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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도시, 그 역사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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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이춘성 /  작성일 202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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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Rohan Reddy on Unsplash

도시는 가인의 후손들에게는 새로운 에덴의 건설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에덴이 바로 가인이 세운 최초의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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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의 문제점


20세기 초기 역사관은 논리 실증주의에 영향을 받아 실증주의 사관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역사 실증주의는 기록된 역사가 실제 사실이었느냐를 증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후 20세기 중후반의 역사관은 모든 역사 기록이란 당대의 관점으로 해석된 역사라는 주장이 더 힘을 얻게 됩니다. 사실을 찾는 것보다는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를 주관주의 사관, 혹은 역사 수정주의라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즘 “역사는 승자의 역사” 또는 “역사란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라는 주장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결국, 사실보다는 주관적 해석과 남은 자들이 만든 주류적 의미가 역사라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대의 역사관은 증명 불가능한 수 백 년, 수 천 년 전의 역사를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긍정적인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여러 면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 부역한 친일파들의 행동에 대해서 이들의 친일 행위는 당시의 상황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과, 지금 우리도 그러한 상황이었다면 이들과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역사 해석이 가능해지지 때문입니다. 또한,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역사적 사실도 얼마든지 왜곡 가능합니다. 이러한 일본과 친일적 역사학자들의 역사 해석에 우리가 불편해하고 분노하지만, 정작 우리가 이러한 수정주의적 역사 해석에 얼마나 익숙한지 생각해 본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 실증주의가 주장하는 것 같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주관적으로 보는 관점도 만만치 않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기록들을 볼 때, 어떤 관점을 가지고 보아야 할까요?


성경의 역사관


그리스도인들의 역사관도 앞에서 언급한 두 문제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실증 가능한 역사로만 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적에 대한 기록은 실증과 증명이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또한, 성경을 우리의 주관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더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을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바른 해석이 필요한 책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고대의 역사 서술 방식을 이용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사진과 영상 기록과 같은 방식이 아니기에 현대적 사실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부족하나 당시의 사실 기록 방식에 따르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개인의 사적 해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스스로 해석의 가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해석의 방향과 의미를 읽은 자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이 해석의 틀을 발견하고 이용하는 것이 사실을 바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가이드는 여러 영역에 걸쳐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매우 중요한 것 하나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성경적 역사관과 그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도시(עִיר, ir)의 역사


창세기의 전반부는 인류의 탄생과 타락의 과정을 다루는 원 역사에 관한 서술입니다. 주로 창세기 1~11장이 이 내용을 포함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고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를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거절하십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가인은 저주를 받아 에덴 동쪽 ‘쉼 없는 땅’이란 뜻의 ‘놋’에 거주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땅의 이름처럼 쉼 없이 일했습니다. 쉼 없는 땅이라는 이름의 뜻이 의미하듯 가인이 거주한 땅, 놋은 가인이 지닌 근본적인 두려움과 불안에 기인합니다. 가인은 이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최초의 도시를 만듭니다(4:17).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도시이자 성인 ‘에녹 성’입니다. 이후 이 도시를 거점으로 가인의 자손인 야발은 목축의 기술, 유발은 음악, 두발가인은 금속 세공과 기계를 만드는 기술, 그리고 라맥은 전쟁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렇게 도시와 도시 속에서 발전시킨 문명과 기술을 통해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불안을 해결하고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얻었던 평안과 안정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도시는 이들 속에 있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발명품이었던 것이지요. 그러기에 도시는 가인의 후손들에게는 새로운 에덴의 건설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에덴이 바로 가인이 세운 최초의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이와 대비되어 하나님의 이름은 도시 밖에서 불립니다. 이것이 창세기 4:25-2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리고 5장에서 가인을 제외한 아담의 새로운 족보가 시작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족보가 서로 나뉩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는 도시라는 인간이 만든 가짜 에덴이 있었습니다. 또한, 도시의 문명과 기술은 하나님이 만드신 진짜 에덴에서 인간들에게 은혜로 주어진 동산의 실과를 대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가인의 도시와 도시가 만든 문명이 하나님을 제거한 가짜 에덴이며, 그곳은 인간이 주인이 되고자 하는 헛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시란 에덴을 빼앗긴 인간이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세운 대체 장치라는 것입니다. 세속 도시와 문명이란 결국 인간의 불안의 상징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시에 대한 부정적인 기술은 이어지는 창세기 본문에도 계속됩니다. 셋으로 이어지는 아담의 새로운 계보는 노아에 이르러(6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도시 문화에 잠식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그 결과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하나님을 향해 높은 탑을 건설합니다. 하나님은 바벨이란 도시를 흩으시지요. 인간 안에는 홍수로도 씻기지 않은 가인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불안과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죄인의 불안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암덩이같다고 가르칩니다. 이 불안은 하나님이 만드신 진짜 에덴에서만 해소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만든 가짜 에덴으로 출발한 도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일까요?


도시 속의 도시


창세기는 바벨탑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도시의 부정적인 측면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돔, 고모라 등의 도시들이 나오며, 이와 대조적으로 아브라함은 도시 밖에 거주하면서 땅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도적으로 도시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도시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이삭의 아내를 찾는 사건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도시로 떠납니다. 종은 ‘나홀의 도시(성)’에서 도시 여자인 리브가를 찾습니다. 이삭의 아내는 도시 출신 여자였습니다(창 24). 그리고 야곱에 이르러 도시의 이미지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도둑질해서 도망합니다. 이때 야곱은 마치 동생을 죽이고 도망하던 가인처럼 불안에 떠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극도의 불안 속에서 가나안의 어느 도시에서 노숙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던 중에 놀라운 꿈을 꾸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야곱에게 들려주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창 28:12-15). 깨어난 야곱은 이곳이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벧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곳은 아브라함이 섞이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던 가나안 지역의 루스라는 도시였습니다. 가인의 도시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집을 찾은 것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6–19).

    
야곱이 루스에서 발견한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도시가 가인의 도시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후에 야곱이 한 행동은 자신이 노숙하면서 베개로 삼은 돌 하나를 그 땅 위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첫 벽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시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제거한 인간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도시 한 가운데에서, 야곱이 돌 하나를 세우고 여기가 하나님의 도시라고 선언한 것, 그것이 하나님의 도시의 출발이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도시


하나님의 도시는 강력한 세상의 도시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되었고, 다시 세계로 흩어져서 하나님을 믿는 무수한 사람들과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계속됩니다. 이 하나님의 도시의 특징은 첫째로 문명과 시스템으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도시는 문명과 시스템으로 견고하게 디자인된 기계적 안전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시는 그 출발인 벧엘이 의미하는 것처럼 도시이기 전에 집이었습니다. 그 정체성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시는 시스템이기 전에 인격이며, 기계적 결합이 아닌 유기적 결합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 도시에 속한 모든 자들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우는 모든 공동체에 적용됩니다. 인격의 공동체, 유기적 영적 연합의 공동체가 교회이며, 그리스도인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도시의 두 번째 특징은 세상의 도시를 하나님의 도시로 바꾸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도시는 하나님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진행입니다. 세상의 도시는 그 특성상 하나님을 그들의 도시에서 철저히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불안의 근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을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자멸하는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다만 여전히 우리가 강력한 세상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야곱처럼 작디작은 돌 하나를 세우고 하나님의 도시를 짓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 큰 도시와 더 위대한 문명과 기술을 추구하는 근원에는 인간의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진짜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도시를 건설하는 이유는 마치 노아가 방주를 지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창 6:8) 하나님의 가족들의 정체성이며, 존재의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시가 나약한 모습으로 세상의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외에는 어떤 것도 인간을 불안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는 방법에 나약함,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약함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도시를 건설하는 이유는 마치 노아가 방주를 지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창 6:8) 하나님의 가족들의 정체성이며, 존재의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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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기독교 공동체 운동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지금은 광교산울교회 협동목사와 고신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 겸임교수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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