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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성탄은 신화가 사실이 된 사건이다
by 고상섭2022-12-18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은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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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가장 큰 의미는 출생이 아니라 강림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이 중요한 성탄의 의미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탄을 믿지 못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합리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않은 전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하는 이 장애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리고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자연주의 세계관은 하나의 신념일 뿐이다 


C. S. 루이스는 기적에서 기적은 초자연적 힘의 간섭으로 자연 외에 초자연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누군가 기적을 경험하더라도 그의 신념 속에 초자연을 배제한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적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옳다면 모든 자연의 법칙들을 물질세계 안에서 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주의 세계관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유물론의 모순을 드러낸 홀데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 정신 과정이 순전히 뇌 속 원자의 운동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라면, 나는 내 소신이 옳다고 가정할 수 있는 어떠한 이유도 갖지 못한다. … 따라서 나는 내 뇌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 이유도 갖지 못한다”(기적, 31). 


루이스는 기적을 믿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첫째, 자연의 통상적 안정성을 믿어야 하고 둘째, 자연 그 너머에 어떤 실재를 믿어야 한다고 했다. 이 두 가지 믿음이 있을 때만 비로소 초자연적 실재가 우리의 자연계를 이루는 시공간 속에 침입해서 그것을 교란시켰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동정녀 탄생과 같은 기적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이성과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사느냐의 문제이다.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느냐? 초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느냐의 차이다.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단지 자신이 자연주의 세계관을 신념으로 가지고 산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뿐이다. 그러나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은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초자연의 세계관을 가질 때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동정녀 탄생은 궁극적 실체를 가리키는 이야기이다 


팀 켈러는 성탄 설교를 모은 예수, 예수에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픽션이 아닐 뿐 아니라, 픽션을 읽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 문학을 좋아하는데,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들도 존재한다. 현대인이라면 더 현실주의적이 되어야 하는데 판타지 문학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는 계속 판타지를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미녀와 야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유명한 동화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끊임없이 판타지 문학을 찾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열망을 얼마간 해소해 주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적 픽션은 그런 열망을 건드리거나 채워줄 수 없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갈망이 초자연 세계를 경험하려는 갈망, 죽음을 면하려는 갈망, 영원한 사랑을 만나려는 갈망,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살며 창의적 꿈을 실현하려는 갈망 등이다. 잘 구성된 판타지 이야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감동과 만족을 얻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이 그런 것들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잠시나마 이런 갈망을 채워주고 미치도록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예수, 예수, 50)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인간 안에 깊은 갈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또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이 탄생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열망하는 모든 판타지의 생각들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알려준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인간 안에 하나님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고 말한다.


세상에 있는 온갖 것들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결코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합니다. 처음 사랑에 빠졌거나 처음 외국을 그려볼 때, 또는 처음 흥미로운 과목을 배울 때 속에서 솟구치는 갈망은 결혼이나 여행, 배움으로 채워질 수 없는 갈망입니다. 결혼이나 여행이 최고의 것일 때도, 그 갈망을 처음 느낀 순간에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현실 속에서 무너져 버리고 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아내가 훌륭할 수도, 여행 가서 묵은 호텔이 아름답고 경치가 빼어날 수도 있으며, 화학 연구가 흥미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 213)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음식이 있기 때문이고, 성욕을 느끼는 것은 성관계가 있기 때문이고, 새끼 오리가 헤엄치고 싶어 하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현실적인 이야기에만 만족하지 않고 판타지 문학을 추구하고 그것을 열망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현실적인 사건들로 채울 수 없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자연주의, 물질주의가 아닌 초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판타지 문학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린이들의 동화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영원을 향한 갈망을 보여주는 창문이라 할 수 있다. 


신화가 사실이 되었다 


C. S. 루이스는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신화를 읽을 때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은 진리(Truth)가 아니라 실재(Reality)다”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인간 지식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경험적 지식으로 맛을 느끼는 순간처럼 맛을 경험하는 지식이다. 이것은 맛을 이해하고 지적으로 분석하는 설명적 지식과 구별된다. 우리가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순간 더 이상 그 맛을 맛으로 느끼지 못한다. 


부부관계를 하는 순간 쾌락을 조사하거나 회개하는 동안 회개를 연구할 수는 없고, 폭소를 터트리는 순간 유머의 본질을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아니라면 이런 것들을 정말 알 수 있을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피고석의 하나님, 73)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포옹하는 행복감을 느끼면서 사랑을 연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꼽 잡고 웃는 순간 유머를 분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설명적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 즉 행복과 유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재를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이런 인간 지식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화라고 말한다.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단순한 명제로 기술되지 않고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위대한 신화를 즐기는 가운데 우리는 추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신화는 사고를 초월한다. 더구나 예수님의 성육신은 단순한 죽은 신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신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신화이며, 그래서 사실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신화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역사적 사실에 동의해야 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모든 신화에 부여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미 사실이 되어 버린) 그 신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은 동정녀가 잉태했을 때 이 위대한 신화가 사실이 되었음을 몰랐던 이들입니다. 사실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신화의 온갖 특성을 함께 가져왔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피고석의 하나님, 76)


동정녀 탄생은 사실이 된 신화이다. 신화적인 모든 요소를 가지고 사실이 되어서 우리에게 그 실재를 경험하게 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사랑과 순종만으로 다 이해할 수 없다. 도덕주의자, 학자. 철학자가 되어야 하지만 시인과 아이의 눈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실이 된 신화를 누리고 맛보고 경탄하며 경외할 수 있어야 한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신화적 요소의 사실 앞에서 우리는 자연주의 세계관에 갇혀 이 땅의 지식과 이 세상의 것들로 쉽게 해석하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육신은 인간의 지식 이상의 초자연의 세계가 이 세상 안으로 침투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성탄절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현실인가? 눈에 보이는 이 땅을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오늘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현실인가?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어쩌면 나니아의 옷장을 여는 문인지 모른다. 마음을 다해 시인과 아이의 눈으로 그 문을 열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돌아가는 현실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 나니아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해준다. 성육신은 영원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의 좁은 시야를 열어주고, 나니아의 세계로 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니아의 옷장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한 가운데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함을 상기시켜 준다. 


성탄은 신화가 사실이 된 날이다. 그리고 현실의 세상에서 초자연의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제 나니아의 옷장을 열어보자. 무미건조한 삶의 하루하루가 경외와 경탄이 있는 삶으로 바뀔 것이다.


성탄절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현실인가? 눈에 보이는 이 땅을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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