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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베들레헴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면…
by Jeremy Linneman2022-12-23

나는 이런 평범한 삶, 이런 평범한 가족, 그리고 초라하지만 막 새롭게 태어난 이런 교회야말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기 가장 좋아하시는 장소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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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초라하고 답답하고 또 평범하기만 한 내 인생이 별 의미가 없는 건 아닐까 느낄 때가 있다. 우리 가족은 훌륭하고 규칙적이다. 나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부족함을 메꾸는 내용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해서 이끌고 있다. 우리는 중서부의 한적한 주에 살고 있다. 내 인생이 TV 쇼라면 관객은 그리 오랫동안 앉아서 내 쇼를 구경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종 묻는다. 뭔가 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더 활기찬 곳으로 옮겨야 하는 건 아닐까? 뭔가 더 특별한 교회를 해야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지 않을까?


개인적이고 또 사역적인 불안함 속에서 대림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대림절은 내 두려움 속으로 들어와 진리를 속삭인다. 대림절 때마다 나는 성탄절이 주는 역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도래를 의식한다. 역설적으로 나는 이런 평범한 삶, 이런 평범한 가족, 그리고 초라하지만 막 새롭게 태어난 이런 교회야말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기 가장 좋아하시는 장소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성탄절의 역설


성탄절이 어떤 의미에서 역설인가?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영적인 거룩한 날인 동시에 극히 상업화된 황금의 노다지이다. 인류 역사를 바꾼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면서도 목격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성탄절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주장을 한다. 우주의 왕이 지구에 오셨다. 그러함에도 이 놀라운 주장은 가장 어리석은 것처럼 들린다. 그는 아기로 태어났다…. 가난한 부모에게…. 동물을 위한 마구간에서.


우리 주님이 탄생하시기 수 세기 전에 예언자 이사야는 소망의 도래를 예언했다.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사 9:1, 6).


어둠의 세계에 빛이 밝았다. 절망의 세계에 희망이 솟아올랐다. 돈과 권력과 전쟁의 세계로… 한 아이가 태어난다고?


누가복음 속 출생 이야기는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까지 무려 80-90마일을 여행했다고, 또 출산을 위한 안전한 장소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구주께서 실로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나신 것에 관해서 알려준다. 


이 모든 것이 역설이다. 우주의 왕,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를 “구주”를 의미하는 이름, 예수라고 불렀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의미하는 임마누엘이다. 무한한 영광과 위엄을 가지신 그분이 무기력하고 혼자 힘으로 생존할 수 없는 작은 아기로 우리에게 오셨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부모에게 느닷없이 여느 아기와 다를 바 없는 이 아이가 태어났다. 예수님은 황금 궁전에서 동화 같은 출생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고통과 가난과 혼란을 통해 오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어떤 이상화된 세계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부서짐이 공존하는 현실 세계로 오신다. 


불완전한 세상 


전 세계를 한 장에 담은 멋진 사진을 사무실에 걸어둔 친구가 있다. 크고 푸른 바다, 흰 구름, 푸른 땅, 그리고 갈색 산맥. 사진 속 세상은 너무나 완벽해 보인다. 내 친구는 사진 속 세상의 완벽함을 언급한 후에, 그게 사실은 진짜 풍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즐긴다. 거의 백 장에 가까운 사진을 조합해서 만든 합성 풍경이라는 것이다. 한쪽이 환하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어둠과 그림자가 덮고 있기에, 지구 전체를 밝고 환하게 찍기 위해서 사진가는 수많은 이미지를 하나의 사진으로 합성해야만 했다. 아름답지만 진짜는 아니다. 사진과 같은 완벽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포토샵으로 수정한 지구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속에 이상화된 버전을 가지고 있다. 지구는 분명히 완벽하게 아름다운 곳이어야만 하는데, 그러나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만나는 세상은 아름다움의 일부와 부서진 조각에 불과하다. 


이것이 성탄절 이야기가 가진 능력이다. 예수님은 결코 나사(NASA) 엽서에서나 만나는 이상화된 세계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진짜 세상, 부서짐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현실로 오신다. 이 세상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 그는 부서진 세상 속으로 오신다. 


소망의 도래


우리의 아기 왕은 역설적이다. 그의 궁전은 마구간이고, 침대는 흙과 짚이다. 뜻밖의 아이, 가난한 가족, 아무도 모르는 동네. 이러한 평범한 환경 속에서 하늘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프레드릭 비크너(Frederick Buechner)는 이렇게 그린다


어둠이 유리처럼 부서지고 영광은 천 개의 태양 빛으로 넘쳐났다. 별이 빛난 적 없던 곳에 새 별이 태어나 빛나고, 천사들의 찬란한 날갯짓이 공기를 가득 채우며, 밤하늘은 번쩍이는 하나님의 군대로 생기를 띠었다. 큰 승리의 찬송이 그들에게서 솟아나오니, 오!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동방에서 온 이방인 왕들이 실로 왕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이 어린아이의 발 앞에 예물을 놓았다.


목동들에게 천사 합창단이 나타났다. 그들은 귀족도, 제사장도, 또 종교 지도자도 아닌, 야간 근무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성경은 그들이 겁에 질렸다고 말한다. 만약에 이들 앞에 하나님이 나타났다면, 그건 심판이고 죽음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 천사는 좋은 소식을 전한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서 너희를 위해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그는 메시아, 주님이시다.”


이것이 온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아의 위대한 도착이었을까? 새로운 예언도 없고, 압제자로부터의 자유도 없고, 또한 새로운 성경도 없는 수 세기의 침묵 끝에 마침내 왕이 오셨다.


천사들은 마치 스스로를 자제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아기를 낳은 부모가 가능한 한 빨리 인스타그램에 수십 장의 아기 사진을 게시하는 것처럼,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천사들이 순진한 목자들을 찾아 노래를 부른다. 한시라도 빨리 이 소식을 전하고 싶은 그들은 초조하다. 


천사의 노래 속에서 하늘과 땅이 만난다. 천사의 영광과 보통 사람의 평범함이 하나가 된다. 


구유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대한 역설과 성찬절 이야기의 도래가 상기시키는 진리가 있다. 마굿간에 나타나는 하나님이라면, 어디에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크너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하나님을 진짜로 믿는다면, 더 이상 하나님에 관해서 단정해서는 안 된다. 마구간에 오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이제 더 이상 확신할 수 없다. 하나님이 어디에 나타나실지, 얼마나 오래 우리와 함께 하실지,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과연 얼마나 더 굴욕적인 모습으로까지 내려가실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사건 중에서도 가장 상서롭지 않은 한 미천한 사람의 아이의 탄생에까지 하나님의 거룩함과 두려운 권능 그리고 위엄의 임재가 가능했다면, 그분의 거룩함이 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천하고 세속적인 장소 또는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이 가장 능력있게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는 곳이 다름 아니라 그분이 가장 보이지 않고 또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곳이라는 사실 말이다. 


마구간의 어둠 속에서 또 동물들과 목자들 사이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은 이제 어디에나 나타나실 수 있다. 가장 지저분한 삶의 현장에서도 우리는 그분을 찾을 수 있다. 대림절은 갈등으로 가득한 결혼생활의 혼란 속으로도 임한다. 우리 교회와 직장에 빛이 비취고 있다. 육아로 지친 긴 밤중에도 한 아이가 태어난다.


여관에는 방이 없었다. 게다가 마굿간은 결코 왕이 태어날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름답고 신비롭고 지극히 지혜로운 구속의 계획 안에서 이 모든 상황을 선택하셨다.


이것은 바로 대림절의 좋은 소식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분이 있을 법하지 않은 곳, 보이지 않는 곳, 초라한 곳에 나타나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장소를 더 선호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한밤중에 동물들로 붐비는 마구간에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그분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곳이 어디가 있겠는가? 할렐루야!



원제: If God Can Show Up in Bethlehem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이 가장 능력있게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는 곳이 다름 아니라 그분이 가장 보이지 않고 또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곳이라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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