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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1) ‘세계’
by 문대원
2024-03-13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인천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세계 선교를 위한 글로벌 플랫폼으로서 로잔 운동의 비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네 개의 키워드가 필요합니다. 바로 (1) 세계 (2) 복음주의 (3) 선교 (4) 운동이라는 키워드입니다. 앞으로 총 4회에 걸쳐서 각각의 키워드가 가진 신학적, 선교학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은 “세계”라는 키워드를 살펴보겠습니다. 세계(world)는 기독교 복음의 보편성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만을 위한 좋은 소식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세계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좋은 소식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기 위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창 12:3).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시내 산에서 선포된 율법의 전문(前文)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온 세계는 하나님께 속했으며, 그분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하는 책임을 받았습니다(출 19:5-6).기독교 복음의 보편성은 성경이 기록된 방식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는 그 경전이 창시자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슬람의 경전 쿠란은 무함마드가 사용했던 아랍어로 기록되었고, 유교의 경전 십삼경(十三經)은 공자가 사용했던 중국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셨지만,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세계 모든 종교 중에서 유일하게 창시자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기록된 경전입니다. 헬라어는 신학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언어가 아니라,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의 공통어(lingua franca)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 복음은 처음부터 다른 언어로 표현되고 번역되었는데, 이는 기독교 복음이 특정한 언어와 문화에 뿌리내린 진리가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민족을 위한 보편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서 예일 대학의 라민 사네(Lamin Sanneh) 교수는 “성경 번역은 교회의 태생적 특징(birthmark)이자, 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benchmark)이다. 왜냐하면 자국어 성경 없이는 현지 교회가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다른 종교와 대비되는 기독교의 또 다른 특징은 기독교에는 다수의 중심(center)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모든 종교에는 특정한 지리적 중심이 있습니다. 가령, 이슬람의 중심은 메카이고, 유대교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힌두교의 중심은 인도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다수의 중심을 가진 다중심적(polycentric) 종교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로마를 중심 거점으로 해서 발전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콘스탄티노플, 캔터베리, 비텐베르크, 취리히, 제네바 등 여러 지역이 기독교의 중심 역할을 감당했습니다.앤드류 월스, 필립 젠킨스, 데이나 로버트와 같은 세계 기독교학자들은 기독교 복음이 한 방향이 아니라 다방향(multi-directional)으로 전파되었다고 분석합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를 상세하게 살펴보면, “복음의 서진(西進)”이나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과 같은 단순화된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선교 운동이 있었습니다. 일례로,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북미 대륙에 도착하기 1세기 전에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들은 인도와 일본, 중국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세계 여러 지역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하였고, 복음을 위해서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경계를 넘어갔던 수많은 선교사의 헌신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글로벌 신앙 운동이 되었습니다.1974년에 시작된 로잔 운동은 당시 부상하던 세계 기독교의 현실을 자각하며 비서구권 교회의 선교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주목했습니다. “선교의 새 시대가 동트고 있음을 우리는 기뻐한다. 서방 선교의 주도적 역할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하나님은 신생 교회들 중에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위대하고도 새로운 자원을 불러일으키신다”(로잔언약 8항). 국제로잔위원회는 리더십 구성과 참가자 선정에 있어서 현재 세계 교회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의 프로그램 위원장은 홍콩 출신의 패트릭 펑(Patrick Fung, 국제 OMF 대표)이 맡고 있으며, 다수의 아시아 선교학자와 선교 리더들이 신학 위원회와 프로그램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번 로잔대회를 통해서 세계 기독교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일터의’ 보통 사람들
by 김선일
2024-03-12
얼마 전 딸아이가 급히 병원 응급실에 가는 일이 생겼다. 진단 결과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지만 빨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순서가 되는 대로 수술 시간을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종합병원이 늘 그렇듯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다 큰 딸이지만 병원 측으로부터 아무 기별이 없다고 하니 부모 마음이 초조한지라 ‘따지러’ 갔다. 그냥 보이는 대로 응급실 데스크 앞에 앉은 간호사에게 물었다. “우리 애가 아파서 와서 하루 종일 기다리고만 있는데 수술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응급실에 더 늦게 온 사람들도 먼저 수술받으러 가던데요.” “어 그러시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님. 따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앳되게 보이는 간호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친절을 다해 응대한다. 아이의 이름을 입력해서 확인한 그녀는 자기가 모든 상황을 한 번 더 확인해서 알려주겠다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정중하게 말한다. 순순히 아이 옆으로 돌아가고 얼마 뒤, 그 간호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아버님, 제가 지금 담당 선생님에게 여기 환자분 상황이 급하다고 알려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더 급한 환자들이 있어서 그랬다고 곧 수술 일정을 잡아주시겠다고 합니다.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간호사의 정성어린 조치에 더는 정색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돌아간 간호사는 약 10분 뒤 다시 와서 묻는다. “환자분, 혹시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제가 지금 또 확인해 봤는데 수술을 위한 입원수속을 도울 선생님들이 오신다고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윽고 입원수속을 돕는 스탭들이 와서 병실로 이동하는데, 그 간호사가 나와서 “수술 잘 받으시고 잘 나으세요!” 응원을 한다. 나도 웃으며 고맙다고 화답하는데, 그녀의 자리에 놓인 (나는 식별할 수 있는) 큐티집이 보인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을 뿐 아니라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오래 전에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의 하나님이 부르신 보통 사람들이 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이 우리가 위대한 신앙의 선배로 추앙하는 이들은 원래부터 특출한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대하게 쓰신 보통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그 젊은 간호사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그리고 그녀가 아마도 좋은 신앙인이라는 추정하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터의” 보통 사람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근래 일터 사역, 일터 영성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신앙의 무게 중심이 교회와 주일에서 이제는 일상과 평일로 이동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상 중 가장 많은 관심과 에너지가 쏠리는 일터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런데 종종 일터 사역과 영성을 위한 모델은 평범한 일터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들보다는, 성공적인 기업인이나 선망할 만한 전문직 종사자로 채워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어느 모임에서 일터 사역 강좌를 인도하는데, 그날의 주제가 일터에서의 압박이었다. 이미 정해진 교재와 외국 저자의 동영상 강의가 주어진 나는 그 내용을 해설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일터에서의 압박이라는 아주 중요한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는데 사례로 나오는 이들은 모두 변호사들이었다. 기독법률가회 모임이라면 참으로 적절한 모델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더욱 평범한 일터에서 단순한 업무나 육체노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사례가 얼마나 와 닿을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사례로 나온 변호사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자신의 소명을 감당하는 이들이었다.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일터의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의 나라를 위해 쓰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일터 영성과 소명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찾아야 한다. 아니, 평범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터 신앙의 영웅이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일터 사역의 건강한 방향이자 가능성이라고 믿는다.언젠가, 집 앞의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순댓국 하나를 시키고 기다리는데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와서 반찬은 셀프라고 웃으며 일러주신다. 반찬 코너로 가니 따라오셔서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신다. “고추절임이 참 맛있어요. 꼭 한번 드셔보세요!” 별로 당기는 반찬은 아니지만 자상함에 몇 개 가져왔다. 식사하는 중간에도 오셔서 더 필요한 거 없냐고 물으며 챙기신다. 사실 혼자 외로이 밥 먹는데 뜻밖의 친절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계산을 하며 고요히 흘러나오는 음악을 자세히 들으니 익숙한 멜로디다. “요게벳의 노래!” 한 가지 예를 더 들겠다. 몇 주 전, 학교 신입생 면접을 한 일이 있었다. 비신학계열 학과에 지원하는 아직 믿음이 확고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학교의 어떤 점이 끌렸냐고 물으니, 학교 분위기가 따뜻하고 직원들이 친절했단다. 그래서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는 부담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한다. 누가 친절했냐고 물으니, 학교 카페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특히 상냥하고 친절했다고 한다. 또 한 번 뿌듯했다. (우리 학교 카페에 한번 와보시라!)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일터에서의 작은 섬김과 친절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일터 사역은 바로 나와 내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터의 보통 사람들이 이제 일터사역의 방향과 가능성이 되어야 한다. 거창하고 성공적인 일터사역의 사례보다 작고 평범한 영웅들에서 공감과 동기부여를 받아야 한다. 수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에는 버스 기사로 일하는 린다라는 여성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녀는 자기 버스에 자주 타는 손님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늦으면 기다리곤 한다. 한 80대 할머니가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힘들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운전석에서 내려 노파의 장바구니를 대신 들어 버스에 실어줬다. 이 노파는 그 뒤로 린다가 모는 버스만 기다리게 되었다. 한번은 추수감사절 즈음에 버스 정류소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는 여성을 보았다. 그 여성은 그 지역에 처음 이사를 와서 모든 게 낯설었다. 린다는 그 여성에게 다가가 이 지역에 가족이나 지인이 있는지 묻고는 추수감사절에 자기 집에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초대했다. 이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신문기사는 린다는 자신의 버스를 작은 축복의 공동체로 만들었다고 평한다. 때로 승객들은 린다에게 종종 꽃다발을 비롯한 선물을 주곤 한다. 취재 기자가 묻는다. “짜증내는 승객들을 대하고, 교통 정체에 시달리며, 때로는 좌석에 붙은 껌도 떼어야 하는 고된 버스 운전을 하면서 어떻게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까?” 린다는 이렇게 대답한다. “새벽에 일어나 주님 앞에서 30분 동안 기도하고 무릎을 꿇는 데서 저의 하루 기분이 결정됩니다.” 린다는 버스 노선 종점에 도착하면 사람들에게 “이제 운행이 끝났습니다. 사랑합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말한다. 기자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어느 버스 기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요? 우리는 이 복잡한 도시의 어디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샌프란시스코를 지나가는 린다의 45번 버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나는 위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어느 미국 목사님의 설교 블로그에서 읽었다. 하지만 미국 교회에서만 배울 수 있는 선진 사례가 아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이처럼 일상과 일터에서 발견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안의 그 평범하고 위대한 이야기를 찾자.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무엇을 할 것인가
by 양혜원
2024-03-11
항암치료 중이신 어머니가 입맛이 뚝 떨어지시고 그나마 찾으시는 게 햄버거이다. 남들은 몸에 안 좋다고 뭐라 하지만, 아무것도 못 드시는 거보다는 낫지 싶어서 그날 저녁도 퇴근길에 버거 사냥을 나섰다. 어머니가 잘 드시는 브랜드의 가게는 너무 멀리 있어서 어디서 사가나 고민하는데 예전에 버스 기다리다가 배가 고파서 들렀던 버거 가게가 생각났다. 큰 기대 없이 시켜서 먹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있었던 기억이 나서 그 버거집으로 갔다.하지만 때는 이미 저녁 7시를 넘었고, 학교 건물 안에 있는 식당이라 벌써 파장 분위기였다. 그래도 주방 안쪽에 사람이 있어서, 아직 영업하시냐고 물었더니, 연세가 좀 있어 보이시는 아주머니가 지금 마지막 버거가 딱 두 개가 남았다고 하신다. 사이드로 감자튀김이랑 치킨 너겟은 튀겨줄 수 있다고 해서 간병하시는 아버지 생각해서 함께 주문하고 잠시 자리에 앉았다. 주방의 아주머니는 그 버거집의 주인이셨는데, 몸의 움직임이나 얼굴로 보아서는 연세가 좀 있어 보이셨지만, 머리카락이 검어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손님은 나 혼자라 너무 조용한 게 오히려 어색해서 소소하게 말을 주고받다가,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하고 물었더니, ‘58년 개띠에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만으로 올해 예순여섯이 되신다는 이야기다. 색은 까만데 두피가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숱이 적고 가는 머리카락이 그 나이를 말해주는 듯했다. 지난번에 여기 우연히 와서 먹었는데 버거가 맛있어서 또 왔다고 했더니, 자신이 미국에서 햄버거 가게를 오래 했었다 하신다. 미국에서 38년을 살았다는데, 그곳에서 자리를 잘 잡으신 분이 어쩌다가 늦은 나이에 다시 한국에 와서 버거 가게를 시작했을까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탈북자 선교하러 왔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더 하고 싶으셨던지, 나더러 교회 다니냐고 물어보셨다. 다닌다고 하자 그때부터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부름으로 한국에 다시 나와서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지 길게 풀어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의 눈길은 정수리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분의 검은 머리에 머물렀다. 흰머리 한 가닥 보이지 않게 새까맣게 물들인 그 머리는 마치 ‘뒤로 물러나 숨기’[隱退]를 거부하는 강한 의지처럼 읽혔다. 내일도 햄버거 백 개를 주문받았다며, 감자와 치킨 너겟을 튀기는 틈틈이 재료 준비를 하는 손이 분주했다. 어쩌면 그는 한국으로 다시 나올 때, 텐트메이커로서 제2의 인생을 산다는 생각에 제법 들떴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생들의 선생이라고 불리는 파커 팔머는 곧 벼랑을 넘어갈 인생의 끄트머리(brink)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 일을 어떻게 맞이할지에 대해서는 선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지만, 해 뜸과 해 짐 사이를 어떻게 걸어갈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묻는다. 해가 진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갈 것인가, 거기에 저항하며 갈 것인가, 아니면 협력하며 갈 것인가.여기에서 선택이라는 말이 애매하게 마음에 머문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근대 이래로 우리 문화가 선택은 마치 운명이나 주어진 상황을 거스르는 일에만 적용되는 것처럼 말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선택은 치고 나가는 능동성만큼이나 받아들이는 수용성도 필요로 한다. 버거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근 40년을 살던 미국을 떠나, 한국에서 햄버거 가게를 하며 선교사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치고 나가는 능동성이었지만, 한국에서 햄버거 가게를 하며 선교사 생활을 하는 데에 따라오는 예상치 못한 수많은 상황은 수용하면서 갈 수밖에 없다. 머리는 까맣게 물들여도, 약해지는 관절과 체력은 수용하면서 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지는 해를 바라보며 용감한 선택을 할 수는 있지만, 해가 진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기대 수명이 길어지면서 인생 2막이 아닌 3막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온지도 제법 되었다. 심지어 배우자도 두 번은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미덕일 수 있었던 것도 다 수명이 짧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불평이 반복될 때는, 엄마도 진작에 한 번 갈아타실 걸 그랬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웃자고 하는 소리였지만, 완전 흰소리는 아니었다. 나의 박사 과정 지도 교수는 40대에 이혼을 하고 홀로 십대 입양아를 키우며 종교여성학 과정을 신설했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종교여성학자들과 네트워크를 다지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러다가 일흔이 다 되어갈 무렵 열 살 연하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여지껏 싱글인 제자들에게 부러움과 함께 ‘나도 어쩌면’ 하는 희망도 품게 한 결혼이었다.) 결혼 얼마 후 지도 교수는 은퇴하고 남편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 엔지오 활동을 시작했고, 얼마 전에는 블로그도 시작했다. 학술적인 글만 쓰다가 처음으로 대중 독자를 위해서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거스르며 살아온 것 같은 지도 교수도, 아프리카에서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죽다 살았고, 열 살 어린 남편은 원인 모르는 장 질환으로 영양 섭취가 안 되어 한동안 고생을 했다. 능동적인 선택 뒤에 따라오는 불가피한 상황들이다. 2년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일흔 후반에 들어선 시점에서 바라보는 인생은 많이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눈빛은 마치 지는 해를 바라보며 가는 길의 또 다른 차원으로 들어선 것 같아 다소 낯설게 다가왔다. 너무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것 같다는 내게 딱 좋은 나이에 시작했다고 말씀해 주신 분이었다. 그때 나는 마흔 초반에 집을 박차고 나가 박사 공부를 시작했다는 서사에 제법 고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딱 11년이 지난 지금 나는 박사 학위 하나로 팔자를 고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대학 사회의 온갖 모순 속에서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다. 능동적 선택 뒤에 따라오는 또 하나의 불가피한 상황들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차이는 사십 대의 계단에서 바라보는 해지는 풍경과 오십 대의 계단에서 바라보는 해지는 풍경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좀 식상하지만 산의 비유를 쓴다면, 산 밑, 산 중턱, 산 정상의 풍경이 다르듯이 그 풍경이 사뭇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지는 해를 향해 가는 이 길에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은, 애초에 이 여정을 시작하게 한 동기이다. 팔머는 자신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혼란스러운 것이 많아서라고 하는데, 나도 비슷하다. 이건 도대체 왜 이런 거야, 하는 의문이 나를 글로 이끌었다. 흔히들 자신이 아는 것을 글로 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글을 쓰면서 알아간다. 어떤 때는 내가 뭐가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정말로 궁금했던 것은 이것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던 나의 글은 학부 졸업 논문이었는데, 이 글도 이해하기 어려운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그때 나의 의문은 왜 현실은 이토록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하는 것이었다. 그 논문으로 졸업생 우수 논문상을 받았는데, 이 질문은 그 이후로도 몇 년간 내 글쓰기의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여성학 석사 과정에 지원할 때 나의 의문은, 왜 나는 똑같은 나인데 평신도일 때랑 사역자 부인일 때랑 교회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다른가였다. 이 주제로 쓴 나의 연구 계획서로 석사 과정에 합격했고, 이 질문은 훗날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었다. 박사 과정에 진학할 때 나의 의문은 여성에 대한 차별은 문화적 문제인가 종교적 문제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여성주의 의식을 가지고도 보수적 신앙관을 수용한 여성 작가들을 연구하고 그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갔다. 연구교수 생활을 거쳐 특임교수 타이틀을 달고 영문 학술지 편집 일을 하는 지금도 나는 궁금한 것들이 많다. 왜 여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공격성은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사회가 여성을 억압한다고만 할까? 왜 한국의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한때 여성주의에 그렇게 열광했을까? 이런 궁금증들을 풀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쓴다. 하나의 궁금증을 풀다 보면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기고, 세상은 이해 못 할 일을 쉼 없이 던져주기에, 연구 논문도 쓰고, 이렇게 짧은 에세이도 쓰고, 책도 쓴다. 그리고 글 쓰는 사람의 자세를 더 잘 갖추기 위해서 더 열심히 듣고 관찰하려 한다. 내가 선택한 것도 그 선택이 나를 데려간 곳도 모두 이런 관찰을 통해 글이 된다. 이런 선택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을 기독교 전통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소명일 것이다. 근대 이후의 사회가 선택을 마치 운명이나 주어진 상황을 거스르는 일에만 해당하는 것 같은 착각을 심어주었다면, 소명을 마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꾹 참고 위에서 부르는 대로 질질 끌려가는 일처럼 생각하게 만든 것은 교회의 실수다. 소명도 선택과 마찬가지로 치고 나가는 능동성과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있다. 그리고 사실 선택이라고 하는 것도, 어디까지가 내 선택이었는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소명 또한 어디까지가 주어진 것인지 선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다만, 삶이 던져주는 것들에 응답하며 가다 보니 그 길에 나와 함께 자라나는 무엇이 생겼다면, 그런 게 소명 아닐까. 그리고 그 자라난 무엇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내 옷같이 느껴진다면 그 옷을 입고 지는 해를 향해서 가도 좋을 것이다.
글로벌과 로컬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복음주의 교회
by 문상철
2024-03-09
로잔 운동의 지도부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되는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지역별, 이슈 네트워크별로 세계 복음주의 지도자를 초청하여 공청회(listening calls)를 개최했다. 2024년에는 지역별 리더들과 함께 총 12회의 지역 간담회, 그리고 23개의 이슈 네트워크(issue networks)와 YLGen(청년 지도자 세대, Younger Leaders Generation) 네트워크로 구성된 24회의 간담회도 개최했다. 회의는 2020년 9월부터 2021년 7월 사이에 진행되었으며 각 그룹의 리더들이 회의에서 정리한 회의록을 제공했다.회의록의 질적 데이터는 근거 이론(grounded theory)의 절차에 따라 글로벌 공청회 팀(Global Listening Team)에 의해 분석되었다. 귀납적 분석 과정은 캐시 차마즈(Kathy Charmaz)의 코딩 전략에 따라 일차 코딩(라인별 코딩), 집중 코딩 및 이론적 코딩의 3단계로 진행되었으며[1] QSR 인터네셔널사의 제품인 윈도우용 NVivo라는 QDA(질적 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코딩 및 분석이 진행되었다.회의록은 경청 과정에서 사용된 5가지 질문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1)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틈(gaps) 또는 남아 있는 과제는 무엇인가?2)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가속화할 수 있는 유력한 돌파구와 혁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3)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하여 어떤 영역에서 더 큰 협업(collaboration)이 이뤄지는 것이 필요한가?4)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주제는 무엇인가?5) 경청의 과정으로 우리가 추가로 의견을 들어야 할 대상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지역 보고서 개요12개의 보고서를 한 줄씩 코딩하여 분석한 결과, 총 285개의 주제 코드가 도출되었다. 이후의 집중 코딩 및 분석은 4개 이상의 공청회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56개의 코드에 대해 진행되었다.남아 있는 격차에 대한 첫 번째 질문에 나타난 주요한 주제는 ‘제자도의 필요성’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사랑과 연합’ ‘리더십의 다양성’ ‘외부 세계와 접촉하지 않는 교회’ ‘남아 있는 미전도 종족집단(UPGs)’ ‘이슬람의 팽창과 무슬림 전도의 필요성’ ‘환경 위기와 창조세계 돌봄’ ‘타문화 선교의 부족’ ‘상황화의 부족’ ‘직장 및 일터 사역의 필요’였다.돌파구와 혁신에 대한 두 번째 질문에서 분석된 지배적인 주제는 ‘사역을 위한 새로운 기술과 미디어 사용’ ‘자생적 선교 운동’ ‘사역의 돌파구와 혁신’이었다.협업에 대한 세 번째 질문의 범주에 속하는 주된 주제는 ‘협력의 필요성’과 ‘플랫폼으로서의 로잔운동’이었다.추가 연구에 관한 네 번째 질문에서 중요한 주제는 ‘디아스포라와 이민자’ ‘사역의 사회문화적 상황’ ‘COVID-19 팬데믹이 사역에 미치는 영향’ ‘미전도 종족집단’ ‘신학의 상황화’ ‘교회 성장’ ‘교회의 협력’ ‘Z세대와 젊은 세대’ ‘리더십‘이었다.경청해야 할 추가 대상자들에 대한 다섯 번째 질문에서 중요한 주제는 ‘Z세대와 청년들’ ‘성령’ ‘현장의 사람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 ‘불신자들과 타종교의 사람들’ ‘서로’ ‘여성’ ‘학계의 목소리’ ‘현지인’ ‘정치 지도자’였다.이슈 네트워크 보고서 개요24개의 보고서를 한 줄씩 코딩하여 분석한 결과 총 247개의 주제 코드가 도출되었다. 집중 코딩 및 분석은 4개 이상의 이슈 네트워크 공청회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된 59개 코드로 진행되었다.첫 번째 질문의 범주에서 나타난 주요한 주제는 ‘제자도의 필요성’ ‘청소년 참여’ ‘사랑, 일치, 동반자적 협력관계’ ‘새로운 외부 사역에 대한 교회의 수용’ ‘총제적 관점의 부족’이었다. ‘상황화 부족’ ‘외부 세계에 참여하지 않는 교회’ ‘사역자과 지도자 훈련’ ‘자원의 격차’ ‘현대 기술과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 교회’ ‘비전과 신뢰의 부족’ ‘미전도 종족집단(UPGs)’ ‘언어 장벽과 성경 번역’ ‘반기독교적 입법과 정치’였다.두 번째 질문에 대한 중요한 주제는 ‘사역을 위한 새로운 기술’ ‘사역의 돌파구’ ‘교회의 영적 각성’ ‘교회들과 지도자들의 연합’ ‘자생적 선교 운동’ ‘새로운 지도자들의 부상’이었다.협업에 대한 세 번째 질문에 대한 주된 주제는 ‘협업의 필요성’ ‘플랫폼으로서의 로잔’ ‘정보 공유의 필요성’이었다.네 번째 질문의 범주에 속하는 중요한 주제는 ‘모범 사례 연구’ ‘경험적 연구의 필요성’ ‘전도사역 연구’ ‘미전도 종족집단 연구’ ‘기금 마련 및 자금 조달’ ‘Z세대 및 젊은 세대에 대한 연구’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보는 사역에 대한 연구’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에 관한 연구’ ‘현재 이슈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관한 연구’ ‘신학의 상황화에 관한 연구’였다.다섯 번째 질문에서 나타난 중요한 주제는 ‘Z세대와 젊은 사람들’ ‘세계 다수의 지도자들’ ‘현장에 있는 사람들’ ‘토착민’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 ‘여성’ ‘성령’ ‘불신자와 타종교인’ ‘서로’ ‘비즈니스 리더’ ‘디아스포라와 이민자’였다.글로벌 종합 및 이론적 논증전체 그룹의 회의록에는 총 391개의 주제 코드가 나타났다. 주제 코드 중 115개는 4개 이상의 회의록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다.10회 이상 회의에서 총 38개의 코드가 나왔고 20회 이상 회의에서 6개의 코드가 나왔다. 그 코드는 다음과 같다: ‘협업의 필요성’(36회의 회의); ‘사역을 위한 새로운 기술 사용’29회); ‘Z세대 및 청년 세대의 소리 듣기’27회); ‘제자도의 필요성’25회); ‘사랑, 화합, 동반자적 협업’(20회); 및 ‘사역의 돌파구’(20회). 36개의 모든 공청회에 협업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역 네트워크와 이슈 네트워크 회의에서 총 102개의 집중 코드(이슈를 다루는 4개 이상의 그룹)가 나타났다.틈과 남은 기회복음주의 교회가 직면한 도전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사역에 참여하는 사역자들과 지도자들을 위한 제자도와 훈련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제자도와 사역 훈련의 기본 접근 방식은 사역 혁신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기독교 교육의 기본이 되는 또 다른 강조점은 사랑, 연합, 동반자적 협력 관계였다. 지도자들은 복음주의 교회가 직면한 다양한 도전에 대처하는 데 있어 교파적 배경과 조직적 경계를 초월하는 기독교적 사랑과 일치에 기초한 협력적인 노력을 요청했다.복음주의 교회가 당면한 남은 과제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패러다임 전환의 측면이 증가하고 있음을 강조했다.[2] 지도자들은 사역의 접근 방식에서 급격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축적된 사역 지식을 통해 프로그램과 활동의 수행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길 원했다.돌파구와 혁신사역에서 사용되는 첨단 기술과 미디어의 유용성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새로운 기술과 미디어의 사용 덕분으로 사역의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많은 지도자들이 공감했던 것은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눈에 띄는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더욱 연합되어 있는데, 이는 새로운 혁신적인 지도자의 출현에서 기인할 수 있다.다양한 사역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공감한 바에 따르면 복음주의 교회와 기독교 단체의 사역에서 돌파구가 목격되고 있다. 혁신적인 과정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려면 젊은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사역 접근 방식을 혁신하는 문제는 사역의 관련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며 이것은 바로 상황화 작업의 일부이다. 창조적인 과정으로서의 혁신은 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상황화를 촉진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획기적인 혁신을 급진적으로 추진하기보다는 사역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인다.[3]협업협업의 필요성은 많은 그룹에서 길게 논의되었다. 로잔운동을 글로벌 협력을 위한 플랫폼으로 사용한다는 견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지도자들은 로잔운동에 대해 대단한 신뢰를 표명하고 다양한 수준에서 그 역할을 더욱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 .정보 공유에 대한 강조는 협업을 위한 상호 노력의 기반이 되고 있기에 주목할 만하다. 사역의 협업을 위한 촉진자(faciliator)이자 플랫폼으로서 로잔운동의 역할을 설정하는 데 그런 기대감은 매우 건설적인 것으로 보인다.연구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사역과 관련된 관심과 이슈들을 광범위하게 반영한 미래 연구 과제에 대해 제안했다. 연구 부족이라는 주제는 복음주의 선교계에서 취약한 영역을 드러낸다. 이 분야에서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복음주의 교회와 단체들은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해결하는 데 통일성을 갖추지 못했고 체계적이지 못했다.전반적으로 향후 연구에 대한 논의와 제언은 실증적 연구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미래 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과 더 많은 연구에 대한 요청은 인류의 상황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포함하는 선교 신학을 수행하는 데 있어 현실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4] 연구 결과를 세계 교회와 효과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섬김의 표현이 될 것이다.추가적인 경청의 대상은?사람들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를 넘어서는 생각이 필요하다. 성령님께 귀기울인다는 것은 복음주의 신앙의 규범이지만 많은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 특히 같은 교단이나 단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말을 듣느라 너무 분주하다. 동시에,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공동의 훈련으로 가능하다.[5]경청에 대한 학제간의 접근을 요구하는 제안들이 많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고려되어야 한다. 연구는 체계적인 경청의 방법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경청은 연구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지식에 대한 총제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세분화되거나 계층화된 접근 방식보다는 학제간의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결론복음주의 교회 앞에 놓인 격차와 도전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그들의 사역에서 다루어야 할 현재의 문제와 도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사역에 대한 전망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지 않다. 그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사역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을 동원한 돌파구가 있다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대체로 글로벌화는 기독교 사역에서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수년 동안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글로벌화는 많은 사역의 현장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내포하면서 빠르게 현실이 되고 있다.공청회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복음주의 공동체에서는 연합에 대한 확고한 결의가 표명되었다. 지역적, 교파적, 세대적 배경의 다양성 속에서도 강력한 연합이 느껴졌다. 동시에, 다른 사역의 경계를 넘어 더 높은 수준의 사랑과 일치를 보고자 하는 강한 열망도 있었다.사역의 전략적 제휴와 사역의 혁신을 위한 특별한 결집을 위하여 2024년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인 제4차 로잔대회는 글로벌 플랫폼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복음주의 교회가 직면한 문제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다년간에 걸친 다중심적(polycentric) 접근은 합리적인 방식이다. 경청하려는 노력은 발전을 이루는 의미있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공청회에서 공유된 공동체적 지혜로 우리는 사역 현장에서 창의적 접근을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안에서의 약속을 기억하게 된다.[6]1. Kathy Charmaz, Constructing Grounded Theory, 2nd Edition (London: SAGE, 2014). 근거이론의 초점은 귀납적인 분석의 과정의 결과로 이론을 생성하는 것이다. 차마즈의 일차코딩, 집중코딩, 이론적코딩의 개념들은 근거이론의 구성주의적 패러다임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 제안들이다. 2. Larry Laudan, Progress and Its Problems: Towards a Theory of Scientific Growth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7), 139. 또한 Larry Laudan의 다른 책들도 참고하라, Science and Relativism: Some Key Controvers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0), 1-32; Larry Laudan, Beyond Positivism and Relativism: Theory, Method, and Evidence (Boulder, CO: Westview Press, 1996), 21-25. 3. 그러나 시장창조형 혁신(market-creating innovation)이 지속형 혁신이나 효율성 혁신 만큼 필요하다. See Bryan Mezue, Clayton Christensen, & Derek van Bever, ‘The Power of Market Creation: How Innovation Can Spur Development,’ Foreign Affairs, January/February 2015을 참고하라,https://www.foreignaffairs.com/articles/africa/2014-12-15/power-market-creation. 4. Paul Hiebert, The Gospel in Human Contexts: Anthropological Explorations for Contemporary Mission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9), 44-53, 127. 5. 폴 히버트(Paul G. Hiebert)는 초대교회가 교리적인 선언문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기보다 하나의 신학적인 과정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예루살렘공회를 해석학적 공동체(a hermeneutical community)의 성경적 모델로 이해한다. Hiebert, P. G. (1994). Anthropological Reflections on Missiological Issues. Grand Rapids: Baker. p. 95. 6. 이 기사는 공청회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요약한 것입니다. 분석 보고서의 전체 내용은 로잔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lausanne.org/l4/global-listening/the-evangelical-church-interacting-between-the-global-and-the-local
진정한 ‘내 소유’는 무엇인가
by 박혜영
2024-03-08
시편 119를 읽는 데 아주 익숙한 표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소유는…”(56절). 사유재산, 소유권, 소유주…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 역사는 ‘소유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소유한다’는 말에는 단지 ‘필요가 있기에 갖고 있다’라는 뜻 그 이상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소유가 많을수록 존재감을 얻으며, 소유가 많을수록 대접받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지하고 저울에 올라서면 무게가 더 나가는 것처럼, 많이 소유할수록 무게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 여겨, 우리는 ‘내 소유’라는 말에서 안심, 안전, 보호라는 말을 동시에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남을 수 있는 것만 무게 있는 실체가 됩니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사 57:13). 이사야 본문에 나온 자들은 위기에 대비하여 의지가 될 만한 우상을 착실히 모아 둔 듯합니다. 재물의 우상, 학업의 우상, 연애의 우상을 모아왔습니다. 우상은 돌이나 나무, 또는 청동으로 만들었을 테니 제법 묵직합니다.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바람에 떠가고, 기운에도 날아가는 연기와 같았습니다. 무게가 나갈 만한 그 어떤 실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내 소유”라 할 수 있을까요? 진정 “내 소유”라면 내 손에 끝까지 남아 나에게 존재감을 부여해야 할 텐데, 사라진 걸 보면 “내 소유”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평생 모으고, 평생 애쓴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충격일까요?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2-15). 사람들은 다 자신이 쌓은 공력을 갖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자신의 공력이 불에 타 없어질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만든 것이라 여길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다 타버렸다면, 그 순간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충격! 반면 “그 날 …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바람이 불어도 그대로 남아 있고, 불에 태워도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공력만이 “내 소유”입니다.여기서 시편 119:56이 중요해집니다. 그대로 남을 만한 진짜 “내 소유”가 무엇인지 귀띔해 주고 있으니까요. 무엇입니까?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진정한 “내 소유”란 재산이나 부동산이 아닙니다. 책에서 얻은 지식도 아니고, 인생 경험도 “내 소유”는 아닙니다. 그런 것에는 하나님 앞에 남을 수 있는 무게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소유”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그것만입니다. 그것만 내 이름으로 남습니다. 이는 위에 인용한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는 말과 통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자만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만 ‘하나님의 산’을 얻고, ‘하나님의 산’에만 요동치 않을 무게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이 본문을 “…하면서 내 삶을 보냈으니”라고 번역한 영어성경(NLT)은 “내 소유”라는 말에 함축된 의미를 간파한 것 같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한평생 보냈는지 묻기 위한 번역처럼 보였습니다.사람이 죽으면 갖고 가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사실 피상적입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면서 재산보다는 자신의 이름이나 명예를 중히 여기는 인생을 살라는 조언도 최고의 지혜는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죽을 때 갖고 가는 게 있노라고. 죽을 때 다 두고 가는 건 아니라고. “내 소유”라 할 만한 것은 갖고 간다고.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재산도 명예도 다 두고 가지만, 진정한 “내 소유”는 갖고 갑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 것, 곧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무게를 순종을 통해 내 무게로 전환시킨 그것은 진정한 “내 소유”가 되어 우리에게 존재감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울 뿐’입니다.
능력 있는 기도의 비밀
by David Mitchell
2024-03-07
마태복음 6:5-15에서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은 모든 기도가 똑같지 않다고 경고하셨다.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전에 세상 사람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먼저 주의를 주었고, 그렇게 함으로 기도의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보여주셨다. 위선자의 기도첫째, 예수님은 위선자, 즉 기도 쇼를 하는 자들을 겨냥하셨다. 기도를 위한 오후 번제 시간(오후 3시경)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 공동체 사람들이 다른 신도들과 함께 번잡한 거리로 나가거나 회당에 나갈 때이다. 따라서 그 시간에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당신이 참으로 얼마나 경건한지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는 정말 좋은 방법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의 열심을 볼 수 있도록 한쪽 눈을 뜨고 큰 소리로 기도하라. 예수님은 5절에서 “그들이 자기 상을 온전히 받았느니라”고 경고한다. 결국 이런 기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어쨌든지 당신이 정말로 원했던 것, 즉 당신과 비슷한 수준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뿐이다. 예수님의 해결책은 사람의 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향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기도이다. 능력 있는 기도의 첫 번째 비결은 기도를 은밀하게 하는 것이다. 강력한 기도는 다른 어떤 사람도 끼어들지 않고, 오로지 당신과 하늘 아버지 사이에서만 소통이 일어날 때 가능하다. 이방인의 기도둘째, 예수님은 비유대인의 기도를 겨냥하신다. 그들의 기도 방식은 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많은 말을 쏟아붓는 특징이 있다. 이는 존경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결국, 때때로 기도하는 내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면 신을 경건하게 불러야 한다. 예를 들면, 앤서니 알바니스(Anthony Albanese), MP, 호주 총리시여…. 이런 식으로 말이다. 누구나 내가 하는 기도가 다른 사람 기도 이상으로 능력 있기를 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왜? 왜냐하면 그런 식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단지 기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이 기도하는 하나님에 관해서 잘 모른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요점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으로 돌아간다. 8절에서 예수님은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실제로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강력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동시에 아버지께도 나아간다. 나는 알바니스 총리의 아들이 그를 “총리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에서 그런 호칭이 나올 리가 없다. 이제 당신은 왜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시라면 그런 식으로 장황하게 호칭하는 게 부적절한지 알 것이다. 인간도 아첨과 헛된 말을 간파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아시겠는가? 필요한 것을 기도로 요청하는 제자들이 하나님에게 아부부터 할 이유가 없다.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하나님은 당신의 필요를 아시며 당신의 아버지이시다. 능력 있는 기도의 원천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위선자들처럼 기도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이방인처럼 기도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친절하시고, 관대하시며, 강력하시고 정의로우시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듣고 있다. 그분은 이미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능력 있는 기도의 비결은 우리 아버지를 바로 알고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교도들과 위선자들이 저지른 진짜 실수는 기도의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누구에게서 나오는지를 몰랐다. 이교도들은 기도의 힘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에게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기도가 필요했던 이유는 마법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주문을 외우다 보면, 어쩌다가 딱 맞는 단어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아니면 자신들이 얼마나 존경심 있고 진지한지를 보여줌으로 그들이 섬기는 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조작으로 움직이는 신은 결코 진정한 신 또는 강력한 신이라고 할 수 없다. 술수를 써야 하는 신에게 사랑이 있을 리 없다. 기도는 마술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위선자들은 기도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것이 효과적이었다. 그들은 지역 사회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인정받지 못했다. 기능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기도의 진정한 힘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기도가 주는 유일한 유익은 사교였다. 그들이 기도하는 신은 아마도 기도로 조종되는 이교도 신보다 더 형편없는지도 모르겠다. 하늘 아버지에게 기도하기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들에게 기도의 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우리는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믿는다.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허락하시고 듣고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와 이 세상을 위해 (궁극적으로) 가장 좋은 결과를 주신다. 기도는 나와 말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기도 생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진짜 기도, 즉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사랑이 많으시고 이해심이 많으신 아버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하나님, 그분 자신이 성공적인 기도의 비결이다. 우리는 나의 불안, 어려움, 약점, 죄를 들고 나아간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루고도 남을 만큼 크고 사랑이 넘치신다. 그는 지혜롭고 능력이 넘치며 사랑에 가득하여 우리를 용서하는 분이다. 원제: The Secret of Powerful Pray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일터에서 ‘함께’ 결정하라
by 김선일
2024-03-06
페인트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 조(Joe)는 같은 일을 반복한다. 손님이 와서 특정한 색의 페인트를 주문하며 조는 해당 페인트를 골라서 기계에 섞고 통에 담아 손님에게 건네준다. 그다음에는 돈을 받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다음 손님을 받는다. 같은 일은 반복된다. 이 일은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조가 지각이나 결석을 한다면 그는 해고당할 수도 있다. 그의 상사는 조가 같은 일을 하루 종일 반복한다 해도 제시간에 와서 해준다면 문제없다고 볼 것이다. 그렇다면 조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하는 일에 무슨 변화나 성장이 있을까?” “이 일이 내가 일하는 회사에 실제로 무슨 영향을 줄 능력이 있을까?”이 이야기는 최근 출판된 요한 하리의 벌거벗은 정신력의 6장에 소개된 한 사례다. 저자는 일하는 현대인들은 이와 같이 영향력 있는 삶을 살려는 열망과 자기 인생의 실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요한 하리가 페인트 가게 점원인 조 필립스와 인터뷰할 때, 그는 공허감 가운데 각종 중독에 빠졌음을 고백했다. 조는 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 속에서 아무런 기대를 갖지 못하고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냥 먹고 살아야 하니까 무기력감 속에서도 일할 뿐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쳇바퀴 돌 듯이 반복되는 업무 속에서 무의미하게 일하고 있을까? 이 책의 저자는 2012년 142개국을 대상으로 갤럽에서 행한 일 경험에 관한 조사를 예로 든다. 일터의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이 맡은 일에 “참여하며”(engaged) 직장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고 답한 이는 13퍼센트에 불과하다. 반면 63퍼센트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실제로는 “참여하지 못한 채”(not engaged) 마치 일하는 시간 내내 몽유병 환자처럼 시간만(에너지나 열정이 아니라) 축내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머지 24퍼센트는 “적극적으로 일을 망치려고 한다”(actively disengaged). 이들은 일터에서 행복하지 않을뿐더러 바쁘게 자신들의 행복하지 않음을 증명하고자 다른 참여적인 동료들이 성취하려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결국 갤럽 조사에 의하면,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기보다는 괴로워하거나 심지어는 혐오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기독교적 일의 신학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근대 개신교 노동윤리와 직업 소명은 자신의 세속적인 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할 것을 가르쳤다. 하지만 성실, 인내, 정직의 기독교적 덕목을 강조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골 3:23)는 것으로는 처절한 일터 현실 속 그리스도인들에게 울림이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1세기에 박해받는 상황에서 믿지 않는 육신의 상전을 모시며 인내와 진실함으로 자기의 일을 감당한 신앙 선배들의 귀감은 여전히 위로가 된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일터의 사람들은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위에서 결정한 대로 지시에 따라 일할 뿐 자신이 하는 일이 전체 일의 계획과 진행 속에서 어느 부분을 맡고 있는지, 어떻게 목표하는 바에 기여하는지 모른다. 들리는 말로는, 고급 기술을 다루는 대기업에서는 직원들이 일의 전체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분업화시킨다고 한다. 나중에 퇴사한 뒤에라도 그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기업의 자기 보호적 정책은 결국 종사자들을 일로부터 더욱 소외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의 신학이 제시할 수 있는 기독교적 가치는 무엇인가?요한 하리는 같은 책에서 또 다른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한 정신과 의사가 영국의 일반 공무원 18,000명과 수년간 인터뷰를 한 뒤 재량권과 의미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그런데 복잡한 일들 속에서 결정을 내리고, 그러한 결정으로 인한 책임의 중압감에 시달릴 고위직 공무원들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단순한 일만 처리하면 되는 하급직 공무원들에 비해서 1/4 수준이라는 것이다. 훨씬 더 많은 책임을 지닌 관리자들이 단순 반복 업무하는 이들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이다. 주도권과 통제력의 상실은 비록 일에 대한 책임 부담이 덜하더라도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울, 불안, 공황장애, 무기력증과 같은 정신적 질환들은 우리 사회에 쓰나미처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덮쳐온다. 우리가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일하면서 보낸다면, 일의 경험이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일에서 재량권을 얻지 못한 대다수는 지금도 자신이 하는 일로부터 소외와 무의미라는 고통을 겪으면서 밥벌이의 신성한 임무를 묵묵히 감당한다. 인내와 순종을 가르치는 신앙의 권면이 일정한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의 신학이 이와 같은 일터의 구조적 문제를 간과하고 오롯이 개인에게 성실과 인내로 일을 감당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적 정신 승리로 비칠 수 있다. 일에 대한 기독교적 비전은 개인적 덕목의 차원뿐 아니라 일의 사회적, 구조적 문제에까지 포괄해야 한다. 일의 재량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을 겪는 현실에서 일의 신학이 내놓을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일까? 답은 성경에 있다. 창조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주신 첫 번째 과업이 바로 결정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하나님은 동물과 새들을 지으시고 그것들을 아담에게 보여주시며 이름을 짓게 하셨다. 그리고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른 대로 이름이 결정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 세계에 대한 청지기 권한을 부여하시는 첫 번째 상징적 사건은 바로 결정권을 주신 것이다. 아담의 결정 과정을 하나님은 관찰하시고, 그의 결정을 허락하셨다. 이름을 짓는 결정 과정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의력과 상상력을 동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야만 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결정권이라는 고유한 역량을 일터에 접목한 사례가 있다. AES(Applied Energy Services)라는 민영 전력회사를 공동 창업하고 이 회사를 4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시킨 데니스 바키(Dennis Bakke)는 사람들에게 결정 과정에 동참시키는 것이 일터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적 가치임을 확신하였다. 그 자신이 매우 주도적이고 독선적인 성향이라고 고백하는 그는 직접 경영을 하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바로 일의 결정 과정으로부터 소외되어 위에서 시키는 일만 강요당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창의성과 미적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신다는 것이고, 아담에게 생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 것은 인간과 결정권을 공유하신다는 것임을 믿고 이를 자신의 기업 경영에 도입했다. 모든 직원에게 직무와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다만 자기 멋대로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조언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해당 사안이 있을 때 최소한 5, 6명의 관련 경험자나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서 결정을 내리게 했다. 결정으로 인한 결과가 좋았다 하더라도 충실한 조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질책을 받는다. 반면, 안 좋은 결과가 나왔더라도 충실한 조언 과정을 거쳤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함께 분담한다. 인간은 결정권과 창의력뿐 아니라 서로 협력해서 공동선을 이루는 존재로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권 부여와 조언 과정을 인적자원개발의 근간으로 삼은 AES는 기업의 사회적 가치와 인간 경영을 구현한 실험적인 모델로 평가받았다. 데니스 바키의 이러한 성경적 일의 철학은 그의 저서 Joy At Work 조이 앳 워크에 이야기 형태로 담겨 있으며, 그의 형제들이 공동 집필한 일의 즐거움 워크북에도 성경공부 교재로 전개되어 있다. 기독교적 일의 관점은 무엇이 달라야 하나? 그동안 일의 신학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측면에서만 기독교적 일의 가치를 발견하는 경향이 있다. 회식 자리에서 술 마시지 않는 법, 정직하게 세금 내기, 주일 성수 하기, 직장에서 험담하지 않기 등과 같은 윤리적이고 방어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신자 개개인이 직면할 수 있는 중요한 신앙 양심의 과제다. 신앙의 양심이 흔들리는 상황을 상대하고 극복해 내는 일터의 신앙인들을 위한 목회적 격려와 위로는 항상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터에서 신앙이 있든 없든 사람들 대다수가 겪는 고통은 바로 일하면서도 일의 주도권과 재량권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실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함과 결정권을 인정한다. 일터에서 결정권을 공유하는 것은 언뜻 낭만적으로, 또는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다. 데니스 바키가 AES의 최고경영자로 일할 때도 이사진과 대주주들로부터 그러한 우려와 공격에 시달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와 같은 창의성과 결정권을 부여하셨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는다면 진지하게 실천을 모색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오늘날 많은 사람이 바로 이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면 성경적 일의 신학이 일터의 세계에 줄 수 있는 선물이 되지 않을까? 먼저 작게라도 시작해 보자. 가정에서, 교회에서, 혹은 교회의 한 부서에서도 여러 결정해야 할 사안들이 있을 것이다. 가족 여행을 언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자녀들에게 연구하고 조언을 얻어서 결정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 소그룹에서 기도회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구성원들이 직접 결정할 수도 있다. 한 교회는 자기 교회의 예배 시간마다 낭송하는 신앙고백을 교인들과 함께 결정했다. 물론 조언의 과정을 충실하게 거쳐야 한다. 결정 과정의 공유라는 기독교적 일의 가치가 교회와 가정에서부터 체득된다면 그 가치는 또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세속의 일터로 스며들 것이다. 더욱더 결정 과정에 참여할수록 책임감과 즐거움도 늘어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원형적 모습이다.
인권의 자리는 어디인가
피터슨, 하라리, 홀랜드의 ‘인권’
by Derek Rishmawy
2024-03-05
THE KELLER CENTER 학부 때 수강한 인권의 도덕성에 관한 강좌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대부분의 철학 강좌와 마찬가지로 그 강좌도 명백하고 복잡한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강좌 전반부는 인권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왜 인권이 규범적이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를 칸트, 공리주의, 실증주의, 사회적 구성주의 등으로 설명한다. (신학적 이유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예 시작점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21세기에 들어서 더 이상해진 서구인 대부분이 인권이라는 개념을 당연하게 여긴다. 독립선언서에 명시되어 있듯이 권리는 “양도할 수 없으며” “자명”하다. 하지만 인권에 관한 공부가 다 끝나고도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사실은 딱 하나에 불과했다. 그 어떤 세속 철학도 인권의 근거에 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든 주장은 서로를 향해서 치명적인 약점을 들이밀었다. 내가 아는 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도 현대 도덕 담론과 국제법에서 인권이라는 중요한 개념의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철학 수업에서야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도 어깨를 으쓱하고 얼마든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누구나 당연시하는 국제 도덕 질서 전체의 기초가 사실은 벌거벗은 임금님에 불과하다는 게 알려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거기에 실상은 “거기”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이 질문은 대학 강의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개 포럼에서도 논의된다. 공공 지식인이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역사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의 인권 논평을 둘러싼 최근 논란을 한번 살펴보자. X(과거 트위터)를 통해서 유포되는 영상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인권은 천국, 신이랑 비슷하다. 인권도 우리가 만들어 내고 퍼뜨린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주 좋은 이야기이기는 하다. 믿고 싶은 매력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현실이 아니다. 해파리, 딱따구리, 타조에게 권리가 없듯이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인권이란 없다. 인간의 배를 가르고 속을 살펴보라. 거기에 피, 심장, 폐와 신장은 있겠지만, 인권은 없다. 인권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내고 퍼뜨린 허구의 이야기에만 존재한다. 정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라는 것도 인권, 신, 그리고 천국처럼 이야기일 뿐이다. 진짜는 무엇인가? 산이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심지어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은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매우 강력한 이야기. 그래서 믿고 싶지만, 여전히 이야기일 뿐이다. 미국은 실제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이런 주장과 관련한 논란을 살펴보는 건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탈 기독교 문화의 도덕적 의식에 발생하는 몇 가지 중요한 균열을 만난다. 그 속에는 창조의 하나님을 모르기에 구원의 하나님은 아예 알 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교훈이 들어있다. 그냥 이야기라고? 하라리가 무신론자이자 자연주의자인 점을 감안할 때, 그가 비교적 표준적이고 철학적으로 정교하지 않은 형태의 과학주의, 즉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비과학적 신념을 표현하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에게 유일한 “실제”는 산, 벌레, 피와 같은 생물학적 현실이다. 즉, 테스트하고, 맛보고, 냄새 맡고, 물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 천국, 지옥, 국가, 심지어 ‘인권’조차도 진짜가 아니다. 그냥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멋진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결코 사물을 만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췌장 왼쪽이나 DNA나 염색체 구조와 같은 물리적 존재에는 인권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관된 자연주의 형이상학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를 관찰할 뿐이다. 세상은 거기 있으니까 있을 뿐이다. 아무리 있기를 바란다고 해도,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어떤 절대적인 의무가 기록된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런 식의 주장이 마치 만화 속 악당이 자신의 마스터플랜(기후 변화 등을 피하기 위해 지구의 많은 부분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폭로하기 위한 전주곡처럼 들린다는 사실이 하라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거 같다. 상황이 그렇다. 우리가 세상을 합리적으로 대하려면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거기’에 있는 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진실이다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역사가 톰 홀랜드의 획기적인 책, 도미니언에서 언급한 요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권의 개념은 특정 시대와 장소(12세기 이탈리아), 특정 인물(교회법 변호사), 특정 교리(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특정 이야기(창조와 구원에 관한 기독교 서사)를 기반으로 생겼다. 어떤 의미에서 인권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기독교 개념이 세속화한 결과이다. 홀랜드가 단언했듯이, 인권은 “가령 삼위일체보다도 객관적인 실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다 이 두 가지 다 기독교 신학의 작용에서 파생되었다. 이 둘을 다 믿기 위해서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홀랜드는 인권과 그 원천이 진리임을 확인함으로 그 “도약”을 이룬 것 같다.)어떤 측면에서 홀랜드와 하라리는 서로 동의한다. 예를 들어서, 인권에 관해서는 준수해야 할 목표가 없다. 그냥 단순히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홀랜드가 기꺼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하라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홀랜드는 하라리의 경험론적 전제, 즉 “객관적”으로 간주되는 유일한 것은 맛보고, 보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뿐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권과 관련해서는 진짜로 ‘그게’ 있다고, 인권이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이야기와 관계없이 거기에는 ‘그게’ 있다주목할 만한 답변이 하나 더 있다. 홀랜드와의 부분적인 의견 차이를 보이는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은 인권에 관한 한 거기에는 “객관성”이 없다는 공유된 전제에 이의를 제기했다.인권에 관한 교리는 의미 네트워크가 파생시킨 의미론적 냉혹한 결과임이 곧 드러날 것이다. 즉 인권은 단지 단어와 언어적 개념뿐만 아니라 이야기와 행동 패턴 사이의 관계에 걸쳐서 암묵적으로 인코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인간 존재의 구조 아니, 인간의 존재 자체에도 내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즉, “인권”은 지속 가능하고 상향 지향적이며 상호 이타적인 인간 상호 작용을 특징짓는 전형적인 현실의 의미론적 표현이다. 전혀 임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피터슨의 언어는 확실히 비잔틴적이고 복잡하다. 그러나 그는 인간 고유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감각이 사물, 존재 또는 존재 자체의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존재는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나아가서 아무런 사회적 구성이나 뿌리도 없이 서구의 양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회-이데올로기적 괴물이 아니다.물론, 피터슨이 지향하는 형이상학과 신학의 모호함을 고려할 때(그의 견해는 발전하는 진화 심리학 분야의 일부 발견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추가한 융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비유신론적 그리고 준종교적 혼합처럼 보인다), 그가 그 가치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 건 별로 놀랍지 않다. 단지 이 진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든 검증이 가능해지고, 정량화가 될 거라는 일종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합리적인 정당성이나 설명이 없는 단순한 신념으로 보인다.자연법, 자연권, 양심: 억압인가, 지지인가?이런 사상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 “이야기”는 지금과 같은 혼란에 어떤 빛을 비출 수 있을까? 기독교 인류학의 기본 형태를 이해하면 옳고 그름의 다양한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웃 및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도 제시할 수 있다.우리 마음에 새겨진 법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지식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갖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한다(1:18-23). ‘자연신학’과 ‘자연법’이다. 우리의 도덕적, 인지적 특성이 올바르게 기능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숭배와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우리라는 피조물에 적합한 요구를 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요구 중 하나가 다른 피조물을 존엄성과 존경심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즉, 학대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성관계를 가지거나 살해하거나 비방하는 등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24-32절).더 나아가서, 존중해야 할 대상이 단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방인, 즉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거나 초자연적인 계시를 모르고 받지도 못한 비유대인도 포함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바울이 이방인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율법이 없어도 그들 자신에게 율법처럼 행하며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고 말한다(2:14).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15절).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감각, 즉 모든 시대, 문화,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 존재에는 법의 개념이 심겨 있다. 이것이 바로 C. S. 루이스가 “도”(Tao)라고 불렀던 것인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준수해야 하는 명령이 있음을 안다. 따라서 비록 창세기 1장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명확한 교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성경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하며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올바로 대하지 않는 경우에 거기에 대한 적절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한 이성과 이데올로기사회 내부와 사회 간의 도덕적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한 사회에서는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영웅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무질서하고 부당하다고 반대할 수 있을까?비도덕적인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사회는 자신이 가르치고 뿌리내리고 질서를 정하는 포괄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 사실은 세상에 타고난 보편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성경은 인류의 자연적 지식이 죄로 인해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질서의 특징을 분별하는 인간이 능력이 하나님과의 소외된 관계로 인해 깨졌다. 인간의 도덕적 나침반은 더 이상 정북을 가리키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런 점을 드러낸다. 거짓 신을 만들어 창조의 특징을 우상화하고 도덕법을 우리 자신의 왜곡된 형상으로 개조한다. 하라리의 말을 인용하자면, 자연주의는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방식으로 인해서 받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만들어 낸, 스스로를 속이는 멋진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보유한 진실 억압 무기고에서도 이데올로기는 가장 정교한 도구 중 하나이다. 일관성, 물질주의, 진리 파악이것이 바로 합리화되고 진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인 하라리의 기술생물학적 자연주의의 정체이다. 그래도 거기에는 최소한 일관성이라는 가치는 있다. 실제로 이 문제를 연구하는 사회생물학자, 진화 심리학자, 자연주의 철학자는 도덕성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규범적 설명을 만들어낼 방법이 없다는 데에는 다 동의한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와 폴 네델리스키가 쓴 Science and the Good’을 참고하라.)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의 진정한 가치를 부인하는 죄로 물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경향을 점점 악화시키는 현실에 대해서 일관되게 잘못된 해석만을 계속해서 내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반면에 피터슨은 한동안 공개적으로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질문을 놓고 씨름했다. 자연법과 자연권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권리를 명령하고 부여하는 하나님, “원형적 현실”을 저술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존엄성과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하나님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결과 또한 타락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모순 덩어리일 뿐이다. 신앙의 도약?홀랜드의 반응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인권 교리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지만, 자연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견해는 매우 신앙주의(fideistic)와 역사주의에 치우쳐 있다. 홀랜드에게 있어서 “인권”에 대한 논의가 복음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 특별한 방식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인권”이 “객관적인” 현실로서 자연에 내재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대부분의 윤리가 올바른 이야기를 믿기로 선택하는 문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맞서 신학자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은 다음과 같이 썼다.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할 수 없다. 역사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은 정반대의 점을 지적하기 마련이다. 역사가 모든 의미와 가치에 대한 범주적 매트릭스로 만들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무언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이야기라면,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하는 이야기란 있을 수 없다. 오도노반의 주장은 복음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 바깥쪽에 있는 현실에 관한 서사라는 것이다. 현실과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이 특정한 방식에 의거해 특정한 모양으로 만든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식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법과 자연권은 자연의 현실에 종속되거나 부과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에도 불구하고 확증하고, 명확히 하고, 정화하고, 또 중요한 경우에 확인시키는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초자연적 계시는 자연계시에 대한 인간의 타락하고 죄악된 인식을 바로잡는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 있는 진리를 제공함으로써 계시를 완성시킨다.자연적 도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 피터슨은 옳다. 그 부분을 자연 너머로부터 오는 확증과 명확한 계시가 필요하다는 점으로 인식한 홀랜드로 마찬가지로 옳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이런 측면에서 사실일 때에만 그 이야기는 인간 존엄성을 확증함으로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도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결국, 오직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이야기만이 우리가 뼈속 깊이 알고 있는 것을 믿고, 이해하고, 확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실의 이야기에 대한 자신감자,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도 없고 복음도 없다면 하라리가 어느 정도 옳은지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단지 고기이며, 그 속에 인간 본성의 존엄성을 주장할 합리적 근거는 없다.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 만큼이나 오래된 주장이지만, 아무리 하라리가 이 문제에 관해서 틀렸고 대부분의 사람이 더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주장을 지금 현실과 관련이 없고 또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 본성의 존엄성에 대한 진실을 공개적으로 억압하는 것을 꺼려한다. 극도로 세속적인 사람이라도 피터슨과 같은 본능을 갖고 있다. 자신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기독교는 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 이성적 힘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한 그에 관한 정당화를 제공한다. 성경의 진리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나라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에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존엄성을 갖고 있음을 확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복음과 함께 오는 더 큰 존엄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죽으시고, 같은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와 죄, 불의의 대가까지 치르시고, 그들을 예정된 영광으로 회복시키셨다. 할렐루야!둘째, 이 결과에는 반직관적인 부분이 있다. 오늘날 기독교 교리와 진리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기적이 진짜냐의 여부가 아니라 도덕성과 관련이 있다. 즉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자연 질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 특히 결혼과 남성과 여성의 본성에 대해서 갖고 있는 기독교의 믿음과 이해에 관한 반대 때문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은 뒷걸음질 치며 후방을 보호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기독교의 관점이 사랑과 정의라며 스스로를 옹호하기에만 바쁜 모습처럼 보인다.이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도덕적 질서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진리를 위해 변증적 이점을 강조할 수 있는 최적의 현장이다. 세속적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서기에 점점 더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럴수록 기독교는 세상과 비교해서 더 확고하게 대조를 이루며 다른 이데올로기가 고작해야 희미하게 제시하는 소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우리가 항상 믿어왔던 것을 단순히 확증하는 역할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우리 양심의 진실을 억압해 온 모든 세상의 방식에 대한 시정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만 한다. 위로와 격려를 주는 말씀뿐만 아니라 심판을 약속하는 말씀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대량 학살, 강간, 인종 차별, 편견 등 이웃에 대한 인류의 폭력적인 범죄와 죄악,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 다른 영역의 진실까지도 억압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오늘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성생활, 성적 취향, 성 정체성에 관해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하신다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릴 것이다. 셋째, 우리가 이러한 점들을 강조할 때,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창조되고 타락한 형상을 지닌 자들로서 다른 창조되고 타락한 형상을 지닌 자들에게 말한다. 그렇기에 겸손하고 자신감 있게 말해야 한다. 불의로 진리를 억압하는 모든 방식에 대해 정기적으로 말씀으로부터 교정 받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들에게 나아간다. 그렇다고 겸손이 나태함이나 절망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진리와 성령의 능력만이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접근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증거를 남겨 두셨다. 율법은 그들의 마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들도 지금 양심을 누르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사모한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심판으로 해방되기를 갈구하고 있다(롬 2:16).원제: Is There a ‘There’ There? Peterson, Harari, and Holland on Human Righ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사물인터넷 시대의 목회
by 전재훈
2024-03-04
나는 식물에 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다. 화분을 선물 받으면 100퍼센트 죽게 된다. 그래서 교회 안에 식물은 이미테이션만 존재한다. 꽃꽂이도 싫어한다. 무엇인가가 내게로 와서 죽어가는 것이 너무 싫다.시대는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꽃의 정보를 내가 알아보고 관리해야 했지만, 이제는 일방 소통의 시대가 종식됐다. 꽃을 파는 사람이 꽃에 대한 정보를 화분에 팻말 형태로 전달한다. 꽃 주인의 배려로 꽃의 이름과 물 주는 시기, 관리 방법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이 시대는 스마트한 시대이다. 화분에 팻말이 아닌 태그가 붙어있고 거기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꽃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스마트링크 기능을 통해 스케줄화 시킬 수 있으며, 알람 기능을 통해 물 주는 시기와 흙갈이 시기를 통보받을 수 있게 된다. 시기를 놓쳐 식물을 말려 죽이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더욱 광범위한 소통의 시대가 된다. 즉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다자간 소통이 가능해진다. 화분에 심어둔 센서가 꽃의 특성에 따라 흙의 상태를 파악해 주인에게 알려주게 된다. 물이 필요한지, 비료가 필요한지 즉각적인 안내를 해 준다. 가끔 교회에서 물을 이중으로 주어 꽃을 죽게 만드는 일 따위는 없어진다. 어느 정도의 물이 필요한지, 화분 온도는 어떤지, 앞으로는 화분이 내게 말을 거는 시대가 올 것이다. 사물인터넷 시대의 다자간 소통은 화분이 스프링클러에게 대화하고, 전기스토브에게 말을 걸게 된다. 스프링클러는 화분의 요구에 따라 물을 정확하게 줄 것이고, 전기스토브는 온도를 조절해 줄 것이다. 나는 화분의 꽃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되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물인터넷 시대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상용화되어 있어서 비닐하우스 농장에서는 현재 사용 중이다. 예전처럼 일일이 하우스마다 들어가 온도를 체크하고 습도를 조절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심어 두고, 때가 되어 거두기만 하면 된다. 꽃에 말을 거는 친구들을 4차원이라고 놀렸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사물에게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사물의 인격화 놀이를 많이 해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사물과 대화하는 날이 오고, 사물 간에 소통하는 일이 생겨난다. 밤이 되면 장난감들이 상자에서 나와 서로 놀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상자 속으로 숨어 버리는 상상이 더 이상 상상만은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신학적인 생각 속에는 자연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믿음과,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다는 믿음까지 있었다. 자연은 우리가 숭배하는 대상이 아니었지만, 은혜를 받고 나면 자연 속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움과 신비를 보고 찬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런 사상은 모든 사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과 종이 한 장 차이로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사물인터넷 세상이 온다면 자연 숭배 사상이나 범신론 같은 것은 더 이상 그 의미를 발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어 다자간 소통이 일어나면 신의 능력보다 과학의 능력을 더 많이 신뢰하게 될 것이고, 영적 영감보다는 객관적 데이터를 가진 빅데이터가 그 빛을 더 크게 발휘하게 된다. 이럴 때 앞으로 우리의 자녀들은 모든 사물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과학을 생각하게 되고, 기도에 의지하기보다 정보에 의지하는 이들이 될 것이다. 이는 분명 신학의 큰 도전이 될 것이고, 시대에 맞게 신학을 재정립해야 할 때를 맞게 될 것이다. 분명 과학의 발달은 인류를 윤택하고 편안하게 해 주었다. 쓸데없이 고민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고, 천형 같았던 많은 질병도 극복하게 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과학에 의지해 살아갈 것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고, 이런 현실들을 직시하여 목회를 다시 점검해 봐야 할 시기가 되었다.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면 교회의 현장에서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의자에 앉기만 해도 당일 출석수를 예배 중에 실시간으로 인지하게 될 것이고, 주차장의 효율성을 높이게 될 것이며,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막는 등 아주 효과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신학과 목회를 미리 정립하지 않으면 과학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절약하듯 교인 수도 절약하게 될지도 모른다.
김은득의 ‘카이퍼 통신’
by 김은득
2024-03-03
카이퍼 통신 1 한국 교회의 후배들에게! 카이퍼 통신 2 위기의 시대, 참된 리더십을 바라며카이퍼 통신 3 직장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카이퍼 통신 4 미국형 칼빈주의를 극복하라카이퍼 통신 5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주권카이퍼 통신 6 도대체 칼빈주의가 뭐길래?카이퍼 통신 7 영역 주권의 역사적 배경카이퍼 통신 8 영역 주권은 신정주의적인가?카이퍼 통신 9 영역 주권은 세속주의를 부추기는가?카이퍼 통신 10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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