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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에 왜 도시가 중요한가
by Aaron M. Renn
2022-10-19
도시는 선교에 중요하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기 때문이다. 아주 최근까지 인류는 거의 다 시골에서 살았다. 1910년까지만 해도 세계 인구의 10퍼센트만 도시에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 인구는 50퍼센트 이상이며, 이번 세기 중반이 되면 75퍼센트까지 늘어날 수 있다. 폴 로머(Paul Romer)는 늑대처럼 무리를 지어 생활하던 인간이 개미나 흰개미처럼 살게 되어서라며, 도시화라는 인간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설명한다. 도시화의 변화는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난다. 아프리카는 이제 다른 어떤 대륙보다 빠르게 도시화하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2050년까지 세계 인구 증가의 절반인 약 12억 명이 아프리카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2050년까지 세계 인구의 21퍼센트가 아프리카 도시에서 살게 될 것이다. 중국과 인도도 도시화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10억 명이 넘는 인구가 도시 빈민가에 살고 있으며, 이는 미국과 유럽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다. 선교학자 레이 바키(Ray Bakke)는 말한다 “더 이상 정글의 초가지붕이 아니다. 도시는 이제 6대륙 모두에게 열린 미래의 새로운 선교지이다.”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우리가 지구상 모든 종족 그룹과 위치에 도달하도록 강조하지만, 인구 통계는 도시 선교에 더 치중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1억 명의 새로운 도시 거주자에 대해 1만 명당 교회가 하나가 되는 비율을 달성하려면, 1만 개의 새로운 도시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 이것은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수만 개의 새로운 도시 교회를 개척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럼 미국은 어떤가?미국과 관련해서는 도시화가 다르게 보인다. 인구 조사국의 분류를 따르면, 미국은 1920년에 이미 도시 인구 50퍼센트에 이르렀고, 오늘날에는 약 80퍼센트에 이르는 사람이 도시 거주자이다. 그러나 “80퍼센트 도시 인구”라는 수치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관계 기관은 2,500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는 모든 곳이 도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가수 존 멜렌캠프(John Mellencamp)가 부른 “작은 마을”(small town)의 전형인 인디애나주 세이모어에 사는 누군가는 이제 기술적으로 도시 거주자가 되었다. 또한 “도시”라는 단어에 대부분 사람은 다가구 주택 및 복합 용도 개발이 이뤄지는 고밀도 지역을 생각한다. 또한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격자 형태의 도로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도로가 배치된 곳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대부분의 미국인이 거주하는 지역의 특징이 아니다. 뉴욕시,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보스턴, 시애틀, 워싱턴, 볼티모어, 마이애미 등 전통적으로 도시화된 곳의 2020년 인구를 다 합해도 약 2천만 명에 불과하다. 내가 사는 인디애나폴리스 같은 도시에 대학 도시까지 합쳐야 미국의 도시 인구는 3, 4천만 정도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건 미국 전체 인구의 약 10-15퍼센트에 불과하다. 자동차를 타는 대부분 미국인은 거대한 패턴으로 성장한 교외에서 산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미국에서도 선교를 위해 전통적인 도시 지역이 여전히 중요한가? 그렇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1.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도시에 사는 3천만에서 4천만 명의 사람들도 복음을 들어야 한다. 루이빌이나 버밍엄 같은 작은 도시든, 보스턴이나 시애틀 같은 큰 도시이든, 도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2. 도시에 핵심 기관들이 있다.미국의 경제, 산업, 정부를 통제하는 주요 도심은 핵심 거점이다. 모든 미국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관이 그곳에 있다. 베이 지역의 기술, 뉴욕의 금융, LA의 엔터테인먼트, 보스턴의 생명 공학 및 엘리트 고등 교육, 워싱턴의 연방 정부는 이러한 해안 센터를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위치 중 하나로 만든다. 구글, 디즈니, 뉴욕타임스, 국방부, 하버드 같은 기관에서 내린 결정은 우리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이유로 도시는 전략적이다. 복음이 핵심 기관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고 싶다면, 교회가 도시에 존재하고 또 견고해야만 한다. 3. 변화는 도시에서 시작한다.국가의 문화 형성 기관이 모두 다 주요 도시 중심에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문화적 변화는 도시에서 먼저 발생한다. 펜실베이니아 역이 뉴욕시에서 철거되었을 때, 전국에서 역사 보존 운동이 촉발했다. 현대 LGBT+인권 운동은 1969년 뉴욕의 스톤월 폭동으로 시작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일어나는 일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비밀을 지키라는 말이 있지만, 뉴욕, 샌프란시스코 또는 LA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국 우리의 삶 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도시 교회는 일찍부터 문화적 변화에 노출된다. 이런 이유로 도시 교회는 종종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을 개발해낸다. 도시 교회가 문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또는 부적절한 방식으로 굴복하더라도) 그들은 많은 교회에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공화당이 우세한 주(red-state)의 교외나 또는 작은 마을의 안락함에 빠져서 도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비판보다는 그들이 어떤 압력을 받으면서 사역하고 있는지,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험하는 힘이 곧 모든 곳에서 똑같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도시 사역이 주님이 주신 지상명령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하다. 인구 통계학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이유로 도시는 전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 21세기 선교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원제: Why Cities Are Important to the Church’s Missio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도시선교
지상명령
도시
도시화
팀 켈러는 왜 ‘도시 선교’를 말하는가?
by 고상섭
2022-07-20
팀 켈러의 센터처치는 복음, 도시, 운동이라는 세 가지 신학적 비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복음을 통해 도시를 변화시키는 연합운동으로 복음 생태계를 만들어 도시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팀 켈러를 언급할 때 지금까지 가장 많이 대두된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복음’과 ‘복음설교’일 것이다. 복음의 재발견은 너무 귀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복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복음은 반드시 도시로 그리고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 도시인가? 도시선교라는 단어는 많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도시를 선교해야 한다면 농촌은 선교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팀 켈러가 말하는 ‘도시’는 단순히 농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도시가 아니고 또 농촌선교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팀 켈러가 도시에 집중하는 이유는 도시는 단위면적당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도시에 몰려서 살고 있고,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문화와 사회가 형성된다는 의미이다.도시의 변화는 한 개인의 변화를 넘어 도시 속에 창출된 경제, 정치. 법질서, 문화의 변화를 촉진한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단순히 개인의 성향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통해 만들어진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도시의 개념에 눈을 뜨지 못하면 복음은 단지 개인의 구원에만 집중하게 되고 구조적인 사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도시를 선교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변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는 도구를 활용한다는 뜻이 된다. 도시의 긴장도시는 사람들이 몰려 밀집된 곳이라 도시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면 선교적 확장성을 가질 수 있지만 또한 죄의 온상지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타락한 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인간이 모여 있는 도시에는 안정과 안정, 다양성, 생산성과 창조성이라는 일반은총의 긍정적 요소도 있지만 죄와 타락이라는 부정적인 모습도 가득하다. 그래서 교회는 도시에 빛을 비추어서 선한 영향력을 통해 문화를 변화시켜야 하고 또한 소금이 되어 도시의 부패를 지연시켜야 하는 책임을 함께 가지고 있다. 도시의 긴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시를 변화시키겠다는 기독교 승리주의식 사역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도시는 교회가 변화시켜야 하는 대상이지만 교회의 힘만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곳임을 인식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도시의 완전한 변화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날의 소망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으로 나침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8). 팀 켈러는 ‘일과 영성’에서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곳임을 이해하라고 권면한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노력한 만큼 열매가 거두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노력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밭의 채소’의 위로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는 세상 속에 있지만(도시가 완전히 변화되지 않지만) 우리가 먹을 밭의 채소를 통해(하나님이 주시는 변화의 예고편과 맛보기) 우리는 소망 가운데 실망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게 된다. “이상주의는 속삭인다. 일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고 영향을 끼치며 새로운 것들을 내놓으며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라고. 반면에 냉소주의는 비아냥거린다. 일한들 뭐가 변하겠어? 쓸데없는 희망을 품어서는 안 돼, 그저 먹고 살 수 있으면 그만이지, 너무 공들이지 말고 여건만 되면 당장이라도 집어치워”(팀 켈러,일과 영성, 111쪽).본래 의도된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의 노력은 여전히 얼마쯤 열매를 맺는다. 도시는 교회가 원하는 만큼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로, 천국의 시민권자로 이 땅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임을 선포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가 저기 있다는 나침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도시와 구원 구약 시대의 선교는 구심적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세상 가운데 이방의 빛이 되어서 많은 이방 민족들이 유입되는 중심을 향해 바깥에서 모여드는 흐름이었다. 솔로몬 시대에 시바의 여왕이 와서 감탄하는 형태의 선교적 모델이었다. 신약 시대 선교는 원심적이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향해 움직인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천국을 약속하셨지만 또한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파송의 사명을 함께 주셨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예수님이 교회를 향해 주신 소명은 세상으로 파송이며 이것은 곧 도시를 변화시키라는 부름이다. 도시목회와 선교의 저자인 하비 칸 교수는 선교신학적으로 ‘도시선교’를 단순히 선교라는 개념에 도시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도시선교를 새로운 선교학작 장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도시를 선교하는 것은 기존 선교의 패러다임이 변화되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1) 접근 가능한 미전도 종족 이전엔 선교지로 나가서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이 많았지만 요즘 도시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와 학생들이 유입된다. 국가에서 복지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있고, 이주자들과 이민자들은 여러 가지로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은 교회의 선교에 가장 효과적인 지점이 될 수도 있다. 선교의 불모지에서 선교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선교적 환경이 훨씬 좋은 곳에서 새로운 이주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할 때 미전도 종족에 대해 쉽고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게 된다. 2) 젊은 세대도시에는 젊은 세대들이 몰려 있다.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18세에서 34세 사이의 미국인 중에 55퍼센트가 뉴욕 시에 살고 싶어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가족과 떨어져서 홀로 직장이나 학교 주변에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더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주로 삶과 환경에 변화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사를 하거나, 새로운 직장을 가거나, 결혼과 출산을 했을 때이다. 삶의 변화가 있는 젊은이들을 복음으로 양육한다면 새롭게 직장을 구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믿음으로 도시를 변화시킬 귀한 자원들이 된다. 3) 문화적 엘리트도시는 출판, 미디어, 학문, 예술의 영역이 모두 종합적으로 모여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그 문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시대정신이 된다. 제임스 헌터는 문화가 변화되는 요소 중 중요한 것이 변방에 있는 문화적 엘리트들의 네트워크라고 말했다. 문화적 엘리트들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그것을 수용해서 활용하는 교양인들이 많아질 때 문화는 운동이 되어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세계에 있는 젊은 세대들은 비슷한 문화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문화를 함께 공유하기 때문이다. 헝가리에 사는 청소년들이 뉴욕에 사는 청소년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맨해튼과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문화 생산물이 세계에 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는 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엘리트들이 복음의 가치를 가지고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복음과 연결할 때 도시의 문화는 복음의 가치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4) 빈곤층 도시는 명암이 확실한 곳이다. 화려한 면이 있지만 어두운 면도 있다. 높은 빌딩과 화려한 쇼핑몰 뒤에 보이지 않는 빈곤층과 노숙자들이 함께 있는 곳이 도시이다. 급성장하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1/3이 판자촌에서 살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세계 빈곤층의 대다수는 도시에 살고 있다. 도시에서 엘리트를 전도하는 것과 빈곤층을 섬기는 것은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빈곤층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타당성에 중요한 표시가 된다. 그리고 빈곤층을 섬길 때 필요한 돈과 자원은 엘리트들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빈곤층과 도시의 필요를 위해 엘리트들의 돈과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도시 교회는 빈곤층에 대한 사역과 엘리트에 대한 사역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빈곤층을 돕기 위해서 엘리트들의 경제적, 문화적 자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빈곤층에 헌신하는 것은 우리의 메시지의 타당성을 지지하는 문화 엘리트층에 대한 전도가 된다”(센터처치, 345쪽).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고 싶어 했다. 아마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기 때문일 것이며, 로마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 시대의 로마처럼 오늘날 세계의 도시들은 그 중요성과 영향력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는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도시 사역을 강조하고 지원하는 것보다 선교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모든 교회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교적 교회의 핵심은 성도들의 선교적 삶이어야 한다. 이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는 길이 바로 도시를 복음으로 품는 것이다. 사람들을 전도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다음 세대를 전도하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세상의 문화 한가운데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조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려면 우리는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센터처치, 346쪽).
도시
도시선교
도시목회
복음주의자는 이제 선교에 대한 관심을 멈췄는가?
by Douglas A. Sweeney
2022-06-12
도움을 주는 사람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도전, 지상 명령을 지향하려는 우리를 낙담시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냉엄한 사실오늘날 세계에는 거의 80억 명이 살고 있으며, 세계 기독교 연구 센터(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Christianity)의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그 중 28퍼센트가 복음화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리스도인 수는 모두 25억 명(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등 모두 포함)이고, 선교사는 43만 5000명이다. 그러니까 전체 그리스도인의 0.01퍼센트가 외국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연간 총 수입은 53조 달러이고, 해외 선교에 지출하는 금액은 520억 달러이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수입의 0.09퍼센트보다 조금 더 많은 금액을 세계 선교에 지출하고 있다.이 수치를 일반 가정에 적용해 보자. 이 통계에 따르면, 미국 그리스도인이 각종 기독교 사역에 지출하는 금액은 크리스마스 비용과 비슷하다. 해외 선교에 지출하는 만큼 우리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돈을 쓴다. 그리고 미전도 종족 복음화보다 애완동물을 위한 할로윈 의상에 더 많은 돈을 쓴다.무엇을 놓치고 있는가?이런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나와 같다면, 이러한 통계 앞에서 부끄럽고 우울하고 또 죄책감까지 느낄 것이다. 물론 이런 수치를 아는 그리스도인은 별로 없다. 그러나 숫자 뒤에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주권자 되시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진정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 역사와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한 확신을 지금 잃어 가고 있다.바로 이런 현실이 오늘날 제자도를 방해한다. 수세기 동안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역사 속에는 세속적인 세상을 초월하는 목적이 있다고 믿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역사에는 의미와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삼위 하나님의 내적 조언(창세 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의 합의)에서 나온다. 창조와 함께 시작된 역사는 인류가 죄에 빠지면서 나선형으로 흘렀고, 잃어버린 자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웅대한 계획에 의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에 빛을 비추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운행하셨다.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 좋은 소식을 전함으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고 그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명하신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예수님 말이다. 역사는 구주의 재림과 함께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으로 끝이 날 것이며, 구주와 함께 빛나는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과거에만 해도 대부분 그리스도인에게 실제이고 진리였다. 바로 이런 사건이 우주를 앞으로 이끌어 가는 동력이었다.그러한 이런 믿음은 대부분 서구 세계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적어도 세속 대학, 엔터테인먼트 산업 및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문화를 형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역사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미래를 건설하라.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라. 무슨 이야기를 할지 주의를 기울이라. 인생은 한 번뿐이다. 그러니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하라. 진짜 죽어야 할 정도로 큰 죄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살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이런 철학은 그리스도인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사명감을 상실하는 건 세속주의 인간 역사와 운명에 대한 해석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진짜 북쪽, 그러니까 정확한 기준이 없을 때 우리의 행동은 줄어든다. 타고 즐기는 게 목표라면,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제는 객관적 가치와 영원한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 유명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1800년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바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지나간 시대에 대해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전에 죽을 때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그들은 하나님의 우편 손으로 갔다.그런데 그 손이 지금은 잘리고 없다.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믿음의 포기는행동마저 하찮게 만든다. 아예 아무런 빛이 없는 거 보다는 희미한 도깨비불이라도 있는 게 더 낫지 않던가그녀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의 약화가 우리가 사는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청지기로서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관리해야 할 사람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다. 대가를 치르는 제자의 삶을 살도록 서로 격려하며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한 확신을 굳건히 하자. 그리스도인이라면 알고 있던 것짧은 교회사 공부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승천 당일, 사도들에게 더 많은 제자를 삼으러 나가기 전에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4, 8).자, 성령이 임하시고 교회가 성장했다. 고대 기독교 성장률에 대한 추정치는 다양하지만 가장 보수적인 학자도 서기 150년에는 약 4만 명, 200년에는 20만 명 이상, 300년에는 60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성령은 더 많은 제자를 준비시키는 제자를 계속해서 일으키셨다. 그 중 소수는 “땅 끝까지” 여행하여, 그 후 몇 년 동안 교회 성장을 가속화했다. 1900년까지 교회는 전 세계 인구의 거의 35퍼센트인 6억 명을 돌파했다. 많은 사람이 다음 세기가 세계 기독교의 황금시대인 “기독교 세기”가 될 거라고 예측했다. 물론 기독교 전파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른바 중세 시대에 기독교세계(Christendom)의 지리는 이슬람 정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아 심하게 축소되었다. 500년에 기독교는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했으며, 인구 통계학적으로 지중해 동부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1500년에는 전 세계 인구의 더 작은 부분을 차지했으며(천 년 전보다 약 2퍼센트 적음), 그 때 전 세계의 무게 중심은 유럽의 심장부에 있었다. 실제로 전체 그리스도인의 거의 92퍼센트가 유럽에 살았다. 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운 비율이다. 그러나 서양 근대사를 거치며 신앙이 더욱 약해졌고, 그에 따른 불가피한 세속화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은 하나님의 죽음을 목격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그러나 하나님은 죽지 않았다. 사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18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흠이 없고 썩지 않는다(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서유럽인 사이에서는 신앙이 쇠퇴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는 일을 계속하고 계신다.현대 선교 운동이 한창이던 1900년에 이르러, 교회는 1500년에 비교해서 일곱 배가 더 커졌다. 그러나 20세기, 적어도 전망처럼 서구에서 “기독교 세기”가 되는 건 실패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엄청난 인구 증가, 대부분의 유럽 지역에서 기독교 헌신의 감소,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의 증가로 인해 기독교는 20세기 동안 전 세계 인구의 1퍼센트 이상이 감소했다. 북반구에서는 인구의 82퍼센트에서 41퍼센트로 급감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전체적으로 겨우 1퍼센트만 감소했을까? “2/3 세계”에 해당하는 여러 지역에서 기독교 신앙이 성장했고, 1900년에 약 9,900만 명(인구의 18퍼센트)이었던 신자가 2000년에는 거의 12억 명(인구의 59퍼센트)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실로 20세기가 기독교 세기가 되었다. 그리고 21세기는 서로 다른 문화가 다양하게 제자도에 참여하기에 좋은 시대가 되었다. 순종은 작게 시작한다지금 이 시대에 성령의 움직임에 동참하자. 장 칼뱅이 말했듯이 믿음의 안경을 끼고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으로 시야를 넓히고 세계사를 바라보자. 국내외에서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자. 돈이 없거나 해외 선교에 참여할 여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세계 여러 국가의 국민이 우리 곁으로 왔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당장 이민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지역 교회의 선교 사업에 협력하고, 또 어디에 있든지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님은 재림 때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제자를 삼고 사랑하면서 사역하고 준비된 상태에서 그분을 맞을 수 있기를 바라신다. 구속의 역사에서 주님은 우리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하길 원하신다. 원제: When Did Evangelicals Stop Caring About Missi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전도
재림
선교
선교통계
세속화
제자도
구속사
에밀리디킨슨
선교운동
칼뱅
복음은 왜 번역가능한가
by 권성찬
2022-05-06
기독교는 번역가능하다. 이는 이미 합의된 선언이다. 이에 대해 주로 언급한 학자는 대표적으로 감비아 출신으로 예일 신학부에서 가르친 라민 사네(Lamin Sanneh), 에든버러 출신의 교회역사학자 앤드류 월스(Andrew Walls), 그리고 가나의 크와메 베디아코(Kwame Bediako) 등이다. 타문화에서 성경을 번역하는 선교사들은 번역가능성(translatability)을 누구보다도 가장 직접적으로 동의하고 실감한다. 만일 기독교의 복음이 번역가능하지 않다면 다른 언어, 다른 문화로 복음을 옮겨내는 일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심지어 신성모독이 될 것이다. 기독교의 번역가능성은 이슬람과 비교했을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이슬람은 번역가능하지 않은(nontranslatable) 종교이다.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의 몸으로 임하신 기독교와 달리 이슬람에서 말씀은 소리(아랍어)로 임했다. 따라서 이슬람의 말씀은 7세기 아랍어 소리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점일획의 변조 금지가 기독교에서는 그 ‘의미’에 방점이 있지만, 코란은 말 그대로 아랍어 소리 그대로의 보존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번역된 성경은 원래의 성경과 동일한 말씀이지만, 이슬람에서 아랍어 코란 이외의 다른 코란은 그저 참조용일 뿐이다. 그러니까 두 종교 모두 포교 혹은 선교를 하지만 이슬람은 형식을 그대로 옮겨내는 선교이고, 기독교는 복음을 번역하는 선교이다. 이에 대해 라민 사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두 종교가 가진 공통된 선교적 열정에도 불구하고 현저한 차이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경전의 번역가능성에 대한 대조적인 입장이 가장 근본적인 차이이다. 앞서 말한 대로 성경 번역은 기독교의 고유한 표식(vintage mark)인 반면에 이슬람에서는 아랍어 코란의 번역불가능성이 그 종교의 특징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두 종교가 선교와 다원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에 중요한 함의를 가지며 개종의 성격과 목적에도 마찬가지이다”[1] 그렇다면 기독교가 번역가능한 종교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라민 사네는 세 가지로 이 주장을 변증한다. 첫째, 기독교는 창시자인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로 예배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 기독교는 창시자인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를 별로 기억하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창시자의 언어로 예배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람들의 일상 언어로 예배한다는 점이다.[2] 라민 사네의 설명이 기독교의 번역가능성에 대한 묘사(descriptive)라면, 앤드류 월스는 좀 더 원리적으로 접근한다. 월스의 설명에 따르면 기독교의 번역가능성은 성육신에 기반한다. 영원하신 말씀이 인간으로 번역 곧 성육신되었기에 기독교 성경은 번역이 가능하다. 이슬람은 코란을 영원한 말씀으로 이해하기에 번역할 수 없으며 그에 상응하는 기독교의 말씀은 영원한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이지만 성육신했다는 면에서 번역된 말씀(Word translated)이다. 그 번역된 말씀인 그리스도에 의존하고 있는 성경은 그래서 번역가능하며 또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이며 동시에 번역된 말씀이라는 월스의 설명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이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요1:1). 동시에 그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민족의 한 사람으로 특정한 지역에 나신 번역된 말씀이다. 복음의 번역가능성은 후자를 기반으로 발전시킨 기독교의 특성이다. 말씀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고, 그 태초부터 존재하셨던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요일1:1)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이를 기반으로 복음이 각 문화와 지역과 세대와 계층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할 수 있으며, 앤드류 월스가 복음을 문화의 포로이자 해방자라고 설명할 때 ‘포로’라는 말은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3] 번역가능성의 논의에서 놓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 바로 영원한 말씀이라는 그리스도의 속성이다. 사실 번역된 말씀이 가능한 이유는 영원한 말씀이라는 속성 때문이다. 영원한 말씀은 번역된 말씀보다 우선성을 가지고 있고 번역된 말씀에 대한 근거이다. 따라서 복음의 번역가능성은 복음의 영원성을 담보한 상황에서만 유효한데, 그것이 번역가능성의 목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며 왜 중요한지 이제 논의를 이 번역가능성의 목적으로 넘어가 보자.번역가능성의 목적복음의 번역가능성으로 인해 다양한 언어, 다양한 문화를 동등하게 대한다는 입장이 정당성을 확보하며 따라서 번역가능성은 위의 학자들이 언급한대로 언어 속으로, 문화 속으로 깊이 나아가는 면이 강조되었다. 특별히 오늘날은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북반구의 종교라는 인식을 벗어나 다양한 나라와 지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며, 다른 어느 때보다 기독교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현재의 다양한 지역이라는 공시적 관점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다양한 세대라는 통시적 관점에 적용하면, 현재 기독교의 쇠퇴를 역전시킬 요소의 하나로 번역가능성을 언급한 팀 켈러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다만 번역가능성에 대해 복음이 다양한 문화 혹은 세대 속으로 침투할 수 있다는 원심적인 면만 묘사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비록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완전하지 않은 설명이다. 왜 번역을 허락하는가? 다른 말로 왜 형식을 여는가? 이에 대한 이해와 전제에 기반하지 않고 단순히 번역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은 미래에 축소와 왜곡을 가져올 가능성이 많으며 실제로 역사가 그것을 증언한다. 팀 켈러가 인용한 앤드류 월스의 글을 다시 인용해 보자. 문화적 다양성은 기독교 신앙 안으로 구축되었다. … 사도행전 15장은 새로 믿게 된 이방 그리스도인이 굳이 유대 문화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 개종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헬라 방식을 만들어나갔다. … 그 누구도 기독교 신앙을 독점하지 않는다. 파키스탄에서 튀니지, 모로코까지 알 수 있는 ‘이슬람 문화’가 있는 것과 달리, 그런 식의 ‘기독교 문화’라는 것은 없다.[4]그렇다. 구원을 이루는 기독교 문화, 기독교 형식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문화, 형식 혹은 심지어 민족(이스라엘)이라도 그것이 본질을 독점하는 순간 축소와 왜곡과 타락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논쟁과 지적은 율법뿐만이 아니라 선택된 민족이라는 형식으로 본질을 대체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와 형식과 더 나아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을 열어 놓으신 이유는 역설적으로 어떠한 형식에게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본질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기독교의 복음은 번역가능성이라는 한 면과 더불어 더 중요한 면인 본질 유지를 포함할 수 있는 용어로 ‘번역성’(translativity)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기독교는 번역성의 특질을 가졌는데, 이는 끝까지 본질을 유지해야 하는 변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우선성에 모든 문화와 세대와 다양성 속으로 침투해야 할 번역가능성을 더해 이루어진 특질이다.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으며 어느 것도 독점할 수 없기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 복음을 번역함으로써 영원한 것은 영원한 대로 그리고 함께하는 것은 함께하는 대로 두 가지를 모두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가?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삼위 하나님과의 하나됨이방인에게, 새로운 문화에게, 새로운 세대에게 특정한 형식이라는 짐을 지우지 않았다는 말을 그들에게 맞는 형식을 주었다는 말로 변환하는 순간 오류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영원성, 즉 복음을 알게 된 사람에게 특정 형식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지, 새로운 형식을 그들에게 주었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환기이자 그래서 반추의 시대인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깊이 묵상할 것은 새로운 지역에, 문화에, 세대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라는 형식에 대한 반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성에 대한 묵상, 복음의 본질에 대한 묵상이다. 본질을 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와 세대와 더불어 함께할 때 새로운 형식을 그 문화가 그리고 그 세대가 자신에게 맞도록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금의 문제는 새로운 방식을 찾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본질을 상실한 채 다가가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남에서 말씀하시기를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랑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어야 모든 사람이 그들이 주님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다(요 13:34-35). 그 사랑의 큰 그림은 주님의 기도에서 드러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그리스도를 통해 성삼위 하나님과 하나되는 공동체가 서로 서로 하나되는 공동체가 되고, 그 공동체가 세상에 나가 함께할 때, 새로운 문화에 함께 할 때, 새로운 세대에 함께할 때 하나님과 하나된 속성과 서로 하나된 속성으로 인해 그들이 주님을 믿고 그 하나됨 안으로 오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는다.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를 근거로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세대에게 끝없이 변하는 모습으로 다가가는 그런 복음의 공동체의 출현을 고대한다. [주]1. Lamin Sanneh. Translating the Message: The Missionary Impact on Culture, Maryknoll, NY: Orbis Books(1989), 211쪽. 2. Lamin Sanneh, “Reflections on the comparative history of translation in Islam and Christianity,” Unpublished(2007). 3. 앤드루 월스. 세계 기독교와 선교 운동, 방연상 옮긴, 서울: IVP(2018), 29쪽. 이 글은 또한 Walls, Andrew F. Wal. 2000.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An interview with Andrew Walls,” Christian Century, August 2-9을 참고했다. 앤드류 월스의 원리적인 접근은 앤드루 월스의 위 책, 75-104을 참고하라.4. 팀 켈러.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복음주의의 쇠퇴.”
번역가능성
번역성
복음과문화
선교화문화
성경과코란
성육신
팀 켈러: 후기 기독교 시대,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by 고상섭
2022-03-28
팀 켈러는 소책자 How to reach the west again에서 기독교에 적대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교회가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한다. (이 소책자는 redeemercitytocity.com에서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또 오는 4월에 ‘후기 기독교 사회를 말하다’(가제, 두란노)로 역간될 예정이다.) 오늘날 복음전도가 어려운 이유먼저, 팀 켈러는 오늘날 복음전도가 어려운 이유에 대해 절대 진리에 대해 믿지 않는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이라 진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 내러티브가 디지털 문화 속에서 더욱 확장되었다고 지적한다. 셰리 터클은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에서 소셜미디어를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현실과 타인을 이해하는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진단했고, 이런 디지털 문화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또한 정치적 양극화 현상의 심화 역시 세속화의 과정이라 분석한다. 과거에는 하나의 미국이 공유하던 도덕이나 신앙관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함께 공유하는 도덕관이 없이 결집력만 갖춘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곳곳에 일어나고 있다. 이런 극단적 양극화 시대에 교회가 휩쓸려 진보와 보수로 나뉘는 것도 복음전도에 큰 방해물이 되었다. “선교적 만남”을 위한 여섯 가지 요소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문화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 팀 켈러는 오늘날과 비슷하게 기독교가 적대적이었지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던 1세기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 이 시대에 “선교적 만남”(Missionary Encounter)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섯 가지 ‘선교적 만남’의 요소를 소개한다. 첫 번째 요소: 기독교 변증 지금까지의 기독교 변증은 성경을 증명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변증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문화가 그 자체로 모순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고 켈러는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하나님의 도성’도 복음을 통해 이교 문화의 근간을 비판하고 그 모순을 드러낸 작품이었다.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중립성, 객관성, 보편성 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복음을 증언하기 전에 선행해야 한다고 팀 켈러는 말한다. 후기 현대성은 인간의 삶을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고, 자유는 커지는 것 같지만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의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찰스 테일러는 ‘불안한 현대 사회’에서 오늘날 서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개인주의라고 밝혔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쾌락과 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생의 의미란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대의를 만날 때 충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쾌락과 만족을 절대시하기 때문에 결국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된다,영국에서 인도로 돌아온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 교회의 쇠퇴를 보면서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성경보다 인간의 이성이 더 권위가 높아진 계몽주의 이후의 시대에는 ‘계몽주의 이성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또 세상의 문화적 모순을 드러낼 때 성경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비기독교 학자들의 사상을 통해 비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다고 팀 켈러는 조언한다. 두 번째 요소: 역동적으로 복음 전하기 이전 시대는 진리와 사후 세계 같은 전제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령 사영리 전도지를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물질주의와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성경적 세계관과 동떨어진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오늘날 기독교와 비슷한 시기였던 초대 교회 공동체를 보면 적대적인 문화 속에서도 어떻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대 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증언했을까? 먼저, 초대 교회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목하고 매력을 느끼도록 했다. 또 사람들이 기독교에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기독교적 가치를 설명해 주었으며,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복음으로 이끌 만큼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했다. 세 번째 요소: 세상의 통념을 바꾸는 사회적 비전 초대 교회는 세상에 대항하는 문화 공동체였다. 배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초대 교회는 여러 민족과 인종이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였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데 헌신한 공동체였다. 타인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때 보복을 해야 하는 문화와는 달리, 용서를 추구하는 공동체였다. 생명을 경시하여 유아살해와 낙태가 흥행하던 시대에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한 공동체였다. 성 윤리에 대해 세상과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던 공동체였다. 이런 초대 교회의 반문화적인 삶은 잘못된 문화 속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쳤고, 어려운 시기에 부흥을 맛본 원동력이 되었다. 네 번째 요소: 디지털 세대를 위한 대항 교리교육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마 5:21)고 말씀하신 다음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 5:22)고 하시면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대조되는 가르침을 전하셨다. 오늘날 교회도 이런 패턴을 따라 대항적 교리교육이 필요하다. 종교개혁 시대의 교리교육은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의미도 있지만, 당시 문화였던 로마가톨릭의 오류를 드러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교리교육은 그 자체로 대항문화 운동의 형식을 띈다. 올바른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만이 아니라 당시 지배적인 세계관을 해체하는 작업을 함께 수행할 때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오늘날의 교리교육도 단순히 이전의 교리들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유행하는 세속주의 문화에 반대하는 명확한 교리들을 제시해야 한다. 단순히 교리적 내용을 아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내러티브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교리를 교육해야 한다. 또한 교리는 도덕적 삶의 일부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통해 삶의 열매를 맺는다. 왜 선해야 하는가? 무엇이 선한가? 무엇이 선하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뿐이다. 그리고 그 성경을 통해 사고하고 생활하는 성경적 세계관이 우리를 도덕적 생태계 안에서 살아가게 한다. 삶의 변화는 말씀 안에서 순종하려고 하는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다섯 번째 요소: 공공 영역에서의 신실한 현존 제임스 헌터의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에 등장하는 개념인 ‘신실한 현존’은 세상 문화를 지배하려는 승리주의, 세상 문화와 타협하는 동화, 세상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회피가 아니라, 세상 속에 머물러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이러한 삶은 예수님이 말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삶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실하게 지키면서 타인을 섬기는 삶을 말한다. ‘신실한’이라는 말에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문화 속에 남아 있되 성경의 가르침에 진실하게 반응한다는 의미이다. 여섯 번째 요소: 복음의 은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은 종교가 아님을 알려주어야 한다. 많은 교회의 참된 부흥에는 언제나 복음의 재발견이 선행한다. 종교는 늘 자신의 행위에 기초하지만, 복음은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한다. 행위는 늘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만, 복음의 은혜는 구원받은 감격을 누리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게 한다. 랭던 길키의 ‘산둥 수용소’에는 영화 ‘불의 전차’로 유명한 에릭 리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수용소에서 시간이 지나면 종교적인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비슷해져 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에릭 리들은 다른 수감자들을 돌보았고 성경과 과학 수업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고 게임과 댄스파티를 준비하기도 했다. 에릭 리들의 희생적 삶을 통해, 랭던 길키는 종교적 신앙과 복음적 신앙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고 인간 이성의 허망함과 복음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팀 켈러는 이 작은 책을 통해 우리를 격려한다. “후기 기독교 시대에는 아직 한 번도 기독교 부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일은 전례 없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후기기독교사회
포스트모더니즘
복음전도
선교적만남
후기계몽주의
기독교변증
교리교육
대항문화
목사님, 선교사들에 대해 아십니까?
by Elliot Clark
2022-03-10
나는 정기적으로 전국 곳곳에 있는 목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가 나눈 대화에서 분명한 한 가지는 지난 2년은 목사들에게 특별히 힘든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코로나 방역 규칙과 인종 갈등, 정치적 분열이 교회 모임들 안에 혼란을 뒤섞어 놓았다. 목사들은 교인들 가운데서도 쓰디쓴 잔을 마셔야만 했다. 그러나 이외에도 내가 목사들과의 대화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도 2020년 이전에 말이다. 자기 교회 선교사들에 대해 잘 모르고 그 선교사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목사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내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무지는 지난 2년 동안 발생했던 이슈들을 포함한 많은 스트레스만큼 골칫거리이거나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목사들이 선교사에 대해 모른다면목사들이 그 교회가 후원하고 파송한 사역자들에 대해 알지 못할 수도 있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어떤 목사들은 그들의 직책을 처음으로 맡아본다. 목사들은 마치 신임 프로 미식축구팀 코치가 현재 자기 팀에 속해 있지 않는 스카우트 후보 선수 명단을 넘겨받는 것처럼 자기 교회 선교사 명단을 넘겨받는다. 그래서 같은 단체에 속해서 지원을 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사역하고 있는 그 선교사들을 목사가 만날 일은 거의 없다. 또 다른 경우, 목사들과 장로들이 선교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선교의 비전과 선교사 후원에 관한 행정 업무를 교회 내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업은 특별히 교회가 현장의 여러 사역자들을 관리하고 그들의 후원과 요구들을 처리해야 하기에 이해할 만한 일이다. 미식축구 비유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면, 코치는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을 개발하고, 구단 사무실은 미래에 뛸 선수들을 발굴하는 사람들을 직접 감독하는 데 더 적합하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는 이러한 사역 분업이 사실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방식이 교회의 가장 전략적인 사역으로부터 목회자를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장로들은 사실상 교회의 중요한 직원 채용을 심사하는 과정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목사가 새로운 동역자를 찾는 데 관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교회의 일선 사역을 위해 교회가 승인한 대표자들을 위임하는 절차에 관여하지 않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선교사를 선발하고 파송하는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선교사들을 잘 알고 돌보는 목회자라도 반드시 선교 사역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선교에 관한 책들을 거의 읽지 않는다. 그들은 선교학 경향을 파악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교사 파송단체나 그 단체의 신학에 대하여 알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 단체들이 지지하는 주요 방법론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목사들이 이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선교사역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위임해야 할 것이지만, 그래도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선교학의 현황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오늘날 타문화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공통된 우선순위 중 하나는 ‘평화의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 사람은 신자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평화의 사람’이 선교사와 지역사회의 어떤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호의적이라면, 그의 영향력을 수단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개할 수도 있다. 그들의 도움으로 선교사들은 가르침에 순종하기로 결심한 그룹의 사람들을 모을 수 있게 되고 그런 그룹을 종종 교회, 아니면 최소한 새로운 제자들이라고 간주하게 된다.또 한 가지 선교사들이 취하는 전략은 이러한 모임이 생겼을 때 되도록 선교사 자신은 발을 빼는 일이다. 애초부터 지역 주민들이 모임을 주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알아가는 것을 권장한다. 실천적인 면에서 이것은 ‘교회’가 권위 있는 가르침이나 내려온 전통에서 크게 떨어져 있던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고 주도되고 구성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세워진 모임의 사람들이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따르지 않더라도, 선교사의 부재로 인해 그 선교사는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더욱이 그러한 그룹이 역사적인 교회의 (또는 다른 현지 교회의) 믿음과 믿음의 실천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도, 선교사들이 개입하여 ‘서양적’ 견해를 부과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선교사가 주도적 위치에서 아예 이끌고 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 사람들이 자신의 방법들을 개발하도록 적극적으로 격려할 수도 있다. 거기에는 새로운 “제자들”이 이전의 종교적 관습(가령, 조상에게 공물을 바치거나 모스크에 참석하는 것)을 계속하는 행동을 선택하는 것도 포함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선교사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의 감수성을 수용하기 위해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예를 들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는 것을) 피하는 성경 번역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일부 목사들은 충격을 받는다. 그들은 선교 실천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이론에 대해서는 훨씬 더 모르고 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무지를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목사들이 사역지에 제공되고 있는 다양한 모델들을 다 따라잡기는 어렵다. 선교사들이 이런 모델 중 어떤 것을 선택할 때 끝도 없이 일어나는 반복은 말할 것도 없다. 순종 기반 제자도나 디스커버리 바이블 스터디, 제자 삼기 운동, 또는 내부자 운동과 같은 다양한 모델들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사들이 이런 현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선교 방법론을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런 것들이 오늘날 거의 모든 주요 파송 단체의 선교전략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지기 우리가 비유로 사용하며 상상한 그 축구코치가 오직 현재 선수들에게만 관심을 둔 것은 아니라고 가정해 보자. 그가 조직 내에서 우수한 스카우트 선수를 확보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식으로 단순히 유능한 대표자들(선교사들)을 발굴하고 고용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그 대표자들이 어떻게 일을 수행해야 하는지, 특히 확보할 장래 선수들을 위한 우선순위들과 방법들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 목사들 외에도 나는 정기적으로 전 세계 선교사들과도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젊은 해외 사역자들로부터 본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선교단체에 의해 지지받는 전략적 선교 접근법에 대해 훈련시켜 주었더라면 하는 말들을 듣는다. 그들이 그러한 방법론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거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그들이 관찰하는 것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행해야 하는 것에도 깊은 염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나는 그들이 믿는 성경과 양심에 반하는 방법을 선택하도록 강요당했기 때문에 사임한 여러 선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지 최신 유행하는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른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아예 여기에 포함시켜 말을 시작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이 선교사들을 파송한 교회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목사들은 종종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다음 세대 해외 사역자들을 돌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다. 개별 교회와 장로들은 선교 사역에 더 많은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첫째는 배움으로, 둘째는 인도함으로 말이다. 전 세계적 기회에 참여하기목사들이여, 이것은 당신에게 놀라운 기회를 제공하다. 선교사들을 선택하고 파송하는 데 더 큰 책임을 짐으로써 모든 교회가 공유하는 전 세계적 임무에 필수적인 역할을 회복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장래의 교회와 당신의 후원을 받는 사역자들을 오류로부터 보호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선교학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당신은 단지 성경을 잘 알고, 선교사를 알고, 그리고 널리 퍼진 선교 방법론에 대해 배우기를 힘쓰면 된다. 복음사역과 그에 따른 도전이 문화와 국경을 건너갈 때마다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이 목사로서 선교사들이 그들 앞에 놓인 어려움을 헤쳐 나갈 때 도움을 제공할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선교사들도 지난 2년 동안 당신에게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자 이제 당신이 선교사들을 알아가야 할 시간이다. 원제: Pastor, Do You Know Your Missionarie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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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여, 우리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by Doug Coleman
2022-03-04
‘오늘날 타문화 선교에서 가장 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전문성이라고 대답할 선교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무슬림 베테랑 선교사 맷 로즈(Matt Rhodes)에게 전문성은 첫 번째 덕목이다. ‘성공에 지름길은 없다: 현대선교를 위한 선언문’(No Shortcut to Success: A Manifesto for Modern Missions)에서 로즈는 오늘날 선교사들이 전문적이지 않기 때문에 현대 선교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로즈의 주장이 특히 존 파이퍼(John Piper)가 쓴 ‘형제여,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다’(Brothers, We Are Not Professional, 우리말 역간 서명은 ‘나의 목회자 형제들에게’)를 읽은 사람들에게는 도발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파이퍼는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문가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영적 죽음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럼 로즈는 파이퍼의 이런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 둘은 전혀 다른 문제일까? 부적절한 전략로즈가 제기하는 문제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선교 공동체가 기존에 감당하던 영역 중에서도 특히나 적절한 신학 훈련, 언어와 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 그리고 교사의 역량 강화와 같은 선교 과업에 꼭 필요한 특정 요소를 점점 더 최소화해 왔다는 점이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이 “전문 기술”(technical skills)을 습득하는 데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지 않는다. 빠른 선교 결과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한 특정한 가정에 근거해 동기부여를 일으키는 새로운 방법론은 신학 훈련과 같은 과정을 계몽되지 않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일 뿐만 아니라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하나님의 빠른 역사하심을 방해하는 유해한 장애물이라며 오히려 대놓고 거부한다. No Shortcut to Success: A Manifesto for Modern Missions 성공에 지름길은 없다: 현대 선교를 위한 선언문매트 로즈선교사들에게 기록적인 선교 결과를 약속하는 최신 유행에 근거하는 새로운 선교 전략은 사방팔방에 널렸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서 폭발적인 숫자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갔다는 보고가 있음에도, 그런 주장은 종종 모호할 뿐 아니라 교회에 남아 있는 신자나 교회의 건강을 보장하는 데 거의 기여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교회와 선교사가 빠른 해결책이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미전도종족 선교라는 지금의 이 긴급한 필요성에 대처할 수 있을까?이 책의 저자이자 선교사인 매트 로즈는 특효약 전략(silver-bullet strategies)과 단기 선교를 쫓는 것을 그만두고, 그 대신 신학적으로 강력하고 역사적으로 입증된 전도와 제자도의 방법을 받아들이라고 간청한다. 그것이이야 말로 바로 윌리엄 캐리와 아도니람 저드슨과 같은 위대한 선교사가 쓴 방법이다. 그들은 결코 전도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외국어를 마스터하고,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현대 선교사들이 최소한의 훈련과 빠른 개종을 강조하는 것이 결국에는 그들이 돕고자 하는 지역사회에 오히려 해를 끼치는 잘못된 전도를 초래할 수 있다고 로즈는 설명한다. 그는 또한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미명 하에 개인의 기술과 노력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고 경고할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전도 집단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성경적인 단계를 제시한다. CROSSWAY. 272 PP. 로즈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방법론은 데이비드 개리슨(David Garrison)이 대중화한 CPM(Church Planting Movement), 데이비드 왓슨(David Watson)의 DMM(Disciple-Making Movement), 그리고 스티브 스미스(Steve Smith)와 잉 카이(Ying Kai)의 Training for Trainers(T4T)와 같은 운동 중심 접근 방식이다. 비록 객관적 증거를 주장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로즈는 핵심 출처를 올바르게 식별했을 뿐 아니라, 선교 공동체에서 그 방법론이 끼친 영향력까지 올바르게 평가했다. 나의 풀타임 선교사 경력은 CPM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던 1998년에 시작되었다. 현장에서 이십 년 이상 활동한 지금 되돌아 볼 때, 운동 중심의 접근 방식은 자연스럽게 많은 영역에서 정통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이 책의 제1부는 운동 중심 접근 방식의 1차 자료와 깊이 상호 작용한다. 로즈는 취소 문화 무시(cancel-culture dismissal)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과 소셜 네트워크로부터 개종자 개개인을 끌어내는 것보다 광범위한 복음 선포, 귀납적 성경 공부, 그리고 공동체 전체에게 다가가기와 같은 주제에 관심에 표현하는 운동 중심의 접근 방식에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로즈는 성경에 비추어 이런 방식이 가진 두드러지고 우려를 자아내는 요소에 관한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숫자에 대한 집착, 신속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 훈련된 교사의 역할 최소화 또는 무시, 전도의 전제 조건으로 “평화의 사람” 찾기, 순종 기반 제자도, 그리고 새로운 신자나 심지어 비신자까지도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 배치하는 것 등이다. 로즈는 출처를 정확하게 표기하고 또한 그로 인한 문제까지도 명확하게 밝히지만, 그렇다고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을 악마화하지 않는다. 전문성 옹호문제를 식별하고 비판하는 것과 해결책을 제안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로즈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이 책의 대부분 내용은 선교의 “전문성”에 대한 긍정적이고 성경적인 비전과 변론이다. 즉, 선교 임무를 잘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시간과 자원을 바치라는 것이다. 선교사는 인도주의적 필요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우리의 주요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데에 있다(고후 5:20).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리가 가진 주요 소명은 의사소통, 특히 복음 메시지와 복음 속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의사소통이 명확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또한 담대해야 한다. 이 점은 특히 선교사가 언어와 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는 점에 관해서 큰 의미를 가진다. 복음이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죽음이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거나 또는 우리가 지은 죄가 왜 예수님의 죽음까지 요구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런 복음 선포는 궁극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복음의 메시지가 명확해지고 듣는 자가 복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 그때부터 질문은 쉬지 않고 계속된다. 여러 명의 아내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족을 빼앗긴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을 함께 예배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질문자의 이면에 깔린 세계관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작업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행여나 언어와 문화 학습에 대한 선교사의 헌신이 당연한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면, 로즈는 일단 현실을 점검하라고 제안한다: “너무 많은 선교사들이 유창한 언어와 별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확실한 도우심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유창한 언어 습득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A 선교사가 미전도종족 B 가운데로 들어가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전도했다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서 그런 역사가 가능했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는다”(150-51).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심도 있는 언어 및 문화 학습이 주는 힘들고 훈련된 작업과 같은 일반적인 수단까지 다 배제하고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로즈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런 이야기뿐 아니라 선교사가 “평범한 수단”에 투자하지 않는 다른 다양한 이유를 많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주님이 주신 사명이 너무 시급해 언어 및 문화 학습에 쓸 시간이 없다. 따라서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 중에서도 영어가 가능한 사람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 선교사가 믿지 않는 사람이나 개종자에게 직접 성경을 가르치는 건 현명한 방향이 아니다. 선교사의 사명은 단순히 그들이 성경을 알게 함으로 성령님이 그들의 선생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선교사가 지역 교회 지도자들에게 해석학이나 역사 신학 같은 것을 가르치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는 말인가? 방향 수정방향 수정에 대한 로즈 제안의 핵심은 이 책의 8장에서 설명하는 열 가지 이정표의 경로이다. 이러한 이정표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각 이정표는 성경이 정의하는 선교 사명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꼭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선교사는 신학과 실제 기술에 대한 적절한 사전 훈련을 취득하고, 언어와 문화 학습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고, 복음을 명확하고 광범위하게 전달하고, 개종자를 제자로 삼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 지역 지도자를 훈련해야 한다. 그가 제시한 이정표가 가진 놀라운 점은 이전 세대에서는 거기에 관해 아무런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존 패튼(John Paton),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같은 선교사 개척자들이 추구한 길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이정표가 성경적 우선순위에 근거하여 균형 잡힌 확고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평범한 수단을 사용하신다는 사실과 그 방법을 독자가 적절하게 이해하고 제대로 인식하도록 반복해서 설명한다. 그럼 저자가 성령을 소홀히 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마지막 장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는, 지나치게 영적인 접근을 선호하는 이들의 시선을 바로잡을 방법을 제공한다. 그런 기적을 바라는 대신에 로즈는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정상적인 관계 및 노력해서 키우는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점에 근거해서 세운 전략에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가 쌓는 모든 능력도 다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고 기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또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이 없이는 갖출 수 없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은 직업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신자에게 중요한 진리이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이 책에 대한 다양한 반대 의견이나 비판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 내용은 상대적으로 미미할 것이다. 나는 동료 선교사들에게 이 책을 주의 깊게 읽으라고 강력히 권할 것이다. 그건 성경에 뿌리를 둔 길로 돌아가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이 단지 현직 선교사, 미래 선교사, 그리고 선교 지도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선교사 파송과 지원에 관련된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로즈는 파이퍼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파이퍼가 멀리해야 한다고 한 전문화는 예수에 대한 믿음 없이도 가능한 교육, 기술, 단체가 요구하는 수준 등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로즈가 강조하는 전문화는 선교사들이 성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지식과 기술의 습득이다. 로즈와 마찬가지로 나도 어떤 유행이 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볼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선교사로 사역해 왔다. 아마추어가 오히려 믿음 좋다고 각광받는 오늘날의 유행이 하루 빨리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로즈가 주장하는 것처럼, 타문화 선교에 관해서만은 단지 불타는 마음과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원제: Missionaries, We Must Be Professionals: Review: ‘No Shortcut to Success’ by Matt Rhod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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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선교사들에게도 밀려든 불안한 위협
by Rick Perhai
2022-02-15
우크라이나 수도 크이우, 여느 때처럼 잔뜩 흐리고 눈이 내리는 1월의 아침, 우리 아파트에서 크이우 신학교까지 1킬로미터를 걷고 있다. 교통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우리 아파트 주민들이 식료품점에서 5리터짜리 물 여러 병과 여분의 통조림 제품을 사서 돌아오고 있다. 도시 분위기는 더 조용해졌다. 신학교 형제들이 우리 가족도 다른 외국인들처럼 우크라이나를 떠날 것인지 알고 싶어 한다. 이게 모두 우크라이나의 북부, 동부, 남동부, 남서부 국경에 수천 대의 탱크와 대포로 무장한 채 금방이라도 침공할 태세로 주둔하고 있는 13만 러시아군 때문이다.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를 자기네 손아귀에 두려고 한다. 이들은 우크라이나가 나토나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협과 분열이 이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외교다. 2014년 2월, 러시아는 자국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이 끝나고 닷새 만에 우크라이나 최남단 크름반도를 침공해 “합병”했다. 어떤 나라가 미국의 플로리다와 조지아, 앨라배마 주를 강탈하는 것과 같을 것이었다. 그 이후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남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전쟁을 지루하게 끌어가고 있다. 이 지역에서만 1만 4,000명이 넘는 우크라이나인이 사망했다. 돈바스에서 러시아가 이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지역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주민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초 돈바스 지역에서 수백만의 우크라이나인이 대기근에 따른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스탈린 집권기 소비에트러시아의 고의가 의심되는 이 홀로도모르(우크라이나어로 “기아와 집단학살”을 의미한다) 이후, 많은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러니, 우크라이나인들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신자들과 교회들의 반응우크라이나인들은 다들 평화를 사랑한다. 현지 개신교인들도 분명히 그러한데, 이들 가운데 많은 교인들은 평화주의 메노나이트 재세례파에 뿌리로 두고 있다. 그러나 침공, 쇼핑몰과 지하철 폭탄 테러, 주 정부 웹 사이트 해킹 및 교란, 도시 정전, 그리고 전면전을 암시하는 최근의 우크라이나 접경지대 전력 배치 같은 러시아의 일련의 도발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내고 있다. 더욱 커진 우크라이나인들의 단결이 그것이다. 놀랍게도 그리스도인 바부슈카(나이든 여성)들도 러시아의 압력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비교 자체가 힘들 정도로 강한 적에게 맞서기에는 너무나 미미한 저항일 터이나, 이들이 나에게 용기를 준다. 이곳 신자들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지 않고 그 상황에 참여하고 또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시작했다.아내와 나를 여기 우크라이나에 머물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교회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작은 무리의 교인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 남아 있다. 우리는 힘들 때나 좋을 때나 이들과 함께 걷고 있다. 나를 신학교에 계속 사역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불확실한 시간 가운데서도 배우기를 열망하고 성경 주해와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신학을 삶에 적용하기를 원하는 우크라이나의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석사과정에 있는 내 학생, 안드리는 우크라이나에 교단연합 선교사 파송 기관을 세우는 일을 돕고 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우리가 2001년 처음 우크라이나에 왔을 때 우크라이나 교회 한 집사님이 우리가 섬기던 우크라이나 개신교회들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을 “위대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그 비전이 이제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또 다른 제자 올레는 우리 신학교의 군목 학사 프로그램 책임자로 섬기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이수한 졸업생들이 러시아와 정면 대치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에서 군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들 중 몇몇이 돈바스 지역에서 목숨을 잃었다. 세 번째 학생 세르히는 3개월 후에 교회개척 사역자로 그리스에 파송될 것이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 한가운데서도 복음의 사역이 계속되고 있다. 2014년 4월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켰을 때, 교회 건물들이 조직적으로 폐쇄되거나 파괴되었다. (러시아정교회 건물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공항도 폐허가 됐다. 도네치크에 있는 한 개신교 신학교는 군용으로 징발됐다. 돈바스 지역의 많은 우크라이나 시민들과 신자들이 모든 것을 잃었다. 돈바스에서 교회개척 사역을 하고 있던 우리 졸업생 티모피는 온 가족이 옷가지만 챙긴 채 크이우로 철수했다. 그리고 지금은 돈바스에서 탈출한 난민을 돕는 사역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우크라이나 서부에 있는 교회들이 다른 지역에서 희망을 찾아 이주해 온 난민들에게 교회 건물과 가정을 개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불확실한 시대의 희망그러나 이 나라가 평안을 누렸던 적이 거의 없다는 게 현실이다. 우크라이나는 수 세기에 걸쳐 티베트 몽골 제국, 폴란드, 리투아니아,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로부터 수도 없이 많은 침략과 점령을 당했다. (‘우크라이나’라는 이름 자체가 국경지대라는 뜻이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위기는 일상이 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이 파괴적인 정치 상황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이 유일한 피난처,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심을 알게 하였다(시 46:1). 오직 여호와만이 우리의 힘과 안전이 되신다. 조약을 맺은 다음에 돌변하여 파괴하려 드는 나라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은 불안하고 불확실하다. 우리 미국인들은 불안을 잘 견뎌내지 못한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삶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안정과 안전, 기본적인 의료보험이나 생명보험조차도 없지만, 우크라이나 신자들은 함께 서로를 지지해 주며 질병과 슬픔과 죽음의 시간을 이겨내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가족이다. 우리 가족은 우크라이나에서 선교사 훈련의 기회가 언젠가는 닫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날이 바로 코앞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형제자매들은 이처럼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시기에 어떻게 믿음과 희망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살아 있는 증인들이 마치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러시아 군대가 둘러싸 위협하는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것이다. 이 글에 등장하는 우크라이나 현지 신자들의 이름은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가명으로 대체했다. 원제: The Ominous Threat Surrounding Missionaries in Ukrain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관련 기사•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기착지가 되어 주는 교회들•우크라이나 난민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폴란드 교회•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남아서 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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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전쟁
2022년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위험한 국가들
by Joe Carter
2022-02-11
2021년 한해 3억 6,000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나라에서 심각한 박해와 차별을 받았다. 이 가운데 6,175명이 재판도 받지 않은 채 구금되거나 체포·투옥되었으며 3,829명이 납치되었고, 5,898명이 신앙을 이유로 살해되었다.오픈도어선교회의 월드와치리스트(World Watch List)는 지난 30년 동안 국가별 기독교 박해 현황을 추적하여 인권 및 종교 권리를 침해하는 국가들에 대한 세계적인 지표를 제공하면서 이러한 국가들은 사회 안정 측면에서 취약한 국가임을 강조해 왔다.미국 오픈도어선교회 대표 데이비드 커리(David Curry)는 “기독교 박해 보고서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이 문제는 그 자체로 정말 심각하기 때문이다”라며 “그렇지만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표적으로 삼아 왔다. 이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으며 더욱 교묘해 지고 있다”고 전한다.2022 세계 기독교 박해 보고서 ‘월드와치리스트’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가장 심한 국가는 아프가니스탄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최악으로 손꼽혔던 북한을 처음으로 이 나라가 앞질렀다.이어서 기독교 박해 상위 10개국과 각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기도 제목을 나누고자 한다(오픈도어선교회의 2022 기독교 박해국가 순위 인용).1. 아프가니스탄박해 요소: 탈레반의 이슬람 신정 정치그리스도인 수: 수천 명으로 추정박해 양상: “탈레반은 이슬람 체제 및 관습을 실행하고 유지할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 개종자들도 이들을 따르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만약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이 발각되면, 개종자의 가족이나 친족, 종족은 그와의 관계를 끊거나 심지어 죽여서라도 이슬람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정의다. 그들은 또한 이슬람을 떠나는 것을 정신병 징후로 여겨 기독교 개종자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키기도 한다.”기도 제목: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밀리에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탈레반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2. 북한박해 요소: 공산주의의 탄압 및 공산주의와 상관없는 탄압그리스도인 수(추정): 40만 명박해 양상: “예수님을 따르다 붙잡힌 북한 성도는 즉시 투옥되거나 잔인한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기도 제목: “기근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고통 받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3. 소말리아박해 요소: 친족의 탄압그리스도인 수: 수백 명으로 추정박해 양상: “소말리아의 소수의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이슬람에서 개종했으며, 급진 이슬람 단체의 주요 표적이 되고 있다. 극단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가족과 지역사회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는다.”기도 제목: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의 표적이 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소망을 주시기를.”4. 리비아박해 요소: 이슬람의 탄압그리스도인 수(추정): 3만 4,600명박해 양상: “리비아에서 이슬람을 떠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면 가족으로부터 기독교 믿음을 포기하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는다. 이웃과 지역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노숙자가 되거나 실직할 수 있으며 홀로 남겨질 수도 있다.”기도 제목: “리비아 정부는 10년 동안 불안한 상태에 있다. 이 나라의 안정화와 법치를 위해.”5. 예멘박해 요소: 친족 탄압그리스도인 수: 수천 명으로 추정박해 양상: “예멘에서 그리스도인 박해는 몇 년 동안 매우 극심해 2022년 기독교 박해 국가 순위에서 2단계 상승했다. 이슬람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탄압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최고 수준이다.”기도 제목: “예멘은 내전이 1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이 땅의 평화와 안정, 종교의 자유가 열리기를 위해.”6. 에리트레아박해 요소: 기독교 특정 교파의 교권주의그리스도인 수(추정): 261만 1,000명박해 양상: “에리트레아는 인구의 거의 절반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신자들은 극심한 박해에 계속 시달리고 있어 전 세계에서 예수님을 따르기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이들이 인정하는 특정 교파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심한 박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수감된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게 된다.”기도 제목: “하나님께서 이슬람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과 정교회 외의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해 주시기를.”7. 나이지리아박해 요소: 이슬람의 탄압그리스도인 수(추정): 9,800만 6,000명박해 양상: “나이지리아의 박해는 한마디로 매우 잔인할 정도로 폭력적이다. 나이지리아 북부 많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보코하람, ISWAP(이슬람국가 서아프리카 지부), 풀라니 등의 무장 세력과 범죄자들의 납치와 살인의 지속적인 위협 아래 살아 가고 있다. 그 폭력성은 말로 다 할 수 없으며 이는 남부로도 뻗치기 시작했다.”기도 제목: “나이지리아의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무장 단체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시기를.”8. 파키스탄박해 요소: 이슬람의 탄압그리스도인 수(추정): 408만 명박해 양상: “파키스탄에서 그리스도인은 2등 시민으로 취급되어 모든 생활에서 차별을 받는다. 당국의 지침을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될 수도 있다.”기도 제목: “납치되어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슬람 남성과 결혼하는 여성과 소녀들을 위해.” 9. 이란박해 요소: 이슬람의 탄압그리스도인 수(추정): 80만 명박해 양상: “이란에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박해의 심각성은 큰 변화 없이 지속되고 있다. 이슬람에서 개종한 사람들은 특히 정부에 의한 박해와 사회, 가족에 의한 박해가 큰 위험 요소이다.”기도 제목: “이란의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이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도록.”10. 인도박해 요소: 힌두 민족주의그리스도인 수(추정): 6,886만 3,000명박해 양상: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의 박해가 심해지고 있다. 인도의 극단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소수 종교인들을 진정한 인도인으로 여기지 않으며, 힌두교를 믿지 않는 나라를 척결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로 인해 이들은 소셜 미디어에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혐오를 조장하는 등 조직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그리스도인과 다른 소수 종교인을 표적으로 삼는 행위를 일삼는다.”기도 제목: “종교적인 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이 치유되기를 위해, 그들의 몸과 마음이 모두 회복되도록.”2018년부터 현재까지 기독교 박해 국가 현황을 비교해 볼 수 있다: 2021, 2020, 2019, 2018원제: The Countries Where It’s Most Dangerous to Be a Christian in 2022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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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박해보고서
장기 선교사를 계속 파송해야 하는 이유 세 가지
by Lloyd Kim
2022-01-14
예배드리고 나올 때 예배당 출구에 “당신은 이제 당신의 선교지로 향합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교회를 본 적 있는가? 자기가 살아가는 지역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해외 선교만 선교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로잡는 올바른 구호이긴 하다.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지역사회에서 은혜의 복음에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이 해외 선교의 중요성을 약화하는 말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여기서 장기 선교사를 계속 파송해야 하는, 특별히 글로벌 팬데믹 상황에서, 세 가지 이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1. 자원의 압도적 불균형 때문이다.첫째는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미전도 지역이나 소외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영적 인력 자원의 지나친 불균형이다. 전 세계에 550만 명의 풀타임 사역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통계 몇 가지를 살펴보자. • 사역의 75.9퍼센트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인구가 다수이거나 상당수인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사역의 23.7퍼센트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인구가 2퍼센트 이상인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사역의 0.37퍼센트만이 미전도 지역, 곧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인구가 2퍼센트 이하인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증인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곳에서 사역할 최고의 능력을 갖춘 현장 선교사, 캠퍼스 사역자, 제자훈련 사역자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 소수인 지역에 가는 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전도 그룹의 사람들을 섬기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왜 그럴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교회들, 자원들, 관계들, 그리고 멘토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미전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평생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도 만나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제자가 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2. 우리는 세계인이 한 가족인 세상에 살고 있다. 세계인이 이제 한 가족이기에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한다. 그리고 미전도 지역에서 섬기고 있는 형제자매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일본 치바에 있는 오유미노 그리스도 교회의 테츠야 데다치 목사는 일본 인구 1억 2,500만 명 중 99.9퍼센트가 비신자이며, 그들 대부분이 성경을 모른다고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었다. 테츠야 목사는 미국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에게 기도해야 하며 선교사들을 전 세계에 파송해야 한다고 도전한다. 현지 일본 목회자를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본에는 전국에 복음을 전할 목사는 고사하고 그리스도인조차도 부족하다. 이는 전 세계 다른 미전도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에 나와 있는 우리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를 진정으로 믿고 있는가? 또한 성도의 교제를 믿고 있는가? 이 신앙고백을 할 때 우리는 일본, 인도, 중국, 방글라데시, 태국, 시리아, 이란, 이라크, 그리고 서아프리카의 신자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전 세계의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선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신 것처럼 복음이 가장 소외된 지역에서 우리의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적절한 시기이다. 코로나19가 도움이 필요한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긍휼과 자비의 사역을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았다. 예를 들면, 서아프리카에서는 코로나19 봉쇄 조치로 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고, 그로 인해 많은 가정들에게 식료품이 부족하다. 이에 우리 선교사들과 국가 파트너들은 쌀과 식용유, 기본 위생용품을 지역사회에 나누어 주면서 복음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가졌다. 복음은 또한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나아가고 있다. 서아프리카 목회자 4명이 돌아가면서 설교하는 유튜브 채널을 매주 1,000명 정도가 시청하고 있다. 인구의 95퍼센트가 이슬람인 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고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 미전도 지역 및 복음 전파가 더딘 지역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묻고 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인간의 죽음과 연약함을 마주하고 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갈급한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고 나누어야 할 때이다. 3. 주님이 주신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하셨기에 간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존귀하게 되는 것을 보길 원한다. 주님께서 교회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구속적 목적을 성취하시려는 왕이신 주님의 계획이다.전 세계에는 6,741개의 미전도 그룹이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인구의 2퍼센트 미만일 때 미전도 그룹이라 정의한다. 이 6,741개 그룹은 세계 인구의 42.2퍼센트, 31억 4,000만 명에 이른다. 1퍼센트 미만의 풀타임 사역자들이 이 미전도 그룹을 위해 사역하고 있다. 캐나다인 목사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J. Smith)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설교하지만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초림에 대해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왜 장기 선교사를 파송해야 하는가? 단지 자원이 지나치게 불균등하게 배치되어 있어서만이 아니다. 단지 전 세계의 형제자매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보냄 받으신 우리 주 예수께서 모든 나라에 가서 제자 삼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원제: 3 Reasons We Must Continue to Send Long-Term Global Missionarie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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