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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일

이런 상투어, 이제 그만!
by Matt Smethurst2020-08-30

하나님이 당신 인생에서 문을 하나 닫았다고 반드시 창문을 여신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문도 아예 열지 않으실 수도 있다. 하나님이 지금 원하는 것은 당신이 완전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깨달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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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책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한 문단은 사람을 바꿀 수 있다. 아니, 심지어 몇 문장이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좋은 문장은 선물이다. 간결하고 명확할 뿐 아니라 외울 수 있을 정도의 문장 속에서 깊고 심오한 진리를 만나는 것은 기쁨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찰스 스펄전이나 C. S. 루이스의 훌륭한 문장이 당신이 받는 뉴스피드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책 전체의 내용을 다 담아서 표현할 수 있는 정도로 속이 꽉 찬 문장을 좋아하신다.


그렇다고 짧은 문장이 언제나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종종 진리를 간결하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진리를 사소하게 만들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진리를 가리기도 한다. 결국 진리를 가리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 그리스도인이 자주 쓰는 다섯 개의 상투적 어구가 있다. 이것들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기에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1. “하나님은 문을 닫으실 때면 대신 창문을 여신다.”


이 말 뒤에 숨은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다. 물론 하나님이 스스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은 진리이다(렘 32:27). 그렇기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가는 길을 바꾸시더라도(잠 16:9) 당신의 뜻을 버리지 않으신다(히 13:5).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문을 하나 닫았다고 반드시 창문을 여신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문도 아예 열지 않으실 수도 있다. 하나님이 지금 원하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깨달음일 수도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된 때에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성령님이 문만이 아니라 창문까지 전부 다 닫아버리시는 이야기로 가득하다(예, 잠 16:9; 19:21; 행 16:6-7).


나는 언젠가 “소명”을 친근감과 능력과 기회의 삼중 현상으로 묘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그걸 좋아하는가, 그걸 할 능력이 있고 또 문이 열려 있는가? 그런데 아주 드물게는 세 번째 조건에 해당하는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문을 부숴서라도 결단하기를 원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순교한 선교사 짐 엘리엇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냥 앉아서 막연하게 “소명”을 기다리고만 있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그들의 엉덩이를 차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다른 경우는 어떨까? 누군가 어떤 도시로 가서  직장을 얻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또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갖는 게 아니라면? 그게 문이든 창문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친근감과 능력과 기회라는 측면에서 스스로를 다시 재점검하기를 원하실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내적 갈망과 확인된 은사와 실질적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기를 원하실지도 모른다.  


2.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안전할 때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안전이 영원을 의미한다면 또는 “올바른 장소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영광스러울 정도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는 육체적 안전을 말한다. 


몇 년 전 내가 어느 폐쇄적인 국가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믿음 좋은 몇 사람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셨으니까 어떤 피해로부터도 당신을 지켜주실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거 같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눅 21:16-18).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그런데 완벽하게 안전할 거라고?


이 약속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AD 100-165)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는 분명히 이 구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죽일 지 모르지만, 결코 우리에게 그 어떤 해도 입힐 수는 없다.”


나는 이 말을 너무 좋아한다. 오로지 기독교인만이 이런 미친 소리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너무도 많은 좋은 것들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육체적 안전은 그 중 하나가 아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맞는 끔찍한 삶의 환경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오히려 더 큰 육체적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영적으로 언제나 살아 있고 영원히 안전하다. 


3.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이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아주 좋게 봐서 이 말은 항복의 가치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너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너의 이력서, 변명, 두려움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이 말은 마치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가 아니라 안락한 소파라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이 말은 아주 교묘하게도 싸우고 노력하고 또 인내하는 것에 브레이크를 거는 용도로 사용된다.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이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이 말이 오로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 심’(justification)을 의미할 때만 쓰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상 성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쓰이면서 결과적으로 수동적 자세를 변명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녹녹치 않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바울은 석양과 낮잠 대신 군인과 운동선수, 농부를 생각했다(딤후 2:3-6). 그는 달리기 트랙과 권투 링을 생각했다(고전 9:24-27).


하나님이 이미 우리 속에서 이뤄놓으신 것을 열매로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또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결과를 드러내면서 살도록 우리는 부름 받았다(빌 2:12-13). 평안 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역동성(마 11:28­-30; 16:24)은 청교도들이 “거룩한 땀”이라고 부르던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하는 덕목이다. 


J. I. 패커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스도인의 모토는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이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자’가 되어야 한다.”


4. “당신이 감당 못할 일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바라는 것은 모두 다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화 속에서 이런 동기부여 슬로건은 우리를 격려하고 또 인생이 사실상 그렇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물론 도전이 되는 일들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알고 결코 그 한계를 넘는 일까지 시키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 할 일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시고, 또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지난 몇 년간 전직 노예 상인이었고 그 유명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지은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의 편지보다 내 영혼에 더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과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뉴턴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생각하는 틀과 인식이 다를 수 있지만 [죽음의 시간]에 관한 믿음이 알려주는 바는 동일합니다. 주님은 대개 죽어가는 시간에 꼭 필요로 하는 힘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 그러다가 주님이 정한 시간에 따라 죽음을 맞았을 때 주님은 당신이 가진 모든 두려움을 압도하고, 당신의 모든 적을 침묵시키며, 그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편안한 승리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직접 죽으심으로 죽음의 쏘는 것을 이기셨고 무덤을 정복하셨고 또한 믿는 사람들을 위해 영광의 문을 여셨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께서 감당하지 못할 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이다. 


5.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성경 구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보다 더 자주 성경 구절로 오해받는 말이 또 있을까? 이 말이 성경에 나오는 게 아니라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라는 사실보다 더 좋은 뉴스는 오늘날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돕는 사람만을 돕는다면 우리는 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만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들, 우리를 위해서 오셨다(마 9:12-13; 눅 19:10).


이 말로 다른 종교의 가르침은 요약이 가능할지 몰라도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메시지는 찰스 스펄전이 언젠가 말했듯이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도우신다.” 참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겸손해지는 사람들, 회개하고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도우신다.


진리는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 다섯 가지 말에 숨은 의미가 진실함에도 불구하고 다음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는 것은 단지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진리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 오로지 진리만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지킬 수 있고, 또 말씀을 바로 지킴으로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오로지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이다(고전 13:6).



원제: 5 Christian Cliches that Need to Di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복음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The good news is not that God won’t give us more than we can handle; it’s that he won’t give us more than he can han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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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tt Smethurst

맷 스메서스트(Matt Smethurst)는 리치먼드에 있는 River City Baptist 교회의 담임목사이다.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2022) 등의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