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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혁하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선교에서...
루펜 다스(RUPEN DAS)
2022-11-06
가난이나 사회 정의를 다루는 기독교 단체의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변혁이라는 단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생들에게 그들의 열망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예멘의 쇠약해진 어린이나 우크라이나, 시리아, 이라크의 황폐한 도시, 난민의 행렬 등의 이미지들과 인종차별과 테러, 잔혹한 갱단의 전쟁, 인신매매, 심각한 빈곤에 대한 이야기들은 너무도 지독해서 어떤 인간의 존엄성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모습들은 세상이 변화하고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매일 일깨워준다.변혁이란 무엇인가?“변혁(transformation)”이라는 단어[1]는 기독교 개발 NGO단체에서 자주 사용하는 어휘이며, USAID와 같은 정부 기관에서도 사용한다. 그러나 형편없는 변화를 약속하거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도록 독려하면서 좌절과 실망을 안겨주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변혁의 의미는 무엇인가?복음주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역이 생명과 영생의 영적 차원에만 초점을 맞추는지, 아니면 오늘날 세상의 빈곤과 사회적 불의를 다루는 것도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왔다.[2] 우리의 증거가 말과 행동 모두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행동의 정확한 본질이 분명하지 않다.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세계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직면한 빈곤과 악의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간에 인간은 세상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깊은 의식에 기반하여 반응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는 데 집중한다. 사회 정의에 중점을 두고 지속적이고 계속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즉 빛과 소금이 되라고 부름을 받았다. 소금은 부패를 막고, 빛은 어둠을 이긴다. 신약에서 “선을 행하라”(갈 6:9-10)는 권면은 사도 바울의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어구로서, 시민과 공동체 생활에 재정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격려한 선행은 가난과 사회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3] 그렇다면 변혁의 개념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변혁의 도전“세상을 바꾸겠다”는 열망은 추구할 가치가 있지만, 실상은 변혁이 복잡하고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변혁은 세상의 물리적 현실을 직시하고 삶의 질적 향상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변혁은 일련의 활동으로 달성되지도 않는다. 근본적인 가치와 태도를 다루지 않는 프로젝트나 이니셔티브(주도권)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변화가 지속 가능하려면, 삶의 영적 차원에 기반을 두고 있는 태도와 가치, 윤리도 다루어야 한다. 많은 프로젝트가 사람들을 빈곤과 결핍 속에 가두는 사회적, 정치적 장벽을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기독교 구호, 개발 옹호'(Christian Relief, Development, and Advocacy, CRDA)의 최근 기사는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변혁으로 이어지는)을 측정하기 위한 증거 기반의 지표를 제안한다. 책임은 매우 중요하며 모든 프로그램에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 기사에서 제안하는 많은 지표들은 영적인 생명과 사명감이 있는지 분별하기 위한 대리 지표들이다.수보드 쿠마르(Subodh Kumar)는, “모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Christ-Centered Organizations)의 사명은 개인과 사회의 변혁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확장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4] 여기에서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이해이다. 하나님 나라의 왕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모든 것을 그의 권위 아래 두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1900년대 초 실패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고 세우는 사회 복음 사상과 같지 않은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분께서 우리를 그 나라로 초대하고 계신다.[5]신학자인 레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변혁이 못일어나게 하는 개인과 사회의 결함 있는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사람은] . . . 생존을 위한 필요 이상으로 식욕을 확장시키는 상상력을 선물이자 저주로 받았다. 인간 사회는 인간 생명의 보존과 충족을 위해 제공하는 물질적, 문화적 재화의 평등한 분배라는 문제를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6]어떤 복음주의자들은 변혁을 하나님 나라 건설과 동일시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샬롬 개념을 변혁의 개념과 동일시한다. 즉, 세상의 변혁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샬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지역사회 개발 프로그램에서 당연히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존 스토트(John Stott)는 이에 대해 경고한다. 구약은 그 개념을 정치적, 물질적 복지를 포함하여 설명하지만,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다.[7] 신약에서 약속된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과 교제, 그리고 서로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엡 2:13-22).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는 넘쳐서 다른 이들을 축복할 수 있는 물질적인 축복이 있을 수 있다. 스토트는 샬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그러므로 샬롬은 메시아가 그의 백성에게 가져다주는 축복이다. 새 피조물과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서 나타난다(고후 5:17) . . . 여러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의가 말하자면 세상의 여러 부분으로 ‘넘쳐 흐르는’ 것을 본다. . .[8]연고 속의 파리불행하게도, 빈곤과 사회적 불의에 대한 현재의 논의 중 어느 것도 인간의 죄의 실재, 즉 개인의 마음 속에 있는 죄와 많은 사회적, 법적, 경제적 구조에 내재된 죄를 다루고 있지 않다.[9] 악과 오만, 권력, 탐욕의 형태로 나타나는 죄는 세상의 많은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지속적인 변화나 변혁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곧 악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나타나서 달성된 것을 파괴하고 축소 또는 약화시킨다.죄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죄를 처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지속 가능한 변화를 약속하게 되면, 그것을 실행하고 지키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공동체의 유력한 인물이나 파벌의 탐욕으로 인해 달성한 것이 훼손될 때 실망하게 된다.인간의 죄가 이 세상에 깊이 뿌리박힌 현실에서 사회적, 정치적 변혁이 가능할까? 그것은 성경적 개념, 즉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추구하고 성취하도록 부름 받은 것인가? 누구의 변혁인가?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세상을 변혁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쓰여 있지 않다.[10] 그러나 변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우리를 그와 함께 하도록 초대하시기 때문에 유효한 성경적 개념이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과 피조물을 구속하는 과정에 있으며, 창조된 시간이 영원으로 합쳐지면 만물을 변화시키실 것이다. 이 영원의 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갈 6:10),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신실한 청지기(창 1:28)가 되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그러나 기독교 개발 전문가들이 사회 변화를 계획할 때, 그들의 의식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기능적으로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실은 커뮤니티 개발과 변화를 위한 노력이 인간 중심적이며, 인간은 스스로를 사회 변화의 중심이자 주요 행위자로 간주한다. 초점은 커뮤니티를 동원하고, 커뮤니티 평가 및 프로젝트 설계를 올바르게 수행하고, 참여와 지역 소유권 및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면서 적절하게 구현하는 것에 맞춰진다. 이러한 작업이 효과적으로 수행되면 변혁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변혁이 되지 않으면, 계획이나 프로세스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이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간과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열방의 흥망성쇠에 관여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이루시고 그의 나라를 세우실 길을 모색하는 지역사회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주여, 우리가 계획하고 진행하는 일을 축복하소서”라고 기도하기 보다, “주님, 당신은 어디에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며, 우리가 어떻게 참여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의 나라가 임하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공동체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변화에서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론 사이더(Ron Sider)가“평화와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은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고 한 말은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보여준다.[11] 하나님은 반역하는 세상에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과정에 있으며, 언젠가는 이 땅에서 영광 가운데 다스리실 것이다.신학자 N.T. 라이트(N.T. Wright)는 변혁을 창조와 심판이라는 쌍둥이 교리에 근거하여 설명한다.창조의 선함을 거두어라. 그러면 심판 날에 세상은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우리는 실체가 없는 구름 위에 앉아서 실체가 없는 하프를 연주하고 있게 된다. 심판을 없애면, 존재와 역사가 끝없는 순환을 한다고 보는 범신론자 외에는 아무 희망 없이 시끄럽게 돌아가는 세상만 남게 된다. 창조와 심판을 합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얻게 된다. 이것은 무로부터가 아니라 구(ex vetere)에서 창조된 것이요, 무로부터가 아니라 옛 것, 즉 기존의 것에서 창조된 것이다.[12]흠이 있는 인류와 썩어가는 피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것의 선함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은 안심이 된다. 그는 악을 다루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한 구로부터 새로운 창조(ex vetere)를 완성할 것이다. 그는 그의 일에 협력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오늘날 변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는 거의 없다. 현대 선교 역사의 개척자들은 변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버트 우드베리(Robert Woodberry)의 연구는 서아프리카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민주주의의 시작을 촉진하는 데 미친 영향을 기록하고 있다.[13]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는 인도에서 사티(sati) [14]를 폐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클랩햄 섹트(Clapham Sect)는 대영제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게 했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변화의 대리인으로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다.변혁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하나님은 사회를 변혁시키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왕의 실재에 대한 증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서 증거하고 협력하는 방법은 긍휼을 보여주고,[15] 정의를 옹호하며[16], 죄로 가득하고 깨어진 세상에서 구세주를 선포하는 것이다.[17] 미주1. 신약에서 변혁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변형(metamorphoo) 인데 다른 형태로 변화하다, 변화되다를 의미하며, 수동태로 그리스도의 변형(transfiguration)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의미는 변화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근본적이고 총체적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커뮤니티 개발 프로젝트는 점진적인 변화를 다루며 본질적으로 진정한 변형(transformative)이 아니다. 커뮤니티 개발에서의 변화가 갖는 의미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Rupen Das, Compassion and Mission of God: Revealing the Hidden Kingdom (Carlisle: Langham Global Library), 135-163을 참조하라.2. For more on this debate and to understand the issues that undergird each position, see Das, Compassion and the Mission of God. 3. N.T. Wright, Paul for Everyone: Galatians and Thessolonians (London: SPCK, 2002), 79. 4. Subodh Kumar, ‘Toward Building Evidence of Kingdom Impact,’ Christian Relief, Development, and Advocacy 3, no. 2 (2022): 24–36.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왕국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이 건설하고 계시다. 우리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기도해야 한다. 6. Reinhold Niebuh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A Study of Ethics and Politics (New York, NY: Scribner’s, 1932), 1. 7. 주변의 많은 왕국들이 고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번영했고 일부는 일정 기간 동안 평화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구약에서는 이 번영을 하나님의 샬롬으로 돌리지 않는다.8. John. R. W. Stott, 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 (Downers Grove, IL: IVP Books, 1975), 31.9. The following have written extensively about sin embedded in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structures in society: Walter Wink, Engaging the Powers: Discernment and Resistance in a World of Domination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2); Niebuh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A Study of Ethics and Politics; Walter Rauschenbausch,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New York, NY: The MacMillan Company, 1917); Jayakumar Christian, God of the Empty-Handed: Poverty, Power and the Kingdom of God (Monrovia, CA: MARC, 1999). 10. 정의를 구하라는 명령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의 엘리트와 권력자가 정의를 위해 맞서 싸우도록 주신 것이다(미 6:8). 11. Ron Sider, Lecture, Acadia Divinity College, Acadia University, Wolfville, NS. May 27, 2013. 12. N.T. Wright, ‘Jesus Is Coming – Plant a Tree!’ Plough, 2015, https://www.plough.com/en/topics/justice/environment/jesus-is-coming-plant-a-tree. 13. Robert D. Woodberry, ‘The Missionary Roots of Liberal Democracy,’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106, no. 2 (2012): 244–74. 14. 죽은 남편의 장작더미에 과부를 태우는 관습. 15. 갈 2:10, 벧전 3:8, 골 3:12, 요일 3:17, 잠 19:17, 22:9, 16, 약 2:14-17 16. 사 1:17, 미가 6:8, 슥 7:9-10, 잠 14:31, 22:22 17. 벧전 3:15-16, 시 96:2-4, 마 28:18-20, 롬 1:16 사진 출처Photo by meo루펜 다스(Rupen Das)는 캐나다 성서공회의 회장이며 연합성서공회의 집행이사회와 세계평의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그는 토론토(Toronto) 틴데일(Tyndale) 대학의 연구교수이기도 하다.
경청하는 자세: 겸손과 사랑, 소망으로 경청하는 8가지 ...
데이비드 베넷(David Bennett)
2022-10-29
최근에 나는 오레곤 심포니와 함께하는 공개 리허설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음악가 집안 출신이고 나의 귀는 다양한 악기와 멜로디, 리듬을 들을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어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그런데 리허설을 하면서 놀란 것은 지휘자는 들을 수 있는데 나는 듣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내가 놓친 미묘함과 뉘앙스를 수정하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계속해서 멈추게 했다.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경청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그 후, 주말에 두 명의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신경과학자가 노래를 부르면 인간의 뇌에서 독특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들은 이전에 발견되지 않은 청각 피질의 뉴런 그룹이 노래에 특별히 반응하는 것을 확인했다. 말이나 다른 소리, 심지어 기악에도 반응하지 않고 오직 노래에만 반응한다고 한다.우리는 경청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때로는 놀랍도록 구체적인 방식으로 들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잘 듣도록 훈련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듣고자 하는 열망이 필요하다. 경청의 성경적 기초경청은 경건한 지혜의 일부이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고 잠언 20:12에서 말한다. 더욱이,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고 했고,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고 했다.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야고보서 1:19)라고 조언한다. 선한 목자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분을 따르는 자들의 특징은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요 10:27).우리는 어린 사무엘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어린아이의 열린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경청하는 자세는 성경적 믿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경청에 관한 나의 경험내가 경청에 대한 생각을 공유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첫 반응은 나 말고 다른 사람, 예를 들어, 임상 심리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경청에 대한 다양한 기술의 도구 상자를 갖춘 전문가와 같은 사람이 이 일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러나 나는 지난 50년 동안 교회 리더십에 관한 두 개의 논문과 인도에서 두 개의 위탁 연구를 포함하여 수많은 인터뷰 기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47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며 두 자녀와 여덟 손주를 두었고, 미국의 서로 다른 세 지역에서 여러 교역자와 함께 교회를 목회한 후, 지난 12년을 로잔의 글로벌 가족을 섬기며 꽤 많은 경청의 경험이 있었음을 깨달았다.그래서 나는 경청에 대해 개인적으로 배운 몇 가지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짧은 생각을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나누고 싶다. 1. 경청하는 자세는 무엇을 전달하는가?첫째, 경청은 겸손한 자세이다. 내가 경청한다는 것은,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알고, 어디서 왔는지, 무엇이 그들을 형성했는지 알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된다. 듣는 동안에는 판단을 보류하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을 피해야 한다.게다가, 나는 당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하는 상황에 대해 무지할 수도 있다. 내가 실수할 수도 있고, 사각지대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지식, 관점, 통찰력이 나를 일깨울 수 있다. 나는 배움이 필요하다. 당신은 내가 필요한 것을 공유할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경청하려면 겸손이 필요하다.둘째, 경청은 사랑의 자세이다. 듣는다는 것은, ‘당신이 중요하고, 당신이 말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나는 당신을 더 잘 알고, 더 잘 이해하고 싶다. 당신은 내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이야기를 나눌 때 기꺼이 당신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고 싶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경청한다는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셋째, 경청은 희망의 자세이다. 내가 누군가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은 서로의 대화를 통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는 의미이다.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고, 함께 나아갈 수 있다.지리, 문화, 언어, 생활 경험, 교육, 사회적 지위, 나이가 아무리 달라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고,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전진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더 나아질 수 있다. 협업의 기반을 찾을 수 있다.경청은 겸손과 사랑, 그리고 희망을 표현한다. 2. 무엇을 들어야하는가?그렇다면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첫째, 말뿐 아니라 그 말 뒤에 숨은 감정에도 귀를 기울이라. 그들이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둘째, 말하는 것뿐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에도 귀를 기울이라. 타임라인에서 누락된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상황이 이야기의 일부가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포함하여 어떤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며 어떤 음성을 언급하지 않는가? 때때로 나는 후속 질문을 함으로써 말하지 않은 것을 끌어낼 수 있다.셋째, 그들이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이유에 귀를 기울이라. 예를 들어, ‘왜 그렇게 느끼는지 말해보세요. 무엇이 당신을 그런 결론에 이르게 했나요?’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런 대화를 통해 그들의 관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요소가 있을 수 있다. 3. 경청하려는 사람과 소통하기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려 할 때 유용하다고 느꼈고, 다른 사람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일 때 감사했던 여덟 가지 방법을 간략하게 나열하고자 한다.개방형(open-ended) 질문을 하라. 나는 몇 가지 가능한 대답이 있는 질문을 함으로써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질문을 하기 전에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검사와 같이 대화를 통제하는 주도적인 질문을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예를 들어, 주의 깊게 듣는 사람으로서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라고 묻기보다는 “당신의 영적 여정의 주요 단계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다.말을 많이 하지 말라. 침묵을 채우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라. 대화 중에 잠시 멈출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라. 내가 정말로 잘 듣는다는 것은, 단지 고개를 끄덕이며 들으면서, 내 삶의 유사한 점을 공유하거나 불쑥 대답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 듣는다는 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다. 잠잠할 때가 있고(전 3:7) 들을 때가 있다.반응을 자제하라. 나는 그들이 말하다가 나오는 지적 또는 감정적 촉발제(trigger)에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경청하고 있음을 전달할 수 있다. 좋은 경청자로서 첫째 중요한 것은 논점과 반대 의견을 논하지 않는 것이다. 목회자로서, 그리고 부모로서 내가 배운 것은 내가 충격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나 분개, 수치심, 비난으로 폭발하거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또는 “어떻게 감히 나한테?”와 같은 말을 하는 것보다 누군가를 입 다물게 하는 더 빠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세심한 신체 언어(body language)를 보여주라. 이것은 문화마다 다를 수 있지만 미국 문화에서는 열린 자세, 앞으로 기울이기, 눈 마주치기, 고개 끄덕임, 짧게 말로 인정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집중하라. 형식적으로 대답하면서 문자를 확인한다거나, 다른 자료 혹은 TV를 보거나, 이메일을 확인하지 않고 집중함으로써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전달할 수 있다. 좋은 경청은 멀티태스킹을 할 때가 아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듣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상대방이 당신이 듣고 있는지 묻거나, 당신이 정말로 듣고 있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바로 그 사실이 위험한 경고 신호이다.상대방이 한 말을 확인하라. 내가 몇 년 전에 배운 한 가지 놀라운 방법은 다른 사람의 의사소통에 응답하기 전에, “내가 듣기로 당신이 말하는 것은. . .” 하고 상대방의 요점을 다시 말한 다음, 내 대답을 하기 전에 상대방이 내 이해를 확인하거나 수정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더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초대하라. 나는 이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 강력한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더 이야기해 주세요”라 말하고 대답을 기다리면 된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완전히 풀기 전에 여러 번 말해야 할 수도 있다.메모를 하라. 나는 이것이 상황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경우에는 메모하는 것이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수십 개 도시의 수백 명의 지도자를 대상으로 인도에서 연구하는 동안, 나는 왜 메모를 하는지 미리 이야기했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들이 말한 내용을 검토하고 싶다고 설명하고 기억력만으로는 부족함을 고백했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고 감사했다. 그러나 나는 눈을 잘 마주치면서 빠르게 글을 쓰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래서 때로는 나중에 내 메모를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내가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는 결론을 하나 덧붙이겠다. 즉, 답변, 평가, 결론 또는 행동을 하기 전에 잘 들었는지 확인하라는 것이다. 잠언 18:13을 기억하라.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그러한 지혜가 필요하다.편집자 주: 지난 몇 년 동안 로잔 운동은 2024 서울 대회를 앞두고 세계 선교의 주요 우선순위를 평가하기 위해 전 세계의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광범위한 공청회(calls)를 가졌다. 문상철(Steve Moon) 박사와 에이코 타카미자와(Eiko Takamizawa) 박사가 글로벌 리스닝 팀( Global Listening Team, GLT)을 이끌며 이 공청회들의 요약과 분석을 담은 전체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기사는 경청의 중요성에 대해 저자가 GLT에 했던 연설을 각색한 것이다.사진 출처Original illustration by Sandy Swartzentruber데이비드 베넷(David Bennett)은 로잔 운동의 협업 및 콘텐츠 글로벌 부국장이다. 그는 청년 사역자, 부목사, 교회 개척자로서, 그리고 캘리포니아, 오레곤, 매사추세츠에서 세계적으로 관련된 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겼다. 그는 MIT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고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DMin 및 PhD 학위를 받았다.
로잔의 새로운 지역 총무들
서울 2024 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리더십 확장
2022-10-22
로잔 운동은 2024 서울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전 세계 거의 모든 12개 지역에서 리더십을 두 배로 늘렸습니다지난해에 로잔 운동은 세계의 12개 지역에서 모두 리더십을 거의 두 배로 늘렸다. 2021년 이전에는 각 지역에 1명의 지역 이사가 있었지만, 지난 1년 동안 그 수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2명으로 증가했다. 이제 각 지역에는 팀 리더십을 행사하는 지역 팀이 생긴 것이다.지역 담당 글로벌 부국장인 라스 뉴먼(Las Newman)은 “지역 리더십의 확대는 두 가지의 결과입니다”라고 말한다.“첫째, 로잔 이사회는 리더십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가 함께 섬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케이프 타운 언약(Cape Town Commitment)에 따라 이를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둘째, 2024년과 그 이후를 위해 지역을 동원하는 큰 과제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지역 팀과 효과적인 팀 리더십이 필요합니다.”가장 최근에 로잔 팀에 합류한 공동 지역 총무는 불어권 아프리카의 서지 아르만드 야오(Serge-Armand Yao)와 북미의 앤드류 앤디 쿡(Andrew ‘Andy’ Cook), 오세아니아의 쥴리안 래어드(Julieanne Laird)입니다. 2022년 6월 로잔 지역 총무들을 위한 기도 시간코트디부아르(Côte d’Ivoire)에 있는 the Institut Supérieur de Théologie de l’Alliance Chrétienne의 학장이자 Université de l’Alliance Chrétienne d’Abidjan의 구약학 교수인 서지 아르만드 야오(Serge-Armand Yao)는 “나에게 로잔 운동은 큰 기쁨으로 간직하고 있는 유산입니다”라고 말한다. “모든 지역과 의견들, 세대의 지도자들을 연결하여 복음의 전진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유산입니다.”쥴리앤 래어드는 지난 12년 동안 호주 로잔의 의장이었다. 그녀는 현재 호주 시티 투 시티(City to City Australia)에서 아웃리치 및 전도 전문가로, 그리고 멜버른 성공회 교구의 교회 개척을 위한 의원으로 일하고 있다.“나는 오랫동안 로잔의 개념을 좋아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조직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좋고, 같은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 좋아요. 로잔은 특정 역할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 서로 알아야 하는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최고의 두뇌와 최고의 실무자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에드 스테져(Ed Stetzer)와 함께 북미 지역 공동 대표인 앤디 쿡은 휘튼 대학(Wheaton College) 빌리 그래함 센터(Billy Graham Center)의 전무 이사이기도 하다.“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고 나누는 공유된 사명에 하나님께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연합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캐나다와 미국의 목사, 전도사,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여하면서 우리는 복음과 우리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복음의 변혁적인 힘에 대한 새로운 초점을 보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상명령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전 세계의 자매들과 형제들로부터 배울 수 있어 기쁩니다.”서지 아르만드(Serge-Armand)와 쥴리안(Julieanne), 앤디(Andy) 외에도 5명의 다른 지역 이사가 작년에 임명되었다. I’Ching Thomas는 2021년 7월 동남아시아 공동 지역 이사로, Esther Chengo는 2021년 10월 영어와 포르투갈어 및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EPSA), 2022년 1월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Analia Saracco, 유럽의 경우 Jim Memory 및 Usha Reifsnider가 임명되었다.”힌두교에서 개종한 1세대이자 이민자 2세대로서, 선교사로서, 그리고 문화인류학에 학문적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로잔의 신학적, 선교학적 성찰은 여러 면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라고 우샤는 말한다. “제3세계 출신 개종자, 이민자 관점에서 로잔 운동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자 책임입니다.”새로운 지역 총무의 임명은 로잔 운동이 2024년에 있을 다음 주요 글로벌 대회를 준비하면서 이루어졌다. 서울 2024는 또한 로잔 운동 50주년을 기념하는 해가 될 것이다.서울 2024를 준비하기 위해 많은 지역에서 앞으로 몇 달 안에 대규모 모임들을 개최할 예정이다.쥴리안(Julieanne)은 “호주에서는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만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오세아니아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우리는 영향력 있는 주요 지도자들을 모아서 그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오세아니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섬기며 그들이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도울 것인지를 모색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2024년 서울에 있어야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기여할 수 있는지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출신인 서지 아르만드(Serge-Armand)는 EPSA 지역뿐만 아니라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의 로잔 지역 총무들과 협력하여 2023년 대륙 전체의 모임을 기대하고 있다.“목표는 세계 아프리카의 관점에서 복음화의 도전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제 기도는 불어권 아프리카의 주요 지도자들이 이 아프리카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024년 서울에서 열릴 글로벌 대화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대륙 전역의 로잔 지역 총무.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Stephen Mbogo , Serge-Armand Yao , Emmanuel Ndikumana, 에스더 쳉고(Esther Chengo), Michael El Daba )ESPA지역의 공동 대표인 에스더 쳉고(Esther Chengo)는 “세계 선교에서 아프리카의 중요성과 선교사를 파송하는 데 가장 크고 역동적인 대륙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이 모임은 폭넓은 협의와 깊은 성찰, 그리고 대륙 내에서 필요한 협력뿐만 아니라 글로벌 선교에서 우리의 역할에 대한 추가 분석을 장려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그녀는 계속해서, “세계 선교를 위해 모든 세대에 걸쳐 모든 종족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참여하고자 하는 로잔 운동의 다면적 성격에 흥분됩니다!”라고 했다.서울 2024를 위한 지역 모임 외에도, 대표들은 각 지역에 대한 기도 지원을 구축하고, 로잔 이슈 네트워크 및 YLGen(젊은 지도자 세대 HYPERLINK “https://lausanne.org/ylgen” \h )팀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일도 할 것입니다.Photo credits: Photo by Monstera
스리랑카의 기독교
카멜 위라쿤(Kamal Weerakoon)
2022-10-15
오늘날 스리랑카의 기독교는 왕성한 동시에 연약하며, 핍박 받고 있다. 긴 내전의 사회적 결과들로 기독교인의 삶은 어려운 상태이다. 불교 민족주의는 복음전도를 식민주의, 회심을 반역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교파에 속하지 않은 신생 교회들은 부실 운영과 개인 숭배, 거짓 가르침 등에 연약하다. 기존 교파에 속한 교회들은 신학적 자유주의와 현실 안주의 구습으로 힘겨워하고 있다. 그러나, 위탁된 리더십과 초 교파적인 협력이 미래를 향한 길을 구축하고 있다.유럽의 식민지화와 주류 교단들기독교는 유럽 식민주의 시대에 스리랑카에 들어왔다:1505년, 포르투갈이 천주교를 소개하였다.1600년대 중반,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네덜란드 개혁 교회를 들여 왔다.1802년 네덜란드가 그들의 영토를 영국에 이양하였다. 영국은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및 구세군 교회들을 들여 왔고, 이들은 현재까지 계속해서 복음전도와 교회 개척, 교회 학교, 그리고 사회 봉사 등의 사역을 이어 나가고 있다.1948년의 독립 이래로, 신할라 족과 타밀 족 간의 내전, 다시 재기된 불교 민족주의, 그리고 신생 독립 교회들이 이끄는 복음주의적 부흥이라는 세 가지 위력이 이러한 유럽 열강의 역사 뒤에 펼쳐지게 되었다.내전의 사회적 영향신할라 족과 타밀 족은 스리랑카의 대표적 두 종족이다. 신할라 족은 자신들이 이 나라의 토착 종족이라 여긴다. 타밀 족은 남 인도 지방 타밀나두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지만, 스리랑카에서 2천 여 년을 살아왔기에, 자신들은 스리랑카인 타밀족이라고 간주한다.영국 통치로부터의 독립으로 신할라 민족주의가 떠오르게 되었고, 이는 모든 타밀족의 공적인 ‘성공’ 혹은 ‘특권’들에 대한 분개로 이어졌다. 정부는 신할라 족이 점령하고 있었고, 꾸준하게 신할라 족에게 이익을 주고 타밀 족에게는 불이익을 주는 쪽으로 정책을 제정해갔다.타밀 족은 이러한 인종적 정책에 불만을 품었다. Th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LTTE)은 무장 투쟁을 벌여 스리랑카의 북쪽과 동쪽 지방을 타밀 족을 위해 독립된 ‘조국’ (타밀어로 eelam)으로 요구했다. 이 내전은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지속되었으며, 8만에서 10만에 이르는 생명이 희생되었다.전쟁 동안에, 양측 모두에서는 인권 탄압1과 언론 통제가 자행되었다:경찰과 군부는 사법 절차 없이 체포, 심문, 형벌, 심지어는 처형까지도 자행하였다.LTTE는 협박, 암살, 인질 구금 등의 행위를 자행하였다.독립적 취재는 억압되었다.따라서 개인적 불만/원한을 해결하기 위해 쉽게 속임수와 폭력이 사용되었다:정부나 군대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또는 이들과 연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원수를 폭행하거나 암살한 뒤 이 문제를 ‘조용히 덮을’ 수 있었다.누군가의 부와 사회적 지위는 그들의 성품이나 행위보다는 그들이 가진 사회적 연줄,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그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조종하려 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점차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오늘날,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 개개인들은 진리의 모습이신 그 분의 이름으로 문화를 거슬러, 진리와 공의를 위해 맞설 임무에 직면해 있다:이는 진리를 선포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같이 할 것을 권면하며, 서로서로 그들이 한 일들에 대해 적합한 보답을 주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직장에서 줄을 서는 데서부터 시작해 삶의 모든 측면들을 건드린다.이 같은 정직함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통상적이지 않다. 이는 문화적으로 굳어진 권력 구조와 견고히 확립된 행동규범들에 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무관심이나 심지어는 적개심으로 반응할 것이다.이에 따라서, 교회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진실됨과 겸손한 섬김보다는 연고주의, 뇌물 수수, 심지어 협박 등에 연루되는 유혹을 받게 된다.그러나, 거룩함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 사람으로부터 진리를 찾으시지만,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외부로부터,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역사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이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가, 그리고 개개인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변 문화에 순응하라는 압박에 대항해야 하고, 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공의를 구해야 한다.진리를 위하여 이 같이 위험한, 문화에 반하는 공개적 저항이 실제로 있어 왔다:내전 동안에, 교회는 지속적으로 종족간의 평화를 옹호하였다.1983년 폭동이 수백 명의 타밀족을 길거리로 내몰았을 때, 교회들이 문을 열고 그들의 거처를 제공해 주었다.성공회 콜롬보 주교는사회, 정부 차원의 투명성과 책무가 줄어들고 있는 최근의 동향을 감안하여 기도의 날을 소집하였다.신할라 불교 민족주의LTTE 타도에 뒤이어, 신할라 민족주의는 스리랑카를 dharmarajya – 정의의 불교 국가 – 로 만들기 위한 급증하는 전투적 움직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신할라 불교 신화는 부처가 친히 그 섬을 방문하여 성스럽게 만들어 부처의 상으로 만들었다고 역설한다. 모든 불교도들은 이 우상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불교 승려들은 그들의 예배와 생활 방식을 전국적 지령으로 만들고, 그 외의 종교들은 소외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가담해오고 있다:2004년, Jathika Hela Urumaya (JHU) (National Heritage Party) – 불교 승려들이 이끄는 정당 – 에서 반 회심 법안을 제출했다.사람들이 종교를 바꾸도록 ‘꾀는’ 것 ‘장려’ 금지를 가장하여, 그 법안은 크리스천 인도주의적 원조를 법률로 금지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을 근거 없는 ‘불법 꾀임’이라는 주장을 들어 괴롭히도록 만들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법안은 보류되었다.2005년, JHU는 Mahinda Rajapaksa 대통령 정부의 일환이 되었다. 정치적 행동주의 안에서의 그들의 역할은 Bodu Bala Sena (BBS) (Buddhist Power Force)가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 모두에 대한 폭력과 협박을 포함한다.이 같은 불교 민족주의적 공격은 정부 각료들과 불교 성직자들에 의해 비난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BS는 종교적 경각심 가운데 세워진 민중의 민족주의를 대표하고 있다.종교와 양심의 자유는 스리랑카 문화권에서는 당연시 여겨지지 않고 있다:신할라 불교도들은 국가적, 인종적, 그리고 종교적 정체성으로 다 함께 결부되어 있다.‘진짜’ 스리랑카인이 되는 것은 신할라 불교도가 되는 것이다; ‘이방인’이나 사회적 약자가 아닌, 불교 문화의 우월함을 위협하지 않는 한 누구나 환영 받는다.불교 우위에 대한 그 어떤 도전 – 누군가에게 종교를 바꾸도록 제안하는 것 같은 – 도 불교 종교, 신할라 민족 정체성, 그리고 스리랑카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 삼중 배반의 행위이다.‘인권’ 또는 ‘민주주의’를 내세워 이것에 맞서고자 하는 시도들은 ‘기독교 서구’가 스리랑카를 ‘재 식민지화’ 하려 한다는, 그래서 이러한 개념들은 교회들이 착한 스리랑카 불교도들을 서구화된 기독교인들로 변하도록 꾀거나 조종하여 이 새로운 제국주의를 확산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는 편견만을 강화시킬 뿐이다.이러한 반 기독교적 종교, 문화적 지배에 대한 최선의 반응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경건한 시민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다: 우리 스리랑카인의 국가 정체성 위에 온전히 살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타협하지 않는 것: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우리의 창조된 모습에 일치한다. 따라서 그것은 명백하게 가장 좋은, 가장 건강한, 그리고 가장 조화된 삶의 방식일 것이다.그것은 또한 어떠한 문화와도 최선의 가장 건강한 요소들과 조화를 이룰 것이다 – 스리랑카의 신할라 불교 문화를 포함하여. 전통적인 스리랑카의. 그리고 불교의 문화 대부분의 요소들은 성경적인, 기독교적 가치들과 배치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기독교와 불교 둘 다 모두 가정, 교육, 그리고 종교적 헌신을 가치롭게 여긴다.서구 제국주의 규탄에 맞서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전통적인 스리랑카 불교에서도 타락이라고 간주하는 성적 난잡함, 성행하는 낙태, 사치성 부와 낭비하는 소비 행태 등과 같은 현대 서구 문화 안의 반 기독교적 측면들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사도 바울이 그러하였듯, 우리 또한 채식주의와 같은 문화적 관습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모든 것이 될 수 있겠다.복음주의적 부흥20세기 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신학적 자유주의가 주류 교단 교회들로부터 그들의 복음주의적 활기를 빼앗아 버렸다. 저해된 그 복음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어떤 의미도 거절하였고 따라서 기독교는 단순히, 사람들이 불교, 힌두교, 또는 이슬람교 가정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종교를 가지게 된 것처럼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가지는 전통적 종교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는 따라서 스리랑카 문화에 아무 해가 되지 않게 되었고,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며 주라고 선포하지 않던 한 교회는 태평할 수 있었다.20세기 후반 국제 복음 부흥 운동이 스리랑카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는 주로 Assemblies of God2, Island Gospel League – India Gospel League3의 교파 – 그리고 Gospel For Asia.4 같이 교단에 속하지 않거나 신생인 교단의 독립적 복음전도의 증가로 인해 일어났다.이러한 새로운 교회들과 움직임들은 많은 지역적 반대에 직면하는데, 주로 그들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가는 것이다:그들의 참신함은 그들을 더더욱 서구 제국주의 집단으로 보여지게끔 만든다.전통 교단 구조나 책임감, 교리적 기준의 부재는 그들로 부실 운영, 개인 숭배, 거짓 가르침 등에 취약하게 만들고 말았다.이런 교회들은 분명히 복음적 활기를 띠고 있고, 그들은 신학적 정통성 안에서 참고 견딜 수 있도록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도전은 새로운 것이 아닌 것이, 대부분의 신약 성경의 서신서들이 쓰여지게끔 한 똑 같은 문제인 것이다.최근 들어, 기존 교회들이 복음주의적인 교회 개척 시도들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들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학과 교회 문화의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모든 주류 개신교 교단들은 그들의 사역자들을 Theological College of Lanka5에서 훈련시킨다. 이 대학은 여전히 신학적 자유주의의 잔여 영향권 아래 있고, 따라서 언제나 성경적 깊이와 복음주의적 열정을 권면하는 것은 아니다.주류 교회들은 그들이 복음 전도를 하지 않는 이상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용납 받으며 지내왔다.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선포하기 시작한다면, 이 문화적 안전 지대를 잃게 될 것이며, 신생 교회들과 똑 같은 반대에 고통 받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사역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 그리고 회중들이 그렇게 할 용기와 확신이 있는지의 여부이다.스리랑카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도전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National Christian Evangelical Alliance of Sri Lanka (NCEASL)6와 같은 단체들은 신생 교회들이 유대감과 신학적 안정성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Lanka Bible College7와 Colombo Theological Seminary8는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초교파 대학들이며, 모든 교회들의 성경적-신학적 깊이를 향상시키고, 복음 중심의 교회, 사역자, 복음전도자들을 서로 연결해 주기를 추구하고 있다.International organisations like Langham Partnership9같은 국제 단체들은 신학 장학금과 가르침에 투자하고 있다.Ajith Fernando10과 Vinoth Ramachandra11는 현재 국제적인 위상을 지닌 스리랑카인 신학자들이다.따르는 영향스리랑카 교회들을 마주하는 많은 쟁점들은 다른 나라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므로 스리랑카의 상황으로부터 배울 점들이 있다:우리는 결코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 방식이라 가장하여 교회에 침투해 오는 세상의 능력을 과소 평가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가 그것들에 도전한다. 교회와 각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우리의 본능적인 사고와 행동 방식이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부응하도록 해야 한다.비기독교 종교의 정체성 형성 능력은 특별히 민족주의와 동맹하였을 때, 종종 서구 방식의 교육의 효과를 압도하곤 하는데, 이는 특별히 식민지로부터 독립 후의 모든 ‘서구적’인 것이 해산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신실한 교회가 그러므로 ‘십자형’이 될 것이다: 세상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랑하고 거룩함을 멸시하는 비이성적인 세상의 증오에 고난 받는 것. 교회는 그리스도를 우주적인 주로 선포하고 그에 따라 핍박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문화에 역행하며 살 것이고 그로 인해 핍박받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는 ‘샬롬’을 시작할 것이고 따라서 문화와 사회를 축복할 것이다. 그러나, 죄의 존재가 이러한 평화가 전쟁을 만날 것임을 뜻한다.제안되는반응들스리랑카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더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전 세계적으로:Lanka Bible College, Colombo Theological Seminary 그리고 Youth for Christ12같은 복음주의적 초교파 사역들, Langham과 같은 스리랑카 교회에 자원을 제공하기 원하는 국제 단체들을 지원할 수 있다.교회나 교단의 연결 고리를 사용하여 떠오르는 스리랑카의 교회 지도자를 알아보고 이 같은 사역에 협력하여 그들의 훈련과 교육에 투자할 수 있다.이러한 연결고리를 사용하여 교회 개척, 청소년 사역, 학교와 학생 사역 같은 스리랑카의 사역들과 장기적 협력을 확립할 수 있다.개인적으로 그리고 그들의 사역 리더십 안에서 지속적인 경건함을 보여 주고 같은 투명성과 책임을 그들이 후원하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며, 그리고스리랑카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통찰력과 배운 바를 나눌 수 있도록 하여 진실된 교제를 권면할 수 있다.Endnotes1. http://www.nytimes.com/2014/02/05/world/asia/new-inquiry-on-sri-lanka-points-to-possible-war-crimes.html and http://www.piac.asn.au/news/2014/02/new-evidence-war-crimes-sri-lankan-civil-war.2. http://worldagfellowship.org/fellowship/countries/wagf-participating-member-s-z/sri-lanka/ 3. http://www.iglworld.org/ 4. http://www.gfa.org/regions/country/sri-lanka/ 5. http://www.tclsl.org/ 6. http://nceasl.org/ 7. http://www.lbcs.edu.lk/ 8. http://www.cts.lk/ 9. http://langham.org/ 10. http://www.cityofgodblog.com/2013/04/just-who-is-ajith-fernando/ 11. http://vinothramachandra.wordpress.com/ 12. http://www.yfci.org/ Kamal Weerakoon was born in Sri Lanka, grew up in Australia, and is pursuing a PhD in intercultural ministry. He serves as resident chaplain to a household of overseas students from China, and as a part-time minister with the Australian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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