 또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드러내고 싶은 만큼 또 동시에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간절하게 찾는 사람만이 그가 들려주는 말씀의 뜻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귀를 시에 기울여야 한다.“하나님은 시인이다”라고 제프리는 말한다. “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뿐 아니라 그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는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듣는 이가 메시지의 형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메시지 속 내용이 아예 상실될지도 모른다. 하나님 말씀에 대해 제프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매우 자주… 하나님은 시인처럼 말씀하신다.” 성경을 펴고 제프리의 주장이 맞는지 확인해보라. 성경을 소리내어 읽을 때, 얼마나 자주 비유적인 언어를 만날 수 있는가? 창세기 속에 있는 히브리식 형태, 시편 속 시적 표현들, 그리고 잠언과 아가서를 보면 더 확실하다. 하나님은 이사야와 에스겔에게 시적으로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의 비유 등등 성경 속에 담긴 이런 다양한 시적 표현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시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높고 거룩한제프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를 듣거나 또는 시를 즐기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30년도 더 전에 탁월한 시인이었던 다나 지오이아(Dana Gioia)는 이제는 더 이상 시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시가 여전히 중요할 수 있을까? 비록 시가 계속 쓰여지고 있지만, 시는 이제 문학 생활의 중심에서 뒤로 후퇴했다.” 시를 읽는 것은 이제 시대와 동떨어진 일이 되었다. 시는 이제 베레모를 쓴 뉴요커 또는 동부 오스틴의 힙스터(hipster, 1940년대 미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속어로 유행 등 대중의 큰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역주)나 즐기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프리는 시가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지금 시대의 현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시를 읽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 만한 좋은 점이 시에 있다. 제프리의 시각에서 볼 때, 시가 가진 수준높은 스타일은 그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의 거룩함을 더 강화시킨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시를 가지고 일상의 대화를 할 수는 없지만, 시는 얼마든지 미스터리를 담아낼 수 있고, 또 시를 듣는 이는 그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제프리는 충고한다. “하나님 왕국에서 우리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치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함에 더 잘 나아가게 하는 시라는 예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시는 바로 믿음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다.” 주일이 거룩한 시간으로 다른 날과 구분되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처럼, 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중요함과 경외로움을 다시금 알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지금 현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인터넷 중독이라는 집단적 마취 상태가 끝나고 그나마 상상의 힘이 남아있는 미래의 삶을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채우는 싸구려 대체품에 의해서 시가 완전히 소멸되기 전에, “그 옛날에는 세상이 어땠지?”라는 질문에 대답할 정도의 기억은 우리에게 남아있어야 한다.종교개혁 이후의 시제프리는 책의 후반부에서 ‘종교개혁 이후’와 ‘나 자신(self)을 도덕적 의무의 권위자 및 중재인’으로 상향시키려던 종교개혁 속 인본주의자들의 경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것은 물론 종교개혁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런 경향은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작가들로부터 시작해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초기 종교개혁 당시 영국 시인인 존 돈(John Donne)과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의 작품은 신실한 기독교인의 글이지만, 또 동시에 시는 대단히 개인적인 면을 치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돈은 고백과 회개, 구원에 대한 열망을 시로 썼지만 허버트는 기도문을 쓰고 그 글을 목양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그의 집에 모이는 회중들에게 읽어주었다. 신학과 정치 그리고 교회라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던 단테(Dante) 또는 초서(Chaucher)의 시적 서사는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내적 성찰을 다룬 시로 대체되었다.낭만주의 시가 가진 이단성을 논하는 데 시간을 쓰는 대신(이것은 그냥 내 생각이지, 저자인 제프리의 의도는 아닐 수도 있다), 제프리는 17세기를 지나 자기 참조적 시(self-referential poetry)라는 거짓된 생각을 그대로 계승한 근대로 넘어온다. 그는 1953-1954년에 있었던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s, 1887년부터 시작한 영국 신학계의 강연-역주)에서 있었던 존 맥머레이(John MacMurray)의 경고를 인용한다.“가장 먼저 근대 철학은 나(self)를 시작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는 이제 고립된 개인이다… 그렇게 전제가 된 자아는 이제 지식, 그러니까 유용한 정보를 찾는 사상가다.”나에 대해서 이런 가정을 하는 이상, 굳이 뭐하러 시를 읽어야 할까? 더 나쁜 것은, 이런 식의 사고, 고립된 개인의 본성을 전제로 한 사람이 쓰는 시는 필연적으로 모호하고, 표현은 거창할지 몰라도 넌센스로 가득할 뿐이다. 제프리는 이런 근대성의 모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의미가 무엇인지는 당신이 정하기 나름이다.”아마도 이런 현실은 왜 시가 더 이상 인기가 없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제프리는 이렇게 썼다. “현대 시인은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공공 시각 영역 밖에서 느낀다.” 만약에 우리가 의미라는 면에서 동떨어진 소리만 한다면, 우리는 독자에게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우리가 생각하는 생각의 틀 외의 어떤 것을 표현하는 데 굳이 열정을 가질 필요도 없으며, 또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지배하는 그 어떤 권위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제프리는 이렇게 한탄했다. “현대 시인이 가진 몇 안 되는 딜레마 중 하나는 독자들이 아는 단어가 점점 더 적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더 나아가 과거와의 대화가 단절되도록 만든다.”그러나 현대 시인들과 현대 영어시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관계 속에서의 개인의 형태”를 표현함으로써 “개인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공유된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시는 우리에게 “공통 비전의 일부를 돌려줄 뿐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길이 된다.”시의 급박성이미지의 한 조각으로서, ‘종교와 예술의 저널’(Journal of Religion and the Arts)에서 캐서린 윌리스 퍼쉬(Katherine Willis Pershey)는 이렇게 주장했다. “전쟁 범죄와 자동차 광고가 범람하는 이 세상에서, 시는 평범한 아름다움과 궁극적인 중요성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라고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외치고 있다.”시는 이해불가한 수수께끼에 이름을 붙여준다. 과열된 모니터에서 쏟아져 나오는 평범한 단어가 둔탁한 소리처럼 느껴질 때, 시는 신적 개입처럼 그런 소음을 부수고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며 또 우리는 누구인지를 다시 들을 수 있도록 한다. 시가 없으면 우리는 컴퓨터의 코드처럼 말하는 운명으로 전락할 것이다. 의미 없는 슬로건으로 가득찬 광고처럼 말하거나 또는 짖거나 우는 동물 소리나 내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시는 우리를 창조 질서 속에서 창조된 바른 피조물의 위치로 승격시킨다. 제프리의 말처럼, 만약에 하나님이 ‘최초의 시인, 이 세상이라는 최초의 시를 쓴 존재’라면, 우리는 그 시를 들을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경고한대로 우리는 눈은 가지고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는 가지고 있으나 듣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원제: Why Christians Need a Poetic Imagin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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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아래 새로운 이단은 없다
by David W. Hall
2021-01-25
약 25년 전, 엉뚱한 몇몇 기술자들이 나를 인터넷으로 끌어들여 어찌 보면 미국 최초의 개혁주의파 웹 사이트라 할 수 있는, Center for the Advancement of Paleo Orthodoxy(CAPO)를 위해 글을 쓰도록 했다. 당시 다소 자유로웠던 정통파(sub-orthodoxies)와 혼동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열띤 논쟁을 피할 마음도 없었다.(우리가 선택한 첫 번째 밈(meme)은 공룡이었다.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 우린 구닥다리 정통을 주장한다. 그래, 어쩔래? 그럼 잘난 당신네들이 주장하는 논지는 뭔데?) 우리는 당시 많은 에세이를 실었는데, 그게 모여서 결국은 ‘현대성의 오만함’이 되었고, CAPO 또는CAPO의 온라인 잡지 격인 ‘Premise’의 한 페이지를 형성했다. 나는 아직도 당시 젊은 혈기에 썼던 치기 어린 에세이를 생각하고 웃곤 한다. 그런 주제를 지금 썼다면 훨씬 더 세련된 글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논증에 열중한 추론이 항상 상대를 제압하고 말겠다는 과도한 뉘앙스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에세이를 모은 책 ‘현대성의 오만함’ 출간 기념일이 다가오는 지금,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주제를 담은 질문은 이것이다. “현대성(modernity)은 정말로 그토록 거대하거나 지속적인가?” (물론 이런 질문을 담은 에세이들이 모두 당시 가장 현대적인 미디어, 인터넷을 통해서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다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현대성은 여전히 오만한가, 아니면 오만함이 덜 해졌는가? 또한 그 어떤 수사학적 주장이라도 '새로운' 연구 또는 혁신적인 계획을 도입함으로 자연스럽게 더 큰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유행, 소셜 미디어, 또는 현대적인 모든 것보다 분별력 있는 솔로몬의 인식론을 더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우리 사이트가 지향한 원래 모토는 솔로몬의 말, ‘Nihil novum sub sole’, 즉 “해 아래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였다)몇몇 에세이는 꽤 괜찮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다가오는 십 년을 위한 전략’이라는 주제를 다뤘던, 나의 첫 에세이를 1989년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에서 발표한 이후, 나는 아직까지도 그 글을 조금씩 수정하면서 계속 발표하고 있다. 이 논문은 전혀 상반되는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정통과 전략: 다가오는 새로운 십 년 또는 밀레니엄을 놓고 아무런 전략을 가지지 않는 것에 관하여' 이 논문이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 접한 사람은 얼마되지 않았지만, 이 논문이 주장하는 핵심, “그리스도의 신부에게 그토록 근시안적이고 세상 문화에 굴복하는 접근법을 강요하는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는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무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략적인 사고를 가진 많은 설교자들이 강단에 섰지만, 그 상승세 또는 생명력(durability)은 짧았다. 오늘날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때 “연예인급”의 명성을 누렸던 복음주의자들의 추락을 한번 보라. ‘바꾸고, 변형시키며 또 재구성하는 이단’(Heresies That Transform, Deform, and Re-form)이라는 에세이에서는 많은 오류가 형태를 바꾸는데, 그것은 결코 사소하거나 중립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변형(deformity)으로 향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동일한 바이러스가 복제되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re-form)되는 경향이 있음을 드러내려고 했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는 컬트와 오류로 가득찬 신학 시스템의 반복을 통해서 싹튼다. 결코 묻힌 채로 머물지 않는 펠라기우스 이단은 한층 정교해진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로 부활, 재구성되거나 치명적인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 이신론의 영향을 받는 반삼위일체 이단)라는 돌연변이를 만든다. 해독 가능한 증상을 보이는 이단들만 놓고 보자면, “솔로몬 + 오류 진단 = 해 아래 새로운 이단이란 없다, 단지 재활용이 될 뿐”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를 가지려면 역사를 경멸하는 대신 역사에서 배우겠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이 도덕률 폐기를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antinomian evangelicals)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르키오니즘(Marcionism,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단)의 귀환이든 또는 자유주의자인 슐라이어마흐(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가 주장한 이성을 뛰어넘는 감정 절대론(Schleiermachian absolutization of feeling)이든 상관없이 지금 시대에 분별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기독교인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고전이 있다. G.K. 체스터턴(G.K. Chesterton, 20세기 영국 작가)이 1905년에 쓴 ‘이단’(Heresies) 또는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이 쓴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다. 역사의 유용성(The utility of history)을 다룬 아주 짧은 에세이는 우리 중에 있을 지 모를 도덕적 순수주의자들에게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오늘날 거만한 윤리적 귀족들, 결함을 가진 초기의 사례가 드러내는 악을 바라보기에는 너무 순수한 눈을 가진 귀족이라면, 실제로 로버트 대브니(Robert Dabney, 19세기 미국 신학자이자 목사, 소설가)가 1854년에 쓴 ‘교회 역사의 활용과 결과’(The Uses and Results of Church History)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대브니는 역사를 포괄적인 학문으로 평가했으며, 역사에 능통해지는 것은 지식인 또는 공적 지도자에게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과거에 대한 지식이 현재에 꼭 필요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썼다. 더욱이 그는 현재 목격하는 잘못된 사고가 지닌 “합리적이지 않은 주장”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고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역사를 예방적 기능을 수행하는 무엇으로 보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현대 이단을 무장해제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치 그 이단이 대단히 진보한 것처럼 드러내는 사상이 사실상 과거 오래 전 기독교 국가에서부터 비난 받은 원조 이단이 가진 오류와 분열적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대브니는 프랑스 혁명을 근대성의 상징으로 분류하고 비판했으며, “교회 역사라는 무기고”는 유용하고 필수적인 무기라고 믿었다. "무정부주의적 오류"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은 현대 문제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읽어야한다. 단지 '뉴'(neo-)라는 접두어가 붙은 것은 무조건 거부하는 그에 대한 재조명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굳이 원한다면, “영국인들이 불건전한 습관을 드러낸다”에서 우리는 체스터턴,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 20세기 영국 추리소설 작가), 그리고 마이클 오크쇼트(Michael Oakeshott, 20세기 영국 철학자)를 가볍게나마 비교할 수 있다. “19세기 교회 개척의 십계명”은 비록 내용이 빈약하지만 초기 장로회 회의 회의록에서 나온 것으로, 대부분의 교회 개척과 관련해서 여전히 탁월한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역사를 활용함으로써 도움을 받는 것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그게 웨스트민스터 신자들의 영성을 검토하는 일이든지, 아니면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9세기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와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20세기 신학자)의 아버지 역할을 했으며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20세기 신학자)에게는 할아버지의 역할을 했던 하윌라우머 흐룬 판 프린스테러르(Groen van Prinsterer, 19세기 네덜란드 정치인)의 기여를 연구하는 일이든지, 또는 이 책의 주제이자 반복적으로 다루는 내용, “해석학: 자신감을 가지고 또는 역사를 가지고”(Hermeneutics: With Hubris or History)의 주된 해석을 살펴보는 데까지 다 유용하다. 역사를 좀 더 살펴보기 위해서, 예닐곱 개의 에세이는 각기 다른 시대를 다루고 있다. 창조에 관한 전통적인 입장의 주장, 고해성사의 가치, 그리고 교회와 윤리 그 외에 다른 여러 주제가 이 책의 자료가 되었다. 물론, 이 컬렉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셈페르 레포르만다’(semper reformanda,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칼 바르트에 의해서 주창되었다)에 대한 조롱이다. 그와 더불어 자유주의 신학(달리 말해 정통신학의 거부)의 확장을 막는 데 필요한 활동을 위해 현금 지원을 제안한 글도 있다. 또한 마지막 장에서는 다문화주의, 위기주의(crisis-ism), 포스트 모더니즘 및 기타 자유주의를 놓고 어떻게 역사를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 대한 결론으로 P.J. 오루크(P.J. O’Rourke, 20세기 미국 언론인)으로부터 인용한 멋진 글을 담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기하학에서도 실패한다.” 실제로 역사는 현대의 많은 생각과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과거를 버리는 것은 진리에 눈을 감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현대성의 오만함’ 개정판이 예정되어 있다.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ies)의 크리스 라슨(Chris Larson)은 “이 책은 엄청나게 팔릴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튼 이 책 안에 있는 몇 개의 에세이는 여전히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현대성이 그 오만이라는 면에서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슬픈 것은 너무도 많은 교회가 숨도 쉬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현대성이 지향하는 바를 그대로 쫓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를 족쇄로 여기며 여전히 과거를 경멸하는 현대성은 많은 세대를 종합적으로 보는 눈을 가지지 않은 신생 학자들의 손에서는 창피함을 모른다. 오만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행여 도덕적 우월감과 자기 중요성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스스로에게 더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또는 체스터턴이 그로서는 예외적일 정도로 진보주의에 대항하여 광범위한 측면에서 경고한 바와 같이, “진보적으로 되는 유일한 이유는 사물은 그냥 두면 자연적으로 악화되기 때문이다. … 모든 보수주의가 기본으로 삼고 있는 생각은 이것이다. 사물을 그냥 가만히 놔두면… 그것은 급격한 변화에 휘말리게 된다. 하얀 기둥을 가만히 놔두면, 그 기둥은 곧 검은 기둥이 된다.” 따라서 그는(그리고 보다 거룩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겸손하게 과거를 활용하여 현재를 새롭게 색칠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했다. 체스터턴은 조언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그 오래된 흰색 기둥을 계속 가지고 싶다면, 당신은 그 기둥을 계속해서 새롭게 하얗게 칠해야 한다.”원제: Arrogance of the Modern: Twenty Years Later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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