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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는 이상하지만 영광스러울 정도로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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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Hayden Hefner /  작성일 202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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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 이상함을 볼썽사나움 내지 무질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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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기 오순절주의를 ‘신학을 찾아가는 체험’이라고 표현하는 이를 만난 적 있다. 오늘날 많은 개혁파 은사지속론자(Reformed continuationists)가 체험 추구의 신학을 갖고 있는 현실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바른 행동(orthopraxy)을 추구하는 하나의 정통(an orthodoxy, 바른 교리)일 뿐이다. 믿음은 분명하지만, 실천은 그렇지 않다. 이론적으로야 얼마든지 계시의 은사가 지속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은사 추구로 인한 혼란을 두려워하여 그들은 은사 추구 자체를 주저한다.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내 말이 당신에게 반향을 일으킨다면, 이 기사는 당신을 위한 것이다. 


어느 분별 블로거의 꿈


확실히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는 종종 이상하고 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계시적 은사의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실수할 가능성 자체를 없애려고 하지 않으신다. 대신 하나님은 조직적 틀(고전 14:26-33)과 더불어 사랑으로 은사를 추구하고 실행하도록 격려했으며(고전 13:1), 지체로서 몸을 세우도록(고전 14:12) 만드는 내적 동기를 제공하셨다. 


나는 적지 않은 이론적 은사지속론자가 교회 안에서 계시의 은사를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경우에 필연적으로 많은 혼돈을 초래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4:33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나 문맥을 주목해서 보라. 이 구절을 쓰기 직전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계시의 은사를 어떻게 추구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설명한다(26-33절). 그렇다면 바울이 33절에서 말하는 화평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39-40).


바울이 추구하는 평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혼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 따르면 은사를 소홀히 한다고 해서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혼란을 피해야 하는 시점은 계시적인 영적 은사를 열렬히 추구하며 공개적으로 그 은사를 실천하는 시간 동안이다. 그럼 “정직하게” 그리고 “질서대로”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이 최소한 바울이 39절에서 언급한 예언과 방언의 은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계시적 은사에 대한 추구는 지혜로운 열심보다는 불길하고 부적절한 경고에 의해 더 많이 언급되기에 교회 안에서 종종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두려움을 가지고 아버지가 주시는 선물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피상적 이상함을 두려워함


몇 주 전에 경건하고 존경받는 한 여성이 교회 앞에 나가서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부엌에 서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녀는 네 명의 자녀, 그러니까 두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어요. 그 여성은 오렌지 또는 산호색 어떤 기구를 들고 이렇게 외치고 있어요. ‘하나님, 당신이 진짜라면 날 좀 도와주세요!” 만약에 여러분 중에 이 여인이 있다면, 이 예배가 끝나고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싶습니다.”


이 여자의 선언 속에 담긴 피상적인 이상함과 무작위성은 피할 길이 없다. 선언이라는 단어도 표면적으로는 이상하다.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피상적인 이상함이 꼭 잘못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성경도 표면적으로는, 그러니까 피상적으로는 이상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맹인의 눈에 침으로 범벅을 만든 진흙 혼합물을 비비는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이상하기 그지없다(요 9:6-7). 다리를 저는 사람에게 일어서서 걸으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요 5:8-9). 우물가에서 무작위로 만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마실 물을 청하는 것도 문화적으로 이상하고 외적으로는 임의적이다(요 4:7-9). 게다가 그녀가 분명 숨기고 싶었을 비공개 세부 사항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도 낯설기 그지없다(요 4:16-19).


이런 식의 피상적으로 이상한 사역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의 지상 사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약 성경은 표면적으로 이상한 방식으로 사역하는 사도들과 더불어 다양한 그리스도인이 벌이는 이상한 예들로 가득 차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 이상한 사역도 얼마든지 “예의바르고 질서 있게” 수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표면적 이상함을 볼썽사나움(indecency) 내지 무질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따라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계시적이라고 주장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이상한 사역의 순간에 교회는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명확성과 식별 가능한 정확성에 비추어 분별한다. 앞에서 언급한 “오렌지색 기구”가 등장하는 예언적 단어의 경우가 그러하다. 첫째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에 성경과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회중에게 그들의 삶에 비추어 그 예언을 저울질하도록 요청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예언의 말씀 후에 기도의 자리로 초대했다. 그날 그 예언이 회중 중에 있던 한 특정 여성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했다. 그날 그 여성은 그리스도의 몸인 다른 지체로부터 기도를 받았고, 이 신령한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의 두 부분인 영과 육을 모두 세우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 두 명의 용감한 여성뿐 아니라, 그 예언이 가진 피상적 기이함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예언을 분별한 회중 모두에게 감사를 표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역을 경멸하지 말라


깨어진 그릇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을 멸시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분별 블로그(discernment blogs)와 타락 포르노(failure porn) 등의 분위기를 타고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복음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두려움이 주는 죄악된 관성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시애틀에서 소리치는 설교자는 권위 있는 설교를 두려워하게 해서는 안 되며, 마법사의 지팡이를 들고 무대에 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는 신자로 하여금 은사 추구를 두려워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은사의 남용이라는 위험 때문에 은사를 피하는 것도 아니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령에 내재된 위험이 있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두려움은 결코 그분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은사를 마치 우리에게서 나온 척하는 우리의 타락된 경향을 겸손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고전 4:7). 우리는 정당한 은사의 남용과 더불어 은사가 자신의 것인 척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순종의 길에서조차 쉬지 않고 죄를 짓는 죄성(propensity)을 인식한다고, 그것 때문에 그 길에서 아예 멀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이다. 우리는 설교와 예언의 말씀을 시험하도록 부름을 받았지(살전 5:21), 결코 그것을 피하거나 멸시하라는 부름을 받지 않았다(살전 5:19-20).


운전대 뒤에 서기


피상적인 기이함에 대한 두려움과 이상주의라는 우상숭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계시적 은사를 열렬히 추구하도록 우리는 어떻게 우리 백성을 목양할 수 있을까?


내가 존경하는 목사인 샘 스톰즈(Sam Storms)는 종종 이렇게 말을 한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규칙은 이거야. ‘다른 사람이 제대로 못하는 건 아예 시도도 하지 말라.’” 영적인 은사를 추구하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쉬운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폐쇄하는 데에는 아무런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카리스마가 그냥 활개 치도록 놔두는 데에도 별 다른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 가진 본질적인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를 부두에 묶은 채로 두거나, 배가 파도에 요동치는 동안 해안가에 서서 편하게 지켜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방향타 뒤에 서서 배를 운행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그 자리가 내가 서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원제: Superficially Weird and Gloriously Goo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성령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 가진 본질적인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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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Hayden Hefner

헤이든 헤프너는 오클라오마 시에 있는 Bridgeway Church의 제자훈련 목회자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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