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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미국 기독교 10대 신학 기사
by Collin Hansen
2021-12-30
2020년이 떠넘겨 준 소란과 분노와 불안이 2021년에는 모두 사라지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희망과 치유를 경험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었다. 세상에, 틀려도 이렇게 틀리다니. 2020년에 비하면 올해 그리 새로운 도전이 많았던 건 아니다. 그 대신 2021년, 내가 선정한 미국 기독교 10대 신학 기사들은 작년에 겪었던 갈등의 많은 부분을 되풀이했다. 아주 예리한 복음주의 비평가들은 인종과 학대에서 정치와 전염병에 이르기까지,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각종 문제의 중심에 있는 분열의 근원을 설명하려 애썼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개혁주의 복음주의자를 (긍정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통회 그룹, 자비 그룹, 신중 그룹, 그리고 용기 그룹이라는 네 그룹으로 나누었다. 드영은 이렇게 적었다. “종이에 쓰는 교리 내용은 똑같다더라도, 이들이 그 교리와 관련해서 취하는 자세와 실천은 하늘과 땅 차이다.” 조지 패커(George Packer)가 매거진 ‘디 애틀랜틱’(The Atlantic)과 그의 책 ‘마지막 최선의 소망’(Last Best Hope)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회에만 이러한 분열이 있는 건 아니다. 사실 드영의 네 가지 범주를 패커의 네 가지 아메리카에 다음과 같이 투영할 수도 있다. 통회 그룹(정의로운 미국인), 자비 그룹(똑똑한 미국인), 신중 그룹(자유로운 미국인), 용기 그룹(진짜 미국인). 이렇게 얼마든지 달리 상상할 수 있듯이, 신학도 결국은 전기(biography), 직관, 종족(tribal), 충성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이 자연적 분열을 극복하지 못할 때, 온 세상이 고통 받는다. 헨리 클레이(Henry Clay) 미국 상원의원은 1852년에 이렇게 말했다. “종교인들조차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없다면, 위대한 사랑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고백하는 정치인이 극소수에 불과한 우리 정치인들에게서 기대할 게 있기나 할까요?”1830년대와 1840년대, 장로교와 감리교와 침례교 교단에 분열이 일어났을 때, 곧이어 남북전쟁이 따라왔다. 나는 지금 우리 시대에 같은 일이 있을 거라고까지 예측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것은 최종 단층선이 어디에 형성되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그 선이 통회와 자비와 신중과 용기 그룹마저도 제각각 분리시킨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구분해서 보는 이 나라에서 교회가 선지자의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을 맞을 것이다. 만약에 자비와 신중 그룹이 공통점을 찾고, 통회 그룹과 용기 그룹이 계속해서 자기네 성격을 밀고 나간다면, 미국 교회는 그보다 더 나은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교회는 모든 게 조작되고 일시적인 공황을 일으키는 상황 속에서, 또는 심지어 불공정과 불신의 실제 사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가리킬 것이다. 교회들은 학대와 낙태를 모두 비난할 수 있다. 교회들은 정의와 정당성을 모두 다 찬양할 수 있다. 참으로 교회들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신실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2022년을 위한 이런 희망과 기도를 가지고, 나는 지금 2021년 10대 신학 기사를 골라 보겠다는 무모한 시도를 하려 한다. 내가 제시한 다음 내용은 복음 연합(The Gospel Coalition)의 신앙고백 선언에 동의하는 미국인의 관점에서 쓴 것이다. 2021년 내내 교회에서 잘못을 찾아내기 위해서 쏟은 같은 양의 에너지를 2022년에는 믿음을 쌓기 위해서 쓴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허락하실지 상상해 보자. 10. 메타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2021년에 우리는 유행을 선도하는 일부 목회자가 교회의 미래가 현재 ‘메타’로 알려진 페이스북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Facebook/Meta 및 기타 주요 기술 회사가 현재 온라인 3D 세계를 만드는 데 투자하는 압도적인 리소스를 근거로 할 때, 아마도 향후 십 년 우리는 지금 이 기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은 고작 10위에 올려놓은 이 기사를 1위로 다시 분류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교인이 급격하게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것을 지켜본 교회 지도자라면, 이제는 함께 모여서 드리는 대면 공동 예배의 실용적이고 신학적인 가치를 입증해야만 한다. 9. 신흥 세대가 종교개혁 이전의 신조를 얼마나 받아들여야 할지 논쟁하다특히 침례교 전통에 속해 있는 젊은 신학자들이 성경과 에큐메니컬 신조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계속해서 열띤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몇 년 전, 삼위일체 내에서 영원한 복종과 권위의 관계(ERAS: eternal relations of submission and authority)를 찾는 신학자에 대한 장로교의 비판으로 시작된 논쟁이 이제는 신학적 방법 자체에 대한 논쟁으로 확장되었다. 학생들과 멘토들 사이의 날카로운 비판을 토대로 볼 때, 앞으로 침례교 신학자 중 일부는 다른 개신교로, 심지어 고전적 신학과 관련해서는 가톨릭과 정교회로까지도 분열할 것으로 보인다. 8. 평결들이 2020년 폭력의 트라우마를 되살리다아흐마우드 아버리(Ahmaud Arbery) 살해에 대한 재판에서 나온 세 건의 유죄 평결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2020년 8월 케노샤 폭동 중 두 명의 남성을 총으로 살해한 카일 리튼하우스(Kyle Rittenhouse)에 대한 무죄 판결만큼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리튼하우스 사건에서 당국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도록 허용한 도시에서 발생하는 자기방어 모델을 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무죄 판결을 받은 후에도 그를 위험한 자경단원으로 바라본다. 지속적인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싸우거나 비판적인 인종 이론의 확산에 저항하려는 신학적 우선순위는 2021년 미국 문화를 더욱 더 대표하는 사례와 판결을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7. 복음주의의 문화와 역사를 점검하다복음주의 세계에 로마 교황 같은 수장, 말하자면 “휘튼의 주교” 같은 이가 있다 하더라도, 로마 교황과는 달리, 그에게는 세계 복음주의를 정의할 권한이 없다. 설사 그런 권한이 있다 하더라도 다양한 저자들이 이 무정형의 개신교 갱신 운동을 신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특히 2016년 이후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미국의 주요 유권자 집단으로 부상하면서 정치적 위세를 행사하자 여러 작가들이 보수적 개신교 신학이 현대 문화의 포로가 되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베스트셀러가 된 책도 있다. 모든 세대가 예외 없이 시대를 초월한 복음과 근시안적 사고에 빠진 복음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영적으로 건강한 해체라면 문화에 사로잡힌 교회를 해방시키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6.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들의 보수적 판결에 바이든 행정부가 진보적 의제로 맞불을 놓다미국 대통령 선거가 종말론적 분위기를 풍기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문화적 교착 상태를 중재하는 대법원의 역할이 확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낙태논쟁 만큼 미국 민주주의의 열정을 자극하는 것도 없다. 진보성향 재판관은 낙태반대론의 주장을 “종교적 견해”로 규정하면서도, 모든 인권이 사실상 신학적 결론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는다. 연방 기금으로 낙태를 지원하도록 행정명령을 내린 바이든 대통령의 백악관도, 낙태를 제한할 수 있도록 주정부의 손을 들어준 트럼프가 새로 임명한 가톨릭교인 대법관들도, 결국 생명의 저자(주인)가 누구인지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려야 했을 것이다. 5. 치열했던 총회장 경선으로 남침례회의 분열의 벽이 더욱 단단해지다미국장로교(PCA) 같은 작은 교단이 현대의 성 정체성 개념을 두고 토론하고 또 적시에 관련 보고서를 발표했다. 주목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은 남침례회(SBC) 같은 거대 교단에서 일어났다.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 교육자[앨버트 몰러 남침례 신학교 총장]가 남침례회 총회장 경선에서 3위로 낙선했다. 2위를 한 마이크 스톤은 선거 운동 내내 교단 내 성 학대 의혹을 총회실행위원으로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고전했고, 총회장에 당선된 에드 린튼은 표절 의혹에 휘말렸다. 물러나는 그리어 총회장가 집행위원회에 남아도 되는지를 두고 일어난 논란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남침례회는 과연 “남부” 또는 “침례교”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 나갈까? 4.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그리스도인들이 탄압에 노출되다 미국인은 이제 이십 년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안정과 승리의 길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더하여, 보복 공격을 피해 필사의 탈출을 하는 미군을 보면서 수치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 탈출 행렬 속에는 아프가니스탄 지하교회 교인들도 있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탈레반의 탄압이 미치기 전에 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탈출하지 않고 남은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그 중에는 미국인도 있다. 현실은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들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탈레반 때문에 결코 좌절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남았다. 3.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둘러싸고 교회들도 갈라지다최근 몇 년 동안 페이스북 엄마 그룹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2021년 상반기까지 전 국민에게 제공된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일부 그리스도인의 반응이 미약할 것이라고 쉽게 예상했을 것이다. 백신 회의론은 현재 아프리카에서도 여전히 높다. 남침례 신학교와 에스베리 신학교는 백 명 이상 직원을 보유한 사업체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백신 명령에 반대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동의를 잘 하기로 유명한 캐나다인들조차도 앨버타의 제임스 코테스(James Coates) 목사가 에드먼턴 교회의 정원 제한 명령을 거부한 것을 놓고 찬반 여론으로 갈라졌다. 교단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교회가 비록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팬데믹을 놓고 음모와 권위 사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있다. 2. ‘마스힐의 부흥과 몰락’ 팟캐스트가 교회를 뒤흔들다 마이크 코스퍼(Mike Cosper)의 팟캐스트 ‘마스힐의 부흥과 몰락’은 지난 십 년을 통틀어 가장 획기적인 기독교 미디어로 전 세계 팟캐스트 차트의 정상권에 오르기도 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이 팟캐스트는 특히 2021년에 수면 위로 올라온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학대 행위를 잇달아 폭로하면서 정신적 학대의 문제를 교회가 해결해야 할 최상위 의제로 밀어 올렸다. 이러한 상호 의심의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유명 교회들이 내부 분열을 겪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지도자가 그들에게 단지 말씀으로 도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확인시켜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 신학자들은 “공감”의 적절한 정의와 적용에 대해 더욱 심도 있는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1.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이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다팬데믹과 정치가 몰고 온 아홉 달의 긴장이 마침내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잔디밭에 십자가들이 세워지고 교수형장의 올가미들이 걸리는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폭발했다. 이 사건을 기독교 민족주의를 주제로 하여 다룬 후속 해설 기사들은 적절한 애국심과 비성경적인 혼합주의를 뒤섞어 놓았다. 그렇지만, 왜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이 2020년 선거 결과에 격렬한 분노로 반응했고, 지금도 여전히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지 한번쯤은 물어 봐야 한다. 아마도 기독교 민족주의,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미국에 적용하는 이 사상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지나치게 현실화된 종말론 또는 언약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원제: My Top 10 Theology Stories of 2021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독교민족주의
문화적포로
성경적성정체성
낙태논쟁
프로라이프
복음주의비평
메타버스 시대를 준비하는 법
by Ian HarberㆍPatrick Miller
2021-11-30
헨리 포드가 직접 대형 교회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자가용 때문에 대형 교회가 가능해졌다. 자가용이 만들어지기 전에 사람들은 대부분 동네에 있는 자신의 교파 교회에 출석했다. 장로교인은 장로교회로, 감리교인은 감리교회로, 침례교인은 침례교회로, 루터교인은 루터교회로, 가톨릭교인은 가톨릭교회로, 그렇게들 각자 동네에 있는 자신의 교파 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자가용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어린이 프로그램, 청소년 프로그램, 찬양팀이 좋은 교회를 찾아서 차로 10~30분 거리에 있는 교회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자가용을 이용하여 좋은 교회 쇼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교회들도 교회 쇼핑을 하는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사역 매뉴들을 준비해 놓기 시작했다. 이처럼 기술문명은 지금까지도 수없이 교회를 변화시켜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기술문명은 너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어서 우리가 그 속도를 따라가자니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앞으로 닥칠 거대한 디지털 문명의 변화라는 빙산의 일각만 경험했을 뿐이다. 현재 우리 앞에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과 교회를 뒤바꿀 근본적인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 바로 메타버스이다.메타버스는 무엇인가?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메타버스’는 낯설게 느껴지는 새로운 단어일 것이다. 어쩌면 이 단어를 최근 마크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의 모기업 이름을 '메타'로 바꿀 때 한번쯤 들어 봤을 수도 있다. 메타라는 이름은 다가올 새로운 미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페이스북은 메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기네가 다가올 디지털 세상의 첫 주자임을 자임했다.그런데, 도대체 메타버스가 무엇인가? 메타버스를 선도하는 벤처 기업에 주로 투자하는 매튜 볼(Matthew Ball)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메타버스는 실시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제한으로 현실 세계와 광범위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3D 가상세계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 역사, 신분, 소통, 금융거래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디지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메타버스는 또 하나의 디지털 세상이 아니다. 여러 세상들이 통합되는 새로운 디지털 세상이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 소유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세상들은 단순히 가상 현실(VR)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으로 실제 그 세상에 참여하는 증강 현실(AR)로도 존재할 것이다.메타버스는 이제 막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음의 몇가지 예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메타버스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 미국의 폭스 TV에서 진행하는 알터에고(Alter Ego)라는 프로그램은 아마추어 가수들이 디지털 아바타로 출연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나 사회적인 요소들과 연결된 선입견의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서는 아마추어 가수들이 디지털 아바타를 사용하여 출연함으로써 자신의 실력만으로 온전하게 평가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메타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신체적인 본래의 자기 모습보다 디지털 아바타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 ‘포켓몬 고’ 게임 속에서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증강 현실 안에 있는 포켓몬을 잡는 게임을 했다. 미래에는 이러한 증강 현실을 업무에 활발하게 적용하게 될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증강 현실 속에서 노는 일도 더 많아질 것이다. • 미국의 힙합 가수 트래비스 스콧(Travis Scott)은 온라인 게임 ‘포트나이트’(Fortnite)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여기에는 전 세계에서 3,000만 명이 참여해 함께 춤추고 즐겼다. 미국의 슈퍼볼 하프타임 때보다 훨씬 많은 수가 모인 행사였다. 아마도 미래에는 사람들이 가상 세계 속에서 라이브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될 것이다.• 애플의 안면 인식 프로그램은 적외선을 사용하여 당신의 얼굴에 있는 3만 개의 포인트를 찾아서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디지털 아바타의 표정으로 실시간으로 반영될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당신의 표정과 디지털 아바타의 표정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플레이스테이션 5’에는 혁명적인 촉각 기술이 반영된 손잡이가 등장했다. 이를 통해 보다 더 현실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미래에는 디지털 장갑을 착용하고 메타버스 안에서 가상의 악수도 나누고, 건배도 하고, 심지어 하이파이브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마이크로소프트의 플레이팹(Play Fab)과 아마존의 게임리프트(GameLift)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서 게임을 할 때 필요한 맞춤형 상대를 가상으로 만들어 냈다. 사용자가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상대와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앞으로 미래에는 메타버스 안에서 내게 필요한 가상의 친구들을 만들 수도 있다. • NFT(가상 화폐)는 우리에게 디지털 세상 속에서 재산을 소유하게 만들 것이다. 메타버스 안에서 디지털 디자이너가 만들어 낸 물건을 구입할 수 있고, 착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증강 현실을 통해서 그것을 현실 속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증강 현실 안경을 착용하면 사람이나 장소가 살아서 움직이는 예술 작품(또는 광고)이 될 수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Flight Simulator)에는 250만 기가바이트의 데이터가 들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현실 세계를 가상 세계 속에 구축하고, 이를 게임으로 만들어 냈다. 2조 그루가 넘는 나무와 15억 개의 건물이 그 세계 속에 들어 있다. 게임 유저들은 현실과 거의 동일한 가상 세계 속에서 비행을 즐길 수 있다(심지어 허리케인 같은 현실과 거의 동일한 기상 상황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을 미러 월드(mirror world)라고 부른다. 미래에는 사람들이 미러 월드의 건물을 디자인하기 위하여서 현실 세계의 건물을 구입할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초현실적인 디지털 재산을 구입하여서 그곳에서 거주하거나 휴가를 즐기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예시들이 메타버스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들은 장차 메타버스가 만들어 낼 미래의 모습이 어떠할지 보여 준다.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그렇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메타버스는 무엇일까?페이스북이 2004년에 등장하고, 아이폰이 2007년에 출시되었을 때, 우리는 그 이후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지 못했다. 14년이 지난 후에 우리는 그 미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이제야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앞으로 메타버스가 문화를 전부 뒤바꾸어 놓은 후에야 교회가 변화된 현실을 알아차리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메타버스 시대를 살아갈 제자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메타버스는 지금의 인터넷 문화가 만들어 내는 문제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 메타버스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까지 5~10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 우리는 다가올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야 한다. 미래의 메타버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갈 증인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오늘 이곳에서 미래 시대의 신실한 제자들을 키워 내기 위하여 필요한 세 가지의 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1. 짜여진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정체성오늘날 우리 사회가 정체성의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안다면 지금 바로 이 문제를 준비해야 한다. 미래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메타버스 안에서 철저하게 짜여진 아바타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마크 주커버그의 메타버스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보면 가상의 공간에서 친구들은 만들어진 로봇처럼 보인다. 우리가 실제로 가상 세계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실제의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 자신처럼 생각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앞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가상 세계 속에 만들어 놓은 정체성을 합쳐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초월적인 트랜스휴먼에 대한 논의들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턱이다. 이제 곧 ‘하나님의 형상’(image Dei)은 ‘메타버스의 형상’(imago meta)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완전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은 굉장히 반문명적인 일처럼 여겨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살과 뼈를 가진 사람, 남자와 여자로 구분된 사람,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정체성은 미래 사회에서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의 생명이 흘러나온다. 사실 스스로 자기를 창조해야 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Z세대[1990년대에 태어난 세대]와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태어난 세대]는 이미 이러한 자기 창조의 두려움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교회는,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된 존재라는 진리를 마지막까지 고수하는 곳이어야 한다. 2. 해체 사회 속에서 창조의 아름다움앞으로 우리의 삶은 점점 더 해체될 것이다. 우리는 가상 세계 속에서 아바타로 또는 증강 현실 속에서 홀로그램으로 해체되어 갈 것이다. 우리의 육체와 실제 환경과 가상 현실 사이의 차이를 더욱 현실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상 세계 속에서 주어진 무제한의 가능성을 바라보면서 그 세계가 현실 세계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동안 세속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담아 내고 있던 초월성, 거룩의 의미를 빼앗아 갔다. 그런데 어느 팟캐스트 진행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 메타버스는 “인간이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던 완전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물리적인 이 세상과 우리의 몸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맡기신 가장 우선하는 근본적인 일은 에덴동산을 가꾸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병든 사람을 돌보며, 외로운 사람에게 찾아가고, 절망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이 세상을 보호하라고 명하셨다. 우리는 기업들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 현실 세상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중요하다고 외쳐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디지털 세상으로 넘어가려는 끊임없는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가상 현실을 거부하며, 더욱 더 현실 세계 속에서 사람들과 만나서 눈을 마주치고, 서로 포옹하며, 그들과 실제로 함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이 미래 사회에서는 반문명적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을 것이지만, 결국에는 이것이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3. 한계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은혜라는 한계메타버스는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메타버스 안에 있는 무제한의 정보는 전지함이 무엇인지 느끼게 한다. 메타버스 안에서 제한이 없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면서 전능함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지리적인 한계도 극복하여 어디든지 우리가 원하는 곳에, 원하는 시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편재성도 체험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가상 현실을 통하여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에 영원함도 손에 잡을 수 있다. 이러한 초현대적인 바벨탑이 한계없는 세상을 약속하며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이런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공동체에 머물러 있으면서, 급속도로 빠른 메타버스의 성장에 저항하여 천천히 가는 길을 택하고, 극도의 지식 사회 속에서 “나는 잘 모른다”는 말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고백해야 한다. 이것은 곧 우리는 어디든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 이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새로운 시대의 신실함우리는 메타버스가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뒤바꿀지 모두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 시대를 본받지 않는 삶을 살아갔다는 것이다. 메타버스는 우리에게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전지전능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우상이 그러하였듯이 메타버스도 우리에게 해악을 더 많이 미칠 것이다. 메타버스는 그럴듯하게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말씀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를 창조하신 영원한 왕을 겨냥하고 있다. 모든 기술적인 혁신이 그러하였듯이 메타버스도 기회와 동시에 위험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변함없이 제자도라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제자도의 길을 고수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현실 세계에서도, 가상 세계에서도, 또한 엄청난 변화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원제: How to Prepare for the Metavers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제자도
메타버스
하나님의형상
기술혁신
가상현실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리스도 고백적 복음주의 정치
by Steve Bryan
2021-10-25
2018년 캘리포니아 연설에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전 대통령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과 뒤를 돌아보는 사람 사이에는 늘 밀고 당기는 긴장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는 사람의 특징은 분열과 두려움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희망을 바탕으로 하는 통합의 정치를 수용한다고 덧붙였다. 오바마의 이런 말은 마치 미국 정치가 언제나 희망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진보주의자와 과거만 집착하는 분열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주의자로 나눠진 공화국과 같다는 이분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현실 자체를 양극화로 인식할 때, 양극화를 비난하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우리는 양극단으로부터 눈을 돌려 또 다른 지혜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 비록 양극단에 빠진, 자칭 복음주의자가 우리 주변에 많다 하더라도, 고백적 복음주의(confessional evangelicalism)는 여전히 정치에 관해서 할 말을 해야 한다. 언제나 개혁하는최근 미국 정치 속에 등장한, 투표권을 가졌으며 대부분 백인으로 구성되었고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the lightly churched)과는 대조적으로, 고백적 복음주의는 개신교 종교 개혁의 역사적 고백에 뿌리를 둔 다민족 글로벌 운동이다. 서서히 그 교리를 발전시킨 “단번에 받은 믿음”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경적 규범에서 차차 벗어나고 있다는 인식에 따른 반응으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셈퍼 리포르만다(semper Reformanda), 즉 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하거나 더 좋은 방향인 “항상 개혁되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원칙을 따랐다. 역사적 기독교의 이런 깊은 뿌리야말로 고백적 복음주의자를 2016년 선거 이후 스스로 “복음주의적”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반대자와 분명하게 구분하도록 만든다.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주의 의제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과거 개신교 개혁가는 아주 다른 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이 추구한 개혁은 변화하는 사회 관습에 교회를 맞추는 식의 변화도 아니었고, 역사의 상향식 발전에 따라 진보하는 식의 변화도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당시의 지배적인 사고체계와 상반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교회가 언제나 정교한 성경의 가르침 아래에서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오래된 찬송 가사처럼 우리 인간은 본성상 “방황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에서 볼 때 고백적 복음주의자가 가진 끊임없는 개혁의 열망은 때때로 그들을 “진보적” 성향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말씀에 신실하게 뿌리박고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진보와 공유점을 가지게 된다. 최소한 그들은 스스로 추구해 온 개혁의 성취를 결코 한때 유행하다 사라지는 식의 “진보”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 개인이 자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 의미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식의 급진적 자유로 대변되는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식의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추구하는 개혁은 신실함으로의 회귀, 잃어버린 중요한 무언가의 회복 그리고 굳건하게 진리를 붙들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이다. 셈퍼 리포르만다를 추구하는 것 때문에 일각에서는 고백적 복음주의자를 정치적 보수주의자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보수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고백적 복음주의자도 과거로부터 보존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그들도 사회학자 및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전문가”의 최신 “발견” 또는 문화 엘리트의 현재 감수성보다 선과 진리에 있어서 지혜를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안내자로 받아들인다. 이런 특징(commitments) 때문에 많은 고백적 복음주의자가 스스로 정치적 보수주의자로 규정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특히 영국과 같은 곳에서는 거의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셈퍼 리포르만다의 추구는 우리가 받은 것을 최종적으로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받은 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예를 들어 고백적 복음주의자는 1950년대의 사회적 규범을 굳이 보존하려고 하지 않는다. 개혁자는 자고로 전통이란 무조건 그 자체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개념을 거부해왔다. 그건 그들이 전통의 가치를 보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는 전통을 존중했다. 단 전통이 성경 속 권위 있는 규범을 보존하는데 한해서만 그런 존중이 가능했다. 물려받은 전통이 말씀을 통해 받은 계시와 반대되는 경우, 관행적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무용지물보다 오히려 더 나쁜 것이다.이런 특징은 많은 복음주의자가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에 동조하도록 만들었다. 체스터턴은 진보주의자의 임무는 “계속해서 실수하는 것”이고, 그에 반해 보수주의자의 임무는 “실수를 바로잡는 일 자체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이러한 선택에 직면했을 때, 고백적 복음주의자는 온건하고 고결하며 욕먹을 일 없는 정치적 중립에 자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고백적 복음주의자는 기껏해야 조금 더 짠 맛을 낼 뿐이다. 복음주의 운동은 결코 정치 운동이 아니다. 그 영향력이 특정 정당 내에서 머무는 한 빠르게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백적 복음주의의 진정한 영향력은 사람과 당파가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서 참되고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하는가 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선지자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함으로 정치 지도 전체에 걸쳐 혼란스러움을 가져올 뿐 아니라, 그 지도에서 벗어나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사상을 변함없이 지지할 것이다. 타협할 수 없는 확신선지자의 증거는 양극단이나 중립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 증거는 오로지 광야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록 주변부(margins)처럼 보이고, 심지어 그렇게 느껴지더라도 광야는 결코 주변부가 아니다. 광야는 선지자가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서 주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굳은 확신으로 담대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을 의미한다. 당 내부에서 오는 영향력을 거부함으로, 그들의 말은 오히려 위로부터 오는 진실의 능력에 덧입혀 권력의 중심에까지 더 확실하게 울려 퍼질 수 있게 한다.이러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현재 정치적 양극에서 발생하는 위협이 최소화되는 것은 아니다. 양극단이 주는 위험에서 자유로운 사회는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복음과 기독교 신앙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 명백하게 복음을 반대하는 적대자들에게서만 온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믿음에 우호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진리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권력에만 관심 있는 자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한다. 약한 자를 짓밟는 자, 그들은 얼마든지 화려한 종교 쇼를 할 수 있으나 실상은 진정한 믿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다(딤후 3:5a).주어진 순간의 긴급한 상황이 우리를 특정 그룹으로 이끌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한 극단이 초래하는 위협이 아무리 커 보일지라도, 당파를 따라 양극단을 옮겨 다닌다면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특정한 당을 대신하여 말하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적인 적이 아무리 진실과 선을 말한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더 큰 선”을 위해 가입했다는 당이 아무리 선을 위협하는 악을 말한다 해도 침묵하기만 할 것이다. 우리의 증언은 근본적으로 영적일 수 있지만, 그 증언이 신실하다면 모든 계층의 정치 지도자에게 놀랍고 불편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한 부유한 “관리(ruler)”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라는 영적인 질문으로 예수님께 다가온 적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웃 중심의 십계명을 강조하는 동시에 권위 있는 토라의 말씀을 그 관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 마음과 관련된 계명(“네 이웃의 것은 탐내지 말라”)을 생략하셨다. 그 계명에는 그 관리에게 없는 “한 가지”가 들어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이것은 변화된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는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소유에 대한 욕심까지도 버리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은 그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이웃 사랑과 무한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선을 갈망한다. 오늘날 “정치인”과 관련하여 고백적 복음주의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정치적 지지가 아니다. 우리의 분명한 고백과 홀로 선하신 하나님 사랑을 증거하는 것 그리고 이웃의 공익을 위한 우리의 헌신이다. 원제: Neither Progressive nor Conservative: The Politics of a Confessing Evangelic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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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를 책임지시는 하나님
by Elliot Clark
2021-10-18
순진무구했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홍수와 기근 같은 자연재해를 초자연적 원인으로 돌렸던 시절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인도까지, 아테네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현실성 없는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모든 재앙을 신이 내린 것이라 여겼다. 홍수가 휩쓸든 지옥에 떨어질 것 같은 일이 생기든 누구를 탓해야 할지 알았다.현재 우리는 과학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현대 과학은 이런 미신 같은 해석에서 인간을 해방하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탐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왜 자연재해가 일어나는지 안다. 산불과 드레쵸(돌풍), 허리케인과 산사태, 만년설이 녹고 오존층이 파괴되는 현상의 원인은 한 가지다. 우리는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 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우리가 말하는 이야기내 의도를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나는 창조주가 만드신 선한 피조물을 책임 있게 관리하고 가꾸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후 변화를 말하는 과학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지지하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사회가 한 가지 이야기만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물리적 현상과 생태학적 고통이라는 하나의 설명에 안착한 것이다. 마치 자연재해가 재판대에 올라섰는데 모든 증인이 같은 증언을 하기 위해 서로 짜 맞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손가락은 모두 우리를 가리키고 있다.이 단일 증언은 상상력이 풍부했던 우리 조상들에게는 황당하고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그들이 자연재해 원인을 전혀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비과학적인 미개인들이 아니었다. 다산과 불임을 위해 신에게 제사했던 바로 그 세대에 인간의 생식 기관과 주기를 정확하게 인식했다. 농작물 재배와 동물 사육을 알아낸 것도 같은 세대였다. 현대적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의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의료 행위를 했다.현미경이 없다고 곡식이 어떻게 자라는지 아기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초자연주의적이었던 이유가 소중한 농작물이 망가지거나 아기가 생기지 않는 일, 질병에 걸려 죽는 일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 모든 책임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현대 신화는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하기 때문에 너무 단순화되었다. 그래서 너무나 우울하게 느껴진다. 20년 전 미국인들이 에이즈 전염병, 허리케인 카트리나, 9·11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었을 때 복음주의 목사들과 인기 있는 텔레비전 전도자들은 그러한 끔찍한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일 수도 있다고 시사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많은 질타를 받았다. 사실상 그 설교자들은 심각한 피해를 일으키는 폭풍, 개인 질병 및 테러 공격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발언과 추측이 오늘날 행해진다면 아마도 ‘영성 남용’이라고 했을 것이다.비난과 수치심누군가는 우리 시대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비난하고 두려움을 조장하는 일이 우리 문화에 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이것을 물리적 남용이라고 불러야 할까?복음주의자들이 인간의 질병과 자연재해를 보고 우리를 탓하는 것에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과학자, 전문가, 정치인은 모든 나쁜 일에 우리(그리고 서로)를 비난하는 것 같다.한쪽에 따르면 인종차별문제, 아프가니스탄 사태, 허리케인 아이다, 코로나19의 확산은 인간 탓이다. 다른 한쪽에 따르면 그와 같은 문제가 일반적으로 다른 이유가 있지만, 여전히 인간 때문이라고 한다. 개인의 선택이든 공공 정책의 책임이든, 동의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우리의 문제가 자연적 원인에 의한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과학 전문가와 정치가들은 뉴스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또 상대방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묻고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이 문제를 스스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말해준다.이 이야기는 별로 좋게 들리지 않는다.만일 우리가 다르게 살겠다고 결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조상들처럼 순진무구하고 무지한 삶의 방식을 회복한다면 어떨까?복음 이야기의 회복나는 감정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우리가 과학을 통해 얻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심지어 코로나 백신도 맞았다!) 나는 모든 사람을 탓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적 확신의 일부를 포기함으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 대신에 초자연적인 증인들의 입장을 수용하고 약간의 신비를 나누도록 한다면 어떨까? 세상의 모든 문제를 우리의 어깨에 올려놓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어떤 유익이 있을지 궁금하다.기독교인의 증언에 따르면 가장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기꺼이 책임지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은 인간의 실패에 대해 솔직하다. 심지어 인간의 선택에서 비롯된 질병, 재난 및 죽음에 대한 고대의 역사를 보여준다. 우리의 좋은 스토리인 기독교 복음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우리가 누리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 약속을 어긴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는 질병과 죽음이 생겼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폭풍과 같이 거대한 짐을 짊어지시려고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실패를 손수 책임지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었다.사전 경고에 주의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재난에 대한 책임을 지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성경에 따르면 질병과 자연재해는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난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근본적인 현실을 볼 수 있도록 돕는 영감을 받은 시각 자료들이다. 그것은 더 큰 재앙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고안된 섬광일 것이다. 예수님은 전쟁, 질병, 자연재해를 재난의 시작이라고 부르셨다. 따라서 그러한 현상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방을 싸서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산모의 진통과 같고, 응급실로 가야 하는 발열과 미각 상실의 증상과 같고, 쓰나미를 피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알려주는 사전 경고 시스템과 같은 것이다.기독교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린다고 믿는다. 자연적인 사건도 그분의 통제 안에 있다. 심지어 우리를 위해 끔찍한 재앙도 계획하신다. 참으로 미스터리 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인간의 책임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야기는 자연주의적 인과관계와 인본주의적 구원의 독특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그리고 그것이 훨씬 더 나은 이야기라고 믿는다.기후 변화가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거나 하나님이 주신 진통은 아니라고 믿는다. 성경은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롬 8:22). 이 땅은 이 모든 재난 끝에 오게 될 더 나은 것을 기다리는 중이다.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 새로운 기후, 더 이상 슬픔도 애통도 고통도 없는 세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꺼이 우리의 비난을 짊어지셨기 때문에 가능한 세상이다.원제: God Wants the Blame for Climate Chan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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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이 만드는 교활하고 거짓된 친밀함
by Chris Martin
2021-10-08
소셜 인터넷은 다양한 의견과 각종 오락이 물결치는 분주한 시장과도 같다. 쇼핑몰의 상점처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또는 틱톡(TikTok)과 같은 다양한 앱은 더 많은 정보와 영감 또는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우리의 끝없는 갈망을 채워주겠다고 약속한다. 각각의 앱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지만, 그 모두를 작동시키는 핵심 구성 요소는 바로 “알고리즘”이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관계없이 피드(feeds)를 통해서 볼 내용을 결정하는 알고리즘은 다른 앱이나 플랫폼으로의 전환을 위한 탭과는 대조적으로, 사용자의 주의를 끌어서 오로지 해당 플랫폼에서만 계속 스크롤을 하도록 만드는 콘텐츠를 제공하도록 설계되었다. 알고리즘이 사용자의 관심을 끌도록 설계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소셜 미디어 앱이 사용자의 관심을 오래 끌수록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하게 되고, 그에 따라 사용자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광고의 가치도 더 높아지게 된다. 알고리즘이 우리를 오싹하게 만드는 이유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은 최근 가장 진보된 알고리즘 중 하나를 갖춘 소셜 미디어 플랫폼인 틱톡이 어떻게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을 감지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 조사한 비디오를 게시했다. 저널은 특정 관심사를 갖도록 프로그래밍된 인공 지능이 실행의 수를 설정하는, 다수의 “가짜” 계정이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오로지 슬프고 우울한 콘텐츠에만 관심을 갖도록 설계된 한 계정의 경우, 틱톡이 그 계정이 무슨 내용에 관심을 갖는지 인식하는 데에는 단 36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가짜 계정이 시청한 모든 동영상과 좋아요를 표시한 정보에 근거해 틱톡이 이 계정에 제공한 콘텐츠 중 무려 93%가 우울증 또는 슬픔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 불행하게도 아주 흔한 이런 예를 통해서 볼 때, 알고리즘의 관심은 우울한 생각을 완화시키는 게 아니라 사용자의 관심을 더 유지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한 사용자는 점점 더 심각한 우울증에 더 빠져들 수밖에 없다. 알고리즘은 치유나 개선에 관심이 없다. 알고리즘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망가진 자아가 거부할 수 없는 내용을 계속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를 무척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이런 알고리즘이 소름 끼치는 주된 이유는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알고리즘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피드에서 만나는 내용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숨기고 싶어하던 가장 어두운 욕망에 직면했기 때문일 수 있다.알고리즘은 숨겨진 마음을 드러내고 지배한다알고리즘은 마음에 우상 숭배를 퍼뜨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음미하는 것보다 소셜 미디어를 스크롤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정작 숭배하는 것이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이라는 사실이 그리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비록 인스타그램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지는 않더라도, 사실상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시간을 인스타그램에 쏟고 있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유튜버의 통찰력이 하나님 말씀의 진리보다 더 중요한 게 현실이 아닌가? 우리가 알고리즘을 “숭배”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한 가지 이유는 알고리즘이 마치 하나님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과 욕망까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아시는데(시 139:23; 렘 12:3; 행 15:8; 계 2:23), 그건 알고리즘도 마찬가지이다. 알고리즘에서 우리는 가장 깊은 두려움과 취약성을 악용하는, 왜곡된 친밀감을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진정한 친밀함, 즉 우리의 가장 큰 갈망을 충족시키는 진짜 친밀함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알고리즘은 우리를 속여 우리를 돌보는 것이 알고리즘이라고 믿도록 만들 수 있다. 겉으로만 봐서는 알고리즘이 꽤나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가진 선호도에 따라서 우리를 기분 좋게도 또는 나쁘게도 만든다. 알고리즘이 요구하는 건 단지 우리의 시간과 관심뿐이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이야기 속 영웅으로 만들고, 모든 현실이 오로지 욕망에만 맞춰지도록 유도한다.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알고리즘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와의 영원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알고리즘도 우리를 친밀하게 알 수 있지만, 결코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지는 않는다. 알고리즘은 결코 우리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위해 우리 마음을 찾으신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미치는 알고리즘의 엄청난 통찰력과 영향력을 깨달을 때, 우리는 현실 속 알고리즘과 같은 수학적 중재자를 피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삶을 중요시하는 사람들과의 친밀감을 추구해야 한다. 알고리즘에서 도망치라, 그리고 사람을 찾으라사람들과 얼마나 자주 어울리는가? 직장을 잃을까봐 거의 항상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느낀다고 소그룹에서 털어놓는가? 아니면, 그냥 형식적으로 웃으면서 모든 게 잘 돌아간다고 말하는가? 친구와 커피를 마실 때 십대 자녀 양육이 주는 고민을 나누는가? 아니면, 그냥 새 학기 시작에 대한 잡담으로 그치는가? 당신이 지금도 정욕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자가 알고 있는가? 배우자는 몰라도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교회 사람들보다 알고리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보다 화면을 두드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보다 알고리즘이 나를 더 잘 아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기초한 안전한 우정을 통해, 우리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알고리즘은 욕망에서 탈출하는 대신 욕망 속에 존재 전체를 던질 때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는 거짓말을 우리가 믿기 원한다. 알고리즘이 우리로 하여금 믿기를 원하는 다른 또 하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라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알려지고 그 안에서 자라야 한다는 사실이다.알고리즘의 거짓된 친밀감과 거짓된 약속에 속지 말라. 진짜 친구 및 가족과 누리는 진정한 친밀감을 추구하라. 알고리즘이 당신의 마음을 형성하고 예배를 훔치도록 놔두지 말라. 목적 없이 스크롤하고 클릭하는 시간을 줄이고,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모든 피드에 속절없이 빠지지 않도록 하라. 대신 기도와 성경 연구 그리로 예배를 통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라. 오늘날 온라인 생활에 관한 아픈 진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콘텐츠가 당신을 소비하고 있음을 기억하라.원제: The Insidious, Fake Intimacy of Algorithm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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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과 희망: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위해 기도하자
by Madeline Arthington
2021-09-04
오늘 아침 나는 고대 실크로드 땅에서 채굴된 푸른 돌로 만들어진 단순한 모양의 목걸이를 손에 들었다. 이 목걸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일부이다. 나는 그 푸르고 작은 청금석을 내 가슴 중앙에 위치시키고 목걸이 줄을 목에 걸었다. 거울은 비록 목걸이를 한 내 모습을 푸른색과 금속성 반짝임 정도로 빛나게 했지만, 내 마음의 고통까지는 드러내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살아본 적은 없지만, 지난 2-3주 동안 들려온 소식으로 알게 된 탈레반의 급부상과 그에 따른 모든 결과를 향해 쏟아지는 세계적인 애도에 나는 동참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걱정하는 많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소셜 미디어 속 사진은 인상적이다. 1970년대에 짧은 치마를 입고 웃고 있는 한 아프간 여성과 탈레반 아래에서 부르카를 입은 한 여성을 비교한 사진이 특히 그렇다. 물론 탈레반이 집권하기 전부터 아프간 여성의 삶은 고단했다. 탈레반 전에도 여자들은 1970년대의 “과거” 사진처럼 미니스커트를 입고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들은 냉정한 현실을 드러낸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탈레반이 권력을 강화함에 따라 우리는 아프간 여성들이 대중의 시선에서 훨씬 더 멀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교육과 공적인 목소리가 없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베일 뒤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더 눈에 띄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현실은 절망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카불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교의 무스카 다스카기어(Muska Dastageer) 강사는 트위터에 “두려움은 검은 새처럼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새가 날개를 펴도 숨을 쉴 수 없다.”라고 썼다.이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할까? 나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길을 잃은 모든 여성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에 관한 몇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위해 기도할 때면 내가 묵묵히 의지하는 감춰진 현실은 바로 이것이다. 주님이 다 보고 계신다고통받는 무슬림 여성들과 나누고 싶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가 하갈의 이야기이다. 궁핍했던 가장 비참한 순간을 맞은 하갈은 도망쳤으며 바로 그 때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를 발견했다(창 16장). 하갈은 하나님에게 “엘로이” 그러니까 “보고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건 매우 놀라운 장면이다. “하갈이 …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13).나는 지난주에 자신이 겪은 학대와 고뇌에 대한 끔찍한 이야기를 공개한 어느 중앙아시아 여성과 직접 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그녀가 아프가니스탄 사람은 아니지만 트라우마, 학대, 사별, 잃어버린 꿈으로 인해 매일 우울한 절망감으로 매일 아침잠에서 깨는 많은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절망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모든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곤경을 보고 계신다. 이번 주 카불의 동정에 따르면 거리는 조용하고 감히 거리로 나서는 몇 안 되는 사람은 다 남자라고 한다. 비록 이처럼 여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났지만 하나님의 눈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보고 계신다.주님이 말씀하신다내가 매일 정기적으로 해오고 있는 성경 읽기에는 기도를 인도하는 시편이 항상 포함된다. 월요일 아침, 나는 하나님의 강력한 음성에 이끌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편 29편을 읽었다. 내 전화기의 뉴스 알림이 계속해서 나쁜 소식을 전할 때마다, 나는 도리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더 생각하고 생각했다.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영광이라 하도다(시 29:7–9).폭풍의 분노보다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권능을 폭풍에 비유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세력도 그 힘을 잃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목소리로 표현된다.많은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외부의 목소리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음성을 막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영광”을 외치도록 만드는 능력의 목소리로 하나님은 지금도 가장 고립된 아프가니스탄 여성에게 다가가신다.주님은 들으신다오늘 나는 시편 31편을 읽고 21-22절 옆 성경 여백에 “탈레반 점령, 2021년 8월”이라고 메모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시 31 21-22).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여성들은 듣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짓눌린 영혼의 아주 작은 속삭임까지도 듣고 계신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복음을 듣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지금도 듣고 계신다. 주님은 존귀함을 주신다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마 9장, 막 5장, 눅 8장)는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말씀이다. 그리고 무슬림 여성과 관련하여 나와 내 친구는 그 이야기를 “수치에서 해방된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부르곤 한다. 이슬람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보면 명예와 수치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다. 명예를 주는 일은 해야 하고 수치를 주는 일은 피해야 한다. 혈루증 여인은 수치심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 전까지 그녀는 무려 12년 동안 부정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녀를 고치는 동시에 그녀의 수치까지 품어주셨다. 주님은 그녀를 “딸”(눅 8:48)이라고 부르시며 명예를 회복시켜주셨다. 수치심에 싸여 살던 여인이 이제는 왕의 영예로운 딸이 되었다.무슬림 여성들은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몸을 가리거나 덮는다. 그러나 진실은 천 조각이나 어떤 옷가지가 불명예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딸”이라고 불러주시는 온유하신 구주만이 수치 속에 갇힌 여인을 구원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여인들의 영혼 안 속사람에게 구원과 치유와 존귀를 가져다주신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주님은 자비를 베푸신다신약에서 야고보는 학대받는 독자들에게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굳건하라고 권면한다. 그는 긍휼과 자비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호소한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세계의 뉴스를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로 하여금 아프가니스탄을 함께 애도할 수 있도록 하며, 또한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는 이 암울한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통해 진리로 나아가도록 가르쳐준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우리의 기도를 주관하도록 하자. 하나님, 당신은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모든 여성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하나님, 당신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복음의 희망을 가지고 많은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도합니다.하나님, 당신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우리는 오늘도 당신을 찾는 여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하나님, 당신은 존귀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우리는 당신이 그들의 수치를 감수하고 그들이 당신의 딸이 되는 영예를 주기를 기도합니다.하나님, 당신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연민과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원제: Lament and Hope: How to Pray for Afghanistan’s Wome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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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약함, 희망: 인종갈등 속 목회에서 배우자
by Steven Lee
2021-08-28
내가 자랄 때에도 우리 동네에서 인종 문제는 언제나 중요한 주제였지만, 오늘날처럼 격렬하고 심각했다고는 기억하지 않는다. 거의가 다 백인인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나는 “칭크”(chink) 또는 “국”(gook)이라고 불리곤 했다(역자 주: 칭크와 국은 동양인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반에서 어떤 아이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지껄이면서 나의 가늘게 찢어진 눈을 흉내 내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 지역에 난민으로 들어온 동남아 학생들과 나는 거리를 두려고 했었다. 나는 놀이터와 농구장에서 흔히 쓰는, 인종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말들을 웅얼거리듯 슬프게 지껄이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이제 목사가 된 내게 인종, 인종주의 그리고 인종간 화합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오늘날 가장 양극화된 주제 중 하나를 건드리는 것인데, 그건 일반 사회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심지어 교회에서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나름의 생각이 있고 누구나 다 지지하는 입장이 있기에, 인종 문제는 승자 없는 패자만 나오는 주제라고 느낄 정도이다.미국에서 인종 문제만큼이나 분열적이고, 적대적이며, 취약하고 또 도전적이면서도 복잡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주말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사역과 비전을 기억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근거로 여전히 이 문제와 관련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다시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1963년 8월 28일, 링컨 메모리얼에서 행한 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에서 킹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언급했다. “큰 시험과 환난을 경험한 사람들 … 박해의 폭풍을 경험하고 또 경찰의 잔혹함에 시달린 사람들 …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고통을 당한 사람들 …” 그럼에도 킹은 연설을 듣는 이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이렇게 당부했다.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오늘 여러분께 말합니다. 절망의 계곡에서 몸부림치지 말자. 우리가 오늘과 내일의 역경을 만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습니다. 아메리카 드림에 깊은 뿌리를 박은, 바로 그런 꿈 말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지금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진실의 강령대로 살아가는, 그런 날이 있을 것이라는 그 꿈이 내게는 있습니다.킹은 그가 꾸는 꿈이 현실이 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우리가 사는 오늘이 킹이 연설을 하던 1963년보다는 훨씬 더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그의 꿈이 현실이 된 시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세상에는 여전히 폭력, 적개심, 분열, 편견, 인종적 적대감, 원한, 분노, 냉담함, 무관심이 가득하다. 그러나 절망에 빠지는 대신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지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또 단지 마틴 루터 킹의 꿈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은 꿈,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가진 모두에게 다가오고 있는 종말 계시의 현실(the end-time Revelation reality)이라는 더 나은 꿈을 위해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안에 깊이 뿌리박은 꿈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준 권위에 힘입어 모든 믿는 자와 지역 교회는 온 세상을 제자로 만들어야 하는 부름을 받았다(마 28:18-20).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어 제자를 만드는 이 글로벌 미션은 세상의 모든 민족으로 구성된 천상의 합창단, 다양성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합된 그 모습을 통해 절정에 이를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를 위한 이 영광스럽고 종말적이며 또 그리스도를 높이는 성경적 꿈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이것이 끝이다. 모든 나라가 다 나아올 것이다. 모든 족속과 모든 민족이 다 나아올 것이다. 모든 언어가 다 등장할 것이다. 거기에 이등 국민은 없다. 엘리트도 없다. 오만함과 적대감과 증오도 없다. 당신은 이런 광경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날에는 모든 잘못이 다 바로잡힐 것이다. 모든 원한, 오해, 헛점, 완악함, 적대감, 인종적 선입관, 시스템적 불법, 그리고 개인적인 죄성까지 모두 다 바로잡힐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자신을 믿는 모든 죄인들을 위해 그의 피를 통해서 죄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이런 구원의 무료 선물을 거부하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흠 없는 재판정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날에는 모든 분열, 불일치, 그리고 적대감이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이들 위로 쏟아내리는 그의 보혈로 인해 다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위한 교훈당신이 이런 미래를 정말로 믿는다면, 그런 미래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큰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이 미국에서 인종 문제에 대한 해법이 생길지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예상하기로 나의 사역이 끝날 때가 되어서도 우리는 여전히 노예제도, 시스템적인 인종차별, 불의, 경찰의 잔혹함 그리고 인종간 적대감을 얘기하지 않을까 싶다. 기독교인이자 목사로서 나는 큰 슬픔을 느낀다. 너무도 느리게 또 힘들게 움직이는 이런 잔인한 현실에 탄식한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이런 현실이 끝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감사한다. 다음과 같은 날이 올 것이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여기에서도 성경적인 정의를 이뤄내는 주도자가 될 수 있으면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정의를 완벽하게 구현할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리며 살 것이다. 그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족, 방언, 언어, 국가로 구성된 다민족 모임에 대한 이 영광스런 종말의 비전을 더 사랑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개인 생활, 교회, 가족 및 지역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야 한다. 다양성의 연합을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교회를 목회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오로지 우리 구세주에게만 우선순위로 맞추며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다음 세 가지를 나누려고 한다. 1. 다양성을 사랑하고 추구하라존 파이퍼(John Piper)는 다음과 같이 썼다.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에게 교회에서 만나는 인종적 다양성이 주는 아름다움과 인종적 다양성이야말로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디자인의 일부라는 확고한 성경적 확신이 실종된 상태이다. 교회 속 인종적 다양성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민족적 다양성에 대해서 적대적인 그리스도인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내가 목격하는, 다른 인종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적대감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을 화해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깊고 성경적인, 십자가 중심의 우러남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올바를지 모르는 다양성의 관용이 가진 아주 얕은 수준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계시록 5장 9-10절에서 드러나듯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핏값으로 사신 다양한 인종의 신부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필요하다. 2. 정의를 사랑하고 추구하라하나님이 성경에서 드러낸 원칙에 따라서 옳고 바른 일을 하는 것이 정의이다.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한다. 이사야 30장 18절을 보라.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시편 37편 28절도 보자.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완벽한 정의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주관한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의 백성을 통해서 이 세상에 정의를 이루길 원한다. 시편 106편 3절을 보자.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잠언 21장 3절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공의와 의를 행하는 것은 불법을 참는 게 아니다. 대신 우리는 이사야가 받은 환상에 주목해야 한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7).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날 참된 성경적 정의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이 땅이 아니라 다시 오실, 완벽하게 정의로운 그분에게만 희망을 가지고 사는 존재들이다. 3. 외부인(Outsider)을 사랑하고 추구하라 우리는 더 이상 국경 남쪽의 이웃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우리는 종교적 박해, 대량 학살 또는 정치적 불안에서 도망치는 난민들이 느끼는 두려움 속에서 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백성들에게 나그네를 사랑하고(신 10:19), 그들을 압제하지 말고(슥 7:10),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돌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시 146:9) 명령했다. 그렇다면 이 지상에 잠시 머무르는 나그네이자 또한 유배자이면서도(벧전 2:11), 상상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아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 우리들은 얼마나 열심을 다해 압제받고 취약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켜주어야 할까? 우리는 난민 위기와 이민 논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할 뿐 아니라 사랑과 인내, 친절함으로 주변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왜 아직도 희망이 있는가예수님은 “미움으로 나누는 벽”을 허물었다(엡 2:14). 우리가 보여주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 우리가 드러내는 이 세상에는 없는 타인을 향한 사랑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요 13:35). 아무리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정치 정책, 문제 해결 전략, 교회와 선교 단체를 포함해서 특정 문제를 어디까지 다뤄야 하는지의 정도 그리고 무엇이 가장 현명하고 유익하며 시기적절한 경로인지 등등에 대해서 얼마든지 서로 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지체로서 서로를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결코 분열과 적대감이 생길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스러운 하나됨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지킬 능력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의미있는 발걸음을 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좌와 우로 나뉘는 게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왕국에 뿌리를 내리고 믿음에 찬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또한 우리 모두가 달성하려는 목적을 잊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전략, 전술 및 이해 수준이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은혜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마침내 그의 왕관 주변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의라는 옷을 입고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는 마지막 날에 이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인종 차별이라는 문제와 관련한 대화에서 완전할 수는 없다. 이 문제를 다루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누구나 다 실수를 저지른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그 누구도 도덕적으로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다 동일한 장소에 서서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이 땅에 살았던 동안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연약함과 신실한 기도, 수고함과 적극적 참여를 통해 그분의 종말 사명을 진전시키는데 참여할 수 있었는지, 새삼 감탄하게 될 것이다. 오 주 예수님이시여, 빨리 재림하소서. 만일 그 재림이 지체된다면, 그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서 우리가 서로의 팔을 꽉 잡고 당신이 주시는 능력으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당신이 오는 그날까지, 당신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원제: Hostility, Fragility, and Hope: Lessons from Pastoring Through Racial Tension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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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페이크와 진실의 타락
by Jason Thacker
2021-08-27
노래하는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이사하는 더글러스! 틱톡(TikTok)에서 골프하는 탐 크루즈(Tom Cruise)!온라인에서 이런 걸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재미있으면서도 중요한 신기술인 딥페이크를 이미 접한 것이다. 최근 몇 달에 걸쳐서 특히 더 각광을 받고 있는, 인공 지능으로 구동되는 딥페이크라는 이 기술이 사실 그리 새로운 건 아니다. 단 최근 들어서 대중이 더 믿고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얼마 전 우리는 쉰 살 먹은 한 일본 자전거 선수가 인터넷에서 자신을 젊은 여성이라고 믿도록 하기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와 같은 유명 지도자의 가짜 동영상을 만드는 데에도 이 기술이 사용되며, 경우에 따라서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 여성의 가짜 누드 사진을 만드는 데에도 사용된다. 딥페이크 기술을 통해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재미있는 비디오를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기술 만능의 시대를 맞아 현실 및 진실의 또 다른 닻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비극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무너지는 기초여러 면에서 딥페이크 기술은 현대 서구 사회와 진리의 빈약한 관계에 대한 간결한 은유이다. 이는 진리와 초월의 구속을 해체한 계몽주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닐 포스트만(Neal Postman)이 그의 고전 ‘테크노폴리(Technopoly, 궁리, 2005)’에서 설명했듯이 경험주의를 향한 계몽주의의 추진은 궁극적으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모든 권위(종교, 정부, 언론)의 거부로 이어졌다.경험주의로의 이러한 전환은 또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와 폴 니델스키(Paul Nedelisky)가 ‘과학과 선(Science and the Good)’에서 적절하게 설명했듯이, “새로운 도덕 과학”에서 도덕에 대한 경험적 기초를 추구하는 새로운 사상가의 흐름을 촉발했다. 데이비드와 폴은 이러한 문화적 변화가 우리 시대에 허무주의적 공리주의를 수용하게 했다고 결론지었다.과학과 기술의 배후에 포괄적인 목적 의식(telos)이 없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경향은 단지 이전에 파괴한 것을 고치기 위한 혁신에 불과하다. 캐나다 철학자 고 조지 그랜트(George Grant)는 ‘기술과 정의(Technology and Justice)’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술이 빚어낸 긴급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술이 필요하다.” 그랜트는 비기술적 수단과 기술적 수단 사이에 선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자크 엘륄(Jacques Ellul)의 “기술적 명령”에 관한 생각을 하나의 단서(thread)로 집어들었다. 이 세상은 점점 더 기술에 의해 조정되고 관리되고 있다. 여기에는 진리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마저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순환 논리(기술로 인해 발생하거나 악화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시 기술을 의지하는 상황)는 우리가 직면한 더 깊은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진과 비디오로 대표되는 현대 시대에서 “무엇이 진리인가?”와 같은 질문이 던진 딜레마에 한때 도움을 주는 것 같았던 기술은 이제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 같다. 상실한 진리에 대한 신뢰오늘날 사진과 비디오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맥락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일종의 문서화된 증거를 얻게 되었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비디오나 사진에서 본 것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고 법적으로 또는 여론 형성에 있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시간 내내 포토샵 및 비디오 편집 소프트웨어와 같은 도구에도 불구하고 비디오와 사진을 수정하는 것은 여전히 꽤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그 결과, 가짜와 실제를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누구나 비디오가 장착된 스마트폰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간편한 편집 도구가 확산됨에 따라, 다른 건 몰라도 사진 및 비디오가 언제나 “진실”이라는 신뢰성마저 흐려지게 되었다. 무수히 많은 인종 편견, 성적 학대, 그리고 부패 사건이 비디오와 사진으로 인해 폭로되었지만, 한편으로 디지털 방식으로 조작된 사진이나 편리하게 편집된,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비디오 영상의 목적이 진실의 포착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더 퍼뜨리고 싶은 욕망이라는 사례 또한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딥페이크라는 이 기술은 골치 아픈 가능성의 새로운 영역이 되었다. 딥페이크의 위험딥페이크 기술이 계속해서 더 저렴해지고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왜곡된 형태의 문서화된 “진실”의 남용이 증가할 것이고, 그 결과 우리 문화에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길 것이다. 첫 번째, 가짜(디지털로 재구성되거나 변조된)와 진짜를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관해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될 때, 그 결과는 인간의 심리와 사회 문화 전반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이다. 회의론이 확대되고 가속화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적”이 계속해서 우리를 속이고 있고, 오로지 “내 편”만을 신뢰할 수 있다는 가정에 함몰될 것이다. 그 결과는 더 가속화된 민족주의(tribalism)와 정치적 분열이다. 회의론이 확대되고 가속화됨에 따라 민족주의와 정치적 분열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두 번째, 딥페이크 기술이 점점 현실이 됨에 따라 비디오 및 사진 증거의 신뢰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 결과 누구나 쉽게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사진 또는 비디오 속 누군가가 실제 그 사람이 아닌 경우를 상상해보자. “증거”가 단순히 정치적 또는 개인적 이득을 위해 만들어진 딥페이크라고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다. 머지 않아 사진과 비디오를 인증하는 기술이 새롭게 나온다고 해도, 그 기술을 돌파하는 새로운 기술이 나올 것이고 끝없는 기술의 속도 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다음은 무엇인가?우리에게는 딥페이크와 진실을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런 현실 속에 숨겨진 도덕적 또는 사회적 불안에 맞서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과도한 영향을 미치는 기술의 힘에 대한 경종을 울려야 한다. 진실의 타락에 맞서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기술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현실 감각을 재조정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와 이웃을 비인간화할 수 있는지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소셜 미디어, 딥페이크 그리고 무너져가는 진리 기반으로 요약할 수 있는 지금 시대에 기독교인의 소명은 최신 기종의 반짝이는 베니어판을 지나 그 너머에 있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이다. 정치, 섹슈얼리티, 기술, 심지어 교회를 포함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지금 진리와 현실에 대한 대대적인 거부라는 초유의 상황을 겪고 있다. 그러나 확고한 진리와 초월적 목적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결코 번영을 꿈꿀 수 없다. 여전히 교회에게는 도덕적 공허함 속으로 과감히 들어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초월적이고도 현실에 부합하는, 진리로 이끄는 밝은 길을 보여줄 기회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밝히는 그 현실(reality)은 결코 누군가의 당파적 의제나 사악한 환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딥페이크 버전이 아니다. 원제: Deepfakes and the Degradation of Tru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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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을 위해 기도하자
by Joe Carter
2021-08-26
탈레반 세력들이 20여년 전에 잃었던 나라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다시 얻으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몰락이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프간 기독교인들이 수일 내로 큰 위험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미군이 주둔하여 억제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아프가니스탄은 오픈도어선교회(Open Doors)에 의하면 박해가 단지 북한보다 약간 덜 심한 땅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은 그들의 새로운 신앙이 발각되면 무서운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오픈도어선교회가 언급하는 대로 그들은 그 나라에서 도망하든지 아니면 죽임을 당하든지 해야 한다. 숨어 지내던 한 아프간 신자가 “우리가 어떻게 날마다 살아남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라고 말한다. “그분께서 아십니다. 그분께서 인자하셔서 우리와 함께 거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죽음에 지쳤습니다.”미국 군대가 급히 그 나라를 떠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더욱 핍박에 노출될 것이다. 여아들과 여성들 또한 고난을 당할 것이고, 지난 20년간 서방 세력을 도왔던 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부지런히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가오는 고난에서 보호하시기를 구해야 한다.기독교인들은 그 나라에 있는 목회자와 선교사들의 영적 공급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저에게 이메일과 문자를 보낸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주께서 그들을 믿음 안에서 강하게 하셔서, 그들이 누군가 말하듯이 ‘주권자요 왕이신 주님 안에서 강하게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라고 조쉬 맨리(Josh Manley)는 말한다.우리는 또한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오픈도어선교회가 지적하듯이, “국제 매체에서 잘 다루지 않지만 코비드-19 확진자 수가 이 나라에서 치솟고 있고 병원에서 제공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도 제한적이다. 그나마 그 의료 체계가 새로운 탈레반 정부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또한 국가의 몰락으로 인해 더욱 극단주의와 테러주의에 이르지 않게 기도해야 한다. 핍박받는 크리스천을 살피며 돕는 국제기구(Release International)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은 “탈레반의 재빠른 진격은 극단주의자들을 대담하게 할 뿐입니다”라고 말한다.그러나 예수께서 우리가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또 다른 부류가 있는데, 곧 탈레반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3-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예수께서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명령을 주셨을 때, 언젠가 탈레반 같이 그분의 신부를 살해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탈레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다.우리 아프간 형제자매들을 살해할 수 있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세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탈레반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라탈레반과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회심에 대해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주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회심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첫 번째 이유가 보다 일반적인 것은 그 극단주의자들의 회심을 기도하는 것이 소용없는 간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셨던 것을 그들에게도 하실 수 있다는 신학적 진리를 잘 안다. 하나님은 구원을 받도록 은혜의 선물을 주신다(엡 2:8). 그러나 우리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그들이 참된 회심을 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여서 우리가 구하는 것조차 우리와 하나님 모두에게 시간 낭비일 거라고 생각한다.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참된 회심을 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회심을 위해 어쨋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최소한 그들의 마음을 바꿔달라고 간구할 수 없겠는가?많은 경우는 아니지만 우리가 그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이 실제로 회개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니느웨 땅에서의 요나 같이,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이 긍휼과 용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내려질 마땅한 결과를 받기를 원한다.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예수님의 명령을 의무감으로 따르며 나치를 위해 기도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자신의 죽음을 앞둔 순간에 참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면 그 기도의 용사들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많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불공평한 것처럼 억울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살려주셨을 때 요나가 했던 것처럼 그들은 아마도 불평했을 것이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그러나 정확히는 그분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원수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원수였을 때에 우리에게 베푸셨던 동일한 은혜를 우리 원수들에게 베푸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 말고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겠는가?탈레반이 악을 행하는 것이 제지되도록 기도하라우리 원수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그들의 악한 행위가 제지되도록 기도하는 것은 상반되지 않는다. 탈레반 박해자들이 더 많은 악을 범하지 않도록 억제되는 것은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유익하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계속 박해하는 것보다 그들의 생명이 짧아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마태복음 5장 22절 설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이생에서 죄를 단 하나라도 덜 범했기를 바랄 것이다.지난 20년 동안 무고한 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위해서 미국을 포함한 정부들이 군사적 행동을 취하여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남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을 박해하는 것을 막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런 악을 막는 데 힘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지지함에는 우리에게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그렇게 억제하는 힘을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요청하는 동기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탈레반 세력의 멸망이 그들이 일으키는 죽음과 고통을 막는 데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나 죽음을 기뻐해서는 안 된다(잠 24:17).탈레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도록 기도하라우리가 합당하게 세워진 정부 당국이 세상의 정의를 구현하기를 간구하듯이,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하시기를 간구할 수 있다. 존 N 데이(John N. Day)는 “사랑과 축복은 신구약 신자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윤리이지만, 저주와 하나님의 보응을 구하는 것은 극단적인 상황에 해당되는 윤리이다. 극심한 상황에서는 완고하고 간사하고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불의한 죄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보응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기를 구함에 있어서 우리의 동기를 삼가 주의해야 한다. 주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의무를 회피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 보응을 맡겨야 하는 한편,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9-21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것은 “마지막 호소”로 포함되어야 한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거나 악을 행하는 데서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 필수적인 것을 행하시도록 마지막으로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예전에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을 확실히 알고 우리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심에 은혜와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탈레반이라 할지라도 그의 자비를 받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크게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거절하고 그들을 살려주실 분을 대적하여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없는 자들에게 내려질 마땅한 하나님의 보응을 그들이 받도록 구해야 한다.원제: How to Pray for Afghanistan and the Talib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강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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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옹호자와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가 닮은 점
by Joe Carter
2021-08-03
사사기에서, 길르앗의 전사들은 에브라임 지파를 패배시킨 후, 살아남은 에브라임 사람들은 요단 강을 건너 고향 땅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길르앗 사람들은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하고 그들이 건너지 못하도록 하며 건너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에브라임 난민인지 확인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 해결책은 간단하고 영리했다.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삿 12:5-6)그 이후로 ‘쉽볼렛’이라는 용어는 한 그룹 사람들(내부인)을 다른 사람들(외부인)과 구분하는 관습이나 전통과 동의어가 되었다. 지난 수요일에 새로운 웹사이트(ChurchClarity.org)가 론칭을 하며 교회들을 구분하기 위해 새로운 ‘쉽볼렛’, 즉 ‘성소수자 옹호’(LGBT-affirming)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데니 버크(Denny Burk)는 그 프로젝트의 문제점을 살펴 본 후 쓴 글에서 “그들은 복음주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교회가 어떤 입장인지 명확히 하도록 강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이 웹사이트와 그 독특한 임무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마치 전에 이런 종류의 것을 들어본 것처럼 섬뜩할 정도로 친숙하게 들렸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나는 그것을 들어 본 적이 있다. ‘성소수자 옹호’는 어떤 의미에서 킹 제임스 번역본(KJV) 성경만이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보수적 근본주의와 다를 바 없는 자유주의 근본주의이다.두 근본주의자들 이야기보수적 근본주의나 독립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킹 제임스 번역본 성경만 사용해야 한다는 견해(일명 KJV 유일주의)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킹 제임스 번역본이 다른 영어 번역본보다 선호될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영어 번역본이라고 믿는 교회 운동이다. 그들은 다른 모든 현대 번역본이 성경 번역자들의 음모로 인해 손상되었다고 주장한다.킹 제임스 성경만이 신성한 영감을 받은 성경이라고 믿는 기독교인 그룹이 성별 정체성이 너무 유동적이어서 하루에 여러 번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 그룹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처음에는 터무니없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두 근본주의 그룹은 적어도 7가지 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1. 성소수자 옹호자들과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은 그들의 신념이 기독교인들 사이를 구분 짓는 핵심이라고 믿는다트레빈 왁스(Trevin Wax)가 지적했듯이, “근본주의 논란에서 앞장서 있는 것은 킹 제임스 성경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쟁이다. 일부 단체에서는 이것이 근본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구분하는 주요 쟁점이라고 주장한다.”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 근본주의 입장에서는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는 의지를 기독교인들 사이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처럼 취급한다. 놀라운 것은 아니지만 Church Clarity와 같은 웹사이트는 성 혁명의 최신 ‘쉽볼렛’에 대해 교회들이 서 있는 위치를 고정시키려 한다는 것이다.2. 성소수자 옹호자들과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은 교회 역사, 교회 전통 그리고 건전한 학문을 거부한다하나님이 1611년에 성경에 다시 영감을 주었다거나 성경이 동성 간의 성행위를 분명하게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려면 모든 교회 역사와 전통뿐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건전한 주석과 성경 연구를 거부해야 한다. 두 진영에서 이러한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나온 “학자”가 신학이나 성경 언어의 전문가이기보다는 독학하거나 관련 없는 자격(예: 성별 연구)을 갖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3. 성소수자 옹호자들과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은 수용 가능한 문화적 선호도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어떤 교회의 웹사이트를 방문하여 그 교회가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그 교회가 특정 문화를 선호한다고 가정해도 된다. 일반적으로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교회는 여러 면에서 1950년대 미국 개신교 백인과 유사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그 교회의 남성과 여성은 성경만큼이나 전통적인 미국 문화에 기반을 둔 성 역할을 따르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 교회는 “전통적인” 예전과 찬송가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교회에서는 성가대가 크리스 톰린(Chris Tomlin)의 최신 경배 찬양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마찬가지로, 당신이 어떤 교회가 성소수자를 옹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교인들은 당신이 최근 출시된 노골적인 영화를 봤다고 말하거나 성별을 드러내는 파티가 트랜스젠더 혐오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당신을 반대하는 시선으로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또한 당신이 그들과 다른 기독교인에 대해 언급하며 “트랜스젠더 혐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4. 성소수자 옹호자들과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은 교회에서 수용 가능한 교리가 무엇인지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성소수자 옹호자들과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이 문화적으로 수용되는 견해에 대해 ‘쉽볼렛’역할을 하듯이, 이 두 근본주의 그룹들은 교회가 용인하는 교리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신호를 보낸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교회는 ‘젊은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ism)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반감을 갖는 반면,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교회는 성역할 상호보완주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반감을 가질 것이다.5. 성소수자 옹호자들과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은 교회에서 수용 가능한 행동이 무엇인지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두 가지 유형의 교회에서는 어떤 행동, 특히 어떤 성적인 행동이 용인되는지에 대해 폭넓은 합의를 하고 있다.예를 들면,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교회에서는 이성애 교인이 음행을 함으로 교회 언약을 위반한 것에 대해 교회의 징계를 받을 수 있다.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교회에서는 이성애 교인이 여자 친구와 동거하는 것으로 교회의 징계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교회는 아마도 회원 자격이 없을 것이며, 교회 언약에 서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교회의 징계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음행’에 대해 징계를 받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그 연인들이 (대부분) 헌신되고, (짐작건대) 사랑에 빠지고, 언젠가는 (아마도) 결혼할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6. 성소수자 옹호자들과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은 영지주의에 근거하고 있다초대 교회에서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창조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지식으로 인해 그들은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이러한 특별한 신념을 모르거나 거부한 기독교인들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마찬가지로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과 성소수자 옹호자들은 그들이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믿으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단순히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로 여긴다.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은 그들이 현대 번역에 대한 진정한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비밀 지식으로 삼고 있다. 트레빈 왁스가 말했듯이,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논쟁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음모 이론이다. 모든 현대 성경 번역이 오염된 사본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번역가가 자유주의적인 개신교나 로마 가톨릭(또는 심지어 단일 세계 정부)에 의해 주도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성소수자를 옹호하는 신자들은 동성애자 및 트랜스젠더를 알거나 접촉하게 됨으로 그들은 그 특별한 지식이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그 의미는, 이전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동성에 끌리거나 다른 성에 동일시하는 사람들에게만 노출되었다면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것이 틀림없고 항상 그래왔다고 인식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결국, 옹호하지 않는 것은 미워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미워하지 않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은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7. 그들은 의도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잘못 인도된 것이다위의 모든 이유로 우리는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교회와 성소수자 옹호 교회 모두 일반적으로 의도적으로 악의적이지 않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두 유형의 근본주의자들 대부분은, 특별하든 일반적이든 간에, 하나님의 계시를 죄악스럽게 거부하고 단지 그들 개인의 취향에 맞는 걸 믿고 있는 것이다.이 두 그룹이 다른 점이 두 그룹이 유사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과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한 가지 주요 차이점은 심미적인 점이다. 어떤 이유로든지 킹 제임스 전용주의자들은 끔찍한 시각적 취향을 갖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웹사이트는 1995년에 ‘지오시티’(Geocities) 사이트에 게시된 이후로 업데이트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그러한 것에 연루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대조적으로 ChurchClarity.org에 있는 것처럼 성소수자 옹호론자들은 더 인상적인 웹사이트를 가지고 있다. 이 유형의 근본주의 웹사이트는 훌륭한 그래픽 디자인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좀 더 용인되는 경향이 있다.또 다른 주요 차이점은 영원한 영향력이다.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추종자들은 분열적이고 죄가 많으며 심지어 약간 이단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교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회개하지 않고 행할 수 있다고 격려하면서도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시 5:4-5; 롬 1:18).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차이점이다. 두 집단 모두 근본주의자일 수 있지만, 인간을 지옥으로 이끄는 근본주의는 언제나 최악의 근본주의다.원제: How ‘LBGT-Affirming’ Is Like KJV-Onlyis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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