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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구유에 누우신 그는 동시에 하늘에도 계신다
by Gavin Ortlund2022-12-22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에 제한되지 않으셨고, 성육신하신 동안에도 우주를 계속 채우고 붙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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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그도 첫 번째, 세 번째와 마찬가지로 모든 곳에 계신다. 당신이 어디를 가든, 그는 거기에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 성경은 그가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한다. 그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 1:3)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골 1:16).


그런데 우리가 매년 성탄절에 기념하는 기적(성육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은 바로 이 신학에 질문을 던진다. 가령 서기 10년, 나사렛을 다니던 시간에도 소년 예수님은 온 세상 어디에나 계셨는가? 구유에서 동물들 사이에 누워서 마리아의 젖을 먹을 때는 어땠을까? 그때에도 과연 모든 쿼크와 별을 다스리며 온 우주를 가득 채웠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extra Calvinisticum)이라고 부르는 신학에 따르면,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이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이지 않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에 제한되지 않으셨고, 성육신하신 동안에도 우주를 계속 채우고 붙드셨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교리를 탐구하는 데에만 수많은 책이 필요하겠지만, 올해 축하할 놀라운 성탄절을 앞에 놓고, 마음과 생각을 재조정하기 위해 세 가지 기본적인 질문만 던지도록 하자.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라틴어이다. 칼리니스티쿰(Calvinisticum)은 “칼빈의”(Calvin’s)를 의미하고, 엑스트라(extra)는 “외부”(outside) 또는 “너머”(beyond)를 뜻한다. 16세기와 17세기 루터파 신학자와 개혁파 신학자 사이에서 벌어진 ‘성만찬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하시는가’에 대한 논쟁에서 나온 말이다. 루터파는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이 자신의 육신을 “넘어서” 존재한다는 개혁파의 가르침에 반대했다. ‘기독교강요’에서 장 칼뱅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나 하늘을 떠나지 않으셨으며, 동정녀의 몸에서 나시고 이 땅에서 사시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그는 태초부터 하셨던 것처럼 언제나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셨다! (기독교강요 2:13.4) 


그러나 이 교리에 포함된 기본 사상의 원조가 칼뱅은 아니다. 이 교리는 아주 오래되었다.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썼다.


말씀께서는 자기 몸에 속박되지 않으셨고, 몸 안에 임재해 계신다고 해서 몸 아닌 다른 곳의 임재가 가로막히지도 않았다. 몸을 쓰시는 동안 생각과 능력으로 우주를 명하시는 일이 중단되지도 않았다. … 경이로운 점은, 그분이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을 사는 동시에, 말씀으로서 우주의 생명을 지탱하고 계셨고, 아들로서 아버지와 계속 함께 거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3.17)


아타나시우스가 강조하는 건 단지 인간 육체 너머에 있는 하나님 아들의 존재만이 아니다. 그는 아들이 우주의 지탱자요 감독자의 역할을 쉬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설교와 주석에서 칼뱅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 속에 담긴 공간적 특성뿐 아니라, 세계를 통치하는 그리스도 그리고 천사들에 대한 중재자 역할이 가진 의미도 같이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편재 그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 중에도 완전한 신성을 유지하며 그에 따르는 모든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말이 되는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 이 개념을 우리가 머리로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걸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당장 두 가지 문제가 떠올랐다. 


첫째, 이 개념은 불합리한가? 그리스도는 유한하시며 무한하시다, 국부적이면서 동시에 편재한다는 것이 어떻게 비모순율(law of non-contradiction)을 위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둘째, 이것이 정통 칼케돈 그리스도론과 어떻게 일치하는가? 유한하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그리스도를 상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우스파 오류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이것을 이해하는 데 그나마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은유가 있다. 간달프와 프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활동하는 반지의 제왕 이야기에 등장인물로 J. R. R. 톨킨이 자신을 넣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그는 더 이상 옥스퍼드에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 중간계에 있는 그의 존재는 옥스퍼드에서 그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이런 상황이 톨킨의 인격의 통일성이나 논리의 법칙을 반드시 위반하느냐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결국 중간계와 옥스포드는 시카고와 뉴욕처럼 같은 세계의 다른 장소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영역” 또는 “세계”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단지 은유일 뿐이다. 창조주가 피조물 세상에 들어가는 것과 작가가 이야기 속에 자신을 넣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과 창조 세계 사이의 연관성은 시카고와 뉴욕보다는 옥스퍼드와 중간계의 관계에 훨씬 더 가깝다. 여전히 옥스퍼드 책상에 앉아서도 샤이어를 걷고 있는 톨킨을 상상하는 것은 전혀 분리되지 않는 한 인격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아들, 신성한 본성에서는 무한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성에서는 유한한 그분을 개념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것은 왜 중요한가?


나는 개인적으로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부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정통적인 그리스도론을 거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칼케돈 그리스도론이 주의를 기울인 몇 가지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뒷받침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격화”하려는 유혹을 미연에 방지하는 동시에 완전히 신성하고 불변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설명하기 위해 성만찬 시간에도 그리스도의 육체가 편재한다고 확증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이렇게 요약했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초월성이라는 그리스도 신성(예를 들어, 제한될 수 없다)과 인성의 순수성(예를 들어, 오로지 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특징)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교리이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보존함으로써 성육신이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라는 점을 깨닫도록 돕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은 마리아의 자궁 속 작은 배아로 줄어든 게 아니다. 신성한 위엄은 여전히 남겨놓으셨다. 그는 언제나 완전한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한 연구는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이렇게 요약한다. “성육신은 영원하신 아들이 그의 우주적 제국을 포기한 게 아니다. 오히려 반역하는 피조물을 향해 그의 제국을 재확인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매년 성탄절을 새로운 경이로움으로 축하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생각해 보라.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는 다음 두 가지를 다 갖고 계신다.


  • 강보에 단단하게 싸여 있지만,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 어머니를 꼭 잡고 있지만, 온 우주의 원자가 제자리에 있도록 붙들고 있다.
  • 젖 달라고 울면서도, 하늘의 별을 지탱하고 있다.
  • 나귀 사이에서 자면서도, 천사들의 찬양을 듣고 있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이 성탄절 찬송[천사 찬송하기를]  가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처녀 몸에 나시어 사람으로 오셨네. 세상 모든 사람들 영원하신 주님께 영광 돌려보내며 높이 찬양하여라.



원제: He Lay in the Manger without Leaving Heave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보존함으로써 성육신이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라는 점을 깨닫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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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Gavin Ortlund

게빈 오트런드는 First Baptist Church of Ojai(Ojai, California)의 담임목사로 Fuller Theological Seminary(PhD)를 졸업했으며, 저서로는 Theological Retrieval for EvangelicalsFinding the Right Hills to Di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